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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부활(4/5)- 톰 라이트

메르시어 2023. 5. 30. 21:04

4부 부활절 이야기[13장 부활절 이야기들의 쟁점들]

N.T. 라이트/RSG

2015-09-17 01:28:0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4부 부활절 이야기

제13장 부활절 이야기들의 일반적인 쟁점들

 

1. 서론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쓰인 이야기들 중에가 가장 이상한 이야기들이다. 어떤 차원에서 그 이야기들은 단순하고 간략하고 분명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는 복잡하고 당혹스럽다. 다만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이 초대 교회의 지속적인 삶 속에서 거듭거듭 말하여진 후에 마침내 글로 쓰인 것은 분명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그들이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소망의 전조적인 성취이라고 믿었다는 전제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왜 초기 기독교의 소망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에 부활 신앙이 놓여 있는지, 왜 메시아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가 메시아 운동으로 발전했는지, 그리고 왜 제2성전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하나님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가 하나님나라 운동이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에 관하여 오늘날 수많은 비평학자들 가운데 출현한 합의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와는 상관없이 현재 형태의 복음서 기사들은 마가를 제외하고는 십자가 처형 후의 한 주간의 첫 날에 관한 묘사가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학, 석의, 정치에 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2. 부활 이야기들의 기원

 

(1) 자료들과 전승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부활 이야기들은 복음서 마다 매우 다르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구전 전승과 문서 전승들로 소급되는 이야기들에서 나온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 물론 문서나 구전 전승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런 전승들은 분명히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는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테오도레투스에 의해 언급되었지만 1886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되기 전에는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본문이 평가되기 시작한 이래로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본문이 정경 복음서들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이 본문은 원래의 형태에 있어서 정경 복음서의 본문들과 독립적이었던 좀 더 오래되고 덜 개작된 판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드로 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들은 그것이 정경의 자료에 의존하고 있고 정경보다 후대의 신학적 성찰을 보여주는 표지들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 복음서는 그 전체 또는 재구성된 부분에서 바울은 물론이고 정경 복음서들 이전 시기에 나왔다고 보여주는 그 어떤 설득력 있는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베드로 복음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지만 예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주된 기사들을 평가하는데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 부활 이야기의 양식

 

   복음서들에 대한 양식비평은 최근 수십 년 동안에는 별로 유행이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불트만 이래로 초기 양식비평 학자들이의 지나치게 그 작업을 몰아붙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한 발자국 물러서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양식비평을 폐지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의 가장 초기 제자들이 당연히 채택하였을 유대적인 이야기 양식들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그 이야기들이 견유학파의 경구들에 더 익숙했던 헬레니즘 환경 속에서 다시 말해졌을 때 취했을 양식들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부활 이야기들은 양식비평의 통상적인 잣대로는 분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부활 이야기들은 압축되어 있고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오직 양식만을 토대로 해서 그것들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말하는 손쉬운 가설들은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이야기들을 복음서 전승, 더 폭넓게는 성경의 전승의 다른 요소들, 그리고 헬레니즘적 소설에 나오는 빈 무덤에 관한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했다. 

 

(4) 편집과 저작

 

   부활 이야기들은 특정한 복음서 기자의 문체와 신학적 관심을 많이 반영한다. 부활 이야기들 사이에 어떤 문헌적인 의존관계가 존재했는지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 중 누가 자신의 신학 또는 그 밖의 다른 과제들에 대한 관심으로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수정하였는지, 만약 그렇게 했다면 어느 정도로 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편집비평 학자들은 복음서 기자들의 세계, 과제, 목적들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해 왔는데, 그들은 점점 더 복음서 기자들이 마치 예수가 자신의 교회의 일원인 것처럼 서술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대로 예수를 서술하고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그 이야기들이 예수의 삶 속의 정황이 아니라 교회가 다른 때, 다른 장소에서 직면하고 있던 정황에 대하여 말하기 위하여 유포되었거나 만들어졌다는 전제에 의존하는 양식비평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부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시대, 자신들의 교회를 위해 적용한 방식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으며, 또 그렇게 말하고 의도했던 초기 판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 이야기들이 실제적인 사건들에 대한 실제적인 회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면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나중에 확장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쉽다. 예수의 부활이 진실로 새 계약, 새 창조, 초대교회가 믿었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면 이러한 확장된 의미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움직임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하게 된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신학적, 도덕적, 실제적인 교훈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런 교훈들에 대한 알레고리의 역할을 하도록 역사화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라면 그들은 현재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3.부활 이야기들의 의외의 요소들

 

(1) 성경에 대한 이상한 침묵

 

   정경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에서 나타나는 의외의 일은 그 이야기들에 성경의 전승으로부터의 수식이나 장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부활 이야기 이전에는 드라마적인 점진적인 점층법과 서사적인 긴장, 그리고 성경의 직간접적인 인용, 참조 반영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가면서 진행해 왔다. 그러나 유독 부활 이야기들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는데, 이것은 전승의 가장 초기부터 예수의 부활은 정확히 성경대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교회의 설교, 스스로의 설명, 외부의 비판자들과의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만일 비평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부활 이야기들이 전개되었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성경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이 이야기들을 성경 예언의 성취에 대한 고상하고 위엄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너무도 쉬웠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이 사람들이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고 예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소망들과 예언들의 성취와 더불어 그들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의 석의에 대한 정교한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부활은 분명히 사실이라는 것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부활절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부활절 이야기들은 구약성경에 의해서 장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따라서 복음서들에 나오는 그 밖의 수많은 이야기들, 특히 직전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과 독특하게 구별되고 다르다.

 

(2) 개인적인 소망의 이상한 부재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되는 부활 이야기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들 속에 장래의 소망에 대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본능에 어긋나는 것이다. 사구 기독교에서 시들, 성상들, 예전들, 묵상의 도구들, 찬송들, 설교들이 중심적인 문제로서 ‘죽음 이후의 삶’에 집중해 왔고 이 문제는 다른 모든 것들을 몰아내고 부활절 이야기를 그런 문제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왜곡시켜 왔다. 그래서 부활절 이야기의 진정한 취지는 실제로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과 예수에게 속한 자들은 결국에 그것을 공유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전제되어 왔다. 그러나 첫 두세기 동안의 기독교의 장래 소망은 거듭거듭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몸의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에는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즉음 이후의 삶, 영원한 생명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의 모든 백성의 부활조차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너희도 부활할 것이라는 취지로 부활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그들은 참으로 이야기를 엉성하게 한 것이 된다. 

