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 죄와 은혜의 지배- 김남준
2014-03-16 15:46:40
1장 신자 안예 있는 은혜와 죄
불신자는 죄의 절대적인 지배하에 있으나 신자에게는 죄의 절대적 지배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신자안에는 죄가 현존한다. 중생과 함께 신자의 영혼에서 죄의 통치는 종식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새로운 성향이 심겨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심겨진 새로운 성향은 일단 심겨지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마음과 성결한 생활 속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신자는 이제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의 통치아래 있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지만 그 통치를 어느정도 누리고 사는 가는 신자의 죄를 죽이는 생활의 실천에 따라서 가변적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죄의 용서를 받은 자들이지만 죄의 영향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것은 아직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기 안에 잔존하는 죄를 죽이지 않고 방치하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죄의 절대적인 지배아라 살아가는 불신자와 방불한 삶을 살게된다. 죄를 죽이시는 주체는 성령이시지만 성령께서는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주신 은혜를 따라서 죄를 살피고 죽이며 슨종하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2장 은혜의 상태 아래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와 파멸되는 죄
신자의 삶에 대한 은혜의 지배는 신자안에 여전히 죄가 잔존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영혼에 실제적인 지배력을 획득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신자안에 죄를 완전히 일시에 소멸시키시지 않은 것은 신자들에게 은혜를 힘입어 잔존하는 죄와 싸우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자의 의무는 죄와 싸우는 것이고 이것이 신자의 성화의 삶이며 언약적 삶의 요체일 것이다. 신자안에는 두 종류의 죄가 있는데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죄와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가면 없어지는 죄이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이고 후자는 인간이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죄이다. 신자로 하여금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만드는 죄는 후자이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죄는 우리의 영적 활기를 유지해 나가는데 치명적이지 않다. 문제가 심각한 죄는 인간이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죄이다. 이런 죄는 영혼에 대하여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신자는 이런 죄에 대하여 의지적으로 굴복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즐거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죄들은 보통 의도적인데 이런 의도적인 죄를 범한 신자들은 영혼의 자유를 상실하고 영적 활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죄를 죽이지 못하면 신자의 마음은 완고해지고 영혼에는 커다란 파괴력이 역사하게 된다. 죄를 마음에 품는 것과 실행한 것은 미치는 영향력이 다르다. 실행된 죄는 더욱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마음을 둔감하게 만든다. 이렇게 영혼의 은혜로운 틀이 와해되고 나면 작은 유혹으로도 큰 범죄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에 매여서 속박을 당하는 상태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죄의 법"은 신자의 영혼에서 세력을 얻은 죄가 실효적인 힘을 갖게되어 신자의 삶을 불순종으로 끌고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3장 죄와 은혜의 계획- 영혼을 지배함
그렇다면 중생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영혼안에서 합법적인 지배권을 잃고 다만 잔존할 뿐인 죄가 여력을 모아 이처럼 집요하게 지배력을구축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는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시려는 것이다. 이처럼 은혜에 원대한 계획이 있듯이 죄에도 궁극적인 계획이 있으니 그것은 개별적이 범죄의 실행을 통해서 신자의 영혼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죄가 이 목표를 이루는 수단이 유혹이다. 유혹은 신자안에 잔존하는 죄의 경향성을 자극하여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갖게한다.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하여 범죄하게 되면 그만큼 신자안에 죄의 경향성은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결국 죄의 목표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듦으로써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것이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구속의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역사한다. 그래서 죄는 신자들을 영적인 어둠에 가두고 죄에 종노릇하게 만들어 총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구체적인 삶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떠난 삶을 살게 만들려는 것이다.
