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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 장두만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 장두만

2014-01-09 00:45:26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 글은 "목회와 신학" 1995년2월호에 게재되었던 것임>

 

 

들어가는 말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이다. 필자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양식 있는 학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를 해왔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스윈돌(Charles Swindoll), 맥아더(John MacArthur),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등이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볼 때에는 세대주의를 매도하거나 정죄하는 사람들의 세대주의 이해는 실제 세대주의자들의 견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과연 그들이 세대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남에게 들은 지식에 근거해 그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 갈 때도 많이 있다. 

계약신학자들도 세대주의자들에 대해서 마찬가지 불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약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비판만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대표적인 계약신학자들의 글을 직접 인용해서 계약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먼저 시도한 뒤에, 그 신학이 갖는 장점과 문제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해야 될 것은 세대주의와 계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Ⅰ. 계약신학 약사(略史)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계약신학도 점진적으로 신학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초대 교회나 중세교회에서는 계약신학에 관한 논의가 없었고, 대표적인 종교개혁자인 칼빈, 루터, 쯔빙글리, 멜란히톤 등에게도 계약신학 사상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헤페(Heinrich Heppe)에 의하면, 계약사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1559년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Compendium Christianae Religionis decem Libris Comprehensum)와 1585년의 올레비아누스(Grasper Olevianus, De Substantic Foederis Gratuiti inter Deum)이지만, 그것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상으로 인식되어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o Dei, 1648)가 그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계약사상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채택됨으로 개혁신학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겸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와 뉴잉글랜드에서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하지 부자(Charles & A. A. Hodge)를 비롯해 칼빈신학교의 벌콥(Louis Berkhof) 등의 활동으로 미국 개혁 신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들은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Ⅱ. 계약신학의 개념 

 

계약신학은 전체 역사를 두 개의 계약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상이다. 즉 아담 타락 이전에 아담과 맺은 행위계약(Covenant of Works)과 타락 후에 맺은 은혜계약(Covenant of Grace)이 그것이다. 계약신학에서 두 개의 계약을 말하지만, 성경 역사로 볼 때 행위계약은 인간의 타락으로 끝났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역사는 은혜계약 하나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이제 이 두 계약을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하도록 하자. 

 

1. 행위계약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이후에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한 계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면 아담과 그 후손이 영생을 얻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그 형벌로 죽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4개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겠다. 

 

①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다. 

② 이 계약에 첨부된 약속은 생명이다. 

③ 계약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다. 

④ 불순종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다. 

 

그러면 이 계약에 대한 논거는 무엇인가? 몇몇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겠다. 

먼저 앨리스(Oswald T.Allis)에 의하면, 창세기에는 행위계약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없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상당히 많이 언급되어 있다고 하면서 신명기 6장 5절, 6장 10-12절, 30장 15-20절 등을 증거본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벌콥은 행위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계약의 여러 요소가 이미 초기 서술에 나타나 있다. 물론 창세기 3장에 '계약'이란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쌍방이 계약 당사자로 언급되고 있고 계약의 조건이 설정되어 있고, 순종에 대한 보상이 언급되어 있으며 또한 범죄에 대한 형벌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물론 쌍방이 계약 조건에 동의했다든지 아담이 그 조건을 수락했다든지 하는 기록은 없지만, 노아나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와 동일한 상황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나님이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한 결론이다. 

둘째, 영생에 관한 약속이 언급되어 있다. 성경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영생을 준다는 분명한 약속은 없지만, 불순종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볼 때 영생에 관한 약속은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 

셋째,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그리스도에 의해 실행되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놓이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성취하셨다. 그것은 바로 최초 계약인 행위계약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 은혜계약이므로 최초 협약도 계약의 성격을 갖는 것임이 분명하다. 

넷째,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해 볼 때 행위계약의 근거는 분명하다.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대비되고 있는데, 이것은 아담이 그리스도와 같이 계약의 머리라는 가정 위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섯째, 호세아 6장 7절이 행위계약을 뒷받침한다. 본문에 의하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담을 고유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따라서 이 구절은 행위계약에 관한 좋은 증거본문이 될 수 있다. 

