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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에서 본 복음과 율법- 이한수

언약신학에서 본 복음과 율법- 이한수

2014-09-17 15:19:25


이한수, [언약 신학에서 본 복음과 율법]

 

 

서론: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울신학에서 언약의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바울의 언약적 사상의 세계는 다메섹 회심 전과 회심 이후에 급진적으로 바뀜을 볼 수 있다. 회심 이전에 바울은 바리새 유대교 신학에 열렬하게 헌신하였지만 다메섹 소명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논증하는 결정적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바울의 중심주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자체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적인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1. 언약: 언약이란 바울 서신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지 않지만 히브리서에서는 중심개념을 이룬다. 

로마서 9:4, 갈라디아서 3:15, 17절에서 율법과 약속은 반립적인 대조 관계에 놓여 있다. 고후 3:6,14절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한다. 옛 언약에서 유대인들은 언약 안에 있는 내인인 반면에 이방인은 외인으로 간주된다. 언약 신학은 ‘신론’에서 출발하는데 구약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유대교도 유일신론적 전통을 따른다. 이것은 창조론적이며, 언약적이며, 섭리적이며, 배타적이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언약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백성을 형성하는 것(렘31:33, 겔36:28)에 있는데 이것은 선택과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백성을 형성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율법에 대한 순종의 요청은 언약을 성립하는 조건이 아니라 언약 관계 안에 머무는 방식이며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신30:16,27; 요14:15; 요일5:3) 본래 언약신학은 “은혜성”과 “요구성”사이의 균형을 생명으로 하는 신학 체계이다. 전자를 강조하면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정체성이 강조되고, 후자를 강조하면 언약의 법률적인 측면들이 강조된다.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하나의 종교적 신념 체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국가적이고 혈통적인 언약신학과 남은 자 그룹의 개인적인 언약신학의 측면이 논쟁중이었다. 중간사 시대의 유대교 분파에서는 이스라엘의 다수가 언약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바울의 유대교 비평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2. 유대교: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가리키고,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토라의 종교이기도 하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과 로마서 2,4,9장 등에서 유대교를 비평하는데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바울의 다양한 논의 중에서 중심적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학자들은 ""행위 의"의 종교인 유대교로 다른 학자들은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인 유대교로 조화적인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행위 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신율주의 종교라고 보고 바울은 그러한 종교 인식에 도전했다고 주장핟나. 그러나 유대교의 언약신학은 혈통적 연대성 원리에 근거하여 아브라함, 모세, 다윗, 새 언약의 사이의 내면적 통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3. 율법: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한 특징은 성문화된 율법 뿐 아니라 구전 율법을 통해서도 삶을 규정한 것인데 모세의 율법의 권위 있는 신적 계시의 말씀처럼 랍비들에 의해서 전수된 구전 율법도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바울 서신에서 율법은 일차적으로 모세의 글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구절에서 옛 언약을 읽는 것은 율법과 동의어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에서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 책이란 사실도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는 자들인 반면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는 자들로 묘사된다. 이로서 율법은 사회적 표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로마서 3:19절에서 율법은 토라를 뛰어 넘어 구약 전체를 지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 복음: 복음은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 내용이요 아브라함에게 먼저 전파된 복음은 바울이 이방 세계에 전파하는 복음 메시지를 예시한 것이다. 종말론적 성취의 측면에서 아브라함, 모세, 새 언약으로 이어지는 언약사의 전체 흐름 속에서 균형 있게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복음은 에언적, 기독론적, 구원론적,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복음은 이방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전파하는 기독론적인 메시지이며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칭의 구원론의 메시지이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된다는 메시지이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구원사건의 메시지이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메시지이며, 또한 신자들이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견고하게 붙들어야 할 소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복음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이다.

