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세가지 용도 -권호덕
2015-01-03 16:40:19
'율법의 세 가지 용도'의 발견과 그 발전 역사
율법의 세 번째 용도 또는 규범적 용도(normativus, tertius usus legis)
1.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율법의 셋째 용도를 usus legis in renatis중생인의 용도(CR 21,719)로 표현했다. 그러면 이 제 3용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멜란히톤은 중생하고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았으며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자들이라고 한다. 즉 예수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의함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는 말은 저주와 정죄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중생인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의 교의학인 Loci Communes(1555)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인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둔다"(렘 31:33; 32:37-41; 히 8:8-12)고 말씀하신 그런 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따라서 멜란히톤이 이 제 3용도를 특별히 교회와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영원하고 불변한 법 곧 lex moralis 또는 십계명을 주셨음을 강조했다.
그러면 멜란히톤은 이들에게 왜 율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에 의하면, 한편으로는 이런 자들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들에게 빛을 주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합당하게 살도록 하시는데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생애 동안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면서 그 자체 많은 연약함, 죄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며 우리의 거짓 안정과 부정 때문에 울어야 한다는(ibid.) 것이다. 멜란히톤은 이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이 받을 형벌을 생각함을 통해 일어난다고 한다(ibid.). 흥미로운 사실은 멜란히톤이 여기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는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 율법의 설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ibid.). 그렇다고 그가 성령을 완전히 배재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는 Loci Communes(1521) 초판에서 율법의 셋째 용도와 더불어 성령이 육신을 죽이는 문제를 이미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를 말하면서 '율법의 설교'를 언급한 내용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설교의 내용은 십계명이라고 말한다ibid.).
멜란히톤은 이런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무엇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순종'이라고 대답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함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멜란히톤도 율법의 제 3용도가 성화와 밀잡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멜란히톤의 견해는 칭의론의 법정적 성격(forensic)과 연관하여 가장 잘 드러난다. 멜란히톤에 의하면 기독인이 첫째 의는 그리스도 안의 의이지만 둘째 의 곧 선한 양심의 의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있어서 율법의 제 3용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멜란히톤은 이런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내용의 윤곽을 그린 설계도 이를테면 '하나님 형상'을 여기에서는 직접 연관시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본질을 계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순종의 뼈대를 제공한다고(ibid.) 말함으로써 율법과 하나님 형상 사이의 관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 루터
루터는 율법의 '제 3의 용도'를 거절했다는 논쟁이 더러 있었다. 이것은 루터와 그것을 거절한 그의 후예들을 혼동한 연고일 것이다. 루터파 학자들이 루터의 셋째 용도론을 부정하는 이유는 루터가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루터는 분명히 율법의 제 3의 용도에 대해 말했다. 그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하면서 이것에 대해 말했다. "…… 셋번째. 율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이는 성화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시는지 곧 이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루터는 '주기도'를 주석하면서 계속해서 십계명을 주시했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시작된 '사망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기독교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문제와 연관하여 usus alienus legis(다른 율법의 용도) usus practicus evangelii(실천적인 복음의 용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교회가 십계명을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해 "Von den Konziliis und Kirchen 총회와 교회에 대하여"(1539)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십계명을 지녀야 한다. 즉 십계명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한 율법의 방법론을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자기의 거룩함으로 어디까지 데려갔음을 보게 만들며 또 어느 정도까지 제한하여 우리가 안전하게 되지 못한 범위를 보게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성화 안에서 계속 자라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녀야 한다" 이 말은 루터가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그것을 주장했음을 보여준다.
루터는 율법폐기론자들과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지닌 자들은 율법을 바로 이루었다. 우리의 본성 속에 박혀있고 우리 마음에 쓰여져 있으며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율법을 모두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일이다"(Table Talk CCLXXXVI) 또 루터는 그의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저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하지 않고 행위에 대한 거짓 견해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즉 칭의는 행위로 얻는다는 어리석은 주장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라고 했는데 칭의함을 받은 후에 율법에 따라 선행을 행함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선행에 대해 매우 자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이를테면 "두려워말라. 나는 율법으로 너희들을 죽이고 너희들을 사망 가운데 머물게 하려고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를 두려워하고 살게 하기 위해 주었다"라는 말은 칭의함을 받은 후에 율법의 필요성이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사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 발언 속에서 구체적으로 계속 열거된다. 흥미로운 것은 루터가 율법의 제 3용도와 더불어 성령의 사역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해서 더 깊은 내용은 루터에게서 기대하기가 힘든다. 그의 무게중심은 제 2용도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제 3용도의 최고의 열거자인 칼빈에게로 넘어 간다.
