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1- 스킬더
2014-02-12 14:20:52
이 발표에서 우리가 논하려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하나님과 다른 편으로 그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 곧 하나님과 신자들 및 그의 자녀들 혹은 아브라함 및 그 후손들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성경이 존재하고 우리의 삶과 사고가 거기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듯이 우리는 모두 언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차이가 그동안 나타났고 이 언약을 누구와 실제로 맺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이런 논쟁이 언약에 대한 관심을 제고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런 의견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이 적절치 못한 점 그리고 특정 언약 교리를 가지고 부당하게 공격한 점은 실망스럽다.
모든 종교는 언약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 바빙크에 의하면 종교는 항상 언약 관계를 가지고 있고 언약의 형태가 없다면 종교나 신을 숭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먼저 우리는 한 가지를 동의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언약의 실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교회는 말하길 우리가 언약을 말하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하나님과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언약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인과 어린애가 언약을 맺는 것이 어리석듯이 성인과 갓난아이가 결혼 언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동물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가? 동물과 이성적이고 도덕적 존재인 인간은 양립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옳은 말이다. 거인과 젖먹이 어린아이, 성인과 갓난아이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여전히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둘 다 피조물이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 차이는 여전히 유한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거인과 아이, 성인과 젖먹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 보다 절대적으로 큰 것이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다른 구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바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실재하는 언약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다 성경에서 언약을 종종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유일 뿐이고 실제로 언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들을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 실재에 대하여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것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며 그것들에 반대하는 말한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언약 교리를 듣는다면 그 교리는 근본적인 오류일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이런 차이를 전적으로 갖지 않는 언약 교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약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언약은 실재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것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려졌으며 동시에 전적으로 경건한 말씀을 가지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편에서 이 언약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에게 오시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주도로 나와 자녀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 존재이다. 사람 편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주도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원인과 주도만이 언약을 원하시고 언약에 대해 말씀하시며 언약 관계를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행하셨는데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그와 세우시는 언약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사람이 언약을 맺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만드신 것이다.
언약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창조 의지로 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언약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소송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미가 6장) 하나님은 자신의 법정, 곧 언약의 법정에서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아, 내가 너에게 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어떻게 너희를 피곤하게 하였느냐? 나에게 대답하라" 우리 편에서 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송하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만일 하나님 편에서 한 편으로 하나님 자신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사람 사이에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면 그것은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법적인 관계가 성립하고 언약적 축복이나 언약적 저주가 생기게 되며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약속으로 끌어들이시거나 언약적 처벌로 위협하신다. 작은 아이가 거인을 초대하여 자신과 언약을 맺게 할 수는 없지만 거인이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나는 젖 먹이 아이를 입양하고 그 아이에게 이해력, 의지, 성향 그리고 그런 행동들로 부터 나오는 것들을 불러 일으켜서 아이가 성장하였을 때 나의 상대편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능력의 빛을 보게 된다. "오 사람아 너는 내 곁에 선 상대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의 능력의 말씀이 나타난 교회를 통하여 천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너를 지으신 이는 너의 남편이시니라." (사54:4) 세상에 어떤 남자도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할 자가 없다. 너의 창조자 ,너를 낳으신 이, 너를 지으신 이가 너의 남편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누구를 낳았다면 그는 아버지이고 그 두 사람은 서로 결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딸은 동등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고 오직 여기서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 보다 수백 배 더 우리를 낳으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내가 너의 남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만들었고 동시에 언약이라고 부르는 너와 나의 관계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초원의 소나 요람의 어린애, 교회안의 의자, 그리고 의자를 덮은 천이 실재하듯이 언약도 실재하는 이유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실제적이고 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말하는 것은 비유적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거부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언약이 비유적이라는 이론으로 부터 배울 점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언약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언약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두 당사자는 작은 사람과 무한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역시 스스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서 언약이 포함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정확히 전달하실 수 없으시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시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자신을 묶으시기 때문이다. 사람인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제한된 단어와 제한된 개념, 제한된 언어개념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무한한 실재를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 가능성 사이의 선택 가운데 계신다.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하고 순전하고 거룩하게 언약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언어의 보물로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렇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가능성을 택하시어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언어를 사용하시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독특한 관계에 대하여 독특하지 않은 언어로 말씀하셔야만 했다.
