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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그리스도와 문화- 스킬더

그리스도와 문화- 스킬더

2014-02-13 22:22:01

 


<그리스도와 문화> 

 

서론 

 

거의 25년 전 1952년 3월 23일 주님께서 당신의 종 클라스 스킬더(Klass Schilder)를 데려 가셨다. 그의 책들 중의 한 권인 본 번역판은 그래서 아주 적절한 때에 출판되었다.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tlure)는 스킬더가 화란어로 출간했던 Christus en Cultuur(그리스도와 문화)의 영어 번역판이다. 화란어판은 원래 1932년도 “Jezus Christus en het cultuurleven”(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이란 제목이었는데, 여러 저자들의 글을 합해서 출간한 Jezus Christus en het menschenleven(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삶)이란 책 속에 포함되었었다. 곧 이어 1947년도에 Christus en Cultuur(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별도판이 나왔고, 1953년에는 그것의 재판발행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1890년 12월 19일, 화란의 깜펀(Kampen)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마을에 있는 화란개혁교회(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의 신학부에서 공부하게 되고 그곳에서 1914년 우등으로 졸업하게 된다. 여러 교회들에서 목사로 봉사를 한 뒤 1933년 독일 엘랑겐(Erlangen) 소재의 프리드리히 알렉산더(Fridrich-Alexander)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제목은, Zur Begriffsgeschichte des “Paradoxon”, mit besonderen Berücksichtigung Calvins und des Nach-Kierkegaardchen “Paradoxon”(후기키에르케고르의 “역설”개념과 칼빈의 “역설”개념의 상호비교)였다. 그 해 그는 깜펀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부임하게 되고 1952년 서거할 때까지 후학들을 지도하게 된다. 

 

스킬더 박사는 수많은 책들과 논문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삼부작 Christus in Zijn lijden(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은 특별히 그 영역판 Christ on Trial(재판받으시는 그리스도,1938)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주간지 De Reformatie(개혁)지가 1920년 발행될 때부터 그곳에 줄곧 정규적으로 글을 발표하였고, 1924년에는 편집인 중의 한 명이 되었다가 마침내 1935년부터는 유일한 편집인이 되었다. 신학적인 문제나 교회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주의 철학의 반기독교적 철학에 대항해서 보여주었던 강한 소신 때문에 그는 1940년 8월 나찌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풀려나서는 피신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점령군이 혈안이 되어서 찾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 거의 말기까지 은신처에 남아 있었다. 

 

1939년과 1947년 두 번 스킬더는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1947년 귀국하는 배 안에서 위에 언급한 1932년도의 글을 교정하면서 확장시킬 수 있었다. Christus en Cultuur의 초판 서론에는 자필사인과 함께 “1947년 8월 24일 벤담 선상에서”라는 글이 쓰여있다. 이 화란판 또한 영어사용권, 특별히 미국에서 주목을 끌었는데,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 칼빈, 카이퍼의 사상과 함께 스킬더의 사상이 헨리 R. 반틸의 책 The Calvinistic Concept of Culture(칼빈주의 문화관(1959; 1972재판)에서 철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일본어판은 1974년 관서대학의 야마나카교수에 의해서 발간되었다. 

 

이 영어판은 A.J. 스킬더 월터 부인의 허락과 화란어판 출판인이었던 T. 웨버(Wever)씨의 협조로 가능하였다. 

 

주님께서 이 책의 출판에 복내리셔서 참된 문화를 위한 전투에 사용하시기를 기원하면서.... 

 

Grand Rapids, Michigan, USA에서 G. van Rongen(반 롱엔) 

Hamilton, ontraio, Canada에서 W. Helder(헬더) 

 

 

 

1976년 12월

 

 

1. 

 

“그리스도와 문화” - 이 주제는 기독교가 세상에 등장한 이래로 오랜 시간에 걸친 관심거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몇 세기 이전부터 그래왔었다. “그리스도”라는 헬라어 명칭은 단지 “메시야”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번역어일 뿐이다. 메시야를 여전히 기대해왔던 구약 시대에도 메시아”(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하여 그 사람들은 생각했고, 투쟁했고, 예언했다. 또한 그것에 대항하여 반역하기도 하면서. 만일 우리가 지금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 참된 것이라면, 오랜 시대에 걸쳐온 이 주제는 이 시대만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기쁨이나 슬픔을 지닌 채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은 역사 속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서야 해결될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해 감으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의 파국적 재림(catastrophic parousia)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문화에 관련된 투쟁의 최종결과에 대하여 가지게 될 그 큰 기쁨과 깊은 슬픔은 종말의 때에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정서적으로 긴장감을 야기하는 두 개의 단어들을 만나게 된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2.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우리가 여기서 다룰 주제는, 성급한 이교도들이 어떤 깊은 연구를 해보기도 전에 자신들의 관심사항에 포함시켜두는 그런 목록에 넣어둘 것도 아니고, 사려 깊은 기독인들이 그것에 관해 학문적인 논쟁을 한 후에야 그 목록들 속에 넣어 두어야 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곧장 기독교적인 사고와 행동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기독인은 반드시 그것에 대하여 꾸준히 따져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부르심 받은 직접적인 의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기독인의 사명의 정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12문답(역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12문답에 해당하는 문답으로, 통상 제 31문답, 제 32문답을 말한다)에 나온 대로 기독인들이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사는 것인데, 이 정의는 충분하고 포괄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리문답의 이 말들(역자 주: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기독교인의 사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적 삶, 이 둘의 관계에 대한 것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역주: 그만큼 이 정의가 완벽하다는 뜻). 특별히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고백적인 기독인은 문화생활 속에 직면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학문적인 결론이 나오기 까지 문화 속에 일어나고 있는 전투를 관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투쟁보다는 회의의 결의나 결론으로 점차 대체되어 버리고 있는 것을 기다리고 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학문을 굳건하게 하지만, 학문은 삶을 굳건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고작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할 뿐이다. 같은 방식으로, 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이나, 기독인이 부대끼거나, 어떤 문화적 상황 속에서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구체적인 삶의 상황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소위 순수 학문적인 문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삶은 학문에 우선한다.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역자 주: 삶이 최우선, 그 다음 두 번째로 철학(학문)이란 뜻]. 모든 사람은 시공간적으로 결정된 문화적 삶의 한 국면을 다뤄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그는 그 가운데 던져졌고, 단 하루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비록 그가 만일, 술 따위를 전혀 맛볼 수 없는 수도원 속으로 도망쳐 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잡지의 기삿거리가 될 만큼 사람이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왜 이 문제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설명이 길어질 것이다. 단지 몇 부분만 설명하자. 

 

a.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첫째, 의견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간혹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만 아니라, 그래,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도 우리들은 종종 아주 추상적인 방식으로 말하곤 한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다. 순수한 형태의 물질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보편주의철학을 개진하는 사람들과는 문화관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란 직선적으로 발전해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사가 순환한다고 보는 사람들과는 다른 문화관을 형성하게 된다. 유신론자와 범신론자는 상호간 대립된 의견들을 가지고 있는데, 문화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루터주의자는 오직 루터의 사상에만 추종한다면 칼빈주의자의 문화관과는 다른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관주의자의 문화관은 낙관주의자의 것과 다르다. 플라톤주의 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다르다. 스피노자주의자는 데카르트주의자와, 칸트주의자는 피히테주의자와 다르다. 낭만주의자들 중에서 조차도 괴테는 노발리스와 다르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슐레겔형제와 다르다. 비스마크와 로젠버그, 오토와 월터 휘트먼, 이러저러한 불교철학을 숭상하는 자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철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는 바로 그 차이가 신학자들과 일반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문화적 개념”(cultural idea)이 일말의 만능열쇠와도 같아서 그 열쇠로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서 열려지는 문화회의에 정중한 환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단지 꿈일 뿐이다(역자 주: 그런 열쇠는 없다는 뜻). 그 회의에는 분명히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불행스럽게도 그런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b. 두 번째 이유는, 그 시간과 그 (문화)문제 자체에, 비록 동일한 기간 내에서 조차도, 상호간 모순이 되는 해결책들이 새롭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니면, 문화에 대한 이 문제가 이론적 기초들의 형태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난다. “기독교”라는 개념이나 “문화”라는 개념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들을 지닌 채로 생성되었다가, 고정되면서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의견 속에서(뒤에 살펴보겠지만 잘못된 의견들이다) –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던 - 단지 “종교와 문화”, 혹은 “자연”과 은총”의 문제로 축소되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이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이 “영역”(territory)라는 말은 취급하기가 용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너무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나아가서, 수학적인 의미를 지닌 채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수학적 개념(점, 선, 면적 등과 같은)들은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럴 때조차도 많은 질문들이 연이어서 생겨나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역자 주: 결국,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자연”과 “은총”과 같은 두 개의 분리된 영역간의 문제라는 식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분리된 “영역”은 실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학적 개념으로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음. 이 수학적 개념의 비실제성은 유클리드 수학과 비 유클리드 수학의 관계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가 됨. 점, 선, 면적 등은 유클리드 공간상의 가상적 개념인데, 이런 가상적 개념에 기초하지 않고 실제의 공간을 고려하면서 전개하는 수학을 비 유클리드수학, 혹은 위상수학[topology]이라고 함). 

 

c. 이 모든 것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평가절하 됨으로 인해서 문화의 개념 또한 평가절하 되었다는 것이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철학도 그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교회와 철학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라는 개념, 문화라는 개념 이 두 개념이 평가절하 되면서, 그 두 개념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가야 할 그 정당한 노선이 희미해져 버렸다. 

 

d. 또한 스스로를 교회라 부르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신조의 내용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어서는 결국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신가? 도대체 이 예수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적 현실(historical life)에 있어서의 그 분이 지니고 있는 의미(significance)가 무엇인가? 그 분께서 과연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 계속적으로 관련되시며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계시는가? 그 분께서는 당연히 그렇게 여겨지셔야 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가? 아니면 그 분(아니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표상들(Gestalten) 중의 하나일 뿐인가? 그 하나님의 표상(Gestalt)은 그 하나님의 본질(Gehalt)을 적절하게 표상한 것인가?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 그 분은 그 그리스도(그 메시아)를 고대해 왔던 구약성경의 기대를 성취시킨 바로 그 분인가? 아니면, 그 분 안에서 적절하게 계시되지도 않은, 혹은 단지 단편적으로만 계시된, 단순한 메시야라는 개념일 뿐인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메시야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기름 부으신 자”라는 뜻을 가짐)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 말은 그가 직분을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신적인 파송(commission)과,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은사(gift)를 참으로 포함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런 의미들이 단지 상징적인 뜻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평범한 인생들 중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들”과 완전히 구분이 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된 나사렛 예수 사이에는 진정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는가? 아니면 이런 근본적인 차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공상에 그칠 뿐인가? 어느 정도 결정적인 방식으로 역사적인 인물로서 그 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생의 삶을 사실 수 있으신가? 곧 진짜 사람인가 아닌가가 판가름 날 수 있는 방식,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실 수 있으신가? 우리와 전적으로 같은 삶을 사셨던 바로 그 역사적 예수께서 바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엄위하신 심판 아래 놓이시는 긴장을 친히 경험하시는가? 아니면, 그 예수께서 엄위하신 재판장이시며 또한 아마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도 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순전하고 효과적으로, 곧 심판하시며 체질하여 걸러내시는 방식으로, 지상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들으시게 하셨던 것인가? 그 절대자의 음성, 곧 한편으로는 밀어내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잡아당기시는 독특하신 그 심판의 음성을 말이다. 정말로 슬퍼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현하의 기독교계에서 아주 심각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편으로는 구체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상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의 “공동체”로서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크리스천들”이라고 하거나 “참된 공동체”라고들 하면서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곧 서로를 향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와 그리스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 아주 확실한 답을 당분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우리들 사이에서 말이다. 우리들 서로에 대해서도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의 입장에 반대하면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의 문서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기록되지 않은 기독론들을 가지고 그 나름대로의 “문화”를 세워가고 있는 이 다종다양한 세상 한 가운데서 기독교인들끼리 대립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강렬하게 소동을 일으키면서, 이 세상의 문화는 성숙한 것도 순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문화는 기만적이며 또한 (문화적) 죄의 결과는 결국 죽음뿐이라는 것을 수 천 번씩이나 항의하곤 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의 문제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들 모두가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우리들 자신이 (최소한 하나의 집단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인 것은 아닌 지,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마디의 말조차도 뱉어낼 수 없는 자들인 것은 아닌 지…….이런 질문부터 먼저 시급하게 답변이 되어야 한다. 그런 질문이 특별히 우리들에게 질문으로서 아주 깊은 상처를 준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들은, 국제적인, 교파적인, 초교파적인, 그리고 상호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그룹들 간의 문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적인 삶과 문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메시지들을 주고받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집단으로서 점점 더 적극적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힘이 없다. 집단으로서 우리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알려지신 분”(the Known one), “친숙하신 분”(the Familiar one)이 아니시라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의 그 관계에 대해서 적절하지 못한 말들만 토해낼 뿐이다. 위의 말 중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그것에 이미 안개가 낀 것처럼 애매모호하게 되어버렸다. 국제적인 관계에, 학문 상호간에, 그리고 교파들 상호간에 이런 안개가 끼어있는 것 최악의 상황이다. 

 

e. 두 번째 말, 곧 문화적 생활이란 말에 대해서는 그 상황이 좀 나은가? 문화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양한 답변들이 있다. 두 서너 마디로 그것에 대해서 이미 언급했었다. 하지만, 이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모든 종류의 염려스러운, 서둘러서 급조한 답변들(constructions), 더욱이나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합법적이지 못한 답변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마음이 무거운 일이다. 최악의 것이 되는 것은, 문화철학자들이 자꾸만 반복해서 근본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답변들을 제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최악의 상황이다. 곧, 한편으로는 모든 종류의 문화철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가치에 대한 – 실상, 주관주의적인- 이론의 배후에 자신들을 감추어 두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 그것도 고백적인 신자들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째이면서 그리고 사실상 유일하게 참된 가치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교통의 가치, 믿음의 확신의 가치, 기독교인의 감사의 가치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독교인의 감사는 실제적으로 유추하면 그 믿음의 열매로부터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역주: 여기서 스킬더는 참된 문화를 기독교인의 감사의 행위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참으로 비굴한 것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이 문화의 문제를 다루려고 할 때에 어리석게도 그만 바로 이웃에 있는 불신적인 문화철학자들을 올려다본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친절하게 우리의 의견에 대해서 동의한다고 머리를 끄덕여주고 있는가? 기독교사상가들과 신학자들이 점차적으로 비기독교적인 문화철학자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굴복하고 있는 것은 통일되고 분명한 믿음의 답변을 제공해주는 것에 더욱 장애가 되고 있다. 오늘날 젊은이 사역자들과 성인교육을 담당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면, 문화의 개념의 기초가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여러 수련회나 강의들에서 그들은 역사의 문제, 개인과 사회의 문제, 국가의 본질과 인종간의 구분에 대한 문제, 시간과 영원의 문제, 물질과 형이상학의 문제, 종교, 도덕, 그리고 자연법의 문제, 진화와 창조의 문제들과 씨름을 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믿음의 편견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 결과 그 권위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 우리들의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행위는 모두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우리들의 고백문서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확실한 지식과 분명한 확신이 되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종종 들어보게 된다. 단지, 어떤 관점의 조직신학적인 문제(교회직분자의 직분정지 같은 포함해서)가 달려있는 한 말이다. 하지만, 문화생활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스핑크스가 논의의 대상이 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들어보기가 무척이나 힘들게 된다. 옳은 행동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대해서 쏟아지는 많은 말들에 대해서 자부심들이 크지만, 실상은 연사들이 답변하기 참 곤란한 이 사실을 분별하지 않고 있다. 곧 “문화”와 “문화생활”이라는 이 이집트 상형문자(ideogram)같은 말들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 단지 미 발달적이면서 가설적인 기초에서만 이 상형문자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는 바로 이 사실들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용어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 지 검토해 보지도 않고서 단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섬길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f. 우리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참으로 그 답을 발견하게 되었다하더라도, 핵심적인 문제가 온전히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 문제가 모두 무엇에 관한 것인가? 우리는 지금 유일무이한 문화(the culture)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러 문화들 중의 하나인 어떤 특정한 문화(a certain kind of culture)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영구한 문화(a permanent culture)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그 문화에 충실한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문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만일 예민하게 사물을 분별할 수 있다면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일종의 문화적 경향성(tendencies)의 혼동만이 있는 것일까? 영구한 문화란 존재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형태의 문화만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화란 도대체 그 특별한 형태들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하는가? 유일한 민족문화(the national culture)인가 아니면 단지 하나의 민족문화(a national one)인가? 유일한(the) 국제문화, 아니면 하나의(a) 국제문화? 유일한 임시적(temporary) 문화, 아니면 하나의 임시적 문화? 유일한 미래의 문화, 아니면 하나의 미래의 문화?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까지 쌓아온 어떤 (혹은 유일한) 문화인가 아니면 앞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쌓아가야 할 문화인가? 그렇게 쌓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종류의 문화인가? 아니면 소망하면서 이루어가야 할 이상적인 문화인가?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중에 개혁가와 혁신가로서 행동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에겐 단지 제한된 사명만 주어져 있어서 이 세상의 변화무쌍한 삶의 급변한 흐름을 거슬러서 올라가도록 힘써야 하는 것일까?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의 인생의 배가 그 엄청난 파도의 거센 세력 앞에서도 파선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을 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에게 진정 어떤 적극적인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일까? “예수를 좇는 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주신 그 창조적인 능력을 끊임없이 실현시킴으로써 세계를 정복하는 경향을 가지고 특수한 (혹은 독특한) 기독교문화를 형성해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좇는다는 것은, 형식상의 관념일 뿐인가? 하나님께서 물론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또한 계속해서 그것을 변화시켜 가시고 계신다. 또한 언젠가 예상 못할 방식으로 변혁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좇으면서 현존하는 세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항거하면서 세상에 속한 태도를 사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보수적이면서 혁명적이고, 거꾸로 또한 혁명적이면서 보수적인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진지하게 실행되는가 아니면 단지 놀이하는 것처럼 실행되는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단지 놀이하는 것만 허용되어져 있을 뿐, 그리고 그렇게 놀이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진지한 행동”일 수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셀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들에 대해서 아직 답변이 없다.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들도 수 없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생활”이란 것은 상호간 적과 동지라도 불리어져 왔다. 때론 서로 간에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톨스토이 같은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를 위해서 “문화”를 무시해 버렸다. 니체 같은 이는 “문화”를 위해서 기독교를 모멸했다. 또 다른 사람들 중에서는, 그리스도와 문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는 사람들도 있다(cf. 소위 신칼빈주의를 비판하는 현대의 발트주의적 비판가들). 처음 두 견해들의 출발점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세 번째 견해도 마찬가지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생활이 실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상호간 대립적(antithetical)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신들은 다행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가 분명히 서로 간에 화해될 수 있는 것이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감정으로 열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둘의 관계가 궁극적으로는 우호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들의 불가피한 결과는, 이런 생각을 갖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없이 다양한 측면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불신자들의 “문화건설”의 “식탁 아래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바보스럽게 주워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문화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금주를 명하신 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 멍청한 구걸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일종의 의심스러운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um e silentio)을 절대 넘어서지 않으려고 하게 될 것이다: 그가 원하는 바가 명백하게 금지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다는 것이다. 남의 식탁 아래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이런 구차함이 믿음과 사랑의 식물인 지, 아니면 부끄러워해야 할 행동인 지에 대해서, 그럼으로 인해서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식으로,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 마라. 또 어떤 사람은 문화생활에 있어서 으쓱대면서 자기의 조그만 기독교적 지식을 부풀려서 어떤 문화적 자부심을 갖는 데까지 이른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형제가 그렇게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서 한숨을 쉬며 사도바울의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는 말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은 단지 부끄러운 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계속 확신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변명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생각에는 그 변명이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문화적 생활을 포함한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 가야 한다는 자부심 넘치는 표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문화적 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과 관계해서, 문화적 생활의 영역 혹은 범위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 지가 전혀 답변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에게 있어서조차 말이다. 

 

 

  우리들은 지금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추종자들조차 그렇다. 수년 동안을 거쳐 오면서 그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만을 외쳐 왔다. 더욱 학구적인 자들이 계속해서 카이퍼의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에 관한 경구를 반복해 왔다. “삶”의 “모든 영역”이 그 자체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간혹 그 구호를 반복만 할 뿐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자신이 그 모든 “영역들” 안에 있는 “주권들”이라는 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유일한 주권(One single Sovereign)을 인정하고 또한 받아들인다.  하지만, 복수형태로, 각각의 영역들에 있는 여러 개의 “주권들”(sovereigns)을 말하게 되면 만사가 애매모호해 진다. 카이퍼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그는 단지 성경의 자료들만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서 “주권”으로 넘어가는 것은, 실로 엄청난 비약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피조세계부터 인간의 산물로 껑충 비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비약에 대해서도 말해야겠다. 그것은, 피조물들의 개별적인 종류(kinds)에서부터 소위 “영역들”이라고 하는, 곧 그 피조물들이 인간의 도움, 혹은 방해를 받든지 아니 받든 지 관계없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그런 “영역들”로 비약하는 것 말이다. 카이퍼의 비유적인 용어는 여기서 다시 복합종의 혼합(metabasis eis allo genos), 곧, 균질한 것이 아니면서 또한 다양한 비율의 양을 서로 뒤섞는 것이 된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특별히 “영역들”이라는 말을 각 영역이 각각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용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린 정말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겸손하게 성경의 가르침 아래에 무릎을 꿇을 때에야 비로소 하늘이 청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이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지고 또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예수와 문화적 삶의 문제가 아니라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의 문제로 축소시키지 않는 한 “기독교와 문화적 삶”의 주제에 관한 어떤 가르침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없다. 처음 두 공식, 곧 “예수와 문화적 삶”과 “기독교와 문화적 삶”이라는 공식은 우리들의 문제의 근본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고 오직 마지막 공식, 곧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이라는 공식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분명 필요하겠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순간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우리가 성경에서 계시된 대로 우리의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  사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가 “기독교와 문화생활”이란 식으로 제기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의 근원에까지 다가 갈 수가 없다. 실상, “기독교”라는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두 개만 생각해 보면, (1)기독교인의 공동체(community)을 의미한다(기독교란 말이 이렇게 사용되어야 하든 지 아니든 지, 혹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든 지 아니든 지), 그리고 (2)기독교인의 공동체 속에 있는 기독교인의 활동으로 인해서 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보이는 기록 가능한 그 가시적 결과물, 혹은, 오히려, 다소 공통된 의견(communis opinio)으로 고착된 틀 안에 기록되어졌고 여전히 기록되고 있는 그 결과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 외에 물론 다른 뜻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는 편의상 제쳐두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 단 두 가지의 뜻에 제한해서 살펴보더라도 문제가 태산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정의를 살펴보자면, 예를 들면, “집단”(community)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함께 모여 있는 그 모임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바 그 목적을 성취를 위해서 모이는 모임을 의미하는가? 그 목적이 그 자체로서(sun-ousia) 옳든지 그르든지 말이다. 아니면 영적인 연합, 곧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의미에 있어서의 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었다(코이노니아)는 의미에서의 연합을 의미하는가? 이 코이노니아가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인가? 곧 인간의 어떤 행동에 의해서 산출되어야 할 그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노력, 곧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형성되어졌고 이제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적으로나(de jure) 사실상으로(de facto) 일치를 이루도록 하신 그 교제를 인식함으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그 어떤 것인가? 혹은, 두 번째 정의에 관해서 살펴보자면,”기독교”란 기독교인의 교제의 결과를 등록(기록)하는 문제로 인해서 결국 역사와 전통에 의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각 시대마다 이러한 등록(기록)과 그 기독교됨의 자격문제에 관해서 그 시대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론을 우리에게 주장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 실로 “기독교”란 단어는 난해한 용어이다. 문제의 실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 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한데, 그것은 문화생활에 대한 질문들을 하고자 할 때, 그 답을 주고자 할 때는 차지하더라도, 이 단어 곧 “기독교”란 말을 출발점으로 삼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a. 그 이유는, 첫째, 기독교가 절대로 표준이 될 수가 없다는 것 때문이다. (위에서 제시된 정의의 첫 번째 의미를 따라서) 기독교인들을 일단의 공동체(community)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 -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추상화를 시켜서(왜냐하면 실제적으로 더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 이 공동체에서 이름으로만 기독교인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을 축출해 보려고 해 보라. 아니면, (두 번째 의미를 좇아서) 기독교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독교적인(당신의 관념상 보편적인 의미를 띄고 있는) 신조의 결과물이라는 의미로 생각해 보라. 이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그렇게 그 명예로운 호칭으로서의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를 적용시켜도 좋다. 어떤 의미로 당신이 생각하든 지,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기독교”란 말이나 개념으로부터 문화생활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어떤 기준(a standard)을 도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준이 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사실적인 자료가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이 우리의 행동을 규제한다. 누구도 사실을 우리에게서 제거해 버릴 수 없다. 모든 사람의 행위가 바로 사실이라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쉽게 허공을 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떤 것에 이르는 것도 어떤 것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현실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물질들을 우리가 다루게 될 때 그 때에야 우리는 이 물질을 조형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질을 조형하게 될 때( 곧 우리가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그 기준들에 온전히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이 기준들은 우리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그 기준이다; 기독교인도 기독교도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계시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지고 계시는 그리스도, 직접 친히 “하나님”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 그 그리스도, 율법의 수여자시며, 보존자이시고 또한 해석자가 되셔서, 죄나 연약함으로 제약을 받으시는 바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친히 베푸신 그 분,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기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 그리스도가 바로 기준인 것이다. 어떤 역사적 경향도, 어떤 문화적 유행도, 물론, 역사적 실재로서의 기독교 위에, 아니면 이상적 기독교 위에 세워진 것일 지라도, 그것은 관념의 소산이며 반드시 죄악과 율법의 파괴와 불경건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바벨의 탑을 쌓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된 출발점을 취함으로 이미 그것은 그렇게 출발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 또한 역사적 유물주의(historical materialism)와 실증주의(positivism)가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서 건방지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물론 다른 전제들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관념주의(idealism)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바르트신학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바르트신학은 말하기를, “교회가 설교한다.”(Es predigt) 고 말한다. 교회 안에 “설교”라는 사실(fact)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이라는 것이 그 이상의 이론적 발전을 위한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기독교”라고 불리어지는 어떤 그 무엇이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그 무엇(fact)이 어떤 교리(doctrine)의 기초가 아니다. 모든 교리가 모든 사실들을 고려하고 또한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사실들을 다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들은 교리들을 위한 어떤 기초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실이나 (사실이라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을 묘사하고 있는 그 설명 안에 이미 어느 만큼의 교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천둥이 친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둥의 신 워단(Wodan: 역자 주: 북유럽사람들이 이전에 믿었던 천둥번개의 신. 이 말에서 Wednesday라는 말이 나왔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과 전기방전이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 천둥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천양지차일 것이다.  

 

  이것 이상의 얘깃거리가 있다. “기독교”라는 것은, 세상 한 가운데서 그 형태를 형성해 왔고 그 “기독교” 자체의 선택한 이름을 가지고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등록(기록)되어 질 수 있는데, 이런 “기독교” 자체가 언제나 어떤 문화적 흐름의 한 과정이나 혹은 일련의 문화적 흐름의 과정들 속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헤겔의 추종자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그리고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 자체를 문화현상의 하나로 간주한다. 안톤 무서트(Anton Mussert)[이차대전 전전과 전후의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음. 영어역의 역자 주]가 도식화한, 다양한 이론들의 제공자들은, “문화성”(Department of Culture)[독일점령군에 의해서 네덜란드인에게 강요된 조직. 예술가 같은 사람들의 등록이 의무화되었는데, 많은 예술가들이 실제로는 활동을 포기하거나 비밀리에 활동하였음. 영어역의 역자 주]에다 기독교에 관한 제반사항 (네덜란드 왕국이라는 유럽의 일부에서만 보호할 수 있을 사항들)을 일임하기를 원했다. 이것 자체가 이미 얼마나 심각하게 그리고 불가피할 정도로 “기독교” 자체가 –비록 그 이름을 보호하려고 한다고 하지만 – 지상의 모든 모임들 속에 현존하고 있는 문화적 경향들의 충돌 속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독교”라는 것이 지역, 국가, 인종, 그리고 심지어는 기상학적 유형에 따라서조차 다양하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일종의 스핑크스이고 그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b. “기독교”가 스핑크스가 아닌 정도에 있어서, 그리고 역사 속에 어떤 순수한 혹은 (또 다시 다른 어떤 그 무엇인) 고정된 형태로 “기독교”가 이해되는 정도에 따라서, “기독교”는 고압적이고 임의적인 전횡을 문화적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저질러 왔고, 수 없는 단점과 죄악을 노출하였다. 그 이후의 각각의, 형성, 변형, 재형성의 과정들 속에서 “기독교”는 때때로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문화의 권력이 되고자 하였으며(교황제도를 기억해 보라), 명확한 문화적 사명을 본질적인 과제로 여기고, 그것을 실행목표로 삼고 있는, 어떤 원리들을 근간으로 해서 유지되어 왔다. 혹은 그것을 의식하면서, 어떨 때는 의식하지 못하면서….물론, 이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문화와 관계된 일이 아니다. 비록 또 다른 면으로는 문화라는 것이 분명히 기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긴 하지만 말이다. 무한히 반복되고 있는(생물학적으로나 진화론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지만) 행동인 변형과 재형성의 행동에 따르면, 그 역사의 과정 속에서 역사적 기독교는 어떤 하나의 특수한 문화적 이념을 결코 가장 선두에 내세울 순 없었다. 또한 기독교는 문화적 생활에 관하여 여겨졌던 그 문화적 사명의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가장 극단적인 다양성이 존재해 왔다. 문화적 제국주의와 – 로마교회에 의해서 어떤 시점에 발전되어 온 – 분리주의 입장, 그리고 “경건한 자들”이면서 문화적인 활동에 주저해 왔던 사람들이나 회중들의 금욕주의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이런 금욕주의자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이야말로 이렇게 문화적으로 주저함으로서만 참된 기독교를 표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기독교”에서 어떻게 문화적 기준(standard)을 도출해 낼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수파냐 소수파냐 하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권세나 정의, 건강이나 치유의 은사가 모두 다수파에 속할 수가 있고, 또한 소수파에도 속할 수가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소수의 모임에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7.  둘째, 엄격히 말해서 역사는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이 문제가 “예수와 문화생활”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해서, 어느 것도 부가하지 않고 말하자면, “예수”는, 우리들이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당신을 그리스도로 설명하였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계시(성경의 설명에 의한)는 어떤 사람에게는 환영을 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시되는 것이다. 이런 거절이 때로는 무지의 옷 속에 감추어져 있기도 한다. 이렇게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은 너무나 신비하다; 제발 기도할 시간, 곧 무지한 자로서 어떻게 해야 올바로 이 예수를 이해해야 할지를 배울 수 있는 그런 기도를 할 시간을 달라!  현재 그는 어떤 종류의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바 된 그 예수님 그 분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예수”라는 개념은 그 분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시 스핑크스가 되어져 버린다.

