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개혁교의학(2/3)- 헤르만 바빙크

메르시어 2023. 5. 30. 18:02

24장 하나님의 신비

2014-03-17 17:16:13


신비는 교의학의 핵심 요소다. … 하나님이 자연과 성경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 지식은 인간의 상상력과 이해를 훨씬 초월한다.

 

교의학에서 취급되는 모든 교리들, 즉 세상, 인간, 그리스도 등에 대한 교리들은 단지 단 하나의 중심 교리인 ‘신 지식’에 대한 해설이다. … 교의학이 숙고하고 기술해야 할 것은 항상 하나님이며 오로지 하나님뿐인데,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와 재창조, 자연과 은혜, 세상과 교회에 나타나 있다. 교의학이 반드시 드러내고 보여주어야 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이다. … 교의학이 자신의 유일한 내용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숙고하면 숙고할수록, 더욱더 감탄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가정한다. … 성경은 하나님의 가지성(可知性)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갖는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이로 인해 영생을 얻게 하는 데 있다. 이 계시로 인해 일차적으로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인격이며, 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의지를 지닌 존재이며, 세상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높이 들린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자기 실존, 생명, 의식과 의지를 지닌 인격적 존재로 자연에 제한되지 않고, 자연을 초월해 높이 들린 하늘과 땅의 창조주다. 이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 특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을 계시할 수 있다. …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자신의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존재가 그 계시와 완전히 합치되는 것이 아니다. … 벧엘의 돌, 광야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 시내산의 우레, 장막의 구름, 언약궤 등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표적들과 보증이나, 하나님을 감싸거나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 특정한 장소, 시간,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한하여 계시한 동일한 하나님은 동시에 자연 전체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여, 무한히 높이 들린 분이다. …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동시에 불가해한 분, 비교할 수 없는 분, 시간과 공간,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무한히 승귀한 분,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다. …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며, 영원 가운데 거하는 지존무상(至尊無上)한 분이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시간, 공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분이다. 아들과 성령 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피조물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이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어떤 개념도 하나님을 완벽하게 포함하지 못한다. 그 어떤 묘사도 하나님을 충분하게 정의할 수 없다.

 

성경과 교회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엄과 주권적 영광을 강력히 주장한다. … 그 어떤 이름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 어떤 정의도 하나님을 묘사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묘사, 생각, 언어를 무한히 초월한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다. … 하나님은 이해될 수는 있으나, 완전히 파악될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으나, 철저한 이해란 없다.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식은 전적으로 독특하다. 우리가 이 지식을 통해 모든 유한한 피조물들과 구별된 무한한 존재를 인식하는 한, 이 지식은 긍정적이라 불릴 수 있다. 이것은 다른 한편 부정적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물들과 관련하여 생각하듯 그 어떤 진술도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유비적인데, 왜냐하면 원래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 가운데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계시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자신을 알릴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방식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 이 신비는 이해될 수 없고, 단지 감사함으로 인정될 뿐이다.

 

하나님의 가지성(可知性)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들에 자신을 계시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 불가지론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따라서 오로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될 수 있는 정도만 알 수 있다.

25장 선천적 신지식

2014-03-17 17:15:4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계시에 그 기원을 둔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계시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역시 불가능하다. …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이 가지성을 폐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하고 확정한다.

 

무신론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 물론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실재적인 무신론이 있다. 하지만 의식적인 이론적 무신론은 설혹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 의미에서 드물다. … 절대적 의미에서 절대적 능력에 대한 부인으로서의 무신론이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결국 모든 사람은 신으로 추앙되는 능력을 다시금 인정하기 때문이다. … 무신론과 유물론은 거듭 범신론으로 변한다. … 왜냐하면 인간은 최상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무신론은 절대적 의미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경배를 요구하는 인격적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은 드물다. …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심지어 불가능하기조차 하다. 그런 증명을 하려면 사람은 전지하고 어디나 존재하는 존재, 즉 하나님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 사물들의 진실이 사실상 가시적 사물들의 진실보다 훨씬 확실하고 확고하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지성으로 분별하는 사물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무모한 자만이 지성이 육안보다 현저하게 선호된다는 것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본유관념론(출생 시에 주어져 인간 본성에 내포되었다는 것)은 헬라 철학에 그 뿌리를 둔다. … 본유관념론은 실재적 의미에서 키케로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 본유관념론은 현대 철학에서 데카르트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 자연 종교를 거부한 소시누스파, 특히 로크, 홉스 그리고 다른 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학이 이 본유관념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아는 것이다. … 기독교 신학은 본유관념론을 강경하게 거부했다. … 스콜라주의 전체는 본유관념론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 위에 언급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왜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한 목소리로 본유관념론을 거부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빠지게 될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신비주의자들,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존재론자들의 견해는 유신론적이 아니라 범신론적이다. … 기독교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기에, 우리의 모든 신 지식은 간접적 계시를 통해 획득되고 유비적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사실상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을 떠나서는 기초 원리를 알 수 없고 신 관념에 이르지 못한다. … 지식의 씨앗들은 본성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한다. … 종교에서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다시금 종교의 씨앗, 신성에 대한 감각, 신적 본능, 선천적 지식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 선천적 신 지식이란 인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었기에 더 이상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선천적 신 지식은 인간이 정상적인 발전 과정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던 환경 가운데서, 저절로 강요 없이, 과학적 추론과 논증 제시 없이, ‘가르침 없이 심겨진 봉성에 의해’ 어떤 확고한, 확실한, 의심할 수 없는 신 지식에 이르는 잠재력(소질, 힘, 능력)과 경향(성향, 기질) 둘 다 갖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심겨진, 천성적, 본유적’ 등의 용어들은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 지식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학문적 추론 없이 생겨난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26장 획득된 신지식

2014-03-17 17:15:07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은 서로 대립되지 말아야 할지라도, 의심 없이 둘 사이는 구별된다. … 모든 지식은 외부로부터 인간 의식에 들어온다. 선천적인 것은 단지 지식에 관한 능력일 뿐이다. … 하나님의 계시는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보다 선행한다. 선천적 신 지식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어려움이나 강요 없이 획득되는 반면, 획득된 신 지식은 ‘원인의 방법, 탁월함의 방법, 부정의 방법’을 따라 추론과 논증, 숙고와 증명을 통해 얻어진다. … 선천적 신 지식은 단지 원리들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지만, 획득된 신 지식은 더 다듬어지고 발전되어 보다 구체적인 명제들을 제시했기에 또한 여러 가지 의혹과 반대도 받았다. … 두 경우 모두에 있어서 신 지식이 우리 의식에 스며드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게시 전체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선천적 신 지식의 경우에 그 계시는 인간의 의식에 작용하여 거기에 인상과 관념을 신장시킨다. 획득된 신 지식의 경우에 그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 의해 숙고된다. 즉, 그의 지성이 일하기 시작하며, 그의 반성이 일깨워지고, 밝고 선명한 의식으로 추론과 증명을 통해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에게 오르려고 추구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연신학의 취급에 있어서 소위 성경 안에 있는 특별계시와 성령의 조명을 제거하고, 어떤 기독교적 전제 없이 자연신학을 논의하고, 그 뒤에 계시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방법이다. …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은 우리가 특별계시와 상관없이 피조물로부터 얻는 지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 자연에서 얻은 신 지식은 자신의 말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암은 것이다. … 우리가 가진 두 가지 지식은 성경 덕분이다.

 

성경은 추론적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의식에 호소한다. 성경은 분석하거나 논증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손이 행한 사역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보여준다. …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 성경은 추상적으로 논증하지 않는다. … 성경은 오히려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고, 하나님의 미덕들을 하나님의 행사 가운데 보여주고,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 성경이 확실히 아는 바,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계시했고, 아무에게도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자연신학에서 학자들은 신앙 이전에 그리고 신앙과 상관없이 합리적, 과학적 바탕 위에 기초했다. 로마교와 로마교 신학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동일한 합리적 입장에 서 있다. 바티칸은 하나님이 이성의 자연적 빛을 통해 창조 세계로부터 확실히 알려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종교개혁은 이 자연신학을 그 증명들과 더불어 전수받았으나, 이것을 신앙에 관한 교리 이전에 취급하지 않고, 신앙에 관한 교리에 포함시켰다. 칼빈은 … 종교의 씨앗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제거될 수 없이 심겨졌을지라도, 질식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더 이상 갖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을 필요로 한다.

 

신학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런 논증들이(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윤리론적 논증 등) 증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하나의 증명에 의존한다는 것은 실재에 의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적인 원인은 본질적인 원인과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 소위 증명이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밝힐 수는 있으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관해 확신하는 최종적 근거는 아니다. 이 확신은 단지 신앙에 의해서만, 즉 사방에서 우리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 우리 의식의 자발적인 증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 증명들은 증명으로서 신앙의 근거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산물이다.

 

우리가 가진 인상들은 관념의 세계로부터(존재론적 증명), 유한한, 우연적, 가변적 사물들의 세계로부터(우주론적 증명), 미와 조화의 세계로부터(목적론적 증명), 도덕적 세계질서로부터(윤리적 증명), 전 인류의 선언과 역사로부터(보편적 승인과 역사적 증명) 온다. 하지만 비록 그 인상들이 이렇게 분류될 수 있다 할지라도, 이 여섯 가지 증명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유일하고 따로 분리된 증거들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와는 반대로, 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증거하고, 전 세계가 하나님의 미덕을 비추는 거울이다.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조차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비추어지지 않는 곳은 없다. 하나님의 증거는 우리의 안팎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자연이나 역사, 마음이나 양심, 이생이나 미래에 자신을 증거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러한 증거는 아주 강력해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사람은 증명을 통해서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며, 반대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파선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 소위 신 존재 증명은 신자에게 자기 자신의 종교적 의식과 윤리적 의식을 설명해 준다. 어쨌든 그것은 더 훌륭하게 무장하지 못한 반대자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신자에게 무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연과 은혜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 분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시다.

 

세상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미덕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비취는 것들이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우리에게 다가오고, 소위 증명에 요약된 증거들은 모두 다름 아닌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계시다.

