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하나님나라 이야기- 강휘중
사도행전: 하나님나라 이야기- 강휘중
2017-02-22 19:54:13
사도행전: 메시아, 성령,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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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도행전 개관
1. 사도행전 진도표
2. 사도 바울의 생애와 사도행전의 역사(보수적인 다수의 견해를 따라)
진도 순서 하나님 나라의 전개와 확장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 안에서의 준비되다(1:1-8:3)
1장 (1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준비되는 하나님 나라
2장 (2:1-42)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다: 하나님 나라의 빅뱅(BIG BANG)!
3장 (3:1-4:31) 베드로가 메시아 예수를 선포하다:
4장 (2:43-47/4:32-5:11) 초대 공동체가 소유를 나누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모습
5장 (5:12-6:7)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 안에서 팽창되다
6장 (6:8-8:3)
스데반이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약속된 메시아를 선포하다: 하나님나라가 예루살렘 밖으로 확장되는 준비
하나님 나라가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다(8:4-12:24)
7장 (8:4-40)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다: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8장 (9:1-31) 바울의 회심: 땅 끝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에 대한 준비
9장 (8:32-11:18) 베드로가 유대에서 전도하다: 유대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10장 (11:19-12:24)
안디옥 교회와 야고보의 순교: 하나님 나라가 땅 끝으로 확장되는 준비
하나님 나라가 땅 끝까지 확장되다(12:25-28:31)
11장 (12:25-13:52)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Ⅰ: 소아시아 지역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12장 (14장)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Ⅱ
13장 (15장:1-35) 예루살렘 회의:
14장 (15:36-16:40)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Ⅰ: 유럽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15장 (17장)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Ⅱ
16장 (18:1-22)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Ⅲ
17장 (18:23-20:16)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Ⅰ: 확장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대한 관리
18장 (20:17-21:16)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Ⅱ
19장 (21:17-23:11)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20장 (23:12-26:32) 가이사랴에서의 바울
21장 (27:1-28:10)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다
22장 (28:11-31)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하다
- 2 -
연대(AD) 사건 사도행전 로마 제국 바울 서신
30 예수의 죽음과 부활 1:1-11 디베리우스(14-37)
30 오순절 2장
32/3/4 스데반의 순교, 바울의 회심
7:54-60,
9:1-22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
35/6/7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9:1-22
(갈 1:18-20)
35-47
바울의 길리기아, 수리아
사역
36/7 바울의 다소 이동
9:30
(갈 1:21)
43/4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에서 안
디옥으로 데려옴, 사도 야고보
의 순교
11:25,
12:1-2
칼리굴라(37-41),
유대 왕 헤롯
아그립바(41-44),
글라우디오(41-54)
44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나옴
12:1-7
44 헤롯 아그립바의 죽음 12:19-24
46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기근 구제 기금 전달)
11:30,
12:25
(갈 2:1-10)
47-48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13, 14장
갈라디아서(반
대 견해가 多)
49
예루살렘 공의회(세 번째 예루
살렘 방문)
15:1-30
글라우디오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함(49)
49-52 2차 선교 여행
15:36-
17:18:22
50-52 고린도 체류 18:1-18
헤롯 아그립바 2세(50-93)
아가야 총독 갈리오(51-52)
데살로니가전
후서(50)
52 바울의 네 번째 예루살렘 방문 18:22 유대 총독 갈리오(51-52)
52-57 3차 선교 여행 19:1-21:17
52-55 에베소 사역 19:1-20:1 유대 총독 벨릭스(52-59)
55-57 마게도냐를 지나 그리스로 20:1-3 네로(54-68) 고린도전후서
(56)-57 고린도 체류 20:2-3 로마서
57
메게도냐로 돌아옴, 드로아와
밀레도
20:3-6
57 예루살렘 귀환 21:2-17
57-59 가이사랴에서의 감옥 생활 23:23-26:32
59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재판 25:1-26:32 유대 총독 베스도(59-61)
59(9월)-
60(2월)
로마로의 항해 27:1-28:16
로마의 대화재(64년
7월)와 네로의 그리스도인
박해
60-62 로마에서의 가택 연금 28:17-31
옥중서신
(에, 빌, 골, 몬)
65(?) 서바나 선교
목회
서신(딤전후, 딛)
64/5(?) 바울의 순교, 베드로의 순교
70 예루살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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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관하여
1) 하나님 나라의 요소
*인간의 국가는 (이론상)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정부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주권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자신의 뜻을 따라 백성을 삼고 그들이 살 땅
을 만들고 통치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좀더 설명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따라 자신의 백성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 땅과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펼쳐가는 나
라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통전성, 시간성, 메시아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땅의 변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말하고 ‘천당’(天堂)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하나님 나
라를 사람이 죽으면 가는 하늘의 어떤 영역 또는 내세(來世)로 이해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대다수가 하
나님 나라나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세계나 내세적 세계로 표현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1)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부활할 때까지 잠시 머무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
이 최종적인 안식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을 가리키는 ‘중간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또한 하나님 나라를 신자의 마음에 거하는 영적 상태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그것
은 신자의 믿음과 신념의 상태이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오해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이 땅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믿는 잘못된 종말론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계시
록에 대한 이해와도 연결이 되는데,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이 땅의 소멸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이다. 둘째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신앙관 때문이다. 즉 육체는 죽
지만 영혼은 살아서 어떤 공간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부활을 분명히 말
하고 있다(고전 15장).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의 세계나 영적인 세계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통전적, 시간적, 공간적, 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1)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양혜원 역(서울: IVP, 2009), 50.(어떤 사람은 ‘한 곳도 없
다’고 말한다. 리처드 미들턴이 지은 『새 하늘과 새 땅』[새물결플러스,2015]을 참고하라.)
2)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58.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백성
땅
국가
국민 주권
국민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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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통전(通典)성
*통전성: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3)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 온
세상의 주관자,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셔서 통치하셨고, 이스라
엘이 하나님과 그 뜻에 순종하면서 피조세계의 청지기 역할(창 1:28)과 이방의 빛(사 42:6)이
되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의 도구였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었는데, 아브라함
언약(창 15, 17장), 시내 산 언약(출 19, 24장), 다윗 언약(삼하 7장), 새 언약(렘 31장) 등이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특히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
가복음-에 하나님 나라가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천
국’[Kongdom of Heaven]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태복음 51회, 마가복음 16회, 누가복음 41회, 요한복음 5회(총 113회). 이중에서 72회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한 것이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29회 등장한
다.4)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진행되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변혁적이
고 종말론적으로 전개된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역사성)
*시간성: 신약성경에 표현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이다. 종말의 때 그리스도
가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 땅과 그의 백성이 온전히 회복되는 나라이다.
*십자가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그리
스도인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신앙이다.
*종말의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
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시작되고 완성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것을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5)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래의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침투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미래의 현존이라고 한다.6) 이것을 도식하면 아래와 같다.
3)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원광연 역(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325.
4) 양용의, 『하나님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서울: 성서유니온, 2005), 16.
5) 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 김근수 역(서울: 나단, 1987), 204(It is already the time of the
end, and yet is not the end).
6)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51.
- 5 -
V
교회(Already-Not yet)
그리스도의 부활(시작) 그리스도의 재림(완성)
*신약성경에서 예수로 인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켜서 이
해하면 다음과 같다.
메시아
메시아 예언 메시아 성령 메시아
구약성경(구약시대) 신약성경(신약시대) 종말
_
창조 그리스도 사역, 죽음,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새 창조의 시작)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는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와 연속성을 가지면서 새롭게 변화된다..
-연속성: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백성, 땅이라는 요소는 변함이 없다.
-변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땅의 개념에 대한 변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가졌던 계획, 이스라엘을 통하여 품었던 계획은 종말까지 지속
되는데 신약시대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속된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된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종말의 신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안에서 지금(now) 여기(here) 살고 있
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성(예수님이 왕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고(구약성경의 메시아에 관한 본문들), 그 메시아가
예수님임이 신약성경에서 드러났고, 예수님 스스로 이를 증거하였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14:27.cf. 눅 24:44))
*예수님이 최초로 선포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따라서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 예수에게서 절정을 이루면서 신약시대를 향하여 새
롭게 전개된다.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전통은 메시아와 연결
되어 있다. 메시아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7)(Messianic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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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3)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 예수와 연결된다. 예수 없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예수의 나라(Kingdom of Jesus)라고 할 수
있다(엡 5:5).8)
*예수의 나라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통치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통치를 경험하
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땅의 변화
◎ 예수님이 王이 되셨다
하나님의 주권은 변화되지 않고, 자신의 왕권을 아들 예수와 공유하신다. 따라서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진행된 하나님의 계획은 아들 예수 안에서 계속된다. 예수님은 아버지
의 주권 아래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온 세상의 왕으로 지금 통치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
리스도인은 왕 그리스도에 순종하면서 세상에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부재하는 왕에 대한 이해
로마 제국 시대에 황제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속주들을 통치하였다. 각 속주의 총독들과 주민들
은 비록 황제가 부재하고 있을지라도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 새로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은 예수님 당시와 사도들 당시에 중요한 질문이었다. 유
대교는 민족적, 인종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고수하였다.9) 그러나 예수님
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적 이스라엘 너머 이방인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모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하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을 ‘새로운
이스라엘’(또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구체
화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드러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선교 사역
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세 전파죌 것이 기
록되었으니(눅 24:47)
7)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서울: 솔로몬, 2009), 70, 75.
8) 로버트 오툴, ‘누가복음-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ed. 웬델 윌리스, 『하나님의 나라: 20세기
의 주요 해석』, 박규태, 안재형 역(서울: 솔로몬, 2011), 261-264.
9) 당시 유대교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했다. 유대교 내에서 인간을 3등분하
면 다음과 같다. ① 할례 받은 태생적 유대인 ② 할례 받은 이방인 개종자(proselytes) ③ 할례 받지
않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fearers).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는 있
었으나 본당의 좌석에 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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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의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는 명령(요 21:15-17)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
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 땅이 변화되었다
구약시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땅은 일차적으로 가나안 땅을 일컬었고10) 지역적이고 공간적
이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서 하나님 나라의 땅은 공간적인 의미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몇 가지를 유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온 땅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둘째,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유럽지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땅 1 --------->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직무(창 1:28)
땅 2 ---------> 그리스도인의 선교 임무(마지막 선교의 땅은 무슬림?)
땅의 공간적 의미는 여전히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땅은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인
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땅에 대한 선교는 인간에 대한 선교, 인간에 대한 선교는
땅에 대한 선교와 분리되지 않는다.(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말의 하나님 나라
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11)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선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중요하다.
*인간에 대한 선교 → 인간의 삶에 대한 선교
-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투성: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들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이다.12)
바울은 엡 6:12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
들과 이 어둠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하면서 그
리스도인은 사탄과의 전투, 즉 영적 전투에 놓여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실제로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이래로 사탄은 인간의 삶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의 죽음과 부활로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시작되었고(D-day)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 승리를 거둘 것이다(V-day).13)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자신의 죄, 사회의 죄를 쥐
고 있는 사탄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삶에 대한 침투하다.
10) 구약성경을 좀더 주의하여 읽어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 49:6).
11)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 달이 요한계시록 21, 22장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을 새
롭고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란 예수님의 기도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12)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44.
13) 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 19,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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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현대적 용어로 고치면, 인간 삶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사람은 인간이 살고 있는 삶의 모든 영역(sphere)-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그리스
도께서 주권(sovereignty)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카이퍼가 칼빈주의라
는 사상에 입각하였다면, 최근에 복음주의권에서 짐 월리스15), 로날드 J. 사이더16), 제임
스 데이비슨 헌트17), 미로슬라브 볼프18), 존 스토트19) 등은 인간의 삶의 영역, 특히 그
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을 둘러싸고 있는 공공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20) 이
것을 ‘공적 신학’(global theology), ’공공 신학‘(public theology) 또는 ’공적 신앙
‘(public faith)이라고 부른다.21)
그리스도인은 국가와 사회의 일원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적인 사회 영역을 벗어
날 수 없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든-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적극적이든, 수동적이
든-답해야 한다. 이것에 대하여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에 대
한 메시지이다.
3)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인 것은 아니
다.22) 그러나 교회 없이 하나님 나라는 없다.23)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
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이다.24)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다.25)
*하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누리는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할 수 없다.
*지역 교회는 지역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풍
성함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요약할 수 있다.26) 예) 신림교회의 지역 사회를 위한 선교.
14) 이러한 내용이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김기찬 역(크리스챤다이제스트: 고양, 1996)에 잘
나타나 있다.
15) 『하나님의 정치』(청림출판),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바꾸는 7가지 방법』(살림), 『하나님 편에 서라』
(IVP) 등을 참고하라.
16) 『복음전도와 사회운동』(CLC),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IVP), 『그리스도인의 양심선
언』(IVP), 『복음주의 정치 스캔들』(홍성사) 등을 참고하라.
17)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새물결플러스)를 참고하라.
18) 『광장에 선 기독교』(IVP), 『배제와 포용』(IVP) 등을 참고하라.
19)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IVP)를 참고하라.
20) 고전적 책으로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IVP),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문예출판사)를 들 수 있다.
21) 여기에 대한 국내 도서들로 『하나님 나라와 공적 신학』(이형기, 한국학술정보), 『공적 시학과 공적
교회』(이형기 외, 킹덤북스), 『하나님의 경제 1』(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북코리아), 『하나님의 경제
2』(김명용 외, 킹덤북스), 『하나님의 정치』(김근주 외, 킹덤북스) 등을 참고하라. 이와 관련하여 『통일
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김지철 외, 새물결플러스),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차정식, 새물결플러스),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김민웅 외, 새물결플러스) 등을 참고하라.
22)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536.
23)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550; 스캇 맥나이트, 『하나님 나라의 비밀』, 김광남 역(서울: 새물결플러
스, 2016), 153-182.
24)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539-547.
25) 스캇 맥나이트, 『하나님 나라의 비밀』, 18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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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조사회(contra-society), 대항사회(against-society)27)
*예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대조사회 또는 대항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대조되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
고, 세상의 권력과 폭력에 대항하는 공동체이다.28)
*교회의 대조사회로서의 모습은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요 17:14-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
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하나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
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다음의 글을 생각해보자.
“로마서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
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이나 그밖의 여러 대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내적 자세의 변화나 무슨 새로운 동기부여가 아니며, 더구나 개인의 그것은 더욱
아니다. 정신을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은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
서 펼쳐진 거기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켜 놓은 그런 종말론적 전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새로운 창
조는 교회의 정신만이 아니라 교회의 몸, 교회의 모습에도 해당한다.29)
4) 성령과 하나님 나라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왕인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며 찬양하였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성령 충만하여 예언하고(눅 1:39-45), 남편 사가랴도 성령 충만하
여 예언한다(1:67-79). 성전에서 시므온은 메시아의 탄생을 찬양하고(2:22-35), 안나라는 여
선지자도 메시아를 찬양한다(2:36-38).
*성령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할 때 강림하였다.(요단 강 세례: 마 3:13-17, 막
1:9-11, 눅 3:21-22)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성령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공관복음은 예
수님의 잉태와 성장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언급하고 있고,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눅 2:49).30)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메시아로서의 공적
(official) 사역(공생애)에 대한 시작을 알린다.
26) 사랑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에서 잘 나타나 있다. 정의는 공동체 안팎의
약자를 보호하고 돕는 것을 말한다(이것은 신구약성경 전편에 걸쳐 있는 핵심적인 윤리이다).
27) 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역(서울: 분도출판사, 1996), 207-222.
28) 2차 대전 당시 독일 고백교회의 칼 바르트와 본 회퍼, 엘살바도르 군부 정권에 저항한 로메르 주교,
남아공 인종 차별에 저항한 투투 주교,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문익환 목사 등은 교회가 대항사회
임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다. 이것만이 교회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살려는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29)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215.
30)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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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성취되었음을 밝히면서, 메시아 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도래했음을 밝힌다(눅 4:18-19).31)
이사야 6:1-2 희년 선포가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고, ‘주의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그 성령이고,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내용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다(→복음서의 예수님의 사역).
*성령은 공생애 사역 동안 권능과 능력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였다.
◎사도행전과 성령32)
- 사도행전은 성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행전’이라고도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한글 개역개정판으로 51회 등장하고, 헬라어 원
문으로는 71회 등장한다.
- 성령이 적극적으로 사역하는 예
오순절 성령 강림(2장), 사도들의 성령 충만(4:23-31),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성령 거
역으로 인한 죽음(5:1-11),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성령 강림(8:14-17), 성령이 빌립을 에디
오피아 네시에게로 인도함(8:29), 고넬료 가정에 대한 성령 강림(8:14-17), 바나바와 바울
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음(13:1-4),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의 성령의 인도(15:28), 성령이
바울의 활동을 도움(16:6-7), 에베소 제자들에 대한 성령 강림(19:1-6), 성령이 바울의 운
명을 예고함(20:22 이하, 21:11), 성령이 교회에 감독을 세움(20:28) 등.
- 사도행전의 네 가지 성령 강림 사건
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2:1-4), ② 사마리아인에 대한 성령강림 사건(8:14-24), ③ 이방
인 고넬료 가정에 대한 성령강림 사건(10:44-48), 에베소 교회의 성령강림 사건(19:1-7)
- 성령 충만과 하나님 나라의 일
성령 충만에 따른 은사들: 지혜(6:3), 믿음(6:5, 11:24), 능력(10:38), 기쁨(13:52), 방언
(2:4, 10:46, 19:6), 예언(19:6, 11:28). cf. 고전 12:8-10 → 열거 조항×, 예시 조항○
- 성령 충만과 하나님 나라의 사역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성령 충만하였다는 것이
다. 이것은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토대와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 없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5) 사도행전과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은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가 사도들을 통하여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역사적으
로 잘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이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하나님 나라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
한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다.(나아가 신약성경이 이야기하는 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여기
에 포함된다.)
*사도행전에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하나님 나라의 통전성: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4-36), 베드로의 성전에서의 설교
(3:12-26), 스데반의 설교(7:2-53),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은 이사야 53:7-8(8:32-33) 등은
31) 양용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17-219.
32) 김경진, ‘누가신학의 성령론’,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대서, 2013), 8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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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구약성경이 이야기해왔던 그 메시아라는 밝히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고 있으며, 사
도행전 1:6-7에서 그 나라를 다시 말하고 있으며 1:11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성: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왕의로서의 인식은 사도행전
에서도 지속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민족적, 인종적 한계를 넘어섰고, 하나님 나라의 땅은 팔레스타인 지역
을 넘어 소아시아, 유럽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투성: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사건들(행 3:1-10;
4:10; 5:1-11; 8:5-24; 13:4-12; 19:11-19, 23-41; 28:11-15)
-초대교회의 태동기: 사도행전은 교회가 처음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지에 관한 역사를 보여주
고 있다. 교회의 내용에 대해서는 바울이 선교 여행 중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나 교회의 지
도자들에 보낸 서신들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에 명시된 하나님 나라: 1:3; 8:12; 14:22; 19:8; 20:25; 28:23, 31(7회)
6) 종합적인 도식
7)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수동적인 로봇이나 인형처럼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
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
라 살기를 원하셨다(창 1-2장).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도, 이스라엘이 불순종했을 때도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것의 절정이 메시아 예수님의 죽
음과 부활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대리 수행하길 원하신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갈 거룩한 도구, 대리 수행자이다. 따라서 그
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이 땅에서 펼쳐나
가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
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
이라(벧전 2:9)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6)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하나님 나라 종말
구약
창조
이스라엘
신약
예수 메시아 왕
새 백성(교회)
땅과 삶의 영역
새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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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인 사도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12세기의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참고 문헌∎
★표는 추천도서이다.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양혜원 역. 서울: IVP, 2009.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원광연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스캇 맥나이트. 『하나님 나라의 비밀』, 김광남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게르하르트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96.
양용의. 『하나님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울: 성서유니온, 2005
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 김근수 역. 서울: 나단, 1987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 서울: 솔로몬, 2009
웬델 윌리스. 『하나님의 나라: 20세기의 주요 해석』, 박규태, 안재형 역. 서울: 솔로몬, 2011.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김기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고양, 1996.
김경진.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대서, 2013.
