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2/4)- 송제근
5장 출애굽기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02:24
5장 출애굽기의 신학과 메시지
오경은 다섯권이 하나로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현현하는 시작과 전개 그리고 예상되는 발전과 그 결과까지를 모두 포괄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경은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모든 기초를 마련하고 그 이후에 그 나라의 역사를 평가하고 결론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나타날 정경들의 의미도 결정짓는다. 오경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나라는 언약을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마련된 하나님나라의 기초는 출-레-민에서 실현되며 신명기에서 완성된다. 하나님나라라는 긍극적인 목적(ultimate purpose)은 언약(berith)이라는 합당한 역사적인 수단(propoer historical method)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경에는 서로 긴밀한 상호관계를가진 세가지 언약이 있는데 창세기에는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족장언약이, 출-레-민에는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을 나타내는 시내산 언약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명기에는 하나님나라의 땅의 완성을 나타내는 모압/세겜언약이 그것이다.
이런 전체적인 윤곽을가지고 출애굽기를 바라보아야 한다. 창세기에서 이미 준비완료된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중에서 씨가 완성을 향한 실제적인 진행을 시작하는 것이 출애굽기이다. 창세기에서 완전수 70명으로 준비된 하나님나라의 씨가 애굽에 정착하였고 출애굽기는 이 완전수의 모목이 애굽에서 큰 나무로 성장한 후에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법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씨로 인정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주목할 것은 준비된 씨기 충만한 숫자로 놀랍게 번성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지만 그 씨가 숫자가 많아진다고 하나님나라의 씨가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먼저 그 씨는 감옥과 같은 애굽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공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씨로 인정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이란 주제는 출애굽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레위기는 출애굽기에서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나라의 씨로서 언약의 증거막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언약적 삶을 규명하고 있다. 언약의 증거만 안에서 행해지는 제사행위는 언약관계의 회복, 유지, 발전을 위한 제사행위였으며 증거막 주의로 배치된 이스라엘 각 지파의 모습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삶을 나태낸다. 또 민수기는 그렇게 준비된 언약공동체가 진영을 이루어 일사분란하게 궁극적은 목표인 하나님나라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민수기에서 일어난 정탐꾼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궁극적인 목적 자체를 포기한 사건이었고 이것은 그 시대의 씨의 전멸을 초래할 위기의 시간이었다. 이 사건은 하나님나라의 땅을 포기하는 하나님나라의 씨는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하나님나라의 섬뜻한 진리를 보여준다.
출애굽기의 주제는 책 제목처럼 출애굽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 즉 하나님나라의 씨가 공적으로 형성되는 사건이 출애굽기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다른 것들은 이 주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신학의 두가지 중심주제인 하나님나라와 언약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쟁개념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주제는 궁극적인 목적과 합당한 역사적 수단이라는 상관관계를 가진다. 보통 하나님나라를 주제로 삼는 경우 그것을 추상적으로 다루기 쉽고 역사의 실제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중심주제는 언제나 언약이라는 역사적인 수단을 통하여 실현되어 왔다. 이 사실이 특히 출애굽기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7세기 이후의 정통신학에서 나타난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이나 삼위 하나님간의 약정 혹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규례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고대근동적 상황이라는 역사적 실재에 뿌리를 박은 것이 아니었다. 정통신학의 이러한 언약 개념은 하나님나라와 언약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한 이유중의 하나였다. 오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공적인 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이 언약에서 맺는 공적인 관계는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상호관계이다. 이 공적인 관계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모든 내용을 다 포괄한다.
하나님나라의 요소중에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것은 하나님나라의 씨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씨가 언악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알아야 한다.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식솔 70인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표현한다.(출1:7)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하나님나라의 씨가 애굽의 노에상태로 부터 해방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바로의 종으로 살면서 하나님나라의 씨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는 주장은 족장언약을 통해서 형성된 법적이고 역사적인 권리였다.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로운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자의 오해와 같이 탈출과 해방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 공동체 형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최종목적은 그 공동체 자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시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를 긍극적으로 지향한다. 그러므로 탈출과 해방은 자유를 얻는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공적인 관계속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언약의 축제는 시작되었다.(출19장) 신랑되신 하나님은 아주 어린 신부인 이스라엘을 이미 시내산에세 기다라고 있었다. 어린 신부인 이스라엘은 중매자 인 모세의 인도하에 우여곡절끝에 축제의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존귀하고 보배로은 백성이란 타이틀을 얻기 원하는지 또 그런 백성다운 권위있고 차원높은 삶을 살 것인지를 물어보셨다. 백성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하였고 드디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대면이 이어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낮추어 보여주시는 최초의 역사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은 위대하신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는 최고의 긴장되고 두려운 순간울 경험하였다. 이 공적인 만남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원리인 십계명과 구체적인 법인 시내산 언약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 두가지 법적 문서가 하나가 되어 소위 언약의 책(seper ha berith)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모든 법적인 요소들이 주어졌으므로 언약 체결 예식을 치루는 번제와 화목제가 드려졌다. 이 제사는 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양 당사자 모두의 서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번제는 언약의 양 당사자의 서로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그리고 화목제는 양 당사자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때 제물에서 나온 피를 언약의 양 당사자에게 뿌리는 예식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언약을 생명을 건 심각한 언약임을 의미한다. 언약체결 예식의 앞 뒤로 언약의 책을 낭독한 것은 언약에서 법적인 요소가 매우 중요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언약체결의 공식적 절차가 끝난 후에 마지막으로 언약 체결을 축하하는 피로연이 베풀어진다.
