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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율법-아더 핑크

그리스도와 율법-아더 핑크

2015-01-03 18:16:13


 

그리스도와 율법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5:17-20)

 

 

우리는 지금 이 본문이 이 타락한 세대에 신앙을 고백하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마 몇몇 우리 독자들은 그 구절의 중요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표면적으로 그 가르침을 요약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이 자기 만족과 자기 희열을 좋아하는 시대에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담겨 있는 그 구절들은 하나님의 계율에 우리가 순종할 것을 주장하는 구절보단도 훨씬 더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율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도 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이며 똑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현재 상태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이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청중들의 칭송이나 비난을 개의치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많은 영혼의 유익을 구하셨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건전한  기독교 신앙은, 친절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고통을 당하는 마음에 그 향유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실한 해석과 양심에 강요하는 율법의 요구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보존되는 곳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율법의 요구를 제외한 율법의 해석이 우위를 차지하는 곳에서는 독선적인 바리새주의 조장되고, 복음의 선포가 율법의 요구를 배제하는 곳에서는 반 율법주의의 방종이 발생 발생케 된다. 지난 100여년 동안 아마 기독교 사회는 복음 선교를 50번 들었다면 율법에 관한 설교는 한 번 정도 들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비참하고 가련하게 되었다. 즉, 느슨하고 부주의한 걸음과 동시에 경박하고 뼈가 없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연속해서 강해지고 그 과정에 있어서 율법에 관한 구절에 이르면 그곳에 머물러 그의 청중들이나 독자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 (이전보다 더) 그에게 더 필요하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을, 특히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의 마음을 살펴야만 한다. 마5:19을 그 표면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숙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기독교 사회는 지극히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책임은 주로 설교자에게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계명을 어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바로 그와 같이 행하라고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 구절을 깨닫게 된다면 자기들의 죄악의 극악성을 인식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행해지고 있던 율법에 대해 여러 가지 면에서 곡해된 것을 고치려고 하셨고, 그들에게 그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도록 경고함으로써 그가 이야기해야만 했던 것을 서두로 말씀하셨다. 비록 그가 모세나 선지자들을 반대한 것처럼 보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기록들 중 그 어느 것도 그가 세우시기 위하여 오신 그 나라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모세를 대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엄숙한 말씀으로 율법은 영원토록 순종해야 될 거시라고 선포하셨으며(18절) 만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어떠한 사역자가 율법의 계율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어기거나 그것을 멸시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그의 눈에 계율이 작게 보였던 것과 같이 주님의 눈에도 그가 작게 보일 것이라고(19절)가르치셨다. 그와 같이 율법이 실천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의 최상의 관심이었다.

 

