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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언약- 클라스 스킬더

언약- 클라스 스킬더

2013-05-19 15:26:23


클라스 스킬더-김범현 목사 역

예비적 첨언

1.

이 강의는 네덜란드 흐로닝언(Groningen)에서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겨울 동안 행해진 끌라스 스힐더의 강연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이 강의 기록 노트는 데던스 교수(신학석사: prof. drs. D. Deddens)에 의해 기록되고 출간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 흐로닝언에 살고 있었고, 깜펀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당시 College, 지금은 University, vr)의 학생이었다.

우리는 이 강의 기록 노트를 그의 친절한 허락으로 번역하고 해설(脚註)을 달았다.

이 시리즈의 제목인 “픽토랄리아Pictoralia”는 화란어 “스힐더schilder”(픽토르pictor=화가painter, vr)의 라틴 버전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역자 주: 네덜란드어로 소문자 ‘schilder’는 예술가, 화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라틴어는 ‘pictor’이다. 따라서 ‘Pictoralia’는 스힐더의 라틴어 버전, 즉 라틴어 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힐더는 또 하나의 화가,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2

끌라스 스힐더(Klaas Schilder)는 1934년에서 1952년까지 깜펀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학교(당시 College, 지금은 University, vr)의 교의학 등의 교수였다. 그의 학문적 작업은 1940년에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됨으로 중단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독일 점령군의 나찌즘에 용감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동일한 이유로 (이번에는) 은거해야 했다. 세 번째 방해는 개혁교회 총회에 의해 발표되어진 어떤 교리 선언들과 또 총회의 이어진 계급주의적 태도에 대한 그의 거부 때문에 그가 정직되고 면직되었을 때에 있었다. 그는 ‘자유롭게 되어진’ 교회들이 깜펀 신학교(College)를 다시 세웠을 때에 그의 가르치는 사역을 재개하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방해의 기간 동안 그는 전시(戰時) 활동 탓에 깜펀에는 갈 수가 없어서 북 쪽 지방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이 일곱 달 동안, 흐로닝언 개혁교회 당회의 요청에 따라, 당시 중요한 이슈였던 몇 가지 문제를 다루는 강의를 수행하였는데, “언약”은 그 중 하나였다. 이 강연은 독일인들이 야간 통금을 실시했기 때문에 초저녁에 강의되었다. 전력(電力)의 부족으로 이 강연은 때때로 촛불 아래서 행해졌다. 2차 세계대전 후 스힐더는 데던스에 의해 만들어진 강의 기록 편집 노트의 출판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차라리 안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것들을 잘 준비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97년에서야 이 강의 노트는 “말씀과 세상(Woord en Wereld)”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3

스힐더의 접근방식은 교의학적이었는데, 단지 그가 깜펀 신학교에서 교의학 강좌를 맡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강의가 언약에 관한, 특별히 신자의 자녀의 위치에 대한 강한 논쟁이 있던 당시에 행해졌기 때문이었기도 한 바, 이 논쟁은 1940년대에 교회들의 “자유”로 이끌리었다.

 

강의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분의 백성과, (바로) 신자와 그 자녀들과 맺으신 언약을 다룰 때에 직면하는 첫 질문들 중의 하나는, 이 언약이 상징적인 언어의 문제인가 아니면 실재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상징적 언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또 우리는 그의 가지들이라고 하실 때 그는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시는 바, 이것은 마치 바울이 이스라엘의 많은 가지들이 죽은 가지들로서 잘려져 나가고 거기에 우리가 접붙여진 나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그런 아무런 실재(나무)가 없다,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언어일 뿐이다. 동일한 것이 언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높이 계신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Karl Barth)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역사 내에서 교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분은 우리를 아연실색케는 하실 것이지만,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지는 아니하신다. 바르트는 말한다. : 당신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과 맺어진 언약에 대해 말할 때에 당신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다: 하나님은 초월적이시고, 내재적이지 않으시다. 그분은 세상 속으로 들어오실 수 없다. 하나님이 내재적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침범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근본적인 테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5.2).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그분이 내재적이 되실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근본적인 오류이다.

