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1/3)- 톰 라이트
목차[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N.T. 라이트/NTPG
2015-06-11 13:57:00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1부 서론
제1장 기독교의 기원과 신약성서
1. 서론
2. 과제
제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
제2장 지식: 문제점들과 다양성들
1. 서론
2. 비판적 실재론
3. 이야기, 세계관, 지식
4. 결론
제3장 문학, 이야기, 세계관의 표현
1. 서론
2. 텍스트 읽기에 대하여
3. 문학에 대하여
4. 이야기의 본질
제4장 역사와 주후1세기
1. 서론
2. 단순한 역사의 불가능성
3. 이것은 사실들의 부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4. 역사적 방법론: 가설과 검증
5. 사건에서 의미로
6. 주후1세기 종교운동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
제5장 신학, 권위, 그리고 신약성서
1.서론: 문학 및 역사에서 신학으로
2. 세계관과 신학
3. 신학, 서사, 권위
4. 결론
제3부 헬라 로마세계와 주후1세기 유대교
제6장 배경과 이야기
1. 서론
2. 초기 유대교의 배경인 헬라 로마세계
3. 주전 587년부터 주후70년에 걸친 이스라엘 이야기
제7장 다양성의 발전
1. 서론 : 사회적 배경
2. 혁명운동들
3. 바리새파
4. 에세네파: 분파에 대한 강조
5. 제사장들, 귀족들, 사두개파
6. 평범한 유대인들 : 들어가는 말
제8장 이야기, 상징, 실천 : 이스라엘 세계관의 요소들
1. 서론
2. 이야기들
3. 상징들
4. 실천
5. 성경에 따라: 세계관의 정초
6. 결론: 이스라엘의 세계관
제9장 이스라엘의 신앙들
1. 서론
2.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
3. 선택과 계약
4. 계약과 종말론
5. 계약, 구속, 죄 사함
6. 신념들: 맺는 말
제10장 이스라엘의 소망
1. 묵시사상
2. 포로생활의 끝, 다가올 시대, 새 계약
3. 신 외에는 왕이 없다
4. 장차 오실 왕
5. 세계, 이스라엘, 인간의 갱신
6. 구원과 칭의
7. 결론: 주후1세기 유대교
제4부 기독교 제1세기
제11장 케리그마적인 교회에 대한 탐구
1. 서론
2. 과제들과 방법론
3. 거점들: 역사와 지리
4. 공백 매우기: 배경을 찾기 위한 문헌들
제12장 실천, 상징, 질문들 : 초기 기독교 세계관의 이면
1. 서론
2. 실천
3. 상징들
4. 질문들
제13장 초기 기독교 이야기들: 신약성서
1. 서론
2. 누가의 이야기
3. 마태의 이야기: 서기관과 줄거리
4. 마가의 이야기: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5. 공관복음서들: 맺는 말
6. 바울: 아담에서 그리스도로
7. 히브리서의 서사 세계
8. 요한의 이야기
제14장 초기 기독교의 이야기들: 양식비평의 수정
1. 서론: 양식비평
2. 양식비평의 수정
3. 이야기 없는 이야기들? : Q자료와 도마복음서
제15장 초기 그리스도인들: 예비적 소묘
1. 서론
2. 목적들
3. 공동체와 정의
4. 발전과 다양성
5. 신학
6. 소망
7. 결론
제5부 결론
제16장 신약성서와 신의 문제
1. 서론
2. 예수
3. 신약성서
4. 신의 문제
1부 서론[1장 기독교의 기원과 신약성서]
N.T. 라이트/NTPG
2015-06-17 13:58:26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서문
바울과 그의 신학에 대한 책 그리고 예수와 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책을 쓰려고 계획하면서 이 두 권의 책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주후 1세기의 유대교에 대한 선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예수, 바울, 복음서에 초점을 맞추어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일관된 가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 대신에 그냥 예수로, 하나님을 신으로 지칭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의 목적이 그리스도나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내용을 예수, 성령, 신약성서의 빛 아래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답을 미리 암시하는 것 같은 어법을 따르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강요하는 일이 될까 우려한다. 나는 이 연구의 방법론으로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한 인식론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신약성서나 1세기 문헌에 나타난 이야기들을 비판적 실재론 속에 통합시켜서 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연구를 진전시키는 방식으로 사용함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1부 서론
1장 기독교의 기원과 신약성서
1. 들어가는 말
나는 신약성서는 그 의미들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공명시설과 적절한 배경 속에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신약성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야기와 상관없는 개념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식들이 아니라 이야기들 자체로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신약성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를 버리고 그것이 제시하는 드라마가 작동되는 방식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2. 과제
신약성서를 읽어왔던 네 가지 역사적 유형들을 (1)비평 이전의 읽기, (2)역사적 읽기, (3)신학적 읽기, (4)포스트모더니즘적 읽기로 분류된다. 이런 읽기 방식은 지닌 세기 서구 문화의 역사에 나타난 운동들과 대응되는데 첫 번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이전 시기의 읽기 방식이고 두 번째는 계몽주의적 강조점으로 읽기 방식, 세 번째는 두 번째 방식에 대한 교정책이지만 여전히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틀 안에 있는 읽기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붕괴되면서 시작된 최근의 읽기 방식이다. 두 번째 방식인 역사적 읽기 방식에는 (1)역사비평, (2)양식 및 자료비평, (3) 편집비평이 있다. 이런 역사적 읽기는 세 가지 근거 위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첫째는 이렇게 읽은 본문이 오늘날의 교회 또는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권위를 지닐 수 있는지 분명치 않다는 점, 둘째, 이것은 성경 문서의 신학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 셋째, 우리가 실제로 일어난 일로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서로 다른 접근 방법들을 병치시킬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정통 기독교적인 것을 추구하는 읽기와 역사에 대한 충실함을 추구하는 읽기 간에 긴장관계가 집중되는 것이다. 역사적 읽기에 모든 도그마는 역사라는 잣대에 비추어 검증되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고집이 존재한다면, 기독교의 신앙과 삶의 중심적인 사건들은 실제 세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기독교의 고집이 존재하는데 이 두 가지 고집이 서로 상충한다. 여기서 난점은 일부 계몽주의 상속자들이 전통적 기독교를 지나치게 규탄했고 기독교는 이런 도전에 대답을 거부하고 기존의 입장을 완강하게 옹호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정통 기독교가 옹호해 온 것은 그 자체로 특별히 기독교적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계몽주의 이전의 세계관일 가능성이 있다.