 

   대신에 복음서 부활 이야기 속에는 현재의 세상 속에서 끝이 열려진 위임에 관한 인식을 발견한다. 예수가 부활하셨으므로 너희에게도 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과제는 바울 및 사도행전에 드러난 선교명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장래의 부활 또는 사후의 실존에 있어서 ‘예수와 함께’ 할 것이라는 그 어떤 언급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거의 모든 언급들, 그리고 정경 이후의 문헌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모든 언급들과 구별된다. 초기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 복음서를 제외한  압도적인 다수의 본문들은 예수의 부활을 그리스도인들의 장래 소망과 분명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가진 것이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뿐이었다면, 우리는 초기 기독교에서 부활 이야기들이 무덤 너머의 신자의 장래 소망을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신자의 장래의 소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다른 그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예수가 옳으며 그의 메시아적 주장이 옳다는 것,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전령관들이 되어 세상에 대해 새롭고 놀랍고 참된 주를 선포하도록 위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3) 예수에 관한 이상한 묘사

 

   오늘날의 통설처럼 부활 이야기들이 초대교회가 성경을 상고하고 그 신앙을 거듭하여 표현하는 과정에서 발전된 이야기라며 우리는 부활 이야기들에 구약성서에서 애호되었던 부활 관련 본문들이 인용되거나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가 신 또는 하늘의 영광의 지위로 승귀되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의도 했다면 예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부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의 사업을 승인했고, 그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었으며, 성경은 이제 성취되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라면 당연히 말했어야 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서의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부활 이야기에서 예수는 이례적인 속성을 가진 사람의 몸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 가현설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활 이야기들이 부활한 예수가 확고하게 몸을 입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후대의 발전된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어불성설이다. 교회 안에서 전승들이 헬레니즘적인 초기 시대로부터 좀 더 유대적인 후기의 시기로 발전했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으로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한다. 오히려 매우 초기의 기독교에서 사건들에 관한 매우 유대적인 인식은 특정한 환경들 아래서 주후1세기 말경에 좀 더 헬레니즘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복음서 부활 이야기들 속에 바울 또는 후대의 전승으로부터 가져온 신학적인 내용들이 거꾸로 집어넣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특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받은 인간이 변화된 육신을 지닐 것이라는 바울의 견해는 부활한 예수가 몸을 지니고 있었지만 뭔가 달랐다는 복음서의 견해를 토대로 삼고 있다. 그리고 변화에 관해 바울은 썩지 않음을 강조한 반면에 복음서들은 그 어디에도 이런 두드러진 사실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4)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모두 여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바울 시대 이후에 여자들이 전승 속에 삽입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바울이 복음전도와 호교론적인 목적을 위해 인용하고 있는 전승은 여자들의 등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진 세계 속에서 도움이 안 될 것으로 여겨져서 의도적으로 여자들을 부활 이야기에서 제거하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법적은 증인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유대세계와 대부분의 이교세계의 형편이었다. 만일 복음서 기자들이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면 그들은 무덤에서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을 믿을 만한 남자증인들로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초대교회가 막달라 마리아가 이끈 여자들이 이 장면에 최초로 등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비판자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주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그것이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이 아니었다면 호교론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록했을 리가 없다. 

 

4. 역사적 대안들

 

   현재의 모습대로의 부활절 이야기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대안은 오직 두 가지가 있다.

 

(1) 첫 번째 대안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바울 및 그 밖의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부활한 인간에 관한 특정한 신학을 입수한 후에 부활절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노선을 따른다면, 우리는 세 복음서 기자들이 고린도전서로부터 오리게네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한 저술가들에게 발견되는 변화된 몸에 관한 신학을 예수에 관한 서로 상당히 다른 이야기들로 전환시켰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이러한 서로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들을 제시하면서 바울과 다른 저술가들이 제시한 부활한 인간에 관한 분석(썩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을 언급하기를 회피했고 그 대신에 부활한 예수의 몸이 통상적이기도 했고 이례적이기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복음서 기자들이 주후1세기의 주류적인 유대교의 성경적 성찰의 틀 안에서 부활한 몸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면, 그들은 다니엘12장을 토대로 해서 부활한 몸은 별과 같이 빛난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바울 및 다른 곳에서 알고 있던 신학을 토대로 해서 부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면, 그들은 도처에 널린 성경적 석의, 직간접적인 인용을 자신들의 이야기에서 의도적으로 뽑아내서 버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독자적으로 그런 일을 하면서 이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공유하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부활 이야기들에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의 사후 장래의 소망에 대해 그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도 이와 동일환 논리가 적용된다.  만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장래 소망을 위한 모델이자 수단이라는 신앙을 유래론적 신화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부활절 이야기를 쓴 것이라면 이러한 주제는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부활 이야기들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을 것이다. 네 명의 저술가들이 매우 서로 다른 부활절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각자가 일종의 묵계인 것처럼 모두 이런 중요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부활 이야기들에 나오는 여자들 이야기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특히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서 전체에 걸쳐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부활 이야기들을 후대의 창작물로 상정하고자 애를 쓰면 쓸수록 문제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2) 두 번째 대안

 

   시간을 앞쪽으로 돌려서 바울 당시의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고 그 몸은 뭔가 달랐다고 하는 이야기를 믿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바울은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이야기들을 위한 이론적이고 신학적이며 성경적인 틀을 제시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이 현재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바울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일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후대에 만들어냈거나 윤색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들이 부활한 몸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거나, 좀 더 폭넓은 신학적 주제들을 제시하거나, 혹은 부활에 관한 소망의 요소를 첨가하거나, 성경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하거나 하지 않고, 단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전해져 오던 전승들을 약간의 편집을 가미한 가운데 서술한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 중 아무도 다니엘12장을 상기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모두 예수의 부활한 몸이 별과 같이 빛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복음서 기자들 중에 아무도 부활 기사들에 구약성서를 제시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의 부활과 유대교 전승 사이에 그 어떤 직접적인 연결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나는 그때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것이 바로 그 일이 진행된 상황이었다.’고 어떤 사람이 당혹스런 태도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나는 두 번째 대안이 순수한 역사적 차원에서 훨씬 더 개연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개연성을 갖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에 관해 묘사할 때에 그들은 맨 처음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목격자들이 이 이야기를 말해주었던 세 가지 서로 다른 방식들을 매우 이른 시기의 구전 전승에 의거하여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승들은 오직 최소한의 발전만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발전도 대부분은 편집의 최종단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천동지할 이야기들, 공동체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그런 이야기들에 의존해 있기 때문에 ,한 번 말해진 후에는 쉽게 수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논증의 목적은 부활절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기사들이 연대기적으로 바울 및 그 이후의 수많은 저술가들의 부활에 관한 발전된 논의들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등을 비롯한 저술가들은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에 대한 신학적 및 성경적 틀을 제시하며, 그것으로부터 추가적인 종말론적 결론들을 이끌어 낸 것이지, 거꾸로 복음서 이야기들이 바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들이 언제 그 최종적인 형태에 도달했는지 와는 상관없이 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들이 진정으로 초기의 구전 전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강력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3) 결론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보이고자 했던 사람들이 지어낸 하나의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에게 공포와 놀라움으로 갑자가 찾아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당혹감 가운데 서둘러서 쓴 이야기들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당시에 일어난 일에 대한 사진 같은 기록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 이야기들이 이른 시기의 것이며,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발전된 신약성서에 맞추어 각색되지 않았고, 그것들 간의 불일치점들은 결코 그것들을 역사적인 자료들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강력하게 밑받침해준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바울보다 훨씬 이전의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이 이야기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것들의 표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잘 통합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세부적인 내용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하거나, 그것들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의심의 해석학을 적용하여 그것들을 후대 신학의 투영 또는 서로 다른 제자들이 연루되어 있던 정치적 또는 리더십 주장들일 밑받침하기 위한 암호화된 메시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정경의 네 개의 부활 기사들은 그 모든 것들 속에 편집적인 특징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거의 틀림없이 기독교의 기원과 형성이라는 문제에 대답을 제공해주는 구전 전승들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왜 시작되었고, 그것은 왜 그러한 모습을 띠었는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이런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 후에 예수에게 어떤 일, 즉 정경의 사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이 말하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부 부활절 이야기[14장 두려움과 떨림: 마가복음]

