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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천년설- 조지 엘든 래드

역사적 전천년설- 조지 엘든 래드

2014-01-06 15:26:05


이 글은 하바드대학교 신학부에서 신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훌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보수신학자, 죠지 E. 라드(George E. Ladd)가 [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관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이다.[George E. Ladd, "Historic Premillennialism,"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Edited by Robert G. Clouse. pp. 17-40.]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은 오는 새 시대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구속목적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재림 후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천년동안 다스릴 것을 믿는 교리이다.

 

계시록 19장 11-16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적그리스도, 사단 그리고 사망을 쳐부수기 위해서 오시는 정복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계시록 19장 17-21절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무리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다. 계시록 20장은 적그리스도의 배후에 있는 용 또는 옛 뱀이요 사단의 악한 세력의 멸망을 기술하고 있다. 이 일이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사단이 묶이고 무저갱에 천년동안 감금된다. 적그리스도를 통해서 만국을 미혹하던 행동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계 20:5). 이 일 후에 사단이 묶임에서 풀리고,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지상에서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을 거역할 중생 받지 못한 자들을 찾아낸다. 마지막 한 차례의 종말론적 전쟁이 따르고, 사단은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와 함께 유황불 못에 던짐을 받는다. 이때 천년왕국 전에 부활하지 못한 자들의 둘째 부활이 일어난다. 이들은 행위대로 심판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된다.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이 때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짐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 명의 적, 즉 적그리스도, 사단,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다. 모든 대적들의 권세가 굴복되었을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영원한 상태가 도래한다(계 21:1-4).

 

1. 해석법의 문제

 

시대구분론자들은 구약예언 중 많은 부분이 천년왕국을 예언하고 있으며, 이들을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묘사와 비교해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구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해석법에 기초하고 있다.

 

시대구분설의 첫째 필수조건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이다. 챨스 라이리(Charles Ryrie, Dispensationalism Today의 저자)와 다니엘 훌러(Daniel Fuller)는 말하기를, "시대구분론의 근본적인 전제는 영원토록 구분을 유지해온 두 백성의 형태 속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두 목적에 있다"고 한다. 이 결론은 두 번째 원칙 즉 성경해석의 문자적 조직 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원칙적으로 구약성경에 적용을 두고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땅을 영원토록 유업 받을 것과 하나님의 신성왕국을 영원토록 형성할 것을 약속한다. 이들 예언이 천년왕국에서 성취된다는 것이 시대구분론자들의 해석이다.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반대되는 것이 영적 해석방법이다. 이 해석법은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무천년설 주창자는 항상 천년왕국의 영적 해석을 주장한다. 천년왕국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이거나 사후 중간상태(낙원)에서의 순교자들의 통치라고 본다.

 

시대구분론자들은 이 영적 해석을 현대 자유주의자로 낙인찍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시대구분론은 구약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만이 참된 복음주의적 신학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위험한 극단적인 견해이다.

 

마지막 시대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관한 해석문제 가운데서 주요한 쟁점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밀하게 검토돼야 할 쟁점이다. 문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자주 구약성경의 본문배경과는 다른 의미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 15절의 호세아 11장 1절의 인용은 예수께서 이집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이집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세아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고 한다. 호세아의 이 말씀은 결코 예언의 말씀이 아니며,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는 역사적 언급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를 큰아들로 인정하여, 의도적으로 역사적 진술을 예언으로 바꾸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 예언을 통하여 흐르는 하나의 원칙이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비추어 재해석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신약성경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사야서 53장에서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예언을 찾고 있다. 마태는 종이 견디어야할 고난이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이 예언을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마 8:17). 그러나 빌립은 종의 고난을 예수께 대한 것으로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말하고 있다(행 8:30-35). 

