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서 해방된 교회- 박득훈
2019-02-08 15:46:00
돈에서 해방된 교회- 박득훈
프롤로그
이 책은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 맘몬 숭배가 있다는 점 그리고 맘몬은 자본주의를 매개로 삼아 한국 교회 안으로 깊이 잠입해 들어와 있다는 점을 천착하여 회생의 길을 모색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나는 교회 개혁운동의 한 모퉁이를 감당해오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비극적 실상을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암세포 같은 맘몬이 자본주의의 등 뒤에 숨어 교회 안으로 잠입해 들어와 여기저기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 개혁이 어려운 것은 막상 암에 걸려있는 교회들이 아직도 그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부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한국 교회를 흔들어 왔는지를 살펴본 후에 2부에서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배후세력인 맘몬에게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성찰한다. 1장이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설명한다면 2장은 자본주의가 교회 안에 잠입해 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짚어본다. 이어서 3장과 4장에서는 각각 뒤틀린 신앙의 모습과 교회의 부패성을 다룬다. 그리고 5장에서는 돈의 본질과 정체를 규명하고 맘몬을 이기기 위해서는 참된 구원을 경험해야 함을 밝힌다. 6장에서는 맘몬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제 문제들이 사실은 믿음의 문제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경제문제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반드시 정의로운 경제적 실천으로 표현되어야만 맘몬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실천의 핵심 기준이 정의와 공의임을 밝힌다.
1장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본회퍼는 값싼 은혜와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서로 친화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했으며, 쟈크 엘룰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교회가 자주 주변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정치. 경체 체제와 밀착하는 바람에 기독교 진리가 뒤틀려온 사실에 주목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본회퍼와 엘룰의 진단이 오늘 대다수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세밀하게 도려내는 뼈아픈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해방이후 미국의 영향아래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후 국가주도 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단계를 거쳐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확실하게 신자유주의에 편입되었고 2012년 한미FTA가 발효되면서 그 체제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자본주의의 기저에는 경제를 자본과 자본이 지배하는 자유시장이 주도하도록 가만히 놔눌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절대적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정의, 경제 민주화 등의 이름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협하거나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본주도하의 시장이 정치, 사회, 문화영역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있는데 첫째는 남북분단의 비극적 역사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선 자본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 자본, 학계, 언론의 동맹세력들은 이 트라우마를 악용해 왔다.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 비판이 더 어려운 둘째 요인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다양한 오류들로 인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롯한 진보적 사조와 사회과학적 분석에 대한 냉소가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이 주장하듯이 마르크스 이론은 현재 자본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해고 극복해 나가는데 여전히 유효적절한 이론이다.
주류 경제학에선 통상적으로 자본을 토지, 노동과 더불어 기본적 생산요소로 간주하면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협상력의 비대칭적 관계,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억압과 착취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생산요소는 시장의 자유롭고 공정한 작동의 결과로 생산에 기여한 바에 따라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그 대가로 자본은 이윤을, 토지는 지대를, 노동은 임금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 혹은 진보적 경제학은 자본을 비판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자본에 의해 구매되고 고용되는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했으며 그런 변화가 확대되는 역사적 과정은 강제와 폭력이 동반된 유혈적 과정이었음을 주목한다. 얼핏 보면 주류경제학의 자본에 대한 이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반면, 진보적 경제학의 자본에 대한 이해는 노동자 편을 드는 당파적 관점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전자를 수용하는 경향이 많지만 문제는 전자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주류경제학의 문제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협상력의 엄청난 차이를 외면하거나 은폐한다는데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은폐한 채, 자본의 긍정적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의 관점이야말로 사실 보다는 이념적 편향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류경제학은 대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이다. 주류경제학은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을 상정하는데, 그 개인은 언제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른 바 경제적 인간이다. 주류경제학에서 자본주의 경제란 각 개인이 시장에서 결정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통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경제다. 그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의 합리성은 경제 전반에 그대로 전가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류경제학자들 은 수많은 경제정보들을 가장 합리적으로 처리해주는 시장만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진보적 경제학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경제라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갈브레이스는 시장체제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명명하는 것은 자본권력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진보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인간성을 보존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래서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경제학은 경제적 개인에서 출발하지 않고 각 개인들이 처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체적 현실, 즉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비대칭적인 사회적 관계에 주목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노동가치설, 잉여가치설 그리고 자본주의 위기론이다. 첫째로 노동가치설은 생산수단으로서 자본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오직 노동자가 직접 수행하는 노동만이 상품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이다. 사용가치가 전혀 다른 두 상품이 화폐를 매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두 상품에 무언가 공통적인 속성이 담겨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상품의 가치다. 상품의 가치는 바로 그 상품을 생산해내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노동가치설의 핵심이다. 둘째로 잉여가치설은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함으로써 자본을 더 축적해나간다는 이론이다. 노동자는 상품 생산을 통해 자신이 창출해낸 총가치보다 적은 대가를 임금으로 받는데 총가치에서 임금을 제하고 남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은 노동이 실제로 창출해 낸 총가치보다 반드시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이윤을 남기지 못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본주의 위기론인데 그 핵심에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과 경기순환이 가중되는 혹독성이 있다. 자본가들은 이윤 창출과 자본축적을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드는데 문제는 경쟁으로 이윤율이 저하되고, 미래 예측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경기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함으로써 심각한 공황을 피할 수 없다는데 있다.
자본주의 정신이 주도하기 전에 사람들은 경제적 취득 차제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선이었고, 경제적 취득활동이란 그 공동선을 실현해나가는데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적 취득활동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격상되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수단을 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런 정신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한 사람이 애덤 스미스다. 그는 시장에서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신을 도덕철학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정당화해주었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 다루는 분야를 인위적 덕(타인의 사적 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계약을 어기지 않는 것을 정라고 간주하는 덕)에 국한시키고, 인위적 덕을 해치지 않는 한 자신의 사적 소유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적 활동을 도덕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각 개인은 사회적 이익을 직접 증진시키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증진하게 되며, 그 과정을 이끄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정신은 강력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의 극대화와 공익의 극대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의 창출에 매료된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창출을 경배하는 맘몬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돈의 신, 맘몬이다. 테리 이글턴은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본질 때문에 언제나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인간의 궁극적 성취와 충족이 간편하게 이루어진다고 믿고 산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는 소비욕망이 자본에 의해 부추겨지고, 정치의 목적도 공공선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에 있지 않고 오로지 총량적 경제성장에 있게 된다. 이런 가치와 태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정의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된다. 본질적으로 맘몬 숭배의 기초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두 가지 심각한 병폐를 낳는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긍정하면서 아무런 고통이나 갈등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마르크스는 이런 종교를 가리켜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 심장을 잃은 세계의 감성, 곧 민중의 아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필자는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진보적 경제학이 무오하다거나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바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의 비판적 입장이 주류경제학의 긍정적 입장보다 하나님나라 관점에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총량적 성장과 효율성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총량적 효율성을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경제의 총량적 성장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경제적 권익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총량적 성장이나 효율성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승리가 보장된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상승이 불가능한 계층에게는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강조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을 상대적으로 더 지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 무비판적 긍정을 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2장 자본주의, 교회에 잠입하다.
자본주의가 한국 교회 속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은 무척 애통한 일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백성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주변문화와 바알숭배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곤 했다. 신약 시대 교회에서도 부당하게 부를 축정하는 부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시대정신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한국 교회 안으로 잠입해 들어오게 된 역사적 맥락을 다음 세 가지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맥락은 일제의 억압 그리고 분단시대에 확산되어온 냉전적 사고다. 한국 개신교회 초기에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비정치적이었고 기독교인의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에서 애굽을 보았고 자신들의 처지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중추적 역할을 했던 3.1 운동의 실패를 기점으로 교회의 정치참여 의식은 쇠퇴하고, 대신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좌절, 일본의 회유정책, 비정치적 선교사들의 영향 그리고 정치신학의 부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46년 미군정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가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후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를 향해 질주하게 된 것인가? 그 중심에는 해방 후 득세한 친일세력과 월남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해방 후에 친일세력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득세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을 강화한 사람들이 바로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이다. 북한 공산주의에게 재산을 강탈당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은 남한에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미군정으로부터 일본이 두고 간 막대한 종교자신을 무상으로 공여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남한에서 친미와 반공주의를 강화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남한 개신교의 반공, 친미, 친자본주의적 태도는 결정적으로 공고화되었다.