앨리스나 벌콥 이외에도 하지(Charles Hodge)나 버즈웰(J. Oliver Buswell) 등도 행위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를 언급하고 있지만 위에 제시한 것들과 대동소이하다. 

 

2. 은혜계약 

은혜계약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으로 행위계약이 파괴된 이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 구원을 약속하는 계약이다. 

모든 계약신학자들이 은혜계약을 언급하지만, 이 계약이 언제 체결되었으며, 계약의 당사자가 누군가에 관해서는 많은 혼란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계약 당사자가 아담과 이브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아브라함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3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 언약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기 기쁘신 뜻대로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으니 흔히 말하는 은혜의 언약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값없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셨으니 저희가 구원을 얻도록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시고 영생을 얻도록 예정된 모든 자에게 그의 성령을 주사 저희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을 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여기서는 분명히 계약 당사자가 '죄인들'임을 말하고 있으며, 소요리 문답 제20번에서도 동일한 취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대요리 문답 제31번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은혜의 언약은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택한 모든 자와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 제32번에서는 그리스도가 은혜계약의 중보자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면 은혜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은혜계약의 체결 시기와 계약 당사자에 관한 혼란 때문에 일치된 성경적 근거를 언급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벌콥에 의하면,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구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벌콥은 창세기 17장 7절, 예레미야 31장 33절, 32장 38-40절, 에스겔 34장 23-25절, 30-31절, 36장 25-28절, 37장 26-27절, 고린도후서 6장 16-18절, 히브리서 8장 10절 등을 증거본문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어떤 계약신학자들은 창세기 3장 15절을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페인(J.Barton Payne)은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3장 15절은 사실상 '계약'이라고 불리우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계약이라고 상정(想定)해야 한다. 왜냐하면 계약의 주요 특징들이 다 언급되고 있고 또 여기에서부터 그 뒤의 구속적(救贖的)인 계약이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 계약사상은 "가장 초보적인 형태로(in a most rudimentary form)표현되고 있다"고 했다. 앨리스(O.T.Allis)는 은혜계약 사상이 창세기 3장 15절에 "비밀스럽게 나타나 있다. (This covenant is first set forth cryptically in the words of the protevangel)"고 했다. 

 

Ⅲ. 계약신학에 대한 평가 

 

1. 장점 

학문에 있어서 체계화(systematization)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계약신학도 은혜계약이라는 중심 사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한 시도는 일단 긍적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 사상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는 차치하고라도 일관된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한 계약신학은 성경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님 은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장점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2. 문제점 

계약신학은 몇 가지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점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계약신학에 대한 석의적(釋義的) 근거가 불충분하다. 여기서 필자가 계약신학에 관한 석의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행위계약이니 은혜계약이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느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벌콥이 언급한 대로 성경에 '삼위일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타당한 교리이다. 

어떤 교리는 직접적으로 언급된 구절에 근거하지만, 어떤 교리는 여러 구절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계약'이나 '은혜계약' 같은 용어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석의적 근거가 확실하면 그러한 용어를 붙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적 전제(theological presupposition)를 떠나서 계약신학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본문을 분석할 때 석의적으로 행위계약이나 은혜계약 사상을 도출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앨리스가 행위계약에 관한 증거 본문으로 제시한 신명기 6장 5절, 6장 10-12절, 30장 15-20절 등이 석의적으로 행위계약을 뒷받침하느냐? 계약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행위계약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신명기 6장 5절 등은 아담 이후 수천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이다. 이런 구절이 어떻게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어진 행위계약에 관한 증거본문이 될 수 있는가? 석의는 완전히 무시하고 아무 구절이나 증거본문으로 제시해도 그 신학은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조직신학자들은 석의를 무시한 증거본문 사용으로 악명이 높은데, 신명기의 경우도 그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벌콥이 제시하고 있는 호세아 6장 7절은 어떤가?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커아담'( )이다. 이 구절에 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전치사 ("-처럼", "같이")를 ("-에서")로 수정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두 글자는 굉장히 유사해 쉽게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요, 또 "거기서"( )라는 부사가 장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해석은, "아담이라는 장소에서"가 되겠다. 여호수아 3장 16절에서 "아담"이라는 장소가 언급되고 있다. 