지상에는 많은 언약들이 맺어진다. 청년들은 결혼 언약을 맺으며 왕들은 공격과 방어의 조약에 서명을 한다. 국가들은 온갖 종류의 조약을 만든다. 사람들에게 오든 종류의 언약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이런 특별한 일에 스스로를 맞추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 이유이고 이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전달하시려는 생각을 언약이라는 말로 성경이 고안해낸 것을 발견하고 따라가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하여 언약에 대하여 정당한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언약에 대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이 질문을 시작하여야 한다. 통상적으로 언약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다. 언약에서는 한편 이상의 상대가 나와서 둘 혹은 셋이나 그 이상의 상대가 서로 언약을 맺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계약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계약에서 자유롭게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렇다 내가 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각 언약은 당사자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실제적인 언약이 된다. 가끔 언약이란 단어는 두 당사자 간에 "아무런 동의가 없는 문제를 구속하는 일에도 사용된다.
하나님은 이 땅과 곡식과 포도주와 비와 언약을 세우심으로 가진 자의 손에 풍성한 열매가 있게 하셨고 물이 다시는 땅을 엄몰하지 않게 하시고 불이 땅을 소멸하지 않게 하셨다. 그런 경우들에 언약이란 단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언약 상대방인 땅, 곡식, 물, 불은 "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시실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말하면서 생각과 말을 할 수 없는 창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에도 언약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비교의 수단으로 말씀을 하심으로 확실한 것이 결정되고 변할 수 없음을 나타내신다.
알다시피 언약은 종이에 쓰고 선포되고 인장으로 인침으로 공적으로 확정된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은 땅과 해와 혹은 다른 것들과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것이 확립되어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과는 이런 식으로 언약이 세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각 언약은 창조 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언약의 여지는 있었지만 언약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생긴 이후에 생겨났다. 이것이 언약이 창조 이후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시며 인도하신다. 이것이 요리문답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두 개념인 보존과 통치이다.
보존은 하나님이 창세기 1장 1절 이래로 오늘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붙드시는 것이다. 배수로의 물과 교회의 벽돌은 창세기 1장 1절의 계속이다. 왜냐하면 그 때 하나님이 물과 벽돌의 재료를 만드셨고 각각의 창조물이 창세기 1:1에 연관되어 오늘까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치란 창세기 1:1에서 창조된 것이 계시록 22:21의 목적지에 적절하게 도달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보존이 알파에서 나온다면 통치는 오늘 존재하는 것이 오메가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섭리의 모든 행동은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행동이고 시작과 끝 사이의 행동이며 시작으로 부터 종말에 이르는 연결인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작품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르시고 보전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언약은 창조 이후에 등장하였고 이미 존재하는 것 위에 세워진다. 이렇게 존재하는 세상에서 언약이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언약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다. 소는 소로서 존재하고 사람은 사람으로 존재한다. 소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책임이 없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사람의 책임과 관련된다. 언약을 추상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모든 추론들은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1944년 해방의 시대에 열린 많은 교회회의가 포함된다. 언약에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하는 실재가 있으며 이 책임은 실재로 인식되어야만 하며 전적으로 숙고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충분히 그리고 편견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은 파괴될 것이다.
어떤 잡지는 죄근에 언급하길 우리(해방파)가 언약을 파괴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 언약을 더욱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책임을 지적할 때 그들은 우리가 언약을 도덕주의로 만든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언약의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은 주장하길 언약은 선택을 의미하며 언약을 깨뜨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위협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진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모든 추론은 언약에서 책임으로 부르심을 강탈하는 것이며 언약을 전적으로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창조로 부터 나왔고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가장 충분하게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약은 언약 상대방들로 하여금 그들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계약은 결혼으로 발전하고 거기서 남자는 아버지로 여자는 어머니로 발전하며 결혼은 양 당사자가 충만한 발전에 이를 때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이 한 편이 되시고 사람이 다른 한편이 되어 언약을 맺을 때도 발전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심, 거룩하심으로 인하여 당연히 변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사람의 눈앞에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하니님은 자신을 나타내신다. 언약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풍부하게 계시하게 만들며 그 안에서 창조주는 자신을 재창조자로, 아버지로 계시하심으로 그가 우리를 만드시고 깨뜨리실 수 있으시며 우리 죄로 빠진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다시는 우리를 깨뜨리지 않으시고 매일 우리에게 아름답게 나타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신다. 사람도 또한 언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난다. 