둘째 맥락은 기독교인의 중산층화와 교회의 사회적 신분상승이다. 군부독재개발 시절, 가난과 안보불안에 시달리던 이들이 위로와 소망을 찾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들의 정신적,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설교로 부응했고, 그 결과 사회정의와 무관한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신앙과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는 기복주의 신앙을 심어주었다. 그런 신앙은 국가주도 자본주의하에서 이루어지던 불균형 압축성장과 잘 어울러졌고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초창기와는 달리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분은 전체적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교회 안에서 중상류층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실질적 주도권을 가진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반공, 친미, 친자본주의로 규정되는 기존 체제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연히 체제의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기존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 정교분리 원칙을 들어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저지하다가도, 기존체제의 유지, 강화를 위해서라면 종교행사로 가장한 정치적 행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셋째 맥락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잠정적 승리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 현실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과 구소련의 몰락을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마치 역사적 진화의 최종단계인 것처럼 미화되고 찬양되기 시작했다. 물론 현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더구나 2007년-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절대적 신봉에 금이 가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불완전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일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이런 세계적 흐름과 사고에 매료되고 압도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한국경제가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에 편입해 짧은 시간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경험했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정치, 경제 구조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게 됨으로써, 한국 교회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3장 뒤틀린 신앙
기복신앙은 사랑의 두 계명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성경을 뒤트는 해석
자본주의 정신은 맘몬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불어 넣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왜곡하므로 맘몬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성경을 잘못 읽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귀는 맘몬으로 행세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도록 부추긴다.
짐월리스가 회심이후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을 언급한 구절이 구약은 수천구절, 신약은 전체의1/16이나 되는 방대한 양에 놀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 교회에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을 보고는 이런 내용을 뺀 성경을 구멍난 성경이라고 외치면서 << 가난과 정의의 성경>>이라는 제목의 성경을 출판했다.
2) 기복신앙에 빠진 한국교회
기복신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앙인에게 경제적 필요를 넘어 경제족 풍요를 반드시 제공하신다고 가르친다. 맘몬을 섬기는 탐욕의 복음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빌어주고 축하헤주는 목사들을 은혜로운 목회자라며 잘 따르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의 일부를 목회자들과 함께 나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과 구벽하기 힘든 존재로 전락해 그 안에 썩은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3) 축복의 복음
순복음교회 신앙의 핵심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문제점은
첫째- 하나님이 약속하신 물질적 축복은 신앙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인데 축복의 복음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과 물질적 축복의 관계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필연적인 함수관계로 규정함으로써 기복신앙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고후8장9절의 오독: 주님이 가난해진 이유가 우리를 부요케함이라 주장한다. 이는 1-15절 전체맥략으로 볼 때 , 고린도성도들도 마케도니아 교회성도들처럼 그 은혜에 동참하여 스스로 가난해짐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헤 연보하도록 독려한 내용의 왜곡이다.
요한3서2절에 대한 오독 : 삼중축복의 말씀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인류는 영적,환경적, 육체적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도요한이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로 격려하는 차원으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의 덕담일 뿐이다. 반드시 실현되는 신학적 명제는 결코 아닌 것이다.
4) 야베스의 기도
윌킨슨의 이 기도문에 대해 “주님이 우리에게 부와 근심없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설명이 일종의 기복신앙으로 볼 수 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최후심판이 이루어질 때에야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 또한 윌킨슨은 기도와 기복신앙을 연결시킨다. 회개와 기복신앙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야베스의 기도에 담긴 진정한 뜻은 억압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 인간의 존엄성과 적절한 품위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이 기도는 정의를 위한 기도이지 단순히 그의 유익을 위한 기복신앙의 기도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정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5) 깨끗한 부자론
깨끗한 부자론은 물질적 성공을 축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은사로 간주한다. 깨끄한 부자는 소유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행복을 얻는 획득한 부를 34.8% 십일조로 하나님몫, 가난한 이웃을 위해(24.8%)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부를 누리며 사는 것을 신앙적,신학적으로 정당화해주면서 그런 삶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이상형으로 제사한다면 그것 또한 기복신앙의 범주에 속한다. 깨끗한 부자론은 매우 높은 수준의 나누고 베푸는 삶을 강조하지만 바로 r mwja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 요소를 강화시킨다. 또한 기복신앙처럼 승리주의를 옹호함으로써 다양한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6) 긍정의 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의 문제점들은 첫째, 복음을 믿는데 진실한 회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점을 약화시킨다.
둘째, 복음이란 희망과 자기계발에 돠한 설득력 있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복음을 효과적인 심리치유법과 처세술로 제시하는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의 핵심적 본질이다.
셋째, 성경중심은 정치와 주요 정책관느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중심에 있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적,경제적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해가는 사회적 책임을 요청한다.
베푸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령에서 성공을 누리는 삶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주변적 장식요소로 전락한다.
또한 오스틴은 자신의 입장을 성경으로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너무 쉽게 비틀고 왜곡한다.
7) 반쪽 진실의 힘
엡2:8-10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힘써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구제와 나눔이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불의한 구조와 제도에 저항하여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주는 일까지 포함된다.(사9:1-7, 마4:12-16) 교만한 맘몬이 인간의 탐욕을 자극헤 은혜와 믿음을 교묘히 왜곡시켜왔다.
은혜는 원래 아주 비싼 것인데, 값싼 것으로 만들었고 ,믿음은 원래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데 죽여버렸다. 믿음은 그저 머리로 복음에 동의하는 것일 뿐, 믿음에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는 무관해져버렸다. 은혜나 믿음이나 다반쪽 진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8) 값싼 은혜
종교개혁 당시 은혜를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다. 독생자를 희생하는 가치이다.
둘째 , 은혜는 은혜 입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따르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값비싼 것이다. 본회퍼는 루터가 경험한 은혜는 이러한 값비싼 은혜였다고 말하면서 그 뜻을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목숨으로 받은 은혜에 걸맞는 , 선한 삶의 투쟁으로 살아 내는 제자도를 가르쳐주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 특히 한국교회가 너무나 쉽고 싸구려로 이 비싼 은혜를 만들어 버렸다. 본회퍼에게 값싼 은혜란 용서받은 것만 강조하고 용서받은 자의 윤리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 당시 루터교회는 명목상 기독교 국가로 전환시켜준 대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본질을 팔아넘겼다.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지금 주류의 한국교회도 똑같은 모습이다. 성장에만 주력하다보니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은혜와 믿음에만 매달리다 보니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9) 죽은 믿음
종교개혁의 또 다른 슬로건 ‘오직 믿음으로’가 담고 있던 진정한 의미가 맘몬의 유혹에 이끌린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퇴색되어왔다. 산믿음이 죽은 믿음으로 대체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웃사랑의 실천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사회로부터 지탄과 경멸의 대산으로 전락해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믿음으로의 회복이 시급하다.
마틴루터가 주장한 , 중세 교회의 공로사상과 그로인한 부패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의 참뜻은 인간의 부패로 부터의 구원은 어떠한 선행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오직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자신이 의로워질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맥그라스가 이를 정리하여 ‘의롭게 해주는 믿음’의 본질을 명확히 설명해준다.
첫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고백이며
둘째 - 믿는 바에 근거해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뢰이며,
셋째 –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자연스럽게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박에 없게 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믿음은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이다.
루터를 비롯해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산 믿음이야말로 맘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산 믿음은 더 이상 수도원에 갇혀 있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삶으로 표현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결론 ) 맘몬이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삶과 산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삶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맘몬은 자본주의의 배후에 숨어서 산 믿음을 공략해온 것이다.
마침내 산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변질시키는데 한국교회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맘몬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경해석을 교묘히 뒤틀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이고 순수한 사랑에서 떠나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웃을 행한 진실한 사랑의 실천에서 떠나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이런 뒤틀린 신앙이 교회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부패시켰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봅니다.