3.칼빈
⒜ 명칭: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는 율법의 셋째 용도의 명칭을 언급하지 하지 않고 단순히 '셋째 용도'(tertius usus)로 표현한다. I.J. Hesselink에 의하면 칼빈은 usus in renatis(중생인의 용도)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멜란히톤과 통한다. 칼빈 연구전문가 John Ooms는 이 셋째 용도를 paedagogicus usus(교육적 용도)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중생인을 교육한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Ooms의 주장은 콜부뤼게 학파의 한 사람인 John Wichelhaus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빅켈하우스) 율법의 이런 용도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인간으로서 본연의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어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져 가게 함을 지적했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율법의 제 2용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면 칼빈은 이들과는 달리 제 3용도를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칼빈의 경우 율법의 셋째 용도는 신자들을 위한 생명의 규칙의 역할을 한다.
⒝ 적용 대상
칼빈은 매우 명확하게 '율법의 제 3용도'(usus legis tertius)가 하나님의 영(靈)이 그 속에 거하시며 주관하시는 중생한 자들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고(렘 31:33; 히 10:16)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는 자들에게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멜란히톤이나 루터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우리는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 중생인은 어떤 존재인지 칼빈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3,10-15에서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함을 지적함으로써 중생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신자들도, 비록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자들은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 대상은 이런 신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해한 중생인의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열거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생인 속에 죄악의 불길을 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연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여기 훈련을 받는다는 말은 중생인에 대한 율법의 어떤 역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도록 꾀며 자극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들의 실제적인 상황을 주시하면서 "성도들이 육욕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칼빈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런 정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한 마디로 그는 그것을 '죄'라고 단정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역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론적인 이 세상 죄 개념이 아니라, 어떤 힘이 있어서 인간에게 능력을 행사하는, 성경이 말하는 역동적인 죄 개념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이런 죄 개념을 간과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을 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인의 삶 가운데 율법이 어떻게 작용하여 이런 죄의 능력을 제압하느냐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힘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죄의 능력
칼빈은 인간이 중생함을 통해 "죄의 지배력은 소멸되었지만 여전히 신자들 안에 거함"을 지적한다. 다른 말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폐지되었지만, 다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한다" 중생한 인간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죄의 법'이 그들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율리아누스를 논박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법의 문제를 인정한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 안에 남아 있다". 그는 계속 인용하기를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했고 이 글에 나오는 암브로시우스의 발언을 참고하여 "죄의 법은 비록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한 죄책은 세례 때 사함을 받았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죄의 법을 불법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그것은 육신이 성령에 대항해서 정욕을 발동하는(갈 5:17) 불법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동의했다. 그 외 칼빈이 어거스틴을 동의하면서 인용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치료)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
┌─────────┐
│ ■■■ ↗ │ 중생인도 육체의 정욕에 사로잡히면 범죄하고
│ ■■■ →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의를 행하는 기로에 서있다.
│ ■■■ ↘ │
│------------ │
│ ■ 죄의 법 │
│ ■ 중생인의 실존│
└─────────┘
칼빈은 또 어거스틴의 롬 6:12 해석을(제 41설교) 비판 없이 그대로 인용했는데 "그(어거스틴)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분의 지체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이런 표현들은 죄의 지배 체제가 비록 패잔병이지만 우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으면서 게릴라 전을 벌리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우리의 관심은 죄의 법이 이렇게 게릴라전을 펼치는데 율법의 어떻게 작용하여 중생인을 성화시켜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 속에 있는 이 죄의 법이 인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비밀은 이 세상 어떤 종교도 철학이나 윤리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간론은 다른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칼빈이 재세례파들의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또 성령의 직통 계시를 통해 지도를 받기 때문에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을 때(Inst III,3,14[1]) 그들이 바로 중생인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법"에 대해 무지한 연고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칼빈은 이들을 비판할 때 인간의 상태를 중심으로 논쟁하기보다는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열거함을 통해 논쟁했다(ibid[9-19]). 필자의 견해로는 이 논쟁에서는 성령론을 중심으로 질문을 제기하는 것보다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 내지 구조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외부의 어떤 세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인데 육신의 정욕이 발동할 때는 사단의 지배체제하에 들어가고 성령의 지배아래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 그러면 이런 죄의 법을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중생인에게 율법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칼빈이 중생인에게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어떻게 말하는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주장 곧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항해서 그 필요성을 매우 명쾌하게 열거한다.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 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고 권고하기 때문이다."(Inst III,19,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7; 엡 1:4; 살전 4:3). 이 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이런 발언은 Ed. A. Dowey의 지적대로 칼빈의 경우 율법속에 성화에로의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상에 기초한다. 그는 칼빈의 Inst III,6,1[2] "Etsi autem novitatem illam qua imago Dei in nobis instauratur, lex ipsius in se continet,"(하나님의 법에는 우리 안에 그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그러면 칼빈의 경우 율법이 '내포적 원리'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부분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 '내포적 원리'란 인간의 생각을 추진하는 요인을 말한다).
