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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언약과 하나님나라 -김성수

언약과 하나님나라 -김성수

2012-01-23 15:35:01


제목: 언약과 하나님나라


1.들어가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입니다. 이로 인해 성경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지식의 습득과 이에 근거한 신관의 정립은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를 위한 첩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가에 대한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의 정립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시급해 해결해야 할 선행 과제입니다. 교회 속에 목사와 교사의 은사자를 세우신 이유가 다름 아닌 이 일을 위해서입니다. 말씀의 원리를 좇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이런 일의 결국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바르고 온전하며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2.펼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라고 정의 할 때, 하나님 나라는 성경계시의 총체적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 나라가 세상 역사 속에서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과정을 구속사라 부릅니다. 언약적 구속사란 표현이 보다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를 방편으로삼아 진행될 때 '선 언약과 후 성취'라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사를 푸는 열쇠는 다름 아닌 언약이란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계시역사는 구속사이며 동시에 언약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약과 구속의 총화인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상호 밀접히 연관돼 불간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언약에 근거한 구속사의 진행과 그 결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총체적인 주제 속에 담긴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이며 점진적인 관계성과 진행상의 세부적인 내용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의적 숭배신앙의 미혹에 빠지게 돼 결국은 편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고 마는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늘 날 한국적 기독교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교회와 목회적 배경이 계시 의존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여기서 종교적이라 함은 신앙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이 보다 자의적인 사실로 인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현세지향적인 특성을 띠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목적 삼는 것이 아닌, 수단과 방편을 삼음으로 하나님을 사유화시켜 개인의 수종자로 여기는 우상숭배적 종교행위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신앙의 성격이 계시의존사색적이 아닌 자기본위의 종교적 특색을 띠고 나타나게 될 때, 대부분의 신앙행위의 중심에는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성공이라는 인본주의적 명제가 자리잡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마치면서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의 신앙은 불가피하게 또 다른 성도와의 유기적인 연합의 관계성 속에서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된 특성을 더불어 이루어 가는 생명공동체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적 속성이 다름 아닌 의와 평강와 희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적극 지향하는 것으로 표출돼야 함이 교회가 지상에 존재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해 성령을 통해 세상 가운데 존재케 하신 유일한 천상적 기관으로 존재합니다. 어떤 유사기관(para church)도 교회를 대신하거나 교회와 동등한 권한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에 보조적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보다 깊이 있고 정당하게 해명되면 될 수록, 성경적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 및 바른 목회관의 정립을 통한 한국적 기독교의 개혁은 그만큼 앞당겨 지리라 확신합니다. 개혁은 결코 외적 제도만의 변화가 아닙니다. 내적 의식의 변화가 전제돼야 합니다. 이때 내적 의식의 변화의 동인은 다름 아닌 성경계시가 지향하는 총체적 본의에 깊이 접촉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음 단계로 이를 부단히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실제적인 변화된 삶의 내용까지를 포괄한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서 천상적 통치의 개념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가장 능력있는 권세로 현시될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이처럼 이미(already) 이루진 과거적 하나님의 나라와, 지금(now)도 이루어 지고 있는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및 앞으로(not yet) 이루어 질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와의 긴장 속에서 전투하는 하나님의 군사된 자격과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오직 참 된 진리 안에서 승리를 위한 건투를 빕니다.