 

 

1부 율법 종교로서의 유대교

 

1장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 실천적 유추에서 본 전망

 

1. 문제제기: 

최근 유대교가 어떤 종교인지 확인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는데 행위의의 종교 혹은 행위 구원의 종교로 보고 샌더스나 던과 같은 학자들은 언약적 신율주의로 파악하고자 한다. 최근에는 이 둘을 조화시켜서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종교로 간주하려는 시도까지 생겨났다. 본 장에서는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을 실천적인 유추의 전망에서 살펴볼 것이다.

 

2.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

 

2.로마서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 

바울은 대화체 방식을 사용하여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공평무사한 심판의 원리를 천명하고 유대인들의 특권적 신분도 그들의 안전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참 유대인의 정체성을 재정의한다. 로마서의 전반부인 1-16장은 가상의 대화상대자를 “너”라는 2인칭으로 사용하고 후반부 17절에서부터는 “유대인이라는 칭하는 네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너”는 누구인가? 첫째, 바울은 도덕적 통찰력과 이상을 지닌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둘째, 바울이 유대인들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 있는데 4절에 함축된 언약적 색채의 언어와 유대인의 특권들,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도덕적 우월의식 등은 바울이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만일 가상적 대화 상대자인 ‘너’가 유대인이라면 유대인들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1) 유대인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믿고 있었다.

2) 유대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였다.

3) 유대인은 심판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방인들)의 악행을 정죄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동일한 일들을 행하였고 회개치 않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1) 유대인들이 신앙했던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전제로 삼고 있다. 

2) 다른 사람의 악행을 심판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유대인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3)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된 근거는 그들도 이방인들과 동일한 죄들을 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4)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하다.

 

문제의 핵심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해서 언약적으로 성실하시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정죄의 심판에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범죄 실상을 지적하면서 그들도 하나님의 정죄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본 점이다. 유대교 비평의 핵심의 근저에는 그들의 현실적인 악행들의 실재가 놓여 있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값으시는 분이다.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믿음은 선한 행실로 논증되고 표현되는 실재이다.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유일신을 섬기는 자들로 묘사된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다. 

 

로마서 2장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의 본질은 다음의 세 가지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는데 

1) 유대교는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얻어보려고 시도했던 행위의의 종교였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2) 유대교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믿었지만, 그것을 인간의 율법 순종의 책임에 조건지어진 개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로마서 2장의 문맥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신분을 상실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3) 유대교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곡해하여 자신들의 삶의 책임의 실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소명과 선택에 내재한 필수적 요소라는 것을 깨닫는데 실패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과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데 작용하는 그의 주권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책임의 실재를 그 빛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심판이 불가피한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임을 자랑하면서(4:1) 육신의 할례나 세우고(2:25-26, 3;30) 율법도 의문의 수준에서 붙들면서 실제로는 범하는 (2:23) 소위 “표면적인” 껍데기 유대인들이 사실 처음부터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2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바울의 유대교 비평: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라는 현실과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 사이에 놓인 역사적 딜레마를 다루는데 

1)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기 백성에게 성실하시며 

2)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3)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인 이스라엘은 지금 대다수가 불순종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복음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역사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 재정의를 내리는 수밖에 없다.

 

표면적 유대인은 육신의 할례나 전통, 의문으로서의 율법을 붙드는 자들인 반면, 이면적 유대인은 마음의 할례를 지향하며 의문이 아니라 영을 지향하는 자들이다. 참 하나님 백성의 존재 기원은 역사적 지평에서 발견되는 어떤 인가적 행위나 성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9:7, 11.24-26)과 선택(11:5)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인간적인 행위나 성취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해 형성된 ‘약속의 자녀’(9:8)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고 해도 문제가 전혀 없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축복들은 혈통이나 할례, 율법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무할례자 신분에 있을 때 믿음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발자취를 좇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는 개방된 보편적인 축복인 것이다. 결국 바울이 율법을 범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이 결국은 ‘표면적유대인’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2.3 유대교 내부 논쟁: 

