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개혁 신학의 차이점 - 정성우 목사
2014-02-21 02:07:45
로이드 존스의 신학과 개혁 신학의 차이점
마르투스 선교회 정성우 목사
로이드 존스의 생애:
로이드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웨일즈 카디프에서 아버지 헨리 로이드 존스와 어머니 막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절은 6살 때인 1905년에 랑게이트 마을로 이사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낙천적이며 쾌활한 아버지와 활동적인 어머니로부터의 영향으로 밝게 자랄 수가 있었다. 1909년초 화재로 인해 집과 가게가 불타고 로이드 존스는 2층에서 뛰어내려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1911년 근처에 있는 트레가론에 위치한 중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그곳에서 역사선생 포엘을 좋아하게 되었다. 후에 그가 역사에 대해 강조하게 된 것은 아마 이분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1913년에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1914년 랑게이트를 떠나 성바돌로매 부속의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의 스승은 당시 왕실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경이었다. 그는 호더와 함께 일하면서 정확한 사고와 정확한 표현법에 대해 철저하게 훈련 받게 되었다. 이것은 훗날 설교자로서의 자신을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자주 설교자와 의사와의 역할과 관계성을 비유로 이야기하곤 했다.
1921년 뛰어난 진단 논문으로 호더경의 입주 보조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2년후 그는 어린나이에 수석 진료조수가 되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볼 때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면서도 그에게는 여전히 인간의 근본적 치유에 대한 해결되지 못한 고민이 있었다. 결국 1926년 샌드필즈에 있는 베들레헴 전진운동선교 교회의 목사로 초빙하는 것을 수락하므로 오랜기간의 고민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복음전파 의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베단 필립스와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193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설교의 초청을 받고 집회를 인도한후 뉴욕주의 버팔로 근처에 있는 셔토크 연구소에서 강습회가 열리게 되었고 6000명이 넘는 청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193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이때 캠벨 몰간이 큰 감명을 받고 그를 교회의 동역자로 초빙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그해 말경에 이것을 수락하였다. 몰간과 로이드 존스는 서로 다른 점이 많았지만 오히려 이 다른점을 큰 장점으로 잘 활용하였다. 면밀한 주해와 면밀한 강해를 한 후에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교에 임하는 캠벨 몰간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는 보다 교리적이고 열정적인 메시지를 적용하는 면에서 서로를 잘 보충해주는 설교가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캠벨 몰간이 1943년 은퇴하기까지 웨스트민스트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있다가 1968년까지 단독 목회로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1968년 심한병을 앓고 목회 사역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병을 치료한 후 그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강의를하게 되었는데 이 내용이 「설교와 설교자」란 책으로 출판이 되었다. 그리고 1981년 3월 그는 잠든 중에 고요히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칼빈주의 감리교의 영향
이것은 그의 설교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로이드존스는 13세 때 호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 역사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책은 칼빈주의 감리교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이후에도 부흥시기의 교회사와 위대한 성도들에 관한 독서는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결정을 내릴 때 두가지의 원리가 있었는데 첫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이해였다. 그리고 18세기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들의 부흥에 관한 독서였다. 그는 고백하기를 ‘항상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이 둘을 그 평가의 시금석으로 삼았고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도 귀중한 사역방향의 시금석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칼빈주의적 교리와 감리교도의 열심의 조화를 강조 했으며 이 두가지 요소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같은 칼빈주의적 감리교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에 대해 그는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감리교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은 존 웨슬리를 많이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성화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이야기가 되었는데, 특히 지난 2세기 동안 그랬으며 그 주된 요인은 바로 위대한 웨슬리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화와 거룩에 관한 한 이론을 절대적인 생명으로 설파했습니다. 그것을 친히 자신에게 가르쳤고, 설교가들에게 그것을 설교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무튼 제가 여러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성화에 대한 견해는 비록 사람들이 성회에 대하여 매우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런 잘못이 그들이 성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1)
즉 로이드 존스는 웨슬리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웨슬리의 견해를 따라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로이드 존스가 웨슬리에게 “큰 빛”을 졌다는 말로 그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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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M. 로이드 존스, “성령 하나님”이순태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00) p. 271
(2)(Ibid p. 283)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 초기부터 18세기 부흥의 재현을 소망했는데 1930년 12월 30일에 여러 목사와 장로 동역자들과 함께 발표한 신조에 이런 성향이 나타난다.
