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역사- 김근주
예언과 역사[1강 예언자들의 시대]
2015-09-05 17:00:00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역사 안에 위치한다.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역사적 위기 가운데 등장했다. 평안할 때 예언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항상 문제가 있을 때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위기시에 보내시기 때문이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 8세기 문서 에언자들(혹은 고전 예언자들)은 앗수르 위기시에 등장했고 예레미야, 에스겔은 바빌론 위기시에 나타났으며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페르시아 포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이다. 주전8세기 이후에 문서 예언자들이; 대거 등장한 것은 모두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라는 열강들로 인한 위기 상황과 관련된다. 로마시대에 쓰여진 신약문서들로 로마 포로기라는 위기시에 등장했다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격동기인 주후1세기에 세례요한이나 예수와 바울도 예언자적 사역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언의 본질은 앞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예언은 무시간적인 교훈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다. 그러므로 예언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다. 예를들면 사도행전 11장 27절에서 아가보 선지자가 안디옥에 와서 에루살렘에 흉년을 들 것이라 예언했는데 안디옥 교회는 이 예언에 반응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하기로 결정했다. 미래의 흉년에 대한 예언에 예루살렘 교회 부조라는 현재적 반응을 한 것이다. 예언은 지금 역사 속에서 반응을 요구한다.
예언자들의 선포의 특징을 보면, 첫째로 예언자들은 무엇보다고 설교자였다. 둘째 예언자들에겐, 일정한 선포양식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양식이 "말씀 전달어구"(MESSENGER FORMULA)였다. 셋째는 고발과 비판 이후에 심판 선포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예언자의 고발과 비난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는 정형구가 나온 다음에 심판이 선포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언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전달만 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예언자의 분석과 평가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에언자의 이런 현실 인식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결합되어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에는 하나님의 직접적 말씀이 거의 없고 기도자의 말이 대부부이지만 우리가 시편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과 유사하다.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비난과 고발 대신에 예언자의 격려와 위로가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직접적 말씀으로서 구원이 선포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비난이나 고발이든 격려나 위로든.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은 예언자의 몫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구약 예언이 가진 이런 성격은 오늘날 정치, 역사 등 삶의 총체적 국면들이 종교와 분리된 현실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신학이 추상화 개인화며 신학이 역사와 분리된 성경 해석이 문제다. 특히 구약적 맥락에서 신약을 해석하지 않고 신약에서 무시간적 원리를 도출하여 거꾸로 구약을 해석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그런데 8세기에 이르러 문서예언자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폰 라드는 그 이유를 다음 3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바알신앙의 확산과 혼합으로 여호와 신앙이 쇠퇴했다. 넘치는 제의와 약속된 풍요를 특징으로 는 바알신앙은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둘째, 열강들의 등장으로 세계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였다. 앗수르를 비롯하여 바빌론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팔페스타인 지역은 격동기에 접어 들었다. 셋째, 종교로 부터 벗어난 세속국가가 츨현하였으며 세속 국가의 부강으로 경제적이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특히 여로보암2세 때는 경제적이루노 군사적으로 북왕국의 최전성기였다. 그래서 주전8세기 이전과는 달리 8세기 이후 예언에는 경제적 불평등에 문제가 부각되었다. 사실 예언자들의 선포는 새로운 얘기가 아니라 예전 부터 야훼께서 해오신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야훼신앙의 오랜 전통을 살려낸 것이고 그것이 지금도 보편타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예언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그것이 진보적이고 심지어는 전복적으로 들린 것은 다가올 영광을 날을 향한 에언의 진취성과 비타협성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언자들은 폰 라드가 지적한 대로 격변기의 시대를 살았고, 후대를 위하여 그 예언들이 기록되고 보존될 필요가 있었다.
예언과 역사[2강 예언자들의 일상과 소명]
2015-09-05 19:00:00
예언자들의 일상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기본적인 직책은 단순히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언(히브리어 "나비")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에는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가 되어 모세의 입을 대신하였다. 예언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대언하였고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대언하였는데 후자의 대언은 중보적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대언자로서 예언자의 대언은 하나님과 백성 모두를 향한 쌍방적 대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언은 예언자들의 일상적 직책이었다.