계몽주의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지만 기독교에게 진정한 역사, 그 필연적인 뿌리들을 상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가 역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적 탐구가 없다면 기독교의 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를 자기 구미에 맞게 각색하는 기독교의 성향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역사는 신앙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계몽주의의 비판을 무시하거나 상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기독교의 이런 태도는 더 깊은 차원에서 계몽주의 세계관에 항복하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의 비판을 무조건 수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신약성서가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창조주 신의 도전이자 대답의 일부로서 기능하려면 성경 본문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질문은 (1)기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2) 기독교는 무엇을 믿으며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다. 이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은 세부적으로 신약성경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질문들로 나뉜다. 그런데 그동안 성경본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과제들이 서로 분리되고 충돌되어 왔는데, 나는 이 세 가지 과제를 통합시키며 성경본문을 읽는 방식을 추구하려고 한다. 예수에 관한 연구는 무엇보다도 역사에 관한 문제로서 본문들에 대한 문학적 연구 및 신학적 연구를 조심스럽게 부수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나는 신학적이고 문학적 혁명을 촉진시킨 역사적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예수를 서술할 것이다. 또한 바울에 관한 연구는 신학에 관한 문제로서 역사적, 문학적 연구를 부수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나는 역사적 성취를 촉진시킨 혁명적인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바울을 논할 것이다. 또한 복음서 연구는 우선적으로 문학적인 과제이지만 역사적, 신학적 배경, 맥락, 함의들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초연한 실증주의적 객관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고 이 모든 것에는 인식주체 또는 연구자, 독자가 연루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근대 이전에 본문의 권위를 강조한 것, 근대에 이르러 본문읽기에 역사와 신학을 강조한 것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강조점 등을 서로 결합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역사에 대한 브레데의 강조, 규범적인 신학에 대한 불트만의 강조 그리고 본문 및 그 독자들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강조를 동시에 제대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증주의가 열어놓은 통로를 따라 무시간적인 진리추구, 단순히 현재적인 나의 읽기에 몰두해서는 이런 종합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결합을 위한 유일한 길은 기독교에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연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새롭게 검토해 보는 것이다.
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2장 문제점들과 다양성들]
N.T. 라이트/NTPG
2015-06-17 13:59:12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
2장 지식: 문제점들과 다양성들
1. 들어가는 말
문학, 역사, 신학이라는 각각의 영역은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 적합한 방식으로 지식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지식들은 모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 집단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수단의 눈금자를 이루는 세계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서 해명될 수 있다. 세계관의 핵심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이야기라는 요소이며 특히 이 이야기라는 요소는 신약성서 및 초기 기독교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비판적 실재론의 인식론을 설명해 낼 수 있고 나아가 문학, 역사, 신학에 대한 연구에 폭넓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2. 비판적 실재론
비판적 실재론에 앞서 계몽주의적 사고에 기반을 둔 인식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실증주의적 입장이 취하는 낙관론인데, 실증주의자들은 우리가 명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적어도 몇몇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참된 것들, 즉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확고하고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을 실제로 가질 수 있고 또한 갖고 있는 그런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런 것들은 경험적으로 즉 물리적인 세계 내에서 관찰하고 측정한 것을 통해서 검증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의 논리적 결론은 이런 식으로 검증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런 실증주의적 신념은 그 확실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주관성 또는 상대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최근 수십 년간 실증주의는 결정적인 비판을 받았고 그 주창자들도 입장을 상당히 수정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여 과학적 지식과 기술적 통제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함과 동시에 인간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과 신념들을 상대화시키는 서구적 세계관을 팽배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제들을 가지고 성경본문을 읽지만, 자신들은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고 주장하거나 예수에 관한 사실들 외에는 나머지는 주후1세기 사람들의 공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들 가운데 실증주의자를 상당히 만나게 된다. 실증주의가 계몽주의적 사고의 낙관적 인식론이라면 비관적 인식론이 현상주의다. 현상주의는 내가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직면했을 때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자신의 감각자료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론적 불신을 내포하고 있는 견해는 외적인 진술을 감각 자료들에 대한 진술들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들은 이제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 엄청난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진영 속에서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에 맞서서 나는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것은 인식 대상이 인식 주체와는 다른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즉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지만(그러므로 실재론) 이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간의 적절한 대화라는 나선형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그러므로 비판적) 인식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비판적 실재론은 실재에 대한 탐구의 산물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때문에 실재에 대한 진술들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지식은 원칙적으로 인식 주체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들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식 그 자체가 인식주체로부터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관찰자는 대상을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감각기관에서 받은 정보를 해석하는데 여기서 관찰자가 서 있는 위치와 대상을 바라볼 때 쓰고 있는 렌즈들은 관찰자가 속한 공동체와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제안하는 비판적 실재론은 특정 대상에 대한 지식이 세부적인 관찰 내용들이나 감각자료들 혹은 외부의 실재에 대한 확신 있는 진술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된 관찰자의 존재방식을 형성하는 이야기 또는 세계관이라는 좀 더 큰 틀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비판적 실재론은 대상에 대한 경험적 자료들로부터 연역해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대상들에 사람들이 지닌 특정한 이야기들이 부합할 때 지식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모형에 의하면 가설은 관찰자가 접수한 감각자료들을 토대로 구성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가설을 확증 혹은 수정되거나 아니면 무너뜨릴 더 많은 감각자료들을 찾아 나선다. 이것은 오도된 것이며 오직 감각자료들 만으로 가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설을 세우기 위해서는 좀 더 큰 클, 세계 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들에 대한 좀 더 큰 규모의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가설에 대한 검증도 무작위적인 감각자료들을 관찰하여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이야기들을 토대로 그 가설의 특정한 측면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3. 이야기, 세계관, 지식
이야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양식들 중의 하나이며, 인간의 행위들은 행동으로 옮겨진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전체적인 이야기가 더 기본적인 범주이고, 특정한 순간이나 특정한 사람은 그런 전체적인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인간들이 스스로 혹은 서로가 말하는 묵시적 혹은 명시적 이야기들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그런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관은 이야기, 상징, 실천, 기본적인 질문과 대답들이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야기가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 요소다. 세계관은 인간이 현실을 인식하는 수단 역할을 하는 격자망과 같은 것이며, 이것은 신념이나 목표라는 형태로 인간의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관 자체를 특징짓는 이야기는 가시적 형태를 지닌 신념이나 목표들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이다.