N.T. 라이트/RSG

2015-09-17 01:28:45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4부 부활절 이야기

제14장 두려움과 떨림: 마가복음

 

1. 서론

 

  마가의 결말에 관한 논쟁들은 보수적인 모더니즘과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몇몇 단계들의 다양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마가는 실제로 좀 더 긴 결말을 썼지만 그것은 지금 멸실되었고, 그것 대신에 두 개의 추가적인 결말들이 후대의 몇몇 사본들에서 제공되었다..

 

2. 결말

 

   마가복음의 가장 초기 사본들, 즉 주후4세기 것인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16장8절로 끝난다. 그 뒤로 나온 후대의 사본들과 초기 교부들 중 일부는 긴 결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예 알지 못했거나, 긴 결말을 재현해 놓고도 그것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9-20절이 단순히 마가복음을 위한 긴 결말을 제시하고자 했던 어떤 사람이 쓴 것이라기보다는, 원래 부활 사건들에 대한 별개의 요약으로 존재해 있다가 나중에 마가복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구조 속에는 저자가 그의 작품에 더 자세하고 더 완결된 결말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존재한다.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한 많은 암시를 곳곳에 배치해 놓고,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둘러싼 정황에 관련하여 선지자 예수가 얼마나 참되었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해온 마가가 갑자가 그 다음에 일어날 일에 관한 그의 예언의 참됨을 설명하기 직전에 복음서를 중단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마가가 16장8절 이후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추측컨대 마가가 계속하려던 말은 예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들이 전에 보았던 것을 마침내 사람들에게 말하고 복음을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라는 위임을 받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에는 부활한 예수의 ‘현현’ 이야기들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은 거부해야 한다. 현존하는 상태의 마가복음은 결코 그 반대의 것을 중명하는데 사용될 수도 없고 또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

 

3. 이야기에서 역사로

 

   그렇다면 우리는 마가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불트만은 마가의 이야기의 요지는 빈 무덤이 부활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며, 이 이야기는 호교론적인 전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은 예수의 부활과 그의 승천 간에 어떤 차이도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고 말한다. 가장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과 승천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는 불트만이 주장은 바울에 대한 잘못된 읽기를 토대로 한 주후20세기의 허구다. 하늘로의 승귀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많이 존재했지만 ‘부활’은 결코 그런 단어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만일 불트만의 주장이 옳다면, 주후1세기 중반에 어느 시점에 예수가 단지 죽어서 천국에 간 것으로 믿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러한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전에 결코 그러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던 언어, 즉 부활에 관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서 빈 무덤에 관한 호교론적인 이야기들을 편의적으로 만들어 유포시켰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트만과 그의 추종자들이 바울이 빈 무덤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며, 또한 그들이 빈 무덤이란 모티프를 이차적으로 간주한 것도 잘못이다. 마가복음에서 빈 무덤 모티프는 언제나 본질적이었다. 만약 빈 무덤의 모티프가 없었다면, 아무리 많은 현현들이 목격되고, 아무리 많은 천사들이 주목할 만한 것들을 말했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말하거나, 초기기독교에서 부활신앙이 놀랍게 발전하거나, 그 누가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4. 마가의 관점에서 본 부활절

 

   결국 마가는(예수의 부활에 대한) 은폐가 아니라 계시의 복음서다. 설사 은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계시를 위한 은폐였다. 마가복음이 부활절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부활 이야기 전체는 여자들의 관점에서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복음서 전승 속에서 주목할 만하며 충분히 이례적이다. 

 

   (2) 이 이야기 전체에 걸쳐서 강조점은 이 사건 전체와 거기에 속한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모두 예기치 않았던 일이라는데 두어져 있다. 이런 특징은 이 이야기가 호교론적으로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을 배제한다. 이 사건을 예상된 패턴에 들어맞는 것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부활의 때에 관한 유대인들의 소망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것은 교회의 일부 진영들에서 채택하기 시작했던 신앙에 대한 주의 깊은 설명으로서의 이야기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3) 빈 무덤의 발견은 부활 신앙에 대한 역사화된 ‘설명’으로서가 아니라 해법을 필요로 하는 수수께끼로 제시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는데, 이제 그러한 믿음을 확증해줄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깜짝 놀랄 만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활이 빈 무덤을 설명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 부활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4) 이 젊은이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마태는 그를 천사라고 부르지만 마가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마가복음에서 이 젊은이가 하는 역할은 묵시론적 환상들 속에서 천사들이 하는 역할과 같다. 그러나 마가의 요지는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 깜짝 놀랄만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천사의 설명은 아마도 이전의 계기들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전에 말했던 대로 부활했다면, 그가 했던 이전의 모든 말씀들은 참됨이 입증된 것이다. 

 

  (5) 마가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재활훈련을 받게 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특별히 베드로를 선택해서 특별한 말을 주고 있는 것은 이전에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마가는 비록 제자들이 예수를 본 것을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일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말해준다. 이 짤막하고 중간에 잘려나간 기사 속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그들이 믿었던 것을 설명하는데 꼭 핵심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역사적 토대가 된 두 가지 요소(빈 무덤과 예수를 본 것)가. 등장한다.

 

  (6) 마가복음 16장1-8절의 이야기 문법은 그것이 단순히 별개의 전승단위로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자들은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무덤에 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여자들의 이런 의도, 그 자체가 더 큰 암묵적인 이야기 속에서 ‘문제점’이었다. 사실 예수의 몸은 이미 매장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14장8절), 이 여자들은 다시 그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 문법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면 마가복음16장1-8절은 독립적인 단위가 아니라 더 큰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새롭게 만들어진 신앙을 밑받침하기 위하여 호교론적인 전설로 생겨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4부 부활절 이야기[15장 지진들과 천사들: 마태복음]

N.T. 라이트/RSG

2015-09-17 01:29:5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4부 부활절 이야기

제15장 지진들과 천사들: 마태복음

 

1. 서론

 

   마태복음에는 두 번의 지진, 뇌물을 받은 보초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을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시키는 특징이다. 이 이야기들은 부활절과 그 의미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 있어서 마태의 독특한 기여를 고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2. 땅이 갈라지고 시체들이 일어남

 

  오직 마태만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기사 속에서 지진과 국지적으로 일어났지만 매우 대규모로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극히 이례적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마태의 이 이야기에는 야훼가 포로생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다시 본토로 되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에스겔 37장12-13절과, 또한 성경에 나오는 다른 두 개의 두드러진 부활 본문들인 이사야 26장19절과 다니엘12장2절이 반영되어 있다. 마태는 이러한 이상한 사건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전승을 알고 있었고, 성경적으로 깨어있는 독자들에게 그런 사건들이 지닌 의미를 알 수 있도록 그 전승을 다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귀환, 새로운 시대의 동터옴, 그리고 심지어 지옥을 뒤집어 놓는 일이다.