《돈에서 해방된 교회》- 박득훈
2019-04-08 01:33:00
프롤로그
이 책은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에 맘몬 숭배가 있다는 점 그리고 맘몬은 자본주의를 매개로 삼아 한국 교회 안으로 깊이 잠입해 들어와 있다는 점을 천착하여 회생의 길을 모색해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나는 교회 개혁운동의 한 모퉁이를 감당해오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비극적 실상을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치명적인 암세포 같은 맘몬이 자본주의의 등 뒤에 숨어 교회 안으로 잠입해 들어와 여기저기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 개혁이 어려운 것은 막상 암에 걸려있는 교회들이 아직도 그 심각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부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한국 교회를 흔들어 왔는지를 살펴본 후에 2부에서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배후세력인 맘몬에게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성찰한다. 1장이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설명한다면 2장은 자본주의가 교회 안에 잠입해 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짚어본다. 이어서 3장과 4장에서는 각각 뒤틀린 신앙의 모습과 교회의 부패성을 다룬다. 그리고 5장에서는 돈의 본질과 정체를 규명하고 맘몬을 이기기 위해서는 참된 구원을 경험해야 함을 밝힌다. 6장에서는 맘몬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제 문제들이 사실은 믿음의 문제임을 확실히 인식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는 경제문제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반드시 정의로운 경제적 실천으로 표현되어야만 맘몬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실천의 핵심 기준이 정의와 공의임을 밝힌다.
1부 교회를 뒤틀어온 자본주의
1장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와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가치가 서로 친화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했으며, 쟈크 엘룰은 교회사 이천년 동안 교회가 자주 주변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정치ㆍ경체 체제와 밀착하는 바람에 기독교 진리가 뒤틀려온 사실에 주목했다. 슬프게도 우리는 본회퍼와 엘룰의 진단이 오늘 대다수 한국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참된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세밀하게 도려내는 뼈아픈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해방이후 미국의 영향아래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후 국가주도 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단계를 거쳐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확실하게 신자유주의에 편입되었고 2012년 한미FTA가 발효되면서 그 체제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자본주의의 기저에는 경제를 자본과 자본이 지배하는 자유시장이 주도하도록 가만히 놔눌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절대적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정의, 경제 민주화 등의 이름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협하거나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자본주도하의 시장이 정치, 사회, 문화영역까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끊임없이 추구한다.
자본주의 이해의 걸림돌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있는데 첫째는 남북분단의 비극적 역사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선 자본과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종북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정치, 자본, 학계, 언론의 동맹세력들은 이 트라우마를 악용해 왔다.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하기는커녕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 비판이 더 어려운 둘째 요인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다양한 오류들로 인해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롯한 진보적 사조와 사회과학적 분석에 대한 냉소가 한국 사회에서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이 주장하듯이 마르크스 이론은 현재 자본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해고 극복해 나가는데 여전히 유효적절한 이론이다.
자본을 보는 두 가지 시각
주류 경제학에선 통상적으로 자본을 토지, 노동과 더불어 기본적 생산요소로 간주하면서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협상력의 비대칭적 관계,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억압과 착취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생산요소는 시장의 자유롭고 공정한 작동의 결과로 생산에 기여한 바에 따라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그 대가로 자본은 이윤을, 토지는 지대를, 노동은 임금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 혹은 진보적 경제학은 자본을 비판적 관점으로 이해한다.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자본에 의해 구매되고 고용되는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했으며 그런 변화가 확대되는 역사적 과정은 강제와 폭력이 동반된 유혈적 과정이었음을 주목한다. 얼핏 보면 주류경제학의 자본에 대한 이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반면, 진보적 경제학의 자본에 대한 이해는 노동자 편을 드는 당파적 관점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전자를 수용하는 경향이 많지만 문제는 전자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주류경제학의 문제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협상력의 엄청난 차이를 외면하거나 은폐한다는데 있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은폐한 채, 자본의 긍정적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의 관점이야말로 사실 보다는 이념적 편향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주류경제학은 대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이다. 주류경제학은 복잡한 자본주의 경제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을 상정하는데, 그 개인은 언제나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른 바 경제적 인간이다. 주류경제학에서 자본주의 경제란 각 개인이 시장에서 결정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통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경제다. 그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의 합리성은 경제 전반에 그대로 전가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류경제학자들 은 수많은 경제정보들을 가장 합리적으로 처리해주는 시장만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진보적 경제학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경제라는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갈브레이스는 시장체제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명명하는 것은 자본권력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진보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참된 인간성을 보존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래서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경제학은 경제적 개인에서 출발하지 않고 각 개인들이 처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체적 현실, 즉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비대칭적인 사회적 관계에 주목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노동가치설, 잉여가치설 그리고 자본주의 위기론이다. 첫째로 노동가치설은 생산수단으로서 자본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오직 노동자가 직접 수행하는 노동만이 상품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이다. 사용가치가 전혀 다른 두 상품이 화폐를 매개로 일정한 비율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두 상품에 무언가 공통적인 속성이 담겨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상품의 가치다. 상품의 가치는 바로 그 상품을 생산해내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노동가치설의 핵심이다. 둘째로 잉여가치설은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함으로써 자본을 더 축적해나간다는 이론이다. 노동자는 상품 생산을 통해 자신이 창출해낸 총가치보다 적은 대가를 임금으로 받는데 총가치에서 임금을 제하고 남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노동력의 가치 즉 임금은 노동이 실제로 창출해 낸 총가치보다 반드시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은 이윤을 남기지 못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본주의 위기론인데 그 핵심에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과 경기순환이 가중되는 혹독성이 있다. 자본가들은 이윤 창출과 자본축적을 위해 치열한 경쟁에 뛰어드는데 문제는 경쟁으로 이윤율이 저하되고, 미래 예측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경기가 호황과 불황을 반복함으로써 심각한 공황을 피할 수 없다는데 있다.
맘몬 숭배, 자본주의의 정신
자본주의 정신이 주도하기 전에 사람들은 경제적 취득 차제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선이었고, 경제적 취득활동이란 그 공동선을 실현해나가는데 물질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적 취득활동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격상되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수단을 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런 정신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게 한 사람이 애덤 스미스다. 그는 시장에서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신을 도덕철학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정당화해주었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 다루는 분야를 인위적 덕(타인의 사적 재산을 침해하지 않고 계약을 어기지 않는 것을 정의라고 간주하는 덕)에 국한시키고, 인위적 덕을 해치지 않는 한 자신의 사적 소유와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적 활동을 도덕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각 개인은 사회적 이익을 직접 증진시키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증진하게 되며, 그 과정을 이끄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정신은 강력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의 극대화와 공익의 극대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이기심과 이타심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의 창출에 매료된 자본주의 사회는 부의 창출을 경배하는 맘몬 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처럼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돈의 신, 맘몬이다. 테리 이글턴은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본질 때문에 언제나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인간의 궁극적 성취와 충족이 간편하게 이루어진다고 믿고 산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는 소비욕망이 자본에 의해 부추겨지고, 정치의 목적도 공공선이나 사회정의의 실현에 있지 않고 오로지 총량적 경제성장에 있게 된다. 이런 가치와 태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정의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된다. 본질적으로 맘몬 숭배의 기초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라는 두 가지 심각한 병폐를 낳는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긍정하면서 아무런 고통이나 갈등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마르크스는 이런 종교를 가리켜 “억압된 피조물의 한숨”, 심장을 잃은 세계의 감성, 곧 민중의 아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진보적 경제학이 무오하다거나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는 바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의 비판적 입장이 주류경제학의 긍정적 입장보다 하나님나라 관점에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총량적 성장과 효율성을 설명하는데 주력하는 반면,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억압과 착취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총량적 효율성을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경제의 총량적 성장보다는 사회적 약자의 경제적 권익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총량적 성장이나 효율성을 강조하는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승리가 보장된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상승이 불가능한 계층에게는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강조하는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통을 당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경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마르크스 경제학과 진보적 경제학을 상대적으로 더 지지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 무비판적 긍정을 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2장 자본주의, 교회에 잠입하다
고흐의 아픈 경험
자본주의가 한국 교회 속으로 잠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은 무척 애통한 일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백성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주변문화와 바알숭배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유혹에 넘어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곤 했다. 신약 시대 교회에서도 부당하게 부를 축정하는 부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시대정신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과거 미 상원의회에서 사역했던 리처드 헬버슨 목사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사람들의 교제모임이었다. 그러나 그 후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고, 로마로 옮겨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다음에 유럽으로 넘어가서 문화가 되었다.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때, 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역사적 맥락
자본주의가 한국 교회 안으로 잠입해 들어오게 된 역사적 맥락을 다음 세 가지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맥락은 일제의 억압 그리고 분단시대에 확산되어온 냉전적 사고다. 한국 개신교회 초기에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비정치적이었고 기독교인의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에서 애굽을 보았고 자신들의 처지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중추적 역할을 했던 3.1 운동의 실패를 기점으로 교회의 정치참여 의식은 쇠퇴하고, 대신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좌절, 일본의 회유정책, 비정치적 선교사들의 영향 그리고 정치신학의 부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1946년 미군정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당시 남한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선호가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후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를 향해 질주하게 된 것인가? 그 중심에는 해방 후 득세한 친일세력과 월남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해방 후에 친일세력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득세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을 강화한 사람들이 바로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이다. 북한 공산주의에게 재산을 강탈당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는 이들은 남한에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미군정으로부터 일본이 두고 간 막대한 종교자신을 무상으로 공여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남한에서 친미와 반공주의를 강화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 남한 개신교의 반공, 친미, 친자본주의적 태도는 결정적으로 공고화되었다.