언약은 상징적인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언약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많은 상징적인 언어도 또한 있지만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자기 자신과 그의 사역을 그에 걸맞은(마땅한) 방식으로 결코 말씀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만약 그분이 자기 자신과 자기 사역을 어떤 상징적인 언어도 없이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재간이 없을 터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 이미지 속에서 말씀하신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은 동물과 소송행위 절차에 들어가지 않으며, 노인도 어린 아이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등한 책임 관계를 결여한 두 당사자가 서로 간에 법적인 소송절차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런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이것을 하신다. 그의 편에서 그는 법적인 성격의 관계를 창조하실 능력이 있다. 그는 나와 교제의 한 양식으로 들어가신다. 그분이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배치이다. 언약은 한편적(mono pleuric), 일방적(one sided)이다. 그러나 언약은 양편적(di pleuric), 양방적(two sided)이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명료하고 확고한 약속을 주시며, 또한 명료하고 확고한 요구를 내셔서, 인간 안에 바로 그분이 원하시는 만큼의 반응을 창조하신다. “인간은 믿어야 하고, 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믿는 것은 단지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것이 우리가 결론지어 버리는 어떤 것이다──만이 아니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항상 명령하시고 지시하시는 바로 그 한 분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편적(쌍방적) 언약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상권(supremity)에 관한 진리를 왜곡한다고 말해진다. 이렇게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칼 바르트의 노선을 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이 말하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진리를 왜곡시킨다. 누구든지 언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여, 양편적(쌍방적) 관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이 바뀌신다고 하는 사람은 그분의 초월성에 관한 진리를 왜곡하게 된다. 그분은 실제로 이와 같은 양편적(쌍방적) 소통 관계를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 나 자신은 결코 이와 같은 쌍방적 소통 관계를 열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쌍방적 언약을 말함으로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초월성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두 개의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즉 디아데이케이(diatheke)와 쉰데이케이(suntheke)이다. 디아데이케이는 처분, 명령을 의미하는 반면, 쉰데이케이는 약속, 계약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디아데이케이를 여시고, 그리고 이제, 동시에, 쉰데이케이를 가지신다. 디아데이케이는 보다 일방적인 면에, 쉰데이케이는 (보다) 양방적인 면에 관계한다. 내가 유언을 할 때, 이것은 디아데이케이이다, 그러나 내가 친구와 약속을 할 때 그것은 쉰데이케이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이 두 용어가 다 하나의 언약에 사용될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 두 용어를 주도면밀하게 사용하여, 언약은 디아데이케이로서 등장(시작)하지만 쉰데이케이로서 존재하고 또 존재하기를 계속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자기 편에서 ‘계획’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언약의 ‘배치’까지도 하신다. 그때 이것은 디아데이케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이 왜 우리가 유언(testament)에 대해서 말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죽기 전의 마지막 말, 유언(‘계획’)을 하는 사람은 또한 그 유언의 ‘배치자’이다. 상속인은 그가 유언을 받아들일 것인지 어떤지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유언을 세우셨을 때, 그때 그분은 모든 일 하나하나를 자기 편에서 배치하신다, 우리 상속자들과는 별도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위에 디아데이케이로서 갖추어진다.

