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 김남준
2013-11-07 15:34:44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동일한 신적 본질안에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데 당신 자신안에서는 아무로 부터로 말미암지도 않고 누구에게서 낳은 바 되지도 않으신 성부와 성부로 부터 낳은 바되신 성자와 성자와 성부로 부터 발출하신 성령으로 존재하시고 당신 자신 바깥에서는 창조하신 성부와 구속하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시는데 각 위격의 영광과 능력은 동등하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을 먼저하고 뒤이어 내재적 삼위일체에대해 고백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 문24: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조항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성부하나님과 우리를 창조하심에 관한 것이고, 둘째로는 성자 하나님과 우리를 구속하심에 관한 것이고, 셋째로는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한 것입니다. 문25: 오직 하나의 신적 본질만 존재하는데 왜 당신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말합니까? 답: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그의 말씀 속에서 계시하셨는데 이 세 구별된 위격들은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에 집중한다.( 하나님, 그리고 성 삼위일체에 관하여- 신성의 단일성안에 세 위격이 있으니 한 본질, 한 능력, 한 영원을 가지시는 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로 부터도 말미암지 않으며 낳은 바 되시지 아니하시고 또한 발출하지도 않으신다.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낳은 바 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인데 이것이 삼위일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1 이러한 사실은 권유형에 있어서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는 경우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와 하나님 자신을 복수로 언급하는 경우 창3:22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에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증거는 천사들의 현현이다. 창18:1-3 "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섯는지라.. 가로되 내 주여.." 이것은 역사적으로 여호와께서 세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신 삼위의 지상 현현으로 이해되어 왔다.
신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구절들이 있다. 마28:19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수로 쓰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소유격인 그 이름은 단수료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단일성(일체성)을 지시하는 직접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눅3:21-22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이 구절 역시 한 장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임재가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에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본문이다. 고후13: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도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2 이상의 직접적 증거본문이외에 신약성경에는 간접적 증거본문들이 많이 있다. 예컨데 성자와 성부가 상호 내재하신다( 요10:38, 17:21) 성부와 성자사이에 지식의 교통으로 사랑이 나타난다.( 마11:27, 요5:20) 성자가 성부의 영광에 영원히 참여하신다( 요17:5, 16:14) 그리고 성자가 성부를 섬기심( 요6:38-39, 8:28-29, 8:49-50, 14:31) 성령이 성자를 섬기심(요 16:13-15) 성부가 성자를 보내심(요5:23-24),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심(요 14:26, 요15:26)이 그것이다. 이처럼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교리는 등장하지 않지만 삼위일체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증거 본문들이 확고하게 존재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지나치게 사변에 의존한다는 비난을 받아왔고 그래소 신자의 실천적인 생활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변적 교리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기독교 교리중 가장 중요한 신앙의 근본 조항에 속하는 내용이다.종교개혁 당시에도 카톨릭과의 교리논쟁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제외되었는데 이는 삼위일체에서만큼은 카톨릭과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삼위일체는 영원한 신비이다. 그래서 이 신비를 설명하는 적당한 유비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신앙으로 찬송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보편적으로 삼위일체는 자연적 이성으로 탐구될 수 없고 확실하게 입증될 수 도 없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이해할 수 없고 인간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는 비밀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복음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삼위일체 교리는 공허한 이론적 교리일 뿐이며 경건의 실천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야 말로 가장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교리이다. 다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할 때 그것은 실천적일 수도 있지만 단지 지식으로만 알 때 그 교리는 가장 실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현대 신학자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접근으로서 삼위일체를 다시 진술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이 교리가 결코 사변적이 아니라 현실성과 적실성을 가진 실천적 교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레오나르도 보프' 나 '케더린 모리 라쿠나' 그리고 '존 지지울라스' 등이 진술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개혁주의가 그들의 신학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뒤틀린 사화구조와 불평등한 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삼위일체를 닮은 공동체적 이상과 성례전적 관계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삼위일체 교리가 실제의 삶과 분명한 관련을 맺어야 할 필요성을 바르게 강조하였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결코 사변적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 교리안에서 발견되는 상호교통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을 확장시키는 통로로 보면서 이것을 가장 실천적인 교리로 이해하여야 한다.
각주 1
히브리어의 복수형태중 엘로힘은 장엄복수로서 숫자적 복수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각주 2
그런데 삼위를 언급할 때 성자를 먼저 언급한 것은 경륜적 삼위일체안에서 성자가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지 내재적 삼위일체의 순서인 성부, 성자, 성령을 바꾼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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