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의학(3/3)- 헤르만 바빙크
41장 죄의 기원
2014-03-17 17:05:29
죄는 피조계 전체를 파괴하여, 그 의를 죄책으로, 그 거룩을 부정으로, 그 영광을 수치로, 그 복됨을 비참으로, 그 조화를 무질서로, 그 생명을 죽음으로, 그 빛을 어두움으로 바꾸었다. 그 악은 어디서 왔으며, 죄의 기원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의롭다고 변호하고,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의 원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주장하는 지속적인 신정론(神正論)을 제시한다.
죄의 기원에 대해 성경은 언제나 피조물을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죄의 발생까지도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격리되거나 하나님의 작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특별 계시에 의하면 죄의 가능성을 창조했던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 하나님은 심지어 뱀이 여자를 유혹하는 것까지도 허락했다. 인간을 단번의 권능의 행위를 통해 죄와 죽음의 가능성을 초월하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유라는 위험한 길을 걸어가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죄가 처음에 땅이 아니라 하늘, 하나님 보좌의 발등상,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존 가운데 시작되었고, 천사들의 타락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 사탄을 통한 타락은 유혹은 인간의 타락을 초래했다. 성경은 죄의 기원을 오로지 이성적 피조물의 의지에서만 찾는다.
스토아학파는 자신의 범신론적 입장과 결정론적 입장에서 죄의 원인을 인간의 의지에 둘 수 없었기에,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전체의 질서와 아름다움 가운데 삽입시키려고 시도했다. 심지어 신(神)조차도 인간적 본성을 모든 결핍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죄는 질병과 재앙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며, 죄가 선을 위해 봉사하고 선을 산출하는 한 죄는 어느 정도 선한 것이었다. … 키케로(Cicero), 세네카(Seneca), 플로티누스(Plotinus) 등에게 항상 반복되었던 생각은, 죄란 의지의 행위이며 의지를 통해 다시금 없던 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기원은 존재에 대한 질문 다음으로 삶의 가장 큰 수수께끼이며 지성이 짊어지기에 무거운 십자가다. … 죄는 인간의 감각적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 하나님에 대한 교만, 질투, 증오, 적대감과 같은 마귀적 성격을 지닌 영적인 죄들도 있으며, 이것들은 잘 보이지 않지만, 육체적인 죄들보다 심각하다. … 바울은 육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일컬으며 모든 지체가 하나님의 병기로 드려질 것을 요구하고, 죽음 몸의 부활을 가르치며, 원칙적으로 금욕주의를 반대한다. … 인간의 감각적 본성이 죄 자체는 아니며, 또한 죄의 원천이나 원리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죄가 거하는 장소이며,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도구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기에 하나님 자신의 법으로 죄를 금지하며, 죄에 대해 인간 양심에 증거하며, 형벌과 심판으로 죄를 갚는다는 사실이다. … 죄는 ‘불법’이다. 죄는 피조물들의 실재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실재에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선은 필연적인데, 왜냐하면 심지어 죄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선은 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거룩은 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진리는 거짓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사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죄가 선을 더욱 드러내고 하나님의 미덕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주 쓰임 받는다면, 이것은 죄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그 의지와 상반된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으로 인해 발생한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는 상반되게 일한다.
비록 하나님이 단지 죄를 허용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왜 하나님이 죄를 막기를 원하지 않았는지 이유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식이나 능력의 부족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이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지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허용은 다시금 하나님의 의지의 행위다.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기를 원했다. … 그래서 진실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죄를 원하셨다. 즉, 하나님은 죄가 존재하기를 원하셨다고 언급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을 원하셨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악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선을 기뻐하셨으나, 악은 신적 증오로 미워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은 죄를 자기 손 안에 있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조금만 닿아도 스스로 오염되고 불결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과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죄를 다름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한 저항 없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 하나님은 악을 사용하되, 악을 범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피조계에 죄도 허용했다. … 하나님이 죄를 원했던 것은, 죄 가운데 그리고 죄에 대항하여 하나님 자신의 신적인 미덕들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확실하게 죄의 가능성을 원했다. 죄의 가능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죄에 대한 생각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의식에 담겨 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의 절대적인 반제로서 죄를 생각하여 그런 속성을 지닌 것으로 자신의 작정 가운데 포함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것은 결코 실제로 발생하고 실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하나님은 이 객관적 가능성과 일치하여 천사들과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도록 창조했다. 그들은 아직 최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 천사들과 인간은 “영원토록 유지하기 바랬던 은혜”가 아니라, “유지할 수 있었던 은혜”를 가졌다. 그들은 아직 최상의 상실할 수 없는 자유, 즉 더 이상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녔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제한되었고, 전적으로 완전하게 발전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죄의 가능성의 한계를 지녔다.
사탄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다가와,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에 맞추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일깨워 타락하게 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의 기원과 본질은 천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 인간은 마귀가 아니라 인간, 즉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하고 창조를 통해 살아 있는 영혼이 된 존재로서 범죄한다는 사실이다. … 영적인 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죄는 그의 육체적 본성과 일치하는 성격을 지니기에 천사들의 죄와는 다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따르면 타락은 창조 자체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이다. 죄는 하나의 현상으로, 그 가능성은 유한하고, 가변적인 존재들의 창조 안에 주어졌으나, 그 실재는 단지 피조물의 의지에 의해 발생될 수 있었다. 죄는 창조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하나의 능력으로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나, 불순종과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했고, 불법으로 창조 가운데 침입했고 창조에 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죄가 존재하고, 죄의 실재는 우연이 아니다.
42장 죄의 확산
2014-03-17 17:04:59
죄는 인간 위에 그리고 인간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에 확대된다.
첫 번째로 죄의 보편성을 아담의 불순종에서 해설한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이하에서 모든 사람의 죽음의 원인이 인간 아담 안에 있는 것처럼, 동일하게 죽음에서의 부활 역시 인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암시된 바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그들 개인의 죄로 인해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미 모든 사람에 대해 선언되고 모든 사람에게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와 모든 사람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의 죄책, 죄와 죽음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한 사람의 순종이 모든 사람의 의(義), 석방과 생명의 원인이다.
펠라기우스는 … 원죄를 부인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실천적인 거룩, 불멸성 등이 아니라 오직 자유로운 인격이다. 즉, 아담의 범죄는 인간에게서 이 하나님의 형상을 빼앗지 않았고, 사실상 아담은 전체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 원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자신과 그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죽음 외에, 특히 도덕적 능력의 약화였다. 비록 죄책으로서의 실재적인 원죄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유전병은 존재한다. 사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병이 들었다. 사람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악으로 기울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을 원할 수 있으며, 그래서 만일 그가 이 선을 원한다면, 그가 선을 성취하는 것을 돕도록 은혜가 주어진다. …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는 죄의 성격과 심각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죄는 불법이다.
이레나이우스, “우리는 첫 번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죄를 범하지만, 우리는 죽기까지 순종한 두 번째 아담 안에서 화목되었다.” / 암브로시우스, “아담이 살았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살았으며, 아담이 죽었고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죽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의 끔찍한 비참은 다름 아닌 죄에 대한 형벌로서 해설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모든 사람이 그 한 사람이었고, 우리 모두가 그 한 사람 안에 있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원죄는 단지 상실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 본성의 전적인 부패[원죄의 부가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 인간 본성의 부패는 전체적이어서 인간은 본성상 어떤 영적인 선을 행하기에 무능하고, 모든 악으로 기울어진 성향을 지니며, 단지 그것만으로 이미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마땅하다. … 개혁파 역시 원죄는 결핍적으로는 원의의 부족이고 부가적으로는 본성의 부패이며, 원죄의 원인은 전가된 아담의 범죄에 기초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취했던 순종을 마치 우리가 성취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 우리가 실질적으로, 잠재적으로, 생식적으로 아담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실재적으로 시험계명을 위반한 것은 아담이지 우리가 아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를 그들의 배후가 아니라 앞에 두고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류를 생성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자체를 유지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산출물이 아니라, 각각의 방식으로 인류의 시작이자 뿌리이며, 온 인류의 머리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결속의 법에 의해 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 자신의 존재로서 이 법을 해설한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육적 인류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
원죄는 인간 본성의 특성이며, 따라서 이 본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에게 고유한 것이다. …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존재하거나 최소한 존재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 주장은 성경에 의해, 경험에 의해, 모든 종교와 민족의 증거에 의해 논박된다.
원죄는 인간 전체를 지배하는데, 지성과 의지, 마음과 양심, 영혼과 육체, 모든 능력과 힘을 지배한다. 그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하고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 반드시 주목할 사실은 성경과 교회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가르침으로써 최상의 척도, 즉 하나님의 법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43장죄의 본질
2014-03-17 17:04:28
아담의 죄는 결코 사소한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근본적인 역전,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 하나님에 대항하는 혁명, 반란, 가장 실재적인 의미의 타락이 틀림없는 것으로, 세상 전체를 결정짓고 세상을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방향과 길로 인도하여 사악함과 부패로 향하게 한 “형언할 수 없이 커다란 죄”였다.
아담 이후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담과 같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아담부터 모세까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실재적인 법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법이 없다면, 또한 범죄, 죄와 사망도 존재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이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응답한 유일한 대답은 아담의 한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권세로서 세상에 들어와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그래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확산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기독교 국가의 법률에 따라 판단되어서는 안 되고, 심지어 다른 민족과 다른 환경 가운데 제정된 함무라비의 법률에 따라 판단되어서도 안 되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인도를 받아 처했던 독특한 상황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을 때 지녔던 그 백성에 대한 목적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 더 나아가, 민족 관습이 하나님의 법과 모순될 필요가 없을지라도, 민족 관습이 사실상 하나님의 법과 계속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결국, 죄의 본질은 이스라엘 가운데 통상적이거나 때때로 발생했던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규정된다.
예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을 모범으로 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판단한다. … 예수는 율법을 전적으로 견지하며, 율법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빼지 않으며, 바로 이 입장에서 모든 인간적 규례들을 판단한다. … 죄의 개념과 죄의식은 예수에 의해 예리해졌고 심화되었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인간적 규례들로부터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율법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율법의 영적인 성격을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 주고, 그 율법을 단 하나의 원칙, 즉 사랑으로 축소하여, 그 율법 전체를 단 하나의 것으로 나타낸다.
율법의 요구는 누구보다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 안에서 충족된다. 왜냐하면 이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알고 행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죄의 본질을 어떤 실체에서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 안에 있는 진노의 원리나, 하나님과 나란히 존재하는 악한 권세, 혹은 물질, 육체와 같은 어떤 물질로 한정하는 견해는 수용될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죄란 아직 존재가 아니며, 그것은 삶의 필연적 반제에 속하며, 유한하고, 스스로 발전하며, 완전을 향해 씨름하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고유하다는 이론도 역시 거부되었다. 이것에 대항하여 기독교 신학은 죄란 실체가 아니라고 처음부터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 다음과 같이 죄의 정의를 내렸다. “죄란 영원한 법에 거슬러 행하거나 말하거나 바랬던 어떤 것이다. 참된 영원한 법은 신적 의도 혹은 하나님의 뜻으로, 자연 질서의 보존을 요구하되 그 혼란을 금지한다.” 이 정의는 나중에 모든 사람에 의해 수용된다. 죄는 “단순한 혹은 순수한 결여가 아니라, 정당한 질서가 결여된 행동이며” “질적으로 그리고 행위적으로 실증적 결여이며” 능동적 결여다.
다른 모든 법들, 즉 심미적, 사회적, 정치적, 교회적 법 등의 위반은 단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도덕법,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위반을 포함하는 하나의 죄다. 인간의 창조 시에 심겨지고, 타락 이후에 그의 양심에 작용하고,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포되었고 또한 신자들의 삶의 규칙으로 지속되는 이 도덕법은 죄 인식의 근원이다. … 도덕법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뜻의 계시, 하나님의 존재의 표현이다. 이러한 도덕법의 성격으로부터 죄는 오직 이성적 피조물에게만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이성 없는 자연이 죄의 결과로 고통을 당할 수 있으나, 죄는 오로지 지성과 의지를 지닌 존재에게만 발생한다. … 도덕법은 무엇보다도 피조물의 의지를 위한 법이다.
사탄은 유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짓, 죄를 낳았고, 상습적인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사탄이 지은 죄의 속성은 자신이 결코 그 죄를 뉘우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도덕적 의식, 양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탄은 증오감으로 살아간다. … 사탄의 죄는 인간의 죄와 거의 비슷하다 할지라도 그 기원, 본성, 결과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 성격을 지니고, 사탄은 악에 대한 최고의 계시다.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 불순종, 반항, 무질서, 불법이며, 동시에 죄는 자기 자신에게 결코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향하며, 우상숭배, 교만, 자아추구, 육체적 감성으로 나아간다. … 원칙적으로 살펴볼 때, 그 어떤 죄도 작거나 사소한 것이란 없다. … 성경이 현세와 내세의 삶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죄는 성령훼방죄다. … 성령훼방죄는 단순히 불신앙에, 일반적으로 성령을 방해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에, 성령의 인성 혹은 신성을 부인하는 것에, 혹은 더 잘 알면서도 끝까지 범죄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것은 또한 율법을 거스르는 죄일 뿐만 아니라, 또한 특히 복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복음에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 … 이 죄 자체는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의심이나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지성의 확신, 양심의 조명, 마음의 직관에 거슬러 부인하는 것이다. … 그 근본은 하나님과 신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것에 대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증오다. 그 본질은 죄의 최고의 계시, 완전히 완성된 혁명, 하나님을 사탄의 자리에 놓고 사탄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그 성격은 더 이상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적인 것이다.
44장 죄의 형벌
2014-03-17 17:03:52
형벌은 이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고, 심지어 죽음에서조차 아직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다. 죄인은 오로지 마지막 심판의 날 이후에 그 모든 가혹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 삶, 즐거움, 발전, 노동, 또한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 하나님과의 교제 회복의 가능성도 즉시 끝나게 된다.
죄 이후에 들어 온 모든 결과와 형벌은 곧바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세워진 결과들과 형벌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다른 관점에서 차이가 없는 은혜의 방편들, 하나님의 참으심과 자비하심의 증거들이기도 하다.
성경의 보편적인 생각에 따르면, 형벌은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을 지닌다.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제정한 율법을 견지하고 백성들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를 지녔으며,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범죄들을 예방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의 규례들을 지켜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형벌의 목적은 이중적인 것으로, 과거와 미래에 연관되어, 반드시 과거의 범죄들을 회복시키고 미래의 범죄를 예방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공의 외에는 형벌이 기초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그것은 또한 인간의 윤리적 자질에도 근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법이 정한 모든 계명들을 위반한 자들로서, 윤리적인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심판대에 소환하여, 심판하고 선고하기 위한 그 어떤 정당성이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징벌한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적 형벌의 정당성의 기초다. … 형벌의 규칙은 결코 단순히 합목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근거한 신성한 선과 악의 사상에 기초한다.
형벌이 가해지는 까닭은 그것이 유익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범죄자가 도덕적인 법적 과실을 범했기 때문이다. …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형벌이 수립되었다. 형벌의 목적은 정의의 회복, 하나님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의 죄에 대해 정한 형벌은 죄책, 오염, 고난, 죽음 그리고 사탄의 통치다. 죄책은 첫 번째 형벌이자 가장 중한 형벌이다. … 죄책은 우리가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 죄책이란 범법을 인하여 누군가에게 지워진 의무로서 비례적인 형벌의 고통을 법을 통해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죄책은 죄인의 범법 후 곧바로 그를 사죄와 형벌의 요구에 묶는다. … 죄책이 죄로부터 제거될 때, 이와 더불어 자연히 모든 속죄와 형벌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죄책은 다름 아닌 형벌을 견뎌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다른 형벌은 오염이다. … 죄는 단지 행위만 아니라, 또한 생각, 욕망, 경향 등이다. 죄는 이 각각의 단계에서 죄책인 동시에 오염이다. … 죄책과 오염은 언제나 죄의 양면이며,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가 있는 곳에 다른 것도 존재한다. 죄는 하나님의 의(義)와 겨루기 때문에 죄책이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상반되기 때문에 오염이다. 죄책은 우리를 형벌에 묶는 반면, 오염은 우리를 더럽힌다. 죄책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관계가 방해를 받고, 오염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교제가 손상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죄책과 오염 이외에 고난도 역시 죄에 대한 형벌이다. … 하나님은 인간과 뱀 사이에 적대감을 두었고, 이로써 인간이 본래 동물 세계를 다스리도록 주어졌던 통치권을 원칙적으로 박탈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여자에 대해서는 잉태하는 고통의 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남편을 사모하는 벌을 선언했다. 남자 자신은 자기가 받아야 할 고통의 몫을 저주 가운데 받았는데, 이 저주는 땅에 대해 선언되었고, 따라서 애써 수고해야만 자신의 작은 몫의 먹을 것을 얻도록 하였다. …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땅은 인간의 처지와 일치한다. 인간은 지식과 의로움과 더불어 통치와 영광도 상실했다. 자연의 세력들과 요소들은 자주 인간과 반목한다. 이제 인간은 힘들고 고된 노동이 아니고는 이러한 세력들과 요소들을 정복할 수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언제나 가장 큰 마지막 원수였다.
죄에 대한 마지막 형벌은 윤리적 의미에서 세상과 사탄이 그의 사자들의 권세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한 이후로 세상은 그의 권세 안에 있으며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 그는 이 세상 임금과 이 세상 신(神)이다. … 사탄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통치하고 활동했으며, 예수를 시험했으며, 더러운 영들을 보내었고, 유다 안에 들어갔다. 그 당시가 사탄의 때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더 강한 대적자였으며, 일생 동안 사탄과 싸워 정복하고 밖에 내어던지고, 교회의 영역을 사탄의 통치로부터 근본적으로 철수시켰다. … 그는 이 땅을 배회하며, 신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대적하여 활동하고, 유혹하여 타락하도록 애를 쓰며, 그래서 교회는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싸우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는 마지막 때에 언제가 한 번 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재기(再起) 하지만, 그는 또한 장차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을 당하고 그의 모든 사자들과 함께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 사탄은 모든 것을 흉내 낸다. 하나님은 현현, 예언, 기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다. 이것들에 대한 마귀의 서투른 모방은 귀신 들림, 점술과 마술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세 가지의 실재를 자주 인정하되, 매우 단호하게 비난하고 금지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사탄을 통해 그 모든 유혹하는 능력으로 종말에 다시 한 번 나타날 것이다.
45장 은혜언약
2014-03-17 17:03:22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풍성함과 영광 가운데 성경에서 우리를 대면한다. 특별 계시는 다시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여 자유롭고 전능한 존재이며, 고유한 성격과 의지를 지닌 존재임을 드러낸다. … 은혜는 그 계시의 첫 순간부터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행위를 통해 발생한 언약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은혜의 풍성한 역사를 제공한다. …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다.
하나님이 창세기 15장 8절 이하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할 때, 이것은 사실상 계약이 아니라, 서약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주고, 스스로 그 약속의 성취에 매이며, 희생제물의 조각 사이를 지나간다. 어디선가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맹세하고,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며, 자기 영혼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는 다만 인간에게 자신의 작정이 불변함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 이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은 성실하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며, 언약은 오로지 유일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확고하게 자리한다. … 우리는 때때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의심해서도 안 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은혜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언약의 교리는 … 원리상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 통일성을 주장했던 츠빙글리에게서 이미 나타났다.