그 다음 질문은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 중생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중생인', '성령' 그리고 '율법'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율법을 지켜야할 인간과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역학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오류 곧 율법폐기론과 신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칼빈은 이미 율법의 제 3용도를 말하면서 중생인이 율법을 지키려할 때 성령의 사역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히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즉 율법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것을 철저히 배우고 확고하게 이해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법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Inst II,7,12[5]). 또 칼빈은 육의 짐 때문에 전진이 방해를 받을 때 율법은 채찍(flagrum)과 같은 부단한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함(ibid., [7-8])을 지적한다. 칼빈은 여기서 시 19:7-8과 시 119:105을 인용하여 율법이 영혼을 어떻게 소생함을 암시한다(ibid., [9-10]). 말하자면 중생인은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배우며, 진리를 배우고 나아가 은총의 약속을 붙들게 함을 통해([13-14]) 주어진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칼빈의 전문가 맥크로드는 여기서 칼빈의 '제네바 신앙교육서'를 인용하여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삶의 규칙을 주셨는가?"라고 묻고 그 대답인 "율법"이 우리가 매진해야할 목표지점을 보여줌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루터파 교의신학자 W. Elert가 '칼빈의 경우 율법 그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루도록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라는 말은 칼빈을 잘 이해한 발언인 것이다. 위의 내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대한 칼빈의 발언과 일치하는 것이다(Inst II,7,12). (Institutes<1536>, 36). 그 두 가지 유익이란 ⑴ 하나님의 뜻의 성격을 알게 되고 ⑵ 자주 묵상함을 통해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이로 인해 힘을 얻는다.)
칼빈은 이것을 더 심층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자유', '양심', '율법' 그리고 성령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곧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난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음을 지적한다(III,19,3). 그 다음에 칼빈은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구절에는 성령의 사역이 전제된다.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4:5) 입양에 대해 말했는데 입양은 양자의 영이 전제되며 성령의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멜란히톤의 발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에 의하여 율법을 지키도록 독려를 받는다". 말하자면 입양되면서 양자의 영을 받으며 성령이 그 마음 속에 감동을 주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제 3용도가 그 기능을 발휘하려면 양심, 자유, 성령의 추진 그리고 율법 사이의 총체적인 관계가 전제됨을 보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중생인 자신의 영적인 전투가 있어야 됨을 분명히 보여준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신 6: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칼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중생인도 육 때문에 약함을 지적한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 III,19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열거한 다음 III,20에서 기도를 길게 열거했는데, 이는 율법이 중생인의 삶에 적용되어서 성화되는 일에 기도의 역할이 중요함을 암시한 것이다. 칼빈이 20장의 제목을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라고 정한 것을 보면 연약한 육인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도를 통해 얻음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감사의 삶을 배운다. 즉 율법은 감사의 삶의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감사가 중생인이 성화되는데, 즉 목적지를 향해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Ooms의 지적은 평가할만하다. 그는 칼빈의 주석 딤후 3:16-17 그리고 갈라디아 주석(Comm on Galations, 109-110)을 참고로 이 사실을 언급했다.