 본문은 5:17에서부터 시작된는데 거기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확실하게 알려 주셨다. 그의 복음 사역의 참된 의도에 대해서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그에 대해 악의를 가진 자들은 예수님이 혁명가이고 그의 목적이 유대교의 기초를 전복시키려 것이라고 사람들로 믿게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공식 설교에서 즉시 이러한 사악한 비방이 거짓임을 밝히시고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선포하셨다. 그리스도와 모세 사이에 아무런 적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요구되었던,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거룩한 율법을 거절하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이 요구하는 바로 그 의를 성취하고 레위의 제사 제도가 예표하엿던 것을 이루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메시야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는 성육신하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베자(Beza)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의와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의와 구원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길을 가져오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아암아 율법의 저주로부터 인간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율법의 상징들로 예표하였던 것을 참으로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더욱이 율법이 명하였던 순종의 참된 길을 가르치고 그 순종의 능력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완전하게 하려 하다" 라는 중심적인 예언에 대해서 매튜 핸리는 "복음 시대는 '개혁할 때'(히9:10)이다. 즉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수정하는 것이며(율법의 바리새주의적인 와전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율법의 재 설립을 의미한다" 라고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절).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시면서 율법의 영속성을 단언하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 버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지속된다. 신약이 영원하듯이 구약도 영원하며, 복음이 영원하듯이 율법도 영원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아멘'의 엄숙한 확언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언이다. 율법안에 있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될 것이다. 즉, 율법의 예표와 예언뿐 아니라 그 계율과 형벌도 완전하게 될 것이다. 첫째, 인격으로 그리고 대리적으로 보증인에 의해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다. 둘쨰, 복음적으로 그의 백성들 안에서 그들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다. 셋째, 율법의 무서운 저주를 영원토록 경험하게 될 사악한 자에 대한 심판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반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크게 하며 존귀하게 하려 이땅에 오셨다.(사42:21) 또한 그의 교훈이 그것에 의해 파괴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율법을 견고하게 하고 강화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17절과 18절에서 선포하신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데 이는 그가 여기서 사용한 언어는 천국의 전 과정에 걸쳐, 즉 이 기독교 시대 전체에 걸쳐 율법에 영속적이고 확고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부여한 측량하지 못할 가치와, 자기의 이름으로 가르쳤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엄격하게 요구하고 강요하였던 판단을 명백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즉 그는 율법의 요구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경시하는 자를 비난하시며, 모범과 가르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존귀케 하는 자를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자는" 이라는 말은 이 구절 앞 구절에서의 '일점일획', 즉 율법 중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버리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 보라. 그것은 두가지 일을 의미하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앞 구절에서 지극히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을 설명하고 계시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할 것을 조장하는 대신에 그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 요구를 지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왕 자신도 그의 사역자들 중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율법의 지극히 작은 요구라도 그것이 무시하는 자에게 비난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앞에서 주장하셨던 것으로부터 명백한 결론을 이끌어 내셨다. 만일 주님께서 친히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면 그의 종들도 역시 계명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행하라고 가르쳐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그가 그들에게 남겨 주신 본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와 동일하게 되어야만 한다.

 

 '폐하다'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또한 우리가 단순히 17절의 '완전하게 하려 하다'라는 말만을 논쟁했던 것을 '그러므로' 바로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에서 어떻게 결론을 맺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자. 선지자를 '폐한다'는 것은 그들의 타당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감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들의 권위를 취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의무를 지우는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폐한다'는 말도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버린다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을 폐기한다는 뜻이 된다. 즉 그것은 율법으로부터 모든 효력과 능력을 빼앗는 것과 같은 파괴적인 일이며, 따라서 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이라는 말씀을 더하신 이유이다. "폐하러...완전하게 하려"(17절)와 "버리고...이를 행하며 가르치는"(19절) 이 두 구절에서 순서가 같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이 앞 구절에서 세운 '율법'에 대한 정의를 이 구절의 내용에서는 어떻게 그 정의를 내리는가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자. 여러 주석가들 사이에 이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어 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로 도덕법에 대해 언급하셧다는 것이 산상설교의 뒷부분에서 입증되고 있긴 하지만 이 말씀을 전파하셨던 상황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일점일획' 이라는 말을 언급하신것을 볼 때 의식법과 재판법의 측면이 배제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이 구절의 전체에 걸쳐 '율법'은 모세 율법을 포함한 것으로서 지극히 넓은 범위에서 그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라고 우리 주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에서 분명히 입증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십계명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 계명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왕국의 근본적인 법령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모두 반대하면서 '율법'이란 여기에서 십계명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그와 논쟁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십계명은 전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 모든 명령은 동등한 귄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의 어떠한 부분도 순종하기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 계명의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고 잇다. 첫째 돌판의 계명을 어기는 것은 둘째 돌판의 계명을 어긴 것보다 더 흉악한 죄라는 것이다. 즉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은 이웃 것을 훔치는 것보다 휠씬 더 죄가 크다. 그러므로 둘째 돌판의 계명들을 어기는 범죄에 있어서도 범죄성의 정도 차가 있는 것이다. 즉 살인하는 것은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 중 어느 한 가지도 가벼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2:10) 는 엄숙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에 앞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구절이 13절에서 16절에 있는 '너희'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설명을 확증해 주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는데, 그 문제는 많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논쟁이 되고 있다. 그 구절을 논할 때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그의 산상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 대명사를 바꾼 것에 관심을 가졌었다. 3절에서 10절까지 구세주께서는 모두 '그들의 것' '그들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셨는데, 11절에서 16절 사이에는 '너희', '너희는' 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곧 신약 시대의 '선지자'의 계승자들(12절)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목자로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계시며,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자는" 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볼 때 분명하게 입증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공간의 거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천국'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신앙고백 영역과 관계되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보다도 범위가 더 넓은데 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교회의 지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승인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므로 그것은 진실한 자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를 포함하며, 이 사실은 우리주님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밀이 들에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라지도 들에서 자라나며, 좋은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쁜 물고기도 그물에 걸린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 이들은 서로 분리될 것이다. 이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라고 가르치는 사역자즐에게도 천국에서 있을 자리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게 되는 의혹을 제거해 준다. 이 왕국은 그리스도의 선구자에(3:2) 의해서 공표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전파되어지고 있다(11:12)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주석가들은 두 가지 다른 설명을 제시하였다. 첫째,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참된 기업이나 어떤 역할을 담당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부정되고 있다. 둘째, 대다수의 저술가들에 의해서 채택된 의견이라 말할 수 없으나, 이 사람은 왕국에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불리는 그러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 속에서 그러한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그것보다 휠씬 더 엄숙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사악한 사역자는 왕에 의해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사9:15)라는 말씀을 회고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불충실한 종을 비난하신 말씀이었다.