이야기들이 세계관의 근본적 요소라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세계관에 잘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글에는 아주 간단한 속담이나 경구라 할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계약의 신, 세계, 이스라엘에 관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라는 하부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신약성서에 적용해보면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일반적 세계관의 한 특정한 변형을 가진 유대인들의 특정한 집단은(초기 그리스도인들) 유대인의 세계관을 특징짓는 소망이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며 그 변형된 세계관을 유대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의 나라가 예수로 말미암아 계시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기독교가 처음부터 사사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 대한 이야기 즉 공적진리를 제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이야기에서 중립적인 혹은 객관적인 증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지금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보다 세계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주장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외부의 현실을 인식할 때 이미 존재하는 틀 안에서 인식하게 되는데, 이 틀이 주로 세계관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세계관들은 특정 유형의 이야기들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실증주의나 현상주의가 잘못된 것은 좀 더 큰 현실을(세계관) 파악하기 이전에 인식이 선행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세부적인 감각인식들은 이야기들 내에서만 일어날 뿐 아니라 이야기들 내에서 검증된다. 실증주의 전통에서 사실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거기에 부수된 이론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론들이 다름 아닌 사실들을 포함하는 틀로서 작용하는 이야기들이다. 결국 경험주의 전통의 낙관적 형태(실증주의)이든 비관적 형태(현상주의)이든 관찰자와 대상간의 대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중립적이며 초연한 입장이 아닌) 사건들(초연하거나 무의미한 대상들이 아닌)간의 대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한쪽에는(관찰자) 사람들이 세계에 대하여 암묵적으로 말하고 이야기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대상) 사건들 및 그 구성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대상들에 함축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최초의 관찰”(이미 이야기 속에 있는)은 이야기를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 의해 도전을 받지만(현실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잘못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야기의 계속을 통하여 새로운 이야기 또는 수정된 이야기를 사용하여 세계에 관하여 참되게 말하는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있다.”
4. 맺는 말
안다는 것은 앎의 대상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앎의 주체”가 “앎의 대상”이 자기가 예상하거나 접수했던 것ㄱ하 다른 것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고(지식의 잠정성을 인정하는 것) 단순히 거리를 두고 초연히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대상에 따라 반응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제시하는 비판적 실재론은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된(detached) 인식론과 반대되는 관계적(relational) 인식론이다. 현실에 대한 참된 설명에 도달하는 수단인 이야기들은 인간과 그 밖의 나머지 실재(물론 다른 인간을 포함한)의 상호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비판적 실재론이란 모형은 개인의 감각자료들을 뛰어넘는 지식의 실재성을 확보해줌(객관주의)과 동시에 앎의 주체가 앎의 행위에 개입하는 것을(주관주의) 보장해준다. 나는 이 모형이 신약학이란 미궁을 해쳐나갈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3장 문학, 이야기, 세계관의 표현]
N.T. 라이트/NTPG
2015-06-17 13:59:40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
3장 문학, 이야기, 세계관의 표현
1. 들어가는 말
초기 기독교, 예수, 바울 특히 기독교 및 거기에 속한 개인들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문학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문학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작용을 하며 또한 문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문학과 관련된 문제는 세 가지로 제시힐 수 있는데, 첫째는 텍스트 읽기 자체와 관련된 문제, 둘째는 문학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셋째는 비평의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문학작품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을 새롭게 읽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올바른 읽기란 무엇이고 그러한 읽기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2. 텍스트 읽기에 대하여
결국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떤 종류의 지식을 얻는가하는 것이다. 이제는 텍스트 읽기라는 현상이 소박한 차원 이외의 그 어떤 차원에서도 매우 파악하기 어려운 현상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대한 문학작품들과 성경을 어리둥절할 정도로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읽어 왔다. 소박한 실재론이 스스로 텍스트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건이나 대상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현상론적으로 텍스트를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단순히 저자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텍스트 읽기라는 현상과 관련된 모든 부분들을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해서 설명해 내는 것이다. 실증주의와 현상주의가 가는 두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읽기라는 현상 전체를 인간 의식의 이야기성 및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이론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는 세계 및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에 관한 어떤 이야기들을 하는데 바로 그 이야기 속에서 텍스트 읽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독자/텍스트 단계에서 독자는 특정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과 텍스트는 독자에 따라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 독자적인 실재라는 사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텍스트 읽기 이론이 필요하며, 또한 그 이론은 텍스트/저자 단계에서 저자는 특정한 것을 의도했다는 사실과 텍스트는 저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독자도 생각지 못한 어떤 것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다루는 이론이어야 한다.
지식을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피조 세계 안에서 책임 있고 지혜롭게 행할 책임의 일부로 보는 인식론은 문학의 차원에서 비판적 실재론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건들에 전능자적 관점이라는 허구나(실증주의) 사건을 의미 또는 인식으로 환원시키는 잘못을(현상주의) 모두 거부해야 한다. 이것은 독자가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텍스트 자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훌륭한 독자는 텍스트와 씨름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인데, 그러나 독자가 아무리 텍스트 자체를 근접하게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그 읽기에서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의 원칙은 타자로 하여금 타자이게 내버려 두는 것, 타자와 관련하여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인데, 이 원칙을 텍스트 읽기의 세 단계(독자/텍스트, 텍스트/저자, 저자/사건)에 적용하는 것을 사랑의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나는 사랑의 해석학을 통해서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텍스트가 만물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독자의 읽기가 단순한 중립적인 관찰이 아니라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 둘째, 텍스트가 모종의 독자적인 삶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저자는 원칙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의도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 셋째, 텍스트에 묘사된 것들이 원칙적으로 공적인 세계 속에 있는 행위와 대상일 수 있다는 것과 동시에 저자가 그것들을 특정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의 각 단계에서 오해가 일어날 수 있고 또한 오해가 불가피한 대화가 일어나는데,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려고 노력한다면 외적인 실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실제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 실재론이며 나는 비판적 실재론 대신에 사랑의 인식론, 혹은 사랑의 해석학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사랑의 해석학이야말로 텍스트, 역사, 그리고 복음서의 복합적인 성격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3. 문학에 대하여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중립적인 묘사로 인식되었으며 현상론자들에게는 문학은 주관적인 감정의 집합체로 여겨져 왔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의 대안으로서 문학을 세계관의 표현 혹은 세계관들을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하는 행위로 보자고 제안한다. 문학 비평의 과제는 문학 안에 내재된 이야기의 차원에서 저자가 무엇을 이루었고, 궁극적으로 내재된 세계관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세계관을 내재하는지를 드러내고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실증주의적 비평학자는 비평의 목적은 텍스트의 올바른 또는 진정한 의미가 존재하며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고 현상론적인 독자들은 그런 것을 결코 존재하지 않고 무수한 서로 다른 읽기들이 존재할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한 텍스트 읽기는 독자의 관점과 배경을 인정하고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텍스트는 독자와 독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는 저자와 독립되어 존재하며 나아가 그 텍스트 안에는 가장 심층적인 의미의 이야기들, 세계관들이 존재함을 인식한다.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한 텍스트 읽기는 스스로를 항상 개혁해가는 보편적인 읽기이며 나아가 도전과 수정과 전복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자신과 공적 세계에 대하여 진실하고자하는 읽기다. 이 말은 텍스트를 독자 자신에 대한 역사적 타자성 및 초시간적 연관성 속에서 검토함과 아울러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관계를 인식하면서 텍스트를 읽는 것을 의미한다.
