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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 -게르하르트 로핑크

메르시어 2023. 5. 31. 15:29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 게르하르트 로핑크

 

[] 예수와 제자들

 

예수의 생각은 유난히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되,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예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더 큰 목표에 이르는 도정이며 보편적 구원의 징표다. 그렇다면 이제 더 엄밀히 말해서 예수는 모여야 할 이스라엘을, 참 하느님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해 예수의 제자교육이 결정적 대답을 준다.

 

1. 제자단

우리는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원칙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우선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되 자기기 사는 동네에서 머물면서 하느님나라를 기다리던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런 성격의 예수 지지자들은 본격적 의미의 제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윤곽이 확정된 동아리다. 그들이 예수와 더불어 이루는 생활공동체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운명공동체다. 무엇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을 불렀던가? 그 최선의 대답은 루가10:2 이다.(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여러분은 추수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 밭에 일꾼들을 보내라고 하시오) 이는 하나님나라 선포와 하느님백성의 집결이 종말 사건임을 말해준다. 이제 제자단은 정작 온 이스라엘에게 일어났어야 할 것을 표출하는 징표가 될 소임을 받는다. 그것은 하느님나라의 복음에 전력으로 헌신하는 일이요, 새로운 생활 질서로 철저히 회개하는 일이며, 새로운 공동체로 모이는 일이다. 예수의 의도는 제자단이 이리하여 이스라엘에 대하여 폐쇄되고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뭉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개방되고 늘 온 이스라엘을 지향하는 자세를 갖추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제자단은 그러므로 옛 하느님 백성 이외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대신으로 이스라엘을 교체하려고 예수가 제자단을 불렀던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산상설교

제자 공동체와 온 이스라엘과의 이 상관관계에 상응하여, 윤리의 차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제자들만을 위한 가르침과 온 이스라엘을 위한 가르침을 구별하기란 극히 어렵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은 제자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게 하자는 것이지만 동시에 온 백성을 위한 가르침이다. 이 점은 바로 제자단이 종말 이스라엘의 징표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산상설교의 상대방은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이다. 이 설교에서 예수는 일찍이 시나이 산 위에서 구약의 사회질서가 선포되었듯이 온 이스라엘 앞에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사회질서를 선포한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예수의 본격적 청중으로 언급된다는 것은 단연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의 설교는 군중을 배제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예수 청중의 가장 중심에 자리하지만 온 이스라엘이야 말로 그 설교를 듣고 실행해야 할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산상설교는 우선 절박하게 제자들에게 적용되지만, 그러나 그들을 넘어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된다. 군중들은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들었고 그들은 이 복음 선포자에 의하여 치유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예수에게는 일면 하나님나라의 공개적 선포와 백성에 대한 설교, 그리고 타면 제자들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이라는 양면이 있었다. 총괄컨대 산상설교의 틀은 우리의 명제를 확인해준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상대방은 고립된 개인도 아니요 인류 전체도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상대방은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이다.

 