둘째 맥락은 기독교인의 중산층화와 교회의 사회적 신분상승이다. 군부독재개발 시절, 가난과 안보불안에 시달리던 이들이 위로와 소망을 찾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들의 정신적,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설교로 부응했고, 그 결과 사회정의와 무관한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신앙과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는 기복주의 신앙을 심어주었다. 그런 신앙은 국가주도 자본주의하에서 이루어지던 불균형 압축성장과 잘 어울러졌고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초창기와는 달리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분은 전체적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형편이 이렇다보니 교회 안에서 중상류층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실질적 주도권을 가진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반공, 친미, 친자본주의로 규정되는 기존 체제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연히 체제의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기존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 정교분리 원칙을 들어 기독교인들의 행동을 저지하다가도, 기존체제의 유지, 강화를 위해서라면 종교행사로 가장한 정치적 행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셋째 맥락은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잠정적 승리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 현실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과 구소련의 몰락을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마치 역사적 진화의 최종단계인 것처럼 미화되고 찬양되기 시작했다. 물론 현 자본주의 체제가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더구나 2007년-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절대적 신봉에 금이 가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불완전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일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이런 세계적 흐름과 사고에 매료되고 압도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한국경제가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에 편입해 짧은 시간에 기적적인 압축 성장을 경험했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정치, 경제 구조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게 됨으로써, 한국 교회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3장 뒤틀린 신앙
성경을 뒤트는 해석
자본주의 정신은 맘몬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에게 불어 넣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을 왜곡하므로 맘몬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성경을 잘못 읽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귀는 맘몬으로 행세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도록 부추긴다. 짐 월리스가 회심이후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책임을 언급한 구절이 구약은 수천 구절, 신약은 전체의 1/16이나 되는 방대한 양에 놀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을 보고는 이런 내용을 뺀 성경을 구멍난 성경이라고 외치면서 《가난과 정의의 성경》이라는 제목의 성경을 출판했다.
기복신앙에 빠진 한국교회
기복신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앙인에게 경제적 필요를 넘어 경제적 풍요를 반드시 제공하신다고 가르친다. 맘몬을 섬기는 탐욕의 복음이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성공을 빌어주고 축하해주는 목사들을 은혜로운 목회자라며 잘 따르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의 일부를 목회자들과 함께 나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과 구별하기 힘든 존재로 전락해 그 안에 썩은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축복의 복음
순복음교회 신앙의 핵심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문제점은 첫째, 하나님이 약속하신 물질적 축복은 신앙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인데, 축복의 복음은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한다. 둘째, 믿음과 물질적 축복의 관계를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필연적인 함수관계로 규정함으로써 기복신앙으로 유도한다. 고후 8:9의 오독: 주님이 가난해진 이유가 우리를 부요케함이라 주장한다. 이는 1-15절 전체 맥락으로 볼 때, 고린도 성도들도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처럼 그 은혜에 동참하여 스스로 가난해짐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하도록 독려한 내용의 왜곡이다. 요한3서 2절에 대한 오독: 삼중축복의 말씀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인류는 영적, 환경적, 육체적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도요한이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로, 격려하는 차원으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의 덕담일 뿐이다. 반드시 실현되는 신학적 명제는 결코 아닌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
브루스 윌킨슨의 이 기도문에 대해 “주님이 우리에게 부와 근심없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설명이 일종의 기복신앙으로 볼 수 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최후심판이 이루어질 때에야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 또한 윌킨슨은 기도와 기복신앙을 연결시킨다. 회개와 기복신앙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야베스의 기도에 담긴 진정한 뜻은 억압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땅에 대한 정당한 권리, 인간의 존엄성과 적절한 품위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이 기도는 정의를 위한 기도이지 단순히 그의 유익을 위한 기복신앙의 기도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정의로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깨끗한 부자론
김동호 목사의 《깨끗한 부자론》은 물질적 성공을 축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은사로 간주한다. 깨끗한 부자는 소유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 소유형 인간이 아니라 나눔으로 행복을 얻는 존재형 인간이다. 그는 획득한 부의 34.8%를 확실히 떼어놓아야 한다. 십일조(10%)로 하나님 몫, 가난한 이웃을 위해 24.8%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부를 누리며 사는 것을 신앙적, 신학적으로 정당화 해주면서 그런 삶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할 이상형으로 제시한다면 그것 또한 기복신앙의 범주에 속한다. 깨끗한 부자론은 매우 높은 수준의 나누고 베푸는 삶을 강조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 요소를 강화시킨다. 김동호 목사의 과잉믿음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가난한 주의 신실한 사람들을 믿음의 철이 들지 못한 사람으로 폄하하는 결과를 낳는다. 깨끗한 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 이상으로 제시해서는 안 되고, 하나의 가능성 정도로 열어놓아야 한다. 또한 기복신앙처럼 승리주의를 옹호함으로써 다양한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하나님나라에는 사회구조를 뒤집는 급진성이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완벽하게 실현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급진적 전망을 품고 사회적 현실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과 깨끗한 부자의 경우에서처럼 미리 기존의 사회적 틀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긍정의 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의 문제점들은 첫째, 복음을 믿는데 진실한 회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점을 약화시킨다. 둘째, 복음이란 희망과 자기계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복음을 효과적인 심리치유법과 처세술로 제시하는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의 핵심적 본질이다. 셋째, 성경중심은 정치와 주요 정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중심에 있는 하나님나라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적, 경제적 현장에서 정의를 실현해가는 사회적 책임을 요청한다. 베푸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령에서 성공을 누리는 삶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주변적 장식요소로 전락시킨다. 또한 오스틴은 자신의 입장을 성경으로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너무 쉽게 비틀고 왜곡한다.
반쪽 진실의 위험
엡2:8-10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대로 힘써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구제와 나눔 이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불의한 구조와 제도에 저항하여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주는 일까지 포함된다.(사9:1-7, 마4:12-16) 교만한 맘몬이 인간의 탐욕을 자극해 은혜와 믿음을 교묘히 왜곡시켜왔다. 은혜는 원래 아주 비싼 것인데, 값싼 것으로 만들었고, 믿음은 원래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하는데 죽여버렸다. 믿음은 그저 머리로 복음에 동의하는 것일 뿐, 믿음에 반드시 동반되어야만 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는 무관해져 버렸다. 은혜나 믿음이나 다 반쪽 진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값싼 은혜
종교개혁 당시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다. 독생자를 희생하는 가치이다. 둘째, 은혜는 은혜 입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따르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값비싼 것이다. 본회퍼는 루터가 경험한 은혜는 이러한 값비싼 은혜였다고 말하면서 그 뜻을 명료하게 정리해준다. 목숨으로 받은 은혜에 걸맞는, 선한 삶의 투쟁으로 살아 내는 제자도를 가르쳐주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 특히 한국교회가 너무나 쉬운 싸구려로 이 비싼 은혜를 만들어 버렸다. 본회퍼에게 값싼 은혜란 용서받은 것만 강조하고 용서받은 자의 윤리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 당시 루터교회는 명목상 기독교 국가로 전환시켜준 대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본질을 팔아넘겼다.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지금 주류의 한국교회도 똑같은 모습이다. 성장에만 주력하다보니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은혜와 믿음에만 매달리다 보니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죽은 믿음
종교개혁의 또 다른 슬로건 ‘오직 믿음으로’가 담고 있던 진정한 의미가 맘몬의 유혹에 이끌린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퇴색되어왔다. 산 믿음이 죽은 믿음으로 대체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웃사랑의 실천을 상실함으로 말미암아 사회로부터 지탄과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믿음으로의 회복이 시급하다.
