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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예언자들[예언자란 누구인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2:40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1장 예언자란 어떤 사람들인가? -

 

 

1. 저자는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악에 민감하며 불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악과 불의는 인간사의 평범한 요소이거나 사람의 복지를 해롭게 하는 것일 뿐이지만, 예언자들에게는 생명이 달린 문제이고 우주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한 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 악과 불의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예언자들은 악과 불의를 철저하고 민감하게 느끼도록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워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 가장 큰 예언의 주제는 인간의 삶의 형편인데, 이는 하나님은 혼자 앉아 영원한 이데아를 명상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형편을 살피고 대처하는 분이시며 사람과 역사의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예언자들의 관심은 지고한 선이나 지혜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이며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펼치는 것이다. 저자는 그래서 예언자들이 쓰는 언어는 우리가 쓰는 언어와 달리 한 옥타브 높은 음계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겉으로만 거룩하고 신성해 보이는 것들이 우상이며 진리로 숭상되는 신념들이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허상임을 폭로한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소중한 확신을 비신화화하고 거룩한 것을 공격하며 사제와 왕을 모독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2. 저자는 예언자가 말하는 모든 재앙의 언어는 그 자체가 회개를 권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의 메시지는 단순히 멸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주제는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권고다. 예언자들의 중심 되는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밝히는 것이다. 미래를 열어 보이는 것도 현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예언자들은 세상을 세상 속에 묻혀 있는 진리가 아니라 초월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양육하셨으며 그들에게 삶의 터전인 땅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실패야말로 가장 쓰라린 실패가 아닐 수 없다. 그들 가운데 소수가 잘못했다 할지라도 책임은 모두가 져야한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범죄는 그가 속한 사회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현존 그 자체는 도전이고 끊임없는 요구였다고 말한다.

 

 

3. 저자는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외톨이가 되어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하지만 예언자의 생애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외침을 듣지 못할지라도 그의 실존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책무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든지 말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애국자들에게는 반역자로, 경건한 대중에게는 불경스런 자로, 집권자들에게는 선동자로 간주되었다. 성경에서 예언자는 감시자, ,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백성이 살아가는 길을 분석하고 시험하고 깨우쳐주는 자로 묘사된다. 예언자의 눈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쏠려있고 그의 발언 주제는 예언자가 속한 사회와 상황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귀는 하나님에게 열려 있으며 그는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영광과 하나님의 손에 사로 잡혀있다. 저자는 예언자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는 자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예언자는 전달자 이상 가는 증인으로서 자신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는 자라고 말한다. 예언자는 자신의 말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하며, 자신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권위는 그의 말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있다.

 

 

4. 예언자는 증인이고 그의 말은 하나님의 힘과 심판, 그분의 정의와 자비에 대한 증언이다. 그래서 예언자의 말에는 저주의 말과 동정의 말, 태워버리는 불과 영원한 사랑이 있다. 그렇다면 이 대조되는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끈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끊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예언자가 무엇을 말했는가에서가 아니라 누구의 말을 했는가에서 예언의 통일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예언자가 의식한 궁극적인 대상이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비난하고 책망할 뿐 아니라 감싸고 위로하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반영한다. 저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때문에 예언자의 태도는 양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들 편에 서며,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 편에 선다. 그러나 여전히 예언자의 생각은 하나님에게 쏠려 있으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저자는 예언적 사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세상을 하늘의 초점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백성을 어떤 영원한 규범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심판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토스도 드러내는데, 그래서 예언서들에는 하나님의 사랑, 낙담, 자비, 분개의 메아리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비인간적인 분이 아님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신성한 하나님의 파토스가 영감 받은 예언의 열쇠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삶과 연루되어 있고 그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반응이 사랑, 자비, 분노로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내면의 깊은 통일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예언자는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므로 예언자들의 영감을 단순한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인 감수성으로 파악하기란 곤란하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은 영감으로 받은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재생하거나 단순히 복사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예언자는 하나님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조수라고 강조한다. 예언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알지 못하고는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저자는 예언자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은 하나님의 느낌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하나님의 파토스에 동참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예언자의 영감에 대한 응답이고 계시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다. 예언자는 자신의 삶을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삶도 산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파토스를 그 내용과 함께 전달코자 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아모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3:12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장 아모스