예언자들의 소명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의 소명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이 소명 기사를 보면 예언자들의 사역은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역의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의 사역 시기는 웃시아 왕이 죽던 시기 즉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이 등장하여 강력한 서진정책을 추진하여 세계질서가 앗수르를 중심으로 재편되던 때였다. 이사야는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만군의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현현 장면에서 이사야는 신비스런 경험을 하는데 이 만남에서 이사야가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자신의 죄인된을 자각하고 두려워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입술로 대표되는 자신의 전 존재가 부정함을 깨닫고 하나님 님의 현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때 이사야에게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이는 이사야가 하나님만이 죄사함의 권능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경험한 것이다. 이후에 이사야의 예언운동에서 제사제도를 공격하는 과격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죄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제사는 단지 은혜를 시각화하고 공식화한 제도일 뿐 사죄의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제사가 넘쳐나던 시대에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폭탄적인 선언이었을 것이다. 이사야의 소명 기사에는 아시야가 천상회의에 참관하던 중에 자신을 보내달라는 청원을 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소명이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이 아님을 암시한다. 이사야에게 나타는 이런 체험 기사는 주전 9-10세기에도 흔하게 있었는데 이사야의 체험의 목적은 그를 예언자로 파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사야의 소명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선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성들을 둔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회개하지 못하게 하라는 이상한 소명이었다. 그렇다면 이사야를 안 보내면 될 것 아닌가? 이사야의 소명은 일종의 역설이었다. 이사야의 소명은 당연히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지만 백성들이 이사야를 거부하고 무시할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이사야 사역이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닫히게 만든 것은 그의 전복적인 선포의 내용때문이다. 제의가 넘쳐다던 시대에 제사는 소용없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백성들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선포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종교권력자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6장에서 이사야의 소명기사가 나타나지 이전의 1-5장의 메시지가 바로 백성들이 거부하였던 이사야의 메시지였다. 그들은 이런 메시지는 하나님이 보낸 자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6장에 나타난 이사야의 체험 이야기는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가 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바울의 3층천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기능하였듯이 이사야의 신비체험도 그의 메시지를 위해 기능한 것이다.
아모스의 소명기사는 7장 10-11절에 나오는데 여로보암2세 당시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아모스의 예언을 듣고 그를 모반자라고 비판한다. 종교가 아니라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아마샤에게 아못스는 모반자로 보인 것이다. 그는 아모스에게 예언을 중단하라는 왕의 명령을 전하고 도망가라고 권유한다. 이는 도망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거라는 협박이다. 아모스의 대답을 보면 아마샤에게 예언자란 그저 먹고 살라고 예언하는 존재였다. 벧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소가 아니라 왕의 성소하고 하는 아마샤는 정치의 하수인이 된 종교 권력자였다. 아모스는 자신이 예언자가 아니면서 예언을 한다고 대답하는데 이는 자신이 제도권에 있는 직업적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과 자신의 예언의 정통성과 권위의 출처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예언과 역사[3강 예언자들과 성전]
성경신학/예언과 역사
2015-09-05 20:00:00
1. 성전은 구약종교의 핵심이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활동이 이루어졌고 제사제도도 성전 안에서만 기능을 하였다. 그런데 예레미야 7장 22-23절에 보면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번제나 희생에 대해 명하지 않았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 구절은 근거로 독일의 구약학자들은 광야시절에는 동물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제사제도는 포로기 이후에 확립되어 드려졌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아모스 5장 25절에 나타난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를 드렸느냐? 는 반문도 광야에서는 제사가 없었다는 증거본문으로 채택한다.
