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신학
2015-03-23 19:42:04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시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풍부하게 가르쳐준다. 시편은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백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부르짖고, 한탄하고, 설교하고, 선포하고, 권면하고, 저주하고, 결단하는 등 대단히 다양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기도란 일방적이 아니고 대단히 쌍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에 터를 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기도를 어떤 요구를 하는 것에 국한하면서 나아가 기도의 응답 방식이나 내용조차도 자기가 결정해 놓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형식적이며 자기 중심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신약에서 주기도문은 가장 대표적인 기도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도문으로 반복하여 읇조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신학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기도문을 문자적으로 읇조리는 것에서 벗어나 그 기도문의 정신과 신학을 따라서 다양하고 풍성한 기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시며 기도자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한 호칭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호칭되고 있다. 기도의 대상과 기도자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매우 친밀한 관게로 설정되어 있다. 이 관계속에서 기도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기도는 이런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하고 기도가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맺은 관계속에서 또 그 관계에 기반하여 기도를 하는 것이다. 관계는 기도의 토대이며 기도는 그 관계에서 나온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이신 하나님, 곧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그런데 기도자와 아버지의 관계에 있는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기도문에서도 기도자는 아버지이신 그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곧 천지를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신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라고 믿었던 것 처럼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며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자는 자신을 우리라는 말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기도임을 의미할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 이스라엘 개별 구성원과 맺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것이듯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맺은 자녀와 아버지라는 관계 역시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맺은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전체와 맺은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근거하는 관계가 공동체적이라면 그 기도 역시 공동체적일 수 밖에 없다. 지금 주기도문의 기도는 그런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시고 기도자는 누구인지를 명백하게 설정하고 있다. 이어지는 기도는 세가지 청원인데 기도의 대상이신 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임하시기를,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가지 청원은 사실 한가지인데, 그것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이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기도의 대주제는 언제나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주제를 떠난 기도는 주기도문의 신학에 어울리지 않는 기도일 것이다.
주기도문의 전반부의 청원은 바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일이 기도자의 사명임을 보여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기도자 즉 기도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여 그 나라를 임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나라는 저절로 임하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알아서 임하게 하시는 나라도 아니며 하나님과 아버지-자녀의 관계를 맺은 기도공동체의 기도와 노력을 통하여 임하는 나라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아버지- 자녀의 관계를 맺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청원 역시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것이다. 기도 공동체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공동체는 그들의 존재에 필요한 것을 마땅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일용할 양식으로 대표되는 생활의 필요일 것이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만으로 기도 공동체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잘못을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는 공동체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언제든지 유혹하는 자의 시험에 들 수도 있고 악에 빠질 위험도 있다. 시험을 이기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전반부의 기도 주제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라면 후반부의 기도 주제는 한마디로 기도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것이다. 이 두가지 주제는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전반부의 기도 주제를 위하여 후반부의 기도주제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 공동체의 사명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있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 공동체가 존재하고 형성되며 유지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저절로 임하거나 하나님이 알아서 임하게 하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다는 사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불변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다스림이 하나님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의 하나님나라
2015-11-30 17:44:01
주기도문의 주제는 하나님나라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으로 시작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기도는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분에게 드리는 기도이다. 아버지와 자녀라는 이 관계가 이 기도의 근본적인 전제이다. 이 관계가 전제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도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물론 생물학적인 의미는 아니며 또한 단순힌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동시에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아버지와 자녀는 천부적인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시작은 자녀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있다. 자녀에게 아버지를 선택할 권리가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런 선제적인 택하심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또한 삼위 하나님을 향한 부름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이러한 관계는 필연적으로 공적이고 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은 자녀는 아버지를 장차 법적으로 공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상속권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과 모양으로 따라 지으셨다는 창조 기사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나라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소유하시며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왕이신 나라가 바로 하나님나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나라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높이고 섬기는 나라가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또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나라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아루어져야 할 곳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늘에 아니라 땅에 임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에서 예비된 예루살렘 성이 땅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임할 곳은 하늘이 아니라 땅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땅은 인간이 살고 숨쉬는 피조세계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방향이고 역사의 목적이자 의미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과 역사 가운데 온전히 임하는 일이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간절히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도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기도에 당연히 전제되는 것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의식이요 구체적인 삶의 행위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그 나라는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나라이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먹고사는 문제이다. 