 

27장 하나님의 이름들

2014-03-17 17:14:26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가운데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알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시되었다. …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닌 자의 표지로서, 누군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릴 수 있는 어떤 속성을 따라 지명(指名)하는 것이다. … 하나님과 그의 이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연관도 우연히 혹은 임의적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수립되었다. 사람들이 그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로서, 능동적이고 객관적 의미에서 공표된 이름으로 전면에 부각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외부로 계시하는 미덕들이나 완전과 일치한다. …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관계에서 계시한 것처럼,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다. …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들, 특히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렸다. … 그의 이름에 그의 영예, 그의 자랑, 그의 모든 은덕들, 그의 계시 전체, 그의 고유한 신적 본질이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약에서 더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아버지의 품 안에 있었던 로고스가 우리에게 아버지를 나타내고, 그의 이름을 우리에게 계시했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참된 지식과 그와 연관된 모든 유익들의 보증이다. … 그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는 용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영생을 받는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안에 인간의 모든 구원이 담겨 있다.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표와 보증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사람의 이마에 있게 될 새 예루살렘의 더 풍성한 계시를 기다려야만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계시를 근거로 그리고 그것과 일치하여 자신을 칭하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 우리는 창조와 재창조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계시된 모든 것을 따라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 우리가 그 모든 이름 가운데서 취급해야 할 것은 단 하나의 이름, 완전한 계시 그리고 그런 범위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 자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와 특정한 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 속에서 마땅히 그 이름에 어울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일컫고 부르는 이름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들은 우리가 보기 좋은 대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연과 은혜 가운데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을 계시했고, 이런 계시를 근거로 우리에게 자신을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진실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자신의 계시를 근거로 자기 자신의 이름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 자연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지향한 것이므로,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며, 하나님이 사용하는 표현은 인간적 표현이며, 하나님이 나타나는 모양은 인간적 형태다. … 성경 전체가 신인동형론적이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적인 방식으로 말씀했다면,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씀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이미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그의 은혜다. … 신인동형론적 언어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역들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 사역들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 … 자연과 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광스런 이름들을 우리 입술에 놓은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임을 가르친다. … 이 세상 지극히 작은 곳에서조차 하나님의 신성이 비추지 않는 곳이란 없다. … 성경은 인간이 그 모든 피조물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피조물이 일반적으로 단지 하나님의 미덕들에 대한 흔적들을 드러내는 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양이다. … 우리는 하나님을 신인동형화해도 되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닮게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 성경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주장한다.

 

28장 하나님의 이름 분류

2014-03-17 17:13:51


성경은 하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코 추상적인 신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또한 결코 하나님의 한 속성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속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 성경의 의도는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이 각각 동일하게 존중받는 것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동시에 가장 풍성하고, 가장 완벽하며, 가장 철저하고, 가장 확정적이고 구체적이며, 절대적으로 단순(單純)한 존재다. … 절대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정의한 기독교 신학이 의미한 모든 것은 위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실재적이고 참된 존재이고, 존재의 충만이며, 모든 실체와 완전의 총체이고, 다른 모든 존재에게 실체를 부여하는 전체 존재이며,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한 존재의 바다이며, 오로지 스스로 실존을 갖는 절대적 존재다. … 만일 하나님이 하나님이며, 유일하고, 영원하며, 절대적 존재라면, 그는 모든 완전을 소유하며, 피조물들 가운데 단지 그 완전에 대한 희미한 유비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하나님이 절대적 존재라면 그는 또한 절대적으로 지혜롭고, 선하며, 정의롭고, 거룩하며, 전능하고, 복된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나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돌아가는 존재로서 존재의 충만이며, 독립적 존재이고 따라서 가장 완벽한 존재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한 자신의 본질을 통해 피조물 가운데 산출하는 다양한 효과들로 인하여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기억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피조물들 사이에 연관 때문에, 하나님은 이처럼 다양한 속성들로 등장하고,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로 일컬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피조물들에게서 보게 되는 그 모든 불완전함과 제약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피조물들에게서 관찰되는 그 모든 완전함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두 가지 방법은 분리된 커다란 격차로 인해 나란히 놓여 있지 않다. 그것들은 심지어 평행선도 달리지 않으며, 다른 방식 없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취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목적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두 가지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단 하나의 완벽한 신 지식을 얻기 위해 항상 서로를 보충하는 두 가지 요소다.

 

논박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숨겨진 본질은 알 수 없고 일컬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이름들은 계시 즉, 창조를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피조물들이며, 따라서 항상 창조에 매여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창조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을 전혀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은 올바른 지식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 지식이 부적절하다는 것, 즉 거짓이나 틀린 것이 아니라, 유비적이고 모형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무한히 초월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적합한 지식이란 없으며, 다만 유비적 지식만 존재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미덕들을 비추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피조물 사이에 차이는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선포하지 않으며, 똑같이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서열과 오름 순차가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흔적들을 드러내지만, 오로지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가운데 신적 존재에 대한 유비(類比)가 있다.

 

그의 피조물들 가운데 나타난 계시 외에 신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항상 유비적이고 모형적일지라도, 우리는 그 계시를 통하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존재, 그리고 경배 받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지식을 소유한다!

 

29장 하나님의 호칭들

2014-03-17 17:13:12


‘하늘’과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여러 언어에서 상호 교환되어 사용된다. … 성경에서도 하나님이란 이름이 하늘이란 이름으로 대체되어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하늘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 ‘큐로스’에서 파생한 ‘큐리오스’는 전능한 분, 주, 소유주, 통치자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셈족에 의해 지칭되는 가장 단순한 하나님의 이름은 ‘엘’이다. … ‘엘로하’의 복수형, ‘엘로힘’이라는 이름은 동일한 어간, ‘울’ 혹은 ‘놀라게 하다’라는 ‘르흐’에서 파생한 것으로, 하나님을 강한 자 혹은 놀람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지칭한다. 단수형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단지 시적(詩的)으로 사용되는 반면, 복수형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 “엘로힘이란 이름은 자신의 원초적 관계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속적인 근본 관계 가운데 있는 신적 존재를 묘사한다. 그 이름은 관계에 대한 묘사이지, 직접적인 내적 본질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과연 온 세상과 관련하여 절대적 주권 개념을 묘사한 것이다.” (J. T. Beck의 글 인용)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일반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렸다. 이제 하나님이 특별 계시 가운데 등장한 첫 번째 이름은 ‘샤다이’ 혹은 ‘엘 샤다이’다. … 이 이름이 나타나는 곳마다 능력과 무적의 강력함의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 … 이 이름은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가지고서 모든 반대를 이기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에 복종시키는 분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엘로힘’이 창조와 자연의 하나님인 반면에, ‘엘 샤다이’는 그 자연의 모든 힘들을 복종시켜 은혜의 사역에 사용하는 하나님이다. 이 이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신성과 무궁한 능력은 더 이상 놀람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과 위로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주며, 자신의 무적의 능력은 자신의 약속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언약을 견지하기 위한 보증이다.

 

그가 특히 자비의 하나님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에서다. … 그들(유대인들)은 레위기 24장 16절과 출애굽기 3장 15절로부터 추론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했는데, … 유대인들이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본래의 정확한 발음이 잊혀졌다. … 비록 ‘여호와’라는 이름이 바벨론의 어떤 신격의 이름이었다 할지라도, 그 이름의 의미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신격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유일한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본래 그 유래를 따라 출애굽기 3장에서 말해진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출애굽기 3장은 그 이름의 어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설명해 준다. …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자 그렇게 계속 머물 것이며, 자신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묘사와 보증이다. …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구약 계시다. 더 이상 새로운 이름은 덧붙여지지 않았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와 보존자임을, ‘엘 샤다이’는 하나님이 자연을 은혜에 복종시키는 강한 자임을 보여준다. ‘여호와’는 하나님을 자신의 은혜 가운데 영원토록 신실한 분으로 묘사한다. ‘여호와 처바오트’는 하나님이 자신의 정비된 천군 천사들로 둘러싸여 영광이 가득한 왕이며,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자신의 성전에서 자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는 전능한 분임을 묘사한다.

 

이 모든 명칭들은 신약에서 보존되었다. ‘엘’과 ‘엘로힘’은 ‘데오스’로 표현되었고, ‘엘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 ‘큐리오스’는 능하신 분이요, 주님이요, 소유자요, 법적으로 능력과 권위를 소유한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알려주는데, … ‘큐리오스’는 신약에서 다양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새로이 추가되어 나타난 이름은 ‘파테르’라는 명칭이다(벌코프는 그의 [조직신학개론]에서 이와 같은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특별한 관계를 표현한 칭호에 이 이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한, 신정적(神政的) 관계를 표현하는데, … 아버지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만물의 기원이자 창조주라는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 아버지라는 이름은 윤리적 관계를 표현하여,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모든 자녀들에 관해 갖는 관계를 보여준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에 대한 모형이자 실례다. 그 관계는 이제 심화되고 확대되어, 윤리화되고 개인화되었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이제 신약에서 일반적인 하나님의 명칭이 되었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큐리오스’에 의해 충분히 묘사되지 못했다. 그 명칭은 말하자면 ‘아버지’라는 명칭으로 보충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최고 계시다. 하나님은 단지 창조주, 전능자, 신실한 분, 왕이자 주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백성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에 나타난 신정 왕국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로 대치되었다. 그 백성들은 동시에 자녀들이며, 그 시민들은 가족들이다. … 그들은 자녀들로서,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가족이다. 이 관계는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요 사랑받는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런 자녀 됨에 참여하며, 또한 그 자녀 됨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30장 비공유적 속성

2014-03-17 17:12:40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을 먼저 다룬 후, 하나님의 속성들을 논의한다. … 하나님의 본성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기독교 신앙에 의해 고백되고, 나중에 삼위일체론에서 드러나게 되듯이 삼중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이 완전에 대한 교리에서 취급된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신적 본성이 자신 안에 무엇을 포함하며, 어떤 점에서 모든 피조물의 본성과 다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보다 먼저, 그리고 더 선명하게 가르쳐진다. 삼위일체는 신약에서야 비로소 선명하게 계시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고유하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존재와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다. … 그 모든 미덕들과 완전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알린다. … ‘여호와’라는 이름이 가장 뛰어난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동일한 분으로, 자기 백성과 연관하여 영원히 동일하게 계시는 분으로 지칭된다.

 

하나님은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은 모든 사물의 존재와 발생의 최종적 근거다. … 하나님은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충족하며, 스스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요, 전에도 있었고 이제도 있으며 장차 오실 자다.