출애굽의 사건은 출애굽기의 주제가 아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출애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기 위한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시내산 언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두려우신 임재에 주목하여 이를 하나님의 나타남 즉 神顯(theo-phany)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맺은 언약관계속에서 이해한다면 신현은 독립주제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주제인 이스라엘의 나타남, 즉 人顯(anthro-phany)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 나타남은 언약당사자의 공적인 만남(official meeting between the two covenant partners)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관련하여 성경학의 난제가 있는데 예를 들면 신약의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긴장관계,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속에 나타난 복음과 율법의 이원론, 로마교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잘못된 일원론, 그리고 신구약간의 피상적인 일원론과 이원론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율법과 언약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면 완벽히 해결할 수 있다. 모든 관계의 법들은 안격 당사자간의 공적인 관계에서 생겨난다. 즉 법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법은 그 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최종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게를 위하여 봉사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는 힘은 법 자체에나 법을 지키는 댓가나 법을 어기는 형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 당사자가 은혜와 진실함(chesed we-emet)으로 맺은 언약(berith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segullah)로 삼으셨고 이스라엘은 이 관계의 깊이를 깨닫고 그 은혜와 사랑(chesed)때문에 언약관계의 법에 진실되게(emet)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도 중요하다. 이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규범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존귀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를 향하여 자비를 배풀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존귀한 백성속의 하나로 인정하셨다면 다른 이스라엘 사람도 역시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도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이신지 말과 행동으로 계시하셨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lation)인 '여호와'는 구약 성경 전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자계시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자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자체와 근본적으로 관련된 표현임이 분명하다. '여호와'라는 자계시는 시내산 언약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계시로서 족장들에게 주어진 자계시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에 비하여 철학적이며 원리적이고 동시에 철저히 역사적인 근본적 자계시이다. 이제 언약을 맺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에게 존재의 근원이시며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원동력이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여호와' 란 하나님의 새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또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행하여 갖는 불타는 열심을 가지셨음을 나타낸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행동과 말로 계시하셨지만 그 뜻의 깊이를 인간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 역사가 흐른 뒤에야 바로서 알 수 있는 때가 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원리적인 법과 구체적인 세부법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깊은 묵상과 연구를 거쳐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언약을 맺은 후에 만든 장막의 실제적이고 법적인 이름은 증거막이다. 이 장막의 이름이 증거막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여기서 만나고 같이 살아야 하며 언약관계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풀려야 한다. 언약관계의 유지 발전 회복이 모두 증거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제도가 바로 제사제도였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이 전사이신 하나님이시다(God as a Warrior). 하나님의 이 모습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서 기원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열심이 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전쟁을 벌이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시며 동시에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대하여서도 전쟁을 벌이신다. 언약에 열심이신 하나님은 언약공동체 밖을 향하여 그리고 동시에 언약공동체 안을 향하여 심판의 팔을 벌리실 것이다.