사람은 늘 이문제로 염려하며 고군분투하며 지낸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일용할 양식이 언제나 보장되므로 먹고사는 염려에서 자유를 얻으며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싸우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나라일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매일 필요한 만나가 주어젔고 그로 인해 광야에서도 그들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듯이 하나님나라는 먹고사는 문제에 매여 종노릇 하는데서 해방된 나라이다. 두 번째로 그 나라는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나라이다. 빚진 자들에게 탕감을 해주고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반복과 갈등 그리고 미움과 증오가 없는 나라이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자신들도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또 기꺼이 남을 용서할 마음이 있는 자들이다. 셋째로, 그 나라는 악이 소멸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시험에 들거나 악에 빠질 일이 없없어진다. 영적, 물질적, 육적인 모든 악이 소멸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서는 마음과 몸이 병들거나 물질의 부족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는 바로 이런 나라의 백성들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의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진행하시며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명하신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나라를 이루시되, 그 나라의 백성들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나라의 백성들을 통하여 그 나라를 이루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다.
다시 읽는 주 기도문
2013-08-04 22:20:34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 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사상을 풍성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가 바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기도의 중심이어야 함을 주 기도문은 분명히 보여준다. 복음의 핵심은 죄사함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이다. 복음은 죄사함이라는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지향한다. 그래서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죄사함도 복음의 중요한 내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사함과 하나님나라는 동등한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목적이라면 죄사함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첫 관문 정도인 것이다. 주 기도문은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상을 풍성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며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나라 사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가 기도할 바를 가르치실 것이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을 여는 이 첫 구절은 주기도문의 서문일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바른 신관은 바른 신앙의 토대이다. 바른 신관이 없이 바른 신앙이 세워질 수 없다. 이 구절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바른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1.1.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함은 우리는 땅에 거하는 존재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함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대 주재이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전능자 하나님, 그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으며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분, 바로 그 분 앞에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나 개인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라는 관계에 선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구성원이됨으로써 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은 오늘날 현대의 개인구원 신학을 치료하는 중요한 신관이다. 나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근본이고 중요하며 모든 것의 출발이라는 신앙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앞에 부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나 개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그가 가진 신관은 성경적 신관에서 빗나간 것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구약적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은 자명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지 그 구성원 개개인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각 개인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공동체가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공동체로 부터의 퇴출은 곧 하나님과의 언약밖으로 나감을 의미했던 것이다.
1.3.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이셨으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는데 이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이것을 일견 우리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유비로 생각하기 쉬운데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중대한 계시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구약적 맥락으로 보면 매우 획기적인 호칭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들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과는 형제 지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분이며 동시에 예수님과 우리도 하나님안에서 형제임을 전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생물학적인 유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아들의 관계는 구약적 맥락을 가진 용어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공적이고 법적인 상속자 혹은 후계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란 관계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공적이고 법적인 상속자나 후계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경우도 마친가지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부자관계는 당연히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하나님이 가지신 권세를 법적이고 공적으로 상속하는 후계자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법적이고 공적인 상속자들로 세워졌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은 대단히 언약적인 호칭이다. 구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의미인데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라고 이해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구약의 언약적 표현이 신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라는 호칭은 대단히 언약적 표현이고 구약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2.1. 하나님의 이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다면 신약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이시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신약의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의 신자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이시다. 주 기도문의 두번째 청원은 바로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약의 신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들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 곧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란 기도자인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아들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대하시지 않고 오직 아들에게만 기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공적이고 법적인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2.2 거룩의 의미
그렇다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이란 말은 언약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거룩이란 말은 언약관계속에서 나오는 개념인 것이다. 이것은 언약 관계를 가진 쌍방이 서로 언약의 상대방을 특별하게 구별된 존재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이란 말에 포함된 윤리적 도덕적 개념들은 여디서 파생된 2차적 개념이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명령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언약적 충성의 요구인 것이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진 십계명의 ' 너는 네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는 첫 계명은 바로 이스라엘이 언약 맺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라는 언약적 충성의 요구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들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아들다운 삶을 살게 될 때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바라며 아버지외에 어떠한 것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이 아들로서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삶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거룩히 여실 자들은 오직 아들 밖에는 없다. 이버지는 바로 그런 아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아들중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는 탁월한 모범의 삶을 사셨고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세우신 것이다.
