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사명과 바울복음의 성격
2014-09-17 12:56:18
바울의 사역과 신학적 적업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이방인의 사도라는 자기 이해의 산물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그의 이런 사도적 직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도적 섬김의 핵심인 그의 복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탐구가 그의 사도적 자기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복음전파 사역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바울의 목회적 실천과 신학적 사고를 움직여간 핵심적 원리가 즉 바울의 복음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이해가 그의 삶과 신학에 갖는 결정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사도적 자의식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바울의 사역을 관통하고 있는 그의 사도적 자기 이해 혹은 사도적 소명의식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바울 자신이 자기의 사도적 소명에 대하여 말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식적인 요구는 바울신학계에 정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바울의 모든 편지들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분명한 소명의식 아래 쓰인 사도적 편지들이다. 바울서신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바울이 사도적 자기 이해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결정적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사역과 그의 서신들 전체를 아우르는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이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개념의 틀을 찾아야 한다. 이런 기본 원칙하에 우리는 '제사드리는 자' 로서의 바울이 면모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작업이 의미있는 것은 성전제사의 수종자라는 초상은 신학자, 선교사 혹은 선지자 등 바울을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이 흔히 제시하는 유비적 개념이 아니라 바울 스스로 자신의 사도적 소명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이해가 가장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구절은 로마서 15장 15-16절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제사장 직무란 이방인을 제물로 드려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는 바울이 향후 자신의 서방 선교를 염두에 두고 로마의 성도들과 교제를 트기위해 쓴 일종의 선교편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이 편지에서 자신의 사역과 복음을 바로 소개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민감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로마서가 바울이 최고의 신중함으로 자기의 사도적 사역에 관해 기술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는 바로 이 구절이 바울의 사도적 사역, 더 나아가 그의 사역의 핵심인 그의 복음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시작할 최선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의미심장하게도 구약의 제사 용어를 빌어 자신의 사도직분을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담당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바울의 이런 표현은 율법의 제도를 따라 제사장 노릇을 하는 구약의 제사제도를 염두에 두고서 거기에다 율법-복음의 반제를 적용하며 만든 표현으로 보인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제사장 노릇을 했지만 이제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제사장 역할을 감당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도입한 제의적 그림의 핵심은 '이방인의 제사'에 있는데 '이방인의 제사'란 말은 아마도 바울이 자신이 바치는 제물로서 이방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바을은 이방인을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직무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제의적 비유로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바울의 사도적 사역 그리고 그 사역의 핵심인 그의 복음의 성격을 믇는다는 점에서 바울 신학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제사장으로 성취하려는 섬김의 목적은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사명에 관해 말하는 가장 구체적 진술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진술은 바울의 사도적 사역 및 그 사역의 근거가 되는 바울 복음의 성격에 대한 가장 결정적 단서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제도의 다양한 규정들의 의도는 한마디로 제물이 하나님께 받으심직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의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수행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물이 하나님의 규정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여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바울 역시 제물이 하나님의 규정에 맞아야 하고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된다는 구약 제사의 기본 정신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복음의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이방인의 제물 역시 하나님께 받아들여 지기 위해 만족시켜야 할 분명한 조건이 있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의 임무는 바로 이런 조건들에 맞는 제물을 마련함으로써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드리는 이방인의 제물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이어서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려여 할 합당한 예배란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약적 제사가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면 신자들의 영적 예배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몸을 드리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드림이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제사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을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15장에서 바울이 제사장인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면 12장에서는 신자들의 임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 두개는 상이한 그림이 아니다. 바울의 궁극적 관심은 누가 제사의 주체이냐가 아니라 드려지는 이방인의 제물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가 되느냐이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말의 의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하듯이 몸을 통해 나타나는 지상적 삶 혹은 몸을 갖고 사는 현재적 삶 전체를 드린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가 죽음과 무관한 삶의 이야기라면 왜 바울은 굳이 죽어야 성립되는 제사 개념을 고집한 것일까? 원칙적으로 죽어야 성립되는 제사 기념은 신자들이 매일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영적 예배를 지칭하는 비유로 활용될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의 제의적 비유의 핵심은 산 것과 죽은 것 사이의 표면적 차이를 넘어 이 두 제사가 갖는 거룩함이라는 제사의 본질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통하여 새롭게 펼쳐지는 기독교적 삶을 구약의 성전 제사와 같은 거룩한 예배행위로 간주하였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의 사도적 소명속에서 이 거룩한 제사는 그의 사역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사도적 소명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산 제사 곧 영적 예배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들이 일상적 삶속에서 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 제사의 거룩함이 선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율법의 규정에 충실함으로 확보되었듯이 산 제사의 거룩함 역시 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확보된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개념은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더불어 일어나는 영적-도덕적 죽음과 새로운 삶의 역동성을 절묘하게 포착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한 제사,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바울이받은 사도적 소명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한다. 바울의 제사장 임무는 그의 사도적 본업과 구분되는 부수적 임무가 아니라 그의 사도적 소명 자체에 대한 핵심적 설명이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이 맡은 책임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거룩하고 받으실만한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제사장 책임은 복음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 복음 선포를 통해 수행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바로 거룩한 제사,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제사라는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한 그런 성격의 복음일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자기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다. 바울이 6장에서 말하는 칭의는 그저 의로운 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존적 변화를 포함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와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런 신적 직설법은 아직 신자들의 현재적 삶에 그 전모를 드러내지 못한다. 따라서 죄에 대한 죽음과 하나님께 대한 살아남이라는 신학적 실재는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 불가피한 도덕적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신자들이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있는 자들로서, 불의의 도구 되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칭의의 실제적 의미이다.
