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6장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메르시어 2023. 4. 17. 14:13

마태복음 6장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52:45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 모르나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는 구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하는 기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사람이 모르게 하는 금식에 대하여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 교훈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의 정신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이 보아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임을 가르친다. 이렇게 구약의 율법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상을 바라고 할 때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5장에서 구약의 율법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해명하였다면 6장에서는 율법의 또 다른 정신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행하는 것임을 해명한 것이리라. 기도에 대한 교훈중에 가르쳐 주신 소위 주ㅊ기도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도래였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어지는 교훈 역시 구약 율법이 가르치는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해명하여 주고 있다. 그것은 특별히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의 정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인데 구약 율법의 교훈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보물을 땅에 쌓아둔다는것은 재물을 섬기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고 재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일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일상의 염려가 바로 하나님 대신 재물을 섬기는 것이라는 지적은 섬뜩한 진리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천국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그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가르치시는데 이것은 결국 주기도문의 정신과 동일한 교훈이다.

 

 

[추기 2012년 9월]

 

  구제할 때 그 행위를 은밀하게 남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면 그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한다.기도할 때도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거 보이려고 하지 말라.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라.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또 기도할 때도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이다.  금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이나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여야 한다. 이 교훈은 단순히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히 해야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같다. 즉 사람이 무슨 의를 행하려고 할 때 그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여서 인정받으려는 동기로 의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행하되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위가 바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외식이라는 것을 가르키신 것이다.

 

 그 다음에 기도와 관련하여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는 중언 부언하지 않는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된 것인 듯 하다. 먼저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하여 기도하고 그 다음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인데 전자와 후자의 내적 관계는 명확하다. 즉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차적인 목적을 갖는 것이다.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하심으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하는 기도는 무용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어서 나오는 교훈은 아무래도 구약의 안식일 계명에 대한 신약적 교훈인 듯한데 그것은 보물을 땅에 쌓지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권면으로 시작된다. 그 이유는 땅에 보물을 쌓으면 결국은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눈의 비유는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은 눈이 어두워 갈길을 찾지 못하고 어둠에 해메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다음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은 결국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고  재물을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려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듯이 보물을 쌓는 일 또한 하늘과 땅 두곳에 쌓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은 재물을 하나님의 위치에 둔다는 얘기이고 이것은 우상숭배의 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일 것이다. 그런데 이어서  "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이렇게 염려하는 것이 재물을 섬기는 것에 해당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일상의 염려가 사실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고 그렇다면 염려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구약의 1계명과 안식일 계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일상의 염려로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설득은 일상의 염려가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대한 중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목숨이 음식보다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듯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시고 몸을 주신 하나님이 음식과 옷을 또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다음에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를 돌보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것은 믿음의 실제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임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이 결론적 가르침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그 다음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추기  2013년. 9. 5 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과 이후에 이어서 나오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교훈의 내적인 관계는 무엇일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행위는 이 모든 것을 더하는 복을 받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궁극적 목적으로 제시된 것이지 세상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과 그의 나라와 그의를 구하라는 권면은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자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또 전자가 실천적인 표현이라면 후자는 원리적인 차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결국 주기도문과 맥락을 같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는 교훈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것과 염려하지 않는 것이 긴밀한 내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고 이해할 때 그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그 분의 왕권에 순종하는 것,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그분의 다스리심이 드러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이 실제적으로 나의 주, 나의 왕이 되시며 나는 그의 소유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분이 실제로 왕이 되시어 우리의 전 존재와 삶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일상적인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염려로 부터의 해방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의 왕이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력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로서의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의 왕, 우리의 주되심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염려로 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가 염려로 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 ,우리의 주되심다는 사실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 것인가?

 

 

[추기 2013년. 11.6]

 

구제, 기도, 금식이라는 3가지 주제를 통하여 동일하게 주어진 교훈은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본문은 "은밀하게 하라"는 의미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에게 하듯이 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은 구제, 기도, 금식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태도로 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런 교훈의 맥락에서 주기도문이 주어졌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은밀하게 하는 기도 즉 하나님이 들으시기를 바라고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의 전형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는 것이나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은밀한 기도 곧 하나님께만 드리는 기도자의 태도를 비유적으로 가르친 것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는 왜 주기도문이 은밀한 기도가 되는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먼저 주기도문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부름으로 시작함으로써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한다. 여기서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는 기도자의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그 분의 나라가 임하시고 그 분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에 대한 기도자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기도의 목적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도자, 자기 개인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뜻이 기도자의 소원이 됨으로 기도의 대상과 기도의 목적이 모두 하나님께만 촛점이 맞추어진 하나님 중심적 기도의 전형이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 다음에 세번째 기도인 일용한 양식과 죄사함 그리고 시험과 악에서의 구원에 대한 청원은 기도자 자신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독립적인 청원이 아니라 앞의 근본적인 청원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청원인 것이다,. 즉 첫번째 청원에 나타난 기도자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자에게 필요한 영적, 물질적 필요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번째 청원 역시 기도자 자신을 향한 기도라기 보다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마지막이 다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대한 송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인 것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주어진 말미에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라는 교훈이 덧붙여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 교훈은 구제나 금식의 주제와 연관된 것 같지는 않고 주기도문 말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주기도문의 교훈과 직접 연관된 것 같다. 그것은 은밀한 기도로서의 주기도문의 교훈에 이어서 하나님이 받으실 그런 은밀한 기도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기도자의 준비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죄사함의 청원과 관련된 것 같다. 기도자가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아무리 은밀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무익한 기도가될 것임을 경고한 것일 것이다. 기도자가 하나님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죄지은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도자의 죄 역시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며 결국 기도자의 그 기도가 아무리 은밀할지라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추기 2014. 4. 10 ]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염려하지 말라