2. 제사제도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레위기가 현재의 형태를 잦춘 것은 포로기 이후인 것은 맞지만 거기에 나온 내용들이 이전에는 없던 것을 포로기 이후에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제사제도 자체는 대부분이 오래전 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성경 내적 외적 증거들이 무수히 있다. 그렇다면 제세된 본문들은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제사의 형식보다 제사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므로 순종이 제사의 본질이고 순종없는 제사는 무의미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제사뿐 아니라 성전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언급을 자주 한다. 그러나 에언자들이 성전과 제사 자체를 배척한 것은 아니다. 제의는 풍성하지만 그 안에 순종이 없음을 비판한 것이다.
3. 그렇다면 순종이란 무엇인가? 아모스 5장 21절에는 절기, 성회, 번제, 소제, 화목제, 노래가 다 필요없다고 일갈한 후에 24절에서 정의(justice)를 물같이 공의( righteousness)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선포한다. 5장 5절에서 아모스는 베델, 길갈, 브엘세바를 찾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종교적 성지순례를 비판한 것인 듯 하다. 아모스는 만들어 낸 종교,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 종교를 부정한다. 순종은 정성스런 예배가 아니다. 아모스는 5장 6절에서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한 후에 14절과 15절에서 여호와를 찾는 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버리는 것이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24절에서 성문의 정의가 없다면 성전 예배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아모스의 말에 따르면 일상에서 정의를 행하고 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일 예배도 헛되다는 것이다.
4.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으로 규정하면서(1장 10절)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헛된 제물을 거부하신다고 말한다.(1장 11-15절) 그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고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권면한다.(1장 16-17절) 이모스와 이사야의 공통점은 예배와 선행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며 일상의 정의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정의가 없는 제사는 우상숭배이며 그것은 단지 그들이 기뻐하므로 만든 것이고 종교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사야 1장 18절은 사죄의 은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정의를 행하고 살면 과거의 죄도 용서받을 것을 말한 것이다. 이사야는 1장 21절에서 정의와 공의가 없는 자들은 창기와 살인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5. 예레미야 7장 1-15절에는 성전에 대한 설교가 나오는데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3절)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4절) 그리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란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5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룰 압제하지 말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산들을 따르지 않는 것(6절)이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자기의 신에게 정성을 다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풍요하고 정성스런 예배를 추구하던 당시 백성들의 모습은 이런 우상 숭배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성전을 배척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성전과 제사의 본질이었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하나님을 체험했고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재건을 촉구하였다.
6. 정의로 대표되는 순종이 알맹이라면 제사나 예배는 형식이다. 내용을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형식은 반드시 팔요하다. 그러나 내용이 빠진 형식은 무의미하다. 정의와 순종이 없는 형식은 무의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역사는 형식은 풍요했지만 내용은 말라버린 경우를 자주 본다. 그 결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제사는 폐지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빼앗기고 포로 신세가 되었다. 본질이 사리지면 형식은 쓸모가 없다. 형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인데 담을 내용이 없는 그릇은 쓸모가 없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는 새 그릇은 신약의 교회였다. 새 본질은 새 형식을 필요로 한다. 새 본질을 옛 형식에 담을 수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면 술과 부대를 모두 버린다. 이제는 정의와 순종을 담을 새 틀이 필요하다. 기존 교회라는 헌 부대를 대체할 새 부대가 필요하다.
예언과 역사[4강 예언자들과 사회현실]
2015-09-05 21:00:00
4강 예언자들과 사회현실
열왕기상 21장 26절에는 엘리야가 아합을 정죄하는 말이 나온다. 엘리야는 아합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했다고 책망한다. 엘리아의 이런 책망의 배경에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있다. 나봇은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자기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는 일이라고 말했다.(왕상21:3) 나봇의 이 말은 아마도 레위기 25:23에 나오는 희년법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시대에도 희년법 규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희년법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포도원 농부인 나봇은 당시에 이미 유명무실해진 희년법을 고집함으로 아합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나봇은 돈을 벌 기회를 거부하고 거의 사문화된 희년법을 고집함으로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신앙을 경제현실에 적용함으로써 삶이 초토화된 것이다.
