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변종길
2014-03-17 22:53:21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서 론
화란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문화론(文化論)’이다. 곧,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문화에 대해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며, 삶의 각 영역에서 어떻게 활동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
다. 이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화란의 저명한 신학자요 정치가요 저널리스트였던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 1837-1920)가 많이 생각하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화란 개혁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단지 전도하고 구원받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노력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문화적 사명’이 있음을 깨우치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사명의 강조는 종교개혁 시대의 칼빈이 강조했던 것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해
‘칼빈주의 문화관’ 또는 ‘개혁주의 문화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화란 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성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
이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 학문 운동’, ‘기독교 대학 운동’, ‘기독교 문화 운동’ 등은 다 이러한
문화적 사명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교단의 ‘고신대학교’도 바로 이런 칼빈주의 문화관에
입각해서 설립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주장들의 핵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
명’에 대해 카이퍼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화란 내에서의 문화론 논의의 역
사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에, 카이퍼의 문화관의 개요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 이에 대해 간단히 평가함
으로써 끝맺고자 한다.
I. 문화론 논의의 역사
1) 아브라함 카이퍼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전의 개혁 신학자들이 주로 ‘특별 은총’에만 관심을 가졌었다고 비판하면서
‘일반 은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드 헤라우트」(De Heraut)
라는 잡지(주간)에 1895년 9월 1일부터 1901년 7월 14일까지 ‘일반 은총’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연재
하였다. 이 글은 나중에 「일반 은총」(De Gemeene Gratie; 이하 GG로 표기함)이라는 제목의 세 권의 책
으로 출판되었다.1)
카이퍼는 이 책에서 인류의 문화 전반에 대해 깊고도 폭넓은 사상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
히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문화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이 발전된 문
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가 구원받는
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중생한 후에 바로 천국에 가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 A. Kuyper, De Gemeene Gratie, I(1902), II(1903), II(1904), Leiden: D. Donner.2
렇지 않고 이렇게 인구가 번성하고 역사가 진전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 발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
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를 지었을 때 단순히 그들만을 생각하신 것
이 아니라 그 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를 생각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문화가 발전할 것을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 발전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카이퍼의 주장
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정을 실현하시기 위해 아담과 하와에게 인류 문화 발전의 ‘씨들’을 부여하
셨다. 이 ‘씨들’은 때가 되면 반드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드
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당위’인 동시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이다.
이렇게 해서 계발, 발전된 문화는 세상의 종말 때 심판의 불에도 소멸되지 않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된다고 한다. 이것이 카이퍼의 문화론의 중요한 한 특징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죄와 부정한 것으
로 물든 것들은 마지막 심판 불에 다 타서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다 소멸되지 않고 남아서 새 예루살렘
에까지 이전되는 것이 있다. 따라서 인류의 모든 분야에서 발전된 문화는 새 예루살렘에까지 ‘지속적
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한 소득’이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 카이퍼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창조시에 부여하신 능력들을 계발
하고 발휘하며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일종의 ‘문화 철학’
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문화 활동은 크게 장려되고 고무되게
되었다.
2) 그 후의 발전
그러나 이러한 카이퍼의 문화론은 화란 내에서도 큰 반향과 파문을 불러일으키면서 계속 논란되어 갔
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는 1932년에 “예수 그리스도와 문
화 생활’이란 글을 발표했다.2) 이 글에 대해 노르트만스(O. Noordmans)가 1936년에 ‘일반 은총’이
란 제목으로 두 편의 글을 써서 이의를 제기하였다.3) 이에 대해 스킬더가 17회에 걸쳐 답변하였다.4)
그러다가 급기야는 1944년의 개혁교회 분열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교단 분열 후 1947년에 시몬 리덜보스(S. J. Ridderbos)가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에서 「아브라함 카
이퍼의 신학적 문화관」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써서 출판하였다.5) 그는 카이퍼의 문화관에 대
해 약간의 비판을 가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의 문화관을 옹호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 이듬해
에 메이어링크(H. J. Meijerink) 목사가 “나그네와 상속자”란 글을 썼다.6) 이 글에서 그는, 그리스
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인 동시에 ‘이 세상의 상속자’이며 이것은 한 사실의 두 면이라고 주
장했다. 이런 와중에 클라스 스킬더는 1948년에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유명한 책을 출판하였다.7) 그
는 이 책에서 카이퍼의 문화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자기 자신의 문화관을 예언적으로 통찰력 있
게 전개하였다.