⒠ 율법의 제 3용도의 목표:
그러면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역사하여 어떤 목표에 도달하게 만들까? 우리는 이에 대해 칼빈에게서 비록 내용은 동일하지만 형식상 다양한 대답을 볼 수 있다. 그는 율법 전체의 목적이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 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II,8,51[1]), "의의 완전한 모범"(iustitiae examplar eminere. II,7,13[5])인 동시에 "완전성"(perfection. II,7,13[9])이라고 했다.(II,7,13). 그러면 이 '모범' 또는 '완전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 형상'과 연관하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윤곽으로 그리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Ita enim suum ingenium Deus illic delineavit, ut siquis factis quicquid illic praecipitur repraesentet, imaginem Dei quodammodo sit in vita expressurus Inst. II,8,51[2])라고 말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나? 필자는 이것을 주제로 이미 논문을 쓴 바 있다(아직 출판되지 않음. 홍치모 교수 은퇴 기념논문집, 원고지 300매). 거기서 필자는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물', '성경'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 등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칼빈은 인간과 관계하여 하나님 형상을 실체론적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이해했음을 지적했다. 우리는 방금 언급한 이 논문과 연관하여 여기서 칼빈이 율법의 제 3용도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다. 칼빈의 경우 율법이 목표로 삼고 있는 하나님 형상은 기독론적, 인간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관점을 보아야 한다. Victor A. Shepherd가 이것을 잘 요약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par exellence(가장 탁원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율법의 순종이 이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율법의 셋째 용도는 믿음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닮아가게 하는 도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 율법을 통해 그들이 종말론적으로 되어야 할 그런 존재(하나님의 형상)가 된다".
칼빈은 십계명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우리는 칼빈의 경우 실체론적 하나님 형상이 나타나려면 관계론적 하나님 형상이 이루어져 됨을 볼 수 있다(필자의 기고논문). 칼빈의 경우 이 후자는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로 명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칼빈은 첫 계명을 해석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II,8,16)라고 한 것이나 둘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굳게 붙어 있아야 한다"(II,8,18)라고 또는 "우리를 교회의 품안에 받아 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다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는 사랑과 정조를 요구하신다"(ibid.)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이루는데 본질적임을 지적한 것이다. 셋째 계명은 말할 것도 없고(ibid., II,8,22) 넷째 계명은 일 중에 하루인 안식일날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구체적으로 한번 경험하고 실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II,8,28).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들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히 하나님의 행적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ibid., II,8,28[9-10])
칼빈은 십계명 중에 수평적인 차원에 대한 내용인 5-10계명은 II,8,35-50에서 열거했다. 그는 여기서 이웃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또는 심층적으로 열거했다. 그 다음 그는 율법의 요약을 말함으로써(II,8,51) 십계명을 정리했다. 여기서 칼빈은 실체론적인 하나님 형상(하나님의 순결)이 나타나려면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져야 함을 암시했다(ibid.). 동시에 그는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수평적인 관계가 온전해짐을 강조했는데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쐐기와 같은 것이다. 펠라기안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일이 필요가 없고 자연인의 상태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경우 이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노력으로 수평적인 차원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자동적으로 정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은 칼빈이 신 10:12-13 내용 속에서 율법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붙어있게 만드는 것(믿음)임을 지적한 것에서 보인 것이다(ibid.). 칼빈은 인간이 성결하게 되려면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평적인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해야 됨을 지적한다. "율법의 목적은 순결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딤전 1: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서눋에 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ibid.). 칼빈은 이런 내용을 신명기 주석에서 율법의 요약을 다루면서도 언급했다.
이런 발언은 칼빈의 경우 하나님 형상의 관계적 형상은 수직과 수평적인 관계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것을 II,8,53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요약했다. 필자는 이미 위에 언급한 "하나님 형상"에 대한 논문에서 칼빈의 주장이 미완성적임을 지적했다. 성경이 말하는 관계적인 형상론은 믿음, 사랑 소망 이 세가지 관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논문). 그렇다고 칼빈이 시간적인 차원을 제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십계명을 언급하면서도 저주와 복받음 또는 약속과 연관하여 시간적인 차원의 내용을 언급했다(특히 2계명과 4계명). 그러나 그는 관계적 하나님 형상론과 연관하여 이 세 가지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칼빈이 이 두 가지가 시간속에서 실현됨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약간 미완성적이기는 하나 그의 발언은 율법의 제 3용도가 중생인에게 주는 영향을 설명하는 일에 손상을 끼치는 않는다.
-Exkurs: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견해-
루터파 신학자들 중에 어떤 이는 칼빈이 율법과 복음을 혼동했다고 비판하는 데 그 말이 타당한가? 호이어(Paul M. Hoyer)에 의하면 칼빈은 율법이 기독인으로 하여금 경건한 삶에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주장(율법의 셋째 용도)을 율법과 복음을 혼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Hoyer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고발할 뿐, 기독인을 경건으로 인도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이다. 즉 율법은 결코 우리 속에 선행을 야기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를 고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율법의 제 2용도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루터란의 전형적인 비판이다.
