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로마서

로마서 8장 생명의 성령의 법

메르시어 2023. 4. 10. 11:45

로마서 8장 생명의 성령의 법

Tolle Rege/로마서

2012-10-06 17:41:55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란 물론 앞에서 말한 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를 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안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영에 대한 언급이 대두되는데 그 영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라고 표현되는 성령의 임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안에 있는 자, 곧 예수와 연합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자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신자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한다. 결국 신자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게 될 때 신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의 의미인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으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렇게 바울은 육신 곧 우리속에 내재하는 죄와 우리속에 내재하는 성령을 날카롭게 대조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실재를 가르키고 있다.  

 

 

  이렇게 생명을 주는 성령의 원리에 대하여 가르친 후에 바울은 신자가 이렇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들이므로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아서 안되며 오히려 성령으로  육신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의 영이다. 그래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그런데 바울은 아버지와 자녀라는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상속자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공적이고 법적인 성격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상속자란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법적인 지위를 갖는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상속자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영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부활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으며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이며 신자가 참여할 영광도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의 실제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영광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 영광은 사실 하나님이 창조시에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시려고 하였던 바로 그 권세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발한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신자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이 신자의 고난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말은 앞에서 말한 것과 어떤 관련을 갖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신자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일, 곧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재적 고난을 가리키는 것인 듯 하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바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자들, 영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자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허무한데 굴복하던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소망으로 신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비록 이 소망의 실재를 신자는 아직 보지 못하지만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게 하시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에서 떠나게 되었고 인간의 정당한 다스림을 받아야 할 피조물도 함께 허무함에 굴복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는 것을 고대한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대로 피조물을 다스리게 될 때 피조물들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천당가는 소망이 아니라 바로 이 소망이 신자들의 구원의 본질인 것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실현되는 근본적이고 원대한 소망인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목적인 것이다. 신자들은 반드시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도 신자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신자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 곧 하나님의 뜻대로 신자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신 것이고 그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며 바로 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으로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는가?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반문한다.  특별히 바울은 다시 살아나신 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천하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제 바울은 넘치는 확신으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것이며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하고 있다.

 

 

[추기] 2013. 3. 31 주일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뜻이 무엇인가? 이 말은 인간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그 가운데 종살이 하는 신세임을 전제한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해방되어야 할 존재, 해방이 필요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매여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무엇인가? 모든 법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순종해야 할 법의 형태로 계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셨고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법이란 하나님의 뜻인데 인간에게 지키라고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 법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인간을 떠나서 법이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어떤 관계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법인 것이다.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이 주어진 것인 아담이 하나님 앞에 언약적 존재이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이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게로 인하여 발생하여 그 관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매여있는 죄와 사망의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하나님의 선한 법이 인간을 구속하는 법이 되어 버린 것인가? 더구나 그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라면 그 법때문에 인간은 죄인으로 정죄되며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다고 탄식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법이 아니고 인간인 것이며 특별히 인간 속에 있는 죄인 것이다. 인간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법이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의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는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법이 인간을 정죄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므로 좌와 사망의 법으로 부터의 해방이란 법 자체로 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로 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인간을 죄로 부터 해방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말은 생명을 주는 성령이라는 법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왜 성령이 생명을 준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라는 법이 생명을 준다고 하였을까? 성령의 법이란 무엇인가? 성령의 법이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은 동일한데 이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그 법에 순종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법이 죄와 사망을 가져왔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법에 순종하게 되므로 그 법이 생명을 가져온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진리를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곧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추기 2014. 4. 27  생명의 성령의 법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동일한 법이지만 육신에 속한 자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된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다음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율법을 범해도 정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으므로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는 것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서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 지게 하셨다는 말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율법의 요구는 변치않는 것이고 엄연히 모든 언약백성들에서 부과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이 우리이게 죄와 사망의 법이 되었는데 이제 육신을  쫓지 않고 영을 따르게 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된다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 육신의 생각, 육신에 있는 자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결국 죄의 지배아래 있는 자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는 일을 함으로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 도 없으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더이상 육신에 속하지 않고 영에 속한 자가 된다. 또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몸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된다. 예수를 죽은 자 가게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아 아니다.

 

추기 2014. 4. 27  성령의 인도하심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빚진 자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가진 신자들의 의무를 뜻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언약적 반응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주신 언약적 행동에 대한 우리의 언약적 반응이란 바로 육신을 쫒치 말고영을 쫓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만일 육신대로 산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오직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만 즉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죄의 행실을 죽여야만 살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법적인 신분만아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울은 신자는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 죄의 지배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자들이 아니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신데, 또한 양자의 영이시다. 양자의 영이란 성령이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는 영이란 의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법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을 대신하는 법적이고 실제적인 상속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란 말을 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뿐만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바,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연합을 의미한다. 결국 신자가 누리는 영광이든 고난이든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이란 말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거론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란 무엇인가? 앞의 문맥으로 보아서 그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고난일 것이다. 신자가 육신을 좋지 않고 성령을 좇아살려고 할 때, 즉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할 때, 그것은 내적으로는 자신안의 죄와의 싸움이고 외적으로는 세상을 거스리는 싸움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반드시 신자는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핍박과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과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든지 의롭게 살려는 자는 고난을 받는다고 말한 것 아닌가? 

 

추기 2014. 4. 27  장차 나타날 영광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누리는 영광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이다.
 
바울은 피조 세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의 피조세계는 허무함 가운데 굴복하여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허무함 가운데 피조세계가 굴복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 세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해야만 이것이 이루어지므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등장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창조시에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다스릴 자로 사람을 만드셨으니 이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법적, 실제적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대행자였다. 이렇게 창조시부터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은 존재였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피조 세계는 자신을 제대로 다스릴 주인을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울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되었고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다고 말한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서 등장해서 자신들을 제대로 다스려주길 고대하는 것이다. 그래야먄 피조물들이 허무한데서 일어나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런 영광이 나타날 때, 피조물들은 비로서 허무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자유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추기 2014. 4. 27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피조물뿐 아니라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몸의 속량이 되는 때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때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속량될 때, 그 때가 바로 피조물들이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때이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인데 양자될 것 곧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양자될 것, 곧 몸의 속량이란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될 것이다. 몸의 속량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양자가 되는 것이라 한 걸 보면 양자됨은 구원의 완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등장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시의 목적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조세계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요 우리도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며 이 소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소망을 아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의 간구를 하신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그 간구대로 이루어주신다. 이렇게 성령이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추기 2014. 4. 27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 소위 예정론의 근거 본문이다.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자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역사 가운데,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날 때 비로소 알게된다는 것이다. 예정론은 우리가 받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신케 해준다. 그러나 예정론이 우리의 책임을 핑게되는 교리로 악용되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는 것이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하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그 아들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들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이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자들을 역사 가운데 부르셨으며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여기서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물론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다 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예정의 목적이고 부르심의 목적이며 구원의 목적이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예정과 부르심을 막을 것이며 대적할 것인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요,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들이니 누가 이들을 정죄할 것인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세상의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무엇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구약의 성도들도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듯이 지금도 신자들은 고난과 핍박을 받지만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에 찬 어조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피조물이락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