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년왕국- 손성은
2013-12-25 20:18:40
통천년왕국(統千年王國, pan-chilliasm)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시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지난 주일 박계원목사님을 통해서 들었던 천년왕국에 대한 세 입장 중에서 저는 소위 “무천년왕국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천년왕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pre-), 후(post)라는 말과 더불어서 “무”(a-)라는 접두사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곧 “무천년왕국”이란 “천년왕국이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오해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이든 실제적이든 그리고 한 번 뿐이든 성경에는 이 단어(“천년, chiliasm)가 분명하게 나옵니다(계20:3,5,7). 기독교의 신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어떤 위치를 이 개념이 차지해야 하느냐는 것은 차지하고 하여튼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존의 신학적 개념과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통(pan-, or supra-)천년왕국”이라는 말로 저의 견해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무”, “a-”)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때부터 지금도 계속 (“통”, “pan-”, 혹은 “supra-”)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초대교회때부터 이 지상 가운데에 “천년왕국”이 성취되었고 또한 그 왕국의 통치가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고 또한 이 땅 우리의 삶 가운데에 그 왕권을 주장하면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전에도 말씀드렸던 “하나나님 나라”의 개념과도 일치됩니다. “실현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에 속해서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 바로 “천년왕국”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올 어떤 “왕국”이 아니고, 이미 이 땅 가운데서 성취되어져서 더욱 완성되어져 가는 “왕국”이 바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왕국”이 역사의 어떤 싯점에서 성취되어졌으며, 우리 개인에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설명은 간단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설명은 좀 길게 오늘 설교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이 “천년왕국”,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정점이 바로 오순절날의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입니다(특별히 행2:33, 15:16). 이 날에 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종말”의 때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말씀드렸던 것은, 성령의 강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위 “성령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의 백성들과 자녀들에게 쏟아부어주는 것을 말합니다(행2:33).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세례란 일종의 가입식입니다. 이전에는 세상에 속해 있던 자들을 “하나님나라”, “천년왕국”에 속하도록 불러서 일종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이 세례는 바로 “성령으로 주신 예수님의 이 세례”를 지향합니다.
이 (성령)세례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지어지고 그 퇴락한 것이 보수되어진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사인입니다. 위대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된 것을 그 정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이 날은 위대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고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그 기쁘신 뜻 가운데서, 당신께서 인간과 더불어 영원하고 지복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그를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소교리문답1). 그래서 당신을 인간에게 창조된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셔야 했고, 또는 꿈과 묵시, 현현을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승천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의 자녀(백성)와 더불어 당신께서 교제 나누시기 위한 일종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 교제를 위한 과정의 정점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도 하나님 당신이 누구시냐는 것을 보여주셨던 현현이었고, 성령강림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 지를 나타내어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이 가장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 주님의 생생한 현현을 통한 교제의 체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만큼 놀라운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목사님께
박 형룡 박사의 영향으로 역사적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보수교단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적 개혁주의의 입장엔 아직도 대다수가 무천년설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도 그 입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로이드존스는 이 주제가 아디아포라의 문제이며 이 주제로 연합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천년이라는 숫자를 자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자연히 무천년의 입장이 가장 무난한 성경해석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손 목사님의 설교에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 중의 하나는 천년왕국의 정점이 오순절 성령강림이라고 보는 것에는 동의가 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더 큰 왕국 개념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십자가는 패배하신 사건이 아니고 오히려 승리하신 사건이기 때문인데 그 사건이야말로 뱀의 머리를 치고 무저갱에 가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는 점이 부각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해 주신다면 더 큰 은혜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 09.06.13 23:29
한우리님에게,
감사합니다. 부족한 아이디어에도 공감해 주시는 리플에 감사를 느낍니다. 이런 용어문제를 재고해 보는 작업이 한국신학계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한 두군데가 아니겠습니다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무천년설”을 “통천년설”등으로 개진해 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에 주저하는 마음이 없쟎아 있었습니다. 격려해주심에 더욱 힘을 내어봅니다.
