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4/4)-송제근

메르시어 2023. 5. 30. 22:22

13장 민수기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18:16


13장 민수기의 신학과 메시지

<민수기의 구조와 신학>

민수기는 레위기와 또 그 앞의 출애굽기와 함께 한 단위의 책을 이루어 하나의 궁극적 목적,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씨가 역사속에서 완성되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레위기의 뒷부분( 17-26)과 민수기의 앞부분(1-10)은 하나의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거룩이 이제 성막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스라엘 삶의 전반에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의 내용을 시간적 관점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고 뒤바뀌어 있는데, 1:1에서 출애굽 2 21일을 먼저 언급하고 다시 7:1 9:15에서 한달전인 출애굽 2 11일로 소급하여 기록하고 다시 10:11에서는 출애굽 2 2 20일로 환원된다. 민수기를 지리적 관점에서 구분하면 1:1-10:10은 출애굽1-2년후인 시내산에서, 10:11-12:16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이고 13:1-19:22은 광야, 20:1-22:1은 가데스에서 모압까지, 10:11-22:1은 출애굽 제 3-39년까지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시기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22:2-36:13은 출애굽 제40년의 모압에서의 기록이다. 또한 민수기를 모병조사를 중심으로 보면 첫 단락인 1-10장은 제1차 모병조사의 기록이고 ,둘째 단락인 11-25장은 광야에서의 파멸의 기록이며, 셋째 단락인 26-36장은 제2차 모병조사 기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 단락은 광야여행이 시작될 때의 상황이고 셋째 단락은 3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의 상황인데 민수기에서는 동일한 주제가 첫단락과 셋째 단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민수기가 둘째 단락을 중심으로 동심원적 구조(concentric pattern)를 가지는 복합적인 구조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민수기는 광야에서의 불순종을 가운데 두고 앞 뒤로 시내산과 모압에서의 이스라엘의 순종을 위치함으로써 시내산과 모압에서 이스라엘의 순종은 축복으로 보상을 받았지만 광야에서의 그들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하였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결국 동심원적 구조를 가진 민수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가운데에 위치한 둘째 단락인, 광야에서의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다.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순종과 그에 따른 언약적 저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그 중심에 놓은 것은 정당한 것이다. 민수기는 이렇게 부정적인 역사관 혹은 역사비판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부정적인 역사관은 세겜에서의 2차 언약갱신에서 이스라엘을 경고하는 여호수아 24장에, 그리고 이후의 신명기에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오경 속에서 민수기의 신학적 내용의 의미>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四經(tetrateuch)은 시간의 진행과 내용에 있어 서로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면 이런 구조를 가진 민수기는 오경 전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오경은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형성 역사를 그리는데 창세기에는 그 형성의 준비로서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씨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이며 신명기는 땅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보이고 있다. 씨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의 기록중에서 출애굽기는 그 나라가 어떻게 70명의 조상에서 출발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수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에서는 하나님과 언약백성으로서 어떻게 그 언약을 유지,발전하며 살 것인가를 소개한다. 이제 민수기는 이런 가운데 그 씨가 어떻게 완전한게 마련되는가를 두 번의(1-4, 26) 모병조사 사건을 통하여 보여준다. 이 사실이 가르치는 진리는 아무리 정해진 혈통을 따라 사람의 숫자가 준비되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13-14)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고 새롭게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은 혈통을 따라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진다(1:12-13). 민수기는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현재 언약적인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고 심지어는 그 세대가 전멸되는, 하나님나라의 삶의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 다음의 책인 신명기는 하나님 나라의 땅의 완성을 주제로 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현재적으로 그 땅에서 언약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저주를 미래에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수기와 신명기의 신학적인 의미는 동일하다. 즉 두 책은 모두,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언약에 현재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머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이 출애굽 1세대를 전멸하게 만들었던가?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직후에,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인 황금송아지와 언약을 맺는 행동을 했다. 이때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진멸하려고 했으나 모세의 헌신적 중재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일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범죄하였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심판하셨다. 그러나 민수기 13-14장에서 행한 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은 출애굽 1세대를 진멸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행동이 이런 중대한 심판을 받을 만한 행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경의 주제인 하나님나라의 형성과정에서 민수기는 하나님 나라의 씨가 완성되고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나서 낙심하여 하나님 나라의 땅의 완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어 버렸다. 이러한 불순종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나라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 나라의 씨인 그들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출애굽1세대를 전멸시키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대신 2세대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는데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민수기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이 진리는 언약의 역사가 진행되는한 변함없는 진리로서 새 언약의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현대의 하나님 나라의 씨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모병조사와 부족들의 배치: 1-2,26>

모병조사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셨다. 이것은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씨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미 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숫자의 과다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순종하는 데 있다. 한편 모병조사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투진영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가 진행하는 것을 증거막이 좌우했다.(9:15-23) 이렇게 증거막을 중심한 이스라엘의 행동의 결정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행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증거막이 거두어 지고 가장 먼저 증거궤가 떠날 때에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10:35), 궤가 쉴 때에 여호와여 돌아오소서’(10:36)라고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훗날 여호와의 전쟁(Yahweh as a warrior)의 모티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그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전쟁을 완수하셔야 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그 하나님이 돌아오셔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 순종과 불순종: 언약백성됨의 관건: 11-25>

이스라엘이 영광의 출애굽을 경험하고 더 영광스러운 언약백성이 되는 예식을 올렸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물과 고기의 문제로 범죄하였지만(16-17) 그 때는 아직 언약백성이 되기 전이므로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언약백성이 되고 난 후에는 예외 없이 모든 범죄를 심판하셨다. 이렇게 참다운 언약백성이 되는 길은 실제적인 삶의 엄청난 난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언약이후의 범죄들, 고기의 문제(11:33), 고라당의 반란(16), 미리암과 아론의 도전(12), 모세의 불순종(20) 등 이런 범죄들을 하나님은 개별사건을 개별적으로 심판하셨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 세대가 거역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함(qadosh) 언약적 의미는 언약의 당사자에 대해 충실하다는 의미이다.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언약적인 사랑으로 행동함에 대하여 이스라엘도 동일한 언약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점에서 철저하게 실패하였다. 이스라엘에게는 내부의 싸움, 즉 자신과의 싸움이 외부와의 전쟁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었다.