*참고하지 않았지만 추천하는 도서
★리차드 미들턴. 『새 하늘과 새 땅』, 이용중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기독교적 종말론에 관하여
올바른 성경적인 해석을 제공해주는 안내서)
★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김귀탁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5.(요한계시록에 관한 균형 잡힌
주석서)
★마이클 고먼.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박규태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위의 책에 비해 비교
적 짧게 써진 요한계시록에 관한 해설서)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vols. 2, 양혜원 역. 서울: IVP, 2012.(사도행전을 이야기하
듯이 플어 쓴 쉽고 재미있는 강해서)
★김세윤, 김회권, 정현구. 『하나님 나라 복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한 책)
★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조악 역. 서울: IVP, 2002(성령에 관하여 쉽게 쓴 복음주의적 해
설서)
★존 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김현희 역. 서울: IVP, 2002.(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관하여 복음주의
적 입장에서 쓴 짧고 간결한 책)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울: IVP, 2011.(왜곡되고 오해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설서)
- 1 -
Ⅱ. 사도행전 본문 연구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 안에서의 준비되다(1:1-8:3)
1과 (사도행전 1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준비되는 하나님 나라
☞ 성경 독서법: “소리 내서 읽어라”
일주일 동안 사도행전 1장을 소리 내서 자주 읽어 보자.
◉ 본문 개관
◉ 본문 길잡이
▫ 본문의 세 가지 축은 ① 예수님의 부활·승천·재림, ② 성령의 약속, ③ 12제자 공동체의 형
성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왕으로서 하나님 나
라의 통치권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행사하신다(하나님의 주권). 12제자 공동체는 새롭게
형성되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며 토대가 된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을 탄생시키
며 성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
▫ 사도행전 1장은 하나님 나라가 메시아, 성령,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어떻게 전개될 것인
지 예고하는 밑그림이다. 1장 이후의 내용은 밑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색깔을 채우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제이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
고(1:3) 하나님 나라로 끝을 맺는다(28:31). 이러한 구조를 ‘inclusio’라고 하는데 수미상관
또는 봉투구조라고 부른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성령과 충성된 하나님의 백
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 서론(1:1-5):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
수신자: 데오빌로(1)
예수님의 부활(3a) <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의 ‘일’(3b): 사도행전의 중심 주제 시작
성령 세례(5)
▫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6-11): 종말의 하나님 나라
종말의 하나님 나라(7) ⇔ 예수님의 재림(11) 수미상관
하나님 나라의 증인(8)
▫ 다락방 공동체(12-26):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시작
▫ 하나님 나라(28:3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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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심층 연구
■ 서론(1-5):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
-수신자 데오빌로는 누구인가?(cf. 눅 1:3)
데오빌로는 헬라어로 ‘Theophilos ’는 ‘하나님’(theos )과 ‘친구’(philos )의 합성어로 ‘하나
님의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눅 1:3과 행 1:1에만 나오는
데, 그는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일 것이다. 누가는 그에게 ‘각하’(kratistos )란 존칭을 붙였
는데, 이것은 로마의 기사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행전에서 로마총독 베스도와 벨릭스
에게도 사용된 점으로 볼 때(행 23:26; 24:3; 26:25) 데오빌로는 아마 로마의 고위 관료
였을 것이다. 따라서 데오빌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데오빌로는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후원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데, 누가복음의 서문(눅 1:1-4)이 “가장 정교하게 꾸며진 문장 구조를 지닌 빼어난 헬라
어”의 형식을 가진 헌정사이기 때문이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만 읽기
를 바라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람들-데오빌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읽기를 바랐을 것
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발신자(저자)는 누가는 누구인가?
의사였던(골 4:14) 누가는 수리아 안디옥에 거주했던 이방인이었다. 적어도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부터 동행했던(행 16:10) 바울의 동역자였다. 그 후 누가는 바울과 함께 하였
는데 바울과 3차 선교여행을 같이 하였고, 바울이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에서도 함께 있었고 바울과 함께 로마에 거주하였다(27:1-28:16).(사도행전에서 ‘우리’라
는 주어는 누가 자신을 포함한 바울 일행을 가리킨다. 16:10-17; 20:5-21:18; 27:1-28:16
에 ‘우리’라는 주어를 보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누가가 저자라는 언급이 없지만, 기
독교 역사 초기부터 누가 저작설이 꾸준히 주장되고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학자들은 누가복음이 기록된 시기를 예루살렘 멸망을 시점으로(AD 70년) AD 58년에서
85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보수적인 견해는 AD 70년 이전이라고 본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 이후에 기록된 것
이기 때문에 앞의 어느 시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보수적인 견해는 사도행전의 결론에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AD 64)와 바울의 죽음(AD 64/5?)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록 시기를 AD 61-63년경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반드시 같이 연결해서 보라고 한다(비록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지만). 이 말은 타당하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관련
해서 읽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이
야기라면, 사도행전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하여 어떻게 전개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을 한 권의 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 3 -
것이다.1) 누가가 “내가 먼저 쓴 글”(1:1)이라고 한 것은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누가는 이
제 그 나라가 땅과 역사 가운데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데오빌로에게 보여주겠다고 한다.
-‘사도행전’이라는 제목이 타당한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이 책을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라고 불렀는데, 이
제목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이 모든 사도들의 사역을 다루지 않고
주로 바울과 베드로의 사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2사도가 아닌 바나바
(4:36-37; 11:22-26; 13-15장), 스데반(6-7장), 빌립(8장)에 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성령이 능동적으로 사도들의 활동을 주도하는 모습도 ‘사도행전’이라는 제목
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이것 때문에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사도행전을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의 도움과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이 선포하
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 행전’(Acts of People of
the Kingdom of God)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1, 2절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와 하나님 나라 복음
에 대한 선포, 부활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은 승천과 더불어 끝
났을까? 복음서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시작에 관한 것
이었다면, 사도행전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사도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치심
과 행하심이 계속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2)
사도, 성령: 사도행전에서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3) 사도와 성령은 사도행전에서 하나
님 나라를 전개하는 중요한 두 가지 축이다. 공관복음서의 제자들은 이제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되어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의 대표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성
령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8)이 된다.
성령으로 명하신 것: 4, 5절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 보인다.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을 기다리라.)
승천하시다(analambano ): ‘집어 올리다, 위로 올리다’란 뜻을 가지는 말로 주로 부활
하신 예수님의 하늘로 올라가신 일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행 1:2, 11, 21; 막 16:19; 딤
전 3:16).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에 관하여 눅 24:51, 행 1:9-11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
다.
3절
1) 실제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두 책을 분리하지 않고 같이 분석한다.
2) F. 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Grand Rapids: Eerdmans, 1990), 98[이하, ‘Bruce’로
약칭함]; Tom Wright,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양혜원 역 (서울: IVP, 2012), 18.[이하
‘Wright’로 약칭함.]
3) Eckhard J. Schnabel, Acts (Grand Rapids, ZONDERVAN, 2012), 71.[이하 ‘Schnabel’로 약칭
함.]
4) David G. Peterson, The Acts of the Apostles (Grand Rapids: Eerdmans, 2009), 103.[이하
‘Peterson’으로 약칭함.]
- 4 -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의 시작과 토대이며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
의 시작이다.5)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를 증거한다. 또한 부활은 우리의 신앙의 토대이다(고전 15장).
40일 동안: 2:1의 오순절을 고려하면 40일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승천까지의 기간을 가
리킨다.6) 40은 완전수를 가리키는 거룩한 숫자가 아니라 단순한 기간을 가리키며,7) 예수
님이 제자들과 40일을 연속적으로 같이 있었다기보다 여러 번 그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5:5-8).8)
하나님 나라: 앞에서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의 주제로서 사도행전의 시작과 끝을 구성한
다고 하였다. 이것을 누가복음-사도행전으로 좀더 확장해보자.
누가복음 1:31-33 (그 나라) 시작
4:18-19 (하나님 나라의 복음)
수미상관, 봉투구조(inclusio)
사도행전 1: 3 (하나님 나라의 일)
28:31 (하나님의 나라) 끝
하나님 나라는 누가복음-사도행전 전체를 감싸는 주제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 한글 개역개정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헬라
어 원문에는 ‘하나님 나라’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제자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예수 자신과 관
련되어 있는지를 배웠을 것이다.(눅 24:44,45...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
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9) 즉 예수님
은 제자들과 성경 공부를 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성경10)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다. Like Jesus, like
disciples!
5절
사도와 함께 모이사: 예수님과 사도들의 마지막 공동체이다. 여태까지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이 넘도록 공동체 생활을 하셨다. 부활 후 40일 동안의 예수 공동체는 예수님의 공생
애 동안의 공동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전의 공동체에서 예수님이 주로 행하시고 가
르치셨으나, 이후의 공동체에서 행하고 가르침을 담당하는 주역은 사도들이다. 예수님은
이제 부재(不在)하는 왕으로서 자신의 공동체와 함께 하실 것이다. 물론 성령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눅 24:49):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예수님이 태어난 나사렛이나 그가 주로 사역했던 갈릴리가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은 이스
5) Wright, p.21.
6) Schnabel, p.73.
7) Peterson, p.104.
8) Schnabel, p.73; Bruce, p.100.
9) Peterson, p.105.
10) 예수님 당시에 성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 5 -
라엘의 신앙과 삶의 중심지였고,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은 예루살렘-이
스라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cf. 욜 2:32).1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출발지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다.
☞ 1) 우리는 안정된 곳,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
고 싶어 한다.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
곳, 죽음을 당해야 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2) 우리는 무엇인가 ‘feel’을 받으면 옳다하고 성급하게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한다.
심지어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5절의 성령을 가리킨다(눅 24:49; 욜 2:28).
세례(baptiso ): ‘세례’ 또는 ‘침례’를 가리키는 ‘baptiso’는 ‘물에 잠기다(담그다)(sink,
immerse)’, ‘씻다(wash)’라는 뜻이다(‘씻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12)). 구약성경과 유
대 문헌에 의하면 세례는 회개, 부정한 것의 제거, 죄의 정화를 위해 시행되었다.13) 이것
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령 세례는 ① 성령에 의하여 압도당하는 것이다. ②
더렵혀진 우리의 영육을 깨끗하게 해준다. ③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준다.14)
세례 요한은 요단 강에서 물로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언급하였다
(눅 3;16). 즉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준비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서 물 세례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령 세례가 동반되어야 한다.15) 현재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는 “회개에 기초해서 정결과 입문을 상징하기 위해 의도된 종교적 예식에서 물을 사
용하는 것”이다.16) 따라서 교회의 공식적인 세례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다.
☞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임재라는 두 가지 요소
가 동시에 요구된다. 이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강조하면, 머리만 큰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흥분된 가슴만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6-11): 종말의 하나님 나라
6, 7절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헬라어에 의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나라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들은 ‘드디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집니까?’란 의미로 질
11) Schnabel, p.74.
12) Ajith Fernando, 『사도행전』, 채천석 역 (서울: 솔로몬, 2013), 59.[이하 ‘Fernando’로 약칭함.]
13) Schnabel, p.75.
14) Ibid.
15) 사도행전에서 물 세례와 더불어 성령 세례가 함께 언급된 본문은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8:12-17),
바울의 고넬료 전도(10:44-48), 바울의 에베소 전도(19:1-7)이다. 사도행전에는 성령 세례에 대하여
언급이 없거나 에디오피아 내시나 아볼로처럼 물 세례만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8:38; 18:25), 성령
세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6) Fernando, p.59.
- 6 -
문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처럼 이스라엘이 민족적, 정치적으로 회복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사도들의 질문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구
약성경(특히 예언서)과 1세기 당시의 유대 문헌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은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인간적인 나
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슬퍼했거나 실망했다는 암시
가 본문에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 나라의 때와 시기17)에 관한 권
한이 하나님에게 있다고만 대답하신다(cf. 마 24:36, 42; 25:13; 눅 12:40) . “너희가 알
바 아니다”란 말은 ‘None of your business’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중의적이다. ① 구약성경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다. 회복은 먼저 이스라
엘에서 시작하여 땅 끝으로 퍼져나간다18)(사 49:6; 행 1:8; 롬 1:16). 그러나 ② 이스라엘
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 운동은 이스라엘에만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
으로 확장된다. 사도들은 이것을 몰랐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8절
이방 땅 끝
사마리아 하나님
예루살렘 유대 나라
교회
예루살렘
땅 끝, 인간
구약시대: 원심적 신약시대: 구심적 현재: 상호적, 교호적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불어 예수님은 사도들의 정치적 인간의 나라에 대한 인식을 종말의 하나님
나라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때와 시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는 ‘그 나라는 곧 올 것이
다. 아니, 오고 있다’란 묵시적인 함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땅 끝: 예수님이 지시한 땅 끝이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살고 있
는 가장 먼 곳을 일컫는다. 로마, 스페인, 에디오피아 등 증인들이 예수님을 증거한 곳이
곧 땅 끝이다. ‘땅 끝’(the ends of the earth,NIV )에서 ‘끝’에 해당하는 헬라어 eskatos
는 지리적으로 ‘끝, 가장 멀리 떨어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는 ‘마지
막’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땅 끝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럴 경우 땅 끝은 세상의 마지막 때,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증인이 된다.
증인: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17) 때(kronos)와 시기(kairos)는 여기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두 개의 단어로 시간적
간격을 가리키는 동일한 의미이다(Schnabe, p.76).
18) Peterson, p.110; Schnabel,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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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의 죽음, 부활,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이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
치신 것을 보고 들은 증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들을 세상에 증거하는 도
구가 된다(눅 24:48). 사도행전에서 증인은 주로 사도들에게 적용된다(1:8, 22; 2:32;
3:15; 5:32; 10:39, 41; 13:31).19) ‘증인’은 헬라어로 martus 라고 부른다. martyr(순교
자), martyrdom(순교)라는 단어의 어원이 여기에서 나왔다.
☞ 1) 증인에서 순교자란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실제로 사
도행전에는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7:54-60), 최초의 순교자 사도 야고보(12:1-2)가 그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나머지 사
도들도 모두 순교했다고 한다.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의 박해에 순교한 평범한 그
리스도인들도 많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순교는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것이다.
2) 행 1:8과 소위 ‘대위임령’이라는 마 28:29-30을 비교해보라.
9-10절
승천(ascension):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높아지셨다고 한다
(엡 1:20-21; 빌 2:9; 히 1:3; 2:9).20)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 9절에 구름이 나오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하늘이다. 그런데
그 하늘은 어떤 하늘일까? 우주의 어떤 공간? 어떤 내세? 본문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은 가시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을 통하여 초월적인 공간으로 가셨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은 하나님의 세계, 영역이다.
갈릴리 사람들: ‘갈릴리 사람들’은 당시에 갈릴리 출신들을 얕보는 표현이다.21) ‘촌놈’이
라고 볼 수 있다. 천사의 말을 다시 옮기면 아마 이럴 것이다: ‘촌놈들아. 뭘 그리 신기하
게 쳐다보냐?’
☞ 우리는 사도들을 위대한 인물들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처음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모두 시골 촌놈들이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권력자, 부자, 대제사장들이 아닌
촌놈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나라 운동은
비범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2)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향식
이 아닌 상향식 운동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재림(second coming):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복음서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셨고, 신약성
경은 곳곳에 이를 증거한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것은 회복될 것이며, 하
나님의 백성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은 역사의 절정의 두 가지 국면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탄
19) Peterson, p.111
20) Fernando, p.84.
21) Ibid.
- 8 -
생,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첫 번째 국면)과 재림(두 번째 국면).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이 국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_ 1-11절은 부활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서막이다.
■ 다락방 공동체(12-26):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시작
12-14절
감람산: 올리브 산(the Mount of Olive)은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 산으로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시간을 보낸 곳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마
지막 명령을 하셨고 승천하셨다. 눅 24:50에서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승천하셨다고 하는
데, 베다니는 올리브 산 자락에 위치한 곳이다.
☞ 예수님이 떠난 자리: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재를 두 번 경험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
을 때이다.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11제자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좌절감을 잔뜩 안은 채 살아
갈 무기력한 날들이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갈릴리는 그런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
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더 이상 갈릴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승천으
로 예수님의 부재를 두 번째 경험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시작된다. 좌절감을 맛 본 곳, 세상이 실패했다고 하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다.
다락방: 여기의 다락방은 아마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행해진 곳이었을 것이다(막
14:15; 눅 22:12). 흔히 이 다락방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하는데,22) 누가는
이 다락방의 누구의 것인지 특정하지 않고 있다.23)
11제자24), 여인들, 예수님의 가족들: 다락방에 모인 이 사람들은 초대 공동체의 핵심적인
사람들이었다.25) 이 공동체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여인들(막 15:40-41; 16:1)과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다는 것은 여인들의 인격과 권리가 무시당했던 시대에 여인들의 역할이 중
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26)
22) 아마 행 12:12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하지 않다.
23) Schnabel, p.82; Fernando, p.85.
24) 도마는 ‘쌍둥이’라는 뜻을 가진 디두모라고 불렸다(요 11:16). 바돌로매는 나다나엘이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21:2) 확실하지 않다. 셀롯인 시몬은 마 10:4(막 3:18)에서 가나안인으로 불렸다.
셀롯은 열혈주의자(Zealot)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무력 투쟁을 벌인 단
체이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로도 불렸다(마 10:3; 막 3:18).
25) Peterson, p.117.
26) 복음서 중에 여인에 대하여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복음서는 누가복음인데, ‘여인들을 위한 복음’
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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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락방 공동체는 초대 교회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당대 사회에서 무시 받았던 촌놈들과 여인들이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가장 약하
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음을 같이 하다, 기도하다. 힘쓰더라: ‘마음을 같이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homothymadon 은 ‘함께, 같이, 일심으로, 만장일치로’의 뜻을 가지고 신약성경에 11회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에서 10회 등장한다(1:14; 2:1, 46; 4:24; 5:12, 25; 7:57; 8:6;
12:10; 18:12).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언급이 20회 등장한다.27) 누가는 그들이 무엇을 기도했는지 밝
히지 않는데, 힌트는 행 1:1-11, 눅 24:53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 성령의 임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구속적인 행동을 하는 거
의 모든 중요한 전환기에서 기도가 이루어졌다(1:24; 8:14-17; 9:11-12; 10:4, 9, 30;
13:2-3).28)
공동체는 기도에 힘썼다. ‘힘쓰다’(proskartereo)는 ‘굳게 계속하다’란 말이다. 즉 끈질기
게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 1) 여기서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함께’와 기도이다. 공동체는
믿음을 함께하는 곳이며 함께 기도하는 곳이다.29) 나아가 삶을 함께 하는 곳이다. 따
라서 믿음, 마음, 삶을 함께 하지 않다면, 함께 기도하지 않다면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가장 큰 차이다.
2)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는 도구이다. 기도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마음이 준비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그 나라의 일을 행할 수 있는 능
력이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함께,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이다.
15-22절
베드로: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중심인물이었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선두 주자로 등장
한다. 그는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였다.(사도행전 15장 이후 예
루살렘 공동체의 대표자는 야고보였다.)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초대 교회의
‘기둥’이라고 표현했다(갈 2:9).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공동서신-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3서-의 저자들이었다.
120명의 성도들(15): 120명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고30) 대략적인 숫자이다. 그들 중에 부
활한 예수님이 일시에 보이신 500명(고전 15:6)에 얼마나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다.31) 중
요한 것은 초대 공동체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32)
27) Fernando, p.86.
28) Peterson, p.118.
29) 기도는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함께 기도할 때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다. “진실
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30) Fernando, p.87, Bruce, p.108.
31) Schnabel,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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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15): 형제(adelphos)들은 예수를 따르던 공동체 전제를 가리기며 남자 성도들만
을 가리키지 않는다. 여자 성도들을 포함한다(1:14).33) 누가는 여자 성도들을 규칙적으로
포함시켜서 가리킨다91;15, 16; 6:3; 9:30; 11:1, 29).34)
베드로의 연설(16-22): 베드로의 연설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① 가룟 유다에 대한 다
윗 시편 예언의 성취(16). ② 유다의 직무와 배신한 유다에게 일어난 사건(17-19). ③
시편 69:25과 109:8(20). ④ 부재하는 12번째 제자 선출의 필요성(21-22).
베드로가 유다 사건에서 시편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다.35) ① 베드로는 덜 중요
한 것에서 더 중요한 것으로(qal wahomer ), 그리고 역으로(vice versa) 적용한다. 즉 다
윗 개인에게 해를 가한 악인의 심판(69:25)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게 일어난 것으로
적용했으며(qal wahomer ), 악인이 빼앗긴 직분-유다가 상실한 직무-이 역으로(vice
versa) 새로운 제자로 채워지는 것으로 적용하였다. ② 베드로는 다윗을 예언자로 봄으로
써 이러한 시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마태 역시 유다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와 유사하
게 적용한다. 마태는 마 27:3-10에서 유다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스가랴서 11;13의 예언
을 적용한다(마 27:9-10).