  

1. 여로보암 2세의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주전 786-746) 북 왕국은 물질적인 국력과 재물을 최고도로 유지하였고 국경은 북쪽으로 하맛과 다마스커스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유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 안은 교만과 사치로 가득했고 가난한 자들은 시달리고 착취를 당했으며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없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국에 앙을 치던 아모스가 일어나 외친 것이다. 그의 고향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에 있는 드고아였지만 그는 북 왕국의 사마리아, 베델을 향해서 예언했다.

 

 2. 아모스가 저주한 일은 특히 두 가지 인데, 성실함의 결여와 서로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었다. 아모스는 이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했다. 아모스가 정의를 외친 것은 그가 윤리나 도덕의 수호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정의는 어떤 이념이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관심사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는 서로 책임을 지고 관심을 두는 관계가 맺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특수한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믿음은 히브리 신앙의 모퉁이 돌이며 좌절의 순간에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 모퉁이 돌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피난은 하나의 도피가 되어버렸음을 알았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하늘의 편애를 받거나 징벌을 면제받는 특권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하늘의 심판과 징벌을 다른 민족보다 더 엄격하게 받는 것임을 깨우쳐 주어야만 했다.

 

 3.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모스의 메시지를 엄격하고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그대로 전달한 것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그러나 이런 견해는 예언자의 메시지 속에 힘 있게 표현된 하나님의 속마음을 간과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만일 하나님의 정의가 단지 엄격하고 기계적인 정의였다면 벌써 그분은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끊어버리고 그들을 버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깊은 애정을 품으셨고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더 친밀하게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하고 책망하시는 동시에 거듭하여 덮어주고 용서하시며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에서 뉘우치고 돌아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불의를 가차 없이 미워하시지만 언제나 회개의 문을 열어두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애정이 있어 동정이 정의를 감싸며 공의 속에 자비가 솟구친다. 예언자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뉘우치고 야훼께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4. 그러나 그들은 뉘우치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의 하나님을 만날 채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이제 그분이 이스라엘을 만나러 오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다. 징계는 실패로 끝났고 이제 만남이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신다. 이것이 아모스 예언의 전제이다. 아모스는 너무나도 강하게 영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 속에서 계시와 응답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바로 자기의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언자 사이에는 서로 마음과 생각을 열어 상대방을 깊이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친분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친분이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야훼이시고 예언자들은 그분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신을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감의 빛 아래서 우리는 아모스의 예언 정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동정과 하나님께 대한 공감, 이것이 아모스의 등을 짓눌렀던 무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예언자들[호세아]-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3:40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3장 호세아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북왕국을 향하여 예언하였다. 남왕국의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그는 북왕국의 쇠퇴와 멸망기의 예언자였다. 호세아는 여로보암2(주전 786-746) 시대에 예언활동을 시작하여 여로보암이 죽은 다음 계속된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살았다. 아시리아는 디글랏빌레셀3(주전 745-727)가 통치하는 동안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으로 발돋움하였다. 아시리아의 번영의 역사는 북시리아 왕국들, 이스라엘 북왕국, 유다 그리고 이집트에게는 엄청난 고난과 파괴의 역사였다. 호세아는 바로 이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북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 북왕국은 정치적인 혼란기였고 북왕국은 아시리아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끼어 잔재주로 외교적 수완을 부려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보강하기는커녕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호세아는 강대국을 의지하려는 북왕국의 외교정책을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호세아를 보내신 것은 파멸을 선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이 돌아와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권고하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아모스가 미완으로 남겨둔 것을 이제 호세아가 처리해야 했다고 말한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선포했다면 호세아는 자기 백성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내었다. 하나님은 정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언약관계를 맺었을 때를 추억하는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분이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떠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들에게 이교의 신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보다 더 매력적이었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김으로 평안을 찾으려는 이스라엘에 심판의 메시지를 퍼부었다. 그러나 호세아의 이 메시지는 단순히 멸망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를 알리려는 것이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분노에 깊이 공감한 예언자였다. 그렇지만 호세아는 하나님의 분노는 강렬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동정심은 끝이 없음을 선포했다. 그래서 호세아는 야훼께서 당신의 심판을 보류하고 이스라엘이 죄를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노래하였다.