마틴 루터가 주장한, 중세 교회의 공로사상과 그로 인한 부패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으로”의 참뜻은 인간의 부패로부터의 구원은 어떠한 선행으로도 불가능하기에 오직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자신이 의로워질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맥그라스가 이를 정리하여 ‘의롭게 해주는 믿음’의 본질을 명확히 설명해준다. 첫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고백이며, 둘째, 믿는 바에 근거해서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뢰이며, 셋째,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자연스럽게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믿음은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이다. 루터를 비롯해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산 믿음이야말로 맘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산 믿음은 더 이상 수도원에 갇혀 있는 믿음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삶으로 표현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아 수도원으로 들어갈 때, ‘경건한 자아’만 빼놓고 모든 것을 버렸다. 두 번째 주님의 부름에선 마지막 남은 ‘경건한 자아’마저도 은혜를 힘입어 버려야 함을 깨달았다. 하여 그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둘아가야 했다. 수도원조차도 세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루터는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자 했다. 루터에게 ‘오직 믿음으로’는 죄악 된 삶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얄팍한 공로사상에 대한 도전이자 온전한 순종으로의 초대였다.
맘몬이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삶과 산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삶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맘몬은 자본주의의 배후에 숨어서 산 믿음을 공략해온 것이다. 마침내 산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변질시키는데 한국교회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맘몬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경해석을 교묘히 뒤틀고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이고 순수한 사랑에서 떠나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실천에서 떠나 값싼 은혜와 죽은 믿음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이런 뒤틀린 신앙이 교회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부패시켰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본다.
4장 교회의 부패
개교회성장주의
개교회가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나 이 단계에서 개교회주의로 넘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노치준 목사에 의하면 개교회주의란 ‘교회가 그 목표를 설정하고 활동을 전개하며 교회 내의 인적, 물질적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개별 교회 내부의 문제, 특별히 개별 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최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 또는 방침’을 말한다. 개교회성장주의란 개교회주의를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교회성장주의에 함몰되면 교회는 결국 실용적 논리로서, 교회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뭐든지 옳고 신앙적인 것으로 환영받게 된다. 한동안 증오하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논리를 교회가 채택한 것이다. 흔히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3,000명, 5,00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개교회성장주의를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한 번도 물량적 성장을 교회 목표로 삼은 적이 없고, 부활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제자도가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실질적으로 소규모 가정교회들의 연합체였고, 권력의 정점 자체가 없이 ‘사도들’이 공동 리더십을 발휘했다. 개교회성장주의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논리는 교회 규모가 커야 좋은 공동체를 형성해 하나님나라의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이 협력하면 얼마든지 이 일을 해낼 수 있고,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십자가의 도로 이끄는 일은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실패하신 일이다. 그런데 교회를 대형화하면서 동시에 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
강도의 소굴
온갖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은 채 교회에서 자신들의 신앙적 안전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부를 축적하고, 정작 잃어버린 사람들은 외면하는 사람들을 용인하여 함께 이익을 보고자 할 때 교회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집이란 의롭게 살려다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와서 하나님의 정의를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면 위로가 아니라 더 깊은 절망과 좌절을 맛보게 된다.
빗나간 정치 참여
교회가 강도의 소굴로서의 성격을 지니면 지닐수록 빗나간 정치 참여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이들이 세상에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익에 위협이 오면 교회는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 같이 나서게 된다. 한국 보수교회의 리더들은 대체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덕을 본 장본인들이다. 이 점이 한국 보수교회로 하여금 빗나간 정치 참여에 발을 들이게 만든 주요인이다.
2부 맘몬에서 해방되는 길
5장 구원 없이 맘몬을 이길 수 없다
교회가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나려면 그 강력한 배후세력인 맘몬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적 과제이다. 둘째 단계는 진정한 구원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깊이 맛보는 것이다.
돈의 본질과 정체
돈은 케인스가 말한 것처럼 ‘경제적 가치로 보편적 형식을 가진 가장 안정된 물건’이다. 돈은 보편적인 등가물로서의 성격, 유동성, 그리고 저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있는 그 어떤 것들보다도 선호되는 물건이다. 그리고 돈, 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들, 돈이 가져다줄 수 있는 물질적 풍요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돈의 본질과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이 모든 것들을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돈의 본질에 대해 두 극단적 관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원론적 금욕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물신주의이다.
돈은 우상일 뿐이다? - 이원론적 금욕주의
이원론적 금욕주의란 돈으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는 물질적 풍요 자체를 우상으로 간주하여 죄악시하고 극단적 빈곤 자체를 선으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몸(혹은 물질)과 영혼(혹은 정신)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흐름 가운데 있는 기독교의 유형은 리처드 니버가 제시한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에 속한다. 즉, 돈과 물질문화를 철저히 배격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 입장을 취한다(중세의 수도원, 현대의 아미시 신앙공동체). 금욕주의와 복음적 가난에 대해 짚고 넘어가보면, 김영봉 목사는 물질과 육신을 악하게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로 본다. 돈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는 ‘종교적 목적을 위해 극도의 자기부정과 자기 억압을 실천하는 사람’을 극단적 금욕주의자라고 보고 경계한다. 다만 ‘인생의 일반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을 바른 금욕주의자라고 정의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금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이 금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가난한 이웃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들의 가난을 치유하고자 함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부의 유혹에 취약한지라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면 다양한 신앙적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김영봉 목사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약간의 아쉬움을 표한다. 축제적 인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금욕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나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인간의 육체적·물질적 삶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시고 마음껏 축복하신다. 또한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해 만물이 새로워지면 더 이상 금욕적인 삶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신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축제적 인물이시다. 이원론적 금욕주의는 돈을 하나님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는 데는 성공할 수 있지만, 돈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 선한 본질마저 파괴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돈은 하나님의 축복일 뿐이다? - 물신주의
물신주의는 이원론적 금욕주의와는 정반대로 돈을 지나치게 미화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극단의 신학적 오류를 범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야 말로 물신주의자의 전형이다. 물론 교회 안에선 아무리 용감할지라도 노골적으로 물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암묵적인 혹은 은밀한 물신주의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 제일주의를 말하는데 내용적으로는 돈이 주는 행복을 좇는 신앙이다. 이러한 물신주의적 경향성은 기복신앙을 통해 한국 교회에 만연해왔다.
좋은 돈
돈은 본질적으로 좋은 성질과 유혹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지닌 인간을 비롯한 물질적 풍요의 세계를 보시곤 ‘좋다’고 평가하셨기 때문이다. ‘좋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형용사 ‘토브’는 ‘즐거운’이라는 뜻만 아니라 ‘선한’, ‘아름다운’, ‘공정한’, ‘올바른’ 등의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돈과 경제적 가치가 있는 모든 것, 물질적 풍요까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다.
유혹적인 돈
그러나 문제는 돈과 인간 사이에 사단이 파고들어왔다는 점이다. 그런 실질적인 정황에서 보면 돈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크 엘륄은 “부는 유혹이다. 부 자체는 악이 아니라 유혹이다. 부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의 악을 주로 드러낸다. 부는 타락의 기회다.”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을 묘사하면서 ‘맘몬’이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여 돈을 의인화하고 유사 신격을 지닌 존재로 표현하셨다. 좁은 의미의 돈은 첫째, 활동적인 행위자이다. 돈은 수동적이고 중립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다. 돈의 힘은 그 보편성에서 마약의 힘과 상대할 바가 아니다. 돈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탐욕을 꿈틀거리게 만든다. 둘째, 돈은 자신에 대한 법이다. 즉, 돈은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지 타자에게 통제받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돈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돈이 만든 법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법이다. 이 법의 기초 위에 자유경쟁시장이 작동한다. 돈은 자신을 증식할 수 있는 힘을 제한하는 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돈은 자기 힘을 확대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법 체제를 도모한다. 가장 강력한 법은 실정법이고 다음은 관행, 그 다음은 암거래법이다. 이 셋을 합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거의 없어진다. 셋째, 돈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자기에게 헌신하도록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이 점 역시 맘몬이 유일한 하나님의 대항마로 나설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영력은 실로 대단해서 맘몬의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 즉 맘몬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의롭지 못한 경쟁에서 밀려나 가난해진 사람들까지도 맘몬을 사랑하고 맘몬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돈은 자기 안에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더 많이 소유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존재다.
