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크리스토퍼 불름하르트
2018-11-15 01:34:34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불름하르트
서문- 로드니 클랩
불름하르트는 하나님의 나라, 곧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그 온전한 의미로 새롭게 재발견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적인 영역의 개념이 배제된 천상의 장소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 그는 여러 정파들이 그어놓은 울타리에 하나님나라를 한정하지도 않았으며 그 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미뤄놓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이 구원받는 것에만 온통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보다 우리 구원을 우선시한다면 이 땅에는 아무런 빛도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자신을 위해 일을 할 사회, 백성이 필요하다. 불름하르트의 영향으로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나라이며, 그것이 정치,사회 그리고 문화 전반에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불름하르트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온 민족을 포함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느라 복음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하나님나라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불름하르트가 가진 하나님나라에 대한 포괄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비전을 우리가 공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바꿔버릴 것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었던 때처럼 다시 한 번 이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것이다.
서론- 챨스 무어
불름하르트는 스위스와 독일의 종교사회주의와 변증법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사상은 레온하르트 라가츠,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디트리히 본회퍼, 하비 콕스, 자끄 엘륄, 위르겐 몰트만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름하르트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삶 자체가 도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메시지는 현실 교회와 세상 풍조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충격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제시했다. 그는 인류 진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 바로 기독교라고 확신했다. 그가 말하는 위험한 기독교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실제적인 일 대신에 자기만족적이고 피안적인 종교성만을 부추기는 형식적 종교를 의미했다. 불름하르트에게 믿음이란 개인 구원이나 내적 평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문제이며, 지금 이 땅에서 어둠과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승리의 문제였다. 불름하르트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상에 화해를 선포하며 모든 고통을 없애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나라, 한마디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다. 불름하르트가 바라보는 하나님나라는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정의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 나라는 형식적인 제도도 아니며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장차 완성될 나라이지만 또한 현재로 침투해 오고 있는 나라다. 불름하르트는 하나님나라만이 인류의 진정한 역사이며, 최후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모습으로 확실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믿었다. 그 나라는 이전에 인간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만든 모든 것에 도전하며, 인간이 이룩한 모든 사상과 업적에 도전하며, 인간이 만든 모든 기관,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나라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런 것들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불름하르트의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울타리를 배척하고 비판한다. 바로 이것이 불름하르트가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널리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다.
불름하르트에게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이었다. 온 몸으로 하나님나라를 생생하게 체험했기에 그에게 하나님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떤 살아 움직이는 실체였다. 그의 하나님나라 체험은 그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남서부 작은 마을인 뫼트링겐의 교구 목사였는데 당시 그의 교구에 고트리빈이란 처녀가 신약성서에 기록된 귀신들림과 유사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불름하르트의 아버지는 그녀 안에 어떤 어두운 세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 어둠의 세력과 2년 동안 지속적인 싸움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의 세력은 정복되었고 악한 영도 쫓겨나면서 고트리빈은 육체적인 질병과 영적인 고통에서 완전히 치유된다. 고트리빈 사건을 통해 물꼬가 터진 하나님나라의 능력은 뫼트링겐 마을 전체를 변화시켰다. 병이 치유되고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심했으며 가정이 회복되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했다. 아버지가 경험한 놀라운 사건들이 아들 크리스토프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아버지가 남긴 영적인 영향력 아래서 아들 불름하르트 역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한다. 하지만 아들 불름하르트는 복음이 이런 기적 사건보다 더 생명력이 가득한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기적과 병 치유에만 집착하는 모습에 매우 실망하였다. 불름하르트에게 질병의 정복은 하나님나라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확실한 표적은 치유나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불름하르트는 세상의 비참함과 죄 문제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고 세계 도처의 가난과 고통 그리고 불평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불의와 자본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저항운동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감지했다. 