Ⅰ. 도입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啓示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 마음에 품으신 계획과 작정을 세상역사 가운데 펼쳐 보이신 책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40여명의 저자들을 특별히 부르셔서 무려 1500∼1600여 년에 걸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 때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담당하신 분이 하나님의 영이시며, 주님의 영이기도 한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성령께서 학생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듯 저자들에게 기계적으로 간섭하여 기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자들의 전 인격을 유기적(有機的)으로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심정으로 쓰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에 의해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내적 간섭과 감동을 입어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발동시켜 자연스럽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체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간섭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요 14:16∼17)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이 성경의 원저자가 되신다는 의미인 동시에 진리와 함께 일하셔서 성경을 친히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분임을 시사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서인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전인적(全人的)으로 타락하고 부패해서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 수도, 찾을 수도, 나아가 자력으로 섬기거나 무슨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와 영적 파산자로 정의(定義)하고 있기 때문(창 3:8∼10; 마 8:21∼22; 롬 3:10∼12; 엡 2:1)입니다. 처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격과 본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오염된 나머지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통로인 영적 기능이 마비돼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한 종교심의 발동이 방향감각을 잃게 된 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게 된 것”(롬 1:21∼23)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서로서 성경을 주신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씀중심의 신앙 또는 신학적으로 계시의존사색신앙(啓示依存思索信仰)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딤후 3:16∼17; 행 17:11).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은 처음부터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를 철저히 의존(依存)하는 것으로서 성립됩니다. 이렇게 성경계시를 생명과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 접촉됩니다. 성경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에 무지하거나 결핍되면 그것에 비례해 자신의 종교심을 발동시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바, 곧 자의적(自意的) 숭배신앙에 빠져듭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은 신앙의 근거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곧 자신의 내적 종교심의 발로로부터 나와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계시에서 이탈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합니다.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의 행복과 안녕이라는 현세적 복과 성공의 개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일의 성취를 위한 수종자로 전락하게 마련입니다. 인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이런 자의적 숭배신앙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므로 항상 신앙의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창 3:5; 왕상 12:25∼33; 사 1:10∼14; 마 16:23∼24)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도의 첫걸음이 자기 부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의 자아는 항상 그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한다는 것(마 16:21∼24; 민 13:31∼33)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당사자들을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에덴에서의 처음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배경이 그랬습니다. 주님의 지상적 사역의 절정인 예루살렘의 고난을 막무가내로 만류했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신앙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의 역사와 시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성경은 늘 경계해서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여전히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신이 인본주의적 유사 기독교 신앙관에 붙들려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자기 기만적(欺瞞的) 신앙에 깊이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정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더욱 한 시대에 절대 다수가 이런 신앙관을 공유하여 제도권을 이룰 때,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신앙이 당대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를 대변하게 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는 여전히 왜곡된 진리와 가치로 판정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신약시대에 유대교와 중세 구교(舊敎)의 실체가 이랬습니다. 거기에도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에 있어서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체계인 계시를 의존해서 좇는 것이 아닌, 자신의 종교적 의를 힘써 추구해 나가는 것임으로 불복종과 불법으로 정죄 당했던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이유로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타락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왜곡된 해석에 기인된 것이 교회역사의 증언입니다.

오늘날이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범죄이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치열한 접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결정적인 구속사의 승패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림(再臨) 때까지는 아직도 사단의 잔존세력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갱신은 곧 말씀의 성경적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힘써 공부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기를 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바른 해명(解明)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여 교회와 신앙을 동시적으로 바르게 세워나갈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


Ⅱ. 전개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總和)로서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대 주제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오늘 첫 번째 강의(講義)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총체적으로 말씀하는 바에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키고 그 내용과 방향성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참된 성경적 신앙의 의미와 본질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명제와 관련하여 다니엘서 2장 31∼45절에서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자태가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본문의 역사적 배경

성경의 역사는 계시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깊은 곳에 간직해 두셨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을 마침내 인류의 역사 속에 언약을 도구로 펼쳐 보이신 구속사(救贖史)입니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당신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사의 경륜을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모형(模型)적, 예표(豫表)적으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택하셔서 선민(選民)으로 삼으시고 열방 앞에 당신의 구속사를 나타내시는 계시적 도구로 삼으신 배경이 이렇습니다(신 7:7∼8). 따라서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언약(창 12:1∼3) 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신정(神政)통치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친(親)백성들로 삼으시려는 거룩한 사역 곧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담당하는 자들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가 구체적으로 성취된 시기가 바로 다윗과 솔로몬 통치 초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통일 이스라엘 왕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현시(顯示)하는 계시적 도구 내지는 한시적 예표로 선용됐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체제를 영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솔로몬 통치 후기에 가서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분열왕국으로 체제가 바뀝니다(왕상 12장). 이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 산 언약(출 19장, 24장)에 대한 불순종으로 야기(惹起)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의 일환입니다.

이후 북이스라엘 왕국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백성들은 앗수르가 통치 관할하는 전지역에 포로로 잡혀가 흩어져 살게 됐을 뿐 아니라(디아스포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인들을 집단 이주시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혼인시키니 그로 인하여 태어난 혼혈족 소위 ‘사마리아인’이 입니다. 유다의 포로귀환 시기 후부터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동족(同族)으로 여기지도 않게 돼 일체의 교제권에서 외면당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유대인들과 마찰을 빚으며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에 위치한 수가성의 한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요 4:7∼9)를 보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반목과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고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됐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9절에서 여인은 물을 달라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 함이러라.”

남 유다 왕국 또한 북 이스라엘 보다 대략 136년 후인 BC586년경에 앗수르를 패배시킨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1차(605), 2차(597), 3차(586)에 걸쳐 남 유다를 침략해서 결국은 삼차 침공 시에 유다는 완전히 패망하고 많은 유다인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적인 굴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의 말발굽아래 항복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는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남북의 분열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결과입니다. 일찍이 시내 산 언약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할 때에 이방의 신을 섬기고 율법을 신실히 청종치 않을 때, 이와 같이 열국에 흩어서 저들의 압제를 받으며 저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는 것으로 심판하실 것(신 4:23∼28)을 이미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런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 시행인 바벨론의 1차 유다 침공(BC605)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1차 침공 시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당시 유다의 젊은 엘리트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비록 적국이라 할지라도 유능한 인재를 등용시켜 자신의 왕위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출신배경의 차별을 두지 않은 듯 합니다. 비록 그것이 전략적인 정치적 목적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여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이런 식으로 주님의 각별하신 섭리적 인도 아래 바벨론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고급 관리의 위치에서 업무를 관장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기자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나라를 포함한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단 2:21, 4:17, 25. 32; 롬 13:1∼2)을 성경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본문에서 왕이 꾼 꿈의 내용을 통해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극명하게 소개함으로써 과연 인간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서인 이유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합니다.