4장 죄가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법 -속임과 강압
죄가 신자의 마음에서 지배력을 확보하는 두가지 무기가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다. 이 두가지를 통해 죄는 신자 안에서 죄의 경향성을 강화함으로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 첫째 속임이란 죄가 신자의 영적인 무지를 이용하여 신자에게 죄의 궁극적 목표를 숨기거나 신자로 하여금 죄의 용서에 대한 은혜를 자의적으로 적용하거나 범죄함으로 얻는 즐거움에 과대한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두번 째로 강압이란 죄가 신자로 하여금 죄의 욕구와 실행을 중단하지 못하도록 그 죄에 집착하게 만들며 나아가 그것을 중단하였을 때 다가올 미래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를 강압하여 끌고 가는 죄의 힘이다. 강압에 대항하려면 은혜를 통하여 영혼이 강건해져야 하고 속임에 대항하려면 지식 안에서 총명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사람을 받으며 그리스도와의 보다 실제적인 연합속에서 살아갈 때 죄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으며 죄의 지배 아래로 데려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거룩한 삶의 진보에 대하여 더 치열한 소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은혜를 통하여 영혼이 강건하게 되는 길이고 죄의 강압을 이기는 길이다. 그 다음에 죄의 속임을 분별하려면 부지런히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죄가 우리를 아는 것 만큼 우리도 죄에 대하여 탐구하고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의 원리들을 터득해야 한다.
5장 죄의 지배의 성질- 거역과 악
신자에게 있어 죄의 지배는 부당한 거역이다. 이 말은 죄가 신자안에서 번성하면 신자의 영혼안에 부당한 지배력을 갖게된다는 의미이다. 은혜의 지배를 받아야 할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음으로 은혜에 부당하게 거역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의 지배를 받는 신자에게 죄의 모든 지배는 불법이요 부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죄와 싸우고 은혜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주시어 죄의 지배를 순식간에 박살내시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하실 것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적의(enmity)이며 그 구체적인 활동이 반감(aversion)과 대적(opposition)으로 나타난다. 죄인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인간 안에 있는 죄는 불신자에게든 신자에게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도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며 반감과 대적으로 그 적의를 나타낸다. 그래서 죄의 지배는 신자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목적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삶을 살게 만는다. 결국 죄가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확보하려고 맹렬하게 역사하는 것은 바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구속계획을 거스르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죄는 신자의 영혼안의 성령의 법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신자의 영혼의 생명력과 활기를 박탈한다. 이것이 죄의 지배의 또 다른 목적이다.
6장 죄의 지배의 특성- 신자의 순종을 사용함
죄가 유혹을 통하여 신자의 생각에 힘을 가하지만 신자가 그 유혹에 글복하기 전에는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 못한다. 죄의 지배력은 신자가 유혹에 굴복할 때 힘을 얻게 된다. 신자안에 잔존하는 죄가 없다면 죄의 유혹도 없을 것이다. 죄는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가 신자안에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죄의 유혹이라는 밖으로 부텨의 역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죄가 아무리 강력하게 유혹할지라도 신자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대항하는 한 죄는 결코 신자를 지배하지 못한다. 비록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가 있을지라도 신자가 자가 안에 심겨진 성령의 법을 따라서 유혹에 저항하는 한 죄는 결코 신자를 지배하지 못한다. 죄의 유혹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신자의 마음이다. 유혹이 강한 능력으로 신자의 생각속에 힘을 가할 때 일시적으로 신자는 혼란에 빠질 수 있고 마음의 틀에 일시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니 이런 지성적 혼란이 곧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유혹은 신자에게 영향을 끼질 수 있고 헌란을 줄 수 있지만 신자가 그 유혹에 굴북하지 않는 한 신자를 지배할 수는 없다. 신자안에 은혜의 지배와 죄의 지배의 공통점은 모두 순종을 통하여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결국 신자의 순종이 관건이다. 말씀을 깨딛거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신자가 실제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은혜 아래 사는 것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죄가 아누리 강하게 유헉한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실제적으로 굴복하지 않는다면 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는다. 성령은 신자의 성화를 위하여 역사하는 주체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은 신자안에서 신자와 함께 역사하시지 신자 밖에서는 신자의 의지를 거슬러서 역사하지 않느다.
7장 죄의 지배의 환경 - 성령의 은혜를 떠나감
죄가 지배력을 얻는데 적함한 환경은 신자가 성령과 은혜의 통치를 떠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죄에 지배되기 전에는 반드시 은혜로 부터의 미끄러짐이 있다.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가 지배력을 얻기 위해서는 신자가 은혜로 부터 멀어져야 한다.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은 신자로 하여금 신속히 은혜의 지배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죄가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 신자 안에는 은혜와 죄가 공존한다. 죄의 지배아라서도 은혜가 사라지지 않고 은혜의 지배아래서도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은혜와 죄는 신자의 마음안에서 하나의 보좌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날마다 끊입없이 은혜의 지배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매순간 마음을 지키며 날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도록 은혜의 수단에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자가 죄와 싸우고 자기 안의 죄를 죽이는 길이다. 죄를 죽이는 것은 은혜이지 신자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안에 머무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죄를 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편은 은혜의 현재적인 통치아래 살려고 힘쓰는 것이다.