6장 출애굽기 1-18장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03:59
6장 출애굽기 1-18장의 신학과 메시지
<창세기와의 관련성>
창세기에서 애굽에 내려간 족장시대의 하나님나라 사람들의 숫자(창46:27)였던 70인이 출애굽기의 초반에서 한번 더 확인 되고 있는데(출 1:5), 이것은 창세기에서 70명으로 마감된 족장시대의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이제 출애굽기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이제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으로서의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는 오직 하나님나라의 씨에 대한 약속이 주된 관심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씨가 가나안의 기근을 피하여 그곳에서 숫자가 충만하고 편만하게 되기 위한 것 뿐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전제로 애굽에 들어간 것이다. 출애굽은 애굽이라는 외적인 세상성으로 부터의 탈출인 동시에 이 세상의 삶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세상성으로 부터의 탈출이다
<하나님나라의 지도자 ‘모세’ >
이스라엘의 애굽 생활은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는데 필요한 과정이었지만 이제 출애굽을 해야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으로 대표되는 세상성을 끊어 버리는 고통이 따라야 했다. 이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도자를 일찍부터 역사의 과정속에 준비시키고 때가 되매 세우셨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된 지도자라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앞에 서는 것은,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서는 것이었다. 이 진리를 모세가 깨닫는 데는 쓰라린 경험과 좌절의 기나긴 세월들이 필요하였다. 이런 경험을 가진 모세였으므로 정작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을 때 그는 다섯번이나 소극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소명을 거부하며 네가지 질문을 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대답하시며 설득하신다. 모세의 첫 번 질문은 자신이 과연 지도자로 세워졌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당신이 모세와 함께 하시며 그를 인도하여 이 산에서의 ‘섬김(abad)' 즉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게 될 것이하고 대답하신다.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누구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랴 할 것인가? 라는 모세의 두번 째 질문에 대하여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alation)를 주셨는데 그것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특이한 이름을 하나님 나라인 이스리엘에게 주신 것이다. 이 현재와 미래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과거의 하나님의 이름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결합이 되었고 이 결합된 이름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기억될 하나님의 이름이며 표호로 선포되었다(출3:15). 이렇게 하나님의 자계시의 완전함이 드러남으로써 시간 세계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완성될 근본적인 준비가 마련되었다. 세번째 모세의 질문은 자기를 지도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고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이적의 표징을 보여 주셨다. 모세의 네번째 의문은 자기에게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인 구변이 없다는 점이었고 이 질문에도 하나님은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대답하여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만족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심중에는 근본적인 불순종과 완고함이 있었고 하나님은 진노하심으로 모세의 이러한 마음을 돌이키셨다. 그러나 지도자의 마음속에 지도자 의식이 한순간에 완성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지도자 의식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고 역사가 진행 될수록 자라났으며 절망과 회복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완전해져갔다. 모든 이적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힘있고 확신에 찬 태도를 취하였고 지도자 의식은 명확하게 성장하였다. (출14:13-14) 이러한 모세의 태도는 그의 영적 지도력의 발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였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지도력의 실체는 지도자 자신의 영적능력의 성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지도자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믿느냐에 달린 것임을 보게된다. 출애굽에서 보이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여,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구하는 기초가 되었고 후대의 시편과 예언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엄청난 경험을 한 이스라엘 이후의 역사는 믿음의 역사로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런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면서 모세는 역사진행의 새로운 패턴을 학습했다. 그것은 자신이 미리 예상해서 하나님께 그 대책을 간구하거나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시는 역사진행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지도력이었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현실을 통해서, 백성들의 타락의 근본원인이 자신의 지도력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범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새로운 차원의 지도자 의식을 배우게 되었다(출16:8). 지도자로서의 이런 성장 이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중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이스라엘’ >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준비는 백성의 숫자가 다 마련되었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개개인의 내면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한 관건이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때를 작정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받는 학정과 그 고통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족장들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며 장차 놀라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언약을 이제 이루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족장들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새로운 자계시로 주신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알고, 이스라엘이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을 가진 구별된 백성으로 행동하기까지는 역사속에서 많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바로에게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현시적으로 나타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차원을 끌어 올리시려 하였다. 바로와 그 신하들의 마음을 하나님게서 강팍하게 하신 의도는 이스라엘을 세상인 애굽과 점차적으로, 결국에는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과는 더 깊고 완전한 관계를 이루어 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동시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데서 하나님의 행동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애굽과 세상의 심판은 동시에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을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예식인 유월절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출애굽의 과정과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의 불순종한 태도는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맺고 있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런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정함이 없으며 하나님을 불신하였으며 그 약속에 대한 인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스라엘 속에 구속역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준비안된 백성들과 함께 해서라도 당신의 역사를 이루려고 끝까지 인내하셨다.
<하나님나라의 대적 ‘바로왕’ >
하나님나라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는 의외로 하나님 나라의 대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민족으로 이루어질 이스라엘에게 이런 기능을 한 대적이 애굽의 바로왕이었다. 출애굽 역사에서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단순하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대적까지 간섭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지 않토록 하신 점이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치적인 위협이 되므로 이것을 막으려고 하였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보내라고 요구할 때 바로의 이스라엘 박해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의 강팍함은 열 재앙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본격적인 구속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역사에서 사건을 최후로 조정하시는 분은 역사의 뒤편에 계신 지존하신 하나님이신 셈이다. 그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깨었으며 드디어는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재난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재난이 바로 애굽의 멸망이라는 사실을 애굽사람들은 시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이스라엘을 홍해까지 추격하였고 마지막 애굽의 파국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애굽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굽사람들을 치는도다’(출14:25)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구원하시고 건설하시는 것과 세상나라를 심판하시고 파멸에 이르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같은 사실임을 보여준다.
