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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

2014-02-21 00:04:01


마이클 호튼의 언약신학

          

1장 언약신학의 중요성

  인간의 타락이 아담 안에서 일어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되풀이 되었을 때, 인간관계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언약적 주님께 대한 불성실의 결과로서 깨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깨진 약속들의 이전과 중간과 이후에도 약속을 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은 그 관계망을 깨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언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언약은 ‘맹세와 연합’관계며, 비록 반드시 동등할 필요는 없지만 상호 헌신을 포함한다. 성경적 언약들에는 일방적으로 명령과 약속을 부여하는 것도 있고, 쌍방 간에 부여하는 것도 있다. 위대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유비를 만드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을 언약 파트너로 만드시며, 인간에게 사명을 주어 하나님 자신의 의를 행하며, 나머지 피조물을 관대하게 다스리도록 하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존 헤실링커는 “개혁신학은 간단하게 말하면 언약신학이다.”라고 말한다. 개혁신학은 언약신학과 동의어다. 만일 예정론이 개혁신학의 ‘중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중심인가? 요즈음 많은 신학자들이 그러한 중심교리는 없다고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개혁신학은 최소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최소한 목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이러한 구조는 언약이다. 성경의 구조는 단순히 언약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를 언약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구체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놀라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문맥을 제공해 준다.

 성경에 있는 모든 다양한 문학 양식 가운데 언약이 가장 기본적이다. 구약의 역사 기록은 “조약 서문의 연장이며 .... 율법과 예언에 연결되어 있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언약은 틀이지 중심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다양한 언약들이 어떤 ‘방(즉 주제)’에서는 다른 방에서보다 더 잘 보이고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 구속 언약은 삼위일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선택을 논의할 때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자들은 성경의 풍성함을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들이 다루는 모든 주제에 대해 언제나 언약적으로 사고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언약 내에 있는 각 개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실행되어야 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축소시키고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에 대한 지나친 과잉반응을 보일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개념이나 사상의 재발견이 아니라 오직 구체적인 언약적 문맥과 실천을 통해서만이 신학과 실천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면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언약적 삶 내에서 자아는 더 이상 주인이거나 자폐적이거나 혹은 공동체의 무리 속에서 상실되지 않고 해방되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소속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많은 성도의 신앙과 실천에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분리하거나 혼합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 나라와 분리시키는 것은 모든 피조물 특히 모든 인간이 이미 창조 언약 안에서 창조주이며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윤리적으로 상호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각 사람은 성도이든지 아니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불신자들과 나란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적 명령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신중하게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신자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공유하고 있으며, 평범하고 세속적인 소명들과 문화적 노력들에 불신자와 함께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문화적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서 발전한다. 언약신학은 두 왕국을 혼합하지 않고 이러한 중요한 과업을 놀랍게 통일시킨다.

  언약신학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시함이 없이 교리와 실천에 대한 관심에 각각의 적합한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언약적 사고로 바라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이나 순종이 없는 참된 지식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실제로 히브리 언어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종이 왕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왕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풍부한 성경적 용어 가운데 하나는 헤세드 또는 ‘언약적 충성’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사이의 구별과 더불어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와 시내 산에서 인간과 맺으신 조건적 형태의 언약과 하나님이 영원한 아들, 타락 이후의 아담과 하와,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맹세하신 것에서 언약신학은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언약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거나 혼합함이 없이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비슷하게 언약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행동에 대한 더 넓은 성경적 문맥을 제공해 준다. 

  언약신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선택과 보편적인 복음 선포 모두를 가르치는 것을 볼 때, 심지어 하나님이 어떻게 이 양자를 무대 뒤에서 조합하는지를 잘 모른다고 고백하면서도 양자 모두를 인정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영원 전에 있었던 삼위 하나님 사이의 사랑의 문맥(구속언약),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의 연대성(창조언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으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혜언약)의 관점에서 논함으로써 언약 신학은 성경에 있는 ‘주권을 보여주는’ 구절만이 아니라 인간 행동의 의미를 강조하는 구절들이 적합한 자리를 줄 수 있다. 양자의 행동 사이에서 우리가 누구의 행동을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가 선택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강조점은 우리의 추상적인 성향을 억제한다. 영원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회의를 없애버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적 전개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언약신학은 불연속성보다 연속성을 가지고 시작하며, 이는 어떤 선입견 때문이 아니라 성경자체가 약속에서 성취로 움직인다. 동시에 언약신학은 성경자체에서 특정한 언약 형태사이의 구별을 인식한다. 어떤 언약은 성취의 조건으로서 순종을 요구하는데 시내산 언약이 이런 언약에 속한다. 신명기가 마치 무시간적인 축복과 저주의 원리인 것처럼 신명기를 읽는 것은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실재를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인 약속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원한 구속 계획과 혼동하는 것이다. 