 

  하지만, 그 분은 스핑크스가 아니다. 그 분의 자기-계시는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은 그 분의 자기-계시에 처분을 맡긴 자들에게 명명백백해 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 수수께끼가 그 분 안에서 분명하게 이해되어진다. 예수님이 단지 “예수”로만 이해되는 사람에게는 이 수수께끼가 결코 열리지 않게 된다. Ubi vides, non est fides(눈에 보이면 믿을 필요 없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 말은 의도는 좋은 데 그렇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분을 참으로 알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라는 인간이 하나님의 보내신바 된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사실, 그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로 불렸었다는 사실, 요셉 없이도 낳으신바 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분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믿음을 필요로 한다. 눈에 보일 수 있는 곳마다 믿음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음을 요구하고 믿음은 지성을 필요로 한다(Ubi vides, ibi fides. Visio quaerit fidem. Fides quaerit intellectum).    

 

  이런 생각은 실상 기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성경은 결코 “예수”만을 말하는 것에 자신을 제한시키고 있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는 먼저 “그리스도” (메시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약속된 그리스도가 훗날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분께서 오신 이후로, 성경은 언제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 왔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로 선포되어 졌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름과 인간의 몸과 특별한 문화적 상황 속에 그 분이 역사적으로 출현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직무와 사역을 이 그리스도라는 말로 압축해서 기술하셨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주어졌던 원시복음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여러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오실 그리스도(메시아)를 말씀해 오셨고 또한 그 분의 직무와 사역에 관한 정보들을 주셨으며, 바로 이 메시야가 세상에 오셔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등재가 되어서 “예수”라 불리어 지게 되었다면, 우리들은 이 “예수”가 온전하게 권위가 부여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길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는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될 뿐이다. 자기 스스로 해석할 권위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 엉터리 권위에 상상적으로 호소하면서 말이다. 지금 나는 상상의 호소(supposed appeal)에 대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실재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해석의 열쇠를 바로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선지자이시고 교사가 되시는 바로 당신 자신의 손으로부터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심히 격노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분께서 이 세대에도 오신다. 예수께서 임하시는 이 세대는 보통 다수 편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혹은 권고하심(visitation)과 때로는 심판(punishment)을 베푸신다. 하지만, 모두 이런 권고하심과 심판은 듣지 않으려고 하는 청중들-해석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마치 복음서에서 자주 당신께서 먼저는 당신의 첫 “동시대인들”에게, 하지만 그 다음엔 우리들(지금 살아계셔서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동시대인이 되는)에게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문화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주제에 관해서 그 분은 반복해서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이전 “동시대인들” 과 (성경을 매개로 하여서) 오늘날의 “동시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저자 주 :두 경우 모두에 우리는 인용부호를 붙여야 한다. 그 분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공기를 들이마셨던 그들은 물론 그 분과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신분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전혀 그들의 신분과는 달랐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 분이 우리 가운데 육신으로 살아계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에 관한 한 그 분과 동시대인이다 ;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그 분은 우리들의 일시적인 지상에서의 이 삶에 개입해 들어오신다.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시는 그 분께서는, 언제나 미리,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며 또한 연약한 우리를 체휼하신다). 그리고 오직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를 찾는 자에게만 문화적 신학적 관점에서 그 비유들의 의미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만일 따라야 할 바가 전혀 없는 것이라면, 두 번째 이름, 곧 두 번째(저자 주 : “예수”는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그의 직무상의 이름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이런 구분에는 여러 가지 진리의 요소가 있긴 한데, 그 분의 경우에는 여호수아(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히 목적이 성취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자기 백성을 구하신다.(마1장)는 구절을 기초로 해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예수)는 직무상의 첫 번째 이름으로서 그 직무와 소명의 내용을 말한다. 두 번째 이름(그리스도)은 이런 소명을 성취하기에 합당하신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의 그 그리스도라는 직무를 나타내는 이름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 분에 대한 그들 자신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은 우리들 생각으로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되어진 바를 넘어가지 않아야 함을 이미 가르쳐 주고 있다(고전4:6). 복음서들이 기록된 것은, 어떤 형식적이고 방법론적 관점에서 그 분의 일생의 활동을 과학적-체계적으로 요약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떤 문화적 관점에서 그렇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예수의 활동, 가르침, 예언, 세우고 부순 것들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어떤 체계적인 논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전기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복음서는 문화철학방법론이나 문화역사방법론을 따라서 어떤 문화적 현상을 기술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기술방법론을 좇아서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복음서는 심지어 구원(salvation)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주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살아가는 삶의 어떤 특별한 국면에 대하여 그 분이 의미하셨던바 그리고 지금도 의미하시는 바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 소위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라는 것들을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실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에서 우리는 예수의 생명(Life of Jesus)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생애를 쓰고자 하는 자는 힘써 애쓰긴 하나 결국 그 분에 대해서 부당하게 행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와 구약성경을 결코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그 분께서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하게 인생으로서의 삶을 따르셔서 복음적인 구속을 완수하신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를 구원의 역사와 계시의 역사와 분리해서도 안 된다. 그 역사들로부터 그 분께서는 그 계획하신 바에 따라서 전면에 부상하시게 되셨다. 바로 이 역사 자체가 그 분에 관한 것이고 또한 그 분에 의해서 집행되어 간다. 복음서는 또는 바울서신과 신약성경의 다른 서신들과도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계시록과도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계시록과 더불어서 성경은 그 최종적인 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한계시록에도 미래에 관해서만 아니라 과거에 관한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예: 계시록12장). 심지어는 그 저자인 요한 당시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관하여서도 포함하고 있다(예: 적기독교적인 로마의 황제숭배, 13장과 18장). 또한 이 성경의 마지막 책에는 어떤 종류의 역사라 하더라도 그 배후에, 그리고 그 역사가 구성하고 있는 요소와 경향성들에게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에는 물론 문화사라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자면,적그리스도적인 짐승 뒤에는 사탄적인 충동질이 있다는 것(12장), 그리고 문화적 갈등을 포함한 모든 갈등은 근본적으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문화적 시기에 있어서 그 옛날의 “여인으로서의 교회”와 그녀의 유일한 “후손”(Seed)을 핍박하고 그 여인과 그 씨를 잔해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옛날의 뱀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 성경 전체로부터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성취하시고자 하신 바와 그 분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월등하게 뛰어난 직무의 수행자로서 우주 만물 가운데에서, 그것을 위하여,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서 수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충실하게 묘사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성경적 가르침이 반드시 담겨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에 관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에 전적으로 그 전하는 스타일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8. , 이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위대한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 바가 없다. 그 분은, 부분적으로는 그 분이 사셨던 시대를 근거로 해서, 또 부분적으로는 그 분 자신의 성품을 참고로 해서, 모든 영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개별적으로 그리고 독점적으로 부여해 주신 바로 그것을 설명할 필요도, 설득하실 필요도 없으셨다(그런 설명이나 설득이 필요 없으실 만큼 그 분은 위대하신 분이신 것이다: 역자 주). 하지만, “예수”에 관해서라면 사실 얼마간 차이가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그 사역에 있어서 그 분은 그 분께서 지상에서 인생들과 함께 하셨던 그 시대와 분리되어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에 근거해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분께서는 그 사셨던 시대를 매개로 해서(by means of) 알려지신다. 그 시대가 근거가 되는 것(on the basis of)은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 분께서는 모든 시대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며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 분에게 있어서 “때가 차매”라고 표현되는 것은 우연적인 “사건의 발생”(occas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라고 하는 것은, 우발적인 어떤 것, 곧 그 분께서 우연히 “발견하셔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를 심으시고 그것으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수 있는 것과 같은 어떤 비옥한 토양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때”는 바로 그 분의 때, 곧 “카이로스”(kairos)이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따라서 진행되어가는 연속적인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chronos) 안에서, 그 분에 의해서 특별히 선택되고 그 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어진 바로 그런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인 것이다. 그 분은 “민족들”의 문화사를 근거로 해서도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근거로 해서도 설명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역사들(이방민족사와 선민의 역사는 모두 다 근본적인 면에서 하나의 역사이며 동일한 영역이다)에 있어서, 그 기초가 되고, 그 역사를 운행하시며, “독생자”이시며, 처음 되시고, 원리가 되며, 목적이 되고, 그래서 또한 새로운 출발점이 되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을 연구한다고 해서 그 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헬레니즘을 연구하는 것이 그 분의 말과 사역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그 분의 말과 사역을 연구하면 헬레니즘을 독특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유대교를 연구한다고 해서 그 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록 그렇게 유대교를 연구하면 – 그 연구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 나오게 된다면 - 예수를 해석하는 해석자들의 관점이 더욱 분명해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신실하신 증인”, 하지만, 불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때때로 수수께끼같이 말씀하시는 그 증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스핑크스가 아니다. 결코 그 분은 스핑크스처럼 수수께끼가 아니시다. 하지만, 그 분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종다양한 변종으로 형성된, “예수 개념”과, 임의적으로 고안된, “예수”의 이미지가 또 다시 스핑크스의 조용하면서 놀리는  듯한 그 미소로 그 예수 이미지의 고안자들과 그 이미지에 대한 경배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이미지는 ‘우상’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스킬더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우상’숭배일 가능성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역자 주). 이 스핑크스는 인류의 역사가 카라반처럼 긴 행렬로 진행하고 있는 그 길가 가까운 곳에 반복해서 세워지곤 한다. 하지만, 성경이, 이런 행렬들 중에 마땅히 어느 방향으로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결정하도록 사용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이런 길들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 스핑크스가 역사의 과정 속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중심”(die Mitte der Zeit)의 본질에 관한 논의 – 요즘 들어와서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는 - 에 과연 누가 정답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 스핑크스를 수 세기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보고 있다. 금세기가 시작되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보거나 듣지 못하였지만 반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희미하게나마 불안스럽게 우뚝 서 있는 채로 그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조용히, 완전히 침묵한 채로 서 있다. “그리스도”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발견되기까지는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전에도 말씀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는 그 분의 신성으로, 위엄과 자비와 성령으로 그 기록된 계시를 통해서 지금도 말씀하시면서 우리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그 분의 말씀을 친히 듣게 되기까지는 이 스핑크스에 관해서 한 편의 소설을 쓸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해서 절대로 예언(prophesy=설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당신 자신의 빛 가운데서 보여야 한다. 아니, 그 분 당신께서 친히 당신의 빛 가운데서 당신을 비춰주셔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당신 자신을 당신 자신의 빛으로 현시하시고 설명하시는 중에 예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분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선지자시며 제사장이시고 왕이신 것은 바로 이 일을 통해서이다. 예수 안에서 비춰지는 그 빛은, 그 분께서 바로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야훼의 종이 되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 학문세계에서도 조차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생명 속에서”(in life) 허락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학문연구생활도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역자 주).  

 

  문화생활에 있어서 “예수”의 중요성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그렇게도 다른 의견들로 사람들이 대립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놀랄 필요가 더 이상 있을까? “예수와 문화”라는 문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그 “해답”이 많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결이 난망한 불가피한 현상 가운데서, 그 분의 위대하심이 드러나고 그 분의 심판이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분명한 증거를 보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그 분에게 “순종해야”(hear)한다는 그 분의 적극적인 명령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두렵도록 진지하게 부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곧 우리가 “예수”를 “보는 것”(see)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명령의 수여”가 효력을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곧 그렇게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심판집행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역자 주). 문화역사연구에 있어서 “예수에 관한 구절들”(Jesus paragraphs)에 관한 논의의 역사를 보면 너무나 혼동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구절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어떤 역사 문화적 심판을 생각하게 한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13:13). “예수의 이미지”를 조형하는 어떤 임의적인 작업도 그 마땅한 보응을 받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결국 가장 개인주의적인 관점들이 양산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불건전한 토양에 의해서 산출된 사악한 결과물들 중의 어떤 것들을 이미 우리는 살펴보았다.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예수”에 관해서이다; 그러면 그 산출물은 더욱 뻔뻔스럽고 실망스러운 것이 된다. 맑스주의자들은 “예수”를 문화의 역사 속에 있었던 위대한 혁명가로 생각한다. 핵켈(Ernst Haeckel)은 문화를 경멸한 자로서의 예수에 대해서 연설을 한다. 콘스탄틴 황제는 가장 기독교적인 문화 투쟁 속에 있었던 가장 성공적인 선전선동가를 그 분 안에서 보았다.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그 분을 – 예수님을! – 아랍문화의 역사적 가상인물들 중의 한 명으로 보았다. 챔벌린(Chamberlain)은 그 분 안에서 어떤 도덕적 문화의 건설자를 발견하였다. 헤겔(Hegel)은 “예수”를 일종의 문화적 범신론과 연결시켰다. 바로 이런 짓을 한 헤겔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만물을 삼위일체론 적으로 표상하였던 그것을 이제는 헤겔 자신과 분리시켜서는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오직 태양이 스톡홀름(Stockholm:스웨덴의 수도로서 영국의 램버스에 해당되는 종교적 위치에 있는 도시: 역자 주) 이나 램버스(Lambeth: 영국 런던의 한 지명으로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런던 주재 시에 머무르는 궁이 있음. 영국국교회 인물들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음: 역자 주)에서나 떠오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들에서 “제 3의 신조”(the third confession)를 작성하길 원했었는데 – 그것들이 이제 어디에 있단 말인가? – 그들은 “예수” 안에서 소위 주제별로 살펴 본 문화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문화계에 직접적인 “메시지들”을 공식화시켜 주신 위대하신 분을 보았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메시지들”이 갖고 있던 직접적인 성격이 결국 근본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다른 회의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영감을 받은 제자들이거나 영감을 제공해 주는 성자들(mahatmas)인 양 뽐내면서, “예수”를 위해서, “동양”과 “서양” 사이를 이어주는 마지막 연결고리를 제공해 주는 수많은 수수께끼 같은 얘깃거리들을 남겨놓고 떠나 버린 “현자들”(the wise) 가운데에 조그만 자리 하나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서양의 그 전통적인 “스승”(Teacher)되신 분이 이런 동서양간의 접촉을 통해서 동일하게 전통적인 동양의 “족장”(Patriarch)들 중의 한 명이 되어 버린 셈이다. 서양세계는 전통적으로 그 “스승들”로 하여금 말씀하게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자신들의 “족장들”이 계속 침묵하고 있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침묵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서 스킬더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침묵시키고 있는 서양인들의 예수 이미지를 비꼬고 있다: 역자 주]. 전자는 그들의 저술들의 기록들을 통해서 그들의 개념들을 분명하게 표현해 온 반면, 후자는 몇 개의 기록된 글들의 행간을 통해서 그 무지무지하게도 역설적인 생각들에 대해서 추측하게 만들며, 어떤 개념적인 “명쾌함”을 오히려 비웃는다. “명쾌함”이란 것은 오히려 명쾌함이 결핍되어 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예수가 지금으로서는 문화적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신학자들이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지학주의자들이 그 분의 침묵하심을 통해서 듣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그 “스핑크스”가 여기선 우연히 아니라 유일하게 적절한 비유가 되겠다. 이 사람들은 결코 회의장에 모여서 작성한 예수에 관한 “메시지” 뒤에 남아있지는 않는다. 금욕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파주의자들을 보라. 그들은 “예수”를 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분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뿐이다. “영혼”과 “마음”을 향해서 말이다. 하지만, 엄청난 이 세상 속의 거칠고 험한 인생살이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으로는, 그 분은 완전한 분리의 명령 외에 어떤 말씀도 하고 계시지 않는 분이시다: 바벨론을 벗어나서 너희들을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라! 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사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은 “예수”를 모하메드, 차라투스트라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 그리고는 참된 종교와 거짓된(유사한) 종교 사이에 있는 실재적인 구분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예언의 능력의 정도에 있어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는 식의 차이에만 염두를 둘 뿐이다. 수많은 천년왕국과 관련된 분파들은, 수세기 동안을 스콜라주의적인 위계적 기독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고 개혁주의적인 건전한 기독교에 대해서조차도 비난해 오면서, “예수”를, 엄격하게 말해서, 자신들의 이기주의와 집단주의를 위한 음울한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무뚝뚝하게 개별적인 공동체를 형성해서는 세상의 어떤 것도 흡수하지 않는 생활을 통해서 세상과 교회를 영구히 분리시켜 버릴 그런 가장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9. 물론  “교회” 자체도 여기에 잘못이 있다. 교회조차도 간혹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 분께서 하신 일과 하지 않으신 일들 속에서 그 분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신학자들이 전체 성경에서 네 복음서를 절단해 내서 성경의 전체 메시지를 오염시키는데 방관했다는 면에서 교회는 유죄이다.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자료들로부터 “객관적인” “예수”의 이미지를 추출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변질시켰던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에만 관심을 제한하면, 기껏해야 아마도 문화에 관하여 “예수”가 하지 않으셨던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답변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극적인 답변을 할 수 있으려면, “예수”(그 분의 첫 번째 이름으로서 직무의 내용을 담고 있음)라는 이름만 아니라, 두 번째 이름인 “그리스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기록으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면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예언되어진 일들을 무시하게 되면, 소소하게 중요한 점들 그 이상의 더 중요한 무엇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이 구절 저 구절에서 흩어져 있는 평행법, 비교법, 혹은 비유를 통해서 모범이 될 만한 일들 몇 가지만 배울 뿐이다. 이런 겉만 번지르르한 얘기들은 간혹 연민의 감정을 일으켜서는 아주 미세한 복음서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문화이론가로서의 예수”에 관한 어떤 교리를 형성하는데 얼마큼 공헌하게 된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 황금, 유향, 몰약은, 그래서 간혹 그 분께서 부유하셨다는 것의 증명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래서 옛적 이스라엘에게 허락해 주신, 비상대책이요 또한 보복의 방편이었던 명령, 곧 “애급인들”의 물품을 취하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현금의 “교회”에게 주신 하나의 규칙(rule)으로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간혹 헤롯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와 같은 부자들의 돈으로 그리스도께서 섬김을 받았음을 들먹이기도 한다. 시몬의 집에서 비싼 향유로 자기 발을 한 여인이 씻는 것을 허락하신 것, 부유한 서기관의 집에 식사하러 들어가신 것,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 아래에서 군병들이 제비뽑기를 하였던 그 옷,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그 옷조차도 모두 예수의 삶에 대한 교훈적인 덕목들의 한 예들로 삼아, “예수와 운치”, “예수와 재물”, “예수와 문화”와 같이 설명되곤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예들을 들어서 무엇 하랴!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 지를 알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황금과 유향, 그리고 몰약은 탄생사건 이후에 복음서에서 다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애급으로 피난 가셨을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나사렛의 랍비는 당신께서 받아들이신 돈으로 축적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가르치시는 데 사용하셨다. 값비싼 향유가 소비되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재물이나 재물의 사용법에 관해서 어떤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시몬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거나 제자들에게 이제 임박하게 된 당신의 죽으심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고 한다면, 이 향유는 장례예식의 한 요소를 공급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자료들”(data) 이상의 것을 알 지 못한다면 이런 것들만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자료들은 단지 어떤 문화적 이미지를 제공해 주는가?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8:20). 이것들은 진정으로 문화-기술적 자료란 말인가? : “누구든 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태복음10:14)[인용된 성구들은 각각의 질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답을 암시한다: 역자주]. 

 

  그리고 만일 질문하는 것을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단지 주장하는 바만 듣고 싶다면, 자, 이젠 답을 하겠다. 그 분께서는 번성하고 있는 고기 잡는 일로부터 동업자들, 곧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내셨다. 그 분께서는 어떤 위장된 문화유형을 제공해 주신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고기잡는 일을 그만 두게 하시고 갈릴리로부터 나사렛 사람인 당신을 따르게 하셨다. 그들 중의 한 명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엄청난 사건이 심사되고 있는 재판정에서 머뭇거리면서 거친 사투리를 뱉아내기도 하였다. 간혹이긴 하지만, 그 분은 문둥이를 고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환자요양원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 분께서는 눈먼 자들을, 다시, 간혹, 치료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눈먼 채로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하셨다. 여하튼, 맹인들을 돕기 위해서 어떤 조직을 세우셨던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기적을 베푸시기 위해서 진흙을 사용하셨다.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무리들을 떠나셔서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나귀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아랫사람들을 조심스럽게 대하셔서 언젠가 당신의 제자들 중 하나가 말고(Malchus)라는 한 하인(slave=노예)의 귀를 잘랐을 때 그 사람을 당장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노예해방협회를 조직하셨는가 하고 복음서를 찾아본다면 헛일일 것이다. 그 분은 귀신들린 자들의 눈을 깊이 주시하시면서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셨다; 하지만 결코 치료소를 세우지 않았고, 직접적인 의미에서 그런 치료를 위한 준비작업을 하셨던 것도 아니다. 그 분에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훗날 책들을 썼는데, 그 책은 어떤 기교적인 스타일이 전혀 없었고 그 당시 사람들이 쓰던 일상용어들을 사용하였다. 다시 질문해 보겠다: 이런 종류의 자세한 사항들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지금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들을 정의하고 답변을 제공하려고 함으로 어떤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방식으로 그 해결책이 나올 수나 있는 것일까?    

 

 

 

10. 

 

 

 

아마도 어떤 사람은, 위에서 소소한 사항들에 대한 호기심을 긁어 모은 것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지금 정당한, 그리고 진지한, 그런 견해를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목들 대신에 그렇다면 대략적인 개요로 예수의 생애를 살피는 것이 선호되어야 하는가? 

 

  그래, 그렇게야 할 수 있지.

 

  하지만, 결과는 매 한 가지일 것, 그렇게 한대도.

 

  그래 몇 가지만 말해 보지.

 

  그 나사렛의 랍비가 이곳 지상에 계셨을 때, 유대교 – 그 중에 한 가지만 말하자면 – 는 조형미술(the plastic arts)에 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역자주: 갑자기 시어체와 산문체를 섞어 놓은 이런 스타일이 엉뚱하게 여겨지는데, 위의 싯귀절은 출처가 불명하지만 그 당시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졌던 싯귀절이였을 가능성이 큼. 스킬더의 냉소적인 답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음). 흔히 관찰되고 있는 이런 현상의 배경이 그 분께서 보시기로는 전적으로 바람직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께서 선견자가 되시고 선지자시라는 것이 분명하다. 선견자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 지를 알고 선지자는 다시금 그 사람들 마음 속에 있다고 본 바를 성경 속에서 주어진 명령들과 관련시켜서 본다. 그러므로 그 분의 명민하신 눈길과 선지자적인 통찰력으로, 그런 현상이 그 분에게 분명하게 보이셨을 것이다. 우리들이 보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보셨을 것이다. 곧, 이러한 조형예술의 결핍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만국에 허락하신 십계명의 두 번째 명령을 그 당시 유대주의가 잘못 해석한 것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느끼셨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장로의 유전으로 바꿔버리셨다고 하신 그 꾸중들을 단지 몇 개의 윤리적 조항들에만 제한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조항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교양잡지를 읽는 일반적인 독자들이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질의응답코너를 통해서 제기하는 질문들과도 같다: 피있는 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선짓국을 먹어도 되는가, 주일날 자전거를 타도 되는가, 동성동본끼리 결혼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 말이다. 조형예술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을 그 당시의 모든 문명화된 국가들과 구별되도록 해 주었던 그 결핍은 그 참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율법의 해석자(예수님)에게는, 그것이 제 2계명을 잘못되게 해석한 결과로 보이는 한, 하나의 “간극”(gap)으로 보였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역자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간극”으로 보지도 않으셨고 그런 문제로 마음을 상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저자가 강조하고 있음). 그리스도께서 “종말의 때”에 순례자의 길을 행할 당신의 군병들에게 주셨던 구체적인 명령들 속에 과연 조형예술이 포함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미리 선입견을 갖고 대답하지 않으면서, 이런 추측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형예술과 관련해서 그 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명령(a mandate)을 무조건적으로 주시길 원하셨던 것은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그 분께서는 일종의 부정적이며 금욕적인 윤리를 제공해 주실 수는 결코 없으실 것이다. 그런 윤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또한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노라고 한다면 말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금욕적인 윤리를 주시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것은, 성막과 성전이 조형예술에 능란했던 사람들, 그것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임명된 사람들[카이퍼(Abraham Kuyper)박사의 일반은총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브살렐(Bezaleel)과 아홀리압(Aholiab)을 생각해 보라]의 봉사를 활용해서 세워졌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말하자면, “예술론”에 관해서 어떤 직접적인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예술론”이 있다면, 위에서 우리가 질문을 던진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답변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여하한 적절한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 예수를 귀하신 선지자이고 스승이시며 또한 예술가로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존전에서 죄없이 사셨던 분의 이런 문제들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는 더욱 “실망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예수”의 입에서 다소간 좀 더 발전된 문화윤리나 미학이론들을 듣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 분의” 가르침에는 그런 문화윤리나 미학의 (발전된) 서론조차 없다. 그 분은 당신 “자신”의 어떤 관념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그 분은 강사가 아니었고 선지자셨다. “성경에 이르기를” 하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하셨던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 분께선 당신의 이름이 붙은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가르치시려고 강단에 서신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반열에 당신을 두셨던 것이다. 물론 그들 선지자들보다 높으신 분이고 그들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시지만, 그들 선지자들과 자신을 분리시키시지 않으셨다. 이건 정말로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 “예수”는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의 규칙에 관한 어떤 체계적인 강연도 하지 않으신다는 바로 그것을 당신의 명예로 삼으신 것이다.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 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려 오셨다. “완성시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사용해서)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무언인가를 첨가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우리는 완전히 발전된 유신론적 문화이론이란게 없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예수”가 어쩌면 문화이론에 관한 어떤 변증학을 제공해 준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문체에 관한 원리들이라도? 전체이론은 아니라도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그런 것에 관한 조그만 경구 하나라도 제공해 주셨던 것은 아닐까?  

 

  그 분께서 지상에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 이런 이론적인 체계를 어떻게든 제공하셨을 것이라고 하는 관념을 우리는 가지기가 아주 쉽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그 당시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행하였던 헬레니즘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예를 들어서, 음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리스인들이 제의활동을 문화에 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도 그것을 “거룩한” 제의활동으로 유지해 왔던 꼭 그것처럼, 유대인의 음악도 성전제의활동에 그 사용을 제한해 왔다. 하지만, 성전제의활동 바깥에서는 “자유로운” 헬라적 음악이 세속적인 문화활동에 있어서 그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관습에 대항했었다. 건축을 보면 문화적 변이의 여러 단계의 영향을, 특별히 그 중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점차적으로 이스라엘 특유의 특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적인 경기도, 정부의 조직도, 군대조직도, 어느 정도 그 의상의 패션도, 모두 다소간에 외국의 모델을 좇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 사람 예수의 마음에 상처를 깊히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검에 의해서 한없이 날카로와진 그 마음 말이다. 스타일의 결핍과 특별히 스타일의 상실은 그 분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이시면서도 제 2위의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흠없이 초유의 방식으로 결합되신 신인[神人, 저자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 되시는 이 결합을 ‘구성’(composition)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쉬운 이해를 위해서 ‘神人’이라고 번역했다: 역자주]이 되시는 그 분에게 말이다. 언제나 그 분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밤낮으로 성경을 애독하셨을 그 분에게, 자기가 누구신 지를 분명히 아셨던 선지자되신 그 분에게, 그 평균화, 그 국제화, 당신의 백성이 그 거짓된 보편화를 추구해 가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과정은 계속 근심거리를 제공해주는 이유가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 과정이란 결국 ‘이방’과 더불어서 간음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인에게 포로가 되어서 그들 중에 흩어졌던 것이다. 이런 분산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불리어 지지 않았던가? 그것은 “예수”의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있었던 외국의 권세의 지배를 보여주는 잔유물, 흔적 혹은 남은 것들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분산당하게 된 것에서 그 분은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를 보았다. 단지 이차적으로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의 사명을 성취해 가기 위한 준비의 과정을 보았던 것이다. 다른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이 의존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것은 그 분에게는 일종의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안에서 죄, 상실, 연약함, 그리고 세속적인 모습들을 보았던 것이다. 죄에 대한 가장 엄격한 심판이 바로 죄가 아니던가? 이것이 바로 이미 스바냐선지자가 보았던 상황 아닌가? 이 선지자도 예를 들자면 외국의 관습이 이스라엘내에 미치도록 유행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렸었다(“문턱을 뛰어 넘는 것”, 스바냐1:8,9, “문턱을 뛰어넘는 것”은 스바냐 당시에 유행했던 이방종교의 한 관습으로 보인다: 역자주). 요시아왕의 개혁 당시에 있었던 추파를 던지며 선동하고 있는 자들의 죄에 반대하는 전투에 참여했었다. “앗수르의 방식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 있는 “주의에 충실한” 칼빈주의자들이 파리의 유행 가운데서 악취를 분간해 내고 청교도들이 문화적인 “제 5열”(fifth column, 이중간첩행위를 지칭함: 역자주)에 의해서 오염될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도 반대했던 꼭 그것과 같이 말이다. 일단의 이국적인 훈련교관들에게 붙여졌던 이름은 그 이상 멋질 수가 없다. “아스돗방언을 절반쯤”은 하면서도 유다말을 못하는 젊은 세대를 향하여 어떤 선지자는 분노를 터뜨렸다(느헤미야13:24). 어떤 선지자는 야훼의 성전에서 어슬렁거리는 “가나안족속”(돈이라고 하면 아무 짓이라도 하는 이런 장사치들!)이 더 이상 없을 때에 대해서 예언하기도 하였다. 블레셋 족속들의 영향을 남쪽에서 개혁자들이 방어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시리아의 영향을 또 다른 개혁자들이 제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사속이나 문화적 교류를 위해서 이방종교를 수입하는 것, 최소한 그 “형태”만이라도 (그것으로 그 내용물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수입하는 것은 제 삼자가 보기로는 “              ”(going awhoring)이다.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가장 우선적으로는 “교회”이고 그 다음에야 “국가”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우선 교회였기 때문에 국가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라! 수 세기가 흘러간 뒤 이제 “예수”가 등장하셨다. 하지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서셔서 당신 자신이 바로 스바냐와 모든 개혁자들, 성전청결자들, 그리고 다른 모든 선지자들의 선구자이시고 또한 후계자되심을 인식하시면서도 그 분은 당신의 “동시대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유행하는 사조들”이나 아니면 그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이고 세련된 이론체계를 전혀 제공해주시지 않으시고 계신다. 문화적 스타일이 형태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어떤 강의를 하지 않으신다. 단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손에는 당신의 고기잡이꾼들을 붙드시고는 설교하시고, 지도하시고, 기도하고 계신다. 결혼 문제에 있어서조차도 당신 앞에 제시된 두 가지 이론들[샴마이(Shammai)의 이론과 힐렐(Hillel)의 이론, 마태복음19장] 중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하기를 거절하신다. 그 분께선 전혀 결혼하지 않으셨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셨던가? 금욕주의자셨던가? 분명히 재물로 여겨질 수 있는 인생의 부를 포기해야 된다는 것일까? 장애인용 건물(a dôme des invalids)을 부지런히 세워야 한다는 것일까? 제발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다오. 오히려, 이런 대답도 없는 질문을 듣고는 이제 예수의 행하신 바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적인 계시의 빛이 온전히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리저리 궁지에 빠져 있는 셈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11.  그러므로 우리들의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의 문제이다.  