8장 죄의 지배의 발전- 죄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됨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가 어떻게 자신의 지배력을 발전시켜 나가는가? 죄는 신자 안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해 나감에 있어서 죄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킴으로 이 일을 성취한다. 첫째로 신자의 죄에 대한 확신을 무디어지게 함으로 죄의 지배를 발전시켜 나간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죄에 대하여 저항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죄에 대한 강한 가책을 느끼게 된다 이 가책은 죄의 무모함 곧 담대함을 제거하는 강력한 제동장치이다. 신자가 은혜 아래 살 때에는 언제나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있고 그래서 진실한 참회가 있다. 그러나 신자가 되의 지배아랴 들어갈 수록 죄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잃어버리고 죄책감은 흐려지게 된다. 둘째로 되는 신자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친화적으로 민감하게 함으로서 죄의 지배를 확대해 간다. 죄에 대한 친화적 민감함은 죄에 대한 혐오감을 제거하고 죄의 계획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흐리게 하며 죄의 실행이 가져다 줄 낙에 대하여 쉽게 집착하게 만든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죄의 결과인 비참함에 대하여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죄가 강력하게 역사하거나 우세한 지배력을 갖게될 때 신자는 현저하게 죄책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죄책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곧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책감이 죄를 이기는 힘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은혜만이 죄를 이기는 힘이 있다. 신자의 영적인 깊이는 자신안의 죄의 존재와 작용을 감지하고 그에 대해 정당한 반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 영적 생활의 경험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고 죄가 활동하는 경로와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거기에 대처하여 죄를 죽여야 한다.
9장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영적인 활기가 쇠퇴하고 정욕에 붙들린 삶을 살게된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서도 가능한 영적 경험이 있다. 죄의 지배 아래서도 영적 은사를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적 조명도 있을 수 있고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도 경험할 수 있고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할 수 있고 단편적인 참회도 가능하며, 죄에 대항하는 결단도 할 수 있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에게도 자신을 경건한 신자라고 오해할 수 있는 외적인 표지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외적 표지들 때문에 자신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죄의 지배로 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10장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위험한 징후들
첫째, 생각의 허탄함(vanity of mind)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터 신자를 멀어지게 한다. 죄가 특정한 악에 대하여 계속해서 상상력을 지배하고 사고 기능에 지속적으로 간여하게 될 때 그것은 죄의 지배아래 있는 뚜렸한 징후다. 둘째, 정서가 지성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작용하는 것은 죄가 신자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징후이다. 셋째,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는 죄를 죄로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넷째, 신자가 죄의 지배하에 있을 대는 그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쉽게 영향읋 받지 못한다. 다삿째,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는 죄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한다.
11장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공급함
신자에게 죄의 지배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그 실효적인 힘은 가변적이고 죄의 지배는 영속적일 수 없다. 죄가 신자에게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를 이길 모든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 복음은 유일한 원천이고 동기이다.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 못하는 근거는 신자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여기서 법은 정죄의 기능을 하는 율법을 가리킨다. 신자가 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율법으로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신자는 중생을 통하여 은혜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지만 은혜의 통치가 죄에 대한 승리를 자동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중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죄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분투하는 살믈 촉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자에게 성화의 삶을 위한 긴장도 없었을 것이다. 신자는 자기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능히 죄를 이기며 살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은혜 안에 살 때이다. 이처럼 죄와 은혜는 모두 자신에 대한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힘을 엄고 신자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죄와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죄가 역사하는 방법과 죄를 죽이는 이치에 대하여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회개하여야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복음은 죄를 소멸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도덕적이 노력이나 윤리적 개선을 통하여 죄를 죽일 수 없고 오직 복음만이 죄를 이기는 능력을 준다.
