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11장 세례 요한의 질문

메르시어 2023. 4. 17. 14:17

마태복음 11장 세례 요한의 질문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55:49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는 세레요한의 질문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세례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능력이 많으시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므로 자신은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의 선구자로서 자신을 인식하였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라고 지칭한 분은 당시 1세기 유대교에서 대망하던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였을 때 말려 이르길 자신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자신 보다 뛰어난 선지자로서 인식하였지만 정작 메시야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세례요한의 질문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의심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미처 메시야로 생각지 못한 예수님이 바로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야이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들었고 그런 비견할데 없는 교훈과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바로 자신이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그가 기다리던 메시야 이심을 확증하는 대답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세례요한이 메시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임을 증거하여 주심으로 자신이 바로 메시야이심을 확인하셨다.

 그러나 이 세대는 요한과 예수님의 증거에 반응하지 않는 악한 세대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가버나움과 고라신을 향하여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요한과 예수님의 증거는 곧 구약에 예언된 천국의 도래를 증거하는 것이었는데 이 증거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 반면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게 증거에 반응하는 자들에게는 나타내진 것이다. 자신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임을 아는 자만이 예수님의 증거를 받고 나아갈 것이며 그들은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 쉼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 온유와 겸손을 배울 때 주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멍에에 비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결코 어렵거나 무거운 것이 아닌 것이다.

 

[추기] 2014. 4. 2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듣기를 즐거워하고, 들으면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를 쉬게하시는 좋으신 분이시라는 생각을 먼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따로 떼어서 보면 안되고 11장의 문맥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말씀에 앞서 3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첫째는 옥에 갇혀있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은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이 자기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하려는 이 세대의 사람들을 지적하신 일이고 셋째는 예수님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책망하신 일이다.

 

이 세가지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25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서 보듯이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지식을 스스로 지헤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이러한 11장의 문맥에서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란 누구인가하면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이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며 교만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을 부르시며 그들이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게 와야한다고 말씀 하신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오려면 예수님이 누구이신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줄 알려면 먼저 자신이 교만한 자요 그래서 자기 생각에 갇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 회개하여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줄 알지 못하는 자는 실족하는 자이고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다. 결국, 자신이 실족한 자요, 들을 귀가 없는 자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 회개하기 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가 없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는 예수님께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다. 교만한 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그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쉼을 누리지 못한다는 무서운 진리가 여기에 있다.

 

[추기] 2019-11-06 17:06:51

마태복음 11장

요한의 질문을 보면 그는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아는 능력이 탁월한 분으로서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정화하시는 분으로 생각했다.(3장 11-12절) 요한은 예수가 행하는 일이 메시아에 대한 이런 자신의 기대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예수가 메시아인지 의심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의 이런 의혹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이미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듣고 있던 그런 일들이었다. 그것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그런 일들이었다.(5절) 이것은 요한이 기대하던 메시아관에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는 이런 일들이야 말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아관과 예수의 행하신 일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6절) 이어지는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는 요한이야말로 얼마나 탁월한 선지자인가를 증거한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요한은 극히 작은 자보다도 작은 자라는 역설적인 평가가 주어진다. 이것은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내진 위대한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천국의 놀라운 경륜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말한다. 천국의 도래라는 복음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거절당하고 폭력을 당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복음에 폭력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함으로써 천국을 빼앗는 자들이 되고 만다. 이어지는 장터의 동무 비유는 바로 천국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거절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왜곡된 메시아관을 가지고 요한을 평가하고 예수를 판단하며 정죄한다. 그렇기에 예수는 자신이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신다. 예수가 행하신 권능들은 그가 메시아이시며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천국을 증거하는 표적이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천국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폭력을 당한다. 천국 복음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 복음은 오히려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하는 자들에게 천국의 복음은 감추어졌다.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이 천국 복음을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며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아마도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며 천국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마치 무거운 멍에를 맨 것과 같아서 쉼을 누리지 못한다. 예수는 이런 자들을 부르시며 온유하고 겸손한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권하신다. 자신의 멍에를 내려놓고 예수의 멍에를 메게될 때 그들은 비로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