 

  이 두 이름이 결합되어서 문화에 대한 해답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예수는 그 분의 직무의 본질을 나타낸다(곧 구원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그 분의 직무의 합당함(legitimacy)과 (결정적으로 그 분께선 하나님께 “임명” 받으셨다) 또한 그 직무의 확실히 보장됨(guarantee, 그 분께선 “성령으로” 부어지심을 받으셨다. 결과적으로 단지 어떤 물질적인 기름이 부어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분께선 완성하시고자 하시는 측면에서 무언가를 이루시기 위해 가지시길 결정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얻으시는 분이시다)을 나타낸다. 이 두 이름은 바로 이 한 인격이시며 또한 분명히 구별되는 두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에게서 단 한 번 독점적으로 결합되어져서, 아무런 스타일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스타일을 창조하고, 단일한 음색들로부터 하나의 화음을 창조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성경의 빛을 통해서 이 두 이름이 그 분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단서를 통해서 “예수의 생애”(the life of Jesus)라는 음악, 곧 “잘 연주되는 피아노소곡”(Ein wohltemperiertes Klavier)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 “소곡”(ein)이라기 보다는 바로 “유일한”(the) 피아노곡이라고 해야겠다. 그래서 이젠 이 하나님의 사람의 직무에 우리가 주의해 보아야겠다. 그 분이 지니고 계시는 그 직무의 성취로부터, 자고 있는 중에나 깨어 있는 중에, 활동하는 중에나 아니면 앉아 있는 중에, 혹은 이야기하는 중에나 침묵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하나님의 도모하시는 바를 설교하는 것이 이제 우리의 일이 된다.

 

  이것은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첫 번째 용어에 적용된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이 그리스도라는 직무의 성취로부터 또한 두 번째 용어, 곧 문화생활, 문화적 과제, 문화의 개념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우리는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12.  위에서 우리는, 성경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였다. 당신께서 누구신 지를 증명하시기 위해서 그 분께서는 이 성경에서 인용하시곤 하셨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바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예수들”(Jesuses, Joshuas)이 제시되었다. 이런 “예수들”은 아직도 사적 집단(gettos)이나 시장바닥에 존재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수 많은 “그리스도들”(christs)들이 제시되었고 다행스럽게 이런 "그리스도들"은 지금도 은밀한 종교집단(catacombs)과 시내 중심가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생각할 때, 그 분 만이 홀로 그리고 진실로 예수로서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 분 안에서 그 신적인 임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졌고 또한 오직 그분만이 그 과제를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분의 이름만으로도 아니요, 그분의 재림(parousia)과 그분의 현현(appearance)에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성경으로부터 듣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 분의 직무(office)는 성경의 그리스도와 그 백성을 결코 분리시키는 것이 아닐 지라도, 그리고 그렇게 상호간 분리되어 축출시키지 않는 한, 그 분의 독특하고 독점적이며 결정적인, 그리고 완성을 위하여 부름 받으심이,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본성들로 구성되어 있는) 그 분의 독특한 위격(Person)과 결합되어서, 그 분을 두 번째 아담으로 그리고 그 분이 하시는 일이 다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독특한 중재자가 되게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분의 사역은, 그 분의 직무(office)에 속한 일이었고 또한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찾으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하신 일은, 바로 그 분(His)의 일이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 일로 그 분을 정의하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하신 그 분의 독특한 봉사 안에서 그 분을 정의하게 된다. 그 분을 정당하게 높여드리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수천의 군사들이 있지만, 그 중에 총대장은 단지 한 명일 뿐이다. 누구든지 이 총대장을 흉내내면서 자기가 총대장인 양 한다면, 군대 전체를 얼어붙게 하는 일일 것이다. 총대장은 군사들 한 명 한 명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총대장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규제를 받지 않는 자”(non-regulation)이다. 그래도 그 나라의 헌법이 그의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법(Law)과 제복(uniform)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총대장을 법으로, 군사들을 제복으로 비유하면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복은 통일된 복장으로 서로간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군사로 비유하고, 법은 그 모든 제복들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총대장으로 비유한 것 같다: 역자주).

 

 

  지금까지 한 말의 논지를 붙잡기 바란다: 결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분에게만 주어졌던 규례였다. 그 분의 직무는 고통 받으시고 죽으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들의 전환점마다 그 분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탄을 대항하여 싸운 싸움으로 구성되었다. 곧 두 번째 아담이 되시는 것이 바로 그 분의 직무였었다. 그럼으로 인해서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육체의 한 혈통으로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영(pneuma)으로서의 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공동체 말이다. 이 직무를 수행하시면서 그 분은 하나의 큰 백성을 통치하시게 된다. 끈끈한 혈연이나 공통의 투쟁역사와 승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분(His)의 찢어진 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유일한 보혈의 희생을 법적 기초로 해서 세워진 나라가 바로 이 공동체이다.  

 

  이 직무를 통해서 그 분께선 사람들 가운데 머무셨다. 결단코 당신 스스로 분리되시고자 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경험”의 독특성(idion)으로 인해서 그 분께선 홀로 무척 외로우셨다. “경험”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신 그(the)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것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하나의(a) 아주 독특한 말씀, 그 분의 독특한 상태에 관련된 한(a) 말씀이 그 분에 대해서 선포되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절대고독을 견뎌 내심으로 그 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또한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찬양 받으심직하게 높였다(자신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성취되어가는 것과 관련해서 저자는 그런 와중의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을 고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역자주). 이 직무가 그 분을 집어삼키셨다. 심지어는 육체로적으로 그러했다. 전적으로 그 분을 복종케 하였고, 너무나 완벽하게 그 분의 영적인 삶과 육체적인 생활을 지배하여서 그 분의 모든 육신과 진액이 그 엄청난 하나의 전투를 행하는 일에 쏟아 부어졌던 것이다. 그 분께선 의로우심과 강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heou(헬라어), coram Deo(라틴어)] 그 전투를 치루셨던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서 예수의 결혼하지 않은 신분상태에 대해서 모든 것이 원리적으로 선포되고 있음을 누가 즉각적으로 느낄 수 없겠는가? 만약 그 분께서 혈육의 법을 따라서 “당신에게 주어진 자녀들”을 입양, 혹은 공동입양[성부의 입양과 성자의 입양을 ‘공동입양’(co-adop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자주]하지도 않으셨고, 또한 야훼의 종으로서 당신에게 주어진 멍에를 친히 담당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분께서는, 깨어진 결혼관계를 “치료”하실 수 조차 없으셨을 것임을 누가 느낄 수 없는가?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히브리서2:14)셨다. “우리 모두의 형제”로 불리어지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분의 직무이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의 (육체)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면 당연히 부끄럽게 여기셨을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의 직무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의 결혼하지 않은 상태가 우리들이 따라야 할 본이 아니다. 금욕의 은사를 받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결혼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경건을 가장할 수 있도록 주어진 “고도의” 이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분의 직무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이 직무가 무엇인 지를 알게 된 사람은, 위에서 수수께끼처럼 던져졌던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 지를 이제는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그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ion, 직무:역자주)의 실현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했다. 그 값비싼 향유, 제비뽑기 당했던 옷, 마지막 밤의 만찬 등, 이 모든 것들은 그 분의 직무를 완성하는데 사용되어야 했던 것이다. 분명히 그 분은 머리 두실 곳도 없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 분께서 문화를 모멸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지붕이 있는 집(머리 두실 곳을 의미: 역자주)에서 머무시는 것을 은근히 반대하고 계시는 것도 아니다. 지붕이 있는 집을 선지자들이 저주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선지자들은 그 집 안에 머무는 자들이 행하는 죄를 규탄하였고, 또한 그들이 그렇게 지붕 아래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집을 무시하는 것을 책망하였던 것이다. 정말, 그 분께서 우리들에게 참된 문화를 제공해 주시기 위해서(to give) 그 분께서는 그 쟁투 가운데서 슬픔을 겪으셔야 했던 것이다. 이 전투 중에 그 분의 하나님께서는 그 분에게 결코 “휴가”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는 여러 종류의 인생들을 당신의 어부들로 택하셨다. 사회학적으로 말해서 가난한 자들과 문화계 내에서 허세부리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하셨던 것이 아니라(사실, 그들 갈릴리인들은 그렇게 “가난했던 자들”이 아니다), 갈릴리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또한 일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게다가 그 분께서는 어부들만, 그리고 갈릴리인들만 제자들로 뽑으셨던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들 중에서 그들을 선택하셨던가?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제자들 중의 얼마는 자기들이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던 것을 제때에 기억해 낸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루살렘 귀부인들의 번쩍이는 의상들에 질투심을 갖고 흘려보는 그런 악동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난하였던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금광”(gold-mine)같은 사업들을 포기하였던 결심이 굳은 영웅들이었던 것이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서 뜨거워지게 하였던 셈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도로서 뽑았던 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차지하게 될 의자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그런 기초 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게 하는 바로 그 기초 위에 만들어지게 된다면, 그들이 포기하였던 그 황금들은 바로 그런 의자를 장식하게 될 황금이 될 것이라고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기 위해서였었다. 이렇게 제자들을 뽑으시는 일을 통해서 그 분께서는 앞으로 전개될 계시의 때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곧, 가장 아름다운 그 도시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계시록19:8, 저자는 “the righteousness of the saints”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외적인 행실 그 자체보다는 그 행실을 가능하게 하는, 성도에게 주어진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주어진 ‘의로움’과 그 의로움으로 인한 ‘행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한다: 역자주)이라는 그 간결하면서도 결정적인 말씀으로 모든 문화철학자들을 무시해 버리시게 될 그 때 말이다. 만일 무엇보다도 그 직무의 공의와 개념들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일치하도록 다시 인정된다면 나환자요양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안락사를 반대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모세의 율법도 이미 사회사업이라는 것에 대해서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나환자들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모세는 이것을 언약의 영역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 중심의(theocratic) 봉사로 보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는 나환자요양소를 세우지 않고 오히려 반환시키시고 계시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언약적 영역이 지리상으로 살펴 보더라도 더 이상 모세 당시와는 동일하지 않고, 현재와 같이 지역 교회(local Churches)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던 때라 하더라도 그렇게 반환시키시는 것이다. 그 분은 왕관을 갖기 원하신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가시관으로 그 왕관을 얻을 실 때에만 그렇다. 그 분은 어부들을 부르셔서 설교자들로 변모시키시고, 그 설교자들이, 예를 들자면,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운동을 조직하는 자들이 되게 하신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을 통해서, 가장 심각하고 고통스럽고 야만스러운 노예상태는 바로 죄의 노예라는 것과 이런 근본적인 노예상태의 근본이 죽음에 까지 자신을 내어놓으신 그 분의 겸비와 그 분 자신께서 친히 노예(종)가 되심(빌립소서2장)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세상 가운데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분께서는 선견자의 확실성과 실제성을 가지고서 그 분의 직무를 이루셔야 할 그 때와 시각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 분께서는, 예를 들자면, 병든 자를 모두 다 치료 하시지 않으신 채로 내버려 두시곤 하신다. 어떤 사람을 치료하셨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냥 내 버려 두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의 사도들이 은사의 능력을 발휘해서 그들이 치료되도록 내 버려 두신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분께서 보여주시길 원하셨던 것은, 사도들이 오순절 이후 병든 자들을 치료할 때마다 당신께서 죽으신 후 다시 부활하셔서 친히 당신의 성령으로 친히 그들 가운데에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자기에게 그리스도가 되시지 않는다면, 그 분께서 병든 자들을 여전히 내버려 두신 것(예를 들자면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에 있었던 걸인)을 이런 빛으로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선견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예언이 성취되는 그 순간에도 그 장소에 함께 계시는 그 그리스도를 말이다. 

 

  그래, 정말 그렇다. 그 분께서는 성경의 그리스도로 이해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위의 10절에서 다루었던 문제들에 대하여 그 분께서 가지고 계시는 적극적인 태도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 분께서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인 면에서, 건축, 조형예술, 음악, 의상, 어떤 국가의 문화발전을 평준화시키는 경향들 사이의 갈등들, 그리고 그 특별한 성격을 유지시키려고 하는 욕구에 대해서 말씀하실 것이다. 하지만, 오직 그 분께서 그리스도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피조되지 않으시고 영원한 로고스 되신 분으로서, 심지어는 “예수”가 태어나시기도 전에, 모든 열방들의 문화를 통치해 오셨던 분, 바로 오순절 날에, 그 승천과 오순절 이후 재림 때까지의 “천년왕국” 동안의 활동을 시작하신 바로 그 그리스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하신 이 영원하신 말씀의 이 최종적 시기에, 그 분께서는 그리스도로서의 당신의 일들을 온전하게 완성시키실 것이다 – 모든 국면에서, 물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화들”에 관한 질문과 갈등에 관한 것들도 완성시키실 것이다. 더욱이 이 세상 가운데에 기독 문화(Christian culture)를 설립하심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기독교적 문화’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저자가 시도했던 소위 ‘기독교문화’에 대한 비평을 감안해서이다: 역자주).   

 

 

13.   게다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의 두 번째 용어인 “문화”와 “문화적 삶”이란 개념의 발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와 온전하게 조화가 되는, 직무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살펴보는 것이 직접적인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직무에 대한 개념, 특별히 존 칼빈(John Calvin)이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그런 직무개념을 고려할 때에야 피곤할 정도의 신경전에 끝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신경전(the game of the spirits)에서 어떤 이는 “문화”를 강조하면서 “종교”를 무시하고, 또 다른 이는 그 반대로 “종교”를 우선시하면서 “문화”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이 여기 바로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둘째” 아담에 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사물의 “시초” 곧 “첫 번째 아담”이 있었던 시점에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 한다. 그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교제 가운에서 계시를 주셨고, 또한 그 언약의 첫 번째 원리를 알게 하셨던 것이다. 첫 아담은 – 최소한 진화론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 순진무구한 어린애가 아니었었다. 벨직신앙고백서의 용어를 빌리자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서 자기(his)의 직무(officium), 곧 하나님의 역사들을 통해서 창조된 그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그 분(His)의 직무의 한 부분을 부여 받았다. 천사들에게도 그러한 것처럼, 그 아담에게 주어진 그 직무(officium)가 그에게 직분(office)이 되었다. 아담은 직무담당자(office-bearer)가 되기 위하여서 창조되었다. 우주라는 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임명된 그 엔진의 운전자로서, 첫 번째 시동자가 아니라 두 번째 운전자로서의 책임을 지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차대한 직무가 아담(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인해서 다른 존재들과의 그의 모든 관계들 안에서 그가 취하게 될 모든 행동들이 결정되었다. 그것으로 인해서 심지어는 그의 특성(qualities)도 결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되 어떤 모습을 가지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아담이 바로 목적을 가진 직무담당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순진무구한” 원시인이란 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동료사역자”라는 칭호가 주어진 것이다[성경에서 이 표현에 대한 헬라원어를 제대로 분석하게 되면 내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뜻과 같은 지에 대한 질문을 여기서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 구절만 아니라 여러 구절들을 취급하여야 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동료사역자”(God’s fellow-worker)라는 표현은 신인협동설이 제기된 이후로 조직신학에서 자주 논의되어온 주제이다: 저자주. 저자는 구원문제에 있어서 신인협동설을 반대하고 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하나님의 동료사역자”라는 개념은 “구원문제에서의” 신인협동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역자주]. 인간에게는 이런 엄청난 우주적 맥락에서 그 분 자신의 일의 한 부분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의 타락하기 전의 원상태에서는 이런 일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예배”(liturgy)라고 불리어 질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그리고 그 왕국을 향한 봉사였던 것이다. 어떤 왕국이라구?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그런 왕국을 향해서 말이다; 곧 하늘왕국을 말한다. 그 소속된 신민(臣民)들이 우주의 두 영역으로 나눠져 있는 왕국 말이다. 한 영역은 “위”의 영역이고, 다른 것은 “아래”의 영역이다. 이런 왕국 가운데서 창조되어서 그 왕국을 향하여 성취할 직무가 주어진 자라는 것이 첫 번째 아담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이런 직무개념의 틀 안에 해당되고 또한 그렇게 해당되기를 당신이 인간으로서 원할 때에라야 그 두 번째 아담이라는 이름을 정당하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한 가운데서 행하시는 직무담당자로서 그 직무가 주어지던 그 시작(beginning)의 때와 그 때 주어졌던 원리들(principles)로 복귀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두 번째 아담으로서이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직무를 성취해 가심으로써 – 그것은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직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 그 분께서는 세상과 생명의 질서에 있어서의 기초(ABC)로 되돌아가는 위대한 개혁의 과제를 담당하시는 것이다. 그 기초(ABC)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 우리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나타나신 뜻을 성취해 가는 것, 그리고 우리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그들과 유기적인 관계와 소통을 이루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문화의 문제, 그리고 또한 그 정의가 원리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곧 이 문제로 되돌아 오겠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의 출발점을 미리 살펴본 후 다시 그 사이를 꿰고 있는 연결고리를 정리해 본다면, 그것은 세계역사 한가운데서 당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역사의 한가운데”(midst of history)[틸리히(Tillich) 등이 주장하는] 라는 개념이 성경과 일치해서 발전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서이다. 이것은 소위 몰역사적인 “시작”이나 “종말”이라는 “경계개념”(border concept)과 같은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범주”(category)가 아니고, 실제하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실제로 측정이 되고 나눠지는 시간의 결과로서의 역사이다. 당연히 역사의 시작은 존재하였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이 창조되고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가 “그 몸으로 행한”(고후5:10) 것들(바로 이곳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서 행하게 되는)을 따라서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한 가운데”란, 창조 이후 곧장 발생하였던 타락과 분리에 의해서 분명하게 결정되어버리고 말았던 그 저주로부터 이런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기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14.   이렇게 원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어진 목적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사역-공동체(work-community)(하나님과 “공동사역자”로 일하게 된 세상이나 교회를 의미함: 역자주)를 당신에게로 되돌려드리는 것이 가능해 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신다. 

 

  첫번째로, 그 분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하나님의 노를 진정시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하나님 그 분과 완벽하게 연합하셔서(in perfect alliance) 이루신다. 화해(“katallagē”)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에로 화해시키셨다”(고후5:19). “그리스도 안에서” 홀로 하나님께서만 이 카탈레게의 유일하신 저자(the only Author)가 되신다. 왜냐하면 모든 죄에 대항하여 그 영원토록 타오르는 하나님의 분노하심은 동시에 또한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그 분의 자비하심과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시간 속에서(소위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정당하게 요구하시는 공의가 동시에 만족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심판하시는 공의는 죄책이 있는 사람의 완전한 저주를 요구한다; 정당하게 요구하시는 공의는 여전히 “몸으로”(곧 살아있는 중에) 완전한 복종의 실행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양면적인 공의와 관련해서 보증인이 되시고 그 보증인으로서의 서약을 당연히 완수하신다. 이런 방식으로 그 분은 역사 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서 동시에 알려지고 또한 요구되고 있는 그 법정적인 평결을 가져오신다; 그 분의 피를 담보물로 해서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라고 불리워지는 재창조의 권리(the right of the renewal)를 확보하신 것이다.  이젠 그들이 그 분의 구속받은 기독회중(His redeemed Christian congregation)이라고 불리어지는데 곧 그 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 분과 더불어서 받아 누리게 될 영생의 상속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그 분을 위해서 그리고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이 영생은 영멸과 더불어서 이 “문화세상”에서 시작되었고 또한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하실 일이 있으시다. 모든 생명과 죽음이 이제 그 분에게 넘겨져서 그 분에 의해서 집행 되어진다. “역사의 한 가운데서” 주어진 바로 그 분 자신이라는 법정적인 성격을 가진 담보물에 의해서 그 생명과 죽음이 영원한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법정적인 평결(“이렇게 정하여 진 자들”, 벧전2:8)을 따라서 이 역사 속에 살아 가는 중에 그리스도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저주의 선고로서 영멸을 그 분께서는 집행하신다. 결과적으로 그의 성령(“역사의 한 가운데”를 “종말”로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시는)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신다. 한 편으로는, 그 분께서는, 문화세상 속에서, 지상의 포도들을 자라게 하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서 그것들이 으깨어지도록 하게 하실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하신 성령을 통하여서 그리스도 당신께서 당신의 평화의 통치기간인 “천년”을 “완성”시키실 그 사람들 “속”(in)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과 봉사를 위하여 당신 자신께서 친히 사신 하나님의 사역공동체(the work and office community)를 무장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구성원들이 그 완전한 영광의 도시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법정적(judicial)인 성격의 쟁투이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은 또한 권능을 차지하기 위한 쟁투(a struggle for power)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탄 앞에서 치루셨던 법정적 쟁투는 세계 역사의 한 가운데서 끝장 났으며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다시 확고한 기초 위에 두셨다.  

 

 그리고 그 분께서 원리상으로 이미 완전히 영원토록 승리해 버리신 그 권력을 위한 전투(the dynamic battle)는 하나님의 새롭게 사신 사역공동체를 위해서, “옛세상”과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하면서 하지만, 전적으로 새로운, 새 인류(new humanity)를, 성령의 부어지심의 위대한 능력들(powers), 성화의 능력들, 교회정복의 능력들, 세계를 성숙시킬 능력들, 그리고 문화적 행동의 능력들을 가능케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 두 가지 직분을 성취시킨 것은, 여기 지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그 분의 생애가 직무수행자이셨던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것은 현금 논의되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15.  그리스도께서 소명을 받으셨고 또한 완벽하게 구비되셔서 이 직무를 완수하시는데 있어서, 이 부패한 세상은 다시 한 번 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곧 전부가 되시는 분(the whole), 아름다우신 분(the beautiful), 근본이 되시는 분(the original), 혹 원한다면, “이상적”(ideal)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의 출현을 보게 된다. 그 분께서 겸비의 상태에 계실 때에는 이 전부되심과 순전하심은 단지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 율법에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시의적절하신 말씀에 언제나 반응하는 것은 바로 순전하고 죄없으신 인성에 어울리는 바이다. 하지만, 그 인성은 그때 아직 그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 보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으로도 영광을 받으시고 그 분의 인성에 불멸성을 갖추게 되시게 되었다. 그 분을 또한 공적으로도 영화롭게 하실 그 보상이 영화의 상태에 있는 그 분에게 주어졌다: 그 분께서는 이제 예복을 갖추신 왕(a King-in-His-beauties)이 되신 것이다.시편 110:3는 언제나 그 분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많은 문화철학자들이 이 구절들을 이해하게 되면 즉시 이러한 수려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 전부가 되시는 분, 그가 선물로서 주어지는가? 물론, 그렇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전부가 되신 분으로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신다: 그것을 위해서 그 분은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 가운데” 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이 흠 없으신 분께서 누구에게도 당신의 등을 돌리지 않으신다. 단 한 순간이라 할 지라도. 그리고 이것만 아니라, 둘째, 그 분에게 주어진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원리상 다시 전부가 되는 한 인간, 곧 창조적인 중생의 열매로서의 한 인간을 창조하신다.

 

 

  이것을 믿게 되면, 그 결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Ad a: 문화적 성취란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들 중의 하나이고, 또한 어느 누구도 그 행동하는 바가 문화적 의미를 갖지 않은 채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유일하게 죄 없으신 분, 그리스도 그 분께서만, 전적으로 순전하신 방식으로 문화적 생활을 성취하셨고 또한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것은, 그 분이야말로 타락사건 이후의 인생들 중에서 오직 유일하신 분이심을 말한다. 죄 없으신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보고 또한 가르치고 있는, 교회의 교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사상의 풍성함과 그 문화적 사상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죄없으신 분으로서 그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당신께서 둘째 아담이 되심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언제나 전적으로 성령께서 당신을 몰아가시는 모든 상황 속으로 들어가시는 방식으로 반응하신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첫째 아담에게 주어졌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그런 세계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문화으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완전하고 순전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또한 원래에 주어졌던 규칙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보다 더욱 더 직접적으로 문화적인 행위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분께서는 단순히 “하나의”(a) 인간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아들(the Son of man)이시다. 이것은, 그 분께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지금 심연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이 세상을 위해서 한 점 밝은 빛이나 광선이 되는 것 이상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의의 태양(Sun)이 되시는 그 분께서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태양”은 단지 빛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말씀-중보자-보증자로서 그 분은 문화의 토대, 견고한 기초, 최초의 근거, 성취자, 구속자, 그리고 쇄신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현 세상의 문화에 대해서 대립되는 하나의 문화적 지표(cultural sign)가 되시는 분이시다. 

 

  Ad b: 메시야로서 그 분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조차 그리고 물론 그 후에도, 곧 모든 세기에 걸쳐서, 당신의 구속하시는 능력(power)으로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얻으시게 될, 혹은 이미 얻으신 그 권리(right)로 인해서, 행동을 취하시기 때문에, “태초에” 계획하셨던 대로 이제는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들(men of God)로 삼으신다. “이 어그러지고 거스러진 세대” 한 가운에, 그 분께서는 이제 원리적으로 순전하게 된 한 인류의 유형들(the types of a humanity)을 두신다. 물론 그들은 완전하지가 않다; 하지만 원리적으로 이제 그들은 다시금 그곳에 놓여지게 되었다(are). 그들은 믿음 안에서 아담(둘째 아담: 역자주)이 자신을 쳐서 첫 번째 복음의 약속의 말씀에 복종시켰을 그 순간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출현하고 증가하며 “누구도 셀 수 없을 만큼 많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거룩함을 입게 된 수많은 무리들 말이다. 그들 무리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고,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세어지게 될 것이다.  

 

  당신 자신의 이 직무집행에 있어서, 그리고 당신과 함께 기름 부음받게 된 자들(“기독교인들”)을 형성하시는 이 일은, 곧 하나님을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세상을 정복하게 되는 신적인 행동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주의 것이로다”(시24:1). 이 정복은 재-정복이다: 소유물들이,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왔던 대로, 원래의 주인에게로 적절하게 되돌아가 그 소유권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처음과 그 마지막을 연결시키시고, 초기 역사와 마지막의 역사, 처음이 일들과 종말의 일들, 알파와 오메가, 역사의 초기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효과적인 입법의 말씀의 기본(ABC)과 역사의 마지막 때에 한 번 더 말씀하신 효과적인 복음의 말씀의 결과(XYZ)를 연결시키신다. 역사의 초기에 타락하기 전의 무흠한 아담에게 발하셨던 입법적인 선포는 언약(covenant)으로(in) 말씀하신, 그 언약을 기초해서 해서(on the basis), 말씀하신 것이다[covenant를 ‘言約’으로 번역하느냐 ‘約束’으로 번역하느냐 하는 것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지만, 일반적인 번역관습을 따라서 일단 ‘言約’으로 번역한다. 하지만, 역자 개인적으로는 ‘約束’이 더 옳다고 본다. promise라는 말이 오히려 ‘언약’ 쯤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본다.covenant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언’(言,words)이 아니고 ‘속’(束, binding)이다:역자주].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를, 약속과 의무로, 질서를 세우신 일the matter of ordering)이다. 이 언약이 그 규정들과 함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세상을 지배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첫 아담에 의해서 그 언약이 깨어지게 된 후에, 둘째 아담이 다시금 그 언약에 개입하여 그것을 회복하였고, 이제 오직 않은 종말이 그 이뤄진 언약과 함께 평화롭게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이다. 그렇지 않다면, 평화란 전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절정에 이르게 하신다: 세속적인 것 그리고 교회적인 것 모두를,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모두를, 천사들의 권능과 마귀들의 그 짐승 같은 세력을 모두. 그가 우리 앞에서 가셨고 또한 그때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의 때로 되돌아 가셨다. 그곳에서 그 분께서는, 율법의 돌판(모세의 돌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첫아담에게 주어진 삶의 규칙으로서의 법칙을 말함: 역자주)에 적혀져 있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첫아담: 역자주)에게 부과하셨던 행동규칙을 읽으셨다. 그 행동규칙은 다음과 같다: 피조세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창조된 모든 일군(labourer)은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창조의 아침에 그의 일군들 모두에게 분배해 주셨던 “달란트들”을 찾아보아야 하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곧 창조시에 부여되어져서 그 “종”(kind)을 따라서 발견되고 존경되어 져야 할 “가능성들”을 실현시킴으로써 그 모든 잠재력들을 개발해야만 한다. 주인이 종들에게 나눠주었던 모든 달란트들은 아침에 나눠졌던 자들에게서처럼 결국 저녁이 되면 모두에게서 거두어져야 했다. 우주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가능성들이 추적되고 발견되며 그 계시된 법칙들을 따라서 활용 되어야 하며, 창조시에 확립된 각 피조물들의 질서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고양시키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만약 인격적인 인간이 – 하나님께 창조된 또 다른 직무담당자로서의 인격적인 천사에 의한 섬김을 받고서 –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직무(‘munus’, office)를 성취하게 되면, 이제, 벨직 신앙고백서(제 12항)의 말을 빌려서 말해서, 다른 비인격적인 피조물, 그리고 또한 인간 자신 – 그리고 천사 – 이 자신의 직분(officium, office or service)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식으로 말해서, 만물의 신정적인 배열(Theocratic arrangement)이라고 할 수 있겠다[여기서 저자는 munus와 officium을 구분하는데, 영어로는 모두 office로 번역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벨직고백서 12조항은 “성부께서는 말씀 곧 그 아들을 통해서 무로부터 하늘, 땅,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는데,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모든 피조물 각각에게 그 존재함(being), 형태(shape), 모양(form), 그리고 여러 가지 직분들(several offices)을 주어서 그 창조주를 섬기도록(to serve) 하셨고, 또한 그것들을 당신의 영원한 섭리와 무한하신 능력으로 인류를 섬겨서(for the service of mankind) 결국 사람이 그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serve) 하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벨직신앙고백서는 비인격적인 피조물들이 인격적인 사람들을 섬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인 피조물들에게도 각각의 여러 가지 직분(several offices)을 주셨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에게 주어진 직무를 munus, 비인격적인 피조물에게 주어진 직분을 officium으로 구분하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역자주].   

 

  그리스도께서 발견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의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넣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당시 아름다운 동산에는 아름다운 문(美門: 예루살렘성전에 있었던 문을 연상케 함: 역자주)이라 불려지는 문이 없었었다. 그 동산은 아예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그리스께서 읽었던 것이 그 분을 사로잡고 지배했었다. 이것을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달란트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안에 인간의 의무의 기본(ABC)가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개혁된(reforming) 방식으로 그 기본(ABC)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직무를 따라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길을 가시기 바로 직전에 주신 마지막 교훈으로서 말이다. 그 분의 “천년왕국”이 진수하기 전에 말씀하셨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 기본이 그 분을 아주 강하게 사로잡고 있어서 그 잡히시기 전날 밤 교회를 위하여 하셨던 마지막 위대한 기도 속에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은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곧 아버지께서 그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그들을 지키시라는 것이었다. 자기공로에 안주하는 수도원, 세상을 향하여 전혀 열린 문이 없는 그런, 세상의 번뇌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에서가 아니고 말이다.     