2. 왕의 꿈 내용

이제 오늘 강의의 주제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 31∼35절입니다. 본 절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다니엘에게 이상을 통해 보여주신 내용이 소개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최종 완성되기 전, 특별히 구약계시의 역사 속에서는 꿈이 종종 하나님의 계시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져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완성된 이상,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구하려는 시도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성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일의 계시로 완성된 성경이 주어진 이상 구약적 방식, 곧 꿈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나 선지자의 예언 등을 통한 하나님의 추가적 계시의 말씀은 이 시대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고도 완성된 계시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최종적 계시의 마침이 됨을 자증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17; 히 1:1∼2; 계 22:18∼19).

왕이 꾼 꿈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31∼33절에서는 왕이 꿈에서 본 것이 큰 신상(神像)으로서 인위적으로 고안되고 제작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 신상의 모습은 크고 광채가 나는 것으로 기이한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31절).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상의 구조에 있어서도 범상치가 않은 것이 머리는 정금으로, 가슴과 두 팔은 은으로, 배와 넓적 다리는 놋으로, 종아리는 철로, 그리고 발의 얼마는 철로 나머지는 진흙으로 혼합해 만들어 져 보기에 두렵고 특이한 신상이라고 소개합니다.

34∼35절에서는 또 다른 꿈 곧 뜨인 돌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제작되지 않은 것’(34절상)이라고 설명으로 그 존재와 출처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위적인 신상과 신적 기원에 의한 뜨인 돌이 왕이 꾼 두 종류의 꿈입니다. 이 두 꿈은 출처와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각각 이질성을 자체에 담고 있지만 내용의 전개상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뜨인 돌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뜨인 돌 하나가 앞서 본 신상의 발을 무서운 속력과 힘으로 내려치니 거대한 신상은 한순간에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을 친 뜨인 돌은 이 후에 태산을 이루는 가운데 온 세계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상으로 대변되는 인간통치 나라는 이 뜨인 돌로 인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뜨인 돌로 인한 신적 기원을 가진 새로운 신정통치의 나라가 인간나라를 대신해 세워진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역사의 진행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바르게 해석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뜨인 돌로 인해 건설 될 새로운 신적 기원의 나라에 정조준(正照準) 할 것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마 6:33).

그렇습니다. 역사는 방향 없이 바람 따라 흔들리는 부평초(浮萍草)가 아닙니다. 기원(起原)이 있고 과정(過程)이 있고 최종적인 목표(目標)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부분은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 저자는 왕의 꿈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땅히 섬길 자가 누구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에 진지하고 엄숙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니엘을 통해 주신 꿈의 정확한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자세와 가치관과 신앙관을 보다 신중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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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언약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나라

서론:


1. 언약적 관점에서 본 하나님나라

(이하에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리심, 혹은 통치”라는 말과 혼용하여 쓰고 있음)

A.원형적 하나님나라

1)주권(창조주 하나님)

2)백성(피조물,하나님의 형상)

3)영토(안식의 땅)

B.타락(노아홍수,심판으로 통치)

C.노아언약으로 심판받아야 함에도 유지, 보존해 주심

D.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아브라함언약)

1).하나님의 백성, 자손

2)민족(공동체)-교회

3)가나안땅(안식의회복)

*바벨탑/세상나라(창11)

1)인간중심의 나라

2)말씀을 거역하는 나라

3)인간이름을 높이는 나라

*하나님나라(창12)

1)시작과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이 중심인 나라 권

2)말씀 중심의 나라

3)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나라


A.원형적 하나님나라
우리는 대개 ‘나라’라 할 때 주권, 백성, 영토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나라의 원형적인 모습은 에덴에서 찾아보게 된다. 하나님은 에덴의 주인이었다. 세상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에덴에 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에 대한 대리통치자였다. 에덴은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토였고, 이러한 바른 관계들 속에서 에덴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안식하시는 세계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도였다.