4. 이야기의 본질
주후 1세기의 유대교나 기독교 문학의 대다수 텍스트들은 이야기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야기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이야기의 서사 구조다. 그래서 유대교와 기독교 문학에 나타나는 유대적인 세계관의 이야기화된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주후1세기에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논쟁들에서 당면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 당면 문제는 추상적인 교리를 놓고 다투는 신학적인 논쟁도 아니고 율법을 놓고 다투는 유대인의 논쟁도 아니고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신, 그의 백성,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가르치는 방식이었는데, 이 이야기는 순수하고 추상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진리들을 단순히 예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시 예수의 말을 듣는 청중들의 세계관을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초대하는 방식이었다. 세계관을 이야기로 나타내는 방식은 유대교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 이유는 유대교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한 분 신에 대한 신앙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신을 가장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이 이야기다.
한 분 창조주 신에 대한 유대교의 신앙은 아주 자연스럽고 특징적으로 실재 세계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창조 및 계약의 신과 관련된 유일신론자들이 그들의 세계관과 관련하여 말하는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은 역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후1세기의 유대인들이 말한 이야기들이 실제로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양식면이나 내용면에서 그 이야기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관점은 초기 기독교의 이야기들에도 그대로 적용되므로, 복음서가 그들의 역사나 신학을 떠나서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고대의 세계관을 어떻게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불러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발견하고, 불러낸 그 세계관을 분명히 논의하며 그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움직임들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혹자는 바울은 이야기 양식을 거부하고 하나님, 예수, 성령, 이스라엘, 세계를 추상적인 용어들로 논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이야기 세계를 뒤로 하고 추상적인 헬레니즘의 사변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신학적인 진술이나 논증들도 사실 예수를 중심축으로 하여 다시 끌어 모든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이야기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바울의 빈번한 진술들은 사실 예수 이야기라는 형태로 농축된 하나님, 이스라엘, 세계에 관한 이야기 전체를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구약성서를 반복하여 인용한 것은 단순한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이야기들을 새롭게 읽는 방식들을 제시하고 예수 이야기 속에서 구약성서의 절정을 발견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4장 역사와 주후 1세기]
N.T. 라이트/NTPG
2015-06-17 14:00:00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
4장 역사와 주후 1세기
1. 들어가는 말
나는 여기서 역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하여 논증하고 이러한 입장을 본론에서 다룰 주요한 역사적 문제들에 적용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역사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역사는 역사 너머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점을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역사와 관련하여 말한다면, 신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고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신학을 고찰하면서 기독교의 기원을 다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건으로서의 역사와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의미를 혼동하게 되면 상당한 좌절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역사는 순수한 사실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관적인 해석들도 아니며 역사는 사건들과 의도들에 관한 의미 있는 담론이다.
2. “단순한 역사”의 불가능성
특정한 관점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사건들의 연대기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단순히 기록하겠다는 계몽주의의 위대한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도 모든 역사가 선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며 그러므로 과거에 관한 어떤 진술을 할 경우 사람들은 거대한 선별 작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해석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개입된다. 그러므로 겉보기에는 순수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듯이 보였던 말은 실제로 다면적인 해석의 산물이다.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한 사람은 비평적 사고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고대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의 권위들에 의거하기를 거부한 계몽주의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차이를 발견해낸 우리 자신이다. 이데올로기를 과거에 투영하여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은 고대의 현상일 뿐 아니라 오늘날이 현상이기도 하다.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자들이 역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두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유대교에 대한 연구는 유대교는 잘못된 종교로서 복음의 영광스러운 빛에 대한 어두운 배경일 뿐이라는 전제를 가진 읽기에 오랫동안 수없이 시달려 왔는데 이제는 그런 읽기에 대한 정당하고도 날카로운 반발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유대교에 대한 원자론이고 비신학적인 읽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는 여러 세기동안 대다수 저술가들의 신학적 선호에 따라 내용들을 조직하고 자료들을 쥐어짜내 사이비적인 형태로 만들어 왔다. 유대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원자론적인 읽기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3. 이것은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가의 과제가 너무도 복잡하고 단순한 관찰과는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일부학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실들”과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이것은 현상학적 인식론을 가진 역사의 추론이다. 실재의 사건들이 특정한 사람의 감각들의 혼합 아래에서 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어떤 역사가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가 제시하는 정보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런 편견을 경계하고 가능한 많은 자료들에 비추어서 그 내용을 평가하면 된다. 어떤 사람이 “관점‘을 가지고 내용을 선별하거나 특징적인 문체나 표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렌즈를 통해서 보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 세계 속에 대상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가 실제로 그 대상들을 보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래서 통일된 인식론을 위해서는 언어 외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실재론을 채택하는 것이다.
이것을 복음서에 적용해 보면 복음서 기자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을 강력한 가능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동일하게 유효하거나 적합한 것은 아니며 비판적 실재론이 제대로 적용되면 어떤 시각들은 다른 시각들 보다 정보를 더 정당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모든 역사적 설명들에는 해석이 필연적으로 들어있는데, 관건은 그런 해석이 사건의 총체성을 드러내서 사건의 모든 실체와 의미를 밝혀주는가 아니면 사건을 형체도 없이 뭉개버려서 사건의 실체와 의미를 닫아버리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학자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실제 사건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한 이유는 기적에 대한 거부감, 그러니까 복음서를 진지한 역사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문화 또는 전승이든지 사건들에 대한 기사에는 전설적인 요소들이 달라붙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므로 통상적으로 예상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런 거부감은 18세기 합리주의적 세계관이나 20세기 실중주의적 세계관의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복음서들을 비평학 이전의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읽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역사는 실증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이상의 것, 즉 사건들과 의도들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복음서들을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읽고자 한 요인은 기적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연구라는 변화와 도전들을 두려워하여 수용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의 토대를 역사에서 구하는 것은 신앙을 공로로 변질시키는 것이고 신앙을 거짓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초기 기독교가 철저히 비유대적인 아마도 영지주의적인 전제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일 경우에만 타당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체적으로 불트만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유대적이었던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신앙의 본질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토대를 사건들에 두는 것이 신앙을 공로로 변질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의심이다. 불트만 이후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들을 어떻게 해야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그 외부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추구함으로 복음서의 이야기를 왜곡시켜왔다. 그들이 만든 “무시간적 예수”라는 신화는 거기에 맞지 않는 모든 부분을 잘라내 버리는 잣대로 사용되고, 그 결과 우리는 실제의 역사적 장소 및 시간과의 중요한 연결 관계들을 상실해 버린 “역사적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역사, 구체적으로 복음서들과 관련하여 흔히 행해져 왔던 다음과 같은 전제들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실제”역사는 복음서들에 내재된 해석적 특히 신학적 요소들을 훼손할 것이라는 라이마루스 이후로 보편화된 개념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역사에는 해석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복음서 기자들이 우리에게 신학적인 것을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경청해야지 우리 자신의 관점 특히 중립적인 또는 실증주의적인 관점을 자동적으로 옳을 것이라고 전제하면 안 된다. 역사는 신학을 배제하지 않으며 역사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을 필요로 한다. 둘째로, 복음서들은 철두철미 신학적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덜 역사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 복음서들이 해석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는 실재한 사건들에 대한 해석이다. 신학은 역사를 배제하지 않으며, 사실 신학은 역사를 필요로 한다. 셋째로, “의미”라는 말을 역사에 적용할 때에 기본적인 차원에서 역사의 “의미”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의도성에 있다.