 

      

 

16.  이 마지막 요점, 곧 세상 첫날에 주어졌던 그 기본(ABC)이 우리의 논점의 전환점이다. 바로 이 순간, 문이 돌쩌귀 위에 놓여져 있다. 중요한 순간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고쳐져야 한다면 바로 여기에서만 그렇게 고쳐질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만 우리들은 위에서 주어진, 문화에 대한 유일하게 잠정적인 개념을 여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문화란 성경의 첫 페이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용어이다: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며(Dress)…생육하고 번성하여(be fruitful and multiply) 땅에 충만하라(replenish)”(창2:15, 1:28). 여기에 나오는 성경의 첫 페이지들은 앞에서 언급했던 “기본”(the ABC)의 페이지들이다. 여기에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로 묘사되는 세가지 간단한 명령들(dress, be fruitful and multiply, replenish)을 포함하고 있다(여기서 스킬더는 “행위언약”을 선악과금령(창2:17)에 연결시키지 않고 그 이전에 주어졌던 문화적 사명과 연결시키고 있다. “행위언약”의 개념이 “생의 법칙으로서의 법”으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법과 뒤섞여서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킬 수 있다. 번역해 가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하겠다: 역자주). 이 과제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처녀 같은 세상에 딱 맞는 것이었다; 곧 그때에 세상은 창조의 계획을 따라서 발전되어져 가는 도상에 있었고 그 마지막 목적하는 바(teleiōsis)를 성취하기 위해서 완전한 상태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첫 페이지는 언약의 규례들로 충만해 있지만, 또한 직접적으로 문화적 관심으로도 충만하다. 창조주 당신께서 문화적인 것에 관심을 두셨던 것이다. “문화”(culture)라는 말은 결국 라틴동사 colere(경작하다)에서 온 말이다. Colere라는 말은 “경작하다”(to cultivate), “보살피다”(to care for)라는 뜻이다. 자기의 논밭을 경작하는 농부가 이 colere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논밭이 있다. 이것은 약속이다. 여기 또한 씨앗이 있다. 이것 또한 약속이다. 하지만, 보라 여기에 농부가 있다: 이것은 “약속이 있는 명령”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는 논밭, 그리고 씨앗과 더불어 우주적인 연합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또한 영원하신 성령의 “논밭”이며 또한 동시에 씨앗이기도 하다. 인간 그 자신이 그의 전체의 몸과 그의 “양심”, 그리고 그의 의식을 모두 포함해서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이다. 벨직신앙고백서(제 2항)에서 진술하기를 “가장 수려한 책” 속에 있는 수많은 피조물들을 언급할 때에 하나님의 피조물에 인간도 포함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여러 다른 피조물들 가운데(in)에만 아니라 그들 위에(over) 하나의 인격적인 피조물로 세우셨다. 이것은, 양심이 주어진 인간은, 창조의 책들 속에 나오는 하나의 등장요소(character)일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reader)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의 등장인물로서 그 책 속에 나오는 자기자신을 읽어야 하고 또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피조물들과 자신을 분리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나는 하나님과(and) 영혼(soul)을 알기 원한다(Deum Scire cupio, et animam)[여기서의 라틴어 animam과 영어의 soul을 자기자신의 정체감을 나타내는 단어로 스킬더가 보고 있다:역자주]. 이 잘 알려진 경구는, 하나님을 통해서 알려지는 바, 여기의 “영혼”(soul)에 관한 한, 그것, 혹은 말하자면, 양심, 의식적인 삶은 하나님의 책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며 또한 독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인적이며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일군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왕관을 쓴 부섭정(副攝政)으로서의 인간은 모든 씨앗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뿌려서 그 논밭으로부터 그 안에 있는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땅을 경작하는 것이다(It is agri-culture)[agriculture는 일반적으로 “농업”으로도 번역되지만, 여기서의 문맥을 고려해서 “땅을 경작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역자주]. 

 

  이 논밭의 주인으로서 이런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또한,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 비록 개별적인(personal) 존재로서 자기가 하나님 아래에서 이 논밭과 하나라는 것을 고백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자기계발이 즉각적으로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점에서이다. 이것은 “개별주의”(personalism)라고 불리워 질 수 없다. “개별적인 한 인간”(person)이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면 혹은 그것 자체로서 목적이 되게 되면(신적인 존재로 되는 것과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한 것), 곧 더 이상 하나님의 책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임을 원치 않는 독자로서만 주장하게 되면 그 순간에 우상, 곧 “자기계발”(person cultivation)의 우상의 제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 창조의 “책”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읽혀져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책으로부터 알려지게 되는 창조주시며 재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서 초월적시며 질적으로 무한한 정도로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어지는 분이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자기계발, 자기발전, 이 긍정적인(!) 측면, 곧, 우리 안에 있는 피조물적인 측면의 훈련은 선하고 또한 명령되어지고 있다. 인간적인 것과 피조물적인 것이 자기 안에서 그 직분(officium)을 발견하게 되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직무(munus)를 보고 그것을 완수하도록 말이다. 그의 손이 세상의 밭에 뿌릴 것이고 그 씨를 또한 저장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동료 일군들에게 말씀하셨던 약속들, 곧 그의 피조물들 속에 두신 바 된 그 침묵속의 약속들을 믿고 또한 신실하게 지켜서, 각각의 피조물들이 각자의 맥락 속에서 자신들을 적절하게 완성시켜갈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이런 자기발전, 이런 자기계발을 통해서 인간은 무거워져 가는 과제를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하나님께서 활동적인 논밭으로서의 자신 속에서 또한 즐거움을 취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지혜롭게 의도하셨던 것이다. 이미 완성된 세계를 창조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다. 단지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셨다. 세상은, 그래서,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 졌을 때, 그것은 약속이 담겨져 있는 세상(a world-in-the-promise), 기대할 바가 있었던 세상(a world-in-hope)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이 그대로 좋았었다면 이 기대는 “게으르다”고 불리워질 수 없다(this hope could not be called “idle”. 기대하면서 게으르게 기대하고만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 역자주). “육체를 통해서 타락하게 되지만 않는다면”(unless through the flesh), 창조 때 주어진 법령들, 그렇게 자연 속에 고정된 “법칙들”이, (우리들의 완전을 위해서 사용되는데 있어서) 타당하지 않게 된다든지, “무력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곧 죄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죄가 창조의 그 법령들을 한 켠으로 치워놓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법령들이 지속되는 것은 저주만 아니라 축복을 위한 우선적인 조건이다 - 축복과 저주 둘 다 이미 낙원에서 선포 되어졌었다. 하지만, 창조의 법령은, 그것에 복종하는 경우에 축복이 구체화되어지고 또한 축복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데, 타락이 된 이후에는 저주에 관한 한 그 창조의 법령이 여전히 동일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곧 그 법령들이 축복에 대해서는 “무력하게” 되어 버렸지만, 저주를 무효화시키는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주는 더욱 더 큰 저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행위언약”의 인허 속에서 곧 바로 말씀하셨던 바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는 세상 모두를, 특별히 인간을, 아주 팽팽한 “긴장”(tension) 가운데 밀어 넣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그리고 하나님 아래에 있는) 동료사역자로 불리어지는 인간을 위해서 세상은 “오메가”(곧, 마지막 결과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알파”(곧, 처음 막 시작한, 그래서 가능성이 있는)의 세상이었다. 그 낙원의 세상은 하나의 시작이었다. 이 태초의 시작에, 원리적으로, 그것들이 완전한 질서, 도시(polis, civitas), 곧 하나님의 “성”(city/state)이라는 완성된 세계로 자라가야만 할 잠재적인 것들로서 이미 모두 주어져 있었다. 낙원의 형태로 설계되었고 머지 않아 그 설계를 따라서 세워지게 될 것이었다. 어느 때인가 완전히 그것이 드러나게 되려면 그것은 여러 세기를 거친 역사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중간시기”(interim)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역사적(a-historical)인 원시적인 “역사”와 종말론적인 “역사”의 그 중간이 아니라,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들로서의 역사적인(historical)  “첫번째” 일과 “마지막 때” 일들 사이의 그 중간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간”이란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 낙원적인 실재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거니와, 소위 “더 높은” 실재 같은 것이 아니다: 아담도 그런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처녀적인(virginal) 실재이다. 이것은 그 이후의 역사를 위해서, 과장되지 않은, 실제적인 역사 속의 시간에 너무나 구체적으로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살과 피가 있었다. 혼과 영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성령이 있었던 것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 과장되지 않은 분명한 실재로서의 역사적인 낙원적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creation)의 기초 위에서 진화(evolution)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 진화는, 창조된 생명의 본성에 따르자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오는 에너지 없이는 일분일초도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질서를 명하시고 모든 것에 그 적절한 위치를 배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그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동료일군으로서 일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간 없이는 단 일초 동안도 그 진화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3:9)(개역성경에는 “너희”라고 되어 있다: 역자주): 이것은 바울에 의해서 저 멀리 외로운 구석 어딘가에 분리되어 있는 교회를 위해서 선포된, 어떤 사후약방문식의 은퇴선언(a posthumous quietive)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첫 번째 원리”로 엄중하게(in an imperative way) 되돌아가는 것과 관련된 일이다. 바울의 이 본문은 단순히 목사의 위임때에 하는 설교본문으로 적당할 뿐만 아니라, 어떤 문화 사역자들, 길거리의 청소부나 교수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월광곡을 작곡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매일매일의 생활용 본문(day-text)이다.   

 

  그러므로, 풍성한 약속과 더불어서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은 다음과 같다: “동산을 관리하라.” 이 말 속에는 공중에 솟아오른 성채가 약속되어 있지 않다; 소위 “더 높은 실재”도 암시하지 않고 있다. 동산을 관리하라 – 여기에는 문화적 도구가 되는 삽도 그리고 고무장화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창조적인 정신이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면서 그것들을 고안해(invent)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관리하는 손에다 그리고 땅을 파고 으깨는 발에다 적응되도록 해야 한다. 손과 정신이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관리해야”하는 것이다. 동산을 관리하라 – 여기엔 내향적인 도덕적 설교가 선포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여기엔, 구체적인 일감과 삶에 대한 명령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고도로 영적인 것이며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상적인 매일의 일들을 위한 명령이다. 성경의 중간시기를 위한 윤리는 파악될 수 있는 일종의 법률(a lex)과 더불어서만 작동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이해해서 붙잡을 수 없는 그런 “명령”(commandment), 그 명령과 더불어 역사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a Word of God)은 그렇게 명령한 것의 교훈적인 부르심의 취지를 성취할 수 있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동산은 어쩜 “낙원”이라고 불리어 질 수 있고 또한 우리들의 시적인 수사법으로 그 낙원을 마치 마술의 힘을 빌려서 분리되고 견고한 담장으로 둘러싸여진 지역, 곧 산들바람이 불고 너무나도 잘못 이해되고 있는 낭만주의가 기술할 수 있는 그런 지역으로 변경시켜버릴 수 있겠기 때문이다(하나님의 동산관리에 대한 명령이 낭만적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는 뜻: 역자주).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다. 동산은 땅(adama), 곧 거주가능한 세계의 시작이다. 여기에서 바로 문화적 세계가 시작된다. 동산은 그 문이 사방으로 활짝 열려져 있다. 그러므로 일찍이 우리는 아름다운 동산, 하지만 “아름다운 문”이란 이름의 문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그런 동산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문화적 생활을 통해서 나온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모든 것들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문화란 바로 여기에서(!) 모든 인류가 행하는 노동과정상의 총합의 획득을 위한 체계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으며, 우주와 더불어서 그리고 우주를 위해서 역사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을 발전시켜 가고, 또한 여하한 역사적 순간에도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창조세계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을 발견해 내는 과제를 안고는 세계의 역사의 과정 속에서 그것들을 각자의 피조물들의 본성에 일치하도록 계발시켜 가며, 그 환경에 더욱 부합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이 우주 안에서의 가깝고 먼 상호관계를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기준에 일치하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까지 획득된 보물들이 예배적인 피조물로서의 인간(MAN AS LITURGICAL CREATURE)에 의해서 활용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모든 것들을 이제는 더욱 철저하게 구비되어진 인간 자신과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도록 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하신 분으로 여겨지고 모든 일들이 그 주인되신 분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의(definition) 안에, 필자의 의견으로 보자면, 성경의 창조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근본적인 순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동산을 관리하라: 이것은 세계 내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계발하라고 하는 구체적인 문화적 사명이다. 충만하고 번성하라: 문화적 사명, 곧 모든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그리고 모든 지리적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의무로서의 이 과제에 종속되는 인간 존재의 활동을 점증시키라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하나님의 부섭정(副攝政)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하나님의 창조활동의 부산물로서의 문화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문화적 작업은 자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인간 안에는 인간됨의 자질이 그의 직무의 관점에서 이미 주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 그 분의 최상의 권위를 대표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된 일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이고 미래를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발견되어지도록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unto) 말씀하시고 또한 인간을 통해서(with) 말씀하신다. 모든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하기 위해서 선택되어진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의 그 교제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을 통해서 나머지 우주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인간 자신이 그 우주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것은 자신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고 느끼는 그 인식이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음과 자기계발, 자기발전이란 것이, 그 목적 자체로서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분명하게 주어진 사명과 의무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에게는 도덕적 명령이 주어져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과 더불어서 자신의 창조주되신 분에게 종속된 문화적 노동을 수행하여야 한다: 피조된 세계와 관계해서 이루어 가야 할 인간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 당신의 우주에 관한 목적에 연관된 계시된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온 것에 복종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인간 자신의 손으로 다듬어 온 우주 안에서 그리고 그 우주와 더불어서 하나님 앞에서 지금 그리고 머지 않아 무릎을 꿇도록 부름을 받았다. 자신의 관점에서의 문화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의 안식(Sabbath)의 관점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안식으로 그, 곧 인간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오염되어져 와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사고의 영향 아래에서, 모든 관계들을 파열시키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문화란, 대개 “종교”(religion)와 분리되어 있거나 최소한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다. 하지만 태초에는 그렇지 아니하였다(마태19:8). 왜냐하면 종교는 삶의 국부적인 영역도 아니고, “마음”에 속한 분리된 어떤 기능이나 그 “마음”을 위한 기능도 아니며, 아주 헌신적인 비밀집회에 속한 사람들 인생의 어느 싯점에서 고상하게 경험하게 되는 현실과 유리된 어떤 체험활동도 아니다. 아니다. 종교란,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일은, 종교성(religiosity)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어 있는 범신론주의 철학자인 슐라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종교에 관해서 on Religion>라는 책을 썼다. 하지만, 그는 단지 종교성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상은 – 그의 범신론으로 인해서 – “하나님”과 “우주”가 그의 사고 속에 뒤섞여 있는 한, 이 종교성이란 것이 곧 자기예배(self-worship)라는 것이다. 그는 목적을 지향하는 어떤 행동도 도덕주의(moralism)라고 필연적으로 거부해야 했다. “종교”란 그에게 있어서 “행함”의 문제도 아니고 “앎”의 문제도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로도 종교는 물론 단순히 “행함”의 문제가 아님에 분명하다. 그것은 “섬김”(service)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주와 더불어서 함께 진동하고 있는 순전히 자연적인 원소, 곧 호문쿨러스(homunculus, 16-17세기의 의학이론에서 정자 속에 있다고 믿었던 미소한 인체)라는 원소의 섬김이 아니고, 자기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한 그 분을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알고, 세계 속에 계심을 믿고 또한 이 세상과 더불어서 그 분에게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인생의 섬김이다. 그 섬김으로 교회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무엇인가를 공식화하고 또한 그의 아버지의 뜻을 그렇게 성취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우주”로부터 모든 종류의 “공식”을 끌어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되시고 또한 입법자가 되시는 분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교훈의 명령들(commandments)에 귀를 의식적으로 기울임으로써 그렇게 공식화하고 그 분의 뜻을 성취시켜 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낙원에서는 문화적 수행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모든 일을 경작한다, 자기가 걷고 있는 땅과 그 영혼 깊은 곳의 마음, 그리고 식물과 명상능력이 있는 영 모두를 그렇게 계발하는 것이다. 그 곳에서는 자기의 더럽혀져 있지 않은 손과 또한 그의 영혼을 의(righteousness)로 깨끗하게 씻게 된다 – 이것과 저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장소 오직 그곳에서만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곧 우리가 돌아가 보아야 할 원래의 상황과 그 질서가 있는 그곳 말이다. 

 

 

17.   나는 원래로 되돌아 가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 표현은 원래의 상태에서 이미 떨어져 나옴(disruption)이 있었다는 고백을 포함한다.  

 

  이 떨어져 나옴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해체(disintegration)가 있었다. 인간의 삶은 곤두박질하였다. 이런 일이 세계에도 일어났다: 그 모든 구석구석, 그리고 관련된 부분들이 상호간 협력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혼동되고 잘못되고 죄악으로 물들어 자기기만적이고 그 자체 안에서 원리상으로 이미 해체되어 버린, 인간의 정신(mind)은, 이젠 실제적으로도 해체의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곧 실체에서 떼어내어 추출해내고 찢어 나누며 분리시키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일반적이면서 광범위하게 우주적인 관점에서 곧 “부분들”을 “전체”에 적절하게 관계시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대신 그의 “보편화시키는” 관심을 “개별화시키는” 관심으로 대체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세부적인 것은, 사람이 그것에 매료될 수 있는데, “전체”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전체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하나님 율법을 통해서 자기에게 계시되어 그의 존재의 그 비극적인 실패로 인해서 확증되어 버린 그 진리, 곧 그가 죄악으로 빠져들어가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전체 목적의 그 위대한 맥락 속에서 어떤 단일주제를 고려할 수도 없게 되었고 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그 진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기를 그쳐 버렸다. 그런 진리를 자기 힘으로 고안해 낼 수 있다거나 고안해 낼 것이라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조차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와 문화가 상호 분리되어 버렸다. 가인후손의 선구자들은 “문화”를 선택하고 “종교”는 이것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겨 버렸다: 그리고 셋의 후손들 중의 후진(後陣)들은 이런 구분에 대해서 상당히 옳다고 해 버렸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야말로 최악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는 더욱 더 파괴를 행하였다. 해체의 과정은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에서 “부분들”, “영역들”(spheres), “방면들”(sectors), “지역들”(territories), “공통관심을 가진 집e단들”(groups with common interests)로 끊어내고 절단해서 추출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죄의 결과일 뿐 아니라, (이런 추출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된) “영역들”, “지역들”, “공동체들”(communities) 안에서조차 해체(dissolution)의 요소가 더욱더 작용해서 역보편화 원리(de-catholicizing principle)의 효과를 증진시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세계 속에 두신 구분들(distincitions)들을 결합시켜서 하나의 “다중형태의” 일치[a “pluriform” unity,이 용어의 철학적 배경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 용어에 인용부호 “   ”를 붙였다. 이 용어에는 한 가지 이상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필자주])를 이루게 하시는 반면, 사탄은 이런 구분들을 이용해서 사물들을 분리(separate)시켜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개개의 인종들을 함께 묶으셔서 그들의 연합(coalescence)으로 인류의 “다중형태성”(pluriformity)를 보여주신다. 사탄은 이런 다중형태성의 원리를 분열의 원리로 변질시켜 버리고 인종간의 투쟁을 강화시킨다. 다른 계급들, 남녀간, 성격차이들, 국가별차이들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바울의 비유를 다시 빌려서 말하자면 이렇다: 눈은 눈을 계발하고(cultivates), 귀는 귀를 계발하며, 손은 손을 계발하고, 또한 발은 발을 계발한다. 그래서 이러한 특수화의 열광이 너무 지나쳐서 신체의 이런 개별적인 부분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 단지 세계가, 예를 들자면, 전후공황상태(a post-war mentality)라고 불려지는 일종의 숙취상태(a hangover)같은 순간을 위해서만 필요로 할 뿐이다. 그 외의 순간에는 불필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도 사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가지출(假支出)결의(a token vote) 그 이상이 결코 아니다. 개인적인 적성이 한 편으로 지나치게 변형되어 버리고 있다. 하나의 (성격) “유형”(type)이 다른 유형과 반대되는 것으로 판정되고 있다. 원래는 하나의 보충적인 유형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차잇점(differences)이라 할 수 있는 것마다 반정립(antitheses)이라고 한다. 모든 인류가 행하는 노동과정상의 총합의 획득을 위한 체계적인 노력으로서의 문화가 여기에서 이미 형식상이지만 그 자체가 해체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사람들은 체계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혼란은 일종의 처벌이지만, 곧 바로 좋은 일이라고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해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실제적인 이탈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부서져 버렸다. 그럼으로 인해서 인간의 직무(office)에 대한 개념이 내팽개쳐져 버렸다. 진지함(earnestness)이 유희(play)에 밀려서 결국 유희문화(play-culture)를 낳게 되었다. 스포츠기사가 너무 차고 넘쳐서 교회소식은 너무나 적게 다루고 있고, 어떤 시합에서 이긴 팀에 대해서는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나가는데, 영적인 투쟁을 위한 대의를 위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문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만물의 회복(regeneration) 안에서 각 부분들이 전체의 최적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을 바라보는 소망이 깨어져 버렸다. 매일 매일 세계는 더욱 신경증적으로 변화되고 있고 “문화”는 더욱 더 포대(砲臺)사업(a casemate business)(포대는 전투 시에 적군의 탄환이나 화살을 막기 위해서 방호하는 일종의 보호 장비: 역자 주)이 되어가고 있다. 모두들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포대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홀로 그 분에게만 속하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광 가운데서 보여져야 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와 버린 피조물을 향한 도취로 변질되어 버렸다. 일치는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하나님 안에서만 일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젠 그 일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이젠 원수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낙원에서 원래 주어졌던 형태의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commandment of life)이 뒤따르고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사람들이 하고 있는 변명은 - 그렇게 여태 변명이 시도되고 있다면 – 이렇다: 음, 우린 지금 사막 한가운데 있는 거야. 그래서, 낙원에서 주어진 명령은 현재의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야. 하지만, 이런 논리는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 사람의 위선만 드러낼 뿐이다: 생명의 법이 모멸되고 있다. 그 법에 의해서 그리고 그 법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당신께서 부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편에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져 나와서 그 도덕법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어떤 문화적 스타일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서 그러면서 또한 그 창조하신 세계를 우주의 자연적 맥락 속에 유지시키시는 한에 있어서, 인간은 이렇게 질서 있는 하나님의 배치에 그리고 또한 자신의 문화적 성취 속에, 자신이 부속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도덕 법칙이 더 이상 인간의 문화적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그 자연 법칙은 계속해서 그 속에서의 활동하는 문화의 생산자를 강한 유대로 결속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연 법칙의 강제하는 유대들(bonds)은 하나님의 사랑의 끈(cords)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연적 법칙의 규정들은 하나님의 친구만 아니라 원수들도 껴안는다(누구에게나 그 법칙규정들이 해당된다는 뜻: 역자주). 하지만, 이 원수들에 관한 한, 그가 하나님의 도덕 법칙에 대항해서 싸우는 중에 자연 법칙이나 그와 같은 기능들을 자기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대로 이용해 보려고 한다. 할 수 있는 대로 자기의 비도덕적인 문화 속에서 사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적절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스타일”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사탄은 물론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의 근본적인 구조를 파괴시킬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도덕적으로 오염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사탄주의”의 “문화적 스타일”을 얼마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이미 역사 속에서 드러나 있다. 

 

 

18.  지금까지의 말들이 함축하고 있는 대로, 문화란 것이 있고 또한 인간이 문화적 행위를 수행한다는 단순한 이 사실을 “일반은총”(common grace)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다.  

 

  “일반은총”이 성경적이라고 하는 주장이 반복해서 제기되어 왔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 경험의 관점에서 그리고 동시에 성경의 자료들을 참고해서 “인도함을 받고자”(guided) 노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죄와 죄책의 무시무시한 성격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타락 이후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기에 마땅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모든 발전으로부터 끊겨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에게 정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타락 이후 수 천년 동안 계속해서 지속되어 오는 것과 우주 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 가능성들이 여태 계속해서 개발되어 오고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grace)가 아니란 말인가? 대답이 이미 암시되어 있다: 물론 은혜이다; 그것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렇다, 이 은혜는 우리들을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반”(common)이라고 불리어진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은총”(grace)이라고 불리어 질 수 있다. 우리들에게 죄를 제어하는(restraining) 혜택을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만약 죄가 제어되지 않는다면 가장 극렬하게 사탄적인 사악함이 직접적으로 쏫아 부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의 “일반적인” 활동을 통해서, 더 나아가 성령의 일반적인 “증거”(testimony)를 통해서라도 이런 사악함을 막으신다. 그 성령의 증거로 인해서 어떤 일련의 중심적인 진리들에 관해서 즉각적인 확신을 확실하게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런 확신은 우리의 사고과정이 있기 이전에 주어지는 것이 된다(pre-reflexive). 이런 식으로 이 사막과 같은 세상에 계속적으로 자기갱신을 하는 일반은총이라는 이슬이 내리고 있다. 이 이슬로 인생은 그래도 견딜 만 하게 될 뿐 아니라 더욱이 – 그 일반은총에 특수하게 연관된 “진보적인”(progressive) 작용 덕분에 – 사막 한 가운데에 오아시스, 곧 문화적 오아시스를 창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고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논리의 비틀어짐이 있어서 여기에 “일반은총”이라는 용어가 적당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죄가 “제어되고 있다”는 것과 저주가 세계에 완전하게 쏫아부어진 것이 아님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되도록 허락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에 의해서 이런 호의의 선물이 되어질 수 있었던, 그 복종에 대해서도 똑 같은 것이 말해질 수 있다. 그 저주가 제어되는 것을 “은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최소한 이런 축복의 “제어됨”(restraining)을 “심판”(judgment)이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면 과학적인(scientific)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서 비과학적인 묘사로서 사용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최상의 것일 수는 없다. “일반은총”이라는 말만 아니라 “일반심판”이라는 말을 이렇게 간단히 사용해 보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교정책이 됨을 의미한다. 

 

  분명히, 제어함(withholding)이란 것이 있다(살후2:6). 하지만, 제어함이란 시간에 특별히 관련된 특징을 갖는다. 어느 것도 “제어되는 것”(withheld)이 없는 곳에는, 항시완전소유(possession tota simul, 언제나 충만할 정도로 완전하게 생명을 소유한 상태)이거나, 아니면 항시완전박탈(privation tota simul, 박탈된 상태가 완전하여서 어떤 한 “순간”도 전혀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 있을 것이다[여기에는 영원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유명한 정의가 암시되고 있다. 이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시고 tota simul possession 하시다. 곧, 제한이 없으신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 Tota simul은 “동시에 또한 완전하게”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헬라어로는 perfectum praesens). 인간의 생명은 그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 완전한 의미로서의 생명을 그는 한시적으로나마 “소유하고” 있지 않다. 현재가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항시완전 (tota simul)이 아니다. (제한적인 존재의 그 성격상) 영원 속에서야 그는 생명을 (그 나름대로) “완전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고, 또한 (역시 그 나름대로) 항시완전이 될 것이다: 그 생명 “안에”는 더 이상 성장(growth)이 없을 것이다(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역자주)].

 

 

 이것은 곧 제어함이 없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한시적인 존재함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영원”이 있는 것이다. 낙원에서조차도 “제어함”이 있었다. 만약 하나님의 성령께서 아담에게 “제한 없이”(withholding) 주어졌었더라면 아담은 죄로 떨어질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발전”이라는 것 – 아니면 “부패”라는 것 – 은 시간에 특별히 관련된 특징이다. 발전과 부패는 시간에 속한 것이다. 발전되어진 상태(state)와 부패되어진 상태가 모두 충분하게 완전하게 된 것은 영원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창조의 선물들이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창조가 은혜가 아니라 자연(nature)임을 보여준다. “그들 안에”, 사물들 안에, 그리고 사람들 안에는 활발한 활동(a stirring)이 있다. 사람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 인간 자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발전하고 있는” 지구로부터 옥수수와 포도 등을 재배하려고 하는 강력한 욕구가 있다: 곧 “경작하려는”(colere) 욕구, 동산을 계발하려는(cultivate) 욕구이다. 하지만, 타락 이전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종교적 활동이었던 것이 타락 이후에는 이기심, 자기보존, 그리고 생의 욕구[zest for living, Felix Timmerman에 의해서 암스텔담에서 출간된 소설 Pallieter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육체에 대한 이교적인 숭배를 상징하고 있는데, 생명을 추구하기 위해서 봄비가 내리는 중에 벌거벗은 채로 달리고 대지에 입을 맞추는 등의 행위를 한다”(Henry R. Van Til의 칼빈주의문화관(The Calvinistic Concepts of Culture), 140쪽, 각주 4에서 발췌함:저자주)]로서의 행위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섬기는 것이 된 것이다. 

 

  인상(impression)이 남겨진 “자연”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연이란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에 의해서 사용되거나 사용되지 않기 위해서 죽어 있는 자산(dead capital)이다. 그러고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곧장 결론을 내려버린다: 인간의 세계는 영원한 죽음을 당하기에 합당한데, 이 영원한 죽음은 그 모든 대상들이 자산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박탈해 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사용할” 수 있다. 곧, 이 죽어있는 자산을 활용해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ergo), 이것이야말로 “은총”이다. “일반은총”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렇게 추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추론은 “자연”이 한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한, 움직이는 것(mobility), 임신과 출산, 태어남과 수태는 자연에 속한 것이다. “죽어있는”(dead) 자산 – 이 용어도 여기서 사용되기에는 지나치게 유희적인(playful) 용어이다. 유희적이라는 평가하는 것은, 죽어있다는 것은 시간 속의 자연(nature-in-time)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죽어있는” 자산이라는 말이 현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왜곡시켜서 “일반은총”이라는 용어가 마땅히 사용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유치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문제는,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타락 이후의 시간이 연장되었다는 것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는 타락 이후 즉각적으로 “지옥불”에 떨어지기에 합당한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죄의 심각성을 언급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은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점의 첫 번째 문장(“지옥불”로 떨어진다는 것)이 하나의 비유(a fable,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fable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우화, 전설, 민담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지만, 저자가 지옥의 실재성을 믿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용어를 ‘비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아 이렇게 번역했다: 역자주)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만약 타락한 인간(아담과 이브: 역자주)이 타락직후 곧장 “지옥불”로 떨어져 버렸었다면, 그러면 “우리”는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두 사람이 저주를 받았을 것이고, 그 이상 어느 누구도, 어떤 인류도, 금방 언급한 가상적인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저자는 결코 지옥의 심판을 가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여기서 그 심판을 “가상적”(hypothetical)이라고 한 것은 “일반은총”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갖고 있는 헛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지옥심판의 논리의 허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서 이 부분을 읽어야 한다: 역자주).  