“첫째, 우리는 회중에게 회심과 중생을 강조한다. 둘째, 모든 신자는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셋째, 신자들은 그들이 성화되어 가고 성령을 받아들이고 갈라디아서5:22의 성령의 열매가 그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교육받고 지도한다.”
이것은 감리교의 웨슬리가 몸담고 있던 홀리 클럽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그렇다면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사상을 알기 위하여 웨슬리의 사상 또한 알아야 한다.
완전 성화를 주장하는 웨슬리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잇는 로이드 존스:
웨슬리는 올더게잇 체험이 있던 1738년 이후 그의 성화론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사람의 행위와 죄에 대한 심각한 통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특히 인간의 내적 죄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외적인 죄로 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죄로부터도 구원함을 받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은혜를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웨슬리의 성화론은 죄에 대한 해결과 이해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3)
또한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이 어느 주어진 순간에 어느 알려진 죄를 의도적으로 범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완전을 조심스럽게 정의하면서 말한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과 거의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웨슬리는 완전이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진술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다음 순간에는 죄를 범할 수 있지만 그 순간에는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은 알려진 죄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모르고 범죄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후에 그 죄가 우리에게 보여질 때에 그 죄를 본 순간에는 이해하고 그 죄를 고백하면 그때 우리는 그러면서 완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는 완전의 어떤 종류이지 절대적인 완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4)
이러한 웨슬리의 주장은 세미 펠라기우스 또는 알미니안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지만 이러한 원죄는 자신이 죄인 것을 알고 행할 때만이 죄로 인정하는 견해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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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웨슬리 신학 - 성광문화사 p182-183)
(4) (로이드 존스 - 성령 하나님 -p 279-280)
로이드 목사가 영향 받은 성화론:
로이드 존스의 견해는 웨슬리의 성화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우리의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정화 과정과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질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세 가지의 다른 견해들과 사상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가 완전주의자들(perfectionists)이다. 그는 이 용어에 대하여 매우 명확함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완전에 관한 그들의 고뇌와 노력을 더 호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에 대한 로이드 존스의 견해는 먼저, 완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죄가 완전히 근절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비유를 정원의 잡초의 뿌리를 뽑아내는 작업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능력의 삶을 살게되는 어느 순간부터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완전주의자들이 말하는 성화는 시간의 경과에 의하여도 가능한 사건이지만 “어느 순간”에 완전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로이드 존스 목사는 같이 동조하고 있으며 완전주의자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웨슬리의 주장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로이드 존스 목사는 개혁주의 입장의 차이를 단지 한 유형이라는 한계를 인정한다고 말하며 찰스 피니, 메이헴의 가르침의 유형인 미국의 오벨린 학파(Obeline Schol)의 가르침을 예로 말한다.(5)
하지만 개혁주의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 입장이다.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지상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왕상 8:46; 잠 20:9; 전 7:20; 약 3:2; 요일 1:8). 두 번째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직 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필히 중생한 신분에서의 자신을 언급하고 롬7:7-26에서 이러한 투쟁에 대한 매우 놀랄 만한 진술을 하고 있다. 세 번째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외없이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도록 가르쳤다(마 6:12-13). 그리고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다(요일 1:9).
완전주의 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율법의 기준을 저하시키고 죄 개념을 구체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일부는 자신의 평가에 따라 신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을 반복적으로 수정한다. 처음에 그 이상은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였지만 그 후에는 “모든 의식적 죄로부터의 자유”,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게로의 전적인 성별”, 결국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이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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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로이드 존스 - 성령 하나님 -p 279.)
이는 그 자체로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충분한 정죄가 된다는 것이다. 위는 물론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을 부인 한다는 것이다.(6)
두 번째는 반작용의 원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이라고 일컫는 방법에 의해서 성화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에 매우 유행한 원칙이며 아직도 그 유명세는 여전하다. 이 견해를 말한 사람들은 죄의 근절을 믿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하여 이들은 매우 분명하다. 죄의 근절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가르침의 근본적인 성경 근거는 로마서 8:2 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들은 죄가 신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러나 만약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는 믿음으로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의지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그를 보호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 안에 죄의 권세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권세가 그것을 저항하고, 이길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작용이 유입되는 것이다.