2) K. Schilder, “Jezus Christus en het cultuurleven,” in: Jezus Christus en het mensenleven, samengesteld door
H. L. Botha e.a., Culemborg: De Pauw, 1932, pp.226-285.
3) O. Noordmans, “De algemeene genade,” in: De Reformatie, 10, 17, jan. 1936.
4) K. Schilder, “Over ‘de algemeene genade’,” in: De Reformatie, 24, 31 jan.; 14, 21, 28 feb.; 6, 13, 20, 27,
maart; 3, 24, april; 1, 8, 15, 22 mei; 5, 12 juni 1936). Noordmans와 Schilder의 이 두 글은 G. Puchinger, Een
theologie in discussie, Kampen: J. H. Kok, 1970, pp.70-82; pp.84-138에 실려 있다.
5) S. J. Ridderbos, De theologische cultuurbeschouwing van Abraham Kuyper, Kampen: J. H. Kok, 1947.
6) H. J. Meijerink, “Vreemdeling en Erfgenaam,” in: Handboek ten dienste va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pp.197-213.
7) K. Schilder, Christus en cultuur, Franeker: T. Wever, 1948. 이 책은 원래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77년에 나온 제5판에는 J. Douma 교수의 해설이 첨부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쉬워졌다.3
그 후 1966년에 기념비적인 논문이 하나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우마(J. Douma) 교수가 박사학
위 논문으로 쓴 「일반 은총」이란 책이다.8) 그는 이 책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클라스 스킬더와 존 칼
빈의 일반은총론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하였다. 그 결과 그는 카이퍼와 스킬더의 문화관이 여태까지 일
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이 되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두 사람이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곧 그들은 창조시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을 최대한으로 ‘계발, 발전’시켜야 한다는 공통된 기본 전제를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이다. 그러
나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계발 사상(啓發思想, ontluikingsgedachte)’은 칼빈에게서는 발견되지 않
는다는 것이 다우마의 논지였다. 그래서 다우마는 전반적으로 칼빈의 견해를 따르면서 그리스도인의
‘나그네 인생(vreemdelingschap)’9)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다우마 교수의 주장에 대해 드 프리스(W. G. de Vries) 목사10)와 깜프하이스(J. Kamphuis) 교
수11)가 반론을 제기했다. 특히 깜프하이스는 다우마가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정복하라”의 의미를
단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을 취하는 것(een in bezit nemen van wat
de mens van Godswege reeds heeft)”으로 보고 마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정복하는 것’은 그
것 이상의 것, 곧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노동’하는 것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반론에
대해 다우마 교수가 다시 답변하였다.12) 그 후 1974년에 나온 책에서 아뻘도른(Apeldoorn)의 펠러마(W.
H. Velema) 교수는 “우리는 나그네 인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문화적 사명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
다.13) 그 후로도 이 주제는 계속해서 관심 있는 주제로 논의되고 있다.14)
II.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개요
1) 카이퍼의 출발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 있어서는 문화적 사명보다도 일반 은총이 출발점이었다. 이 말은 카이퍼가 문화
적 사명을 말하지 않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타락 이후에도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주신 ‘일반 은총’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일반 은총」이란 책의 출발점
은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이었다. 그 다음에 그는 ‘낙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주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대해, 곧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즉시 죽지 아
8) J. Douma, Algemene genade. Uiteenzetting, vergelijking en beoordeling van de opvattingen van A. Kuyper,
K. Schilder en Joh. Calvijn over 'algemene genad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4
1981 (1
1966, 2
1974).
9) 이 단어를 정확히 번역하자면 ‘외국인 됨’이라고 할 수 있다.
10) W. G. de Vries, “Cultuur-taak en vreemdelingschap,” in: Petah-ja (jan. 1967), pp.5-8. 이 글에 대한 N. Bruin
목사의 반응과, 그리고 이에 대한 De Vries 목사의 답변에 대해서는 각각 동(同) 잡지, pp.45-48 및 p.50f., pp.51-55
를 보라.
11) J. Kamphuis, “Het ‘cultuur-mandaat’ in discussie,” in: De Reformatie 42(1967), pp.233f., 241f., 257f.
12) J. Kamphuis와 W. G. de Vries의 비판에 대한 J. Douma의 답변은 그의 Algemene genade, 제2판 이후의
pp.369-390에 “Cultuur en vreemdelingschap”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3) W. H. Velema, Ethiek en pelgrimage, Amsterdam, 1974.