유다의 죽음에 관하여 누가의 기록과 마태의 기록이 차이가 나는데(마 27:1-10), 이것은
고대의 역사 기록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 중요도에 따른 자유로운 기술이라고 보는
가 하면,36)(역사 기록이 사건에 대한 ‘fact’의 기록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자결하고 목을 매었던 나무 위의 줄이 끈어져, 그 시신이 바
위 위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대리인들을 통해 그 땅을 매입하고 유다의
땅으로 간주했을 것이다”37)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11개 설교들38)
32) Fernando, p.87.
33) Schnabel, p.97.
34) Peterson, p.121.
35) Schnabel, p.97.
36) Fernando, p.87.
37) Richard Bauckham,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밧모섬까지』, 왕인성 역 (서울: CLC, 2010), 54.[이하
‘Bacukham’으로 약칭함.]
38) Schnabel, p.93.
본문 대상 장소 지역
1:15-22 신자들: 120명의 사람들 다락방 예루살렘
2:14-36 유대인들: 수천 명 거리(성전 단지?) 예루살렘
2:37-40 유대인들: 수천 명 거리(성전 단지?) 예루살렘
3:4-6 유대인: 앉은뱅이 성전 미문(美門) 예루살렘
3:11-26 유대인들: 군중 솔로몬의 행각 예루살렘
4:5-22 유대인들: 귀족들 산헤드린 예루살렘
5:3-10 신자들: 아나니아, 삽비라 솔로몬의 낭실? 예루살렘
5:27-33 유대인들: 귀족들 산헤드린 예루살렘
10:34-43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고넬료 로마군 병영 가이사랴
11:1-18 신자들 솔로몬의 낭실? 예루살렘
15:7-11 신자들 솔로몬의 낭실? 예루살렘
- 11 -
☞ 예수님이 떠난 자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예수님의 지시였다(4). 다
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인가 시작할 때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그런 매뉴얼이 없었다. 다만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라는 암시만 주어졌
을 따름이다. 실제로 그것은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중요한 이정표였다. 베
드로(예루살렘 공동체)가 두 번째로 한 일은 유다가 빠진 12번째 사도를 새로 선출하
는 것이었다. 왜 사도수를 12명으로 꽉 채워야 했는가? 11명으로 시작하면 되지 않는
가? 여기서 12명의 사도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12사도는 12지파로 상징되
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서 시작된다. 11명의 불완전한 사
도수는 하나님 나라의 완정성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12사도는 이제 이스라엘을
넘어 새 이스라엘로 확장되는 초대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상징하고
대표한다. 이제 막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12사도로 대표되는 공동체 안에서 시작
된다.
21-26절
12번째 사도의 조건(21,22): ①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한 사람. ② 예수님의 부활을 목
격한 사람 중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 ③ 남자여야 했다.39)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하였고, 부활을 목격했다고 해서 사도의 조건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증인으
로서 증언할 수 있는 자라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없는 자는 사도로서의 필
요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충족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요셉과 맛디아(23): 베드로의 요청에 ‘그들이’ 두 사람을 제안했는데, 누가는 선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는다. 11사도들이 두 사람을 천거했을 수고 있고, 보다 큰 모임이 그랬
을 수도 있다. 또는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가 가진 권위를 존중하여 베드로가 공동체원 중
에서 적절한 사람을 추천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여기에 만장일치로 동의
했다는 것이다.
요셉은 흔한 히브리식 이름이었고, 그의 아람식 이름은 바나바(‘안식일의 아들’ 또는 ‘사
바의 아들’), 로마식 이름은 유스도였다. 맛디아는 ‘야웨의 선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40)
흔히 맛디아에 비해 요셉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해서 요셉이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사도를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누가는 여기에 대하여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지 않는다.
이렇게 선출된 유스도와 맛디아가 사도행전에서 등장하는 곳은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다. 더 이상 이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맛디아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공동체의 사도 선출 기도(24,25): 공동체의 기도를 쉽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마음을 아
시는 예수님. 당신은 이미 두 사람 중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을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41)
39) 22절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에서 ‘사람’은 헬라어로 ‘남자’를 가리킨다(Schnabel, p.100).
40) Schnabel, p.101.
41) 헬라어 원문에는 ‘선택하다’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즉 이미 예수님은 적절한 사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 12 -
이제 그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오.’
제 곳(25): 헬라어를 직역하면, ‘자기의 장소’이다. 즉 유다는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갔
다.
☞ 유다가 간 곳은 어디일까?42)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을 택함으로써 죽음의
길로 갔다는 것을 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생명의 길로 갔다. 영어에
‘go one’s separate ways’란 말이 있는데, ‘(관계를 끝내고) 각자 제 갈 길을 가다’란
말이다. 이것은 분리를 나타낸다. 유다는 사도들과 시작은 같았으나, 마지막은 달랐다.
즉 유다는 예수님과 분리되어 죽음의 길로 가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이다. 누구든지 시작에는 열정과 믿음이 넘치고 마음은 순수하다. 그러나 녹록
지 않은 신앙의 길을 가다보면 어느새 다른 길을 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사도 요
한은 이 유혹들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하고 있다(요일
2:16). 지금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예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세상의 길-로 가
고 있다. 우리도 그 길로 빠져들 수 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길(way)43)에 대한 이야
기이다. 예루살렘으로 갈 것인가? 다메섹으로 갈 것인가? 안디옥으로 갈 것인가? 빌
립보로 갈 것인가? 로마로 갈 것인가?...여러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의 길로 가
리로 결정했으면 끝까지 가자!
제비뽑기(26): 존 스토트는 제비뽑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44) 첫째, 공동체는 적절한
사람을 선출하기 위한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는다. 둘째, 그 사람들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기도한다. 넷째, 제비를 뽑는다. 예루살렘 공동
체는 제비뽑기에서 하나님이 간섭하실 것을 믿었다(cf. 잠 16:33).
☞ 1) 신약성경에서 더 이상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장면을 찾을 수 없다. 또한
현재 교회는 사역자나 장로, 권사들을 제비로 선출하지 않고, 대체적으로 민주적인 방
식으로 선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에도 제비로 리더십을 선출하는 것이 타당한다?
2) 제비뽑기는 성령이 초대 공동체를 인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가? 예루살렘 공동
체는 성령의 임재를 기다려야 하지 않았나?
✞_ 12-26절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
지,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 본문 순모임에 적용하기
■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본문에는 하나님 나라의 세 요소가 모두 등장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이제
42) 딤후 4:10에서 데마란 사람은 믿음을 떠나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43) 사도행전에서 ‘길’(way)은 중의적이다. 땅 위의 길이기도 하면서 예수의 가르침, 예수를 따르는 삶이다.
44) 존 스토트, 『사도행전』, 정옥배 역 (서울: IVP, 2012),
- 13 -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예수님의 왕권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미친다(하나님의 주권, 하
나님의 백성, 땅).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예
수님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행 1:3, 8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
러므로 순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이다.
■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
라는 무엇인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자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는가? 2,000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어야 하듯이 지금도 그것은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땅의 의미가 변했다.
땅의 지리적 의미는 여전히 의미가 있지만, 땅은 인간 삶을 포괄하는 영역적 의미가 동시
에 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삶에 침투하였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정치, 경제, 사
회, 문화, 타종교-에 하나님 나라가 침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열방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영역에 하나
님 나라를 세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순원들을 땅의 선교사라 부르셨고 또한 순원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부르셨다.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그
나라를 세우신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 공동체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서 시작된다. 교회를 넓
게 보면, 전 세계에 퍼져있는 교회, 한국에 있는 교회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보면, 개개의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는 지역 교회의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증인이 된다. 이것을 순모임에 적용해보자. 순모임은 신림교회 안에 있는 하나의 작
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순모임 안에서 시작된다. 개개의 순모임 안에 하나
님 나라의 부흥이 일어나길 기도하자.
■ 하나님 나라는 기도와 성령으로 시작된다.
기도와 성령의 임재 없이 하나님 나라는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로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는
없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고 성령이 임재하실 때 하나님 나라의 강력
한 역사가 일어났다. 따라서 순모임에서 순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증
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자. 성령의 임재를 구하자.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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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1.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2. 순모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의 공동체가 되어달라고 기도
하자.
3. 순모임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달라고 기도하자.
4. 순모임에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하다.
- 1 -
2과 (사도행전 2:1-41)
오순절 성령 강림: 하나님 나라의 Big Bang !
☞ 성경 독서법: “반복해서 읽어라”
일주일 동안 사도행전 2:1-42을 반복해서 읽자.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 주의할 것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강림이 아니다. 물론 성령 강림 사건이 본문에서 명시적
으로 드러난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23).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대로 그 아들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셨다.(17-36
절 사이에 ‘하나님’이 주어로 모두 약 12회 등장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과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시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 두 번째로 중요한 것 역시 성령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이다. 부활하시
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금 통치하고 계
신다(30, 33, 36). 성령의 오심은 왕 예수님이 백성에서 하사하신 왕의 선물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아버지에게 순종하시고 아버지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고
난 다음에 성령의 오심을 보아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33). 성령
의 부어주심은 우주의 탄생과 같은 하나님 나라 교회의 빅뱅이다. 드디어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
▫ 오순절 성령 강림(2:1-13)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시다(1-4)
방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반응(5-13)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4-36)
서두(14-15)
베드로의 첫 번째 주장(16-24) “하나님이”(17)
-성령 강림에 대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다(16-21)
-성령 강림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로 성취되다(22-24)
베드로의 두 번째 주장(25-32)
-다윗이 예수님을 주로 예언하다(25-28) 하나님의 주권(계획)
-그 예언이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다(29-32)
베드로의 세 번째 주장(33-36)
-왕이신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다(33-35)
-예수님이 주요 메시아시다(36) “하나님이”(36)
▫ 최초의 대부흥[The Great Awakening](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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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순원들을 위한 가이드 라인 관련 본문 해석
1. 본문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령?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의 큰 일’(mighty deeds of God,NASB)(11),
하나님의 예정과 뜻(23)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백성을 위하여 일하셨고, 1세기에도 예수
님을 통하여 일하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예수님과 성령을 통하여 어떻게 일어
났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순장들은 이것을 먼저 순원들에게
인식시킨 다음에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성령과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합시다.
2. 본문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지만, 본문의 순서상 성령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
시다. 성령에 대하여 우리가 잘 모르고, 오해하는 것들이 많기 때
문에 사전지식이 필요합니다. (순원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물어보
십시오.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순장은 각자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성령의 사역은 신약성경에서 두드러지지만,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등장한다. 성령은 창조의 사역에 동참했고(창 1:2), 인간에게 생명을 부
여했다(2:7).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
-족장들, 사사들, 왕들, 선지자들-에게 특별히 임하였다. 구약성경의 성
령은 하나님의 백성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임재했다기보다 특수하게 임
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편적으로 임재하는 분이다. 사도행전 2장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에 대한 오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성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심지어 성령을 주고받는 어떤 물건처
럼 취급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결코 아
니다. 성령은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다. 성부,
성자와 더불어 본질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과
함께하며 그것을 수행하는 주권적인 분이다.(요한은 성령을 바람 같은
분으로 묘사하며[요 3:8], 사도행전은 성령이 주도적으로 사역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창1:2;민
24:2; 삼상 10:10 등),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영’(롬 8:9; 빌 1:19)이라
고 한다. 그런 성령을 왜곡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의 은사 때문인데,
실제로 이것에 대한 이해도 잘못된 것이 많다. 이 부분은 행 2장의 방
- 3 -
언에 대한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3. 드디어 예수님이 약속한(1:4, 5)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재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왜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재했는가? 성령의 임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
이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1:4-5에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
다.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약속과 명령에 따른 것이다.(그런데
성령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약성경에서부터 약속된 분이
다.)
성령의 임재를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1) 성령 세례(baptism)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
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회개-입문’의 단계의 성령 세례라고 하
는데,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견해이다.1)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그리
스도인은 없으며,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령 세례 받은 사람들이다.
2)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세례 받은 후 주어지는 것으로서 보
통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롬12:6-8; 고전
12:4-11; 엡 4:11-13; 벧전 4:10-11)와 성령의 열매(갈 5:22-24)로 나타난
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난 은사이다. 실제
로 사도행전은 성령 세례 이후에 주어지는 성령 충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3) 따라서 성령은 사람을 구원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
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재하였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하나님/그리스도에 의하여 부어졌습니다(성령 세례). 그리
고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와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
를 세워갈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은사와 열매를 하나님의 백성에
게 부어주십니다(성령 충만).
순장과 순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령 충만한 삶입니
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선물에 관
한 본문들
① (정황상) 성령 세례에 관한 본문들:
(2:38); 8:17, 18, 19; 10:44; 11:16.
② (정황상) 성령 충만에 관한 본문들:
1:8, 16; 2:4; 4:8, 31; 6:3, 5, 10;
7;55; 9:17; 10:38, 45, 11:24, 28;
13:9, 52; 19:6; 21:4, 11.
③ (정황상) 성령 세례와 충만을 다 포
함하는 본문들: 1:5; 2:33, 38; 10:47;
15:8; 19:2.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
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
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4. 1-13절은 오순절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임재함으로써 12사
도를 포함한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
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방언’으로 말(기
도)하였습니다. 왜 초대 교회의 성령 충만으로 나타난 첫 번째 은
사가 방언이었을까요? 그것에 대한 암시는 9-11절에서 15개의 지
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입니다. 여러분
- 4 -
이 가진 교재에서 15개 지역을 지도에서 살펴봅시다.
그들은 가까이는 유대 지역(9), 멀리는 로마(10)로부터 와서 오순
절 절기를 지키려했던 유대인들과 유대인 개종자들이었습니다(10
절에서는 로마로부터 온 사람들만 유대인 개종자들이라고 언급하
고 있다). 그들은 갈릴리 촌놈들이 그들이 살던 지역의 언어-라틴
어, 헬라어, 시리아어, 아랍어, 아람어 등-로 기도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120명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대다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그래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하자 그들은 전에 배우지
못했던 외국어를 말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왜 120명은 외국어로 방언을
했을까요? 그것은 1:8절에 나와 있는 세상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15개 지역으로 상징되는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이며 그 때
각 지역에 살고 있던 자국인들은 아람어나 헬라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
다. 지금 우리가 ‘한국어’로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
듯이.(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
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GBT[선경번역선교회]가 이 사역
을 하고 있습니다.)
*방언에 대하여 주의할 점2)
고신대 신학교수 박영돈이 지은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IVP)에서 방언
에 대하여 주의할 점을 말하고 있다.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그것은
김우현이 자신의 책 『하늘의 언어』(규장)에서처럼 방언만을 유일하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고 옥한흠 목사의 아들 옥성호
씨가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흥과개혁사)에서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가 이제는 중지된 것처럼 언급하는 것도 잘못이다. 양자는
모두 특정한 주장을 따름으로써 성경을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다. 둘째,
따라서 성경이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는
필요하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려는 하나님의 백성
이 성령의 은사를 간구할 때 성령은 주권적으로 각 사람에게 역사하신
다. 오순절파처럼 은사를 구원의 증거로 간주하거나, 은사주의자들처럼
기적과 같은 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
니다.
오순절: 유월절, 장막절과 더불어 유대
인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이다. 이스
라엘은 유월절에 애굽을 탈출하여 오순
절 즈음에 시내산에 도착하였는데(cf.
출 19:1), 어떤 유대교 전통은 유월절
에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
결하면서 율법을 받은 것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양자를 연결하고 있다(cf.희년서). 그렇
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옛 언약 백
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 언
약 백성으로 변화된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오심: 성령의 오심으로 ‘강림,
임재’, 역사’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성
령의 역동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지 못
한다. 성령이 하늘로부터 ‘퍼부어졌다,
쏟아졌다’
(pour out)란 의미로 이해하도록 하자.
바람, 불(2,3): 성령 강림을 청각적, 시
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에
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출 3:2; 13:21-22; 14:20, 24; 왕상
19:11-12; 시 104:4). 그리스도인에게 성
령이 임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방언(5): 여기의 방언은 정확히는 ‘외국
어’다. 즉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다. 그
런데 고전 12:10의 방언은 해석이 필
요한 말이다. 바울은 방언이 교회의 덕
을 세우지 못하면 유익하지 못하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고전 14:5).
하나님의 큰 일(11): 유대인들은 방언
을 듣고 이렇게 말했는데, 누가는 방언
의 내용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증언, 성령을
부어주심에 대한 감사 등이었을 것이라
고 추측할 수 있다.
5. 왜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에 대한 언급들이 많을까요?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일까요? 성령 충만을 몇 가지 측면
에서 살펴봅시다.
- 5 -
1) 성령 충만은 필요할까요?
예,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성령 충만을 지속
적으로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가? 바로 이것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3)
2) 성령 충만은 특정한 사람과 상황에서만 주어질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성령 충
만해서 일한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특정한 사람, 특별한
상황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 받은 하
나의 백성들입니다. 백성이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
니다. 성령이 순장과 순원을 충만하게 하시도록 소망하고 간구
합시다.
3) 성령 충만은 반드시 경험을 동반할까요?
경험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 반드시
방언, 예언, 기적 등을 수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으로 신
앙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체험은 공동체
와 권위자의 검증과 확인이 필요합니다.(은사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예들은 아주 많습니다.) 바울은 고전 13장에
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은사를 경고하고 있고, 누가는 사도
행전에서 성령의 충만을 지혜(6:3), 믿음(6:5; 11:24), 기쁨
(13:52)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우리
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혜를 강화시켜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시켜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
할 수 있도록 해주며,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더 사랑하도록 해
줍니다. 성령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
랑비에 속옷 적듯이 조금씩 우리를 적시기도 하고, 장대비처럼
우리에게 퍼부어지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이 반드시 오순절 처
럼 역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4)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 중 어느 것을 더 간구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표지는 성령의 은사에 있지
않고,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즉 성령 충만은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입니다.4)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
면서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은사는 그 사람의
인격과 상관 없습니다. 따라서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을
우러러 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순장과 순원은
은사보다 열매를 더욱더 간구합시다.
5)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비결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것으로 기
성령의 열매(갈 5:22-24)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
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
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
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엡 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
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
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
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6 -
도하십시오. 그리고 읽고 기도한대로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러면 성령으로 충만해집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이지 않습니
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6. 베드로의 설교 14-36은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는 성령의 부어주심이 요엘서의 예언(욜 2:28-32)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셨다는 것입
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봅시다.
1)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놀람과 비아냥거림에 욜 2:28-32의 예언
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즉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이 바로 요엘이 예언한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욜 2:28에서 ‘그 후에’를 ‘말세에’(17)라고 바꾸어 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심, 부활, 승천으로 말세가 시작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종말의 의
미를 가지고 있습니다(cf.1:11).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남녀
노소(17), 지위고하(18)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
는 자(21)로 이루어집니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하나
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탄생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을 알리는 빅뱅과도 같은 신호탄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하나님의 뜻과 예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면서(23) 다윗의 시편 16편 8-11절을 적
용하면서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로 보
면서(30) 그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27,
30-32).
3) 시 110:1의 예언대로 부활하신 하나님의 오른 편으로 높임을
받으셨다(33, 35).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 편에 계신다는 것
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등극했다는 뜻이다. 지금 예수
님은 천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나아가 온 세계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천상에서 처음으로 한 일은 약속된 성
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33).
실제로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부각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 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것입
니다. 그리고 왕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첫
번째로 하신 일은 바로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왕
의 하사품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진 이
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은 오직 왕 예수님의 통치에만 순종하는 새 언약의 백
시 16:8-11; 110:1 인용: 이 시편들은
모두 다윗 개인에게 일어난 일들이다.
베드로는 1장에서 유다에게 일어난 일
을 다윗의 시편 69:25; 109:8의 예언
의 성취라고 한 것처럼(1:20) 여기서도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20): 욜 2:31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로 표현하고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날을 종말
의 날로 보고 있다. 이 날을 그리스도
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구원의 날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욜 2:28-32에서 주
어는 여호와지만, 행 2:17-21에서의
‘주’는 예수님이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성령의 약속: 본문에서 약속된 성령의
부어주심은 요엘서의 성취이다. 더불어
성령의 약속은 에스겔 36:27과 예레미
야 31:33의 예언의 성취이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백성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33): 헬라어로는 ‘하나님의 오른 편으
로 높임을 받으시매’이다.