 

  결론적으로, 타락 후에도 여전히 시간이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한 비밀이 정확하게 계시되어 왔다. 이런 연장이 결코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을 “논증하는 것”(to prove)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처벌하시게 될 만큼의 그 숫자만큼의 사람들을 처벌하시기로 작정하셨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겠다: 이 사람들은 우선 태어나야만 하고 계속해서 대를 이어가도록 되어야만 하진 않았을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분명히 있게 될 당신의 진노의 대상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목적으로 이미 시간을 연장시키셨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이 아니다. 이 시간 내에서 결혼이 약정되었어야만 했을 것이고: 여하튼, 남자들과 여자들의 성적 교합이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자면, 경제적인 평형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문화가 필요했었을 것이다. 문화란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전제가 되는 것이다. 지옥과 관계해서조차 말이다.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단지 그 사실보다도 더 많은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찬양 돌리자. 천국 또한 그 신적인 활동 속에 계획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천국으로 부르실 사람의 숫자만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간의 연장이 필요하다.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평형과 기상학적인 평형 가운데에서 노동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간적인 연장과 우주의 문화적 발전을 (일반)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오류가 된다. 

 

  이러한 연장과 발전은 전혀 은총이 아니다. 그것들은 저주도 아니고 죄의 선고도 아니다. 이러한 용어들을 진지한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영생과 영멸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conditio sine qua non), 영생과 영멸의 토대이다. 

 

  피조세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적인 것인 한, 여하한 태의 열림, 어머니가 되는 지구의 태가 열리는 것조차도 자연적인 것인 한, 문화도 자연적인 것이다. 문화란 두 개의 극단, 곧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predestined) 수만큼의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과 영멸에 이르도록 작정된(foreordained) 사람들의 수만큼 축출하는 두 극단의 일들이 발생할 수 있게 되는 토대이다. 

 

  은총(은혜)라는 것은 이러한 문화(colere)에 원래적인 것이 아니다. 은혜는 먹는 일, 마시는 일 같은 것, 혹은 숨쉬고 자녀를 생산하는 일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작(colere)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먹과 마시며 또한 자녀를 낳는 일 말이다. 죽어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이것에 속한다. 

 

  그리고 저주도 이런 문화(colere)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며, 혹은 숨쉬고 자녀를 생산하는 일 속에 저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경건하지 못한 경작(colere), 불경건한 먹고 마심, 자녀생산에 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죽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든 일 속에 저주가 있는 것이다. 

 

  타락 이후의 시간의 틀 안에서, 반정립(antithesis)이란 자연 속에 불가피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 곧 문화 속에서 그렇게 불가피한 것이다. 신앙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느냐 아니면 불신앙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느냐 그것들 사이에 반정립이 있는 것이다. 

 

  문화 속에 물론 “공통의”(common) 은총이 있다.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은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universal, (혹은 일반적인, general)] 은총은 없다(이런 주장의 역설을 저자도 느끼고 아래에서 더 설명하고 있다: 역자주). 그러므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에 대한 주장은 잘못되었다.

 

  문화생활 속에 “공통의”(common) 저주가 물론 있다.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저주 말이다. 하지만, 보편적인(혹은 일반적인) 저주는 없다. 

 

  “공통”이라는 말이 때로는 보편적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 이상에게는 공통적이면서도 모든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여기서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공통”이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유되었음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사용될 수 있는, 그런 의미로서의 “공통”은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공통적인 은총이 문화 속에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에게 소속된 모든 자들에 의해서 공유되어지는 한에 있어서 그들의 문화적 성취에 교효과를 미치게 되는 그런 은총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다른 자들은 공통의 저주 아래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17:31에 나오는 “정하신 사람”에게 주어져서 그 저주아래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할 수 있게 된 그것이다[이 부분의 설명에 대해서는 저자의 Is de term ‘algemeene genade’ wetenschappelijk verantwoord? (Kampen: Ph. Salsman, 1947)을 참고하라:저자주]. 

 

 

 

 

29.    일곱번째면서 마지막 결과는, 부르심과 직무에 대한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기독교 문화철학은 더욱 일관성있게 논리적 사고(reasoning)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문화이론가라면 누구도 위에서 거부했던 의미로서의 “일반은총”(“common grace”)을 출발점으로 취해서는 안 된다. 마땅한 출발점은, 원래의 부르심, 창조시에 주어진 과제, 원래의 직무로부터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문화적 낙관주의나 문화적 모멸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들 중에 최상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실수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박사는 그의 책 과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일반은총(De Gemeene Gratie in Wetenschap en Kunst,1904)의 44쪽에서 “종교”는 그 최상의 형태에 있어서 그 예술적 의상을 스스로 벗겨버린다는 폰 하르트만(Von Hartmann)의 견해에 동조한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추론이 유신론적이라기 보다는 범신론적인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된다(예술을 위한 예술을 허용함으로 인해서 종교와 예술을 일치시키는 이러한 경향이 범신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역자주). 또한 우리들은 “종교”가 “그 자체”에게 옷입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기 예언자들을 전례학자(liturgists)로 만들고(물론 전례학자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 예언자들 모두에게 직무의 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예술가들조차 이러한 의상들을 만드는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만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어느 누구도 그 옷감을 짜는 직조기를 독점하고 있지 않다. “종교”는 결코 예술적인 의상으로 옷입혀졌던 적이 없었다.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직무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예술적인 의상을 제공해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무의 옷으로 입혀 왔다. 이 서명이 계속 그 옷에 남아 있고 또한 그것을 입는 사람이 그 서명이 있는 것을 참아낼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말이다. 직무의 의상은 결코 내던져버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의상의 독특함이 계속해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칼빈주의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양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했던 “제어”(“restraints”)와 “자제함”(“abstinence”)이 방해가 되지 않게 될 정도로까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와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또한 “내재적인 종교의식”, 곧 그 자체를 종교문화 속에서 표출하고 실현해 가려고 하는 그런 종교적 의식에서 우리의 표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더욱이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살려고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직무를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무를 의식하게 되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로 되돌아가게 해서 무엇이 규범인지를 다시금 배우게 한다. “자연”은, 수수께끼같이도, 그것이 성경의 빛 가운데서 놓여지지 않는 한,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신의 직무를 지속적으로 자각함으로 인해서 그리고 자신의 문화적 과제와 관계해서 선지자로서의 기독교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게 된다. 그런 자각으로 제사장으로서의 기독교인에게 직무를 자각하고 있는 삶의 애정과 문화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향유하는 것을 자신의 순수한 자연적 에로스의 기능을 혼동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에로스가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처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 팔리에터(Pallieter)는 이교도이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기독교인에게 인생 자체를 위해서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창조주의 영광을 추구하게 된다. 자신이 바로 그 분의 종이고 또한 대표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핵심은 하이델베르그문답의 주의 날 12항[31번문답: (문) 왜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 불리는가? (답) 성부에 의해서 임명되어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음 바 되어서 우리들의 선지자와 교사가 되어서 우리들에게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하신 도모와 뜻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당신의 몸을 한 제물로 드려서 우릳르을 구속하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계속적으로 중보의 기도를 하시며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시어서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를 위해서 사신 그 구원(의 누림)을 위해서 우리를 방어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이 하이델베르그문답서는 우르시누와 올레비아누스를 통해서 작성된 뒤에 1563년 하이델베르그총회에서 통과되어 중요한 개혁주의신앙고백문서 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역자주]의 두 번째 답변에 놓여져 있다. 그것을 보면 존 칼빈(John Calvin)이 그의 제자들 우르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Olevianus)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문화의 선지자가 된다. 칼빈은 인간의 직무라는 개념을 가르치고 그것을 심오하게 만들었다. 또한 어떻게, 죄와 은혜의 투쟁, 복종과 불복족의 갈등이 문화에 있어서 참으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존 칼빈의 학교를 거친 사람들은, 예를 들자면, 기술과학이 얼마나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고, 그것을 충분히 강조하면서 외치길, 기술로 인간은 승리하였지만 죽음에 이르도록 승리하였다[Er hat gesiegt aber er hat sich tot gesiegt, 이것은 릴예(H.Lilje,1899-1977)의 말. 릴예는 독일루터란계통의 목사. 에큐메니칼세계교회운동:역자주]고 하는 사람들의 외침 같은 것을 결코 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은 옳은 말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적 영역에서 죽음을 맞게 될 때에 그것은 결코 어떤 문화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가 자신의 직무를 완성하는데 있어서의 불순종과 불성실함의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하였다. 존 칼빈의 절대주권(autarky)개념은 반(反)영지주의적이다[영어번역자는 autarky(자급자족)라고 번역했는데, autarchy(절대주권)로 번역되었어야 할 것이다: 역자주].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이제 드디어 결론부분에 이르렀다. 

 

  이제 마음들이 열려 질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입술도 그렇다; 이제 손들이 일할 준비가 되었고 발들도 분주히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렇게 그 분을 따르는 중에는 당당하고 또한 건전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사망 가운데서 거짓말했노라고 (주님의 최후의 만찬석의) 총회와 잔치의 날에 정확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낯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이다[Homo est, humani nihil a se alienum putat. 로마시대의 극작가 Titus Maccius Plautus(254-184 BC)의 말. 곧 자신이 한 거짓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질 것을 이 로마극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강조하고 있음: 역자주]. 인간은 또한 자신이 행하고 말한 모든 것에 아주 굳어져(concrete) 버렸다.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Novalis)가 이렇게 노래했다:

 

 

      어둠이 깊어지는 곳마다

 

      새생명이 돋는구나, 신선한 피가 흐르며;

 

      우리들을 위해서 영원한 평화를 세우려고

 

      그 분께서 생명의 강물에 뛰어드셨도다;

 

      그 양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우리 중에 서 계시는구나,

 

      우리들 모두의 기도를 사랑의 눈길로 들으시면서.

 

 

  그렇다, 당연히 그렇다. 그 분께서는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듣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행동, 아니, 우리들 보다 더욱 이성적인 사람들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행위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더욱) 근신하”(살전5:7)고, 성경저자들의 합창단들 속에서 한 목소리가 외치고 있다. 원리상 낭만주의자인 노발리스(Novalis)는 결국 범신론자이고 범그리스도주의자(panchristist)여서 어둠이 깊어지는 곳에 다시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있다. 곧 대조되던 것들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고, 반대편의 것들의 연합이 “체험되어지는” 곳, 결과적으로, 의도적인 행위, 근본적인 반정립을 의식하고 있는 행위가 결핍된 곳에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낮에 속한 자들만을 알고 계신다. 낮의 빛은 모든 것을 구별되게 한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감정적인 기도에) 단순히 듣고만 계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삽과 망치, 책, 바늘, 그림붓, 그 외의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이 세상으로부터 –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 하나님께서 그 안에 두셨던 모든 것을 이끌어내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시다.  

 

   “제발 종말론적 설교를 좀 해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또한 종말론적 방식으로 우리가 씨를 뿌리고 톱질을 하고 또한 비행하고 전보를 쳐야 한다고 외치게 하라. 종말론적인 “신학”이 어디에선가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모든 곳에서 요구되는 종말론적 문화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발리스가 노래하길:

 

 

         축복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동산에서 우리

 

         신실하게 그 꽃봉오리와 꽃들을 보살피자구나

 

 

  고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더 이상 하나님의 동산, 곧 에덴동산이 아니라고 답변한다. 에덴동산은 언젠가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세상은 작업장이고 경주장이며 건축현장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노발리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영혼을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곳, 낭만적인 경향이 짙은 영혼이 소위 “종교”라는 것을 실행하는 그런 은밀한 장소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과 자연 사이에 어떤 경계선도 설정하지 않은 채로 어스름한 빛 가운데 놓여 있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대광장(forum)은 오늘날 그 분의 작업장이다.  그것은 이 세상만큼 넓고 바로 우리의 작업장, 우리의 공장, 부엌, 연구실, 공연장, 한 마리로 말해서, 어떤 장소, 어떤 비수학적 공간(any non-mathematical plane)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딤후3:17) 장소이다. 그곳에서 하마 그런 것이 있다면 “꽃봉오리와 꽃들”을 신실하게 보살피기도 하겠지만, 또한 험한 일을 위해서 고무장화를 신고 잡초를 뽑아주며 광야와 같은 곳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그런 곳이다.

 

  그것은 정말 “끝이 없는 과제”(“endless task”)가 아닌가? 그렇다, 정말 그렇다. 이런 끝없는 과제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바보”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 그 사람 의견으로는 다른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무모한 사람들이다. 정말 그가 옳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어서 우리의 문화적 과제는, 당연히 “끝이 없는 과제’이다. 옳은 방식으로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고 있는 우리의 지혜로운 장로(wise ward-elder)야말로 복된 자이다. 자기는 모르고 있을지 몰라도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적 세력(a cultural force)이다. 사람들이 그를 모욕하게 하라: 그들은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뒤집어 보자면 그들이야 말로 문화적 한량들(gadabout)일 뿐이다!    

 

 

스킬더의『그리스도와 문화』토론을 위한 질문들- 손성은

2017-05-27 21:46:10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소그룹토론을 위한 질문들

 

 

1-안개에 둘러싸인 심각한 현실

 

 

1: 주제의 중요성

 

1) 저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수많은 토론들이 개진되어 왔다고 합니다. 어떤 것들이 그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2) 이 주제가 왜 천국 지옥과 같이 대립되는 개념들 사이에 긴장을 갖게 할 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저자가 '지옥' 천국에 관하여 책들(지옥은 무엇인가?, 천국은 무엇인가)을 쓸 정도였음을 감안하여 생각해 봅시다)?

 

 

2: 주제의 난해성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가 어떤 면에서 기독교적 사고와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직결되고, 또한 크리스챤의 소명과 관련되는가요?

 

2) 진정한 문화에 대한 논의는 삶과 학문 중 어느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하며, 왜 그렇게 해야 하나요?

 

 

3: 주제가 난해한 여섯 가지 이유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가 난해한 이유들로 저자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보십시오.

 

2) 그 이유들 중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어떤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고 보시는가요?

 

 

4: 지금 우리는 안개에 싸여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유형들을 저자가 예시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리챠드 니버가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들과는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요?

 

2)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그런 견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카이퍼의 이론을 심화시킨 도이벨트의 강조점은 무엇이며 또한 이런 도이벨트의 강조점에 대해서 스킬더가 생존하여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 것 같습니까?

 

 

5: 해결책-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문화적 삶

 

1)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 ‘예수와 문화적 삶’,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적 삶이란 표현들이 서로 어떻게 차이가 있나요?

 

2) 이러한 세 가지 표현들 중 저자는 어떤 표현을 염두에 두고 본서에가 강조하고자 하는가요?

 

2-안개 속에 머물러 있게 하는 시도들

 

6: 잘못된 해결방식1(기독교와 문화적 삶)

1) '기독교'에 대하여 저자가 소개하는 최소한 두 가지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2) '기독교'를 문화와 관련시켜 논의하면 잘못된 해결에 이르게 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그 이유에 대해서 동의한다면 어떤 면에서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7: 잘못된 해결방식2-예수와 문화적 삶

1. 문화적 삶에 있어서 예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말을 설명해 보시오. 왜 그런가?

 

2. ‘예수에 대하여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의 어떤 면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8: ‘예수에 대한 오해

 

1. ‘예수에 대한 잘못된 오해의 예들을 몇 가지로 적어보라.

 

2. 그 예들은 어떤 면에서 오해라고 할 수 있는가?

 

 

9: 잘못된 해결방식3-‘교회 자체의 잘못

 

1. 문화적 삶에 대하여 교회 자체의 실수로서 성경의 전체 메시지를 어떻게 오염시켰다고 저자는 말하는가?

 

2. 저자는 이런 실수를 어떻게 만회시킬 수 있다고 제시하는가?

 

 

3-안개를 뚫고 나오기 위한 올바른 모색

 

 

10: 예수님의 생애의 성경적 개요

 

1. 예수님은 당대의 문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2.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아무런 문화이론이나 강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11: 올바른 해결방안-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저자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의의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12: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직무의 본질

 

1.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의 외로움과 고난을 저자 스킬더는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의 삼부작 설교집, The Suffering Christ, Christ on Trial, 그리고 Christ of the Cross을 참고하라!)

 

2.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직분자로 보게 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함축하는가?

 

 

13: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직무

 

1. 예수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의 의의는 무엇인가?

 

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셨던 것의 본질로서, 세상의 기본적 질서로 되돌아가셨던 그 질서는 어떤 것이었는가?

 

 

14: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두 가지 직무

 

1.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셔서 둘째 아담으로서 성취하신 두 가지 일은 무엇인가?

 

2.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두 가지 일이 지금 현재에는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15: 그리스도의 직무완성의 결과

 

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를 완성하셨을 때 이뤄진 두 가지 결과는 무엇인가(p.95)?

 

2.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은 어떤 언약인가? ‘행위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창세기126~8절에 맺어졌는가? 아니면 창세기216~17절에 맺어졌는가?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91항과 5항에서는 행위언약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4. 통념상의 행위언약 생의 법칙으로서의 행위언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16: 문화의 정의

 

1. 저자는 행위언약에 담긴 세 가지 명령을 어떻게 요약하고 있는가?

 

2. ‘행위언약 문화명령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3. 문화명령 속에 포함된 자기계발이 자기우상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4. 창조를 기반으로 그 모든 잠재가능성들을 계발해 내는 발전의 역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이라고 저자가 강조하는가(p.106)?

 

5. 저자가 제시하는 문화의 정의, 과제, 방법, 목적 등을 정리해 보시오.

 

6.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세상적인 관점과 비교해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원래의 관점을 저자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p.110)?

 

 

17: 본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한 것의 의미

 

1. 인간의 범죄 이후 진행되어지는 해체’(disintegration)의 과정과 특징들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점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2. 이러한 해체의 모습들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이라고 변명하고 있는가?

 

18: ‘일반은총이란 가능한가?

 

1. 소위 일반은총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는 무엇인가?

 

2. 카이퍼박사가 주장하면서 회자되어온 일반은총을 본서의 저자가 비판하면서 반대하는 논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3. 이런 논리전개에 있어서 시간이란 요소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4. 카이퍼가 강조하는 반정립과 저자가 강조하는 반정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5. ‘일반(general)은총은 없지만, ‘공통(common)은총이 있다고 하는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문화적 사명

 

1.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구주로서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구속주가 되기 위하여 행동하시는 두 가지 역할은 무엇인가?

 

2. 사이비문화 가운데서 펼쳐지는 진정한 문화사역을,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요한의 어떤 점들에서 그 예들을 찾고 있는가?

 

3. 사이비문화를 치료하는 것으로서의 개혁운동 중에서 마틴 루터의 사역과 존 칼빈의 사역을 어떻게 비교되는가?

 

4.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분리로서 보느냐 구별로서 보느냐 하는 문제를, 루터와 칼빈의 견해와 대조하면서 설명해 보세요.

 

5. 대격변을 통하여 이뤄지게 되는 새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이뤄가는 문화적 산물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는가? (523장의 p.176도 참고하실 것)

6. 이러한 저자의 대격변설이 소위 멸절설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일까? 저자의 대격변설을 취하게 되면, 이 땅에서의 크리스챤의 문화활동의 적극성이 어떻게 변호될 수 있을까?

 

 

4-불필요한 오해들

 

20: 세 가지 오해들

 

1. 저자가 코이노니아 수누시아라는 개념을 구분하여 제시하는 이유로서 첫 번째 오해는 무엇인가? 이것들의 구분에 따르면, 저자는 신자와 불신자의 문화활동에 있어서의 협력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2. 신자와 불신자들이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동일한 활동을 하여 동일한 결과물을 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활동을 하는 사람들 각각에 의하여 이뤄지는 결과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왜 그런가?

 

3. 두 번째 오해인 공통조절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면, 불신자들의 문화활동의 산물이 영원한 천국에 보존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참고해서 답을 해 보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도 모두 하나의 동일한 문화활동에 참여하게 된다”(p.151). “이렇게 공통적으로 제어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건설자라 하더라도 모두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다”(p.152).

 

4. 창조의 흔적들과 타락의 흔적들로서의 잔여물들을 조정하는 것은, ‘제어 억제와는 달리, 어떻게 항구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가? 천국과 지옥에서도 이런 잔여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5. 이러한 잔여물들이 있다는 것이, 칼빈주의적 고백에 있어서 어떻게 감탄스러울 만큼 위험하게 묘사되는 것인가?

 

6. 이러한 잔여물들만으로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를 만들 수 없다”(p.157)면서 그 돌파구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다고 저자는 암시하는가?

 

7. ‘잔여물들만으로 문화를 건설하고자 할 때 생겨지는 결과들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pp.158~160)?

 

21: 적그리스도와 문화활동

 

1. 하나님의 적극적인 허용을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서 이뤄지는 문화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가?

 

2.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의하여 개진된 문화활동의 최후적 결과는 어떠한가?

 

3. 적그리스도와 문화활동과 대조되는, 공교회적으로, 균질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건설하는 문화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22: 하나님의 왕국과 문화

 

1. 자신들의 눈에 즐거워하던 세상문화의 화려한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자기 눈에 즐거워하던 아내를 잃었다 하더라도, 스가랴선지자처럼 울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왕국의 참된 문화를 건설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충분한 것이, 신자들에게 문화적 자부심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신자들조차 문화적 노력을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목적이 분명하고 구조가 건전하며 기준이 확실한 조화로운 문화가 참으로 현존하는 곳은 언제 어디서인가?

 

4. 참된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성도의 교제와 성도간의 분열이 차지하는 위치는 각각 어떠한가?

 

5. 참된 그리스도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신앙의 위치를 설명해 보세요.

 

 

5-성경적인 문화관에 관한 일곱 가지 결론

 

 

23: 성경적인 문화관1-유일한 문화는 없다

 

1. 유일한 문화가 인간의 내재적 본성에 의하여 불가능한 이유들은 무엇인가?

 

2. 유일한 문화가 불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지체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지체하심의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3. 저자는 문화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열매들인 문화적 산물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송인규의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에서 문화적 산물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평가해 보라.

 

4. 유일한 문화가 없다는 저자의 결론이 선교에 대해서 어떤 함축성을 제공해 준다고 여기는가?

 

 

24: 성경적인 문화관2-문화는 구체적인 섬김이다

 

1. 문화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p.179)라는 저자의 말을 자기가 이해하는 식으로 말해 보시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설정되는 것이 어떻게 지역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할까?

 

 

25: 성경적인 문화관3-문화는 때때로 자제가 필요하다

 

1. (소극적인 면에서) 저자는 신실한 사람이 어떤 문화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거의 불가능해 보여서 그 영역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죄악이며,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를 통해서 저자의 문화관을 평가해 보자.

 

2. (적극적인 면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전쟁기간이라고 한다. 이 특별한 비상사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왜 문화적으로 자제함이 필요하다고 하는가?

 

3.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저자는 소극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제와 절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영웅들로서의 그리스인들과 그리스도인공동체의 모습을 예로 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4. 저자가 주장하는 소극적인 금욕주의와, 암시적으로 비판되고 있는 적극적인 금욕주의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26: 성경적인 문화관4-문화사명은 태초부터 주어졌다

 

1. 저자가 허용가능하느냐 않느냐는 개념을 담고 있는 일반은총이란 용어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사명개념을 담고 있는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2. ‘일반은총 개념이 잘못된 이유를 저자는 세 가지로 든다. 무엇들인가?

 

3. “문화는 당위의 문제이다”(p.192)는 저자의 말을 설명해 보라.

 

4. 기독교나 칼빈주의가 고유한 예술양식을 계획할 수 없으며 계획해서도 안된다는 견해에 저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비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27: 성경적인 문화관5-교회는 가장 간접적인 문화세력이다

 

1. 저자는 총괄갱신이란 용어와 개념을 다양한 저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소개의 의도와 결론은 무엇인가?

 

2. 만물의 총괄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은 교회의 문화활동에 있어서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3. ‘유기체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이 왜 교회를 죽이고, 교회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고 저자는 혹평하고 있는 것일까? 카이퍼가 주장하는 이 유기체로서의 교회개념과 저자의 교회개념을 비교해 보라.

 

4. 교회가 문화사역에서 간접적이어야 한다면,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5.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열쇠가 되는데도 교회가 직접적으로 문화사역에 앞장 서거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에 등한히 하게 될 때 생기는 현상과 이 문제를 관련시킨다. 그 관련성은 무엇인가?

 

28: 성경적인 문화관6-그리스도 없이는 참된 문화도 없다

 

1. 시내산의 율법이 산상보훈의 말씀은 모두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전체로서 한 집단에게 주어졌는가? 아니면 전체를 이루는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졌는가?

 

2. 이런 질문이 교회와 개인의 문화활동에 있어서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3. 산상수훈(이나 요한계시록194)에서 주어진 명령과 고린도전서510절 말씀에서 주어진 명령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4. 3번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로서의 수누시아와 날마다 교제해야 할 우리의 의무로서의 코이노니아 사이의 긴장을 설명해 보시오.

 

5. 이런 긴장 가운데서도 참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원리는 무엇인가?

 

29: 성경적인 문화관7-문화는 끝이 없는 과제이다

 

1. 문화를 고려할 때 언제나 원래의 부르심, 창조 때 주어진 과제, 즉 원래의 직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어떤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저자는 경고하는가?

 

2. 참된 문화활동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의식하게 될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2주일의 두 번째 답변에 있는 대로) 반드시 고려하게 된 세 가지 직분들과 그 역할은 무엇인가?

 

3. 우리는 삼중직의 직분자로서 우리의 끝없는 과제를 어디에서 수행하게 되는가?

 

4. 이러한 끊임없는 과제수행의 한 예로서, 장로가 하나의 문화세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하면서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문화- 클라스 스킬더(번역:손성은)

2019-04-06 21:53:09


그리스도와 문화(클라스 스킬더/번역 손성은)

서론(Richard J. Mouw/번역 손성은)

 

저는 클라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런 유형의 영역본을 수십년간 고대해 왔습니다. 1977년판은 저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만, 읽기가 쉽지가 않고, 화란 개혁신앙인들의 생활과 사고에 아무런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급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얼마간 더욱 자세한 설명들을 담고 더욱 더 가독성이 있는 번역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번역본의 출현은 영어권 세계에 적시에 등장하였습니다. 특별히 북아메리카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아브라함 카이퍼과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에 대해서 오늘날 광범위하게 흥미를 갖게 된 시점에서 말입니다. 이들 두 명의 신학자들은 스킬더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무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빙크의 네 권짜리 개혁교의학이 이제 영어(와 한글로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카이퍼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번역하고자 하는 계획이 실행 중입니다. 제가 카이퍼와 바빙크의 신칼빈주의의 전망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자임은 비밀사항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또한 스킬더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특별히 그가 카이퍼적인 전망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본서에서 카이퍼에 대해서 얼마간 냉혹한 비판들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스킬더는 스킬더의 각인이 찍힌 일반은총교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카이퍼의 정교한 영역주권체계에 디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카이퍼와 바빙크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문화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문화 안에서 그들은 구속받지 못한 자들과 구속받은 자들의 생활과 사상의 근본적인 패턴들 사이에 급진적인 반정립”(antitheses)을 긍정적으로 보는 하나의 건강한 긴장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자신의 공식적인 입장의 대부분에 있어서 그 스펙트럼의 반대편 입장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신칼빈주의 체계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스킬더는 여러 가지 중요한 뉘앙스들을 소개하는데, 그 결과로, 그가 카이퍼적인 사상에 대해서 동정적이었던 것보다 더욱 동정적인 우리들이, 그가 말해야만 하는 것과 씨름하게 되어, 심지어는 그가 말하고자 했던 요점들에 상당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문화적 산물들에 대한 스킬더의 별로 희망을 갖지 않는 평가는, 우리가 간혹 재침례파와 경건주의자들의 전망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정당하지 못한 지나친 대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과 같이 문화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제한시키기는커녕, 스킬더는 문화활동의 길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분별하는 중에 우리는 역사의 실제적인 전개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기독교인들의 문화활동에 참여한 것에 무엇이 적절한 것이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현재 인간 역사의 중간의 중간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 큰 중간기가 타락의 저주로 인하여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욱 광범위한 그 역사적 전망 안에서, 더 큰 중간기 안에 있는 더 짧은 중간기를 현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더 짧은 중간기는 일반문화가 아직은 반기독교적이지 않았던 시대의 끝부분쯤 시작되었고 그것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반기독교적인 문화적 상황을 향하여 지금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제 다가오게 되는 그 위기는 “‘불법의 사람’(살후2;3) 그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스킬더는 언급합니다. “그 사람은 거짓 선지자들의 선전부서의 옹호를 받을, 위대한 문화의 영웅(하지만 죄에 있어서만 위대한 영웅)일 것이며,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짐승(13)일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시작하면서, 스킬더는 카이퍼리안들 사이에 있는 한 경향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들 카이퍼리안들은 다양한 비극적 성경의 예언의 시나리오들에 때로는 너무나도 강하게 반대하여서 이제 곧 다가오게 될 악의 엄청난 현현에 대한 성경의 진정한 경고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이러한 예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문화에 참여하게 될 때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식의 비상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화의 문제를 제안하는데 있어서 구속역사의 실제적인 패턴들에 스킬더가 강조하는 것은, 문화의 신학의 기본적인 것들을 공식화하는데 있어서 그가 얼마나 더욱 주의하고자 하는지를 지적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카이퍼의 영역주권 시나리오를 비판하는데 있어서, 그는 카이퍼가 창세기의 창조기사의 그 종류를 따라서라는 말을 인용해 놓고는 너무도 빨리 다양한 문화의 영역들에게로 옮겨서 그 각각에 독특한 권위-구조가 있는 것처럼 옮겨간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한 동물의 영역에서 다양한 문화적 상호작용의 패턴들을 주장하는 것에 옮겨가는 것은, 스킬더가 주장하기를, “오히려 엄청난 비약입니다 - 카이퍼의 주장을 위한 기로초서 작용하기로는 너무나도 엄청난 비약인 것입니다. 스킬더는 이것에 대해서 옳습니다. 비록 제가 확신하기로는 다양한 창조의 영역을 위한 카이퍼적인 유형의 이론의 근본적인 원리가 발전되어질 수 있다고 보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카이퍼 자신이 제공하지 않고 있는 여러 가지 필요한 신학적 시도들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카이퍼리안들이 적극적인 문화적 참여를 위하여 간혹 정당성을 확보해 온 방법을 설득력있는 비판서를 제출하면서 스킬더는, 그들의 신학적 전망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어서 카이퍼에게 열정적으로 의견을 같이하여 특별히 재침례교도들의 세상-도피적 경건주의자들과 바르트주의자들의 전망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결국, 본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문화적 발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스킬더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는 당연히 문화의 주님이시며 그분의 추종자들은 모든 생활의 국면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문화적 복종에 대한 부르심은 스킬더의 교회생활과 사명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는 그 문화적 권위를 우리가 분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광범위한 주목도 하지 않은 채로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논의에 우리가 뛰어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가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순종적인 제자들로서 따르도록 명령을 받은 그 예수는, 하늘이 파송한 구주이시고 주님이시며, 처음부터 창조시에 역사해 오셨던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시고, 또한 언젠가 그 왕국의 완성 가운데서 진입해 들어오실 분이십니다. 그 왕국에 대해서 유일하시며 참되시고 의로우신 주권자로서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기본적인 문화신학은 어떤 카이퍼리안이 바랄 수 있는 만큼 확고합니다. 그리고 dfl가 만약 하나님의 문화적 설계에 대한 그의 강한 확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전략들을 공식화하는데 있어서 스킬더가 그렇게 경계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화적 사명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 속한 것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챤 공동체가 자발적인 절제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그리스도의 대의에 대한 충성의무로서 필요로 할 수 있는 것들로부터라도 말입니다. 이런 절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왕국 안에서, “전쟁이 끝나게 될 그 날을 기대하는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훈련, 또한 자기-금욕’, 자기계발을 하고자 하려는 실행일 때에만 합법적입니다.