 

저자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악한 범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예언했다면 호세아는 사랑의 동기로 인간 역사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예언했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속임을 당해도 여전히 정조를 지키며 재결합을 애타게 바라는 신실한 배우자로 묘사한다. 저자는 호세아는 주관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예언적 각성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훌륭하게 표현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호세아에게서 하나님의 솟구치는 정념만이 아니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강점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성에 대한 음성이라고 말한다. 호세아에게는 아모스에게 찾아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부드러움과 자비의 감성이 나타난다.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어미의 부드러운 사랑으로, 남편과 아내사이의 애정으로 표현하였다. 저자는 호세아가 동족에게 던진 중심적 문제는 제사의식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대해 진노하시지만 결국은 이스라엘과 계약을 갱신하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호세아 예언의 주제는 변절이었다. 저자는 그런데 호세아가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대상이 변절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버림을 당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신실한 배우자라는 관점으로 보았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사랑, 부드러움, 그리움이라는 관계로 표현하지만 동시에 무서운 격렬함도 드러낸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부드러움, 그리고 거룩한 형벌의 격렬함으로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야훼는 이스라엘과 사랑에 빠져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올바름에 대한 정열적인 사람과 함께 잘못됨에 대한 불타는 증오도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흔히 계약 관계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관계는 인간적인 깊이보다는 영속성, 견고성, 상호의존성 등을 암시한다.

그래서 호세아에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는 결혼이었다. 결혼이란 이미지를 통해서 호세아가 강조하려는 것은 우상숭배는 배우자인 하나님에 대한 간음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람피우는 아내와 같고 야훼는 성실하고 사랑하지만 버림받는 남편과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단순한 포고령이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의 정념의 발로이다. 이스라엘과의 재결합을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과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분의 소망은 질투심보다 강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배우자로 묘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는 못한다. 그 어떤 이미지도 비유도, 상징도 하나님에게 적용시키면 곧장 퇴색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보다 감정보다 더 강하다. 저자는 호세아를 움직인 정념은 아모스에 비하여 복합적인 구조를 지녔다고 말한다. 저자는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은 하나의 드라마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드라마는 여러 막과 무대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호세아로 하여금 그 모든 신적 정념의 무대들과 내적인 일체감을 갖게 한 것인가? 어떤 경험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가지려면 그 경험을 함께 나누든지 아니면 비슷한 경험이라도 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전체 이야기가 호세아의 일생을 통하여 재상되었고, 하나님의 여러 정념들이 호세아의 사랑, 낙심, 화해하는 사적 운명 속에서 경험되고 나누어졌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야훼로부터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호세아의 결혼 이야기를 비현실적인 비유나 알레고리로 보려는 시도는, 이 이야기가 호세아가 실제로 경험한 인생의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현대학자들에 의해 일축되었다. 그런데 호세아가 자신의 결혼이 하늘의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호세아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저자는 이런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호세아의 결혼 사건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회해란 오직 참회와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지만 고멜이 회개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또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를 버렸지만 호세아는 결코 이스라엘의 버림받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인간이 하나님의 내면적인 삶을 복사한다는 생각은 부조리의 극치였다. 저자는 아무래도 예언자의 결혼을 어떤 결과를 목적으로 한 행위로, 어떤 실물 교훈이나 공공의 교훈을 의도한 행위로 보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호세아의 결혼 이야기의 바탕은 그의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 자체가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불문하고 호세아에게 그 사건을 가장 깊은 차원에서 그와 개인적으로 연루되어 있고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호세아는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이 하나님의 정념을 얼비치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호세아는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의 정념을 공감하는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아마도 자기 결혼이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러므로 호세아의 결혼은 실제 사실의 상징적 표현도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반복되거나 재현되는 행동도 아니며 하나님의 내면의 삶을 보여주는 어떤 의도적 경험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호세아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성한 배우자가 경험한 바를 살아냄으로써 비로서 하나님의 정념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 목적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있지 않고 호세아 자신을 가르쳐 하늘의 감성을 이해하게 하는데 있다.