하지만 언약은 그 존재와 유지에 있어서 양방적이다, 쉰데이케이 말이다. 이 양방성 또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묶으시며 또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제 그분 자신의 말씀에 의해 자기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도록 의무지워진다. 이것의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고, 교회에도 있지 않으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 자신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릴 권리와 심지어 의무까지도 가진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 소통은 우리의 기도에서 고백되어진다: 하늘에 계신──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 아버지──이것은 친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언약은 창조와 함께 주어지지 않았다. 언약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심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인간은 그때 이미 거기 있었다. 언약이 창조 뒤에 온 까닭에,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분이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둘 다이다. 보존하신다는 것은 활동력(생명력) 있게 유지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알파는 끝까지, 오메가까지 유지된다. 그분은 창세기 1장에서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유지시키신다. 우리 자신의 존재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가 보존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언약도 유지하시는가 하는 방법이다. 다스리신다는 것은 끝을 향한 안내(guide)를 의미한다. 이것은 알파에서 오메가로, 시작에서 끝으로 이끄심의 문제이다, 그리하여 결국(끝에) 모든 것 하나하나는 새로워진 땅과 새로워진 하늘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가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한다. 자신의 섭리에서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들의 본성과 연관되이 나아가신다: 창조 후 그분은 어떤 새로운 사물도 만들지 아니하신다. 동일한 것이 언약에도 적용된다. 그분은 우리 인간 본성과 연관되이 나아가신다.이것이 어째서 우리가 언약 안에서 살 때에 자연적인 방식으로 사는가의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언약 내에서만 만족히(to the full) 살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성품을 더 발전시킨다. 마치 결혼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 곧 ‘남자됨’과 ‘여자됨’과 함께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이 양자를 더 발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도 그러하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언약 안에서 발전을 겪지 아니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그분은 그렇게 되어지시는 것이 아니다.

언약은 우리 인간 본성과 함께 간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 존재로 다루어진다, 인간 자신의 본성과 책임에 따라서 말이다. 이것은 낙원에서 그랬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다. (흔히) 이렇게 말해진다: ‘관련된’ 사람들1)은 은혜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만든다, 그들은 노동의 노래(행위의 노래)를 부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승리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이 말보다) 더 진실에서 벗어난 것은 없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은혜 언약은 은혜의 문제이고 그 이상은 없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말한다: ‘그만! 당신은 언약을 언약으로 보고 있지 않다.’ 언약은 항상 우리의 인간됨, 우리의 성품 및 책임과 함께 간다. 이것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대조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미 낙원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낙원에서조차 인간은 어떤 것도 (행위의 노력으로) 벌지 않았다. 아담은 자기의 구원(생명)을 그의 행위를 이유로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행위들을 거쳐서 받았다. 우리는 행위 언약에서는 사람이 그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벌 수 있었다고 결코 말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도 벌지 못한다. 그 경우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는 일하는 것과 버는 것의 상호작용이 있다. 한 편에 의해 지불되어진 임금은 다른 편의 노동 수행을 상쇄시킨다. 하지만 우리의 수행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불하시는 임금과 조금도 균형이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하는 손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에게로 감사 제물로 가져가야 하는 희생제물을 창조하셨다. 이 모두가 하나님 그분의 선물이다. 고전 4.7──‘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있느냐?’ 행위 언약 내에 버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고 은혜 언약에서 모든 것 하나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벌어주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다. 은혜 언약에서 우리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는다. 그는 이 공로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 얻어내셨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인간으로서는 그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버실 수 없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 덕에 받는 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하지만 ‘인간 책임과 함께 가기’와 ‘인간 책임에 주어진 호소’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은혜 언약 안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언약으로 남기 때문이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대조가 아니라 하나의 언약사의 다른 단계들이다.

자신의 전지하심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죄 속으로 타락하리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는 것 또한 아셨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을 초월적인 분으로 계시하셨고, 또 그분은, 새로운 디아데이케이를 통하여, 그가 이미 그의 영원한 회의(평화회의)에서 결정하셨던 것, 즉 그가 자신의 언약을 (이제는) 은혜 언약으로 유지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언약의 중보자로 주실 것에 빛을 가져오셨다. 이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계속 교제하신다. 그의 신실하심은 그렇게나 깊어서 그분은 우리가 신실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조차도 신실하신 채로 남으신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다. 오늘날의 논쟁에서2) 이렇게 말해진다, ‘ 의견3)은 (그럭저럭) 견딜만 하지만, 그리스도는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회의의 결의(법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은혜 언약과 하나님의 평화회의를 혼동하게 되고 영원과 시간을 마구 뒤섞게 된다. 평화회의는 영원에서부터이지만 은혜 언약은 시간상의 문제이다. 전자에서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 간에 세상을 구원하기로 약속하시지만, 후자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하게 된다. 평화회의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가지만, 은혜 언약은 인간에게 들려진다.