바울이 2장에서 유대교 내부 비평자의 시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바울은 언약적 성실성의 개념을 전제하면서 유대인들이 언약적 성실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아노라”는 진술은 유대인들 가운데 공인된 일반적 지식에 호소하여 그릇된 전제를 깨뜨리고자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셋째, 2;11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는 구약 뿐 아니라 유대교 문헌에서도 공인된 명제이다. 의견 차이의 핵심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육신적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 그룹만이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라는 사상은 구약 후기 예언서와 중간사 시대의 유대교 문헌 가운데서 등장하는 “남은 자” 신학과 깊이 맞물려 있다. 남은 자의 존재는 9:29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남겨둔 “씨”와 동일시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 육신적 이스라엘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소수의 남은 자 그룹에게만 해당된다고 이해한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집합적인 언약신학적 사고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 그거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과 선택에 있고 그 정체성은 순종하는 삶의 실재를 통해서 나타난다.

 

2.4 새로운 계시적 인식: 

바울의 유대교 비평은 다메섹에서 받은 계시적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바울은 익명의 대상자와 함께 유대교 내부의 전제를 가지고 논증하고 둘째, 계시적 인식에 기초하여 새로운 측면을 포함한다. 최근 김세윤 교수는 유대교를 순전한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나 행위의의 요소를 부인하는 새 관점주의자도 옳지 않으며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신율주의였다고 주장한다. 라토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은총의 신분을 소홀히하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으면 언약 밖으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능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려고 함으로 행위의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례와 법도와 게명을 준수하고 지키는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김세윤 교수는 초반에는 율법준수를 통해 의를 확보하는 길을 선택한 유대교 자체의 오류를 비판하다가 인간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는 율법의 구조적 약점을 비평하는데 나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유대인들이 선민적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율법 준수를 통해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강성 율법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둘째, 바울은 이신칭의의 논하는 자리에서 율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을 전적으로 거부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생에 이르는 길로서 성화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진술은 유대인들의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으려 했기보다는 율법 아래서 행해진 반역의 역사를 계시의 빛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민족주의적인 국가적 언약신학에 기초한 종교로서 그 중심에 율법을 두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인식론적 한계, 무능성의 한계, 민족주의적 한계를 깨닫고 언약의 외피적인 요소들만 붙잡고 있는 유대인들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외피적인 요소만 붙잡고 율법 백성 답게 사는데 실패한 것이다.

 

3. 결론적 관찰들

 

3.1 결론적 요약: 

첫째, 유대교는 강성율법주의보다는 연성 율법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둘째, 유대교는 대중적 인식 속에서 언약적 신율주의 종교로 간주될 수 있다. 

셋째, 바울의 유대교 비평은 대중적 자의식과 관련이 있고 기독교 복음의 대안을 제시할 때는 남은 자 그룹의 신학 패턴을 따른다. 

넷째, 남은 자들의 존재의 기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 있지만 그들의 신분은 율법에 대한 순종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특징화된다. 

다섯째, 바울의 유대교 비평에는 언제나 율법 문제가 있는데 율법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 요소, 사회적 경계선 표지 기능을 한다. 또 다른 차원은 율법의 구원사적 한계 혹은 구조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여섯째, 유대교의 오류는 언약을 국가적 선택론에 기초하여 혈통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언약 외피적인 요소들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시래하고 범죄에 빠진 데 있다. 결국 로마서 2장의 바울의 논지는 행위의 조건에 기초해서 구원의 실재를 결정짓는 방향이 아니라 행위의 실재를 통해서 신분 정체성을 추론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일곱째, 바울은 유대교를 비평할 때 대중적 자의식 속에 자리잡은 국가적 언약신학을 거부하고 선택론을 새롭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기원은 그의 선택적 부르심에 있다. 따라서 바울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선택론을 거부하고 아브라함 언약을 재해석함으로 이방인이 언약 백성의 합법적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신칭의 복음은 “사회변헉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2 연구를 위한 제언: 

바울은 은혜 언약 속에서도 구원의 선물을 경험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함께 섞여 있다고 보고 있다. 칼빈은 언약을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길”이다. 칼빈은 이와같이 언약을 역동적으로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하게 붙들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2장 유대교와 바울의 이방선교: 최근 유대교 해석 패턴들에 대한 평가

 

  강성율법주의란 유대인조차도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전제하고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교를 말하고 연성율법주의는 하나님 백성임을 전제하고 하나님백성답게 살려다가 계율종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는 

첫째, 연성 율법주의의 경향을 있으나 강성 율법주의의 종교는 아니다. 