 

자존성은 단지 실재하는 하나님의 자율성만 표현하지만, 독립성은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하나님은 모든 것, 즉 자신의 존재, 미덕들, 작정들, 사역들에 있어서 독자적이라는 사실을 포함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신학자들이 주로 ‘여호와’라는 명칭에서 출발한 반면, 나중에는 하나님의 독립성이 주로 비공유적 속성들 중의 첫 번째로 등장했다. … 자존성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로지 스스로 존재하며, - 그가 자신을 존재하게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신이 현존한다는 의미에서 - 생성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 충만한 존재다. 따라서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실재, 미덕들, 모든 사역들 가운데 영원히 그리고 전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이며, 처음이자 나중이며, 만물의 유일한 원인이자 궁극적 목적이다.

 

하나님의 자존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불변성이 흘러나온다. … 하나님의 실재와 본질이 변하지 않기에, 또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 하나님의 모든 계획들과 작정들도 변하지 않는다. … 창조, 계시, 성육신, 정서(情緖) 등은 하나님께 어떤 변화도 초래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계획이란 결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항상 유일하고 불변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 스스로 불변하신 하나님이 변하는 피조물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으며, 스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 들어올 수 있으며, 스스로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모든 공간에 침투해 올 수 있으며,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또한 생성되는 피조물에게 고유한 위치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에는 한순간의 시간도 없고, 하나님의 광대함에는 한 치의 공간도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에는 생성의 그 어떤 요소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로, 피조물을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이며, 시간을 전제하는 것은 영원성이며, 공간을 전제하는 것은 광대함이며, 생성을 전제하는 것은 존재이며, 가변을 전제하는 것은 불변이다.

 

무한은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긍정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이 피조물들과 구별된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어떤 유한한 것들과 피조된 것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무한성은 또한 하나님의 미덕들이 무한하며, 하나님의 각각의 미덕이 절대적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무한성은 완전과 마찬가지다. … 시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한성은 하나님의 영원성이다. 성경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이나 마지막이 언급되지 않는다. … 시간은 시작과 끝을 가지거나 최소한 가질 수 있는 반면, 영원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영원한 작정과 미덕들을 계시하기 위하여 시간을 사용한다.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무한성이란 하나님의 편재성이다. … 하나님은 공간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로] 하늘과 땅을 채운다. 아무도 그의 면전에서 피하여 숨을 수 없다. …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도 다시금 이신론과 범신론을 회피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며, 그것들에 의해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 공간과 장소는 모든 유한한 존재의 속성이며, 유한한 존재와 더불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유한한 존재는 자연적으로 공간에 존재한다. …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늘과 땅을 채운다. 하나님은 빛과 공기처럼 공간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존재로 모든 장소에 있다. … 광대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속하지 않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인성에도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에도 있으며, 경건한 자들 가운데 있는 것처럼 악한 자들 가운데에도 있고, 빛의 궁전에 있는 것처럼 더럽고 어두운 곳에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비록 편재할지라도 피조물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 더러움으로 인하여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단일성과 인류의 단일성에 대한 교리, 이스라엘의 선택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대한 교리, 율법에 기록된 종교와 도덕에 대한 교리 등을 포함한 구약 성경 전체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단일성에 근거했다.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존재, 생명, 지식, 의지는 차이가 난다. 피조물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단지 존재만 가진 피조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피조물은 생명도 가지고 있으며, 또 다른 피조물은 생각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단 한 가지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지혜, 자기 자신이 생명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존재와 생명은 동일하다.

 

하나님은 무한하며,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무한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신적이며, 따라서 무한하고 자기 존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만 스스로 충족하며, 완전히 복되고 영광스러우며,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

 

신학이 가리키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쨌든 존재한다는 것 이상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존재,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다. … 하나님은 아주 풍성하여서 우리는 오직 많은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어떤 개념을 얻을 수 있다. … 하나님은 자신의 다양성 가운데 단순하고, 자신의 단순성 가운데 다양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각각의 규정, 각각의 이름은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31장 공유적 속성

2014-03-17 17:12:06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영원하며, 편재하며, 비교할 수 없으며, 볼 수 없으며, 형상이 없기 때문에 형상화할 수 없는 분이다. …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임재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는 것은 자신의 영을 통해, 따라서 영적인 방식으로 한다. … 하나님의 영적 본질은 신약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 예수가 하나님을 영이라 부르고, 따라서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요구했을 때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의 영적 본성이란 하나님이 세계의 존재와는 구별된 독특한 실체이며, 이 실체는 비물질적이고, 육체적 감각이 지각할 수 없으며, 복합이나 연장을 지니지 않는다고 이해되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비물질적 실체의 본성에 대해 자기 안에서 발견한 영적 본질의 유비로부터 단지 희미한 개념만을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영혼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 하나님은 부정적으로는 천사들의 영과 사람의 영혼과의 유비 가운데 비물질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만 하며, 또한 긍정적으로는 모든 피조물, 즉 육체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숨어 있고, [복합되지 않은] 단순하고, 절대적인 근거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본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편에서의 낮추심, 즉 하나님이 자기 편에서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는 계시를 필요로 한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의식과 지식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 하나님의 지식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이다(전지). … 하나님의 지식은 더 증가될 수 없으며,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식이다. …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전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물들의 관찰을 통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 우리의 지식은 후험적이어서, 존재를 전제하고 그것으로부터 파생한다. … 하나님은 무엇이 존재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안다. … 하나님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들을 생각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영원으로부터 단 번에, 동시에 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눈앞에 영원히 현존한다.

 

지혜와 지식은 사람이 각기 다른 능력에 기초한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 지식을 얻지만, 지혜는 통찰을 통해 얻는다. 전자는 추론을 통한 것이지만, 후자는 직관을 통한 것이다. 지식은 이론적인 반면, 지혜는 실천적이고 목적론적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지식을 사용한다. … 참된 지혜는 인간의 이성의 열매가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살고, 도덕적 생활 가운데 드러내는 도덕적 견실함이다. … 세상과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둘 다는 여호와의 지혜에서 유래되었다. … 하나님의 지혜는 과연 만물의 창조, 정돈, 인도와 통치 가운데 드러난다. 그 지혜는 만물을 창조하며, 만물의 목적, 즉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통치하고 인도하는 창조자이며, 만물의 장인(匠人)이며, 또한 항상 그런 존재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주관적으로 어떤 것을 확실하게 붙잡는 것, 즉 믿음을 가리키고, 객관적으로는 누군가를 또는 어떤 일을 의지하는 확고함, 신뢰성, 진리를 가리킨다. … 그는 거짓말하거나 후회하는 인생이 아니다.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진리의 본성을 지닌다. … 그는 참된 하나님으로 모든 인간과 대조된다. … 그의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이며 항상 그러한 분으로서 구원을 온전히 베푼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지식은 정확하고, 불변하며, 적절하다. 진실로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재론적 진리이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에 있어서 진리 자체다. … 그 지식은 사물들에 대한 탐구와 숙고로부터 획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이며 사물들에 선행한다. …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진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식한다. … 하나님은 윤리적 의미에서 진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참으로 존재하고 생각하듯이 자신을 계시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논리적 의미에서 진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며, 아니 오히려 자신이 그 사물들을 생각하듯이 그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히, 절대적 의미에서 진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제일의 진리, 본래의 진리, 모든 진리의 근원, 모든 진리 가운데 진리다. 하나님은 진리의 토대이고, 만물의 기초와 참된 존재의 기초이며, 만물을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기반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본질과 표현이 반드시 평가되고 규정되는 모든 진리, 모든 윤리적 존재, 모든 규정과 법들의 이상과 원형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윤리적 속성들 가운데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자연을 통해서도 알려진다. …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완전함의 총체다(형이상학적인 선). 모든 미덕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현존한다. … 하나님에게 무슨 미덕이 부여되든 간에, 성경은 항상 이 선의 미덕이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하나님의 선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과 동일하다. … 모든 자연적, 도덕적, 영적 선의 기원은 하나님 안에 있다. 성경은 주의 선하심에 대한 찬송이다. 주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창조 사역이 이루어졌고, 사람과 짐승에 대한 모든 생명과 복이 흘러나왔다. 주의 선하심은 자신의 모든 사역 위에 펼쳐지고, 영원토록 지속된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비참한 자들에게 나타날 때, ‘자비’라고 불린다. …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고 용서하는 선하심은 ‘오래 참으심’,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훨씬 더 풍성하게 드러난 것은, 선한 것이라곤 조금도 없고 오로지 악을 행한 자들의 경우다. …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단지 어떤 유익들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기 때문이다.

 

선하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 신구약 성경에서 거룩의 개념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 거룩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 하나님의 거룩은 자기 백성에게 대한 모든 관계, 즉 선택, 언약, 계시, 그들 중에 하나님의 거하심 등에서 계시된다. … 이스라엘의 온 율법 제정의 원리는 여호와의 거룩이며, 그 백성의 거룩 가운데 그 목적이 담겨 있다. …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통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이스라엘에게 전적으로 여호와를 섬길 것을 요구하는 그 거룩하심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교회에 주고, 교회를 모든 불의에서 건지고 정결하게 했다는 사실에서 그 절정을 계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 하나님은 온 세상의 심판자다. 하나님의 공의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고, 의로운 자들과 악한 자들을 구별하여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주목할 만한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인들을 벌하는 공의의 측면, 즉 보복의 정의가 의인들을 승인하는 공의의 측면보다 훨씬 적게 전면에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 악인들에 대한 징벌은 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비롯되었고, 성경에서 공의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원리로 등장한다. … 여호와의 의는 그의 분노처럼 그의 자비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동의어다.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은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의 나타남이다. 심지어 사죄함조차 하나님의 의에 기인한다. … 이스라엘이 진실로 범죄한 백성이며, 따라서 심한 징벌을 받을지라도,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대조적으로 의롭다. … 하나님의 의는 그 성격으로 인하여 반드시 사법적 정의를 포함해야 하며, 따라서 한편으로 보상적 정의와 다른 한편으로 보복의 정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만물의 존재와 그처럼 존재하는 것의 최종적인 원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다. … 만물은 하나님과 다른 것들이지만,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이 소유하지 못한, 그리고 그것 없이는 복될 수 없는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고 완전히 복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 피조물들과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선이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을 의지(意志)하는 것은 그들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 자체를 지향하지 않고, 피조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향한다. …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도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목적으로서 자신을 향한 경향이다.”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는 의지는 “수단으로서 피조물을 향한 경향이다.” …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한다. … 하나님은 자기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만물이 존재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다.