언약 안에서 그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 혹은 언약의 파기자로서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 드러나게 된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의 호의로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사람은 머리의 왕관으로 부터 그의 발의 발바닥까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만 자신의 정당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언약에서 당사자의 위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언약은 일방적이다. 그것은 양방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최종적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창조된 존재가 아니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동등하지 않다.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동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시작하시고 그 조건을 정하신다. 우리가 언약의 일방성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언약을 구상하시고 만드신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양방적 관계를 만드실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언약 관계 안에 두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는 언약을 양방적으로 만드실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합법적인 근본책임의 내용이다. 그렇지 않다면 언약은 창조이전으로 거슬러 가야하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언약을 양방적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은 비록 내가 그와 동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상대방으로 만드셨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시고 상대방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렇게 결정하시고 나를 책임을 가진 상대방으로 창조하셨고 나의 의지를 자극하여 이것을 알게 하시려고 낙원에서 조상 아담 안에서 나에게 선포하셨다. 이렇게 양방이 생긴 것이고 이것은 실재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통해서 언약을 맺는 통상적인 관계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양방통행로이므로 하나님으로 부터 나에게 오는 길이 있고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있다. 언약이 일방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관계에서 일방길( 하나님으로 부터 사람에게로 가는) 만 보고 그 반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방적 언약은 태양이나 봄과 맺어진 것이지 사람하고 맺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독립적 존재로서 독립적 사고를 따라서 행동해야하는 책임 있는 피조물, 즉 인격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라면, 인간의 그런 특성 때문에 언약은 양방길이 되어야 한다. 언약은 두 당사자로서 특징지어진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모든 언약에는 두 부분이 있다고 듣는다. 그 두 부분은 첫째는 약속이고 둘째는 의무이다. 이것은 결혼에서도 그렇다. 젊은이는 처녀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해야 하고 또 처녀에게 약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반대로 처녀는 남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남자가 약속한 것이고 남자가 요구한 약속이다. 갑이 을에게 어떤 것을 약속하고 을은 갑의 약속을 요구할 때, 동시에 을은 갑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갑은 을에게 그것을 약속한다. 이렇게 언약은 양 당사자 사이에 맺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에게 언약은 이렇게 맺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약속하시고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께 요구하게 된다.(시8:1 너의 입을 넓게 열라 내가 그것을 채우리라)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약속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언약은 죽은 것이 된다. 언약은 약속과 요구를 통하여서만 살아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결코 분리하지 않는다. 요즘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길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자녀를 영원부터 택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오직 거기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언약은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있는데 내적인 면이 실제적인 언약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길 언약은 영원한 구원과 선택안의 완전한 선물로서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약속을 그런 식으로 묘사하여 요구를 제거하는 자들은 언약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하길 당신들은 언약을 파괴한다고 한다. 당신들은 사람들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수고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율법을 설교하고 있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언약을 율법의 설교나 도덕 이론으로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혐의는 전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양측이 모두 언약을 파괴하는 셈이다. 약속을 가르치지만 그 바탕에 있는 요구를 제거하는 사람들이나 요구 때문에 약속의 달콤한 소리를 무시하는 사람들 모두가 언약에게 미끄러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붙여놓으신 것을 교회회의 안이든 밖이든 혹은 신학이든, 사람이 흩어버릴 수 없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에 하나님이 언약으로 어떤 것을 약속하셨다면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요구도 하신다. 굴이 껍질 밖에서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속도 요구하는 껍질에서 벗겨질 수 없다. 그 반면에 하나님이 언약에서 결코 헛된 말씀이 아닌 요구를 하셨다면 하나님은 약속도 함께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길 " 나는 여호와니 너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니라" 하시며 이어서 큰 소리로 "너는.. 하라"는 열 가지 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너를 종 되었던 집에서, 억압의 집에서, 매여 있던 땅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부르심을 받는 언약에 대하여 말하길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택자만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 언약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약은 부분, 약속과 요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약속되었을 때, 상대방이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예" 라고 대답해야하는 어떤 것도 요구되는 것이다. 요구하는 사람은 자기 뜻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을 말하거나 기록한다. 어떤 특정한 사람을 선택된 자라고 부르는 때가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세례를 받을 때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요구하신 형식을 따라서 한다.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한 요구를 가진 오직 한 가지 형태의 세례가 있을 뿐이다.