성자는 중보자로서 성부에게 종속되고, 성부를 자신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수행해야 할 일을 짊어진 성부의 종이며, 성자는 완전한 순종에 대해 포상을 받는다. …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 한 중보자만 있으며,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한 분이며, 영원 전부터 중보자로 선택되었고, 로고스로서 또한 영원히 존재한다. … 삼위 사이의 언약은 온전한 의미에서 언약이다. 최상의 자유와 완전한 합의가 여기서 일치한다. 구원 사역은 삼위의 사역이며, 이를 위해 모두가 협력하고 그 가운데서 각 위는 자신의 독특한 사명을 수행한다. … 구원의 전체 사역을 함께 고안하고, 확정하고,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이는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다.
시간 속에서 계시된 은혜언약은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변한 토대에 기초한 것이다. 은혜언약은 삼위 하나님의 작정과 언약 가운데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고, 은혜언약은 이 작정과 언약에 대해 틀림없이 뒤따르는 적용과 시행이다. … 창조가 삼위일체의 사역이듯이, 마찬가지로 재창조 역시 맨 처음 순간부터 삼위의 사역이었다. … 성자는 타락 후에 곧바로 중보자로서, 두 번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으로서 등장함으로써 첫 번째 아담의 자리를 대신하여 첫 번째 아담이 파괴하고 수행하지 못한 것을 회복시키고 완성한다. 그리고 성령은 곧바로 보혜사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원의 적용자로서 활동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다르지 않았고 더 낫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보다 더 완고하고 반항했으나, 오로지 은혜로 선택되었다. …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다시금 전적으로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새롭고 더 높은 수준의 계시다. 하나님은 이 언약에서 주도권을 가진다. 하나님은 언약을 수립하고, 아브라함을 선택한다.
시내 산에서 은혜언약이 취한 율법 전체의 목적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단 한 말씀,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선포되었을 때, 이는 결코 은혜언약의 폐기와 행위언약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은 은혜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들어 섬기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에 의해서도 거듭하여 그와 같이 이해되고 찬송을 받았다. 하지만 은혜언약과 분리되었을 경우, 모세 율법은 과연 죽이는 문자요 정죄의 직분이다(고후 3:6, 9). 이제 구약 시대에 은혜언약이 다른 이유들 가운데 율법을 취한 이유는, 율법이 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고, 구원의 필요를 가중시키며,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한 기대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신약과 구약은 본질상 단일한 언약이다. 신약과 구약은 하나의 복음을 가지며, 유일한 중보자, 즉 구약시대에도 존재했고, 자신의 중보직을 섬겼으며,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의 유일한 중보자인 그리스도, 구원의 길로서 하나의 믿음,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동일한 약속과 은덕들, 용서와 의롭다 함, 영생 등을 말한다. 구약의 신자들과 신약의 신자들이 걸었던 길은 동일하되, 그들이 걸었던 길을 비추던 빛은 달랐다.
비록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 행위언약 가운데 특별한 형태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즉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 주어졌을지라도, 이 순종 자체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풀려날 수 없는 의무다. … 성경은 죄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또한 타락 후 인간에게 영생의 길로서 완전한 순종의 요구를 주장한다.
구원협약과 은혜언약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 그리스도는 보증인이요 머리인 반면, 후자에서는 중보자다. 전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제한되어 그리스도가 택자들의 자리에 서서 형벌을 감당하고 율법을 완수할 것을 요구한다. 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자리에서 완수하지 않았거나 완수할 수 없는 믿음과 회개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전자는 구원의 획득에 연관되고, 영원하며 역사가 아닌 반면, 후자는 구원의 적용을 취급하며, 시간 속에서 시작하고 다양한 세대들을 지닌다. … 행위언약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하늘에 이르는 길인 반면, 은혜언약은 타락한 인간이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행위언약은 아담 안에서 인류와 맺은 언약이며, 은혜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머리다.
언약 교리는 놀라운 방식으로 구원의 전체 사역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한다. … 구원을 계획하고 원한 분은 성부다. 구원을 보증하고 실재적으로 획득한 분은 성자다. 구원을 수행하고 적용하는 분은 성령이다. … 선택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반면, 은혜언약에서는 능동적으로 나타난다.
은혜언약이 선언하는 바 심오하고, 멋진 진리는 아담이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되었고, 첫 번째 아담 안에서 타락했던 인류는 두 번째 아담 안에서 회복되었으며, 단지 몇몇 소수의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아래 있는 택자들 안에서 유기적 인류와 세상 자체가 구원을 받는데,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 아니라,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고, 아담 안에 있는 본래의 창조로부터 유래한 구조적 유기체 역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 은혜언약은 창조 질서와 연관되고, 창조 질서로 거슬러 올라가며, 창조 전체를 자기 안에 질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포함시키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인류의 기관이다.
46장 그리스도의 인격
2014-03-17 17:02:51
은혜언약이 또한 행위언약과 구별되는 점은 하나님과 인간을 단지 하나로 묶을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그들 둘을 서로 화해시켜 그들 사이의 깨어진 교제를 회복시키는 중보자를 지닌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소수의 독립적인 메시아 본문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 전체가 인물들과 사건들, 직분과 제도들, 율법과 예식들과 더불어 신약에서의 성취를 지시하고 그 성취를 향해 나아간다.
비록 다윗 왕가가 시작되었다가 왕위에서 쫓겨나 되돌아온, 멸시받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 출신일지라도,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될 것이다. 주권자로서의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왕으로, 기묘자, 모사, 전능한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들을 지니며,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시험과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로서 시온에 두어졌으며,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탄 왕으로,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백성이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부르며 인정한다. … 그는 영원히 다스리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번영의 왕국을 세울 것이며, 그의 통치는 또한 이방인들에게 미치고, 땅 끝까지 확대될 것이다. …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장이며, 그는 하나님의 신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선지자이며, 그는 영광을 받으며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왕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여기 지상의 신자들 가운데 즉시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신자들이 자신들의 편에서 이 왕국의 소유물들, 즉 영생, 하나님을 대면함, 완전한 구원을 여기서 아직 완전히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한, 왕국은 여전히 미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왕국이 여기 지상에 수립되고, 중생과 신앙과 회개가 마음 가운데 심겨지는 한, 왕국은 현재적이며, 신자들은 이미 여기 이 땅에서 천국의 시민이며 참여자들이다. … 그리스도가 현재 왕이며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왕과 제사장으로 삼을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비로소 완성된다.
다니엘 7장 13절에서 ‘인자 같은 이’라는 명칭은 메시아에 대한 칭호다. … 인자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를 받는 메시아이며, 성도들의 미래의 통치자다. … 예수가 자신을 이 이름으로 여러 차례 묘사했으나, 스데반 이외에 다른 이들에 의해 결코 일컬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이 명칭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옴, 하늘과 교제함, 하늘나라에서 예수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세와 연관되어 나타나고, 예수의 낮아진 신분, 수난과 죽음만 아니라, 또한 예수의 부활, 승천,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음,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 예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리기 위해 이 명칭을 선택했다. (1) 예수는 단지 다윗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연관을 맺고 자신의 영혼을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로 주는 인자다. (2) 예수가 위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지상에 머무는 동안 성부와 끊임 없는 교제를 누렸으며, 죄를 사하고, 영생을 주며, 왕국의 모든 소유물을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권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3) 예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반드시 자기 백성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했다. (4) 예수는 무엇보다도 이 길을 따라서만 부활과 승천, 하나님 우편에 높이 올려지고 심판을 위한 재림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예수의 의식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독특한 관계를 지닌다는 지식에서 흘러나왔다. 예수는 자신을 인자라고 불렀으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일컬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으로 묘사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 그 다음에 왕, 그리고 특히 메시아다.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까닭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왕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왕인 까닭은 메시아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성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시에 모든 죄에서 자유롭다. … 예수는 자신의 성육신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때 하나님의 본체였으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며, 천사보다 뛰어나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으며 만물이 예수 안에서 존재했고, 전적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자신이 하나님이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결코 혼합되거나 서로 변화되지 않으며, 각각의 본성은 스스로 영구히 머물러 자신의 본질적 속성들을 보존하며 결코 다른 본성의 속성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가르친다. … 개혁파 신학은 성자의 인격이 육체가 되었다고, 즉 성자의 본질이 아니라, 성자의 위격이 우리의 본성을 취했다고 전면에 부각시켜 강조했다.
19세기의 기독론의 일반적인 특징은, 쉘링과 헤겔,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영향 아래 발생했던 것처럼, 합리주의와 도덕주의에 대한 반작용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되돌아가 그의 역사적 출현에 종교적 삶의 영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영향을 받은 다른 학자들은 예수를 단순히 선지자와 교사와 모범으로만이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계시로서, 전적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사람으로, 하나님이 오로지 그 안에만 거주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통해 특별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주목할 수 있다.
기독론은 교의학 전체의 출발점이 아니라, 중심점이다. 다른 모든 교리들은 기독론을 준비하거나 기독론에서 추론된다. … 성육신은 그 전제와 토대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두고 있다. … 개혁파는 모든 혼합에 대항하여 신적 본성이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성자의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고 강조했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자의 위격이 즉각적으로 인간 본성과 연합하고 신적 본성이 성자 안에서 매개적으로 인간 본성과 연합한다는 표현 방식을 선호한다. … 비록 성육신이 주관적으로 그리고 종국적으로 오로지 성자에게 고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근원적으로, 원리적으로,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보냄을 받았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아리우스적 기독론, 합리론의 도덕적 기독론, 칸트의 상징적 기독론, 헤겔의 관념적 기독론, 데 베터의 심미적 기독론, 포이에르바흐의 인간론적 기독론,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교의학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 초자연적 잉태는 고대로부터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 에비온파에 의해, 케린투스, 카르포크라테스, 켈수스에 의해, 모건, 첩과 같은 18세기의 이신론자들과 합리론자들에 의해, 슈트라우스, 부르노 바우어, 레난 등과 가은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그리고 최근에 하르낙에 의해 부정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인성을 따라 맨 처음 순간부터 인생 전체를 거쳐 승귀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메시아, 그리스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했다. 예수는 육체를 따라 나지 않고는, 즉 여자에게서 나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 없었다. …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난 자다. …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 특히 여자의 후손, 하나님이 주신 자, 여호와가 낳은 자, 이새의 잘려진 그루터기에서 난 한 싹,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될 처녀의 아들로 약속되었다. … 예수는 마리아를 따라서가 아니라, 요셉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간주되었다. … 예수의 아버지는 아담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인격으로서 예수는 인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외부로부터 인류에게 다가와 인류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 모든 원죄로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 잉태될 수 있었으며 그 성령을 통해 모든 죄의 허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 이 성령의 잉태는 인격으로서 이미 존재했고 새 언약의 머리로 세움을 입었던 예수가 이제 또한 인간적인 방식으로, 육신으로, 자신의 존재, 즉 그리스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며 계속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왔다는 사실을 매우 확실히 인정하기에,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적이다. … 성경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그가 모든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지니는데, 단지 육체, 살과 피, 다리와 옆구리, 머리와 손과 발만 아니라, 또한 마음, 영혼, 의식, 그리고 의지도 지닌다고 말한다. … 성경에서 신적 속성과 인간적 속성은 매 순간 동일한 인격적 주체에게 돌려진다.
두 본성 교리는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있는 두 측면이나 두 상태 교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그 모든 영광스런 속성들을 지닌 까닭은, 그가 한편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바쳐서 자신이 참된 인간임을 증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동일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계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실재적으로 한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 성경은 단지 한 인격, 한 주체, 한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두 종류의 속성들, 신적 속성들과 인간적 속성들을 부여한다. 그는 로고스이며 육신이 되었다. 그는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의 자손일지라도, 만물 위에 계셔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다. … 만일 신학이 참으로 성경적이고 기독교적 신학이고자 한다면, 먼저 두 본성 교리를 견지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은사들의 전달을 예수의 인간적 발전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했다. 비록 두 번째 아담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아담은 성인으로 창조되었고, 낙원이 그의 거주지였으며, 고통과 죽음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힘없는 어린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낙원에 놓여지지 않았고, 악한 자 가운데 놓인 세상에 왔다. …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인성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완전한 상태에서는 많은 감정들, 즉 분노, 슬픔, 동정심, 자비 등에 대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 더 나아가, 그리스도에게 인간적인 지식, 지적인 발전, 지혜와 지식의 증대가 있었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주입된 지식과 획득된 지식은 즉각적으로 완전했던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증가되었으며, 둘째, 그리스도는 여기 지상에서 지복직관자(至福直觀者)가 아니라 순례자였다고 말했다. 그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신앙과 소망으로 행했던 것은 여기 지상에서 아직 지복의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당연히 우리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의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독특성은 오로지 우리가 처한 죄의 상태를 통하여 신앙이 획득한 것이다. … 그는 힘없고 연약한 어린아이로서 태어났다. 그는 음식과 음료를 필요로 했으며, 여행으로 지쳐 샘물 곁에 앉았다. 심지어 그는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조차 사람들의 신앙에 의존적이었으며, 동산에서 천사를 통해 힘을 얻었다. 부활 후에서야 비로소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또한 창조자로서 경배되고 기도를 받는 것처럼, 우리의 중보자로서 매우 분명하게 예배할 수 있으나, 그 근거는 오로지 그의 신성에 놓여 있다. 그는 자신이 중보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중보자이며, 성부와 성령으로 더불어 유일한 한 분 하나님으로, 모든 것 위에 뛰어나 영원토록 찬양을 받는다. 온갖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처럼, 중보자의 위엄과 사역은 예배의 동기들이 될 수 있고 그렇게 허용된다. … 예배의 기초는 하나님 되심 하나뿐이다.
47장 낮아지신 그리스도
2014-03-17 17:01:50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의 면전에서 자신을 숨긴다. 그는 하나님이 선하다는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생각 아래 살아간다. 단지 존경과 감사만 아니라, 특히 두려움과 공포가 그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도록 촉구한다. 따라서 구원 사상은 속죄의 사상과 결합한다. … 제사 의식(祭祀 儀式)은 속죄 제사의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약적 제사 의식은 불완전했다. 제사장 자신들이 죄인들이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제거할 수 없었다. 제사는 반드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했다. 모든 것은 구약의 의식적(儀式的) 세대가 단지 지나가는, 상징적, 모형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지시했다. 그러므로 예언에 의하면, 파기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준수할 다른 언약이 다가올 것이다. 특별하게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기쁜 소식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전할 다른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다. 아론의 방식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세움을 입어 제사장적 위엄과 왕적 위엄을 자신 안에 지닐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니게 될 다른 제사장이 나타날 것이다. 다윗의 집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될 다른 왕이 나타날 것이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제사는 순종, 인애, 상한 심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율법과 예언에 관한 이 모든 다양한 증거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구약 성경 전체는 원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와 아멘이다. 그리스도는 다윗 집에서 나온 참된 메시아, 왕이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지자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인격, 신분, 사명, 제사, 거룩한 처소에서 구약적 제사장직을 훨씬 초월하는 제사장이다. 그리스도는 종으로서 섬기기 위하여 왔으며, 율법에 복종했고, 모든 의를 성취했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던 주의 종이다. …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그가 자기 생명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성별했고, 그 생명을 제물로 바쳤으며, 이로 말미암아 속죄와 화평을 이루었음을 증명한다. … 그리스도는 고난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으며 쓰디쓴 죽음 전체를 맛보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과 죽음 자체로부터 온전히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가 현재 낮아진 상태에서 완수하는 사역은 신약성경에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성부가 그에게 맡긴 일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었으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해설, 그의 이름을 계시하고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등을 포함했다. 그리스도는 말과 일에 능력 있는 선지자다. 그는 새로운 율법의 제정자가 아니라, 율법의 해설자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며, 율법과 복음 모두에서 자신을 율법의 완성자와 복음의 내용으로서 설교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이 율법이며 복음이다. … 그는 로고스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성령으로 한량없이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성부에 대한 계시다. … 그의 설교의 원천은 자기 자신이며 …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으며 그를 통하여 말씀했다. … 그는 모든 예언의 원천이며 중심점이다. 그리고 그의 성육신 이전의 구약 성경과 또한 현재 그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신약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그로부터 나온다. … 예수가 성취해야 했던 하나님의 뜻은 그가 행했던 기적들도 포함했다. … 그는 단지 기적들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인격 자체가 절대적인 기적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으로 오시어 부활하여 영광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자신이 가장 큰 기적이며, 모든 기적들의 중심점이며, 만물의 재창조의 장본인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며, 만물 가운데 으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보다도 성부의 독생자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것을 포함한다. …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의 피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해 치러진 값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한 유월절 양이며, 세상의 죄를 지고 가며 이를 위해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 그는 속죄를 위한 속죄의 수단, 즉 속죄제물이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한 저주다. … 그리스도가 이러한 자신의 희생 제사를 통해 획득한 것은 너무 많아 언급할 수 없다. … 이제 모든 유익은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그리스도는 단지 선지자로서 여겨졌던 것이 아니라, 왕과 제사장으로도 여겨졌다. …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모든 유익은 객관적으로 그의 인격 안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그는 객관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켰고, 이를 통하여 또한 죄, 죽음, 사탄,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관계를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첫 번째 유익은 죄의 용서이며, 그 결과 또한 오염, 죽음, 율법,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며, 충분한 구원자이며, 대선지자, 유일한 제사장, 참된 왕이다.
현대 신학은 본래 속죄의 교리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 이 신학은 인간의 도덕적 기질을 높이 생각했고, 예수를 선지자로, 모범으로서, 도덕적 이상으로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죄는 타락으로 발행한 것이 아니며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유전되지 않지만, 점차 극복되게 될 필연적 결함, 발전의 한 단계, 인간이 자신의 참된 본질에 따라 반드시 되어야만 하고 장차 생성될, 아직 확정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속죄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의 중보자 됨으로의 선택은 그와 상관없이 발생한 것이 아니며, 구원협약의 성격을 지닌다. 구원 사역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공동 사역이며, 타락 후 곧바로 삼위 모두에 의해 시행되기 시작했다. 성부가 영원 전부터 자기 자녀들의 아버지이며 성령이 영원 전부터 신자들의 보혜사인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성자는 영원 전부터 중보자로 세움을 입었고 타락 후 곧바로 중보자로 활동했다. … 그리스도의 왕직은, 구약의 왕직이 단지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의 그림자였던 반면,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있어 실재적이었다. 신정적, 다윗의 왕직은 실재에 대한 단지 희미한 예표였을 뿐이며, 그리스도의 왕직에서 그 본질적 성취를 맛보았다. … 그의 왕직 역시 선지자적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포함한다. … 그가 단지 선지자적, 제사장적, 그리고 왕적 사역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인격 자체가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다. … 사실상 그는 세 가지 직분 모두를 동시에 소유하기에, 지속적으로 동시에, 그의 성육신 전후에, 낮아진 상태와 높아진 상태 모두에서, 세 직분 모두를 행사한다. … 그 직분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구분은 분명히 가능하다. …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는 반드시 스스로를 위해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자와 구주로서 세 직분을 담당해야만 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인지하고 계시하기 위하여 반드시 선지자이어야 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바치고 우리 대신에 자신을 하나님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반드시 제사장이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보호하기 위하여 반드시 왕이어야 했다. 가르치고 속죄하고 지도하며, 구원을 인지하고 획득하고 적용하며, 지혜와 공의와 구원, 진리와 사랑과 능력, 이 세 가지 모두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서 선지자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서 제사장이며, 인류의 머리로서 왕이다.