4. 역사적 방법론 : 가설과 검증
역사적 방법론은 다른 연구 방법론들과 마찬가지로 검증이 필요한 가설들을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특정한 가설을 다른 가설들에 비해 좋은 역사적 가설이 되게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설이란 본질적으로 특정한 일련의 현상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제시되는 인간의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이런 현상들에 대한 해석일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는 바로 그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따라서 좋은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로 좋은 가설이 되려면 자료들을 포괄해야 한다. 여러 가지 증거 단편들을 억지로 짜 맞추지 말고 그대로 통합하여야 한다. 둘째 좋은 가설은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좋은 가설의 이 두 측면(단순성과 통일성)은 언제나 서로 긴장 관계에 있다. 일부 자료들을 희생시키고 단순한 가설을 세우기 쉽고, 아니면 모든 자료들을 설명하려고 대단히 복잡하고 뒤엉킨 가설을 제시하기 쉽다. 이런 위험성은 신약성서 연구 특히 예수에 대한 연구에서 비일비재하다. 세 번째는 모든 자료들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되는 이야기는 다른 관련 분야들을 설명하는데도 효과적임이 입증되어야 한다.
5. 사건에서 의미로
역사는 특정한 종류의 진정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하는 인간 공동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들에 적절하게 답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한 잠정적인 판단들을 형성한 다음에 자료들과의 추가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이 판단들을 실험하는 나선형의 인식과정을 통해서 도달된다. 그러나 역사에 특유한 세 가지 차원의 이해가 추가적으로 존재한다. 첫째로 역사는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는 물리적 사건들이란 의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성에 대한 연구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일어난 사건들의 이면에는 인간의 목표, 의도, 동기, 이에 따른 행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목표란 어떤 사람의 삶의 근본적인 지향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목표는 한 개인의 사고방식의 방향을 의미하고, 한 개인의 사고방식은 그 개인이 속한 사회가 취하고 있는 세계관의 개인적 변형물을 의미한다. 의도란 목표를 특정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기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위 또는 일련의 행위들을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만드는 특정한 의미를 가리킨다. 물론 특정한 동기들이 목표들 및 의도들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도 아주 높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적어도 목표, 의도, 동기간에 대략적인 일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건들의 이면에 있는 인간들의 목표들, 의도들, 동기들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끝으로 역사가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면 역사는 분명히 단순히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개개인들의 사고방식이란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관련된 사회들의 세계관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런 것들을 포괄해야 한다. 그러한 연구는 특정한 사회가 지니는 상징들, 특징적 행동, 문학, 특히 그 사회가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말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제 우리는 초기 유대교 및 기독교 문학에 대한 연구와 그 문학들을 토대로 역사를 쓰려는 시도를 포함하는 이 프로젝트의 주된 작업을 지탱해 줄 만큼 든든한 토대들을 놓았다. 나는 관련된 사람들 및 사회들의 세계관, 사고방식들, 목표들, 의도들, 동기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역사를 비판적 실재론에 의거해서 읽는 것은 적절하고 원칙적으로 가능한 일임을 논증했다. 이제 초기 유대교 및 기독교에 관한 연구, 그것의 일부분인 예수 및 바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정지작업이 끝난 셈이다.
6. 주후1세기 종교운동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
이 프로젝트의 주된 초점은 주후1세기에 일어난 몇몇 종교운동들에 대한 역사다. 예수와 그의 의미, 바울과 그의 의미, 복음서들과 그의 의미를 다루려면, 우리는 우선 그러한 세계관들을 아주 선명하게 포함하고 있는 오늘날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요소들인 사람들과 운동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드라마 자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역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주후1세기의 유대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당시의 유대교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점을 올바르게 강조해 왔다. 그러나 주후1세기의 유대교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칫 일종의 원자론적 실증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게 되어 왔다. 어떤 텍스트를 그 자체만으로 살펴보고 그 텍스트의 사상 및 비전의 세계 속에서 그 텍스트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만 던질 뿐, 그 텍스트의 피상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그 텍스트에 좀 더 넓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큰 세계와 결부시키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또 그렇게 되기 쉽다. 우리는 제2성전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고 또한 그 근저에 있었던 세계관을 재구성하는 끊임없는 시도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시기의 유대인들이 누구이고 그들의 신이 어떤 분이며,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서로 및 그들 자신에게 말한 이야기들을 추적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방법론이라는 차원에서 이와 같은 문제는 주후1세기 기독교와 관련해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학계에서는 천박한 일반화의 자취를 띠라서 최근에는 원자론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유대교외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는 계몽주의 이후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에게 종교로 보여 왔지만 주후1세기의 범주들 속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은 그 공동체의 종교적 측면이나 초기적인 교리 문구들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총체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주후1세기 종교운동들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때, 사건들의 이면을 살펴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5장 신학, 권위, 그리고 신약성서]
N.T. 라이트/NTPG
2015-06-17 14:00:20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제2부 과제를 위한 도구들
5장 신학, 권위, 그리고 신약성서
1. 서론 : 문학 및 역사에서 신학으로
이제 신약성서를 읽는 과제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혹은 순수하게 역사적인 연구일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문학적인 연구나 역사적인 연구는 문화, 세계관들 특히 신학에 대한 폭넓은 고찰 없이 단독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목표는 문학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읽기를 건너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읽기들을 한층 빛나게 해주는 신학적 읽기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고 그러한 복합적인 읽기가 규범적인 또는 권위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하나의 모형을 탐색해 보는 것이다.