<언약이 있기전에 주어진 법과 제도>
약속과 언약은 분명히 다르다. 약속은 한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에게 어떤 것을 하겠다는 일반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언약(berith)은 단순한 약속을 넘어서는 법적이고 공적인 것이고 두 당사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을 언약은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새로운 차원 가운데 진행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언약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내용, 즉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이행하여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법정신과 법철학은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고대근동에서는 왕이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면 효력을 발휘하고 백성은 거기에 일방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이 경우 법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진 법은 그 자체로 최종의 목적과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즉 법은 언약의 하위개념이고 종속개념이며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법을 언약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기 전 까지의 짧은 기간이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즉 법적인 삶을 연습하고 살아야 했다. 이 삶을 위하여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는 그 밤을 기점으로 하여 유월절 예식을 위한 법도를 배워야 했고(출12:40-42) ‘마라’라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인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스라엘을 단련하셨다(출15:25)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거두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안식일 법을 미리 주셨고 그들이 그것을 지키기를 원하셨다.(출16:21-30)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기 전이라도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법과 행정제도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충만한 숫자의 출애굽한 백성이 준비되었고 또 그 백성의 구체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한 법들과 행정제도들이 마련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시내산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7장 출애굽기 19-24장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05:20
7장 출애굽기 19-24장의 신학과 메시지
<출애굽의 목적인 시내산 언약>
츨애굽의 목적은 출애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출3:12에서 약속하신 대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다. 이 언약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때 출애굽기를 단순히 민중이 현실의 억압에서 해방받는 역사를 기술한 책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 실제적인 사례가 출애굽기가 자신들의 신학의 완전한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해석하여 1970년대에 열풍을 일으켰던 민중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들이었다. 그러나 관건은 ‘어디로 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누구를 향한 해방’이었다. 즉 애굽에서의 해방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해방이라는 목적이 더 중요하였다. 入애굽은 出애굽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출애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는 정확한 명칭으로 시내산 言約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
㉠ 언약 당사자들의 관계성(출19:3-6)
고대의 공적인 문서들은 대부분 언약 당사자의 관계와 역사성을 천명하는 서언(historical prologue)으로 시작된다. 그 이유는 현재 맺으려는 공적인 관계의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시내산 언약의 서언으로서 출19:3-4의 ‘야곱족속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을 주도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언약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종주권조약(suzerainity treaty)에 흔히 나오는 용어로 우월한 언약 당사자가 약한 언약 당사자를 향하여 사용하는 말로서 보배로운 존재(segullah)라는 단어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이 단어를 보충 설명해주는 표현이 ‘제사장 나라’ 혹은 ‘구별된 백성’인데, 이 의미는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로서 선택된 구분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언약 당사자간의 법적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주례자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는 나의 보배 백성’이라고 선포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 이시라고 선언하였다(이 말은 생략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십계명 1계명의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라는 표현에서 이미 그 관계가 충분히 표현된 것이다)
㉡ 모세의 중재와 언약당사자의 만남(19:7-8, 19:9-25)
모세가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세는 언약의 중재자로서 언약 당사자들 사이에 언약의 조건들을 전달하고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출19:5-8, 출20:20-21, 출24:1,12) 그러나 언약은 중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언약 당사자들이 대면하여야 한다.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 당사자들의 대면에 대한 보고가 출19:10-25이다. 이 본문은 오랫동안 학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타나심(神顯)으로만 해석되었으나 장엄하고 탁월한 신현에 비해 보잘것 없지만 이스라엘의 나아감(人顯)도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출19:17) 그러므로 이 장면은 단순한 신현이 아니라 ‘언약당사자들의 만남’ 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만남의 사건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경험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놀라운 것으로서 이스라엘 역사에 늘 회상되며 시편과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표현되는 주제가 되었다. 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약적인 만남의 하나님을 회상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이스라엘의 범죄하여 언약을 깨뜨릴 때 이스라엘이 경험한 두려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언약적 저주가 임하게 되며, 반대로 언약에 진실한 이스라엘이 위태로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하여 엄위롭게 임재하실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선지서와 시편에 언약적인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십계명의 해석에도 영향을 끼친다. 십계명을 위에서 권위적으로 내려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법으로 해석하는 배경에는 출19:10-25을 단순한 산현으로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상응된 행동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나아감을 생각한다면 이 십계명은 단순히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는 일방적인 법이 아니라 언약을 맺는 당사자간의 언약의 조건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 언약의 조건(Covenant Law)- 출20장, 출21-23장