성육신과 속죄란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에 의해 다시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영광을 받기 위하여 발생했던 것이다. 죄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거부하는 것이며, 피조물을 향하여 경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을 계시하고, 자신의 주권을 회복하고, 자신의 모든 속성들을 입증하고,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의 신성(神性)을 옹호했다. 하나님은 구원 사역에 있어서도, 일차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며, 자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다.
구원은 완전한 것으로,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전인의 구원이며 모든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가운데, 그리고 그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다. …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은 점차적으로, 먼저 영적으로, 그 다음에 육체적으로, 성취되고 적용될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하나님 율법의 성취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충족으로 여긴다. 그리스도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자신의 출생과 죽음, 자신의 말씀과 사역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다. … 그리스도의 순종이 갖는 속죄의 성격은, 그리스도가 복수심에 불타는 신성(神性)을 피로 만족시키고, 그 증오와 원한을 많은 고난으로 진정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고 완전하며, 거룩하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며, 몸과 마음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이다. …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순종을 완수했고, 자신의 거룩함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은 단지 보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대속이다.
언약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인격과 희생 제사에 선행한다. … 그리스도 자신도 이 언약 가운데 서 있다. 그는 이 언약의 보증이요 중보자다. 그의 피는 언약의 피이며, 따라서 속죄하는 피다. … 은혜언약은 처음에 시간 속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영원에 그 토대를 지니고, 구원협약(pactum salutis)에 기초하며, 일차적으로 신적 본질 자체 안에 있는 삼위의 언약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은 모두 이 언약 가운데 활동한다. … 은혜언약이 행위언약을 초월하고, 복음이 율법을 초월하듯이, 그리스도는 그렇게 높이 아담을 초월한다.
자기 비움(exinanitio)은 하나님의 형상을 종의 형체로, 신적 존재 방식을 인간적 존재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 잉태로부터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는 그의 순종의 결과인 낮아지심으로, 지속적으로 더 깊이 우리 죄에 참여하고 지속적으로 더 나아가 천상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애 동안 말하고 행했던 그 모든 말씀과 사역들은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율법과 복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속성들, 작정과 그 기뻐하신 뜻을 알리는 것이며, 자신의 제사장적 자비를 모든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잃어버린 바 된 자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며, 사탄, 세상, 죄와 그 모든 영향들에 대한 자신의 왕적 권세를 증명하는 것이다. … 성육신으로 시작되었으나 위대한 수난 가운데 완성된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부의 뜻이자 계명이며,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의 증거이며, 그의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며, 그들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다.
48장 높아지신 그리스도
2014-03-17 17:01:02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의 끝이자 동시에 그리스도가 높아짐에 이르는 길이었다. … 십자가와 면류관, 죽음과 부활, 낮아짐과 높아짐은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 … 바울과 모든 사도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대상은 높아지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였으나, 그는 낮아진 분과 동일한 분이다.
승귀의 상태(중생, 회개, 성화 등)의 비하의 상태 가운데 있는 중보자의 사역이 지닌 성격은 그 사역들이 단지 참된 하나님이자 동시에 참된 인간인 단일 존재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은 신적 속성들의 인간 본성에로의 교류에 관한 루터파 교리를 거부했고, 인간 본성을 항상 연약하기에 고난 받고 죽을 수 있으며,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고, 부활에서야 비로소 영광을 받았던 본성으로 생각했다.
개혁파 고백서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비하는 그 신적 속성에 따라 다음과 같다고 만장일치로 가르쳤다. (1) 그리스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구원협약(pactum salutis) 가운데 스스로 자원하여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고 섬기며, 따라서 주의 종이 되었다. (2) 그리스도의 때가 차서 인간 본성을 취하고, 단지 죄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었다. (3)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자신이 존재했던 신적 위엄과 영광,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거나, 또는 오히려 지상에서 거닐었던 종의 형체 뒤에 숨겼다. (4) 그리스도는 자신의 낮아지신 상태 내내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 원수들을 무찌르기 위해 자신의 신적 능력과 자신의 모든 신적 속성들을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의 무기로 싸워 승리했다. 그리스도의 삶의 비밀은 자기 부인이었다.
기도 응답과 특히 부활부터 심판하기 위한 재림까지의 승귀 신분 전체는 그리스도가 비하의 상태에서 주의 종으로서 수행했던 수고의 상급이었다. … 성경은 반복하여 비하의 상태를 그리스도가 승귀에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과 수단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 특히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 사이의 이 공로적 연관을 거듭 진지하게 강조한다(히 1:3; 2:9, 10; 5:7∼10; 10:12; 12:2). …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자기 자신을 위한 공로에 대해 언급하기를 반대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단지 승귀의 상태에서만 왕적 위엄과 하나님의 지위에 이르게 했던 소시누스파에 대한 반대에 있었다. … 그리스도가 승귀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받았던 것은 신적 본성이나 하나님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신적 선택과 임명에 기초한 선지자, 제사장 또는 왕의 직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승귀 자체,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음 그리고 심판을 위한 재림이거나,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그가 두 본성에 따라 높아졌던 중보자의 영광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영광을 앞서 소유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승귀할 때 비로소 획득했다. 따라서 이 승귀는 … 그가 비하의 상태에서 아직 소유하지 못했던 것을 획득했던 것, 즉 객관적이고 참된 의미의 승귀다.
출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 되었으며,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여 연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활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임명되었다. …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을 때에 하나님의 형체를 종의 형체로 바꾸었던 반면, 그는 이제 부활함으로 자신의 하나님 됨을 따라 성부와 함께 이미 전에 지녔던 영광을 받았으며, 그는 이제 영광의 주,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으며,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주’라는 칭호를 획득했고, 그래서 통치권, 능력, 권위와 권세를 획득하여, 중보자로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자기 원수들을 복종시키며, 자기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에 대해 타락한 피조계를 회복시킨다. 부활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주, 왕, 중보자로 임명했고,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고 그 가운데 죄에 대해 심판했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또한 모든 믿는 자들 안에 성결의 영으로서 거하는 자신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켰는데, 이는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육체의 연약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진실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 심지어 그가 육신이었을 때에도 그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 성결의 영으로서 거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언제나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부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으로부터의 출생이었고, 따라서 사망과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에 대한 승리였다. … 부활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어떻게 만장일치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 삼 일로 삼았는지 말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의미는 … (1)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명, 주의 종이 그리스도와 주, 임금과 재판장이 되는 대관식이다. (2) 예수의 영원하고, 신적 아들 됨의 봉인이다. (3) 그리스도의 중보자 사역에 대한 신적 승인, 그의 죽음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선언, 아들의 “다 이루었다”에 대한 아버지의 ‘아멘’이다. (4) 고난을 통해 도달한 그리스도의 승귀의 시작이다. (5) 우리의 용서와 칭의에 대한 보증이다. (6) 많은 영적 복들의 원천이다. (7) 우리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원리이자 담보물이다. (8) 사도적 기독교의 토대다.
승천은 영광스러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영광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소유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음’이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 예수가 앉은 자리는 “하나님 우편에”, “권능의 우편에”,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하나님의 보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라는 표현들로 지적된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창시자,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며, 그의 복음은 구원의 복음이다. 이 구원은 죄와 그 모든 뒤따르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며, 최상의 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죽음, 멸망, 진노와 반대되고, 영원까지 지속된다. … 이 유익들 가운데 제일 위에 있는 것은 화목이다. … 신약 성경을 포함한 성경은 하나님이 죄에 대해 진노하며, 죄인으로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화목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반드시 화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역시 자신이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줌으로써 자신의 진노를 내려놓고 인간 사이에 평화 관계를 수립한다는 의미에서 인간과 화목되어야 한다. … 재창조 전체, 죄로 말미암아 허물을 짊어진 부패하고 깨어진 세상과 인류의 완전한 회복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열매다. …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자신의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켰기에 그리스도의 사역은 보상이며, 이 동일한 사역은 그리스도가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획득했기 때문에 공로다.
제한속죄론을 주장하는 개혁파는 거의 홀로 서 있다. … 개혁파는 구원이란 참되게, 온전히, 영원히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속죄했던 자들은 틀림없이 확실하게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주와 군주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제 더 이상 순종의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모으고 자기의 모든 원수들을 그 발 아래 두기까지 다스리는 왕적 통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보자의 사역은 하늘에서 계속된다. … 그리스도가 하늘에 들어간 것은 거기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자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획득한 충만을 여기 지상의 자기 백성들에게 채우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가 땅에서 바쳤던 희생 제사는 영원한 성격을 지닌다. … 그 희생 제사는 역사적이며 동시에 초역사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한 성령의 능력을 통한 아들의 희생 제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희생 제사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적 대제사장직의 행위인 동시에 이를 위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 참된 제사장이 되기 위해, 그는 반드시 하늘의 제사장이 되어야만 했는데, 즉, 땅이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우주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이 되어야 했다. …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그의 기도 가운데 계속 살아 역사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된, 땅에서 단번에 완성된 희생 제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으되 동시에 승귀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며 지속적인 화목제물이다.
49장 구원의 서정
2014-03-17 17:00:09
이방 종교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그 종교들은 죄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없고 은혜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알지 못하며, 모두가 ‘구원의 길’을 공로의 길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이교도의 기본 원리는, 부정적으로는 참된 유일신을 부인하고 그의 은혜의 선물들을 경멸하지만, 긍정적으로는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사상과 노력이다. … 기독교가 아닌 다른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이다.
불교에서 구속이란, 비참이 인생 자체에 있기 때문에, 오로지 존재에 대한 욕구를 죽이는 것이다. … 이슬람교도가 죄의 용서에 대해 기도하지만, 회개할 때, 즉 하나님의 통일성과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믿고, 더 나아가 종교적 의무들(기도, 자선, 금식, 순례)을 수행할 때, 그는 자동적으로 사죄를 받는다. 구속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행위다. 철학적 체계들은 근본적인 사고에 있어서 이런 종교들과 일치한다. 구원의 유일한 길은 미덕의 길이며, 도덕적인 자기 완성이다. … 키케로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이 미덕을 소유한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미덕으로 인해 정당하게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그 미덕에 대해 합당한 자랑을 지니기 때문이다. … 성경의 견해는 전적으로 다르다. …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희망하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따른다.
그리스도는 비하의 상태에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 땅에서 전자(구원의 획득)를 성취한 반면, 승귀의 상태에서, 하나님 우편에서 자신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그리고 왕적 사역을 통해 하늘에서 후자(구원의 적용)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또한 이 구원의 적용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시킨다. …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으며 모든 하늘 위에 높아졌는데, 이는 자신이 만물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 그리스도가 승귀한 뒤 행한 첫 번째 사역은 성령을 부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의 오른손에 의해 높아졌고 아버지로부터 성령, 즉 하나님이 구약 성경에서 약속한 성령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는 이제 이 성령을 이 땅에 있는 자신의 교회에 나누어줄 수 있었다.
성령이 과거에는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개별적으로 독립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일시적으로 주어졌던 반면, 성령은 현재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내려왔으며, 이제 앞으로 그들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고 사역한다. …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그리고 모든 신자들 상호 간에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이루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물론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지만, 두 분과 나란히 따로 언급되는 다른 보혜사다. 하지만 성령은 또한 본질상 그들과 하나이며, 그러므로 신자들을 그들과 온전히 교제하게 하며 그들의 모든 유익들을 나누어 준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은 단지 또는 주로 특별한 은사들과 능력들을 베푸는 데 있지 않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인격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유익들만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이러한 교제는 성령을 통해 수립되고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단지 믿음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하는 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주다. …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게 오고, 그들 가운데 살며, 마찬가지로 그와 반대로 신자들은 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고, 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들, 즉 그의 지혜, 의, 거룩, 구속과 교제하게 한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한다. 성령은 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켜, 그들이 자신의 원리를 통해 생활하고 자신의 대표 아래 확립된 하나의 교회로서 함께 세상 가운데 활동하게 한다. 성령은 신자들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고, 그들을 한 아버지께 인도하며,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게 하며, 그들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성령은 거듭남, 생명, 조명, 온갖 은사들, 갱신과 성화, 보증과 영광의 하나님이다.
구원론 역시 신론처럼,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죄로 인해 시달리고 손상을 입은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주장하고 계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세상과 인류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구속하고 그들을 영원히 그의 지혜와 능력, 그의 거룩과 은혜의 모델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재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발생했던 것처럼, 재창조 또한 반드시 성령을 통해 주관적으로 교회 안에서 확실하게 성취되어야 한다.
종교심리학은 모든 종교 현상들을 연구하지 않으며, 교리와 예배와 같은 종교의 객관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역사학과 철학에 넘겨준다. 종교심리학은 그 자체로 주관적 종교 연구, 주체의 종교적 경험에 제한된다. … 종교심리학은 종교적 개념들보다는 이 개념들과 동반하거나 이것들을 통해 발생된 감정과 정서와 열망들에 더 집중한다. … 기독교는 회심을 초자연적인 작용의 결과로 여긴다. 하지만 종교심리학에 따르면, 학문적으로, 이러한 종교적 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요인을 피난처로 삼을 필요가 없다.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회심은 심리학적으로 충분하게 해석될 수 있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과정이다. … 종교심리학은 회개가 종종 실재적인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때로 어떤 상황 아래에서 발생하고, 때로 무엇이 회개로 주어지고 여겨지는지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으며, 사람들과 증거들을 연구함으로써 이 영역에서의 우리 지식을 상당히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심리학은 그 자체로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 세상적 슬픔과 경건한 슬픔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예를 들어 경건한 가정에서 생활한 다른 사람에게는 발생하지 않는지, 회개가 왜 이 사람의 생애 중 이 시기에 일어나고, 다른 사람에게는 훨씬 더 이른 시기 혹은 더 늦은 시기에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다. 결국, 종교심리학은 스스로 표준 척도를 수반하지 않으며, 스스로 무엇이 회개이며 무엇이 회개이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것을 자신의 계시로 우리에게 말하며, 그 외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무엇이 회개인지 말하지 않는다. … 종교심리학은 초자연적 요소에 대해 진술할 수도 없고 진술해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종교심리학은 단지 종교적 현상들의 외면만 살피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현상들의 가장 깊고 궁극적인 기초까지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 종교심리학이 취한 방식을 따라서는 종교의 타당성, 종교의 참됨과 가치를 결코 증명할 수 없다. … 종교심리학은 최소한으로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가 어떻게 인간 본성 전체에 근거하며 연관되는지 우리에게 가르치지만, 종교의 내용, 그 진리와 정당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율법주의가 구원의 획득에 있어서 인간의 사역을 확대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움츠러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만일 믿음, 회개, 인내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능력과 사역에 있다면, 만일 실재적인 구원받음에 대한 결정이 궁극적으로, 결정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리스도는 기껏해야 단지 구원의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 펠라기우스주의적인 구원의 서정 개념은 기독교와 이방 종교들 사이의 특정한 차이를 제거하고, 그 모든 종교를 단 하나의 과정 속에 포함시켜 기독교를 기껏해야 유사한 종교들 가운데 첫 번째 종교로 존경할 수 있을 뿐이다. … 경건주의와 감리교는 성령의 사역, 은혜의 준비, 창조와 재창조의 연관성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르지 못한다. …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본질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끝나고, 이교도로 되돌아가 죄에 대한 구원을 인간의 이성적 계몽이나 도덕적 개선에 둔다. 이 두 가지, 반율법주의와 율법주의는 아리우수주의적인 형태 혹은 사벨리우스주의적인 형태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을 부인한다.
오로지 삼위일체론적 고백의 근거 위에서만 성경적, 기독교적, 개혁파적 의미의 구원의 서정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있다. … 이 (구원의) 적용의 사역은 성부의 창조와 성자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적 사역이다. 따라서 이 사역을 초래하는 성령은 성부, 성자와 더불어 유일한 하나님이며, 찬송과 영광을 영원히 받으신다. …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세대들 가운데 예비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령은 자신의 사역에서 자연적인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연계하여 자신의 은혜로 자연적인 삶 전체를 회복시키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애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동일본질에서 또한 뒤따르는 사실은 성령이 성자의 사역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성자와 성령 역시 서로 상반되게 사역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가 오순절 날에 이 성령을 보낸 것은 성령을 통해 자신의 모든 유익들을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 성령의 사역은 다름 아닌 적용의 사역이다. 구원의 서정은 구원의 적용이다. … 구원의 길 전체는 성령의 적용하는 은혜다.
교의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을 따라 구원의 서정이 무엇인지 해설하는 것이다. … 교의학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죄인의 회개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교회를 위해 획득하게 하고 성령을 통해 자기 교회에 나누어 주는 구원과 복의 보물들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 교의학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유일하고 위대한 구원 사역에 포함된 모든 유익들을 알리는 것이다. … 그의 의무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감추어진 생각들을 발견하고, 이러한 생각들의 상호 연관성을 질서 있게 제시하는 것이다.
부르심(소명)에서, 성령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깨닫게 하고 가르치는 직무를 수행하며, 우리에게 예비적인, 선행하는 그리고 작용하는 은혜를 제공한다. 칭의에서, 성령의 위로의 직무와 조명의 은혜가 전면에 부각된다. 성화에서, 성령은 자신의 거룩하게 하는 직무를 완수하고, 협력하는 은혜를 통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한다. 그리고 이 지상의 삶에서 이미 시작된 영화에서, 성령은 자신의 인 치는 직무를 수행하며, 보존하고 완전하게 하는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전적으로 회복시키는데, “이는 그(그리스도)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기 위함이다(롬 8:29).
50장소명과 중생
2014-03-17 16:59:30
하나님의 이 부르심(소명)은 성자 안에서 그리고 성자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성자)가 구원을 획득했기 때문에, 구원은 특별히 그리스도에게 공로가 있다. … 이 부르심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간섭이며, 로고스의 증거이며, 인류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 사물을 통한 소명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계시된 율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복음을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말씀을 통한 소명’이 더 높은 차원의 부르심이다. … 이 부르심은 율법보다는 복음을 참된 수단으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며, 또한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으로서 교회에 부으셨던 성령의 사역과 증거를 언제나 동반한다.
부르심은 그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도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부르심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죄인이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씀(겔 18:23, 32)을 인 친다.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이 매우 풍성하고 강력하기에 아무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율법의 요구도, 죄의 권세도, 사탄의 지배도 그 부르심의 적용을 가로막지 못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한다. … 율법과 복음을 통한 외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이 염두에 둔 목적을 성취한다. … 이 목적은 단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만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 부르심은 ‘억제하는 은혜’다. … 부르심은 단지 억제하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예비적 은혜’이기도 하다. (자기 모든 자녀들이 중생하기 이전에 그리고 중생하는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을 인도한다. … 잉태와 출생, 가정과 세대, 민족과 땅, 양육과 교육, 지적 발달과 마음의 성장, 끔찍한 죄로부터의 보존, 무엇보다도 성령훼방죄로부터의 보존, 온갖 종류의 악과 불의에 대한 포기, 재앙과 심판들, 복과 유익들,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교, 심판에 대한 낙심과 두려움, 양심의 각성과 구원의 필요,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을 위한 예비적 은혜이며 신자가 나중에 교회에서 차지할 자리를 위한 예비적 은혜다.) … 율법과 복음을 통한 부르심의 목적은 또한 부르심이 제공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인류와 개별적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부르심 후에 관찰되는 구별은 인간으로부터 설명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별되게 한다. … 구원의 사역은 주관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진다. … 소명은 선택의 실현이다.