 

 

 이 구절은 세대주의자들(하나님의 모든 계명 주에서 지극히 큰 계명의 하나인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거부하는 자들)을 엄숙하게 정죄하고 있을 뿐 아닐 또 다른 부류의 오류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난을 공표하고 있다.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복음과 율법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는데, 그들은 복음을 율법의 보조적인 성질을 지닌 것으로 설명하는 대신 그들을 융화할 수 없는 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을 모독한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역사하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생활에 대한 자기 계율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자가 십계명에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속박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과연 어떠한 것이기에 대해 그들은 전적으로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롬6:14이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칭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덕법을 거부하고 있고, 어떠한 점에서도 우리가 그 권위 하에 들어 있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에 의해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꼐서 보시기에 '지극히 작은 ' 이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공표하신 바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그를 따라야만 한다.

 

반 율법주의(antinomianism: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계율로서 도덕법을 거부하는)는 카톨릭의 방종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을 만하며 위험한 것이다. 만일 한편으로 우리에게 법을 어기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필요하다면(하나님의 손에서 어떤 좋은 상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틀림없이 오직 복음의 은혜 안에서만 거하려는 위험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거룩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반 율법주의의 방종과 바리새주의적인 자기 의를 똑같이 경계하도록 하자. 이것들은 치명적인 암초와 소용돌이이다. 그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주님과 성령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분명하고 완전한 해석과, 마음과 양심에 그것을 성경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이러한 치명적인 극단의 상황으로부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예방법을 제공한다"(토머스 스코트)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음을 받으리라" 여기에서 말의 순서를 주목해 보면 '행하며 가르치는'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그의 아들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라"(딤전4:16)고 권고한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생활의 고결함과 교리의 건전함을 요구하고 계신다. 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서로 다른 사역자들은 주님을 조롱하며 심히 모욕하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설교와 반대가 된다면 복음 전파하는 일을 전적으로 그만두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말이 조화가 되지 않는 사람의 설교에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의 말은 그의 청중들의 마음에 확신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목사에게 의아해하면서 심각하게 "나는 당신의 행동을 본 후로부터 당신이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소"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끝으로, 사역자는 먼저 자기가 설교한 것을 실천하지 아니하고는 양심의 깨끗함과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가르칠 수 없다.