이방의 왕족 출신인 이세벨이 보기에 아합은 왕권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왕답지 못한 왕이었다. 이방의 왕권 개념으로 보면 아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합은 악한 자였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왕이었기에 여호와의 법을 노골적으로 대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세벨은 나봇을 모함하고 꼬투리를 잡아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요즘으로 하면 나봇은 국가 보안법을 범한 것같이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범죄자로 몰린 것이다. 왕의 요구를 거절한 것을 하나님을 모독한 일로 몰아간 것이다. 나봇을 재판하는 재판 역시 요식 행위만 갖춘 불의한 재판이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두 명의 거짓증인을 세우고 율법에 따라서 돌로 나봇을 쳐 죽었다. 그들은 율법을 따라서 나봇 사건을 처리한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가 나봇을 살리지 못하고 죽인 것이다. “오직 성경”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교회가 정의를 행하는 일에서 도망치는 경우가 많다. 나봇 사건에서도 보듯이 위선적 종교인들의 특징은 정의보다 종교의 규율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나봇뿐 아니라 나봇의 아들들도 죽임으로 포도원의 유업문제를 근절했는데 이는 아마도 아간 사건의 판례를 이용한 듯하다.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다”고 정죄하였다.(왕상21:19) 나봇을 모함한 모든 일은 이세벨이 꾸민 것이고 이에 가세한 불의한 장로들과 거짓 증언을 한 비류들이었지 아합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엘리야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아합이라고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나봇 사건에서 왕을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상규명 방식이다. 이것은 모든 불의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은 먼저 최고 권력자에게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엘리야는 아합을 정죄하면서 그가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했다고 책망한다.(왕상21:26)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일을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약한 농부의 땅을 빼앗은 불의한 일이 바로 우상 숭배처럼 하나님보시기에 가증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 현실 문제에 예언자가 개입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대기업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랜드 비정규직 사건 때도 교회는 팔짱만 끼고 있었다. 교회는 사회현실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봇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도 이런 일은 예언자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상21:26은 특별한 본문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두 가지 영역을 강조했는데 첫째가 열방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외교, 국방영역이고, 둘째가 경제문제나 빈부격차와 관련된 사회현실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이 두 영역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비판하였고 당시의 이스라엘 기득권들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부르그만이 말하듯이 왕권의식과 예언자의식이 충돌한 것이다. 오늘도 교회는 이런 일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아모스, 호세아, 마가를 비롯한 예언서들의 압도적인 주제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호세아 4장8절에는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들은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당시에도 제사장들의 관심사는 백성들의 죄악이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죄의식으로 통제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했다. 오늘도 종교 세력들은 성도들의 죄의식을 강조함으로 존립하고 있다. 당시의 종교 세력도 백성들을 종교에 묶으려고 했다. 부르그만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 용서를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죄의식에서 해방한 것은 위대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호세아6:1-3은 그럴듯한 신앙 언어를 말하지만 인애가 사라진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아모스도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아모스6:1-6은 북왕국의 불의한 사회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한다. 이 비판의 배경은 아모스5:4이다. 거기서 아모스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러면 살 것이라고 대 전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여호와를 찾는 구체적인 일이 바로 선을 행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고 말한다.(아모스5:14-15) 아모스는 성문에서 불의한 재판을 그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일상의 삶의 영역이 곧 예배임을 분명히 한다. 아모스6:1-6은 북왕국의 사치스런 생활을 묘사하면서 정작 정죄하는 것은 사치 그 자체가 아니라 동포인 요셉의 환란을 슬퍼하지 않는 것이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도 부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가난한 나사로를 돌아보지 않은 것을 정죄하고 있다. 예레미야34:8에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된 절박한 상황에서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서 계약을 맺고 종들을 해방시킨 일이 기록되었다. 예언자들이 노예 제도 자체를 정죄한 적도 없는데 34:15에서 예레미야는 이 일이 회개한 일이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노예해방은 오래가지 못하고 해방된 노예들을 다시 잡아서 종으로 삼는 일이 벌어진다. 34:21에는 바벨론이 잠시 떠나갔었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애굽의 바로 느고의 출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노예를 해방했을 때 바벨론이 포위를 풀고 잠시 떠나는 일이 있었고 이에 안심한 고관들과 백성들이 다시 노예를 잡아들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점을 지적하며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이 바벨론의 손에 멸망당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언과 역사[5강 예언자들의 갈등과 협력]
2015-09-05 21:14:11