14) 일례로 K. Schilder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집이 Kampen의 신학대학에서 출판되었는데(K. Schilder.
Aspecten van zijn werk, Barneveld: De Vuurbaak, 1990), 이 책에서 J. Douma는 “그리스도와 문화”(Christus en
cultuur)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pp.169-201). 이 글에서 그는 이전보다 카이퍼의 문화관에 좀 더 접근하고 있
는 것 같다. 그는 세상 문화에 대해 좀 더 낙관적이 되었으며, 피상적이고 외적인 결과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물론 스킬더에 있어서의 문화 개념의 분석이라든지, 문화의 발전이 가인의 후손에게서 그리고 불
신자들에게서 상당히 촉진되었다는 것 등의 지적은 큰 진전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스킬더의 기독교 문화와 비기
독교 문화 사이의 반립(反立, antithese)을 비판하면서 비기독교 문화의 가치를 많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
으로 볼 때에 1990년의 다우마 교수의 입장은 1966년의 ‘나그네 인생’이란 주장에서 다소 후퇴했다는 인상이 든다. 4
니하고 계속 살아서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8절
은 다루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 강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폭넓은 ‘일반 은총’의 빛 아래서 우리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 ‘기초되고
(gefundeerd)’ ‘자극된다(gestimuleerd)’.
① 카이퍼가 창세기 1:28을 문화적 사명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반 은총」(GG)이란 세 권
의 책에서 창세기 1:28을 언급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겐 아주 특이하게 여겨진다. 단
지 한 군데, 그의 GG, II, p.271에서 지나가면서 조금 언급하고 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낙원
에서 아담은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가졌으나 죄로 말미암아 그 지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제 일반 은총
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잃었던 지배를 회복한다.” 따라서 카이퍼는 우리가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문화적
‘사명(使命)’보다는 땅을 지배했었다는 ‘사실(事實)’을 지적하고 있다.
② 그의 Dictaten Dogmatiek, III, Loc. de Christo (Pars Tertia), p.170에서 그는 창세기 1:26,28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능력(kracht)’을 부여하시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
라. ...”고 하셨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권(souvereiniteit)’을 부여하신 것이라고 한다.
③ Het Calvinisme, p.116에서 카이퍼는 창세기 1:28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순례자(pelgrim)’인데,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도중에 이 땅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과업(een onmetelijke taak op aarde)’을 수행
해야 하는 순례자라고 말하고 있다.
④ Pro Rege, I, p.129f., p.133ff., III, p.457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에게 모든 자연에 대한 ‘주권(heerschappij)’을 주셨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 이는 또한 ‘명령(gebod)’
이라고 말한다. “아니, 사람의 창조 후에 즉시 사람에게 또한 명령이 주어졌다. 이 명령은 사람에게 의무
를 부과하는데, 곧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주권을 또한 행사하며 유지하며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I,
p.133f.) 따라서 여기서 창세기 1:28의 말씀은 ‘축복(zegen)’인 동시에 ‘명령(gebod)’이다.
2) 하나님의 형상
카이퍼의 문화관은 창세기 1장 28절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설명할 때 잘 나타난
다.15) 카이퍼는 하나님 형상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는 우선 옛 신학이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 좁게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너무 ‘개인적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원래 아담에게 있었던 지혜와 거룩과 의 정도로만 보고 말았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요소를 무시하였다. 둘째로, 이들은 너무 ‘구원’에만 집착하였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의 구속도 언약
적 관점이 무시되고 너무 개인적으로만 이해되어서 한낱 ‘피의 이론(bloedtheorie)’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16)
그리고 나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나 부요하고 풍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한 개인에게서 다
실현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부모와 아이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부모의 얼굴과 성격의 특징
은 한 아이에게서 완전히 다 찾아볼 수 없고, 여러 아이들에게 나누어져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부요하고 충만한 형상은 어떻게 한 개인에게서 다 표현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 충만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는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인류 전체
(heel ons menschelijk geslacht)’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17)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사회적 요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인류 발전의 한없이 많은
15) GG, II, pp.620-627.
16) GG, II, p.622f.: “De oude Theologie bezat alleen in haar Verbondsleer een saamvattend begrip, maar bezag
voor het overige nooit anders dan den individueelen mensch, en dien individueelen mensch onder het
gezichtspunt der zaligheid. ··· Zelfs de verzoening in het bloed des kruizes is door die eenzijdige beschouwing
van den enkeling, tot een ‘bloedtheorie’ geworden, ···”
17) GG, II, p.623.5
‘씨들(kiemen)’을 부여하셨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全)형상이 그[아담] 안에
씨로 농축되어 들어 있었다(··· dat heel het beeld Gods in hem in kiem geconcentreerd lag, ···).”
