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타종교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제럴드 맥더모트
2018-10-11 19:30:12
서문
20세기 초 중국에서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자란 린위탕은 근본주의적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토착 문화의 진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는 타종교들에 대한 태도에서 린위탕 당시의 중국 근본주의와 상당히 비슷하여, 비기독교 종교를 금기시해왔다. 어리석은 허튼소리이거나 악마에 사로잡힌 망상이라는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는 비기독교 종교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여긴 적이 거의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걸림돌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타종교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이 존중하지 않아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한 비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21세기 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특수성의 스캔들’(Scandal of particularity, 하나님이 역사상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고,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특히 유대인과 예수님을 통해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확신을 말한다.)이라는 문제일 것임이 틀림없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은 붓다나 공자나 크리슈나나 무함마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와 대비시키면서 비기독교 종교들을 완전한 흑암의 지하 세계로 간주한다면, 교회의 메시지는 특수성의 스캔들이 아니라 오만한 반계몽주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대해 배우는 데 관심이 없으며 그들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그들의 전통은 무가치하고 유해하다고 가정하는 전도 방식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도움보다 해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인간 개인이 아닌 사상 체계의 대표자로만 보는 것이다.
이 책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계시의 문제를 다루며, 다른 전통들의 규범적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종교 신학의 시발점이다. 또한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밝히는 빛(요 1:9)이시며, 하나님은 비기독교 전통들 가운데 그분 자신에 대한 증거를 남겨 두셨다(행 14:17)는 성경적 명제들을 탐구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배웠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웠으며, 장 칼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배웠으며, 복음주의자들도 붓다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더 분명히 이해하게 해 주는 것들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새로운 이해나 통찰이 생기는 전형적인 방식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계시의 일부를 새롭게 강조하여 계시 전체가 새롭게 밝혀지는 것이고, 둘째, 전에 그리스도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었던 옛 개념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이며, 셋째, 새로운 적용과 연결 또는 함축을 통해 개념들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첫째의 경우, 루터는 전적으로 새로운 칭의 개념을 소개함으로써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전통 내 일부를 선택해 새롭게 강조한 것으로, 루터 이전에 행해진 기독교 전통과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터가 그 개념을 다른 무엇보다 강조하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을 때, 계시되어 왔던 다른 모든 것들이 새롭고도 다르게 보였다. 둘째의 경우, 개념들은 의미가 매우 풍부해서 한 관점이나 측면으로는 그 개념이 지닌 내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존 헨리 뉴먼)는 것이다. 익숙한 개념을 새로운 측면이나 관점에서 봄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5장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을 통해 봄으로써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는지 검토할 것이다. 6장에서는 욕망을 자아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분석하는 불교의 창을 통해 바울이 말한 타락한 자아와 루터가 말한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자아’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셋째의 경우,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를 뽑아내거나 그것을 다른 개념들과 관련시킴으로써 그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영원에서는 모든 기독교 교리가 꼭 들어맞을 것이지만, 현재는 시간 속에서 연결된 많은 것이 신비한 채로 남아 있다. 신학의 역사는 연결된 것들을 서서히 더욱더 끌어내는 역사다. 도교의 無爲를 연구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배울 수 있다. 타종교들 안에 있는 비슷한 개념들로부터 배우는 것에 대해 주의할 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타종교들이 그 개념들을 보는 것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각 개념들은 그것이 꼭 맞는 틀에 의해 채색되고 형성되며, 그 틀의 맥락 가운데서만 제대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틀을 사랑하는 종교인들의 감정을 공유하지 않을 경우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보는 것처럼 그 개념이나 부분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도교신자들이 무위를 이해하는 것처럼 무위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공유하지 않고 또 공유할 수도 없는 확신이며 비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개념으로부터, 비록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하더라도,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통해 보고 이해한다. 내가 도교의 무위로부터 배울 때, 무위에 대한 내 해석은 내 기독교적 틀에 의해 형성되며, 내 기독교적 틀의 일부를 바꾸려고 무위를 사용하는 방식 역시 여전히 기독교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교의 무위와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무위에 대한 나의 이해는 내가 가진 기독교적 감정과 관점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나는 종교를 믿지 않으면 그 종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확신에 동의한다. “이해하기 위해 믿으라.”
나는 이 주제에 겸손히 접근하고자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연구함에 있어 몇 가지 위험이 따른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과 신념을 공유하지 않은 이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기독교 진리를 희석시키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헌신을 유보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종교와 관련해서 중립적 관찰자가 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가정은 근대성의 위대한 신화 중 하나다. 헌신하지 않고 이해를 추구하는 자들은 가장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다른 위험은 신앙이 미성숙한 이들이 자기 신앙을 둔 채, 다른 전통을 깊이 탐구하다 영적 혼란을 겪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적절히 기반을 두고서 그리스도가 타종교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1장 복음주의자들과 세계 종교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유익 중 하나는 이제 복음주의자들이나 비복음주의자나 공히 ‘열광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사람의 역사와 상황으로 형성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가 보는 방식 그리고 실제로 보는 것에 자신이 가진 전제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학자는 없다. 합리성이라는 틀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ㆍ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주의 관점에서 종교들 가운데 있는 계시의 문제를 살펴보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 책의 객관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다만 내 해석과 결론이 비복음주의적 또는 비기독교적 관점을 사용하는 사람과 다를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내 추론이 반드시 덜 공정하거나 전체를 더 아우를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복음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는 추가 질문이 생긴다. 하지만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다양한 복음주의의 모습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역사적ㆍ신학적으로 정의를 이어 나갈 것이다. 즉 3세기에 걸친 복음주의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검토함으로써 역사적 정의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전통의 최선을 제안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정의를 내릴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나는 그러한 정의를 상정해 두고 쓸 것이다.
역사적 주요 사건들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헬라어 명사 유앙겔리온에서 유래하는데, 그 말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 또는 ‘복음’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와 교부들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이르기까지, 이후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가 이끈 부흥운동 등에 복음주의의 정신과 그 운동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반하는 자의식의 반응으로 생겨났는데, 근본주의는 1910년 직후에 개신교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이성적 주장으로 시작했다가 복음의 사회적 요구들을 무시하는 경향의 반동적 ‘반대주의’로 전락했다. 금세기에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1942년 전국복음주의협회가 형성되면서이고, 이는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와 구별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과 수적 힘을 획득했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적극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더불어 복음주의 신학도 함께 성숙하게 발전했다.
신학적 정의
많은 학자들이 복음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해 왔지만,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6가지 특징이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것 같다.
1 성육신한 하나님이자 주님이시며, 죄악에 물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엄하심. 복음주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함축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에 의해 구원받는다. ㉢중심에 십자가가 있음을 믿는 것은 우리는 타락으로 인해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권세들에 대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무지이자 속박이다. 죄는 교만, 권력에 대한 욕망,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이기심, 두려움, 영적인 것에 대한 거부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죄에 대한 성향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다. 죄의 권세는 인간의 노력으로 깨부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2 성령의 주 되심. 성령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사역을 적용하는 데 필요한 분이다.
3 성경의 최고 권위. 성경 정경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가장 결정적인 근원이자 기독교적 삶에 대한 지침으로 간주한다. 모든 문화적 추세를 맹종하며 따르라는 요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그런 추세들을 판단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자신에 의해 읽히는 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가 아니라 인격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4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주의자들은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회심을 더 많이 강조해 왔다. 회심에 감정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 회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5 개인과 전 교회에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전도. 전도의 근본 동기는 관대함이다. 구원의 위대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6 영적 양육, 친교 및 성장에 기독교 공동체가 차지하는 중요성. 영적 성숙을 위해 기독교 공동체는 필수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성령이 오랜 시대에 걸쳐 교회에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다.
위에서 설명하는 6가지 특징은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특징들이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은 그 특징을 강조하는 정도와 그것들이 구현되는 형식에 달려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그 특징들에 부여하는 중요성이 각각 다르며, 엄밀한 해석,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부차적 특징들도 다르다. 다양성을 기꺼이 용인하는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 “본질적인 것에는 연합을,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 관용을.”
복음주의 대 근본주의
복음주의와 가장 많이 혼동하는 것이 근본주의다. 두 접근법이 달라지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1 성경 해석.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좀더 문자 그대로 읽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장르와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더 면밀히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2 문화.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 내지 않거나 성경과 관련 없는 인간 문화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모든 인간 문화 가운데 그리고 인간 문화를 통해 역사하고 있다고 본다.
3 사회 활동. 근본주의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활동을 자유주의 신학의 표지로 간주하던 때가 있었다. 최근까지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사회적 참여를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고 反낙태운동을 벌이는 것 정도로 이해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이 우리에게 인종주의, 성차별, 빈곤에 맞서 싸우기를 요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4 분리주의. 20세기의 수십 년 동안,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은 물론 그들과 어울리는 보수주의자들과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달리 복음주의 신학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더 강조한다.
5 자유주의자들과의 대화.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 복음주의적 접근은 그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설득하고 심지어 그들에게서 배우려는 자세로 이야기를 나눈다.
6 기독교의 본질. 근본주의자들은 규칙과 규제에 많이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보고 그것에 더 집중한다.