 

 교훈의 핵심은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천국 백성들이 구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국 백성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다. 그리하면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도 하늘 아버지께서 다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이라면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  어쩌면 이런 염려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불가피하고 당연하기 조차한 것이 아닌가?  사람은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염려에서 자유로운 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런 염려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먹고사는 염려를 하는 것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이며 그의 마음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다고 말한다. 이뿐 아니라 먹고사는 염려를 하는 것은 눈이 어두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둠가운데 있는 소경과 같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결정적인 경고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먹고사는 것을 염려하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무서운 결론에 이른다.

 

 

[추기] 2018년 9월 10일 월

 

6장 1절-18절은 자선, 기도, 금식과 같은 종교 행위에 있어서 위선을 금하는 교훈이다.

여기서 정의되는 위선이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자선행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 이 모든 것들이 위선적인 종교 행위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남이 모르게 숨어서 자선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하다보면 자꾸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되풀이하게 된다.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금식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띠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면 이것은 위선이다. 이런 교훈에서 하나님은 숨어서 계시며,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상이 일관되게 제시된다. 하나님시며 숨어서 계신 분이므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종교 행위도 숨어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6장 19-34절은 다른 교훈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말라는 교훈이다. 모든 사람에게 너무도 당연하고 일상적인 먹고사는 걱정을 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교훈은 매우 놀랍다. 먹고사는 걱정을 하고 사는 일은 눈이 어두워 온 몸이 어두운 사람과 같으며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기려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먹고사는 걱정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 교훈은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먹고사는 문제를 책임져 주심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하면 먹고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 교훈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니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과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삶이 대비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과는 반대되는 삶을 산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추기] 2018년 9월 16일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예수계서 가르치신 기도의 가장 큰 원칙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 들으시라고 하는 것이니 가르침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종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예수 당시에 사람들은 아마도 종교지도자들이었겠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통이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한 것 같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예배당에서 들려지는 수많은 기도들이 바로 그럴 것인데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주로 종교지도자들이다.,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이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숨어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것인데 이 말이 문자적으로 은밀한 공간에서만 혼자서 기도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안된다는 말인데 그건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숨어서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의 본의는 무엇인가? 그것의 의미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의 주된 특징은 빈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기도가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인 셈이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기도는 곧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이고 위선적인 기도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예수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예를 제시하는데 이것이 소위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로 신성시되는 주기도문이다. 그러나 사실 소위 주기도문은 유일한 기도도 아니고 신성한 기도도 아니다. 이 기도는 위선적이지 않은 기도 빈말이 아닌 기도의 예로 제시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교회 전통에서 이것을 주기도문으로 신성시하여 형식적으로 읊조리는 일은 또 다른 위선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왜 빈밀이 아닌 마음이 실린 기도이며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아닌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기도의 세번째 간구때문인 듯 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구이다. 기도하는 자는 자신이 먼저 죄지은 자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자기 죄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이런 간구는 참으로 진실된, 마음이 살린 기도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이 실리지 않고는 않고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남의 죄를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 기도의 예를 제시한 후에 세번째 간구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하시지만 너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추기] 2019년 9월 21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22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지만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23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24절) 이 교훈의 문맥에서 보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놓거나 아니면 하늘에 쌓아 놓는냐, 그리고 눈이 성하느냐 아니면 눈이 성하지 못하느냐라는 비유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의 교훈으로 귀결된다. 결국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은 보물을 땅에 쌓아 놓는 것과 같으며 또 눈이 성하지 못하여 온 몸이 어두운 것과 같다는 것이고, 그 반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놓는 것과 같고 또 눈이 성하여 온 몸이 밝은 것과 같다는 의미다. 이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주인으로 섬기는 재물도 결국 다 잃어버리고 사라질 것이며 눈이 멀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처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25절) 고 이어지는 교훈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삶의 태도다. 먹고 사는 일로 늘 염려하는 인간의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사실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고는 인간의 모든 염려를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일로 인한 염려를 특정하고 있다. 모든 염려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염려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 신자가  먹고 사는 일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기려는 것이고 이것을 불가능하다. 이방사람들이 먹고사는 일로 염려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그것은 당연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늘 아버지게서 이 모든 것이 신자들에게 필요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살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염려할 수 없으며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추기] 2019-11-06 17:04:04

마태복음 6장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의 주된 책망은 율법을 위선적으로 지키는 문제였다. 형식적으로는 율법을 지키지만 정작 그 율법이 요구하는 법정신을 어기는 것이 늘 문제였다. 5장에서 구약 율법의 궁극적인 법정신을 규명했다면 6장에서도 역시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율법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선이고 외식이다. 율법을 준수하는 동기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규율하는 언약법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법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들의 삶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는 동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할 때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구제, 기도, 금식이 거론되었다. 19절부터 등장하는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 외식의 문제다. 1-18절에서 종교적인 규례에서의 외식을 예로 들었다면 19-34절은 일상의 먹고사는 문제에서 나타나는 외식을 지적하고 있다. 이 단락의 핵심 구절은 24-25절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고(24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25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외식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염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천국 백성들에게는 그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이고 아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늘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고 구하지만(32절) 천국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천국 백성들에게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더하실 것이다(33절) 그러므로 천국 백성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