(중생에 대해)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은 물론 언어와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 자체는 완전히 일치한다. … 중생은 언제나 절대적 의미에서 인간이 내적으로 변하고 새롭게 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 중생은 때때로 요한의 경우처럼 새 생명의 원리로서 결과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신실하게 듣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강조되고, 때로는 이 새 생명의 전개와 발전의 다른 측면이 더 부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고, 분리할 수 없이 중생의 단일한 개념에 속한다. … 성경은 중생을 주로 세 가지 의미로 말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1) 인간이 믿음을 갖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인간 안에 심겨진 새로운 생명의 원리, (2) 거룩한 삶 가운데 나타나는 인간의 도덕적 갱신, (3) 마지막으로 온 세상의 원래 완전한 상태로의 회복. 그래서 중생은 첫 번째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재창조의 모든 사역을 포함한다.
종교개혁은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구원의 중재자로서의 교회를 제쳐 놓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을 중재로 하여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직접적인 연관을 회복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성경을 교회보다 앞세웠고 말씀을 성찬보다 앞세웠다.
수천 명의 유아들이 출생 전에 또는 출생 시에 또는 출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경우 문제는 달랐다. 단지 기독교적 정서만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과 그들 자녀들이 함께 포함된 은혜언약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역시 이 자녀들 모두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반대한다. … 성령이 아직 분별력이 없는 신자들의 자녀들을 말씀을 통해 믿음과 회개로 이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유아들의 경우 말씀을 통해 완성될 수 없고 오직 분별의 연령에 이른 성인들의 경우에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신자들의 자녀들은 신자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은혜언약에 포함되었지만, 단지 세례를 통해 그리고 세례 후에만 아니라, 이미 세례 전에도 포함되었으며, 성령이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중생의 은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만장일치로 고백했는데, 왜냐하면 중생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이 있기 전에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 신학자들은 성령이 말씀을 통한 부르심 없이도 유아들의 마음에 역사할 수 있으며, 유아기에 죽은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지속적으로 행하며, 교회 안에 태어나 그 안에서 성장하고 나중에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에 입교한 자녀들에게도 자주 이것을 행하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자녀들은 사랑의 판단을 따라 그들의 고백이나 삶이 결정적으로 그 반대 사실을 드러내기까지는 반드시 택함 받고 거듭난 자들로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일치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성인들과 아이들의 경우 모두 시간적이 아니라 확실히 언제나 논리적으로 믿음과 회개에 선행했다.
신자들의 자녀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전 유아기에 거듭날 때, 이것은 언제나 신자들의 자녀들, 즉 잉태와 출생 후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자녀들에게만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언약은 그들의 중생 전에 선행한다. … 만일 교의학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구원론)이 취급된다면, 구원론에서 곧바로 중생으로 시작할 수 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론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객관적 구원이 세상에 알려지고 대대로 전해진 길과 수단들이 반드시 먼저 취급되어야 한다. … 중생이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일어난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 중생이 일어나는 말씀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재창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말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 만일 어떤 개혁파 신학자들이 단지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만 아니라, 생존한 언약의 자녀들의 경우에도 세례 전이나 세례 시에 두는 것을 선호했을 때, 이것은 교회가 어디선가 확정한 교리가 아니라, 교회가 그 어린 자녀들의 삶이 정반대의 것으로 드러나기까지 그들을 바라보고 취급했던 사랑의 판단이었다. 여기서는 중생을 절대적으로 얻지 못했고, 얻지 못한다. … 그리고 이 말씀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 자녀들의 마음에 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개혁파는 중생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직접적이며, 다시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 자신은 인간 마음에 직접 들어와, 인간의지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마음속에 중생이 틀림없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 성령은 단지 지성을 통해 의지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직접 의지에 침투하여 여기에 직접적으로 새로운 마음의 성향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 도르트레흐트 총회는 중생이란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며, 가장 강력한 사역인 동시에 매우 부드러운 사역이며, 놀랍고, 은밀하며 오류가 전혀 없는 사역이며, 그 능력은 성경에 따르면 창조나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것보다 작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다.”
중생 가운데 발생한 생명은 인간 편에서 보았을 때, 믿음의 생명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이 생명은 객관적으로 성령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기적적인 생명이다. … 중생이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자유롭고, 인간의 모든 규정을 초월하기에, 인간의 지식으로 헤아릴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도르트 신조, “하나님이 택한 자들 가운데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실 때 … 하나님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강한 역사로 인간의 가장 깊은 데까지 임하시어 닫힌 마음을 여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신다. 하나님이 의지에 새로운 자질들을 주입하시어, 죽었던 의지를 살리시며, 악했던 의지를 선하게 만드시고, 원하지 않던 의지를 이제는 진실로 원하게 만드시며, 반항하던 의지를 순종하게 하시고, 이러한 의지를 움직이고 강하게 하시어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51장 믿음과 회심
014-03-17 16:58:49
믿음은 진실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열매이며, 특별히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 믿음이나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하신다. … 믿음이 획득되는 유일한 길과 믿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는 믿음이다. 진실로 우리를 위한 모든 유익들, 즉 용서, 중생, 성화, 견인, 하늘의 구원은 오로지 믿음을 통해 존재한다.
구약 성경에는 오늘날 기독교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기술적인 용어가 없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구원은 처음부터 다름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수용될 수 있는 약속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택하는 사랑에 기초하고 인간 편에서의 자발적 동의를 요구하는 언약의 모습을 취했기 때문이다. … 신약 성경의 ‘믿음’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의미를 풍성하게 지니고 있다. … 그 때나 지금이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 이 믿음은 처음부터 두 가지 요소를 포함했다. (1)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적 설교의 수용과 (2) 지금도 여전히 하늘에 살아 계시고 죄를 용서하고 완전한 구원을 주기에 전능한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다. …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자신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포함한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이 상호 의존한다. 사도들의 증거를 참으로 믿는 자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뢰하는 자는 또한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들의 증거도 자발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스도는 과거에 구원을 성취했으나, 오늘날 친히 구원을 적용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획득한 언약의 유익들은 존재와 의식의 재창조를 포함한다. 이 유익들은 칭의와 갱신, 빛과 생명, 진리와 은혜다. … 성경은 위에 계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인도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다. … 믿음은 신비적인 동시에 지성적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흔들리지 않는 신뢰로서,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듯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성취했고 이 근거 위에서 이제와 영원토록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다.
로마교의 경우, 믿음은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포함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자유롭고 공로적인 지적 동의로서 하나님이 계시했고 교회가 믿는 모든 진리(신비)를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관계는 사랑에 의한 믿음 다음에 비로소 발생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믿음이란 비록 어떤 역사적 지식 혹은 다시 말하면 ‘일반적 믿음’을 전제한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본래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관계, 따라서 전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인격적] 지식이든 신뢰든 언제나 확실한 지식, 확고한 신뢰다. 믿음은 본성상 모든 의심과 대립되고 인격적 구원의 확실성을 포함한다.
개혁파 신앙고백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택자들만을 위하여 구원을 성취했다. 하지만 이 택자들은 성경에서 이름으로 지명되지 않았으며,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전파되고 모든 사람은 믿도록 부름 받고 믿어야만 했다.
성경에서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들의 증거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즉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속이다. 거기서 믿음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라고 불릴 수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의 원리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들을 얻는 수단이며, 모든 구원과 복의 주관적 원천이다. … 믿음은 신비적이며, 정신적이고, 수용적이고 바발적이며, 수동적이고 능동적이며, 모든 작용들의 대조이며, 믿음 자체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고, 칭의의 수단이며 성화의 원리이며, 우리 인생 전체 동안 함께하다 죽을 때 비로소 눈으로 보게 된다. … 구원의 모든 유익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현존하고 그리스도 자신이 하늘의 주님으로서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성령을 통해 나누어 주고 적용한다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즉 새 생명의 원리의 주입으로서 중생은 또한 시간상 믿음에 선행할 수 있다. 개혁파는 재세례파와의 투쟁 가운데 점차적으로 믿음의 능력, 씨앗, 성향 혹은 다른 말로하면 중생은 제한된 의미에서 유아기, 의식이 깨어나기 전, 세례를 받기 전 혹은 세례 가운데 심지어 이미 태어나기 전에 이미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통찰했다. …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개혁파에 따르면 단지 믿는 힘으로서 은사도, 자유의지의 회복도, 세례로 인한 중생, 즉, 생명의 혁신으로서 중생과도 본질적으로 다르고 나중에 뒤따르는 인격적 동의와 수용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중생이란 온전한 의미에서 즉각적인 중생으로, 원리상 사람 전체를 포함하고, 처음에는 그의 모든 능력과 힘들을 새롭게 하며, 나중에는 모든 면에서 믿음과 회심, 성화와 선행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 확증했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언약의 위대한 유익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접목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들을 취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선포되어야 하듯이, 모든 사람은 이 은혜의 수여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믿음이란 염려, 두려움, 의심, 근심과 상반되고, 믿음이란 무제한적 신뢰이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반율법주의의 잘못은 믿음 안에 확신을 포함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를 이 확신 속에 흡수시켜 다른 모든 믿음의 활동들을 부인하고, 따라서 믿음을 다름 아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선언을 지성적으로 수용하는 것으로만 이해한 것이었다. 율법적 경건주의는 다른 쪽으로 오류를 범하여, 구원의 확신을 믿음의 본질에서 믿음의 [부가적] 행복으로 옮겼으며, 특별계시 외에 오로지 지속적인 자기반성과 길고도 불안한 자기 점검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심은 언제나 내적인 생각의 변화로서 죄악 된 과거를 하나님의 얼굴 빛 가운데 보여주고, 근심, 후회, 겸손, 죄를 고백하게 만들며, 또한 내적, 외적으로 새로운 종교적, 도덕적 삶을 시작하게 한다.
신자들은 여기 지상에서 완전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많은 일들에 실수하고, 만일 그들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에 대해 죽는 날까지 계속 싸워야 하며, 회개에 합당하고 회개에 상응하는 열매를 계속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근본적인 회심은 반드시 삶 전체를 포함하고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회심이어야 한다. … 말하자면 두 번째 회심이 필요하다. 다윗은 이것에 대한 구약 성경의 한 본보기이며, 베드로는 신약 성경의 한 본보기다. … 회심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사람의 지성과 의지를 통해 실현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회심시킬 때, 그 사람은 회심되어, 자신을 돌이킨다.
참된 회심은 삶의 길에서 전적인 방향 전환, 즉 죄를 죄로 알고 근본적으로 죄와 단절하는 것이다. … 참된 회심이란 지속적으로 죄를 혐오하여 죄를 떠나 도망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독교를 이제 방금 알게 된 사람들에게 어릴 적부터 기독교 내에서 양육된 사람들에게 기대하듯이 동일한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회심의 가장 깊은 동기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주 회심을 경험한 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으며, 깊은 죄의식은 믿음의 원인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회심 시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회심의 시각이 아니라, 회심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심지어 그 시각을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식된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등장하는 회심은 점차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율법이 모든 죄의 표준 척도이기에 죄에 대한 지식이 율법에서 나온 것은 매우 확실하고, 따라서 모든 죄는 불법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죄의 속성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복음 때문이며 믿음의 열매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회심에서 율법과 복음은 협력한다. 율법은 교육학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복음은 또한 율법에 그 빛을 되돌려 비춘다.
교회의 열쇠권 전체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것이었다. 열쇠권은 “복음의 설교와 분리된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설교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볼 때, 복음 선포는 권세가 아니라 섬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실상 이 권세를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들을 말씀의 봉사자들로 삼았던” 자들의 말씀에 주었기 때문이다.
로마교 그리스도인의 경우, 거룩한 삶의 자극제는 배상[보속]들, 혹은 선행의 동로들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입장에서 이것들은 더 이상 언급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성취했고 모든 죄를 속했고, 따라서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52장 칭의
2014-03-17 16:58:09
중생, 믿음, 회심은 은혜언약의 후속적 유익들의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은 사람이 죄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됨, 평화와 기쁨, 성화와 영화를 수용하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모든 유익들 가운데 칭의가 다시금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데, 왜냐하면 칭의 아래 은혜로운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의 행위가 이해되고, 칭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모든 죄의 죄책(허물)과 형벌로부터 사면하고 그에게 영생의 권리를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과 영예를 맹세로 보증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공의는 가깝고, 하나님의 구원은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며, 시온에 구원을 베풀며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베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 안에만 의와 힘이 있으며, 하나님은 여호와, 그들의 의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좋은 다른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며, 하나님은 이 유익을 의인들이 아니라,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잃은 바 된 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구원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의 모든 구원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자녀들에게 준다는 복음을 선포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로서 죄 용서의 유익을 베푼다. 진실로 예수는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고,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며, 죄사함을 위해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한다.
이 용어(‘하나님의 의’)는 구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의롭게 편파적 대우 없이 심판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따라서 죄인을 무죄한 자로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선언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더 명확하게 개인적으로는 잘못이 있는 가난한 자들, 비참한 자들을 돕고 구원하며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 방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의는 구약 시대 마지막에 전적으로 사라져 상실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았으며,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전에 지은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믿음은 진실로 하나님의 증거를 수용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다. … 칭의는 생명의 의다.
로마교에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님은 이 행위를 통해 단지 죄의 죄책을 용서하고 영원한 형벌을 사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내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한다. … 로마교의 경우, 전체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이 세례 혹은 참회 가운데 잃었던 추가된 선물을 사람에게 되돌려 줄 수 있고, 이를 통해 그 사람이 선행을 하여 하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심지어 로마교는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 가운데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생각을 반대하지 않지만, 이것이 이 유익의 전체라는 사실은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단지 법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주입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의롭게 한다’는 것은 “의로운 자로 여기다, 수용된 자로 취급하다, 죄를 전가하지 않고 불의를 용서하다,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의를 주다, 의를 전가하다”를 의미한다. … 이 칭의는 전적으로 행위와 상관없으며, 즉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행위와 상관없다. … 우리는 선행 때문에 그리고 선행을 통해 의롭게 되지 못하나, 우리는 선행을 위해 의롭게 된다.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은혜 밖에 없다. … “어떤 사람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 성경의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그 어떤 설득력 있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 단어가 간혹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칭의가 언급될 때는 언제나 법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의의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속죄했고 자신의 부활로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 외적으로 의롭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간주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는 것이다.”
칭의의 모든 관심은 구원이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 공로 없이 의롭게 되는 것, 영광스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강조에 초점을 맞춘다. … 칭의는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로 되거나 거듭나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즉 죄사함을 받거나 죄사함이 따르는 것,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 의로운 자들로 선언되거나 여겨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 칭의는 믿음 가운데 받고 누리는 사죄의 유익과 일치하고,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교젝 되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거하게 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새 생명과 새 힘을 부어준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등장했을 때, 개혁파 신학자자들은 개념 분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가지 오류를 피하기 위해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를 구분했다. 한편으로 사람의 믿음, 경험이나 회심을 통해 비로소 용서의 유익이 발생한다는 율법주의가 거부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율법주의에 대해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영원한 칭의 교리를 거의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 능동적 칭의는 믿음 이 전의 내적 소명과 믿음으로의 내적 소명 가운데 비로소 발생하지만, … 수동적 칭의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칭의의 유익을 올바르게 깨닫기 위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들어 올리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세워야 한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미덕과 선행을 통해, 우리의 공력이나 마땅한 공로 절반 혹은 전부를 통해 하나니므이 호의를 받을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는 결코 회복될 수 없고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칭의의 근거를 믿음, 즉 사람의 좋은 성품, 미덕들과 선행에 두고 이것들을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완전의 보증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거나 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그들을 완전한 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 로마교, 항변파, 합리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과 많은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견해로 …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들은 믿음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관시킬지라도, 죄인을 사면하는 하나님의 의를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인간에게서 찾는다. … 하지만 이런 견해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에 대해 존재할 수 없다. … 하나님의 의는 …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고 믿음보다 앞서 객관적으로 복음 가운데 계시되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웠고, 이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위해 죽고, 저주를 받았으며, 죄가 되었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살아났는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거나 반드시 의롭게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살아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다. 그리고 우리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믿음은 결코 칭의의 근거로 제시된 적이 없다. 의,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지만, 결코 믿음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의이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 혹은 행위로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의 의이기 때문에 믿음은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를 의롭게 한다. …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대상과 내용으로 삼는 믿음이다. …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모든 행위의 포기, 죽은 자를 살리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의를 주는 하나님에 대한 무제한적인 신뢰이므로,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는 표현은 믿음 자체가 의의 행위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대신에 또는 나란히 하나님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의미할 수 없다.
로마교와 종교개혁 사이의 차이는 우리가 행함 있는 산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아니면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울에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그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 가운데 우리를 의롭게 하는지 아니면 믿음이 그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지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이 믿음의 열매들인 이 믿음의 행위들을 신자의 믿음의 참됨과 그래서 신자의 구원을 확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또한 믿음은 믿음의 행위들과 대립하지 않는다.
로마교는 이로부터 신자들 자신이 여전히 자신들의 가벼운 죄에 대해 속죄해야만 한다고 추론함으로써 용서의 풍성한 은혜를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반율법주의는 이 용서의 은혜를 존중하고 따라서 신자들이 저지른 죄는 새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고, 다만 옛 사람에게만 해당하며, 신자들이 심지어 더 이상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모든 개혁파 신학자들은 용서가 물론 죄의 실재적 죄책을 제거하지만, 잠재적 죄책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용서가 형벌을 제거하지만, 죄의 형벌의 당위성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죄가 지속되는 한 이 죄의 형벌의 당위성은 지속된다. … 우리가 범죄한 이후에 이 믿음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다시금 선명하고 강하게 증거하기 위해 자책, 고백, 용서의 기도가 필요하다.
개혁파는 선택 교리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을 호기심에서 탐구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속성과 열매들에서 성령의 증거를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구원의 확고한 확신을 믿음에 돌렸다. … 결국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성령의 사역이다. … 로마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칭의란 사람들을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갖추는 것인 반면,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칭의란 하나님께 대한 종교적 관계의 회복이다. … 칭의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 자녀 됨,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이 믿음으로부터 선행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53장 성화와 견인
2014-03-17 16:57:3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하고 성취하는 구속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과 그 모든 결과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칭의와 더불어 또한 처음부터 성화와 영화를 포함한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이 율법 안에 요약된 것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화는 죄사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장래 사역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허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 바로 그 자신의 성화였다. 예수가 이렇게 행한 것은 그들도 자신의 말씀으로 진리 안에서 거룩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성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그의 영의 사역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그들 마음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적 성화는 사실상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더불어 완전한 거룩을 우리에게 주며, 이 거룩을 단지 전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완전히 닮기까지 거듭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 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의로움이며,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그들의 거룩함이다. 즉, 그들의 거룩이 아니라, 그들의 성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신자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 근거인 의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죄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거룩도 획득했다. …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약속하고 교회 안에 부어 준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자녀 됨을 확증하는 양자 됨의 영(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갱신과 성화의 영이기도 하다. … 성령은 그들 가운데 내주하며, 그들은 성령 안에서 살며 행한다. … 신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은 성령의 내주와 더불어 시작된다.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있는 거룩의 관계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자리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 신약 성경에서 성화는 전적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 그들은 택함 받은 자들이지만, 자신의 부르심과 택함을 확고히 하기를 반드시 힘써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자신이 기뻐하는 바를 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드시 믿음 가운데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그들은 새 사람을 입었고 지속적으로 반드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그들은 정욕과 더불어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반드시 땅에 있는 자신의 지체를 죽여야 한다. 그들은 성도들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모든 행실에 반드시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자신들의 성화를 추구하며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은 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원리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 예수와 사도들이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들은 신자들이 현재 이미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 율법이 아니라 복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고 수용된 구원은 거룩한 삶의 강력한 동기다.