불름하르트는 아버지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가면서도 점점 더 사회현실에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에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불름하르트는 하나님은 단지 하늘에만 계시고 복음은 내적인 삶에만 적용된다는 생각은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불름하르트는 교리주의적이고 제도화된 교회와 위선이 가득한 기독교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는 예수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가르쳤으며 그것을 직접 삶으로 보이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새로운 세상의 창시자였다. 예수의 죽음은 옛 세상 권세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며 그의 부활은 새로운 세상의 여명이었으며 그리고 그의 재림은 새로운 세상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에게 복음은 바로 이렇게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식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어떤 진보에 대한 인간 철학과 혼돈될 수 없는 새로운 실체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인간의 믿음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그러나 불름하르트는 인간이 단지 손을 놓고 그 나라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미래의 능력이 이미 이 땅에서 역사하고 있기에 사람은 그 능력에 응답하여 그 능력이 확장되도록 그 능력 안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렇게 불름하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의 권능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다. 불름하르트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기다림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바라보면 모든 힘을 다해 일하는 동시에 비록 그 노력이 성과가 없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인내함을 의미한다. 그는 이런 기다림 자체가 하나님나라를 앞당기는 굉장히 강력하고 창조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1장 하나님나라를 추구하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나라 역사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라를 알지 못하며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모든 피조물을 그분의 정의와 질서로 다스리시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가 곧 하나님나라다. 하나님의 통치는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 땅에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통치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살아 움직이는 실재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그 나라는 지금 우리 눈으로 이 땅 위에서 볼 수 있게 임한다. 우리가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예수가 그저 공허한 이름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역사하는 분이라는 확신만큼 힘을 주는 것도 없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예수가 진실로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이 우리의 왕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돌려드리고 다스리심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진리 아닌 다른 거짓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오직 예수가 주이심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의 통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이 가능하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2장-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시록21장5절) 모든 말씀 가운데 으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하고 죽어가는 세상을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변화는 예외로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이 약속은 누구든지 새롭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비록 몇 사람만 새롭게 된다 해도 이는 엄청난 사건이며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진리는 인자가 세상에 가져오신 새로운 실재,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서 시작해서 마침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신다는 소식이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실재, 세상 역사에 저항하는 새로운 실재가 나타났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이 새로운 역사는 우리, 각 사람 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안에서 살며 그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삶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나라는 기독교 조직이나 운동이 결코 아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이며 하나님의 통치다. 하나님나라는 여기 이 땅에서 거룩한 생명이 계시되는 것이며 새로운 마음과 생각과 감각과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며 세상의 빛이시며 사망을 정복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삶,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를 놓으셨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존재 깊은 곳까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사망의 늪으로 떨어지며 어둠이 계속해서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우리에게 기독교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만약 모든 것이 옛 습관 속에서 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참 생명의 실재 가운데 살고 있다면 새로운 생명, 새로운 능력, 새로운 기쁨이 현실에서 드러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승리자이시며, 그분만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우리 마음과 세상으로 오실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다스리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우리 맘속에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참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실 것이다.
