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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때가 차매 - 헤르만 리델보스

때가 차매 - 헤르만 리델보스

 

2011-05-18 13:40:09


 

원제 :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1장 공관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나라

 

공관복음에서 하나님나라 개념은 그리스도 비유의 핵심이 되고 있다.  사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전활동과 메시지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아가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나라를 계시하는 책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천국복음 선포는 고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적 종말론 전통의 일부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선포에서 새로운 요소는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임박함을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나팔소리였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천국 복음의 종말론적 성격에 해답이 되신다. 천국 비유에 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이야 말로 복음서의 주제이며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목적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길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의 지상생활속에는 계시와   신비, 종말론적 위대성과 인간적 약함 사이의 기묘한 긴장이 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인자 안에서   그의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다.  하나님나라의 신비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심오해지고 그 나라의 성격은 예수의 부활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인자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미래를 향하여 성큼 성큼 걸어가시며 다니엘 7장에 언급된 왕의 권세를 받으신 것이다.

이것이 공관복음 속에 나타난 그 나라의 개념이다. 그것은 미래성일 뿐 아니라 현재성이기도 하며

비밀이면서도 계시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나라가 이미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여기서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나라는 세상으로 부터 초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찾고 세상과의 광범위한 관계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현재는 그 나라가 미래에 의하여 수행되고 지배될 때만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세속화하고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시대들( 하나님나라의 현재와 미래) 사이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어난 일(현재적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미래적 하나님나라) 에 대한 보증이다.

바로 이것이 공관복음과 신약성경에서 완료시제와 미래시제가 번갈아 나타나는  이유이다.

 

신약성경의 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나라에서 부터 접근하는 것이다. 예수는 교회의 설립자일 뿐 아니라 자신을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하나님

나라 사상, 메시아 사상, 교회사상은 원래의 복음속에서 통합된 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이 현재의 교회를 위하여 갖는 실질적인 의미는

첫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사도의 증거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의 합법성과 통일성은 교회의 사도적  성격에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는 그 나라의 교회이기 때문에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이고 결론적으로 교회는 그  나라의 교회이므로 미래를 추구하여 햔다는 것이다. 교회는 현재 주님의 일을 하지만 동시에  미래에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잊으라거나 땅을 위하여 하늘을 잊으라는 유혹의 한 가운데서 교회는 등불을 밝히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2장 산상수훈의 의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메시아로서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능력과 권위로 이야기 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라는 틀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실체는 산상수훈의 철저성에서 드러난다. 이제 다루어야 할 질문은 산상수훈의 절대적인 명령과 천국과의 연관성이다. 그 명령의 철저성 속에는 예수님 자신의 사랑의 증표가 숨겨져 있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이 산상수훈에서 명령한 사랑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께서 그 말씀에 부여한 충만한 의미대로 성취되도록 노력한다는 사실에 산상수훈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산상수훈속의 예수님의 명령들의 철저성은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그의 은혜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생명은 상실된 생명이라는 지식을 기초로  하고 있다. 따라서 산상수훈은 생명의 참된 비밀은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3장 바울 설교의 구속사적 의의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이 압도적인 건물의 입구를 찾아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바울의 이신칭의의 설교속에서 이 정문을 발견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후 교회의 경건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흐름의 영향으로 칭의에 대한 법적 개념에서 신비주의적(영적) 개념으로 수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바울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구약이나 후기 유대인의 법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바울의 헬라적인 신비들과 삶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법적이든 영젹이든

바울의 설교를 칭의의 설교라고 규정하는 이런 해석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설교와 바울의 설교사이의 통일성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바울 설교에 대한 이런 개념은 신약성경의 통일성의 붕괴라는 결과를 수반했다. 만약 우리가 바울의 설교를 칭의의 설교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설교와 바울의 설교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명백하게 볼 수 없게된다.