 

백성들에 대한 호세아의 비난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는 알다(yada)”라는 단어를 매우 자주 쓰는데 다앗 엘로힘(daath elohim)”이라는 말과 함께 쓴다. 예언자가 말하는 앎이란 추상적인 개념파악이 아니라 내적인 귀속, 느낌, 영혼 속으로 받아들임을 다 나포하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행위 둘 다를 의미한다. 히브리 성서에 나타난 yada의 용례를 살펴보면 굽어 살피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동감하다, 돌보다, 좋아하다, 친숙하다, 결합하다, 이런 의미가 있다. 호세아가 부부 관계로 서술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피차의 옳은 행실을 요구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감정도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호세아는 하나님과의 감정적 일체를 경험함으로써 공감이라는 관념들 종교의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건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다앗 엘로힘은 사람과 지식으로 전인격으로 하나님과 공감하는 것이며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앗은 헤세드(hesed)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내적으로 공감하는 것이며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앗 엘로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생각하는 호세아의 사고의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비난하는 음란함은 다앗 엘로힘과 반대되는 말이다. 앎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음탕함이라는 동사가 가리키는 성적인 결합이란 아날로기는 앎이란 피차간에 나누는 감정적 경험을 암시한다. 성관계를 맺을 때 한 쪽의 감정이 전입되어 둘이 같은 감정을 느끼듯이 호세아가 암시하는 공감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내적인 경험을 더불어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앗 엘로힘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관심하는 바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 하나님의 의지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관심, 행동과 아울러 내면의 진의까지도 포함시키는 관심을 의미한다. 호세아가 말하는 다앗 이란 단어가 인간의 전인격적 관계 맺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과 맺을 새로운 관계를 예고하는 대목에서도(2:21-22) 확인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 그렇듯이, 인격적인 결합은 하나님을 앎(daath)의 전제이며 그 핵심이다. 그러므로 호세아가 요구하는 공감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결속이며 감정적인 일체화다. 그것은 종교적 필수조건이며 핵심이므로 다앗의 상실은 인간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4:6) 아모스에게 근본적인 죄가 불의였다면 호세아에게 근본적인 죄는 우상숭배였다. 아모스가 악한 행실을 통렬하게 비난했다면 호세아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 없음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도 아모스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본다면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정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면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은 어렸을 적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백성이다. 호세아는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hesed) 자도 신실한(emeth) 자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daath) 자도 없다고 탄식한다.

 

예언자들[이사야 1-39장]-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4:06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4장 이사야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웃시야의 오랜 치세 아래 유대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웃시야가 죽던 해였는데 이는 북왕국의 여로보암2세가 죽은지 4년이 지난 해였고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이 출현하여 바빌론과 시리아를 정복할 채비를 차리고 있을 때였다. 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남유다는 일련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북왕국의 베가가 주도하고 다메섹의 르신, 아스켈론과 가자까지 참여한 반 아시리아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다의 아하스는 이 동맹에 참여를 거부함으로 동맹군과 유다 간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시리아 에브라임 전쟁이었다. 막강한 동맹군의 공격으로 유다의 변경은 황폐해졌고 수도 예루살렘가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아하스는 이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아시리아는 북왕국의 호세아를 굴복시키고 남진하여 아스켈론과 가자를 점령하고 734-732년경에 시리아와 펠레스타인 일대를 휩쓸어 이집트 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메섹은 점령당했고 시리아 왕은 죽임을 당했다.