 

어느 누가 이사야 53장이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것이 예수의 고난에 관한 예언이라는 사실이 물론 분명하나, 오직 사건 후에 해석되었을 때에 그러하다. 단순한 사실은 이사야 53장이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는 이것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아의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승리자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 왕으로써 내정되어 있다. 이것이 이사야 11장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여기 분명히 다른 묘사를 보게 된다. 메시아는 다스리고, 악을 파괴하며, 악한 자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그와 같은 승리의 지배자가 동시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며,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겠는가?(사 53:12)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53장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리스도는 정복하고 지배하기로 되어있지, 정복되고 고난받기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정복자로 지배자로 오시기 전에, 먼저 겸손한 고난의 종으로 나타나야 할 것에 대해서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사실도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수난 받은 자는 결코 그리스도나,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름 없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본문의 배경에 의하면, 수난의 종은 하나님의 종으로써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참고 52:13; 50:10; 49:3; 49:5; 45:3). 이들 성구들은 종이, 이스라엘과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를 말하고 있다. 종은 이 두 개념 사이에 상호 연관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종은 그리스도나 다윗의 지배자라고 불리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 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사야서 53장이 종을 정복자, 구원받은 자의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억눌리고, 고난 받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그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아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비추어 해석될 때에 비로소 그러하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 작용하지 않은 원칙을 분명히 세운다. 문자적으로는 이사야서 53장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이름 없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은 그것들의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좀더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신약교회에 적용한다는 결론과,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원칙이 가장 생생한 예문은 로마서 9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환언하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유대인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이 부르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호세아에서 두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 

 

호세아에서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문자적 국가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불순종의 백성이 순종하는 미래의 회개의 날을 본다. 

 

그는 바다의 모래 같은 큰 무리의 남은 자를 본다. ". . .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10)고 한다.

 

이것은 유대인의 미래의 회심을 말한 것이다. 두 번째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 2:23)고 한다.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장래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 백성은 하나님께 한 때 거절당하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장래의 구원에 대한 이 두 구절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취해서 이것들을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호세아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 이것이 영적 해석이라 할지라도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적용했는가는 분명한 일이다.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롬 4:11). 또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롬 4:16).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갈 3: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만약 아브라함이 영적 백성의 아버지라면, 그리고 만일 모든 성도가 아브라함의 자녀요, 그의 소산이라면, 그들은 영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이라 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오직 심령에 할례를 받은 자라야 참된 유대인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이 두 절의 말씀 속에서 바울이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대부분이 이방인인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바울 사도는 교회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회피한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가 쓰고 있는데, 혹자는 이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국한시키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해석상의 논박이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구약성경의 배경 속에서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속하는 예언의 말씀들을 교회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교회를 아브라함의 자녀 또는 씨라고 부른다. 그는 신자들을 참된 할례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바울이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보았다는 결론을 회피하기란 어렵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성구가 있다. 예레미야서 31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반역스런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하시는 한 날을 예언하고 있다. 이 새 언약은 그의 백성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 의해서 특징지어질 것이다. ". .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 .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렘 31:33-34).

 

히브리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만들어진 새 언약에 적용시키고 있다. 히브리서 8장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소개된 새 질서를 구약의 지나간 질서와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옛 것이 아닌 참된 장막 가운데서 섬기신다. 왜냐하면, 옛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히 8: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히 8:6). 왜냐하면,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히 8:7). 이 말씀들은 결점 있는 옛 언약과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과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히 8:8). 즉 하나님께서 옛 질서 아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언약의 말씀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이 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8장 8-12절은 예레미야서 31장 31-34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이 그리스도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새 언약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가능하게된 새 언약을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구약성경에 대해 말하면서 히브리서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며, 첫 것은 낡아지게(희미)하는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고 말씀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66-70년 사이에 유대전쟁으로 파괴되었는데, 히브리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의 옛 질서는 끝났다고 히브리서는 선포한다.

 

시대구분론적인 천년왕국설의 한가지 중심사상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문자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천년왕국 동안 유대인의 성전이 재건되며, 전체 희생제사 체제가 재 제정된다고 에스겔서 40-48장의 예언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의 희생제사와 구약시대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에 대한 기념일 것이라는 것이다. "천년왕국 시기에 문자적으로 지켜질 천년왕국의 희생제사 의식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제사를 돌아보고 기념한다는 중심 사상을 가진 희생제사를 의미한다"(John 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 p. 312)고 왈부르드는 말한다. 그러나 기념적이던 실질적 재건이던 어떠한 형태의 구약의 희생제사 체제의 재건도 히브리서 8장 13절의 말씀과는 상치된다. 히브리서 8장 13절의 말씀은 "옛 것은 낡아지고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8장 8-13절의 말씀은 시대구분론을 두 가지 점에서 반박한다.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는 것과 없어져야 할 운명의 구약의 희생제사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는 주장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의 주요한 요점은 구약시대에 역사적으로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많은 예언의 말씀들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 문제가 적용되는가? 구약성경은 그것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어질 것인가를 명백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예언들은 유대인들에게 예기치 못했던 방법과 구약성경 자체가 미리 보지 못한 방법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해서는 신약에 의해서 구약이 해석된다는 것이다.