2. 세계관과 신학
실증주의 역사서술이 흔히 간과해 왔던 차원은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며 세계관은 어떤 관점에서는 대단히 신학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신학의 의미를 검토해야 한다.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 또는 사회의 인식 이전 단계인 전제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세계관이 존재한다. 세계관이 특징적으로 수행하는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세계관은 인간이 현실을 보는 수단인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둘째, 이러한 이야기들로부터 우리는 인간 실존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을 포함하는 이야기들과 정체성, 주변 환경, 악, 종말론에 관한 문제들에 대하여 그 이야기들이 제공해주는 대답들은 문화적인 상징들로 표현된다. 넷째, 세계관은 실천, 즉 세계 속에서의 존재방식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의 세계관의 진정한 모습은 흔히 그 사람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본능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행하는 행위들 속에 드러난다.
이와 같이 세계관은 인간 실존을 이루는 기본적인 재료로서 세계를 보는 렌즈,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에 관한 청사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도록 만들어 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것이든 우리가 연구하는 문화의 것이든, 세계관을 무시한 연구는 극히 천박한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세계관은 이야기, 실천, 질문들, 상징의 각 요소들이 상호 격자망을 이루고 작용하는데 첫째로 문화는 한 사회의 실천과 상징들을 가리키고, 물론 이 둘은 주도적인 이야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며 세계관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특정한 대답들을 반영한다. 둘째, 마찬가지로 파악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단어도 상징과 실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상징과 실천은 그것들 자체를 뛰어넘어 그것들에 좀 더 넓은 의미를 부여하는 주도적인 이야기를 가리키고 있다. 셋째, 신학은 질문들과 대답들에 초점을 맞추고 구체적으로 그러한 것들의 몇몇 측면들에 집중한다. 넷째, 상상력과 감성은 이야기와 상징 사이에 위치하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실천과 질문들에 깊이를 더해준다. 다섯째, 많은 문화들 속에서 신화는 신성한 세력들이 일상 체험의 속으로 지속적으로 침투해 들어온다는 것을 긍정하는 현실 인식을 반영하는 말하기 방식이다.
세계관은 집의 주초와 같다. 그래서 그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계관은 한 사회 또는 개인이 통상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통로다. 세계관은 사람이 현실을 파악할 때 그 현실의 일부가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격자망이다. 세계관은 통상적으로 꽤 명백하게 도전을 받거나 모욕을 받지 않는다면 의식이나 논의선상에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것은 통상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세계관은 도전을 받을 수 있고 필요하면 논의될 수 있으며 그 가치체계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세계관은 기본적인 신념이나 목표들로 가시화되며 이것들은 세계관을 표현함과 동시에 보호하는데 기여한다. 신념과 목표들은 세계, 자기 자신, 자기가 속한 사회, 자기가 믿는 신에 관한 부수적인 신념들과 의도들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것들은 여러 방향으로 발산되어 다양한 정도의 확신을 지니는 의견들과 동기들을 형성한다.
신학은 그 어떤 세계관인가와는 상관없이 그 세계관의 특정한 차원들을 집중적으로 밝혀준다. 신학은 이야기를 말하는 모종의 방식들을 제시하고 질문들에 대답하는 모종의 방식들을 탐구하며 상징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들을 제시하고 실천의 모종의 형태들을 제시하거나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 유물론적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 또는 적어도 그런 존재가 암묵적으로 위치해 있는 이야기 전개상의 도발적인 공간을 포함하는 이야기들을 말한다. 이러한 이야기 활동에 비추어서 신학은 신이 과연 존재하는지, 이 신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관계가 있다면 이 신은 이 세계를 바로잡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또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들은 분명히 세계관과 관련된 네 가지 주요한 질문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신학의 이야기 활동(story- telling) 및 문제제기 활동은 보통 사물들이든 행위들이든 상징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 사회 또는 문화의 상징들은 종종 여러 질문들에 대한 공식적인 이야기들 또는 권위 있는 대답들보다 실제의 세계관에 관한 좀 더 진정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 상징과 이야기가 서로 부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이유를 물어서 정도에서 벗어난 쪽을 비판하는 것도 신학의 과제중의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신학은 모든 점에서 세계관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신학은 단지 언제나 인식되는 것은 아닌 의미를 현실에 부여하고자 시도하는 기발한 방식인 메타언어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신학은 시공에 속한 현실을 뛰어넘는 진정한 실재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린 다시금 비판적 실재론을 떠 올려야 한다. 종교 및 계시에 관한 언어는 실제로 인간 의식 속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고, 따라서 억압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모든 언어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신에 관한 언어를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신에 관한 언어가 그 대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은유 자체가 단순한 은유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하는 작은 이야기들이다. 그러한 은유들과 이야기들은 사실 겉보기에 사실을 말하는 언어보다 인간의 의식 속에서 더 기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신에 관한 언어의 본질적인 이야기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 대상의 실재성을 단언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물론 신에 관한 언어가 대상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신 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가 참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학은 특정한 세계관 중에서 신과 관련된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수많은 사상가들, 정치가들 심지어 성서학자들조차 신학을 일련의 미리 설정된 추상적이고 교리적인 질문들에 대한 일련의 답변들로 취급하여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신학은 그런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신학은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 세계관과 관련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 세계관을 문화 속에 표현하게 해주는 상징 세계, 세계관이 발생시키는 실천적 과제들 속에서 본질적인 구성요소다. 그런 까닭에 신학은 문학과 역사에 대한 연구, 따라서 신약학의 양보할 수 없는 일부를 이룬다. 사람들의 사고 체계가 무엇이든 신학적이든, 유사신학적이든, 우리는 신에 관한 언어 및 그 언어가 세계관 속에서 차지하는 해당 문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부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에 관한 언어는 어떠한가? 신약성서 기자들이 사용한 언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초기 기독교와 주후1세기 유대교 신학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 관하여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신에 대하여 기독교적으로 말하는 것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독교적 신학인가? 신학은 필연적으로 규범적인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신학 작업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신과 이 신이 창조한 세계를 서술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그런 것들에 관하여 말하고 그러한 것들에 참여하는 한 방식을 장려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들이 마땅히 믿어야 하는 것도 포함할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매우 오만하게 보인다는 상대주의자들의 반응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현실 전체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면 그런 기독교 신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단지 모든 다른 세계관들과 그 부수적인 신념체계들이 행하는 바로 그런 것을 할 뿐이다. 기독교 신학은 현실 전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학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지난 두세기 동안 두 가지 방식이 널리 사용되었는데 첫 방식은 무시간적인 진리들 또는 명제들을 배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결을 통해서든 통합을 통해서든 세계의 현재적 관심사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나는 지금까지 서술해 온 인식론 모형과 서사 신학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다소 다른 길을 가고자 한다. 네 가지 질문(이야기, 질문들에 대한 답변, 상징들, 실천)과 관련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간략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신학은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통일적으로 하고자 한다. 그 이야기는 창조주 및 그의 창조, 이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과 그 인간에게 수행하라고 주어진 과제들, 인간의 반역과 모든 차원에서 피조물들과의 불화, 특히 이에 따른 곤경으로부터 자신의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특히 그 절정에서 예수를 통하여 창조주가 역사하신 것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창조주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영을 통해서 세상을 위한 본래의 목표였던 회복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역사로 이어진다.