  

 

그리스도와 율법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이 구절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란 누구이며, 또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둘째, 그들의 의의 특성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더 나은 그 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넷째, 그 의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다섯째, 그 의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여섯째, 그 의는 어떠한 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가? 일곱째,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여덟째, 20절과 전후 문장 사이에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그 대답을 찾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그의 청중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반응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서기관들은 가장 유명한 율법 선생들이었고 바리새인들은 가장 모범적인 유대교의 표본으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우기 위해 오셨던 그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는 데에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 부적당한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엄숙하게 확언하신 것은 참으로 과격하고 놀랄 만한 선포하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개인적 경건의 극점에 도달한 사람들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와 같은 높은 영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은 그들의 경지에 똑같이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단지 두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한 사람은 서기관이고 또 한 사람은 바리새인일 것이다"라고 하는 속담이 유대인들 사이에 펴져 있을 정도였다.

 

 첫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누구인가? '서기관' 이라는 말은 직책의 명칭인데 유대인들에게는 두 종류의 서기관, 즉 국가의 서기관과 교회의 서기관이 있었다. 국가의 서기관이란 나라의 일들을 기록하는 공증인이었는데 심새와 같은 사람이고(스4:8), 교회의 서기관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에스라와 같은 사람이다(스7:1,5,6) 그리스도께서는 이 복음서의 13:52과 23:2에서 바로 후자를 가리켜 모세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라고 언급하셨으며, 그들은 레위지파였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은 직책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고 한 분파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은 모세 율법이 명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며 조상들의 유전에 기초를 둔 도덕법과 의식법을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기관들과는 달랐으며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행23:6;26:5참조) 그러므로 서기관들은 율법 학자라 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하는 바리새인들은 가장 고결하게 율법을 실행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들의 의의 특성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점은 어디에 있었는가?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단지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외면적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거에 불과했다. 그들은 간음, 도덕질, 살인, 그리고 우상 숭배와 같은 큰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삼가는 데에는 엄격하였으나 더러운 생각과 탐욕과 미움과 하나님께 대한 냉담한 마음에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3:25,27,28)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들은 편파적으로만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였다. 즉, 그들은 율법의 도덕적인 요구보다 의식적인 계율을 휠씬 더 강조하고 있다.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셋째로, 그들의 행위는 건전히 못한 윈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자기 유익이 그들을 지배하는 동기였다. 그들은 금식하고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며 허식으로 자선을 베푸는 일에는 앞섰으나 그것은 모두 사람들 가운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행한 것이었다(마23:5-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의와 마음의 순결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에서 우리는 이 세상 전체에 퍼져 있는 사람들의 본래의 신앙에 대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즉 그것은 외면적 행위의 신앙이 복되고 영원한 세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이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그것을 실제로 행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만을 가지고 기도하는 집에 오는 것이지 그들의 영혼조차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그들의 입만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몰두하는 일이나 새벽기도회에는 꼼꼼한 사람들이지만 전력을 다해 자기 마음을 지키는 데에는(잠4:23) 과심을 두지 않는다. 대부분의 신앙을 고백한느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으로 강포한 행위를 삼가지만 그들의 이웃에게는 그들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좋은 평판을 잃게 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도덕질하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 않으나 자기들의 선을 거짓 선전하며 자기들의 고객들을 속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는 사람의 율법을 어기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그 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세 가지 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로, 아담이 그의 창조주의 손을 떠나기 전에 갖고 있었던 (전7:29) 원래의 의가 있는데 오늘날은 날 때부터 그 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둘재로, 전가된 의(롬4:6)인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얻는 칭의의 전체를 가리킨다. 셋째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실 때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의이다(엡4:24) 옛날 해석가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마5:20에서 언급하신 의는 이들 가운데 두 번째 의를 가리킨다고 결론지었으나 우리는 이것은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하늘에서의 죄인의 자격은 그의 믿음에 따라 그에게 전가된 그리스도도의 온전하 의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빛 가운데에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성도들의 기업에 대한 경험적인 만족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중생과 성화를 통하여 이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필포트(J.C Philpot)가 마5:20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들을 위해서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외면적인 의를 의미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내면적인 의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외적인 예복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에 대해서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시45:13). 