3.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기서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킬 것이다. 주님이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듯이 신자들이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임하옵시고' 라는 이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라는 앞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자들이 아들다운 삶을 살겠다는 소원과 결심을 아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기도는 바로 신자들이 아들다운 삶을 살게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진리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아들다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 , 아버지가 거룩히 여기심을 받게 될 때만 임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나라라는 중대한 진리가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들의 언약적 충성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아들중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언약적 충성으로 시작되었고 이제 그 나라는 예수님의 형제된 아들들 곧 신약의 신자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며 성령님은 신자들에게 임하여 내주하시며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나라의 두가지 중대한 성격을 보여준다.
4.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이라는 언약을 맺은 아들들이다. 이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 그러다면 아들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적으로는 십계명으로 표현된 율법이고 신약적으로는 산상보훈으로 표현된 주님의 교훈일 것이다. 이 두가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그 법정신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 곧 아들다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이며 하나님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언약적 순결함의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중의 뜻이며 이것은 창조시에 주어진 선악과 금령의 정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었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께 다한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을 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4.2.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죽어서 가는 나라라면 주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신 것은 그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임하였다는 의미이지 하늘에 가까이 임한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언약을 맺은 신약의 신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과 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에서는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서 살게 될 때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나라도 아니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언약적 충성과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인 신약의 신자들의 존재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만일 아들들이 그 나라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아들들은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인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언약 백성에게 언약 배반은 곧 존재 이유의 상실을 초래한다. 아담의 범죄이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나 노아의 홍수로 인류와 피조세계가 멸망한 사건이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진멸된 일들은 모두 이것에 대한 역사적 증거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기도자가 자신이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음을 전제한 기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듣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셔야 할 언약적 책임이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신 것이다.
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일용항 양식을 구한 기도에 이어 등장하는 것이 죄사함에 대한 기도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죄란 개념은 하나님께 짓는 죄가 아니라 신자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죄를 가르킨다. 신자 상호간에 서로를 대하여 저지르는 여러가지 잘못들과 실수들 실패들 갈등과 오해, 미움, 그런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기도는 신자들의 간에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들의 언약관계를 맺은 아들들의 공동체를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안의 갈등이나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큰 장애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을 적극적을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 해결방법은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만이 공동체안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임을 이 기도는 가르쳐 준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기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신자 공동체안의 신자간의 용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는 잘 보여준다.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마지막 기도는 시험과 악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최초의 시험자 뱀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교묘한 영적 유혹이었으며 악의 구덩이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악의 세력의 공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유혹 혹은 시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감당핳 수 없는 영적인 악의 세력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책략을 다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그래서 바울은 사단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은 늘 유혹과 시험의 형태로 다가온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 우리는 악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사단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것임을 선악과 사건은 잘 보여준다. 사단은 우리를 강제로 어떻게 굴복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최초의 아들이었던 아담에게 그러하였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들인 신약의 신자들도 시험하여 악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사단이 시험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하고 진리를 진리아닌 것과 교묘하게 섞어서 속이는 사이비 방식으로 다가온다. 선악과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사단의 시험의 성격과 방식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싸워서 이기신 방식이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서는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 시험에서 완전한 승리를 하신 것은 우리의 승리의 보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의 훌륭한 모범이 된다. 바로 그 싸움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싸우는 그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권세와 정사와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의 승리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앞서 그 싸움을 싸우셨고 완벽한 승리를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의 남은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며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마지막 간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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