기록되고 선포된 성경 어디에도 선택된 특정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별도의 약속이 없다.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을 섭리하시고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섭리하시며 하나님의 이런 섭리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인 언약의 핵심이다. 그러나 세례 시에 하나님이 선택된 자녀인 특정한 사람과만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세례 시에 하나님이 택하신 특정한 사람에게 언약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선택 안에서 언약을 생각하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약속이나 요구가 없다. 하나님의 계획은 기록되거나 말하여 지지 않는다.
만일 언약이 선택에 의존한다면 언약 자녀는 교회나 성경에서 언약의 자녀로서 그의 자격이 인정된 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택자에 대한 그런 약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기록된 약속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과 약속에 대한 파괴를 보게 된다. 오날날 사람들은 택자에 대한 약속에 대하여 말하고 이것이 실재하는 약속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마치 컴퍼스로 구름의 크기를 재려는 것과 같다. 사람과 세운 언약은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땅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시내산과 호렙에서 요구하셨으며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썼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약속과 요구를 말씀하시고 기록하신다.
사람들이 실제적인 언약의 약속들은 비택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그 약속은 택자와 관련해서만 고려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언약을 파괴하는 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특정한 사람이 특별한 방식으로 택자로 불리는지 나에게 알려 달라. 나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약속되지 않은 어떤 약속도 상상할 수 없으니 그것은 오직 상상일 뿐인 생각이다.
우리의 사고는 약속과 요구가 모든 언약의 두 부분이라는 사실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언약은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세워지는데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 라고 대답하지 않는 자들이 있고 그리하여 그들이 떨어져 나감이 분명해지는 반면에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차별적으로 대우하시는데 칼빈은 이것을 선택과 유기의 두려운 판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나에게 속하는 것이다! 오직 후자만이 언약이고 그래서 모든 신자들과 그 자녀들이 실제적인 언약의 자녀인 것이다.
이방인 자녀에서 언약은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자녀는 언약의 은혜와 요구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그에게 허락되고 약속된 것이며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이미 그의 영원한 소유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람 편에서 또한 어떤 것을 행하여여 한다. 사람에게 조건이 부여된 것이 아닌가? 이것 때문에 최근에 이루어진 연설에 관한 어떤 논문에서 말하길 사람이 충족해야 하는 하나의 조건을 가진 언약에 대한 제3의 관점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나는 조용히 대답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모든 시대의 개혁 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라고 말이다. 언약의 조건에 대한 그들의 교리를 가지고 이런 비판을 한 것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약속은 만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고 ( 내가 말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항론파(알미니우스 주의)처럼 말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항론파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반응하는 것이다! 당신은 조심해야만 한다.
항론파는 사람은 구원의 기초로서 저것을 행하여야 하고 이런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보신다) 우리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고안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내가 "예" 라고 말하게 하시고 나의 믿음도 만드신다. 나에게 오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에게만 온다. 그러나 우리는 조건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요구를-믿음은 첫 번째 요구이다- 충족하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리문답은 첫 번째 계명이 믿음을 요구한 것이고 두 번째도 믿음을, 그리고 세 번째도 믿음을 요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약속과 요구는 매우 밀접하게 함께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명령으로서 " 나는 너에게 약속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 구체적인 조건으로 말씀하시는데 즉각적으로 믿음의 요구가 앞에 제시된다. 약속과 요구는 함께 속한다. 그 둘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조건을 가진 말씀의 형태를 택하신다. 어떤 사람이 선택을 통하여 믿음을 받을 것인지 그리고 그 특정한 사람이 나중에 선택받은 것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선택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전적으로 침묵하시지만 약속과 요구에 대하서는 생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약속 안에 유익들이 있다. 네가 그 약속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너의 것이다.