에덴에 하나님의 禁令이 주어졌다는 것은, 에덴동산이라는 곳이 지금의 죄악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제 마음대로 사는 곳이 아니라, 에덴동산은 왕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금령을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최초의 하나님나라는 역사적이고, 우주적이고, 보편적이고, 만물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하나님나라의 실패 (인간의 범죄)

인간의 범죄는 최초의 하나님나라의 실패를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실패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인간의 실패와 반역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된다(한몸, 부부관계-아담,하와/형제관계-가인과 아벨). 그리고 인간은 예덴동산에서 쫓겨나게되고, 땅은 안식하지 못하고(창3:17), 결국 고통의 땅(창8:6-7)이 되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땅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실패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실패는 아니다. 하나님은 범죄 이후 즉시로 한 약속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약속이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창3:15-원시복음). 하나님께서는 장차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재창조하시려는 계획과 약속을 세우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구원이란, 단순한 단순히 원형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회복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재창조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다시 우리의 하나님(왕)이 되시고(히8:10,구원의 언약), 우리가 다시 서로 하나가 되고 (엡1:10,그리스도안에서 통일/교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참하게 됨으로 구원과 재창조가 이루어진다(주일의 참된 의미).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는 초림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재림 때 완성이 되는 것이다.


C.노아언약과 세상나라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고, 사람들도 그가 창조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세상은 처음과 같지 않다. 모든 피조물(땅)도 안식하지 못하고(롬8:18-25),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창6:1~4)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 원했던 세상(땅)과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대로 살았다. 마치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강포가 지배하는 세상인 것처럼 보였다(노아홍수 때의 상황). 이러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홍수로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수가 국지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도 전 세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와의 언약을 통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그대로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창9:10,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은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노아언약은 지금의 인류가 범죄했지만 당장 멸망받지 않고, 창조 때와 같이 인간의 생명과 지으신 만물이 유지되어지고 보존되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 아래있는 땅의 모든 기식하는 것들과 사람들에게 노아언약의 규례로서 “생육, 번성, 땅에 충만과 생명보존”의 명령(축복)들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창9:1-7,낙태반대운동과 환경보존운동의 성경적 근거) 이것을 태초에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축복,창1;28)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범죄했지만 하나님의 창조 의도가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에 그대로 실현되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바벨탑을 지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11,롬1:18-32) 그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성과 대를 높이 쌓자”고 하는데, 여기서 “성”이란 나라를 뜻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아닌 인간나라 혹은 세상나라를 건설하려했는데, 이러한 바벨탑에 나타난 세상 나라가 그 후에 일어나는 모든 세상나라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이 된다. 즉 지금의 이 세상나라에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통치와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노아언약(일반은총) 아래 있는 바벨탑(세상나라)을 쌓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하나님나라의 은닉성), 오히려 반역하고 거역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사회복음주의 운동의 한계와 모순). 바벨탑(세상나라)을 만드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인 그들 자신이고(창11:3,4), 또한 목적도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다(창11:4) 또한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반대되는 일이었다(창9:7,11:4/ 흩어지라는 명령에 정면 도전).이것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이제 하나님은 그의 진정한 통치가 나타날 수 있는 인간을 택하셨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과 그의 복을 이어받은 언약의 자손들이다.

또한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구약교회)을 만드시고, 그들을 통해서 바벨탑과는 대치되는 하나님나라를 나타내시고, 이 세상가운데 하나님의 창조 의도를 실현하시고자 하였다.(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증시체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다스리심)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과의 특수한 관계성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통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는 노아 언약에서 나타난 대로, 세상이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유지시키시고 보존시키심으로 나타나고, 또한 그의 약속에서 제외시킴으로서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롬1:18).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보편적 공의를 드러내시려 하시는 것이다.(출19:5-6“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느니--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고 --제사장나라가 되리라”).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두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주된 메세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 관계성에 촛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편적통치가 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의 실패와 신약교회의 연약성들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회개와 개혁의 메세지의 촛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성이고, 사도들의 메세지의 촛점도 교회의 교회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안만 미치고, 세상 가운데는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영지주의적인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D.족장들의 언약과 하나님나라-약속된 하나님나라

하나님은 족장의 대표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신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창17:2,17:7~8,18:19,)

(2)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다. (창12:2,13:6,15:5,16:10.18:18)

(3) 이 후손들은 안식을 누릴 땅인 가나안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창12:7,13:14~15,15:18~21,17: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모든 약속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창12:1-3). 이것은 바벨탑을 짖던 세상의 모습과 극히 대조를 이룬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나라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다스리는 왕 앞에 그의 백성들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면 누가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이것이 언약적 축복이고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이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가 창세기 중반부의 주제를 이룬다(창12~36) 즉 창세기에 나타난 세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들의 이야기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누릴 당사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우리도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롬4.9:7-8). 여기서 우리는 누가 왕이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보았다. <(1)의 약속과 관련>. 이제 이러한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개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보게된다. 그 과정이 창37~출1장 사이에서 설명되고 있다. 민족(큰 공동체)을 이루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함의 후손인 바로의 압제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출1:7).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2)의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과 관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마지막의 약속이 땅에 대한 약속인데 이것은 안식을 누림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희년의 의미)


* 하나님나라:

주권-하나님

백성-언약의 자손의 공동체(민족)에 대한 약속(교회와 관련)

영토-세상나라인 가나안땅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3)은 다윗 시대에 잠정적으로 이루어진다.