7 연쇄적인 분열. 많은 복음주의 그룹들은 분열하고 다시 갈라졌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근본주의 가운데서 더 심한 것 같다.
개신교 정통주의, 자유주의, 후기 자유주의
복음주의는 고전적 개신교 정통주의와 교리 면에서는 거의 다른 것이 없고 매우 비슷하지만,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우선성을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신경 및 교리에 대한 충성과 배타적인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을 더 소중히 여긴다. 즉 개인적 신앙의 뜨거움이 없는 메마른 정통주의를 경계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경험을 진리와 도덕의 최종 규범으로 여기는 자유주의 신앙을 거부한다. 모든 신앙에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종교성을 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동질화 경향에 반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은 기독교 계시의 특수성과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적 자율성을 특히 중요하게 여기고 내적 규범들(양심과 종교적 경험)에 호소하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외적 규범들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복음주의자들은 후기 자유주의가 진리를 내적 일관성의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후기 자유주의자들은 계시의 본질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 계시라는 점을 부인하고, 대신 성령이 대단히 감동할 때에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
세계 종교들을 대하는 복음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은 세계 종교들을 고려할 때, 대개 계시와 구원 문제에 집중했다. 그들은 계시가 구원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지점까지만 계시에 관심을 가졌다. 제한주의자들은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구원은 신앙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 장 칼뱅 등이 이 입장을 취한다.
다원주의자들은 구원을 얻는 방법이 많으며, 천국과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는 길도 많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예수님과는 별개로 불교 신자나 무슬림이 되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존 힉, 폴 니터,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가 이 접근법을 지지하는 인물들이다.
포괄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해 인식론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을 떠나서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예수님에 의해 구원을 받기 위해 현세에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타종교를 고백하지만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유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존 웨슬리, C. S. 루이스, 클라크 피녹, 존 샌더스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책에서 나는 이 입장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변호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관심사는 구원이 아니라 종교들 가운데 있는 계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포괄주의는 종교들 가운데 있는 수많은 목표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있다. 다원주의도 일관성이 없다. 실제 신자들은 신적인 것과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다른 것들을 말하는데도, 다원주의자들은 그들이 모두 동일한 것을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실상 다원주의자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다원주의를 부인하는 것이다. 종교적 성취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비움(lostness), 비기독교 종교를 통한 불완전한 종교적 성취,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감이 그것이다. 그중 기독교 신앙만 마지막 것을 제공한다. 종교들 가운데 계시가 있다는 개념을 성경이 지지한다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정통 가톨릭 학자들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아직 그 문제에 대해 질문도 시작하지 않고 있다. 이제 더 나아가야 할 때다.
2장 계시란 무엇인가?
계몽주의운동 이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두 원천이 있다고 언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왔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자연과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계시다.
정의
계시란? 라틴어 레베로(revelo), 히브리어 갈라(gala), 헬라어 아포칼륍토(apokalypto)로, 감추어진 어떤 것을 드러내어 그것이 무엇인지 보고 알 수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 저자들에게, 계시란 이전에 감추어졌던 신비를 밝히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에게 계시는 인간의 추구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왜곡시키기만 했을 것이다. 계시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과 존재를 드러내시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분이 드러내심으로써 생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다음 이 지식으로 나머지 모든 실재의 의미가 드러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문제 때문에 박해를 당하거나 기적적인 치유를 보았을 때, 이런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설명이 되었다(행1-5장). 다시 말해, 계시의 내용은 곧 하나님이셨으며, 그분의 성품과 본질은 주로 그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계시되었다. 그 구속 사역은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변호로 시작했으며 성자의 선도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계시가 지식을 전달한다면,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하나님의 드러내심에는 계시된 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요구된다. 그것은 적절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순종을 수반하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롬1:5, 16:26). 이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단순히 정신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
매개와 방식
계시는 어떤 매개나 방식을 통해 오는가?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계시는 많고 다양하다. 하나님은 제비뽑기, 환상, 귀로 들리는 소리, 꿈, 해몽, 천사, 예언의 영감, 역사적 사건, 은유, 비유 및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누구에게 계시할지 선택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제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계시는 그분의 위격이었다(요1:1). 이제 그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요1:17).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요14:9).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계시의 역사는 예수님 그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히1:1-2). 사도들의 영감된 저술을 통해 성자의 계시적 기능이 계속될 수 있도록 성령이 오셨다(요14:25-26, 16:12-15, 요일2:20, 27)
자연을 통한 계시?
장 칼뱅과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자연 가운데 그분 자신에 대한 객관적 계시를 주셨다고 주장했다. 칼뱅은 하나님의 존재, 본질, 속성을 나타내는 거울이자 무대인 창조 질서를 살펴봄으로써 창조자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에드워즈는 칼뱅과 의견을 같이하여, 자연의 구속자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만을 가리키며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자연은 도덕적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보여주지만, 죄인들이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로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는 자연이 하나님을 계시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연만을 통해서는 하나님께로 오지 못했다고 썼다.
일반 계시는 자연과 양심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지만(롬1:18-20,2:14-15), 특별 계시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따라서 그 전통에 접근한 자들에게만 알려졌다. 전자는 하나님의 존재, 능력, 도덕적 요구를 계시하는 반면, 후자만이 그런 요구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우리가 불가피한 실패에 대해 어떻게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지 가르쳐 준다. 계시라는 언어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임이 확인된다. 그것은 구원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자신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다. 종교들 가운데 있는 어떤 계시는 두 계시 중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아는 것을 반영하거나 심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들 가운데 있는 어떤 진리 주장들은 오직 하나 또는 소수의 종교들에만 해당하는 특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것들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 계시의 예라 할 수 없다. 특별 계시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특별계시는 보통 죄와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진리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교의 ‘무위’라는 개념은 신에게 항복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항복하지 않을 때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 계시도 아니고 특별 계시도 아니다.
계시에 드러나는 진리의 본질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진짜 계시를 주시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계속되는 논쟁들은 세 가지 문제와 관련이 있다.
첫째, 계시는 사건인가 아니면 단어들로 표현된 명제인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단어로 설명되는 역사상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한가, 아니면 입으로 하는 말과 명제적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에게 계시된 진리는 일어나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들은 어떤 것이라는 점도 똑같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목적들을 말씀하심으로써 스스로를 계시하셨다.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이 특정 장소와 시간에 전달받는 식으로 전해진 신적 말씀은 역사적이다. 메시지를 전달받고 이어서 그 메시지를 인간의 말로 반복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계시 자체는 역사 속에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하나님에게서 온 메시지로 더 잘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그분의 목적을 계시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아모스에게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성부 하나님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말씀하셨으며, 또 그들에게 주신 명령을 완성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신비를 계시하셨다고 말했으며, 또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계시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러니까 성경적 증거에 따르면 사건으로서의 계시와 말씀으로서의 계시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성경에는 둘 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씀은 사건을 해석하고, 사건들은 말씀으로 한 약속들을 성취한다.
둘째, 하나님의 진리는 개념화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계시된 진리의 명료성과 관련된 것이다. 계시는 말로 전달될 수 있는가,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형언 불가능성 논지’라 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후대 판에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 전달이라는 점에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만남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따라서 계시의 진리는 명제적이 아니라 실존적이며, 인간 “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당신”의 인격적 만남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으로부터 계시 중 많은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지만, 계시 중 일부는 명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일부 종교적 진리는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은 “지식을 초월”하고 또 인간은 신의 많은 것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계시라는 바로 그 개념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와 도의 일부 차원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언가를 알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분명하지도 모호하지도 않으며 유비적이다. 우리가 계시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때, 하나님은 그분을 빗댄 대상과 동일하지 않으시지만 전혀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대상과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다 들어 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는데, 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의미다. 성경의 객관적인 내용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성경의 독자는 신을 만날 수 있다.
셋째, 계시와 성경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건 또는 말씀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첫 번째 질문과 관련된다. 바르트를 따라서 계시는 언제나 사건이라고 말한 자들은 성경이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증언이라고 했다. 하나의 사물인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즐거움을 따라 계속해서 새롭게 수립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될 수 없다. 성령의 역동적 조명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가 아니다. 바르트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단회적 사역을 훼손시키면서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강조했다면, 반면에, 에드워즈는 더 균형 잡힌 방법, 즉 성경에 담긴 계시의 객관적 특성과 신자들에게 필요한 주관적 조명을 결합시키는 것을 제시한다.
계시의 차원들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상반되는 용어들을 사용했으며, 또한 각 쌍은 잘못된 이원론이라 제안했다. 계시는 사건들 및 그 사건들에 대한 명제들을 모두 포괄하며, 어떤 지점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또 다른 지점에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성령의 과정이나 활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객관적 내용 둘 다 포함한다. 계시에는 하나나 둘이 아니라 많은 차원이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낫다. 가톨릭 신학자 애버리 덜레스는 계시를 다섯 가지 모형으로 유익하게 정리하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 세계에 그분 자신을 계시하신 광범위한 방법들을 훌륭하게 조망한다. 그 모형들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1. 교리로서의 계시. 성경의 사건들이 성경의 말씀에 의해서만 해석되는 것으로 본다. 신앙이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내적·외적 타당성에 기초하는 합리적인 신뢰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2. 역사로서의 계시. 계시는 교리들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델러스는 성경 안에 있는 역사적 사건은 계시에 있어 물질적 요소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말씀은 형식적 요소라고 말함으로써 이 처음 두 견해들을 중재할 것을 제안한다.