3장- 서두르라 그리고 기다리라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끝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오실 때가지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우리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신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우리 힘으로 이 땅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안달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예수,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그분만이 승리를 가져오실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그분의 오심은 미래의 사건이가도 하지만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경험될 수 있는 실재다.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종이 되어야 한다. 그 기다림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그분의 청지기가 되어 뭔가를 하는 능동적인 기다림이다. 우리는 예수가 마지막 날에나 다시 오실 것이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그는 언제나 지금 여기 우리 삶 속으로 오신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이것을 기억하고 붙잡을 때, 당신은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무엇보다 강하며 반드시 오신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이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두려움과 고난이 오더라도 싸울 수 있다. 종의 임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4장. 구원자는 지금 오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는 예수가 오시는 그날입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장래가 아닙니다. 미래를 지금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매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 역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닥 실처럼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허락되지 않은 재림에 대한 말은 깨어 기다리고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헤쳐 나갈 길은 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인도할 그 위대한 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삶과 생각은 활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표적과 하나님에게서 오는 도움은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를 가로막던 것들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도 그리스도의 미래를 경험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신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죽어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소망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삶속에서 그분의 오심을 경험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렇게 깨어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신앙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구원자는 우리에게 진지하게 요구하십니다. “깨어라, 깨어라, 깨어 기다리라”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모든 삶속에 그분이 오실 수 있는 토대를 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깨어 기다리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그분께 드리고 마음에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과 삶과 가정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5장 당신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까?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이란 말을 꺼내 도 마음이 들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말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종교가 하나님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선 열띤 토론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죽은 채로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지금까지 그분을 죽게 만든 죄를 통회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의 일을 함께 하자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오메가 되신 주님을 반석으로 삼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영이 바로 반석입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가 오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과 부와 영혼을 위해 기도는 하지만 고난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조금도 고통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않는다면 이 혼돈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항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외에는 딴 길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안락한 삶을 떨치고 일어섭시다. 목숨을 잃을 지라도 싸움 한복판으로 전진합시다. 예수님을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현실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만큼 하나님이 현실에서 의미를 잃은 적이 없었습니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종교는 왕성한데도,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이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죽어있는 것입니다.
6장.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시며, 선하고 자유롭고 참되고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행위와 진리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대신 기독교란 종교가 굳게 세워졌습니다. 아름다운 교회 지붕 아래로 하나님이 아닌 온갖 세력들이 기어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권위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상황에 따라 믿고 있습니다. 악마의 왕국은 사망의 지배이며 돈과 탐욕의 지배입니다. 모든 빈곤과 가난에 속박되는 것입니다. 가난은 사람들을 탐욕과 질투와 두려움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말로 임박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나라가 오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처럼 수많은 갈등과 분쟁과 절망이 가득한 중대한 시대에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길 원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와 의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의를 향한 우리의 목마름과 굶주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유일하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방향전환입니다. 의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과 슬픔 속에서도 끝까지 그분만을 섬기십시오. 당신이 고통과 가난과 고난과 걱정 속에 있더라도 다른 어떤 것도 마음에 허락하지 마십시오. 어려운 이웃에게 인정을 베풀고, 약한 자들에게 온유하십시오. 누군가 당신과 싸움을 걸어오면 화해하십시오. 무엇보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신뢰하십시오. 자신에게 진실하고 타인에게 진실하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이기게 될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7장.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진심으로 준비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 삶에서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곳, 이 땅위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의에 따라 살길 원하는 참 제자가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주의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고 신비한 영적체험을 쫓아다니거나 주의 재림에 대해서 파고들며 온갖 억측을 하는 일에 몰두해선 안됩니다. 차라리 지금 이 땅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며, 각자 살아가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인지 고민하는 편이 낫습니다. 감정적인 체험을 따라다니는 신앙생활을 멀리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에 초월할수록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신 곳이라면 더욱 진리를 구하고 힘껏 그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실제 삶 한 가운데로 직접 찾아오십니다.마 18:20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이 할 일은 주님의 성품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가지고 종교를 만들지 말라! 내가 하나님에게서 너희에게 가져온 것은 종교가 아니다. 모든 종교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변화를 싫어한다. 종교는 성전을 짓고 박물관을 세우고 성직자들을 만들지만, 이것들로 인해 세상에 걸림돌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종교들은 세상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도 장애물입니다. 종교만큼 하나님나라의 발전에 위험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리를 이교도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바로 이런 꼴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기독교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무엇이 더 위대합니까? 