 

아하스는 아시리아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정치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아시리아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하스는 732년에 디글랏빌레셀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고 거기서 본 아시리아 신의 제단을 본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단을 만들기까지 했다. 아하스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과 손을 잡기 위해 종교적인 원리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하스가 최대 강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모두 환영하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아시리아가 유다에 재난을 몰고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마리아만 겨우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던 북왕국은 결국 722년에 아시리아의 사르곤2세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 멸망하고 말았고 남유다는 북왕국의 멸망을 슬픔과 놀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하스가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이집트는 꽤 오랜 세월동안 침체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720년경 이집트의 제2왕조가 출범하면서 이집트는 남부 팔레스타인의 여러 민족들에게 아시리아에 항거하도록 부추겼고 결국 블레셋, 모압, 에돔, 유다가 연합하여 아시리아에 항거하였다. 이사야는 유다가 이집트를 의지하고 반 아시리아 정책을 펴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결국 재난을 초래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사야의 충고가 먹혀들어간 듯, 히스기야는 결국 713년과 711년에 일어난 반 아시리아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고 결국 아시리아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르곤2세가 죽고 그 아들 산헤립이 왕이 되자 히스기야는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추진해나갔다. 사르곤2세가 죽자 아시리아 제국의 변두리에서부터 반역이 일어났는데 바빌론에서는 엘람인들의 도움을 받아 므로닥발라딘이 왕으로 자처하였다. 므로닥발라딘은 히스기야를 부추겨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반군세력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이사야는 유다가 반군세력에 가담하면 결국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막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전역에 반 아시리아 분위기가 익어가고 강력한 동맹군이 결성되자 히스기야는 그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물론 이 때도 반 아시리아 동맹의 후원자는 이집트였다.

 

이사야는 이집트든 아시리아든 유다가 외국과 동맹하는 것을 반대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두 개의 큰 거부에서 비롯되었는데, 아브라함 시대에는 메소포타미아를 거부하였고, 모세 시대에는 이집트를 거부하였다. 여러 세기에 걸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정치와 종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스라엘을 그 영향을 거부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과 모세 시대에 가가스로 획득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 이제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에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강대국의 위협으로 풍전등화와 같이 된 위기 속에서 온 민족이 군사력을 외면하고 오로지 야훼만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있을 만한 일인가? 신앙으로 살기를 배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이사야는 인간이란 신앙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앙은 결코 손쉽고 편리한 방편이 아니다. 역사의 굽이마다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는 사람은 숱한 좌절을 맛보게 되어있다.

 

703년경 산헤립은 군대를 일으켜 질풍노도처럼 반란군들을 삼켜버렸다. 그는 므로닥발라딘과 엘람인들을 무찔러 티그리스 동쪽 지역을 평정한 다음, 701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진군하였다. 이내 유다의 계곡들은 아시리아의 군마들과 전차로 가득 차게 되었고 산헤립은 유대의 전진기지인 라기스에 진을 치고 히스기야의 항복을 요구했다. 예루살렘은 곧 포위되었고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새장에 갇힌 새라고 조롱하였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파배를 예언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은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남으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무서운 역병이 아시리아군 진영에 퍼져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산헤립은 결국 니느웨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아들들의 손에 살해를 당하게 된다. 이후 아시리아가 몰락하기까지 70년 동안 유다는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존속했지만 국가적 위기에는 휩쓸려 들어가지 않았다.