이 개념들의 순서는 매우 아름답다. 자녀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성령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씻음의 약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그들은 의로움의 권리를 받으며 이제 성령은 그들을 계속적으로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더 열심히 하나님께 "예"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들이 그 관계 속에서 정당하게 배치되도록 하여야 하여 하나님이 조건적 방식으로 말씀하시도록 하여야 한다. 내가 선택 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결코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나의 선택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예" 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언약의 부분들의 통일성과 언약의 상대방의 연합성을 주장한다. 언약은 오직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마치 두개의 언약이 있는 것처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과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의 언약 안에 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규례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 그리스도" 로서 하나님과 친교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타락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하신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사람 편에서 깨뜨린 언약을 유지하시길 원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을 회복하시는 재창조자로서 나타나신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길 " 나는 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언약과 요구를 배반한 형벌을 감당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다시금 영생의 약속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 때문에 죽으셨다. 이점에서 우리는 언약이 두려운 것임을 알게 된다. 골고다에서 언약 배반의 죄가 처벌된 것이다. 그러나 골고다는 영생을 다시 값없이 얻는 권리를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의 두 번째 국면은 은혜언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관계는 남아있다. 첫 번째 아담이후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 로서 하나님과 친구였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 그리스도"로서 첫 번째 아담이후 하나님과 친구인 것이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더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타락 전에 창조주였던 하나님이 이제는 재창조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덕,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의로우신 거래의 덕이 더욱 풍성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정의의 모든 덕 가운데 계시되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고 1944년 교회 회의는 이런 생각을 강행하여 통과 시켰다. "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언약은 오직 친밀하신 하나님을 알 뿐이다.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고 언약을 율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판결이라면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자비하시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언약이 오직 하나임을 알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정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포용하시는 사랑도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을 주시는 정의의 시행으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것이다. 은혜가 몇 퍼센트고 정의가 몇 퍼센트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백퍼센트 은혜이고 백퍼센트 정의이시다. 하나님의 속성을 퍼센트로 계산하려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고 하나님은 백퍼센트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에서 은혜와 정의의 체계를 모두 망라하신다.
타락 후 언약의 두 번째 국면에서 은혜는 더욱 결정적으로 은혜가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이 오시기까지 어떻게 은혜가 세워졌는지 보여준다. 은혜언약은 은혜를 시행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을 더럽히는 자에게 형벌이 더욱 큰 것이다. 심지어 지옥의 형벌이 은혜언약에서 결정된다. 이것은 약속과 요구가 두 부분이기 때문이다. 약속으로 발생하는 것이 있다면 요구로 발생하는 것도 있다. 약속으로 보상의 소망이 온다면 요구로 형벌의 위협이 오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것을 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울 것이다.
언약은 즐거운 말뿐 아니라 무서운 말도 사용한다. 우리는 언약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의 고상한 음악들을 듣지만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천둥소리도 듣는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하늘에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유리 바다에서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유리를 통하여 연기를 보며 연기로 부터 분명히 나타나는 정의 때문에 할렐루야를 또한 외친다. 그들은 약속이 언약의 핵심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은혜의 언약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물론 그렇다고 말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와 그의 약속을 멸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이유이다.
종종 그들은 진노는 구약에서만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온갖 종류의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이스라엘인 시내산에서 시작하였고 언약이 거기서 모세 앞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아담부터 모세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없었는가? 성경은 모세로 부터 시작되지만 진노는 홍수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의 모든 덕이 새 언약을 통하여 계시되었고 그것은 은혜와 진노를 포함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한다.(롬22:20-22, 히10:21-31, 히12:25 을 보라) 우리는 끄시는 상급과 위협하시는 형벌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이 둘은 율법과 복음에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도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에서 나오는 빛으로 그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언약은 창조 후에 사람과의 최초의 교제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언약은 충만하게 발전하여 마지막 날이 이르면 역사의 종국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지옥에서도 언약은 하나님의 통치의 모든 자리에서 보존되고 나타날 것이다. 지옥에는 언약을 배반한 모든 자들이 있을 것이고 거기서도 언약의 배반자로 있을 것이다. 은혜 언약에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채찍으로 맞을 것이고 언약을 거절한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계신다. 법과 질서가 있는 나라에서 감옥이 국가의 수장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그 나라의 수장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것이다. 지옥의 계시에 관해서 조차도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늘과 땅에서 언약은 창조의 흔적과 기억으로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고 능력있게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예"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사람에게 "예"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시다. 영원한 약속과 계속적인 요구가 함께 있을 것이다. 두 부분의 어떤 것도 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언약의 머리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교회와 하나님 자신의 눈 앞에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 시대에 누가 신자이고 그 후손인지 분명할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그리고 약속과 요구의 방식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도 분명하다.
거기에서 언약은 유기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더 악화되고 택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더 크게 될 것이 계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시간 안에서 언약을 수납한 자들에게는 천국으로 들어가면 옛 언약의 조항들 보다 더욱 풍성한 약속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새로운 것은 옛 것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한 말씀을 깨닫게 된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 족하니라." 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너의 창조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너의 재창조자이시다.