 

시대구분론과 다른 천년왕국설 사이를 가르는 분수령의 기본은 시대구분론이 구약의 문자적 해석에 의해서 종말론을 형성하고 신약을 그것에 맞추는데 있다. 다른 학설의 종말론은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에 근거하여 종말론적 신학을 형성한다. 종말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어질 것인가를 확신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리스도의 초림이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의해서 예견한 방법으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는 피할 수 없는 지시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제까지 언급한 모든 것을 그대로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두 개의 성구가 신약성경에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서 11장 26절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말씀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감람나무를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원 가지들이다. 이방인들은 돌감람나무 가지들이다. 본성을 거슬러, 원가지인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꺾이우고 그 대신 이방인들인 돌감람나무 가지들이 접붙임을 받았다(롬 11:9). 그러나 원 가지들이 불순종을 끝내고 믿기만 하면 자신들의 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것이다(롬 11:23).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었은 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롬 11:24)고 한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진술의 배경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하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11:26).

 

신약성경은 문자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구원의 시기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방인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도 일어날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천년왕국의 성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다고 믿기에는 해석학상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 가운데서 세워진 새 언약 안에서 성취된다. 이스라엘의 회심은 천년왕국과 관련해서 일어날 것이다. 천년왕국 가운데서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참된 기독교 국가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의 회심과 천년왕국 가운데서의 그들의 역할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비시대구분론적 종말론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장래 구원을 인정할 뿐이며,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미래에 의존할 뿐이다.

 

일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구약성경의 많은 약속들이 교회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의 유일한 규범적 원칙에서 성취되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신약성경이 이스라엘의 최종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입증한 바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써 계속 남아있다(롬 11:16). 우리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알 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 남아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저들을 마지막날 구원할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 천년왕국의 본문배경

 

어떠한 천년왕국 교리도 그것이 신약성경의 본문배경과 특히 그것의 기독론과 일치해야 하며, 해석상의 문제와 동일하게 중요하다.

 

신약성경의 중심교리 중 하나는, 종종 경시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천국 보좌에 관한 교리이다. ". . .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것이 신약성경 여기 저기에 나타나 있는 주제이다. ". . .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히 2:7-8).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리니"(히 10:12-13). 

 

시편 110장 1절에 하나의 분명한 암시가 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시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우편은 특혜의 자리이며, 권능의 자리이며, 월등한 자리이다. 이 자리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 있다. 우편은 효과면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같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 다음가는 통치자로서 천국에서 다스리고 계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대항세력을 진압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시작된 천국에서의 영적 통치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통치의 원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적 원수를 멸망시키는 것이며,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고양(高揚)과 통치의 진리는 기독론적인 성구인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원천적인 고대 기독인의 고백은 예수가 구세주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8:10). 이것은 예수가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님의 위치에까지 고양시키신 것을 내가 인정하는 신학적 고백이다. 그는 주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높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주권 앞에 절함으로써 그분을 나의 구주로 삼는다.

 

여기서 주권과 왕권은 상호 바꾸어 쓸 수 있는 용어이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이 말씀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한편, 모든 원수가 그리스도의 발 밑에 놓이는 주 예수의 중보적 사역에 의해서 이다. 이 일이 성취되었을 때에 그리고 그분이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망시키셨을 때, 주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께 왕국을 바치실 것이다(고전 15:24).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같은 진리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본문 배경으로 볼 때, 이 말씀이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높이심을 받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3장 18절에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로써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그분의 높이심에서 예수는 그의 그리스도의 선교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기름부음 받은 다윗 왕의 역할을 말하기도 한다. 주는 종교적 술어로써 절대주권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는 중요성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나타나 보여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좌에 앉으실 이를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고 예언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높이심을 받았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행 2:34-35). 여기서도 시편 110장을 인용한 것이다. 예수의 높이심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에서 하나님은 시편 110장의 약속을 성취 하셨음을 베드로가 의미한다는 결론을 회피하기란 어렵다. 영감 가운데서 베드로는 다윗의 왕좌를 예루살렘이 시온산(시 110:2)에서 천국으로 옮겼다. 예수는 천국 보좌에 앉으시는 주가 되셨다. 그분은 또 그리스도의 다윗 왕으로써의 통치를 이미 시작하고 계신다. 그는 주와 그리스도로써 그의 통치를 이미 시작하신 것이다.