둘째, "아담"을 일반 명사, 즉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담)은 고유 명사로 쓰일 수도 있고, 일반 명사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해석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약속(계약)을 잘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가 되겠다. 

셋째, 전치사 를 로 바꾸지 않고 (아담)을 지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해석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같은 절에 나오는 "거기서"( )라는 부사 때문이다. "아담"이 지명이 아니면 "거기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문맥적으로 8절과 9절이 모두 장소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에 "아담"도 장소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또 여호수아 3장 16절에서도 "아담"이란 지명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도 그렇다. 이 경우에 해석은 "아담에서처럼"(as at Adam)이 되겠다. 

아무튼 호세아 6장 7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구절이고, 또 계약신학자들의 해석의 타당성을 명명백백하게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구절에 근거해 신학을 세우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교리는 명백한 구절에 근거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그밖에 행위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로 벌콥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 같이 모두 설득력이 없다. 

 

① 계약의 여러 요소가 이미 초기의 서술에 나타나 있다는 주장을 고찰해 보자. 

벌콥은 노아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행위계약의 타당성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논거는 극히 미약하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경우는 "내가 너와 네 후손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운다"는 표현(또는 유사한 표현)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창9:9, 12, 13, 16, 17; 15:18; 17:2, 4, 7 등) 그렇기 때문에 "노아 언약"이나 "아브라함 언약"은 분명히 성경적 언약이지만, 행위계약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② 영생에 관한 약속이 언급되어 있다는 주장에 관해서 살펴보자. 

벌콥에 의하면, 불순종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볼 때 영생에 관한 약속은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으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주장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위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창2:17).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면(또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약속은 창세기 어디에도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영생을 얻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가령 갑이란 사람이 한평생 죄를 전혀 안 지으면 - 이것은 물론 가정이다 -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아니다! 그는 예수 믿지 않는 죄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다. 

③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이 그리스도에 의해 실행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관해서 고찰해 보자.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Petitio Principii)를 범하고 있다. 벌콥의 주장을 삼단논법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행위계약의 조건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는 은혜계약의 중보자다. 

그러므로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의 실행이다. 

 

이 논증에서 증명되지도 않은 행위계약을 마치 증명된 것같이 대전제에서 사용하고 있다. 소전제도 마찬가지다. 증명되지 않은 은혜계약을 증명된 것같이 사용하고 있다. 두 개의 전제가 타당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결론도 물론 타당하지 않다. 

④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해볼 때 행위계약의 근거는 분명하다는 주장을 검토해 보자.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대비되고 있는데, 이것은 아담이 그리스도와 같이 계약의 머리라는 가정 위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벌콥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행위계약 사상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벌콥의 주장은 로마서 5장 12-21절의 석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학적 전제를 본문 석의에 집어넣으려는 억지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면 은혜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어떤가? 우선 은혜계약에 대한 증거로 제시되는 창세기 3장 15절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창세기 3장 15절은 이른바 '원복음'(Protevangelium)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메시야에 관한 최초의 약속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이 어떻게 해서 은혜계약에 관한 증거본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본문 어디에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과 구원을 주겠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는가? 창세기 3장 15절은 메시야에 관한 약속이지 구원을 말하는 은혜계약은 아니다. 

창세기 17장 7절은 어떤가? 그것은 "아브라함과의 언약"(Abrahamic covenant)이지 계약신학에서 말하는 은혜계약은 아니다. 은혜계약은 아담 타락 직후에 체결된 언약인데,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그로부터 수천년 뒤의 일이다. 시간적으로도 맞지 않다. 

벌콥이 제시하고 있는 예레미야 31장 33절, 32장 38-40절, 에스겔 34장 23-25절, 30-31절, 36장 25-28절, 37장 26-27절, 히브리서 8장 10절 등은 모두 "새언약"에 관한 구절이지 은혜계약에 관한 구절이 아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6장 16-18절은 계약과는 상관이 없는 구절이다. 