주와 그리스도(36): ‘주’(Lord)는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cf.2:39).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 되셔서 구원의 주권을 행사
하시며 은혜를 주시는 분이 되셨다. 여
기에서 삼위일체 신학이 살짝 엿보인
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되셨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
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
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
심이라(롬 15:16)
- 7 -
성을 창조합니다. 둘째, 성령은 백성으로 하여금 온 세상을 다스
리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온 세상에 알리는 전령이 되게 합니다.
셋째, 성령은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워
가는 일꾼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왕 예수
님의 전령이며, 예수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7.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왕을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23, 36).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을 계속 인용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왕위
를 이어받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32-33).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 세례, 죄 사함, 성령의 선물을 선포합
니다(38). 여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1) ‘회개’는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닙니다. metanoeo (회개하다)
는 방향을 바꾸는 것, 되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
을 대적했던 행동과 마음을 바꾸어 그 분을 왕으로 받아들이
고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예수님
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의식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하지
않지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사람의 죄가 사하여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례는
단순한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세례를 강조하고 있고(2:38, 41;
8:12-13, 36-38; 9:18; 10:47-48; 16:15, 33; 18:8; 19:5;
22;16), 교회는 초기부터 세례를 중요한 의식으로 보았다. 종
교개혁 당시에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의 많은 예전들을 없
앴지만, 세례와 성만찬의 전통은 유지하였다.
3) 그럴 경우 ‘성령의 선물’을 받습니다. 여기서 성령은 인간의 죄
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입니다. 베
드로는 이것을 ‘구원’(40)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
다(2:21도 마찬가지). 달리 말하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
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를 부르는 세
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그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2:21, 39).
회개와 죄 사함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자 할 때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38절: 헬라어로 다시 번역하면, ‘너희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다.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
한 바울의 본문들: 고전 15:27-28; 엡
1:22-23; 골 1:16-18.
- 8 -
◉ 기도
1.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순모임에서 사도행전을 말씀을 나누고, 기도할 때 성령이 순장들과 순
원들에게 부어지도록 기도합시다.
2. 순장들과 순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죄성들을 성령의 씻어주심으로 정결하게 되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
록 기도합시다. 순모임이 거룩하고 경건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1) 존 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김현희 역(서울: IVP, 2002), 56; 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종락 역(서울:
홍성사, 2002), 126, 289.
2) 박영돈,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울: IVP, 2011), 143-186을 참고하라.
3) 존 스토트, 『성령세례와 충만』, 60.
4) Ibid., 65.
5) Ibid., 82.
6) Ibid., 56.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한 번의 세례, 여러
번의 충만’이라고 하면서5) ‘성령의 충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회개’라고 합니다.6) 만약 우리가 한 번의 성령 세례로 만족한다면
구원파와 다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성령으로 남겨진 죄(성)을 씻
겨냄으로써 거룩과 경건을 유지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세상의 공
동체와 기독교 공동체와의 차이점입니다.
8. 120명의 성도가 3,000명으로 증가한 사건(41)은 기독교 역사
에서 최초의 대부흥에 해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증가한 것의 원인에는 회개와 더불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
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개신교 역사에서 대각성 운동 또는 대부흥
운동이라는 17-19세기 영국과 북미 대륙에서 일어났는데, 그 운
동들의 공통점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한국에서는 1907
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 운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는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
교회는 인구감소, 교회의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등으로 성도
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 17-19세기의
부흥이 오늘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을까요?
3,000명(41):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를
대략 100,000명 또는 오순절 순례자를
포함해서 180,000~200,000명으로 보기
도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120명에서
3,000명으로 25배의 수적 증가를 경험
했다. 4:4에서 남자 성도만 4,000명이
되었고, 21:20에서 수만 명이 되었다.
- 1 -
3과 (사도행전 2:42-47; 4:32-5:11)
공유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내적인 삶
☞성경 독서법: “천천히 읽어라”
일주일 동안 사도행전을 천천히 읽어봅시다.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 2:42-27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신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사람
들의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진 재산을
공유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 이것은 단순히 공동체의 공유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공동
체에 실현된 첫 번째 사례라고 보아야 합니다. 공유는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에 임했을 때 나타난 백
성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본문에 나타난 공동체적 삶이 사회적 공동체와 어떻게 다
른가를 살펴보고, 그것이 현재의 교회에도 구현될 수 있는 규범인지를 살펴봅시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공동체을 속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
는 행위였습니다.
성령 충만(2:4) ←--- 성령의 부어주심(33)
공동체의 공동 소유(42-47)
가르침, 교제(코이노니아), 떡 뗌, 기도의 전념(42)
성령 충만(4:31)
공동 소유의 구체적인 모습(4:32-35)
공동 소유의 두 가지 사례 – 바나바(4:36-37)와 아나니아와 삽비라(5:1-11)
- 2 -
◉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순을 위한 가이드 라인 관련 본문 해석
1. 42-47절에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
120+3,000명으로 구성된 공동체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
나님 나라는 교회 안에서 먼저 시작되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
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그 나라를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2. 42절은 초대 교회(와 더불어 현대 교회)의 4대 지표를 언
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침, 교제, 떡을 뗌, 기도입니다.
1) 가르침(didache): 사도들의 가르침은 1:1의 예수님의 가르
침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
신 것들을 다시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가르침의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속적인 제자도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제자들 1(사도들)-제
자들 2......제자들 n으로 이어지는 끊이지 않는 제자도의 형
성입니다. 그러므로 순모임은, 순장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또 하나의 제자들이면서 순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면서 그들을 제자 삼는 제자도의 공동체입니다.
2) 교제(koinonia): 교제, 친교, 나눔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
순히 삶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교제
는 성령과 물질의 공유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부
어주신 성령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2:33). 성령은 그리
스도인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
리고 타인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 결과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과 물질을 나누는 아름다
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탄생합니다(2:45; 4:35). 실제로
예수님의 공동체는 물질을 공유하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
다(마 19:21; 눅 12:33). 예루살렘 공동체는 예수님과 함께
나눔의 삶을 경험한 제자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통하
여 이제 그 나눔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
는 자본주의의 물질관에 영향을 받아서 코이노니아의 정신
을 잃어버렸습니다.
3) 떡을 뗌: 성만찬(주의 만찬)과 공동 식사를 가리킵니다. 46
절 중반부의 ‘떡을 떼는 것’은 성만찬, 후반부의 ‘음식을 먹
42절: 헬라어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
침, 교제, 떡을 떼는 일, 기도에 힘쓰다’
로 번역된다. 즉 ‘힘쓰다’가 기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3가지에
도 연결된다.
- 3 -
는 것’은 공동 식사를 지칭합니다. 초대 교회는 가정 교회
(2:46)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배할 때 성만찬과 공동 식사
는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공동 식사는 공동체성을
유지시키고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동 식사를 통해
음식과 담소를 나누면서 형제자매애를 돈독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4) 기도: 하나님 나라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에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전환기에서 기도가 행해졌다
(1:24; 8:14-17; 9:11-12; 10:4, 9, 30; 13:2-3). 순모임
은 성경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순모임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순장은
명심하기 바랍니다.
3. 교회와 공동체성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봅시다. 교회를 가
리키는 헬라어는 ecclesia인데, ‘모임, 회합’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로 모이는 곳입니
다. 그런데 인간 존재 자체는 원래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의 공
동체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창 1:26). 그리고 남
자와 여자라는 복수적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였습니다(1:27).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하나
님은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에게 맡긴 하나
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존재는 단독자(單獨者)가 아니라
원래부터 공동체적 존재이며, 그 공동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동체적 존재로서 우리는 ‘나’와 ‘너’를 구
별하지 않으며 ‘너’를 타자화(他者化)하지 않고,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네’가 울 때 함께 울며 ‘네’가 기
뻐할 때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로 가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령을 성부와 성자
를 연결하는 ‘사랑의 끈’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성
령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사랑으로 묶습니다. 성령의 사
랑으로 묶인 공동체는 ‘마음을 같이 하여’(2:46) ‘한 마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을 개별적이고 파
편화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
면, 샤르트르,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등. 이처럼 개인화된 철학을 극복한 철
학자로 레비나스, 마르틴 부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격: 1) 공동체성.
2) 하나됨(oness)(요 17:21-23)
요 17:21-23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
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
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
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
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
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
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
로소이다
- 4 -
음’(4:32)이 됩니다. 순모임이 진정한 공동체, 마음을 같이 하
는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4. 2:44-45, 4:32-35은 공동 소유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
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임재
로 참된 코이노니아와 한 마음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루살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재산과 소유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소유권의 포기가 아닙니다.
2) 나눔은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이었습니다(공산주의와의 차
이점).
3) 나눔은 일시적이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계속적으로 행해졌
습니다.
4) 공동체는 보편적 복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
에게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2:45; 4:35).
5) 나눔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였습니다(그리스-로마의
호혜적 친교와 다른 점).
6) 나눔으로 공동체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4:34).
이것은 신명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가난
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의 신약적 실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
다(신 15:4, 7, 11).
2:44-45 4:32-3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
를 따라 나눠 주며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
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고 자
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
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
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2:44
헬라어에 의하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
용하고’보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가지
고’로 번역된다. 이것은 공동 소유를 의
미하는데, 한글 번역은 공동 소유의 부
정적 의미 때문에 다소 모호하게 번역
한 것으로 보인다.
2:44-45과 4:32-35의 동사들은 헬라
어 시제로 과거의 계속적 행위를 의미
한다.
신 15:4-5, 7, 11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
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
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
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
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
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5. 4:36-5:11에서 바나바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통해서 본문 전체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 바나바는 구브로에 있는 밭을 팔아서
매각 대금 전부를 공동체에 기부했습니다.
감추다(nosphizomai)(2, 3): 이 단어는
신약에서 딛 2:10, 70인역 구약에서 수
7:1(아간의 죄)에 등장한다. 많은 학자들
은 아간의 죄와 아나니아와 십비라의 죄
를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 5 -
그러나 바나바와 대조하여 예루살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
부는 자기들의 토지를 판 돈 일부를 공동체에 기부했습니다.
그 결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을 좀더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죽임을 당했을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표면적으로 아나니아
와 삽비라는 매각 대금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바치면서
전부라고 거짓말하였습니다(5:2, 8). 그런데 이면에는 매각
대금을 착복(횡령)한 데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횡령과 거짓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땅은 원래 자기들의 것이었고, 그 매
각 대금도 자기들의 것이었는데(4), 그 일부를 감추고, 일
부를 바친 것이 왜 문제가 되나요?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과 매각 대금은 베드로의
말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땅을 팔고 대금을 공동체에 바치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선한
일-공동체의 공동 소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의도
는 선했을 것입니다.1) 따라서 성령의 임재로 선한 마음으
로 땅을 팔고 매각 대금을 취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소유
가 될까요? 그때부터 대금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지금 예
수의 영이 충만해 있는 공동체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대금의 일부를 취한 것은 자기들의 것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착복한 것이 됩니다.(이런 점에서 여호수아
서에서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착복한 사건과 동일하다.)
3) 아간과 아나니나, 삽비라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입니다. 이스라
엘이 요단 강을 건너 수행하는 초기 전투에서 아간의 범죄
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찬가
지로 예수님의 통치와 성령의 임재로 시작되는 새 이스라
엘의 공동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는 아간의 죄와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 11절에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한
다. 본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하나님의 것을 착
복하고 성령을 속인 것이기도 하면서 교회의 것을 취하고
속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예수님의 것이
거짓이라는 죄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아
담과 하와는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선
악과를 먹었고(창 3:1-5), 가인은 아벨
을 죽이고 하나님의 질문에 거짓으로
답했다(4:9). 출애굽기 금송아지 사건도
본질은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속인 사건
이라고 볼 수 있다(출 32:4).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토지 매각 대금을
착복한 것을 사도행전은 ‘성령을 속인
것’(5:3),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4),
‘주의 영을 시험한 것’(9)은 모두 동일
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벧전 2:9
너희는...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6 -
◉ 순모임에 적용하기
1. 본문의 의미를 살피기 전에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1) 여러분이 공동체적 존재라고 여기십니까? 삼위일체 공동체의 하나님이 자기(들)의 형상을 따라 여러
분들을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한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하나인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라고 생각합니까?
2) 공동체이며 하나된 우리-교회-를 방해하는 현대적인 요소들은 무엇일까요?
3) 우리가 견고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3. 초대 교회가 공동 소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였기 때문
에 가능했습니다.
1)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이 현대 교회의 규범이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될 수 없다
면,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2)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현대 교회에서 공동 소유의 형태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1) 존 스토트는 베드로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서로 대금을 공동체에 전부 바치기로 약속하였다고 가정합니다(『사도행
전』, 정옥배 역 [서울: IVP, 2012], 122). 그러나 본문에 그런 정황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
체인 교회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순모임은 하나
님의 귀중한 소유입니다.
- 7 -
◉ 기도
위에서 나누었던 것을 토대로 순장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원들과 합심하여 기도하십시오.
- 1 -
4과 (사도행전 3:1-4:31)
두 번째 표적 -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치유되다: 회복의 하나님 나라
(첫 번째 표적과 기사[2:44]는 공동체의 공동 소유[44-47])
☞ 성경 독서법: “암송하도록 읽으라”
일주일 동안 사도행전의 일부분을 암송해봅시다.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 3:1-4:31에서 베드로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설교와 논쟁입니
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2:44에서 언급된 표적과 기사의 첫 번째가 공동체가 공동으로 물건을
나누는 일이었다면, 두 번째의 표적과 기사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건입니다. 달리 말
하면,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일이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입니
다.
◻ 사도행전에서 하나님 나라의 두 번째 표적과 기사로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
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의 나라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동안 귀신을 축출하고 병자들을 치
유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자신을 통하여 임하였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이 회복되는 나라입니다. 귀신들림, 병, 죽음은 본래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생긴 죄의 결과들입니다.1)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죄가 사하여지고,
그 결과 인간이 짊어진 죄의 고통들이 사라지고, 인간이 완전한 회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은 그 일을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하셨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도들을 통하
여 이어나가셨고, 지금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 그러나 이 회복의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그 일을 실행할 때 항상 대적
자들이 방해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셨고, 초
대 교회가 공동으로 물질을 나누려고 했을 때 사탄이 방해했습니다(행 5:3). 그리고 권력자들이 하
나님의 백성을 위협했습니다(4:6).
1) 그리스도인 역시도 병에 걸리고 육체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예수님이 인간을 완전히 회복시킬 때까지 그리스도
인 역시도 그것들을 피할 수 없다.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다(3:1-10)
베드로가 이스라엘 대중에게 설교하다(3:11-26): 회복과 종말의 하나님 나라 회복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설교하다(4:1-21): 구속의 하나님 나라와 대적자들
앉은뱅이 치유 사건 결말(4:22)
공동체의 기도(4:23-31)
- 2 -
◉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1. 3장과 4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지체장애인2) 치유사건이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지체장애인 치유는 본문을 감싸는 수
미쌍관(inclusio)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그 사건으로
시작하고(3:1-10) 당사자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기 때문입
니다(4:22). 그리고 3, 4장은 그 사건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언
급하고 있습니다. 지체장애인이 고침을 받은 것은 단순히 병
자가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살펴봅시다.
1) 성령 충만으로 예루살렘 공동체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모습은 공동체의 물질의 나눔이었고, 두 번째 모습은
불구자가 치유된 사건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신앙을 영
적(spiritual)인 것이라고 하면서, 내면적인 것으로만 간주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보듯이 공동체의 신앙은 물
질적이고 육체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요소를 아우른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전인적(全人的, holistic)이라고 합
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모든 요소-영혼과 육체와
삶-가 회복되는 나라입니다.
2) 3:6은 유명하게(?) 오용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영과
육을 구별해서 지체장애인의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회복과 더불어 영혼도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장애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비록 장애인이 돈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요구
했지만, 그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육체의 회복이
었습니다. 육체의 회복을 통하여 장애인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3:16) 회복된 육체로 정상적인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체장애인 치유 사건에 대한 언급들:
이 일(3:12), 이 사람을 성하게 하다
(17), 완전히 낫다(17), 이 일(4:7), 착
한 일(9), 표적(16, 22).
2. 하나님 나라는 종말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회복
의 나라입니다. 장애인 치유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
어질 완전한 회복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지금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는 오순절 설교를 상기시킵니다. 전
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서 왕이 되셨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3:11-26에서는 그 왕이 다시 오실 것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되는 날’(3:19), ‘예수를 보내시리
- 3 -
니’(20), ‘만물이 회복하실 때’(21)은 모두 왕 예수님의 재
림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
다.
2) 종말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한 회복을
경험합니다(3:21).3) 그러나 그 회복은 예수님을 통하여 시
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그
회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백성은 피조물을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존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장애인
이 치유된 사건을 이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회복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종’(3:13, 26; 4:27, 30), ‘거룩하고 의로운 이’(14), ‘생명
의 주’(15), ‘모세와 같은 선지자’(22)라고 다양하게 표현하
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되
고(3:6)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4:12). 부활하시고 하
늘에 계신 예수님의 그 이름으로만 구원과 회복이 일어납
니다.
4) 실제로 회복과 종말은 창세기부터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으
로 끝을 맺는 성경 이야기의 거대한 주제입니다. 회복과 종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창조와 새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창
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반역으로 왜곡되자, 하나님은 예수님
을 통하여 바로 잡으십니다. 그리고 백성은 하나님의 거대
한 계획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복음서에
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행전에서는 백성을 통해
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3:13): 종은 이사야서 52:13-53:12
에서 이야기하는 고난 받는 종의 성취
이다.
생명의 주(15):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이 주어
진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생명의 물(요 4:14; 7:38), ‘생명의
떡’(요 6:34)으로 표현한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22):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예언의 성취이다(신 18:15,
18).
이름(3:6; 4:10, 12, 17, 18): 예수 그
리스도의 이름이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이름에 마술적인 힘이 있어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시
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살아계셔
서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이름
을 믿는 자에게만 가능하다.
3. 베드로와 요한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인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제사장들, 성전 수비대장, 사두개인들
(4:1),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장인 안나스, 장로들(6)4)은 모두
예수님을 죽인 자들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직면했던 살기등등한 위협을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
드로는 성령이 부어주시는 용기와 지혜로 이것을 돌파해나갑
니다(8).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공모자들이라고 책망
하면서(11)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1) 첫째는 장애인이 회복된 사건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의 질
문(7)에 베드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
했다고 대답합니다(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불과 두 달 전에 그들은 예수
산헤드린 공회(6): 대제사장과 장로들
의 공식 기관으로 종교적 결정권을 가
진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다.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탄의 유혹에 넘
어가 하나님 나라를 대적했듯이 산헤드
린 공회 역시 사탄의 조종에 의하여 하
나님 나라를 대적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영
적 전투이다.
- 4 -
◉ 순모임에 적용하기
1. 장애인이 치유된 사건은 (신약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첫 번째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기적을 넘어서 회복의 하나님 나라가 2,000여 년 전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신 예수님에 의
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회
복’(restoration, apokatastasis)을 나누어봅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행 3:21에서만 등장하
는데, 그 뜻은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나 복구’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이 세상
2) 이하에서 앉은뱅이를 ‘지체장애인’이라고 표기한다. 이 말이 가지는 혐오적인 뉘앙스 때문에 장애인 단체는 성경
에서 표현된 ‘손 마른 자’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저는 자’ ‘앉은뱅이’ 등을 지체장애인이라고 표기할 것을 주
문했다. 다만 그 장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3) 요한계시록 21, 22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회복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4) 요한과 알렉산더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다시는 듣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다시 반복되었을 때 그
들은 제자들의 대적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
과 동일하게 그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지금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 있습니다.
2) 베드로는 장애인 치유 사건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
현합니다(9, 11). 구원은 ‘구속’이란 말로 바꿀 수 있습니
다. 구속은 창조와 새 창조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
님을 통하여 행하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복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에 구원자(구속자) 예
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와 메시아(2:36)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자(구속자)이십니다.
3)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
하지 아니할 수 없다.”(19-20)란 베드로의 대답은 아마
목숨을 건 말이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예수님처럼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
들 때문에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구원(9, 11):복음서에서는 치유를 구원
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
면, 누가복음에서 혈루증 걸린 여인의
치유(8:48), 회당장 딸의 치유(50), 사
마리아인 나병환자의 치유(17:19), 맹
인의 치유(18:42).
4.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풀려났을 때 공동체
는 창조주 하나님(4:24), 만유의 주권자 하나님(25-26), 하나
님의 종이자 회복주인 예수님(27-30)을 두고 통성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이 다시 그들 가운데 부어졌습
니다.