고 한다.18) 그리고 이 씨들은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연관을 통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고
한다.19)
3) 씨의 발아, 성장
그리고 나서 카이퍼는 이 부여된 ‘씨들’은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의 부요함을 사회적인 다양성과 충만함 가운데서 우리 인류에게 반영하
시기를 기뻐하셨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러한 발전을 위한 씨들을 인류의 인간적 본성 속에 부
여하셨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의 찬란함이 나타나야 하며, 그 부요함은 숨겨져 있을 수 없으며, 그 씨
들은 말라죽을 수 없다. 또한 그 씨들이 충만하게 다 자랄 때까지, 그리고 충만한 인류의 발전이 실현
될 때까지, 그만큼 오랫동안 인류는 땅위에 존재해야 하며, 그만큼 넓게 그리고 부요하게 발전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 인류 발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영광이 반영될 수 있어야만 한다.”20)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 카이퍼에게는 인간이 이렇게 계발하고 발휘해야 한다는 ‘사명(使命)’보다
는(물론 이것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계발, 발전, 성장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당위(當爲)’가 강
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이퍼에 의하면 문화 발전은 우리의 사명인 동시에, 그러나 무엇보다
도 발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하나의 ‘필연(必然)’인 것이다.
그리고 카이퍼는 이러한 문화 발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 발전을 통해 우리 인간은 또한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류의 문화 발전을 보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그 안에
서 자신의 영광을 찾으신다.21)
4) 독자적인 목적
그리고 이러한 인류의 발전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목적(een zelfstandig doel)’을 가지고 있다
고 한다. 즉 인류 발전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목적 외에 ‘그 자체의 목적(een doel in zichzelf)’을
가진다고 한다.22) 이 점이 카이퍼의 문화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물론 하나의 사실이 동시에 두 가
지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군대는 조국을 방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동
시에 또한 백성들에게 질서유지와 훈련이라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긴 역사의 흐름과 우리
인류의 부요한 발전은 그 발전 과정에서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며, 또한 동시에 무엇보다도 다른 여러
18) GG, II, p.623f. 이것은 곧 아담이 우리 인류 전체를 자기의 허리에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19) GG, II, p.625: “Dit sociale element zegt alleen, dat God bij de schepping des menschen naar zijn beeld, een
eindelooze menigte van kiemen voor hooge menschelijke ontwikkeling in onze natuur heeft gelegd, en dat deze
kiemen niet tot ontwikkeling kunnen komen dan door het sociale verband van menschen met menschen.”
20) GG, II, p.626: “Heeft het Gode behaagd ook in die sociale veelheid en volheid den rijkdom van zijn beeld in
ons menschelijk geslacht af te spiegelen, en heeft Hij zelf de kiemen voor die ontwikkeling in de menschelijke
natuur van ons geslacht gelegd, dan moet deze schittering van zijn beeld ook uitkomen, dan mag die rijkdom
niet schuilen blijven, dan mogen die kiemen niet verdorren, en dan moet die menschheid zóó lang op aarde
bestaan, en zich zóó breed en rijk ontplooien, tot die kiemen ten volle zullen zijn uitgegroeid, en die volle
menschelijke ontwikkeling zal zijn uitgekomen, waarin al de heerlijkheid van Gods beeld zich weerkaatsen kan.”
21) GG, II, p.626.