돈은 언제 우상이 되는가
축복이 되는 돈
돈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이 세상에서 매우 제한적이다. 돈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공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부가 의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구약은 말한다. 당시 부는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으며 부족 혹은 가족의 소유였다. 신명기의 축복받을 자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체적 축복과 깊이 연관된 물질적 풍요가 개인주의적 번영을 도모하는 오늘날의 기복신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돈과 재물이 빈부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모두 돈에 대해 이기적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욥 그리고 솔로몬은 부의 축복을 받을 때, 모두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결코 부의 축적과 향유를 신앙생활의 목표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이 축복이 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그의 근사치적 실현을 위해 함께 애써야 할 것이다.
우상이 되는 돈
부가 억압과 착취의 결과로 축적되며 공동체 전체보다는 특정 개인과 가족, 집단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향유될 때, 부 즉 돈은 우상이 된다. 그런 현실에선 돈의 가치가 그 밖의 모든 것을 합친 가치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부가 돈을 향유하기 위해 하나님, 사회정의 그리고 공동체가 짓밟히고 만다. 소수에게 집중된 부는 절대화된다. 이렇게 돈이 우상화되면 부당한 부의 축적과정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와 이념이 지배층에 의해 보편화된다. 성경은 이렇게 우상화된 돈과 부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우선 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부자를 악인과 일치시키는 흐름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의한 부의 축적은 특정한 사람에 의한 직접적인 착취와 억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경제 체제 자체가 불의할 때 ‘모든 부자가 악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부자들의 개인적인 선한 의도나 양심적인 행동과는 관계없이, 부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불가피하게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진실에 훨씬 가깝다. 왜냐하면 아무리 개인 도덕에서는 양심적일지라도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원천적으로 억압하는 악한 제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심성이 착한 부자, 깨끗한 부의 창출자들은 매우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성경의 분석과 진단을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곳곳에서 하나님은 부와 가난을 대역전 시키는 분임을 보여준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선언, 가난한 자의 행복과 부자의 화 비교, 마리아의 노래 본문을 개인적 구원 차원에서 해석하려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본문들은 각 개인의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사회구조 자체가 불의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나라에서는 바로 이 구조적 불의가 바로잡힌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개인신앙과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가난해진다고 말한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연결시키는데 피해야 할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맞춰 사회 구원을 무력화시키는 오류다. 다른 하나는 사회 구원만 강조하다 개인 구원을 외면하는 오류다. 나는 이에 대해 개인적인 죄와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죄를 모두 발견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총체적인 제자도를 실천해야 하고,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 사회적 약자들을 구조적 억압에서 건져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의 길
맘몬과 맞서 이길 수 있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맘몬의 유혹이 너무나 강렬하고, 유혹을 뿌리칠 때 두려움 역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맘몬이 내미는 당근을 거부하려면 맘몬이 약속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 무엇을 발견해야 한다. 또한 맘몬이 위협하는 두려움을 이기려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누군가에 대한 확신이 서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진실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세속적인 인간으로 남아 있거나 적당히 종교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맘몬을 이길 재간이 없다.
구원 없이 맘몬을 이길 수 없다
물론 구원만 제대로 경험하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위의 길을 수월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구원을 경험하면 맘몬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내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적 종교성으로 맘몬을 이길 수 없다
구원이 빠진 피상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종교생활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맘몬 앞에서 참으로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훌륭하게 보이는 바로 그 종교성 때문에 자신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돈에 대한 탐욕을 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8장 18-30절의 주인공을 살펴보면 자기기만의 함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경건한 언어 사용에 스스로 속아 맘몬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선하다’라는 말을 붙임으로서 자신이 예수님의 선함을 알아볼 정도로 선한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요, 선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언어 사용이 피상적이고 종교적인 언어습관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는 진리를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언어사용의 피상성,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기만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동을 거신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율법주의적 종교성에 속아 맘몬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율법 준수를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이는 구약시대의 언약에 대한 오해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구약시대도 신약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율법준수를 구원과 영생을 가능케 하는 진실한 믿음의 증거로 보았지, 구원과 영생의 조건으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지?’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는 한, 자기 속 깊은 곳을 성찰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 속에 들어 있는 탐욕은 들키지 않고 그의 내면에서 은밀하게 작동한다. 맘몬은 바로 그 틈을 이용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놀랍게도 맘몬 숭배와 아주 친화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돈 사랑과 율법주의는 아주 잘 통한다. 깨끗한 부자론이 위태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몫과 이웃 몫의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을 준수하면 내 몫을 자유롭고 즐겁게 누려도 된다는 것이 율법주의다. 그런 율법주의는 내 몫에 대한 탐욕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율법주의와 물질적 탐욕은 친화적이다. 율법주의적 종교성으로 맘몬을 이길 수 없는 분명한 이유다. 부자 지도자가 맘몬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탐욕을 발견하고 기만적인 종교성을 벗어 던짐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만적 종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구원받아 맘몬을 이긴 부자, 삭개오!
우리는 삭개오를 통해 맘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해법은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음을 깨닫는다. 맘몬과 싸워 이겨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맘몬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삭개오는 돈만 충분히 손에 거머쥐면 행복하게 잘 살 줄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는 돈으로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무엇, 그 깊은 갈망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맘몬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갈망을 인식해야 한다. 꼭 의식적이지 않아도 된다. 무의식적이라도 이 갈망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고 싶은 열망이 마음 한가운데서 솟아올라야 한다. 그것 자체가 은혜이다. 이는 어느 날 느껴져야 한다. 인생의 어떤 극적인 사건이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서, 누군가와의 만남과 대화가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로부터오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아니고는 맘몬이 주는 행복과 만족의 거짓됨을 절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우리는 삭개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오늘은 내가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맘몬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확신 있게 선언한 것처럼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힘임을 알아야 한다. 그 힘으로 우리는 비로소 맘몬에 대항할 수 있다.
제6장 경제 문제는 믿음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몬과의 싸움은 참으로 끈질기고 치열하다. 우리가 개인적 차원에서 맘몬과 싸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맘몬이 항복하는 게 아니다. 맘몬은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으로 들어가 자기 세력을 방어하고 확대해 나가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 사회는 경제와 직결된 다양한 문제들로 몸살을 앓아왔다. 지역 재개발로 말미암은 용산참사,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한미 FTA 저지투쟁, 4대강 공사, 한진 중공업 해고자 복직투쟁과 희망버스 운동, 24명에 이르는 쌍용자동차 해직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자살, 대기업 초과이윤 나누기, 보편적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복지 논쟁, 사회적 양극화와 재벌개혁을 둘러싼 경제민주화 논쟁 등, 참으로 많은 이슈가 있었다.
과연 이런 주제들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제 문제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네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경제 문제를 개인윤리의 차원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 이유. 둘째, 정교분리 원칙의 원래 정신은 교회의 예언자적 정치 참여를 금하지 않는다는 점. 셋째, 기독교 신앙은 통합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믿음 문제로 간주한다는 점. 넷째, 통합적 세계관에 의거한 총체적 복음(신학)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경제 문제가 믿음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는 점을 이야기 할 것이다.
