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로마서

로마서 1장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메르시어 2023. 4. 10. 11:39

로마서 1장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Tolle Rege/로마서

2012-09-16 15:53:17


  로마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로마에 형성된 교회인데 그 형성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사도들이 로마에 선교한 역사가 없는데 이미 로마에 교회가 형성되어 있었다면 추측컨데 로마 교회는 오순절 사건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 의해 이른 시기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뭏든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지 않은 교회인 로마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구약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인데 성경에 약속된 아들이 누구이신가 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순종케 하려고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로마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과 로마교회가 복음 안에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설명한 후에 비로서 로마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는 문안인사를 시작한다.

  바울은 자신이 선교하지 않은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를 보고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항상 기도에 쉬지 않고 로마 교회를 말하며 그들에게로 갈 기회를 구한 것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 보기를 간절히 원한 것은 그들에게 이방인 사도로서 자신이 받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기위함이었고 그들의 믿음을 보고 마음에 위로를 받기 위함이었다. 즉 바울은 복음 안에서 로마의 형제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며 피차 안위함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번 로마에 가고자 하였지만 지금까지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하였던 다른 이방인 지역에서와 같이 로마에도 복음을 전하길 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에게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빚을 진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가고자 하였지만 갈 길이 막혀있었고 언제 로마를 방문할지 기약할 수없는 상황속에서 그들에게 편지로나마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와 달리 복음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소논문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이리라. 바울은 편지로나마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로마의 형제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편지의 서두를 시작한 바울은 본격적으로 복음에 대한 증거를 시작한다. 바울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차별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자기는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복음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는데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기록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 자들인데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스스로 지혜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 그들이 나타내는 성적문란함 그리고 그들의 여러 악행들은 모두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신 연고이다. 그들은 이런 악행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알면서도 담대하게도 자신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죄악의 모든 근원이 참 하나님을 떠난데 있다는 본질적 진리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인간 죄악에 근거한 것이고 인간 죄악은 하나님을 떠난 연고이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이 없는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는 결코 해결될 가망이 없는 것이다.

 

[추기] 2013. 4.1 주일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인 자신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의 복음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성취된 것이지 구약과 별도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무엇인가하면 아들에 관한 약속이었다. 바울이 말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구약에서 아들에 관하여 약속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그러나 사실 육신도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다만 마리아가 법적으로 요셉의 아내였으므로 예수님은 법적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것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남, 죽음 그리고 부활이 모두 구약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바울은 바로 구약의 예언대로 성취된 예수의 생애가 바로 그가 그리스도요 주이신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이시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인 것이고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한 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사건을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선언된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주어진 약속이 공적으로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약속은 무엇이고 왜 예수의 부활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사건이라는 것일까? 사실 예수님은 부활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고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시에 이미 증거되었던 것이다. 구약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되었다. 이는 메시야가 하나님의 공적이고 법적인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 대망도 다윗의 위를 이어 아스라엘을 다스릴 탁월한 왕이었다. 물론 그들의 메시야 대망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내용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메시야라고 기대했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소식은 예수가 진정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에수님이 부활하신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부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부활로 말미암아 공적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추기 2014. 4. 22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사도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혹은 알리시는 복음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이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복음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된 것이 신약에서 나타난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 역사와 계시의 맥락에서 신약에 나타난 복음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 약속된 그 아들이 누구이신가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된 그 아들이라는 증거를 두가지로 말하는데 첫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구약에 아들에 관하여 약속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하여 구약에 약속된 것이고 그 약속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시며 그리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 구약에 미리 약속되었는데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복음이 되는가? 그것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이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 그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루게 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여야 한다는 것 아닌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 그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이다.

 
 
추기 2014. 4. 22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후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한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의한 자들이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그들의 불의와 불경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불의이다. 이 불의로 그들은 진리를 억누르는 자들이다.
 
앞에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면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들이 의로운 자들이라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는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의"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관계가 없다면 의나 혹 불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니 곧 바울이 말하는  의란 관계에서 상대방을 향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꾼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다.
 
여기서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보여주셨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보여 알여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만물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누구도 핑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만물에 계시된 진리를 불의로 막는자들이 되는 것이며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의 현저한 특징이 무엇인가하면 어리석고 미련하면서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그 진노는 우선 그들을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자기 정욕을 따라서 더러운 가운데 잘 지내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이다. 그들이 마움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어버려두신 결과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합당하지 못한 일, 곧 하나님의 뜻에 어긋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의 모든 불의, 음행,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 악독,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행,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는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신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의와 악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신, 곧 진노하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불의와 악을 해결하는 길은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곧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일외에 다른 길이 없다. 인간의 어떤 고안이나 프로그램으로도 자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복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추기] 2015. 2. 7
 
복음의 출처는 구약이다. 복음은 신약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미리 약속된 것이고 그것이 신약에 성취된 것이다. 구약에 미리 약속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이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인데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시고 사도로 부르셨다.
 