5강 예언자들 간의 협력과 갈등
예언자들 간의 협력
동시대인물이더라도 예언자들은 상호간에 언급을 잘 안하는 것 같다. 예레미야가 26장에서 자신보다 100년 전 예언자였던 미가를 인용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비록 호세아를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처에서 호세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호세아는 예레미야의 신학적 아버지라고 할 만큼 두 예언자의 사고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스가랴서는 예언자가 이전 시대 예언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스가랴는 다리오 왕 제2년에 예언활동을 시작했는데 이때는 1차 포로귀환 후 18년이 지난 시간이며 제2성전이 완공되기 4년 전이다. 1:4에서 옛적 선지자들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예루살렘 멸망이전의 선지자들을 가르칠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는 옛적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1장3-4절)
스가랴 7장에서 언급한 다리오 왕 4년은 성전공사가 한창 성전공사 중인 때였다. 그런데 벧엘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자신들이 포로기 내내 매년 5월이면 금식했던 관습을 따라 계속 5월이면 금식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스가랴는 그 금식이 과연 여호와를 위한 것이었냐고 반문하였다. 이 말은 옛 선지자들을 통해 이른 말씀을 버리고 등을 돌리고 듣지 않으면서 무슨 금식 타령이냐는 반문일 것이다. (7장 5-7절) 그러면서 스가랴는 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포로기 이전의)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이 옛 선지자의 말 듣기를 싫어하고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가랴는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해서 외친 말씀을 7장 9-10절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은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하고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1장3절에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다소 추상적인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여호와께 돌아간다는 것은 금식을 비롯한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관계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으니 스가랴가 이런 말을 하던 다리오 왕4년은 성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을 것이고 포로귀환 공동체의 모든 관심이 성전건축에 있을 때였다. 그러나 스가랴의 선포주제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였다. 스가랴의 선포는 건물이 왜 필요한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성전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스가랴 7장이 이스라엘이 망해가던 시대를 회고한 것이라면 8장은 다시 포로에서 귀환한 현 시점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3절에는 놀랍게도 여호와가 시온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선언이 일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은혜를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8장에서는 한 번도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이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말만 나온다.
그런데 은혜를 베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후에 16-17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행할 일이 이러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은혜와 관계회복 이후에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 편에서 행해야 할 언약적 행동에 대한 요구이다. 그것은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며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7장8-9절에 나온 옛 선지자들의 요구와 골격은 같지만 포로기 이후의 상황에 맞춘 개정판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변하지 않는 골격은 이웃과의 관계이다.
예언자들 간의 갈등
예언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가장 많이 나타난 곳은 예레미야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평화를 얘기하던 시절에 예레미야는 재앙을 외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자기 목에 걸고(27장2절)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여 그의 멍에를 메라고 권하였다.(27장 11-12절) 그러나 선지자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단언하면서 예레미야와 정반대의 예언을 하였다. 두 명의 선지자가 정 반대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함으로써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신명기 18장에 나타난 고전적인 예언 분별법은 선지자가 말한 것에 증험이 있으며 예언이 성취되는 여부였다. 문제는 이 방법은 성취되기까지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참 예언자들 가운데 성취 안 된 예언을 한 적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예언이 충돌할 때는 사실 헷갈리게 되는데 28장 6절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반응은 아마도 그의 헷갈리는 모습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28장 7절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이르는 말을 잘 들으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냐는 말할 때 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는 말씀전달 어구를 사용하며 자신의 예언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지만 여기서 예레미야는 ‘내가 이르는 말’이라고 한 점이 특이하다. 하나냐의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박은 요지는 이전의 선지자들의 기본적인 예언이 모두 자신과 같은 재앙의 예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시는 목적은 잘못된 백성을 교정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자는 기본적으로 심판을 예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평화에 대한 예언은 신명기 18장의 고전적 예언 분별법을 따라서 그것이 성취되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냐는 다시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예언의 신적 권위를 주장하지만 예레미야는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간다.