- 5 -
을 선하게 창조하신 상태는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을 잃어버린 죄인들이 되었으며, 인간의 죄
로 창조 질서는 왜곡되고 흐트러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인 인간과 왜곡된 세상을 회복시키려고 오
셨습니다.
1)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소멸하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겨
진 죄성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4은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
고”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죄의 유혹에 넘어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을 소멸하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
의 형상으로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회복된 영혼 위에 성령의
열매를 더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감정, 이성, 마음을 유혹하는 크고 작은 모든
유혹들로부터 보호해달라고 예수님과 성령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2) 우리 영혼의 회복뿐만 아니라 세상의 회복에 대하여 나누어봅시다. 최근에 우리 사회와 교회에는
큰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부정적인 정치 사건들, 헬조선, 소위 ‘이생망’, OECD 자살
률·노인 사망률과 빈곤률·청년 실업률 등의 지표가 1위 내지 최하위 등, 교회의 세속화와 목회자들의
타락, 대형 교회의 문제 등...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실천할 수 있을
까요?
2. 베드로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것과 그들이 한 말을 상상해보십시오(4:7, 12, 19). 아마 이것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로 여겨집니다. 최초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기존의 로마 카톨릭 교리와 반
대되는 글을 발표한 후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는 독일 황제 카를 5세와 카톨릭 지도자들의 협박을
당했습니다(1517년 4월 보름스 회의). 만약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그는 화형을
당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순장은 순원들에게 루터의 말 중
에 고딕체를 읽어주십시오.)
“황제 폐화, 귀족 제후 각하들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요구하고 계시군요. 여기 숨김 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아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양자는 서로 엇갈
린 주장을 펴 오고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
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한기 때문입니다. 하나
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1) 우리는 상황만 다를 뿐 세상을 살아가면서 베드로나 루터처럼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 6 -
◉ 기도
1. 회복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소생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가 살고 있는 세상을 회복시켜나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2. 위에서 나누었던 것을 토대로 순장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원들과 합심하여 기도하십시오.
- 1 -
5과 (사도행전 5:12-6:7)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과 공동체의 응전
☞ 성경 독서법: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 위의 본문 개관에서 보듯이 3, 4, 5, 6(앞부분)장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후 예루살렘 공동체에
발생한 종말 -회복의 하나님 나라(A)가 외부적, 내부적으로 도전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베드로
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친 후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을 받는다(B). 그리고 공동체의 공동 나
눔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의하여 위협받는다(C). 이러한 패턴은 5:12-16에서 반복된다. 사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자 믿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늘어난다(5:12-16)(A′). 사도들의 말씀 선포와 치유
사역을 산헤드린 공회는 다시 방해하며 협박한다(5:13-42)(B′). 그러나 사도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
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한다. 공동체는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의 구제 문제로 갈
등에 빠진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를 지혜롭게 해결한다(6:1-7)(C′). 여기서 A B C / A′ B′ C′의 패
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을 교차대구(chiasmus)라고 한다. 누가는 이러한 패턴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주어진 난관을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주고 있
다. 달리 말하면, 도전과 응전이다.
◻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을 어떻게 응전하면서 극복해나가는지를 잘 살펴보는 것이 관건이
다. 산헤드린의 외부적 도전에 사도들은 고난을 통하여 극복했고, 내부적 도전에 지혜로운 리더십으
로 극복했다.
◻ 6:7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국면에 대한 결론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1:8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충만해지는 모습이다. 6:7 이후 7장의 스데반
의 순교는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을 넘어 가는 전화점이 된다.
3:1-26 회복의 하나님 나라 1 A
4:1-31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외부의 도전 1 B
5:1-1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부의 도전 C
5:12-16 회복의 하나님 나라와 그 확장 A′ 교차대구(chiasmus)
5:17-42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외부의 도전 2 B′
6:1-7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부의 도전 2 C′
- 2 -
◉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1.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하면서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이
나온다. 우리는 그것이 종말-회복의 하나님 나라가 교회(하나님의 백
성)를 통하여 시작되었음을 배웠다. 앞으로 이러한 기사(wonders)와
표적(miracles)은 사도들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5:12-16에서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는 사건을 간
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이 성령을 사도들
에게 부어주심으로써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하나님 나라가 능력
으로 사람들에게 임하는 모습이다.
사도들(12, 18): 4장에서 베드
로와 요한만이 등장하나, 여기
에서 12명 전체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2.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투옥과 위협에도 불구하고(4:3, 18) 하
나님 말씀을 선포했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그러자 산헤드린 공
회는 사도들을 다시 투옥하였고(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20)을 선포했고, 공회는 다시 그들을 불러 세웠다(28).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보자.
1) 옥에 갇힌 사도들을 깨운 존재는 ‘주의 사자’(19)인데, 천사를 가리
킨다. 사도행전에는 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체적인 일을 지시하고(5:20; 8:26; 10:3), 격려하고
(27:23), 감옥에 갇힌 하나님의 백성을 구출하고(5:19; 12:7-11),
악한 자-헤롯-를 심판한다(12:3). 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주권적
인 섭리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따라 천사를 통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사들이 자
주 등장하여 백성에게 간섭하는 것은 아니다(아니면 생략?). 오히
려 사도행전에서는 천사보다 성령이 더 자주 등장하여 백성을 인
도한다. 그리고 옥에 갇힌 모든 사람을 천사가 구출해주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일반적이라기보다 특별한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천사들이 사도들을 감옥에서 구출한 것보다 사도들
을 왜 구출했는가이다. 그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했
다. 흥미로운 점은 천사가 산헤드린 공회가 금지한 것, 즉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4:18)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조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셨
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반한
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천사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
을 선포하였다(5:21, 25).
2)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투옥하고(18) 불러 세운 것은(28) 4장
에 이어 두 번째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대한 외부적
도전이다. 만약 사도들이 이들의 살기등등한 위협에 굴복했다면,
생명의 말씀(20): ‘생명의 주’(3:15)
를 상기시킨다. 즉 생명을 주시
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이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에
게 생명을 주고 삶을 변화시키
신다.
- 3 -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
했을까? 한 번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은 참을 수 있
을까? 만약 두 번도 견딜 수 있다면, 세 번은?(베드로는 예수 때
문에 감옥에 세 번 갇혔다[12:4]). 여기서 천사가 간섭한 이유를
살펴보자.
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 충만을 경험
했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지만, 실제로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들의 믿음은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천사의 개입은 사도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행위였을 것이다. ② 천사의 개입은 하나님
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중대하고 시급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
도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상 말씀을 선포할 자가 없다. 하나님
은 그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천사를 개입시키셨다. 따라서 천
사의 행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3)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4:19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행동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
라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럴 경우 백성은 세상
과 충돌하거나 긴장 관계를 가질 수밖에 있다. 또한 이것은 그리
스도인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그리스도인의 시민 불복종 운동
의 예: 18세기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폐지운동, 20세
기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남아공의 만델라와 투투 주교의
인종차별금지운동, 2차 대전 당
시 본 회퍼 목사의 반나치운동,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거부 운동
등. 지금은?
3. 5:30-31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에 대한 요약이다: 메시아의 십
자가의 죽음, 야훼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
한 메시아, 메시아의 회개와 죄사함의 권세와 은혜. 그런데 왜 유대인
들은, 특히 종교 권력자들-대제사장,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기득권
세력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예수님 선포를 거부했을까? 그들도 당
시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을 믿는데...
5:30의 ‘나무에 달아 죽인’은 유대인의 메시아관에 대한 중요한 힌트
를 준다. 이 말은 신 21: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의
재현이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메시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로부터 구출
하고 이방을 심판하는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런 메시아는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을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십자가 나무에 달린 메
시아를 유대인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유대인들의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했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했는데, 율법과 성전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성전을
부정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
대인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사도
- 4 -
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4.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위협과 협박에 대하여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
했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사도들은 하
나님 나라의 적대자들이 행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오
히려 그들은 감옥에 들어갔고(4:3; 5:17), 채찍질을 당했고(5:40), 능
욕 받았다(5:41).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그런 일들을 당하는 것을 기
뻐했다(5:41).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먼저 당하고 인내하고 (하나님
께) 순종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에 그리스도인이 응전하는 태도는 ‘고
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
나님 나라를 위해 수용하는 삶의 방식이다. 또한 그것은 21세기 현재
에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가 감내하고 인내해
야 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하신 고난을 당신
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에게 남겨놓으셨다(골 1:24). 고난 없이 하나님
나라는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고난이 뒤따라 온다(롬
8:17; 빌 1:29).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사실
은 사탄이 주는 두려움이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시며
(고후 1:5) 이길 힘을 주시며(히 2:18) 더 큰 소망을 주신다(롬 8:18).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5. 가말리엘이 한 말을 주목해보고(5:38, 39) 그의 태도를 평가해보
자.
가말리엘(34): 사도 바울의 스
승이며 힐렐학파의 거두. 바리
새파에는 샴마이학파와 힐렐학
파가 있었는데, 전자는 율법준
수에 엄격하고 그것을 위해 정
치적인 투쟁도 수용했다. 후자
는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대하
여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6.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외부적 도전과 응전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6:1-6은 5:1-1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공동체
내부의 도전이다. 공동체가 이 일을 어떻게 풀어 가는지 살펴보자.
1) 최선의 방법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6:1-6에서 오늘날 교회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성경적 지침
을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교회의 지도자들의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인가?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와 히브
리파 유대인들의 과부(1): 헬라
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
인들로 말년을 고국인 이스라엘
에서 보내기 위하여 귀국한 유
대인들로 보인다. 그들이 죽고
그들의 아내들을 돌보는 문제가
당시의 공동체에 있었다. 그들
은 언어적, 문화적으로 이스라
엘 출신인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과부와 어느 정도 갈등이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 5 -
◉ 순모임에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인 예수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2.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시민 불복종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존 스토트는 정부가 오히려 선을 벌하고 힘을 사용하여 악을 조장할 때 저항해야 하는 것
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하였다(존 스토트, 『사도행전 강해』, 129). 여기에 대하여 나누어보자. 구
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면, 어떠한 행동이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가?
3.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고난이 수반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4. 6:1-6을 토대로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 기도
1.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기도하자.
2.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기도하자.
3.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믿음을 두고 기도하자.
4.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공동체를 세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주지하고, 일상에서 말씀 읽기와 기
도하는 습관을 다짐하는 기도를 하자.
3) 사도들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취했는
가? (외부인과 내부인, 자격 요건)
- 1 -
6과 (사도행전 6:8-8:3)
고난을 통하여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
☞ 성경 독서법: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 본문은 예루살렘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초대교회 첫 번째 순교자
인 스데반을 통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1:8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 스데반은 성전과 율법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독했다는 중상모략에 대하여 자신을 변론하는데,
무고에 대하여 직접 맞서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역사를 이야기함으로써 율
법과 성전의 참 된 의미를 사람들에게 깨우치는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에 스데반은 자신을 모략한
사람들을 오히려 역공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 스데반의 구약개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로 볼 수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인 아브라
함과 족장들, 모세,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전개시키시는 모습을 이야기한
다. 그 나라에서 땅과 성전과 율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성전과 율법은 당시의 이스라
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성전과 율법이 아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의 죽음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을 택하셨는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분명히 하나님
의 백성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고난에
하나님의 백성은 대항하지 않고 순종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6:8-15. 스데반에 대한 중상모략: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11) → 성전과 율법을 모독(14)
7:1-50. 스데반의 구약개론: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계획: 백성, 땅, 성전)와 그 나라의 성취자인 예수
2-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후손, 땅에 대한 약속
17-44.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약속: 백성, 땅, 성전
45-50. 땅과 성전의 완성
7:51-53. 하나님 나라의 성전과 율법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
7:54-8:3.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다.
- 2 -
◉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1. 스데반은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세워졌지만(6:5), 거기에 국한하지
않고 사도들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다(8). 스데반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면서(11) 그 내
용으로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고 공회에 고발한다(14).
성전과 율법은 이방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1세기 유대교를 지탱
하던 두 기둥이었다. 이 기둥들이 무너지면, 유대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종교였고,1)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6:8-15에서 과연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모독하는 행동을 하였는지 분
명하지 않다. 그러나 스데반에 대한 고소를 예수님도 동일하게 받았다는
점을 볼 때 스데반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사도들처럼(3:12-26;
4:9-12; 5:12-16, 21, 42) 예수님을 선포하였으며 예수님이 공생애동안
율법과 성전에 관하여 선포하신 것을 어느 정도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14).
따라서 유대인의 입장-율법과 성전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에서
볼 때 그 고발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오해함
으로써 성전과 율법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하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신앙을 장구한 구약의 역사-구약성경-를
통하여 살핀다.
자유민들(9): BC 63년에 폼
페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
을 때 잡혀서 노예가 된 사
람들의 후손들로서 나중에
자유인이 된 사람들이다(헬
라 유대인). 그들은 예루살
렘에서 그들의 회당을 구성
하여 예배하고 성경을 읽었
다.
자유민들이 그들의 회당에
서 온 것으로 보아서(9) 아
마 헬라 문화권에서 자란 스
데반은 동일한 언어를 쓰고
문화권에 있었던 자유민들
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2. 스데반은 중상모략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펼치
신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백성과 땅 그리고 성전과 율법-를 이야기하
면서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시다(7:6; 창 15:13,
14)[7:2-8]. 톰 라이트는 “창세기는 이 세상이 어떻게 바로잡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161). 즉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으
로 뒤틀린 이 세상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바
로잡으시려고 했다는 말이다.
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백성과 땅-이 모세를 통하여 이
루어지다(7:9-37).
3) 스데반은 7:38-50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땅에서 율법과 성전으
로 주제를 바꾼다.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
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편이었다.
이제 스데반은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에 대하여 반론을 펼친
다.
① 38절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살아있는
- 3 -
말씀’ 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율법과 율법의 중개자인 모세를 존중하
고 있음을 강조한다. 오히려 그는 출 32장의 황금 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을 인용하면서(39-42) 모세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금지
한 십계명의 율법(출 20:3)을 어겼음을 고발한다. 42-43절에서 스데
반은 암 5:25-27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 총체적인 우상숭배에 빠
졌음을 밝힌다.
② 스데반은 44-50에서 성전에 대하여 언급한다. 광야에서 장막이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성전으로 건축되었음을 밝힌다(47). 그런데
스데반은 성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가두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드린 기도(왕
상 8:27)를 인용하면서(48), 그리고 사 66:1-2을 인용하면서
(49-50) 강조한다.
4) 51-53에서 스데반은 오히려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자가 바로 그를
중상모략한 지금의 이스라엘이라고 고발한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성
령을 거역했고(51), 의인-메시아-을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였고(52),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거스렀다(53).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것은
스데반이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다.
스데반이 적대자들이 이미 알고 있던 구약을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52절의 ‘의인’, 메시아 예수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율
법을 결코 폐하지 않았고 오히려 완전하게 하셨다(마 5:17). 그는 사
람들이 하나님을 장소와 공간에 가두려고 했던 그 성전을 새롭게 변
화시켜 자신이 성전이 되셨고(엡 1:23; 골 1:18),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성전이 되었다(고전 3:16; 12:27).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율
법과 성전은 의미가 변화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스데반이 유대인을 고발하고자 한 것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
로써 그 결과 율법과 성전마저도 모독한 것이 되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
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
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
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
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
려 하심이요(골 1:18).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
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3. 스데반의 변론과 고소가 끝난 후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
라보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돌로 쳤다. 스데반은 죽어가
는 중에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눅 23:46, 34)
그들을 용서하고 숨을 거둔다.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첫 번째 순
교이다.
4. 스데반의 순교 후 본격적이고 공적인 핍박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
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일을 계기로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을 넘어 유
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된다(8:1). 스데반의 순교와 교회에 대한 박해의
현장에 사울이 있었는데, 이것은 앞으로 그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즉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적대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호의자가
- 4 -
◉ 순모임에 적용하기
1.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 나라의 외부적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고난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다. 고난
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 번 더 나누어보자. 오늘 배운 본문에서 고난-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대하여 나누어보자.
2.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1) 구약의 율법은 그대로 현재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다
시 새롭게 해석되어 적용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한가?(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에 불순종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또한
가르침의 목적과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따르면 제대로 순종하는 것인가?(예수님이 바
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비판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2) 신약성경에 따르면, 성전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교회의 조직, 건물 등을 성전과 동일시하고 있다. 올바른 ‘성전 신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기도
1)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성전을 파괴한 이후 유대교는 율법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될 것인지, 예고하고 있다. 이로써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제1막이 막을 내린다.
- 1 -
7과 (사도행전 8:4-40)
사마리아로 확장된 하나님 나라: 민족적, 인종적,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백성
☞ 성경 독서법: 성경을 백 번만 읽으라~^^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하여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첫 번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행 1:8에서 예수님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셨다. 본문은 예수님의 이 명령이 첫
번째로 이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공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사마리아
로 확장되는 국면이다.
◻또한 본문은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태생적 유
대인, 할례 받은 유대교 개종자(proselyte)로 한정 지었다(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rers]는 유
대교의 회당 예배에 참석은 할 수 있었지만, 유대교가 규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 이런 점
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배척한 이방인과도 같은 사람들이었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유대교의 경
계에 머문 사람이었다. 본문은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즉, 빌립이 사마
리아인과 간다게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빌립이 선포한 예수님에 관한 복음(Gospel)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영적 전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대적하는 모습을 잘 살펴보자.
8:4-25. 빌립이 사마리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표적을 행하다.
→ 민족적, 역사적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백성
8:26-40.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
→ 종교적,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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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1. 8:4절에서 ‘흩어진’이란 표현에 주목하자. 이것은 스데반의 순교에
따른 박해로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졌다는 것(1)을 이어
받는 표현이다. 이 동사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이다. 즉 백성을 흩어
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
을까? (일차적 원인은 스데반의 순교에 따른 박해에 있다)
2.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다(8:4-25).
1)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노예보다 못한 존재
로 취급했다. 즉 그들은 비록 유대인의 유전자를 가지고는 있었을지라도
태생적 유대인이 보기에는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에서 적지 않은 사마리아인들
이 예수님을 믿었다(4:39-42).
따라서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또한 행 1:8에서 예
수님이 사마리아를 언급한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한 사람들
이 미리 예수님을 알고 믿었고(비록 일부일지라도), 빌립이 선포한 복음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 나라의 왕-을 듣고 믿었을 때 성령이 임하
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2)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
대인 그리스도인이 참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그들 역
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첫 번째 사건이다.
이것은 ①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적, 민족적, 인종적, 역사적으로 규정되
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유대교와 혈통적 유대인으
로 제한되지 않는다. ② 하나님의 백성은 지역적 한계를 넘어선다. 예루
살렘에 머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사마리아
지역의 사마리아인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간략한 역사
솔로몬 사후 남유다와 북이
스라엘의 분리 – 사마리아:
북이스라엘의 수도 –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
르에 멸망당함 – 앗수르의
통혼정책으로 혈통적으로
수한 유대인들이 불가능 –
바벨론 고레스의 칙령으로
남유다의 귀환과 이후 사마
리아인들과의 갈등.
3.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가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영적 전투는 5:16,
6:8의 암시, 사도들과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이
미 드러나 있다.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시몬은 사마리아의 마술사로 큰 능력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
은 그의 마술을 ‘큰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정도였는데(10), 그것은 실
제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마리아 사람들을 마
술로 현혹한 것에 불과하다. 시몬은 마술을 통하여 마치 자신을 신적인
시몬(9): ‘Simon Magus’라
고도 불리는데, ‘magus’는
마술사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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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우상화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둠의 영도 큰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유혹하여 어둠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어떤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만 하나
님 나라의 진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능력은 기록된 하나님의 참된 말
씀, 거룩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증거, 말씀을 따라 행하는 참된
기도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판단할 수 있다.
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자 사마리아인
들은 믿고 세례를 받는다(12).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시몬의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10)과 대조를 이룬다.
3) 문제는 시몬 역시 ‘믿고 세례를 받았다’(12). 학자들 간에 시몬의 믿
음에 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시몬이 정말 믿었는가, 아니면 믿지 않았
는가, 구원에 이를 만한 믿음이었는가 등...그런데 단지 12절만으로 시몬
의 믿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후 24절까지 이어지는 시몬의 태도를
포괄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딤전 1:19-20, 히 6:4-6.
4)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세례를 베푸는
것을 보고 그 능력을 돈을 매수하려고 한다(18-19). 여기서 ‘simony’란
단어가 나왔는데, ‘성직 매매’란 뜻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성령 매수’라
는 뜻이 더 타당해보인다. 즉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령을 매수하려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을 상기하
자.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돈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지만, 여기서처럼 인간 탐욕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더욱 큰 문
제는 삶의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시몬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돈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처럼 돈은 인간의 욕망과 결부할 때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이 된다. 이와 유사한 예는 이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
서 배웠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였다(마
6:24).