한우리님께서 의문을 가지시는 것처럼, 계20:1-3의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구절에 대한 이해는 “통천년설”의 개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절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만국이 미혹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들을 모두 다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시간이 주어지면 저도 그렇게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여깁니다만, 그럴 여유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최근엔 “성령세례”와 관계되는 자료들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왕국설은 그 성령론과의 관계하에서 잠시 정리를 해 본 주제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중요한 주제라고 여겨지는군요. 특별히 “하나님나라”의 개념과 관계해서 생각할 때 말입니다. 이상한 것은, 이 천년왕국설을 종말론과 관계시키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신학의 중요한 주제와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천년왕국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연관성을 시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저로서 기이하게 여겨집니다.
하여튼, “만국을 미혹하지 못한다”는 말에 대한 “통천년왕국적”이 이해가 얼마나 이해가 될 런지는 모르지만, 제가 이해하는 바를 올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저의 설교의 마지막부분에서도 간단히 언급을 했었습니다만, 마귀가 “천년”동안 결박을 당하여서 “만국”을 미혹하지는 못할 지라도 “개인”을 미혹할 수는 있는 상태가 “천년왕국”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의 가능성은 본문 자체내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천년왕국”에 대한 인상을 배제하고 본문 자체내에서 “천년”의 의미가 무엇인 지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년왕국”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다른 부분의 성경구절들에 대한 지식들을 가지고 이 본문을 이해하려고들 합니다. 곧 “천년왕국”을 “이상적인 메시야왕국”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학적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년”이라는 말이 이 계시록 20장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가능한 한(선입견을 벗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이 본문 자체 내에서 그 의미의 단초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본문을 다시 읽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이 장의 표현된 개념들이 거의 모두 다 “상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천년”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무저갱 열쇠”, “큰 쇠사슬”, “옛뱀”, “마귀”, “사단”이란 단어, “결박”, “살아서”, “왕노릇” 등등의 개념들이 모두 그렇게 상징적입니다. 심지어는 “천사”라는 말도 영적 존재에 대한 상징적 언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이런 문제는 종교적 언어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논의의 폭을 “만국의 미혹”이란 개념에 제한한다면, “천년” 동안 있게 되는 일들을 정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1) 사단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 잠겨짐(만국을 미혹하지 못함), 2)보좌에 앉은 자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음(그 심판의 권세가 “천년” 동안 실행되는 지는 정확하지 않음), 3)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나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일, 4)둘째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함, 5)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됨 입니다.
이 구절들을 보게 되면, 유토피아적 이상왕국으로서의 메시야왕국을 연상시킬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만일, 선입견을 가지고 보려면 볼 수도 없쟎아 있겠지요. 하지만, 본문 자체가 그런 유토피아적 해석을 거부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첫째 부활”과 “둘째사망”이라는 말의 등장입니다. “둘째 사망”이 있다면, “첫째 사망”도 있어야 하고, 이런 “사망”의 패턴구조와 대응이 되는 “첫째부활”과 “둘째 부활”도 또한 있어야 합니다. 이 본문에 “둘째 부활”이나 “첫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문맥상, 표현상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먼저 “첫째부활”(5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5절의 첫부분은 ( )안에 처리되어 있는 데 사본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논의에서 제외시키겠습니다.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어느 쪽으로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째 부활”은 분명히 “예수의 증거와….아니한 자들”(4절)의 부활임에 분명합니다. 1장9절, 6장9절이 연상되는 표현입니다. 이들에게는 “둘째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라는 개념은, 출19장부터 벧후1장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제사장”을 연상시켜 줍니다. 논의의 간편화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전천년왕국, 후천년왕국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재림 이후의 영원왕국적인 시각으로 보려고 하면 난점이 생깁니다. 곧, ‘제사장”은 대신해서 제사를 드릴 그 대상이 필요합니다. 제사에 참여하는 “백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은 기독교신학의 구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들 간에 제사장계층이 있고, 일반성도계층이 있다는 식의 생각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계층이 전천년왕국이나 후천년왕국이나 아니면 영원왕국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기독교전체신학적 구조를 왜곡시켜야 할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이상적 메시야왕국”이기 때문에 불신자도 없고 오직 메시야의 완전한 통치만이 있다고 하면 “제사장”이라는 개념자체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한다”고 하는 표현도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왕”이라면 “통치를 받는 신하”가 있어야 합니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왕”노릇을 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계층의 사람들,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인들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만일 전천년왕국설, 후천년왕국설을 받아 들이게 된다면, 또 다시 그 천년왕국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최소한 이원화시키는 위험을 안게 됩니다. 