성화는 선행 가운데 드러나는데, 선행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따르면 참된 믿음을 원리로, 하나님의 율법을 규범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다. …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성화 가운데 복음의 원리들을 따라 성취해야 할 유일하고 위대한 사역(일)이다. 믿음은 성화의 탁월한 수단이다. …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위해 성취된 의와 거룩을 의지한다. 믿음은 겸손, 의존, 신뢰를 기르고, 성령을 통해 위로, 평화, 기쁨을 주며, 받은 유익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선행을 하도록 촉구한다.
감리교가 성화와 인침을 칭의와 믿음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전자를 소유하지 않고서도 후자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길 때, 감리교는 이런 그리스도의 통일성과 그리스도는 분할될 수 없다는 중대한 진리를 간과한 것이다. … 감리교가 이 분리된 유익을 칭의 후 곧바로 또는 나중에 비상한 믿음의 행위를 통해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전달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 감리교는 더욱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이런 맥락에서 감리교는 믿음의 속성과 성화의 성격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화는 하나님과 인간 편에서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이다. 그리스도가 더욱 우리 안에 내주함에 따라 우리는 믿음 가운데 더 강화되고, 우리의 믿음이 증가됨에 따라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우리에게 전달한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원자론적으로 나뉠 수 없고, 행위는 삶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의 행위는 다른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 하나의 유기체로, 단 하나의 원리로부터 번성하고, 단 하나의 규범을 통해 규정되고,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성경은 성화에 대해 말하듯이 동일하게 성도의 견인에 대해 말한다. 성경은 신자들이 끝까지 인내하며, 그리스도 안에, 그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물고, 믿음에서 떠나지 말고 믿음을 지키며,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권면한다.
개혁파의 견인 교리는 … 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하나님은 은혜의 사역이 진전되고 완성되도록 지키고 돌보지만, 신자들과 상관없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행한다. … 하나님은 소명, 칭의, 영화의 유익들을 주는데, 이 유익들은 상호 분리될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 견인은 또한 그 어떤 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영적인 방식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도덕적인 방식으로 권면과 경고를 통해 신자를 하늘의 복으로 인도하길 원하며, 신자 자신이 성령의 은혜를 통해 믿음과 사랑 안에서 기꺼이 인내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면으로부터 은혜의 전적인 상실의 가능성을 추론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 배교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 하나님의 확고한 작정, 하나님의 언약의 파기될 수 없음,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된다. … 복음 전체가 견인을 지지하고 확정한다. 성부는 창세 전에 그들을 택했고, 영생을 주기로 작정했으며,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불변하며, 때가 되어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를 수반한다. …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그들은 잃은 바 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성령은 그들을 거듭나게 하고, 영원히 그들 가운데 거하며, 구속의 날까지 그들을 인 친다.
54장 교회의 본질
2014-03-17 16:56:43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소유한 자들의 공동체는 교회라는 이름을 지닌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란 오로지 기독교의 범주 내에서만 언급된다. … 기독교회는 구약 성경 시대에 마련되었다. 족장시대에 신자들의 가정은 종교 공동체였으며 가장들은 제사장들이었다. … 포로 후에 이스라엘의 민족적 실재는 현저한 변화를 겪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세상의 다른 민족들과 같은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기독교적 관용어로 ‘시나고게’가 단지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과 그들의 회집했던 건물에만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반면, 그 외에는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카할’,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회집한 공동체에 처음으로 적용한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 ‘교회’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5장 11절, 11장 26절, 고린도전서 11장 18절, 14장 19절, 28절 35절에서 분명히 공동체의 모임 또는 회집과 연관된다. … ‘교회’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모임으로 단지 지상의 모임만이 아니라 하늘의 모임도, 단지 과거와 현재의 모임만이 아니라, 미래의 모임도 포함한다. … ‘카할’, ‘에클레시아’라는 명칭은 ‘소집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들의 파생어로서 이미 어떤 목적, 특히 정치적 또는 종교적 목적으로 회집하는 사람들의 모임, 또는 비록 그들이 특정한 순간에 모이지 않을지라도 그런 목적으로 상호 연합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루터는) 로마교회를 공격하여 사제, 제사, 수도사 체계, 오류 없는 제도적 교회 그리고 마술적으로 작용하는 성사를 거부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언했고, 사도신경 가운데 믿음의 대상으로 고백된 것처럼 교회를 신자들의 모임, ‘성도들의 교제’로 이해했다. …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본래 단지 로마교에 대해 교회의 본질이 비가시적인 것, 즉 믿음,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유익들과의 교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교회의 가시성, 즉 현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 이제 교회가 비가시적이라 불리는 까닭은 교회가 영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자들의 범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시적 교회는 고백과 삶 가운데 나타난 신자들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초기에 루터와 신앙고백서들이 교회가 아닌 ‘마귀의 왕국’에 속한다고 여겼던 불신자들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개혁파 교회론은 루터파 교회론과 주로 일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독특성을 보여준다. … 후기 루터파 교의학자들은 자신들의 교리에 따르면 선택 받은 자들은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반면, 개혁파 교리에 따르면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 밖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차이점을 발견했다. 실재적으로 개혁파 교리는 하나님이 보통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말씀과 성사의 수단을 통해 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여 있지 않으며, 매우 드물게 제도적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을 베푼다고 가르쳤다. … 개혁파는 교회를 선택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시켰고, 따라서 교회의 비가시성을 루터파와는 자주 다르게 이해했다. … 그(칼빈)는 이 ‘비가시적 교회’라는 용어를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선택된 자들의 모임으로 이해했고, 그 뒤에 교회를, 가시적이고 또한 위선자들도 포함하지만 또한 우리는 누가 이 가운데서 참된 신자들인지 알 수 없으므로 다시금 비가시적이고 믿음의 대상인 “세상에 퍼진 보편적인 군중들”로 특징지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 가지 점에서 이미 비가시적이라 불릴 수 있었다. (1) ‘보편적 교회’로서,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지역과 다른 시대의 교회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 ‘택자들의 모임’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비로소 완성되고 나타나게 될 것이다. (3) ‘부름 받은 택자들의 모임’으로서, 왜냐하면 우리는 지상의 교회에서 참된 신자들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개혁파 역시 물론 참된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의 순수한 시행에서 찾았으나, 일반적으로 여기에다 교회의 징계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선택이 교회의 토대였으나, 선택은 믿음과 선행 가운데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어린아이들의 소유이거나 소유가 되고, 하나님 나라 자체는 성령에 의한 평화, 기쁨, 즐거움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여기 지상에서 조직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유익들이 주어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지상 그 어느 곳에서도 마무리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특히 현세적 개념으로 직분들과 봉사들을 지니고 하나님의 회집한 백성으로서 가시적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교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유익들을 나누어 주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하는 수단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과정에서 불순하고 사실상 교회에 속하지 않는 온갖 요소들을 포함하는 반면, [영적] 소유물인 하나님 나라는 순수하고 순전하며 오직 거듭난 자들만 포함한다. …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교회의 본질이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넓은 의미에서나 좁은 의미에서 언제나 신자들의 모임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 또는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단지 전투적 교회에만 적용되고, 따라서 교회는 그 영적인 측면을 따라 또는 교회의 참된 회원들 안에서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 전투적 교회,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에 대해 사용된 ‘교회’라는 명칭은 로마교와 개신교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은유적인 의미를 지닌다.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핵심적인 요소를 형성하고 교회에 본질을 제공하는 신자들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는 결코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과 신자들의 그룹에 대한 명칭이 아니다.
교회의 무게중심을 신자들의 모임에서 계급적 제도, ‘온 세상의 외적인 최고 군주제’로 옮기고, 교회의 본질을 ‘듣는 교회’보다는 훨씬 더 ‘가르치는 교회’에서 찾는 로마교가 있다. … 벨라미누스는 로마교회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정력을 기울인다. 그는 열 다섯 개나 되는 표지들을 나열한다. … 로마교 신학자들은 이 본보기를 따르지만, 열다섯 개의 표지를 일반적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언급된 것처럼 네 개로 축소한다.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성이 그것이다. 게다가 로마교회는 사실상 참된 교회가 알려질 수 있는 표지들이나 기준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전히 주목해야 한다. … 로마교는 그런 척도를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이 교회에 의존하고 있으며, 교회 자체가 교리와 삶에 대한 최상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경우, 교회의 표지들은 다름 아닌 교회가 드러나고 나타나는 표시들, 속성들이다. …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본질에 상응한다는 것을 논증해야 한다. 그들의 개혁적 행위가 전제한 것은 교회란 ‘스스로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서 벗어나 방황할 수 있고, 교회 역시 복종해야 하는 더 높은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더 높은 권위는 다름 아닌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 종교개혁이 교회의 표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추구했다는 사실은 성경과 관련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없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통일성이란 … 로마교에 의하면 이 속성은 특히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교황 안에서 하나의 가시적 머리를 지니며 결코 다른 교회를 그 옆에 두거나 그 뒤에 둘 수 없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사실상 교황이 참된 교회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표지다. … 개신교는 … 교회의 머리와의 하나 됨, 하나이자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모든 선지자들의 교제, 그리스도와 서로 하나 됨,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 사랑, 소망, 세례 등의 하나 됨을 생각한다. 이러한 통일성은 물론 일차적으로 영적인 성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며 또한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불완전한 방식이지만 외부로 나타나고, 최소한 모든 기독교회가 서로 공통점을 지닌 점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로마교는 교회의 거룩성을 일차적으로 예전적, 예식적 거룩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신적 은혜의 강력한 수단으로서 신자들 가운데 참된 거룩을 일으키는 제도적 교회의 합법적인 제사 의식과 성사를 건전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 종교개혁은 교를 다시금 성도들의 교제로 알렸기 때문에, 거룩을 일차적으로 구원의 기관의 초자연적인 성격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교회 회원들의 영적 갱신에서 추구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속성은 교회의 보편성이다. 로마교의 경우, 이 명칭은 교회의 첫 번째 명칭인데, 왜냐하면 교회는 비록 단 하나의 전체와 완전한 일치를 형성할지라도 온 땅에 퍼져 있는 반면, 분파들은 항상 한 나라 또는 세상의 한 부분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 로마교의 경우, 보편성은 반드시 교회의 분명한 가시적 표지여야 하므로, 보편성은 특히 모든 민족들 가운데 교회가 현저하게 많은 회원들을 보유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 하지만 교부들이 교회의 보편성을 호소하는 본문들은 보편성의 의미가 특히 다음 사실에 있음을 증거한다. 기독교는 모든 민족과 모든 세기, 모든 신분과 지위, 모든 장소와 시간에 적합하고 의도된 세계종교다.
교회의 네 번째 속성은 교회의 사도성이다. 로마교에 의하면, 사도성은 로마교회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로마교회가 사도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교리와 조직과 봉사에서 사도들의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며, 특히 로마교회의 직분자들은 끊임없는 계승을 따른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며, 그들 자신이 순차를 따라 사도들의 합법적인 계승을 받았던 자들로부터 자신들의 권세와 권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 개신교도들은 ‘위치와 인물의 계승’이 아니라, ‘교리의 계승’이 참된 교회의 특징적 속성이라고 올바르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속성들에 속하는 것은 ‘무결점’과 ‘무오류’다. 예수는 지목의 문이 교회에 대해 이기지 못할 것이며, 자신이 세상 끝 날까지 교회를 보존할 것이라고 자신의 교회에 약속했다. … 신약 성경은 말세에 더욱 부패해지고 교회는 온갖 유혹과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55장 교회의 통치
2014-03-17 16:56:03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통치는 필수적이다. … 이 권위는 정치적 영역보다 더 특별한 의미에서 단지 만물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원자인 하나님에게 기초한다. …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이미 중보자로 임명되어 자신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직분을 낙원에서부터 수행했고, 구약 시대에 그리고 자신이 지상에서 거니는 동안 이 직분을 계속 수행했으며, 이제는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이 직분을 성취하고 있다.
신자들의 모임으로서 교회 자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그의 교회에 불러 모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었다. … 교회는 수동적 의미와 능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동시에 신자들의 모임과 신자들의 어머니이며, 또는 다른 명칭을 따라 동시에 유기체이며 제도적 기관이다. … 교회의 제도는 최소한 개혁파 고백에 따르자면 결코 교회의 산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설립한 것이다.
사도직의 수립은 특히 그리스도가 지상의 자기 교회에 주었던 제도적 성격에 대한 강력한 증거다. … 열 두 사도는 바울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기독교회 내에 확립되어 있었다. ‘사도’라는 명칭 역시 예수가 그들에게 준 것인데, 그들은 설교하도록 예수에 의해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 바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도로서, 자신의 부르심, 자신의 복음, 심지어 특히 자기 복음의 독특한 내용, 즉 이방인들이 함께 후사라는 것조차 그리스도의 특별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사도적 조력자들은 ‘전도자들’이라는 명칭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그리고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따로 구별된 것처럼, 자기 규례를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복음 선포를 위해 교회에 의해 따로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좁은 의미로 세 가지 측면에서 사도들과 일치한다.
사도들과 전도자들과의 공통점은 그들이 지상의 온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효한 하나의 직분을 갖고, 따라서 교회의 터를 닦는 데 함께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도자들은 특히 사도들의 선교적 사역과 교회 설립의 사역을 돕는 반면, 선지자들은 사도들의 건덕과 교육의 사역을 측면에서 지원한다. … (1) 사도들은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선택되고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직분을 받았다. (2)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위해 예수 자신에 의해 훈련되어 능력을 갖추었고,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해 눈과 귀로 목격하고 들은 증인들이었으며,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으며, 그들의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받은 것이다. (3) 그들은 특별한 정도로 자신들을 가르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을 소유한다. (4) 그들은 이 성령을 덧입어 예수의 증인, 특히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공적으로 활동하고, 신뢰할 만한 증인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5) 그들의 증거는 하나님에 의해 표적들과 기적들과 풍성한 영적 복으로 인침을 받았다. (6) 모든 세대의 교회는 그들의 이러한 증거에 매여 있다. …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다. … (7) 그러므로 그들의 직분은 일시적이거나 지역 교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온 교회로 확장된다. … 사도성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속성이며 특징이다.
교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세워진 비상한 직분들인 사도들, 복음 전도자들, 선지자들과, 사도적 인도 아래 교회들 자체에서 등장한 일반적인 직분들인 장로들과 집사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후자의 이 직분들은 정부가 백성들을 전제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교회들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직분들은 사도의 직분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그리고 즉각적으로 세워지지 않았으나, 교회들이 설립되고 정규적인 지도가 필요할 때 비로소 등장했다.
감독의 직분을 가리키는 ‘장로’라는 명칭은 점차적으로 ‘감독’이라는 명칭을 통해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대체되었다. … 사도행전은 얼마 안 있어 성령의 인도 아래 여러 교회에서 남자들이 임명을 받았는데, 그들은 회중을 감독해야 하고, 처음에는 대개 연장자들 가운데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들’이라는 명칭을 지녔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사역의 관점에서 ‘감독들’이라는 명칭을 획득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감독들은 교회 안에서 특별한 봉사를 위해 임명된 장로들이다. 따라서 모든 감독들은 장로들이지만, 모든 장로들이 감독들은 결코 아니다. 장로들은 하나의 신분 또는 그룹을 형성하는 반면, 감독들을 직분을 지닌 자들이다. 그러나 초기에 자주 발생했던 것처럼, 감독들이 장로들이라고 언급되었을 때, 명칭상의 차이는 없다. 이 경우 장로들과 감독들은 동일한 사람들이며 동일한 직분을 지닌 자들이다.
장로의 직분이 일차적으로 교회의 감독과 다스림과 인도의 과제를 담당한다. … 감독의 직분은 본래 가르치는 직분이 아니라 다스리는 직분이었다. …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점차 감독의 직분에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교회들이 확장되자, 말씀과 성례의 필요가 더 이상 사도들, 복음 전도자들, 선지자들에 의해 충족될 수 없었다. 이 필요를 충족시키고 제공할 지역적이고 항구적인 직분이 필요했다. … 모든 상황은 가르치는 사역을 감독의 직분에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감독의 직분은 교회에서 영속적인 자리를 확보했다. … 단지 다스리기만 하는 감독과, 가르치는 사역도 함께 맡은 다른 감독 사이에 구분이 지어졌다.
집사들에 관하여 신약 성경 사도행전 6장은 그들이 교회에 의해 지명되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 준다. … 그들은 식사 때 사람들을 돕고 더 나아가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주님의 선물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도록 임명되었다.
특별한 직분으로서 사도직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앞서는 반면, 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은 이런 직분을 맡을 사람을 지명하고 선택할 권한을 지닌 교회를 전제한다. … 교회들이 초기에 특별한 직분들(사도들, 복음 전도자들, 선지자들)과 평범한 직분들(감독들, 집사들)을 아직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 신약 성경과 속사도 교부들에 의하면 교회 안에 존재했던 상황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그 풍성하고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모두 흡수할 수 없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 온갖 이단적 경향들과 분파적 경향들의 등장은 기독교회의 조직과 강화를 긴급하게 필요로 했다.
로마교회는 감독 체제에 머물지 않고, 이 체제를 교황 체제로 발전시켰다. … 로마에서 2세기 중반경에 첫 번째 주교 명단이 작성되었다. 여기서 주교들의 계승과 그들의 사도적 존엄성에 대한 사상이 등장했다. ‘로마’와 ‘가톨릭’은 처음부터 서로 연관되었고 상호 발전했다. … 4∼5세기의 교부들이 로마와 교제하고 로마에 복종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에 필요하다고 여긴 것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 공동체의 권한은 로마교회에서 나온다. … 로마교적인 것이 가톨릭의 표준 잣대다. … 모든 교회들은 기독교적인 동시에 가톨릭이 되기 위해 반드시 믿음 안에서 로마교회와 일치해야만 했다. …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독제로부터 교황 체제가 흘러나왔고, 옛 지역 교회들의 모임은 총회와 공의회로 확대되었다. … 로마교회는 갈수록 더욱더, 사도들 가운데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특별한 은사와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주교가 교회의 머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무결점’의 근거를 발견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계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교구, 주교좌 성당, 총대주교 또는 대주교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모든 교회는 동등하며 각각 자신의 감독들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 어디에서도 교회 봉사자들의 합법적 계승을 살필 것을 지시받지 않았고, 오히려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며, 가르침 안에 머물라고 명령되었다. 합법적 계승이 교리의 순수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이런 계승은 구원을 특정한 인물들에게 의존하게 하며 비실재적인, 오류에 빠지기 쉬운 그리고 심지어는 종종 불가능한 역사적 연구에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 성경에 의하면, 사도직은 신약 교회에서 예외적, 일시적, 그리고 갱신 불가능한 직분이었다. 비록 감독직이 장로직과 다른 직분이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감독직이 사도직과 동일하고 사도직의 연장이라는 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 베드로의 수위성(首位性)은 다시금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지녔던 사도직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로마교 신학자들도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우위라고 말하는 성경의 모든 것이 다른 사도들에 대한 그의 ‘월등한 관할권’임을 증명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베드로가 바울과 동일한 해에 또는 몇 년 일찍 64년에 네로 치하에서 순교자로 죽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 베드로가 20∼25년 동안 로마에서 지내고, 로마교회의 주교와 온 교회의 대주교였으며, 리누스(Linus)가 베드로의 주교직과 대주교직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절대 증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 (1) 사도행전 12장 17절은 베드로가 44년에 죽은 헤롯왕의 사망에 바로 앞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 (2) 바울이 약 54∼58년경에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온 교회에 쓴 서신에는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하여 사역했다는 언급이 한마디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없고, 바울이 57∼58년 또는 61∼63년에 틀림없이 로마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 (3) 가장 오래된 전통은 베드로와 바울을 계속 나란히 언급하며, 단지 베드로만이 아니라,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의 교회를 시작하고 설립했다고 말한다. … (4) 빅토르(Victor) 또는 제피리누스(Zephyrinus)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고대 전통은 변하여 바울은 갈수록 더욱 로마교회의 설립과 확립에 기여한 바를 잃은 반면, 오로지 베드로만이 감독직을 시작한 사도로 여겨지고 그 후에 또한 로마의 첫 번째 주교로 제시되었다. … 로마 주교의 수위성, 교황의 교회적 위엄, 그리고 따라서 로마교회의 진리와 로마교 신자들의 구원은 언제라도 새로운 증거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가능성에 기초한다. 여기서 영원은 힘없는 거미줄에 매달려 있다. … 베드로의 수위성과 로마교회의 감독직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수위성을 로마 주교가 아닌 다른 주교에게 넘겨주었을 수도 있었다. …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로마의 감독직이나 로마의 후계자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 모든 교회에 대한 로마 주교의 수위성은 근거가 없고, 자신이 기초하는 ‘신적 법률’을 지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믿을 만한 역사적 토대마저 없기 때문이다. … 결국 로마교 신학자들은 수위성과 로마 주교직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서로 일치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에 고유한 통치를 부여했다. 그리스도는 친히 사도들을 불러 훈련하고 임명하여 교회의 기초로 삼았다. 그리고 이 사도들은 자기 차례를 따라 그리스도의 인도하심 아래 감독들과 집사들의 일반적인 직분들을 제정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없을 때 그리고 죽은 후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통치 없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그리스도의 교회 자체가 환경의 요구에 부응하는 통치 형태를 만들 수 있다거나 암묵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기독교 정부에 통치를 위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 동일한 죄가 교회 안에서 처벌받는 것과 국가에서 처벌받는 것은 다르다. 교회가 벌하는 징계와 국가가 내리는 형벌은 천지 차이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 양 떼들을 감독하는 것, 말씀과 성례의 시행, 봉사자들의 소명과 선택은 교회의 고유한 권한과 엄숙한 의무로 머물 것이다.