  언약신학은 우리가 성경을 읽어갈 때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도움을 준다. 언약신학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은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연속성의 기초를 보여준다. 또한 구약 자체에서 조차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한 모든 것에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것에 의존하는 언약 등의 불연속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다양한 기독교 전통은 말씀 중심적인 것과 성례 중심적인 것으로 나누어져있다. 적어도 실제상으로 세례와 성찬 없이도 설교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들도 있다. 또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상으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성례 자체라고 생각하는 교회들도 잇다. 이런 태도 대신에 우리는 우리 시대에 설교와 성례, 언약의 말로하는 것과 언약을 눈으로 보면서 확증하고 참여하는 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말씀과 성례의 상호 의존성은 우리가 교회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이론이 아니라, ‘언약 체결’을 할 때 양자 모두에 잇는 성경적 문맥에 대한 호소에 의해 가장 잘 확증될 수 있다.

  하나의 시민 종교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삶의 기초로서 민족적 정서보다 여호와의 뜻을 강조하게 된 것은 주로 언약 개념이었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하나님의 언약적 방시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7장 언약 백성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인가? 또한 이 질문은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다. 성경자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언약적 해석을 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언약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언약의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는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이것은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

  시내 산 언약은 백성들이 ‘율법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맹세한 것인데 절대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한 가지라도 어기는 것은 전체를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다. 약속은 조건적이었다. 만일 너희가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킨다면, 너희는 내가 준 땅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분명 땅을 주는 것 자체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은혜로 해방시켜 주신 것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제 땅을 잃어버리거나 유지하는 것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율법 규정을 얼마나 잘 지키는 가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시내 산 언약은 행위언약이며, 하니님과  아담 안에 있는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의 반복이다. 그러나 또한 순수한 약속의 언약,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일방적인 평화 언약이 있다. 종주권 조약과는 달리, 아브라함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형식에 있어 노아 언약과 일치한다. 형식과 내용 양면에 있어, 아브라함 언약은 ‘영원한’ 다윗 언약과 일치하며, 예레미야 31장과 다르 ㄴ곳에 나오는 새 언약의 선구자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이 두 개의 구별된 구원 방법이나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을 제공하는 것처럼 그 두 사이의 구별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구약 성경 내에서도 있고, 신약 성경 내에서도 있는 신, 구약 성경 모두 안에 있는 구별이다.

  언약신학이 대체주의에 도전을 주는 이유는 교회를 이스라엘의 대체로 보는 대신에 교회를 이스라엘의 열매로 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언약 파괴자로서 국가적인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가지치기를 통해 살아남고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에서 접붙임을 받고 있다. 

  구약 성경(특히 율법)이 고대 근동 조약문서들과 얼마나 많이 닮았는지를 보았다. 내용만이 아니라 의식의 형식에 있어서도 닮았다. 조약의 기본 구조는 수정될 수 없지만, 역사적인 연속성뿐만 아니라 변화를 고려하여 다양한 갱신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한 언약들은 동등하지 않은 당사자 사이에 맺어지며, 서기관들에 의해 수정될 수 없다. 새로운 언약 내용이 작성될 수는 있지만 결코 수정될 수 는 없다. 각각의 권위 있는 언약적 문서의 집성 범위는 고정되어 있지만, 문서를 구성하는 역사적 순서는 영구히 닫힌 시스템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시리즈로 된 구별되는 언약적 정경이다. 각각은 모든 부분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언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과정으로부터 추상적으로 각각의 규범을 절대화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각각의 기록된 언약은 봉신의 변경, 삭제 혹은 첨가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 그러나 종주에 의한 개정에는 열려 있다.

  언약적 정경성의 다른 결과는 구약 성경은 기독교회의 정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격한 법적 관점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메시아가 오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규제했던 역사적 조약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측면에서 본 구약 성경은 교회의 헌법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역사적 문서에 해당된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 율법과 복음으로서 구속 언약의 기록론적 통일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언약신학은 완전히 성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아니다.