물론, 그 왕노릇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을 대상으로 한다고도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억지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논의를 배경으로 해서, “첫째 부활”이란 아무래도 “영적 부활”을 상징하는 말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리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다. ‘영적 부활”이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중생과 회심”의 사건을 두고 말합니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제사장이 된다거나, 왕노릇을 한다거나 하는 상징적 표현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한 국면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 해석에 대한 성경구절들의 인용은 많겠습니다만 생략합니다만 참고. 계5:10절).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그리스도의 삼중직(왕, 제사장, 선지자)을 따라서 또한 그들도 삼중직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함이 바로 칼빈주의신학적 윤리의 요체라는 것이 저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둘째 부활”이라는 것이 예수의 재림으로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영혼”과 “몸”의 재결합, 그리고 그 이후의 영원세계로의 진입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본다고 하면, 기존신학적 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통천년설적 입장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둘째 사망”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둘째사망”(6절, 14절)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둘째 사망”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를 다스릴 권세가 없다고 합니다(6절). 이것은 “첫째 부활”을 한 사람들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그리스도인 된 사람이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기존신학적 설명과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첫째 사망”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이 “첫째 사망”이란 “육신의 사망”을 이야기하고 이런 면에서 “둘째 사망”은 “영원한 사망”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본문을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둘째 사망”이란 불신자들이 당하게 될, 예수님 재림때에 일어나게 될 “모든 사람”들의 부활때에 “불신자”들도 “부활하게 되되”, 그들의 육신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어서 그 이전까지는 “영혼”만의 고통속에서 첫째 사망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 결합으로 인하여 있게 될 “영원한 고통”을 “둘째 사망”으로 인하여 받게 된다는 기존신학의 틀과 정확하게 부합됩니다. “무천년주의적” 해석으로 이 계시록 20장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에 대한 이런 “무천년주의적 해석”은 계시록 전체의 구조와도 부합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우리님께서 말씀하신 포이스레스의 글들을 이전에도 살펴보았습니다만, 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제가 아직 참고하지 않았습니다만(앞으로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전체구조를 “나선형적 구조”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인-나팔-대접으로 이어지는 메타포의 진행을 자칫 잘못 보면 “나선형적 구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엄밀하게 보면, 일곱번째 인 안에 일곱개의 나팔이 들어있고, 일곱번째의 나팔 안에 일곱개의 대접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나선형적 구조”라고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인”은, 계시되어지고 있는 역사의 비밀의 주관자이시고, 주인공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면, “나팔”의 계시는 똑 같은 역사의 계시를 “경고적인 의미”에서 부각시키고 있고, “대접”은 그 역사를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심판의 부어짐”(대접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임박함이나 그 실행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서의 구조이해라면 포이스레스의 계시록의 구조이해를 저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나선형적 구조”라는 표현보다는 “직선적”구조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초대교회때부터 진행되는 “통천년왕국적 역사의 진행”이 직선적인 구조로 나열되어 있는데, 그 나열이 단순나열이 아니고, 역사의 다양한 면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의 계시는 그 인의 주관자되시는 예수, 나팔의 계시는 임박한 계시에 대한 경고, 대접의 계시는, 그 심판의 실행이라는 면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곧,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 세가지 심판의 면(인, 나팔, 대접의 면)이 반복되고 있다는 직선적으로(물론, 나선형적으로 발전되어간다고 보겠습니다만, ‘나선형”이라는 이미지가 보여주는 그 부드러움과 매끄러움을 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물론 이런 비판이 “직선적 구조”라는 말에도 적용되겠습니다만, 이런 “이미지표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씀인 줄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진행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진행을 요한계시록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16장까지 일곱번째 대접의 심판에 대한 계시가 끝난다고 할 수 있고, 17장부터19장까지는 안티피널트(어미에서 세번째 음절), 20장은 피널트(두번째 음절), 21-22장은 피날레(마지막 음절)의 구조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의 음절구분을 참고하시면 저의 설명을 좀 더 잘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안티피널트(바벨론의 멸망<17-18장>, 짐승과 선지자의 멸망<19장>, 곧 거짓삼위일체의 멸망과, 피날레(새하늘과 새땅과 진짜 삼위일체의 영광<21장이후>) 그 사이에 끼어있는 피널트로서의 “천년”의 설정은, 다시 한 번 더 교회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성격을 가질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헬라어음절구조와의 관련성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담으로 들어주시길 바라구요.