언약은 낙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때 언약은 “보편적”이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언약을 아브라함의 집안으로 제한하시었다. 그는 언약의 역사에서 특별한 기능, 즉 열방의 아버지가 되는 특별한 기능을 받았는 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나시게 되어 있었다. 단 하나의 나라가 한 동안, 때가 차고 오순절 날이 있기까지, 구원 흐름의 기층이 되어야 했는 바, 그때(오순절)에 모든 믿는 자(신자)들은 그 자녀들과 함께 언약 속으로 결합되어질 것이다. 언약의 지속적인 목표는 우주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어떤 새로운 언약이 아니었고, 오히려, 비록 새로운 형태 속에서였지만, 여전히 낙원 시절 이래 동일한 옛 언약이었다. 이것이 우리 (개혁신앙의) 선조들이 말한 바로 그것이다: 언약은 오직 하나의 본질을 가진다. 그것은 여러 경륜 시대에서 동일하게 남는다: ‘약속’과 ‘요구’ 및 순종의 경우 상(축복)이라는, 언약 파기의 경우 처벌이라는 ‘재가/제재의 규정’(sanctions), 이것들은 언약사의 모든 단계국면들에서 유지되어진다.

이러한 법적인 틀과 재가/제재의 규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법적인 틀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성령의 오피시움(officium 직분)에 대하여 말하곤 하였다. 직분은 단지 피조물에게만 가능하지 않은가? 하고 물어진다. 우리의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어떤 것을 정할 수 있으시다. 그는 자신에게 오피시움(직분)을 주실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약 속에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을 행하시도록 자신들을 묶으신다. 더욱이 이것은 계시되어진 것이다. 이 틀은 사람에게만 적용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적용된다. 최근에 한 교수4)가 (그의) 친구에 의해 쓰여진 윤리학에 관한 책 한 권을 발행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선조들의 발자국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를 명확하게 하였다. 그 책은 언약의 재가/제재 규정을 다루지만, 그뒤 곧바로 그는 제재 규정이 국제연합(UN)을 위한 어떤 것이지 성경의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직 타락 이전에만 선택과 언약5)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가려내시었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동시발생하였다. 그때는 모든 언약 회원들이 택자였고 오직 택자만이 언약 회원들이었다. 하나님은 원숭이들은 지나가셨다. 그분이 책임의 피조물을 고르셔서 그와 함께 언약 관계 속에서 살게 하셨다는 바로 그 때문에, 상황은 타락 이후에도 동일하다: 타락 후에도 하나님은 책임성을 가지고 있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저는 못합니다!’ 제재 규정 속에서 작동하는 언약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계산에 넣어야만 한다.

언약은 그 본질과 관련되는 한 동일하게 남는 까닭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는 아무런 대조도 없다. 안타깝게도 총회의 견해에는 이러한 대조가 있다. 이런 경향은 다음과 같이 말한 꼬케이우스(Coccejus)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문자를 가졌고 우리는 영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졌고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언약은 외부적이었다(할례, ks), 우리에게는 그것이 내적이다(선택, ks).6) 이런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중생에 의해 언약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대조를 만드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다: ‘나는 야웨(LORD), 너의 하나님이다.’ 율법을 받은 민족은 종되었던 집에서 구원받은 민족이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는 훈육선생(Pedagogue), 우리의 후견인(tutor)이다. 미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너희는 어떻게 내가 율법으로 너희를 피곤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인간에게 주실 때에 그를 피곤하게 하지 아니하신다. 율법의 목표는 복음적이다. 율법의 최후의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요청이다. 이것이 어째서 이스라엘이 복음의 깃발 아래 살고 있었는가의 이유이다: 돛대 사이로 부는 바람은 거져주시는 은혜의 바람이었다. 새 경륜의 시대는 옛 경륜 안에 숨겨져 있었다. 전진하는 발전의 선이 있다, 보다 못한 것에서 보다 나은 것으로의 발전이다. 전체 옛 언약은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전진하고 있다. 그때 이미 언약의 유익들은 그리스도의 피(희생제물, ks)에 의한, 믿음으로 받는 칭의와 성화였다. 모세가 단지 문자의 경륜만을 가졌더라면, 언약은 틀림없이 그에게 얼마나 빈곤한 것이었을까!