은혜계약 체결 시기와 계약 당사자에 관한 혼란도 은혜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은혜계약에 관한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면 계약 당사자가 아담이니, 죄인들이니, 아브라함이니, 택자니, 그리스도니 하는 식으로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은혜계약의 체결 시기와 계약 당사자가 누구인지 석의적으로 분명히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경적 언약'(Biblical covenant)과 '신학적 계약'(Theological covenant)은 동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 새 언약 모세 언약 등은 모두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성경적 언약'이다. 그러나 행위계약이니 은혜계약이니 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무하거나 거의 없다. 계약신학자들은 성경적 언약과 신학적 계약(언약)을 혼동해 성경적 언약에 관한 구절을 신학적 계약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오류를 흔히 범하고 있다. 

다음은, 은혜계약의 하나로 창세기 3장 이후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리한 시도이다. 신약과 구약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성서신학 입장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다. 신구약 상호간의 관계를 하나의 개념으로 축소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많이 있어왔다. 

예를 들면, 아이히로트(Walter Eichrodt)는 계약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젤린(Emst Sellin)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쾰러(Ludwig Kohlker)는 주(主)로서의 하나님을, 빌트베르거(Hans Wildberger)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택을, 제에바스(Horst Seebaas)는 하나님의 통치를, 클라인(Gunther Klein)은 하나님 나라를, 포러(Georg Fohrer)는 하나님의 통치와 신인(神人)간의 교통을, 프리첸(Theodorus C. Vriezen)은 교통을 그 중심 개념으로 내세우고 있다. 

신구약 성경을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시키려는 이들의 노력은 충분히 인정할만한 것이지만, 다양한 성경의 내용을 한 두 개의 개념으로 축소시키려 할 때 지나친 주관성과 강제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두 개의 개념으로 다양한 내용을 묶으려할 경우 그 개념에 딱 들어맞지 않는 내용도 억지로 갖다 붙이려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맥을 떠난 해석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은혜계약으로 모든 것을 총괄하려는 계약신학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한 입장은 '다양성 가운데서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창세기 3장 이후의 모든 내용을 은혜계약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교회의 시작에 관해서 혼동하고 있다. 계약신학에서는 구속함 받은 무리의 모임 자체가 교회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부터 교회가 있었고, 신약교회도 그 연계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족장시대에는 교회 회원이 신자의 가족들이었고, 모세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신약시대에는 참 신자들이다. 계약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모순점은 새 시대의 시작이나 교회의 시작이 아니고 구약교회의 영적 회복에 불과하다. 

은혜계약의 바탕 위에서 신구약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계약신학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그러나 석의적으로 오순절 이외의 다른 시점을 교회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가? 여기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예언서 해석의 원리」(서울:요단출판사, 1992) 제5장 1절(PP. 85-114)을 참고하기 바란다. 

둘째, 교회의 시작 문제와 연관된 문제가 교회와 이스라엘은 동일한가, 다른가 하는 문제이다. 계약신학자들은 물론 양자를 동일시하면서 이를 구별하는 세대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이 문제도 위에서 언급한 필자의 「예언서 해석의 원리」 제5장에서 자세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 재론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계약신학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동일한 것이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은 모두 영적으로 교회에 의해 성취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주장이 석의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계약신학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음을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셋째, 침례(세례)와 할례를 혼동한다. 특히 유아세례의 근거를 말할 때 양자를 동일시해서 언급한다. 이것도 계약신학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결론이다. 그러나 할례와 침례(세례)를 동일시해서 구약 시대에 유아들이 할례 받았으니 오늘날 유아들도 세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먼저, 할례는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임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그것은 신앙과는 상관없이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침례(세례)는 중생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다. 그것은 철저히 신앙의 근거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와 침례(세례)는 동일시할 수 없다. 

다음으로 할례는 남자에게만 행해졌다. 만일 할례와 침례(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유아 세례도 사내아이에게만 행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신학자들은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침례(세례)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분명한 석의적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