둘째, 유대교는 대중적 인식 차원에서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적인 논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바울은 선민주의에 바탕을 둔 대중적 인식을 비평하지만 남은 자 그룹의 신학 패턴을 따른다. 

넷째, 남은 자들의 존재 기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 있지만 그들의 신분은 율법에 대한 순종 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특징 지워진다. 

다섯째, 바울의 유대교 비평은 항상 율법과 관계가 된다. 율법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사회적 경계선 표지 기능을 한다. 바울은 율법의 구원사적 한계 혹은 구조적 약점을 지적한다. 

여섯째, 요대교의 오료는 언약적 국가적 선택론에 기초하여 혈통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언약의 외피적인 요소들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실패한 범죄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 백성의 기원을 그의 선택적 부르심에 두면서 편협한 민족주의적 선택론을 거부한다. 이신칭의의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고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다.

 

 

2부 언약 신학에서 본 율법과 복음

 

강성율법주의란 유대인조차도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전제하고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교를 말하고 연성율법주의는 하나님 백성임을 전제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다가 계율종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는 

첫째, 연성 율법주의의 경향은 있으나 강성 율법주의는 아니다. 

둘째, 유대교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나 통일된 인식은 아니다. 

셋째, 바울은 민족주의적 대중적 인식은 비평하지만 남은 자 신학의 패턴을 따른다. 

넷째, 남은 자들의 존재 기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 놓여있지만 그들의 신분은 율법에 대한 순종 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특징화된다. 

다섯째, 유대교 비평은 항상 율법문제와 관련되는데 율법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사회적 경계선 표지 기능을 하지만 율법은 구원사적 한계성 혹은 율법의 구조적 약점이 있다. 

여섯째, 유대교의 오류는 언약을 국가적 선택론에 기초하여 혈통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언약의 외피적인 요소들을 내세우면서 사실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범죄한데 있다. 일곱째, 바울은 국가적 언약신학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론을 하나님의 백성의 기원으로 두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선택론을 거부한다. 이신칭의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사회 변혁적 성격을 가진다. 중요한 것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도 구원의 선물을 경험하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들이 함께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언약은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길 인 것이다.

 

 

3장 율법과 그리스도: 반제들의 기원과 그 의의

 

1. 왜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는가?:

 

1.1 “이방인을 위한” 바울 복음과 사도직의 기원: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소명 사건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 가운데 전하는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갈1:12)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직과 복음이 밀접하게 연결된 것인데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이 바울 복음의 핵심 내용이고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1.2 기독교회 핍박을 야기한 원인: 바울은 조상의 유전에 헌신한 자였는데 조상의 유전이란 넓게는 바울이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통해서 배우게 된 조상들의 교리와 풍습들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특정하게는 구두로 전해진 율법 교훈들 또는 바리새 학파 가운데서 전수되어 내려온 할라카를 지칭하는 것이다. 모세 율법과 유전에 열심이었던 바울은 유대교를 지탱하는 두 핵심 요소인 율법과 성전에 대한 공격에 참을 수 없었다.

 

1.3 율법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가: 바울은 다메섹 소명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목적과 언약 백성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김세윤 교수는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의 핵심 내용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는 고후 4:4절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술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안에서 첫째 아담이 상실한 자신의 형상과 영광을 회복하신 것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이러한 ‘형상 기독록’에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이 발전되었으며 그의 칭의론도 이방인 선교와 관련하여 발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김교수의 논지는, 

첫째로 율법을 끝냈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루터파적 신학 노선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율법의 판결을 무효화시켰고 예수는 하나님의 뜻의 참 계시로서 율법을 대체시켰다고 하였다. 