현대의 법 개념과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의 법 개념도 위에서 주어진 것이고 밑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며,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는 신과 인간이 맺은 언약에 따른 법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독특한 법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법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법을 볼 때 법 자체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은혜의 언약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언약의 당사자들이 대면하여 만나고 나서 결정할 사항은 언약의 조건들이다. 그런데 출 19:10-25을 신현으로만 해석하는 견해의 결정적 약점은, 이 본문이 이어서 나오는 십계명과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언약 당사자의 만남으로 해석할 때 십계명은 언약당사자들이 대면하여 만나고(출19:10-25)나서 결정한 언약의 조건들이며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적인 삶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지켜야 할 언약적인 조건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앞서 출19:4에 표현된 ‘독수리 날개로 업어’라는 표현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유일한 언약의 대상자로서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로 역사를 통하여 인도하실 것이며, 또 19:5의 ‘보배로운 존재’로 이스라엘을 삼으신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누리는 절대적인 권리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종주권 언약(suzerainity treaty)에서 약한 당사자가 우월한 당사자의 요구대로 행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한편, 우월한 당사자는 약한 당사자에게 절대적인 보호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적 의무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언약적 관계규정에서 이미 충분히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언약조건으로서의 십계명은 언약당사자들이 직접 만났을 때 주어졌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서있는 것이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나머지 세부 언약법은 모세를 통하여 듣기를 청원하였고(출20:18-19) 이후에 주어지는 언약의 세부법은(출21-23장) 모세가 하나님께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어진 언약법인데 이것은 조약을 맺을 때 원칙적인 사항들만 당사자들이 정하고 나머지 세부사항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고대와 현대의 외교적 관습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출24:7의 언약의 책(한글 번역-언약서)은 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출21-23장의 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근거도 없이 해석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20장의 십계명과 21-24장의 법의 밀접한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본대로 20장은 언약법, 21-23장은 세부법이라는 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언약의 책이라는 명칭은 20-23장 전체 언약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즉, 20-23장 전체는 언약의 조건, 규범들을 명시한 언약 문서로 보아야 한다.
㉣ 언약예식(출24:3-8, 출24:9-11)
이스라엘이 언약의 조건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들었고 이어서 나오는 것이 출24:3-11에 나오는 공적예식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유사한 예식이 두 번이나 나온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학자들은 무관한 다른 문서의 편집이나 혹은 같은 내용의 두 다른 전승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예식은 내용과 형식에서 명확하게 구분되나 서로 연관이 있는 예식으로서 전자(출24:3-8)는 공적인 관계가 수립되는 언약 비준예식이고 후자(출24:9-11)는 언약관계가 합법적으로 수립된 이후에 가지는 언약 축하예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 속에 있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1.언약의 한 당사자인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출24:4)
2.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개의 돌기둥(출24:4)
3.언약제사의 두 구성요소인 번제와 화목제(출24:5)
4.제단과 돌기둥에 반씩 뿌려진 생명을 담보하는 서약을 상징하는 피(출24:6,8))
5.언약의 공적문서로서의 언약의 책(출24:7)
6.거듭 확인된, 언약에 참여함에 대한 백성들의 동의 내지 승인(출24:3, 7)
이런 요소들은 고대 근동에서 행해진 공적인 관계형성을 위한 비준예식에서 필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언약에 진실할 때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적)축복이 임할 것이고 언약을 깨어 버릴 때 이스라엘에게 (언약적)저주가 임할 것이다. 모압언약에 비해서 시내산언약에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하나님과 처음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시되게 된다. 엄숙한 공적관계 형성의 예식이 지나가면 형성된 관계를 축하하는 기쁨의 시간이 찾아오는데 이것은 보통 샬롬의 상태로 표시되는 먹고 마시는 시간이다.(출24:11)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이 완성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축제를 즐기는 것이 허용되었다. 첫 만남은 긴장되고 위험한 것이었으나 둘째 만남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것이다. 이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상태를 지속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막이다
<성막(출25-31장, 34-40장)>
성막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며 동시에 언약당사자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회막이었다. 언약체결 이후에 바로 성막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막에 대한 기록을 앞장(19-24장)과는 무관한 제사장 문서라고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하면 이제부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고 이 만남은 지속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자마자 즉시 모세를 불러서 성막을 준비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신 것은 언약을 유지할 수단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날 공간적 장소를 마련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제 언약관계가 시작되었으므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처를 마련되어야 했다. 성막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십계명이 새겨진 증거판이 들어있는 언약궤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번제단에서 출발하여 물두멍을 거쳐서 성소로 들어가며 성소안에서 진설병과 등대 그리고 향단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리고 언약궤가 놓여 있는 지성소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성막에 대한 모든 구성은 레위기에서 민수기 10장까지 묘사된 언약유지와 발전을 위한 모든 세부 규범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
<언약의 파기와 언약의 갱신(출32-34장)>
그러나 인간은 언약을 맺은 시작부터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고 마는데 그것이 32장의 황금송아지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 다른 신과 언약을 맺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역사상의 모든 현실세대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라고 볼 수 있다. 언약의 파기는 바로 언약적인 저주를 의미하고 그것은 생명을 지불해야 하는 심판으로 결론이 났다. 심판의 도구는 언약에 열심인 레위인들 이었고, 그들은 빠르게 죄악에 전염되어 가는 언약공동체를 살리기 위하여 방자한 자들을 죽였다. 한편 이 범죄한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필사적 중보기도로(출32:30-35, 출33:12-16)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새롭게 하셨고 특기할 법들을 다시 주셨으며 성막이 조만간 식양대로 다 만들어질 것이고(출35-40), 이어서 언약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성막 안에서 행해질 모든 제사규례와 규범들이 레위기에서 주어질 것이었다.