 

이 진리는 예수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헬라어 단어중 하나인 아포칼뤂시스에서 반영되는데, 아포칼뤂시스는 "계시"란 뜻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그들이 기다린다고 고린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다(고전 1:7). 주의 재림은 "주 예수가 하늘로서 나타나실 때"(살후 1:7) 억눌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미 그분의 것인 통치권과 주권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은 지금 주이며,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의 현재의 통치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보여진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여지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분의 재림은 이미 그분의 것인 주권의 폭로 즉 계시를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과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딤 2:13)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동안 교회의 주이시라는 견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 시에 그분의 메시아적 통치를 시작한다는 견해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또 그분의 왕권이 우선적으로 천년왕국에 속한다는 견해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그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통치는 이미 그분의 것인 통치권과 주권을 역사에 표명하시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3. 천년왕국설

 

이제 우리는 신약시대로 돌아가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모든 천년왕국설은 구약성경의 예언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것과 오직 신약성경 하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적 천년왕국을 말하는 유일한 성경말씀은 계시록 20장 1-6절에 있는 말씀이다. 어떠한 천년왕국 교리도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주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계시록은 묵시라 불리는 문학장르에 속한다. 첫 묵시록은 경전인 다니엘서였다. 그 후 많은 모방 작품들이 200 B.C.와 A.D. 100년 사이에 속출하였는데, 에녹(Enoch), 모세의 승천(Assumption of Moses), 에스라4서(4Ezra), 그리고 바룩(Apocalypse of Baruch)같은 것들이 있다. 묵시록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요점은 1)묵시록이 역사상의 일련의 사건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알기 어려운 상징적 용어를 쓴다는 것과 2)묵시의 주요한 관심은 마지막 시대와 하나님의 왕국의 성립에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가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모세의 승천에서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은 이어지는 네 세계적 제국들의 일어남을 대표하는 바다에서 나오는 네 짐승를 본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보좌에서 인자 같은 이를 한 분 본다. 이 분이 가장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그분이 세상에 가져오시는 한 왕국을 받으신다(단 2장). 이것이 다니엘이 마지막 시대와 하나님의 왕국의 성립을 기술하는 방법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13장의 짐승은 고대 로마제국과 마지막 시대의 적그리스도이다. 첫째 주목할 것은 계시록 20장의 사건이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환상 후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재림에 관한 환상은 19장 11-16절에 나타난다. 이 환상에서 강조되는 것은 모두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전사와 같이 백마를 타시고 천상의 군대와 오신다(계 19:16). 그분은 적그리스도와 싸우시기 위해서 오신다. 이 적그리스도는 13, 17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무기는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검뿐임을 언급하는 것도 가치가 있는 줄 안다. 그것으로 그분은 만국을 멸하신다(계 19:5). 진실로 여기에 놀라움이 있다. 그분은 그분의 말씀 하나로 승리를 거두신다. 이 말씀은 "살아있고 생동력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날카롭다"(히 4:12)고 성경은 말한다. 그분은 세상의 무기로써 승리를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하나로 승리를 거두신다. 그분은 말씀하실 것이며 승리는 그분의 것이다. 혹자들의 해석은 이 환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증거 되는 데에 대한 심한 상징적 묘사를 보고 있다. 이 해석은 가능한 것 같지 않다. 계시록의 주제는 그분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주의 재림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 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우리는 여기서 신약신학 전반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할을 다시 고려해 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모든 곳에서 나타난 절대적인 중심 교리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주재와 영광이 예수의 인성에 나타나신 역사상에 하나의 신성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이 주재와 영광이 나타나실 제 이의 신성의 구현이시다. 계시록 19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한 계시록에서의 유일한 말씀이다. 만약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한다면, 계시록의 어느 곳에서도 주의 오심을 기술한 말씀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계시록 19장 6-10절은 "어린양의 혼인"을 선언하고 있다. 이 혼인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날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말한다. 결혼 그 자체는 서술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의 재림 시 일어난다. 주제는 다시 21장 2절에서 언급되는데, 하나님의 구속받은 성도를 나타내는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 하늘로써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를 기술하기 위하여 혼인잔치라는 말로써 표현하셨다(마 22:1-14). 그리고 신랑의 오심이 불확실한 시간에 오실 것을 말하심으로써 왕국의 도래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임할 것을 강조하였다(마 25:1-13). 바울 사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동정녀 신부와 그녀의 한 분 남편의 관계로 비유하였다(고후 11:2). 교회는 아직 부인이 아니다. 결혼은 종말론적인 연합이다. 또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남편과 부인의 관계로 설명하였다(엡 5:25-33). 그러나 실질적 혼인은 교회가 장차 그리스도 앞에 제시될 장래의 일로써 다음과 같이 보았다. "자기 앞에 영광스런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계시록에서 실제적 사건으로써의 혼인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최후의 구속적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 때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는 시간이다(계 21:3).