* 하나님나라의 약속의 전개 : 족장들의 언약의 신실성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권능에 의해서 전개

E.출애굽과 가나안정복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전개되어지는 하나님나라

우리는 위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결국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출애굽사건과 가나안정복의 사건 속에서 성취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출애굽의 사건

하나님은 출애굽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이 땅에서의 왕되심과 구속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애굽의 바로는 당시의 표면적인 이 땅의 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사건을 통해 자신의 왕되심을 입증해 나가신다. 출애굽시의 10가지의 재앙은 당시의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에 대한 징치이다(최종의 신이 인간이다-유월절). 여기서 하나님은 그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결국 마지막의 유월절사건에서 세상에 대한 심판과 언약의 피 아래있는 자들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 출애굽사건의 마무리는 홍해사건에서 바로의 무리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되어진다. 홍해사건 후에 나타난 모세의 노래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이 단순히 그의 자녀들에 대한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 주관자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출15:1~18.이 세상에 대한 구원의 시작은 종말과 심판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가 현재에 임하여졌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과 종말도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예수의 재림이란 세상에 대한 종말이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복음선포는 세상에 대한 심판과 종말의 선포이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으로 지켜야될 규례를 말씀하시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듣고 잘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의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나라가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가가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입증이 된다.(교회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다)


(2)가나안땅정복사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 사건은 단순히 땅을 정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싸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 그런데 이것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여부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순종이라 함은 그들이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 싸워 주신 것이다. 이 승리는 단순한 육신적 원한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언약적 승리인 것이다.(시편의 주제,2편 참고). 이것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오는 문제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한다(히3:18,4:1,신1:34,35)


ꏒ 성경을 찾아보자.

히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가나안땅)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니라

이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안식(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곧 구원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의 가나안땅 정복이 온전치 못하였음을 이야기한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히4:8,9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러므로 안식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 말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신약에 대한 모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구약이 모형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도 분명히 구원과 하나님나라를 豫視해주고 있다.

3) 神政國 준비기 (사사시대)

a.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지 아니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삼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했을 때 사무엘은 “이것은 나를 무시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왕되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b. 사울왕의 등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간 왕을 구하는 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이다.

c.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 제도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왕을 원하셨다.

(이러한 왕이 다윗왕이었다)

d. 이것은 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무교회주의는 인간 지도자나 제도없는 교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사사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의 연약함으로 이러한 형태가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제도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태가 아닌 하나님의 왕되심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제도가 되어야 한다. 장로교의 제도, 원탁형의 직분론)

F. 구약에서 성취된 하나님나라 : 다윗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다윗 시대에 성취된 다윗 왕국은 구약의 하나님나라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자, 또한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모형적 하나님나라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 다윗 언약의 내용-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일차적으로 다윗 시대에 이루어진다(삼하7장1절ꡒ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즉 가나안땅에 대한 약속이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도면상(명목상)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 땅은 그 후(사사기)에도 계속 대적의 위협을 받는다. 그런데 다윗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사방 모든 대적이 물러가고, 가나안 땅에 온전한 안식이 찾아온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ꡒ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왕국"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 이스라엘왕국은 지상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것이다. 즉 이스라엘왕국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이었고, 다윗은 대리통치자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왕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안식이 회복된 땅이 된 것이다. 즉 다윗 언약은 민족적 이스라엘에 대한 영원성을 약속한 언약이 아니라,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보여주게 된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을 약속한 언약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스라엘(구약교회)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유일하게 증시해주는 단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드러낼 때만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사울 왕이었다. 처음에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가 다스리던 이스라엘왕국이 그 자신의 왕국인냥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왕은 그렇지 않았다. 그 왕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온전히 하나님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ꏒ 성경을 찾아보자.

신17: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열국과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즉 가나안땅의 실질적인 왕은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그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이후에 특정한 지도자를 세우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율법(율법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표현이다-수24장)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율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사는 결코 그들의 항존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특정한 사건에 한시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었다.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는 말로 그도 왕의 후계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은 철저히 배격하셨다. 그 이후에도 삼상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요구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삼상8:7)

우리는 다윗 왕국에서 왕이신 하나님(주권)과 그의 대리통치자인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백성)과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이스라엘왕국은 세상의 왕국과는 달리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얼마나 잘 받아 들이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다윗의 통치방식은 세상의 통치방식과 달랐다. 그 한 예로 세상적인 통치방식은 前왕조의 사람들을 제거시킴으로서 그들의 왕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사울 왕을 끝까지 살려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사울 왕을 죽인 자를 오히려 죽여버린다. 그리고 죽은 사울 왕의 친척들에게도 환대해준다(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이 장수 요압이었다. 그는 군대의 힘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이끌어져 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윗이 대리통치자로 있는 이스라엘 왕국에는 결국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 이 나라는 결코 그 나라의 백성의 숫자가 자랑이나 큰 힘이 될 수 없다(말년의 다윗은 백성의 수를 계수함으로 하나님의 책망을 듣는다).