 

하나님은 죄를 의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의와 거리가 멀다. 하나님이 죄를 엄격하게 금하고 징벌할지라도, 죄는 존재하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독립적이고, 유효하다. … 하나님의 참된 뜻은 기뻐하는 뜻이며, 이 기뻐하는 뜻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 것으로, 불변하며 항상 성취된다. … 하나님의 신적 주권은, 하나님이 인간의 어리석음 가운데 자신의 지혜, 인간이 약함 가운데 자신의 능력, 인간의 죄 가운데 자신의 정의와 은혜를 영화롭게 하는 데서 밝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나는데 …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 그 어디에서도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 …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 드러난다. 창조, 보존, 이스라엘의 이집트로부터의 구원, 법칙을 지닌 자연,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전능을 선포한다.

 

최고의 완전함이란 하나님이 모든 완전의 총체이며, “그보다 더 크고, 높고, 더 나은 존재란 생각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가리킨다. … 하나님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완전의 총체, 모든 결핍과 제한을 무한히 높이 초월한 최고의 완전함이다.

 

하나님이 복되다고 할 때 … 하나님이 절대적 완전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 ‘복된 하나님’이란 명칭에는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의 절대적 완전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 또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기며, 자기 자신 안에서 안식하고, 스스로 절대적으로 충족하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내적으로 복됨의 근거인 하나님의 완전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낸다. … 주의 영광은 하나님의 미덕들과 자연, 그리고 특히 은혜 가운데 나타난 자신의 자기 계시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광채와 영광, 하나님이 어디서나 피조물들에 대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형태를 뜻한다. … 특히 이 영광은 독생자,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된 소망과 크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교회에 나타났다.

 

모든 피조물이 가리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최상의 존재, 최상의 진리, 최상의 선”이며, 또한 불변하는 최상의 미(美)이기도 하다. … 하나님은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외냐하면 자신의 존재 안에 절대적 통일, 크기, 그리고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하나님 안에는 그 어떤 남는 것도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위대하심’과 ‘높아지심’으로 불리는데, 이는 피조물 가운데 경외받기에 합당한 경탄과 경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광스럽다’고 일컬어지는데, 감사와 찬양 그리고 영광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엄’이라고 불리는데, 하나님의 절대적 존엄과 연관되며, 모든 피조물의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32장거룩한 삼위일체

2014-03-17 17:11:29


위격들의 이름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이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르는데, 이는 위격들의 이름들이 신적 존재의 단일성 가운데 존재하는 구별이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재를 단지 흐릿하게 알려 준다고 할지라도, 구약은 점진적으로 생성되어 가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책이다. … 구약 성경에서 이 삼중적 원인은 특별 계시의 영역에서, 재창조의 사역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 여호와가 재창조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의 사자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듯이, 마찬가지로 그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영 안에서, 그리고 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다. …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개념들의 순수한 발전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훨씬 더 분명하게 밝혀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 추론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행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다. … 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은 신약 성경의 경륜, 특히 성육신과 성령을 부어 준 사실들 가운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했다.

 

모든 구원, 복과 은총의 삼중적 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안에 있다. … 기뻐하는 뜻, 예지, 선택, 권세, 사랑, 나라는 아버지께 속한다. 중보자 됨, 화목, 구원, 은혜, 지혜, 공의는 아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중생, 갱신, 성화, 교제는 성령에게 속한다.

 

이 이름(성부의 이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들, 특히 인간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신정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까닭은, 자신의 기적 같은 능력으로 그 백성을 창조하고 보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미는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의 아버지라는 윤리적 의미로 변한다. 하지만 전적으로 독특한,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다. …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부른다. 그리고 성경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일차적으로 이스라엘과 신자들과 연관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원래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를 지칭한다고 명백하게 지적한다. 하나님은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에서 성자의 아버지이며, 성자를 사랑한다. … 그는 창조와 재창조 모두의 아버지이며,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분은 성부다. 예정한 목적, 기뻐하심, 창조와 구원의 주도권, 권세와 능력, 공의, 선, 지혜, 불멸,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 성부에게 속한다. … 성부만 오로지 지혜롭고,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스스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신성의 원천인 반면, 성자와 성령은 교통을 통해 동일한 존재와 동일한 속성들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신적 경륜에서 첫 번째라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은 성령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 대한 어떤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 비록 성령론이 신약 성경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계시되었을지라도, 원칙적으로는 구약 성경에도 나타난다. … 성경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는 다른 신적 존재의 특별한 위격을 가리킨다. … 성령이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는 까닭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만물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 성령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그리스도와 맺는다. … 그 누구도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교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 성령에게도 신적 영광이 속한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나란히 모든 복의 원인이다. 우리는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모든 생명과 능력은 성령에게 속한다.

 

성경은 물론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완전한 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한 명칭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 가운데서 비로소 충분하게 전개되었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바,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 즉 창조와 재창조 모두는 삼중적인 신적 원인을 갖는다. … 성자는 성부와는 다른 존재이고, 성령은 또다시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주라는 명칭은 공유한다. 그들은 ‘한 하나님’으로 분리될 수 없다. … 성자는 물론 성부와는 다른 존재이나, ‘나뉘거나 분리된 존재’는 아니다. ‘구별’, ‘구분’은 있지만, ‘모순’과 ‘분할’은 없다. …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 내의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한 신학자는 오리게네스였다. [성자의] 발생은 ‘영원한 출생’이다. 빛이 비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듯이, 성부도 성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다. 성부는 성자가 존재하기 이전에 성부가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 성부인 것이다.

 

아리우스주의는 2세기와 3세기에 에비온파, 알로기파, 테오도투스, 아르테몬,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초자연적으로 태어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세례 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능력을 갖추어 주(主)로 높여진 인간으로 여기고, 그의 선재와 신성을 단연코 부인했다. … 사벨리우스주의는 2세기와 3세기에 노에투스, 프락세아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들은 성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 고난을 받고 죽었으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다양한 관계들, 즉 성육신 이전에 그리고 성육신 가운데, 그 자체로 그리고 그의 역사적 출현 가운데 있는 동일한 위격에 대한 이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은 성부이며, 인성, 육신은 성자였다고 가르쳤다(단일신론, 성부수난설, 양태론). … 아리우스주의의 핵심은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부인하는 것인데, 즉 오로지 성부만이 그리고 절대적 의미에서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성자는 하나님의 본성 외부에 위치한 저급한 존재다.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교리였으며, 따라서 아주 탁월한 신비였다. 기독교의 본질,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와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전달은, 오로지 그 토대와 원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근거할 때만 주장될 수 있었다. … 성경이 신적 존재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자기 구별은 신학에서 ‘위격’이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 비록 성경이 엄격하게 일신론적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성과 완전들을 인정하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며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구별된 주체들이다. …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단지 한 위격은 성부, 다른 위격은 성자, 그리고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첫 번째 위격은 성부이며, 그의 위격적 속성은 성부 됨, 또는 태어나지 않음이다. … 성부는 자주 스스로 태어난, 자생적인, 스스로 발아한, 창조되지 않은, 시작이 없는 분, 자신이 스스로의 기원이며, 자기 실체의 원인이며, 자신의 기초원리라고 불리고, 더 나아가 성자와 성령, 또는 신성 전체의 기초원리, 원인, 뿌리, 원천, 기원, 머리 등으로 불린다. … 두 번째 위격의 특별한 속성은 아들 됨이다. … 말씀, 지혜, 로고스, 아들, 맏아들, 독생자, 하나님의 형상, 형상, 실체, 흔적이 있다. …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명칭을 지니며, 그의 위격적 속성은 발출, 내쉼이다. … 성령에 있어서 논쟁은 주로 그의 인격성에 대한 것이었다. … 성령이 모든 구원, 즉 중생, 신앙, 회개, 성화 등의 주관적인 원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에 확고하게 근거한다. 다름 말로 하면, 성령을 떠나서,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란 불가능하다. …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 없이는 성부와 성자의 참된 하나 됨이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은 단 하나의 원리, 즉 하나님을 갖지만, 삼위의 협동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삼위는 창조 사역과 구속과 성화의 사역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유한 임무를 성취한다. 모든 것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자를 통해 성취되고,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 모든 외적 사역들, 즉 창조, 보존, 다스림, 성육신, 속죄, 갱신, 성화 등은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다. 하지만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는 보다 구체적으로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성경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근거다. 이성은 기껏해야 이 교리를 후험적으로 사유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임을 알려준다. … 창조론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 가운데서만 주장될 수 있다. … 삼위일체는 기독종교에서 최고의 비중을 지닌다. …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모든 교리들의 근간이며, 새 언약의 실체다. … 우리의 모든 구원과 복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 이름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요약이다. 모든 복이 그 이름으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온다. 우리는 그 이름에 영원토록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33장 하나님의 경륜

2014-03-17 17:10:47

하나님의 사역은 내적 사역들과 외적 사역들로 나뉘는데, 내적 사역은 일반적으로 작정이라는 명칭으로 지칭되고, 모두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포함된다. 이 작정은 신적 존재의 내재적 사역들과 창조와 재창조의 외적 사역들 사이의 연관을 수립한다. 그와 같은 작정은 세 가지 특징들을 지닌다. 첫째, 하나님의 작정 안에 포함되어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 실현되도록 정해진 그 모든 생각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현존하는 충만한 지식에서 나온 것이다. …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 것은 말하자면 단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에 대한 하나의 대요(大要), 요약일 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가능하나, 그것들 모두가 현실 가운데 발생한 것은 아니다. … 둘째,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한다. … 만물이 존재하고 창조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 셋째, 작정의 개념 가운데 포함된 것은 때가 되면 실현될 것이다. … 작정으로 인하여 세상의 창조와 보존은 필연적이다.