예레미야 28장을 보면서 예언을 분별하는데 사려 깊은 관찰이 필요함을 배우게 된다. 예레미야는 자기 예언이 참되고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례 깊은 성찰을 통해서 예언자들의 예언의 본질은 심판과 재앙 예언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언이 충돌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함부로 내세우지 말고 합리적인 말로 결론을 내야 한다. 예레미야의 태도는 진리 앞에서 심사숙고하고 겸손한 태도와 합리적 관찰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예언과 역사[6강 예언자들과 열방 말씀]
2015-09-05 21:14:44
주전 8세기 문서 예언자들부터는 이스라엘 주변나라들에 대한 소위 열방말씀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는 1장3절부터 열방에 대한 말씀이 길게 이어지며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 2장6절에 이르러는 이스라엘의 죄를 길게 언급하는데 그 패턴은 앞서 열방말씀의 패턴과 달라진다. 이것은 앞선 열방말씀보다 아모스 예언의 주된 초점은 바로 이스라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대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논죄가 열방말씀의 패턴 안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도 본질적으로 열방과 다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모스 1장3절부터 등장하는 열방말씀은 다메섹 곧 아람의 죄로부터 시작하는데 아람의 죄는 길르앗(북왕국의 요단 동편지역) 거민을 지나치게 압박한 것이었다. 두번째는 불레셋의 죄에 대한 심판인데 그 죄는 전쟁포로를 인신매매한 것이다. 그 다음 두로의 죄는 형제의 계약을 배반한 죄인데 이는 아마도 북왕국과의 동맹관계에 대한 배신을 가리킬 것이다. 모압의 죄는 에돔에 대한 지나친 학대였다. 2장4절에는 유대의 죄가 나오고 2장6절에는 이스라엘의 죄가 나오는데 이들에 대한 논죄의 근거가 율법이란 점이 열방괴 다른 점이다.하나님의 백성이 열방과 다른 점은 그들의 삶의 질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그들이 본질적으로 열방과 다른 것을 없다.
열방들에 대한 정죄의 공통점은 전쟁상황하에서 그들이 저지른 무자비한 학살과 잔인함이었다. 이것은 인간생명 존중과 휴머니즘이 하나님의 중대한 관심사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패배자들이나 약자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를 말하는 성경의 본질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전쟁 중에 잔혹함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므로 아모스의 열방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가4장이 노래하는 전쟁 없는 세상이 오기까지는 아모스는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무자비한 살상을 방지하고 전쟁포로를 정당하게 대우하는 휴머니즘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열방말씀은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배제된 영역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언자들은 외교나 국제 관계도 하나님의 주권영역이고, 사회경제적인 현실도 하나님의 주권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바댜서에는 에돔의 교만에 대한 정죄가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아모스의 에돔 이야기를 확대한 것으로서 에돔을 열방의 대표로 내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에돔의 교만을 정죄하고 있지만 열방말씀의 청중이 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교만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열방말씀이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이사야13-23장, 예레미야46-51장, 에스겔25-35장의 핵심 메시지는 열방들의 교만이었고 하나님이 그 교만을 심판하신다는 것이었다. 열방의 압제로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 열방말씀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것은 열방말씀이 열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메시지이다.