그러면 다윗이 통치한 이스라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1)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신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나라이다.

(2) 가난한 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기초는 아둘람 공동체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사울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나라는 것은 가난하면 무조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아둘람 공동체의 가난한자들이란 육신이나 혈통을 의지할 것 없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자로 이해해야 한다.(마5:3.결국 이 가난한자도 모형적 의미로 이해야 한다)

(3)현재적인 고난을 겪고서야 영광에 참여하는 나라이다. 다윗은 왕이었으나 많은 억울한 고난과 환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높이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왕이지만 많은 고난을 당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여 만왕의 왕을 삼으셨다. 이와같이 다윗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인 모습을 띠고있다.(시22,눅24:26) 이것은 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우리도 결국 이 땅에서 하나님백성으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의를 인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마5:10) 그러나 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4) 모든 땅의 대적을 물리치고, 평강과 안식이 있는 나라이다.

다윗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땅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므로 가나안 땅에 평안과 안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때 계시된 에덴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타락이후 하나님이 만드신 땅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평안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비로소 다윗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형으로서 하나님나라는 사탄의 권세들을 물리치므로 평안과 안식이 깃드는 나라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권능을 행하시고(특히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행하시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선포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셨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결국에 이 다윗의 왕국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이라 볼 수 없다. 다윗과 솔로몬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그들에게 있었던 가나안 땅의 안식은 사라지고 만다. 그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가운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망하게 한다. 그들이 대망하는 하나님나라는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나라(현재의 하나님나라-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나라)와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하나님나라(미래의 하나님나라-저 땅에서 펼쳐질 하나님나라) 동시에 소망하며,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이와 같이 구약과 신약 속에서 항상 이미(already)와 아직(yet)의 긴장가운데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F. 선지자가 바라 본 하나님의 나라

위에서 언급했듯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욍국도 온전한 왕국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세상나라인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의 상황이 다시 세상의 왕(바벨론왕)이 이스라엘왕국을 지배하는 형태가 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선지자의 영적 안목이 나타난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세상(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왕국)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지만 (바벨론 포로상황),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 위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단4:17), 장차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바라본다(단2:43,44,45) 그런데 이러한 나라가 언제 이루어지는가? 이것이 초림의 상황을 말하는가? 아니면 재림의 상황을 말하는가? 이것은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을 일명ꡒ선지자적 조망"이라고 한다. 즉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으며(막1:15),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다(요3:18). 그리고 또한 재림 때 하나님나라가 온전한 형태로 완성이 되며, 세상에 대한 심판<종말>이 완성이 된다.


G.하나님나라의 도래(초림)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 그 증거로

1) 천국복음이 증거 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2) 또한 병자가 치유되는 것으로 하나남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눅08:02,눅09:11)

3) 또한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심으로 더욱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신다.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마12:28,마12:28,눅11:20,고전4:20,막0:1)


마8장에서 마귀가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왜 벌써 나를 쫓아내느냐’고 한다. 여기서 ‘때’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때를 말한다(요한복음).그러나 이렇게 초림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사탄의 세력이 완전히 끝장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심장에 칼이 꽂힌 사탄(머리가 상한 뱀-사탄)이 그의 완전한 종말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이 땅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재림 직전의 성도의 대환난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성도의 고난은 죽어가고 있는 사탄의 시험이고, 재림 직전의 성도의 대환난은 사탄의 최후 발악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했지만, 죽어가고 있는 사탄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탄의 도전에 대하여 우리를 위로하시고 지키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검인 말씀과 성령 안에서의 끊임없는 기도로 말미암아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엡6:10~18).결국 종말 때 사탄과 그의 나라는 완전한 종말을 고하게되고, 이러한 성도의 고난과 눈물은 사라지게된다.(계21:4ꡒ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시리라)

또한 마13장을 통하여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을 재림 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

1)현재 임하여진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인 나라이다 (감추인 보화비유)

그러나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성도를 핍박한 사람까지)볼 수 있게 임하여진다. 즉 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세상나라와 같지 않고 영적인 나라이다. 그러나 미래에 임 할 하나님나라는 이 모든 감추인 것들이 공개가 되어지는 나라이다. (계5:4,계11:15)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올 것인지를 계산하며 살아가지 말고 종말이 이미 도래했다는 종말적 신앙으로 살아가자.(마24:42-46)

2)현재에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그것이 미미하게 보이나 장차 커서 새들이 깃들수 있는 겨자나무(미래의 하나님나라)가 된다. 즉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종말)가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발전하는 형태로 진행 중에 있다가 종말에 완성된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동참해 있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보장받을 수 없다. 또한 현재의 하나님나라에 동참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따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자동적으로 보장을 받는 것이다.그래서 우리가 과연 현재 임하여진 하나님나라에 동참해 있는지 하나님나라의 현제적 양태(열매)를 살펴보면서 살아가야 겠다.(하나님나라에 합당한자 마13:43,마21:31,마25:34,막10:14,막10:15)
3)현재 임하여진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나라와 썩여져 있다 (가라지, 그물비유) 그러나 종말에는 사탄의 나라가 없어진다. 초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세상나라가 끝장나지 아니한 것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이 땅에 대한 하나님나라의 소명때문이다.