3. 새 가정

그런데 앞의 두 단락은 한 난제를 남겨놓고 있다. 사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철저한 요구들-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떠나고 소유를 포기하는 등-을 제시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이런 요구들을 덮어놓고 온 하느님 백성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이런 요구를 자기를 따라오던 제자들에게만 제시했지, 온 백성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예수에게서 추종윤리와 온 하느님백성의 윤리를 구분하는 것을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점이 더 훌륭한 사람들의 윤리와 평균치인 사람들의 윤리라는 천주교회의 이층윤리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예수 추종자에게 특수윤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층윤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경계선이 그어질 수 있는 추종윤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온 하느님 백성의 윤리에 비하여 한층 드높은 형태의 윤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구체적 생활 형태에 대하여 기능적으로만 규정될 뿐이다. 여기서 추종윤리와 온 하느님 백성의 윤리와의 내적 연관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은 그 대가를 백배나 받는다고 말한다. 예수는 이 모든 것을 상대화시킨다. 물론 덮어놓고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버리는 일 자체에 무슨 적극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바야흐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나라가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를 따라가는, 하느님나라 때문에 종래의 것들을 물리치고 떠나는 그런 사람들은 새 가족이 된다. 새로운 가정에, 역설적으로 다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버린 모든 것을 백배로 되돌려 얻게 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한 것은 형제자매의 새 가정을 이루어 그들 자신이 돌입하는 하느님 나라의 징표가 되도록 부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단연 중요한 물음은 새 가정의 실상으로 묘사된 것이 과연 하느님 백성의 총체와 연결될 수 있냐는 것이다. 누가 예수가 말하는 이 새 가족인가? 제자단만인가? 그분 주위에 군중이 앉아 있었다는 말이 아마 이에 대한 반증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했다. 이 문맥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준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란 하느님이 바야흐로 수행하시는 구원계획에 가담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이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참 이스라엘의 모임이다. 그러니 예수가 말하는 새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은 비단 제자만이 아니라 바야흐로 이스라엘 안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느님 나라로 몰려드는 모든 사람이다. 이로써 분명히 예수의 형제와 자매라는 새 가족은 본격적인 제자단을 넘어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믿는 이스라엘 안에서 곳곳에서 바야흐로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하느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진행되어 나가면서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이스라엘 안에 결별과 양분을 낳는다. 이 양분 현상이 복음 때문에 이스라엘의 가정들을 가로지르며 곳곳에서 예수의 새 가정을 이룬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서 하느님이 계획하시는 새 사회가 아직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실상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생겨난다.

 

4. 끝난 아버지 노릇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버린 모든 것을 지금 이미 되찾는다고 약속한다. 집도, 형제도, 자매도, 어머니도, 자녀도, 토지도. 다만 여기에 아버지는 없다. (마르코 10:29-30) 이 말씀의 둘째 부분에 아버지가 우연히 아니라 의식적으로 빠진 것은 새 가정에는 아버지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너무나도 가부장적인 지배의 상징이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또 따라서 참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이신 아버지만을 모셔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 그래서 예수는 여러분은 땅에서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지 마시오.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분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마태23:9)라고 가르친다. 마태 23:8-12에서는 그리스도의 존칭에 대한 금지 외에 올바른 직무행사 문제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공동체 안에서 가장 큰 사람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일반적으로 랍비라는 칭호를 용인했지만 그러나 랍비들이 제자들의 섬김을 받는 관례를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한다.(22:27)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가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예수는 여러분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가 섬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섬겼다는 사실은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 인상깊이 사무쳐있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기를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또한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본디는 물론 외부사람들이 아니라 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예수의 용어도 바로 여기 제자들의 이 새로운 상황에 그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 용어로 예수는 제자들이 가족을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새로이 철저한 의미에서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음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도 바로 여기 제자단의 이 특별한 상황에 그 삶의 자리가 있다고 하겠다. 본래 주기도문은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을 위한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으로 그들은 하느님을 압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일용한 양식을 주십사고 비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태오 23:9은 그 정확한 의미를 얻게 된다. 제자들은 하느님 한 분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압바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들에게는 이제 더러는 자상하게 돌봐주던 아버지고 없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이 있을 따름일진대, 하물며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란 다시는 없다. 정든 아버지마저 버린 마당에 군림하는 아버지를 제자단에서 되찾는다면 자가당착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새 가정 안에서 형제와 자매 어머니와 자녀 모두를 되찾지만 그러나 되찾을 아버지는 없다, 새 가정에는 가부장적 지배가 남아서는 안 되며 모성과 우애와 자녀 됨만이 하느님 아버지 앞에 남아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지배구조라고 부를 바로 그것에 대하여 말해준다. 이 세상의 사회들에서는 그것이 예사스런 일이지만 제자 공동체 안에서는 지배관계가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오히려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여느 사회에서 상례로 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로 상종하기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대조사회를 요청한다.