8장 출애굽기 25-31장, 35-40장의 신학과 메시지
2016-01-23 18:07:46
8장 출애굽기 25-31장, 35-40장의 신학과 메시지
<서론적 고찰>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깊고도 다양하게 형상화 된 것이 증거막(성막 혹은 회막)인데 그 유례없는 복잡성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의 전통 역시 다양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가지 전통적 해석은 19세기 후반부터 기승을 부린 자유주의적인 해석과 유대인들의 해석이다. 자유주의적 전통은 증거막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의적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며 심지어는 이것을 신약시대의 바리새 종교의 근원으로 간주하여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종교가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였으므로, 증거막과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의적 행동을 법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언약적인 것으로 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의 형상화인 증거막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저 한다. 장막안의 모든 물건들에 일관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증거라는 말이다. 증거막안에 증거궤가 있고 그안에 증거판이 있다. 그러므로 이 장막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표현은 증거막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근동의 조약에도 많이 표현되는 증거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대하여 증거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막의 본질을 아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성막은 단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막’이거나 막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을 위한 ‘회막’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거하며 나아가 그 언약을 유지, 발전시키거나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증거막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 안의 내용물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증거막안의 지성소는 언약의 한 당사자인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성소는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은 그 방의 내용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성소의 유일한 물건인 증거궤와 증거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법을 나타내며 성소에 있는 진설병상, 등대, 향단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서 드려야 하는 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방은 언약 당사자들인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최초의 만남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 진 것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증거막은 언약당사자들이 만나는 장소이며 여기서 깨어진 언약관계가 회복되며 정상적인 언약관계가 더 깊이 발전되기도 한다. 출33:7-11에는 회막이란 말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증거막이 완성되기 전에 여호와를 자원해서 찾는 자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임시변통의 막으로서 진밖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증거막이 완성되고 회막이 없어진 이후에도 회막이란 말이 나오는데(출40장), 이것은 회막이 계속 존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증거막을 증거막, 회막 혹은 성막으로 번갈아 가며 지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막의 내전의 내용>
이 증거막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드는 것이었다. 이 증거막은 언약에 대하여 증거하는 장막이므로 언약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쌍방의 언약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식양에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 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헌물을 드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전은 두개의 방인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진다. 내전의 첫 번째 방은 지성소인데 이 안에 있는 증거궤의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같은 증거막 안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장소인 번제단과 대응한다. 증거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임재하는 장소이며, 번제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출발점이다. 증거궤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출25:22)이란 표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며 언약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이 이제 동일한 말씀의 권위로 언약을 실행하시며 유지하신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근본적인 속죄를 이루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 근본적인 속죄위에 이스라엘의 헌신이 기초하고 있다. 내전의 두 번 째 방인 성소는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다섯가지 제사를 드려 자기의 죄를 해결한 정결한 상태에서 여기에 들어와 하나님께 참된 헌신과 봉사를 드리는 장소이다. 이것은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지성소에 임재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대응한다. 성소안의 진설병은 특이하게 얼굴의 떡(lechem panim)으로 표현된 12개의 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언약공동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을 떡과 포도주로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진설병과 포도주를 비추는 등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명을 상징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나와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완전한 생명이다. 이 생명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이 땅위에 완전히 나타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진력해야 할 것을 나타낸다. 성소안에서 향단의 위치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바로 다음에 놓여 있으며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이 향단에 향을 피우고 그것을 앞세워 들어간다.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에서 속죄소(증거궤)위에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나타나듯이 향단의 향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접근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가리우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올 때 내전 앞의 물두멍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내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성막의 외전의 내용>
외전, 곧 증거막의 뜰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증거막의 뜰은 번제단과 물두멍을 포함하는 하나의 공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개인적으로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외전 뜰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번제단(alter of burnt offering)은 이스라엘이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깨뜨렸을 경우에 그것을 회복하는 제사를 드릴 때에 사용되었고, 유지되고 있는 언약관계를 발전시키는 제사(화목제, 서원제, 감사제)도 여기에서 드려졌다. 여기서 내전쪽으로 향하여 가면 물두멍이 있는데 제사장이 내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 속의 물을 사용하여 자신을 제의적으로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증거막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과 그 행동원칙>
대제사장의 복장에 관한 규례의 목적은, 언약관계에서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제사장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나타내는 것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암은 증거막의 제조 책임자로서 일하였는데, 이들은 성령이 창조시에 그러하였듯이 이 성막을 만드는데 있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하였다. 새 언약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기구와 조직도 이러한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이다. 이러한 증거막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원칙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는 것이었다. 증거막은 공간의 거룩을 보증하고 안식일은 시간의 거룩을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증거막을 만들기 위하여 안식일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더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새언약에서도 안식은 모든 것의 전제이다(마11:28-30) 우리의 짐을 내려놓는 것이 첫 번째 안식이라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두 번째 안식이다.