3. 내적 경험으로서의 계시. 계시를 은혜의 내부 경험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로 여기는 것으로, 이때의 영적 지각은 개인에게 즉시 일어난다. 이 견해의 일부 형태는 계시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와 충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에게 계시는 객관적 극단뿐만 아니라 주관적 극단도 포함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4. 변증법적 존재로서의 계시.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월적이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믿음이 담긴 말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인간 존재를 만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한다.
5. 새로운 인식으로서의 계시. 계시는 사람의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일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진리는 실제적이고 구원하며, 고정된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복음주의자들은 계시에 정말로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조명이 성경의 기록된 계시에 역사하여 새로운 의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은 개인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복지와도 연결될 것이다.
델러스의 다섯 가지 계시 모형들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요점은 계시가 다차원적이라는 것이다. 계시가 모든 존재와 아름다움의 무한한 원천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현현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실재를 아우르신다. 따라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실재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이치에 맞다. 우리가 타 종교들 가운데 있는 계시에 대해 물을 때 계시가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계시의 해석
계시와 그 진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계시는 해석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첫째, 사람은 신적 계시라는 이 중대한 문제를 겸손한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 여러 세기 전에 위 디오니시우스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단편적이고 취약하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전혀 묘사할 수 없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 유창하지 못한 언어로 이야기 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합리적인 말로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신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쇠약하고 불완전한 특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유한한 언어를 사용해서 무한한 실재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는 희극의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둘째, 우리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종교개혁 원리를 준수해야한다. 성경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학문의 판단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객관적인 성경적 비평을 위해 이제껏 거쳐 온 많은 것의 전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근본주의적 주석들만큼이나 편견을 드러냈음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해석자들은 “성경의 다른 곳을 혐오스럽게 할 만큼 한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영국 종교개혁자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는 이음매 없는 온전한 전체이기에, 우리가 그것의 부분을 뜯어내면 전체 일관성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 칼뱅과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이성에서 비롯된 논거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은 성경의 신적 기원을 지지하는 최선의 논거는 성경 자체이며,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성경의 ‘自證(self-validation)’의 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면, 성경을 적절히 해석하는 데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해석의 가장 큰 부분은 신자의 눈을 열어서 성경 뒤에 있는, 성경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성경은 신적 계시라는 것을 믿는다 할지라도, 성경에 쓰인 말들만 읽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에 기록된 계시는 합리적 지식을 위해 필요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 계시는 합리적 지식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에게 구원의 은혜가 없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계시를 통해 얻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계시에는 양극이 있기 때문에, 해석은 왜곡될 여지가 있다. 특히 객관적 계시는 있지만 성령의 주관적 조명이 없는 자들의 경우 그렇다. 하나님이 계시에서조차 자유롭게 감추실 수 있다는 개념은 하나님이 다른 것들을 계시하면서도 계시를 받은 자들에게조차 자신을 숨기시고 어떤 것은 비밀로 하신다는 성경적 암시에 근거를 둔다. 그리스도인에게 계시는 종교 신자의 인식을 벗어날 만큼 종교를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시의 저자인 하나님의 영의 의도에 충실하게 봐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시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기독론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통해 그분 자신에 대해 드러내신 것은 외부에서 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계시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는 언젠가 이루어질 것보다 훨씬 더 부족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예수님께 속하기 때문에 그 계시를 조명하시면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 범위는 우주만큼 넓다. 다만 계시 자체는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한 확실한 입증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다른 개념은 그 위대한 기준에 준하여 평가 받아야 한다.
3장 성경적 시사
유대 기독교 전통 밖의 종교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가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적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하나님이 그분의 인격과 의도의 측면들에 대한 계시를 이스라엘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충분한 암시와 시사가 성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하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분의 인격과 사역의 일부 측면들에 대한 지식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는 성경적 증거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 지식은 구원으로 이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는 전통적 구분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경험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분을 알기 원하신다
구약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여호와는 모든 세계가 그분이 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할 뿐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도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 주제는 이사야, 에스겔서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 천하만국이 주님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사37:20). 이사야는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고난당하는 종이 열방에 빛과 정의를 가져올 때를 예언한다(사40:5; 42:1, 49:6). 에스겔은 하나님은 열방에게 그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며 모든 육체가 그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기 원하신다고 말한다(겔20:9-22; 21:5). 이런 구절들은 구약의 이야기가 하나님이 열방을 무시하고 단지 이스라엘이란 한 백성을 일으키고 구출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구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일으키고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고대 근동의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알리려고 작정하셨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약도 하나님이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기 원하심을 시사한다. 로마서를 비롯한 신약본문들은 자연과 양심 가운데 나타난 일반계시에 대해 언급하며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자연과 음식의 축복을 통해 그분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진술한다(행14:17). 이렇게 신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방식으로도 자신을 계시하심을 말한다.
히브리 민족과 기독교 전통 밖,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경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음을 진술한다. 창세기에는 가나안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시와 별개로 참 하나님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멜기세덱은 가나안 신의 이름으로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멜기세덱은 히브리인들로부터 계시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멜기세덱의 믿음이 아브라함과 동일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본문은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진 계시와는 별도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멜기세덱에게 있었음을 암시한다. 바로의 요술사들이나 발람 같은 이들은 구원하는 지식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참된 하나님에 대한 무언가를 알았다. 신약에 와서는 흥미진진한 전환이 더해진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고 선언한다(요1:3-4).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에 의해 빛을 받았다면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빛 안에 포함된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그리스의 시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행17:28).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로부터 배우다
나는 성경 속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하나님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하는데 이방인들의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런 세계관의 틀로 여호와를 이해했을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분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려고 그 틀을 사용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면 성경에 등장하는 언약이나 할례는 고대 근동에서 널리 사용되던 의식이었다. 고대 근동에서 할례는 사춘기, 풍요, 또는 결혼 의식으로 널리 시행되었다. 이는 하나님이 공통된 문화적 종교적 관습들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에게 새로운 종교적 개념들을 가르쳤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백성이 참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받지 않았던 자들에게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배운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이름도 이교에서 배운 하나의 예이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엘(el)”을 셈족들의 언어에서 차용했으며 신약 저자들은 헬라 용어 “테오스(theos)”를 빌려왔다. 시편 104편의 저자는 에멘호테프 4세의 이집트 찬송가에서 배웠을 수도 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이 두 문서의 내용은 놀랄 만큼 유사하다. 많은 학자들은 잠언 22장17절-24장22절은 비히브리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제임스 던은 이 본문이 초기 이집트 지혜전통인 “아메네모페의 가르침”과 구조와 주제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고 말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나사렛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두 이방인을 칭찬하셨다(눅4:24-26). 그들은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었다. 나아가 예수님은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백부장에 대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다(눅7:9).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마15:21-28),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권장하시며(눅10:25-27),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 오직 한 “이방인”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지적하셨다(눅17:18).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를 통해 그리스도의 선교가 이방인들에게 확장되었음을 배웠다. 이런 성경의 진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전통 밖에 있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는 것이 성경에 위배되는 생각이 아님을 보여준다.
4장 신학적 고찰
비기독교 종교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는가? 다만 그 종교들과 그리스도의 직접적 연속성은 없다. 종교적인 사람이 반드시 비종교적인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 앞에서는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님의 현현이 무한한 질적 차이로 분리되는 그런 존재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것처럼 비기독교 종교들은 기독교과 직접적 연속성이 있다고 하기 에는 기독교와 너무도 맞지 않는 목표와 방법을 제시한다. 다른 방향을 향하고 다른 질문들을 하며 다른 종류의 종교적 성취를 기대한다. 타종교들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계시가 존재할 수 있지만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 하는 활동을 하셨다.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타종교들도 있다. 힌두교의 박티(bhakti)운동이나 대승불교는 신자들이 신의 선물(기독교의 은혜 개념과 유사)에 의해 신성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겪은 경험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은 경험의 관계는 이중적(변증법적)이다.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둘 다 있다.
가빈 드 코스타는 성령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특수성을 인류 전체의 역사와 연결 짓게 한다고 강조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예수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지만,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읽는 방식은 성령이 타종교들 가운데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변혁되고 도전받는다. 예수님은 totus Deus이지만 totum Dei는 아니다. 이는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식의 규범이 되지만 그분만 배타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성령의 인도와 역사로 인해 변혁되고 풍성해진다. 성령은 메시아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교회에 제공하시는데 그 통찰의 일부는 기독교 밖의 사람들 안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저명한 신학자들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유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에게 심어진 말씀의 씨가 고대 이방인 저자들로 하여금 영적 실재들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교도들 가운데서도 나올 수 있음을 인정했다.