 

이사야의 주된 관심은 유다의 외교정책이 아니라 나라의 속사정이었다. 당시에 나라 살림은 풍요한 편이었고 사람들은 평온하고 즐겁게 일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예배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 악행들, 우상숭배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었다.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현실이 그에게는 병든 것뿐이다. 예언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야 할 땅에 우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예언자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에게 진노하심을 알고 파멸의 환상으로 마음이 괴로웠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도록 격렬한가를 이사야는 거듭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냉혹하고 불길하고 무자비하게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시는 것은 인간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에 대한 그분의 관심과 불의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토록 격렬한 것은 인간의 잔인함이 극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사야의 쓰디쓴 경고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슬픔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자식에게 버림받은 아버지의 처지에 비유한 이사야의 예언에는 하나님의 상처 입은 사랑에 대한 그의 공감이 온 몸을 사로잡고 있다. 노아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인내와 오랜 아픔은 이제 그 한계에 도달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신다. 그들의 맹세와 축제와 제의는 하나님께 짐이 되었고 슬픔을 안겨줄 뿐이다. 이사야의 중요한 신학적 명제이기도 한 하나님의 싫증은 그분으로 하여금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계기가 된다. 바야흐로 때가 이르매 그분의 분노가 역사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정념이 감정에서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이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진노 속에서도 울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슬픔이 있고 그분의 분노는 정화의 도구요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자비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잠시 보류된 것뿐이다. 그분의 분노는 한순간이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사야는 또한 하나님의 열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남은 자라는 기적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살아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난을 피한 자들이 시온 산에서 나올 것이다. 호세아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배필이었다면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이었다. 이사야는 포도원에 온갖 정성을 쏟았지만 아무 결실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동정한다. 사람들의 비극보다는 하나님의 슬픔이 이사야 예언의 주제이다.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심고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신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하나님이 포도원에서 거두고자 한 것은 공평과 정의였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것은 유혈과 악행 그리고 아우성이었고 이에 마음이 상한 하나님은 바야흐로 진노를 폭발하셨다.

 

그러나 이사야를 괴롭힌 것은 다른 사람들의 비행만이 아니었고 자기도 오염된 것을 알고 있다. 예언자는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자이며 더러운 사람들 틈에 섞여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시대인을 향하여 온갖 저주를 퍼붓는 예언자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의 동족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그는 온 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데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 상태에 처한 동족을 동정한다. 그러나 동족이 우상숭배에 빠져 만군의 야훼를 저버리는 것을 볼 때 예언자는 그들을 용서하지 마소서라고 외친다. 예언자는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은 아예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예언자의 마음에는 두 가지 동정심이 깃들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동정과 백성에 대한 동정이다. 백성을 향해 말할 때 그는 감정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고, 파멸의 환상을 볼 때 그는 감정적으로 백성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의 동시대인들은 지각이 없고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예언자는 다가오는 야훼의 날을 내다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혼합물이 제거되는 정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순화의 과정은 냉혹하고 무서울 것이다.

 

이사야 6장에는 예언자의 소명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 이사야가 받은 명령은 놀라운 내적 모순을 담고 있다. 그것은 예언자의 근본적인 목적을 오히려 훼방하고 뒤집어엎기 위하여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이었다. 이사야의 평생 일이 그의 동족을 설득하고 권고하고 회개하게 하는 일이었는데 어찌된 것인가? 저자는 이 명령은 남유다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북왕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북왕국 백성들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오히려 그들의 이해력을 없애며 무감각을 신장시키는 것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정념에 흠뻑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이런 숙명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의 소명은 하나님의 백성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예언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백성은 철없이 군다고 말한다. 그러니 설득하는 말도 파국을 예고하는 위협도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직 종말적인 사건만이 오만방자한 인간을 잠잠케 할 것이다.