 

한편, 스킬더가, 모든 인간들과 더불어 함께 하고 있다는, 수누시아에 대해서 우리가 시선을 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선택된 지체들로서 우리를 모두 함께 묶어주는 특별한 코이노니아를 강화시키는데 있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의 지체들로서, 수누시아 안에서 코이노니아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크리스챤 문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족의 유대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매일의 수고에 진력하며,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들에게 할당되어 있는 몫으로서 가정들을 방문하는 것 - 이것들이 문화적 활동으로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과학계 전체집단보다도 더 가치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임으로서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지혜로운 그 관찰들 속에서, 스킬더는 우리들에게 지적하는 것이 - 본서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 크리스챤 생활과 사고의 “the ABC”입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을 분별하려고 하는 시도에 있어서 생각해 볼 거리들을 많이 제공해 줍니다. 그것은,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세계의 복잡한 문화적 도전들 가운데서 이러한 결코 협상할 수 없는 기본들 위에서 왕되신 예수를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구체화시켜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유형의 시간을 보내도록 놓여져 있는 그 세상 속에서 말입니다. 스킬더의 이 놀라운 책은 우리들에게 우리들 앞에 놓여진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지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N.H.Gootjes(번역: 손성은)

 

서론

 

K.스킬더를 추념하면서 문화에 주목하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킬더는 문화에 대해서 대단히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문화를 모든 크리스챤들이 관심을 가져할 그런 방식으로 정의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삶의 어떠한 영역에 있어서도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으시는 곳이 손톱만큼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카이퍼의 이 문장은 스킬더의 확신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개혁신자들이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부터의 개혁교회들 안에서의 많은 활동들은 문화에 대해서 스킬더가 제기하였던 말들을 배경으로 하여 설명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활동을 요약하는 문구인 문화적 사명(cultural mandate)라는 표현도 스킬더에 의해서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문화에 대한 스킬더의 관점은 너무나도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스킬더의 문화관은 그의 신학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 측면들 중의 하나였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O.Noordmans박사는 스킬더가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에서 신학부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표명된 스킬더의 견해를 담은 소논문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자 스킬더는 그를 자신이 매주일 편집하고 있는 De Roformatie지에 초청하여 그 비판하는 견해를 발표하게 하였습니다. Noordmans는 스킬더의 문화에 관한 소논문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내가 교육받았던 그 동일한 믿음인지, 혹은 개혁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가 그 개혁신앙의 전통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다른 복음에서 그 진액을 취한 것은 아닌지 하는 질문을 억제할 수 없는, 그런 새로운 종교가 여기에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스킬더의 문화관이 복음에 전혀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고 하는 그의 첫인상은 그의 소논문의 끝부분에 이르게 되어서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끝부분에서 그것을 일반은총을 이렇게 절대화시키는 것, 성경을 이렇게 모독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Noordmans는 스킬더가 속하고 있던, 개혁교회소속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개혁교회 안에서도 스킬더는 반대에 직면하였습니다. 주요 논적은 자유대학의 동료교수였던 V.Hepp박사였습니다. 그의 의견은 스킬더의 문화관이 그 당시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변질(deformation)에 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킬더의 문화에 관한 견해들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에는 처음 때처럼 혹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스킬더의 확신들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또한 거부되고 있는 것들 중의 몇 가지입니다. 단 하나의 예만 들어 본다면, 1990 4, 자유대학에서 스킬더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습니다. 참석자들 중의 한 명의 인상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스킬더의 거의 유일한 작품인 양 여겨졌었고 또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킬더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 동안에 발표된 많은 소논문들과 강연들이 스킬더의 문화관을 비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킬더의 유산 중에서 이 중요한 부분에 한번 더 우리들 스스로 직면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중심주제인, 문화적 사명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강경하게 저항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 견해는 도대체 무엇인가? 스킬더는 A.Kuper박사 없이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카이퍼박사는 거의 혼자서 개혁교회들을 위한 세계관을 발전시켰고, 따라서 그 생활을 조직하였던 인물입니다. 문화에 대한 카이퍼의 사상을 간략하게 다룬 뒤에, 우리는 다시금 스킬더로 되돌아 오겠습니다.

 

문화에 대한 카이퍼의 견해

 

1920년 즈음에 존재하였던 개혁주의계통의 세계는, 여러 방향으로 뻗쳐나갔는데, 카이퍼의 창조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의 책들은 문화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문화를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문화라는 말이 언급될 것으로 여겨지는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칼빈주의에 대한 강연입니다. 카이퍼는 칼빈주의와 정치”, “칼빈주의와 학문연구”, 그리고 칼빈주의와 예술을 다루었지만, 칼빈주의와 문화에 관한 강연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카이퍼가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문명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카이퍼에 따르면,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마치 농부와도 같아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물들을 관리하고 그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시켜 줍니다. 문화 속에서, 사람은 자기 생명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자들로서 여겨집니다. 문화라는 단어는 인간 중심적이기 때문에, 카이퍼는 대신해서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원합니다. 그에게 따르면, 칼빈과 우리의 개혁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에, 일반은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완화시키시고, 모든 분야들에서 인간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문화에 대하여 특별한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카이퍼에 따르면, 문화는 은혜의 문제입니다. 죄로 가득차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라도 우리는 많은 발전과 위대한 문화적 성취들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문화적 발전은 무엇보다도 일반은총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에서든 발전해 왔습니다. 동시에 일반은총에 기초한 문화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오직 특별은총이 더하여져야 문화가 그 완전한 성장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카이퍼의 이런 관점을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그가 제공해주는 역사에 대한 주석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문명들이 중국과 일본, 어메리카와 인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주목을 요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매우 발달된 인간사회가 이런 나라들 가운데서 세워졌었던 것입니다. 카이퍼는 여기서 기독교신앙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화적 발전들이 있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 문화들은 일반은총만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화적 발전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진보를 통해서 나아가야 하는 그 중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국가들의 역사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도로 발전된 문명들이 멕시코와 페루에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명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들 나라들에서 인디안족들의 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인도에서는 그 상황이 다릅니다. 매우 발달된 그 문화가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성장이 멈춰 버렸습니다  더 이상 발전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체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이 나라는 서구적 문화의 결과물들(철도, 전신 등)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더욱 놀라운 발전의 예는 중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들에서 우리는 질서정연한 사회들, 높은 수준들의 예술적이면서 지적인 발전과 번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퍼의 말로 하자면, “이 나라들에서의 일반은총의 열매는 대단히 풍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발전들은 제한되었습니다. 먼저, 일반은총의 그 결과는 이들 국가들 자체들에 제한되었습니다. 전체로서의 인류는 이들 문화들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들 문명은 지속적인 이득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서구문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 국가의 문화들은 말라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은총은 그 국가들에 대해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끼칩니다. 장소와 시간상 제한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인구에게는 축복을 주지만, 다른 국가들은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닿게 되는 인구들 안에서조차도 문화는 어느 한계 안에서 발전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문화는 쇠퇴하고 화석화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국가에 제한되어지지 않고 다른 모든 민족을 축복하도록 운명이 지워진 일반은총의 발전이 또한 있습니다. 이 발전은 어떤 기간에 제한되어지지 않고 모든 시대를 거쳐서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 발전은 어떤 수준에서 멈춰버리지 않고 계속 그 이상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과 이집트에서 시작되어지고, 그리스와 로마에서 어느 정도 꽃을 피웠고 그 뒤 기독교에 의하여 동화되어진 일반은총의 발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그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발전을 계속해 왔습니다.

 

카이퍼는 여기서 일반은총은, 그것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있었던 것과 같이, 기독교를 위한 하나의 예비단계였음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 더하여 졌을 때, 이 문화는 이전에 없던 발전으로 꽃이 피었습니다. 서구문화의 확장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시면서 그것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레코-로마 문화에 기독교 종교를 첨가하셨습니다. 일반은총은 서구문명의 뿌리 속에 전개되어 오면서 그리스도의 특별은총 때문에 더욱 높은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서구문화의 특별한 성격이 이제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특별은총)과 문명의 발달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가 되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서구문명과는 별개의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 문명을 발전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한번 창조되어진 그 동일한 고대세계이고 또한 그렇게 남아있는데, 일반은총에 의하여 보존되어지고, 또한 특별은총에 의하여 그 생명의 핵심에 있어서 회복되어지고 그 뿌리에 있는 암이 제거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문명들은 사라져 버렸거나 그 권세가 깨어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에 민족들을 인도하는 일이 맡겨진 이후로, 일반은총은 언제나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서 새로운 대로들을 열어 줍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기독교 세계는 모든 역사상 우리 인류의 최고의 발전단계에 이르렀고 더욱 발전해 갈 운명인 것 같습니다.

 

카이퍼의 이 관점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그가 세계역사에 대해서 가졌던, 기절케 할 만한 관점에 의하여 인상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이 관점에서는 영혼을 구하거나 사람을 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문화도 구원하시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취하셔서 그것 속에 기독교의 능력들을 주입하셨습니다. 그 결과, 고전문화가 다른 모든 문화들의 힘을 빨아먹어버리는 그 치명적인 질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서구문화가 다른 문명들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그 이유입니다. 카이퍼는 다른 문명들의 퇴보와 서구문명의 진보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카이퍼가 여기서 문화역사학자 카이퍼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어떤 기독교문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에 의하여 영향을 입은 서구문화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챤문화를 이루기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서구문화의 계속적인 기독교화를 위하여 일해야 할 뿐입니다. 정치와 고등교육을 위한 카이퍼의 활동은 이런 문화관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반혁명당과 자유대학은 서구사회를 더욱 기독교의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수단들이었습니다.

 

카이퍼와 스킬더의 중간시대

 

스킬더의 문화생활에 대한 논문과 카이퍼의 일반은총 사이에는 3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하였습니다. 카이퍼시대의 사람들이 서구문화의 위대함에 대하여 가졌던 거의 무한한 신뢰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유럽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권력이었던 독일이 파멸적인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1차세계대전은 과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진보가 자동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철학에 있어서 주도적인 국가(독일)조차도 이런 야만적인 잔혹성을 행할 수 있을 때, 서구문화에 대해서 낙관적으로 보기는 어려웠고, 이 문화가 고대문명에 대한 크리스챤의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전쟁 이후에 서구문명은 위기에 놓여 졌습니다.

 

하지만, 네델란드개혁교회 안에서, 생활은 이전과 같은 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카이퍼가 창설한 반혁명당과 설립한 자유대학은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반혁명당은 H. Colijn 안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자랑할 수 있었는데, 그는 여러번이나 수상직을 맡았습니다. 자유대학은 확장되어졌습니다. 부서들이 확장되고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또한 문화적 질문들에 대하여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였던 신학자가 K.Schilder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중요성

 

카이퍼 뿐만 아니라, 스킬도 또한 문화와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합니다. 그의 원래의 논문은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이라는 제목이 붙여졌습니다. 확장판이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그 제목이 짧아지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문화. 두 작품 모두 문화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논의를 시작합니다.

 

스킬더는 여기서 하이델베르그문답의 해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분이 구세주로 오셨다는 것을 가르키는 이름입니다. 그분의 직분의 본질은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저 예수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입니다. 이 부분의 이름은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구세주로 임명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문화와 연관해서도 구세주로서 보여 지셔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반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정화되어졌고,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런 의미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땅은 그 합당한 권리를 지니신 원래의 소유주에게로 되돌려져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에게로 함께 기름을 부음받은 자들, 곧 크리스챤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카이퍼와 스킬더가 모두 문화에 대해서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심장함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이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로마문화에 당신의 특별은총을 부으시는 구세주로 보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문화의 구세주인 것입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구세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행하십니다. 이 역사는 불순종의 사람들을 자신의 문화 활동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태초로 돌아감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의무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의 의무입니까?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스킬더에 따르면, 그 의무는 낙원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 의무는 사람이 창조된 이후에 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1:28):“땅을 충만하게 하고 그것을 정복하라.” 이 의무는 또한 에덴동산으로 사람이 인도된 후 하신 말씀 속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2:15): “그것을 경작하여 지키라.”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개발되어진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낙원에서의 인간도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태초에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죄 가운데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불복종 가운데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신 그 구조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연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법에 불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창조주에게 불복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개입해 들어오십니다. 구세주로서 그분께서는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스킬더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역을 또한 문화생활을 위하여서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사람이 다시금 직면하도록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문화적 활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문화란 스킬더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안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이들이 각각 무력증을 느낍니다. 스킬더는 자신의 문화관을 반 페이지에 해당되는 하나의 복합문장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우리는 몇가지 너무나도 중요한 측면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첫째, 문화는 이 세상에서 수행되어지는 전체 활동입니다. Culture(문화)라는 말은 경작하다”(to cultivate)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농부가 풍성하게 추수하기 위해서 그 토지에 행하는 모든 활동이 문화라고 불려집니다. 스킬더는 이것을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는 태초의 명령(2:15)과 연관시킵니다. 그리고선 그 의미를 땅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행하여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서 문화라는 말의 의미를 확장시킵니다.

 

스킬더에 따르면, 문화는 예술의 세계나 예술과 학문에 제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들도 문화에 속하기는 합니다. 스킬더는 개혁신앙인들에게 예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의무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술은 이 세상에서 행하여지는 문화활동의 유일한 것이 아닙니다. 청소부도 가정주부와 같이 문화적 활동을 합니다. 실제로, 이 땅 위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종류의 활동이 문화에 속합니다.

 

스킬더의 문화관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측면은 문화명령은 세계는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입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하게 개발되어진 형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가능성들이 실재가 될 수 있도록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에 있어서 스킬더는 창조에 기초한 진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동산을 하나 예비하셨지만 이 동산 하나는 자녀와 손주들이 태어나게 되면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넓은 땅이 계발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삽이 필요해졌습니다. 삽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와 손이 서로 협력해야 했습니다. 머리가 그것을 고안하고 손이 그것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술적인 창안물들은 사람이 발전시켜야 했던 그 문화에 속하여 있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문화활동의 결과로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문화는 동산에서 도시로의 변화를 의미할 것입니다.

 

문화의 세 번째 중요한 특징은, 문화는 모든 인간의 의무라는 점입니다. 문화적 사명은 처음에는 낙원에 있는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문화활동에 연루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어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일들을 문화적 활동으로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입니다. 땅 위에 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왜 문화적 발전, 이 세상의 발전이 결코 완성되지 않을 것인가 하는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거부하는 이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들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능력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에게는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불복종의 결과로서 그들의 문화활동의 많은 것들이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문화적 성취물들은 단지 몸통만 있는 조각품, 짓다가 만 피라미드일 뿐임이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또한 중생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문화활동에 있어서 순종의 시작이 가시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문화발달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문화도 짓다가 만 피라미드처럼 남겨질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을 들어서 이 점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그들이 소수라는 점입니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에게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뤄져야 할 일을 수행할 만한 인력이 충분히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들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의 손과 눈이 죄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챤이라 하더라도 어떤 유형의 일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마지막 측면은 문화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로부터, 그의 문화적 활동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문화적 발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져, 문화의 산물들은 심지어 위험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망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해롭게 하고 죽이는데도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죄는 또한 문화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이 관점에서, 예를 들자면, 스포츠가 여가를 즐기는 것 대신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 되어버립니다. 스킬더는 소위 크리스챤 신문들에서조차도 교회소식에 대해서는 너무나 적게 다루어지는 반면, 스포츠뉴스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긴 팀에 대한 기사는 대문짝만하게 나가면서도, 영적 투쟁에 대하여서는 한 줄도 언급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중요성을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문화관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 충분히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카이퍼의 문화관만큼 광범위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전포괄적인 관점에서 세계의 전체 역사를 조사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카이퍼의 관점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심령을 파고 들어가며 모든 크리스챤들이 자신의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으로서 수행해야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스킬더의 관점은 심각한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다음 항들에서 우리는 최근의 몇몇 비판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가?

 

스킬더가 주장하는 문화명령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이 여러 번 제기되었습니다. 최근에 어떤 이는 그것을 물거품이라고 불렀습니다. 문화사명은 멋지게 보입니다만, 그것을 만져 보면 성경적인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펑 터져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개혁신학자에게는 최고로 심각한 비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킬더의 이해에 깔려 있는 본문들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스킬더의 주요 논증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크리스챤이 인간의 창조 이후에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그 원래의 순종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셨던가요?

 

창세기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에 대해서 당신 자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사람을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다스린다”(to have dominion)는 뜻의 단어는 여기서 대단히 두드러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통 이 용어가 누군가를 과격하게 복종시킨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발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세상의 태초에, 죄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과격함이 창세기1장에서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그 동사는 또한 노예처럼 부리다”(14:2)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의미를 제거하게 된다면, 이 의미가 창세기1장에 적합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짐승들은 사람들의 종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소가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은 피조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사람에게 그것을 가축으로 만들 권리와 그 우유를 사용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말도 창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뛰어다닙니다. 사람은 그것을 잡을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길들이고 훈련시켜서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된 사람에게 어떤 발전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 발로 걸어서 가는 것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더 무거운 짐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것을 위하여서 얼마나 많은 것을 사람이 고안해 내야 하는지도 상상해 보십시오. 죄없는 세상에서조차도 말입니다. 그는 재갈과 고비, 바퀴와 수레, 마굿간과 담벼락 등을 고안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을 지배하는 것에 속하는 일들입니다. 사람은 또한 양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의 털을 깎고 그 양털로 옷을 지어 만들 수 있습니다. 짐승들에 대한 다스림은 의심할 바 없이 문화적 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다스림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때 더욱 인상적이 됩니다. 그들도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자신들의 형태를 좇아서). 하지만 물고기와 새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사람은 바다와 공중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다스림은 문화적 발달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1:28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다스림의 정도는 하나님께서 26절에서 가리키셨던 것보다 더욱 확대되는 것이 입증됩니다. 처음에는 단지 짐승들에 대한 다스림만이 언급되었는데, 이제 gkskslarptjm 땅에 충만하여 그것을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정복하라는 동사의 의미는 26절의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보면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스린다”(to have dominion)는 단어의 뜻처럼, “정복한다”(to subdue)는 단어는 누군가를 노예로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대하28:10). “땅을 정복한다는 표현은 분명히 짐승들만 아니라, 땅 전체를 인간의 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미합니다. 땅은 아직 사람에 대해서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타락 이전이라고 하더라도 땅은 자동적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습니다. 낙원에서 사람은 땅을 자신의 종으로 사용하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에 대한 이런 다스림은 사람에게 앞에서 말해진 바,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과 연결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죄와 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주어졌습니다.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살다가 자기 자신들의 자녀들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스림과 자녀들을 가지는 것, 이 두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은 더 많은 땅이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작은 단지 동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산 하나로는 태어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지원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많은 땅이 경작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땅을 경작하게 될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절로부터 한 가지 더 언급할 요소가 있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스킬더는 문화사명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사명(Mandate)이라는 것은 그렇게 흔한 단어가 아닌데, 하나의 과제, 의무를 뜻하는 것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무는 낙원에 있는 인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부인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창조가 창세기 2장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그를 동산 가운데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꽃, , 그리고 잔디로 아름답게 가꾸어져있는 경치가 멋있는 도심의 정원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꽃들이 낙원에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그 동산은 일종의 부엌정원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열매맺는 과수가 그곳에 서있고, 그것으로부터 사람은 열매를 따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경작”(to till)해야 했습니다. “경작하는 것은 열매맺는 나무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채소를 키우는데 준비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낙원에서조차도 사람은 어슬렁거리면서 나뭇가지에서 열매를 따 먹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들은 개간하여 씨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켜야 했고, 씨가 뿌려져야 했으며, 곡식은 추수를 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루로 만들어져 빵으로 굽어져야 했습니다. 개간과 추수, 그리고 빵을 굽는 도구들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 사람을 동산에 두어서 그것을 경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무들은 동산에 심기워져 씨뿌리고 추수하는 게절의 변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먹는 것을 제공해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무들은 단지 시작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기 전의 기간에 대해서 기록된 본문들만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 문화적 사명이 타락 이후에는 급격하게 변화되지 않았던가요? 8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6). 사람은 요셉이 애굽을 다스렸듯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45:8,26). 이 시편은 우리들에게 창세기1장을 기억나게 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죄에도 불구하고 태초에 있었던 것과 같은 위치를 창조 가운데에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여러 구절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한 달란트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양의 돈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소유할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의 돈이었습니다. 이 달란트들은 무엇을 가르키는가요? 그것들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능력들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들이 그들의 달란트들을 그 재능대로”(15) 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능력(재능)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종은 다섯 달란트를, 다른 종은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다른 종은 한 달란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달란트들로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달란트들은 주님께서 주신 의무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능력(재능)대로 각각의 의무들을 주십니다. 이런 의무들은 교회 안에서 일하는 것에 제한되는 것일까요? 어느 곳에도 이런 뜻이 언급되어 있거나 함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의무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해야 할 의무가 배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스킬더는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labours together with God)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분명히 고린도전서3:9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본문은 RSV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God’s fellow workers)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는 모든 크리스챤들을 가르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회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자들을 가르킵니다. 회중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불려 집니다.

 

한 구절 더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디모데전서4:4~5입니다. 결혼하지 말라 어떤 음식을 먹지 말라는 등의 금욕주의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 굶어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음식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음식은 안 된다거나) 간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역자주: 고재수는 it should be plain.이라고 해서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음식의 간소화만을 가르쳤던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구약율법의 정결례를 따라서 특별한 음식을 금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해서 한글개역성경도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라고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원문은 πέχεσθαι βρωμάτων으로 음식은 먹지 말라고 되어 있다. 한글개역의 어떤이란 말은 해석상 첨가된 것이다). 바울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심지어 맛있게 요리된 음식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선물들(여기서는 음식), 감사함으로 받으면, 개발할 수 있는 하나님의 허락을 보게 됩니다.

 

문화적 사명이 성경적 기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게 말하였습니다.

 

복음과 문화는 상충되는가?

 

문화적 사명의 개념을 반대하는데 제기되는 또 다른 비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잘못된 전망을 그것이 제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을 하는 비판가들은 하나님께서 낙원에서 인간에게 문화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하기를, 이 의무는 우리의 죄악된 세상 가운데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문화적 발전이 아니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문화사명이 성취되었을 때가 아니라, 복음이 모든 곳에 선포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리의 문화적 사명을 성취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끝이 오기 전에 문화가 어떤 수준만큼 발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충분히 발전된 문화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거나 그것을 함축한 바가 있습니까? 나는 이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반대로, 스킬더는 크리스챤들의 모든 문화적 노력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화적 노력은 모두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임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발전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꼭대기가 잘려진 피라미드들”(truncated pyramids)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기간의 성격입니다. 이 기간은 오직 선포해야 할 의무만이 완성되어야 할 때이고, 이 세상에서의 일해야 할 의무는 완성되어야 할 기간이 아닌가요? 만약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면, 이 견해는 크리스챤이라면 자기와 자기 가족이 생활하고 그들의 의무들만 성취할 수 있을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에는 복음전도만 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게 됩니다.

 

이런 견해는 분명하게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됩니다. 예를 들자면, 세례요한이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하였을 때 그는 세리들에게 너희들의 일을 그만두고 나가서 전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3:13을 보면,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왔을 때 그는 그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말하기를,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3:14)고 하였습니다. 아니면,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알렉산더의 문제(딤후4:14)은 그가 구리 세공업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복음에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종들은 종들로서 신실하게 일해야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평신도)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기간의 의미는 복음전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성령께서 크리스챤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셔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기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매일의 일들(군인들로서, 종들로서, 등등)을 보고 일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빛 가운데서, 심지어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닌 세계 속에서조차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이 기간 가운데서, 각각의 신자가 자신의 매일의 일을 성취하는 방식에서, 중생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일은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필수적인 것 그 이상의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사명은 환경을 파괴하는가?

 

스킬더의 문화사명이란 관점에 대한 세 번째 비판은, 더욱 실제적입니다. 세계를 개발하는 위험들이 가시적이 되어버린 시대에 어떻게 문화적 사명이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요? 문호나ᅟᅳᆫ 위대한 진보를 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진보는 자연을 손상시키고 말았습니다. 세계는 문화적 사명이란 미명 하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들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의무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문화적 사명이란 개념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연이 인간의 지구상의 자원들에 가한 사용 아래에서 손상을 입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부분을 파괴시켰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문화사명이 이것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인류는 스킬더가 문화사명에 대해서 말하기 훨씬 이전 몇 세기 전부터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오용은 스킬더의 문화적 사명에 의하여 영향을 입은 (오히려 제한된) 그룹을 훨씬 넘어서서 발견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사명이란 개념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원하는 무엇이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자연자원을 고갈시키고, 식물과 짐승들을 죽이며, 오염물질만 남겨두지 않게 하였습니까? 이런 점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스킬더가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 중의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얻어야 한다(we have to get out of the world everything we can)고 한 것입니다.

 

이 한 표현으로 스킬더를 심판하는 것은 불공정할 것이다. 이 표현 바로 앞부분에서 그는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 분명히 문화적 사명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라는 세 가지 분명한 언급들을 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지구상의 자원들을 그 개별적인 본성에 따라서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 본성에 반대해서 창조물을 사용하는 것 모두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우주와 연관해서 이 자원들을 개발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은 개발하면서 다른 것을 동시에 파괴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인 성경에 복종하면서 자원들을 사용해야 합니다(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p. 108에 나오는 문화의 정의 속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제한점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약탈하는 것(exploitation)은 불법이라는 점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스킬더는 우리들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에 그의 글을 썼습니다. 그의 시대는 놀라울 정도의 기술적이고 산업적인 진보가 이뤄지고 있던 시대이고, 단지 조금씩 그 부정적인 결과들이 가시적이 되어가던 때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불법적인 성장의 결과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킬더가 기대하였던 것보다 더 창조세계를 오용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 경고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오염을 방지할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남긴 오염물질들을 치워버려야 할 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정상적이지 못한 성장, 불법적인 성장, 더러운 성장이지, 창조세계를 이용하는 것 자체나, 그것을 개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인간의 방식이 세계의 파괴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은 문화적 사명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다스림의 결과입니다. 땅을 다스리는 과제는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결론들

 

만약 스킬더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관점이 원리상 성경적이고 정확한 것이라면 그것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 결과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습니다.

 

1.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문화적 활동의 광범위함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땅을 다스리는 것은 먼저 농부의 활동, 들에서 일하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문화는 여기서 경작과 아주 가깝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문화적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에 있는 짐승과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우리들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농부를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이 있습니다. 스킬더는 문화사명을 교수들과 거리의 청소부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월광곡의 작곡가에게도 적용시키고 있는 멋있는 구절을 제시합니다. 문화적 사명 때문에,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할 수만 있다면, 공부하고, 과학자들이 되며, 교수들이 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농부들과 교수들은 서로를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일하는 사명 안에서 협력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말입니다.

 

다음에, 청소부가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계속 돌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땅을 지키라는 명령의 한 부분입니다. 이 명령은 거리들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과 질병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또한 부엌에서 일하는 이들(kitchen workers)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부엌에서 일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주부들이 오래 동안 일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전기용품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여권주의에 저항하면서도 가정주부가 된다는 것은 땅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는 점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한 가정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세상의 자원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개발되어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예술가들은 때로 크리스챤들 사이에 오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술계에게도 그렇게 비난을 받는 책임의 일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술가는 전적으로 자유로와야 하고 의미있는 예술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배양시켜 왔습니다. 크리스챤들이 이런 생각을 거부하는 것을 옳습니다. 하지만, 또한 예술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안에 주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예술가들도, 또한, 피조된 실재로서의 그들의 세계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사명의 관점에서부터 볼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많은 직업들 속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일하는 그 직업으로 인하여 서로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들은 동료 일군들입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결과는, 우리의 매일의 활동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복종의 부분으로서 보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들과 일은 우리들 자신의 생활과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가 진전하기 위한 충분한 돈을 우리들에게 제공해주는 방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매일의 직업이 주님을 섬기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모든 직업들에는 힘들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면서 피곤한 일을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매일의 의무의 한 부분으로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일하는 것이 더 쉬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일의 힘듦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참아내어야 합니다(다시금, 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일군들은 추수가 이르게 되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일이 잘 수행되어지면 만족이 오게 됩니다. 이 기쁨도 또한 주님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노동절은 크리스챤들이 즐기고 축하해야 할 날인 것입니다.

 

문화적 사명은 우리들에게 또한 주간의 일들에 대한 올바른 전망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발걸음을 질질 끌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말이 되어서 모든 일들을 뒤로 제쳐둘 때에야 즐거워하기 시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말을 강조하고 주간의 일들은 하나의 필요악인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챤들은 주말의 자유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고, 매일이 일들이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일들의 질이 향상되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 결과는 교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들의 의무에 관계된다. 스킬더는 바울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문화적 권력(a cultural power)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은 태초로부터 주어진 의무를 신자들에게 다시금 대면시킵니다.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복음은 매일의 직업을 하나님께 대한 섬김의 빛 속에 위치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신자의 내면생활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매일의 일들이 설교의 영역 안에 들어옵니다. 설교는 목사의 회중들의 매일의 삶을 다뤄야 합니다. 일터와 학교에서의 윤리를 언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것이 장로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실, 스킬더는 자신의 책을 장로를 언급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옳은 방식으로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우리의 지혜로운 장로야말로 복된 자이다. 자신은 모를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의 문화세력이다.” 장로가 가정을 심방할 때 그들은 그 가정의 하나님 앞에서의 매일의 삶에 대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마약 장로들이 자신의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하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과 관련해서, 그는 우리의 문화적 사명, 일터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의 문화적 사명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문화적 사명에 대해서 가르쳐 준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너의 매일의 활동을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에게 주셨던 그 의무의 한 부분으로서 보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것을 행하라;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라.