 

5. 폭력의 단념

폭력을 단념하라는 예수의 요청이 가장 뚜렷한 대목은 마태오5:39-32, 루가 6:29-30이다. 이 본문에는 항거하지 말라는 악의 내용이- 염치없는 간청에서 억지스런 강요를 거쳐 송사를 걸겠다는 공갈에 이르렀다가 노골적인 폭행에 이르기까지- 점점 강도를 더한다. 단연 중요한 것은 네 마디 말씀이 마디마다 충격적 언어를 구사하면서 폭력 단념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윤리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이 네 마디 말씀의 의도는 분명하다. 법적 제재 일랑 일체 단념하라 어떤 보복이라도 삼가라.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 불의를 당하거든 꾹 눌러 참되 더욱 넘쳐흐르는 선행으로 응수하라! 어쩌면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불의를 그저 감내하기만 하는 수동적 자세가 적수를 위하여 애를 쓰는, 그를 형제로 삼으려는 지극히 능동적인 자세로 변하는 것이다. 정녕 예수는 폭력의 사용을 금하고 있으며 자기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폭력저항과 보복행위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폭력을 단념하라는 예수의 요청을 상징적 표현인 양 무산시켜보려는 교묘한 해석이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지는 이른바 여장규칙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여장규칙이 지시하는 것은 절대 무방비 상태다. 지팡이와 신발의 포기는 무방비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비폭력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실로 그것은 절대적인 평화 태세를 과시하는 신호가 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여장규칙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사회적, 사교적 맥락, 즉 바야흐로 곳곳에서 생겨나던 예수의 새 가족들이 환대와 협력을 기꺼이 베풀 자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만 가능하다. 여장규칙의 엄격성은 형성 중이던 예수의 새 가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이와 똑같이 폭력을 단념하라는 예수의 요청의 철저성도 이 요청의 사회적 맥락, 즉 제자단을 예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라는 새 가족을, 모여야 할 이스라엘을, 평화의 아들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폭력 단념이라는 철저한 윤리가 겨냥하는 상대방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요 온 세상도 아니며 분명히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사무쳐 새겨진 하느님 백성이다. 이 점을 통찰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점점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평화에 관한 논쟁들을 위하여 지대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이 논쟁을 보면 실상, 한쪽에서는 폭력 단념이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 없는 개인만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란 입장을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세계 내의 정치적, 사회적인 활동이 산상설교의 규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복음에 대하여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예수의 사고는 비상하게 사회 관계적이다. 예수의 시선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또는 하느님 다스림이 빛을 발하게 될 이스라엘의 예표인 제자 공동체를 향해 있다. 예수의 요청은 민중적 개방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이나 국가나 사회 일반을 상대방으로 삼지 않는다. 예수의 나라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 세상의 구조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만일 이 세상의 구조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이 나라 안에서도 그 권리를 필요하면 폭력을 써서라도 쟁취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는 거기, 지금 그 나라가 빛을 발하고 있는 거기서는 그러나 예수에 따르면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 참 하느님 백성, 참 예수의 가족은 무슨 일이든지 폭력으로 관철하서는 안 된다. 거기서는 사회에서 상례가 되어 있고 또 자주 정당한 일이기도 한 그런 폭력으로 권리를 관철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감수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건데, 이 모든 것으로써 예수는 단지 내적 심리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안의 구체적 실천을 겨냥한다. 예수는 모여야 할 하느님 백성을 대조사회로 이해한다. 예수가 모으려는 하느님 백성이야 말로 대안사회라고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그 사회 안에서는 이 세상 권세들의 폭력구조가 아니라 화해와 우애가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6. 가벼운 짐