반작용의 법칙이란 물속에 들어가 빠져 허덕이는 이에게 구명대를 주고 그 구명대만 붙든다면 구명대로부터 살아남을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구명대를 벗어 버린다면 그 이전의 법칙이 그를 지배하여 물에 빠져 들어가도록 할 것이다. 그는 구명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는 그 구명대를 계속해서 보아야 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 삼아 홉킨스 목사는 예를 들고 있다.(7)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죄에 대한 고백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성화의 경험으로 우리가 성화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반성주의자들이다.
세 번째로, 성화란 우리가 중생하는 그 수난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전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며 죽음 다음에야 비로소 완전케 되는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경해와 이전의 견해들과의 큰 차이점은 성화란 칭의에 이어서 받은 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이의 중생의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되며 그것이 계속되어 오직 우리의 몸이 부패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영화가 될 때에만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로마서 8:23에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고통하는 것을 말할 때에 “이뿐 아니라 또한 위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곧 몸이 마지막으로 구곳할 때에만 우리의 성화는 완성된다는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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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루이스 벌코프 - 조직신학2.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 p 792-793)
(7) (로이드 존스 - 성령 하나님 - p281-282)
(8) (Ibid - p.281-282)
결국 로이드 존스는 앞에서 나열하고 있는 여러 성화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믿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위에 나열한 성화에 대하여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그래서 웨슬리에게 큰 빛을 지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9)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인간됨의 목적:
또 한 가지 우리가 로이드 존스 목사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성화의 목적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데살로니가전서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라는 구절과 갈라디아서 4:4에 말씀하신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하신”이란 말씀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바는 성화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 목적은 성화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님의 보내심의 목적도 성화이며 우리의 구원의 목적 역시 성화에 있다는 것이다. 성화가 바로 모든 것 위에 있는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그가 우리를 깨끗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0)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 성화의 목적으로 정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신앙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11)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차이점은 사실 성령론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성령론의 다른 견해 때문에 성화의 차이가 있는 것임을 우리는 조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로이드 존스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별하여 중생한 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중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체험적인 면에서는 그럴듯하게 보이나 사실 성경은 그러한 교리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로이드 존스는 중생한(성령세례 받은) 신자들에게 성령 충만 받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엡5:18).는 것이다. 사실 개혁주의자들은 성령 충만을 말씀 충만으로 보고 있지만(엡5:18-20과 골3:16-17절 비교),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성령 충만함을 개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통해 부흥과 회복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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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로이드 존스 - 성령 하나님- p283)
(10) (Ibid, P285-286)
(11) (존 칼빈 - 칼빈의 요리문답 - p.51)
(12) (총신 논문 - 개혁주의에서 바라본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 - 유희춘 p. 90-91)
이러한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관은 오순절 계열과 많이 비슷한 점이 있으며, 알미니안 주의에서 인간의 의지의 노력을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로이드 존스의 성령 세례관이 분명 웨슬리의 이중 성령 세례론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의 글에서도 분명 웨슬리의 성령 세례에 대하여 긍정하는 글을 발견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칼빈주의와 알미이안 주의자들도 성령 세례의 체험을 증언했고 말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요한 웨슬리의 경험과 D.L. 무디와 찰스 피니의 경험까지도 인용한다.(13) 그리고 자신의 성령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형제단의 입장과 다비와 메켄토시와 윌리엄 케리의 가르침을 인용한다.(14)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화는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고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 새 마음과 새 정신이 창조되며,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들 속에 거하시는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계속 인격적이고 진정한 성화를 거듭한다고 한다.(고전 6:11; 행 20:32; 빌 3:10) 이러한 성화의 과정에서 몸 전체를 지배하던 죄의 권세는 파괴되고 몸의 욕정들은 점차 약화되고 죽고 나아가서 이들은 온갖 구원의 은혜를 얻어 참된 거룩을 실천하고 자극을 받고 강화되어 간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후 7:1; 히12:14) 이러한 성화는 평생을 통하여 전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살전 5:23). 그러나 이 성화는 이 생애 있어서 불완전하다.