 

 

 

스킬더: 문화의 열쇠, 그리스도

헨리 반틸/번역: 손성은(천국제자들교회)

 

클라스 스킬더(1890~1952)는 카이퍼(Kuyper) 이후 개혁신학계 내 알려진 가장 위대한 문화신학자입니다. 카이퍼와는 일반은총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또한 그것 대신 '일반명령'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의 본 연구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카이퍼 이후 스킬더는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한 화란 칼빈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변증학자였습니다. 그는 인간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권위를 강조했던 칼빈의 강조하는 그 점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하나님을 역사와 일치시켰던 헤겔(Hegel)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하늘이 선포하고 있음을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그의 제자들인 바르트(Barth), 브룬너(Brunner), 틸리히(Tillich) 등에 대해서도 결코 적지 않게 비판합니다. 그들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분리되지(seperate)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disjunction)은 언제나 더욱 깊은 결합(conjunction)의 기초 위에 있는 것이고, 또한 그 결합이 그 분리를 결정하며 상대화시키고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스킬더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자연, 하나님과 역사, 하나님과 피조물, 은총과 자연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습니다. 대립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죄와 은총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저항하는 적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우주 안에서의 대립입니다. 기원 후 1900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연관성을 아무 것도 찾지 않고 있는 키에르고르에 반대해서, 스킬더는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중심에 서 계시며 또한 그 분의 승천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모든 것이 되시는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성육신은,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역 곧 창조 없이는, 그리고 창조 이후의 섭리 가운데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 없이는,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칼케돈신조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인성과 연합되어 있으나 결코 혼합되어 있지 않으신 분이신데, 이런 고백에는 기독교적 역사관과 천국관이 농축되어 있습니다(앞의 책, p. 68). 역사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한 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자연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정죄하실 뿐이고, 오히려 자연과 역사를 그 원래의 무흠했던 목적을 성취하도록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문화의 비밀입니다. 그것은 기름부으신 자인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를 위하여 담당하셨던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또한 우리들의 첫 번째 조상에게 원래 주어졌던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를 우리가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원래의 자리에 회복시켜 놓으신 분(Replacement)이십니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으심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하이델베르그문답, 주의 날 12), 문화에 대해서 크리스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기름부음 받으심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아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선포되셨고, 또한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이 성취하지 못했던 그 일, 곧 하나님의 만드신 작품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한, 당대의 하나님의 직분자(God's officer of the day)로서 위임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의하여 능력이 입히우셨을(empowered)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능력으로 행하실(enabled)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분의 기름부음받으심은 성취의 보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을 아버지에게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1:20).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십니다.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애초에 계획하셨던 일을 일어나도록 하고 계십니다(앞의 책, p. 129). 산 영(a living soul)으로서의 아담은 당연히 인류사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생명을 주시는 영(life-giving spirit)이셔서, 사람들을 당신과의 교제로 부르시고 계시고 또한 부르신 자들을 창조시에 첫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의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드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후자(곧 사람들)은 기본적으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자(image-bearer)로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담지하는 자(officer-bearer)로서 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참된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우주의 질서였습니다. 그 안에서, 위임받았고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소명의 개념이 문화의 본질에 있어서 결정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반역하였고, 아버지에 대한 자기자신의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동맹하였습니다. 피조된 자연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은 의식(consciousness)과 양심(conscience)을 모두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쓰여진 편지이면서 동시에 읽는 자(해석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좋았던 땅을 개발시켜서 암시되어 있던 것을 구체화시키고, 잠재되어 있던 것을 열매맺게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조주되신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세계를 좋다고 선포하셨지만 그 자체로는 완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촉진되는 진화(evolution)와 발전(development)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영원한 쉼의 안식이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자기계발(self-culture)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성품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하는 인격주의적 의미로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과 존재 자체의 목적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자기영광화이기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목적으로 두는 이러한 인격주의는 분명히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또 다른 결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일로만 아니라, 문화의 도구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목적에서 과정만을 떼어내어서 그 목적 대신에 수단만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무익한 종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는 분리를 야기시킵니다. 창조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그 동료인간들, 종교와 문화, 이 모든 관계들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분해가 일어나고 우주의 아름다운 전체적 조화는 산산조각나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보편화시키는 영혼(catholicizing spirit)을 상실해 버려서, 더 이상 그 모든 것들의 통일과 목적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하나님의 창조적 규례(the creative ordinances)를 폐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규례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행위의 언약 속에서 우리의 피조성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 의무(common obligation)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결코 개인적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이르게 되도록 인도하려고 힘씁니다. 낙원(에덴동산)은 낭만적이고 고립된 장소로서 영혼의 한 기능으로서의 종교를 실행했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사람이 거주하게 된 땅의 시작이었고, 문화적 세계의 시초였습니다. 존 프린드(John Vriend)가 하나의 괴물적인 문장(a monstrous sentence)라고 부르면서 번역하였던, 문화를 정의한 스킬더의 문장에 의하면, 문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화는) 인류전체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생산되어질 자원개발노동의 총체(the aggregate of exploitive labor)를 향한 조직적인 노력이다. 인류에게는, 창조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들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대로 그것들을 드러내어야 할 과제, 그것들을 그들 각자의 본성들의 법칙들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개발해야 할 과제, 그리고 그것들을 원근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의 기준에 복종해야 한다. 그 과제의 목적은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얻어진 보물들을 예배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되게 하며, 결과적으로, 이제는 더욱 철저하게 갖춰진 인간과 함께, 그것들을 하나님의 발 앞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돌려져야 한다.”

 

죄많은 세상 속에서 이러한 의미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은총(common grace) 때문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스킬더는 또한 성령님의 일반적인 활동 속에 일반은총이란 것을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죄의 억제라는 개념은 스킬더도 부인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은혜의 억제의 개념으로 보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억제는 시간 속에 고유한 것입니다. 이런 억제가 멈추게 되면 시간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낙원(곧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축복을 주시는 일에 억제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완전한 축복을 주셨다면) 타락이란 사건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제란 우리의 한시적 존재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세상 일반에 대하여 베푸신 은혜로우신 분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은총을 적절한 맥락에서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추론적으로 일반저주(common curse)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카이퍼의 정의에 의하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안식일은, 하나의 임시적인 휴지(katapausis), 곧 그 저주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스킬더에게는 너무 부정적입니다. 인간이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still has) 것 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세울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가능성(may)은 하나의 당위성(must)입니다. 물론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우리들에게 남겨진 것으로 우리가 출발한다고 하는 것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여전히 지니고 있거나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는 질문은 행위언약에 있어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루게 됩니다. 이 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담지한 자(office-bearer)인데, 그 원래의 직무가 하나님을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what we still have)으로부터 논증하는 지성은 자아중심적이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을 너무 쉽게 벗어버리고자 하는 게으른 종의 태도입니다(was is de Hemel, p. 286).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진 위대한 과제를 여태(not yet) 끝내지 못했나이다고 말하는 복종적인 아들의 말로 말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애당초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을 계속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애당초부터 주어져 있었던 그것을 우리들에게 지금도 의무적인 것으로 부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여태”(not-yet) 끝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팔복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배고프며 비참하고 애통하며 땅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불신세계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렇게도 많은 좋은 것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궁핍하고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킬더는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을 논증합니다. 그러기에 타락 이후의 시간의 연장은 은혜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신 것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을 번성시키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단순히 연장하셨다는 그것 자체는 축복이나 저주가 되는 것이 니라, 오히려 역사가 진행되고 문화가 산출될 수 있는 기층을 제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역시 자연을 개발하는 것도 은혜가 아니라, 단지 자연적인 과정의 부분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두신 내재적인 능력의 결과입니다. 과정 중에 있는 땅(becoming earth)으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서 그 열매를 산출케 하는 그것은, 또한 자신도 과정 중인 인간 안에 있는 격렬하고도 열렬한 충동입니다. 문화에의 본능(the instinct to culture)은 심겨진 것입니다. 낙원(에덴동산)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활동이었다면, 타락 이후에는 그것이 마치 팔리터(Pallieter)의 사고방식과 같이 자아중심적이고 자기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스킬더는 말합니다. , 시간 속의 자연(nature-in-time)은 운동과 발전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구상하고 실현하는 것은 역사 과정의 부분이며, 문화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간상 연장되는 것, 곧 단순한 문화적 활동이란 사실 그 자체를 은혜로 지칭한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Chr. and Cult., p. 63).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일, 아니면 자녀를 낳는 일 자체에는 은혜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일들 자체에 어떤 저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advent's-work)로서, 믿음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역사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적 성취에 효과를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보편적인 은혜란 전혀 없습니다(Ibid., p. 64). 비슷하게, 믿음도 없이 먹고 마시며 모태인 땅으로부터 생산하게 되는 모든 불경건한 문화(colere) 위에는 저주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에 대립이라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립은 자연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사용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곧 문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킬더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가져오게 될 파국적인 사건을 예견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갖고 종말론적으로 사고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서 우리가 문화를 보게 된다면, 문화조차도 천국을 위하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하여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문화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역사해서는 안된다면 오히려 놀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우리들에게 폭넓은 전망을 제공해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은총교리를 남용하는 자들의 폭만큼은 넓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감각주의자이고 에피큐리안들이어서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며, 단지 질문하는 것은, 자신들의 영원한 복지에 위험을 주는 것이 아닌 한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킬더의 관점에 제공하는 전망의 폭은, 직분담지자(office-bearer)의 폭넓은 우주적 관점입니다. 직분담지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준비하는 것으로서의 문화적 활동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시간 전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85).

 

크리스챤들은 비중생자들의 문화적 테이블들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르기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속문화의 북채”(drumstick)에 손을 대어 흥을 돋우는 크리스챤 식도락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일반은총에 대해서 말하려면 반드시 그 방계개념인 일반저주도 동시에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Ibid., p. 287). 그 둘은 모두 알곡과 가라지가 추수의 때까지 자랄 수 있도록, 완전한 축복과 완전한 저주를 잠시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받기에 마땅한 자들이지만 우리들은 아름다운 자연, 훌륭한 교향악, 드라마와 텔레비전 같이 좋은 것들을 여전히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문제를 너무 좁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게 되면, 낙원(에덴동산)에서 명령과 약속이 시작되었고, 사역의 명령과 사역의 재료들 모두가 미래, 곧 하나님의 안식이 시작되는 역사의 파국적 시점을 가르키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전망을 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Ibid., p.287). 그러므로 은혜라는 말은 너무나도 좁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입니다. 낙원을 잃었고 다시 찾는 것, 그 둘 사이에 있는 머나먼 여정은, 위임, 명령, 사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인간에게 요구하셨던 그것을 지금도 수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잘못이 아닙니다(Heidelberg Catechism, L.D. IV). 오히려 이것은 문화문제의 경외심을 고무시키는 측면을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이 지고 계시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형벌을 받지 않고는 창조주의 이러한 주장을 회피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88).

 

스킬더는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영역”(common terrain)이라는 개념도 폐기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활동영역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일반은혜의 영역으로서 문화적 영역을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두 개의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중립지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휴식과 공통의 여흥을 줄기는 장소, 일반적인 쉼의 영역 말입니다. 우리가 최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공통의 작업장(a common workshop)인 세상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의 공통의 문화(a common culture)를 함께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Ibid., p. 289). (물론) 하나님의 피조물인 형상담지자(image-bearer)의 보편적인 인간성의 결과로서 세상 속에 모든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a being together, sunousia)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에 세상을 두 부분으로 분리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문화사명과 문화충동은 여전히 모든 인류의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자연만 있습니다. 단지 그 자연이 이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재료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이중적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역이 있지만, 그것이 이중적으로 개발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문화충동이 있는데 단지 이중의 문화적 추구가 있습니다(Chr. and Cult., p. 76). 문화적 투쟁에 있어서 친구와 원수의 산물이 서로간에 엇비슷한 것은, 모든 작업이 자연의 법칙에 종속하는 것 때문이며, 또한 다루기 힘든 물질들은 공예인과 예술가의 뜻을 따라서 주조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일반은혜개념의 기초위에서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동시대의 제자들의 전체 구조물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그리스도를 문화를 여는 열쇠요 단서의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인류가 참된 종교와 참된 문화로 되돌아 오는 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일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공의와 분노하심이 해소되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복종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Redeeemer-Saviour)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복수자(Avenger of God's justice)로서 타락 이후 즉각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이 이중의 측면에서 그 분은 세상의 구주이시고 또한 문화적 성취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미래를 보증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공동체, 그의 종들을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동력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낙원(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던, 인류의 행군명령을 새롭게 선포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문화의 그 원초적 인간, 곧 아담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과업은 이젠 둘째 아담에 의해서 넘겨졌습니다.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이 구속받은 공동체의 마음들 위에 이 과업의 명령을 다시금 새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 세기 간의 역사가 그 두 개의 낙원들 사이에, 첫 번째 범죄와 그 결정적인 저주 사이에 투입되어졌습니다. 단순히 구원의 역사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구속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분의 사역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Ibid., p. 66). 카이퍼는 교회를 일반은혜의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일반은혜에 의해서 교회는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이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모으시는 한에 있어서는 세상은 단지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90).

 

스킬더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전인적 인간을 생산하심으로 문화를 회복시키십니다. 문화적으로 노쇠하고 파산해 버린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건전한 문화를 생산하는 누룩이었습니다. 문화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천막을 만들며 설교하였던 바울 한 명이 네로의 부패한 궁정의 수천의 궁신들과 고급매춘부들보다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도입은 단지 종교적 부흥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적 개혁이었습니다. 신교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문화적 르네상스의 부활이었습니다. 루터는 실제적인 캐더린(Kathryn)과 행복한 결혼을 하여 자신의 탁상담화에서 즐거우면서도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그의 성경 번역 속에 생생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크리스챤적인 문화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새롭게 된 제네바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스킬더가 크리스챤적 문화라는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들입니다(Chr. and Cult, p. 71). 루터가 이성을 창녀라고 하였을 때 반문화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죄악되고 거만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이성을 영적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간음한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로마제국도 요한계시록에서 음부라고 불려지는데, 그 보호 아래에서 크리스챤들을 핍박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로서 지니고 있는 은사들을 창조주를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 때문입니다. 음부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여성적 본성 때문에가 아니라 그 여성으로서의 본성을 여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어긋나게 사용하기 때문에 정죄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지 않을 때, 헛된 것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의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칼빈이 미친 공헌에 대해서 스킬더는 칼빈이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지 않고 구분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살아있는 사랑을 가르쳤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은 역시 문화적이었던 그 당대의 질서를 갖고 하나님의 신병들(God's recruits)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라는 값진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런 이해에 기초해서 또한 문화라는 값진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만물은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스킬더는,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건전하게 만드심으로 인하여 그들이 다시금 그들의 문화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게 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독특한 크리스챤다운 스타일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크리스챤 가정이 건강한 능력의 계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은 할리우드 속에서 헛되게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가정생활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슬픈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연히 자신을 크리스챤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크리스챤 노동자 한 명이 다시금 비역사적이며, 비즈니스적으로 미국화된 세계 속에 있는 한 조각의 건강함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보지 못한 모든 학문계의 사람들보다 그 (문화적) 정복력에 있어서 더욱 가치있는 사람입니다(Ibid., p. 73). 영적인 개발에 노력하고 그 지역에서 원칙들을 순수하게 지키고 있는 지방교회의 주간지가 화려한 무대보다도 문화건설에 있어서 더 유익합니다. 인생의 길을 인도해주는 성경적으로 건전한 묵상이 일곱 번의 드라마를 관람하는 것보다도 훨씬 값집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상의 능력보다 더욱 강하며, 교리가 이적보다 더욱 강한 것과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문화적인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만 이뤄집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된 교제(koinoonia)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 동일한 본성이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원리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 공통의 목표를 지향하게 될 때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화의 교제는 기본적으로 신앙의 교제의 문제인 것입니다(Ibid., p. 75).

 

하지만, 이 충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그 저주의 효과와 죄에 대한 당신의 진노하심을 완화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인간성(sunousia)의 기초 위에서, 자신들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함께 파편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함께 붙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사탄을 이미 결박하셨고, 또한 적그리스도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판만 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절정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고, 어는 것도 완성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음악이나 귀신들의 음악 모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여전히 얼마간 문화가 있다는 것은 사탄이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불경건한 문화는 결코 진정으로 성숙해지 않으며, 결코 절정에 이르게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문화적 마비증세를 일으키는 괴물은 문화를 언제나 뒤쫓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 도구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를 위한 영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교육과 양육의 매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에 심취해서 눈을 가려버리게 되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적그리스도가 와서,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발명품들과 기술적 방법들을 동원해서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문화는, 하나님의 제한하시는 섭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억제하지 않게 될 때, 종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Ibid., p. 84, 85). “유리바다의 이 끝에서 지금도 보이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로 (역사의) 지평선이 활활 불타오르게 될 때, 적그리스도의 문화는, 그 전야제 후에 단지 손발이 없는 몸통만 남게 될 것이다”(Ibid., p. 85). 하지만 숫자 일곱으로 완전함을 상징하고 있는 성경은, 우리들에게 적그리스도가 단지 그 숫자의 절반에만 이르게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계획이 중단될 것이라는 사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명예를 위하여 개최된 적그리스도의 문화축제(kermis)가 결국 중간에 무너져 내린 피라밋 모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간에서 무너져 내린 우울한 피라밋의 모습에 대립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한 애당초부터 참된 규범의 구조물인 교회와 천국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의 교회됨과 문화적인 투쟁을 포함한 모든 투쟁에 있어서 그 교회가 믿음을 통해서만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만큼 종종, 그들은 자신들의 왕궁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때는 웅장하였던 그 나무의 그루터기를 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추방은 단순히 영적인 배교가 일어난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의 추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그 아름다운 성전 모두가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과 문화적으로 경쟁하기를 원하였던 그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서 아무런 내일의 소망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눈물 흘리는 것을 멈추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잘라져버린 믿음을 지닌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나올 것인데 곧 선한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되 문화적인 것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로운 문화의 하나의 건강하고 참된 목적지향의 구조물이, 규범을 확실하게 지키는 스타일을 지닌 모습으로, 강력한 실재가 되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은총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며, 하나님의 사람을 모든 선한 일에 완전하게 구비되도록 하십니다(Ibid., pp. 87, 88).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문화의 유일하게 참된 원천이시며, 또한 개인들을 상호적으로 함께 묶어주는 교제(koinoonia)를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제가 목적론적으로 지향하는 문화건설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입니다(Ibid., p. 88).

 

문화에 대한 이러한 모든 해석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앙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순힌 영적인 일들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보는 것이나 경험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입장에서 말미암는 몇 가지 결과들에 대해서 요약해 보겠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문화만을 위한 문화("de" cultuur)란 없습니다. “순수한 이성(reine Vernunft)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순수한 문화(reine Kultur)란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문화란 단순히 상상 속에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일지라도, 인류의 문화적 추구는 두 종류입니다. 죄와 저주로 인하여 이 이중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대립을 인식해야 합니다(Ibid., p. 89). 세속화과정의 비극적인 드라마가 전개되는 무대로서의 죄의 세상에서는 오직 문화적 단편들만 생산될 뿐입니다. 기본적 통일성이 상실되어버렸고 죄인은 모두 엄청난 종파주의자이고 분리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와 능력이 지연되는 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 세상의 핍박으로 인하여, 또한 세상 사람들 각각의 그리고 공통의 무지로 인하여, 크리스챤들조차도 문화적 단편들만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반역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는, 크리스챤과 문화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문화 그 자체”(culture as such)의 공상에 기초해서 논의가 진행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추상이며 세계영혼과 세계이성(logos)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는 집단형성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자신을 불러주시는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 부르심이 우리의 특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들의 열심(aspiration)이 우리에게 주어진 영감(inspiration)에서 이탈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공통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제를 형성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챤의 문화이다”(Ibid., p. 93).

 

셋째로, 문화적 추구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에 대하여 의문이 일어납니다. 물론, 문화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추구로부터의 회피는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며 결국 스스로 결핍상태에 빠져들고 말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또한 말씀(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과 기도(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로 인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그 자체를 위해서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언제나 죄악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위급사태에서는 필요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추구하며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의 불신적인 아들들 때문에 수고해야 할 짐이 배나 많습니다. 스킬더는 보잘 것 없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 1만원(two quarters)을 지불하는 사람을 세상적인 사람의 예로서 듭니다. 반면 신자들은 위대한 선교사역을 위하여 힘써 아껴 5천원(a quarter)을 절약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출판사, 요양소 등을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자녀들은 그들의 불신의 형제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 때문에 과중한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신자들이 영적 전쟁을 위한 훈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기를 힘쓴다면, 문화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금욕적) 태도에 있어서 크리스챤적 영웅주의(Christian heroism)가 가능할 것입니다. “고등교육을 위하여 자신들의 학교를 후원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그리스도께서 돌보라고 남겨두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그들을 (적그리스도의 선구자인) 국가절대주의의 마수에서 건져내며,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수천가지 다른 과업들을 수행하되,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가 아니라, 예를 든다면, 화려한 크리스챤들의 무대를 계획하거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지닌 하나의 광범위한 크리스챤 조직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공동체입니다”(Ibid., p. 96). 이러한 포기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자기부인입니다(“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19:12을 참고).

 

넷째로, 문화의 질문을 일반은혜의 것으로 제기하는 것은 무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라는 것이 단순히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선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은혜라고 불러서는 안되며, “자연적 빛”(natural light)이라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명명하는 것을 "일반은총"(commune gratia)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스킬더가 하이델베르그를 해설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하되, 도르트신조를 작성한 분들과 어거스틴은 인간이 자연(nature)에 의해서 지니고 있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창조때에 인간 본성(nature)의 원래적인 능력으로 주어진 것을 은혜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펠라기안자들은 율법이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이 율법을 은혜라고 말하기조차 하였다고 합니다. 참된 은혜(true grace),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혼동케 하기 위해서, 펠라기안들은 인간의 합리적 본성(nature), 자유의지의 은사, 율법과 교리 같은 것 모두를 은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은혜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회복과 재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는데만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 빛과 그 빛의 사용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스킬더가 보기로는 카이퍼가 일반은혜에 대한 서사시를 쓰면서 항상 이렇게 구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카이퍼의 관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명”(mission) 허용”(permission)으로 좁아져 버렸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문화적 낙관주의에 빠져들게 될 위험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주가 선장에게 배를 맡기는 것은 그 배를 사용해서 주인된 자신의 해양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습니다. 문화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가능성(may)는 우리의 당연성(must)입니다. 능력이나 취향이 규범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완전하도록, 전적으로 인간적이 되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Chr.and Cutl., pp. 97~101).

 

다섯 번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문화적으로 큰 존경심을 갖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위대한 총괄자(Recapitulator)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일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cf. 1:10; 1:20). 교회는 결코 문화의 센터, “천박하게 위장된 대학교”(Vriend, p. 29)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간접적인 문화적 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Schilder, op. cit., p. 112).

 

더욱이나 크리스챤 문화에 있어서는 인격(person)이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인격(personality)을 상실해 버리는 대중이 되어버리는 전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길 데 없는 당신의 문화경전( Cannon of Cuture )인 산상보훈에서 개인을 향하여 선포하고 계십니다. 반석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찍어 내어져 버린 자는 (세상과) 분리함 없이 자기자신을 돋보이게 할 것입니다(고전2). (반면 그리스도 안에 여전히 붙어 있는 자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문화적 퇴폐의 시대에서 그 위대한 집주인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죄인들을 피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면서(고전5:10) 동시에 바빌론으로부터 나올 것을 명하고 있는(18:4), 성경의 역설은, 크리스챤들이 비록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기억하게 되면 쉽게 해결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빌론을 음부로서 정죄하는 것은, 그녀의 간음이 실행되어지는 기초로서의 공통의 인간성(sunousia)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속에서 누워있고 악한 자 속에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벌리는 지속적인 갈등과, “ 세상으로부터 결코 나오지 말라는 명령으로부터 일어나는 긴장은, 사람들과 계속 접촉(sunousia)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몫과 교제에 대한 우리의 의무(koinoonia) 사이에서 생기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Ibid., p. 114).

 

마지막으로, 크리스챤 문화철학자는 문화적 낙관주의에 도취거나 문화적 금욕주의로 마비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부르심의 개념(직분의 개념)으로부터 더욱 논리적으로 추론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르심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직분담지자(office-bearer), 곧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시의 말씀의 빛을 좇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의하여 조명되지 않으면,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그의 제자인 울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안누스(Olevianus)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죄와 은혜의 투쟁, 복종과 불복종의 투쟁이 어떻게 문화 속에서 최절정에 이르게 되는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특별히 칼빈이었습니다(Ibid., p. 117).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왕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들으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망치나 삽, 책이나 바늘, 솔 등의 기구들을 사용하여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넣어두신 것들을 이끌어내시는지를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론적 설교와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지금 갈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종말론적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정원(에덴)이 아니라, 오히려 일해야 할 장소, 싸워야 할 경기장, 건축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낭만적인 기분에 젖은 영혼이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난 일로서의 종교를 실행하는 그런 은밀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광장은, 세상만큼이나 드넓은 그 분의 일의 영역이며, 그 안에 우리들의 일터, 공장, 그리고 김이 나는 가마, 연구실과 실험실이 있습니다. 선한 모든 일을 위하여 온전히 구비되어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신실하게 성취해 가는 모든 장소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활성화된 이런 문화과정 속에서의 복종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죄를 억제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형성되고 또한 교정되어졌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상되어집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아들됨의 완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집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위대한 건물에 필요로 하는 돌들을 각각 운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문화적 과정을 그것의 종말론적-교육학적 가치의 기초 위에서 평가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교육학적으로, 일하는 사람(worker)은 문화적 과정에서의 긴장들에 의해서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 문화적 과정이 무용한 것으로 선언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시련을 거쳐온 작품들(trial-pieces)이 최후의 날의 불길 속에 녹아버리게 되어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말론이라는 다른 용어로 인도하는데, 스킬더는 이 용어를 문자적으로 마지막 일들에 관한 논의로 사용합니다. 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되어진 작품들, 곧 예술과 현대적 발명품 조각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오르내리는 그 과정의 긴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경기장을 마련하는 일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의 마지막 사람조차 세상에 대해서 승리하게 되는 그 일을 성취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Ibid., p. 305).

 

이것과 관계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번째로 스킬더는 열방의 영광이 새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카이퍼의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석적인 근거로 스킬더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흐레이다누스(S. Greijdanus)박사의 계시록에 대한 주석(21:24)을 인용하는 것인데, 흐레이다누스박사는 이 과정이 현재 세대에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곧 지상의 고귀한 자들 중에서 회개하게 되는 자들이 그들의 문화적 보물들을 그리스도의 발앞으로 가지고 오는 현 세대 말입니다. 그 효과가 영원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Ibid., pp. 291~292). 둘째로 비판되는 카이퍼의 주장은, 문화의 씨가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되는 것은 카이퍼가 그의 논증을 부활의 때에 일어나게 되는 육체의 비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주석한 흐로샤이데(F.W.Grosheide)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카이퍼의 주장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에 묻혀지게 되는 자연적 육체를 부활하게 되는 영적 몸의 씨앗으로 여기는 것은 가능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하나의 시체(a corpse)가 다시 돌아오는 것과 문화적 산물들(cultural products)이 도래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카이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비교(metabasis eis allo genos)하는 위험한 비유에 탐닉해 있었던 것입니다(Ibid., po. 293~94).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24:21)는 구절을 아직 완전한 천국이 임하지 않은 예루살렘의 활동들에 있어서 마지막 행위이거나 천상의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새로운 사태의 맨처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것보다는, 스킬더는, 이 구절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예루살렘의 도래와 발전의 과정 속에 있는 하나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왕들이 새예루살렘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생각에 스킬더가 반대하는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성도들은 부활의 과정에 있어서 수동적일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은혜로 일으키시되 파국적으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몸이 급진적으로 변화될 것인데,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여자와 남자 같은 것은 천국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애문화의 풍요함이 (천국에서) 무슨 목적에 봉사하게 되겠습니까? 세상이 심판의 불길을 통과한 이후에 어떤 씨앗들(germs)이 남아 있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스킬더는 카이퍼의 이러한 전원적 서사시를 시대에 뒤진 것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역사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개념은 파국적 시점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사건의 사태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역사의 절정에 일어나는 심판의 대단원 속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시대에서도 이미 있어왔다는 것입니다(Ibid., pp. 64, 67, 298, et al.). 천국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전적으로 다른 세계(a totally other world)로 본다면, 우리는 성육신에 대해서 정당한 견해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성육신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역사의 목적을 통제하고 있고 또한 태초에서도 연루되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는 올바르게 있었던 것들 중의 하나였던 이 세상에서, 이제 완전이란 진화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떤 시간의 한 시점에서 일어나는 파국적 도약,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서 오게 될 것입니다. 이허나 하나님의 절차가 역사의 구조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스킬더는 말합니다(Ibid., p. 64). 물론 그는 이 점에서 우리는 환상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고 건전한 추론에 의해서 성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 모든 함축되는 바와 더불어서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에 이르게 될 계획으로 창조되었던 그 완전과 온전함의 천국세계는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단순히 정화되고 재생되며 그래서 완전하게 된 창조라고 추론합니다. 두 번째 단계의 논증은, 천국에서는 더 이상 결혼제도가 없고 또한 배를 위하여 먹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바울이 우리들에게 성욕과 식욕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인간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습니다. 곧 성욕과 식욕을 추구하던 삶이 이러한 요소들이 나타나지 않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격렬하고 파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단언하기를, 창조의 과정에서조차 이러한 기법이 따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선 것을 초월하고 변형시키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매일같이 추가되었습니다. 물질을 무로부터 불러내시는 첫 번째 창조행위의 기초 위에서, 충격요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주간의 매일 아침에 하나의 경이로운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Ibid., p. 299). 하루도 그 다음 날에 진화론적인 점진성으로 짝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결과에 한 날의 일이 더하여지는 것은 급격하였고 또한 폭발적이었습니다.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외현상의 혼동이 조화롭게 변형되었습니다. 땅과 바다가 분리되었고, 계속되는 아침마다 새로운 어떤 것이 앞서서 창조된 세계가 그 생의 법칙에 봉사하게 된 그것에 의해서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은 모든 힘을 다하여 힘써 일하도록, 그리고 그의 모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안식으로 밤중의 도둑처럼 파국적으로 또한 급격하게 완숙과 완전의 한 영원한 아침으로 들어오시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작용방식을 망쳐버리지 않았습니다. 주의 날의 위대한 저녁이 다가와서 세상의 주간(world-week)이 그 영원한 아침을 위하여 물러나야만 하는 때에 왜 우리는 사물들을 다르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문화적 산물들을 상실하게 될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맙시다! 물과 먼지의 거품들이 분리되어 땅과 바다가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의 손실이었던가요? 질문해 보는 것이야말로 답변에 이르는 길이라고 스킬더는 확언합니다.

 

우리는 문화를 말하면서 인본주의적 가치론을 주의해야 합니다.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하늘로부터 꽃같이 떨어지는 때, 문화의 씨앗(germs)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로고스(Logos)가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솜씨를 즐거워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이 세상에서 만물이 교회를 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결코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들은 교회에 전혀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로 존재해 왔고 또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지막 최종적인 것이 이르기 전 바로 직전에 있는 하나의 절정(penutimate)입니다. 문화의 진정한 목적이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진행하시고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이뤄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인 것입니다(Ibid., pp. 300~7).

 

칼빈주의문화관에 미친 스킬더의 공헌을 평가하고자 할 때, 철저하게 객관적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존 프린드와 더불어서 일반은혜에 대한 몇 가지 주장 외에는 나는 그 논증의 기본적인 일격에 온 마음으로 공감한다”(Op cit., p. 29)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싶을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직분담지자로서의 인간(man as offfice-bearer of God)이란 개념이 되어야 할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 문화활동을 통해서 이 세상을 열매맺는데 이르도록 부름을 받았고 또한 자격이 주어진 자로서의 인간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또한 기독교 역사철학의 기본(abc)입니다.