 

구속사(redemptive-historical / Heilsgeschichtlich) 라는 용어는 바울 설교의 전체적인 성격에

대한 새롭고도 보다 넓은 조망을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이심을 계시해

주셨다, 이것은 바울에게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부활한 구주에게서 하나님 때의 큰 전환점이 도래했다는 새롭고도 압도적인 확실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사역과 서신의 주제였다.

그러므로 그의 선교와 사역의 성격은 구속의 역사(구속사)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는 단순한 종교적인 천재나 교회개혁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의 증인이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현

시간속에 새로운 시대(하나님나라) 가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증언하고 전파한 사람이다. 이 관점은 바울의 케리그마와  그리스도의 천국 설교 사이의 통일성을 입증하는데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바울의 사역의 양상이 그리스도의 그것과 아무리 다르다고 할지라도 바울의 케리그마는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에 대해 가르친 실체를 설명하는 것 뿐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들을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절정으로 또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드라마의 결정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며 전파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의 설교는 복음서와 다르고 더욱 복잡하며 신학적이다.

그러므로 이신칭의의 중심동기에 대한 참되고 풍부한 의미는 이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만이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얻으려고 노력하던 그 의가 이미 현재의 것이 되었고 선포하고 있다

게다가 그 일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크신 활동속에서 칭의라는 종말론적

은사가 이미 현실화된 실체로 뚫고 들어온 것이다. 바울에게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라는 종말론적 실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속에서 계시된 것이다.

 

바울의 케리그마에서 성령안에 있다는 것은 신비의 카테고리가 아니라 종말론적이며 구속사적인 카테고리이다.  바울의 케리그마에서 법적인 면인 하나님의 의와 영적인 면인 성령은 하나님의 구속의 큰 날에 주어지는 은사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  을

개인적이며 실존적 차원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없이 전체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이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체험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론적 활동과 구속이라는 위대한 드라마속의 그리스도의 위치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다" 는 것은 종말론적 존재양태로서, 이 양태는 항상  개개인이

포함된 전체라는 공동체적 의미를 취한다. 따라서 인류는 아담안에 있고 예정된 교회는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표현은 신비적인 표현이 아니고 구속사적이며 교회론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바울의 케리그마에 대한 이런 광법위한 접근이 교회의 사역이 대하여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서 바울의 케리그마를 이신칭의로만 접근하면 구원에 있어 복음의 종말론적 성격이 아니라 복음의 법적인 성격만 남게되며 계시의 흐름이 지나치게 교회의 전통속에서만 흐르게 될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를 구한 진리는 이신칭의였지만 오늘날 문제는 도대체 사람에게 칭의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구속사라는 것이 인간 자신속에서만 일어나는 실존적 차원의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과거에 한번 일어났던 구속의 사실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참된 실존적 방법으로 설교했다. 바울의 케리그마에서 인간 실존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지금까지 구원받아 온 것은 오직 구원의 역사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으로 써이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인간의 실존이 그리스도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실존이 그리스도의 몸 곧 그이 백성속에서와 교회안에 포함될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 설교는 단지 구원의 역사와 인간이 그 역사속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구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서의 신앙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4장 바울 구원론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

 

신약성경의 계시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중 하나는 바울의 구원 설교중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속에서 율법의 문제가 제기된 것은 특히 유대교에

대한 그의 투쟁에서였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그 자체가 아니라 유대교의 율법 해석 곧 율법을 구원의 방도로 해석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인간에게 대적하는 힘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구원의 방도로 여기는 유대교적인 관점에서 취급하고 있으므로 율법을 죽이고 감금하며 위협하는 세력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속에서 이른바 율법의 제3의 용도를 거부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태도이다.

바울이이 말하는사랑은 율법을 대치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이상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독론과 성령론 모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영구적이며 권위있는 율법의 의미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의 기독론적 관점에서 볼때 그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령론적 관점에서도 바울은 율법을 지지한다. 성령의 사역은 신자들의 생활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참되게 이루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규범이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에 들어있다는 것이 바울에게는 지극히 자명한 일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증인이요 그리스도의 명령의 증인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5장 구속의 역사와 신약의 성경들

 

이제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하나님의 역시적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방법으로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또한 그렇게 발생한 일이 정당한 방법으로

설명되었다는 확실성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이다.