그러나 베드로는 시몬의 제안을 강력하게 거절한다. 필립(J. B. Philip)이
란 사람은 20절을 “네 돈과 함께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풀어썼다.
21-23절에 시몬에 대한 베드로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비록 24절
에서 시몬이 후회의 말을 하지만, 그의 믿음은 총체적으로 어떻게 평가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딤전 1:19-20. 믿음과 착
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
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
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
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
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
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
라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
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
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
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
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
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
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4. 에디오피아 내시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다(8:26-40).
1) 에디오피아 재정을 담당하는 고위직인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
으로 보아서(27)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rer)인 것으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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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모임에 적용하기
인다. 그러나 그는 내시(환관)이므로 신 23:1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2) 그러나 성령이 빌립을 가사로 내려가는 그 사람으로 인도한다. 마침
내시는 사 53:7-8을 읽고 있었는데, 유명한 ‘고난 받는 종’에 관한 노래
이다(32-33). 빌립은 그 본문이 메시아임을 가리키면서 스데반처럼 구
약개론을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35).
3) 빌립의 세례를 계기로 내시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38). 내시
는 유대교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되었을지라도 하
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는 하
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종교적, 문화
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준다.
5. 빌립과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1) 말씀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다(8:4),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하다(12), 하나님의 말씀을 받다(14), 주의 말씀을 증
언하고 복음을 전하다(25), 복음을 전하다(35).
2)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을 넘어서는 국면에서 사도행전은 ‘복음’이란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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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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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사도행전 8:32-11:18)
첫 번째 이방인 고넬료: 땅 끝으로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두 번째 준비 단계
◉ 본문 개관
◉ 본문 전체 길잡이
◻1:8의 위임령의 결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사마리아, 유대 지역까지 확장
되었다(9:31을 참고하라). 룻다와 욥바는 예루살렘 서쪽 지중해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욥
바는 항구도시였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땅 끝, 이방으로 확장시키기 위하여 준비하는 두 번째
장면이다. 첫 번째 장면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바울의 회심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첫 번째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이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면은 매우 특이하다. 바울과 비교해보자.
바울 – 직접 계시를 통하여
베드로 – 환상(vision)을 통하여
하나님은 왜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을까?
◻베드로의 환상이 가지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이방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앞으로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장면을 목격할 것이다. 그
들을 통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 사회,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담은 것으로 변
하였다.
9:32-43. 유다 지역-룻다, 욥바-으로 확장된 하나님 나라
10:1-48. 하나님 나라가 땅 끝으로 확장되는 첫 번째 모습-첫 번째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들
1-8. 고넬료의 환상
9-23. 베드로의 환상
24-43. 베드로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만유의 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
판장
44-48. 첫 번째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들
11:1-18.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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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적용을 위한 길잡이
1. 유대 지역으로 확장된 하나님 나라(9:32-43) - 평범한 하나님
의 백성들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유대 지역으로 확장된 것은 빌립의 사역으로 사마리아
로 하나님 나라가 전개된 것과 차이가 난다. 바울의 회심 사건에 묻
혀 슬쩍 지나간다(9:31). 그리고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로 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다: 애니아(33)와 다비다(36)의 그리스
도인 공동체.
베드로가 그곳에서 한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지만
(35, 42), 주인공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곳의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
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크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보게
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작은 것도 결코 소홀히 취급되지 않는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다비다이다. 누가는 그녀가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았다고 한다(36). 다비다의 삶 자체가 선행과 구제였다는 말
이다. 그녀에 대한 소개는 여기에만 등장하지만, 아마 뜨개질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으로 과부들을 섬긴 것으로 보인다(39). 41절에
서 ‘성도들과 과부들’이라고 과부들을 성도들과 구별해서 언급한 것으
로 보아 과부들은 아마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다비다의 선행은 대단한 것이다. 그녀는 신자와 불신
자를 가리지 않고 구제를 한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거창하고 대단한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
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상의 소소한 삶에서 이루어지는 선행, 구
제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워진다.
성도(32, 41): 헬
라어로 hagios, 영
어로 the saints.
성도란 단어는
9:13에서 처음 등
장하며 사도행전에
서 총 4회 사용된
다(9:13, 32, 41;
26:10). 9장에 집
중적으로 등장한
다. 하나님의 백성
으로 해석하는 것
이 타당하다.
심히(36): NIV는
always라고 번역
하나, 원어로는 선
행이 ‘가득찼다, 많
았다’는 의미이다.
2. 첫 번째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 고넬료(10:1-48) -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룬 사람들로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방 땅 끝으로 확장시키는지 전
략을 위해 어떤 전술을 펼치시는지 잘 살펴보자(하나님의 두 번째 전
술).[첫 번째 전술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은 사건]
1) 하나님은 환상(vision)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먼저는 고넬료의
환상(3-6), 다음으로는 베드로의 환상이다(10-16). 하나님은 동시에
두 사람을 준비시키신다: 고넬료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준비, 베
드로는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도할 준비. 둘 다 핵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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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하나님 나라가 이방으로 전개
된다는 것이다.
2) 고넬료는 누구였는가? 그는 가이사랴(팔레스타인 북부 항구도시로
군사적, 정치적 주요 거점)에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군대의
중간 간부였다. 로마 군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매우 강력했고 동시
에 매우 잔인했다. 그런 군대의 백부장, 즉 손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
를 묻힌 살인 기계, 더구나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제국의 하수인
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가능했을까? (가까운 예로 2차 대전
당시 나치군대의 그리스도인, 일제 억압 당시 일본군대의 그리스도
인)
하나님은 왜 하필 고넬료와 같은 사람을 첫 번째 이방인 하나님의 백
성으로 삼으셨을까?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인간이 보는 것은 차이가
있는가?(cf. 10:2, 34-35)
나아가 고넬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군복을 벗어야 할까?(cf. 삭
개오의 예, 눅 19:2-10)
3) 베드로의 환상은 본문의 중심이다. 베드로(누가)는 자신(베드로)의
환상을 세 번씩이나 언급한다: 10:10-16; 28; 11:5-10. 베드로의 환
상의 내용은 유대교의 음식법에 대한 것이다. 레위기 11장과 20장을
보면, 유대인은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
식을 구별하여 먹었다. 그런데 환상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세 번씩
이나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강권한다.
일차적으로 부정한 음식은 이방인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을
먹으라는 것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복음을 먹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자. 베드로의 환상과 유대교의 음식법
규정이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비유로만 기능했을까? 나아가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때 음식법과 같은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문
제도 포함하지 않았을까?(실제로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 음식
법 같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의 중요한 테마였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11-14도 참고하라.)
*율법 중에 할례, 음식법,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켜
주는 ‘경계 표지’(boundary marker)였다. 유대인은 이 규례들을 준수
함으로써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였고, 선택 받은 하나
님의 백성이라는 강력한 자부심을 가졌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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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예를 들면, 마카비
서에 나오는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 이야기).
흥미로운 것은 환상 중에 유대교의 음식법을 거부하라는 명령을 내리
는 존재는 다름 아닌 주님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히려 주님의 명령
을 거부하고 음식법을 준수하는 고집을 부린다. 베드로의 행동을 어
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주님의 명령이 우선인가, 주님이 제정하신
음식법 준수가 우선인가?
하나님은 왜 베드로에게 환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셨을까?
4) 베드로의 설교(34-43)에서 예수님이 만유의 주(36, cf. 엡 4:6),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42)으로 묘사된다. 예수님은 참으
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가 되시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오는 세상의 심판자가 되신다.
5) 44-48절의 성령 강림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언급된 성령 세례
와 다른 모습이다. 2장 오순절 성령 강림과 유사하다(47). 오순절 성
령 강림이 예루살렘의 유대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한 것이라면, 고
넬료 집안의 성령 강림은 이방 땅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한 것
이다.
☞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건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
획과 주권으로 이루어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인간-고
넬료와 베드로-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 보이지 않게 이루어 가시는 나라다. 그러면 하
나님의 백성은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와 같은 신실한 백성을 통하여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 나라를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패러다임-가치관, 관습, 전통, 인식 등-을
뒤집어엎어버리는 나라이다.
3. 예루살렘 교회의 할례자들과 베드로(11:1-18) – 반(semi) 패러
다임을 소유한 공동체.
베드로의 고넬료 방문으로 첫 번째 이방인 하나님의 백성의 탄생을
예루살렘 교회는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1). 그러나 그들은 이방
인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 특히 하나
님의 백성의 표지인 할례, 음식법 준수 등과 같은 규례를 준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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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할례자들’(2)이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전체를 가리키
는지, 아니면 율법을 준수를 강하게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을 가리키
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수의 학자들은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일부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경계 표지로서의 율법(cf. 3절)을 지켜
야 한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그러나 15장의 논조는 전자의 주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논리나 신학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고 욥바에서의 환상을 다시 언급한다(5-10). 베드로
의 현명한 대처였다. 베드로의 주장의 요지는 17절이다: “내가 누구
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실제로 베드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였을 것이다. 이 말은
한 때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해 했던 말,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
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를 생각나게 한다(또는 가말리엘이 베드
로를 변호하며 한 말[39]을 베드로가 차용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
서 베드로의 대적자들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서 그의 동료로 잠시 바
뀌었다.
베드로의 항변에 동료들은 순복하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
이 있었다. 즉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cf. 15:1).
☞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을 반쯤 소유한
공동체였다. 실제로 이런 모습은 현대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
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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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용
1. 본문에서 당신은 어떤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는가?
2. 하나님 나라가 패러다임을 전복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나라라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3.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면 우리-당신-의 삶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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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반대
사도행전 11:19-12:25
■ 전체 구조
◎ 11:19-30 _ 안디옥 교회: 하나님 나라가 이방 땅으로 확장되는 사역의 전초 기지(이방인
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계기)
19-21 _ 스데반의 환난 이후 하나님 나라가 베니게(페니키아), 구브로(키푸루스), 안디
옥(안타키아)으로 확장됨. 하나님 나라가 이방 땅으로 본격적으로 확장되는 초
기 단계.
22-26 _ 이방 땅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 기지인 안디옥 교회, 충성된 일꾼 바
나바, 바울의 복귀.
27-30 _ 안디옥 교회와 모(母)교회 예루살렘 교회, 동역과 부조의 관계.
◎ 21:1-25 _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과 하나님의 승리
1-11 _ 사도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3차 투옥, 그리고 탈출.
12-17 _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
18-19 _ 헤롯의 반응.
20-23 _ 헬롯의 죽음.
24 _ 하나님의 승리!
25 _ 바나바와 사울의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복귀.
■ 본문 길라잡이
1.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반대
존 스토트(John Stott)는 사도행전 11:19-12:24을 ‘확장과 반대’라는 제목으로 설명한다.
스토트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본문을 바라보지 않지만(그러나 암시되어 있음), 우리
는 본문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반대’라는 주제로 파악하자.
안디옥 교회 이전까지 하나님 나라는 아직 이방 땅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즉, 이방인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교회를 이루는 사역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8장에서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사역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와 그 집안이 믿은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이방 땅으로 확장되
는 연결점 역할을 하나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그것을 위해 9장에서 주님이 사
울이라는 인물을 준비하시는 사역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웠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
장되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반대 세력들이 등
장했다. 대표적인 반대 세력은 옛 언약을 고수하는 유대인들, 특히 종교 권력자들이었다
(4:1,5,6; 5:17,18; 7:1,54).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대 세력은 외부적인 것만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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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내부적인 요소들도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5:1-11), 과부에 대한 구제 문제에 대
하여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의 대립(6:1), 이방인 고넬료와 베드로
의 사역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비난(11:1-3, 이방인 선교에 대한 문제는 15장에서 본격
적으로 발생한다) 등.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반대 세력이 등장하는데, 유대교의 종교 권력과 달리
공권력(Öffentliche Gewalt, public power)이 등장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다.
본문에서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헤롯 대왕의 손자)1)은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
켰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호감을 얻기 위해서였다(12:3).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의 조취도 그렇게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들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 안팎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지나치게 개인적, 영적(?)으로만 읽어서 성경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잘 보지 못보고
지나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개인적, 영적 의미를 던져주
지만, 그 의미를 넘어서 공동체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던져주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
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I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누구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나
아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2. 이방인(gentile)이 하나님의 백성이 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처음 맺은 언약(시내산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역사적 사
실이지만, 오직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의 빛’으로 삼아(사 42:6; 49:6[행 13:47에서 재인용]) 열방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려는 책임을 맡기셨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들에게 붙
여준 언약의 이름들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출 19:5,6, 특히 ‘제사장 나
라’).2) 그리고 스바냐 2:11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
다.
메시야 사상과 더불어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계획은 이사야서 40-66장에서 언
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구약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계획안에 이방인이 내포되어 있
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됨,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
됨을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롬 3:29; 9:30; 10:12-13).
이처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
이었다. 하나님은 이제 민족적 이스라엘을 넘어서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인이었던
우리-그리고 우리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개시켜 나가신다.
1)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들(Herods): 헤롯 대왕. 헤롯가문의 창시자이자 마태복음 2장의 유아 학살의
장본인. BC 4년에 사망. ‚ 헤롯 안디바.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갈릴리와 베레
아 지역을 다스린 분봉왕. ƒ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사람. „ 헤롯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1세의 아들로서 헤롯가의 마지막 왕. 사도행전 25,
26장에서 바울과 대면했던 사람.
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가 지은 『하나님
의 선교』, 『하나님 백성의 선교』(이상 IVP)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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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인(11:26, Christian, kristianos)됨의 의미에 관하여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kristianos’이다. 헬라어에 어미 ‘-ianos’가 붙으면,
‘추종자’란 뜻을 가진다. 예를 들면, ‘가이사리아노스’(kaisarianos)는 가이사를 추종하는 자
들이고, ‘헤로디아노스’(Hedianos)는 헤롯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
인’이라고 하면,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I 1) 제우스, 아폴로, 포세이돈, 아도니스, 디케 등의 신들이 판을 치는 만신전의
‘Apollonios’, ‘Poseidonios’에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신이라는 것과 예수가 죽음에서 부
활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2) 로마 황제의 추종자들인 가이사리아노스에게 ‘예수가 주시다’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3) 21세기의 아폴로니오스, 가이사리아노스 가운데 크리스티아노스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둘째, 11:19-30에서 그리스도인의 징표는 ‘흩어진 자들’(11:19), ‘제자들’(26)이다. 그리스도
인은 세상 속으로 흩어진 자들이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소꿉장난하는 무리들
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됨을 잘 드러내는 곳은 경건의 모
양을 갖춘 교회 안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드러내는 교회 밖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각
자가 흩어진 곳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제자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3) 본문에서 제자의 징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오래
두는 것(24),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 것(26)이다. 본문에서 바
나바는 제자의 본을 보이고 있다.
4. 안디옥 교회
안디옥 교회는 새로운 교회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모교회로 부를 수는 있지만, 엄격한 의미
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모교회인 것은 아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개척한 곳이
아닐뿐더러 흩어진 자들이 개척(또는 다른 흩어진 자들로 이미 구성되었을 수도 있는)한 곳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바울
역시 그랬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방인 선교라는 위대한 업
적을 이룬 교회였다. 그런 점에서 안디옥 교회는 새로운 교회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안디
옥 교회를 터 잡아서 이방 선교의 사역을 감당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의 구심점이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라고 할 수 있다.
I 안디옥 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3) 제자도에 관하여 데이비드 왓슨(David L. Watson)이 지은 『제자도』(두란노)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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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와 세 종류의 죽음(12장)
우리는 앞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공권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12장은 그에 의하여 베드로가 세 번째 감옥에 갇히는 사건을 길게 기술하고 있다. 본문은
야고보의 순교라는 비극(1,2)과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한 교회(5,12)가
정작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그 사실을 믿지 않는 희극(15)이 교차하고 있다. 하나
님 나라의 일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여기서 우리는 세 종류의 죽음을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죽음: 야고보의 죽음, 사도의 첫 번째 죽음(1-2)
누가는 평신도(?)였던 스데반의 죽음은 매우 길게 서술하는 반면(7장), 사도였던 야고보
의 죽음은 달랑 2절로 소개하는데 그친다. 야고보의 죽음은 헤롯에게는 정치적 욕망의
실현이요, 유대인에게는 종교적 기쁨이었지만(3), 교회에게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영원한 비극이 아니요 순간적인 고통에 불과하다. 누가가 야고보의 죽음을 당
연하다는 듯이 매우 비정하게 보일 정도로 짧게 처리하고 베드로의 투옥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에는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마가복음 10:35-40에 야고보의 순교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죽음의 위기(들): 베드로의 세 번째 투옥(3-19)
사실 베드로도 야고보처럼 죽임을 당할 위기에 있었다(4). 그러나 야고보와는 달리 하나
님은 천사(7)를 동원하여 베드로를 살려내신다. 재미있는 것은 천사가 옆구리를 발로 걷
어찰 정도로 죽음 앞에서도 베드로는 깊이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
는 이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도행전에는 오통 그런 사람들로 붐빈다!
태연한 베드로와는 달리 하나님은 매우 조급하신 것 같다. ‘어차피 죽을 운명! 까짓것
잠이나 실컷 자라!’라는 태도를 가진 베드로와 달리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깊이 잠든
베드로를 깨워 일으키시고,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베드로를 탈출시키신다. 마치 출
애굽한 이스라엘처럼.
3) 하나님 나라 바깥에서의 죽음: 헤롯의 죽음(20-23)
의미 없다!
6. 하나님의 승리
본문에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주제지
만, 그 이면에서 보이지 않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미션을 살펴볼 수
있다. 누가는 그것을 12:24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말한다.
안디옥 교회의 개척과 부흥은 이름 없는 ‘흩어진 자들’과 바나바와 바울에 의하여 이루
어졌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주의 손’(11:21)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 교회의 부흥은 인간의 노
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라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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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바나바, 바울 모두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역사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과 인간의 동역이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 하
나님께 맡기는 것이 참된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안디옥 교회의 개척과 부흥은 스데반의 핍박으로 일어난 환난의 결과였다(11:19). 하나
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이 아무리 죽음과 박해라는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
할지라도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할지라도 하
나님은 승리하신다.
누가는 12:24절과 유사한 말을 6:7과 9:31에서도 언급했다. 이 세 절 앞에는 항상 하나
님 나라와 교회의 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 위기 가운데 역
사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더욱 확장시켜 나가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승리하
시는 나라이다. 비록 우리 눈앞에 암담한 현실이 펼쳐져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승리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자!
■ 본문 해설
11:19-30
19
누가는 8:4절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안디옥 교회 사건이 스데
반의 죽음에 따른 하나님 나라의 전개로 보고 있다.
20
‘흩어진 자들’ 가운데 구브로(키푸루스)와 구레네(키레네)4)에서 온 사람들이 안디옷에서
처음으로 ‘헬라인’에게 예수를 전파하다.
‘예수를 주라고 전파하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 하나님 나라의 일은 꼭 이름을 남겨야 하는
가?
21 ‘주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킨다.
22,
23
예루살렘 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사도적 권위를 가진 곳이었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
를 파송할 수 있었다. 안디옥 교회도 여기에 순종하였다.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한 이유는 그가 구브로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고(4:36),
환대하는 마음이 컸고(37), 회심한 바울을 중개할 정도로 관용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9:27).
24 바나바의 성격과 인격.
25,
26
바울이 안디옥으로 복귀하다.
그 동안 바울의 여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심(AD 33년경) - 3년의 아라비아(나바테 왕국) 지역 활동(AD 33-35[36], 행 9:23, 갈
1:17-18) -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15일 동안 방문(AD 35[6], 행 9:26-30, 갈 1:18) -
길리기아 지역에서 10여 년간 활동 – 기근 문제로 예루살렘 방문(AD 46, 행 11:27-30,
12:25, 갈 2:2) - 1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 방문 (AD 49, 행 15장).5)
27
-
30
안디옥 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의 부조는 초대 교회의 국제적 구제이다.
12:1-25
1
‘그 때에’(Now about that time, KJV, NASB)란 표현이 11:19, 27; 12:1에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변화되는 국면, 교회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는 국면이다.
4 베드로에게 4명의 군인들이 4개조를 편성(총 16명)하여 엄중하게 감시한 이유는 5:18, 19
- 6 -
■ 적용
1. 우리는 세상에 흩어진 예수의 제자들로서 새로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다. 세상 속에
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에 대하여.