 

19-20장은 어린양의 혼인, 즉 그리스도의 승리적 재림과 원수로부터의 승리를 연속적인 이야기 형태로 선포하신다. 계시록 19장 17-21절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누르고 승리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대 전쟁술어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들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었다"고 성경은 말한다(계 19:20). 20장은 짐승 배후에 선 사단을 누르고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술하고 있다. 사단을 누르고 이기는 승리의 두 단계가 있다. 첫째, 사단은 묶이고 무저갱에서 천년동안 갇히기 때문에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는 단계(20:3)와 둘째는 일 천년 후 사단이 잠시 놓였다가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유황불 붙는 지옥에 영원히 던지움을 받는 단계가 있다.

 

이것이 계시록 20장 1-6절의 수용할 만한 유일한 주석이라고 나는 믿는다. 말씀의 주석은 4-5절의 주석에 달렸다고 본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살아서"라는 말의 번역은 헬라어 동사인 ezesan(      )에서 나왔고, "그들이 살았다"는 뜻이다.[역자주: ezesan(      )은 zao(   )의 능동태 단순과거 3인칭 복수동사이다.] "살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말씀의 전반적인 해석은 첫째 부활과 나머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육체부활과 같은 부활을 의미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첫째 부활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문자적인 육체부활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는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이 구절에서 천년왕국의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는 열쇠를 찾게 될 것이다.

 

첫째 부활에 대한 영적해석은 신약성경이 영적부활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주장으로는 반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은 영적부활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6절은 죄에 한 때 죽은 우리가 다시 살았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믿음을 가질 때 일어나는 영적 부활임이 분명하다. 

 

요한복음 5장 25-29절에서도 다시 영적부활과 육체부활이 같은 본문 배경 속에서도 일어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여기서 보면, 영적부활이 먼저 있고, 몸의 부활이 뒤따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년왕국설을 믿지 않는 해석가들은 계시록 20장을 요한복음 5장과 유사한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계시록에서의 말씀에 참된 유사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요한복음에서 본문배경 자체가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한편, 다른 한편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시한다. 살아난 첫째 그룹에 관해서는 시간이 이미 이르렀다. 이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것에 따라서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둘째 그룹은 무덤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그와 같이 죽은 자들이 다시금 생명에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일부가 생명의 부활로, 오는 시대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에로 몸의 부활을 체험한다. 그 나머지 일부는 저주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또 그들에게 제시된 생명을 거절했기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요 3:18, 36). 이 말씀은 예수께서 듣는 자들이 현재의 영적부활과 장래의 육체의 부활이란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계시록 20장에는 이와 같은 비슷한 해석의 다양성을 위한 어떠한 본문 배경적인 단서를 갖지 않는다. 말씀의 언어는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다. 말씀의 의미를 소개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부활을 해석해야 할 필연성이나 본문 배경적인 가능성도 갖지 않는다. 천년의 시작 전에 죽은 자의 일부가 살아날 것이고, 천년이 다 차면 죽은 자의 나머지가 살아날 것이다. 여기에는 말장난 같은 흔적은 없다.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때 완벽하게 의미가 통하게 되어있다.

 

같은 단어가 계시록 다른 곳에서도 두 번 같은 의미로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에서 이 견해는 보강되어진다. 계시록 2장 8절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ezesan) 가라사대"로 말한다. 여기서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계시록 13장 14절에서도 짐승에 대해서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ezesan) 짐승을 위하여"라고 말한다. 13장 3절부터 볼 때, 여기서의 상처는 생명에 위태로운 즉 죽게된 상처라는 것을 안다.