언약들과 종교들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양극화하여 분리시킨 것과 달리 칼빈은 두 언약(유대교의 행위언약과 기독교의 은혜언약)이 단지 동일한 언약의 다른 두 제도의 양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칼빈의 뒤를 이어 두 언약을 하나의 구속계획을 서로 다르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된 두 양식으로 묘사했다. 에드워즈는 행위언약은 은혜언약이라는 핵심을 싸고 있는 외피로 비유한다. 그는 전자가 언약의 참 의미를 간접적이고 모호하게 전달하는 율법의 문자라면 후자는 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율법의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복음이 구약에서는 불완전하고 드물게 계시되지만 신약에서는 충분하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우리는 기독교 밖의 타종교들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타종교들의 개념은 기독교의 계시와 자주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종교들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해 고찰할 때 에드워즈의 성찰에서 도움을 받는다. 첫째 타종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때로 모호하고 부분적이며 간접적으로 계시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안에 있음을 시사한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계시가 준비되기 위해 구약의 제사가 필요했던 것처럼 일부 종교에는 구약의 몇몇 과정에서 드러났던 하나님의 인격 및 품성의 측면과 비슷한 것을 보여주는 계시가 있을 수 있다. 일부 종교는 미래에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다. 대승불교와 힌두교의 박티는 모두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에게 이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둘 다 기독교 계시에서 가르치는 철저한 은혜 개념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복음서의 예수님을 모르는 이런 종교들에서도 하나님이 지니신 은혜로운 성품의 어떤 것이 밝혀지기도 한다.
에드워즈의 모형론
에드워즈는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영적인 것들의 모형으로 의도된 것임을 주장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출애굽은 신약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해방시키시는 일에 대한 모형이며 다윗의 고난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하는 고난의 모형이었다. 또한 에드워즈는 성경이 자연에 있는 모형 체제를 지지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씨와 열매의 비유로 몸의 부활을 설명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연적인 현상을 영적 실재들을 나타내는 모형으로 의도하셨음을 전제한다. 성경은 또한 인간 제도들이 영적 세계의 모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실재를 모형론적으로 보는 관점에 담긴 함축은 분명하다. 거짓이 포함된 종교들 가운데도 참된 종교의 모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것이라면 심지어 종교적 오류 속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계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희미하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적 계시가 될 수 있다. 에드워즈가 전개한 모형론은 유대-기독교 전통 밖의 종교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가능성을 신학적으로 입증해 준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바르트의 비유들
현대 개혁주의 사상가 중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밖에서도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믿은 사람이 에드워즈뿐만이 아니다. 기독교 이외에 참된 종교를 부인하는 칼 바르트도 교회 담 밖에 하나님의 계시가 상당히 실재한다고 믿었다. 바르트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단언한다면 기독교 밖에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가능성은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한다. 물론 바르트는 이것은 깜박거리는 작은 빛들일 뿐이며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이고 참된 빛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는 이 진리들은 나름대로 가치를 가졌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타종교들 가운데 있는 “일종의” 계시
적어도 일부 종교들 가운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계시가 있다. 먼저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증거가 있다. 이 계시는 신학자들이 일반계시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는 모든 시간과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신적 드러내심으로 그것에 의해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노래했고(시19:1) 이사야는 하나님이 유다로 돌아오실 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예언한다(사40:5).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통해 알려졌으며(롬1:20),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양심에 그분의 율법을 심어 놓았다고 말한다(롬2:14-15). 멜기세덱은 가나안 종교의 제사장이었으며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이해하는데 이스라엘 밖의 종교적 전통들이 전해지고 형성되었다. 발람은 거짓 선지자였지만 성령은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참된 예언을 하도록 하셨다. 바울은 그리스의 두 시인 에피메니데스와 아리투스가 종교적 진리를 전달함을 인정하였다.
어떤 종교가 참된 하나님의 정체성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종류의 계시인가? 예를 들어 대승불교나 힌두교의 박티는 신적 존재의 은혜라는 주제를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아니므로 특별계시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접하는 개념도 아니므로 일반계시라고 볼 수도 없다. 나는 이것들을 에드워즈가 많은 세계 종교들 가운데 발견한 모형과 유사한 “계시된 모형(revealed types)”이며 C.S. 루이스가 세계의 신화들 가운데 발견되는 “좋은 꿈”과 “위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종교들은 신적 실재들을 왜곡된 형태로 묘사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정체성의 어떤 측면들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들은 단순히 인간적인 통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인식들에서 (비록 왜곡되고 불완전하지만) 유래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들은 종교들 가운데 흩어져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각 종교들 속에 심어놓은 계시된 모형들(실재의 그림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런 모형들을 제공하셨는가?
아마도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이 계시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클라크 피녹은 종교는 그것이 인간의 삶을 보다 품위 있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의 선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마 더 흥미롭고 적절한 질문은 이 모형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프란시스 클루니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들의 신앙을 탐구하고 그 신앙들 가운데 참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자신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진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소승불교의 “부정의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경향을 교정해줄 수 있다. 마틴 루터 킹은 간디의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비폭력 저항 철학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비폭력은 단순히 바라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종교적 원리들의 구현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조지 린드백은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들로부터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타종교에 지금까지 기독교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진리란 기독교 계시에 이미 포함되거나 암시된 것을 넘어서는 다른 진리라기보다는 그 계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이해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타종교들에 기독교 계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모형들이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 계시를 뒤엎는 새로운 계시를 말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타종교들 가운데 있는 계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계시를 더 잘 이해할 방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줄 수 있다. 이것은 무한한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 해도 그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 계시를 이해하는데 계속 성장해야함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학은 성령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계시에 대한 교회의 이해를 늘리고 교정함으로 통해 발전해왔다. 그렇다면 계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성령의 조명과 더불어 타종교의 통찰로부터도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5장 오래된 패턴: 이집트인들을 강탈한 기독교 신학자들
성 아우구스티누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들이 부분적으로는 이교도 플로티노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기독교 진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이방인은 플라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신플라톤주의 신학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단순히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한 것이 아니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의 어렴풋한 형상으로 모든 세상을 영원한 원리들에 존재를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록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도움을 얻으려고 신플라톤주의를 고려했다.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악을 선의 궁핍,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았으며 성경 정경보다 성경 외적 전통들에서 유래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 받았다. 신플라톤주의는 그에게 어떤 개인도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완전히 초월적인 분이시라고 가르쳤다. 이런 인식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하심에 대해 성경이 강조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도나투스파 논쟁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데 신플라톤주의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비전을 보면서 성경의 저자들이 원죄가 늘 우리와 함께 있는 타락한 세계라고 말한 것을 이교도가 언뜻 경험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교회의 의식들이 거룩하다고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거룩하심에 참여할 때에만 그러하다. 교회는 주관적으로 거룩하지 않으며 또 그 자체로도 거룩하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현하려고 불완전하게 분투하는 일그러진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완전해진 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부활의 날 오직 하나님의 완전한 도성 안에서 끝나는 날까지 죄인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들이 성경적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유토피아적 엄숙주의와 도덕률 폐지론의 방종 사이에서 길을 찾도록 도와주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적 비전이 지닌 함축을 볼 수 있도록 도운 플라톤주의자(플로티노스)에게 빚을 진 것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을 종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 덕분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창조된 육체의 선함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을 소생시키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퀴나스의 업적은 기독교의 창조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세계 개념을 조화시킨 것이다. 영혼은 인간의 한 부분일 뿐이며 또 몸 안에 선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 몸의 부활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지지하는 철학을 아퀴나스에게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의 도움을 받아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분명히 설명하였다. 은총이 자연을 완전하게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연세계는 계시된 세계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자연의 행위와 모든 우연의 행위와 인간의 모든 자유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에 사용되는 도구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실재들을 단순한 인간적 현상으로 보는 자연적 관점에서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예들로 보는 계시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은 실재이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자연은 실재일 뿐만 아니라 선하며 그것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깊이 있는 관심으로 인해 아퀴나스는 이를 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퀴나스의 유비교리를 형성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하여 아퀴나스가 성찰한 결과 우리가 성경에서 얻는 지식을 이해하는 유익한 방법을 얻었다. 아퀴나스는 성경에서 얻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 명료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아퀴나스는 우리가 세상 속 사물들을 경험함으로써 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아퀴나스는 여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지고 유한한 언어를 사용하여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를 생각할 때 어떤 방식이 성령이 원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장 칼뱅
장 칼뱅의 지적 맥락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그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상당한 빚을 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칼뱅은 평생 동안 에라스무스의 사상세계에서 살았으며 그 세계의 영적 공기를 마셨다. 칼뱅은 복음과 특히 에라스무스를 관련지어 “기독교 철학”을 서술했다. 그는 주요 방면에서 늘 후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였다라고 윌리엄 부스마는 언급한다. 칼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엄격히 이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교 사상과 혼합된 점으로 인해 이제는 하위 기독교로 인식되고 있는 그러한 입장들을 취했다. 인문주의가 수사학을 강조한 것 역시 그가 설교의 중요성을 볼 수 있게 도왔다. 또 인간의 노력으로 자기 개혁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인문주의 확신은 칼뱅을 자극하여 우리가 성화로 알게 된 것에 주목하게 했다. (물론 칼뱅은 성령의 사역 없이 인간의 노력은 헛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인문주의적 요소를 기독교화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칼뱅에게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는 그들이 웅변술을 청중의 귀에 의도적으로 맞추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칼뱅은 하나님이 어떻게 성경을 통해 가르치시는지 설명하는 데 이와 같은 인문주의 훈련을 연결지었다. 훌륭한 인간 교사가 청중의 필요에 자신의 가르침을 맞추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분 자신을 인간의 능력에 맞추신다고 말했다. 칼뱅에게 적응의 원리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인지하는 방식에 따라서 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필요와 능력에 맞추어서, 수사학적으로 말했다. 칼뱅의 적응 교리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통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심을 성경에 이따금 나오는 거북스러운 것, 명백한 불일치,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과 어떻게 조화시킬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칼뱅은 기독교 계시의 본질 또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교사상가의 도움을 받은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였다.
