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장 이사야를 부르심
Tolle Rege/이사야
2011-07-19 01:16:46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선자자로 세워졌다.
이때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환상은 성전에 임재하여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높이 들린 보좌, 성전에 가득한 옷자락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언약적 임재를 의미할 것이며 스랍 천사들의 거룩하다는 세번의 외침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이사야가 성전 환상을 보고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 앞에선 자신과 이스라엘의 부정함 때문이었다. 이 부정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반대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언약을 배반한 언약적 부정이었다. 이사야는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므로 자신도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던 것인데 이사야의 부정은 스랍 천사가 핀 숯을 입에 댐으로 정결하여 졌다.
하나님은 부정한 이스라엘에게 누군가를 보내시려고 하였고 이사야는 자신을 보내달라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의 선포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사야에게 이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사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이 언제까지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하셨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나무가 남김없이 베임을 당할 것이지만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보존될 것이라는 소망을 주신다.
사실 이사야가 선지자로 공적으로 세워진 이 사실이 이사야서 서두에 기록되고 그 이후에 1-5장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것이 논리적인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먼저 정죄와 소망이 선포된 것은 그만큼 상황의 급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먼저 핵심적인 계시를 먼저 선포한 후에 자신의 소명을 말함으로써 그 선포의 신적인 근거와 선포의 성격(회개의 촉구가 아닌 저주의 선포)를 밝히려고 한 것같다.
이사야 6장
닥치고 성경/이사야
2019-09-22 19:44:52
이사야 6장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이야기기 등장하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이사야서의 맨 처음에 나와야 할 대목이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고 이후에 보냄을 받은 예언자로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미 1-5장에서 핵심적인 예언이 선포된 후에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그만큼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급박하게 수행되어야 할 중대한 사명이었으며 남조 유다의 상황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핵심적인 예언이 선포되었기에 이사야는 자신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예언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차 있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성전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기도를 하며 온갖 종교적 열성을 다하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종교적으로 섬기는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종교적 행위에만 치중하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욕망을 섬기는 위선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스랍들은 주님이 만군의 주님이시며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기득한 거룩하신 분이심을 찬양한다. 이사야는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뵈옵고 재앙이 자신에게 닥쳤음을 알고 두려워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입술이 부정하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종교적 제의에는 열심을 내면서 정작 주님의 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위선을 가리킬 것이다. 이는 입으로는 주님에게 가깝지만 정작 마음은 멀리 있는 유다 백성들의 위선적 상황을 의미한다. 주님은 즉각 이사야의 악을 제거하고 그 죄를 사하셨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사는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자각하고 주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사야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기 원하셨지만 이사야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렇게 자문하신다. 주님의 이런 자문은 그만큼 이스라엘 안에 예언자로 보낼 자가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이시며 동시에 이사야의 자발적인 반응에 대한 기를 반영할 것이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심정을 깨닫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요 라고 말씀드린다. 그런데 주님이 이사야를 보내면서 그에게 주신 예언의 메시지는 당시 유다백성들의 심각성을 반영한다. 그들의 문제는 듣기는 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늘 보지만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둔하고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와 눈을 막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과 죄악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를 보내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삼각한 실상을 경고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이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걱정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의 이런 심각하고 암담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주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님이 없어질 때까지 그들이 먼나라로 흩어져 이곳 땅이 온통 버려지며 남은 자들도 다 불에 타죽을 때까지 이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주님의 심판으로 유다 백성이 거의 진멸될 지경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돌이키기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유다가 멸망하고 소멸되는 것이 주님의 뜻은 아니다. 주님은 결코 유다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야곱 족속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주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야곱 족속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야곱 족속을 부르셨기에 그 목적을 이루시는 날까지 결코 그들을 포기하거나 진멸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에 영원토록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가 남듯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면서도 거룩한 씨를 남겨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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