<결론적 고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보이신 행동의 원리는 언약의 증거막을 만드실 때에 보이신 행동의 원리와 서로 상응한다. 그 이유는 창조에 있어서나 언약수립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뜻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이후에 곧 실패한 하나님의 나라가 (창1-11장) 이제 언약의 증거막 형성이라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러나 동일한 원리로 이 땅위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창조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9장 출애굽기 32장 1-6절의 주석적 신학적 연구
2016-01-23 18:10:18
9장 출애굽기 32장 1-6절의 주석적 신학적 연구
<들어가는 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받는 도전은 두가지 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있는 테러와 그것의 원인이 되고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문제인데, 사실 이것은 셰계의 문제라기 보다는 1400년동안 풀지 못하고 지속되어온 기독교의 문제이다. 또 하나는 전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세속주의이다. 공산주의라는 물질주의에 대하여 또 다른 물질주의인 자본주의의 승리이후 이 승리한 물질주의에 기초하는 세속주의는 세계 전역을 통하여 심지어 이슬람 사회에서 조차 가장 어려운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이 세속주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기독교에 대한 이론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기독교의 기초와 근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일이다. 이제 기독교가 새로운 자체 개혁을 통해서 현대적 도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이전부터 믿음의 조상들이 가르쳐 준 비법이었다. 그런데 개혁은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자체가 말하는 개혁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의 기원이 되는 오경속에서 대표적인 개혁의 역사가 출32장이며 여기에 나타난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과 언약을 새로 맺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출32-34장의 통일성>
우리는 출32-34장 본문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 구조를 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 이 세 책의 통일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세 책의 근본적 구조는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숫자적으로 충만해지고(출1장) 노예된 상태에서 탈출하여(출3-15장)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후(출19-24장) 언약당사자들이 같이 거할 언약의 증거막을 만들며(출25-31장, 35-40장) 언약을 회복, 유지, 발전시킬 제사제도를 만들고(레위기) 가나안 땅 앞까지의 여정을 보여준다.(민수기) 이런 거대한 신학적 구조속에서 출32-34장의 모든 요소들이 명확하게 자기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본문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출32장의 언약파기(covenant braking)에 대해 출34장의 언약회복(covenent recovering)의 조처가 주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구조속에서 출32-34장 전체가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출19-24장의 언약체결 이후 출25-31장은 증거막 건립의 규례를 말하고 있고, 갑자기 출32-34장의 충격적인 언약파기 및 회복의 사건이 벌어지며 이후 출35-40장은 증거막을 실제로 건조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출24:3-8의 언약체결 예식에서 언약의 피를 언약의 양 당사자인 하나님(제단)과 백성들에게 직접 뿌리는 것은 이 언약을 깨는 경우에는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엄숙한 결의를 의미하며 그러므로 출32-34장에 나타나는 심판행위는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 언약적 저주의 실행이 되는 셈이다. 한편 출35-40장에 묘사되는 증거막 건조는 레위기1-25장의 제사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으며 레26장에 나타나는 축복과 저주의 목록은 츨32-34장에서 겪었던 언약파기의 충격적인 경험을 반영하는 언약적 축복과 저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2장 1-6절의 주석>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긴 사건은 제2계명을 명백히 어긴 것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출32:4)는 선언은 언약법의 기초를 형성하는, 출20:2의 선언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아주 익숙한 표현이다. 이 선언 속에는 이중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것과, 둘째는 이 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결국 출32:4의 선언은 바로 이 황금 송아지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로써 여호와 하나님은 황금 송아지에게 자신이 이루신 자비의 출애굽 역사를 빼앗기고 나아가 황금 송아지에게 이스라엘의 언약의 당사자의 자리를 빼앗긴 셈이된 것이다. 이 우상에 대해 아론이 취한 공적인 조처는 첫째 우상의 공적인 이름을 여호와로 불렀고 이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을 제거하고 황금 송아지로 완전히 대체한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어떤 것을 체결할 절기를 만들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축제가 아니고 우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 행사를 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명백히 출24:3-8의 언약체결 예식을 모방한 것이다. 셋째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인데(출32:6) 이것은 공적관계를 맺기 위해 언약의 당사자들끼리 드리던 제사이다. 그리고 넷째는 먹고 마시고 뛰놀은 것(출32:6)인데 이것 역시 출24:9-11의 언약체결 피로연을 모방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이들이 하는 행위가 단순한 우상숭배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언약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즉 언약의 본래 대상자인 여호와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약의 파트너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체결하려고 한 것이다.