 성경에서 "의"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 관계가 지우는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의"이다. 그러니까 "의"는 언약적 신실함이다. 그리고 "의"를 햄함으로 그 관계가 원만한 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언약 관계의 창조를 내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창조주로서 의무를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바로 복음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함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고 "불의"를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불의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으므로 하나님의 의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산실함을 표현하는 동의어이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난 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요구하는 인간의 정당한 반응인 것이다.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하여 믿음이라는 인간의 언약벅 반응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께어졌던 언약관계는 회복된다. 이것이 바로 칭의, 화목, 양자됨이라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은 그 믿음이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 요구하는 인간의 언약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이다. 인간이 믿음이라는 언약적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회복된 것을 부정적으로는 "사죄"라 하고 긍정적으로는 "칭의"라고 하는 것이다.

 
창조된 만물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분명하여 나타나 누구도 핑게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다. 이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다. 바울은 지금 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 것이며 죄의 근본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추기 2016년 3월 27일 부활주일에

 

바울은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복음은 아들에 관한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알리신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아들에 관해 설명을 하면서 하나님이 아들에 관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 그 아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분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권세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분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진 아들에 관한 이 약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필요조건이었다면 그가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공적인 선포가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의 부활은 이스라엘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면 이제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을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은 민족적 범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제 이방인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 은혜와 평강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언약적 자비이다.

 

이제 하나님은 모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확장된 이스라엘로의 부르심이며시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을 자기의 친 백성삼으시려7는 것이요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려하심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로로 마밍마아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기쁜 소식인 복음은 삼위일체적 부르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신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선포 역시 삼위일체적 선포인 것이다.  예수가 왕이라는 이 선포는 이  선포를 듣는 자들에게 이  선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복음은 믿음을 요구한다. 그 믿음은 선포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것 곧 그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왕되심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이방인들이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 일이 바로 사도직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차별없이 모든 믿는 자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는 오래된 약속이 복음에 나타난 것이다. 바록 이스라엘은 언약에 불신실했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제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시 돌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만방에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을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베푸시는 거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하나님의 언약적 의 곧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동은 그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장한 반응이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실한 응답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은 복으메 대 언약적 반응을 통해 의로움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압축한 말이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 그가 바로 의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이다.

로마서 1장

닥치고 성경/로마서

2020-01-09 19:48:07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힌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며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한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바울은 인식은 분명하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며 이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신적 소명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 복음은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갑자기 등장한 소식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것이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그의 아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 아들이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신 분, 즉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그 아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시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으로 세워진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활 사건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온 세상의 왕으로 선포하신 사건인 셈이다. 이리하여 복음은 이제 이스라엘만의 복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이 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네 후손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을 받을 것이란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를 통해 실현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직분이란 다름 아닌 그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는 직분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그 이름을 전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그 아들이 온 세상의 왕이심을 전하는 일이다. 이는 권유하고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아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왕이심을 선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히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그 복음을 듣는 자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왕임을 믿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믿음에는 당연히 그 왕에 대한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부르심이란 바로 그 아들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빈다. 이는 단순한 축복과 인사의 말이 아니라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그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누리는 복이 바로 은혜와 평화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음에 감사하며 그들은 만나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바울이 그들은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세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나누어 주고 싶어한 신령한 은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사도였기에 그가 가진 신령한 은사는 바로 복음에 대한 선명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니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복음에 굳게 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고 서로 격려를 받기를 원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가운데서 열매를 거두었듯이 로마교회에도 복음을 전함으로 동일한 열매를 거두길 원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명임을 말하는 동시에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 기쁜 소식임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자랑스러워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믿는 사람 모두를 구원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복음으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가?  그것은 복음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언약적 신실함을 나타내셨다. 그렇기에 복음은 그 복음을 듣는 자의 신실한 반응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복음은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언약적 행동이다. 그렇기에 복음은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신실한 언약적 반응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 복음을 듣는 자의 신실한 반응을 요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란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믿음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어떤 약속이나 행동에 대한 인간의 정당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면 믿음에는 인간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왜 사람들에게 복음이 필요한가? 왜 복음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모든 불의함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진노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의는 불의한 세상을 향한 진노로 나타난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온세상의 창조주이심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창조된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하기는 커녕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그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 대신 자기 욕망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다. 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것이고 창주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의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고 그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셨다. 그러니까 바울은 세상에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하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가 가득찬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이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동, 곧 그 아들을 통해 나타난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