교회의 토대와 일치는 하나님의 작정, 은혜언약,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으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는 반드시 말씀과 성령을 통해 회집되고 인도되어야 한다. 이 모임은 그리스도에 의해 발생하고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한다. 비록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직분들과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언약의 유익들을 나누어 주고 이를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설립하는 자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친히 사도들의 고백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사도들은 그의 손 안에 있는 도구들로서 토대인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운다. … 교회 전체는 다양한 지체들의 원자론적 총합으로 발생하지 않고, 보편 교회가 먼저 존재한다.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신약 시대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거기서 다른 장소들로 확대되었다. …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母) 교회란 없다. 예루살렘이나 로마는 그런 지배를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교회는 동등한데, 왜냐하면 모든 교회는 비록 하나의 교회가 다른 교회에 의해 세워졌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즉 직접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의존적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 누가 교회의 회원이며 우리가 누구와 교제하며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 우리의 교회로서 가장 순수한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다.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신자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수해야만 한다. … 그들은 교회에 가입할 의무를 지닌다. 그들은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며 따라서 교회에 가입하여 교제를 추구하고 유지해야 한다. …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들을 활용하고, 형제들을 동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며, 신자들의 회집에 참석하고, 주의 죽으심을 전파하며, 서로를 돌아보고, 섬기고 나누는 자비의 활동 등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 그들 각각에게는 또한 자신의 방식과 정도에 따라 교회를 형성하고 개혁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종들을 직분에 두는 길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소명, 검증, 그리고 임명이다. … 내적 소명은 (1) 직분에 요구되는 은사의 수여 (2) 직분을 추구하는 순수하고 참되고 확고한 욕구 (3) 직분으로 인도되는 길의 자취들에 있다. … 외적 소명은 시험, 조사, 또는 검토로 이어진다. … 실수 없이 안전하도록 교회가 소명 후에 여전히 시험을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가 요구되는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교회에 주기 위한 목적이다. … 교회가 노회에서 시험을 치게 할 때 교수들의 도움을 받을 경우 잘 시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성경과 개혁파 고백에 따르면, 그리고 또한 일의 성격상 그런 조사를 시행할 권리는 교회에 속한다. 학교가 그 시험들을 치르게 하지만, 부르고, 시험하고, 보내고,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는 권세를 주는 권리는 교회가 지닌다. … 마지막으로, 소명과 시험에 특히 안수를 통해 거행되는 임직이 덧붙여진다. …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가 직분 임명에 있어서도 그렇게 안수했다는 것을 읽지 못한다. 예수는 자기의 사도들을 어떤 예식 없이 단지 말씀으로만 임명했다. … 치료할 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고, 집사들을 임명할 때 안수가 시행되었다. … 안수가 직분의 영적 은사들을 참으로 제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피택된 집사들은 이미 안수에 앞서 반드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사도행전 6장 3절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 개혁파는 안수가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고, 따라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만장일치로 생각했다. … 안수는 임직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의 경우나, 사도들의 경우나, 장로들의 경우에도 안수에 대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 안수는 또한 직분으로서의 선택이나 소명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직분으로 부름 받은 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지명이자 이 직분으로의 엄숙한 취임과 소명일 뿐이다. … 안수는 부름 받은 자가 합법적 절차를 따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요구되는 은사들을 소유하며 그런 자로서 교회에 의해 수용되고, 인정되며 존경받아야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단지 하나님과 그의 교회 앞에서 엄숙하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통치에 있어 장로교적인 형태를 소유하는 것은 칼빈 덕분이다. … 칼빈이 이것을 처음으로 실행했고 장로의 직분을 개혁파 교회 통치의 한 특징으로 만들었다. 칼빈은 이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했다. … 그가 제시한 장로의 교회 통치는 어떤 추상적인 원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하고 성경의 권위로 교회 안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개혁파는 말씀 봉사자 직분의 회복과 나란히 장로직과 집사직의 회복을 통해 성경의 사상을 가장 순수하게 붙들었고 교회의 권리를 가장 확고하게 인정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왕이다. 비가시적 측면에서 …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지상에 있는 자신의 교회를 자신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그리고 왕적 활동을 통해 다스린다. … 가시적인 측면에서 … 그리스도는 교사의 직분을 통해 교육하고, 장로의 직분을 통해 지도하며, 집사의 직분을 통해 자신의 양 떼들을 돌본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직분 모두를 통해 우리의 최고 선지자와 우리의 영원한 왕과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신다.
56장 교회의 권세
2014-03-17 16:55:03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에 준 이 권세는 특별한 성격을 지닌다. 이 권세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가 맨 처음 베드로에게 주었던 열쇠권이다. … 베드로가 여기서(마 16:19) 예수에게서 받은 권한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자신의 고백에 근거하여 그리고 자신의 고백에 따라 여기 이 땅에서 설립된 교회에 그 중심지를 갖는 하늘나라에서 무엇이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을지를 결정할 권한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도권(敎道權, 교황이나 주교들의 가르치는 권한)을 명백히 재치권(裁治權,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 아래에 두고 있다. 로마교에서 말씀의 봉사는 교황의 무류한 결정에 정점을 이루는 사법(司法)이다. … 로마교에서 사제직은 또한 복음의 설교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 고해성사는 단지 세례 받은 자들에게만 시행되는데, 왜냐하면 교회는 단지 세례를 통해 교회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에 대해서만 재치권을 갖기 때문이다. … 신자들은 교회의 법령, 즉 교화의 교령을 따라 사제에게 종속된다. … 교황이 오류가 없는 까닭은 영감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교회가 오류에서 벗어나 진리 가운데 보존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오류가 없는 것은 그가 새로운 계시들을 받고 새로운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가 사도들이 전한 계시를 신실하게 보존하고 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황이 이 모든 것에서 오류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그 어떤 비평할 권한도 없이(“아무도 그의 결정을 비평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적으로 교황에게 순종해야 하며, 다른 아닌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두고 순종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교회 권력의 부패에 대해 저항했다. 종교개혁은 교회란 ‘성도들의 교제’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세속 정부의 권세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권세를 받았다고 다시금 고백했다. … 교회의 모든 권세는 본래 하나님에 의해 시온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에게 기초하고, 따라서 영적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 권세를 행사할 때 도구들을 사용하는데, 이 도구들은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이거나 주권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 매여 있다.
지상에는 많은 종류의 권세와 권위가 있다. 가정, 사회, 국가, 예술, 학문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교회의 권세는 이 모든 권세와 본질적으로 구별되고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권세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 교회의 권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직접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다른 모든 지상의 권세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 교회의 모든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 안에 제정한 직분들과 연관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직분들에 은사들을 주고 부여할 수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직분들을 부르고 보낸다. … 이 권세는 영적 권세다. 이것은 권세가 보이지 않거나 전적으로 내적인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진실로 영적인 왕이지만, 영혼과 육체 모두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 교회의 권세가 성령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며,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시행될 수 있으며, 오로지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며, 오직 영적, 도덕적 방식으로, 즉 금전, 재산, 생명의 강요나 형벌이 아니라 확신, 믿음, 자원함, 자유, 사랑으로 그래서 오로지 영적 무장을 통해서만 행사되고 행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이 권세는 구원을 위한 것이며,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함이며, 신자들의 온전함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
교회의 권세는 그 종류상 모든 국가 권력과 다르다. … 그리스도는 친히 모든 지상의 권세를 거부했고, 자기 제자들에게 세상 통치의 조짐을 보이는 모든 것을 취하지 말라고 금했다. … 속성과 본질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세는 영적인 반면, 정부의 정치적 권세는 자연적, 지상적, 세속적이며,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고, 단지 백성들의 지상적 관심사만을 규제하기 때문이다. 목적에서도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교회의 권세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소용되지만, 정치적 권세는 지상 생활에 목표를 두고 자연적 선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수단에 있어서도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지 영적 무기만을 지니지만, 정부는 칼을 지니고, 살리고 죽이는 권한을 죽이며 힘과 강요로 복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로마교회는 모든 지상의 정치적 권세를 자신의 손 안에 두려고 계속 염두에 둘 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로마교회가 교회의 권세 자체로부터 그 영적인 성격을 빼앗아 정치적 지배권으로 바꾼 것이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의 직분과 연관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삼중직, 선지자, 왕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세 가지 종류의 권세가 있다. 교도권, 통치권, 그리고 자비의 권세 또는 오히려 자비의 봉사가 그것이다. … 교도권의 기원과 토대는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을 받고 직접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지금도 언제나 행사하는 선지자의 직분에서 비롯된다. … ‘교사’라는 명칭은 말씀의 봉사자에 대한 특징적인 칭호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준비와 훈련, 말씀 봉사에 대한 전적인 헌신, 복음을 전함으로써 살아갈 권리, 신자들의 모임 가운데서 말씀과 성례의 공적인 시행을 통하여 감독, 특별히 목양의 일을 맡은 다스리는 장로와 구별된다. … 이 교도권은 더 나아가 다음 세 가지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포함한다. 첫째, 교회는 미래의 교회 봉사자들을 훈련시키거나 이 훈련을 세밀하게 감독하며, 교회의 봉사들로 부르고, 심사하며, 파송하고, 임직하며, 후원하며, 그들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설교되고, 이런 식으로 인류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확립되고 확대되어 널리 보급되게 한다. 둘째, 교회는 직분의 수단을 통해 각각의 필요를 따라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젖의 형태로, 그리고 교회의 성인 교우들에게는 딱딱한 음식의 형태로 전하고, 더 나아가 항상 하나님의 온전한 뜻,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펼쳐 보이고 각 백성과 나라, 각 세대와 시기, 모든 교회와 특히 모든 신자들의 필요를 따라 전개시키고 적용해야 한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번역하며, 믿음의 규칙을 따라 해설하고, 모든 거짓 공격에 대해 변호하며, 이렇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교회를 건설하며, 진리를 간직한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교회를 각 사람의 눈에 드러내고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
고백서는 성경과 나란히 서 있거나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보다 훨씬 아래 존재한다. 오로지 성경만이 그 자체로 믿을 만한 자증하는 것,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믿음과 순종에 묶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고백은 언제나 성경에 의해 심사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고백은 표준적 기준이 아니라, 기껏해야 표준화된 기준일 뿐이며,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특정한 교회에서 수용된 교리의 기준”이며, 종속되고 틀릴 수 있는 인간의 산물이고,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으로부터 자신의 의식 가운데 취한 것의 불완전한 표현이며, 이제 모든 오류와 거짓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고백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고백으로 아무도 강요하지 않으며 탐구하도록 속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각 사람이 다르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의미로 이해하도록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개혁교회의 권징에 따르면, … 언제나 인격적 존재들이 권징의 대상이다. 권징의 대상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다. … 권징의 대상은 죽은 사람들, 또는 사람들의 계층이나 단체가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개인들로서 단지 세례를 통해 또는 고백을 통해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다. … 권징을 유발하는 원인은 … 회중 가운데 괴로움을 초래하고 정부가 징벌하지 않거나 매우 부드럽게 벌하는 죄들이다. … 교회 전체 또는 당회의 교회 대표가 개입되었을 때 비로소 공공연한 죄의 성격을 지닌다. … 교회가 부과하는 징벌은 순전히 영적인 것이다. … 교회의 무기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강력한 것이다. … 출교란 마지막으로 다름 아닌 형제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 출교란 다름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나 아니라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를 심판하도록 교회와 교회의 교제 밖에 두는 것임을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선포하는 것일 뿐이다.
모든 교회 모임들의 권위는 다름 아닌 교회 자체의 권위다. 이 권위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에서 그리고 교회의 다양한 모임들에서 권위를 갖는 유일한 분이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결정적이다. 오로지 성령이 교인들 가운데 그리고 교인들을 통해 승인하는 것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구속력을 지닌다.
57장 은혜의 방편
2014-03-17 16:54:12
모든 구원과 복은 하나님의 미덕인 은혜로부터 타락한 인간에게 흐른다. 그 모든 유익을 지닌 은혜는 객관적으로 이 유익들을 언약의 방식을 따라 성취하고 나누어 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 신비주의자들은 … 오직 하나님 자신, 또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 성령이나 내적인 말씀이나 빛이 인간 안에 은혜를 일으키고, 말씀과 성례는 단지 이 내적인 은혜를 가리키고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 로마교에 의하면, 교회, 가시적 교회, 보이지 않는 성령에 의해 지지되는 교회가 실질적이고 참된 완전한 은혜의 방편이며, 특히 무엇보다도 성찬이 그 은혜의 방편이다. … 로마교에서는 교회가 성경보다 앞서고, 교회는 성경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로부터 나온 것이다. … 종교개혁은 … 교회를 다시금 성경의 토대 위에 놓았고, 성경을 다시금 교회 위에 높이 두었다. 교회가 아니라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탁월한 방편이 되었다. 심지어 성찬조차 말씀에 종속되었고 이 말씀 없이 그 어떤 의미나 효력도 지니지 못한다.
하나님은 외적인 수단들 없이도 죄인들의 마음 가운데 자신의 은혜를 영화롭게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과 표식들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일 뿐이다. … 개혁파의 경우, 중생은 세례에 앞서는 것으로 여겨져 은혜의 방편들은 중생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 우리는 구원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분여된다는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기초해야만 한다. …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구원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다. … 규칙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자신의 은혜의 분배를 그리스도의 교회에 매어 두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나란히 존재하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위탁된 모든 권세는 다름 아닌 말씀과 성례의 봉사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직분 그 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과 성례를 통해 은혜가 주어진다. 그리고, 믿음, 회개, 기도는 은혜의 방편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열매들이다. … 엄격한 의미에서 오직 말씀과 성례만이 은혜의 방편들로 여겨질 수 있다. …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례 없이 또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은혜를 베푼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나 자신이 교회에 주었던 성령의 내적인 부름을 통해 은혜를 베풀고, 자신이 만민에게 복음을 설교하라고 위임했던 교회의 교제 가운데 은혜를 베풀며, 복음을 그 내용으로, 그리고 성찬을 표시와 인침으로 받은 언약의 길을 따라 은혜를 베푼다.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 성찬은 오로지 신자들의 모임에서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봉사자에 의해서만 시행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들의 모임 밖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그 자리를 가지며,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찬과 더불어 참된 의미의 은혜의 방편으로서 논의되는 때는 오직 목사가 공개적으로 설교할 때이다.
율법은 한 민족을 위한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어야 할 영원한 것이다. 율법은 불완전하고, 그림자와 본보기였으나, 복음은 완전하고 유익들 자체의 실체다. 율법은 두려움을 조성하여 예속시켰지만, 복음은 사랑과 자유를 일깨운다. 율법은 온전한 의미에서 의롭게 할 수 없고,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지 않았으나, 복음은 성례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을 완수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은 불완전한 복음이며, 복음은 완전한 율법이다. …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으로부터 나온 것인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고, 율법은 본성에 의해 알려진 반면, 복음은 오로지 특별 계시에 의해 알려지고, 율법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는 반면, 복음은 그 의를 제공하고, 율법은 공로를 통해 영생으로 인도하는 반면, 복음은 믿음 안에서 제공된 영생으로부터 선행이 발생하게 하고, 율법은 지금 사람을 정죄하는 반면, 복음은 사람을 해방시키고,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향하는 반면, 복음은 오직 복음 아래 사는 자들에게만 향한다는 점에서 율법과 복음은 다르다.
복음은 실제로 언제나 율법과 연관되고, 그래서 또한 성경 전체를 통해 언제나 율법과 함께 짜여 있다. 복음은 언제나 율법을 전제하고, 또한 복음이 증거될 때 율법을 필요로 한다. … 각 사람은 먼저 복음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본성상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따라서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는 복음을 수용해야만 한다. … 믿음과 회개는 복음의 내용이며, 율법의 결과나 열매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며, 율법은 진실로 참회를 일으키지만, 오히려 믿음의 열매인 회개를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 율법과 복음은 구체적으로 살펴 볼 때, 율법이 항상 명령의 형태로 나타나고 복음은 약속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도 약속들을 지니고 있으며, 복음 역시 책망하고 의무들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과 복음은 특히 내용 면에서 차이가 난다. 율법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를 성취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반면, 복음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모든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수용할 것을 초대하고 심지어 이를 위하여 믿음의 선물까지 제공한다.