 

14장 민수기 1-10장의 현대적 의미

2016-01-23 18:20:05


14장 민수기 1-10장의 현대적 의미

민수기 1-10장의 규례와 내용들은 그 앞의 책들인 출애굽기 후반이나 레위기의 내용과 함께 현대인에게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들이 갖는 종교적인 가치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선지서나 시편보다 훨씬 더 풍부한 계시를 발견할 수 있다. 민수기에 나타나는 종교적 제도의 법들이 현대 개신교인 들에게 생소한 이유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예언자적 영성을 제사장적 영성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으며 또한 제사장적 영성을 로마교의 것과 동일시 하여 그 내용을 다루는 본문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는 일종의 개혁가로서 개혁이 팔요할 때에 등장했던 인물인 반면에 제사장은 항상 있는 직분으로서 종교의 전통과 맥락을 이어가는 중요한 기구였다. 에언자는 후대에 왕 제도와 함께 이스라엘 무대에 등장하였으나 제사장은 처음부터 계속 있어 왔고 심지어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유일한 기회로서 주어졌던 제도였다.

 

<민수기 1-10장의 구성> 출애굽기, 레위기의 연속으로서의 민수기

민수기의 첫 부분(1-10)은 내용적으로 바로 앞의 레위기와 직접 이어져서 시내산에서의 사건과 준비가 연속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레위기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성막, 즉 증거막의 내부와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소개하였으나, 민수기의 첫 부분은 그 증거막 주위의 상황, 즉 이스라엘이 어떻게 조직적인 진을 형성하여 증거막을 둘러싸고 행진할 것인가를 소개한다. 이렇게 민수기 전체는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제도적으로 완벽히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가운데 현실화되는 과정은 씨가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수기는 그 씨가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신 인도로 완벽하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애굽에 내려간 70명의 야곱 족속이 충만하게 불어나는 과정과 (1-2) 그 백성이 질곡을 벗어나는 해방의 과정(3-15)을 거쳐서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예식을 행할 시내산에 이르러서 언약을 맺었다(19-24)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의 삶을 보장하는 증거막을 중심으로한 삶의 규례를 다방면으로 다루면서 하나님 나라의 씨의 완전한 면모를 갖추었고(25-10) 이제는 가나안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들어가서 약속된 그 땅을 유업으로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함으로 그 씨인 출애굽 1세대는 그 땅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세대가 전멸되기를 기다리는 38년이라는 잔인한 세월과 출애굽 2세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세월이 남았을 뿐이었다(11-25). 이어서 형성된 출애굽 2세대가 철저한 순종을 바탕으로 약속의 땅 언저리까지 인도되는 과정을 보게된다(26-36) 

 

<민수기 1-4> 증거막을 중심으로 한 언약백성의 진배치와 행진

민수기의 인구조사는 일반적인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투병력 조사였다. 즉 전쟁에 나갈만한 자를 그 군대대로 계수하였으므로 여자가 아닌 남자만 계산되었고(1:2), 20세이상으로 싸울수 있는 자를 모두 계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전투적 모습을 본다. 불의와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것들을 파괴하며(광야여행 중의 전투),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주신 것들을 정복(가나안 정복)하는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모습인 것이다. 창세기부터 레위기까지는 하나님나라는 수동적, 수세적이었거나 (1-11) 형성기를 거치는 과정(12-레위기)이었다면 민수기에서는 드디어 철저하게 조직되고 무장된 하나님 나라의 군대의 윤곽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이 군대는 두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언약의 마지막 요소인 땅을 차지하는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이 참으시기 어려울 정도로 된 가나안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기능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질서없이 조직된 것이 아니었다. 먼저 각 지파를 다스릴 족장들이 선정되었고 이들이 각 지파의 군인들을 계수하였다(1:1-19), 각 지파도 아무렇게나 언급된 것이 아니라 증거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맡을 네 지파군으로 구성되고 각 지파군은 유사한 성격의 지파들끼리 모여있다. 증거막과 함께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순서는 유다 지파군- 르우벤 지파군- 에브라임 지파군- 단 지파군으로 이어지고 증거막은 모든 지파의 가운데서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증거막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큰 것이다. 이것은 행진을 하지 않고 포진할 때에도 증거막이 중심에 있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막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지키시고 오히려 제사장과 레위인이 증거막 주위에 포진하여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증거막과 함부로 접촉하여 죽는 것을 막았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계수할 때에 레위지파를 그 속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1:47-54) 레위지파의 역할이 다른 지파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각 지파의 인구조사의 목적은 전쟁을 위한 모병이었으나 레위지파의 인구조사는 직접적인 전쟁이 아닌 증거막의 모든 기구들을 관리하고(1:50-51), 증거막과 이스라엘 사이에 포진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1:53) 그러므로 다른 지파와 달리, 레위지파는 20세 이상이 아니라, 태어나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판단되는 생후 일개월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다 계수하였다.(3:39). 다른 지파가 하나님 나라의 직접적인 전투에 임하여 외부의 적과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레위지파와 같이 내부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를 위하여 언약관계의 법칙을 따라 살게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이것은 공동체 외부와의 전쟁과 함께, 공동체 내부를 청결하게 하고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나타낸다.

 