 

개혁주의는 고대로 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가장 크게 강조해왓다. 성경을 명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이 원리가 없이는 온갖 형태의 주관주의에 대한 신학적 저항이 불가능해지며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에 대한 공격에 대항할 수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에 필요한 것은 구원 역사속에서의 하나님의 행동과 성경속에서의 그의 말씀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대한 분명한 통찰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신약성경 자체의 권위와 이 권위의 성격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구속역사의 핵심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은 때가 찼을 때에 일어난 일의 서술과

전승을 권위를 위임받은 사도직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보호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크신 일들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의 중심사건들은 권위를 위임받은 사도들의 선언과 전승에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신약의

구원은 처음에 주님에 의하여 선포되었고 그 선포를 직접들은 사도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증거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사도의 사역속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언급하여야 한다.  성령의 활동은

사도들의 증거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사도의 증거에 관하여 신약성경은 전승이란 말을 반복한다. 여기서 전승은 사도들의 권위있는 설교를 의미한다. 신약성격에서 공동체가 순종해야 할 가르침이 전승과 동일시되고 있다.

사도들이 받아서 교회에 전달한 그 전승은 거룩한 전승으로서 그 안에서 주님 자신이 그의 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런 전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전승은 계시의 일부이며 계시의

역사 그 자체이다. 그것은 사도들에게 맡겨진 진리이며 성령에 의하여 그들의 사역에 위임된 진리이다.

 

교회가 신약성경을 만든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것은 교회가 자신이 거기서 태어났고 그 기초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사도의 사역위에 교회의

기초를놓았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했으며 또한 교회가 신약성경 속에 확립된 전승이외에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기초와 교회의 기초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역사적이고 분명한 의미에서 계시이다, 성경은 문자의 형태로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에 참여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도성과 기독성은 성경의 권위의 인정에 달려있다. 우리는 계시와 구원의 역사 그 자체로 부터 성경의 권위로 접근해 가야 한다. 이 계시의 성격은 또한 성경의 성격과 그 권위의 성격을 밝혀준다. 신약계시의 참된 내용은 그 나라의 도래 곧 큰 구원의 때의 도래이다. 그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일들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본질적인 성격은 무엇보다도 케리그마 혹은 유앙겔리온의 선포이다. 복음서들의 원래의

의미에 관한 이 정의는 해석학적 원리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 정의는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복음서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역사에 대한 엄밀하고  연속적인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 안에서 임했는가를 보여준다. 복음서 기자들의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케리그마를 교회와 세상에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와 케리그마를 분리시키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활동의 때가 찼을 때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의 구원의 역사로 부터 케리그마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복음을 변조시키는 일이다.

신약성경의 증거는 사실들에 대한 증거이면서 동시에 사실들 안에 들어있는 진리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성령은 증인들의 말과 글들이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도록 인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의 성경의 무오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증거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일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는 케리그마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외에 사도들의 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크신 일에 대한 케리그마요 증거로 규정할 수 있을까? 바울의 설교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시대의 공표이며

감추어져 있던 것의 드러남이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그 나라의 도래라고 불린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케리그마의 양상은 복음서의 그것과 다르다. 우리는 바울의 케리그마를 복음서에 기록된 구원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의 서신들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교리 즉 디다케(didache)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케리그마와 다다케의 내용들은 정확히 똑 같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선구자에 의하여 선포된 것이 교사에 의하여 설명되고 있는셈이다. 따라서 첫 부분에서는 천국의 케리그마로 불리던 것이 뒷부분에 가서는 종교적인 가르침과 교리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른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그 사실의 의미에 대한 믿음임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사명은 전파하고 증거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