로마서 9장 21절을 배타적으로 타락전 선택설의 타락하지 않은 집단으로만 생각하거나, 또는 배타적으로 이우구스티누스와 타락후 선택설의 타락한 집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구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자기 피조물들에게 목적지를 부여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바울은 선택에 대한 모든 반대들을 논박하지만, 선택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사실로써 논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적 권리에 호소함으로써 논박한다. … 참된 선택은 거룩, 자녀 됨, 구원, 영생, 그리스도를 본받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초대 기독교회는 … 절대적 예정론과 불가항력적 은혜는 가르쳐지지 않았다. … 펠라기우스는 원죄,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 등과 같은 교리적 요소들을 경시했다. … 펠라기우스의 출발의 전제는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우며,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도 역시 그 본성상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선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었으나, 원하고 실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 비록 인간이 악을 행할지라도, 그는 선을 행할 가능성과 능력인 의지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펠라기우스 논쟁 오래전에 예정론을 가르쳤다. … “예정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장차 행할 것을 예지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예정은 공로나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에 따른 것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도록 선택되었다.” … 예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유기를 자주 예정으로 여긴다. … 예정이 하나님의 행위인 것처럼, 유기는 공의의 행위다.

 

오렌지 공의회(Orange, 529)는 한편으로 전인(全人)은 아담이 죄로 인하여 부패되어 그 스스로 오직 거짓과 죄밖에 없으며, 믿음의 시작과 성장 모두는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 우리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굽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돌이키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 주입, 작용, 영감,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자유의지가 죄로 인해 쇠약해지고 빈약해졌으며, 모든 세례 교인들은 만일 신실하게 노력한다면, 세례 가운데 받은 은혜, 그리스도의 도움과 협력으로 구원에 필요한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성취해야만 한다고 언급되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절대적 예정, 블가항력적 은혜, 은혜의 특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 트렌트 공의회(Trente)는 명백하게 가르치기를,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양자 됨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했으며, 사람은 은혜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으며, 보존하거나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종교개혁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돌아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고백에서 로마교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 할 힘을 발견했다. … 루터파가 루터와 종교개혁 전체의 본래 입장을 점점 더 포기했던 반면, 개혁파는 그 입장을 충실하게 고수했다. 따라서 분리의 원인을 개혁파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 모든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에 수용되었다.

 

칼빈은 타락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이 있다는 피기우스의 결론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유기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심오한 원인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있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와 타락후 선택설의 견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이것은 타락전 선택설을 취했던 후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거의 언제나 그러했다. 그들은 타락전 선택설이 허용된다고 생각했지만, 타락후 선택설을 정죄하거나, 자신들의 견해를 유일하고 참된 견해로서 고백서에 표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락후 선택설을 대신하는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타락후 선택설과 더불어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 타락전 선택설은 고백서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또한 정죄되지도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이 문제를 심지어 의도적으로 결정하지 않았고, 타락후 선택설과 타락전 선택설의 어느 편도 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중에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타락전 선택설을 선호했으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타락후 선택설의 정당성에 대한 인정과 결부되어 생각되었다. 결국 타락후 선택설은 공식적으로 고백서에 포함되었고,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열심히 옹호되고 강력하게 변호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설교에서도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 예정 개념을 좁게 보느냐 아니면 넓게 보느냐에 따른 정의다. …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특징은 창조와 타락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선행한다. 다른 한편으로, 타락전 선택설은 예정을 매우 확대시켜, 창조와 타락을 궁극적 목적,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에 이르는 방편들로서 예정 가운데 포함시킨다. 예정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지속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었다. 네덜란드 신앙고백 표준문서들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지만, 그 어떤 교회 회의도, 도르트레흐트 총회도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를 정죄한 일이 없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항상 이 두 견해의 권리를 인정했다. … 이 두 견해는 자유의지를 부인하며, 신앙이 선택의 원인이며 죄가 유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이 두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는 뜻에 기초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작정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를 취한 반면,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들은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순서를 선호한 것이다. 전자는 예정 개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창조, 타락, 섭리를 예정에 선행시킨 반면, 후자는 예정 아래 다른 모든 작정들을 포함시킨다. … 이 문제는 성경에 호소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후 선택설은 선택과 유기가 타락한 세상과 연관된 모든 구절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자비와 공의의 행위로 제시되는 반면, 타락전 선택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는 모든 구절들, 특히 죄와 관련된 구절들 가운데서 자신의 강점을 찾기 때문이다. …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최종 목적에 선행하는 모든 것을 수단들로 삼아 상호 종속적 관계 가운데 놓음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수단들은 당연히 최종 목적에 종속되나,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 타락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모든 작정들이 합해져서 통일성을 이루고, 모든 것이 종속되고 사용되는 최종 목적이 있으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다거나 예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했고, 결정했으며, 창조는 이미 곧바로 재창조를 의도했고,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가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작정들이 비록 단일할지라도 그 대상들에 대해 구분되고, 그 작정들 가운데 단지 목적론적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인 순서도 드러나며, 창조와 타락은 단지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들로서만 여겨질 수 없으며, 죄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창조의 파괴였으며, 하나님은 단지 그 자체만을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을, 선행적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결과적 은혜로 인해 인내할 하나님의 예지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지만, 믿지 않거나 인내하지 않을 다른 이들은 징벌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된다. 성경이 어디서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모든 존재와 발생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실현이며, 그 모델과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 하나님의 작정은 내적인 사역, 즉 신적 존재 안에 있는 내재적, 영원한 그리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사역이다. …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제일 먼저 작정이 구별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섭리’라는 명칭으로 지시되었다. ‘섭리’라는 용어는 원래 다름 아닌 미리 내다봄, 미리 준비함, 미리 숙고함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을 위한 사물들의 배열의 방식”, 즉 자신의 확정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영원부터 만물을 정돈했던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행위로 정의되었다.

 

성경은 신앙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이 단지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대상이기도 함을 명백하고 선명하게 가르친다. … 예지는 계획이나 목적, 예정, 선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의 행위다. … 신앙은 자연인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따라서 선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제하고, 그 열매와 결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 구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 모두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모든 종교적, 기독교적 경험이 만장일치로 증거한다. … 하나님의 예지의 성격은 그 대상을 미리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이며, 그래서 그 예지는 예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전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면, 예지도 역시 견지될 수 없다.

 

예정 교리는 결코 개혁파만의 신앙고백이 아니며,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전체의 교리다. 예정 교리가 일컬어지는 명칭에 있어서, 그리고 제시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일치한다. 즉, 모든 기독교회와 학자들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영원부터 아는 것처럼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발생하는 결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이단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주의를 기울여 변호되는 이 예정에 대한 신앙을 갖지 않은 적이 없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타락한 모든 인간에게 구원에 충분한 은혜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선행적이고 조건적인 의지 또는 작정”을 수용한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유효한 은혜로의 예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 한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 자체로 충분하며, 이제 사람의 의지가 그 은혜가 유효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에 있어서는 사실상 은혜의 보편적 제공에 대한 작정 이후 더 이상 그 어떤 작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 죄로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능력을 소유할 수 있으며, 첫 번째 은혜를 선용하거나 선용하지 않을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가? 어디서 그가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는가? … 성경은 가능한 한 선명하게 가르치기를, 인간은 전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원할 수도 없으며, 신앙은 과분한 은혜의 선물이며, 구원은 또한 주관적으로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 펠라기우스주의는 영광으로의 예정에 있어서 자기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리를 믿어 죄 용서함을 받고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 믿음을 보존하여 구원을 얻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34장 창조

2014-03-17 17:10:02

하나님의 경륜의 시행은 창조로 시작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전체 계시의 시초이자 토대이며, 따라서 모든 종교적 삶과 윤리적 생활의 근본이기도 하다. … 하나님을 떠난 어떤 독립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원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했다. … 세계는 하나님의 의지의 산물이다. 세계는 하나님의 미덕들을 계시하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 창조론은 하나님의 광대함, 전능, 위엄과 동시에 선하심, 지혜, 사랑을 드러내기에 믿음을 확고하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증하며, 고난 중에 위로를 준다. 창조론은 찬송과 감사를 우러나오게 하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자신의 미약함고 무익함을 느끼게 한다. … 창조론은 오로지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며, 믿음으로 이해된다.

범신론과 유물론 둘 다 정밀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철학, 세계관,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이 아닌 신념의 체계들이라는 점이다. … 유물론자가 늘 호소하는 자연과학은 그와 같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것, 자연과 그 현상들을 다룬다. 자연과학은 항상 자연에서 출발하여 자연을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기에, 그 뒤에 놓여 있는 것까지 꿰뚫지 못한다. … 유물론은 정밀과학이 아니며, 엄격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철학에 대한 부정 위에 세워진 하나의 철학이다. … 유물론은 모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원자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유물론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을 신격화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무한히 초월하며, 자신의 주권적인 기뻐하는 뜻을 따라 모든 피조물들과 관계하는 전능한 분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소유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천지의 주재이며, 하나님의 권세는 무궁하다. … 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골 1:16∼17),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존재하며(계 4:11),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롬 11:36). … 가시적 세계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둔다.

 

‘무(無)로부터’라는 표현은 세상이 형성되었던 어떤 기존의 물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무(無)로부터’라는 표현은 오로지 기독교 신학에서만 기꺼이 보존되었는데, 이는 온갖 오류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데 특별히 적절했기 때문이다. …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완전한 독립성을 가르친다. …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주장한다. …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은 신적 존재의 그 어떤 부분도, 방출도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고유한 본질과 존재를 지닌다.

 

기독교 신학은 더더욱 만장일치로 창조 사역을 삼위일체 세 위격 모두에게 돌린다. …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을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 이 맥락에서 성자와 성령은 의존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성부와 함께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인 것처럼, 그와 더불어 창조 사역을 수행한 독립적 원리들, 창조자들로 여겨졌다. … 성부는 최초의 원인으로, 주도권이 그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창조는 경륜적 의미에서 특정하게 성부에게 돌려진다. 성자는 도구가 아니라 인격적 지혜, 로고스로서, 그를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다. 만물이 그 안에서 체계를 갖추어 서고,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의 머리와 주인으로서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성령은 인격적, 내재적 원인으로, 이를 통해 만물이 하나님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며, 그들의 모양과 형태를 받으며, 그들의 목적으로 인도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이다. 인류는 오로지 머리와 중심인물인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신인(神人)은 최상의 창조 목적이다. … 성부가 창조의 주도권을 가지며, 세계 관념을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이 존재하고 소유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성자에게 전달하고 성자 안에서 표현한다. … 성자는 로고스이며, 성부는 로고스를 통해 만물을 창조한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생각이 실현된 것이다. … 성자는 시작, 첫 소생, 창조의 근원, 창조를 붙드는 맏아들이라고 불리며, 창조는 자신의 원인과 모델인 성자 안에 기초하며, 성자로부터 발생한다. … 성자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목적인(目的因)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성자 안에 자신의 토대와 모델을 가지며, 또한 만물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만유의 머리, 주(主)와 후사(後嗣)인 성자를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 창조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나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다시 성부에게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영원히 창조했다. 즉, 세상이 존재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영원한 분으로 존재했고, 계속 존재할 것이며, 영원한 분으로서 창조했다. …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며, 하나님 안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생성이나 변화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생각, 의지, 작정이 영원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하나님은 영원한 창조주이며,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며, 영원한 분으로서 하나님은 창조했다. 그러므로 창조가 하나님에게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존재의 어떤 부분도 아니다.