  옛 언약이 새 언약에 길을 내주며, 새 언약에는 더 좋은 약속들, 중보자, 제사장, 성전, 제물과 땅이 있는 것처럼 옛 언약의 시행 방식에는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심지어 지금 사라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스티븐 멕켄지는 이렇게 말한다. “신명기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에 달려잇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지위와 약속의 땅에서의 생존이다.” 분명 본래 땅을 주신 것은 선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신실함으로 그 땅을 지켜야만 한다.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의 유명한 정의를 빌려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은혜로 들어가며 순종으로 유지된다. 맥켄지는 이렇게 덧붙인다. “불순종의 결과는 땅을 잃어버리고, 백성들이 추방되는 것이다. 신명기의 끝부분에 묘사된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의 의식은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주를 받는다는 선택을 보여준다.”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에 있는 왕적인 약속의 성취를 말해주는 새 언약의 기대와는 얼마나 다른가?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히12:18) 이 때문에 만국이 이르는 곳은 시내 산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일에 창조주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위대한 시가행진을 하며 새 창조 안에서 자신들의 몫을 받게 될 시온 산이다. 

 

8장 언약의 표지와 도장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은 약속의 성령으로서, 그리스도의 “새 창조”를 실현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 일을 성취하시는 걸까? 이 일은 믿음이라는 선물을 통해 성취된다. 이 믿음은 복음의 전파로 생겨나고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표지와 도장인 성례를 통해 확증된다. 성례예식은 이 시대의 언약 체결에 속한다. 우리가 세례의 광경을 목격하거나 성찬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로 친히 성사시킨 거래에 대해 악수하시는 셈이다. 두 상대자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우리도 역시 악수한다), 이 언약에서 우리의 손을 잡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손이다. 우리는 언약에서 주어진 약속들을 반드시 믿어야 하지만, 그 조약의 보증인은 하나님이시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이렇게 성례를 “표지와 도장”으로 확인하는 견해를 확증하는데, 그것은 확실히 언약 승인의 언어다. 

  창세기3장8~10절은 하나님의 임재가 좋은 소식으로서뿐 아니라 나쁜 소식으로 다가오게 되는 첫 순간일 뿐 마지막 순간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일종의 복이다.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기 자신을 둔다는 것은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뜻이다. 

  세례를 언약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두 가지 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데, 그것은 표지가 가리키는 실재와 표지를 동일시해서 마치 세례 의식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표지가 가리키는 실재를 표지와 분리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성례를 기계론적으로 바라보는 견해와 오직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는 견해 사이에서 제시될 때가 많은 그릇된 딜레마를 거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견해는 성례 그 자체가 무언가를 한다는 잘못된 가정을 이용한다. 문제는 ‘성례’가 우리를 ‘상대’로 무언가를 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성례를 ‘사용해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느냐는 것이다.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세례를 통해 그들에게 약속된 분을 ‘영접’해야 한다. 우리는 세례가 죄를 씻어 없애고 깨끗하게 하는 구원의 상징과 수단으로 묘사됨으로 초기 기독교 선포의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살아남으로써”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께 더해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으시는 것일까?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끄신다. 

  한편으로, 믿음이 없다면 이 세례는 지시 대상이 되는 실재를 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세례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고 하네요. “세례는 하나님의 손에 놓인 수단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장소다. 다른 한편으로 이 마지막 진술은 마치세례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고 그 자체가 효력을 발휘해서 구원을 분여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모든 제안을 배제한다. 

  조약을 승인하는 식사의 사례들은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표지와 지시 대상이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에서 할례가 “언약”으로 불릴 수 있듯이, 유월절 예식 자체도 “여호와 하나님이 넘어가시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고대 조약에는 비상사태를 대비한 규정이 있었다. 제후는 군사적 구조를 위해 대왕의 이름에 청원할 수 있었다. 여호와의 이름에 청원하는 모습은 국가 간 조약에서 그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데, 거기서 제후는 침공하는 적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지키기 위해 대왕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유월절의 잔을 들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언약의 어떤 부분도 결코 따로 분리될 수 없다. 언약은 말로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서약을 보증하는 확인 예식을 통해서도 보장되었다. 

