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이사야

이사야 1장 정죄와 소망

메르시어 2023. 3. 26. 16:57

이사야 1장 정죄와 소망

Tolle Rege/이사야

2011-07-18 01:48:44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에 예언사역을 시작하여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기 까지 오랜 세월 예언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사야가 예언 활동을 한 시대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후한 시대였고 유다가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시대였다. 그래서 그의 예언 사역의 대상은 북조 이스라엘이 아니고 위기에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이었다.  

 

이사야서는 언약의 증인인 하늘과 땅을 부르는 말로 시작된다. 모세가 하늘과 땅을 불러 언약의 증거를 삼았듯이 이사야는 모세가 증인으로 세운 그 하늘과 땅을 불러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죄악, 즉 언약적 배신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고발의 첫번째 내용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휼히 여기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자신들과 언약맺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무리 때려도 거역하는 자식처럼 앗수르에 짓밟혀 땅이 황폐하였고 성읍은 불에 탔고 예루살렘만이 포도원의 망대같이 남아있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아예 소돔의 관원이요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하고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과 같이 된 그들이 드리는 모든 제사와 그들이 지키는 모든 절기가 이제 하나님에게는 역겹기만 하다. 그런 종교적 의식이전에 그들은 여호와의 법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해 주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여호와의 법에 귀를 기울여 그렇게만 한다면 이스라엘의 죄가 주홍 간을지라도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어질 것이며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하여 배반한다면 칼에 삼켜질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죄악이 공동체안의  선과 정의를 행치 않는 죄악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된다. 하나님은 창기와 같이 되어버린 성읍, 살인자들뿐인 성읍,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뇌물을사랑하여 고아를 신원하지 않고 과부의 송사를 듣지 않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시고 슬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돌이킬 가망성이 없어진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대적, 하나님의 원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는 앗수르를 의미할 것이다)에게 보응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정화시켜서 의의 성읍, 신실한 고을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시온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언약적 자비가 모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에게만 베풀어질 것이요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며 여호와를 버린자도 멸망할 것이다.

 

 

이사야 1장

닥치고 성경/이사야

2019-09-22 19:39:03


 

이사야 1장

 이사야가 보기에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주님을 거역하였고, 주님을 알지 못하며, 주님을 버리고, 업신여기고, 등을 돌린 자들이었다. 이사야의 이런 책망의 배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있다.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그래서 주님은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책망하시고 듣지 않으면 때리기까지 하신다.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때리시는 이유는 단하나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맞고도 더 맞을 짓만 하므로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속은 골병이 들었지만 그것을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래서 도성 시온은 외롭게 남아 있는 포도원 초막과 같이, 포위된 성읍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절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얼마를 살아남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때리는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고 언약에 신실하기를 바라서이지 그들의 멸절을 바래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언약을 배반하고 주님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거나 멸절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가 바로 주님의 신실하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주님은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절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들의 실상은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의 통치자들이며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멸절당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달라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이다. 

 

  지금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10절)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 없이 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이사야의 책망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업신여기고, 등을 돌렸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이었고 분향하고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며 기도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게 종교적 제의는 넘쳐났지만 그들은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종교적 제의를 미워하시고 역겨워하시며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기도하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종교적 제의를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가득한 피를 씻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는 일이다. 악한 행실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정의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옳은 일, 정의를 찾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하는 자를 책망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며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는 일이다. 남을 억압하지 않는 것은 악행을 그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정의를 찾는 일은 아직 아니다. 정의를 찾으려면 억압받는 자들을 도와주고 억압하는 자들을 꾸짖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주님은 이스라엘의 지난 죄가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기꺼이 용서해주실 마음이 있으시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망과 징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거절하고 배반한다면 칼날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주님은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시지만, 그들이 돌이키기 않는다면 주님은 끝까지 그들을 괴롭히고 때리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주님은 이스라엘을 멸절시키시거나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신실하던 성읍이 창녀와 같이 되었고,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던 성읍 안에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친다고 한탄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고 도독의 짝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쫒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을 귓전으로 흘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그들을 원수로 여기시고 보복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형벌하고 멸절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때려서라도 그들을 씻고 모든 불순물을 없애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에게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보내실 것이며 그런 다음에 예루살렘을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 부르실 것이다. 시온은 정의를 행할 때 구속을 받고 이스라엘은 공의를 행할 때 구속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시온이라는 이름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그들은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거역하는 자들, 죄인들, 주님을 버리는 자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패망하고 멸망을 당할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우상숭배를 즐겼고, 동산에서 이방 신들을 즐겨 섬겼다고 비난한다. 주님의 법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생각, 자기 욕망이 주님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이 주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다를 수 없다. 주님의 법을 거절하는 것은 곧 주님의 주님되심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주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종교적 욕망에만 충실한 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