이런 여담을 차치하고, 17장 이후부터 22장까지를 역사의 진행과 관련해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그 해결이 시도되고 있다 하겠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요한에게 보여지는 계시의 성격, 곧 그에게 보여졌던 환상(계시)가 환상간의 어떤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도 시도될 수 있겠습니다. 곧 17장 이후부터 나오는 매장 초두의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혹은 보니”라는 구절을 실제 역사의 시간적 순서로서가 아니라, 환상의 순서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환상의 순서가 실제 역사의 시간적 순서를 함축하지 않은 채로 환상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17-19장의 바벨론,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멸망과 20장의 용(사단)의 멸망은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상의 순서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동시에 진행되는 사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와 짐승이 사단이 없이는 건재할 수가 없고, 거짓선지자와 짐승이 없는 사단이 역사도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이 논리적 순서의 근거입니다. 그 셋은 함께 흥하고 함께 망하게 되는 것이니깐요. 그러니, 17-19장은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멸망을 다루고 20장은 그 괴수로서의 사단의 멸망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논리적 순서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 순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전천년주의식, 혹은 후천년주의식의 시간적 순서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통천년왕국”적 설명을 시도해 보는 셈입니다.
이 “통천년왕국적 설명”에 의하면, 17-18장의 바벨론의 멸망, 19장의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멸망, 그리고 20장의 사단의 “결박”조차도 “교회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곧 19장의 “충신과 성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워지는 분의 통치가 반드시 “재림이후”에 개진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교회시대와 더불어서, 곧 성령의 강림으로 인한 예수의 성령세례로 인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여호와증인들과 같은 식의 해석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분명히 “재림”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것으로 남아있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무천년왕국”식의 예수님의 “천년왕국”이 “없다”는 식의 이해는 예수님의 통치의 현존성과 성령을 통한 통치의 강력함을 경솔하게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 가운데서 성령님을 통해서 임재하시고, 그 현존을 당신의 자녀들, 제자들, 백성들에게 나타내시면서 당신의 왕국통치를 실행하고 계시다고 하는 인식, 바로 이것이야말로 “통천년왕국”의 “천년왕국”이해의 핵심요체입니다. 천년왕국,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내 옆, 내 삶의 모든 국면에서 꿈틀거리면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통치(바실레이아)의 실제 아래에서, 그러면서도, 더욱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삼위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가 역사의 마지막날에 드러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맨처음을 돌아가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통천년왕국적 시각에서 사단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지만, “개인”을 미혹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고, 또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사단은 “결박”당하였지만, 이것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영적 실재인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것은 그 활동의 효과와 영역이 제한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결박”당하였지만, 여전히 “공중의 권세잡은 자”일 수 있습니다. “만국을 미혹하지는 못해도” “공중”(곧 영적 존재들을 향하여)을 미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합니다. “결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결박”의 이해는, 20장 자체에의 표현과 부합합니다. 이 천년왕국때에는 여전히 “사망”이 있습니다. 곧 “첫째 사망”입니다. ( )안에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여전히 그 천년왕국시대에조차도 “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받은 자들의 “영적 부활”과 대응되는, 불신자들의 “영적 사망”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만일 “천년이 차기까지”를 “천살이 넘도록은 살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불신자들조차도 “수명”이 지금보다 오히려 길어지게 된다는 이상야릇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천년왕국때에 오히려 불신자들이 더욱 오래살게 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영적 사망”일 뿐만 아니라, “육적인 사망”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곧, 천년왕국시대에도 여전히 사망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곧 사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사망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단이 “결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그의 역사임에 분명합니다.