 

이사야는 인류에게 두 가지 희망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즉각적이고 부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멀고 종말론적인 최후의 것으로서 마지막 날에 세계가 변모하리라는 것이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이 희망 너머에는 온 세계가 변모하여 새 세계가 되리라는 최후의 희망이 있다. 이사야는 재난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남은 자들이 돌아온다는 것, 시온이 끝내 시련을 견뎌내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시온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달리 이사야는 결코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포한 모든 재난과 파멸의 예언들 위로, 백성과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끈질기고 사라질 줄 모르는 사랑과 관심에 대한 예언자의 강력한 확신이 솟구쳐 오른다. 하나님이 진노하시지만 당신 백성과 맺은 줄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예언은 언제나 양극단 사이를 오간다. 예와 아니오, 분노와 사랑, 파국과 구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하나이심을 믿는 확신 속에서 풀어진다.

 

예언자들[미가]-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4:34

예언자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5장 미가

 

 

이사야와 동시대인이었던 미가는 자신의 사명을 거역하기만 하는 야곱의 죄상을 밝히고 못할 짓만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규탄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첫 번째 예언자였는데 그가 이 무서운 말을 입 밖에 낸 것은 히스기야가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미가의 눈에 유다의 치명적인 죄는 바로 도덕적 부패였다. 미가는 재앙을 선포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미가를 조롱한다. 미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쓰기만 하다. 시온과 자기 동족을 사랑한 그는 닥쳐올 일을 환상으로 보면서 그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예언자는 고독한 사람이다. 그가 선 자리는 너무 높고 그의 덩치는 너무 크고 그의 관심은 너무 치열해서 보통 사람이 그것을 더불어 나눌 수 없다.

 

미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위대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들이고 견딜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분의 진노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우리가 그분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분의 진노가 인간을 영원히 버리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데 있다. 그분의 진노는 지나가 버리지만 그분의 미쁘심은 영원히 계속된다. 어둠은 음습한 늪이 아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신다. 또한 미가는 또 다른 위대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미가는 야훼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제의가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고 은덕에 보답하며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정의]-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2015-09-05 22:37:45

  예언자들은 희생제보다 도덕성이 더 근본이라고 강조했을 뿐 아니라 예배의 가치는 절대적인 아니고 도덕적인 삶에 따라오는 것이며 부도덕이 판을 친다면 예배가 오히려 혐오스런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근본적인 길은 사랑, 정의를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물론 예언자들이 희생제 자체를 정죄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불의한 행실이 희생제와 기도를 망쳐놓는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예배를 본질로 하는 종교가 인간에게 그토록 정의를 강조하는가? 헤셀은 의란 그냥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몫이요 인간의 역사에 내기를 건 하나님의 밑천이라고 말한다. 정의는 고대의 관습도, 인간의 약정이나 가치가 아니다. 정의는 신의 관심이 실려있는 초월적인 요구다. 정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요구를 내포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추론적 결과가 아니라 성경적 신앙의 선험적 사실이며 자명한  사실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 본디 갖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분의 도와 동일한 것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바다. 그것은 지상 명령이며 남이 대신하여 충족시킬 수도 없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하여 열쇠가 되는 두 단어는 쩨다카(tsedakah)와 미쉬팟(mishipat)이다.  소펫(재판관)이 내린 판결을 뜻하는 미쉬팟은 정의(justice)은 규범, 법적 권리, 법률이란 의미를 함의한다. 쩨다카는 의(righteousness)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헤셀은 이 두 단어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미쉬팟은 행동의 양태를 의미하고 쩨다카는 인격의 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헤셀은 쩨다카는 미쉬팟을 넘어선다고 말한다. 미쉬팟은 법적인 차원이지만 쩨다카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동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공정한 균형이 아니라 압제받는 자들에게 쏠리는 편중이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포함하고 있다. 헤셀은 정의는 주장과 책임을 둘 다 포함하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성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쉬팟은 자기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이면서 남에게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리와 동시에 의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정의는 권리와 의무를 다 내포하고 있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전제하며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양쪽에 다 적용된다. 저자는 그러므로 미쉬팟은 계약,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하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가 강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고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축복의 씨앗이 되도록 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 즉 이스라엘에게 의(째다카)와 정의(mishipat)을 행함으로 야훼의 도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었다'(창18:9) 헤셀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의와 정의에 대한 관심을 더불어 나누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동정어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새계약의 목표라고 말한다. 정의(미쉬팟)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그분이 인간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쩨다카)에서 나온다.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절대적 원리나 관념으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정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의가 값진 것이며 반드시 구현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추상적인 개념도 독립적인 가치도 아니다. 정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고통이 하나님의 마음에 까지 닿을 수 있는 존재이다. 