경제 문제의 구조적 성격
경제문제를 개인적인 윤리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그 나라의 경제구조와 제도에 관한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경제활동은 항상 경제구조와 제도를 매개로 삼아 벌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나와 나 자신의 관계, 나와 너/너희의 관계 및 나/우리 와 그것(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말하는 경제 윤리적 성찰이란 이 기본적 관계들을 어떻게 설정해야 옳은가를 묻고 심사숙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영역을 신앙과 윤리의 관점에서 성찰하려면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가 경제활동을 통해서 나/우리, 너/너희, 그리고 그것(자연) 사이에 어떤 모습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지 그 규범들을 찾아야 한다. 둘째, 현재의 구조와 제도가 그 규범들을 실천해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셋째, 그 규범을 실천해가는 데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현실적인 사회구조와 제도는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지평을 결코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지평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는 한 역사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머릿속 계산만으로 미리 알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며 역사적 한계치를 가늠하려 할 때에는 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뿐 아니라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구체적인, 때로는 치명적인 영향을 직간접으로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현상을 유지할 때 치러야 할 분명한 대가와 이상을 추구할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부작용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성찰하고 사심없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인간으로서 질 수 있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고민과 성찰 그리고 책임있는 결단과 선택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런 것일까?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오랫동안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 현행 헌법 제20조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이러한 정교분리 원칙의 헌법적 선언의 원조를 일반적으로 미국 수정헌법 제1조(1791년 인준)에서 찾는다. “의회는 국교의 수립에 관한, 혹은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는 이 수정헌법 제1조가 내포하고 있는 정교분리의 원래 정신에 의하면, 국가는 교회가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 국가가 하는 잘못에 대하여 예언자적 발언과 행동을 하는 자유를 막을 권리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교회를 향해 정치에 대해서는 완전히 손을 털 것을 요구하는 원칙으로 잘못 이해되어온 것이다. 정교분리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정치ㆍ경제적 무관심을 교회 안에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정교분리 원칙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교회가 정치적 발언이나 행위를 일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우리는 흔히 서로 대결하고 있는 경제구조와 제도들에 대해 중립을 지키거나 침묵하면 책임질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ㆍ경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립이나 침묵은 결과적으로 지배적인 구조와 제도를 지지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통합적 세계관
성경과 기독교 신앙은 앞서 5장에서 언급한 왜곡된 이원론과 달리 통합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물질세계와 영적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 세계관은 정치ㆍ경제영역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실현해 가도록 한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통합적 세계관의 가장 기본적인 틀은 창조ㆍ타락ㆍ구속이라는 이야기이다. 첫째,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만드셨고 그 가운데 인간에게 소위 문화사명을 부여했음을 보여준다. 그 사명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더 나아가 정치ㆍ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연을 돌보며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창1:26-28). 둘째, 타락 이야기는 이 질서와 사명이 여전히 타락한 인간에게도 유효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노아에게 문화 창조의 명령이 다시 한 번 주어지는 것에서 나타난다(창9:1,2). 다만 가인의 후예들이 만든 문화와 바벨탑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타락한 인간은 문화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구하기보다는 자기만족과 영광을 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구속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인간을 창조질서나 문화사명의 영역에서 해방시켜 그와는 전혀 무관한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예수님은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제사장적 기도에서 그 기도의 목적이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 한가운데 있으면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고 밝히셨다(요17:15).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다고 말씀하셨다(요17:18). 이는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부른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마5:13-16).
총체적 복음
통합적 세계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복음도 자연스레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총체적 복음에 직면하면 그리스도인은 사회참여를 향한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일상에서 접하는 경제영역이 사회참여의 중요한 한 장임을 발견하게 되고 이는 경제 문제가 곧 믿음의 문제임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근대 교회사를 돌아보면 복음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오랫동안 양극단으로 갈라져 있었다. 복음을 이야기할 때 보수 진영에서는 영혼구원을 강조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총체적인 복음이란 이 두 영역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은 의미한다. 그 흐름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1974년 영국의 성공회 신부 존 스토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로잔 언약의 발표였다. 물론 복음주의적 사회참여와 진보 진영의 사회구원 사이에는 그 신학적 의미에서 여전히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양자가 추구하는 정치ㆍ경제 현실의 변화는 동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진보적 신학자들과는 달리 정의를 향한 사회적 변화에 온전한 구원의 의미까지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는 온전한 구원을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국한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체적 복음은 이런 구분 때문에 사회참여의 신앙적ㆍ신학적 중요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 이제 사회참여를 촉구하는 총체적 복음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들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님
하나님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영역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자연세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하나님께선 인간에게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에 노동을 함께 투여해 창의적으로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가라는 청지기 사명을 주셨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문화사명이다. 경제활동은 문화사명의 중요한 한 축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단순히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정의의 실천을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면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 백성이 추구하는 정의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 명령의 핵심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하나님은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회복시켜주는 것을 강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실천해야 할 정의의 핵심은 억압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출23:6, 사1:17, 렘5:28).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된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지자들의 외침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신의 백성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정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정의를 행하라는 율법을 주시기 전부터 모든 인간에겐 정의를 행할 책임이 있음을 이미 분명히 하셨다. 이는 이른바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인간은 그가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사회정의에 대한 일정한 깨달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총체적 복음은 인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그에 기초해 사회참여를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실로 고귀한 존재이다. 이는 모든 인간은 인간됨 그 자체로 인해 누릴 고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개신교 정의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칙으로 발전했다. 즉, 그리스도인에겐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존중하고 회복시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사회참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이다.
다양한 인간 고유의 권리들은 인간이 몸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그 내용이 더욱 구체화된다. 몸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사항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의 나와 부활 후의 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바로 소마, 몸이다. 부활하면 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프쉬케(숨, 호흡, 영혼, 생명)가 프뉴마(영, 바람, 입김, 숨)로 대체되어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에게 먹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창1:29). 따라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누릴 권리를 인간 고유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경제영역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 영역이 정의로우려면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줌으로서 인간 고유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경제 영역을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총체적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자라는 관점에서 좀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더욱 견고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웃과의 정의를 짓밟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를 약속하셨다. 그의 임무의 주요 핵심은 무너진 정의를 회복하는 것이다(사11:1-5, 42:1-4). 예수님은 그 약속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의 총체적 사명선언을 통해 아주 극명하게 증명된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 42:7, 58:6, 61:1-2을 찾아 읽으시고, 그 말씀이 바로 자신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눅4:21). 즉,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을 받아 메시아의 사명,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임무를 수행하러 왔음을 분명히 하셨다. 더구나 이를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과 동일시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총체성을 제대로 이해할 때, 예수님의 말씀들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컨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규정하시고 그들을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신 사건의 총체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명을 구제나 봉사 정도의 소극적 의미로 국한시키려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사회윤리학자 스티븐 모트는 성경에서 빛은 어둠과 대항해서 싸우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힘을 나타낸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사야 9:2-7에 주목하면서 빛의 역할은 바로 “피 흘리는 전쟁터에서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는 것이요 정의를 세우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정치ㆍ경제 체제를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개혁해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결코 비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셨다. 예수님이 로마의 제국주의 권력에 구체적으로 항거하는 정치적 운동을 안 하셨다고 해서 그가 비정치적이었다거나 우리도 그런 식의 정치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예수님의 진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커크의 지적처럼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의 움직임은 적어도 로마의 기존 정치ㆍ경제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적 함의를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공동체가 되려면 오늘 우리 시대의 불의한 질서에 도전하는, 그래서 기존 질서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령
총체적 복음엔 성령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성령은 메시아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힘과 열정,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시다. 이는 앞서 본 바와 같이 특히 이사야를 통해 명확하게 증언되고 있다. 이사야는 수차례에 걸쳐 메시아가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것을 강조한다(사11:2-5, 42:1-4, 61:1-3). 성령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실현해나가는 데 있음을 그의 백성들 가슴 깊은 곳에 새겨 주신다. 그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데 필요한 내적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신다. 진정한 성령으로 충만할 때, 경제 영역에 대한 신앙 윤리적 성찰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구원
총체적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구원 역시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이 아니다. 이는 구원이 하나님나라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사52:7, 막10:24-26). 예수님 자신도 ‘구원’을 ‘하나님나라’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눅18:24-27). 하나님나라는 지리적 ‘영역’을 뛰어넘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더 적절한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이다. 구원,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용서받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선물로 받은 성령을 힘입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들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묵상과 기도, 그리고 말씀공부를 통해 우리 내면세계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맛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나라와 그의 정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일반 사회의 정치ㆍ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최대한 실현되도록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
마지막으로 총체적 복음은 교회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총체적 복음을 통해 탄생된 교회는 세상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세상 안에 있어야 한다(요17:15-16, 18).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완전히 부정해도 안 되고, 세상에 동화 되어서도 안 된다. 세상 한가운데로 깊이 들어가되, 세상에 도전하여 변혁을 도모하고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존 스토트는 ‘거룩한 세속성’이라는 말로 적절히 표현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는 기존의 정치ㆍ경제체제와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겠는가? 현대와 같이 사회변동이 급격한 시대에는 교회는 자신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회 속으로 깊이 스며들어가 각자의 형편과 은사에 따라 다양한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경제구조와 제도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여기엔 교회가 스스로 온전한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에 대한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7장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맘몬에 대한 승리는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확보된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에서는 실천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율법주의를 조장하는 건 아닌지 검증하려는 태세다. 오히려 산 믿음의 증거는 실천이다. 실천과 관련한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오해는 실천은 믿음으로 자동적으로 흘러나온다는 안이한 생각이다. 저자는 실천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정의와 공의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실천의 세 가지 범주를 말하고자 한다.