2.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최
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궁극적으로 세워 가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확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 기도
4) 지금의 시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곳.
5) 바울이 언제 예루살렘을 1, 2차에 걸쳐 방문했는가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의견의 대립이 있다. 위에
서 든 것은 다수설이다. 그러나 F. F. Bruce라는 위대한 학자는 사도행전 15장의 문제를 바울이 기
근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절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베드로가 풀려난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6절도 참
고하라. 10절의 두 번에 걸친 보초와 마지막 쇠문이라는 삼중 장치는 헤롯이 베드로를 얼마
나 꽁꽁 묶어두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결박들을 풀어헤치셨다.
5
교회의 기도. 기도 없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가 기도하자 주의 사자가 기
동하였다(7).
7
‘주의 사자’는 5:19에서 사도들을 탈옥시킨 그 천사로 보인다. 또한 23절에서 헤롯을 죽음
으로 몰고 간 천사와 동일한 인물로 보인다.
8 베드로의 급박한 탈출 장면은 출애굽기 12장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12 교회의 기도 가운데(5, 12) 베드로의 탈옥(6-11)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13 로데(Rhoda), 장미라는 뜻.
14 얼굴은 장미처럼 아름다웠으나 정신이 없는 로데. 베드로: “헐...(T T)”
15 기도가 이루어졌으나 믿지 못하고 있는 마가의 집의 사람들.
16 답답한 베드로.
17
베드로가 어디로 떠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가 로마로 갔다고 하
나 근거가 없다. 베드로는 이후 15장에서 한 번 등장하고 사도행전에서 사라진다.
25
11:30과 연결된다. 이 때를 AD 46년경으로 본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는 야고보의 순교
와 베드로의 투옥이라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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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과.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
바울의 첫 번째 선교여행 (1)
사도행전 13:1-52
■ 전체 구조
◎ 13:1-3 _ 성령의 지시에 의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를 떠나다.
◎ 4-12 _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키푸로스)에서 선교하다.
4-5. 살라미에서 전도하다.
6-12. 바보에서 전도하다. 바예수가 대적하고, 서기오 바울이 믿다.
◎ 13-52 _ 바울과 바나바가 소아시아(남갈라디아 지역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하다.
13-15 _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의 바울과 바나바
16-41 _ 바울이 회당에서 설교하다.
16-25 _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로
서 구주 메시아 그리스도
26-37 _ 부활하신 예수, 계시의 성취
38-41 _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죄사함과 칭의
42-50 _ 많은 이방인들은 믿으나, 유대인들은 대적하다.
51-52 _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으로 떠나다.
■ 본문 길라잡이
1.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일꾼(롬 16:1; 고전 4:1; 고후 3:6)인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마땅히 힘써서 일해야 한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믿음과 소망
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긴 일을 해나갈 때 먼 훗날에(혹은 갑자기)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하게 회복시킬 것이다. 그 때를 위하여 마치 그 날
이 오늘 우리에게 임한 것처럼 살아가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애쓸지라도 그 나라를 보이
지 않게 최종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나라이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이룰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에도 이스라엘 역사와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하나님은 마치
신실한 당신의 종들이 그 나라를 이룬 것처럼 보이게 하셨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파송을 받는 과정에서 성령이
그들을 따로 세우고(13:2), 보낸 것은(3)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직접 일하시는 모습을
1)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방문한 소아시아의 일부 지역은 당시 남부 갈라디아 지역이었다. 초기 서신
인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방문하고 개척한 교회들에 보낸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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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준다. 성령이 지시하는 ‘일’(2)은 일차적으로는 바울(과 바나바)을 통하여 이방인 선교를
담당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곧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방 땅으로 확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다.
성령의 지시(2)와 성령의 파송(4)은 이후 사도행전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모든 선교 활동
마다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바울 일행이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
장은 모두 성령의 역사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성령의 역사
에 따라 성령 충만하여(9, 52)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했다. 따라서 13:2, 4의 성령의 지
시와 파송은 최초로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파송하는 장면
에서 등장하지만 사도행전에서 향후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를 지시하는 중요한 모티프라고
볼 수 있다.
I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 가신다. 1)
지금 한국 교회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하나님은 ‘신
실한’(faithful)2) 종-교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2) 당신 안에 무너진 하나님 나라를 먼저
회복하라!
2.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교회의 특징: 양육(2절), 선교(3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힘쓰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안디옥 교회는 여기에 대하여 힌트
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양육이다. 양육은 다른 말로 훈련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안디옥 교회는 금식과 기도로 훈련된 교회였다.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금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역사하였다. 대개 우리는 어떤 일
이 꼬였거나 상황이 막막할 때 또는 무슨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또는 회개할 때 금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신자가 늘어나는 소위 ‘부흥’하는 가운데 금식하며 예배
하였다. 아마 그들은 금식하며 이방인 세계에서 교회가 나아갈 바3), 즉 이방인 선교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금식은 개인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현대 교회가 영성훈련
에서 기독교의 오랜 전통인 금식 훈련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육의 또 다른 모습은 11:26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친 모습에서 찾
을 수 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훌륭한 인격을 소유한 바나바와 열정이 넘치고 구약과
유대교 신학에 탁월했던 바울로부터 신자들은 양질의 양육을 받았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측
면은 안디옥 교회의 리더십이 지역, 인종(흑인 시므온), 사회적 지위(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2) 신실함이 완전함, 완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할 것. 그렇다고 우리의 죄성에 안주하라거나
포기하라는 의미도 아님을 염두에 둘 것!
3) 행 11:25에서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온 것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 선교가 어느 정도 예상된 것
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몰랐던 것 같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9;15)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 년 동안 사역한 것도 그런 측면이 작용한 것
일 수 있다. 또는 일 년 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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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엔), 학력(바울)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하나가 된 교회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리더십을 통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두 번째 특징은 선교이다. 일차적으로 선교는 지역 선교를 가
리킨다. 안디옥 교회도 이방 땅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
해져야 할 미전도 지역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임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세 요소(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백성, 땅) 중 하나님의 백성됨
에 관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땅에 관한 요소와 관련해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① 개인적·사회적으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②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이루어가는 것, ③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워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공의를 개인, 사회, 공동체의 삶에서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선교의 또 다른 측면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죽을 때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
한 것만이 아니라4),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완전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현재에서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그 나라를 소망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나아가 마치 그 나라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능력을 주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선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삶이
다. 또한 그 나라를 우리보다 더 탁월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세워서 파송하는 것이다. 안
디옥 교인들은, 2인자나 3인자가 아니라, 교회에서 가장 탁월했던 두 사람인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다.
I 양육과 선교를 교회 가르침의 중요한 두 기둥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회의 이름은?
3. 계시의 유기적 점진성(33, 34, 35, 48절)
계시의 유기적 점진성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행동[행동계시]을 성
경으로 기록한 것[말씀계시] 또는 하나님의 약속이 점진적으로 역사의 각 국면마다 어떻게
성취되었고, 최종적으로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1세기 이스라엘 속에서 이루어진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이
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 오신 일이다. 베드로가 성전에서 한 설교
(3:12-26),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한 설교(7:2-53),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한
설교(13:16-41)들의 공통점은 장구한 구약의 역사와 말씀을 개론적으로 풀이한 것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무엇이며, 약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
게 신실하게, 점진적으로 그것을 성취해 오셨는지, 그리고 그것의 최종적 성취가 무엇인지
를 유대인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단번에 시공을 초월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편에서, 인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심과 신실하심으로 당신의 계획을
4) 이것은 구원의 아주 작은 모습일 뿐이다.
- 4 -
이루어 오셨다.
바울이 13:33에서 인용한 시 2:7(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34절에서 인용한
사 55:3(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35절에서 인용한 시 16:10(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47절에서 인용한 사 49:6(이방의 빛) 등은 하
나님의 행동의 증거들이며 이제 그것들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울의 설교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가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열방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을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죽인 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며 부활
한 예수께서 지금 메시아와 구원자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
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고(38) 의롭다 여기심
을 받을 수 있다(39).
이런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이 ‘계시된’ 말씀5)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마 4:17; 막 1:15; 4:43[4:18-19]; 요 3:3,5; 행
1:3).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말씀의 trinity).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
바울과 바나바의 임무는 이 말씀들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1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5
회(5, 8, 44, 46, 48), ‘구원의 말씀’이 1회(27) 언급되고 있다.
I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
이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달라고 성령께 간구합시다.
5) Karl Barth
하나님의 뜻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시편 이사야
예수 그리스도
(Davidic
Messiah,
창 1:27-28; Messianic King)
3:15;
8:21;
창 12:1-3;
15장;
17장
삼하 7:11-17
삼하 7:14 시 2:7
삼하 7:15, 16 사 55:3
삼하 7:12 시 16:10
역사의 각 국면에서의 성취
역사의
절정(최종적
성취),
미래적, 종말적
성취
- 5 -
4. 하나님 나라의 대적자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퍼지는 것을 훼방하는 방해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12장까
지 오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적대시하는 대적자들을 살펴보았다. 13장도 예외는 아니다. 13
장에는 두 종류의 대적자들이 등장한다.
먼저 구브로 섬의 마술사 바예수다(6).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의 믿음을 방해하자 바울
은 그를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 마귀의 자식, 모든 의의 원수,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
는 자’라고 악평하고 저주한다(10). 바울은 여기서 매우 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엡 6:12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강력한 방해자는 어둠의 세력의 왕초 사탄이다. 유대인들,
권력자들, 공권력 등의 이면에는 이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람이나 권력들과 싸우되 뒤에서 그것들을 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44, 49).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들의 사역을 방해했다(특히 50절에서 종교가 인간의 권력과 결탁할 때 얼마나 비열하고
폭력적인지 보라!). 이후 사도행전에서 유대인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는 주된 세력으로 등
장한다.
I 하나님 나라 안에서 세상의 어두움과 그것을 쥐고 있는 악한 세력을 주목하고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저항합시다.
5. The First Urban Christians
바울의 선교 사역의 타겟은 로마 제국의 도시들이었다. 바울은 각 도시마다 흩어져 살고 있
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들은 그레꼬-로
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던 환경 속에 살고 있었으며, 바울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상의
문화와 저항, 때로는 융합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이러한 것들은 바울의 서신
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시 교회가 농촌 교회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
점에서 도시와 도시의 문화 속에서 교회들이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지는 중요한 문제이
다. 도시의 파급효과, 농촌의 도시화·산업화 현상, 도시 문화 속에서 반응하는 기독교의 가
치, 도시인들을 훈련하여 하나님 나라 세우기 등.
- 6 -
■ 본문 해설
13:1-52.
1
여기서 헤롯은 헤롯 안디바를 가리킨다. ‘젖동생’은 헤롯과 함께 자라면서 같은 유모의 젖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마나엔은 헤롯의 혈육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5
요한은 John Mark로서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의 저자이며 바나바의 사촌이다. 골 4:10은
마가를 바나바의 ‘생질’(누이의 아들, 즉 조카)로 표기하고 있는데, 헬라어 anepsios는 사촌
을 가리킨다. 영어 성경(NIV, NAASB)도 마가를 cousin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6 Bar-Jesus 또는 Bar-Joshua. Bar은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이다.
8 엘루마(Elymas)는 ‘마술사’란 뜻을 가진 아람어식 표현이다. 8절은 동어반복.
11
바예수가 대적하다가 맹인이 된 사건에서 바울은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
다.
12
서기오 바울이 믿게 된 것에는 바울의 이적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주의 가르치심’에 놀랐
다.
13 요한 마가가 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났는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마가가 돌아가
는 것에 반대했으며, 2차 선교여행 때 마가가 동행하는 것에 대하여 바나바와 격렬하게 다
투다가 둘이 헤어졌다는 것이다(15:37-39).
14
-
15
회당 예배 순서: 쉐마 낭독(신 6:4-9; 11:13-21; 민 15:37-21) - 기도 – 율법서(모세오경)
중 지정된 부분 낭독(대체로 율법서는 3년에 1회독) - 율법서와 관련된 선지서 낭독 – 설교
축도. 설교는 회당장이 적당한 사람을 지정했다.
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유대교에 관심이 있어서 예배에 참석은 하나 아직 개종자가
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그러나 때로는 개종자를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17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일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출애굽 → 이스라엘의 구원
19
450년이라는 기간에 대하여 해석이 갈린다. 유력설은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사무엘 시대(사
사시대)까지로 본다. 그러나 다수설은 17-19절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거주 400
년, 광야 생활 40년, 가나안 정착 10년을 합친 기간으로 본다.
22
다윗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했던 왕이요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사
람으로 묘사된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의 관점에서 다윗은, 그 뒤에 일어날 후손을 통
하여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는 메시아적 인물이다.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다는
것(행 13:23; 마 1:1)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3
하나님의 약속은 좀더 구체적으로 삼하 7장의 다윗 언약을 가리킨다. 그러나 더 넓게는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전체 계획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
은 다윗 언약의 성취가 바로 예수라고 한다.
26
-
27
이스라엘의 무지가 눅 24:44과 대조된다.
- 7 -
29
이스라엘의 무지가 오히려 말씀-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역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33 ‘약속’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38
-
39
사도행전에 드물게 등장하는 바울적인 구원론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것을 신학
적으로 정교하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사도행전의 이신칭의 → 10:43; 14:27.
41
합 1:5을 인용한 것이다. 하박국의 원래 표현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
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인데, 바뀐 표현은 다음과 같다.
합 1:5 행 13:41
여러 나라(목적어) 멸시하는 사람들(호격)
놀랄지어다 멸망하라
바벨론을 통한 멸망의 경고 믿지 않음에 대한 책망과 저주
43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들이 바울의 설교에 대다수 설득을 당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는 말을 헬라어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계속하라’는 말이다. ‘계속하
다’(continue)는 헬라어 prosmenein은 11:23의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는 말의 동사
‘머물러 있다’와 같다. 즉 13:43과 11:23은 같은 의미이다. 이 말은, 그들이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그 안에서 신실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
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5
여기의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바울에 대하여 보
이는 적대적인 태도는 3중적이다: 시기가 가득, 반박, 비방.
46
‘영생’은 죽음 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46, 48절에만 등장한다. 바울
이 유대인들이 반대하자 이방인에게로 향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방인 선교가 이제부터 시
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전도를 포기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4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빛’으로 부르셨다. 바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이 비전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48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모두 다 믿더라”를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생을 위해 작
정된 자는 다 믿었다”이다. 여기에는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모두 포함된다. 복음적인
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고 있다(Calvin, Bruce).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셔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들음에도 마음
이 열리지 않아서 믿지 않는 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49 하나님 나라의 성공적인 확장(cf. 12:24)
52
13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성령 충만으로 시작해서(9) 성령 충
만으로 끝난다(52)
- 8 -
■ 적용
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세워 가시는 나라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함께 일
하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 충만으로 가능하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하여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구하자.
2. 전도와 선교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주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
로’ 전하고 있는가?
3. 우리가 전해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를 왕으로 모시면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우리의 부활(영생)을 소망하는 것이다.
■ 기도
- 1 -
12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바울의 첫 번째 선교여행과 안디옥 교회로의 귀환(2)
사도행전 14:1-28
■ 전체 구조: 이고니온(Iconium)1), 루스드라(Lystra)2), 더베(Derbe)3) 선교
◎ 14:1-7 _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선교하다.
◎ 8-20b _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선교하다.
8-13.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치다.이고니온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
와 그의 아들 헤르메스가 현현한 것으로 알고 섬기려 하다.
14-18. 바울이 이고니온 사람들의 제사를 반대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설교하다.
◎ 20c-21a _ 바울과 바나바가 더베에서 선교하다.
◎ 21b-23 _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이 세운 교회를 격려하며 권면하다.
◎ 24-28 _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귀환하다.
■ 본문 길라잡이
1. 최초의 갈라디아 교회들(AD 47-48)
하나님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행을 통하여 남갈라디아 지역의 비시디아 안디옥, 이
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이방인 교회들을 세우셨다. 이 교회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를
통하여 개척된 최초의 이방인 교회들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남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개척
하는 데 걸린 기간은 대략 2년 정도(AD 47-48)로 보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주요한 사건
들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두 사람이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는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귀환하면서 교회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22)
과 장로들을 세운 것(23)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은 교회를 세우고 기초를 다지
는 데 있어서 목회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 1. 2000년 전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한 지역은 2000년 후
터키 땅이 되었고, 이슬람의 세력권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과 역사
(교회사)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나누어보자.
2. 하나님의 교회들이 주님께서 재림할 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1) 현재는 터키의 코니아(Konya).
2)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Konya에서 남동쪽으로 약 130㎞ 떨어진 카라만
(Karaman) 읍내에서 서쪽으로 15㎞ 떨어진 일리스트라(Ilistra) 마을이라고 본다.
3) 오늘날의 터키 Karaman 북동쪽 25㎞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 2 -
적용을 위한 중요한 길라잡이
2. 환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22)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Greek. ἐπιστηρίζοντες τὰς ψυχὰς τῶν μαθητῶν, παρακαλοῦντες ἐμμένειν τῇ πίστει καὶ
ὅτι διὰ πολλῶν θλίψεων δεῖ ἡμᾶς εἰσελθεῖν εἰς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
NIV. 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they said.
ESV. strengthening the souls of the disciples, encouraging them to continue in the faith,
and saying that through many tribulations we must enter the kingdom of God.
*바울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는데, 믿음 안
에 거할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을 겪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1) 마음: 믿음의 초석(礎石)
헬라어 ‘프쉬케’를 개역개정판은 ‘영혼’, ‘마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개역개정판은 ‘마음’
으로 번역하고 있다. 마음은 히브리 사상에서는 심장을 가리키는데, 단순히 감정이나 감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것, 인간이라는 全존재의 중심을 지칭한다. 믿음
은 그 마음에 존재하는데, 마치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기초를 먼저 다져야 하듯이 믿음은
마음이라는 초석 위에 세워진다.
그런데 기초가 부실하면 건축물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듯이 마음이 부실하면 믿음도 흔들리
고 무너질 수 있다. 역으로 마음이 튼튼하면 믿음도 튼튼해진다. 바울은 여기서 새롭게 탄생
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 개역개정 성경에서 마
음이란 단어가 1000회 정도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믿음과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2)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고난
한글 성경은 잘 드러나 있지 않는 중요한 표현이 헬라어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δεῖ’
이다. 영어로 ‘must’에 해당하는데, NIV, ESV, KSV, NASB 등은 표기하고 있다. 이 δεῖ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환난을 겪을 것’이 아니라 ‘환난을 반드시 겪어야만 할 것’이 된다.4)
4) ESV는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반드시 들어간다’로 해석하고 있으나, 다수의 주석가들과 NIV
- 3 -
그래서 δεῖ를 신적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다.5)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당한 고난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연결해서 ‘no cross, no
crown’이라고 말했다.6) 또 다른 학자는 이것을 ‘suffering before glory’라고 표현했다.7)
★ 고난과 관련하여 순원들에게 여태까지 사도행전을 배우면서 등장한 고난을 각자 살펴보
도록 하라.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예를 들면, 눅 9:23-27; 롬 8:17;
빌 1:28-30; 살전 3:3; 살후 1:5; 딤후 3:12 등).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 나라와 연관시키고
있는 구절도 있다(행 14:22; 롬 8:17; 딤후 2:12).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 죽음,
심리적 상처(트라우마), 경제적 궁핍 등 개인적인 고난, ‚ 타인이 고통당함으로써 직접·간
접으로 겪는 고난, ƒ 교회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 겪는 고난(선교, 성경적 가르침을 따르다
가 당하는 어려움 등). 우리들 대부분은 항목에 속하는 고난을 겪는다(그리고 이 범주의
고난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개인적인 고
통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해나간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ƒ의 범주에 속하는 고난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개인
적인 고난은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개인이
경험하는 고난이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성숙시켜 나간다. 다음은 C. S.
루이스(Lewis)가 자기 아내를 암으로 잃은 후 지은 『헤아려 본 슬픔』에 나오는 표현이다.
고양이는 자신을 수술하려는 자에게 으르렁거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물어뜯을 것이다. 진
짜 문제는 고양이의 수술자가 수의사냐, 아니면 생체 해부학자냐 하는 질문이다. 내가 나 자
신의 고통을 생각할 때면 나는 신이 수의사임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고통을 생각할
때면 그렇게 믿기가 훨씬 더 어렵다.8)
★ 순원들과 개인적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것이나, 믿음을 지켰던 경험을 나누어
보라.