웨슬리의 성화와 칼빈의 성화의 다른 점:
웨슬리 주의 믿음에 대한 칼빈주의적 개념을 선택적 은총에 대한 책임성이라고 말한다. 웨슬리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나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거부하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사실 믿음은 신적 작정에 의한 구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므로써 역사해야 한다고 믿는다.(인간의 의지적인 사랑)
하지만 칼빈주의적 믿음은 구원에 사랑의 본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반면 웨슬리는 성경적 신앙은 사랑과 복종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바로 믿음은 사랑을 위한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웨슬리 신학은 칭의의 순간에 믿음을 갖는다기 보다는 성화 안에서 사랑이 자라가며 사랑을 통해 믿음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에 있어서는 칭의의 순간이 믿음이다. 웨슬리 주의에서는 아주 약한 것에서 완전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정도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면 사랑도 자란다고 주장한다. 이것으로 어린 믿음과 성화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정확히 자기 노력의 종착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능동적인 사랑과 복종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무한의 발전에 의하여 지배 받는 계속적인 신뢰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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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로이드 존스 성령론 - pp.203-220)
(14) (Ibid, pp 222-224)
웨슬리는 복종과 사랑을 포함하여 그 자체가 역동적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계속적으로 응답하는 믿음은 다른 사람들과의 전반적인 윤리적 관계와 하나님을 향하는 전적인 사랑에 전념하도록 이끈다. 이것을 “완전 사랑”또는 “성결”이라고 말한다.(15)
성화를 위한 회개와 죄사함:
칼빈에게 있어서 복음의 총체, 곧 핵심은 “회개와 죄사함”이다(눅 24:47; 행 5:31). 그런데 회개와 죄의 용서, 곧 새로운 생활과 화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중생과 회개를 같이 보고 있으며 회개는 죄사함을 받게 하며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며 지상에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한다. 회개 없이는 죄의 용서가 없다. 회개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공로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른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날마다 회개하는 삶이다.
칼빈은 죄사함을(회개) 통해서 중생의 유일한 목적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다“(엡 4:24).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16)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게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속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총은 신자들의 전적인 순종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지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뇨 죄인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신 의도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는 죄인들에게 회개와 죄의 각성을 촉구하신다. 죄의 용서를 위하여 먼저 회개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죄인이 회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17)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러나 회개가 죄의 사함만을 위한 원인이라는 것으로만 보기보다는 죄의 사죄는 그리스도안에서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회개가 없이는 죄사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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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칼빈주의와 웨슬리 신학 - 한영태 - 생명의 말씀사)
(16) (기독교 강요 - 3권 3장 과 9장)
(17) (기독교 강요 3권 3장 20장)
(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송종섭 - p.63)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한 신자는 이제는 죄사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화목한 교제를 함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선한 일을 위하여 소망 가운데 살게되는 것이다. 회개는 성회에 있어서 초석이며 핵심적인 명제로 서로 불가분의 관계임을 칼빈은 말한다.
결론: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와 칼빈의 성화에 대하여 비교하였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조심하고 연구해야하지만 분명 로이드 존스의 성화관과 성령론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먼저 성화의 핵심적인 관점으로 로이드 존스는 “칭의에 관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성화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도록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반면 칼빈은 성화의 핵심은 “회개와 죄사함”이라고 말한다. 킬빈의 성화는 외적으로는 기독론적으로 내적으로는 성령론을 강조하면서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인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신본주의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정에 기초한 성화의 과정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자발적인 성화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에 의한 은총적인 회개와 죄사함이다. 결국 우리들은 이 은총에 감사함으로 성화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주제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잘못하면 알미나안 주의적 인본주의속에서 신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신본주의 신앙 안에서 배워야하며 신앙을 갖춰야 한다. 칼빈의 개혁주의가 표방하는 구원론적인 성화론의 가르침과 설교가 부름 받은 교회를 세우고 견고히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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