언약2- 스킬더
2014-02-12 14:21:57
하나님께서 인간과, 그분의 백성 즉 신자와 그 자녀들과 맺으신 언약을 다룰 때 직면하는 첫 질문중의 하나는 이 언약이 상징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것은 상징적 언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또 우리를 그의 가지들이라고 하실 때 그것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이스라엘의 많은 가지들이 잘려나가고 거기에 우리가 접붙여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에는 아무런 실재가 없다.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언어일 뿐이다. 동일한 것이 언약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지 아니하신다. 그 분은 그러기에는 너무 높이 계시기 때문이다. "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과 역사 내에서 교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일은 하시지만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다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다. 하나님은 초월적이시고 내재적이시지 않다. 하나님은 세상 속으로 들어오실 수 없다 하나님이 내재적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분을 침범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근본 테제는 이것이다.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전5:2) 이에 대하여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또한 하나님은 내재적이 되실 능력이 있으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부인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근본적 오류이다.
언약은 상징적인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언약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많은 상징적인 언어가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자기 자신과 하시는 일을 그에 걸맞은 마땅한 방식으로 결코 말씀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어떤 상징적인 언어도 없이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 이미지를 가지고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은 " 인간은 동물과 소송행위에 들어가지 않으며 노인도 어린아이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동등한 책임 관계를 결여한 두 당사자가 서로 간에 법적인 소송 절차에 들어갈 수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 분은 이것을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편에서 법적인 성격의 관계를 창조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나와 교제의 한 양식을 만드시고 그것을 시작하신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배치이다. 이런 면에서 언약은 단편적(mono-pleuric)이고 일방적(one-sided)이다, 그러나 언약은 또한 양편적(di-pleuric)이고 양방적(two-sided)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명료하고 확고한 약속을 주시며, 또한 명료하고 확고한 요구를 하심으로 인간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반응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어야 하고 또한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은 단지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결론지어 버린다. 그러나 믿는 것은 단지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요구를 받아들이기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항상 명령하시고 지시하시는 바로 그 분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양편적 언약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상권(supermity)에 관한 진리를 왜곡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칼 바르트의 노선을 따르게 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진리를 왜곡시킨다. 누구든지 언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여 양편적 관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이 바뀌신다고 하는 사람은 그 분의 초월성에 관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와 같은 양편적 소통관계를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 인간은 결코 이와 같은 양편적 소통관계를 시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과의 양방적 언약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초월성을 영예롭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두개의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데 디아데케(diatheke)와 쉰데케(suntheke)가 그것이다. 디아데케는 처분, 명령을 의미하는 반면에 쉰데케는 약속, 계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디아데케를 시작하시고 그리고 동시에 쉰데케를 가지신다. 디아데케는 일방적인 면에 쉰데케는 양방적인 면에 관계된다. 우리가 유언을 할 때 이것은 디아데케이지만 친구와 약속을 할 때 그것은 쉰데케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 두 용어가 모두 하나의 언약에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이 두 용어를 주도면밀하게 사용하여 언약은 디아데케로서 등장하지만 쉰데케로서 존재하고 또 지속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편에서 계획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언약의 배치까지도 하시는데 이 때 이것은 디아데케라는 말로 표현된다. 이것이 우리가 유언(testament)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이다. 유언(계획)을 말하는 사람은 또한 유언의 배치자이다. 상속인은 그가 유언을 받아들인 것인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유언을 세우셨을 때 그 때 하나님은 모든 일 하나하나를 자기편에서 배치하신다. 우리 상속자들이 하나님의 배치에 관여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디아데케"로서 배치된다. 하지만 언약은 그 존재와 유지에 있어서는 "쉰데케"로서 양방적이다. 이 양방성 또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묶으시며 또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말씀에 의해 스스로 언약을 지키시는 의무를 감당하신다. 이것의 근거는 나에게나 교회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 분 자신의 말씀을 상기시켜드릴 권리와 심지어 의무까지도 지닌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런 소통은 주 기도문에서 나타나는데 "하늘에 계신" 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고백한다면 동시에 "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언약은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언약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심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언약이 창조 후에 온 까닭에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 종속된다. 