H. 구약이스라엘 교회의 실패와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신약교회(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이상을 통해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증시체로서 온전한 기능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돌려버리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버리셨다(애굽의 상황). 그리고 400년 동안의 계시가 없는 암흑기가 오게 하셨다. 이 400년 동안의 계시의 암흑기 끝에 나타난 인물이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마지막 선지자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광야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항상 새 역사의 도래시에 광야에서 부르시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도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불렀다. 바로가 말하기를 애굽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않느냐 했을때 모세는 분명히 광야로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의 새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광야에서 사람들을 부르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의 선고의 의미가 있다. 특히 이러한 사실들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 구약에서 약속되고, 모형으로 보여 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킬 왕으로 오시는 분임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다윗 왕의 가계인 요셉의 가계에서 태어난 분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정혼은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혼인한 관계임) 또한 별이 동방의 박사들을 왕이 나신 곳으로 인도하는데 먼저 헤롯의 왕궁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그렇게 인도한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베들레헴으로 별을 통해 인도한다. 왜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는 별들이 바로 예수님의 계신 곳으로 인도하지 않고 헤롯의 궁중에 갔다가 베들레헴으로 가는가?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민족적 이스라엘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왕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출애굽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바로의 박해와 비견될 수 있는 헤롯의 박해와 모세 시대의 바로의 영아학살과 예수시대의 헤롯의 영아학살이 있다. 더우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헤롯에게 쫒기어 애굽으로 도망하는 사건을 호세아의 말을 인용하여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애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자들간에는 예수님이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건을 두고 이 예언의 성취가 있다고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예수님이 헤롯에게 쫓기어 가는 것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다.(마2;13-15) 그러니까 예수님이 출애굽하시는 것은 장소적인 출애굽이라기 보다는 의미상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로 그 의미상의 애굽이 유대종교(실패한 이스라엘)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400년 동안의 계시의 공백기가 있었다. 이러한 신구약중간시대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이스라엘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최상의 종교(?)라는 유대종교와 유대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반성하기를 그들이 이렇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오게 된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혈통적 순수성과 모세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이스라엘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으로 말미암은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다윗 왕국과 같은 정치적 하나님 왕국의 도래를 무력(인간의 힘)으로 이루려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먼저 세례요한을 보내심으로 이제 옛 이스라엘(유대주의)의 심판과 회개를 선고하시고,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예고하신 것이다.(눅2:34에 나타난 시므온의 아기 예수에 대한 예언을 참조해 보라) 그래서 마4장에 보면 옛 아담과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실패와 대조되게 광야에서 마귀에게 승리하심으로 공생애의 문을 여신다.(마4:1-11) 그리고 세례요한의 잡히심을 들으시고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먼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4:17)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새 이스라엘의 새 언약의 공동체로서 구약의 12지파와 비견되는 12제자들의 신약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다.(겔37)

그리고 마5-7장에서는 이제 옛언약(모세언약)과는 대치되고, 완성되고, 새로운 새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의 도리를 산 위에서 선포하셨다(모세가 산 위에서 율법을 전함과 비교)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신약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약에서 옛 이스라엘로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신약의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야 하며, 더우기 신약의 교회는 단순히 바벨론의 세상 나라를 극복하는 그런 정도의 교회가 아니라, 옛 이스라엘의 유대종교와 유대주의도 극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들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직 힘으로도 되지 않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되지 않고, 선지자들이 새 언약를 바라보면서 약속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때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교회는 가견적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임함으로 비로소 신약의 교회가 설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성령을 떠나서는 옛 이스라엘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말한다면 성령의 역사란 다름 아닌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을 교회를 통하여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은 성령이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은 우리가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참고/행1:3,8:12,14;22,19:8,20:25,28:23 28:31.*반드시 읽어 볼


2. 이와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교회와 세상을 보는데 미치는 영향

A. 교회에 미치는 영향

1.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교회관도 달라진다.

a. 지상의 교회의 제도적인 면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파악 (천주교)

b. 하나님 나라가 교회에만 미친다 (영지주의적 교회관-교회와 세상과의 초월적 관계만 증시한다. 이에 대해 골로새서에서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강조하고 있다)

c.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미래적인 것이다.(유대교와 같은 율법주의교회를 만듬)

2.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언약적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이해하고 드러 낼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다.(예, 유리조각/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소금-교회의 본질을 강조, 교회의 세상과의 대조성, 빛-교회의 땅에 대한 사명)

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증시체로서 먼저 세상 나라와는 대조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바벨탑사건)

4. 교회의 모든 제도나 행정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사기 참조) 교회가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 지키는 일이다.