사용된 그림언어는 다르지만 6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가 12장의 권면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비유 자체가 아니라 비유가 담아내는 실제적 내용인데 그것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드려짐은 6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 혹은 의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며 12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두 묘사는 동일한 삶의 정황을 포착하는 상이한 표현이다. 그리고 우리가 15장 16절에서 확인한 것 처럼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신이 성취하려는 사명의 핵심이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바울의 사도적 사역 및 그의 복음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바울의 사도적 임무는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 그렇다면 이 복음이란 어떤 성격의 복음일까?
바울의 목표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만한 제물 곧 흠이 없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에서 흠이 없는 제물에 대한 요구가 수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흠없는 제물을 마련하는 것이 실제적인 의미에서 제사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의미심장하게도 바울 서신에는 성도들의 삶과 관련된 문맥에서 흠 없음에 관한 언급이 매우 빈번하게 나타난다. 빌립보서 2장 14-17절에서 성도들이 흠이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흠이 없어야 한다는 구약 제사의 요구를 바탕에 깔고 있다. 바울의 제사적 언어 사용이 자신의 제사장적 위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섬김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도 다시 확인된다. 빌립보 성도들이 드리는 믿음과 제물의 봉사가 흠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사도적 사역의 성공 여부는 바로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살아가는냐 여부에 달려있다.
에베소서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관점을 확인한다. 서두에서 바울은 신적 예정의 목적이 신자가 사랑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큰 구도속에서 구원의 청사진을 그리는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이 영원하고 주권적인 계획의 핵심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은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준다. 하나님의 예정이 우리의 거룩하고 흠이 없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예정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그리스도 사건 역시 동일한 목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예정부터 마지막까지 구속의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를 통해 혹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바울의 강조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한가지 분명한 목적을 가진 것인데 바울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요약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함은 십자가의 부수적 효과가 아니라 십자가 자체의 핵심적 목적에 해당한다.
여기서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의 책임이 중요해진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사역은 당연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들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예정 및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목적을 공유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는 그 예정을 구체적인 현실이 되게하셨으며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퍼뜨린다. 에베소서와 마찬가지로 골로새서도 구원의 목적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함이었다.(골로새서 1:22) 바울의 사역이 이런 신적 목적의 구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역시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리스도 사건의 목적에 관한 진술은 동시에 바울의 사도적 섬김이 추구하는 목적에 관한 진술이기도 한 것이다.
바울은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지만 그의 섬김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한 섬김이었다. 말하자면 성도들의 거룩함을 그 핵심적 목표로 하는 그의 사역이 바로 복음 선포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라면 이는 그가 선포하는 복음 자체가 성도들의 거룩함을 핵심에 두고 있는 그런 성격의 복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사도적 소명에 관한 바울의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울의 복음에서 윤리적 차원이 주변적인 혹은 부차적인 요소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핵심에 가까운 요소가 됨을 예상할 수 있다. 바울이 사도로서 선포한 복음이 구원의 복음이라면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을 통해 이루려던 목표가 성도들의 거룩함과 순종이라면 이는 곧 바울이 선포한 구원의 복음 자체속에 거룩과 순종이라는 도덕적 요소가 그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이라 불렀던 것은 그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언약적 요구나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구약적 명제를 건너뛰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복음이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 곧 성도들의 순종과 거룩함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 그리고 복음속에 율법이 하지 못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깨달음과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바로 이 능력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구현한 이방인의 사도였다.