우리는 이런 비판의 문제점이 그가 지닌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이기보다는 너무나 루터파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과연 칼빈은 이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가? 사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립을 정확하게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율법의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그런데 칼빈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이런 대립에 놓여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있음을 보았다.말하자면 루터파가 성경속에서 율법을 보는 관점과 칼빈이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다는 시각으로 보았다. 또 베르카우워Berkouwer가 지적한 대로 루터가 율법의 계시성(죄를 고발함)에 치중한다면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정보성에 치중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Hesselink의 "이렇게 율법을 하나님의 한 은혜로운 뜻의 계시로 보고 강조하는 것은 칼빈이 율법과 복음 사이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보는 관점의 전제이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칼빈은 바울을 따라 율법이 '의로운 생활의 표준'(regulam iuste vivendi)이라고 못박은 다음(Inst II,9,4[2]),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 자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되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 희망을 전혀 주시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빗나간 사람에게는 저주를 더하심을 지적하면서(II,9,4[2]) 롬 3:21이하와 갈 3:10이하에 근거하여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기도 했다(II,9,4[4]). 그런데 그는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되 두부를 자르듯이 그렇게 하지 않고 이 둘 사이를 구별하지 않고 보완관계로 또는 통일체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복음은 율법이 약속한 모든 것을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림자(umbris)에게 실체(corpus)를 부여했다는 것이다(II,9,4[6]).이 둘 사이의 보완관계는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서 잘 표현된다: "인간은 율법의 고발을 통해 그리스도에게로 쫓겨가고 복음을 통해 율법의 의무를 이루게 된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상태와 더불어 가장 명쾌하게 설명된다. 율법이 인간이 처한 상태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인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즉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임을 지적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처한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부쳐(Bucer)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한다. "율법이 새롭게 하는 영이 없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사망을 가져오고, 성령으로 구비된 자들에게는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 준다". 즉 이들은 모두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이 죄인에게 접근하면, 불순종을 야기시키는 반면에 율법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함을 말했던 것이다.
칼빈은 똑같은 문제를 매우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는 동일한 율법이 죄인에게 접근하면 위협하고 죽이는 직분을 수행하고(Inst II,7,7)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접근하면 부드럽게 대하며 구원으로 인도함을(II,7,12)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은 율법이 원래 선한 것이었는데 인간의 부패 때문에 죽이는 직분이 뜻밖의 일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율법의 이런 기능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과 더불어 수행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처한 '영적인 상태'에 따라 율법의 기능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불신자들에게 접근하면 그들로 하여금 죄의 상태 속에서 절망하고 낙담에 빠지게 만드는 반면에 신자들에게는 의를 사모하게 만드고 용기와 기쁨이 넘치게 만든다"라는 Jake의 해석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칼빈이 다음과 같이 인용한 어거스틴의 말과 암부로시우스의 말은 위의 내용을 정리해 준다: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격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
우리는 칼빈의 이런 발언을 아래의 도표로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육의 상태 또는 사망의 상태 속에서 살 때는 율법이 죽음으로 위협하지만 '원시상태'(하나님 형상의 상태)나 '영에 따라'의 상태 또는 '主안의 상태'에 있으면 친절하게 대한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칼빈의 하나님 형상론은 이미 이런 도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권호덕, 칼빈의 하나님 형상이해, 패러다임 변화와 연관하여 II, 4). 그런데 왜 칼빈이 이런 도식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지 않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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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구원 최후심판
■■■■■ ■■■■■ 칭의▦▦▦▦▦ ■■■■■
■하나님■ ■육신의■ ▦성령에▦ ■하나님■
■형상대■→ ■정욕대■→ ▦따라성▦→ ■형상의■
■창조됨■ ■로의삶■ ▦화의삶▦ ■회복됨■
■■■■■ ■■■■■ ▦▦▦▦▦ ■■■■■
(A) (B) (C) (D)
원시상태 사망의 상태 주안의 상태 완전회복의 상태
육의 상태 영에따라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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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요약정리
1.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이 세상에 질서를 유지하기를 바라셨음을 알았다.