 

   마태는 십자가 처형의 때를 전후해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한 것이다. (1) 이 이야기는 바람직한 성경에 대한 간접인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2) 이 이야기는 적어도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이 이야기는 마태가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의미,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합된 사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시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지시해준다. 마태는 이것이 실제로 위대한 일반적인 부활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반적인 부활에 대한 이상한 국지적인 선취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이야기는 바울의 신학이나 신약성서의 다른 기자들의 신학을 구체화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이야기의 역사성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점에 있어서는 자료들이 병행되고 있는데 오직 한 자료만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들은, 특히 지진 같은 사건들은 묵시론적 기대의 통상적인 요소들 중의 일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역사성은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마태가 27장51-53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건들은 다른 초기 기독교 자료들이나 제2성전 시대의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도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을 단순히 그 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아무도 예언하지 않았던 예언들을 ‘성취된’ 것으로 제시하게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 이야기들은 너무도 기묘해서, 그런 것들이 정말 일어났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입증해 낼만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제사장들, 보초들, 뇌물들

 

   마태복음에서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부활절 기사로 넘어가는 중간에 끼어있는 또 하나의 야야기는 고위제사장들이 바리새인들과 함께 모여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무덤을 지킬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초대교회의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동기들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27장63절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묘사(저 속이는 자)이다. 이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에 대한 성경의 여러 경고들을 반영한 것으로서, 예수에게 붙인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죄목과 연결되어 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은 전혀 없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모든 면에서 의미가 잘 통한다. 분명히 이 이야기는 예수의 몸의 부활을 위한 변증의 일부이다. 그것은 무덤이 빈 것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는,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는 주장을 물리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기독교 공동체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이 존재한다. (1) 제자들이 실제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이 이미 돌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 전체가 애초에 만들어지거나 말해지고 최종적으로 기록될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했다고 날조하여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러한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2) 무덤이 비어 있었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설명을 요구하는 일들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거나 적어도 유포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소문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빈 무덤 자체가 후대의 전설이었다면, 사람들이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것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렸을 리가 없고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반박하기 위해 복음서들에 기록하는 일을 했을 리가 없다. (3) 이 이야기는 고위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기 관련된 사람들 누구에게나 예수가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보도된 예언이 나중에 그의 시신이 일어난 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약 다시 살아나는 것이 예수의 영혼이 천국에 갔고 시신은 무덤에 남아있는 것을 의미했다면, 보초를 세울 필요도, 무덤 입구를 돌로 막을 필요도, 그 이야기들을 반박하는 이야기들을 유포시킬 이유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 논증의 요점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모든 점에서 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가 후대에 전설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빈 무덤이 절대적이고 의문시 될 수 없는 사실이었던 공동체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빈 무덤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기독교 분파들이 존재했다면(달리 말하면 빈 무덤 자체가 후대의 호교론적 허구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주장이 옳다면) 시신을 훔쳐갔다는 이야기와 그러한 고소가 왜 사실이 아닌지를 설명하는 반박 이야기가 생겨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제사장들이 예수가 삼일 후에 부활 할 것에 대한 예고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예고들은 언제나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은밀하게 있을 때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유다가 이런 비밀을 그의 배신행위의 일부로서 누설한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유일한 암시는 예수가 성전을 허물고 삼일 후에 재건하겠다고 말하는 고소가 될 것이다. 제사장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 것이 후대에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특별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4. 무덤 천사들, 첫 번째 현현(28:1-10)

 

   첫 번째 부활절에 관한 마태의 기사는 마가의 기사에 의거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 기사는 마태가 나름대로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온갖 표지들을 지니고 있다. 마태는 거의 모든 대목에서 단호하게 독자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의 자료들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마태는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하고 있지 않은 것을 한층 더 주목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태가 부활 이야기에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간접인용들과 함의들이라는 관점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마태가 이 이야기를 나름대로 서술하면서 분명히 천사적이고 묵시론적인 요소들을 가져와서 수식할 자유가 있었다면, 왜 그는 적어도 한 명의 남자 증인이 예수를 만나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점 더 설득력 있게 만들지 않은 것인가? 

 

  마태복음의 부활절 이야기는 여전히 동일한 이야기,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 실제로 개연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매우 초기의 전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아주 길고 복잡하고 예술적인 문학 작품의 절정으로서 말해주고 있는 것에 대하여 놀라게 되는 그런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마태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편집 행위 속에서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그가 어디에서 편집적인 재량권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만약 그들이 나름대로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만들어냈다면, 그들은 겉보기에는 더 나은 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자유가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5. 갈릴리의 산에서(28:16-20)

 

   마가복음에서 천사는 여자들에게 예수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키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 14장28절의 병행이 나오지만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대신에 마태는 단순히 여자들에게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나도록 알리라고 말한다. 이 단락에서도 마태 자신의 손길들이 도처에 널려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의 본문이 마가복음16장1-8절 및 누가복음24장1-2절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태가 초기 전승에 뿌리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쓴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누가와 요한복음에 나오는 위임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마태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세계 선교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시를 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세계선교는 마태복음의 전략상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국한했지만 마태복음에서 내내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이 마지막 단락의 주된 강조점은 지금 예수가 누구로 계시되고 있는가에 있다. 부활한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내용이 어떻게 응답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임하고 있고,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에게 부활의 의미는 예수가 지금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인자’같은 인물과 연관되었던 시편2편,72편,89편의 메시아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원래 ‘승귀’ 장면이었는데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위치로 말미암아 ‘부활’ 장면이 된 것뿐이란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고 있는 전 세계적인 위임은 지금 진정으로 개시된 하나님나라 안에서 예수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권세와 하나님나라의 성취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 단락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표지는 표현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의심을 했다(17절)는 말이 나오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과 선교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주후1세기 말경의 어느 시점에 순수한 허구로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이상한 말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의심을 했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겠는가? 아마도 제자들 중에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다른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활한 예수는 그의 이전의 모습과 동일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분명 예수였지만 그에게는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꿰뚫어 알 수 없는 어떤 신비가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튼 마태의 예수는 요한이나 누가의 예수와는 달리 제자들의 의심과 두려움을 덜어주지 않고, 그러한 긴장 관계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

 