[추기] 2014. 9. 23 화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섬겼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루려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바울 서신을 이해하려면 이런 질문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는 바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바울이 편지를 쓴 의도를 알 수 있다. 바울의 편지는 신학적 사색이 아니라 목회적 산물이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편지를 쓴 것이다. 따라서 그 편지에는 교회 공동체를 돌보려는 목회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였고 목회적 목표를 가지고 일하고 편지를 쓴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복음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썻고 이 과정에서 고난을 많이 받았다. 바울이 여러지역에서 전도를 하였지만 바울이 여러 지역을 다니게 된 것은 박해를 받아 어쩔수 없이 쫒겨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박해가 없을 때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머물러 있었는데 예를 들면 고린도에서 18개월을 에베소에서는 3년을 머물면서 교회를 가르쳤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은 단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려는 바울의 노력과 열정이 나타나있다. 바울이 목표는 제대로 된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바울의 신학은 추상적이지 않고 실천적이며 열정적이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분을 제사장 직분에 비유하여 말한다. 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때문이라고 말하면서 16절에서 그 은혜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는 일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한다. 바울이 왜 이런 구약 제사의 이미지를 사용했을까? 구약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거룩함이다. 그래야만 그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효한 제사가 된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기 보다는 제사가 거룩하게 되도록 제사인을 지도하는 사람이다. 18절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에게 이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바울에게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는 것이 중요하였다. 결국 거룩은 순종의 개념이다. 이방인에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목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 사역의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 복음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바울의 편지에는 구약 제사에서 나온 언어가 풍부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로마서 12장 1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 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구약 제사와 다른 점은 제물이 죽은 동물이 아니라 신자 자신의 삶 자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제사의 정신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은 구약과 동일하다. 바울은 이 산제사가 바로 영적인 예배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적 예배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분별은 당연히 순종을 포함한 것이다. 결국 바울 복음의 목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 직분을 제사장으로 비유한 것은 자신의 목표가 이방인을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거룩하고 흠이없는" 이란 말이 도처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방인을 거룩하고 흠이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울 사역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 복음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동안 바울 복음을 너무 추상화시켰고 삶과 분리된 마음의 문제로만 왜곡하였다. 바울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고 말한 의도는 진정한 믿음과 공공연한 믿음, 곧 확실한 믿음이지 삶과 분리된 믿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 사역의 목표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이방인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그가 행위없는 믿음을 말했겠는가? 행위가 구원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단 말과 같다. 바울이 추구한 거룩함은 바울 사역의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바울 사역의 최종적 목표였다. 바울은 처음부터 거룩한 공동체를 목표로 사역을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 복음을 다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의 복음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자신의 사도직분의 목표가 이방인들이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은 믿음으로 순종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믿음과 율법은 대립되지만 믿음과 행위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믿음과 행위는 충돌하지 않는다 다만 순종의 길이 율법이 아니라 믿음임을 강조할 뿐이다. 목표는 언제나 순종이었고 그 순종이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 나타남을 의미하였다. 바울에게 은혜 개념은 수동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바울 서신을 액면 그대로 읽지 않고 자기 틀에 맞추어 읽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따라가면 충격을 받는다. 액면 그대로 따라가 바울을 제대로 읽으면 바울 복음은 복음서나 야고보서의 메시지와 동일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하나의 통합된 복음임을 우리가 알게될 때 복음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된다.
질문 1.
결국 바울 복음이 목표가 거룩한 삶이라고 한다면 거룩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삶을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분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분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특별히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속에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답: 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은 단순히 윤리적이나 도덕적 탁월함을 의미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관계를 전제한 개념이다. 거룩은 문자 그대로는 구별됨이나 따로 떼어 놓는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관계적인 배타성을 의미한다. 즉 언약을 맺은 관계인 언약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인 신실함 혹은 충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룩의 본질적 의미는 언약 상대방에 대한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언약적 신실함으로서의 거룩이란 언약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언약적 의무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바로 율법이다. 언약관계의 일방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전적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하셨고 언약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언약법으로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에 신실하다는 것은 언약법인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끼 율법을 떠나서 거룩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서의 율법을 분별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을 우리 시대의 삶의 자리로 가져오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일이 바로 신학작업의 중요한 부분이고 공동체로서 교회가 힘써 연구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언약을 맺은 것은 언약적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언약맺음 없이 언약적 삶이 있을 수 없지만 반대로 언약젃 삶이 없는 언약은 무의미할 것이다.