둘째로, 그리스도가 의를 얻는 길,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 율법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관찰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대체하였고 이론상으로는 사람이 완벽한 준수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였다. 

셋째로 김교수는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행위 구원의 종교로, 다른 한편으로는 언약적 신율주의의 전망에서 평가하는데 그는 이러한 성격의 유대교를 “신인협력적 신율주의”라는 술어로 묘사한다. 그러나 바울 당대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으면 언약 안에 들어온 신분을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불안하게 생각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을 과신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이방인들처럼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언약 안에 들어온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다메섹 계시의 인식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의 참 성격을 재정의하여 이방 기독교인들도 합법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포함시키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칭의론은 아브라함 자손의 참 성격을 재정의하는 수단이되고,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지닌 아브라함 자손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격파하는 논쟁의 수단이 된다. 결국 칭의론은 법률적인 신분만을 변경시키는 무죄선언의 판결이란 의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의한 참 하나님의 백성의 형성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넷째, 할례와 율법은 언약백성인 유대인만을 위한 특수 구원사의 요소이고 은혜와 믿음의 복음은 보편 구원사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1.4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 

바울은 인류 모두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율법 아래 갇힌 상태에서 죄의 폭군적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바울은 구원사의 시기를 율법의 시기와 믿음의 시기로 구분하면서 율법의 시기는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제한된다고 하였다. 몽학선생(παιδαγογος)이란 랍비문헌에서 이스라엘 중요 지도자들을 묘사하는 말로 자주 등장하는데 최근 베츠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 당시의 문학 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위협하고 때리거나 자유를 제한하는 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율법은 잠정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과 같은 감독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 축복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2. 율법과 그리스도: 두 상반된 칭의 영역.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유대교의 인종주의적인 언약신학을 비평하고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이 시내산 언약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 안으로 이전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율법의 대조는 첫째로, 사회적 함의가 있다. 율법과 그리스도는 하나님 백성의 경계선 표지가 되는데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하나님 백성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표지가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율법을 대조함으로 유대교와 기독교회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회적 실재임을 천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십자가 죽음에서 성취한 사랑의 교훈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새 언약을 바울 자신의 복음과 연결시키는 연속성을 지닌다.

 

 

4장 약속과 율법: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율법과 약속의 대립관계:

첫째, 칭의론과 관련하여 율법과 약속은 흔히 반립적인 대조의 관계에 놓이는데 칭의라는 술어는 언약적이고 존재론적이며, 법률적인 성격을 가진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역에서 가능하다.

둘째, 율법과 약속을 대조하는 진술들은 언약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바울은 남은 자 신학을 통해서 새 언약사상을 들어 아브라함의 자손을 재정의한다. 율법은 하나님 백성의 참 표지가 아니다.

셋째, 칭의론과 관련하여 약속과 율법을 대조하는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준할 수 없는 사회적 실재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교는 육에 속한 반면 기독교는 성령에 기초한 종교이다.

넷째, 칭의론의 관점에서 아브라함의 참 가족의 성격을 규정하는 바울의 해석은 이방선교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율법과 약속의 성취관계:

첫째, 아브라함, 모세, 다윗, 새언약 사이의 내면적 통일성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립된다.

둘째, 종말론적인 성취의 전망 아래서 약속과 율법, 그리스도와 율법은 칭의론을 다룰 때와는 달리 긍정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신약의 이스라엘은 회복된 이스라엘로 믿음과 성령으로 특징화되는 변화된 실존이다.

 바울의 언약사상의 일치성 문제: 바울 서신은 상황적으로 쓰여졌다.