   이 단락에 나오는 뜻밖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신이 삼위일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19절) 삼위일체적인 문구는 대체로 이 본문으로 인해서 교회 전승 및 특히 예전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이 어구는 마치 주후4-5세기의 기독론 및 삼위일체론에 거의 근접한 것이거나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울 및 그 밖의 다른 곳에 이와 방행되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이 어구에서 다시금 초기 기독교신학에서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선포된 예수에 대한 추가적인 계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이스라엘의 신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런 권세를 공유하고 있는 참된 주이며 그런 권세는 이제 성령을 통해서 행사된다는 것이다.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더불어 성령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장차 오실 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약속했던 세례 요한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의 명령으로 시작된 운동을 세례 요한에게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부활한 예수의 권세 아래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되고 있는 계약 갱신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행전에서 세례는 통상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또는 그 ‘이름과 합하여’ 주어지며 바울에게는 세례는 ‘메시아와 합하여’ 주어진다. 그러므로 마태가 참 신을 삼위일체적인 형태로 언급하면서 그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한 명령은, 그가 사도행전 혹은 바울이 반영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을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어구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묘사의 중심에 부활한 예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의 세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출애굽 상징체계를 지닌 세례는 하나님의 가족, 갱신된 계약의 가족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 더 명시적으로 나오듯이(로마서6장, 골로새서2장), 세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루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 끝 날까지’ 그의 백성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의 마지막 약속은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특히 바울의 특징이었던 ‘두 세대’구조를 가진 연대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의 요지는 ‘내세’가 지금 예수의 부활을 통해 개시되었고, 부활한 예수는 이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고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와 현세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예수의 약속은 임마누엘 약속의 성취임과 동시에 아주 작은 무리의 예배자들일지라도 그들이 마치 성전에 있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있겠다는 야훼의 약속의 성취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 안에서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은 현세를 안전하게 통과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내세로 들어가는 것이 보장된다. 

 

6. 마태와 부활 : 결론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실의 직접적인 결과에 대한 마태의 풍부한 해설은 다양한 초기 기독교의 전승들과 많은 접촉점을 지니고 있다. 마태는 개성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와 이미지들은 그의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맥을 같이 한다. 마태는 바울 또는 요한계시록의 부활 신학에 동화된 것이 아니었으며 여러 잡다한 글들을 사용해서 부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부활 이야기들을 다시 말하면서, 그의 복음서의 서사적 및 신학적 논리의 결말부에 적합한 형태로 다듬었고 또한 그러한 요소들을 부각시켰다. 이렇게 다시 말해진 이야기들을 통해서 마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한 약속들, 포로생활로부터 귀환에 관한 약속을 마침내 예수가 성취했고, 그것은 모세가  말했던 모든 것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마태의 부활 이야기들이 바울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마태 자신이 초기의 전승된 이야기들을 오랜 시간동안 되새김질하다가 기본적으로 초기 이야기들의 형태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 이야기들을 다시 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태는 철저하게 유대적인 역사와 신학의 책을 썼다. 그의 전체적인 명제는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 안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역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과 연관시키지 않고서는 그러한 유대적인 틀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활동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진정으로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고 빈 무덤을 남겨 놓았다고 믿었다. 그가 28장에서 말하는 이야기들은 그의 동료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이야기들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마치 역사적인 것처럼 위장한 것은 결코 아니다.

 

4부 부활절 이야기[16장 불붙는 가슴과 떡을 뗌: 누가복음]

N.T. 라이트/RSG

2015-09-17 01:30:42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4부 부활절 이야기

제16장 불붙는 가슴과 떡을 뗌 : 누가복음

 

1. 서론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는 부활절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형성하고 특정한 교훈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매우 초기의 전승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질적으로 수정할 자유가 있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다. 그의 이야기들은 다른 정경 복음서들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함께 이상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유대교이든 이교이든 고대 문헌들 속에서 독특한 것으로서, 부활이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성찰과 부합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러한 성찰로부터 신속하게 예수의 부활 및 그의 제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결부시키게 된 발전된 신학적 또는 석의적 세부사항을 빌려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는 전혀 없다. 

 

   다른 정경의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누가의 저작에도 예수의 부활이 지닌 일차적인 의미가 어떤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사후의 미래와 관련이 있다는 암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의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이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절정에 도달했고 그럼으로써 너희는 그것을 세상에 수행하도록 위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이 정하신 긴 이야기의 절정과 새로운 선교의 개시는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1장에 섞여 짜여 있고, 그것들은 거기서 도출되는 다른 특징, 즉 이제 예수의 제자들에게 맡겨진 삶의 패턴을 위한 맥락을 제공한다. 누가에게 부활절은 한편으로는 역사의 의미(특히 이스라엘 역사 그러나 누가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온 세상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역사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나오는 교회의 과제와 형태에 관한 것이다.

 

2.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

 

   누가 복음 서두에는 예수의 수태와 출생 이야기가 놓여있는데, 이것은 누가가 어떤 식으로든 이 이야기를 부활절 사건과 병행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병행관계에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예수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 있다. 서문에서 시므온은 예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가져오게 될 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부활절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핵심으로 다시 반복된다. 이런 연결고리들이 우연으로 치부될 수 없다면, 누가는 서문에서 약속된 모든 것이, 물론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방식이긴 하지만, 이제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실현되었다는 취지로 부활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특히 그것이 예수에 관하여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완성시킨 사건이었다. 누가는 부활절 이야기를 통해서 이전에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성경이 내내 말해 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제시해준다. 누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성경의 이야기, 창조주이자 세상, 특히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신에 관한 이야기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이 ‘마땅히’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성경의 이야기와 접목시키고, 칠십인역 본문에 나오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성경 본문을 참조하고 함축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어떻게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누가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직접적인 반영들로부터는 주목할 만한 정도로 자유롭긴 하지만, 엠마오 도상의 이야기의 핵심에는 누가가 부활절의 의미라고 여겼던 것에 대한 분명한 한 가지 내용이 있다. 성경에 언급된 최초의 식사는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실을 먹은 것이었다. 그 결과는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게 된 것, 곧 환영받지 못하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이제 엠마오에서 글로바와 그의 동료는 식탁에 앉아서 새롭고 충심으로 환영할 만한 지식에 직면한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가 예수인 줄 알아보았다. 누가는 이것이 궁극적인 구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에게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포로생활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사였다. 이것은 새 창조의 시작이며 이것은 회개와 죄 사함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이유이다. 