성경입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자기애와 자기만족으로 가득찬 기도, 더 잘 살기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가지고 종교나 편안한 안식처, 황홀한 천국을 만들려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늘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열고 온 세계가 회복할 때까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스스로 질문해보십시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마음의 고통 속에서 사는 이 사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하나로 만들며, 또한 자유를 줍니다. 자유롭게 된 자로서 당신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하며, 당신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이 비참하고 저주받고 길을 잃은 사회로 들어오시도록 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들은 천국으로 날아가면서 버림받아 있는 자들을 보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을 분리시키는 종교는 가짜입니다. 마지막에 누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건지, 정말 자신의 의가 예수님보다 더 대단한 건지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오는 ‘모든 것’은 먼저 이 땅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사는 곳에서, 일하는 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주님을 위해 힘써 행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당장 내일 오시든 천 년 뒤에 오시든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올바른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좀 더 바르고 참된 태도를 취할 때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진리 안에서 명하신 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열정적으로 그 길을 가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옳은 일을 알게 되거든, 즉시 행하십시오!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그것만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옳다면, 가서 행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8장. 새로운 생명
사도 바울은 새로운 생명의 모습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처럼 다스려야 하며 죽음이 더 이상 지배권을 갖고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실상 모든 인간이 사망의 법아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새 생명이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는 그 생명 속에 푹 잠겨 자신의 삶을 다스릴 것입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졌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모두 해결하셨고 만사가 형통이니 계속 죄를 지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온전하고 새롭게 되어야 하며 생명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세례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해서 그와 함께 다시 살고 새 생명으로 들어가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육이 무덤에 묻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당신이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은 생명을 향한 능력이 이제 당신 안에서 꿈틀거리고, 어떤 신적인 것, 거룩한 것이 당신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생명은 죄의 욕망이 더 이상 우릴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온전함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생명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종교적인 지식과 행위 속에서 이런 안락한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각기 좁은 구멍에 들어가서 주님이 끌어내려 해도 나오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보십시오! 이것이 교회가 새로운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일반적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삶에서는 영적인 것이 더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에 연합하는 지점까지 이르게 되면 반드시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함께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당신을 버리시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당신이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을까 걱정하십시오. 바울은 로마 교회가 기독교를 진흙탕 속으로 끌어내리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으니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여기며 자기들은 더 이상 할 게 없다고 여길까봐 걱정하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은 당황해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 와서는 육체로 끝마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이 새로운 것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 한 주님은 여러분들을 도우실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위해 사시듯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9장. 자신을 부인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 것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원받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은 구원받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탄식소리와 수많은 사람들의 절규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행복과 심지어 우리 자신의 구원조차도 내려놓고 온몸으로 싸우며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것을 경험할 때만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가 외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목적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을 철저히 포기하고 내려놓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 드러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수많은 천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있을 곳은 이 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들이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구원입니다.벧전1:10-12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비신자들에게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를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돕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길 거절한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제외하실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위해 이곳에 계시며, 그런 다음에 당신을 위해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예수님이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오셨다고 믿으며 달콤한 환상 속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만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영광이며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당신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십시오. 비기독교인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예”라고 대답만 하면 모든 것이 채워질 것입니다.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이제 시작하십시오! 비록 지금 당장 행동하지는 못해도 탄식하며 하나님께 외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완악한 마음은 금세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찢어지듯이 괴로워야 합니다. 그때 구원자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존재가 새롭게 회복되어 하나님나라를 위해 새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10장 하나님은 시온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이 땅에서 펼치려고 하실 때는 언제나 먼저 시온을 세우십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열린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춘 적은 없었습니다. 시온이 없다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행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일직이 아브라함과 그의 종들과 아들들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자기 자신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연합된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이들도 그 시대 하나님의 시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시온이 생기기 위해선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움이 올 수 있는 길을 닦을 사람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원자조차도 시온이 없이는 오실 수 없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한나. 