개혁파는 … 율법의 정치적 용법과 교육적 용법은 죄로 인해 단지 우연히 필요하게 되었다. 비록 이 용법들이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용법인 교훈적, 규범적 용법은 남아 있다. 율법은 결국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 복음은 일시적이지만, 율법은 영원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에 의해 회복되었다. 그래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이 율법과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구원의 조건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이 일으킬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씀 없이 일으키지 않는 믿음과 회개를 오직 말씀만으로 초래하기는 불충분하고, 따라서 말씀과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람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서로 연관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 개혁파는 일반적으로 성령이 ‘말씀과 함께’ 동반한다고 생각한 반면, 루터파는 성령이 자신의 도구인 ‘말씀을 통하여’ 일한다고 점점 더 강조했다. …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다가오고, 성령에 의해 전파되고 따라서 항상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 성령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이 말씀을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고 강퍅하게도 하며, 흥하게도 하고 패하게도 한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 사역하지만,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 성령의 이런 주관적인 활동은 반드시 객관적인 말씀에 더해져야 한다. 이런 활동은 일의 본질상 말씀 속에 갇힐 수 없다. … ‘말씀을 통한’ 활동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하는 활동이며, 마음을 여는 것이며, 내적인 계시이며, 그리스도께 이끄는 것이며, 지성을 밝히는 것이며, 소원과 행함의 사역이다. 이로써 성령은 말씀으로부터 떨어지거나 분리되지 않고, 심지어 유아들의 경우에 어떤 은혜의 수단도 없이 거듭나게 하는 때에도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듭나게 하는 때에도 성령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성령, 그리스도가 획득한 영으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는 다스리며, 이 성령은 모든 것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취하고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에 부어지고 따라서 교회의 영이기 때문이다. …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묶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일한다. …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성령은 단지 은혜언약이 말씀의 봉사와 성찬의 시행과 더불어 퍼진 곳에서만 일한다. 따라서 유아들의 경우, 중생은 언제나 그들이 성숙했을 때 알려지고 그 참됨이 입증되는데, 중생은 믿음과 회개의 행위로 드러나고 객관적으로 우리를 위한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58장 성례들
59장세례
신학분과별/바빙크 교의학
2014-03-17 16:52:20
신약의 세례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백하게 지시했던 할례를 통해 준비되었다. … 할례는 은혜언약의 표와 확증으로 사용되었고 이 언약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크고 유일한 약속은 “내가 ……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할례는 그 언약의 두 가지 유익에 대한 인(印)으로서, 믿음의 의와 마음의 할례, 즉 칭의나 죄사함, 그리고 중생이나 성화를 인 친다. … 할례란 믿음의 의에 대한 인이며 따라서 믿음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기 전에 요한의 물세례를 도입했다. 이 세례 역시 고대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었다. 고대 종교 전체는 물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고 자신의 약속을 성취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 그것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단지 나중에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게 될 죄사함만을 예비했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회개를 통해 용서를 제공했다는 의미다. … 예수 자신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행한 세례와 요한의 세례를 결코 구별하지 않았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은 채 단순히 받아들였으며,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다른 세례나 새로운 세례를 도입하지 않고, 다만 세례를 모든 민족에게 확대시켰을 뿐이다. … 참된 기독교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물로 시행되는 세례이고, 요한의 세례는 마찬가지로 물로 시행되는 세례였으나, 동시에 회개와 용서를 인 치는 것이었다.
세례의 신적 제정은 이미 요한의 사역에서 발생했고, 예수 자신이 이 세례를 받은 후 이를 이어받아 자기 제자들을 통해 세례를 주었으며,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만민 가운데 모든 신자들은 이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 예수 자신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써 요한의 세례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 예수가 이 세례를 이어받아, 비록 자신이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제자들을 통해 이 세례를 시행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요한의 설교와 동일한 설교, 즉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파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똑같은 조건, 즉 믿음과 회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기독교 세례의 문구가 아니라, 기독교 세례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 기독교 세례도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또는 ‘예수의 이름에 합하는’ 세례이며 그렇게 불리는데, 왜냐하면 기독교 세례는 신자들을 예수의 교제 가운데 가입시키고 오로지 예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기독교 세례는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가입하는 것이며 반드시 그러한 가입이어야 한다. …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인격 자체와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세례를 받은 자가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한 하나님과 연관하여 이 교제 가운데 있으며, 이제 이것을 토대로 그 이름을 고백하고 영화롭게 할 의무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 공동체 가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고, 세례는 죄사함의 표와 증거였다. … 물속에 들어갔다가 올라오는 것으로서 세례는 그리스도,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과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묘사와 보증이다. … 바울에게 있어서 물세례는 동시에 성령세례이지만, 방언과 예언의 영적인 은사들의 세례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원리로서의 성령의 세례다.
루터는 초기에 세례의 유익한 효과가 언제나 세례의 유익들이 수용되는 믿음에 의존한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가면 갈수록 그는 더욱더 세례의 객관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신자들이거나 신자들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하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루터파는 나중에 성인들의 경우, 세례의 유익한 효과는 진실로 믿음, 최소한 ‘수동적 능력’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만일 믿음이 있다면, 그 유익한 효과는 ‘인침’과 ‘확증’인 반면, 유아들의 경우, 세례가 중생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개혁파는 점차적으로 세례와 연관된 대부분의 의식들을 거부하고 성경의 단순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또한 세례란 신자들을 위해 제정되었기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킨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이런 사상을 견지하려고 애썼다. … 세례란 부모들에게 자기 후손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포함되었다는 증거인 동시에 자녀들에게는 훗날 그들이 성장했을 때 풍성한 위로와 복이며, 또한 무의식의 상태 속에서도 이미 그들에게 은혜언약의 유익들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 세례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평신도에 의해] 긴급하게 세례 받을 필요도 없었다. … 그들 모두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방편들에 매여 있지 않으며 또한 어린 유아들의 마음속에 중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예외 없이 인정했으나, 택함 받은 어린아이들의 경우 이 거듭남이 세례 전에 또는 세례 시에 또는 심지어 때때로 세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 미결 상태로 두었다. … 세례는 점차적으로 중생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견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세례를 교회의 성사로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후손의 보증으로서, 또는 복음의 객관적, 조건적 약속의 확증으로서, 또는 외적 은혜언약의 교통에 대한 증거로서, 또는 상실될 수 있는, 구원과 분리될 수 있는, 그리고 나중에 인격적인 믿음을 통해 확증되는 중생에 대한 보증으로서, 또는 나중에 세례 받은 자의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양육의 수단으로서 이해되고 정당화되었다.
성경은 세례가 오로지 신자들을 위해서만 제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오직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와 믿음을 증거한 사람만이 세례를 받았다. … 진리에 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는 한, 믿음을 먼저 고백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교회도 성인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다. … 로마교는 갈수록 더욱더 이런 수용자의 조건을 약화시켰고, 무게중심을 말씀과 믿음에서 성사로 옮겼다. … 로마교는 설교와 믿음이 단지 예비적인 의미만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즉, 참으로 거룩하게 하는 초자연적 은혜는 오로지 세례성사에 의해 전달되고, 따라서 [순교의] 피의 세례나 제사장의 세례로 대치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이 세례성사는 성인들과 유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에 반하여 종교개혁은 성경적인 원칙을 천명했는데, 즉 성례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써 이 소유하지 않은 그 어떤 유익도 전달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성례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모든 유익을 얻게 하고 누리게 한다.
물이 몸의 더러운 것을 씻듯이,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민족들과 모든 종교에서 물은 풍성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온갖 정결예식에서 사용되는 물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참여하기 위해 각 사람이 필요로 하는 영적 씻음을 예시했다. … 초기의 세례 행위는 세례 받는 자가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다음 순간 거기서 다시 일으켜 올라오게 하는 것이었다. … 성경이 들려주는 경우들은 사도 시대에 세례는 아래에 잠기는 방식으로 시행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 ‘물을 뿌리거나’ 또는 더 낫게는 ‘물을 붓는 것’은 단지 고대에만 나타나는데, 물이 부족하거나 병사들이 병상에서 세례를 받아야 했을 때 사용되었다. … 서방에서는 13세기까지 물속에 잠기는 세례가 물 뿌림의 세례와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가 갈수록 더욱더 보편화되었다. …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관습[물 뿌림]을 채택했다. 루터는 물에 잠기는 것을 선호했고, 칼빈은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으나, 재세례파는 이것을 원칙의 문제로 삼아 ‘물속에 잠기는 것’으로 되돌아갔다. … 고대에 물속에 잠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허용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물로 뿌리는 것보다 세례의 풍성한 의미를 더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원칙의 문제로 삼지 말아야 한다. … (1) 물은 그리스도의 피 자체가 아니고 물 자체가 죄 씻음을 초래하지 않으며, 다만 그에 대한 표시와 인침일 뿐이기 때문이다. … (2) 세례를 통해 묘사된 영적 유익은 죄 씻음으로 일컬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깨끗한 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이라고도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3) 비록 물속에 잠기는 것이 수 세기 동안 관습으로 머물렀다고 할지라도, 고대 이후로 필요한 경우에는 물 뿌림도 허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4) 세례 시 물로 뿌리는 것도 역시 씻음에 대한 상징이 보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적 문구는 단지 이단을 물리치고, 시행된 세례가 참된 기독교 세례라는 것을 보증하며, 바랐던 확고부동함을 예언적 관습에 도입하기 위해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삼위일체론적 세례 문구가 물을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로마교와 루터파는 성령의 사역을 ‘물을 통해’ 지나가는 것으로서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개혁파는 이런 지역적, 물리적 연합을 거부하고, 그 대신 말씀의 경우와 같은 연합을 취한다. 성령이 진실로 말씀과 함께 역사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사역이 말씀 속에 갇히지 않는 것처럼, 세례의 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 거룩하게 하고 그 의미하는 것을 주는 것은 봉사자나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 개혁파 교회 역시 세례에서 그리스도가 약속하고 보증하는 바, 믿음으로 세례를 수용하는 각 사람은 외적으로 몸의 더러운 것이 물로 제거되어 씻겨진 것처럼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영혼의 더러움이 씻겨진다는 것을 고백한다. … 이 유익들은 모든 신자가 세례를 통해 가입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성부는 세례 가운데 자신이 우리와 영원한 은혜언약을 세웠으며, 우리를 자신의 자녀들과 후사들로 삼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성자는 친히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기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교제 속에 우리들을 가입시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성령은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 이 유익들은 다음과 같다. (1) 칭의 또는 죄의 용서 … (2) 중생, 회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를 통한 옛 사람의 죽임과 새 사람의 살림 … (3) 그리스도 자신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교제
유아세례가 도입되는 순간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상당 부분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데, 특히 두 가지 이유에서 거부한다. 첫째 유아세례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며, 둘째 세례의 본래 제정에 따르면 세례는 유아들에게 발생하지 않거나 어쨌든 드러날 수 없고 인정될 수 없는 믿음과 회개를 언제나 전제한다. 진실로 테르툴리아누스 때까지 세례가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시행되었다는 직접적이고 확고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침묵으로부터 지나친 추론은 하지 말아야 한다. … 교회가 확립되고 민족들이 차례대로 기독교화 되었을 때, 유아세례는 원칙이 되었고 이교도 국가 외에 개종자 세례는 예외가 되었다. … 그(테르툴리아누스)가 반대한 까닭은 다음과 같은 그의 일반적인 확신 때문이었다. “세례를 연기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세례의 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세례의 연기보다 세례 받는 것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 개혁파는 성경으로 되돌아가 유아세례를 변호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단지 신자들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의 후손까지도 포함하는 은혜언약 가운데 자신들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주장했다. 중생이나 믿음이나 회개가 아니라 … 오로지 은혜언약만이 성인들과 유아들 모두에게 세례에 대한 권리를 주었다.
유아세례의 정당성은 오로지 성경이 신자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보며,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 할례는 구약 성경에서 남자 아이들에게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시행되었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따르면, 이런 할례는 세례로 말미암아 교체되었다. … 할례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 반면, 세례는 돌이켜 그 죽음을 가리킨다. 전자는 그 죽음으로 끝나지만, 후자는 그 죽음으로 시작한다. … 옛 언약의 성례는 단지 남자에게만 시행된 반면, 새 언약의 성례는 여자에게도 시행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 언약은 결코 단지 한 사람과 맺은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 안에서 곧바로 그의 후손과도 맺은 것이다. … 하나님의 행위와 규례들은 반드시 부모들을 통해 자녀들에게 전수되어야 한다. … 성경에는 이 모든 자녀들을 위한 주님의 약속, 즉 그들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주님의 약속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의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 전에 죽는다면, 경건한 부모들은 그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라난 어린아이들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반드시 지배해야 할 사랑의 판단을 따라, 그 반대의 것이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그들의 구원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 … 세례의 근거는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뿐이다.
이 세례의 시행자는 그리스도다. … 그리스도는 세례를 시행함에 있어서 사람을 사용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나누어 주게 한다. 구약 시대의 할례에는 그 어떤 직분도 연관되지 않았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할례를 시행할 수 있었다. … 신약 성경에서 세례는 오로지 직분에 임명된 자들에 의해서만 시행되었다. … 성례는 말씀을 뒤따르고, 따라서 성례들을 시행할 권한은 사도들과 전도자들로부터 자동적으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인 [목사들과] 교사들에게 넘어갔다. … 로마교회는 … 이단자에 의해, 진실로 심지어 불신자에 의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 의해 시행된 세례조차 인정한다. … 로마교회는 ‘스스로 자신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개혁파는 … 말씀을 통해 주어지지 않고 믿음을 통해 수용되지 않은 유익은 그 어떤 것도 세례를 통해 수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세례를 받지 못한 것’ 자체가 아니라 ‘세례를 멸시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 신자들의 모임이 발생하는 순간, 말씀의 봉사와 성례의 시행은 반드시 교회 안에 전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공중 예배의 한 구성 요소이며 자산이기 때문이다. … 세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안에 가입하는 것을 묘사하기에, 신자들의 공중 모임에서 시행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60장 성찬
2014-03-17 16:51:30
유월절은 일차적으로 제사였고 그 뒤에 성례였다.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 27, 34장 25절에서 여호와 앞에 있는 ‘제사’라고 불리고, 이에 수반되는 행위는 ‘예식’이라고 불리며, 이 예식의 거행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불렸다. … 유월절의 제사적 성격은 나중에 가나안에서 거행된 유월절 방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기서 어린 양은 더 이상 가정의 가장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잡았고, 피는 제사장들에 의해 제단에 뿌려졌으며, 기름 부분은 제단에서 불살라졌고, 음식은 성소에서 먹었다. 그러므로 유월절이 비록 일차적으로는 하나의 제사라고 할지라도, 제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식사가 되었다. … 유월절은 제사였으나 그 뒤에 곧바로 식사가 되었다. 유월절은 속죄제에 속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먹기 때문이며, 또한 화목제에도 속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속죄가 식사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 유월절은 속죄의 제사이며 하나님과 상호 간의 교제의 식사다. … 신약 성경은 이 유월절에 예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 유월절은 단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라, 죄의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약속된 메시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표시와 보증이기도하다.
할례가 세례에 대한 하나의 모델이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런 세례로 변한 것처럼, 유월절은 성찬을 향해 지시하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성찬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유월절은 여전히 일차적으로 제사였던 반면, 성찬은 이 성격을 전적으로 상실했다. 왜냐하면 유월절에 바쳐진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월절은 그리스도가 은혜언약의 새로운 시대를 설립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거룩한 식사에 초대하여 강화시키는 단번에 성취한 완전한 제사에 근거한다.
유월절은 어린 양이 죽어 그 피를 흘리고 제단에 뿌려짐으로써 일차적으로 속죄의 제사로 드려졌고, 그 뒤에 어린 양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교제를 의미하는 제사 음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전가시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즉 자신의 살을 찢고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하나님과의 속죄를 이루고 새 언약의 토대를 놓는 참된 유월절 어린 양이다.
예수는 성찬 때에 무엇을 반드시 말해야 하는지 규정하지 않았고, 다만 성찬이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묘사했다. 이것은 네 개의 본문에 의해 완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유월절 음식의 떡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의 표시로 삼았고, 진실로 머지않아 속죄의 제물로서 죽음 가운데 바쳐지게 될 몸과 피의 표시로 삼았다. … 떡은 속죄를 위해 죽음 가운데 희생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예수의 몸에 대한 표시다. … 포도주로 표시되는 그리스도의 피는 희생제사의 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속죄의 피로, 이 피를 통해 새 언약이 시작되고 성별된다.
성찬은 하나의 식사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본질적인 식사다. 성찬은 하나의 제사의 음식으로,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위해 죽은 것처럼, 신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즐기는 탁월한 제사 음식이다. …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준다. 성찬의 잔과 떡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 자신이 식탁에 앉아 제정한 성찬은 자신이 죽은 후 기독교회 안에서 오늘날까지 시행되어 온 것과 동일한 것이다. …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를 위한 영속적인 유익으로서 성찬을 제정했다. 성찬은 다른 모든 유익들을 보여주고 인치기 위해 이 유익들에 덧붙여진 하나의 유익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제단의 성사 속 떡과 포도주의 모습 가운데 진실로 포함되어 있으며, 떡은 신적 능력으로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는 피로 변한다”고 결정했다. … 루터는 … 그리스도의 몸은 …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성찬 가운데, 성찬과 함께, 그리고 성찬 아래 현존하고, 따라서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비록 자기 자신의 멸망을 먹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 츠빙글리는 성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현존을 확실히 반대하지만, 이로써 믿음에 대해 그리스도가 영적인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선포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성찬에 참여한다. … 칼빈은 떡과 포도주의 표시들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육체적, 지역적, 실체적 현존을 철저히 부정한 점에서 확고하게 츠빙글리의 편에 서 있다. … 그는 특히 츠빙글리의 성찬론에 대해 두 가지로 반대했다. (1) 츠빙글리는 성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신자들이 성찬 가운데서 행하는 것 뒤로 너무 많이 물러나게 하여 결국 성찬을 일방적으로 고백의 행위로 이해한다. (2)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다름 아닌 다만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여긴다. … 칼빈의 관심은 명백히 신비적 연합,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온 인격 사이의 교제와 연관된다. … 성찬 가운데 있는 교제는 단지 그리스도의 유익들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도 포함하고, 다시금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 자신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 우리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교제함으로써, 그 결과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적 실체로부터 우리 영혼 가운데 생명을 불어넣으며, 진실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넘치도록 부어준다.”
성찬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만이 은혜의 수여자이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은혜의 수여를 자신이 제정한 방편들과 연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특히 중보자로서 이 성찬을 제정했다. 그는 이 성찬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해설하는 선지자로서 활동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준 제사장으로서 일하며, 자신이 획득한 은혜를 떡과 포도주의 표시 아래 자기 제자들이 즐기도록 마음대로 제공하는 왕으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성찬의 제정자인 동시에 성찬의 주인이며 봉사자다.