22) GG, II, p.622.6
목적에 봉사하기도 한다.”23) 여기서 다른 목적이란 택자들이 태어나게 하는 것, 영원을 위해 의미 있
는 것들을 위해 우리가 노력하도록 하는 것 등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류 발전이 또한
동시에 스스로 독자적인 목적을 가진다는 사실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 목적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영
화롭게 하고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 인류 안에 씨의 형태로 들어 있던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24)
카이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적 발전(uitwendige ontwikkeling)’과 ‘내적 발전
(inwendige ontwikkeling)’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외적 발전’이란 위에서 말한 문화 발전을 말하
고 ‘내적 발전’이란 구원, 의, 성화와 같은 것을 말한다. 인류의 문화 발전은 성도의 신앙생활과 전
혀 독립적인 것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공연한 충돌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우리의 신앙에
유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 발전’은 계속되어야 하며 완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에게서 하나님의 역사가 완전히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이다.25)
5) 하나님의 예정
카이퍼는 이러한 인간의 역사 발전은 하나님의 ‘예정(praedestinatie)’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26) 왜냐하면 만일 일반 은총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면, 그 기
초가 허물어지며 그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는 것을 카이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개혁 신학에서 ‘예정’을 오직 택자들과 불택자들에 관한 특별 은총에만 한정하고 만 것은 대단히 유
감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단순히 택자들의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 은총에
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반 은총의 영역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까지 관계된 것이다. 일반 은총
의 역사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을 다 포함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중국과 일본의 몽골들, 히말라야 남
쪽의 인도인들, 애굽인들, 로마인들, 바빌론인들 모두 다 세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27) “그리하여
예정의 결정은 모든 역사를 포함하며, 땅과 하늘이 진행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
든 피조물과 온 우주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종말을 목표로 하고 있다.”28)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고 말한다. “사탄의 온갖 방해와 사람의 죄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이 세상에 부여하신 것들이 나타나게 하시며, 계속 진행되게 하시며, 또한 그
의 피조물의 충만한 생명력이 세상의 완성 때에 밝게 드러나도록 완전히 발전시키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29)
6)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
23) GG, II, p.622: “··· dat de lange loop der eeuwen en de rijke ontwikkeling van ons menschelijk geslacht, in
dien loop tegelijk én een doel in zichzelf heeft, én bovendien aan allerlei ander doel dienstbaar is.”
24) GG, II, p.622: “··· maar dat alles belet niet, dat het tegelijk ook het zelfstandig doel in zich draagt, om al
wat in ons geslacht aan kiemen school tot eer en prijs van Gods naam in het licht te doen treden.”
25) GG, II, p.626.
26) GG, II, pp.97-105.
27) GG, II, p.619.
28) GG, II, p.104: “Alzoo omvat het besluit der voorverordinering heel de historie, heel het verloop, dat aarde en
hemel nemen zullen, en is het gericht op het einde, om uit gansch de schepping, en uit gansch dat heelal Gode
zijn eere te doen uitkomen.”
29) GG, II, p.619: “··· omdat het Gode belieft, hetgeen Hij bij de schepping in deze wereld had ingelegd, in
weerwil van Satans vonden, en te spijt van 's menschen zonde, toch te doen uitkomen, toch door te zetten, en
toch zoo volkomen te ontwikkelen, dat de volle levensenergie zijner schepping in de voleinding der wereld aan
het licht trede.”7
이렇게 해서 계발, 발전된 문화는 종말 때에도 불타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
이 카이퍼의 문화론에서 또다른 중요한 요소이다.30) 만약 이 세상에서 발전된 것이 영원으로 이전되지
아니한다면, 이 세상의 문화 활동의 의미는 상당히 축소될 수밖에 없음을 카이퍼도 인정한다.31)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이 끝날 때, 종말의 불에도 소멸되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전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세상의 종말에서 새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은 ‘점진적인 전이(geleidelijke
overgang)’가 아니라 ‘파국(catastrophe)’이라는 것을 카이퍼도 인정한다.3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전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
름 아닌 ‘잠재해 있는 생명의 씨(de schuilende levenskiem)’, 곧 ‘사물들의 근본 의미(de
grondbeteekenis der dingen)’이라고 주장한다. 새 땅에서는 그 씨로부터 동일한 어떤 것이,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것, 더 부요한 영광의 것이 발전되어 나올 것이다.33) 그는 이것을 다알리아와
튤립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런 것들을 심으면 먼저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다음에 꽃이 핀
다. 겨울이 오면 농부가 이것들을 다 잘라 버리거나 뽑아 버린다. 이듬해에 날이 따뜻해지자 농부가 그
씨(열매)를 꺼내어 심으면 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싹이 나고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똑같은 생명
이, 아니 전보다 더 나은 생명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34)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멸망할 때에도 ‘일반 은총’의 모든 식물이(우리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잘라져서 거두어진다. 그러나 새 땅이 다시 번창할 때에 이 일반 은총의 씨가 화려하게 피
어날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전의 발전의 열매이기 때문에 더 낫게 번창할 것이다.”35)
카이퍼는 이것을 또한 계시록 21:24,26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한다. 24절에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
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되어 있고 26절에는 그것이 다시
반복되어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카이퍼는 이 구절의 말
씀이 종말 이전의 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그 자체,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인간의 일반적인 발전 중에서 죄가 스며들고 물든 것은 다 소멸되고 멸망된다.36) 그러
나 그런 가운데서도 영원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인류의 선행하는 발전 가운데서
그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datgene wat uit die voorafgaande ontwikkeling van ons menschelijk
geslacht in dat rijk van glorie ingedragen wordt)”을 가리켜 본문은 ‘만국의 영광과 존귀’라고
말하고 있다.37) 이것을 여러 민족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 후에 카이퍼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존귀와 영광은 만국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일반적인 민족 발전의 정도를 가리킨다.”38) 여기에
는 온갖 영역의 것들이 포함된다.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 국가 기구와 사법 제도, 학문과 예술, 용맹
과 경영, 상업과 기업의 영역 등에서 능력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은 다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카이퍼
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본질상 일반 은총의 열매인 이 소득에 대해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다. 곧, 이 소득은 그냥 멸망해 버리거나 종말 때의 심판의 불에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30) GG, I, pp.454-462.