 

에베소서 2장과 요한복음 5장은 계시록 20장과 유사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또 이들 말씀들은 첫째 부활은 영적 부활로, 둘째 부활은 몸의 부활을 말한다는 해석에 충분한 타당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자연스러운 연역법적 주석은 두 부활이 같은 방법 안에서 취하여진, 즉 몸의 부활을 말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자주 인용되는 헨리 알포드(Henry Alford)의 말 이상으로 우리는 잘 표현할 수 없다.

 

만약 두 부활을 언급한 말씀 가운데서, 즉 첫째는 영적부활을, 첫째부활 후의 어떤 특정한 시기를 지칭한 말씀에 나머지 육체의 부활을 언급한 말씀 가운데서 - 만약 그와 같은 말씀 가운데서 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는 영적 부활을 의미하는 한편, 둘째 부활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몸의 부활을 의미할는지 모른다면; - 그러면 언어에 있어서 모든 중요성의 종말이 있을 뿐이며,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진술로써 씻겨져 버리고 말 것이다.

 

혹자들은 요한이 본 것이 몸이 아니라 영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요한이 본 것은 살아있는 영혼들이었다. 즉 부활 가운데서 생명에로 일어나는 것을 본 것이다.

 

천년왕국설에 가장 강한 반대는, 이 교리가 오직 계시록 20장 한 곳에서만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천년왕국설을 믿지 않는 학자들은 유사성의 논쟁에 대해 이 문제를 붙인다. 즉 어려운 말씀은 분명한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말씀이 천년왕국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시대구분론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서 가운데 나타난 천년왕국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이다. 이것은 누가 천년왕국에 들어가고 누가 제외되는가를 결정하는 심판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의로운 자들은 영생으로, 악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을(마 25:26) 본문 자체는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해석은 불가능하다. 영생은 천년이 아니고 오는 시대의 영원한 삶인 것이다. 실제로 발부르드(John Valvoord)는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천년왕국설을 찾지 못한다는 이유로 본인을 무천년설 주창자로 분류하였다. 실제적으로 본인은 복음서에서 천년왕국이나 중간 지상왕국에 관한 어떠한 사상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한 구절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천년설이 아니면 중간왕국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3-26절에서 바울은 몇몇 단계에서 성취될 그리스도왕국의 승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첫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즉 재림 시에 일어날 것이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세 단계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1)그리스도의 부활; 2)부활 때에 믿는 자들의 부활; 3)종말. 분명하지 않은 중간시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재림시기 사이에 떨어진다. 두 번째 분명하지 않은 중간시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분의 재림시기 사이에 떨어진다. 두 번째 분명하지 않은 중간시기는 재림과 종말 즉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완전히 굴복시키실 때 사이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계시의 점진성의 예를 보게된다.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래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질문에 해답을 주는데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벧후 1:19). 성경을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점진적 계시를 인정한다. 신약성경의 모든 부분이 천년 왕국을 예언하지 않는 것이, 구약성경이 분명하게 교회시대를 예언하지 않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로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천년왕국의 교리 즉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의 목적을 주해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어떤 방법에 있어서는 천년왕국은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밑에 놓는 것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통치의 일부일 것이다(고전 15:25). 천년왕국의 또 다른 가능한 역할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왕국이 역사상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의 지상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왕국을 인간에게 가져오는 것이었다(마 12:28). 왕이 이미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그분의 왕국으로 이전되었다(골 1:13).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 승천 때부터 그분의 메시아적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논증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현재의 통치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고, 인정되지 않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으로써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현재 질서와는 매우 다른 질서일 것이다(벧후 3:12; 계 21-22장). 천년왕국은 우리가 그것을 아는 대로 그리스도의 통치의 영광과 능력을 세상에 나타낼 것이다.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의 또 하나의 가능한 이유가 있다. 마지막 때에 사단은 그의 투옥에서 풀릴 것이며, 인간들이 평화와 의를 찾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단의 궤계에 넘어갈 인간의 심령을 사단은 찾을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데 일목을 담당할 것이다. 죄 즉 하나님을 대항하여 거역한 죄는 사악한 사회나 나쁜 환경 때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 심령의 지독한 죄성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는 최후의 심판 날에 완전히 입증될 것이다.

 

천년왕국 교리에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신학이 비록 그것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할지라도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쌓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전천년설 주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