또한 “곡과 마곡”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도 이런 저의 이해, 곧 “결박”을 “활동의 제한”으로 보는 이해와 잘 조화됩니다. “곡과 마곡”이 어디냐는 문제를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문제는, ‘만국이 미혹되지 않은” 이 천년왕국시대에도 여전히 “곡과 마곡”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단의 “만국을 미혹하는 스케일”로서의 미혹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년”이 지나면서 그런 “만국을 미혹하는 미혹”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계시입니다. 그렇다면, 이 “천년” 동안 도대체 “곡과 마곡”은 어떤 형태, 어떤 스타일로 존재하고 있게 되는 것일까요? “천년왕국”에 말입니다. 전천년왕국설이나 후천년왕국설은 이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의 “통천년왕국설”에 의하면, “결박”이 된 사단이 단지 “활동의 제약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전과의 활동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제한되고 제약된 상태에서라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곡과 마곡”의 존재는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국가냐 어떤 민족이냐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곡과 마곡에 대한 이해는 초대교회 당시의 인류문화사적 이해,곧 지식사회학적 이해와 구약성경 곧 창10장의 민족의 배정과도 관계해서 해결해야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곡과 마곡이 반드시 러시아나 중국을 나타낸다는 소위 세대주의적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국”일 수 있고, “영국”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아니면 또 다른 제 3, 제4의 국가가 문명의 흥망성쇠를 따라서 대두될 수도 있다고 보여지는데, 어떤 싯점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시느냐는 문제와 관계해서 드러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설명은, 초대교회 이전에는 “만국”이 사단에게 미혹을 당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만국이 미혹을 당하였다”는 것의 의미는 국가적인 영역에서의 불신과 우상숭배, 특별히 국가종교의 지배를 의미한다고 여겨집니다. 그 당시의 로마국가가 그러했습니다. 이런 “만국의 미혹”이 분쇄되어지고, 그 효과가 제한되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의 한 귀퉁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부터 말입니다. 그러다가 기어이는 로마제국이 복음에 의해서 정복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런 이해는 너무 복음의 역사에 대해서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없쟎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당시에 로마세계 밖의 영역, 곧 그 당시의 중국이나 아시아지역, 혹은 잉카나 마야문명권의 국가적 단계에서의 우상숭배 같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통천년왕국적”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천년왕국”이란 개념을 정적으로(statically) 이해하게 되면 풀기 어려울지 몰라도, 역동적으로(dynamically) 이해하게 된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여깁니다. “천년”이란 상징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반드시 숫적인 “천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정해진 기간으로서의 “천년”이라고 할 수 있겠고, 이 “천년”이란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서 그 출발과 그 마침이 다를 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마침”까지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재림의 형태와 스타일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의 승천시에 있었던 천사들의 예언, 곧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는데, 그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데, 구름 속에서 나타나실 지, 구름을 타고 나실 지, 어떤 구름일 지…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나팔소리가 나매”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던” 사탄이 혹시 “잠시” 풀려난 것이 요즘 아닐까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변질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미국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 “미국종교”로 변질되고 American Jesus로 예수님이 변질되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나라들이 있지만, 실상은 그 국가적인 단위로 오히려 성경의 복음을 변질시켜가고 있는 요즘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의 조짐과 더불어서 “인자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 보곤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없겠기 때문이 아니라, “참되고 진정함으로” 믿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무천년왕국”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져 있는 영적 싸움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는 경향들이 있음에 대해서 경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통천년왕국”설이라는 용어를 고려해 보았던 셈입니다.