12장 복음이 자유를 줌
복음은 신자에게 이중의 자유를 주는데 첫째는 신분과 상태의 자유이고 둘째는 내적 역사, 즉 마음과 영혼의 자유이다. 전자는 율법과 그로 말미암는 저주로 부터의 자유이고 후자는 죄의 사슬로 부터 영혼과 마음이 해방되는 것이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은 모두 이런 복음이 주는 자유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명의 원리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끊임없이 죄죽임을 실천하고 받은 바 은혜를 보전하고 강화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다.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로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신자안에서 신자와 함께 일하신다. 신자 자신이 분투와 순종없이도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어떤 보증도 새언약에는 없다. 따라서 신자는 스스로 죄의 자리를 떠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하시는 모든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심을 굳게 믿으며 도움을 구해야 한다.
13장 복음이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를 줌
은혜는 죄를 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는데 복음을 통하여 그리한다. 모든 성화와 경건의 원천은 복음이므로 성화의 비빌은 곧 복음의 비밀을 아는 것이다. 신자의 복음적인 거룩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심겨지며 그의 삶 전체에서 지속된다. 이 은혜의 힘으로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동시와 격려를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믿음의 삶은 죄와 싸우는 것이다. 죄와의 싸움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삶에 따르는 필연적인 싸움이다. 성령은 죄와 싸우는 신자들을 도우시려 은혜를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승리를 확신하게 하신다.
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죄와의 싸움에서 신자들은 지성적 혼란에 빠질 수 있는데 원리적 혼란과 개별적 혼란이 있다. 원리적 혼란이란 첫째 신자가 죄와의 싸움에서 번번히 실패할 때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과 둘째 죄죽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별적 혼란으로는 첫째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무지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둘째 죄와의 싸움에서 타협하고 거짓 평화를 누리거나 죄에 대한 진지한 고만을 하지 않는 경우, 셋째 죄의 근원과 싸우지 않고 개별적인 특정한 죄만 싸우는 경우, 넷째 죄와의 갈등, 고민을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하는 경우이다. 죄와의 싸움에서 이런 지성적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말씀에 착념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한다.(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라)
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
죄죽임의 실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의무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신자안에 죄를 남겨두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신자 안에 있는 죄를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운 방식으로 다스리심으로써 결국 그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죄를 인하여" 란 의미는 "은혜를 따라 죄와 싸우는 신자안에 남아 있는 죄를 인하여" 란 의미이다. 죄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게함으로 신자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게서는 그런 의도를 가진 죄를 지혜로운 방식으로 사용하셔서 오히려 신자안에 은혜가 넘치게 하신다. 하나님게서는 신자안의 죄의 존속을 오히려 은혜의 기회로 삼으신다. 죄가 크면 은혜도 크게 하시고 죄가 지속적이면 은혜도 지속적이게 하신다. 구약에서 다윗은 범죄와 그것을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죄가 무엇인지를 뼈져리게 체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위대한 용서의 계시에 있어서 최고의 담지자가 되었다. 죄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죄를 사용하셔서 신자에게 은혜를 넘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는 신자에게는 죄가 결코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없다. 신자에게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죄죽임을 위한 분투가 시작될 때 비로서 죄는 은혜의 기회가 된다. 신자 안에 죄가 있어도 그 죄와 싸우고저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죄의 능력보다 더 큰 은혜의 능력을 공급하시며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 한 죄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용서를 믿으며 나오는 신자들에게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신다. 신자가 죄를 사랑하는 한 죄는 신자를 파괴하는 기회가 되지만 신자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한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된다.
16장 죄의 지배에 작별을 고하며
죄에 대한 철저한 미움이 없으면 죄를 죽일 수 없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이 힙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신자가 죄와 싸워야 하는 필연적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갈 때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자를 부르심은 우리가 참 신자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땅에 존재하기를 바라시는 인간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정확히 알려주는 빛이요 무의미한 세상이 맛을 주는 소금이다. 신자는 오직 은혜의 통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중생한 것 만으로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날 수 없다. 여전히 신자안에 남아 있는 죄를 버려서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녀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끊임없이 은혜의 지배아래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신자가 죄의 지배를 벗어나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은 신자의 소명이기도 하지만 소망없는 세상을 위한 부르심이기도 하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과 문화 - 이정석 (0) | 2023.05.03 |
---|---|
아브라함 카이퍼의 문화관- 변종길 (0) | 2023.05.03 |
개혁주의 신학의 역사- 한병수 (0) | 2023.05.03 |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 신학과 신화(deification) (0) | 2023.05.03 |
카이퍼의 중생교리에 대한 바빙크의 반론- 강웅산 (0) | 2023.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