 

    누가는 이 모든 것 속에서 유대교에서 부활은 언제나 혁명적인 교리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참 신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의 처음 두 장을 유대인의 왕 및 세상의 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장은 헤롯으로부터 시작되고, 2장은 가이사 아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맥락을 따라서 9장에는 헤롯의 당혹해 하는 모습, 13장에는 헤롯과 로마 당국자들의 위협, 그리고 23장에서 헤롯과 빌라도가 마침내 손을 잡고 예수를 대적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로써 누가는 예수가 선포했던 나라가 세상의 연합세력들과 대결하고 있다는 암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4장에서 메시지가 ‘모든 민족들’에게 나아갈 때 그 메시지는 단순한 새로운 종교의 길 이상의 것을 제시한 것이다. 사도행전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그 메시지는 예수가 참된 주라는 것이다. 창조주 신은 제국의 권력과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를 무시하고 있다. 누가에게 이 메시지의 중심적인 의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나라들과 대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명을 위임한 후에 승천한 것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사도행전 자체도 헤롯과 가이사의 세계, 그리고 복음이 그 두 세계로 강력하게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큰 틀로 삼고 있다.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곁들인 부활한 예수에 관한 기사를 완결하는 사도행전1장은 누가의 저작의 나머지 부분과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누가는 예수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역설하며 그가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이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때에 관하여 알지 못할 것이지만 이것이 그 나라가 오게 되는 방식이다. 그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를 증거하는 것을 통하여 그 나라는 오게 된다. 이 문장은 사도행전 전체의 강령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지역에 최초의 복음전파로 시작해서 8장에는 사마리아에서 선교, 10장에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필두로 해서, 13-28장에서 바울의 선교여행을 통해 전 세계로 걸친 복음전파로 나아간다.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장차 오게 될 방식이다. 사람들이 소망해 왔던 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메시아의 대표들이 세계 속으로 나아가서 메시아를 참된 주로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오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51절에서 그 복선이 나와 있는, 이런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이  사도행전 1장9-11절에서 예수의 승천에 관하여 묘사하고 의도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적절한 맥락이 된다. 사실 승천 이야기를 듣는 주후1세기의 청중들에게 진정한 문제점은 승천 자체가 아니라 육신적이기도 하고 변화된 것이기도 한 몸에 관한 개념이었다. 무덤 속에 예전의 몸을 그대로 버려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시신이 소생된 것도 아닌, 이러한 종류의 몸을 입은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현재의 시공간의 우주 안에서 다른 장소로 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가의 승천 이야기에 영향을 미쳤을 흥미로운 성경적 병행은 ‘인자 같은 이’가 ‘짐승들’에게 고난을 당한 후에 승귀되어서 ‘옛적부터 계신 이’ 옆에 앉게 되는 이야기를 하는 다니엘서 7장이다. 승천은 부활한 새로운 종류의 몸에 일어나는 문제점에 관한 해법이 아니다. 바울에게와 마찬가지로 누가에게도 승천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대표자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적어도 함축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압제해왔던 이방나라들과 이스라엘을 부패시켜 왔던 현재의 통치지들에게 맞서서 예수에게 지지를 보내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달리 말하면 승천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이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는 방식은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가 세상의 참된 주로 등극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에게나 더 넓은 이교 세계의 독자들에게 예수의 승천에 관한 이야기는 경건한 유대인이 다니엘서 7장의 암묵적인 반영들로부터 연상했을 것과 비슷한 반제국적인 효과를 즉각적으로 미쳤을 것이다. 바울 시대에는 로마의 황제들이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되는 관습이 잘 수립되어 있었고, 죽은 황제의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들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새로운 황제가 그의 전임자의 신격화를 토대로 해서 ‘신의 아들’로  선포된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칭호를 부활하여 승귀한 예수에게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승천 이야기들은 이교의 승천 이야기들로부터 유래한 것일 수 없다. 기독교의 승천 이야기들은 분명히 주후1세기의 후반부에 반제국적인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것은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는 메시지였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승천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 의미는 바울에게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지만 누가는 이런 내용을 바울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이 이야기를 전복 성향을 지닌 복음이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신과 그의 전 세계적인 나라를 선포하고, 특히 예수를 주와 메시아로 선포하기 위하여 퍼져나가는 더 큰 이야기를 위한 토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3. 독특한 사건

 

   크로산은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들, 특히 누가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실제 세계에서 일어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예수가 빈 무덤과 관계없이 살아 있고 신자들의 마음과 사고가 그러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의해서 강화된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진행된 일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크로산의 말은 학계에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의 많은 진영에서 당연한 것으로 널리 퍼져있는 견해이다. 그러나 누가의 이야기의 전체적인 요지는 그것이 영적인 체험의 한 예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충격적이고 일회적인 독특한 사건에 관한 것이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여자들, 열한 제자들, 베드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다락방의 제자들 모두에게 의외의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묘사한다. 누가에게 부활은 단순히 교회의 삶과 예배에서 반복된 패턴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이스라엘을 변화시킨 단회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이 누가가 누가복은 24장과 사도행전 1장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의 이야기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지속적인 체험에 관한 묘사로 해석하거나 바꾸어 놓는 것은 누가의 명백한 의도에 대해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가 이 이야기들이 가져올 다양한 공명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명들은 누가가 말하는 원래의 사건 자체로부터 울려 퍼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누가가 묘사한 부활한 예수는 너무도 학고하게 몸을 입고 있고, 만질 수 있으며, 먹을 수 있었다. 누가가 특별히 도출해 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부활한 몸이 육체성을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세상과 이스라엘에 관한 견해 전체와 관련해서 의미한 것, 즉 부활절을 계기로 새로운 세상, 이스라엘의 구속, 새 창조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누가의 이야기의 취지는 몇몇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영적 체험을 시작했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누가가 초대교회 내의 가현설적인 성향들과 싸우기 위해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누가가 그런 종류의 견해와 싸우기 위하여 복음서를 쓴 것이라면, 엠마오 도상의 이야기, 제자들이 몰라보았고 그 후에 사라진 예수, 예수가 갑자기 다락방에 나타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에 승천 이야기를 포함시킨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누가는 예수의 몸의 부활이라는 이례적이고 독특한 사건을 믿었고, 그 결과로서 창조주가 세상 및 이스라엘을 다루시려는 것에 관한 이야기 전체가 새로운 초점을 갖게 되었다고 믿었다.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 길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이전에는 이렇게 성경을 읽기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그 메시아에게서 절정에 도달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특징으로 하는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누가의 부활 이야기는 바울이나 신약의 그 밖의 책들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매우 초기의 전승들을 나름대로 다시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부활절과 교회의 삶

 

   누가가 부활 이야기를 자신이 나중에 환기시키고 있는 공동생활의 패턴들을 정립하거나 밑받침하기 위한 방식으로 말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분명한 출발점은 엠마오 도상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는데 거기에서 누가는 두 가지 특징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떡을 떼는 것인데,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의 마음은 첫 번째에 의해서 불타오르고, 그들의 눈은 두 번째에 의해서 열려진다. 누가의 저작 전체가 의도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들에 비추어 성경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읽기를 불타오르는 열심의 내적인 삶의 원천으로 삼아야 하고, 예수가 누구였고 지금 누구이며, 그와 관련하여 그들은 누구이고, 그 결과로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과 그 후에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말한 여러 상세한 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부활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메시아임이 입증되었고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참된 주이고 세상에 대하여 충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예수는 그를 대신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도록 제자들에게 위임할 것이다. 이것 자체가 계약 갱신과 새로운 삶의 표지이자 수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시작할 핵심적인 제자들은 예수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다. 