이들은 이 질서유지를 위해 율법의 제 1용도가 중요한 역할을 함을 인식했다. 이들은 또 인간의 육의 정욕이 사회전체를 혼란 속으로 몰아 넣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이들의 신학은 전적 부패한 인간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도구로서 정부 부모 선생 등을 곱았다. 이런 질서 유지는 막연하게 언제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이다.
이로 보건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입법이 이루어져야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나라 질서 기관들이(정부, 부모, 선생 등등) 각자의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해야 될 것이다. 율법의 제 1용도는 사회 공의가 굳건하게 서기 위해 이런 기관들의 건강을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해야 될 것을 암시한다. 동시에 여론이 공의의 원칙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국민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별히 개인주의의 삶의 원리와 공동체 삶의 원리 사이의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입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중요한 일에 율법의 제 1용도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론할 것이다.
2. 멜란히톤과 루터는 율법의 제 2용도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 반면에 칼빈은 제 3용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 교인들에게 지금까지 소개된 것은 율법의 제 2용도이다. 율법의 제 1용도는 자연은총을 소개하면서 첫째 용도의 내용이 어느 정도 소개가 되었으나 제 2용도마져 구체적으로 잘 소개 된 것은 아니다.
앞에 열거한 율법의 제 2용도는 기독인으로 하여금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각하도록 도운다. 이를 위해 율법의 제 2용도는 기독인들에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무섭게 심판으로 임하는가를 인식시킨다. 이것 역시 인간론에 대한 문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 심각성을 매우 민감하게 인식했다. 현대 기독인들에게 큰 문제점을 드러나는 것은 죄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자세는 결국 세속인과 기독인 사이에 구별이 사라지게 만들어 교회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세속화되어 버린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옥의 고통'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문제를 삼은 것은 '외식자'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외식자가 무엇인지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제시했다. 이들은 교회의 타락과 사회의 타락이 외식자들에게 비롯됨을 알았다. 이 외식자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율법의 제 2용도는 현대한국교회의 문제를 푸는 관건으로 여겨진다. 율법은 외식자인 교역자는 물론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율법이 외식자에게 어떤 반응을 하는지 인식시켜 반성으로 인도하도록 도운다. 한국의 경우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이 이런 반성으로 가는 길을 막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 외식자의 문제는 '값싼은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만일 율법의 제 2용도가 인간의 부패를 정확하게 지적해 주지 않는다면 교인은 외식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게 될 것이고 나아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가르침은 한국 교회에 긴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별히 종교다원주의 운동에 직면해 있는 한국 기독교회는 율법의 제 2용도를 통해 기독인의 정체성을 정비하도록 해야 한다. 종교개혁 신학은 일반 자연종교가 모두 외식자들의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3. 멜란히톤, 루터 그리고 칼빈 이 세 사람은 중생인에게 율법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세 사람 모두 율법의 제 3용도가 적용되는데 성령의 역사가 동반함을 말했다.
칼빈은 셋째 용도를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능으로 여겼다. 칼빈은 세 사람 가운데 중생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처방을 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독인들은 중생 이후의 이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 스스로의 방법으로 노력하다가 좌절하거나 외식자로 둔갑해 버릴 수 있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인이 어떻게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으로 살아서 그 목표를 향해 바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경우 교인들은 이방종교의 방법으로 살던가 아니면 명목상의 기독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공헌은 지대하다 할 것이다. 그는 중생인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문제점은 물론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을 잘 제시했던 것이다. 만일 한국 개혁교회가 율법의 제 3용도를 제대로 몰랐다면 칼빈의 신학의 핵심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름만 칼빈주의자 곧 외식자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지금 그 정체성을 검토하고 회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기독인이 그 내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은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지금(1999년) 지도자급의 기독인들의 외식적인 행위로 인해 선교와 전도에 치명적인 손상을 당하고 있다. 이 위기의 시기에 교회는 신학자들이 정직하게, 주어진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고 그들의 결론을 존중하는 풍토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신학자란 사람들이 그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고 신학을 알지 못하는 교권자들에게 아부해서 자기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정직한 신학자들의 주장이 묵살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 교회는 외식자들로 가득차서 자체 붕괴할 것이고 나아가 빛과 소금의 주체들을 잃어버린 인간사회는 치료 불가능 상태로 악화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통해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의 병든 상태를 진단하고 그 처방을 강구하는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3용도가 시민 사회에 법 특별히 형법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본다. 성경의 율법을 세속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근거는 한편으로는 종교 체제와 법체제 사이의 유사성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에 근거한 개혁신학의 대중화 작업의 당위성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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