옛 경륜과 새 경륜 사이에는 아무런 대조도 없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는 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설령 이 말들이 아담에게 말했듯이 우리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새 경륜시대에 언약의 저주는 폐지되지 않았다. 로마서 11.20-22와 히브리서 12.25를 읽으라. 하나님은 여전히 매듭(thumbscrews)을 한층 더 꽉 쥐고 계시다! 새 언약에서 모든 것 하나하나는, 상과 처벌을 포함하여, 옛 언약에서보다 더 강력하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범법에 대한 처벌이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서보다 더 무겁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언약 안에 설 때, 우리는 아이가 성인과 동일한 수준에 놓여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이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의식적인 다른 한 편(당사자 party)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한 편(a Party)이라고 대분자 P로 말하고, 사람을 소문자 상자에서 “p”를 끄집어내어 다른 한 편(a party)이라고 한다면, 아이는 쌍따옴표에 묶인 “다른 한 편”(“party”)이다. 아이가 세례받을 때에 아이는 “다른 한 편”이 된다, 다른 한 편 됨의 배치 아래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직 명료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명료화는 신앙의 공적 고백에서 일어난다, 그때 전 회중 앞에서 아이는, 잘 의식한 채, 쌍따옴표를 내어던져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물들을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은 언약 안에서 강한 위안을 발견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택자들 중에 속했는지 어떤지를 먼저 알아야만 한다면, 위안은 없다. 그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들 내부에서 (선택의) 표지들을 찾아야만 한다.7) 미국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닻을 강 바닦에 놓는 대신에 배의 선창에 내리워 뜨리기. 그러나 그러면 배는 제대로 정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닻을 야웨(LORD)의 보좌로 내려야 한다, 높이, 아래가 아니라.

언약은 시간 내에서 세워졌다, 하지만 언약은 영원에 머문다. 이제 그것은 그 휴식에 닿을 것이다, 거기서 언약의 지배(사법권)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택자들의 언약적 교제가 계속 될 것이고, 또 지옥에서도 그 지배(사법권)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지옥은 언약에 의해 특징지워질 것이다.

 

<스킬더 약력>

끌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는 1890년 12월 19일에 네덜라드의 깜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후에 그의 고향 도시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De G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는 이 학교를 1914년에 꿈 라우데(cum laude 우등)로 졸업하였다. 목사로서 여러 회중들을 섬긴 후 1933년에 그는 독일의 에를랑엔(Erlangen)에 있는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the Friedrich Alexander University)에서 수마 꿈 라우데(summa cum laude 최우등)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에 깜펀 신학교(the Kampen Seminary)의 교의학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 직임을 1952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스킬더 박사는 수많은 책과 논문들을 썼다. 그의 삼부작 "그의 수난 속에 계신 그리스도Christus in Zijn lijden"는 특별히 영어판인 "수난의 그리스도Christ on Trial"(1938)*로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그는 규칙적으로 주간지(週刊誌)인 "개혁De Reformatie"에, 이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한 1920년 이래 항상 글을 발표했고, 1924년에는 그 편집인 중 한 명이 되었고, 1935년 이후로는 그가 유일한 편집인이었다.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주의의 반기독교적 철학에 대항하여서도 그가 취한 강한 입장은 1940년 8월에 나찌에 의한 그의 체포로 이어졌다. 풀려나자마자 그는 (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독일 점령군에 의해 지명수배된 사람들 중에 그도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거의 숨어지냈다. 그가 속한 교회(교단)의 총회에 의해 발표되어진 어떤 교리 선언들과 또 총회의 이어진 계급주의적 태도에 대한 그의 거부로 인하여 그는 정직되고 또 면직당했다. 그는 “자유로워진” 교회들이 지금은 대학교(University)인 깜펀 대학(College)을 다시 세웠을 때에 가르치는 사역을 재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