둘째, 세계관에 관한 근본적인 표현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이 이야기는 세계관과 관련된 다음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일련의 답변들을 제공한다.
(1)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지위에 걸맞은 책임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종, 성별, 사회적 계층, 지리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또한 우리는 결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장기 게임의 졸들이 아니다.
(2)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신의 피조물인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 속에 있다. 우리는 영지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낯선 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신으로 섬겨야 할 우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3)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인류는 창조주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반역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우주적 균열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세계는 그 창조된 의도를 벗어나 있다.
(4) 해법은 무엇인가?
창조주는 인간의 반역에 의해 시작된 악을 처리하고 그의 세계를 원래 의도했던 목적으로, 즉 세계가 창조주의 임재와 영광을 충분히 드러내도록 이끌기 위하여 그의 피조세계 내에서 역사하셨고, 역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역사할 것이다. 물론 신의 이러한 행위는 예수 및 창조주의 영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죽 우리는 이 문제의 한 부분만을 대변하는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해법들을 거부한다.
셋째, 이러한 세계관은 공예품들 및 문화적 사건들이라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상징들을 통해서 표현되어 왔다. 기독교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들과 마찬가지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적절하게 질서를 따라 영위해 나가고, 세게 및 그 안에서 그들이 할 일들을 어느 정도 통일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상징들을 가지고 있다.
넷째, 기독교적 세계관은 특정한 유형의 실천, 즉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특정한 방식을 탄생시킨다. 실제로 기독교의 경우에 이것은 세상을 위한 존재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은 피조세계를 돌보려는 창조주가 사용하는 수단의 일부이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창조주가 사용하는 수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질문(이야기, 질문들에 대한 답변, 상징들, 실천)과 관련하여 간략하게 서술해 본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은 이번에는 세계관 자체보다 좀 더 의식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신념들의 체계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이라 불리는 것의 상당수는 기독교 세계관 자체의 차원이 아니라 기본적인 신념, 또는 부수적인 신념의 차원에서 논의들과 논쟁들을 다룬다. 그러나 신학적 연구가 자신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세계관으로부터 모든 수준의 신념에 이르기까지 전체 범위에 관한 연구를 반드시 포함하여야 한다. 이러한 대규모의 신학적 과제를 위해서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연구가 필수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오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사적인 언어나 은밀한 신비가 아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포함해 모든 세계관들은 원칙적으로 공적인 진술들이다. 모든 세계관들은 다른 세계관 및 그 이야기들을 전복시키거나 도전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특히 기독교의 주장은 철저히 공적인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은 창조주 및 그가 지은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 신학이 이 이야기가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구출해내는 신에 관한 이야기로 잠깐 동안이나마 변질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그 세계관에서 극히 근본적인 것을 포기하는 셈이 된다. 초기의 교부들 중 다수는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영지주의를 거부했던 이유다. 사실 영지주의의 이원론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공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왜냐하면 세게는 파멸의 장소이고 사람들을 거기서 구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할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원론을 극복한다면 기독교의 주장은 한층 더 분명한 공공성을 띠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학은 어떤 종류의 말을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 하나님이신 창조주이자 구속주인 신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신은 자연신론적 신도 아니고 범신론적 신도 아니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고 지탱하여 세상 속에서 활동하지만 세상 안에 갇혀 있지 않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을 적절한 방식으로 즉 기독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표현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하도록 위임받고 있다. 그리고 신화를 포함한 이야기와 은유들은 청중들을 이 렌즈를 통해서 좀 더 분명하게 사물들을 볼 수 있는 세계 속으로 초대하는 작은 이야기들이다. 기독교적인 비판적 실재론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이야기와 은유는 인간의 자기기만의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이자 구속주인 하나님과 관련된 말을 진정으로 할 수 있는 방식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찬양과 예배, 선포 그리고 신학을 포함할 것인데 이는 기본적인 신념 또는 부수적인 신념의 차원에서 기본적인 세계관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그 세계관을 밑받침하며 필요한 경우에 그 세계관을 수정하고 오도할 가능성이 있는 대안들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모든 세계관들에 의하여 제기되는 질문들에 신학적, 문화적 상징들을 통하여 대답할 것이다. 아울러 그것들은 역사에 관한 말들이 될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밖의 몇몇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만유의 창조주는 역사의 주이기도 하다는 신앙 및 기독교에 특유한, 신앙 즉 창조주가 그 결정적인 역사를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영을 선물로 줌으로써 실행하였고 창조주는 이 일을 최종적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을 통해서 완성할 것이라는 신앙 속에서 진지한 역사 작업을 수행할 것임을 의미한다. 끝으로 기독교 신학자는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참된 말을 하도록 위임받았다. 기독교 신학자는 전적으로 진리에 헌신되어 있지만 오직 잠정적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진리의 잠정성과 진리에 대한 통찰의 부분성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 자체 및 그 세계관이 발생시키는 목표들과 의도들 내에서 신앙과 소망 그리고 (항상 일치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필요하게 된다.