요셉,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시온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위한 정의와 진리가 놓일 기초를 놓아야 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태어나셨고 우리 자신을 올려놓을 반석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통해 시온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된 시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주님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도들의 삶은 오늘날까지 기적과 표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이 사도들에게서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세상으로 퍼져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도들의 시온은 인간적인 이상으로 변질되었고, 죄와 죽음의 저주에서 해방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는 좌절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또 하나의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종교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침체되었습니다. 다시 옛날처럼 비참한 죄와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부활과 참 생명의 흔적이 사람들의 삶에까지 다가가질 못하고 있으며, 지금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악함이 버섯처럼 퍼지고 있고, 인간이 만든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뒤섞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참 생명의 삶을 기대한다면 시온을 위한 준비가 먼저 되어있어야 하고, 자신의 모든 조건들을 무조건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일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11장.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실제 경험하기는커녕 아무런 놀라움과 충격도 없이 그저 감탄만 하며 지나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육체로 보내셔서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그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단지 신기한 과거 사건으로 역사에 묻히게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날”에 대한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합니다. 늘 모든 것을 예수님이 재림하실 마지막 날까지 미뤄놓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에 대한 기대는 게으른 자들의 안락한 도피처일 뿐입니다. 이런 안락한 도피처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생명과 부활의 씨앗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론이 아니라 행함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이론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면서 예수님의 살아있는 실재는 놓치고 맙니다. 독실한 신자들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분은 토론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부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당시처럼 지금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경험하길 원하고 오실 이를 전심으로 기다린다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뭔가가 우리 안에 준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전염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되시길 원하시며, 그저 우리 머릿속의 개념이 아니라 실재 사실이 되길 정말로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속에서 만나는 것과 예수님의 능력과 성품이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내 안에서건 그 누구 안에서건 또 다시 실현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런 소망이 우리 마음속에서 열망으로 불타올라야 합니다. 이런 열망 가운데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예수님이 통치하시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12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께 다가가야 합니다. 그는 승리자이시며,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스리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은 여전히 연약함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모든 약함과 한계를 짊어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인간으로서 가지는 약함 속에 묻혀있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어둠으로부터 온전하게 부활하셔서 영광스러운 빛의 주로 나타나셨으며, 어둠에 둘러싸인 인간에게 생명을 주실 권능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부활의 모습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며, 그저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부활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별 의미를 주지 못하며,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생명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안에서만 나타나는 이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끌어내려져 우리가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은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거듭거듭 다시 부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어떤 영적인 것이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에 그렇게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하늘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능력은 그들 안에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들을 해결하려할 때, 우리가 가진 힘으로만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망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입니다. “구하라! 위의 것을 찾아라!” 이것은 잠자코 기다리며 해야 하는 것이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권능을 보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매일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능력을 주소서. 나는 당신만을 위해 살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능력, 새 생명을 늘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날 때가지 더욱 강력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에게 강한 능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13장.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입니까?
오늘날 이 세대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진리의 손가락이 우리 전통과 종교에 대해 거짓과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의 손가락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돌이키라고 요구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민족이든 나라든 커다란 사건 없이 수십 년 이상 평화롭게 살게 되면 전통과 관습이 너무 안락해지고 편안해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런 인간 문명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운 사회제도가 뒤집히면 모든 게 무너질 거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데 온 힘을 쏟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너무 비겁해져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싸우지 못하게 됩니다. 죄악을 눈감아 버리고 불의에 익숙해져서 어떤 것도 용납하게 됩니다.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고 고통이 넘쳐도 관심이 없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진리와 의를 요구하는 정의의 목소리가 울리면 그 소리를 오히려 비난하고 반박합니다. 관습과 전통 뿐만 아니라 사회자체가 변하고 있는, 이 불안한 시대에 우리는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모든 죽은 것들과 타락한 것들을 정복하십니다. 이제 종교적인 모양이 아니라 진실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입니다. 진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인간적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해 보일지라도 완전히 쓸어 없애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하나님나라는 지금 우리가 하듯이 우리를 여러 집단으로 나누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든 것은 이 질문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옳은 편에 설 것입니까? 당신의 교회나 분파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꿔버릴 진리 편에 설 것입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이나 세상을 탓하는 자는 “내가 주님을 늘 찬양할 것이니, 주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 내 입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기에 고난을 겪는다고 여기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는 담대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이뤄지길 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진리가 오도록 그의 길을 준비하겠습니다.” 용기를 잃지 맙시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소한 일에 매달리지 말고 다가올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놓은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행위가 좋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끗하게 되고 영원히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그렇지 않다면, 은혜와 자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불의한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옳고 진실한 것은 영원히 견딜 것입니다.