질문 2.
바울에게 믿음과 율법은 정말 대립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바울에게 율법은 무엇이었을까? 구약에서 율법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삶을 규율하는 구체적인 원리였다. 그러니까 율법은 언약 백성들에게 요구된 일종의 언약법이었다. 언약 맺음의 목표는 바로 언약법에 순종하는 언약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에게 믿음의 목표가 순종이라면 믿음이 순종의 구체적 규례을 가르치는 율법과 충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답: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믿음과 율법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은 비극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바울의 문맥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석의의 결과다. 복음서에서 예수도 그렇고 유대인으로서 바울도 그렇고 율법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표현이 나타난 것은 언제나 율법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 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무시한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율법준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인 모양만 취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지적했다. 그래서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먼저였다. 그리고 율법은 이 언약관계에서 나온 관계법이고 이 언약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진 언약법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율법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범주의 것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 로마서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이 복음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 그리고 믿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 우리의 언약적 신실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언약적 삶인데, 이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으로서의 율법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믿음과 율법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다른 범주의 개념으로서 믿음이 언약맺는 일과 관련된다면 율법은 언약맺은 자가 살아야 할 언약적 삶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바울 복음의 위치
2014-09-03 16:33:59
기독교 신학에서 바울 신학은 압도적 위치를 차지한다. 톰라이트가 지적한대로 복음서는 기독교 신학에 기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복음서는 무엇이며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안에서 바울 복음의 위치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바울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맥락은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맥락에 따라서 동일한 말과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 다음에 현대적 문맥에서 바울신학의 함의를 생각해야 한다. 즉 본래의 맥락에서 바울을 해석한 후 현대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전통적 관점에서 제임스 던은 새관점에서 바울신학을 전개한다. 이 두책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좋다.
복음서의 메시지와 바울의 메시지는 뭔가 다른거 같다. 이 두 메시지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이것이 통합되지 못하면 복음을 총체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충만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무기력함은 바로 복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신약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은 순종하는 삶이고 이것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를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믿음과 은혜를 동의어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이 비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율법적 의가 아니라 "위선적 의"였다. 예수님의 관점은 언제나 행함과 순종이었다. 행위를 요구하는 복음서와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너무나 선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서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바울이 말하는 믿음, 은혜를 행위를 배제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바울이 싸운 대상은 무엇인가? 바울은 언제나 행위를 전제하고 믿음과 은혜를 말한다. 그렇다면 왜 복음인가? 바로 이 질문에 바울은 대답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과 행위는 처음부터 함께 간다고 말한다. 그러면 바울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은 무슨 얘기를 하려던 것인가?
바울서신의 상황적 성격
2014-09-17 12:21:13
상황을 모르면 언어 자체로는 그 의미가 분명치 않다. 일상 생활에서 언어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수많은 상황을 제한된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의 본질이다. 하나의 언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므로 언어의 의미는 다중적이다. 그래서 언어는 항상 주어진 맥락속에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언어가 사용된 상황은 언어의 다중적 의미중에서 특정 의미를 결정한다.
특히 고대 문서인 성경을 이해하려면 쓰여진 상황과 문맥을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가 성경에 부여한 상황을 가지고 성경을 왜곡하게 된다. 상황과 문맥이 언어의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편지에는 사연이 있듯이 바울의 서신에도 편지를 쓰게된 이유가 있고 각 편지마다 다른 상황을 가지고 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는 상황이 좀 배제된 듯 보이지만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는 특정한 상황과 문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편지라는 정황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의 상황을 만들지 말고 이미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문맥이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성찬에 대해 교훈하면서 자신을 살피라는 의미는 자신이 죄가 있으면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성찬에 공동체가 질서있게 참여하라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가 그동안 오독되어 가르쳐왔다. 감옥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도 감옥을 뒷바라지 해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맥락을 떠나 경건을 내세워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안된다. 특히 문맥을 떠나 성경을 적용하는 강박증이 있는 큐티식 성경읽기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킬 위험이 있다. 이것은 해석학적 우상숭배이다.
질문:
바울 서신의 상황과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다른 서신 그리고 서선서 안의 문맥 나아가 성경의 다른 서신서들도 참고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을 때 구약 및 복음서의 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요? 앞의 것이 미시적 맥락이라면 뒤의 것은 거시적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거시적 맥락이 많이 도외시 되어 왔고 그 결과 바울 서신을 왜곡하게 된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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