<민수기 5-6> 여호와께 구분된 백성의 삶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구분되었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만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여호와를 향하여 구분되어야 한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와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는 언약적 표현의 실제적 의미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중에서 이런 여호와를 만날 수 없는 세가지 경우(5:1-4)를 들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완전하지 못하거나 죽음과 상관이 있는, 즉 생명과 완전한 창조의 하나님의 속성과 배치되는 현상을 경험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일시적으로 격리되어 진 밖에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서약과 관련된 네가지 법규를 소개하는데 (5:5-6:27)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입을 사용하는 영역에서도 하나님께 구분되어야 하는 것을 나타낸다. 먼저 타인의 소유물에 대하여 손해를 입히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거짓 증거한 경우를 들고 있다(5:5-10) 이것은 속건제로 알려진 보상제 혹은 배상죄에 해당한다. 이런 죄는 두 단계로 처리되는데, 먼저 죄 지었음을 고백하고 또한 죄값을 충분히 보상하되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덧붙여야 한다. 둘째로 의심받는 아내 (5:11-13)는 고대 근동에서 흔히 있었던 시련을 통한 진위 확인 관습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구약법이 고대 근동의 관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의심을 받는 사람이 위험한 과정을 통과하는 일이 없고, 의심하는 남편과 의심받는 아내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나실인의 규례이다(6:1-21) 이 본문에서 나타난 것은 나실인의 서약을 어떻게 완벽하게 시행할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나실인의 규례는 제사장의 그것과 유사하게 포도주나 강한 술을 금지하는 것이고 시체와 접촉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 규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제사장은 레위인중 남자만 할 수 있으나, 나실인은 모든 지파중에서 누구나, 그 중에서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나실인으로 있을 기간도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한다는 점이다. 구약의 제도를 철저히 수동적이고 하향적으로 주어지는 명령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여성의 하나님을 향한 자빌성을 인정한 나실인 제도는 충격적일 것이다. 나실인은 여호와게 구분된 (거룩한)자이므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구분된 삶을(어떤 의미에서는 제사장보다 더) 살아야 한다. 로마서 12:1-2은 그리스도인이 신약적 의미의 나실인적인 삶을 살 것을 명령한 것이다. 넷째는 대제사장적 축복, 소위 Barucha이다(6:22-27). 거의 조화로운 tricolon형식으로(6:24-26) 이루어진 본문의 주제는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임이 엄청나게 강조되었음으로 보게된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각 colon에서 정확히 두 번째 위치에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또 대 제사장적인 축복이 끝나고 나서도 하나님의 이름(내이름-6:27)의 권위가 다시 강조된 것으로 알 수 있다. 6장에 이어서 7장에서 증거막이 봉헌될 때에 지파장들의 예물드림이 기록된 것은 6장 마지막의 대제사장적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서 지파장들의 자발적인 헌신을 나타낸다. 이들의 예물은 12지파 언약 공동체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12마리의 소와 두 지파에서 한대씩 마련한 수레이다. 이러한 수레는 12개의 진설병이 두열로 배열된 것과 동일하다. 이어서 레위자손의 헌신법(8:5-26)이 나오는데 그 과정은 나실인의 그것과 명확히 대조된다. 나실인의 경우는 특별한 예식이 없으나 여기서는 명확한 예식이 있고, 나실인은 삭도를 대지 않으나 여기서는 오히려 전신을 삭도로 밀며 옷을 빨고 정결케 한다. 또 나실인은 기간이 끝났을 째 번제제, 속죄제, 화목제, 소제의 4가지 제사를 드리는데 비해 여기서는 시작할 때에 번제, 소제, 속죄제의 3가지를 드린다.

 

<민수기 9-10> 두번째 유월절과 행진의 준비완료

이제 이스라엘의 군대와 그 제도형성의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고 그 땅으로 행진하는 일만 남았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사항이 여기에 기록되었다. 우선 두 번째 유월절 행사(9:1-14)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시기적으로 이 때의 당면과제였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명하셨던 대로 유월절 예식을 행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특히한 예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 참여하는 유월절에 참여하라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도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백성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백성이 하나되어 언약공동체가 출발한 과거를 회상하고 즐기는 곳에는 한 개인이 비윤리적인 허물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보다 공동체적 차원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중요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타국인이 유월절에 참여하기 원하면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엄청난 자비가 베풀어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자비의 공동체로서의 적극적인 측면을 형성 초기부터 보인 것이다. 증거막 위의 구름의 신호(9:15-23)와 두개의 은나팔(10:1-10)의 내용은 서로 상관되는 것이다. 즉 구름이 일어나거나 머무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막을 떠나게 하시거나 멈추게 하심을 주권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인간들이 해야할 일은 은나팔을 만들어서 구름의 움직임의 신호를 따라서 부는 것이었다. 이 은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기도였다. 은나팔을 한번 불 때는 지도자가 모이고, 두 번 불 때는 백성 전체가 모였다. 그러나 울려서 불 때는 전투대형으로 한 지파씩 행진하였다. 이때 각 지파는 예상했던 대로 분해된 증거막을 중심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떠나는 상황을 여호와의 산을 떠난다(10:33)고 표현하였다. 즉 출애굽기 31, 185절의 하나님의 산이라는 목표점이 이루어졌고,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된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스라엘이 떠날 때, 즉 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소서(qumah Yahweh)라고 기도하였고 궤가 쉴 때 여호와여 돌아오소서(shubah Yahweh)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행동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행동해야 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15장 신명기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23:18


 15장 신명기의 신학과 메시지

 

우리는 신명기에 나타난 다음 3가지 성경신학적 관점에 근거하여 신명기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다루려고 한다. (1) 신명기는 통일성을 가진 실체이며, 그 통일성의 근본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갱신하는 언약인 모압(세겜)언약이다. (2)신명기의 핵심인 모압(세겜)언약은 최초의 근본적 언약인 시내산 언약과 쌍을 이룬다. (3)시내산 언약과 모압(세겜)언약은 구약의 나머지 책들의 형성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성경신학의 핵심으로서의 언약신학>

 

 언약신학에 대한 재평가

언약이 성경신학의 핵심이라는 생각과 그것으로 성경신학이나 조직신학의 근본을 형성해 보려는 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언약신학은 두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자유주의 언약신학의 한계인데 이 신학은 언약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제도가 아니라, 어떤 신학자나 학파가 만들어낸 신학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보수주의 언약신학의 한계이다. 이 신학은 전통적으로 언약신학에 대하여 주석적인 근거를 약하게 가지거나 아예 가지지도 않았던 경우도 많고, 심지어는 단순히 조직신학적 요청으로 언약신학이 만들어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런 두가지 신학적 전통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로운 차원에서 구약의 언약을 해석하기 위하여는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정교하게 정의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신학적 요청으로 성경학에서 언약신학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철저한 주석적인 연구를 통해 언약의 실제적인 내용이 그 시대의 삶의 상황 속에서 무엇이었는가를 드러내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언약이 과연 고대 근동의 유사한 제도와 어떻게 관련되며 또 성경의 언약의 독창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여야 한다.