  바울사도는 표지와 지시 대상이 서로 다르면서도 연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연합은 어떤 경우에도 언약적 성격을 띠며, 그 중심에는 중재 활동이 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이교 예식의 식사를 성찬과 대조함으로써 표지와 지시 대상 간의 연합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를 통해 사제주의의 오류와 기념설의 오류를 예방하게 되는데, 사제주의는 표지를 지시 대상과 구별하지 못하고 기념설은 표지와 지시 대상간의 연합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제주의자들은 고린도 전서 11장 28,29절을 문맥으로부터 분리해 성찬을 받을 만한 조건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의 떡과 포도주 자체로 존재한다고 인정하거나(천주교), 적어도 떡과 포도주의 안에, 그것들과 동시에, 그리고 그것들 아래에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루터주의)을 의미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경고가 우상숭배와 분리에 반대하는 권징의 주장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 관련된 문맥이 가장 중요하다. 바울은 축복의 잔과 떡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핵심은 이처럼 성스러운 식사가 참석자들을 한 몸으로 연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찬은 언약식사다. 그것은 성찬이 우선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서약에 대한 승인이라는 뜻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한 서약을 승인한다는 뜻이다. 성찬에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모두 존재한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만들어진다.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 성찬은 개인주의의 방식으로 다뤄질 수 없으며, 오직 언약 식사로만 잔주될 수 있다. 

  성찬이 언약 식사라는 사실에는 종교 개혁가들의 깨달음처럼 대단히 실천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말씀, 세례, 성찬은 분열적인 세상의 반목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일체성을 소유하는 하나의 단일한 섬을 만들어 낸다.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자리다. 

  우리는 함께 모인 신자들에게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결국 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금한다는 것은 친교를 제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스스로 그만둘 수 있는 이런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성례를 주신 목적은 바로 약한 믿음과 회개를 강하게 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다는 복된 소식으로 낙담한 영혼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다.

  기독교인의 삶에는 실천할 때에 우리에게 유익하고 도움을 주는 일이 많다. 기도와 성경 읽기의 훈련, 신자들 간의 친교, 복음 전도,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등은 각 개인과 교회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습관이다. 하지만 말씀과 성례는 다른 모든 ‘은혜’의 수단과 구별된다. 기도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표현대로 “감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꼐로 나아가는 무엇이지만, 선포된 말씀과 성례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향하시는 움직임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은혜를 내릴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리 중대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거나 확증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 하나님이 복음 전파와 성례를 그분의 전형적인 작용 방식으로 정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성찬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분명하게 강조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성례는 우리가 마지막 때에 완성될 구원에까지 자라기 위한 수단이다. 

  성례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를 철학이 아닌 언약의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세례의 물, 그리고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성령에 힘입어 말씀과 합하므로, 그런 사물들은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서 피 흘림과 언약 식사를 통해 상징하고 보증하는 천상의 실재와 연결된다. 은혜는 비인격적인 실체가 아닌 인격적 속성이다. 은혜는 한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는 영적 강장제가 아니라, 정반대의 처분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태도와 행동이다.  성찬에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물질적 실체와 영적 실체가 아니라, “이 시대”와 “오는 시대”다. “이 시대”에는 우리의 양심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올라가셔서 부재하는 상태며, “오는 시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의 강림을 통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령의 역할은 또한 언약 소송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곧 성령은 유죄를 선고하고 회심시키는 일을 하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더불어 보내신 성령은 육체적으로 부재중인 구세주와 함께 친교를 누리도록 신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교제가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과 반대된다는 뜻이 아니라, 완성된 안식으로부터 이 시대로 보냄을 받으신 신적 위격인 성령께 그것을 의탁한다는 뜻이며, 새 언약의 신자들을 얼마간 실현된 새 창조 안에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성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지와 실재로 구성되는데, 표지는 지시 대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시 대상은 표지가 가리키는 실재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이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표지가 아니며,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에게 아버지의 선하심과 낮추심을 보여 주시는 두드러진 증거다. 