이제 모든 연구, 텍스트 읽기,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은 특정한 세계관 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해석자에게 세계관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어려운 일을 강요하는 듯이 보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은 최근 수십 년 동안에 계몽주의 이후의 모더니즘적 관점에 서서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비롯한 학문 작업에 참여하라는 압력을 느껴왔다. 이런 압력은 계몽주의 이후의 세계관 자체가 주는 인상, 즉 종교적 견해에 관한 문제들은 공적 세계와는 상관없는 단순한 사적인 선택사항일 뿐이라는 인상에 의해서 더욱 강화되어 왔다. 계몽주의의 모더니즘과 기독교, 이 양자를 포함한 모든 세계관들은 공적이고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관들은 다른 세계관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세계관들은 서로 겹치게 마련인데 관건은 어느 세계관의 설명이 의미를 가장 잘 밝혀 주는가 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모더니즘은 기독교는 단순한 사적인 종교적 선택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자기 안에 포섭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계몽주의의 질문들을 온전히 수용해서 그 질문들을 가지고 작업할 수 있다고 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기독교가 역사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면 기독교는 역사 연구를 하면서 계몽주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족시켜야 한다. 그것은 실증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한 중립적인 또는 객관적인 역사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실제 사건들의 외면만이 아니라 이면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역사에 호소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자체가 바로 그러한 역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과 성서학은 서로가 필요한 공생관계에 있다. 성서학은 신학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오직 신학적 도구들을 통해서 역사적 주석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계획했으며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는 몇몇 신념들과 목표들을 소중히 여겼는데 이것들은 근저에 있는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또 성서학에 신학이 필요한 이유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당시 문화에 대한 전적으로 신학적인 분석의 도움을 받아야만 그들 자신의 질문들, 전제들, 목표들, 의도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거론하는 것은 진지한 역사적, 비평적 주석과정을 생략하고 이미 짜인 대답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도식을 호출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학은 역사 비평가가 자신의 목표 및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자유롭게 역사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학에는 성서학이 필요한데 이는 어떤 신학이든 그 신학의 주장들은 조만간 성경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과 접촉 또는 갈등을 하게 되어 있고 그런 경우에 그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쟁 상대들에 의해서 제기된 도전들을 물리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기독교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와 그 이야기 속의 하위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경을 임기응변식으로 사용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단편들을 도식에 적당히 짜 맞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학에서 성경의 증거본문 또는 증거가 되는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면 신학은 그런 본문들의 특징을 이루는 견고하고 용기 있는 신앙은 빼버린 최악의 현상을 재현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후1세기의 세계를 연구하고 그 속에서 예수와 바울, 복음서들을 연구할 때에 우리가 계몽주의적 세계관 또는 오늘날의 세속문화 속에서 제안하는 그 어떠한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채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 비평을 거부하자는 것도 아니고 잠재적인 불일치들 및 대안적인 읽기들을 회피하고 사적인 영역 속으로 후퇴하자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제안한 방식으로 인식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계몽주의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관점들을 제시해 줄 것이다. 신약성서에 대한 좀 더 온전한 읽기는 예수를 배제하지도 포함하지도 않고 예수를 그냥 전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이야기가 공적 역사 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전제하는 가운데 예수 이야기를 하는 과제를 그 자체의 아주 중요한 일부로 포함시킨다.
3. 신학, 서사, 권위
이제 이 과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 즉 내가 지금까지 논증한 신약성서를 읽는 방식을 채택하면 우리는 현대 이전의 기독교 독자들이 전제했던 것 그리고 현대주의자들이 그토록 많은 문제점을 느꼈던 것, 즉 신약성서를 권위 있는 책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것은 모더니즘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교리에 대한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을 성경본문의 본질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기한 바 있다. 이렇게 성경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모더니즘 자체 내에서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좋든 싫든 모더니즘적인 신약학의 세계 속에는 성경에 대한 서술적 읽기와 규범적 읽기를 구분해야한다는 실제적인 합의가 존재해 왔다. 만일 우리가 사실로부터 당위로 옮겨가고 과거에 대한 서술로부터 권위 있는 진술로 옮겨가야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연구 자체의 외부에서 행해지는 선택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연구와 부합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부여해 왔던 그러한 권위를 신약성서가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어떤 다른 모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이야기들은 어느 경우이든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고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이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야기들이 어떻게 권위를 실어 나를 수 있는지 또는 실어 나르는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자는 것이다. 이 모형과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 이야기를 5막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1막-창조, 2막-타락, 3막-이스라엘, 4막- 예수, 그렇다면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는 제5막의 첫 번째 장면이 되고 동시에 이 연극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에 대한 단서도 제공해 줄 것이다. 제4막이 현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중간 단계들을 밝히지 않고도 이 드라마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존하는 이야기의 권위 아래에서 살면서 의도된 결말로 향해 가는 마지막 제5막을 스스로 쓰면서 연기를 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형에 의하면 교회는 창조주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무대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최후의 제5막을 쓰는 것의 일부로서 앞서의 여러 막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그 작업을 수행하는 동안에 항상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조와 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였고 예수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시각에서 보면 역사적 신학과, 신학적 역사를 포함한 역사의 과제는 성경의 이야기 자체 속에서 이미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우리는 사람들이 제5막의 나머지 부분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만큼 1-4막 또는 실제로 제5막의 처음 부분을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바로 이것이 신앙과 순종이 본질적으로 여전히 모험에 속하는 이유이다. 교회의 역사,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 예수의 공생에 동안에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대한 잘못된 읽기를 토대로 그 속편들을 썼음이 드러난 개인들과 집단들과 운동들에 관한 많은 예들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반적으로 그러한 것을 수행하는 과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배우들이 여전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둘째는 분명히 기독교의 이야기 속에서 제4막(예수 이야기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은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성경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에 제5막에서 말할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는 반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대답은 우리는 제5막의 과제의 일부-부활 사건 이후에 복음서들의 저술을 포함한 가장 초기의 교회에서 시작된 과제-는 처음 4막, 좀 더 구체적으로 제1-3막에 비추어서 4막의 의미를 반추하고 도출하며 실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제4막은 그런 추가적인 작업을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한 성찰과 활동은 단순히 제4막의 이야기 표면에 나타나는 관념들을 읽어내서 제5막에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적으로 제5막을 충실하게 쓰기 위해서는 제4막에 나오는 주장들의 성격이 과연 어떤 것이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함해서 앞서의 내용(제1-3막)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꼼꼼하게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대답은 나는 이 문제가(4막의 이야기) 입증할 필요가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이 가진 전제는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실제로 그러한 절정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신앙이 성경 본문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학계의 일부 분파들의 반역사적인 성향에서 나왔다고 본다. 기독교의 가장 초기의 증인인 바울은 분명히 현재적인 성령의 사역을 과거에 예수께서 이루신 일과 끊임없이 결부시킨다.
4. 맺는 말
요약해 보면, 나는 실증주의적으로 인식된 신약성서, 신약성서 신학, 초기 기독교 역사 등과 같은 것에만 부여되는 권위가 아니라, 신구약성서에서 반복되어 언급되었으며 여전히 그 완성이 필요한 이스라엘 이야기 및 예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창조주, 신 자신, 세상과 이 신에 관한 이야기에도 부여되는 권위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신학적 담론에서 논의되는 개념들 보다 훨씬 더 복잡한 권위 개념이다. 우리의 전체적인 과제는 통상적으로 신약학에서 배제되고 있는 구약성서 신학에 관한 논의와 유대교 및 기독교 전승 외부의 세계에 대한 고찰을 포함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당면한 목표는 신약성서 특히 예수와 바울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탐구가 우리의 목표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탐구의 역사적 맥락을 가급적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독교 탄생의 배경이 된 유대교, 그 다음에 바울과 그의 저술들의 배경을 이룰 뿐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를 기억하고 예수에 관하여 글을 썼던 초기 기독교 자체를 연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