31) GG, I, p.454.
32) GG, I, p.455.
33) GG, I, p.455.
34) GG, I, p.455f.
35) GG, I, p.456: “Op die wijze nu, is het zeer denkbaar, dat ook bij het ondergaan van deze wereld, heel het
gewas der 'gemeene gratie,' als we ons zoo mogen uitdrukken, wordt afgestroopt en weggenomen, en dat toch,
bij het weêr opbloeien der nieuwe aarde de kiem dier gemeene gratie welig zal uitbotten, en juist als vrucht
van vroegere ontwikkeling te beter zal gedijen.”
36) GG, I, p.459f.
37) GG, I, p.460.
38) GG, I, p.460: “Eere en heerlijkheid wijst alzoo op den graad van algemeene volksontwikkeling, waartoe de
volken in den loop der historie gekomen zijn.”8
곧 새 땅에서도 그 소득은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가 도달한 이 존귀와
영광은 또한 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여지기 때문이다.”39) 따라서 우리 인류의 문화 활동의 열매는
‘영원한 소득(blijvende winste)’이 된다.
7) 형태와 씨
카이퍼는 여기서 ‘형태들(vormen)’과 ‘씨(kiem)’ 사이를 구별한다.40) 사람의 몸이 죽으면 다 부
패하고 소멸되지만, 그래도 씨와 같은 것이 남아서 그 씨가 다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하나
님께서는 이 씨에다 새로운 몸을 주실 것이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
다. 곧, 일반 은총의 열매가 맺히게 된 그 형태들은 언젠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기초
가 되는 강력한 씨는 계속 머물 것이며, 영광의 새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씨에다 새로운 형태를 주실 것인데, 그것은 그의 나라의 영광과 거룩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41) 그 결과 인류의 장구한 역사의 흐름은 택자들의 구원과는 별도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
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은 놀라운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 그러한 발전은 우
리의 현재의 삶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능력들
의 발휘(een ontplooing van menschelijke kracht en van in de mensch door God gelegde vermogens)’
를 가져오며, 그것은 또한 새 땅에 이루어질 영광의 나라에서도 영원히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42)
8) 요약
이처럼 카이퍼에게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 활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전 ‘예정’에 뿌리박고 있
으며, 창조시에 그것을 위한 ‘능력들’과 ‘씨들’이 주어졌으며,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아하여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며, 그 열매들은 마지막 심판의 불에도 타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새 예루살렘에까지 이
전되는 ‘영원한 소득’이 되며, 이러한 문화 발전은 택자의 구원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목적’을 지
니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인류의 문화 발전을 기뻐하시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영광
받으신다.
이러한 광대한 문화 프로그램은 ‘일반 은총’에 의해 가능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들어 있
는 것이며, 우리의 죄와 사탄의 방해가 제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러한 확실한 하나님의 역
사 가운데서 우리의 문화적 활동은 자극되고 고무되며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카이퍼에게 있어서 우리
인간의 ‘문화적 사명’이란 것은 광대한 하나님의 ‘일반 은총’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일반 은
총’에 의하여 허락되고 가능해지며,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확실성을 보장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9) GG, I. p.460f.: “En van deze winste nu, die uiteraard niets dan een vrucht der gemeene gratie is, wordt nu
gezegd, dat deze winste niet eenvoudig ondergaat en in den algemeenen wereldbrand vernietigd wordt, maar dat
ook voor het nieuw Jeruzalem, d.i. voor de nieuwe aarde, die winste een blijvende beteekenis zal hebben, want
dat deze eere en heerlijkheid, waartoe ons menschelijk geslacht zal gekomen zijn, ook in dit nieuw Jeruzalem
zal worden ingedragen.”