<32장 1-6절의 총체적인 신학적 의미>
32장 1-6절의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출19-24장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체결 과정과 황금송아지와의 언약체결의 차이를 주석하여 보야야 한다
㉠ 언약적 쌍방관계의 정의(출19:3-8)
시내산 언약체결에서는 명확하게 쌍방관계가 정의되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백성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선포되었음에 비해 황금 송아지와 언약 체결에서는 황금 송아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 언약 당사자의 대면(출19:16-19a)
시내산 언약에서와 마찬가지로 황금 송아지와 백성간의 공적인 대면의 모양이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체인데 반해 항금 송아지는 의인화된 물체에 불과하였다.그러므로 여기서는 언약 당사자간의 인격체로서의 대면이 없다. 거짓 종교의 비인격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 언약법의 직접선포와 간접수여(출20:1-17, 21-23장)
이스라엘 백성을 직접 대면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언약법을 수여하셨고 백성의 요청에 의해 세부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셨다. 그러나 황금 송아지의 경우는 언약법 수여가 없었다. 황금 송아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법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거짓 종교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언약체결 예식(출24:3-8)
언약법이 수여되고 난 다음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언약의 피를 쌍방에 뿌리고 언약서를 낭독하며 언약체결 예식을 행하였다. 황금 송아지의 언약도 비슷한 예식이 있지만 피뿌림의 예식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한쪽의 언약 당사자인 황금 송아지가 언약에 목슴을 걸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진정한 효력이 없는 것이다.
㉤ 언약체결 축하 피로연(출24:9-11)
예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였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영적인 긴장이 없어지고 공적으로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황금 송아지의 경우도 백성들이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피로연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출32:1-6의 사건이 단순히 우상을 숭배함으로 언약을 깨는 사건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방금 체결한 여호와와의 언약관계를 무효화 시키고, 여호와라는 이름과 그의 역사를 도적질하여 만들어낸 황금 송아지와 언약을 체결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법적인 언약파기를, 황금 송아지와는 새로운 언약체결이라는 중대한 죄를 지은 것이다. 그 결과 이 범죄는 다른 일반 범죄와 차원을 달리하는 심각한 처벌을 초래하게 되었다. 다른 일반 범죄들의 경우는 죄를 지은 당사자만 죽게 되었으나 이 사건의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전멸시키시고 모세를 통하여 새롭게 시작하시려는 뜻을 정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언약파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피뿌림 예식의 실제적인 적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이런 해석은 출32-34장 전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준다. 이렇게 파기된 언약은 반드시 회복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34장의 사건을 언약갱신(covenant renewal)이 아니라 언약회복(covenant recovering)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언약 갱신이 아니라 회복이므로 새로운 예식은 불필요 하였고 단지 그 속의 법적, 불변적 요소(legal, invariable element)를 재삼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세의 중보자로서 역할이 부각되었으나 그것은 모세를 영웅화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세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전진을 위한 중보자라는 도구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일 뿐이다. 이어서 기록된 레위기의 26장은 이 때의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을 반영하여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목록을 나열하게 된다. 21세기의 전무후무한 도전에 직면한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자체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개혁의 가장 첨예한 요소는 결국 신론의 정립이다. 그러나 신론만으로 신학이 설 수 없고 인간론이 있어야 하는데, 신론과 인간론이 하나가 되는 현장이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개혁의 가장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출32-24장의 본문을 통해서 타락한 교회는 반드시 언약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도 있고 하나님의 사역도 있으나 실제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섬뜩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언약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될 때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의 자리를 어떤 우상이 차지하게 되며 영적 이스라엘은 이 우상과 언약을 맺고 살아가는 속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고대처럼 자연물로 우상을 만들지는 않으나 돈과 권력과 같은 삶의 실제, 혹은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로 우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우상을 만드는 행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참 신이신 여호와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대신에 이런 우상과 언약을 맺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이루고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진실한 언약관계를 맺고 산다면, 우리를 보배로 여기시는 그 하나님이 언약적 원리를 따라서 당신이 보여주셨던 세상을 뒤흔드는 능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우리로 하여금 능히 정복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도전을 능히 이기도록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