하나님은 섭리로써 자신의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 보존하신다는 것은 피조물의 활동력(생명력)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알파는 오메가까지 유지된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유지시키신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가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그의 언약을 유지하시는 방법이다. 다스리신다는 것은 끝을 향한 인도를 의미한다. 이것은 알파에서 오메가로 , 곧 창조의 시작에서 창조의 목적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 하나하나는 새로워진 땅과 하늘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가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언약은 섭리에 복종한다. 하나님은 섭리로써 피조물의 본성과 연관하여 다스리신다. 창조 후에 하나님은 어떤 새로운 사물도 만들지 아니하셨다. 동일한 것이 언약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과 연관되어 섭리하신다. 그런 까닭에 언약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한다.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의 본성과 연관되어 섭리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언약 안에서 살 때 자연적인 방식으로 사는 이유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언약 내에서 만족하게 살 수 있고 언약은 우리의 성품을 더 발전시킨다. 마치 결혼이 이미 존재하는 것들 즉 남자와 여자가 함께 가며, 그리하여 이 양자를 더 발전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도 그러하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은 언약 안에서 아무런 발전을 겪지 아니하신다. 언약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뿐이다. 언약은 인간 본성과 함께 간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간 존재로 즉 인간의 본성과 책임에 따라서 다루신다. 이것은 타락 전 낙원에서도 그랬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 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만든다. 그들은 노동(행위)의 노래를 부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라는 승리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 은혜언약은 은혜의 문제이고 그 이상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언약을 언약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언약은 항상 우리의 인간됨, 우리의 성품 및 책임과 함께 간다. 이런 관점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대조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낙원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호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낙원에서 조차 인간은 어떤 것도 행위의 노력으로 얻지 않았다. 아담은 자기의 생명을 행위를 이유로 해서가 아니라 행위들을 거쳐서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행위언약에서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행위로 얻을 수 있었다고 결코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자기 행위의 대가로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하는 것과 버는 것의 상호작용이 있다. 한 편이 지불한 임금은 다른 편의 노동 행위를 상쇄시킨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불하시는 임금과 조금도 균형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하는 손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감사제물과 희생제물을 창조하셨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없다. 행위 언약 안에 우리가 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은혜 언약 안의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벌어주신 것이다. 두 가지 경우(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모두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다. 은혜 언약에서 우리는 구원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얻는다. 그리스도는 이 공로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서 얻어내셨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로 부터 아무 것도 버실 수 없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 덕에 얻는 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하지만 "인간 책임과 함께 가기" 와 "인간 책임에 주어진 호소" 는 여전히 은혜 언약 안에 있다. 왜냐하면 언약은 언약으로 남기 때문이다.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대조가 아니라 동일한 언약 역사의 다른 단계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죄로 넘어질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도 아셨다. 그래서 아담이 언약을 깨뜨렸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초월적인 분으로 계시하셨고 새로운 디아데케를 통하여 그가 이미 영원한 회의(평화회의)에서 결정하셨던 것, 즉 자신의 언약을 이제는 은혜 언약으로 유지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 언약의 중보자로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두 경우 모두(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계속 교제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한량없이 크시므로 우리가 신실하지 않게 되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신실한 분으로 남으신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지이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언약의 머리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의 회의의 결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평화회의와 은혜언약을 혼동하게 되고 영원과 시간을 마구 뒤섞게 된다. 평화회의는 영원으로부터이지만 은혜 언약은 시간상의 문제이다. 전자에서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 간에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시지만 후자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된다. 평화회의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지만 은혜 언약은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다.