6장 불교의 무아와 무념
불교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한 가지를 말하는 듯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다.
다른 비전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경배한다. 붓다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고통을 피하도록 가르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고통을 정복하는 길을 보여 주셨다. 불교와 기독교의 윤리는 중요한 원리들에 있어서 의견이 일치하지만(도둑질, 거짓말,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것, 성적 비행은 나쁜 것이며 동정과 연민은 필수적인 것이다), 윤리와 궁극적 실재의 관계에 있어서는 의견이 다르다. 고타마 붓다와 대승불교 신자들에게 윤리적 삶은 열반의 건너편 연안으로 태워 가는 임시 뗏목으로 거기 도착한 다음에는 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선과 악의 차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옳고 그름의 구별은 실재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영원까지 지속될 것이다. 불교 신자들은 『법구경』에서 “육체적 존재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다”는 구절을 읽는다. 사람이 삶, 죽음, 환생의 끝없는 순환-사마라(samara)로 알려진 순환-에 남아 있는 한, 우주 안에 있는 삶이 불러일으키는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세속적 존재는 필연적으로 눈물의 계곡에 있다. 이 고달픈 환생의 순환을 벗어나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생각과 언어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
고타마 붓다와 후계자들은 초월적 진리가 감각에 의한 인식과 지적 개념 너머에 있다고 강조한다. 궁극적 진리의 기준과 대비되는 모든 사건과 물질은 ‘공(空)’이다. 최종적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지만 사건과 물질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완전한 지혜는 궁극적 실재가 영(零, Sunya)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뜻한다. 즉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차이의 힘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붓다는 우리가 최종적 실재라고 부르는 것의 엄존을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부르는 이름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에게 실재를 단어나 개념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불손한 짓이었다. 그는 의지를 발휘하거나 지적 공식으로는 궁극적 실재(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를 간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이성으로 이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갖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피조물들을 통해 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분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애매하고 거울에 비친 듯하며 멀리 있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우리의 유한한 이 세상 기준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단언들을 절대화하거나 우상으로 바꾸지 않도록 주의하라. 칼 바르트가 표현한 말처럼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기 때문에 더 큰 존재시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때로 하나님을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어떤 분으로 여기며 우상숭배를 하듯 본다.
바르트 및 이사야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불교 전통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질적으로 그리고 무한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라고 충고한다. 선불교 전통들은 신자들에게 바라보는 모든 것을 자신과 연결 짓는 자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중지하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자아를 중요시하는 데 집착하는 한 정말로 있는 것을 보거나 듣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세상이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에 대해 눈멀 것이다. 禪의 통찰을 자신의 기독교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하고자 노력했던 예수회 학자 로버트 케네디는 “우리가 징징거릴 때 주목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의 대상일 수 있겠는가?”하고 묻는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응답받지 못한 기도들은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섬김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을 장엄하게 상기시킨다.
붓다와 그의 후계자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들어 온 것만 보고 듣는 경향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킬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실재는 우리가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또 우리가 전에 해 보지 않은 것처럼 보고 들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도록 -우리가 그들에게 허락한다면- 촉구할 수 있다. 때로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우상을 숭배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수님을 친구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거인”(The Big Man) 또는 “위에 계신 분”(The Man Upstairs)이라 부른다. 불교 전통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과 상관없이 무한히 멀리 계시며, 또 사실상 우리가 기도하고 이야기하는 목적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한스 큉이 표현한 것처럼, 최종적 무한성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부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고 무한히 선하시며 절대선이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시고 동시에 침투하신다. 하나님은 무한히 멀리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은 “형태가 없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조차 그분은 존재하신다.” 모든 진술은 그것이 탁월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려면,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을 통과해야 한다.
세상과 자아의 우연성
불교 사상가들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불교의 ‘의존적 발생’이라는 교리는 우주의 어떠한 현상도 고립되거나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모든 현상은 모든 다른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緣起論). 세상은 일시적이고 항상 변하며 어떤 영구적인 토대도 없다. 이를 통해, 세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의 연속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고 하는 성경의 주장이 더욱 뒷받침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이 세상 속 사물들을 통해 그것들의 실재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순전한 하나님의 생각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어떤 사물은 다른 모든 것과 독립해 있는 정체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신적 의사소통의 표현이다. 사무엘 존슨, “사물들은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붓다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존재의 실존을 부인하지 않고 존재와 비존재의 중도를 설파했다.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으로 실체-보통 ‘존재’라 부르는 것-를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세상이 우연하다면 인간 자아도 우연하다는 붓다의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의 교리는 변화하지 않는 대상은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의 기본 원리인 ‘무’(無)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모든 것처럼, 인간은 순전히 우연하며, 전적으로 존재의 체계에 의존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시시각각 유지되는 것이다. 루터의 다음 글은 신의 자비를 바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내 영혼에는 자비가 없다. 내 동료의 선은 내가 보기에 중요하지 않다. 만약 자비의 방주, 무한한 지혜를 지니신 신의 약속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고통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가?” 불교 사상가들이 자아와 세계에 대한 성경의 견해에 질적으로 더해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창조 질서의 근본적 우연성에 대한 성경의 주장을 확인시켜 주고 선명하게 한다.
일상적인 것의 신비
지상에 살면서 날마다 하늘을 보는 것은 중국 불교의 업적이다. 중국 선종에서는 사람이 일상생활의 모든 세부적인 일 속에서 궁극적 실재를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세상에서 물러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사람은 항상 우리 앞에 있는 실재를 보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육조 혜능 대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신비를 창조 세계와 역사의 모든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와 같은 생각은 기독교에 낯설지 않다.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에드워즈의 만유재신론을 자연과 역사의 모든 것에 계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범신론이 된다고 추정할 필요가 없다. 혜능 대사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성경 저자들은 분명 그분을 믿었다. 일상적인 것의 신비를 인식한다는 것은 히브리인들처럼 삶을 보는 것이다. 부차적이 아니라 주된 원인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는 것이다. 그들의 적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패배하게 한 것은 하나님이다. 장수들이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다. 농사가 실패했다면, 하나님이 가뭄을 보내셨기 때문이었다. 진리는 하나님이 아스피린 알약을 통해 내 두통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성경이 창조와 섭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참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당장 바로 여기 계시다는 드 멜로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것을 할 필요는 없다. 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잠잠하게 하고, 고요해지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당신의 손에 닿는 느낌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그리스도인들이 선종과 선불교 전통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부 신자들이 수 세기 동안 묻혀 있던 기독교 계시의 여러 차원들을 다시 전용할 수 있었다.
옛 사람의 강박적 집착
신비주의가 더 흔하고 중요한 아시아의 종교 사상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과 바울, 다른 성경 주제와 저자들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불교 교리가 바울의 '옛 사람' 개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루터가 말한 '구부러진 자아'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불교 신자들에게 인간조건의 본질은 그들이 '욕망'이라 부르는 것으로, 자아의 생각과 바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의미한다. 이는 곧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자신에게 욕망 그 자체를 중심으로 보고 그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라고 요구하는 자기주장의 표현이다. 관찰자의 자아와 떨어져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관찰자 안에 있는 '옛 사람'은 각 사물을 관찰자와 관련지은 상태로만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에 완고하게 집착할 때, 우리는 사물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에머슨이 말한 대로, 우리는 우리가 인도 제국에 가지고 가는 것만 인도 제국에서 가지고 돌아온다. 즉 익숙하게 보던 것만 본다. 우리의 이기적인 집착은 실재의 참된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방금 말한 것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다음에 말할 것을 생각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사는 것, 현재의 순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힘들다. D. H. 로렌스가 말한 대로, “그들이 처한 자리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도덕조차도 우리가 참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는 일련의 개념들에 대한 집착이 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윤리적 확신으로 인해 참된 하나님과 맺는 관계의 전적인 개별성을 보지 못하게 되어 종교적 삶의 가장 높은 단계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관습적 도덕의 범주들로 인해 가까이 있는 영적 진리를 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셨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 관리에게 그가 선에 대해 묻는 이유를 물으시고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기 의에 빠져 도덕적 판단으로 인해 실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신에 대한 개념들로 하나님을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영성 훈련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짜 심판을 대면할 때 안전할 것이라고 하는 자기 의로 흐를 수 있다. 자아의 잘못된 인식들과 밀접한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바울이 ‘옛 사람’이라 불렀던 것을 잘 나타낸다.