 

 언약이란 무엇인가?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은 인격 당사자간에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이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종교제도였다. 이것과 유사한 제도가 고대근동의 입양제도나 국가간의 조약제도 이었다. 고대 근동의 강대국과 약소국간의 조약은 성경의 언약과 아주 유사하며 특히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와 유사한 시기에 존재했던 헷제국과 애굽간에 맺은 조약은 성경의 언약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은 신학계에서 거의 상식이 되었다. 이런 지리적, 역사적 상관성 속에서 조약개념과 유사한 구약의 언약개념이 창조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공적관계를 맺는 고대근동의 제도와 유사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공적으로 규정하는 언약 체결의 구체적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언약 당사자간의 공적관계의 쌍방정의. 언약 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언약관계법의 제시와 수납  언약체결 비준, 제사 및 언약문서 작성  언약체결후의 피로연

 

<오경을 중심한 언약신학의 수립>

 

 모압(세겜)언약

오경에서 언약이라고 표현한 곳은 여러 군데이다. 아담언약이나 노아언약은 언약이란 말은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언약의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므로 이것들은 단순한 명령이나 약속이라고 볼 수 있다. 언약의 결과로서 생기는 것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 구성요소는 주권(), 국민(), 영토()이다. 오경은 이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완전하게 형성되는가를 보이는 책이다. 주권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께 있다. 창세기에서는 족장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 되었고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씨가 완성되었으며 이제 신명기에서는 모압언약을 통해 땅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명기의 핵심주제인 모압언약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모압언약이란 말이 나오는 신29:1절의 앞부분인 신5-28장에서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구체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다 발견할 수 있다.

 

시내산 언약 모압(세겜)언약

 언약 당사자간의 공적관계의 쌍방정의 출19:5-6 26:17-19

 언약 당사자의 공적인 대면 출19:9-25 5:2-3

 언약법의 제시와 수납 출20:1-17 5:7-21

 언약 세부법의 수납 출20:22-23:33 6-11, 12-26

 언약체결 비준, 제사 및 언약문서 출24:3-8 27

 언약체결후의 피로연 출24:9-11 27:7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다른 점은 축복과 저주가 있다는 점이고 고대 근동의 다른 제도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용서가 있는 것 인데 이런 차이점들은 모압(세겜)언약이 최초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새로운 상황에서 갱신한 언약이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오경의 언약과 구약의 다른 책들과의 성경신학적인 관계

19세기 말부터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종교의 유일성을 윤리적 유일신론(ethical monotheism)에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예언자가 종교의 출발점이고 오경은 가장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오경의 언약신학이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언서 메시지의 세가지 축인 정죄-심판-소망의 근거가 오경의 언약신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정죄는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책망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상에게 선 이해된 법의식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경에서 이미 주어진 언약법에 근거한 것임이 명확하다. 그리고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심판은 이미 오경에서 언약체결시 선포된 언약적 저주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언서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소망의 메시지( 31:31-34의 새언약, 36-37장의 화평의 언약)의 근거는 바로 모압(세겜)언약의 마지막 부분인 신30:6에서 발견할수 있다. 에레미아와 에스겔은 그들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언약에 궁극적으로 소망을 걸고 있는데 이것은 신30:6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마음의 할례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경의 언약신학, 특히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은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30:6절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할례를 베푸신다는 메시지는 신명기 전체에서 이스라엘의 회개와 책임을 끝까지 강조하는 가운데 주어졌다. 이것은 게으른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자동적을 해결하시는 것으로 오해하지 못하도록 하며 인간편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여 회개하며 노력해야 할 것과, 최종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서의 첫 번째 시리즈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는 예언서에서 처럼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가 나타나며 그속에 일단의 소망의 요소가 보인다는 점에서 신명기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열왕기상 8장의 솔로몬의 기도의 내용들은 신명시 28장이나 레위기 26장의 저주 목록과 유사하다. 이 첫 번째 역사서 시리즈의 촛점은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의 멸망이다. 그러므로 그 핵심 메시지는 언약적 원리에 따라 이스라엘의 범죄로 심판이 임하였으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언약적 원리에 따라 회개함으로써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서의 두 번째 시리즈인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지나고 회복의 시기가 도래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 기록된 책들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시리즈의 메시지의 핵심은 오랫동안 소망을 잃고 살아온 이스라엘이 이제는 진정으로 언약법으로 돌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근본적으로 갱신함으로써 (7-9) 소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시가서에도 언약과 관련된 수 많은 주제들이 있는데 토라와 그 법에 관한 관심을 나타낸 시편들 (1,19,119,15,24)이나 언약갱신과 직접 관련된 시편 (24,50) 그리고 참된 예배나 제사등과 관련된 관심들이 그것이다. 특히 시가서의 많은 내용들은 신31:9 이하에 주어진 매7년 마다 정기 초막절에 공적으로 치루어야 하는 언약갱신 축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타 다른 주제들도 오경의 언약을 기초로 하여 주어진 것이며 발전된 형태의 것이다. 서구의 구약신학, 특히 독일신학에서는 지혜서를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인간의 자기성찰의 산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지혜서의 근본 주제가 여호와를 두려워 함이고 토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지혜서의 이 두가지 주제가 바로 오경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두려워함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을 만날 때 경험한 것이고 토라를 준수하는 것은 언약조건인 언약법을 제시히고 수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토라를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오경의 언약신학은 지혜서 신학의 근간을 형성한다. 오경, 그 중에서도 특히 신명기를 연구하거나 설교함으로써 가지는 장점은 이런 성경신학의 핵심과 정점을 다루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서 구약의 다른 책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초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성경신학적인 특이성>

 

 땅의 신학인 모압언약

신명기의 신학적 특성의 하나가 이라는 점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신명기가 그 앞의 책인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관련되는지를 잘 밝히지 못했다. 신명기의 모압언약은 근본적으로 시내산 언약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형성에 기여한다. 즉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에 모압언약은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에 관련된다. 시내산 언약이 기록된 출19-24장과 언약후의 역사가 기록된 출25-36장은 이제 이스라엘이 완성된 씨로서 모압땅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모압언약은 준비된 그 씨가 어떻게 준비된 땅에 들어가서 살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모압언약은 그 땅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면들을 시내산 언약보다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이 씨의 신학이라면 모압 언약은 땅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게 이 두 신학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씨와 땅이 준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씨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그 씨와 그 땅도 존재 의미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총이지만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언약적 삶을 살지 않을 때는 오히려 그 언약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이 언약적 심판의 원리는 구약 이해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언약법으로서의 토라(torah)