언약은 낙원에서 시작되었고 그 때 언약은 보편적이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아브라함의 집안으로 제한하셨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역사에서 특별한 기능, 즉 열방의 아버지가 되는 특별한 기능을 받았는데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나시게 되었다. 단 하나의 나라가 때가 차고 오순절 날이 이르기까지 구원 흐름의 기층이 되어야 했고 오순절 날이 이르면 모든 신자들이 그 자녀들과 함께 언약 속으로 결합되어 질 것이다. 언약의 지속적인 목표는 우주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어떤 새로운 언약이 아니었고 비록 새로운 형태였지만 여전히 낙원 시절의 언약과 동일한 옛 언약이었다. 이것이 우리 개혁신앙의 선조들이 말한 바, 언약은 오직 하나의 본질을 가지며 그것은 여러 경륜 시대에서 도일하게 남는다는 그것이다. " 약속과 요구" 및 "순종의 경우 축복, 언약 파기의 경우 처벌"이라는 제재 규정은 언약사의 모든 단계 국면에서 유지된다. 언약의 이런 법적인 틀과 제재규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런 법적인 틀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은 성령의 직분(officium)에 대하여 말하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직분은 단지 피조물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 자신이 어떤 것을 정하실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직분을 주실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약 속에서 한번 약속하신 것을 행하시도록 자신들을 그 약속에 묶으신다. 더욱이 이것은 계시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법적인 틀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적용된다. 오직 타락 이전에만 선택과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부터 구별하셨다는 의미에서만 동시 발생하였다. 그 때 모든 언약 회원들이 책자였고 오직 택자만이 언약 회원들이었다. 하나님이 책임 있는 피조물인 인간을 택하시어 그와 함께 언약 관계 속에서 살게 하셨다는 바로 그 때문에 상황은 타락 후에도 동일하다. 타락후에도 하나님은 책임성을 가지고 있으나 " 저는 못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동일한 제재 규정을 말씀하신다. 제재 규정 속에서 작동하는 언약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언약은 그 본질과 관련되는 한 동일한 까닭에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는 아무런 대조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회에는 이러한 대조가 있다. 이런 경향은 다음과 같이 말한 코케이우스(Coccejus)와 함께 시작되었다. " 이스라엘은 문자를 가졌고 우리는 영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졌고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언약은 외적(할례)이었고 우리에게 언약은 내적(선택)이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는 중생에 의해 언약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율법과 복음사이에 대조를 만드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율법 안에도 복음이 있다. " 나는 야훼 너희 하나님이다" 율법을 받은 민족은 종 되었던 집에서 구원 받은 민족이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가는 훈육선생(Pedagogue), 후견인(tutor)이다. 미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 내 백성아, 너희는 어떻게 내가 율법으로 너희를 피곤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느냐?"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를 피곤하게 하지 않으신다. 율법의 목표는 복음적이다. 율법의 최종 결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요청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복음의 깃발아래 살고 있었던 이유이다. 돛대 사이로 부는 바람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바람이었다. 새 경륜의 시대는 옛 경륜 아래 숨겨져 있었다. (언약 역사는) 전진하는 발전, 곧 보다 못한 것에서 보다 나은 것으로의 발전이었다. 모든 옛 언약은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전진하고 있다. 그 때 이미 언약의 유익들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믿음으로 받는 칭의와 성화였다. 모세가 단지 문자의 경륜만을 가졌다면 언약은 얼마나 그에게 지극히 빈곤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옛 경륜과 새 경륜 사이에는 아무런 대조도 없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는 (원리)는 새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설령 이 말들이 아담에게 적용되었듯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새 경륜 시대에 언약의 저주는 폐지되지 않았다. 로마서 11:20-22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며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과 히브리서 12: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을 읽으라. 하나님은 여전히 매듭(thumbscrews)을 한층 더 꽉 쥐고 계시다! 새 언약에서 모든 것 하나하나는 상과 처벌을 포함하여 옛 언약에서 보다 더 강력하다. 우리에게는 범법에 대한 처벌이 아브라함에게 보다 더 무겁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녀들과 함께 언약 안에 설 때, 우리는 아이들이 성인과 동일한 수준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아이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의식적인 다른 한편(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문자로 한편(PARTY)이라고 말하고 사람을 소문자로 한편(party)라고 말한다면 아이는 따옴표에 묶인 "다른 한편"("party") 가 될 것이다. 아이가 세례 받을 때에 아이는 "다른 한편" 이 된다. 다른 한편 됨의 배치아래 놓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직 명료하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명료화는 아이의 신앙고백에서 일어난다. 그 때 전 회중 앞에서 아이는 잘 의식한 채로 쌍 따옴표를 벗어내고 하나님의 다른 한편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물들을 이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는 언약 안에서 강한 위안을 발견한다. 만약 내가 택자들 중에 속했는지 여부를 먼저 알아야 한다면 그 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들 내부에서 선택의 표지를 찾아야 한다. 이 때 우리에게 위안은 없다. 닻을 강바닥이 아니라 선창에 내린다면 배는 제대로 정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닻을 야훼의 보좌로 깊이 내려야 한다. 언약은 시간 내에서 세워졌다. 하지만 언약은 영원에 머문다. 이제 그것은 그 안식에 닿을 것이다. 거기서도 언약의 지배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는 택자들의 언약적 교제가 계속될 것이고 또 지옥에서도 그 지배가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지옥은 언약에 의해 특징져질 것이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C.S.Lewis의 글에 드러나는 (신)플라톤주의-손성은 (0) | 2023.05.21 |
---|---|
그리스도와 문화- 스킬더 (0) | 2023.05.17 |
연속적 중생론 (0) | 2023.05.17 |
회심 이야기- 손성은 (0) | 2023.05.17 |
세 분 한 하나님- 손성은 (0) | 2023.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