40) GG, I, p.461f.
41) GG, I, p.461: “Geheel op dezelfde wijze hebben we het ons dus voor te stellen, dat wel alle vormen waarin
thans de vrucht der gemeene gratie bloeit, eens zullen ondergaan, maar dat de krachtige kiem, die aan dit alles
ten grondslag ligt, niet vergaat, maar blijft, eens in het nieuwe rijk der heerlijkheid zal worden ingedragen, en
dat God er alsdan een nieuwen vorm aan zal geven, die in heilige harmonie is met de heerlijkheid van zijn
koninkrijk.”
42) GG, I, p.461.9
III. 간단한 평가
이상에서 살펴볼 때, 카이퍼의 문화관에서 아주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씨(kiem)’ 사상이다. 이
‘씨’는 영원 전에 예정되었으며, 창조시에 인류의 조상에게 대표적으로 주어졌으며, 처음부터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아, 발전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카이퍼의 문화관의 핵심인 ‘계발 사상(ontluikingsgedachte)’과 ‘유기체 사상
(organische gedachte)’을 보게 된다. ‘계발 사상’이란 창조시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들을 최대
한으로 발휘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말한다.43) 이러한 사상은 다우마 교수에 의하면, 카이퍼에
게 현저하게 나타나고, 스킬더에게는 절제된 형태로 나타나지만, 칼빈과 성경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사
상이라고 한다.44) 그리고 ‘유기체 사상’이란 19세기의 낭만주의(Hölderlin 등)와 이상주의 철학
(Schelling과 Hegel 등)에서 비롯된 사상인데, 종전의 기계적 우주관에 반대하고 실재(實在)를 생명 있
는 유기체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 의하면, 1) 유기체는 생명이 있으므로 성장하고 발
전하며, 2) 유기체는 단순히 각 부분들의 연결이 아니라 전체로서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따라
서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은 낙관주의, 진보주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45) 카이퍼는 바로 이러한 19세
기 후반의 유기체 사상과 진보주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낙관적인 문화관’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카이퍼에게 있어서 반복해서 나타나며, 조금도 의심받지 않고 자명한 사실로 전제되고 있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전, 진보’에 대한 신뢰이다. 그는 그 당시에 진행되고 있던 과학 기술의 발전,
예를 들면 증기 기관, 전기, 화학 등의 발명과 발전에 매료되었으며,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46) 특
히 이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남미가 아닌 바로 구라파(특히 북구라파)와 북미에서,
그것도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에게서 경이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47) 필자
는 이것이 카이퍼의 문화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특정 철학이나 어떤
특정 사상보다도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과학 기술의 진보’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
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북구라파에서의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연결시켜서 설명하
려고 시도한 것이 곧 그의 ‘문화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문화 발전이 때로는 거룩하지 못하며 택자의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 것
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아니하였으며, 전체적으로 봐서 계속적인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그의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은총의 열매인 이 총
체적인 발전은 계속 진보한다. 이것은 항상 거룩한 것은 아니다. 아주 거룩치 못할 때도 자주 있다. 그
러나 여하튼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진보한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19세기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
에 대한 인간의 능력, 사물에 대한 지식, 교통수단들, 삶의 편리함과 수많은 다른 것들이 이전 세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멀리 진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48)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43) 이것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잠재성(potentialiteit)’을 ‘현실성(werkelijkheid)’으로 만든다는 말로도 표현되고, 또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eruit halen wat erin zit)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Cf. K. Schilder,
Christus en cultuur(
5
1977), pp.59-63.
44) J. Douma, Algemene genade, p.264ff.
45) 아브라함 카이퍼의 유기체 사상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위해서는 K. Veling, “Kuypers visie op de wetenschap
als organisme,” in: Bezield verband. Opstellen aangeboden aan prof. J. Kamphuis, Van den Berg, Kampen,
pp.277-288을 보라.
46) GG, II, p.271.
47) GG, I, p.460. 문화 발전이 북구라파에서, 그 중에서도 화란과 영미에서 최고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칼빈주의」(Het Calvinisme, 1898년도 프린스턴 강연)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pp.29-32). 뿐만 아니라 이것은 사실
상 그 책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카이퍼의 이러한 사상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소지도 있다고 하겠다. 10
말한다. “이 진보가 계속해서 이렇게 진행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 역(逆)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전에, 곧 세상의 종말 이전에 인류의 총체적인 삶에 있어서, 지
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더 부요한 발전이 올 것이라는 가능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49)
이처럼 카이퍼에게 있어서 인류 문화의 진보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었으며, 그의 방대한 문화론의 기
초였으며 기본전제였다.