신명기의 모압(세겜)언약을 살펴볼 때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토라(torah)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시내산 언약의 언약문서를 언약의 책’ (sept haberith, 24:7)라고 지칭한 것과 같이 신명기는 스스로를 가르켜, 구체적으로는 모압(세겜)언약을 가르켜 토라(torah)라고 지칭하였다. 토라라는 말은 모압언약을 마무리하는 신명기29-31장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토라가 막연하게 법을 가르키는 용어가 아니라 모압(세겜)언약을 가르키는 용어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단순한 법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신후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신 언약법인 것이다. 이러한 토라에 대한 이해는 유대교의 토라 이해나 혹은 고대 근동의 강압적인 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토라를 대부분 법 그 자체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토라속에서 언약적인 요소를 빼어 버리게 되면 구약의 신학적인 내용은 유대교의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구약법의 독특성은 그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존재 기반인 언약에 있다. 즉 법 자체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제도속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물과 떡의 문제로 범죄하였을 때 언약전에는 심판을 받지 않았으나 (15-18) 언약후에는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심판을 하셨다(10장 이하)는 사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언약은 법적인 행동의 동기를 제시한다. 법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저주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하신 언약의 상대방인 하나님이 그렇게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의 언약에 근거하여서 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구약 법 철학의 기초이다.

 

모압(세겜)언약의 이중성

신명기의 언약은 모압과 세겜의 두 장소에서 현재와 미래의 두 시간에 걸쳐 모세와 여호수아의 두 지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특이한 언약이다. 신명기의 언약이 쉽게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명기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것이다 언약갱신은 언약당사자가 바뀌었거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이루어진다. 우선 이스라엘이 세대교체를 마무리 하고 새로운 세대가 이스라엘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그 땅에서 언약을 갱신해야 한다. 또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자로 세대교체를 해야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언약을 갱신한 것이 신명기 언약이었으므로 모세는 언약갱신에 필요한 모든 것(언약관계 선언, 언약당사자 만남, 언약법 선포)을 모압에서 자기가 다 완료해 놓고 나머지 언약예식(언약준비예식, 축복과 저주, 언약 피로연)만 여호수아에게 남겨두고 그가 약속의 땅(세겜)에 들어가서 행하도록 마련해두었다. 모세가 모압에서 완료해 놓은 것은 모두 법적인 부분들(5-11, 12-26)이고 여호수아가 미래에 세겜에서 할 일(11:26-30, 27-28)은 모두 제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의 언약이 되게 하였으므로 신명기 언약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압(세겜)언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신명기의 언약은 모압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이나 세겜의 측면에서 보면 미완성이다. 즉 완성된 것이자 동시에 미완성된 언약이다. 이루어 졌으나 앞으로 이루어 져야할, 이 상태는 신명기 신학의 중요한 긴장을 조성하며 구약의 다음 책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언약관계의 근본적인 선언

고대근동의 조약문서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부르는 전문용어인 segullah가 바로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는데 동일하게 사용되었다(19:5, 26:18)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강대국-약소국의 관계에 유비(analogy)시켜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배로운 자로 선언하였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선언은 생략되어 있으나 신명기 언약에서는 여호와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26:17) 그리고 너는 나의 보배로운 백성이다(26:18)라고 완벽하게 쌍방의 선언으로 표현되었다.그런데 시내산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두번째 선언은 제사장 나라인데 이것에 대응하는 모압언약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언은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에서 말하는 제사장 나라의 의미를 모압언약에서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제사장 나라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제사장으로 기능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대사회의 제사장 같이 최고의 지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로 뛰어나게 라고 평범하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지고하심을 나타내는 데만 사용되는 elyion이란 단어이다. 이것은 신28:1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이 용어는 가히 신명기의 혁명적인 용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서 지고지존 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도 세상을 향해서 지고지존 하다는 의미이다.

 

<신명기의 구조와 그 특이성>

신명기는 핵심인 모압(세겜)언약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구조와 핵심자체의 내부구조(4:44-29:1)로 나누어진다. 외부구조는 핵심을 중심으로 앞에는 이스라엘의 과거의 역사(1:1-4:43)가 뒤에는 이스라엘의 미래의 역사(29:2-34:12)가 놓여 있으면서 가까운 과거(1:1-3:29)와 먼 과거(4:1-43) 그리고 먼 미래(29:2-30:20)와 가까운미래(31:1-34:12)가 서로 대응되는 동심원적 평행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핵심 자체의 내부구조는 첫째 법적요소(4:44-11:25)와 첫째 제의적 요소(11:26-32) 그리고 둘째 법적요소(12:1-26:15)와 둘째 제의적 요소( 26:16-28:68)로 구성되는 정상적 평행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신명기는 모압언약을 중심으로 내부구조와 외부구조가 다양한 평행법(parallelism)을 사용하고 있는 문학적으로 탁월한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책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 신학의 핵심인 모압언약이 구조적으로는 가운데에 위치하고 시간적으로는 현재에 놓여있으며 이것을 보좌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역사 서술이 앞뒤로 놓여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것은 신명기 전체의 구조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의 흐름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모압(세겜)언약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구조에서 1-3장의 산문적인 역사 서술은 31-34장의 운문적인 미래 서술과 대응하며, 4장의 설교적인 과거회상은 29-30장의 설교적인 미래예견과 탁월하게 일치한다. 이런점에서 과거(1-4)와 미래(29-34)를 염두에 두고 현재의 모압(세겜)언약을 대할 때에 우리는 신명기를 긴장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명기의 법의 특이성: 6-11, 12-26>