 

세상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만들어졌다(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인용). … 세상이 있기 전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이란 유한 존재의 필연적 존재 형태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별도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저절로 주어진 것이며, 장소와 마찬가지로 함께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얻기 위해 세상을 창조할 수 없었고, 단지 자신을 주고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의 이유다. … 기독교 신학자들 역시 하나님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자주 말했다. … 창조의 동기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있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다는 이론은 실제와 상충된다. 우주는 진실로 인간을 돕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에, 인간을 위한 유익 외에 여전히 다른 목적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 성경은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미덕들을 계시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선포자라고 말한다. … 그리스도가 온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요 17:4).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은혜의 유익들, 즉 구원, 용서, 성화 등을 베푸신다. … 궁극적 목적은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 언젠가는 하나님이 홀로 위대하게 될 것이며, 그의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다. …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궁극적이라고 거의 만장일치로 가르쳤다.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말했다. “세상이 창조된 이유는 우리가 태어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리가 세상과 우리의 창조자인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를 경배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를 경배하는 까닭은 노동의 상급으로 불멸을 받기 위함인데,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최고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불멸로 장식되는 이유는 천사들처럼 되어 최상의 성부와 주님을 영원토록 섬기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기 위함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요약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며, 이것이 세상의 신비다.”

 

35장 영적 세계

2014-03-17 17:08:58

성경에 따르면 창조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하늘과 땅, “하늘로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나뉜다(골 1:16). …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은 성격상 철학적이 아니라 종교적이다. 이 믿음은 계시 그리고 기적과 매우 긴밀하게 연계된다. … 하나님의 초월성, 계시와 기적에 대한 믿음, 종교의 본질은 영적 존재들에 대한 신앙을 수반한다.

성경은 천사들이 영들이며, 결혼하지 않고, 죽지 않으며, 보이지 않고, 제한된 단일 장소에서 군대일 수 있으며, 영들로서 살과 뼈가 없다고 명백하게 선언한다. … 죄에 대한 형벌은 오로지 사람들에게만 시행되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범죄한 자들이고, 천사들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성경 본문들도 천사들의 육체성을 증거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천사들은 하나님처럼 모든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은 피조물이기에 유한하고 제한되기 때문이다. 편재성과 영원성은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천사들은 또한 우리 육체처럼 제한된 장소를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영들로서 길이와 넓이의 크기를 지니지 않기에, 공간에 의한 연장, 확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한정된 장소를 지닌다고 일반적으로 언급된다. … 그들은 편재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매여 현존한다. 그들은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기에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그 어떤 물질적인 사물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의 장소 이동은 순간적이다.

 

인간과 천사 둘 다 인격적, 이성적, 도덕적 존재다. 둘 다 본래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으로 지음 받았다. 둘 다 통치권, 불멸 그리고 복을 받았다. 둘 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욥 1:6; 눅 3: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그들의 차이는, 천사가 아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통해 가장 엄격하게 견지된다. …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가지 특징들이 천사들에게 있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천사는 영이며, 영으로서 완전하다. 반면에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다. … 천사들은 순수한 영적 존재로서 또한 혈연으로 서로 매여 있지도 않다. 그들 사이에는 부자(父子) 관계가 없으며, 육체적 연관이 없으며, 혈족 관계가 없다. … 천사들은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들,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들의 증인인 반면, 인간은 그 대상이다. … 천사가 더 권세 있는 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더욱 풍성한 영이다. 천사는 지성과 능력에서 인간을 훨씬 초월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 세상 그리고 인류에 대해 갖는 기적 같은 풍성한 관계로 인하여 더 깊은 영혼과 더 풍성한 감정을 지닌다. … 그리스도는 진실로 천사들의 주와 머리이지만, 그들의 화해자와 구원자는 아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따라서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화해되고 회복된 만물을 성부에게 다시 돌려 드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로지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며, 오로지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의 거처다.

 

(천사들의) 특별한 봉사는 타락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죄로 인해 필연적이 되었다. … 천사들의 특별한 봉사란 그들이 구원 역사의 중요한 시점들과 동행한다는 사실이다. … 그들은 계시들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며,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갖 봉사를 수행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항상 교회의 영역에서 일한다. 또한 그들이 자연의 능력들에 대한 권세를 얻거나, 혹은 나라들의 운명에 개입하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주권을 내쫓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중재자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구원의 상속할 자들을 위해 섬기는 영들이다.

 

제일 먼저 여기에(천사들의 일반적인 봉사) 속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밤낮으로 찬송하는 것이다. … 그들이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며, 신자들을 지키며,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고, 교회 안에 현존하며,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르며, 교회를 통해 가르침을 받게 하며,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 수호천사가 확대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전체가 자연과 역사, 특히 별들의 움직임 가운데서 천사들에 의해 중재된다고 스콜라주의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호천사들은 로마교 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고, … 칼빈은 수호천사들의 실재를 거부했고,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루터파와 개혁파, 그리고 거의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확고한 입장에서 이러한 종교적 천사 숭배와 성인 숭배를 거부했다. … 신약 성경에는 심지어 [천사 숭배에 대한] 어떤 증거 비슷한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천사 숭배는 성경에서 규정되지도 않고 실례도 없다. … 천사 숭배는 성경에서 또한 확정적으로 금지된다. 성경에 따르면, 종교적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돌려지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려지지 않는다. 로마교는 감히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지만, 예배와 존경을 구별함으로써 천사 숭배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 로마교에서 천사들과 성인들에 대한 숭배는 비록 상대적이라고 할지라도, 단연코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 존경은 하나의 종교적 예배다. … 개신교는 천사들에 대한 종교적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천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생활에서 필수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초래하는 자들이 아니며, 우리의 신뢰의 근거도 아니며, 우리의 경배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한다. 심지어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며, 천사들을 통한 모든 특별한 계시는 그쳤다. … 천사들이 우리에게서 받아야만 할 존경이 여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경은 어떤 면에서도 종교적이 아니라, 단지 예의적 성격의 것이다. … 천사들의 교리는 우리에게 또한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교리를 우리에게 계시한 것은, 하나님이 약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강하게 하며, 낙심 가운데 있는 우리를 격려하기 위함이다.

 

36장 물질적 세계

2014-03-17 17:08:21

  천사들의 실재와 존재는 오로지 계시로부터만 알려지기에 이성과 학문에는 감추어진 반면, 물질적 세계는 모든 사람에 의해 관찰되기에 철학과 신학, 종교와 학문에서 논의된다. … (철학은) 만물의 기원과 본성을 연구하는 반면,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추적하여 하나님에게 되돌아간다. 신학이 피조물과 관계하는 것은, 오로지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작품들이며 하나님의 어떤 미덕들을 계시하기 때문이다. … 신학과 철학은 동일한 세계에 대해 취급한다. 둘 사이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주 작업 활동 영역의 분리가 제시되었다. 학문은 가시적 사물들을 연구하며, 다름 아닌 종교적, 윤리적 세계는 종교와 신학에 넘겨주는 것이다. 또는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은 학문을 위한 것이며, 오로지 가치 판단에 있어서만 종교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모든 학문적 체계가 결국 언제나 종교적 확신에 뿌리는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조 세계에 대해 특정한 관점을 수반하지 않는 종교란 하나도 없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반드시 정복해야 했던 하나님과 대립된 자연적 능력의 존재는 그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라합, 리워야단 등을 바벨론 티아맛과 동일한 것으로 볼 증거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자연의 능력들을 억제하고 승리한다는 개념은 시적인 묘사로서, 이스라엘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이교도의 신화를 믿었다는 주장을 결코 지지할 수 없다.

 

성경의 창조 설화와 바벨론의 창조 설화는 모든 점에서 매우 다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실재는 만물에 선행하는 반면, 바벨론 창조 설화에서는 신들이 혼돈 이후에, 그리고 혼돈으로부터 태어난다. 성경에서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존재했고, 그 뒤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 반면, 바벨론 신화에서는 본래 오로지 혼돈만이 있었고, 그로부터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신들이 나오고 그 신들에 대해 혼돈이 대립한다. … 유일하게 일치하는 것은 오로지 두 설화에서 하늘과 땅이 형성되기 전에 혼돈이 선행한다는 것뿐이다. … 창조는 이미 바벨론 포로 이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은 그 땅의 기원을 알려주는데, 그 땅은 하나님에 의해 곧바로 땅으로 창조되었다. …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의 교차는 빛의 창조와 더불어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빛이 존재한 이후에서야 밤이 되고, 다시 그 후에 아침이 될 수 있었으며, 이 아침과 더불어 첫째 날이 끝났는데,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은 그 날을 아침부터 아침까지 계산하기 때문이다.