 

 

5장 바울에 의해서 재해석된 아브라함 이야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육신적 조상으로 생각하였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축복들이 마땅히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할례와 같은 의식은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한다는 것을 표시해주는 언약적 징표로 여겨졌다. 바울은 칭의가 어떤 대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경험되는 것이며 삶과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논증되고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6장 바울의 율법신학: 율법에 대한 삼중적 접근

 

1. 사회적 경계선 표지로서의 율법: 언약적 신율주의에서 할례와 율법준수는 핵심요소인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에 힘썼고 이것이 자신들을 언약 백성으로 자랑할 수 있는 우월의식의 근거로 삼았다. 여기서 배타주의가 발생하게 되었고 적대의담을 쌓게 되었다. 율법은 이처럼 사회적 기능, 구원사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것을 극복하고 초문화적이며 영적인 사회적 실재가 되게 하였다.

 

2. 언약적 전망에서 본 율법: 언약적 전망에서 언약은 은혜성과 요구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의 은총으로 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언약백성의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다.

 

3. 종말론적 성취의 전망에서 본 율법: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배타적인 기능이 폐지되고 율법의 요구를 성령 안에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아브라함언약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시되었고 그 원리는 한번도 변경된 적이 없었다. 아브라함 언약은 믿음과 은혜의 원리에 기초한 반면, 시내산 언약은 행위의 원리에 기초한다. 전자가 보편적 언약이라면 후자는 배타적 특권을 뒷받침하는 특수 언약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정죄 기능을 폐지한 것이지 율법 자체의 본질적 내용을 폐지한 것은 아니다.

 

 

7장 율법과 생명: 구약, 복음서, 바울 서신에 나타난 율법 이해들의 비교

 

구약에서 율법은 은총의 선물, 언약공동체의 삶의 규범, 생명의 길, 로 묘사되며 공관복음에서 율법은 생명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영생을 유업으로 얻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계명들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충분한 자격요건이다. 계명에 대한 순종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천국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삶의 실재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바울도 율법은 참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할 수 없다고 본다. 약속의 자녀 또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언약 공동체가 율법을 따라 났다면 새 언약의 공동체는 성령과 믿음을 따라서 난 자들이다. 또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생명의 길로 제시되지만 의무는 죽이는 것일 뿐이다. 바울은 성령이 없는 율법과 성령과 함께한 율법을 구원사적으로 대조하면서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을 대조한다. 율법은 표면적 유대인을 심판하는 도구로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하는 도구일 뿐이다. 표면적 유대인들을 새롭게 하고 생명을 주는 것은 새 언약의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육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신자들의 순종의 삶 속에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는 길을 열어 놓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성이라는 개념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재정의함으로 문제를 돌파하는데 이스라엘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그의 미리 아신 백성, 은혜로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8장 율법과 성령: 구원사적 대조 속에 나타난 그 실천적 의의들

 

율법과 성령의 대조는 유대 사회를 대항하여 기독교의 우월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구원사적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바울은 율법의 구원사적 한계를 드러내고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아브라함 언약과 후기 선지서들에 나타난 새 언약 사상에서 찾았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율법이 아니라 초문화적이고 초인종적인 믿음과 성령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보았는데 보편적인 언약이다. 여기서 새 언약의 영은 새 언약 백성의 정체성과 신분을 결정하고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원리로 나타난다. 새로운 피조물은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새 언약의 우월성을 확신하는 낙관론적 현실주의자이다.

 

 

3부 교의신학에서 본 시각

 

9장 박형룡 신학의 재조명: 구원론 체계 속에서 본 신약 윤리

 

박형룡 박사는 오직 믿음으로 경험되는 칭의론을 확고하게 붙들면서도 칼빈과 마찬가지로 칭의 구원이 신자들의 선행을 산출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강하게 붙든다. 십자가의 구속은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거룩에 이르는 열매를 나타내며 선한 일에 힘쓰는 존재들로 변화시켰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은 축복론과 상급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윤리가 신자의 정체성과 구원 목적에 관련된 근본 요청이기 때문이다. 언약적 전망에서 보면 신자가 은혜로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 책임있는 순종으로 언약 관계를 유지한다. 바울은 이 두 전망을 잘 조화하는데 선택 개념은 언약 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술어이다. 언약과 선택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바울은 선택론을 가지고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면서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육적인 후손이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책임 있는 순종과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