시내산 언약의 세부법(21-23)이나 모압(세겜)언약의 세부법(12-26)은 모두십계명의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이것은 두 언약 모두 십계명을 가장 중요한 법적인근거로 삼고 그것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십계명에 특이한 법 2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신명기는 제4계명 안식일 계명에 있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시내산 언약에서 제시한 창조라는 주제 대신에 구속의 주제를 사용한다. 신명기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주제가 구속인데 내가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내었으므로 다음의 행동을 하라(15:15)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아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일 계명을 지킴에 있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속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이민족과 구별되어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추측하여 볼 수 있다. 둘째, 탐심에 관한 10계명에서 차이점을 보이는데,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웃의 집이 먼저 언급되면서 그것이 이웃의 소유를 포괄적으로 나타낸 반면에 모압언약에서는 이웃의 아내가 먼저 언급되고 나머지 이웃의 소유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가서 살 때 그곳의 음란한 성 풍습과 일부다처제를 경계하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신명기법의 체계는 시내산 언약의 법체계와 다른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시내산 언약법의 체계는 십계명(20)과 세부법(21-23)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신명기법은 십계명(5), 주요법(6-11) 그리고 세부법(12-26)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명기법에서 새로운 요소로 주어진 주요법은 주로 십계명의 1계명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며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서 이스라엘의 순종을 설득하는 내용으로 따라서 매우 설교적이다. 또 신명기법의 세부법은 시내산 언약 세부법에 비해서 엄청나게 그 길이가 늘어났는데 이유는 모압언약에는 각 명령과 규례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설명과 함께 동기절(motive clause)이 붙어 있어서 그 명령을 행하도록 설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압(세겜)언약법은 시내산 언약법에 비하여 삶의 현실적인 상황을 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동정적으로 고려하며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신명기 1-3장 과 31-34, 그리고 신명기 4장 과 25-30>

신명기 1-3장과 31-34장은 서로 상응한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까운 과거를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까운 미래를 말한다. 또한 신명기 4장과 25-30장도 서로 대응하는데 4장은 먼 과거를 말하며 열조시대를 거쳐 세상 창조까지 시간적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렇게 먼 과거로 시간을 소급해 가는 이유는 먼저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특권을 가진 나라가 패역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클 것을 경고한다. 반대로 25-30장은 가장 먼 미래까지 시간이 흘러 내려가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가 쌓일 때 궁극적으로 그들은 해체되고 열국중에 끌려갈 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들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어떻게 열리는가를 보여주며 새로운 전망을 앞으로 올 세대를 향하여 열어 놓고있다.

 

<결어>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오경이 어떻게 성경신학적으로 구약의 다른 책과 관련되는가를 알아야하는 문제이다. 오경은 구약의 출발점이자 신학에 있어서도 구약전체의 핵심을 제공한다. 이제 신명기를 성경신학적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이상 논의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신학의 근본은 오경이다.

 오경의 언약은 구약의 다른 책들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오경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모압(세겜)언약으로 구성된다

 오경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족장언약으로 준비되었고 시내산 언약을 통해 그 씨가 완성되었으며 모압(세겜)언약을 통해 그 땅이 완성되었다.

 모압(세겜)언약은 두 지도자, 두 시간, 두 장소라는 이중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 결과로 모압(세겜)언약은 완성되었으나 동시에 완성을 향해서 가야하는 특이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신명기는 자신을 토라(torah)라고 부른다. 토라는 단순한 법이 아니라 법이 기능한 언약의 공적문서를 가리킨다.

 오경의 법은 언약이라는 제도 속에서 그 제도를 완성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 로 이 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언약에 봉사하는 언약법이다.

 신명기의 법은 시내산 언약과 동일하게 십계명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법들이 (12-26) 나오기 전에 제1계명을 근거로 긴 설교를(6-11) 기술하고 있는 점이 특이 하다.

 신명기의 십계명이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구별되는 것은 제4계명(구속 주제)과 제10계명 (아내의 위치)에 있다.

 모압(세겜)언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명기의 완벽한 구조는 신명기의 신학적 목적에 봉사한다. 즉 현재에 성취되어야 할 모압(세겜)언약을 위하여(5-28) 앞에서 과거의 사건을 반성하고(1-4), 미래의 일을 예견하고 있다(29-34)

 신명기 30:6에는 신명기 신학의 신비한 역사철학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킬 책임을 끝까지 강조하지만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인간의 마음에 할례 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이 약속은 구약의 역사철학의 근거가 되며, 앞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주어질 언약인 새 언약(31:31-34)과 화평의 언약(36-37)의 기초를 형성한다.

 

우리가 현재까지 모든 신학적인 노력을 다 기울여서 구약을 전체로 본 관점이 언약이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것은 되지 못할 것이고 성경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성경을 완전하게 전체로 보는 것은 영원한 미래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은 부분적으로 보나 완전히 알게 될 그 때를 기대한다 (고전13:9-12)

 

16장 신명기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2016-01-23 18:24:36


16장 신명기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신명기 연구역사>

지난 세기 이후 신명기에 대한 연구는 그칠줄 모르고 계속되어 왔다. 그 이유는 구약의 다른 책들과의 상관성에서 신명기가 그 어떤 책 보다도 깊고 또 신약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명기 자체의 여러 문제도 다른 책과의 관련성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기때문에 더욱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복합성을 지닌 신명기의 여러 난제들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쉽게 접근하는 길은 현재 우리 손에 주어진 신명기 자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이 말은 본문 속의 언어학적, 문학적, 주석적, 구조적, 신학적 내용이 현재 표현된 상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연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최근의 신명기 연구는 현재의 본문을 역사적으로 누적된 것으로 보던 지난날의 자세에서 벗어나 현재 본문의 모습 그 자체가 신학적인 의미를 충분히 지닐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1970년대 부터 성경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새 문학비평(new literary criticism)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고전적 역사적 문학비평(old literary and historical criticism)과 양식사적 연구들이 신명기 뿐아니라 구약전체의 이론들을 세워왔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없어서 다른 책들에 비해 연구가 늦어 지고 있지만 그런 중에 조금씩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의 통일성에 관한 연구>