핵심가치
성경의 핵심가치는 “다만 공의(체다카)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미쉬파트)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4)는 말씀이다. 신약에서의 모든 성경은 구약이었을 것이고, 디모데후서에는 모든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였으니 구약에서 말하는 정의를 가르치는데 유익하다는 것이다. 미쉬파트(정의)는 단순히 평가의 기준이나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공의 즉 체다카는 바른 관계의 삶을 가리킨다. 알렉 모티어는 체다카를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삶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계들을 바르게 하는 데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사회정의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것을 흐르는 물에 비유했다. 정의와 공의 그리고 물과 강의 공통점은 평등을 향해 쉴 새 없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사회적 강자와 사회적 약자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해 양자 간의 평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예수님 안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정의가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3:28) 단순히 인격적인 존중을 의미하는, 내면적인 혹은 영적인 일이 아니다. 존재의 모든 면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존중을 의미한다. 야고보서2:8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에 잘 드러나 있다. 상대적 빈곤을 해결하는 것은 정의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시혜의 문제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최고법을 어기는 것이다. 황금률은 시혜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행동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빈부격차의 해소, 상대적 빈곤의 해소를 정의가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적용
정의가 요구하는 모든 시민의 경제적 평등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즉, ⓵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평등한 권리 ⓶사회적 지위와 직책을 얻는 데 균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 ⓷경제적 활동을 하는 조직 내에서 경제적 결정과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 ⓸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이 고르게 충족될 수 있도록 사회구조와 제도를 형성해갈 권리 ⓹가장 불리한 계층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경제적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권리 ⓺가장 불리한 계층의 자기 존중감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일정한 제한을 가질 수 있는 권리적 실천.
1. 청지기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부를 창출하는 경제활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향유할 수 있는 아름답고 풍성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 개인과 공동체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정의가 실현됨으로 성취되는 샬롬의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정체성
경제활동을 할 때 마음에 반드시 새겨야 할 점은 청지기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화사명을 주심으로써 하나님, 인간, 그리고 땅으로 대변되는 물질세계 사이에 하나의 관계가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지기 직분이다. 청지기는 자연과 물질세계를 단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창세기2:15의 다스리다(아바드)의 뜻은 ‘일하다, 섬기다, 노동하다, 봉사하다, 경작하다’이다. 그러므로 전체 문맥상 광폭한 군림이나 억압적 지배를 말하지 않는다. 서구사회가 경제적 진보를 절대화하여 과학기술과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자연생태계를 파괴해온 것은 청지기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경제활동을 하면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과 공동체를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
경제활동의 목적
⓵자아성취를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열매를 보시고 기뻐하셨다. 그것이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자아성취의 모델이다. 경제활동이란 자신 안에 있는 창조성, 가능성을 실현해나가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⓶이웃을 섬기는 마음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⓷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일반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모든 이들 또한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어떻게 봐야 하나
청지기다운 경제활동을 수행하려면 성공에 대한 바른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 성공은 승리주의적 관점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에서 분명히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나라는 경제적 풍요나 마법 그리고 정치권력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성공을 보장하시거나 요구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세속적 지위가 아니라 사람의 신앙과 인품, 그리고 영적 은사를 사용하신다. 이를 놓치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에 집착하게 되고 성공에 집착하면 기존질서를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변혁시켜나가라는 하나님의 급진적 명령에 순종할 수 없게 된다.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존질서에 포획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공은 세속적 차원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영역에서 그의 성품과 삶을 닮아가는 데 있다.
2. 나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선 최대한 검소한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진정성 있게 살려면 넘어야할 장벽 하나는 자본주의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유재산권 개념, 다른 하나는 자기 몫의 부를 정당화하기 위한 나눔이다.
사유재산권에 대한 바른 이해
렘5:28~29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종합해 보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 즉 땅과 일정한 소득을 향유할 권리가 있으며 사회는 이를 보장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나눌 때,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푼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소위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도움 받을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려다 보면 가난한 사람들의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하나님은 수학적 정의를 기계적으로 실현하시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의 인격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도덕적 해이의 문제는 인격적 설득과 영적 감화를 통해서 해결해가길 원하신다.
넉넉한 내 몫에 집착하지 않는 나눔
깨끗한 부자론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존재다. 소득의 일정한 부분 21.5%만 떼어놓는 것을 이상적인 목표나 기준으로 설정해선 안 된다. 진정한 나눔, 즉 복음적 가난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로 간주해야 한다. 진정한 나눔의 목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는 데 꼭 필요한 것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나누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에서 이 모든 것은 최소한의 기본적 필요이지 넘치는 풍요가 아니란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본적 필요로 만족하며 사는 삶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은연 중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습관이 생길 수도 있다. 피해의식이 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정죄의식도 생긴다. 그래서 건강하게 복음적 가난을 즐기며 살려면 풍성한 영성이 필요하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오직 주님과 나 사이의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믿음의 신비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겐 복음적 가난의 정신만 알려줄 뿐, 그 구체적 적용은 그와 주님을 신뢰하고 맡겨야 한다.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 결심하고 나면 부자가 될수록 유리한 게 깨끗한 부자의 삶이다. 복음적 가난은 어떤가? 가난한 사람들에겐 위로다. 일단 자기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에겐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넉넉히 누리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복음적 가난을 더 좋아하실 것이 분명하다.
친밀한 신앙공동체의 중요성
기본적 필요로 만족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외계인 취급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무척 힘들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앙공동체란 바로 그렇게 용감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쉼터요 안식처요 때론 생활터전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나눔 정신을 반영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기 원한다면 교회가 먼저 모델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교회가 먼저 친밀한 나눔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여줄 때 그리스도인은 세속사회에서 건강한 권위를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 보다 정의로운 경제제도를 추구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
3. 정의로운 제도 만들기
나눔의 삶이 사회봉사라면 보다 정의로운 대안경제체제를 추구하는 일은 사회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봉사로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부익부빈익빈을 강화시키는 제도와 구조는 가만 놔둔 채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친다면 그것은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흡사하다. 제도와 구조를 정의롭게 바꾸어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효과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회운동을 통해 경제제도가 정의로워질수록 부의 창출과 축적은 비록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 차원에서 그만큼 더 도덕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그리스도인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반기독교적이라는 오래된 강박관념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회과학적 분석도구를 통해 자본주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대안을 찾아서
아르헨티나의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의 짤막한 말 한마디를 마음에 새겨두면 좋을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그리스도인들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데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실현에 대한 꿈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급진적으로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조금 더 보수적인 사람도 대중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고 지나치게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있다. 공동체민주주의는 헌법정신이 실제로 실현되도록 설계된 정치경제체제이다. 생산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여 억압하고 착취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제도를 정비한다. 시장이나 국가가 경제운영을 독점하지 않고 시장,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가 공동선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도록 공공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간다.
과도기적 운동들
현실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운동들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정의로운 경제실천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실로 지난한 과제이다.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요 문익환 목사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의 한 대목처럼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나 다름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길이 없다고 할 때, 스스로 길이 되길 결심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역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 신앙으로 사는 자들이요, 그렇기에 어린양이 가자고 하는 대로 과감히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눈으로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는 소중한 이 길을 우리 모두가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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