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창세기

창세기 25장 야곱과 에서

메르시어 2023. 2. 5. 20:50

창세기 25장 야곱과 에서

Tolle Rege/창세기

2011-05-12 23:16:37


  아브라함의 죽음은 간단히 기록되었다. 그가 사라가 장사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강조된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땅의 약속의 실현을 보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막벨라 굴을 사고 그곳에 장사됨으로써 그 실현을 멀리서 내다 보고 기다리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간단한 기록에 이어 이스마엘의 후예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 이어진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에 대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성경은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두가지 간단한 기록은 본격적인 언약의 자손인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대한 기록의 준비단계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이상한 계시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이삭이 장자의 명분을 파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 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자의 명분을 중시한 야곱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의 대조는 하나님나라 형성의 원리를 보여준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중시한 것은 단순히 그의 욕심때문이라고만 해석하기 보다는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자의 명문을 중시한 것이 아닐까? 장자권의 핵심에는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유산으로 받은 언약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에서는 장자로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위치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고 그 결과 장자권이 야곱에게 넘어가게 된 셈이다.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두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은 자연적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질서라는 것, 들째 하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되 하나님의 언약에 충성된 자를  통하여 이루신다는 진리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건은 이미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대로 이루어 진 것이므로 에서에게 무슨 책임을 물울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책임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미리 정 하신 섭리대로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역사 저너머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실현은 인간을 통하여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은 충돌하지 않는 것이다.

 

추기 2011. 12. 15

이제 아브라함은 자기의 역할을 충성되이 마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백성이요 하나님나라의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의 주검이 막벨라 굴에 사라와 함께 묻힌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온 땅을 주시마 약속했고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살아 생전에 자신이 돈 주고 산 매장지 막벨라 굴밖에 보지 못했고 백세나 되어 얻은 이삭외에는 약속의 후손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믿음으로 이삭조차 하나님 앞에 내어 드렸고 믿음으로 돈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산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바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며 약속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보이는 대로 행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는 것 처럼 바라보았으니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보여준 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자기 중심적 확신이나 신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이란 헛된 자기 확신이거나 맹신일 뿐이다. 하나님나라는 약속에 기초한 믿음을 통하여 임하는 것이다.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를 취하여 많은 육신의 자손을 둔 사실이 언급되고 또한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언급된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리 많은 육신의 자손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삭의 이야기에서 야곱과 에서의 출생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적 장자권은 에서에게 있을지라고 하나님나라의 장자권은 약속의 자녀로 선택된  야곱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나라는 그 약속을 믿는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에 대한 인간의 믿음 이 두가지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두가지 핵심 요소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믿음 이 두가지 요소가 만날 때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간에 한그릇 팥죽으로 장자권이 거래된 에피소드는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는가? 아마도 야곱은 자신의 출생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어머니 리브가를 통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권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에서는 장자권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의 그의 무관심과 무지함을 보여준다. 야곱과 에서의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정당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야곱은 잔꾀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으려 할 것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어야 했으며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약속의 자녀로서의 의식을 가졌어야 했을 것이다. 야곱의 행동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꾀로 이루어보려 한 것이라면  에서의 행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이런 약점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창세기 25장

닥치고 성경/창세기

2019-10-10 21:04:40


창세기 25장

드디어 아브라함은 백 칠십 오세에 늙어서 기운이 진하여 죽고 사라가 매장된 막벨라 굴에 그도 매장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 땅에 사라도 아브라함도 뼈를 묻고 죽어서도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삭이 쌍둥이 형제인 야곱과 에서를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여호와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이삭에게 하셨다.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 에서가 이삭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 보리는 일화가 등장한다. 쌍둥이 형제인 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늘 관심을 자기고 있었고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장난 같은 일을 통해 이렇게 장자의 명분이 에서에게서 야곱으로 넘어갔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쌍둥이 형제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처음부터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에게 있었다. 장자의 명분이란 생물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이 일화는 보여준다. 장자의 명분이 야곱에게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뜻인 동시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