14장 깨어서 일할 준비를 하고 있으십시오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해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적은 수만이 그 가치를 아는 보화이며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눈길 한번 주고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때는 우리 자신의 관심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행하지도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많이 맡긴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한다.”(눅 12:47-48) 하나님나라는 어떤 인간의 발견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성취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과 열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묵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계획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허리에 띠를 띤 채 등불을 밝히고 명령만 떨어지면 수행할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싸우기 위해선 일복을 입고 때로는 온 세상과 맞설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의와 진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실현되기에 우리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에 관해 우리 연약한 인간은 기본적으로 참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에게서 오는 빛이 있으면 죄와 불의, 살인과 불륜과 같은 문제들을 그 빛으로 비춰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혼란을 초래하고 법과 종교를 위태롭게 한다는 죄목으로 끔찍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은 결국 ‘일요일의 종교’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은 평일 생활과 상관없이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님께 향한 예배라고 말하지 맙시다. 그저 우리 마음을 달래고 개인적인 충족감을 얻는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도록 허락하십시오. 당신이 자발적으로 절대 가지 않을 곳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허락해야만 합니다. 낮과 밤 구분 없이 언제나 깨어, 문 옆에 서 있다가 열어주는 것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이며 하나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주인인 것처럼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미래에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립니다. 반드시 영적으로 수준 높은 것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매우 일상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우리 생활 전반에 관련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 상황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소한 문제에 관해서 조차도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나라의 방식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다르게 할 수 있지?” 그러려면 먼저 가난한 마음이 되어 당신이 언제 어디서 빛이 없는 사람처럼 어리석게 행동했는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다’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들을 잘 지켜보다가 이 땅에서 그것들이 실현되도록 길을 내는 일입니다. 소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합시다. 이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어디에도 얽매이지 말고 구속되지 마십시오.
15장 조급해 하지 말고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하나님나라에서 조급함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비극적인 결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조급함의 뿌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취욕입니다. 이들은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움직이시지 않아도, 자기가 이해한 대로 앞으로 내달리며 일을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옵니다. 인간의 힘이나 육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에서, 그리고 정말 원하던 목표를 이루는 일에 우리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고, 좋든 나쁘든 우리 능력을 전부 내려놓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과 열정으로 육신을 높이려고 앞서나가는 사람을 가로막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옛 본성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들어와서 남보다 앞서나가는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려 하는 자들을 제지하십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낮아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 길 위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로막지 않으십니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서 그들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며 그래서 기뻐합니다. 이들은 종교적 지위나 세상의 지위를 모두 포기할 수 있으며, 세상에서 준 모든 감투를 벗어던지며 기쁨으로 환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 겸손합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던 일을 내려놓고 비록 아무런 명예도 없고 중요한 역할을 못한다 하더라도 즐겁고 활기차게 하나님나라를 기다릴 수 있습니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내려놓고 주도적이 되어 앞서가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현 상태에 만족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바라는 참된 목마름이 없습니다. 믿음과 인내와 희망, 사랑을 운운하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것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결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죽으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모양만 양일뿐 예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두들겨 맞고 결국에는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된 죽음, 행복한 임종을 ‘구원’이라고 여기며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 삶 속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16장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은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위해서 일어서실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실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의 소망으로 나를 위로할 때 솔직히 그걸 믿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영원한 천국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구원자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만 오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들 하나님은 영원히 저 하늘에 계신다는 환상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에서 얼마간 고통을 겪을 운명을 타고났으며, 이곳 삶을 청산하고 죽으면 우리의 종교적 신앙에 따라 벌을 받든가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오랜 세월동안 믿어왔으며 그걸로 만족해왔습니다. 이런 불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우리의 행복은 권능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지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자는 그 권능이 조금이나마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일하시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하는지 아닌지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은 하나님의 도움에 달려있으며 우리의 행위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영원한 세상과 이 세상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기 전까지 궁핍함과 비참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세상과 이 세상 장벽은 위에서 아래로 열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합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벗어나 위로 날아 올라가 구원받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도움이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문이 열려야 합니다. 