여왕에게는 두 종류의 의가 있다. 즉, 그녀에게 전가된 의는 그녀의 외적인 예복인 '금으로 수놓은' 옷이며, 부여받은 의는 그녀로 하여금' 모든 영화를 누리게' 하는 내적인 장식이다. 이 내적인 영광은 모든 선물과 은혜를 갖춘 마음속에 있는 새 사람이다." 만일 교회가 그 머리를 따른다면 그 머리는 외적으로 '점도 없고' 내적으로 '흠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꼭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자세히 그 문제에 대해 알아보아야 하겠다.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끌어 줄 의는 단순히 전가된 의가 아니라 부여된 의를 수반하는 전가된 의이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칭의가 공표되는 곳은 어디든지 이미 성화(근본적인 면에서)를 부여받은 것이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과 관계가 있고 성화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와 관계된 것이다. 로마서 5장과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도 중요하고 복된 복음의 일부분이며, 만일 실질상으로 성화가 배제된 것으로서 칭의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다. 오직 의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분명하게 보증해 주며, 복음적 의만이 그것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나무가 그 열매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가된 의도 생활 속에 나타나는  그 의의 효험과 더불어 내적인 의로 말미암아 인정을 받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원한 왕국에 참여하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그 의의 본질을, 가장 단순하고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정반대의 입장에 서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결점은 주로 세 가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의는 전적으로 외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적인 면에서의 진실을 요구하신다.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둘째, 그들의 의는 편파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 가운데 자기들의 기호에 맞는 어떤 부분만을  강조하는 반면 율법의 다른 중요한 점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폐기해 버렸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는 전체적인 순종,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셋째, 그들의 의는 더러운 샘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주신 이를 기쁘시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보다 나은 의는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은 반드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그의 권위를 진심으로 공경하며 참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뜻에 전혀 자신을 꾸며 넣거나 부과하지 아니하고 그 뜻에 완전히 일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즉 의 와 인 과 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 순종이 아닌 진실한 순종이어야 하며, 노예적 순종이 아닌 자식으로서의 순종이어야 하고, 이기적인 순종이 아닌 사심 없는 순종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균형 있고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은 자기의 의를 높이거나 과장함이 없이 주님 앞에서 진지하게 그 목표를 향하여 걸어 나가는 자가 되고 겸손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넷째로, 이보다 나은 의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그것은 타락한 피조물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위에서 서술한 그러한 순종은 오직 하나님과 화해한 마음에서만 생기는데,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 (롬8:7)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고후 5:17,18에서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친히 우리와 화해를 이루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 시작은 곧 우리는 거듭나게 될 때에 즉 거룩한 본성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달되어질 때에 이 의에 참예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롬7:22) 그것을 "섬기게"(롬7:25) 하는 도가 있는 것이다. 점진적인 발전은 곧 우리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랄" 때에 이 내적인 의가 발전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정해진 수단을 이용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을 배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은 오직 우리가 영화되어질 때, 곧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심으로 충만케 될 때에만 이 내적인 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이 복음적 의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내적인 의는 거룩함으로 새롭게 된 피조물에게 있는 것이며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그 열매에 의해서 구별이 된다. 이 내적인 의를 가지고 있는 자의 기질과 생활 속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이제부터 그는 이전에 그가 즐거워하던 것을 싫어하고 전에 싫어하던 것들을 좋아하고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죄에 대한 진정한 미움과 하나님께 대한 거짓되지 않은 사랑으로서 입증된다. 그것은 신자들 속에 있는 두 가지 본성 사이의 적대감을 깨달으므로서 구별된다. 그의 내재하고 있는 부패성은 계속해서 이 의의 원리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에 종종 그가 이행하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육체와의 갈등은 그리스도인을 낮추게 하고 그의 슬픈 실패를 탄식하게 하며 그로, 단지 무익한 종일 뿐이라고 고백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옛 사람을 억제하고 새 사람에게 생기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내재하는 의의 또 다른 증거는 그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깊어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로, 이 의는 어떠한 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가? 그리스도인의 의의 우월성은 이미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나 그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지만,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지만(벧후1:4) 그들의 의는 전체가 인간의 성품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결점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로 말미암아 감추어지지만 그들의 의의 결점은 하나님께 칭찬을 얻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새 언약의 조건에 따른 복음적 의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시내 산의 계약 안에는 지존자께서 율법적인 의를 받아들이신다는 조항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오히려 그들을 그곳에서 쫓아낼 것이다.