단순한 것을 너무 복잡하게 설명한 것은 아닐 지 두렵습니다. 저의 설명에도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명쾌한 답변을 요구하셨지만,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군요. 단지, 부족한 저의 조그만 한 시도일 뿐임을 양지하시고 주시는 은혜를 따라서 함께 주의 말씀을 더욱 분명히 이해해가는 동역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목사님의 상세한 답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밝혀 이해하는데 귀한 동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글이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역시 목사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기쁨이 있습니다. 저의 신학적 견해나 생각과 일치하는 바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도 거의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까지 무천년주의자들이 목사님이 말씀하신 통천년왕국의 견해와 표현만 달랐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무천년설이라고 할 때 '무'라는 단어보다는 통천년이라고 할 때 '통'이라는 단어가 훨씬 천년왕국의 성경적 개념에 적합하다는 의미에서 목사님의 통천년왕국이란 정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입니다.
제가 몰랐던 사실인데..만약 목사님의 지적처럼 기존의 무천년주의자들이 천년을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우리에게 실현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천년왕국자체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이 무천년주의라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과연 기존의 무천년주의자들의 견해가 그러하다면 저도 제 자신을 무천년주의자라고 소개할 수 없는 것이겠죠.....저는 지금까지 무천년주의를 통천년주의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죠..다시 한번 무천년주의를 상세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기존의 무천년주의자들이 하나님나라와 연관해서 무천년이란 개념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목사님과 저와 같은 개념으로 통천년을 주장하는 것이 참으로 신학계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총신의 권성수 교수같은 분이 무천년주의를 소개할 때 목사님의 통천년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소개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거든요....제가 90년도에 총신신대원을 들어갈 때까지 제 개인의 천년왕국에 대한 생각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권성수 교수의 설명을 듣고 무천년주의로 저의 생각을 바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도 제가 질문드린 계20장 부분이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천년왕국에 대한 이 부분의 난제를 유보하고 있다가 마침 목사님의 글을 보고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저도 다시 한번 예전의 책들을 읽어보고 확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목사님의 상세한 답변에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저에게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것이 역시 만국의 미혹부분과 첫째 부활에 관한 부분입니다. 첫째 부활을 영적부활, 즉 중생과 회심의 의미로 보시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천년왕국의 시작이라고 하신 것에 내용적으로 전적으로 동의가 됩니다. 다만 내용적으로는 충분히 동의가 되는데 문맥적으로 아직 완전한 동의가 어려운 것이 첫째 부활을 의미하는 20:4절의 '살아서'라는 표현이 그 앞의 내용을 조건적 받아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님과 같은 통천년주의자로서의 저의 고민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표현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자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통천년적인 이해로는 첫째부활, 곧 영적인 중생과 회심이 있고나서 이런 삶이 가능한데 본문의 문맥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은 이미 중생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쪽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이해해주시고 같은 통천년주의의 개념을 가진 목회자로서 이부분에 계속해서 목사님의 연구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목사님의 고견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포이스레스의 나선형구조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저도 동감합니다. 제가 포이스레스를 너무 오래전에 읽고 그의 의견을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아마 포이스레스도 그렇게(나선형속에서 직선적인 진행) 말했을 것입니다. 목사님의 일곱인과 나팔과 대접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타당하다고 보아집니다. 저도 실제적으로 계시록을 강해할 때 그렇게 강해했지만 저보다 더 분명하게 보고 계신 것 같아서 제가 목사님에게 배울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저를 위해 다시 한번 연구해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17.18.19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멸망,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을 사단이 결박당한 것과 동일한 정도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박과 멸망은 전혀 다른 의미와 이미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사단이 결박당했다는 것은 결박을 당했지만 아직 살았있다는 뜻이지만 멸망은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이 아직 멸망당하거나 완전히 그 세속성이 없어지지 않았다는데 또한 저의 고민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19:19-20절에는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웠다라는 말까지 있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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