 

  헤셀은 성경의 종교가 이룬 주된 성취는 역사의 과정에서 작자 미상의 너울을 치워버린 것이었다고 말한다. 역사의 과정에는 궁극적인 법이라든가 영원한 관념 따위는 없다. 다만 야훼 홀로 궁극적인 분이요 영원한 분이다. 그러므로 법이나 도덕적 관념은 그분의 창조물이지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온 실재물이 아니다. 헤셀은 실로 도덕적 관념의 인격화야말로 예언 신학의 빠뜨릴 수 없는 임무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이 그토록 빈번하게 고백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불변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관심에 바탕을 둔 에토스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도덕적 관념과 일치시키는 것은 예언자의 신학이 의미하는 것과 정반대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저 도덕 질서를 지키고 안내하는 분이 아니며, 선이라고 하는 어떤 초월적 관념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분도 아니다. 그러므로 헤셀은 예언자들을 미쉬팟을 선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념을 선포하는 자로, 정의라는 관념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대변하는 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바로 이 사실이 예언자로 하여금 인간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게한다. 헤셀은 하나님의 정념(파토스)는 신비속에 숨어있는 의요 거룩한 타자와의 동거라고 말한다.( God's pathos is righteousness wrapped in mystery, togetherness in holy otherness)  하나님은 정의와 측은히 여기는 마음 곧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 둘은 서로 갈라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상호 보충한다. 측은한 마음(쩨다카)으로부터 정의(mishipat)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추기] 헤셀의 설명에 의하면 신약성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랑(헬라어로 아가페로 번역된)이란 말은 쩨다카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을 행한 하나님의 자비, 동정, 관심, 긍휼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쩨다카 곧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인 것이다. 로마서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헬라어로 디카오쉬네로 번역됨)가 나타났다고 말했을 때 이 하나님의 의도 쩨다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쩨다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하고 그 관계로 인해서 나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정념(측은히 여김, 자비 동종, 관심)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언약적 신실함(covenantal faithfulness)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에 신실한 분이며 또한 인간에게도 그런 신실함을 요구하시분이다. 그러니까 이런 언약적 신실함(쩨다카)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의(미쉬팟)일 것이다. 사실 미쉬팟뿐 아니라 하나님의 징벌, 심판, 사랑, 긍휼 등 모든 것이 다 쩨다카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째다카와 미쉬팟은 분리될 수 없으며 미쉬팟은 쩨다카의 하위개념으로서 쩨다카로부터 나온다고 보아야 한다. 

 

[추기2] 공의, 긍휼로 번역되는 쩨다카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을 같이하는 것(공감)이고 동정(sympathy)하는 것이다. 째다카는 압제당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미쉬팟은 쩨다카에 토대를 둔 언약적 행동으로서의 정의이다. 그러므로 미쉬팟은 율법조항도 아니고 사회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쩨다카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이다. 그러므로 미쉬팟은 재판이란 의미를 갖는데, 이는 재판을 통하여 약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처벌하는 정의가 구현되기 때문이다. 쩨다카와 미쉬팟은 분리되지 않으며 쩨다카 없는 미쉬팟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쩨다카와 미쉬파는 이 둘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 원리이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와 정의로 통치되는 나라임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