 

 일곱째로, 우리 주님께서 이 의를 가지고 잇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리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는 판결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19절에 대한 주석의 내용에서 우린느 이 '천국' 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며 신앙고백의 영역, 곧 기독교 사회 전체를 포함한다고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진실된 자뿐 아니라 거짓된 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가 '대단히 많은 경우' 에 적용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 의미를 조심스럽게 제한하였다. 한두 가지 현저한 예외가 있는데, 예를들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이 말씀에서 천국은 영광의 나라라고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구절도 그와 같은 경우인데, 즉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며 오직 그 의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줄 것이다.

 

 여덟째, 지금 이 구절과 그 문맥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이 구절 전체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복음사역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논박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과 독립적으로 활동하셨고 '장로들의 유전'을 무시하셨으며 나사렛의 공회에서 은혜를 선포하셨기 때문에(눅4:16-22)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세를 반대하는 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상 그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행해지고 잇던 것보다 휠씬 더 낫고 새로운 어떤것을 가져오시기 위해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과 유대교 사이에는 실제로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즉 부수적인 것들은 서로 많은 것이 달랐을지라도 근본적인 것들은 사실상 서로 완전히 일치하엿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은 그 두 가지 섭리의 영적인 통리성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유명하게 된 대부분의 '성경교사'들에 의해 강력하게 거절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분명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17절) 즉 우리는 지금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성취하시는가에 대해 알아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의 율법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엄숙하게 확언하셨으며(18절) 율법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그는 그의 종들이 그것을 행하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의 완전성을 보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으며(19절),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넷째, 그는 모세와 반대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그 후로는 그의 청중들 중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를 의심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20절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는 조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그것을 이미 소유한 자들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주님의 주변에 모여든 군중들의 대부분은 틀림없이 그들의 욕망대로 할 수 없는 한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것이다(이것은 가련한 인간 본성이다) 그런데 주님의 왕국의 진실한 백성들을 구별하는 도덕성과 영성이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바리새인들이 예시하였던 것보다 휠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실로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제자의 의가 그들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그를 자기의 제자라고 생각지 아니하셨다. 이와 같이 그의 나라의 본질과 요구는 그가 율법을 존귀케하고 본존하셨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이 구절과 전후 문맥상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산상설교 전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주된 의도 중 하나가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의의 깊은 필요성을 느끼도록 일깨우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바리새주의를 번성하게 만든 것은 율법에 대한 무지였는데, 그들은 외적으로 문자적인 면에서만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그것의 참된 의미와 요구를 강조하심으로써 양심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이 산상설교는 하나의 주된 사상을 중심으로 계속반복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불행을 깨닫게 해주고 그들을 하나님의 의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은 오직 영적을 율법을 적용시키고 또한 율법의 침범할 수 없는 요구를 강조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으며, 오직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복음을 알고 깨닫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