 

스킬더의 교회론적 경향, 교회정책에 대한 하나의 논쟁적인 질문 때문에 개혁주의공동체가 이 시적으로 재능이 넘치는 선지자의 탁월하고도 급진적인 칼빈주의적 공헌을 인식하지 못하여 결국 그 목욕물과 함께 목욕시키던 소중한 아이를 함께 쏟아버리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열린 마음과 열렬히 기대하는 심정으로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해진 믿음을 위한 이 용감한 변증학자의 진정으로 광대하고 서사시적 작품들을 연구할 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스킬더의 논제에 대해서 비판하여 어떤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 룰러(A.A Van Ruler)는 스킬더의 기본 논제에 대하여 반대하여, 우리는 세상을 일차적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보아야지 하나님의 자기영광화의 도구로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키에르케고르과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반 룰러는 단순히 하나님과 죄 사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반정립(antitheses)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만일 우리가 칼빈주의 성경해석으로 양육되어져 왔다면, 이런 혹평에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문화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행위언약의 완성에 대한 스킬더의 강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비난도 조리에 맞지 않습니다.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에 대하여 세 권짜리 방대한 설교집을 출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들에서 스킬더는 그 파국적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담당하셨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연관성 속에서 스킬더의 입장의 통전성 을 재진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최종분석에 있어서, 반 룰러는 자신의 반대하는 바를 한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말하기를, 스킬더는 구원론적인 것과 문화적으로 이론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스킬더가 종교를 문화로 보고 있다고 의미한 것입니다. 특별은혜를 지속적인 창조로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스킬더가 건전한 기독론적 강조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스킬더의 공헌

 

스킬더가 종종 신앙(religion) 전체가 하나님을 문화적으로 섬기는 것으로 인간이 회복되는데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는 점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과장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religion)은 하나님과 별개로 고려될 수 있는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부르심 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보게 합니다. 이 점에서 스킬더는 카이퍼를 대단히 신뢰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창조된 우주와 인간의 문화적 소명에 대하여 예스라고 답하면서 경건의 모든 종류의 병적인 경건적 이상(ideal))에 등을 돌려야 할 것을 가르친 사람은 바로 카이퍼였음을 스킬더는 인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원래적인 관계가 언약적 책임관계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만약 스킬더가 옳다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것은,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역하게 되는 존재가 되는 이 목적에 결코 모자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이퍼가 인간의 문화를 일반은혜에 기초하여 설명함으로 일반은혜가 역사에 있어서 이차적인 종류의 목적을 설정하게 되는 것을 스킬더가 반대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스킬더는 카이퍼의 주장을 일반은혜가 없으면 세상은 즉각 추상과 사색으로 파멸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특징짓습니다. 이것 또한 추천할 만한 비판입니다.

 

스킬더에 대한 비판

 

하지만, 스킬더가 자신이 우리들에게 인상깊게 심어주었던 그 해박함 속에서 지적하였던 그 오류, 우리들에게 피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 오류를 자신도 또한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을 분명해 해야 하겠습니다. 첫세상이 파국적 대단원에 의하여 그 완성의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카이퍼가 일반은혜가 없으면 세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라고 한 주장만큼이나, 사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경우 모두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서 추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게다가 스킬더는 추상적인 사색에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성(all creaturliness)을 사랑하신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죄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호의를 지니고 계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피조성(creaturliness)이란 하나의 순수한 추상이며, 이런 것은 인간세계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마태복음5:44, 45와 그 병행구절들이 모든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점을 부인하는 명백한 주석적 폭력이 됩니다.

 

반면, 일반은혜의 영역론에 대항한 스킬더의 비판은,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영역론이 마치 크리스챤과 비크리스챤 사이에 중립적인 활동의 장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보스(S.J. Ridderbos) 박사가, 자신의 논문 속에서, 카이퍼가 일반은혜영역을 주장하면서 어떤 종류의 중립지대를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옳을 지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리더보스박사는 추론하기를, 은혜를 완전히 인식함을 통해서,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에 상호적인 그것이 더 날카로운 초점을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일반은혜영역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Ibid., p. 312). 하지만 이런 논증은 카이퍼식의 사색의 분위기에서만 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전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없다면 세상은 당장 파괴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의 구원 안에서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역사의 동기이며, 그 목적이 타락 이후에도 세상이 여전히 운행되도록 하였음을 누군가가 믿게 된다면, 또한 만일 하나님의 형상, 내적인 빛, 이성, 도덕 등이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구비물의 부분이고, 또한 그의 인간성의 구조의 부분임을 누군가가 믿게 된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일반은혜의 영역이라는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그 개념은 문화적 낙관주의자들이 반정립의 개념을 분쇄시키는데 즐거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또한 볼렌호번(Vollenhoven) 박사가 관찰하였던 것처럼, 인간 자신의 존재를 이중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 번은 일반은혜의 영역에서 살고 다른 때에는 특별은혜의 영역에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큰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은혜에 관하여 로마카톨릭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영역들(terrains)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일반은혜의 대상과 특별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종교가 고도로 발달하면 예술의 옷을 벗어 버리기 때문에 칼빈주의는 그 독자적 예술형태를 발달시킬 수 없었다고 한 카이퍼의 말을, 스킬더가 오해하였다고 한, 리더보스박사의 평은, 진실로 정당합니다. 리더보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실은, 카이퍼는 종교라는 용어를 예전적 실행에 해당되고 있는 예배라는 느슨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이퍼가 이 점에 대해서 분명치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Calvinism, pp. 145~155), 카이퍼는 자신이 종교와 예술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분명히 표명하였고, 자기 자신의 나라에서 예술에 미친 칼빈주의의 효과에 대하여 상당한 열정을 갖고 입증하고 있습니다(Ibid., passim).

 

순수한 연장로서의, 곧 은혜와 진노를 제한하기 위한 중립적인 기층(substratum)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스킬더적인 구성에 대해서 말해 보자면, 이것 또한 추상적 사변의 또 다른 본보기인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섭리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벌카우어(Berkouwer)가 지적한 것처럼, 스킬더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적 관계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대신에, 영원한 작정과 최후의 목적으로부터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의 사실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유일하게 독생하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그리고 당신의 작정에 따라서 세상을 계속 유지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온전한 핵심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의 연장, 역사의 발달도 축복과 저주의 발달, 은혜와 진노의 발달 사이에 있는 균형으로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벌카우어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최소한 우리는 모든 작정들이 동등하게 궁극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과 유기의 작정들 모두가 동등하게 궁극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속의 교리가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심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단지 유기는 선택과 동등하게 영원하고 주권적인 작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지하셨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 이전에 이것을 결정짓는 어떤 원인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영원한 진노에 떨어지는 것은, 최종적인 분석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채, 자기 자신들의 자유 선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점에서 벌카우어교수와 그의 몇몇 제자들은 칼빈에게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성경에 기초해서(잠언16:4; 9:21~22), 그들의 유기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창조되어졌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을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Ibid., III, 22, 11; 23, 1).

 

마지막으로, 믄화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성가신 질문에 대하여는 어떻게 답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스킬더는, 우리의 현재의 문화의 씨앗(germ)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카이퍼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비록 리더보스는 이 반박에 반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을 스킬더는 주석적이면서 교의학적 근거로 주장합니다. 물론, 리더보스가 카이퍼의 입장을 설명하는 대로, 문화는 영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Op.cit., p. 313). 그렇다면 어떤 문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순수한 문화란 없습니다!(Es gibt kein reine cultur!) 이 현재의 악한 세상의 불경건한 문화의 어떤 부분의 씨앗들(germs)이 그 거룩한 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누가 방어하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그 성에 말입니다. “영원한 의의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스킬더는 카이퍼보다 더 안전한 주석적 근거를 여기에서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총체적으로, 클라스 스킬더는, 낙원(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사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서의 그의 문화개념을 제시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위대한 봉사를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별히 칼빈주의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서의 문화적 사명의 성취를 향하여 자신들을 부르고 있는 이 나팔소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클라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담론

손성은목사(천국제자들교회)

 

I. 클라스 스킬더(1890~1952), 누구인가?

 

스킬더박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유럽사회에서 1차대전(1914~1918), 2차대전(1939~1945)을 그 가장 민감한 청년기와 중년기를 통해서 겪었다고 하면 그 말 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뒤에 좀 살펴보게 될 카이퍼의 문화에 대한 견해를 비교해 보게 될 때에도 이 점이 많이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체험이 역사와 시대, 그리고 문화와 성경을 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에 의하여 조국이 짓밟히게 된 상황에서 주간지 De Reofrmatie를 통해서 표현된 신앙의 원리에 기초해서 강력하게 입장을 견지한 것 때문에 나찌에 의하여 4개월간(19408~12) Arnhem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 이후에도 그 신앙의 입장을 변치 않았기 때문에 2년 이상(19427~19448)을 당국의 눈을 피하여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한상동목사의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그 투옥경험과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인지, 한국교회의 고려파(1953)와 화란의 해방파(1944) 1967년 상호간 자매교회관계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스킬더의 명성은 이런 투옥경험에서보다는 그의 개혁신학적 신학의 독특함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그리스도의 수난에 집중하는 트릴로지(삼부작) 설교집을 발간하여서 그리스도의 삼중직분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기초하여 다른 분들의 글들과 함께 실려 출간된(1932) 한 책 안에 실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이란 글에 기초해 결국 그리스도와 문화란 제목으로 한 책이 발간되었던 때가 1948년입니다. 그의 생애의 초기에 발간되었던 이 트릴로지 설교집과 후기에 완결된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는 스킬더의 사상에 있어서 변화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이 일반은총에 대한 초기의 우호적인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심장마비로 1952 323일 소천하였습니다.

 

II. 스킬더의 문화관

 

스킬더는 어느 누구보다도 문화 그 자체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개진해 갑니다. ‘문화사명’(Cultural Mandate)이란 용어도 스킬더도 조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킬더에게 있어서는 문화는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무와 사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1:27~28)과 에덴동산에서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것(2:15)이 모두 문화적 사명과 연관된다고 강조합니다. 2) 그런데, 이 사명을 성취하지 못하고 타락하게 되었는데, 3)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째 아담의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의 삼중직분의 완전한 수행을 통하여 그 사명을 성취하셨고, 4) 이제 죄인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첫째 아담의 자리에 서서 그 사명을 성취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죄에서 구원 얻은 자로서만 아니라, 문화적 사명성취를 위하여 회복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을 파악하게 되면,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어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III. 스킬더의 문화관에 대한 평가

 

1. 스킬더의 문화관의 강점

 

1) 스킬더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중심적 문화이론을 펼쳤습니다. 카이퍼는 서구 문명의 주동력을 일반은총에서 찾았지만 스킬더는 문화의 근본동력을 문화명령에 대한 순종에서 찾았습니다. 타락으로 문화명령에 불순종했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다시금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를 카이퍼처럼 문화의 구세주로 보기보다는 사람들의 구세주로 보았고, 그렇게 구원을 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문화명령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이 펼쳐지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2) 스킬더는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을 설명함에 있어 카이퍼와 달리 이원론적 경향에 빠지지 않습니다. 카이퍼의 문화이론은 결국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의 상호관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얼마간의 이원론적 흔적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스킬더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킬더는 언약, 문화명령, 그리스도의 직분 등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함께 통합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문화적 사명과 관련해서도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가르침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3)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문화적 활동이 비그리스도인의 것과 대조되는 것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비록 카이퍼 역시 반립(antithesis)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문화 활동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스킬더의 이론에 비하면 이런 측면에서의 강조가 훨씬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줍니다. 스킬더는 문화활동의 진정성을 문화적 업적이나 시대적 영향력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문화 활동 수행자의 마음 자세에서 찾도록 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은 경건과 별도의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경건의 훈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스킬더는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활동에도 문화사명에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은 전 세계의 문명사와 민족이나 국가들의 문화적 영향력을 다루었기 때문에 거창하고 대규모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각자의 책임이나 문화적 사명을 고취하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스킬더는 달랐습니다.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문화적 사명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했고, 문화적 예술적 성취보다는 일상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핵심임을 가르쳤습니다.

 

이제 문제점들을 살펴보겠는데,  문제점들은 올바르게 비판하는 것도 있고 오해에 기초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저자가 제시한 문제점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로 지적하는 것 외에는 오해라고 할 수 있겠고, 또한 고재수교수는 스킬더의 문화관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명하는데,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2. 스킬더의 문화관의 문제점?

 

1) 비그리스도인의 실존 및 삶과 관련하여 은총(곧 일반은총)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로 여겨진다?

 

이런 비판은 불신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은혜로 표현하고 있다는 성경구절들로 인하여 인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성경의 예는, 삼하7:14~16, 26:9~10, 16:12~13, 3:10~4:2 인데, 성경에서의 이런 예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일반은총을 그 용어조차도 부인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일관화시키려는 욕심이 지나치게 나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카이퍼도 비판되어야 하고, 스킬더도 마찬가지로 비판되어야 할 것임을, 헨리 반틸교수가 칼빈주의문화관에서 정리하면서, 자신은 일반은총이라고 인용부호를 붙여서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2) 문화명령을 행위 언약의 조항에 포함시키는 일은 성경적 지지를 받기가 힘들다?

 

이런 비판은 오히려 더 지지를 받기가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적인 개혁신학의 신조들이 이렇게 문화명령을 행위언약의 조항으로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9(하나님의 법)의 제1항과 5항에서는 행위언약을 창세기1장의 문화명령에서 그 증명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에 의하면, 모세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이 아니고,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 것이 문화명령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3) 문화활동의 결과인 문화적 산물에 대해 지나치게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스킬더는 신자들의 문화적 산물에 대해서 결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불신자들의 문화활동에 의하여 산출된 문화적 산물이 결국 천국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올바른 비판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스킬더는 분명히 불신자들의 예술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베토벤의 월광곡, 본서의 p.107.) 문화적 결과물들이 천국에까지도 들어갈 것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스킬더의 말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도 모두 하나의 동일한 문화활동에 참여하게 된다”(p.151). “이렇게 공통적으로 제어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건설자라 하더라도 모두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다”(p.152). 스킬더는 현 세대와 영원한 천국으로의 전이가 격변적으로 도래할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이전 세대가 멸절되어 버릴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자의 문화적 산물 가운데서도 격변의 과정으로 통하여 쇄신되고 온전히 변화되어서 죄와 불순한 요소들이 모두 제거되어서 천국에 보존되는데, 불신자들의 것들 중에서 과연 얼마나 그렇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불신자의 문화적 결과물은 천국에 있는데, 그 문화적 결과물을 산출하는데 협력하게 된 그 불신자 자체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때에 천국에 있는 그 결과물의 의의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역자로서의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하나님께서 불신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 결과물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은 모두 천국에 남겨질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요소들은 모두 격변의 과정 속에서 제거되어질 것이고, 이런 점은, 신자들이 남기게 되는 문화적 결과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세 가지는 고재수교수가 스킬더 교수를 추념하는 책자인 Always Obedient 속에 실은 ‘Schilder on Christ and Culture’라는 글의 말미에 제시한 것들입니다.

 

4) ‘문화사명이 성경적인가?

 

개혁신학자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런 비판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성경적인 증거는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타락 이전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되는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을 고려하는 것 뿐만 아니라,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조차도 여전히 이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8, 25장의 달란트비유나, 말씀과 기도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한 딤전4:4~5을 통해서 문화적 사명은 충분히 지지된다고 하겠습니다.

 

5) 문화사명은 복음전파사명과 상충되는가?

 

여러 사람들이 이 사명을 대립적으로 이해하여 스킬더의 문화사명을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문화를 스킬더가 의미하는 대로 사용하고 또한, ‘중생이라는 것이 신자들이 자기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유지한다면 이 두 개의 사명은 상호간 마찰될 것이 전혀 없이 상호간 오히려 보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중생이란 개념이 느슨하게 되어서 그것을 문화생활로 대치하게 된다든지 하면, 분명히 문화사명 복음전파사명을 왜곡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개념의 중생론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관건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6) 문화사명은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자연에 대한 지나친 개발을 통해서 오는 파괴 및 침탈과정은, 스킬더가 문화사명’(Cultural Mandate)를 주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스킬더의 이런 주장이 환경파괴의 주범이라고 하는 것은 무척 잘못된 비판입니다. 더욱이나 스킬더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것에 문화사명을 중요한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작하고 지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된다면, 결코 스킬더의 문화관을 따른다 하더라도, 환경파괴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연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관리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것을 파괴적인 남획과 무절제한 개발의 논거로 활용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의 크고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스킬더의 문화관은 결코 그러한 오용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IV. 결론: 스킬더 등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우리 시대를 보며 살자

 

저의 결론은, 고재수교수가 스킬더의 문화사명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것이라면, 우리들의 태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결론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 것과 같습니다.

 

1.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문화적 활동이 얼마나 광범위한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문화의 영역은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음악, 미술, 건축 등) 영역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되어야 할 문화행위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 문화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일상의 삶 속에서의 순종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순종이 없는 문화행위는, 거짓되고 부패한 문화를 낳게 되고, 순종이 있을 때에 아무리 하챦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천국문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스킬더의 문화관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체계 전체가 바로 이 한 마디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진들이 그를 추념하면서 지은 책의 제목도 Always Obedient(항상 순종)입니다. 순종이 없는 문화는 반역과 배반의 문화이고, 초라한 것 같아도 순종이 있는 문화야말로 천국을 건설하는 문화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한 순간 순간이 바로 천국의 문화를 건설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3. 교회에서의 사역자들(곧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역자들의 내적 정신적 삶만이 아니라, 그들이 활동하는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교인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고, 설교하고, 심방과 양육을 하고, 또한 본을 보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스킬더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제일 마지막 문단을 성도의 가정을 올바르게 심방하는 장로야말로 하나님의 문화의 전위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직분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굉장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감독 집사의 자질에 대해서 제시한 뒤에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부분의 결론을 삼습니다(딤전3:14~16):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나탄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복음을 복음으로 보전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하기 위해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것임을 이런 맥락이 강조하는 셈입니다. 직분자들이 직분자다워야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4. 한 가지만 저의 결론으로 첨부하고 싶은 것은, 카이퍼나 스킬더 등의 사상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때, 무조건 대립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각자의 역사적 맥락과 상황 속에서 이해한 뒤에 시도하게 되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우리들 상황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도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청교도서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소그룹토론을 위한 질문들

 

 

1-안개에 둘러싸인 심각한 현실

 

1: 주제의 중요성

 

1) 저자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수많은 토론들이 개진되어 왔다고 합니다. 어떤 것들이 그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2) 이 주제가 왜 천국 지옥과 같이 대립되는 개념들 사이에 긴장을 갖게 할 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저자가 '지옥' 천국에 관하여 책들(지옥은 무엇인가?, 천국은 무엇인가)을 쓸 정도였음을 감안하여 생각해 봅시다)?

 

2: 주제의 난해성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가 어떤 면에서 기독교적 사고와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직결되고, 또한 크리스챤의 소명과 관련되는가요?

 

2) 진정한 문화에 대한 논의는 삶과 학문 중 어느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하며, 왜 그렇게 해야 하나요?

 

3: 주제가 난해한 여섯 가지 이유

 

1)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주제가 난해한 이유들로 저자가 제시하는 여섯 가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보십시오.

 

2) 그 이유들 중 가장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어떤 점에서 호소력이 있다고 보시는가요?

 

4: 지금 우리는 안개에 싸여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유형들을 저자가 예시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리챠드 니버가 그의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들과는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요?

 

2)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그런 견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카이퍼의 이론을 심화시킨 도이벨트의 강조점은 무엇이며 또한 이런 도이벨트의 강조점에 대해서 스킬더가 생존하여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였을 것 같습니까?

 

5: 해결책-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문화적 삶

 

1)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적 삶’, ‘예수와 문화적 삶’,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적 삶이란 표현들이 서로 어떻게 차이가 있나요?

 

2) 이러한 세 가지 표현들 중 저자는 어떤 표현을 염두에 두고 본서에가 강조하고자 하는가요?

 

2-안개 속에 머물러 있게 하는 시도들

 

6: 잘못된 해결방식1(기독교와 문화적 삶)

 

1) '기독교'에 대하여 저자가 소개하는 최소한 두 가지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2) '기독교'를 문화와 관련시켜 논의하면 잘못된 해결에 이르게 되는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그 이유에 대해서 동의한다면 어떤 면에서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7: 잘못된 해결방식2-예수와 문화적 삶

 

1. 문화적 삶에 있어서 예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말을 설명해 보시오. 왜 그런가?

 

2. ‘예수에 대하여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의 어떤 면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일까?

 

8: ‘예수에 대한 오해

 

1. ‘예수에 대한 잘못된 오해의 예들을 몇 가지로 적어보라.

 

2. 그 예들은 어떤 면에서 오해라고 할 수 있는가?

 

9: 잘못된 해결방식3-‘교회 자체의 잘못

 

1. 문화적 삶에 대하여 교회 자체의 실수로서 성경의 전체 메시지를 어떻게 오염시켰다고 저자는 말하는가?

 

2. 저자는 이런 실수를 어떻게 만회시킬 수 있다고 제시하는가?

 

3-안개를 뚫고 나오기 위한 올바른 모색

 

10: 예수님의 생애의 성경적 개요

 

1. 예수님은 당대의 문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가?

 

2. 우리는 우리들의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아무런 문화이론이나 강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11: 올바른 해결방안-예수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2. 저자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의의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12: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직무의 본질

 

1.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의 외로움과 고난을 저자 스킬더는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그의 삼부작 설교집, The Suffering Christ, Christ on Trial, 그리고 Christ of the Cross을 참고하라!)

 

2.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직분자로 보게 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함축하는가?

 

13: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직무

 

1. 예수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의 의의는 무엇인가?

 

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셨던 것의 본질로서, 세상의 기본적 질서로 되돌아가셨던 그 질서는 어떤 것이었는가?

 

 

14: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두 가지 직무

 

1.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셔서 둘째 아담으로서 성취하신 두 가지 일은 무엇인가?

 

2.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두 가지 일이 지금 현재에는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가?

 

15: 그리스도의 직무완성의 결과

 

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를 완성하셨을 때 이뤄진 두 가지 결과는 무엇인가(p.95)?

 

2.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은 어떤 언약인가? ‘행위언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창세기126~8절에 맺어졌는가? 아니면 창세기216~17절에 맺어졌는가?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91항과 5항에서는 행위언약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4. 통념상의 행위언약 생의 법칙으로서의 행위언약의 차이는 무엇인가?

 

16: 문화의 정의

 

1. 저자는 행위언약에 담긴 세 가지 명령을 어떻게 요약하고 있는가?

 

2. ‘행위언약 문화명령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3. 문화명령 속에 포함된 자기계발이 자기우상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4. 창조를 기반으로 그 모든 잠재가능성들을 계발해 내는 발전의 역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이라고 저자가 강조하는가(p.106)?

 

5. 저자가 제시하는 문화의 정의, 과제, 방법, 목적 등을 정리해 보시오.

 

6.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세상적인 관점과 비교해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원래의 관점을 저자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p.110)?

 

17: 본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한 것의 의미

 

1. 인간의 범죄 이후 진행되어지는 해체’(disintegration)의 과정과 특징들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점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2. 이러한 해체의 모습들에 대해서 인간은 무엇이라고 변명하고 있는가?

 

18: ‘일반은총이란 가능한가?

 

1. 소위 일반은총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거는 무엇인가?

 

2. 카이퍼박사가 주장하면서 회자되어온 일반은총을 본서의 저자가 비판하면서 반대하는 논리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3. 이런 논리전개에 있어서 시간이란 요소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4. 카이퍼가 강조하는 반정립과 저자가 강조하는 반정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5. ‘일반(general)은총은 없지만, ‘공통(common)은총이 있다고 하는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문화적 사명

 

1.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구주로서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구속주가 되기 위하여 행동하시는 두 가지 역할은 무엇인가?

 

2. 사이비문화 가운데서 펼쳐지는 진정한 문화사역을,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요한의 어떤 점들에서 그 예들을 찾고 있는가?

 

3. 사이비문화를 치료하는 것으로서의 개혁운동 중에서 마틴 루터의 사역과 존 칼빈의 사역을 어떻게 비교되는가?

 

4.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분리로서 보느냐 구별로서 보느냐 하는 문제를, 루터와 칼빈의 견해와 대조하면서 설명해 보세요.

 

5. 대격변을 통하여 이뤄지게 되는 새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이뤄가는 문화적 산물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는가? (523장의 p.176도 참고하실 것)

 

6. 이러한 저자의 대격변설이 소위 멸절설로 오해될 수 있는 것일까? 저자의 대격변설을 취하게 되면, 이 땅에서의 크리스챤의 문화활동의 적극성이 어떻게 변호될 수 있을까?

 

4-불필요한 오해들

 

20: 세 가지 오해들

 

1. 저자가 코이노니아 수누시아라는 개념을 구분하여 제시하는 이유로서 첫 번째 오해는 무엇인가? 이것들의 구분에 따르면, 저자는 신자와 불신자의 문화활동에 있어서의 협력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2. 신자와 불신자들이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동일한 활동을 하여 동일한 결과물을 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활동을 하는 사람들 각각에 의하여 이뤄지는 결과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왜 그런가?

 

3. 두 번째 오해인 공통조절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면, 불신자들의 문화활동의 산물이 영원한 천국에 보존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답변할 것이라고 예상되는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참고해서 답을 해 보시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도 모두 하나의 동일한 문화활동에 참여하게 된다”(p.151). “이렇게 공통적으로 제어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건설자라 하더라도 모두가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다”(p.152).

 

4. 창조의 흔적들과 타락의 흔적들로서의 잔여물들을 조정하는 것은, ‘제어 억제와는 달리, 어떻게 항구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가? 천국과 지옥에서도 이런 잔여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5. 이러한 잔여물들이 있다는 것이, 칼빈주의적 고백에 있어서 어떻게 감탄스러울 만큼 위험하게 묘사되는 것인가?

 

6. 이러한 잔여물들만으로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를 만들 수 없다”(p.157)면서 그 돌파구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다고 저자는 암시하는가?

 

7. ‘잔여물들만으로 문화를 건설하고자 할 때 생겨지는 결과들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pp.158~160)?

 

21: 적그리스도와 문화활동

 

1. 하나님의 적극적인 허용을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통해서 이뤄지는 문화의 특징은 어떠한 것인가?

 

2.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의하여 개진된 문화활동의 최후적 결과는 어떠한가?

 

3. 적그리스도와 문화활동과 대조되는, 공교회적으로, 균질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건설하는 문화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22: 하나님의 왕국과 문화

 

1. 자신들의 눈에 즐거워하던 세상문화의 화려한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자기 눈에 즐거워하던 아내를 잃었다 하더라도, 스가랴 선지자처럼 울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왕국의 참된 문화를 건설하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충분한 것이, 신자들에게 문화적 자부심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3. 신자들조차 문화적 노력을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 하지만 목적이 분명하고 구조가 건전하며 기준이 확실한 조화로운 문화가 참으로 현존하는 곳은 언제 어디서인가?

 

4. 참된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성도의 교제와 성도간의 분열이 차지하는 위치는 각각 어떠한가?

 

5. 참된 그리스도의 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신앙의 위치를 설명해 보세요.

 

5-성경적인 문화관에 관한 일곱 가지 결론

 

23: 성경적인 문화관1-유일한 문화는 없다

 

1. 유일한 문화가 인간의 내재적 본성에 의하여 불가능한 이유들은 무엇인가?

 

2. 유일한 문화가 불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지체하심으로 통치하시는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지체하심의 법칙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3. 저자는 문화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열매들인 문화적 산물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송인규의 일반은총과 문화적 산물에서 문화적 산물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평가해 보라.

 

4. 유일한 문화가 없다는 저자의 결론이 선교에 대해서 어떤 함축성을 제공해 준다고 여기는가?

 

24: 성경적인 문화관2-문화는 구체적인 섬김이다

 

1. 문화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2.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p.179)라는 저자의 말을 자기가 이해하는 식으로 말해 보시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설정되는 것이 어떻게 지역교회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할까?

 

25: 성경적인 문화관3-문화는 때때로 자제가 필요하다

 

1. (소극적인 면에서) 저자는 신실한 사람이 어떤 문화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거의 불가능해 보여서 그 영역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기도 하는 것을 죄악이며, “하나님을 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를 통해서 저자의 문화관을 평가해 보자.

 

2. (적극적인 면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전쟁기간이라고 한다. 이 특별한 비상사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왜 문화적으로 자제함이 필요하다고 하는가?

 

3.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저자는 소극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제와 절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영웅들로서의 그리스인들과 그리스도인공동체의 모습을 예로 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4. 저자가 주장하는 소극적인 금욕주의와, 암시적으로 비판되고 있는 적극적인 금욕주의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26: 성경적인 문화관4-문화사명은 태초부터 주어졌다

 

1. 저자가 허용 가능하느냐 않느냐는 개념을 담고 있는 일반은총이란 용어보다도 더욱 적극적인 사명개념을 담고 있는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2. ‘일반은총 개념이 잘못된 이유를 저자는 세 가지로 든다. 무엇들인가?

 

3. “문화는 당위의 문제이다”(p.192)는 저자의 말을 설명해 보라.

 

4. 기독교나 칼빈주의가 고유한 예술양식을 계획할 수 없으며 계획해서도 안된다는 견해에 저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비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27: 성경적인 문화관5-교회는 가장 간접적인 문화세력이다

 

1. 저자는 총괄갱신이란 용어와 개념을 다양한 저자들의 의견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소개의 의도와 결론은 무엇인가?

 

2. 만물의 총괄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은 교회의 문화활동에 있어서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3. ‘유기체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이 왜 교회를 죽이고, 교회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고 저자는 혹평하고 있는 것일까? 카이퍼가 주장하는 이 유기체로서의 교회개념과 저자의 교회개념을 비교해 보라.

 

4. 교회가 문화사역에서 간접적이어야 한다면,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5.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문화의 열쇠가 되는데도 교회가 직접적으로 문화사역에 앞장 서거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에 등한히 하게 될 때 생기는 현상과 이 문제를 관련시킨다. 그 관련성은 무엇인가?

 

28: 성경적인 문화관6-그리스도 없이는 참된 문화도 없다

 

1. 시내산의 율법이 산상보훈의 말씀은 모두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전체로서 한 집단에게 주어졌는가? 아니면 전체를 이루는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졌는가?

 

2. 이런 질문이 교회와 개인의 문화활동에 있어서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3. 산상수훈(이나 요한계시록194)에서 주어진 명령과 고린도전서510절 말씀에서 주어진 명령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4. 3번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로서의 수누시아와 날마다 교제해야 할 우리의 의무로서의 코이노니아 사이의 긴장을 설명해 보시오.

 

5. 이런 긴장 가운데서도 참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적 원리는 무엇인가?

 

29: 성경적인 문화관7-문화는 끝이 없는 과제이다

 

1. 문화를 고려할 때 언제나 원래의 부르심, 창조 때 주어진 과제, 즉 원래의 직무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어떤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저자는 경고하는가?

 

2. 참된 문화활동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의식하게 될 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2주일의 두 번째 답변에 있는 대로) 반드시 고려하게 된 세 가지 직분들과 그 역할은 무엇인가?

 

3. 우리는 삼중직의 직분자로서 우리의 끝없는 과제를 어디에서 수행하게 되는가?

 

4. 이러한 끊임없는 과제수행의 한 예로서, 장로가 하나의 문화세력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하면서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