 

5. 누가와 부활: 결론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도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특정한 강조점들과 신학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부활 이야기들을 형성하고 다시 말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서들의 예수에 관한 묘사는 동일하고, 그 묘사는 그 자체로는 대단히 수수께끼 같지만, 바울의 신학적인 전승들에서 발견되는 부활에 관한 좀 더 발전된 신학적 분석과 부합한다. 그것은 새롭고 예기치 않으며, 설명할 수 없는 특성들을 지닌, 몸을 확고하게 입은 인간 존재로서의 부활한 예수에 관한 그림이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누가는 극히 이례적인 혁신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해석을 곁들이지만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믿었던 것을 실질적으로 수정함이 없이 전달해준다. 누가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를 묻도록 만든다. 

 

4부 부활절 이야기[17장 새 날, 새 과제들 : 요한복음]

N.T. 라이트/RSG

2015-09-17 01:31:36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4부 부활절 이야기

제17장 새 날, 새 과제들 :요한복음

 

1. 서론

 

   요한의 부활절에 관한 두 개의 장은 고린도서신에 나오는 핵심본문 및 로마서8장과 아울러서 부활에 관한 가장 영광스러운 글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20장에서 끝내고자 했다는 온갖 표지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후에 21장이 나오며, 그 어떤 사본도 21장이 없이 유포된 것은 없었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 다른 특징은 긴 대화들과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이인데 그에 대한 평가가 무엇이든지 분명한 것은 요한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통일적이고 믿을 만한 초상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들은 후대의 교회의 체험에 대한 분명한 알레고리가 아니라 고유한 맥락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요한이 ‘영생’을 사람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쳤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그 자체를 영광, ‘들리움’의 핵심적인 순간으로 보고 있다고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요한의 신학 속에는 예수의 부활 또는 제자들의 부활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요한에게 십자가 사건, 부활, 승천은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에 이 땅에 잠시 현현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귀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요한은 십자가 사건, 부활, 승천을 단일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러한 것들을 주의 깊게 차별화한다. 그가 십자가 사건, 승천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게다가 예수가 마리아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요한은, 다른 곳에서 굳이 부활과 승천의 구별을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을 뿐이지, 그러한 구별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요한을 예수의 부활에 관한 하나의 견해의 증인으로 여기고, 그의 부활절 이야기들을 단지 예수의 죽음이 승리였고 그는 지금 하늘에 살아 있으며 그의 제자들은 지금 그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극적이고 암호화된 방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2. 요한복음 20장

 

   요한은 창세기1장1절에 대한 분명한 간접 인용을 통해서 처음부터 그의 복음서가 예수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창조에 관한 것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20장에서 부활절이 한 주간의 첫 날이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동일한 요지를 제시한다. 일곱째 날은 창조주를 위한 안식의 날이다. 요한에게 그 날은 예수가 무덤에서 안식하는 날이고 부활절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이것은 빛과 생명이라는 주제들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서문의 빛 아래서 20장을 읽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제자들에게 1장3절과 3장1-13절에서 언급된 중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서문의 절정(1장14절)은 요한에게 매우 중요하다. 요한에게 한 분 신과 함께 있었고 이 신과 동일시되었던 말씀이 이제 그리고 영원히 육신이 되었는데, 이 육신이 말씀과 영으로 다시 되돌아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요한에게 부활이 중요한 것은 요한은 창조의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하나로 결합시킬 때 그 초점이 되었던 말씀은 이제 부활 속에서 창조주와 새 창조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이 모든 것은 요한에게 부활절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요한은 예수의 인간적 육신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깨닫게 하려던 성육신 신학자였기 때문에, 그는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단지 믿음의 눈으로서만이 아니라, 통상적인 인간의 촉각을 통해서도 사람의 형태를 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 특히 대칭을 이루고 있는 서문의 맥락에서 볼 때, 요한복음 20장의 부활 이야기들이 영적인 체험에 대한 알레고리나 은유로서 유래했거나, 청중들이 그런 식으로 들었을 것이라고 시사하는 내용은 없다. 사실 부활 이야기들은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20장의 부활 이야기들을 떼어 버리면 요한복음의 나머지 19장들이 아무런 손상도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는 없다. 

 

   첫째 주제는 표적들이다. 요한복음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표적들이 존재하는데, 요한이 이러한 표적들을 배열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그의 이름 속에서 발견되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도마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했다고 묘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부활 자체를 이러한 일련의 표적들 중에서 마지막 ‘표적’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주제는 믿음이다. 신앙 또는 믿음도 20장을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시켜주는 주제이다. 믿다(피스튜에인)라는 어구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빈번하게 나오는 주제인데, 이 주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20장에서 성취에 이른다. 요한이 이 복음서 전제를 지배해 온 이 주제가 20장에서 완성에 도달하도록 의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셋째 주제는 성령이다. 요한복음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강력하게 나타나고 20장에서 성취되는 주제는 성령이라는 주제이다. 20장에 나오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는 장면은 7장에 나오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생수와 마찬가지로 새 창조와 새 성전에 대한 반영을 일깨운다. 창조주가 태초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 사함을 세상 속에서 현실이 되게 할 사람들로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가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예수를 증거함으로써 그의 사역, 그의 죽음, 그의 부활이라는 유일무이하고도 결정적인 사건을 증거하도록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다.  넷째 주제는 성전이다.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20장이 밀접하게 관련짓는 주제는 ‘회복된 성전’이라는 주제이다. 요한은 예수가 여러 절기들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간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2장의 첫 유월절과 12장의 마지막 유월절이 그 틀을 이루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죽기 며칠 전에 일어난 성전사건이 첫 번째 유월절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다. 그때 주어진 예수의 대답은 왜 요한이 이 사건을 여기에 두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복음서의 성전 장면들의 나머지 부분을 부활에 의해 제공되는 틀 안에서 이해하도록 의도하고 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표적, 믿음, 성령, 성전이란 주제에서 20장을 제거해 버리면 이 모든 사건과 설명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20장을 다시 붙여 놓으면 독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심판이 성전에 행해졌고, 이제 예수 자신이 아버지의 임재와 용서하시는 사람이 베풀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한 말씀, 즉 사람들이 아버지를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참된 예배자들은 특정한 지리적인 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온다고 한 말씀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다가 20장에서 절정에 달하는 다섯 번째 주제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자신에 대한 요한의 이해이다. 바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시아직’이라는 범주는 요한에게 있어서도 중심적이다. 요한에게는 바울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왕적’이고 ‘민족적’인 뉘앙스를 지니는 유대적인 범주와 온전히 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 간에 상당한 정도의 유동성이 존재한다. 이 주제는 이런저런 이야기 또는 강론 속에서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 전체에 걸쳐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 지니는 왕적이고 다윗적인 의미가 여전히 활발하게 드러나 있고 좀 더 깊은 차원은 대체로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다. 그러나 부활 이야기, 그리고 도마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은 일시에 하나로 꿰어지게 된다. 그리고 요한이 복음서를 통해서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믿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은 ‘이스라엘의 참된 기름부음 받은 왕‘이라는 의미와 ’성육신한 말씀, 퀴리오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그런 인간 존재‘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부활절 때까지는 이러한 신앙을 위한 근거들이 온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활 이야기 없이는 이러한 신앙은 온전하게 표현되지 못한다..