 

(창조 사역을 두 가지 삼중의 사역으로 나누는 견해에 대해) 과연 첫째 날의 사역과 넷째 날의 사역 사이에는 일치가 있지만, 둘째 날과 다섯째 날, 그리고 마찬가지로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그와 같이 평행되지 않는다. 다섯째 날에 공중의 새들만 아니라 물고기들과 물 속의 생물이 창조되었는데, 이는 셋째 날의 사역과 훨씬 더 상응한다. 그러나, 창조 사역에는 과연 분명히 더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 진전되고, 유기적 생명에 대한 일반적 가정들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이러한 유기적 생명 자체로의 주목할 만한 진전이 있다. 그러므로 전체 창조 사역을 삼등분한 옛날 구분이 더 낫다. (1) 창조, (2) 처음 삼 일 동안의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땅과 바다의 구별, 그리고 (3) 준비된 땅을 온갖 생명체들로 거주하게 하는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장식’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 사역을 완성한 자기 사역에 대한 만족과 기뻐함의 결과다. 동시에 그것은 적극적으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한 것으로, 이는 이 일곱째 날에 지속적인 창조, 즉 하나님에 의해 온갖 능력들로 복을 받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된 창조가 이제부터는 스스로 주의 섭리 아래 발전되고, 자신의 목적에 상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구는 더 높은 존재들의 거주지로서 유일하게 적합한 행성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수립되었고, 여기에서 빛과 어두움의 전쟁이 일어나고, 여기 교회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한 처소를 준비한다. … 비록 랄란더(Lalande) 자신이 온 우주를 샅샅이 뒤져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감히 말한다고 할지라도, 측량할 수 없는 공간을 지닌 우주는 우리의 제한된 시각에 여전히 하나의 수수께끼이며, 누구든지 자신의 직접적인 주변에서, 양심과 마음, 말씀과 교회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최고의 망원경으로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우주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과학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을 계시가 가르쳐 주는데, 이 계시는 모든 민족들의 전통에 의해 확정된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형성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 진행하는 것을 기뻐했다. …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실재적인 상태를 알려주는 반면, 과학은 과학적으로 견지될 수 없는 가정들을 말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지질학이나 어떤 다른 과학의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피조물들의 기원과 생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종교의 책, 계시의 책, 신 지식의 책으로 머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창조 설화의 모든 특징들 배후에는 하나님의 기적과 행위들이 놓여 있는데, 지질학이 이것을 일련의 무수한 현상들 가운데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성경과 신학은 지질학과 무생물학이 밝힌 사실들에 대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세상 역시 하나님의 책으로서 그 모든 페이지마다 하나님의 전능한 손이 기록했다. 충돌이 발생한 까닭은 오로지 성경이라는 책의 본문과 자연이라는 책의 본문이 자주 심히 잘못 읽혀지고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 신학은 철저하고 다양한 측면의 연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신학은 단지 거듭 추측과 의심으로 보충되는 여전히 전적으로 새롭고,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연구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신학은 언제라도 무너지고 더 깊은 연구로 인해 지지될 수 없는 소위 과학적 결과들을 너무 쉽게 용인하고, 그 결과들과 조화시키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37장 인간의 기원

2014-03-17 17:07:46

창조의 절정은 인간이다. … 짐승들은 하나님에 의해 땅이 산출한 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의논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늘, 땅, 천계(天界) 등의 다른 모든 사물들의 창조가 길게 그리고 일정한 순서로 이야기되는 반면, … 2장은 천지창조를 전제하고, 연대기적 순서가 아니라 실질적 순서를 따르며, 동식물이 언제 창조되었는지 말하지 않고, 다만 그것들이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갖는 관계를 묘사할 뿐이다. … 창세기 2장 18절 이하에서 동물들의 창조가 물론 인간의 창조 이후에 언급되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창조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을 돕는 배필은 동물들 가운데서가 아닌 사람과 같은 존재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때때로 자생적으로 땅에서 출현하거나, 또는 어떤 동물에게서 발전한 것, 또는 어떤 나무의 열매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진화 개념은 현대에서야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났다. 우리는 그 개념이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 특히 아낙시메네스에게서 발견되고, 그 다음에 헤라클리토스에 의해 범신론적 의미로 상술되고, 원자론자들에 의해 유물론적 형태로 제시되었음을 발견한다.

 

유전론은 지금까지 생명의 기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에는 여전히 전적으로 무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 다윈주의는 또한 유기적 존재들의 후속적 발전을 해설할 수 없다. … 성경은 땅이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에 의해서만 이 유기적 존재들을 나올 수 있게 했고, 이 유기적 존재들은 처음부터 종(種)으로 구별되어 존재했으며, 그것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속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 낮과 밤,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 천사와 인간을 구별한 분이다. 그래서 피조물들, 특히 유기적 존재들의 이러한 다양성과 차이는 다윈주의에서 수수께끼로 머문다. … 하나의 종(種)에서 다른 종으로의 그러한 전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결코 관찰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동일한 동식물의 종류는 수천 년 전에도 존재했고, 단번에 많은 수로 나타났다. 현존하는 종류들을 함께 더 가깝게 만드는 전이 형태들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고생물학은 저등한 유기적 존재의 고등한 존재로의 느린, 직선적 상승을 증거하지는 않으며, 단지 온갖 종류들이 처음부터 나란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 다윈주의에 있어서 인간의 발생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다.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에 대한 실재적인 증거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 다윈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 현상들, 의식, 언어, 종교, 윤리성 등을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로부터 도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다른 많은 학자들이 그를 추종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현재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 인간이 동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이론은 인간 내부의 하나님 형상을 손상시켜 인간을 오랑우탄과 침팬지 형상으로 격하시킨다. 진화의 입장에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옹호될 수 없다.

 

진화론은 또한 인유의 연대(年代), 통일성, 그리고 본래 거주지에 관하여 성경과 모순된다. … 모든 고대 역사 연구가마다 자기 자신의 연대를 갖고 있다. 이것은 실마리가 없는 미궁(迷宮)이다.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참된 의미의 역사와 연대 추정을 말할 수 있다. … 가장 신뢰할 만한 연대는 기원잔 오천 년에서 칠천 년 이상 되지 않는다.

 

인종학, 언어학, 역사와 자연과학은 아시아가 인간의 본래 거주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 우리는 여기 아시아에서 태고의 민족들, 태고의 문명, 태고의 언어들을 발견한다. … 심지어 그 지리적 위치가 더 이상 확정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성경과 과학 모두는 인간의 본래 거주지를 아시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8장 인간의 본질

2014-03-17 17:07:15

  인간의 본질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최대 계시이며, 가장 풍성한 계시이고, 따라서 동시에 모든 창조의 머리이자 면류관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자연의 개요, 작은 신(神)과 소(小)우주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오로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1장 7절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하는 야고보서 3장 9절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누가복음 3장 38절은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바울은 이교도의 시인처럼 “우리도 그의 소생이다”(행 17:28)라고 말한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 역시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것의 갱신이며, 신자의 새롭게 됨은 이 창조를 분명히 갱신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형상과 모양은 분명히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이고 내용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구별 없이 사용되고 특별한 이유 없이 서로 교체된다. … 모양은 형상에 대한 더 자세한 규정이고, 강조와 보충이다. … 형상과 모양이라는 단어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 창조되지 않은 이미지 또는 원형이 아니라 피조된 이미지나 모사를 가리킨다. …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이 창조는 그 어떤 면에서도, 즉 원형의 측면에서도 모사의 측면에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물론 성자는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고, 인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차이가 있다. … 개혁신학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廣義)와 협의(狹義)로 언급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을 따라, 인간이 한편으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고 또 반드시 그와 같이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 형상의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지식, 의, 거룩을 상실했고, 이 속성들을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되돌려 받았다고(엡 4:24; 골 3:10) 가르친다.

 

인간의 원시 상태에 관한 질문은 사실상 역사적 질문이 아니라 철학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의 역사가 짐승과 같은 미개한 상태로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해진다. … 성경은 인간이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성인(成人)으로, 성숙한 연령으로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로마교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초자연적 의를 상실할 수 있을지라도, 그 성질상 어떤 결함도 없는 자연적 의로 선하고, 참된, 완전한, 죄 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하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죄인으로서의 인간 사이에 그 어떤 중간 상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소생(所生), 하나님의 형상이든지, 아니면 죄와 범죄 가운데 죽은 진노의 자식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교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실은, 이 형상이 인간 전체에 걸쳐 확대된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는 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 만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전적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짓지 않았더라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며, 모든 인간적인 속성들을 하나님에게 옮겨 적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 가운데서 지시될 수 있다. … 생기는 삶의 원리며, 생령은 인간의 본질이다. … 반복적으로 기독교회의 영지주의적 학파들과 신지학적 학파들에서 수용되었던 [인간을 몸과 마음과 영으로 구분한] 삼분법은 여기서 두 개의 특별한 실체들[프뉴마와 프쉬케]을 본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것이다. … 혼(魂)과 영(靈)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병행하고 서로 교환된다. 때로는 몸과 영혼이, 또 때로는 몸과 영(靈)이 인간의 본질을 성립한다. … 둘째, 인간의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 우리는 인간의 이 모든 정신적 능력들과 활동들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들을 볼 수 있다. …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되었던 지식과 의와 거룩의 미덕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 인간은 순전히 중립적인 능력들을 지닌 중립적 존재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체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지성의 지식, 의지의 의, 마음의 거룩을 지닌 성인으로 창조되었다. … 넷째,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 인간은 영(靈)을 지니는데, 이 영은 정신적으로 통합되었고, 그 본성에 의해 반드시 몸에 거주해야만 한다. … 육체는 감옥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의 놀라운 예술 작품이며, 영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는 것은 또한 낙원에서의 거처다. 거룩과 복은 서로에게 속한다.

 

인간 전체는, 즉 영혼과 육체, 모든 능력들, 힘과 은사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인간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적인 것에까지 확대된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 자체는 아닐지라도, 신적인 것의 유한하고 피조적인 흔적이다. … 인간은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통일, 우주의 거울, 자연 전체의 연결 고리, 개요, 축도(縮圖), 소우주이며, 바로 이것으로 인해 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그의 아들과 상속자, 작은 신(神)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미덕들을 선포하는 선지자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공의로 이끌고 다스리는 왕이다.

39장 인간의 목적

2014-03-17 17:06:40

첫 번째 인간은 창조로 말미암아 생령(生靈), 육적인 자,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인 반면, 두 번째 인간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려 주는 영, 신령한 자, 하늘에서 온 존재다. 비록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 그는 땅에서 나온 흙이기 때문에 땅에 의존했다. 그는 결국 음식과 음료, 빛과 공기, 낮과 밤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아직 그 모든 필요들을 초월한, 영적으로 영화롭게 된 육체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자연적 육체는 아직 완전히 영혼의 도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담은 그와 같은 존재로서 그리스도보다 낮은 단계에 있다.