십자가 위에 앉아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린다〕"(골3:9, 엡4:22)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서 다시 불교의 이해가 도움이 된다. 옛 사람이 일종의 집착이라면 그것을 벗어 버린다는 것은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든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생각을 놓아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옛 선승들이 "붓다를 본다면 그를 죽여라!" 하고 말했을 때 의미와 비슷하다. 이기적인 자아에서 나오는 우리 자신의 생각들은 도덕과 종교에 대한 생각일 때조차도 파괴적이며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을 자기 비움 또는 놓아버림으로 제시한다. 헬라어로는 케노시스(kenosis),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적 형태를 ‘비우셨으며’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빌2:7). 그 결과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서 유사한 놓아버림을 보여 주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그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2:1-2)만 의지하기 위해 웅변술과 인간의 지혜를 놓아버리기로 결심했다고 쓴다. 이것은 세련된 수사학과 최신 철학을 높이 평가했던 문화에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놓아 버리는 것을 마치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의지처럼, 그리스도를 규율에 맞춰 단호히 따르거나 본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의 실재들을 통해 우리는 은혜를 떠나서 의지는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놓아 버린다는 것은 성령의 우선적 생명력에 의해서만 생기며, 자아의 욕망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께 집중하는 일종의 무사무욕이다. 내적 변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행위(doing)가 아니라 존재(being)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진짜 죽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비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놓아버림이다. 우리가 참 생명을 찾고, 그 결과 목숨을 잃는 것이다(눅17:33).
참 자아를 찾아서
불교 신자들은 우리 본래의 얼굴을 보고 그 안에서 붓다를 발견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종의 육조는 우리가 그 같은 발견을 하면 자연스럽게 실재를 경험할 것이라고 했다. 선불교 신자들이 사토리(satori, 각성 또는 깨달음)가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 본래의 얼굴 또는 참 자아를 보게 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옛 사람을 놓아 버리는 것 역시 우리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이 새롭고 참된 자아는 스스로에 집착하지 않고 토머스 머튼이 표현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능한다.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의 가장 깊은 행동 원리가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 이상 자신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정의와 선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하며 살게 된다. 선승들이 사토리의 경험을 묘사하면서 말한 쾌활하고 근심 걱정이 거의 없는 자연스러움은 바울이 뜻한 성령 안에서 사는 삶(롬8장)과 유사하다.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는 삶이다. 루터는 이를 ‘속박되지 않는 것’(suasponte)이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사랑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라”(Amaet fac quod vis)고 격려했을 때 그가 마음에 두었던 삶이다. 즉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나’가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 자기를 의식하는 ‘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감정이 종종 자아에 근거하며 사람의 보기와 듣기를 왜곡한다고 하는 불교 신자들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사토리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자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두 가지 마지막 언급
불교 신자들이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는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 신자들의 묵상 기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긴장을 풀고 고요해지고 더 깊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며 마음뿐만 아니라 몸으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다. 둘째, 불교 신자들은 우리 자신의 머리 외부에 있는 것은 알 수 없다고 전제하는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진지한 사상가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불교 신자들이 열반의 이편에서 지적 순수함을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지만, 왜곡에서 벗어난 진짜 자유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의견이 같다. 그러나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유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보는 것처럼 언제나 부분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는 부분적으로만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여전히 귀중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가 있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의 지성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영원히 불가지론에 처해 있을 운명이 아니다.
제7장 도교의 위장 신학
도교는 종교적 도교와 철학적 도교로 나누어진다. 종교적 도교 신자들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신들과 인간 본성, 의식들을 통한 죄책 및 죄로부터의 구속을 믿는다. 그들은 불멸을 추구한다. 한편, 철학적 도교 신자들은 사후의 삶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며, 우주에 생기를 불어넣는 감추어진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표면에 드러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도(道)를 목표로 한다. 이 장에서 나는 철학적 도교에 집중할 것이다. 서양에서는『도덕경』과『장자』로 인해 철학적 도교가 더 익숙하다. 이 문서들은 아시아 지혜 문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잠언 같은 히브리 지혜 문학과 유사하다. 두 문서의 저자로 추정되는 노자와 장자는 예수님처럼 당시 문화들과 대립 상태에 있었다. 예수님의 지혜는, ‘노장’의 제안과 같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고 실제로 고통을 피하도록 돕는 방식을 뛰어넘어 궁극적 실재가 결국 인격적이며, 고통을 그 자체 안에 취한다. 하나님은 함께 우리의 고통 가운데로 들어오시는 인격이심을 보여 주셨다. 실제로 하나님 자신은 죽음이라는 궁극적 악을 겪으시고 극복하셨으며,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것이 잠언, 노자, 장자의 옛 지혜를 무색하게 하고 이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지혜다.
위장해 계신 하나님
‘노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종종 위장(僞裝)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임재와 지혜는 종종 그 분의 부재와 어리석음으로 여겨진다.『도덕경』은 인격적 신이 아니라 만물에 생기를 주고 스며들며 움직이는 비인격적 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도덕경』에서 실재는 그 보이는 것과 같지 않고 또 지혜는 종종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메시지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자는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 확립된 덕은 부주의한 것 같다”고 하면서, 바울의 생각을 상기시켰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행하고 일하고 분투하는 활동을 덕이라 생각한다. 행위는 구원하지 못한다는 항변이 있지만, 복음주의자들까지도 종교적 규율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정반대의 확신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하게도, 복음주의자들은 이 철학적 도교 사상가들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이 신앙생활 속에 살아 있는 실재가 되는 것의 의미를 되찾도록 (또는 처음으로 알 수 있도록) 도움 받을 수 있다. 그 이해를 열어 줄 수 있는 문은 ‘무위’(無爲)라 부르는 난해한 개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행하거나 행동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도가 행동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역효과를 낳을 것이며, 우리가 자유롭게 놓아주려고 하는 일들을 망쳐 놓기만 할 것이다. 도를 기다리는 자들은 그들의 초기 기대가 채워지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무위’ 또는 무행동의 다른 의미는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행동 자체에 애착을 보이지 않으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곧 덕과 가치를 쌓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도(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헌신하는 삶이다. 자의식적인 숙고의 방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사는 자발적 방식-그리스도 그 분의 삶-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장자에게 덕의 삶은 계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영적 연합의 산물이다. 장자에게 위대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가치와 덕의 창고를 세운 사람이 아니라 도가 그 안에서 ‘물 흐르듯’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는 ‘도인’이다. 이것은 신약이 설명하는 ‘믿음의 삶’과 유사한 길이며, 곧 ‘선’이 아니라 도(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행위가 아니라 연합을 목표로 하는 삶인 것이다. 장자의 말을 빌리면, 자아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마치 자아가 “마른 나무 그루터기” 또는 “죽은 재”인 것처럼 그것에 대해 잊어버린 사람의 총체적 겸손이다.노장은 도와 연합하여 생기는 무사무욕으로 인해 우리는 자아의 끔찍한 요구로부터 해방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와 사시게 한다면, 우리는 첫째가 되고 인정받으려는 자아의 강한 욕구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 자아의 요구를 무시하고 도에 항복한 결과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버릴 때만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강조하셨던 바로 그 아이러니와 같다. 변화되는 것과 변화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체념하는 것은 선의 심연에 몸을 맡기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자족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복음주의자인 우리는 철학적 도교의 우주론이나 신학을 취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궁극적 실재가 인격적이며, 따라서 섭리는 차가운 운명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도교 사상가들이 무정한 도의 작용을 신뢰함으로써 만족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그분의 돌보심을 보여 주신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신뢰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불완전하게 알던 하나님을 신뢰한 이교도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주가 궁극적으로 이로운 작용을 한다고 신뢰하는 도교 신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역설적인 방식
철학적 도교 신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약함을 통해 강함을 낳으신다는 성경적 역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노자가 바울이 의미했던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그의 육체의 가시를 고쳐 주기를 거절하셨다는 사실로 바울이 어리둥절했던 역설적 패턴에는 익숙했다. 그는 약함과 내세우지 않음이 어떻게 강함과 우세함으로 나아가는지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 노자는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장성시키되 주재(主宰)하지 않으니, 심오한 힘이다”라고 말했다. 분명한 무위(불활동)에도 불구하고, 행위(활동)가 이루어진다. (후왕은 자신을 고과불곡(孤寡不穀역)이라 부르니, 이는 천한 것으로써 근본을 삼음이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치가 있다. 역설은 반대로 작동하기도 한다. 강함은 약함 가운데서 자라고 명예는 겸손으로부터 자랄 뿐만 아니라, 약함도 교만한 강함에서 생긴다. 노자는 바울과 비슷한 말로 결론을 내린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
그러나 중국의 지혜가 이러한 패턴의 편만함과 실재를 보여준다면, 유대 지혜와 기독교 지혜는 세상이 이와 같이 작동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이라.” 바울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역설적으로 작동한다. 카르마(karma) 또는 도라고 부르는 추상적 질서 같은 비인격적 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그분의 성도들이 엄청난 영광과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종종 재난이 임하게 하셔서, 그들이 이 세상의 것들-심지어 영적 성공까지도-을 신뢰하지 않게 하신다고 덧붙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사 23:9) 하고 그분의 백성이 자신들을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게 하여 하나님 한 분만 칭송을 받으실 수 있게 하려고 이런 패턴을 허락하신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14년 전, 갈라디아에서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면서 이 역설의 실재를 경험했다. 바울이 세 번이나 질병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울이 (육체적으로)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를 위해 더 큰 영적 치유를 예비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기묘하게도, 하나님은 바울이 “사탄의 사자”(고후 12:7)라고 한 것을 제거하길 정말로 원하지 않으셨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나님은 바울이 그분의 불가해한 목적을 위해 사탄(!)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서 갖고 있기를 원하셨다. 욥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은 그분의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마의 일을 분명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을 사용해 선을 빚으신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오직 약함 가운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약한 채 있기를 원하셨다는 점이다. 이는 도교 신자들이 알았고 바울도 실례를 들어 보여 준 역설이다.