  개혁주의신앙고백은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함꼐 확신한다고 주장하는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데, 첫째는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승천하시므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안에 존재하지 않고 하물며 그런 떡과 포도주 자체가 아니시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천국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신 이, 똑같은 그리스돌르 받는 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이런 친교를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행위 주체는 성령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 성찬은 영화롭게 된 몸, 보다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의 영화로워진 몸과 관련해서 그분과 사귀는 일을 포함한다고 한다. 따라서 육체는 성찬을 상호소통의 인과 표지로 하는 친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찬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신비다.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성령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취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만드시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가 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찬에서 우리는 단번에 드려진 제사에 자신이 ‘관여’하는 사실에 대한 확증만 받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물로 드려진 그리스도께 실제로 ‘동참’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분의 생명을 주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따라서 세례가 무엇보다 우리와 우리 자녀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서약하시는 하나님의 표시인 것과 같이, 성찬도 첫째로 그분의 굳건한 맹세에 대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보증이다. 

  새롭게 시행된 식사가 자신의 흘릴 ‘새’ 언약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옛 상징들이 이제 종결되어서, 굳건하고 영원한 언약에 자리를 물려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실 생각이었다.” 성례는 단순한 신앙고백의 기장이나 “순전한 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개인이나 단체의 경건을 통해 성례로 만들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대 교리문답의 표현대로, 성례를 “구원의 유효적 수단”으로 만드는 요인은 표지 자체의 작용이나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활동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성찬에 정말로 함꼐 하신다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성찬을 떡과 포도주 자체로 제한하지 않는다. 성찬에서 우리는 표지와 ‘아울러’ 지시대상이 되는 실재들과 연관된다.(실체의 변화나 혼합이 아닌 연합) 벨기에 신앙고백은 사람의 약함과 염려와 본성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지탱하는 신적 활동으로서 성례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렇게 개혁주의 신앙을 선언하는 고백서들이 성례에서 외적으로 제공하신 것들을 하나님이 성례를 통해 실제로 “우리의 마음속에 주신다.”는 견해를 계속 옹호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영속적인 현존을 교회에 약속하셨다. 현존이라는 개념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요, 이것이 개혁주의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이다. 은혜가 실체에 대한 문제가 아닌 신적 화해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례에서의 현존은 공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언약의 승인과 보증에 대한 문제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회상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현재에서 그 과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도 선포한다. 리더보스는 모든 것은 과거 뿐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게 된다. 성찬은 새롭고 영원한 은혜 언약이 비록 여전히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의미에서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 효력이 발생되었다는 선포라 말한다. 성찬은 하나님이 그분의 영원한 언약을 친히 확증하시는 사건이다. 

 

9장 새 언약적 순종; 언약과 조건

 구속언약- 삼위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조약- 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다윗, 새 언약의 약속은 본질에 있어 불변하며, 깨어질 수 없으며,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관계 없는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에 있어 우리는 수혜자지 파트너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하여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언약은 시행상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은혜 언약은 신자와 신자의 후손들과 맺은 언약이다.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아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 앞에 최종 구원을 위한 많은 조건을 열거한다. 처음의 회개와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증명되는 견인은 ‘이것 없이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거룩함의 부분들이다. 이 거룩함은 전달되는 의라기보다는 전가되는 의인 우리의 칭의 만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내적으로 새롭게 되는 우리의 성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영화와 분리될 수 없는 조건이다. 즉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순종을 시작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행위 언약과 구분하고자 했던 무조건적인 약속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첫째, 우리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구별해야 한다. 칭의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율법을 들어야 하고, 율법에 의해 죄를 깨달아야 하며, 회개하여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우리 마음은 변화되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가 한때 거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의 하나도 칭의의 근거나 수단은 아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나고 말하는 것은 이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칭의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다. 조건은 수단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율법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과 약속 언약 안에 있는 조건들을 구별해야 한다. 율법은 명령할 수 있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은 언약조항의 성취에 근거해서 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 언약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분명 율법의 요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근거는 변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공하시는 구원은 총체적인 것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칭의 뿐만 아니라 중생, 성화 그리고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데 요구되는 모든 것이 이 무조건적인 약속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은혜 언약은 기초와 관련해서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구속 언약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계획은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각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양 무리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끝까지 보호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같은 조건이 우리에게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아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보호되지는 않을 것이다. 외적으로는 언약 공동체 안에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종말에 최후의 추방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매주 함께 모여 언약 갱신 의식에 참여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은 언약 공동체의 회원이며, 언약 공동체 내에 있었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심지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놀라운 유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적 연대감이 그 자체로 “구원에 속한 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복음 설교로 우리 믿음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며 성례로 믿음을 굳게 해 주신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성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자신을 주시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경고들이 그들에게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결코 꺼져 가는 촛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를 꺼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