신명기의 구조와 신학의 통일성을 연구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현재 우리 손에 들려진 신명기의 특징적인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지적하는 것이다. 신명기 연구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출발점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은 신명기에서 언급된(29:1) 소위 모압언약의 실체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29:1이 표제어인가 혹은 결어인가라는 논쟁이 있어 왔다. 이것이 표제어라면 모압언약의 실체를 29장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만일 결어라면 그 앞의 단원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질문은 29 1절에 언급된 두 언약, 즉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이 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29:1에서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과 다르며 모압언약이 시내산 언약이 그랬던 것처럼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체라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9:1을 표제어로 생각하면 우리는 모압언약의 실체를 그 이후 단원에서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결어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고 29:1에 표현된 두 언약,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모압언약은 시내산 언약에 대한 언약갱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하나 구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언약에는 불변요소(invariable element)가 있고 또한 가변요소(variable element)가 있다. 불변요소는 언약당사자에 대한 규정(definition of the covenant relationship) 언약규범(stipulations)과 같은 것이고 가변요소는 언약체결에 필요한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변요소를 법적 요소(legal element)라고 할 수 있고 가변요소를 제의적 요소(cultic element)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을 맺은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함으로 새로운 시간(27:2)과 장소(11:29, 27:12-13)에서 다른 주체(27:1,11 비교 11:29, 8:33)에 의해 언약의 제의적 요소가 변하였으므로 언약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모압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것이다. 29:1은 독자가 이미 시내산 언약의 신적 권위를 받아 들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과 모압 언약이 통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모압언약의 권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신5:2-3에서 시내산에서 그 당대의 사람들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 오늘 모압언덕에서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그 언약에 동참한 것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한다. 이것은 이제 모압언덕에 집결하여 있는 현재의 세대가 언약을 갱신하는데, 이 언약이 근본적으로 그 전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기초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과거와 현재의 시대를 동일시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최초의 언약수립이 현재의 세대에도 유효하며 툭히 현재와 미래를 거쳐 완성될 모압언약이 바로 시내산 언약에 기초룰 두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이 둘째 언약은 이제 모압언덕에서 시작되지만 여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므로 그곳에서 언약갱신이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압 땅에서의 언약갱신은 가나안 땅에서의 완성을 기대하는 잠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족장 때부터 약속된 그 땅에서 매듭짓는 언약갱신이야 말로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9:1은 앞에서 언급한(모압언약의 시작은 4:45) 모압언약의 내용을 정리하여 요약한 결어에 해당하고 신명기의 구조적, 신학적 통일성을 분명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7장 제4계명의 구약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하나님의 일하심과 안식하심>

창세기의 하나님의 일하심과 안식하심이라는 신인동형론적 표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어떻게 일하고 쉬어야 하는가를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4계명처럼 하나님의 행동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명하는 것은 다른 계명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쉼을 이제 출애굽 이후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누림으로 이제 이스라엘은 참된 일함과 참된 쉼이 무엇인가를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쉼의 더 깊은 전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되는 언약관계에 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는 분이시므로 그 언약의 당사자가 가진 속성을 이스라엘도 가져야 할 것이었고 그 속성의 첫 번째가 참된 쉼이었다. 그래서 그 날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구분하셨다에 상응하여 그날을 이스라엘이 기억하고 구분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즉 그 날이 어떤 풍요와 해방의 날인지를 잘 알고 다른 날과 구분해서 맞이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신명기 5:12-15에서는 4계명의 동기절 내용이 출애굽기의 그것과 다르게 하나님의 창조와 쉬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유케 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같이 신명기는 제4계명의 실제적인 근거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이제는 일과 쉼을 애굽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리엘을 자유케 하시고 진정한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애굽의 노예된 상태에서의 해방보다 더 깊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타락 이전 상태로의 부분적 회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쉬심, 축복하심, 구분하심 그리고 이스라엘의 행동>

안식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하신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이며 그것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하나님이 하신 구체적 행동은 쉬심, 축복하심, 구분하심이다. 하나님의 쉬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행동은 출애굽기에서는 일하지 말라로 부정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신명기에서는 일하지 말라에 더하여 쉬라고 표현되어 제4계명이 단순히 일을 정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안식하는 것이 목적임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는 의미는 창1:22, 28을 원용하면, 축복하심으로 그 결과가 풍성한 생육과 번성을 가져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이 이 날은 일하지 않아도 풍성한 생육과 번성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이후 출애굽하여 언약백성이 되었을 때 특히 그러한 것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해야 할 행동은 그 축복을 믿고 그 날에 쉬는 것이다. 축복하다(barak)라는 말과 함께 평행법(parallelism)적으로 표현된 구분하다(qadosh)라는 단어는 그 날이 축복된 날로 선포되었으므로 이 날은 다른 날들과 구분된 특별한 날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인간도 그 날을 구분해야 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날이 다른 날과 구분되는 풍성한 축복의 날이며 동시에 일과 노예 상태로 부터의 해방의 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그 날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오경에서의 제4계명의 적용>

증거막을 만들 때 안식일도 철저히 지켜졌는데(31,35), 이것은 공간의 거룩을 형상화한 성막과 함께 시간의 거룩을 형상화한 안식일을 통하여, 구약적 하나님의 경륜인, 제한된 영역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 나타났다. 21,23장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안식년과 3대 명절까지 안식일 개념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레 23,25장은 희년을 안식년보다 더 자세하게 언급함으로써 희년을 가장 최종적인 안식일의 의미로 이스라엘에게 적용 시키고 있다. 신명기는(16:1-17) 안식일 개념을 아주 독특하게 발전시키고 있는데 안식년 대신에 면제년이라고 표현(15:1-18)하면서 매 7년마다 내가 남에게 면제해 주어야 할 의무를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안식일 계명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이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어떻게 이스라엘 사회속의 약자들에게 물질적인 해방을 줄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심지어 삶의 기본적인 문제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 조차도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하였다. 먹고 마시는 일(16), 불 피우는 일(35:1-3), 나무하는 일(15:32), 추수하는 일(34:21)과 같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이런 일 조차도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세상에서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동을 안해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보살피시는 것을 믿고 체험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축복과 해방을 주신다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 믿음을 가져야 했다. 추수하는 날에도 쉬라고(34:21) 명하신 것은 물질에 매일 수 있는 삶에 대한 혁명적 규례인 동시에 애굽에서의 해방은 이제 재물로 부터의 해방까지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과 해방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훈련하게 되었을 것이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시는 날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상호 간에도 해방을 주는 날을 의미하였다. 그 날은 소나 나귀 그리고 종과 나그네도 쉼을 주었고 (23:12), 사회적 약자인 객과 고아와 레위인에게도 긍휼을 베풀었다.(15-16) 신명기는 더 많은 동기절을 사용하여 이렇게 해야 할 언약적 이유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즉 풍성한 축복과 해방의 원리를 내가 누리니 다른 사람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일 규례를 어긴 자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것은(15:32-36) 세속 사회속의 현대인에게는 놀랍게 여겨진다. 안식일 규례법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축복으로 풍요롭게 창조하시고 특별히 이스라엘과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다는 근본적 사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삶을 진정으로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언약백성으로서의 삶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관건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속에서의 제4계명의 적용>