제8장 덕에 대한 유교의 헌신
공자는 신학보다 인간 도덕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연관된 전통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 선함에 기반을 둔 인간학으로 발전되었다. 하지만 공자 자신은 신적 세계의 실재를 확신했고, 『논어』에는 인간성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개념이 훨씬 더 많다. 하늘은 그가 지닌 덕의 저자이자 기도의 대상이었다. 하늘의 법령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으며 자연의 움직임을 그것의 통제 아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공자는 하늘을 인격적 신과 같은 무언가로 여겼지만, 맹자는 하늘은 더 내재적이고 비인격적이라 했다. 그러나 맹자조차도 하늘은 인간의 중재 없이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하면서, 행동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유교 전통은 인간 본성을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유교 전통은 인간의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했다. 인간의 근본적 본성은 선할지 모르지만, 그 행적은 악으로 상당히 더럽혀져 있다. 인간 본성의 근본적 선함이라는 교리로 알려진 맹자조차 도는 찾기 전혀 어렵지 않은 넓은 길과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 도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유교의 교리는 실제적 선함보다 잠재적 선함을 강조한다. 인간은 네 가지 덕의 싹(四端-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맹자는 단지 사람이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또 사람들이 나쁘게 된다면 그들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다. 야고보는 우리가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나 원래의 본성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탓해야 한다고 말했다(약 1:13-16). 신유학파 사람들은 인간 본성의 양면-즉 선한 하늘의 근본적 본성과 선하거나 악할 수 있는 육체적·실존적 본성-에 대해 말했다. 유교전통은 죄라는 기독교적 개념에 접촉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 잠재적 선함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죄로 손상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과 비슷하다. 유교 전통에서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다.
중국의 정언적 명령법
'공맹'은 진리와 옳은 것에 대한 헌신을 철저히 가르쳐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당황하게 한다. 중국 현자들은 도를 따르는 것이 가난,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을 때조차도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했다. 덕을 추구하는 것은 외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 복음주의가 물질주의와 성공이라는 술에 취하고 있는 시대에, 이 중국 교사들은 (이교적) 해독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들은 우리가 오래전에 미국 기독교 의식에서 상실해 버린 기독교, 그야말로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전통-사심 없이 선을 행하는 에드워즈 전통-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신앙감정론』에서 에드워즈는 참된 영성은 자기 유익(self-interest)에 근거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사랑 또는 이 세상의 사랑은 내 사랑에 대해 돌려받을 수 있는 것에 근거를 둔다고 하였다. 또 예수님은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사랑은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이 단순히 이기심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자, 사탄이 욥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게 하는 데 동의하셨다. 여기에서 흥미진진한 함축은 하나님은 단지 이기심에 근거한 영성은 무가치하다는 사탄의 가정을 인정하셨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주된 이유는 그로 인해 생길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나는 장엄하심, 아름다움과 영광, 그분 자체 때문이다. 칸트의 정언적(定言的) 명령도 비슷하다. 인간 도덕의 내적 원리는 보편적인 법으로 받아들여 따라 행해야 하는 무조건적 규칙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의 결과를 묻지 않아야 한다. 이 의무를 지키기로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칸트의 윤리는 ‘비결과주의’라 불린다. 그런가 하면, 에드워즈와 칸트 사이에 큰 차이점도 있다. 칸트는 보상에 대한 관심이 윤리적 진지함을 약화시킨다고 믿는 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근거하는 한 성화의 과정에서 하늘의 보상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이유가 이익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라는 유교 전통에 동의했다. 에드워즈도 루이스도 윤리적 삶에 대한 동기로 보상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윤리적 삶의 주요 근간을 이룬다면 그것은 타락이라고 일축한다. 공자와 맹자는 그러한 원리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제공한다. 그들은 좌도 우도 아닌 오직 도를 향해 똑바로 가는 삶에 헌신했다. 거친 밥과 마실 물이 도를 따를 때 얻는 전부라 해도 행복하다. 이익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옳은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에 대해 염려한다. 현자들은 부유하고 유명할 때도 지나칠 수 없고, 또 가난하고 유명하지 않을 때도 목적에서 빗나갈 수 없다. 우월한 힘 앞에서 원리를 타협할 수도 없다. 따라서 군자는 역경을 만난다고 해도 결코 의를 포기하지 않으며 성공했다고 해서 도에서 떠나지 않는다. 참된 덕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나쁜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충(忠)과 서(恕)
유교 신자들이 순전한 기쁨을 위해 도를 따른다면, 도는 그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그들은 인(仁)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행동의 한 가지 특성으로서) 대략 ‘자비심 또는 인간애’로 번역할 수 있다. 인은 예(禮)로 돌아가려는 시도인데, 예는 ‘의식, 관습, 예절 또는 태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동안 예는 종교적 의식에서의 관습으로 좁게 규정되어 있었다. 공자는 예를 사람의 마음 및 양심에 대한 성실함(忠)과 호혜주의(恕)로 규정했다. 그가 “종신토록 행할 만한 한 마디”라고 했던 이 마지막 특성은 부정의 황금률이라 일컬어진다. 즉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긍정의 표현으로 말했다. “네가 대접받기 원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대접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너는 이것이 인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 것이다.” 서(恕)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끌고 충(忠)은 자아에 대한 지식으로 이끄는데, 이는 겸손을 가져올 것이다. 논어에서는 로마서 7장에 기록된 바울의 필사적인 외침을 연상시키는 말로 자신의 도덕적 무능을 탄식했다. “덕(德)을 닦지 못하는 것, 학(學)을 강마(講磨)하지 못하는 것, 의(義)를 듣고 옮겨 가지 못하는 것, 착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걱정거리다.” 그러므로 그는 인을 추구하는 자들은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맹자는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남을 사랑했는데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인을 반성하고, 남에게 예를 베풀어도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심을 반성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행위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때마다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자기 자신이 바르게 되면 천하가 그에게 돌아간다.”
마지막 언급
이 마지막 언급으로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유교와 기독교 신앙 간 중요한 차이를 떠올릴 것이다. '공맹'은 하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준 본래의 도덕적 감각이 있다고 믿었다. 이는 바울이 “그 마음에 새긴” 신적 율법이라 일컬은 것과 유사할 수 있다(롬 2:14-15). 그러나 그들(특히 공자)은 이 도덕적 의식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하늘의 거룩함에 대해 아직 계발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인간의 능력으로 자아를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들은 신적 계시보다는 고대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여성 혐오의 경향과 엄격한 계급주의의 기초를 놓는다. 한스 큉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족과 국가에만 사랑을 국한시킨 유교를 능가하셨다. 이 팔레스타인 현자는 육과 혈의 구분을-또한 성차 구분에 대해서도-극복하기를 원하셨다. 제프리 와틀즈에 따르면, 유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족으로 대할 때 하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행위자가 자기 가족에게 베풀었던 배려를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장하는 황금률”에 기초하여 본다. 반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신학적 근거를 주셨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므로 사랑을 받아야 한다. 공자는 원수는 사랑이 아니라 교정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수를 대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교 전통이 진리를 따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게 상기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예수님의 급진적인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통찰을 준다.
9장 무함마드와 하나님의 증표들
복음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대중 매체를 통해 매우 전투적인 무슬림들의 나쁜 선례만을 보고, 무슬림들 역시 마찬가지로 십자군과 북아일랜드에 근거해 기독교를 그리 보는 경향이 있다.많은 무슬림들은 서구를 양면적 태도로 바라본다. 서구 기술은 인정하고 사용하지만 서구 문화는 자신들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 서구 문화는 도덕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현대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슬림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관례 때문에 서구, 특히 미국을 비종교적이고 무신론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신다면, 국가를 포함한 삶의 모든 측면은 그분 법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무슬림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법(샤리아)은 지상 모든 나라의 법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근본적 원리로 기여한다. 특히 시온주의자와 미국인의 음모로 중동이 가장 위험한 화약고가 되고 이스라엘을 미국의 의존국으로 보고, 미국 정부는 유대인 로비에 지배받는다고 믿는다.