성례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통해 획득한 모든 유익들과 복들,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들”이다. … 성찬은 말씀과 세례와 동일 선상에 서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성찬을 일차적으로 말씀과 세례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설교와 확증으로 여겨야 한다. … 그는 제자들이 이 떡과 포도주를 단지 그의 몸과 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이들을 그와 같은 것으로 받아 먹고 마셔야 한다고 명백하게 설명한다. …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연합과 여기에 연관된 모든 유익들을 주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 예수가 성찬을 제정할 때, 그는 육체적으로 자기 제자들과 더불어 식탁에 앉아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육신의 입으로 예수 자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생각할 수 없었고, 그 몸 자체를 먹고 그 피를 마신다고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 성찬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영적 생명이 양육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미사를 닮은 모든 것은 성찬의 제정과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통용되었던 성찬 시행에 절대적으로 낯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의 희생제사는, 비록 피 흘림이 없는 제사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자신을 드린 희생제사의 반복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 허용하지 않는다. 은혜의 모든 유익들, 즉 용서, 성화, 구속, 구원 전체는 십자가 희생으로 획득되었기에 보충될 필요가 없다. 진실로, 그리스도가 단번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쳐 죽음에 내어 주었으므로, 그는 심지어 이것을 두 번째로 더 이상 반복할 수 없고, 그의 죽음의 희생은 반복될 수 없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른 것으로서,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음식과 음료로서 떡과 포도주가 사용되었고,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친교를 위한 표시와 인으로 사용되었다. … 떡과 포도주의 표시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영혼을 위해 준비한 영적 음식과 음료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행한 탁월하고 적합한 선택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도록 직접 떡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 이것은 성찬을 받는 사람이 없이 행하는 로마교의 미사를 매우 강력히 정죄하는 것이다. … 성찬은 예수가 행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며, 그가 제정한 영적 식사다. … 성찬의 모든 표시들, 행위들과 말들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향하도록 지시한다. … 성찬의 식사는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참된 교제를 가져오는데, 단지 그리스도의 유익들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과 신적 본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도 누리게 한다. … 성찬에서 강화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오로지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통해 발생한다. 성찬은 말씀 가운데 제공된 것에 그 어떤 은혜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단지 믿음을 통해 말씀으로부터 받은 것을 강화시키고 확증할 뿐이다. … 성찬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과 선포로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며 신자들 상호 간의 교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세례가 접붙임의 성례인 반면,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있는 성장의 성례라는 사실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 가운데 장사 지낸 바 되고 그의 부활 가운데 일으킴을 받았으므로 수동적이다. 하지만 성찬에서 우리는 직접 행동하는 자들로 등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며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 영생을 위하여 양육된다. … 성찬은 영적인 식사로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십자가에 달린 몸과 흘린 피로 우리 영혼을 양육한다. 이것들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영적인 영원한 생명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은 세례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신자들만을 위해 제정되었다. … 세례 받지 않는 자들, 불신자들, 이단들, 분리주의자들, 공적으로 드러난 죄인들, 파문된 자들은 이 규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 많은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찬이 신자들의 공적인 모임이 아닌 개인의 집에서 병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에게 시행되는 것을 반대했다. … 유아들도 성찬에서 배제되었다. … 할례는 모든 남자 아이들에게 규정되었던 반면, 유월절은 그것이 제정되었을 때 곧바로 시행되지 않고, 나중에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매우 어린 아이들은 유월절 행사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되었다. … 세례는 사람의 역할이 수동적인 중생의 세례인 반면,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영적 생명의 양육 가운데 있는 성숙의 성례로서 성찬을 받는 자들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전제한다.
61장 그리스도의 재림
2014-03-17 16:50:49
이 단어(스올)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고 … 스올은 하나의 커다란 무덤으로 죽은 자들의 모든 무덤을 포함하고, 죽은 자들의 나라, 지하 세계이며 … 스올은 모든 죽은 자들이 예외 없이 집결하는 장소이며 … 스올은 어둠의 영역과 죽음의 그늘의 영역이며, 멸망의 장소, 진실로 구조가 없는, 즉 확고한 경계와 분명한 구별이 없는, 멸망 자체이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 더 이상 찬송과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미덕들이 더 이상 선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기적들이 더 이상 증거되지 않는 안식, 침묵, 망각의 땅이며, 죽은 자들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더 이상 일하지 못하고, 더 이상 기회를 갖지 못하고, 더 이상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어쨌든 해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는 장소다. … 스올의 상태는 존재의 소멸은 아닐지라도, 끔찍한 생명의 감소이고, 금생에서 삶에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다.
죽음이란 진실로 지상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고, 지상의 풍성한 삶에 대해 죽는 것이며, 쉬는 것, 잠자는 것, 조용히 있는 것, 무덤 이쪽의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죽음과 스올이 주로 오직 악인들과 연관되는 반면, 생명은 거의 언제나 의인들에게 돌려진다는 사실이다. 지혜, 의, 주를 경외함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악인은 불행이 닥칠 때 엎드러지지만, 의인은 죽음에서조차 여전히 신뢰하고 위로를 받는다.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는 가장 힘든 역경에서도 복된 자인 반면,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아무리 번성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죽고 멸망을 고한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보다 더 강하게 죽음이란 죄의 결과와 형벌이라고 밝힌다. … 영혼은 죽을 수 없고, 육체는 다시 일으킴을 받으며, 신자들은 심지어 죽지 못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게헨나는 마귀들을 위하여 예비된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이 있는 장소이고, 불 못은 세상 왕국과 거짓 선지자, 사탄, 그리고 모든 사악한 자들을 벌하기 위한 현재의 장소가 아니라 미래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 모두는 현재 마지막 심판과 불 못을 위해 ‘옥’에 갇혀 있다.
속사도 교부들은 중간 상태에 대한 어떤 교리도 아직 갖지 못했고 일반적으로 경건한 자들은 죽자마자 곧바로 하늘의 구원을 얻게 되고 악한 자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다. … 종교개혁은 … 이신칭의의 원리를 바탕으로 사람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 겪는 개인적 심판’ 후에 곧바로 하늘의 구원이나 지옥의 멸망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 칼빈은 자신의 저작 [영혼수면론 논박]에서 아브라함의 품은 다름 아닌 경건한 자들의 영혼이 죽은 뒤 완전한 평화를 누리지만, 부활의 날까지 무엇인가, 즉 “그들이 항상 갈망하는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완전한 영광”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 구원은 항상 “진행 중이며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진행이 끝나고 종결된다”고 말했다.
철학은 죽음을 자연스런 어떤 것으로 여기고 영혼 불멸, 영혼의 계속적인 존재를 충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데 있고, 마귀가 인간을 유혹하여 타락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마귀에게 있으며, 인간의 삶 전체를 허물어뜨리고,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서 죽음을 이끌어 내는 죄 자체에 있고, 죄를 죽음으로 갚는 하나님의 심판에 있다. … 죽음의 원인은 다름 아닌 죄이며, 죄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죄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붕괴이자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다. … 죄는 죽음이며 영적인 의미의 죽음이다. … 죄는 사실 그 성격상, 죄가 범해지는 그 순간에 결과적으로 완전한 죽음, 전체적인 죽음을 초래했고, 온 우주를 그 초기의 혼돈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이 삶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며, 이 세상과의 모든 연관을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편에서의 삶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존재하지 않음, 쉼, 잠이며, 한마디로 이 땅에서의 풍성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 전체에 대해 전적으로 죽은 것이다. … 죽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통로이며, 무덤은 부활의 아침까지 머무는 성별된 안식의 장소다.
성경은 죽음이란 이 땅에서의 삶 전체와의 완전한 단절이고 그런 점에서 자는 것, 쉬는 것, 침묵하는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가르친다. … 성경은 죽음 이후의 영혼을 다소 의식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 부활하여 다시 살아난 자들이 무덤 저편에서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것을 전달했다는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무덤 저편에서의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금지되었거나 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성경 전체는 죽음이란 무덤 이편의 생명과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 성경은 언제나 사람이 죽을 때 이 세상과의 교제가 전적으로 단절된다고 소개한다. …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과 교통한다는 것은 그 어디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왕국과 완전히 분리된 다른 왕국에 속한다. … 따라서 성인들에게 기도하거나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성인들에 대한 기도나 숭배를 뒷받침할 근거는 여전히 적다. … 그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에게 중보기도를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 개혁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죽은 상태에서의 그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도록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62장 그리스도의 재림
2014-03-17 16:50:10
인간이 언젠가 한 번은 죽도록 정해진 것처럼, 세상의 역사도 반드시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 계산에 의하면, 지구의 자전 속도는 최소한 60만 년에 1초씩 줄어든다. 이런 감소가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수십억 년 후에는 지구의 낮과 밤이 바뀌어 모든 생명이 죽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지구의 회전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계속 느려질 것인데, 왜냐하면 이런 영향은 지구의 대륙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동력 에너지의 공급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는 점점 더 태양에 근접하여 마침내 반드시 태양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 태양은 유입되는 운석에 의한 것이든, 지속적인 축소에 의한 것이든, 화학적 작용에 의한 것이든 그 열을 발산하고, 점차 이 열을 소모시키며, 그 크기를 축소시키고, 응집되어 사라져 간다.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심판과 형벌의 날을 선포한다. … 하지만, 이 형벌은 한시적이다. … 하나님은 형벌의 기간 끝에 다윗의 집을 통해 메시아를 보낼 것이다. … 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자기 백성에게 줄 유익은 무엇보다도 포로된 땅에서 귀환하는 것이다. … 사실상 모든 선지자들은 포로 귀환을 동시에 윤리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개로 이해한다. … 이런 영적 유익들은 구약의 예언에서 성전과 예배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포함한다. … 이런 영적 유익들에 온갖 물질적인 복이 덧붙여진다. 이스라엘은 장차 다윗 가문의 평강의 왕의 통치 아래에서 평안하게 거할 것이다.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다. …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릴 것이다.
신자들이 마지막 때에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간다는 언급이 없다. 구원은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예기된다. 이와 연관하여 구약 성경의 예언은 오직 메시아가 한 번만 오게 될 것을 말한다. … 구약의 예언은 메시아의 삶을 비하의 상태와 승귀의 상태로 분리시키지 않고, 이 두 상태를 단 하나의 이미지 속에 담고 있다. 이 예언은 초림과 재림을 구별하지 않으며, 구원을 위한 초림과 심판을 위한 재림 사이에 긴 간격을 두지 않는다. …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 사이의 시간적 구별을 두지 않는다. … 구약의 예언은 메시아 왕국을 최종적인 상태로 여기고, 원수들에 대한 심판, 최후 공격에 대한 격퇴, 자연의 변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 이 왕국의 설립과 확신에 선행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천년설은 기독교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기원과 페르시아적인 기원을 갖는다. … 천년설의 강점이 구약 성경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다. 구약 성경은 결단코 천년설을 지지하지 않고, 메시아 왕국을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묘사하는데, 이 나라는 끝이 없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심판과 부활, 그리고 세상의 갱신에 뒤따른다. … 천년설은 종교개혁 이전에 그리고 종교개혁 시기에 다시 등장했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로마교를 거짓된 음녀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여기기 시작했다. 천년설은 재세례파, 요리스파, 소시누스파에게서 다시 유행했고, 공적인 교회들이 이 교리를 거부했을지라도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 천년설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두 번에 걸친 이중적 재림과 이중적 부활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두 번 발생하는 것으로 만드는데, 구약 성경은 이것에 대해 전혀 모른다. 천년설은 해석상의 모든 규칙과 방법을 무시하고, 해설자의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임의적으로 멈춘다. … 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심을 기대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심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여 거기서 천년왕국의 가장 중요한 시민들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동일하게 행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 영적인 일들과 하늘의 일들에 대해 오직 이 땅의 감각적인 형태로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구약의 예배를 그렇게 제정했던 것은 우리가 하늘의 것들을 우리 스스로 만든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이미지로 참되게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모든 예언은 그 고유한 속성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 시문학(詩文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선지자들 자신이 [주장하는] 사물과 [그 사물을 묘사하는] 이미지의 차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선지자들은 위에 언급된 시적인 묘사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이미지로 이해했다. … 구약 성경을 주석하는 경우 문제는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예언이 갖는 상징적 특성을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의식했는가가 아니다. … 문제는 그들 가운데 있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예언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하고 보여 주길 원했는가다.
원리적으로 살펴볼 때, 천년설은 유대교와 하나이기에, 기독교에 대해,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치를 부여하고, 영광 중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재림 가운데 비로소 참된 구원을 기대하는 데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천년설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윤리적인 것을 육체적인 것에 종속시키고, 유대인들의 세속적 성향을 강화하고, 그들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에 대해 변명의 구실을 주고, 구약을 읽을 때 그들 앞에 놓인 가리개를 더욱 두텁게 하며,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이 그 자체로 여전히 천국에서 특권을 지닐 것이라는 환상을 고무시킨다. …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이 있을 것이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것이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영도 아래 열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기대를 포함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은 그 자체로 천년설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1) 왜냐하면 여기에 유대인들의 회심과 귀환, 예루살렘 성의 재건, 성전과 예배의 회복, 세상의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2) 큰 환란 가운데서 신실하게 지켜 온 신자들이 살아서 왕 노릇을 하는 것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3) 요한은 또한 천년왕국에 앞서게 될 첫 번째 육체적 부활과 그 이후에 뒤따를 두 번째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 첫 번째 부활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신자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왕 노릇하는 것이다. … 죽기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자들은 살아서 천국에서 곧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아 다스린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이다.
천 년은 현재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상징적인 숫자다. … 천 년은 죽은 신자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거룩하고 복된 안식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하여 주시는 날을 고대하는 기대를 가리키는 반면, 지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대항한 세상 왕국과 나라들의 싸움이 여전히 계속된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예루살렘의 멸망 전이나 멸망 후 즉시 일어날 것이라고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 예수는 그 시기를 보다 상세하게 정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목적은 자기 제자들에게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 시대의 징조들을 주목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인 반면, 그가 오는 정확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그들에게 금지된 일이고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 성경은 예수의 재림 시간에 대해 절제하여 말하는 것처럼 그 재림의 방법에 대해서도 자제한다. … 그의 임함은 온 땅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질 것이고, 마치 번개가 하늘 이편에서 저편까지 비치는 것과 같을 것이며, 천사장의 소리와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선포될 것이다.
63장 세상의 완성
2014-03-17 16:49:25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자기 백성에게 왕으로 와서 모든 원수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하고 예루살렘에서 자기와 더불어 평화롭고 안전하게 거하는 때를 가리켰다. … 신약 성경에 의하면, ‘이 시대’의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어 우리는 현재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과 더불어 ‘다가올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출현에 뒤따르는 첫 번째 사건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 성자는 부활이고 생명이며,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반드시 부활시켜야 했다. … 이 부활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적으로 성취된 실재적이고 참된 부활인데, 왜냐하면 이 부활은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재결합이 아니라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는 것이며, 영혼과 육체 모두가 곧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은 새로운 두 번째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 전체를 멸하고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대체했다면 훨씬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세상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 범죄한 동일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었다.
화장(火葬)은 거부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화장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제한하여 부활을 불가능하도록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장은 이교도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스라엘과 기독교 국가들에서 통용되지 않았으며 기독교 관습과 모순된다. 이스라엘과 기독교 국장은 성경과 신앙고백, 역사와 예전, 육체 속에서도 표현되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교리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에 대한 교리, 그리고 죽은 자들에 대한 마땅한 존경과 마지막 날의 부활에 훨씬 더 일치한다. 그리스도인은 시체들을 이집트 사람들처럼 인공적으로 보존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기계적으로 파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체들을 땅의 품에 맡겨 부활의 날까지 쉬게한다.
부활 뒤에 심판이 뒤따르는데, 이 심판은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들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로 묘사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는 보다 더 영적인 묘사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율법에 따라 모든 사람을 판결하고 선호하는 그리스도의 재판 사역으로 기술되었다. … 성경은 심판을 자주 성부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성부는 모든 심판을 그리스도에게 넘겨주고, 재판장으로 임명한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의 사역을 행사한다. … 그리스도는 결국 자신의 나타남으로 이미 심판을 초래했고, 역사 가운데 이 심판을 지속하고 종말에 완성할 인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는 영원한 복과 화를 결정한다. … 마지막 심판에서 주된 문제는 신앙 또는 불신앙이다. …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일차적으로 복음이다. 하지만 이 복음은 율법에 대치되지 않고 심지어 율법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믿음에 대한 요구 자체는 이미 율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복음은 율법의 회복과 완성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 심판에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 율법과 복음 두 부분이다.
악인들이 심판을 받은 후 보내지는 장소는 신약 성경에서 ‘게헨나’라고 불린다. 히브리어 ‘게힌놈’은 본래 힌놈의 골짜기라는 명칭으로,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위치한 곳이며 여호수아 15장 8절, 18장 16절에 의하면 두 지파 사이의 경계를 나누었던 곳이다. 아하스와 므낫세 왕 치하에서 이 골짜기는 몰록 숭배를 위한 장소가 되었고 이 우상을 섬기기 위해 자녀들이 살육되고 불태워졌다. 따라서 이 장소는 요시야 왕 통치 아래 파괴되고 제사장들에 의해 부정한 곳으로 선포되었다. … 게헨나는 심판 날 후에 악인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로, 하데스, 옥, 구덩이와는 구별되지만, 풀무불과 불 못과는 동일하다. … 게헨나는 단지 상실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신 모두의 슬픔과 고통의 장소이며, 형벌과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장소이며, 환란과 곤고, 멸함, 썩어짐, 멸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게헨나는 둘째 사망의 영역이다.
영생은 본질적으로 내세에 속하고, 죽지 않으며, 하나님이 지은 집, 구원, 속죄, 유업, 영광, 왕국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 영원하다고 일컬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고 일컬어진다. 이에 반하여 악인들의 형벌은 영원한 불, 영원한 벌, 영원한 멸망, 영원한 심판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언급된다. … 성경은 그곳의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죽지 않으며,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며, 세세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받으며, 영원한 형벌은 의인들의 영원한 생명에 대치된 영원한 고통이라고 선언한다. …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는 신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 악인들이 파멸을 당하고, 근절되고, 멸망하며, 썩음을 당하고, 멸절되고, 밖에 내던져지고, 끊어지며, 겨와 같이 태워질 것이라는 사실과 일치하여 멸망, 썩어짐, 파멸, 죽음 등으로 묘사된다. … 성경은 인간의 불멸을 선명하게 그리고 반박할 수 없게 가르친다. … 하나님은 첫 번째 죽음에서 인간을 소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죽음에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두 번째 죽음은 형벌, 울며 이를 가는 것, 환난과 곤고, 꺼지지 않는 불, 결코 죽지 않는 구더기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 모든 표현들은 잃어버린 자들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형벌을 승인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완전 무결함과 죄의 깊은 죄성을 깨닫는 일이다. 죄란 그 어떤 연약함, 그 어떤 부족함, 그 어떤 일시적인 불완전함과 점차 사라지는 불완전함이 아니라 기원과 본질상 불법이며, 위법이고,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적대감이며,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권위,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구약의 예언은 자연 전체의 특별한 변화를 기대하지만, 현재 세계의 멸망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 현재 세상의 멸망은 과거 세상의 홍수 멸망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은 태우고, 깨끗하게 하고, 정화시키지만,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 그리스도는 언젠가 가시적으로 다시 와서 온 교회, 진실로 온 세상을 자신의 영광 가운데 참여하게 할 것이다. … 땅의 예루살렘은 본보기였고, 지금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이 그때에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존하는 세상의 요소들로부터 건설되고, 교회는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아래 회복된 인류다. 그러나 신자들이 어떤 의미에서 아무리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이 구원은 단지 원칙적으로 그러한 것일 뿐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계시라는 거울로 단지 그의 형상을 볼 뿐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그가 우리를 아는 것처럼 그를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 복된 자들은 하나님을 보지만, 육체의 눈이 아니라 자연과 성경의 수단을 통한 이 세대의 모든 계시를 훨씬 능가하는 방식으로 볼 것이다. …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향유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 즉 영혼과 육체, 지성과 의지에 따른 복을 누린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은혜언약 안에서 태어나 분별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 전에 죽은 모든 아이들은 천상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믿는 경향을 지녔다. 그리고 여기서도 비록 많은 학자들이 선택받은 아이들과 버림받은 아이들 사이를 구별했을지라도, 이 아이들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구원이 있다고 감히 확신 있게 말하지는 못했다. … 푸치우스(voetius)는 그들이 버림받았는지 아니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선택을 받아 죽기 전에 중생했는지에 대해, “나는 부인하고 싶지 않고, 확증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방인들의 구원과 유아기에 죽은 아이들의 구원에 관해 긍정적 의미에서나 부정적 의미에서 단호하고 확고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 개혁파 신학은 구원의 가장 깊은 궁극적 원인을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하나님의 영원한 긍휼하심에,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에, 하나님의 전능하고 값없이 주는 신비로운 풍성한 은혜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