이스라엘의 역사를 독립시대인 제1성전시대와 포로시대인 제2성전시대로 구분해 볼때 이 양시대는 인식일을 적용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1성전 시대에는 다른 절기들과 함께 안식일이 명확히 지켜져야 할 날로 여겨졌다(2:11,왕하4:23) 그러나 안식일 규례의 언약적이고 내면적인 가치가 잊혀지면서 안식일 규례가 형식화되어 갔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이렇게 외식적으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을 타매하고 이 문제들과 투쟁해야 했다 (8:5,2:11,1:13-14) 그러나 제2성전시대에는 그 이전과 정반대의 문제로 씨름해야 했다. 이시대는 외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정해진 울타리 속에 살지 않게 되었으므로 외적 규례가 지켜지지 않는 위험이 있는 시기였다. 그 중에 두드러진 것이 안식일과 성전의 문제였으므로 이 두가지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아는 성전제도의 재건과 안식일 문제를 놓고 현실속에서 씨름했다. 그들은 성전과 안식일 제도를 통하여 왕이 없는 포로시대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음을 선포하였다.(20,22,23, 9:14,10:31,13:15-22) 이것은 종교의 외면적인 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나야 할 종교의 외향성을 정당하게 드러낸 것이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서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신약에서의 제4계명의 해석과 적용>

4계명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인데 이제 이런 경륜의 전개 관점에서 제4계명의 의미 변화 및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 2경륜 시대에 제4계명이 가진 풍요와 해방이라는 근본 원리는 여전히 3경륜 시대에도 유효하다. 다만 3경륜 시대에서는 이제 모든 시간대 속에서 그러한 원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투쟁적인 삶이 필요하다. 11-1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 “자비를 베푸는 날이며”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심으로써 안식일의 근본 원리가 풍요와 해방임을 나타내셨다. 신약초기에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복음으로만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 생겼는데 이것은 복음의 유일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날과 절기에 집착하여 안식일을 지키려는 자들을 정죄하듯이 판단하였다.(10,11,15, 4:8-11)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날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하며 안식일을 지키는 내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4장에서는 안식일의 전혀 새로운 차원, 안식일이 제4경륜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소개한다. 그것은 제3경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안식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은 가운데, 완전한 안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제2경륜에서 안식일을 범하여 죽은 자들이 있듯이 지금도 제4경륜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안식을 체험하지 못할 사람들이 3경륜에도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한다. 즉 안식일의 종말론적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4계명의 신약적 해석과 현대적 의미>

4계명의 변하지 않는 의미는 풍요의 축복, 그리고 해방의 기쁨이다. 이런 초월적 의미 외에 제4계명에 부여 되었던 2경륜적 의미는 이제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 되어야 한다. 특히 날짜의 개념은 명백히 극복되어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란 공간의 거룩이 초월되었으면 안식일이란 시간의 거룩도 분명하게 초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란 특별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태도가 중요하듯이, 안식일이란 특정한 날이 아닌 모든 날에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우리가 처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풍요와 해방을 누리고 실현 시키는 것이 제4계명의 현대적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2경륜 시대에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언약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셨다. 그런데 이제 3경륜의 시대 벽두에 이 안식일 계명의 계시를 명확하게 혁명적으로 나타내셨다. 그것은 최초의 교회속에 소유 의식 자체가 포기되고 진정한 공유 의식만이 존재하게 하심으로써 교회내에 핍절한 자가 없게 된 것이었다.(4:32) 더 나아가 소유 자체가 죄인 것을 알게 되었고, 소유라는 죄가 처리되자 하나님의 축복인 풍요가 찾아 왔고 물질로 부터의 해방이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이제 3경륜을 사는 우리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해방되어 오직 그의 나라와 의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환상적인 삶이 펼쳐진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구약과 신약의 다양성보다 일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눈에 보이고 제도적인 구약적인 삶 자체를 무리하게 신약에 접목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규례를 쉽게 신약의 주의 날의 규례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개혁 교회속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듯이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전통이 남아있게 되었다. 청교도들의 신학적 유산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언약과 그 법의 발전과 전개라는 경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었기에 이러한 오해들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속문화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그동안 이룩한 주일의 전통은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이 날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해방을 알지 목하는 세속사회를 향해서 쓰는 잠정적인 임시 대응 방안에 불과하다. 세속사회를 향해서 우리는 이 날을 주의 날로 표현하고 주장하되, 우리 자신을 향해서는 날짜를 초월하여 풍요와 해방을 누리는 삶의 기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가 주일을 휴일로 정한 것은 하나님이 기독교를 통하여 세상에 내려주신, 역사 가운데 나타난 일반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이 날은 단순히 구약 때처럼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쉼의 의미는 더욱 고차원적인 것으로 넘어가서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께 맡기고 (11:28) 그리고 역설적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는 것이 진정한 쉼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6일간의 지친 삶을 주일에 내려놓고 쉬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주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우리의 육신을 쳐서 다른 사람을 더욱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딤후4:6). 안식 후 첫날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초대 교회가 이 날을 기념하여 새벽에 혹은 저녁에 모이는 전통이 생겼다. 주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이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이 날에 모이는 전통을 가진 것은 교회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안식일이 그대로 신약의 주일로 바뀌었다는 설익은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오직 이날에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근본적인 축복을 선포하신 것을 기억하고 즐거워 하며 그것을 나누고 선포할 뿐이다. 바쁜 현대문명 속에서 주일은 신자들이 모여 교제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며, 공동체가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영적 전투를 하여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기에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이 날이기 때문에 공동체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날로 만들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는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