오바댜서에는 1-9절에서 에돔의 교만에 대한 정죄가 나오고 10-14절에서는 교만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0절에서 지적한 야곱에게 행한 폭력(violence)이다. 오바댜는 에돔이 야곱에게 직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야곱의 고통을 방관하고 고난을 이용한 것이 바로 폭력을 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만국을 벌할 날에 에돔을 그 행한대로 심판하실 것이다.(15절) 오바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회복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20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날에 하나님은 열방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
예언과 역사[7강 예언자들과 종말에 대한 기대]
2015-09-05 21:15:12
7강 예언자와 종말
이사야 2장2-5에는 “말일에”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히브리어로는 그냥 “훗날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일이란 어구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곧 다가올 어떤 날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교회는 여기서 “말일”을 세상의 종말로 생각해서 이 본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나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예언은 이제 곧 다가올 미래였고 현재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미래였다. 구약에서 종말은 신약의 종말과 다르다. 신약의 종말이 말 그대로 세상이 끝나는 날이라면 구약의 종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언약이 회복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사실 신약의 종말도 구약의 종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신약을 구약과 분리하여 이해하면서 종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2장2절에 여호와의 전의 산은 곧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가리킬 것인데 이 시온으로 열방이 몰려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런데 시온이 열방의 중심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지 문자적이나 지리적 의미로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열방의 중심이며 시온인 것이다.
4절에는 여호와께서 재판하신다는 예언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는 그 날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다고 말하면서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진정한 평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이다. 미가서4장에도 이런 평화 예언이 등장한다. 부르그만이 역설한 예언자적 활성화가 바로 이런 것이다. 5절에는 이사야가 야곱족속에게 와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권유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앞의 2-4절의 내용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5절은 앞 절과 분리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2-4절의 내용에 대한 정당한 반응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까 2-4절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라면 5절은 그 나라를 기대하는 이스라엘이 마땅히 나타내야 할 정당한 반응에 대한 예언인 셈이다. 그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면서 그 나라를 마중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과 상통하는 의미일 것이다. 예언(prophecy)에는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fore-telling)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서 말하는 것(forth-telling)도 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이루어질 미래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우리가 지행하고 추구해야 할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예언이다. 그러므로 2장 2-4절이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대 한 fore-telling이라면 5절은 그 나라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forth-telling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1-39장까지는 주된 주제는 죄의 고발과 심판의 선포이다. 그런데 40장에서부터 위로하라는 선포가 등장하면서 40-55장에서는 죄의 고발이나 심판 선포가 없고 위로와 격려가 주로 나타난다. 이것은 아마도 이미 심판이 내린 것을 전제로 희망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향하여 위로와 격려가 선포된 듯하다. 그러니까 1-39장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이라면 40-55장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말기 즉, 가장 어둠이 깊고 절망적인 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 이해가 된다. 그런데 56장부터는 다시 죄에 대한 고발이 등장한다. 그리고 죄의 내용도 1-39장과 동일하게 주로 사회적인 문제로서 정의와 공의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1-39장과 다른 점은 56-66장에는 죄 고발은 있는데 심판의 위협은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예언은 포로귀환 공동체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기대의 상실이다. 돌아왔지만 돌아온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한 포로귀환 공동체의 현실이 이 예언의 배경으로 잘 맞아 떨어진다. 이런 점에서 56-66장은 말라기의 내용과 겹쳐진다. 그래서 56-66장은 40-55장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그날을 기대하면서 약속을 믿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마도 이것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일 것이다.
다니엘7장에는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이 나오는데 이 짐승들은 세상 나라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13-14절에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1-14절까지가 환상이고 15절부터 환상에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18절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22절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27절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들, 이런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짐승들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인자 같은 이’는 바로 성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짐승 같은 세상 나라들이 지금은 위세를 떨치지만 성도들이 궁극적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교회가 중시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화가 사람을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바로 성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때문이다. 궁극적 승리가 주어지는 때를 다니엘7장 25절은 한 때, 두 때와 반 때라고 묘사한다. 이 숫자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악인의 세력은 아무리 난리를 쳐도 결국 하나님의 완전수 7에 절반일 뿐이라는 것이고 그러니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이 환상에 대한 결론은 7장28절이다. 이 말을 들은 다니엘에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중심에 번민하고 얼굴빛이 변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일을 마음이 간직했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다니엘이 번민한 것은 약속된 미래와 지옥 같은 현실간의 큰 괴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는 것은 지독한 현실 가운데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광의 날을 보면서 동시에 지옥 같은 현실에 발 디디고 서야하는 예언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요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