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15장 바리새인들의 위선

메르시어 2023. 4. 17. 14:20

마태복음 15장 바리새인들의 위선

Tolle Rege/마태복음

2012-06-07 00:50:16


예수님의 모든 교훈과 이적들은 하나님나라의도래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분명히 보고 들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주장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라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마디로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다는 것이었다. 고르반이라는 자기들의  전통으로 부모공경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폐한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먼 자들이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가리지와 같은 자들이니 뽑힐 것이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나라의 귀중한 진리를 교훈하셨는데 그것은 문제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고 그 마음에서 모든 더러운 것이 나오는 것이므로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이방 여인의 믿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스스로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은 위선자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여인은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방여인이 믿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방여인의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님의 냉담해 보이는 듯한 반응은 그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 예수님의 본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 가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냉담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간절하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구원을 바라는 여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인정하신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개라고 낮추는 이방여인의 모습은 도움을 얻기위한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훙악한 귀신에 들린 자신의 딸과 자신의 모습이 정말 개만도 못한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음을 정직하게 인정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결국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은 이방여인의 믿음이 자신의 실체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었다면 위선자라고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들의 블신은 스스로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할 정도로 자신의 실체에대한 무지였던 것이다.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치유하고 이어서 소경과 벙어리 장애인을 고치는 일과 칠병이어의 이적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제 하나님나라의 표적들이 거침없이 증거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칠병이어 이적과 더불어 소경과 벙어리 장애인의 치유의 이적  역시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범죄이후 창조목적에서 떠나 소경과 벙어리 그리고 장애인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 영혼이 새롭게 되는 창조목적의 회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회복과 성취를 떠나서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추기] 2019-11-06 17:09:01

마태복음 15장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이 또 일어났다. 앞서 12장에서  안식일 규례 및 귀신을 쫒아내는 일로 인해 일어난 충돌 이후에 두번 째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정결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런 지적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예수는 그들이 요구하는 전통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종교지도자들이야 말로 이사야의 예언에 해당하는 위선자들임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지만 사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할 뿐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계명 곧 전통을 교훈 삼아 가르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일 뿐이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대단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된 줄 아시느냐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시기에 그들은 스스로 맹인이면서 맹인을 인도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더럽다는데 있다.  마음이 더럽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뿐이다. 이제 예수와 종교지도자들의 충돌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고 이것은 필연코 예수를 죽음으로 끌고 가게 될 것이다.  예수가 이것을 몰랐을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충돌을 피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의도적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러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명하셨는데(10:5-6절) 여기서 자신은  의도적으로 이방인 지역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 그곳에서 만난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줄 것을 간청한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 이 가나안 여자도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소문을 들은 듯 하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는 이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며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자의 계속되는 간청도 거절하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하신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수는 이방인 지역으로 온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후에 예수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한 것을 보면 예수의 이 냉정한 거절은 여자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가나안 여자를 만나려고 이방인 지역에 일부러 들어온 것이며 그에게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 것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여인의 대답을 듣고 예수는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신다. 여자의 이런 대답은 단순히 겸손의 대답만이 아니라 비록 예수는 이방인의 메시아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전해진 천국의 복이 이방인들에게도 흘러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답이었다. 이것은 일찌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후손을 통해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 하신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합치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는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인정하신 것인지 모른다.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앞에 나오는 바리새인과의 충돌 이야기와도 대조를 이룬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믿음 없음을 보여준 반면에 이방의 가나안 여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주는 복이 이방에게도 흘러갈 것을 기대하는 큰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