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Tolle Rege/시편
2012-01-21 23:43:38
성경에 욥기에 이어서 시편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욥기가 인간의 모든 생각과 판단을 넘어선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가르친 반면에 시편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계시하기 위하여 성경에서 욥기에 바로 이어서 시편을 배치한 것이 아닐까?
시편의 첫머리를 장식한 이 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의 현실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다소 추상적인 복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을 본받지 않고 그들과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로 표현된 대상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평행법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꾀로 사는 자들이고 죄악의 길을 걷는 자들이며 스스로 오만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은 이런 자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받은 복이 구체적으로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서 복을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거짓이고 허망한 말인지 이 시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데 복을 받은 자의 구별된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며 그 율법을 깨닫고 행하기 위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의 공통점은 여호와의 율법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이고 이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자 곧 복있는 자의 삶은 늘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두번째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복을 운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시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시인은 그저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을법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율법이 단순한 법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 부터 나오는 언약적 요구로서의 법인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인은 복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복을 받은 자는 언약적 요구로서의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있는 자의 이러한 삶의 태도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마르지 않고 철따라 열매를 맺듯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형통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의도하는 것들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복있는 자가 의도하는 것은 자기 욕심이나 자기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므로 이 말은 결국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종을 통하여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이 시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의인들의 모임에서 쫒겨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의인이란 말을 여기서 도입하는데 그가 가리키는 의인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복있는 자일 것이다. 복있는 자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의인의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인정하시지 않으시므로 반드시 망한다는 것, 이것이 만고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가 무엇인지, 시편이 노래하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곧 복있는 자의 삶은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그의 삶은 형통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떠나서 복을 논할 수 없고 율법을 떠나서 형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시편의 주제가 아닐까?
[추기] 2013. 10.29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란 무엇인가? 악인, 죄인, 오만한 자와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대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들의 정체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라는 것이고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은 자의 특징은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이다. 복은 신령하고 보이지 않지만 복을 받은 자의 삶을 통하여 실제적이고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따라 행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니까 울법을 떠나서 복을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율법을 여호와의 율법이라고 한다. 이는 율법의 출처가 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복이 율법 행함을 통해 나타난다면 복이 지향하는 것은 인간을 통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다. 그러므로 복이란 그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과 무관한 복은 우상이며 미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의 길은 하나님이 당얀히 인정하신다 그러나 자기 뜻을 따라 행하는 자들의 길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것 그것이 곧 멸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잣대는 창조목적인 것이다. 창조목적에 순종하였는가 아니면 창조목적을 거스렸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인 것이다. 창조목적을 거스린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멸망은 존재근거의 상실의 결과이며 영생은 존재 근거의 성취의 결과인 것이다.
추기 2014. 5. 11 복있는 사람
복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이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자이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이다. 대신에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이다. 이런 자가 복있는 자이다.
결국 복의 기준점은 여호와의 율법이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악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대적하며, 죄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자이며, 오만한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여호와의 율법이 그의 즐거움이 되며 즐거움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따른다. 그래서 그는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면 여호와의 율법을 줄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누구도 자신이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자리에 들어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자가 복있는 자이다. 이런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할 것이다. 이 대목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라는 황금률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자는 그렇지 않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므로 망할 것이다.
결국 복 있는 자란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 곧 의인을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을 거스리는 자들이 바로 악인,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