그러나 산상설교처럼 엄격하고 타협없는 의미로 폭력을 배제하며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문제는 비단 폭력의 경우만 아니라 예수가 제시하는 모든 윤리적 명제에서 제기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산상설교의 실행가능성에 대한 제목 아래 많은 궁리가 있어 왔다. 특히 칸트의 독일 관념론 이래 가장 영향력이 큰 대답의 하나인즉, 예수의 요청들이란 다름 아니라 바른 마음가짐의 훈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청들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오직 하나,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랑의 내적 지향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바른 지향을 중요시한다는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다 지향윤리는 으레 어떤 바른 인식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 바른 인식이라는 것이 예수 요청의 구체적 행위를 덜 중요한 것으로 보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산상설교가 반석위에 지은 집의 비유로 끝나는 것은 산상설교가 전적으로 겨냥하는 것인즉 바로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실행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반석비유에서는 토라 대신 예수의 가르침이 등장함이 분명해진다. 사실 토라란 이스라엘의 생활 질서, 아니 사회질서다. 따라서 반석비유는 세말 하느님 백성을 위한 생활 질서요 사회질서라는 의미에서 예수의 말씀을 다룬다. 분명 사회질서란 지향만으로는 바로 설수 없다. 하느님 백성이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반석비유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준행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개신교에서 발전된 또 하나의 다른 대답이 있다. 그것은 산상설교는 가차 없이 인간을 심판하고 인간의 진상을 폭로하며 그래서 인간이 아예 자기 자신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만 기대하는 일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바울의 신학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율법과 율법 아래의 인간에 대한 바울의 표현들을 경솔하게 산상설교에다 끌어다 붙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바울에게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의 교훈이라는 의미의 차원에 있지 그가 말하는 시내산 율법이란 의미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모든 요청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구원을 절대적 기존 여건으로 전제함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예수 자신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라는 해방하고 구원하는 현실이야말로 원칙적으로 모든 요청의 전제다. 그러므로 예수의 윤리적 훈시는 모름지기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지평 앞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출발함으로써만 산상설교의 수행 가능성이란 문제의 대답이 실질적으로 바르게 얻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을 지우는가, 아니면 모든 요청에서 그 짐과 무게를 덜어줄 만큼 사로잡는 매력이 발산되는가?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돌입에 의해 발산되는 사로잡는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아니 이미 사람들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하도 매혹되어, 자기 삶을 바꾸고 앞으로는 발견된 그 매력 속에서 살기가 전혀 어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분명히 보물과 진주의 비유는 예수와 예수의 새 가족의 실존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열쇠를 제공한다. 그것은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체험한, 그래서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게 된 그런 복되고도 매혹적인 발견의 이야기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요청들을 괴로워하거나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주 큰일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알게 되는 새로운 홀가분한 마음과 깊은 자유를 체험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예수의 초대는 이 근본체험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이 초대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시나이의 율법을 대신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은 시나이의 율법처럼 짓누르는 멍에가 아니라 가벼운 짐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예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처럼 자기 사람들을 지배하고 강제하지 않는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 권력과 자기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모름지기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산다. 그러므로 이 대목도 개인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되며, 이 대목이 배후에도 해방하고 구원하며 고무하는 현실로서 하느님 나라가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을 가차 없이 심판하는, 그래서 그 앞에서 인간이 전전긍긍하며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율법이 아니라, 인간에게 숨통을 트게 해주는 부드러운 멍에요 가벼운 짐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윤리는 고립된 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제자단을, 예수의 새 가족을, 모여야 할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 것이다. 거기에는 뚜렷이 사회적인 차원이 있다. 이 윤리가 실행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의식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복속하여 참으로 형제들과 자매들의 공동체이기를 원하는 그런 인간들의 집단들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언제나 하느님의 백성들을 상대했으며, 이스라엘을 참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자 제자들을 자기 둘레에 모았다는 이 모든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산상설교의 수행가능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7. 산 위의 도시

서구에서 극히 짧은 기간에 교회에 대한 의식이 크게 전환되었다. 아직도 영광의 교회론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이제는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교회상에 빠져들고 있다. 그것은 전혀 눈에 뜨일 것이라고는 없는 그런 교회의 모습이다. 가뭇없이 깊이 인간사회 속으로 잠겨 들어가 버리는, 교회 자체의 존재를 몰각하고 거의 교회 본연의 소임마저 포기해 버리는, 세속 안에서 모든 것이 파고들어가 스스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그런 교회다. 이 교회상에는 콘스탄티누스 전환기 이래 교회의 군림의 역사에 대한 깊은 수치심이 사무쳐 있다. 또 동시에 온갖 엘리트적, 개선주의적 사고들에 대한 혐오도 있고, 만인과의 연대성을 아쉬워하는 동경도 있으며, 교회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던 과거의 잘못을 미래에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적인 반성도 있다. 이런 경향의 일부는 옳고 또 불가피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과거의 개선주의에 반발하다가 교회를 완전히 평면화시켜 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교회가 거의 자기소임마저 포기할 지경으로 여느 사회 속으로 잠겨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사회를 변혁시키는 바른 길일까?