다들 죽음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천국에 가서 구원받기만을 바랍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것에 대해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로 그분은 오셨으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살아 계시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이 될 때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이교도의 온갖 사상에 물들어 버린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죽어서 가는 ‘저 세상’에만 제한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천국에 계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종교적인 만족 외에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이 땅에서 일하시는 동역자가 되신다는 예언적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다시 인간 가운데 거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누가 감히 자기 믿음에 대해 ‘아, 나는 참 믿음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착각이며 기만입니다. “종교”를 갖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도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의 종교에 달려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비, 능력에 달렸습니다.
17장.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기쁨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런 기쁨들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기쁨, 의미있는 삶은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선한 것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내용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앎입니다. 또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신념’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미리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임하듯이 지금 여기에 임합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한 번도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기대를 포기하고 대신 소위 자선활동으로 대치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신 바와 정반대입니다. ‘자선’은 해답이 아닙니다. 자선을 통해선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만들 수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하나 된 공동체는 반드시 이 땅에 태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버렸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변화하기 전에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구성원들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동체의 교제 안으로 모으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서로 연합해서 내가 어려울 때 다른 이들이 도울 거란 확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게 나를 위해 저축을 해야지”라고 생각하거나, 남들은 가난하더라도 나는 부자가 되겠다고 욕심낸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흉내만 냈을 뿐 그리스도의 몸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영적인” 공동체-실제적인 삶의 필요를 외면하고 같은 이름의 교회 안에서 주일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일정기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갈라서게 됩니다. 공동체가 지속하려면 어떤 영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깊은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모든 세상의 방식을 거부합니다. “거짓과 부정을 따를 바엔 차라리 가난을 택할 것이다”라고 세상을 향해 대놓고 말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갖고도 사람들 앞에서 명예와 영광을 좇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이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경구절을 들먹이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성경구절이나 내뱉는다고 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손으로 만져지는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뭔가 성취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나는 이제 은혜로 일꾼이 된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면 이제 은혜로 의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이것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자기 부인(the denial of self)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성과 충돌하더라도 진짜 선한 것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끝이 없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편안한 기독교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그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뻐하십시오! 형제와 자매가 참된 자기 부정과 자유 안에서 하나 되어 사는 공동체, 서로 비난하지 않고 진리를 분명히 볼 줄 아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용감한 전사로서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이런 마음으로 함께 연합하십시오!
후기- 칼 바르트
불름하르트는 세상과 싸우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께 완전히 충성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 나라가 앞당겨지기를 재촉한다. 불름하르트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목적과 함께 시작한다. 그는 한편으로 세상의 고통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불름하르트가 세상의 문제에 대해 느낀 고통과 미래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가득한 믿음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모든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인가? 불룸하르트는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 오직 당신만이 도울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우리 손에 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이렇게 불름하르트는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하늘과 땅 양쪽의 활동(인간은 구하고 하나님은 일하시는)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불름하르트에게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는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의 삶 가운데 우리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임무(인간의 행위)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도록 재촉하면서 기다릴 때 하나님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그 나라의 완성을 준비하실 것이다. 지금 이미 이루어진 것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 미래는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언제 그 미래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날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든 것 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위대한 미래를 이미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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