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 신앙과 칭의의 관계-조엘 비키
2014-01-13 00:41:18
이신칭의의 개념은 마틴 루터에게 획기적인 영적 및 신학적 돌파구가 되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말은 루터에게
성경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았다.
으로(by)라는 이 간단한 전치사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간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구약 성경은 칭의는 믿음으로(by faith) 얻는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창세기 15장 6절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정하시고]
그러나 로마카톨릭은 이 구절을 전통적으로 은혜가 주입된 행위로 얻는 칭의 교리를 지지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도처에서 믿음으로 얻는 칭의사상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렇다면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신앙은 칭의를 어떻게 일으키는가?
그 대답은 --의로(by)라는 전치사에 달려있다.
신약성경은 보통 " 피스테이(믿음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믿음으로)", 디아 피스테오스(믿음을 통해)" 라는 세가지 전치사를 사용하여 믿음을 표현한다.
이 전치사들은 각각 그 자체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여격인 " 피스테이"는 믿음의 필수성과 중요성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전치사 "디아(-를 통해서)" 는 믿음을 칭의의 도구 곧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수단으로 설명한다. 전치사 "에크(-로 부터, -에서,-로 인해)는 믿음을 칭의의 유효적 또는 궁극적 원인은 아니지만 칭의의 유인으로 설명한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세가지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로 믿음이 칭의를 자져온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모든 경우에 믿음은 칭의의 수단으로 제시된다.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propter fidem)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propter Christum)이다.
궁극적으로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이다.
개혁파 전통속에서 다양한 신학용어나 표현들이 믿음과 칭의의 이런한 성경적 관계를 포착하는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벨직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믿음을 칭의의 유일한 도구와 칭의의 단 하나의 도구로 설명한다. 믿음은 칭의의 작인이 아니고 도구(수단이다) 이 수단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성령의 구원사역으로서 이 수단을 통해 죄인은 삼위 하나님과의 생명력있고 인격적인 관계속에 들어게 된다.
믿음은 칭의의 조건인가?
헬라어 원문에 따라 '믿음으로' 란 말이 주어지면 믿음은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도구로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조건은 일반적으로 유익이 주어지지 위해 제공되는 어떤 공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 때문(for)이 아니라 믿음으로(by) 구원받는다. 곧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붙들고 받아오는 것(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롭게 된다.
이 두 견해 차이는 결정적이다.
믿음을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자신의 뜻에 따른 행위로 말미암아 성취할 수 있는 선행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런 경우 인간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칭의의 조건적 근거라면 구원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공로에 기인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를 어떻게 적용하는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은 오늘날 알미니안주의가 침탈을 해서 회복이 시급한 상황에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믿음을 구원조건을 충족시키는 죄인의 자유의지의 한 행위로 한정시키는 잘못된 개념때문에 많은 진지한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념에 대하여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리스도를받아들이는 것을 아르미니우스의 사상과 같은 것처럼 믿기에 그들은 복음에 자유롭게 반응하는 것을 제한받고 있다. 믿음을 칭의의 기초로 부인한다고 해서 믿음을 경시하거나 개인적으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필수성을 무시하는 것은아니다. 성경은 믿음 자체를 공로로 간주하지 않지만 믿음의 필수성은 분명히 강조한다. 만일 죄인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려면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개인적으로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믿음으로 확증된다. 믿음은 솔라 그리타아의 경쟁자가 아니다.
1. 믿음은 경험적이고 죄를 깨닫게 하고 영혼을 비우게 하는 은혜이다.
2. 믿음은 복음 진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3.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하고 지각을 넘어서는 용서와 평강을 경험하게 한다.
4. 믿음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 중심성이 믿음의 특징이다. 그리스도 중심성이 믿음의 참된 본질이요 기초다.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지만 그들의 관심은 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대상 중심적이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자 기대다. 믿음은 영혼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영혼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어떤 것보다 믿음과 칭의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고 칭의에 있어서 다른 모든 은혜를 능가한다.
개신교의 이신칭의 견해는 로마카톨릭의 가르침과 어떻게 대립하는가?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이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개신교를 반대하였을 때 그들의 핵심목적은 이신칭의 교리를 다루는데 있었다. 그들은 개신교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칭의 교리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1. 전통적인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은 칭의를 죄인이 의롭게 되는 과정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의롭게 하다(justify)는 동사가 의롭게 만들다(make righteousness)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칭의는 성화를 동반한다. 칭의는 죄인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그의 본성의 내적 변화에 달려있다. 신학적으로 이러한 견해는 칭의와 성화의 혼합을 초래한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은 칭의에서 의는 전가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죄인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선언이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결합되지 않는다. 역사적 개신교 신앙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적이지만 구별된 개념이다.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선언하지만 성화는 죄인을 의롭게 만들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거룩한 열매의 담지자로 만든다.
2. 로마 카톨릭 사상은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죄인 자신의 의로 보강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신자는 은혜에 협력하여 칭의에 대한 공로를 얻게된다고 천명한다. 그들은 은혜와 행위를 칭의 속에 혼합시킨다.
3. 로마카톨릭 사상은 칭의와 묵시적 신앙의 단계설을 옹호하지만 성격과 개신교 사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의롭게 되거나 의롭게 되지 않거나 둘 중하나이다.
4. 로마카톨릭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성례에 참여하는 것과 연관시킨다. 스콜라 신학의 맥락에 따라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례를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인간적 의를 형식적 원인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가시적인 교회 밖에 있거나 세례를 받지 않으면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면에 개신교는 믿음은 칭의의 독구적 원인이고 신자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의 형식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알미니우스주의와 율법폐기론을 어떻게 논박할까?
알미니우스 주의는 칭의의 기초를 믿음이라고 말하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 칭의에 있어서 조건적 예정과 조건적 신앙을 옹호함으써 알미니우스 주의는 사람들을 크게 속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써 현세에서 실제로 의롭게 될 필요성을 부정하는 율법폐시론자나 하이퍼-칼빈주의 사상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카톨릭 사상, 율법폐기론, 알미니우스주의, 모더니즘과 같은 다양한 사상 형식들에 직변하여 있기 때문에 오늘날은 너무 자주 성경적이고 온전한 이신칭의 교리의 위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앙이 구원의 조건으로 간주될 때는 지나치게 강조되고(알미니우스 주의), 구원의 필수적인 열매로서 부정될 때는 지나치고 무시되고(율법 폐기론) 우리의 행함의 공동노력으로 수반된 믿음으로나(로마 카톨릭 사상) 우리안에서 은혜의 한 행위로서 주어진 믿음으로나(알미니우스 주의), 성령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능력인 믿음으로나( 율법 폐기론), 인긴 실존의 의미에 관련되어 있는 믿음으로(현대 실존주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의 가치는 교회의 정체성, 기독교 신학의 본질, 복음 선포에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 경험적 기초로서도 결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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