5.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주제가 구약의 십계명, 산상수훈, 마13장의 천국비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6. 또한 교회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이 왕 되심을 드러내어야 한다.

(복음전파와 아울러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도 전파해야 한다)

7. 신약과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가장 좋은 비유는 잔치집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중시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잔치집과 같은 영적인 풍요로움과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8.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옛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고, 새언약의 공동체로서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성령의 능력아래 있어야 한다.

9.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끊임없이 교회를 도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개혁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B.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세상을 보는 시각에 미치는 영향 (오광만교수의 글 참조한 것임)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시각이 있다.

1. 하나님나라와 세상 : 초월적 관계

a.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철저하게 초월적이고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으며, 현재적이 아니라 철저히 미래적인 것이다.

b.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면 세상에 대하여 탈세상적,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극단적으로는 도피적 태도로까지 발전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내적인 종교생활에만 국한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와 세상 : 내재적, 동일시 관계

a.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도덕적인 가르침들을 이 세상 사람들이 따름으로써 이 세상에 건설 되어지는 인류공동체이다.(유토피아)

b.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자연히 사회복음주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1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무시했고, 2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을 무시했다<바벨탑사건을 무시했다>. 1의 견해는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기 쉽고, 2의 견해는 세속주의로 기울어지기 쉽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속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3. 하나님나라와 세상 : 변혁관계

a. 세상에 대한 견해

a-1 긍정적 견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들에게 그것을 대리자로 다스릴 문화적인 명령을 태초에 내리셨다. 이러한 문화명령이 의미하는 바는 이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완전을 향하여 나아갈 존재이다. 즉, 이 세상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창조된 세상이고, 인간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를 받았다.(노동의 긍정성-노동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타락이후이다. 그래서 범죄 후 노동은 안식일 제정으로 인하여 우선권에서의 시험을 받게 된 것이다)


a-2 부정적 견해

이 세상이 이처럼 선하게 창조되었고,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존재이나, 이러한 세상에 제동을 걸게한 것이 바로 罪이다. 죄의 영향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미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에 미치게 한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이나, 죄와 사탄의 실제적인 영향력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세상참여는 세속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언약을 통해서 비록 물심판 받을 이 세상이지만, 계속 유지가 되고 보존이 되도록 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1장과 같은 이 세상에 대한 문화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을 받은 이 세상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문화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바벨탑)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죄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세상자체를 죄와 동일시할 수 없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내려졌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에서의 죄에서 떠나 은혜와 의의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변혁자로서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b. 세상에 대한 사명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소명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또한 이러한 소명에로의 부르심은 종교적 소명과 일반적 소명이 있다. 종교적 소명은 전도자(선교사), 혹은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이다. 일반적 부르심은 직업에로의 부르심이 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엄밀하게 말하면 나눌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두 가지 소명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굳이 구분을 한다면 두 부분 중에 어느 쪽을 풀타임소명으로 생각하느냐에 있다) 이러한 소명을 위하여 선택과 구원이 있게 된 것이다. 구원받는 자는 모두 소명자이다. 소명이 없으면 구원받은 가 아니다.

b-1 참다운 교회건설의 사명

하나님 나라가 우주적이고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지상에서의 하나님나라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교회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명이라고 할 때 굳이 종교인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건설의 사명이 우리모두의 일차적인 사명이다.


b-2 문화변혁자로서의 사명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표와 실천이 우주적이고 종교생활뿐 아니라 모든 생활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에서의 사명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을 거부하지도(초월적 세상관과 대조), 세상과 동화하지도(동화적 세상관과 대조) 않으면서 세상의 변혁자로서 태도를 견지했다.(그것은 세상이 원래 하나님의 선하신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지금은 타락때문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재창조 될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변혁자로서의 사명이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를 우리의 모습으로 통해서 이 세상사람이 변혁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결국에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나라)안으로 들어오게 해야하는 것이다. 즉 복음전파라는 것도 단순히 물량적인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동참케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히 선하게 되어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죄된 문화의 모습을 방관해도 되지 않는다.(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결국 동화자가 될 수밖에 없다-사사시대 실패의 교훈) 결국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이 아니라, 위에서 임하여 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의 현재를 지금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세상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누가 이 시대의 개혁자가 인가?(사6장)

1)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이 교회의 왕이심을 바라 깨닫는 자

2) 그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개혁의 대상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자 (특히 입술의 죄)

3)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체험하는 자

4)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과 역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자신을 맡기고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하는 자

5) 듣든 듣지 않든 교회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왕되심과 공의를 몸으로 증거하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