자연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단지 소질, 단순한 능력, 의지의 자유, 형식적 인격성에 두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자연적인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형상 또는 최소한 하나님의 모양은 창조 시에 인간에게 직접 주어졌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반드시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초자연주의적 견해는 다른 극단에 치우쳐 초자연적 특성 전체를 완전한 상태에 돌렸다. 단지 원의(原義)만 초자연적 선물로 여겨졌던 것이 아니라 불멸 역시 특별한 창조자의 은혜로 여겨졌으며, 아담은 고난과 고통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지만 자신을 낮추는 선한 분이다. 그는 주권자이지만 또한 아버지다. 그는 창조자이지만 또한 원형(原型)이다. 그는 한 마디로 언약의 하나님이다. …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권한을 수반하거나 소유할 수도 없다. …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모든 것, 그 존재와 소유를 자신의 창조자에게 빚지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아무런 권한이나 요구를 갖지 못한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해 공로란 언급된 적이 없으며 언급될 수도 없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단숨에 피조물의 모든 공로를 절단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궁극적 목적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그 두 언약에는 단 한 분의 중보자가 있는데, 당시에는 연합의 중보자, 이제는 화해의 중보자가 있다. 그 두 언약에는 단 하나의 신앙이 있는데,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후,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주었다. 결국, 인간은 특별 계시 없이도 도덕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그의 마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적 계명은 적극적인 것으로, 인간의 본성 자체와 더불어 주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 줌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었다. … 로마교는 행위언약의 교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 영생이라는 은혜의 선물로부터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역시 반드시 초자연적이어야 한다고 추론하고, 이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주어진 그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다시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교는 은혜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다시 선행의 공로성(功勞性)을 도입한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한편으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초자연적 계시 없이 도덕법을 알고, 초자연적 능력 없이 그 법을 지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 로마교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인간에게 부여된 초자연적 은혜가 그로 하여금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영생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수립하고, 그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며, 그의 노동의 가치를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은혜로운 섭리를 따라 준다고 말한다.

 

그들(개혁파)에 의하면, 아담은 최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다. 최상의 것은 실질적인 자유이며, 더 이상 오류를 범할 수도, 범죄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 모든 타락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한 것이다. 신자들은 이 최상의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붜 직접 받는다. 그들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더 이상 죽을 수 없고, 믿음을 통해 즉각적으로 상실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하면, 죄는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파괴했으나,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창조의 본질, 실체를 바꿀 수 없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머물렀다.

 

성경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성령의 전, 하나님의 거처, 모든 나라들의 영광이 집결되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가르친다. 이것이 과연 이제 죄를 거쳐 도달하게 될 영광의 상태에 대한 그림이다. … 만일 인류가 하나의 머리에 연관되지 않고 요약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완전한 유기체로 생각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에서 이 위치를 차지하고, 교회의 머리다. 그 머리는 행위언약에서 아담이 차지했다. 하와가 아담으로부터 창조된 것은 아담이 전체 인류의 기초원리가 되고, 인류의 단일성이 그 기원의 일치에 근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여자는 남자로부터, 남자로 인하여 존재하고, 남자의 영광이며, 남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남자는 일차적으로 통치를 지닌 자이기에, 여자의 머리와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일지라도, 여자 없이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육체에 관한 한 그리스도 자신은 아담에게서 나왔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치점은, 인류가 법적인 의미와 윤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갖는 관계처럼 아담과 동일한 관계를 갖는 데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과 생명의 원인인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아담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원인이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 안에서 온 인류를 고려하고 심판한다. … 아담은 단지 온 인류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인류의 머리, 대표자였다. 아담의 행위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이었다. … 아담의 계명 위반은 그의 후손 전체의 타락이 되었던 반면, 그의 순종은 또한 그의 대형(對型)인 그리스도가 증거하듯이 그의 모든 후손들의 생명이었다. 만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아담 안에서 멸망을 받을 수 없었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혼유전론은 영혼의 기원도 죄의 유전도 설명하지 못한다. 영혼의 기원에 관련하여, 영혼유전론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이미 부모와 조상들 안에 존재하기에, 따라서 반드시 일종의 선재론(先在論)에 이르거나, 또는 남자나 여자, 또는 둘 다의 씨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되었다는 유물론에 이르거나, 또는 부모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즉 이제는 하나님 대신에 인간에 의해 산출, 창출되었다는 교리에 이르게 된다.

 

비록 영혼창조론과 영혼유전론 둘 다 해결 불가능한 난제들에 직면할지라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 로마교 신학자들, 그리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전자의 견해를 수용했던 반면, 후자의 견해는 단지 루터파 신학자들만이 수용했다는 것이다. … 영혼창조론은 각 사람이 커다란 전체의 유기적 지체이며, 동시에 그 커다란 전체 가운데 자신의 독립적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인류 전체의 통일성과 동시에 각 개인의 독립적 중요성을 확고히 견지한다.

40장 섭리

2014-03-17 17:06:02

  하나님에게 있어서 창조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고, 보존하는 것은 안식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단지 하나님이 새로운 종류들의 생산을 끝내어, 무(無)로부터 사물들의 산출인 창조 사역이 참되고 좁은 의미에서 끝났으며, 이 완성된 사역을 신적 기쁨으로 즐거워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 보존 자체는 또한 신적 행위이기도 하며, 창조보다 덜 위대하고 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항상 일하며, 세상은 스스로 존립하지 못한다. …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세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다. …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성경에 있는 섭리 신앙에 대한 참된 대상이다.

이것(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을 부인하는 자는 종교를 손상시킨다. 이것 없이는 더 이상 기도와 제사, 신앙과 희망, 신뢰와 사랑에 대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 이교도에게 있어서 섭리 신앙은 실천적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이었고, 종교적인 교리라기보다는 철학적인 관점이었다. 이것은 고난의 때와 죽음의 시기에 충분히 위로하지 못했고, 우연과 운명 사이를 항상 왔다 갔다 왕래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환상이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자연은 은혜에,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종속되고 쓰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스스로 지닌다. …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섭리의 책이다. … ‘섭리’라는 단어는 철학에서 나왔다. 라에르티우스(Laёrtius)에 의하면, 플라톤이 ‘프로노이아(προνοια)’란 단어를 이런 의미에서 사용했던 첫 번째 철학자였다. … 섭리는 본래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미리 내다봄’, 또는 ‘미리 앎’을 의미했다. … 이렇게 이해할 때,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고백되는 모든 기독교 교리를 포함하기에 전적으로 부적합했다. …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를 공허한 예지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이 단지 모든 것을 미리 알 뿐만 아니라, 또한 미리 결정하고 제정했다는 것도 고백한다. …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고백에 따른 섭리란 하나님이 만물을 매 순간 보존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단지 돌봄만 아니라, 또한 예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섭리’라는 단어가 이해되었던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은 이 교리의 위치와 내용이 기독교 교의학에서 반복적으로 바뀌고, 여러 가지 변화들을 겪게 되었던 원인이었다.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다시 하나님의 작정들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외적 사역들로 여겨졌다.

 

넓은 의미에서, 섭리는 (1) 더 나아가 여전히 다시 예지, 계획이나 목적, 통치로 구분되는 내적 행위, 그리고 (2) 정돈의 시행, 보존, 협력, 통치로 묘사되는 외적 행위를 포함한다. (이러한 섭리의 내적 행위는 이미 앞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작정의 교리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섭리는 여기서, 즉 창조론 후에 단지 외적 행위, 즉 외부로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로서만 논의될 것이다.)

 

하나님이 자연과 은혜 가운데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언제나 만물을 보존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지혜와 전능으로 만물을 통치하는 분이다. … 그것들(보존, 협력, 통치)은 항상 서로 연관을 가지며, 매 순간 서로를 포함한다. … 협력은 바로 이러한 보존이 피조물들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전제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통치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하나님에 의해 확정된 궁극적 목적이 성취되도록 만물을 이끄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연과 은혜의 영역 모두에서 신적 능력으로 항상 일한다. … 그러므로 섭리는 적극적인 행위이며, [사물들의] 존재와 활동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존재하고 활동하도록 사역한다. … 피조물이란 명백히 의존적이다. … 단지 일반적으로 만물만 아니라, 심지어 머리털, 참새들, 공중의 새들, 들의 백합화, 까마귀 새끼조차 하나님이 돌보는 대상이다.

 

섭리는 창조와 마찬가지로 크고 전능하고 편재한 하나님의 행위다. 그것은 지속적인 혹은 지속되는 창조다. 섭리와 창조는 모두 단일 행위이고, 단지 나타나는 양식에서 다를 뿐이다. … 창조와 섭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만일 섭리가 매 순간 새롭게 갱신하는 창조였다면, 피조물들 역시 매 순간 무(無)로부터 산출되어야 했을 것이다. …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신적 능력, 전능하고 편재한 능력이 창조와 보존에서 활동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보존은 창조보다 저급한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행위 모두 능력, 신적 전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창조와 보존은 또한 당연히 하나님 자신 안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 창조와 보존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해 갖는 관계에 놓여 있다. … 창조는 존재를 부여하고, 보존은 존재의 영속성을 부여한다.

 

“정돈의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만물을 돌본다.”(Thomas Aquinas의 글 인용) 이런 이유로 기적도 역시 자연법칙의 위반이 아니며, 자연 질서에 대한 외부적 개입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서 기적은 그 어떤 일상적 사건보다 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으로 하나님을 삼지 않는 행위다. 따라서 기적은 모든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경륜에서 그리고 세상 관념에서 질서 있고 조화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님은 천사들 모두를 동시에 창조했으나, 사람들은 단일 핏줄에서 나오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들을 개별적으로 보존하고, 다른 것들은 종류와 혈통으로서 보존한다.

 

비록 죄가 처음에는 다른 아닌 인간의 독단적인 행위로 여겨질지라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손이 그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죄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심지어 죄의 시작은, 비록 형식상 그리고 주관적이 아닐지라도, 실질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돌려지기도 한다. … 하나님은 단지 죄의 시작만 아니라, 그 지속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전능한 힘으로 통치한다. … 하나님은 죄가 지속되는 것을 허용할 경우에도, 그것을 지도하며, 용서하든 징벌하든 그것을 종결지으며, 죄가 바라고 의도하는 바와는 달리 자기 경륜의 시행과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도되는 만물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하고, 하나님의 미덕들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 섭리는 우리에게 만사에 우리의 신실한 하나님이자 아버지가 육신과 영혼의 모든 필요한 것을 돌보며, 이 세상의 눈물의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보낸 모든 재난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그와 같이 할 수 있으며, 또한 신실한 아버지로서 그와 같이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