몇 가지 놀라운 일들
서로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정보로 인해 많은 왜곡이 있다. 이슬람교는 가장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 무슬림들은 공격적으로 전도하고 메시지는 단순하며 정치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국가 변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슬람교는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다(미국 무슬림의 3분의 1은 흑인이다). 이슬람교의 급속한 성장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출산율이다. 가장 큰 무슬림 국가들의 여성은 평균 5명의 아이를 낳는다. 또한 대부분의 무슬림들이 중동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워한다(인니 1억 1,600만, 파키스탄 1억 5,000만, 인도 1억 2,100만).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예수님을 대단히 존경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꾸란에도 예수는 메시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 주님께서 보내신 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의 역사성을 받아들인다. 무슬림은 구약과 신약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 다만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의 중요한 점을 오염시켰다고 단서를 붙인다. 유대인은 자신들만을 위한 배타적 구원선포가 문제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만들었으며, 그래서 알라가 금지한 다신론으로 되돌아가는 실수를 했다고 믿는다. 무슬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공로 없이 받은 호의를 의미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 강조한다. 즉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그들을 위해 중보 하는 무함마드에게 소망을 둔다고 고백한다. 원죄와 인간의 타락을 부인하지만, 꾸란에도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또한 일부 무슬림에는 구속적 고난의 전통이 있는데, 680년 무함마드의 손자 후사인이 암살당했는데 시아파 신도들은 그가 “그의 백성을 위한, 인류를 위한 몸값”을 치렀다고 믿는다.
차이점들
각 경전의 내용이 현저히 다르다. 꾸란은 신약과 길이만 비슷하고, 한 사람에 의해 구술되었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다양한 저자로 예수의 생애 사건들을 전달한다. 꾸란은 무함마드의 생애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서다. 하나님은 한 분이고 주관적이시며, 심판이 오고 있고, 우리는 알라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성경 영감의 본질에 대해서도 매우 다른 이해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인간과 신적 작용의 합작품으로 믿지만, 무슬림들은 꾸란에는 인간의 영향력은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믿으며, 구술 영감론을 받아들인다.
두드러진 교훈들
1) 하나님에 대한 복종. 무함마드는 궁극적인 미덕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슬람’의 문자적 의미)이라고 가르쳤다. 사람의 개인적 바람들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의 유일한 의무는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이다. 각자가 선지자들 중 가장 위대하고 마지막인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삶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돈, 가족, 인종, 성공, 지상에서의 삶 자체-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시르크)이며, 지옥의 끓는 물과 타는 듯한 바람을 받아 마땅할 구제할 수 없는 방종이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무대인 창조 세계. 꾸란에 나오는 공통적인 주제는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실재를 나타내는 증표들이 많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보통 창조 세계의 증거 가치를 염두에 두는데, 하나님의 증표들은 어디에나 있고, 특히 자연 속에 많다는 것이다. 인간 문화에도 증표들이 가득하다. 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덕분에” 바다를 항해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 언어들은 하나님의 존재,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추가적인 증표들이다. 무함마드에게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은 신적 실재의 증거로 보였다. 아마도 하나님이 보이신 가장 특별한 증표는 인간이다.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의 도덕적 본질에 대한 증거로 특별히 언급한다. 유감스럽게도, 꾸란은 대부분의 인간이 교만이나 헤아리기 어려운 사악함 때문에 증표들을 “부정하거나 거부한다”고 탄식한다. 이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죄, 즉 ‘시르크(우상숭배)’라는 죄의 결과다.
3) 규칙적이고 신 중심적인 기도. 하루에 다섯 번 선한 무슬림은 메카를 행해서 팔뚝, 발, 입, 콧구멍을 세 번 닦고 암송해 놓은 믿음, 찬양, 감사의 기도문을 읊는다. 기도의 주된 부분은 간구가 아니라 예배라고 생각하며 하루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시간을 내서 우리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 꾸란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대단히 강조한다. 불신과 위선적 종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견지에서 규정된다. 불운한 자들을 돕지 않는 것은 일부 본문에서 지옥에 가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로 나온다. 예수님처럼, 무함마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베푸는 자들을 비난했다. 그와 같은 접근은 사람의 자선 행위를 “헛되게 할”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무슬림은 ‘자카트’(수니파는 자기 소득의 2.5%, 시아파는 20%를 구호금으로 드릴 것을 요구한다)와 ‘사다카’라고 하는 자선을 구분한다. 전자는 법적이고 의무적인 행위이고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일부로, 실제적으로는 예배의 기술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일 년에 한 번 지불하는 세금에 더 가까우며, ‘자카트’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 중 하나는 ‘순결’인데, 적절한 비율을 이슬람 공동체에 기증하기 전까지 돈은 ‘불결’하다는 뜻이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돈의 일부를 공동체에 바칠 때까지 돈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다는 무슬림의 확신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
5) 신앙과 공공 광장. 이슬람교를 통해 종교와 관련 없는 공공 광장은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인간의 마음은 교정 할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이라 믿는다. 무신론자조차도 종교적이다. 그러므로 정부를 비롯해 공적 생활과 동떨어진 종교를 말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비적 환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 또는 도덕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음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금지될 때, 빈 공간이 생기고 다른 신들(인종 또는 국가 또는 세속적 이데올로기)이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몰려든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무슬림들은 종교가 단지 사적이고 주관적인 일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더 잘 이해한다. 우리의 개인적 취향에 맞는 종교들을 찾을 수 있다는 광범위한 포스트모던주의 태도는 종교를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몰아냄으로써 현상을 강화하고 종교는 약화되며 국가 권력은 확장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라민 샤네는 말한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증표들의 명확성에 대해 조건 없이 단언하기를 원치 않을지 모르지만,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무슬림의 답이 지닌 힘을 인정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혼란한 세상에서, 이슬람교는 단순하고 분명한 답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10장 결론: 반대와 응답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그림자는 역사 전체에 흩어져 있다. 자연과 양심(일반 계시) 안에도 있고 종교 전통들 가운데도 흩어져 있다.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나는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개념을 뒷받침해주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근거가 있으며, 정말로 그렇게 한 그리스도인 사상가들이 줄곧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 밖의 몇몇 본문과 전통에서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특별한 교훈들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가 무한하고 그분의 계시가 무한하다면(우리는 둘 다 참되다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그 계시의 진리를 교회에 밝히신다면(노예제, 여성, 성령의 은사에 대한 우리의 점진적 이해), 우리는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성경적 계시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모든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성령은 아직 우리에게 존재라는 것의 절반도 보여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기본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적용은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발생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증가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 깨닫는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다시 적용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적 계시 자체를 묵상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조명만이 유일한 방식이라고 봐야 하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믿음과 하나님에 대해 이교도들로부터 배우라고 충고하셨다면, 비기독교 전통들을 숙고해서 어떤 새로운 이해를 얻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독단적인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들은 남아 있다.
1. 우리는 이런 진리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성경적 계시 안에 있다면, 왜 우리 자신의 신앙으로부터 직접 더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다른 전통들에 의지해야 하는가? 우리가 다른 신앙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이교도들을 사용하셨다. 아브라함, 다윗, 모세 같은 유대인의 모범들에게만 호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하고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나 그분의 아들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교도들을 가리키셨다. 시돈 사렙다의 이교도 과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 등. 장 칼뱅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 교사들의 도움을 통해 이해했다.
2. 성경적 정경을 위태롭게 하는가? 하나님이 성경 안에 있는 것을 넘어서 교회에 특별 계시를 더 주신다는 말인가? 한마디로 아니다. 새로운 계시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경에 묘사된 계시를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종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에 덧붙이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성경적 계시를 해명하는 것을 도와주는 계시(계시된 모형)다.
3.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전도 및 선교의 긴급성을 악화시키는가? 우리가 종교들에 이미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왜 그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로 데려오는 데 헌신해야 하는가? 타종교들이 진리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훨씬 더 온전한 진리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받는다. 우리는 사랑과 연민으로 전도와 선교 활동을 하며 복음을 나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빛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이 다투는 전쟁터다. 우리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하며,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는 복음이다.
4. 우리 자신의 종교도 잘 알지 못하는데 타종교들을 연구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꽤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성경은 먼저 제대로 공부하고 나서야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다른 종교를 공부하여 비교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위험하다. 조심해서 읽지 않으면, 우유만 소화할 수 있는 영적 초신자들에게 고기를 씹어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 될 수 있다.(히5:11-14)
5. 이 모든 교훈을 받은 다음 당신은 어디로 갈 것인가? 타종교들로부터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 연구에는 네 가지 목표가 있다. 1) 복음주의적 전도를 더 민감하게 그래서 더 효과적이 되게 해야 한다. 2)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더 나은 제자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전망과 실재로 인해 매우 고무된 적이 있었다. 3) 종교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에큐메니칼 사회 활동–또는 일부 사람들이 자선 사역이라 부르는 것-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 4) 타종교들로부터 진리를 배우면서 찬송할 이유가 있다. 종교들에 대해 배우고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들을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어떻게 계시하셨는지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방법과 땅과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아는 하나님은 너무 작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만 가득하다고 상상해왔지만, 타종교들로부터 배울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가 이제껏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광대하고 활동하고 계심이 드러날 것이다.
성경은 창조 세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내적 영광과 충만함의 발현이자 참된 외적 표현”이라는 뜻이다. 타종교의 이해를 통해 지경이 넓어질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그만큼 훨씬 확대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찬양과 예배는 깊어지고 부요해질 것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천상의 합창에 합류할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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