예수의 교훈에 등장하는 빛과 소금 그리고 산위의 동네의 표징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 의하여 온 인류를 변혁시키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크게 이루어진다는 바로 그런 의미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수긍될 수 있는 사회질서의 삶을 사는 공동체요 세상을 위한 교회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 안에서 번영해서는 안 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산위에서 빛나는 도시란 대조사회인 교회, 바로 대조사회로서야 말로 세상을 바꾸어 놓는 그런 교회를 가리키는 기호다. 교회가 그 대조성을 상실하다면 교회는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그리하여 사회는 다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처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3-9),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4:26-29), 겨자씨의 비유(4:30-32), 누룩의 비유(13:20-21)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심지어 아슬아슬하게 위험에 처한 시작이 놀랍게도 풍부하고 광장한 완성과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관점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따로 그 자체의 작용으로만 아니라 제자들의 활동으로도, 아니 바로 제자 공동체 안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을 당연히 전제한다. 사실 예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 하느님 나라의 숨은 현재를 예수에게만 집중시키고 제자들을 그 나라의 상징적 현존에서 배제시키는 사람은 제자들의 파견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적, 유대교적 사고에서는 하느님 통치에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다. 슈낙켄부르크의 말처럼 예수의 말씀, 사죄, 축사, 치유 등 구원행적이 그러하듯이,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하느님 다스림의 힘찬 현존을 가리키는 표징이다. 마태복음 5:13-16 본문이 보여주듯이 예수에게는 제자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바야흐로 이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요, 이 사람들 안에서 미래의 나라가 벌써 상징적 현재가 된 것이다. 물론 제자 공동체 혹은 교회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바로잡자는 의도로 반대하는 입장 탓에 오늘날 우리들 의식 속에서 교회와 하느님 나라 사이의 괴리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면, 또 다시 새로운 바로잡음이 절실히 요청된다. 예수의 종말론에서 단연 중요한 점은 하느님 다스림이 바야흐로 이미 이스라엘 안에서 현재의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직 완성되지는 않았을지언정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교회 안에서도 또는 그리스도 공동체들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재의 일이라는 입장을 굽힘없이 고수하는 그런 교회론이라야만 올바른 교회론이다.

 

8.예수의 공동체 의지

신약성서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의도를 밝히는 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천착되면서 그 종말론적 성격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다. 예수의 중요한 관심사는 어떤 임의의 집결 운동과 각성운동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종말 모임이다. 예수 설교의 중심 내용은 바야흐로 예수 자신의 등장과 더불어 때가 성취되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종말을 위한 옛 약속이 현실이 되고 하느님 나라가 돌입하고 있다. 이 종말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제시된 구원을 붙들어야 하고 회개해야 하며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모여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다수가 이 부름을 회피하자 예수는 전보다 더 집중적으로 제자들에게 힘을 쏟는다. 그러나 예수에게 제자단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남은 자들이나 이스라엘 내부의 무슨 특수 공동체가 아니며, 더구나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존재는 더욱 아니다. 제자단은 오히려 아직은 전체적으로 모일 수 없는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동시에 언젠가는 충만한 숫자로 모여 이뤄져야 할 종말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존재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집중하는 예수의 관심은 최후의 만찬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보편성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다. 이방인들의 순례라는 표상이 입증하듯이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할을 이사야 전통의 보편적 지평에서 바라본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징표로서 선택되었다. 그 마지막 모습의 하느님 나라란 예수가 볼 때에는 단연 현재의 이스라엘을 넘어서는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통치가 일거에 전 세계적으로 관철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구름에서 돌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매개로 전달된다. 한 구체적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빛을 발하고 그래서 그 본질이 세상 가운데 계시되는 그런 형태로 실현된다.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는 무슨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고 한 구체적 백성인 하느님 백성과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연계관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을 표출할 수 있는 인간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상에 도래할 수가 있으랴! 예수의 제자단 안에서 또 그것을 넘어서 종말 이스라엘의 출발로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이상 사회, 마음들의 결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예수의 뜻에 따라 여느 사회에서와는 다른 사회관계들이 다스린다. 보복이 다시는 없으며 지배구조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사회적 실재에 관한 일임이 분명해진다. 예수의 윤리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쇄신된 종말론적 하느님 백성을 겨냥한다. 그것은 고립된 개인이나 세상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세상 가운데 시작하시는 새로운 일은 자기 백성 안에서, 곧 예수가 둘레에 모으는 제자들의 새 가정 안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