결 론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는 19세기 후반의 진보주의, 낙관주의에 크게 영향받은 신학자였다. 그는
기술 발전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너무나도 ‘순
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이 1960년대에 공장이 들어서고 공장 굴뚝에 연기만
나면 근대화요 발전이라고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선 지금, 공장 굴뚝에서 시
커먼 연기가 나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카이퍼도 역시 그
시대의 일반적 조류를 벗어나지 못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한 마디로 19세
기 후반의 신학자였으며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람이었다. 그가 그토록 신뢰하고 예찬했던 인류 문화의
발전이 수많은 사람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그것도 최고의 문화 발전을 이룩
했다고 그가 그토록 자랑하던 게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에 대량 살육의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낙관적인 문화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가 죽기(1920년) 몇 년 전에 1차 세계대전을
직접 목도하기는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그의 사상을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이다. (「基督敎大學
과 學問에 對한 聖經的 眺望」(高神大學校 設立 50週年 및 漢石 吳秉世 博士 隱退 記念 論文集), 고신대
학교 출판부, 1996, pp.197-212)
48) GG, I, p.458f.
49) GG, I, p.459.11
참고 문헌
Douma, J., Algemene genade. Uiteenzetting, vergelijking en beoordeling van de opvattingen van
A. Kuyper, K. Schilder en Joh. Calvijn over 'algemene genade', Goes: Oosterbaan & Le Cointre,
1
1966, 2
1974, 4
1981.
Douma, J., “Christus en cultuur,” in: K. Schilder. Aspecten van zijn werk, onder redaktie van
J. Douma, C. Trimp, K. Veling, Barneveld: De Vuurbaak, 1990, pp.169-201.
Kamphuis, J., “Het ‘cultuur-mandaat’ in discussie,” in: De Reformatie 42(1967), pp.233f.,
241f., 257f..
Kuyper, A., De Gemeene Gratie, 3 dln., Leiden: D. Donner, 1902-1904.
Kuyper, A., Dictaten Dogmatiek, 5 dln., Kampen: J. H. Kok, 2
1910f.
Kuyper, A., Het Calvinisme. Zes Stone-lezingen, Kampen: J. H. Kok, 1898.
Kuyper, A., Pro Rege, 3 dln., Kampen: J. H. Kok, 1911-1912.
Meijerink, H. J., “Vreemdeling en Erfgenaam,” in: Handboek ten dienste van 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pp.197-213.
Noordmans, O., “De algemeene genade,” in: De Reformatie, 10, 17, jan. 1936.
Puchinger, G., Een theologie in discussie, Kampen: J. H. Kok, 1970.
Ridderbos, S. J., De theologische cultuurbeschouwing van Abraham Kuyper, Kampen: J. H. Kok,
1947.
Schilder, K., “Jezus Christus en het cultuurleven,” in: Jezus Christus en het mensenleven,
samengesteld door H. L. Botha e.a., Culemborg: De Pauw, 1932, pp.226-285.
Schilder, K., “Over ‘de algemeene genade’,” in: De Reformatie, 24, 31 jan.; 14, 21, 28 feb.;
6, 13, 20, 27, maart; 3, 24, april; 1, 8, 15, 22 mei; 5, 12 juni 1936.
Schilder, K., Christus en cultuur, Franeker: T. Wever, 1
1948, 5
1977.
Velema, W. H., Ethiek en pelgrimage, Amsterdam, 1974.
Veling, K., “Kuypers visie op de wetenschap als organisme,” in: Bezield verband. Opstellen
aangeboden aan prof. J. Kamphuis, Kampen: Van den Berg, pp.277-288.
Vries, W. G. de, “Cultuur-taak en vreemdelingschap,” in: Petah-ja (jan. 1967), pp.5-8.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혁주의 문화명령- 서철원 (0) | 2023.05.03 |
---|---|
복음과 문화 - 이정석 (0) | 2023.05.03 |
존 오웬 죄와 은혜의 지배- 김남준 (0) | 2023.05.03 |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 한병수 (0) | 2023.05.03 |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 신학과 신화(deification) (0) | 2023.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