 

   여섯째 주제는 요한복음의 많은 부분을 관통하고 있는 예수가 ‘영화롭게’ 되었다거나 ‘들리움’을 받았다는 모티프이다. 고별강론(13장, 17장) 본문에서 예수가 들림을 받을 때에 영화가 일어난다면 이것은 분명히 십자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가 ‘떠나가는 것’이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이 결국 중요한 주제가 목표에 도달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의 기사에는 그 어떤 것도 이런 결론을 밑받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가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에게로 간다는 주제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부활 이야기이다. 오직 부활절의 빛 아래서만 그 온전한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가 마르다에게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믿는 자들은 사랑하는 제자와 도마 같이 단지 십자가 사건을 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부활을 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곱 번째 주제는 요한을 유명하게 해준 바로 ‘아가페’라는 주제이다. 그러나 요한이 제시하는 이 주제는 세상 일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들의 사랑의 사역을 밑받침해주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한 사랑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도마, 그리고 예수와 베드로 간의 관계의 갱신 속에서 최종적으로 표현된다. 죽음을 통해서 주어진 사랑은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을 통해서 새롭게 갱신된다. 

 

   이러한 개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첫째, 20장은 복음서의 의도된 ‘틀’의 일부로 확고하게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와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그 주된 주제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을 바라볼 때만 이해될 수 있다. 요한은 복음서를 쓰는 동안 내내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20장은 단지 전승과 맞추거나 신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속셈으로 첨가된 것이 아니었다. 둘째, 이 복음서 전체 및 그 안에 주제들의 근저에 있는 ‘새 창조’ 신학은 요한이 그의 이야기들을 현실적이고 문자적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도 온갖 종류의 반영들과 공명들이 그 이야기들 안에서 들려질 것을 의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일련의 구체적인 사건들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서술과는 구별되는 반영들과 공명들이다. 많은 신약학 연구에서 지배적인 가설, 즉 부활 이야기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에 관한 알레고리로서 발생하고 발전된 후에, 그 이후 세대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사건들에 관한 문자 그대로의 서술로 잘못 받아들여졌다는 가설은 문학, 역사, 신학의 차원에서 실패하고 만다.

 

3. 요한복음 21장의 기여

 

   21장은 아무리 매력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부활 장면을 한 가지 더 제시하게 위하여 쓰인 것이 아니다. 21장의 주된 강조점들은 첫 번째는 베드로의 재활과 위임이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제자의 임박한 죽음이다. 이 본문이 베드로의 수장성(primacy)을 지지한다는 주장도 흔히 제기되어 왔지만, 그런 주장들은 설득력이 없다.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수장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신분을 설정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베드로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것은 사랑을 회복한 후에 신뢰 관계가 재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 여기서 베드로가 이제 특별히 높은 지위를 맡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21장이 지닌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부활한 예수에 관한 묘사이다.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의 예수는 실재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포함한 육신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몸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에게 감히 묻기를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대답은 그들이 예수가 분명히 예전과 동일하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기사는 새 창조의 낯설음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그들이 부활한 예수를(바울 이래로 현재의 몸과 부활한 몸과의 주된 차이점으로 부각된)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으로 인식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달리 말하면 이 이야기는 발전된 신학에다 고안된 사실주의적 허구를 입히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제자들이 알아볼 수 있으면서도 뭔가 당혹스러운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최초의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인식, 그들이 감히 묻기도 두려워했던 어떤 질문을 반영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연속성과 아울러 불연속성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과 그 이후에서 발견되는 언어나 신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복음서의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해온 그림과 아주 잘 부합한다.

 

4. 복음서의 부활절 이야기들: 결론

 

   각각의 복음서 기자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쪽이 다른 쪽을 자료로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어휘상의 중복은 눈에 띄게 적다. 그 대신에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원시 전승으로부터 복음서 기자가 글을 쓸 당시에 그 전승이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표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가 자신의 복음서에 맞는 절정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원시 전승들을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의 복음서에 중요한 주제들과 강조점들을 부각시킬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다시 말하고 다시 형성하는데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활 이야기들의 기본적인 개요가 거의 변함이 없고, 발전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한층 더 주목할 만하다. 특히 각각의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특히 기독교의 세계 선교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과 예수의 현현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들이 후대의 단계에서 생겨났다는 표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부활’이라는 단어가 예수에 관하여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변증으로부터, 또는 교회내의 특정한 지도자들이나 특정한 관습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생겨났다고 볼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복음서 기자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했지만 그 근저에 있는 내용을 파괴하지 않았던 자료들은 실제로 예수가 처형 후에 제 삼일에 일어난 실제적인 사건들을 가리킬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글을 쓰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들은 은유적으로 혹은 알레고리적으로 온갖 종류의 다른 것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이야기들, 그들이 자신의 기사들 전체에 대한 의도적이고 절정에 해당하는 결론부로서 그런 이야기들을 써낸 방식은, 그들이 부활절 사건들을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이었고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사건들이 교회의 존재 자체의 토대가 되었다고 믿었고, 따라서 당연히 이것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동의한 세계관, 가장 초기의 기독교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유대적 세계관 내부로부터의 새롭게 수정된 세계관 속에서 전개된 이야기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신이신 창조주의 갱신된 백성이 창조의 세계, 공간과 물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 자료들은 ‘부활’ 신앙의 전체적인 발전들과 특징들을 후대의 신학을 단순히 투영한 것이라고 주장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한다. 초기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표현의 다양성들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관성은 기독교가 유대교적 신앙의 스펙트럼 위에 있는 한 점(몸의 부활)에 위치해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 점 내부로부터 핵심적인 수정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 핵심적인 수정들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1) 부활은 신앙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였다는 것. (2) 부활은 더 이상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연대기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이미 일어났다는 것. (3)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 아니라 변화를 내포한다는 것.(4) 부활 언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례와 거룩함을 가리킨다는 것.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복잡하지만 주목할 만한 정도로 일관되게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로마인들에 의해 예수가 처형된 지 사흘 만에 그의 무덤은 비어있었고, 그는 살아나서 여러 경우들과 여러 장소들에서 그의 제자들 및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그가 결코 유령이나 환각이 아니라 진정으로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 이야기였다. 예수에 관한 이러한 신앙은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세상의 참된 주라는 신앙의 출현과 발전에 대한 역사적으로 완전하고 철저하며 만족할 만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또한 그것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새 시대가 개시되었고, 새로운 과제들과 가능성들이 열리게 되었다는 초기 기독교의 확신을 설명해 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상 전체 및 예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소망은 역사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있지도 않고, 스토아학파 사상에서처럼 죽음과 재탄생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에 있지도 않으며, 몸을 입지 않은 채로 지복의 불멸의 삶을 사는 것에 있지도 않고, 오직 새로 몸을 입은 삶, 변화된 몸을 입고 사는 것에 있다는 신앙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신앙이 그 토대로 삼고 있던 중심적인 이야기들은, 비록 복음서 기자들에 의해 재형성되고 편집되기는 했지만 그것들이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동시에 바울 이래로의 발전들을 설명하는데 아주 큰 기여를 하는 단순하면서도 매우 초기에 속하는 특징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