루이스는 아내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 다시 자신의 믿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루이스와 같
을 것이다. 우리는 각자 앞에 놓인 고난이라는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그 길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 고난이 우리의 취사선택과 무관한 것이라면, ‚와 ƒ의 고난은 우리의 우
리의 순종이나 의지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
을 것이다. 첫째, 행 14:22과 그밖의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
는 must를 환난에 붙여서 해석하고 있다.
5) 구원을 위해서 고난이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6) F. F. Bruce.
7) Theodor Schneider
8) 『헤아려 본 슬픔』(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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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런 종류의 고난을 의지적으로 선택해서 경험할 것인가 또는 주어진 고난을 피하지 않
고 순종해서 경험할 것인가? 둘째, 일부러 고난의 현장에 뛰어들기를 거부하거나 주어진 고
난을 피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란 사람은 그의 사도행전 주석에서 다음
과 같이 적고 있다. 참고하라.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크리스천들은 왜 그러한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가? 아마도 제자도의 근
본적인 원리를 가르쳤던 사람들이 고난에 대해서 별로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신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품어야 할 때, 그것을 피했다. 설교자들이 고난의 잔을 마시
는 경험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
이 고난을 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요지는 고난의
십자가란 순종을 통해서 취하거나, 또는 우리가 원한다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9)
★ 여기에 대하여 순원들과 나누어 보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난은 의무적인
것인가, 선택적인 것인가?
3.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는 나라(27)
27절에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많은 모든 일’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이루어가는 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가는 동역자들이자 거룩한 도구들이다.
벧전 2:9을 다시 보자. 암기하고, 기억하고, 상기하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 『NIV 적용주석 사도행전』(IVP),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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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과. 예루살렘 회의: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사도행전 15장
■ 전체 구조
■ 본문 길라잡이
2. 안디옥 사건: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
사도행전 15:1의 배경은 갈라디아서 2장이다.
사도행전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
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
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1,2)
갈라디아서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갈 2: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
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
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1, 12)
여기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갈 2:1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던 때는 행 11:27-30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을 돕기 위한 부조금을 가지고 갔던 때라고 한다. 그럴 경우 어떤 사람들이 예
루살렘으로부터 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과 베드로가 그들 때문에 도망간 사
건을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는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급히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갈라디아서에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 이전에 쓰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견해는 갈 2:1에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간 때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은 같다는 것이다(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은 회의의 공식적인 결과를 보고하는 내용
이고, 갈라디아서 2장은 회의의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인 결과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
만약 첫 번째 견해를 따를 경우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행 15:1)은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이들’(갈 2:12)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안디옥으로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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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이 교회의 지시도 없이 함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행 15:24). 아마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였던 야고보의 이름을 팔고 다
녔을 것이다. 설령 첫 번째 주장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
었을 것이다.
3.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1) 사도행전 15장의 논점: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은혜
사도행전 15장은 두 개의 주장이 긴장을 이루면서 대립하고 있다. 첫째는 1절의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5절도 이에 포함)이고, 둘째는 11절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유대교의 신학과 그 안에서 새로이 태동한 기독교의 신학의 대립이
다. 그 결과 유대교의 하나님과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 아들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이 달
라 서로 다른 형태의 종교로 나타났다.1) 나아가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의 신학과 신앙은
그것에 대한 추종자들에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란 중대한 질문을 던지는 결과를 낳았
다. 즉 누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혈통적인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
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그 방식은 유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 없이 예수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하
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2)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
구약성경과 적어도 초대교회 당시 ‘백성’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
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
다(출 19:5,6; 24:1-11). 구약의 초점도, 그들이 성공했던 실패했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
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성령
이 강림하는 사건을 일차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비록 하나님의 백
성이 겪어야 하는 현재의 상황이 모호하고 열악했을지라도,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일단 하나님의 백성을 이런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갈 2:4),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2: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5:12), ‘어떤 사람들’(행
15:1),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15:5)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의무적으로 준수하
는 것이 구원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본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표징(창 17:10)이었으며 그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
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표지(marker)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
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야 했다. 그러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백성
1) 아직까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대교와 분리하면서 독립적으로 바라보지 않다. 그
러나 전혀 다른 형태의 신앙과 종교가 태동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고, 머지않아 그런 결과가 나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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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인식은 매우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백성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는 메시아,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➀ 메시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죽음, 부활, 승천, (재림)으로 새 이스라엘(참 이스라
엘)의 왕,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➁ 성령: 메시아의 영이신 성령의 부으심으로 새 이
스라엘인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했다. ➂ 하나님의 백성: 율법의 완성자(마 5:17), 율법의 마
침(롬 10:4), 그림자인 율법의 실제 형상(히 10:1)인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
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왕이신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여전히 구약의 하나님 백성 사상에 갇혀버렸다(구약의 하나님 나라 사상).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사상을 깨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친히 이 땅에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회복
하시려 했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시길 원하셨다. 한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어느 정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사상은 아직은 자기
민족과 유대교의 관습에 남아 있던 그들에게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변혁을 꽤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당시 유대인의 전통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에서 사람들
이 오자 두려워서 도망가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2) 예루살렘에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 그
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유대교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지키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소극적으로
준수했을 것이다. 그 중에 바리새파 그리스도인과 같은 일부 소수파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율법을 준수했을 것이다(행 15:5).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다음과 상황에도 처해 있
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자유분방하게 교제하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알
려져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의 선교 활동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선한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베드로의 곤경
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바울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에게도 복음에 유익되는 일을 하
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고, 자기가 안디옥에서 행한 일로 인하여 유대에서 복음의 손
상을 가져왔다면, 그는 기꺼이 자기의 행동과 태도를 바꿀 용의가 있었다. 바울과 마찬
가지고 그의 눈에도 본래 주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음식과 같은 윤리와 무관한 영역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3)
4)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 새 이스라엘(new Israel), 참 이스라엘(true Israel)
메시아가 오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준이 달라졌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은혜와 그 은혜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행 13:39) 구원받아
(15:11)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15:14). 여기에 다른 어떤 것도 붙이거나 뺄 수 없다. 오직
예수와 믿음뿐이다.
2)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믿음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위선적인 행동이라고 비난했다(갈 2:13).
3) F. F. Br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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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15:9).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전환(transformation)이요, 이방인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
(advent)이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탄생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왕으로 새우셔서 그 왕께 순종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create)하셨다.
그것을 새 이스라엘(new Israel)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새 이스라엘은 육체에 할례
가 필요했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했던 옛 이스라엘이 아닌, 마음에 할례를 받고(롬 2:29)
성령이 마음에 새겨준 성령의 법(롬 8:2, 렘 31:33)과 사랑의 법(갈 5:14)인 그리스도의 법
(갈 6:2)을 따르는 새로운 형태의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이제 새 이스라엘과 함께(행
14:27; 15:4, 12)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여기에 등장하는 회심한 이방인들,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 예루살렘 공동체원들, 야고보 등은 모두 새 이스라엘이다.
또한 새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true Israel)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
는 백성이다(행 15:14).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 즉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이다(출
19:5). 그러므로 참 하나님의 백성인 참 이스라엘은 그의 주인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백
성이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였다(출 19:5,6). 마찬가지로 하나
님은 이방인을 당신의 백성이요 소유로 삼으셨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예수의
은혜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된 새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전도, 선교하도
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참 이스라엘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
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
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4. 새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 → 하나님 나라의 혁명
■ 적용
1.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자. 정말 하나님의 은혜는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
다를 먹물 삼아도’ 우리가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일상에서 너무 자
주 잊고 살아간다.
2. 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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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드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는 기회주의자였는가? 타협주의자였는가? 아니면...
당신이 베드로의 처지였다면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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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과.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1): 하나님 나라의 연합
사도행전 15:36-16:40
■ 전체 구조
◎ 15:36-41 _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고 바울과 실라(실루아노)가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다.
◎ 6:1-5 _ 바울과 디모데. 디모데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도자로 세워지다.
◎ 6:6-40 _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선교하다.
6-10 _ 마게도냐 환상
11-15 _ 유럽의 첫 번째 하나님이 백성: 루디아
16_18 _ 귀신들린 여종 치유
19-34 _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35-40 _ 감옥에서 나오다
■ 본문 길라잡이
1. 빌립보(Philippi): 유럽 선교의 출발지
빌립보는 바울이 유럽지역에서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한 지역이며, 빌립보 교회는 향후 바울
이 유럽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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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한 원칙과 일관성 그리고 유연성의 문제
15장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 문제가 일단락된 후 할례는 더 이상 바울에게 이방인이 하나
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결정이 있은 후 바로(물론 다
소의 시간이 흘렀겠지만) 누가는 바울이 디모데1)를 제자삼고 유대인의 감정을 고려하여 그
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지시한다.
바울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분명히 바울은 할례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
이 되거나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13:39. cf.14:22). 그런데 왜
바울은 여기에서 디모데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였을까? 바울은 자신의 원칙을 깨고 일관
성 없이 행동한 것일까?
F.F. Bruce는 이것을 ‘높은 차원에서의 일관성과 낮은 차원에서의 일관성’으로 설명한
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전할 때는 높은 차원에서의 일관성이 적용된다. 즉 할례
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믿고 이해
했다면 율법의 행위는 중립적인 의미를 가진다(낮은 차원에서의 일관성). 그럴 경우 할례는
‘하찮은 외과 수술’에 불과하다. 사실 바울에게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전
7:19; 갈 5:6; 6:15).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서 필요하다면 그것
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때로는 할례자로 때로는 무할례자로 행동했다
(고전 9:22). 바울은 자신의 그런 태도와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효
과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바울이 ‘할례는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서도 안 된다!’라는 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고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복음 전파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유연하게
대처하는 바울의 태도를 바라볼 수 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할례가 아니라 사람들이 복
음을 듣고,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
해서 바울은 자신의 신학쯤이야 포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가진 사
상, 이데올로기를 신앙, 하나님 나라, 복음보다 우위에 두는 경향이 매우 많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기 전에 바울과 실라2)가 로마 시민권을 주장
하여 태형을 당하거나 부당한 이유로 수감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
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재판이나 판결 없이는 죄를 정할 수 없었으며 함부
로 매를 맞을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바울 일행은 그들의 시민권을 감옥에서 출
감할 때 주장하는데, 그들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자신들에게 가해진 위법행위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유연하게 사용하
는 바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1)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딤후 1:5)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행 16:1). 그의 외조모는
유대인 로이스(딤후 1:5)였으며 그 어머니와 외조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성경공부를 해왔다(딤후
3:15). 그러나 아버지 때문에 할례는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실라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권자였다. 실라는 히브리식 이름, 실루아노(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벧전 5:12)는 로마식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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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인도하심: 금지와 허용3)
성령은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선교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16:6). 그러자 그들은 비두니
아 지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것도 예수의 영에 의하여 막혔다(7). 예수의 영인 성령이 왜
그들을 막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게도냐인의 환상과 관련하여 최소한의 추측은 할
수 있을 것이다(8). 즉 성령은 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그
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개시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
은 금지와 허용의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은, 그때 바울이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금하셨고(그것은 3차 선교 여행 중에 이루어진다), 유
럽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개해나가시는 이
중적 방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는 가
장 적절하면서도 최소한의 반응은 순종이다. 만약 바울이 성령의 지시에 거부하여 자기 고
집대로 소아시아나 갈라디아 북쪽지역의 비두니아로 갔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아마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사도행전과 전혀 다른 사도행전을 가졌을 수 있다.
☞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의 선택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백성의 일함이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ex. 할례라는 원칙과 원칙의 포
3) A. T. Pierson은 이를 ‘사도와 그의 동료들의 이중적 인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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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성령의 지시와 순종).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중적 인도를 경험한 믿음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메소포타미아 갈대아인의 땅인 우르에서 떠나라는 하나님
의 지시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들어왔다(창 12:1).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심한 기근을
만나자 가서는 안 되는 땅인 애굽으로 건너갔다(창 12:10).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다시 팔
레스타인 땅으로 인도하셨다(창 12:17, 금지).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그를 애굽에
서 미디안 광야로 인도하셨다(출 2:15).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안은 모세가 머물 곳이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를
애굽으로 불러내셨다(출 3:9, 금지). 애굽 역시 모세가 머물 땅이 아니었으므로 모세와 이스
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비록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기는
했지만 광야 역시 모세와 이스라엘이 머물 땅이 아니었다. 사울을 피해 도망자 생활을 했던
다윗이 모압 땅에 머무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고통의 땅인 유다로 보내셨다(삼상
22:5,금지). 다윗이 블레셋에 몸을 피했을 때도 그곳은 그가 머물 곳이 아니었으므로 하나
님은 그를 블레셋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삼상 29:10,11, 금지). 그 후 하나님은 그를 유
다 지파의 땅인 헤브론으로 인도하셨다(삼하 2;1).
예수의 길도 그러했다.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잠간 동안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예수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그 길로 인도하셨
다(마 26:39). 또한 예수님의 광야 시험(마 4:3-11), 십자가상에서의 유혹(마 27:40)도 그
러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으시면서 아들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셨다.
☞ 하나님의 이중적인 인도 방식을 획일적으로 할 수 없지만, 우리 각자의 삶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 각자 나누어보자.
4.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성격: 연합4)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배경, 성격,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연합한 공동체원을 향하여 서로 형제와 자매(16:40)이라고 부른다. 본문에서 등장하
는 5명의 인물을 통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성격을 살펴보자.
1) 첫째 인물은 마가 요한5)이다. 두 번째 선교 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갈 것인지를 두고 ‘심하게’ 다투었다(15:39). 여기서 바울은 원칙적이고 판단하는 자
세를 취하지만, 바나바는 관용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마가가 바나바의 4촌이었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했지만, 여하튼 바나바는 마가를 포기하지 않았고 격려했음을 알 수 있다. 바나
바의 격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마가는 이후 베드로의 동역자로 베드로로부터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나중에 바울은 로
마 감옥에 있을 때 디모데에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
다.6) 처음 실패했다고 해서 계속 실패하라는 법은 없다. 바울과 바나바의 사례를 통해 공동
4) John R. W. Stott.
5) 전통적으로 세 번째 공관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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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갈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Stott는 이 갈등조차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는 것이 공동
체의 다툼을 정당화해 주는 구실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갈등이 없는 공동체는 없을 수 없으
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가이다. 우리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해결을 위하여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인 행동,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욕설 등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7) 2) 두 번째 인물은 디모데이다. 그는 바울
이 1차 선교 여행을 할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복음을 들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요(롬 16:21) 영적 아들이요(고전 4:17; 딤전 1:2,18; 6:20; 딤후 1:2)꾼(살전
3:2)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최후의 순간을 지켜보았을 것이다.8) 디모데는 겸손하고 순종
적이고 헌신적인 인물이기는 했지만, 나이가 어리고 병약하고 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딤전 5:23). 고린도전서가 쓰인 후 바울은 디모데를 내적인 갈등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보냈지만, 디모데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cf. 고전 4;17; 16:10).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느낌을 준다. 여하튼 마가와 디모데를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갈등을 연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인물들은 루디아, 귀신들린 여종, 빌립보 감옥의 간수이다. 이들은 인
종, 사회적 배경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나 이들을 공통적으로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
한 ‘종속’ 또는 ‘얽매임’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3) 루디아9)는 소아시아
서쪽의 두아디라10) 지방 출신으로 빌립보에서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타지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찌된 일인지 유대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16: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전통과 신앙에 얽
매어 있었을 것이다. 4) 귀신들린 여종(16)은 헬라어로 ‘파이돈(Python)11)의 영에 사로잡
힌’ 여종이란 말이다. 본문에서 그녀는 두 가지에게 종속을 당하고 있는데, 첫째는 ‘파이돈’
이라는 악한 영이다. 둘째는 돈을 사랑하는 그녀의 주인들(19)12)이다. 돈을 좋아하여 한 사
람의 자유와 권리를 착취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영적으로 악하다고 본다면, 결국 여종뿐만
아니라 여종의 주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악한 어둠의 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5) 마지
막으로 빌립보의 간수는 로마의 공무원으로서 죄수들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가 죄수들이 탈출한 것으로 착각해서 자결을 하려고 한 것은 로마 제국이 요구하는 의무
와 징벌 때문이었다. 간수는 로마라는 권력의 힘에 종속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즉 그는 국
가 권력에 얽매어 있던 사람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떤 힘이나 사상에 의하여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것에 구속되어 생각하고 살아갔던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자 그들은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의 자유를 경험했다.
6) 바나바 역시 바울과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cf. 고전 9:5).
7) Ajith Fernando.
8) 디모데후서를 바울의 최후의 서신이라고 본다면.
9) 루디아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아디라의 Lydia란 곳은 당시에 염색으로 유명했다고 한
다.
10) Thyatira. 지금의 터키 서쪽 지역.
11) 피톤(또는 파이돈)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홀로 낳은 아들이다. 데우칼리온의 홍수가 지나가고 물이
빠지면서 대지에 남은 썩은 진흙과 수렁 속에서 기어 나왔다고 한다. 가이아는 그를 파르나소스 산기
슭에 자리 잡은 피토(나중의 델포이)에서 살게 하였다. 피톤은 그곳 대지의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사람
들을 괴롭혔고 또 가이아의 신탁을 전해주기도 했다. 피톤이 지배하던 이 신탁소는 그가 아폴론의 화
살을 맞고 죽은 뒤 이곳이 델포이로 바뀌면서 아폴론을 모시는 유명한 델포이의 신탁소가 되었다. 피
톤이 아폴론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연유는 아폴론의 출생과 관계가 있다.[이상 네이버에서]
12) 복수로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이용해 돈을 착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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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 나라의 복음 → 구원의 복음(16:17, 31. cf. 16:15) → 자유의 복음
■ 적용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인간을 얽매고 있는 모든 속박을 끊고 자유를 주신 예수 그
리스도의 은혜를 맛보는 곳입니다. 또한 공동체는 그런 해방과 자유를 누린, 누리고 있는,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연합한 곳입니다. 자유의 복음을 누리는 자들은 연약하고 부족한
지체를 세워주어야 하며, 누리려고 하는 자들은 기도와 말씀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
기를 바랍니다. 물론 전자도 성령 충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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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과.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2)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교회: 저항 공동체
사도행전 17:1-34
■ 전체 구조
◎ 17:1-9 _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
◎ 10-15 _ 바울 일행이 베뢰아에서 전도하다.
◎ 16-34 _ 바울 일행이 아덴에서 전도하다. _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선교하다.
6-10 _ 마게도냐 환상
11-15 _ 유럽의 첫 번째 하나님이 백성: 루디아
16_18 _ 귀신들린 여종 치유
19-34 _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 그리고 간수
35-40 _ 감옥에서 나오다
■ 본문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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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Sanzio Raffaello)의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1509-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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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교회: 저항 공동체(Gegengesellschaft)1)
1. 저항의 속성: 명시와 암시, 능동성(적극성)과 소극성(수동성)
1) 저항에 대한 명시와 암시
6절에서 유대인들과 선동가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라고 비난하
는데, 여기서 ‘천하’는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이어서 7절에서 그들은 바울 일행을 가이사,
즉 로마 황제를 반역하여 예수를 왕2)으로 세우려고 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한 마디로 말하
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체제전복자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 일행은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려 하지 않았고, 예수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거짓 혐의를 씌워서 감옥에 보내어 선
교 활동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무고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야손 일행을 단
지 보석금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로마 제국의 체제를 전복하였다는
혐의가 사실이었다면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보석금을 받고 야손을 풀어주었을 때 바울이 데살
로니가에서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와 그리고 개개의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만물을 다스
리시는 자요, 하나님 백성의 왕이시라는 신앙 고백과 실재(實在) 가운데 세상과 세상의 왕
들, 권력들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해볼 수
있다. 이것을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3)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저항은 명시적 측면과 암시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저항에 대한 암시적
측면을 살펴 볼 것인데, 그전에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는 자신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
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을 왕이라고 지칭했다.4)
빌라도: 네가 유대인이 왕이냐?(요 19:33)
예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37)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
1)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서 게르하르트 로핑크(Gehard Lohfink)는 교회를 이렇게 불렀다.
2) ‘임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바실류스’(basileus)인데 황제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3) protestant에 해당하는 라틴어 protestatio는 ‘항거하다’란 말이다.
4) 누가복음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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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가 예수를 신문하는 자리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9:36).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인 곳에 존재하는 나라라는 말이 아니
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와 권능은 하나님과 예수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세
상의 권력이 아니며 그것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종말
의 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예수가 그 나라를 선포하셨으며(마 4:17; 1:15, cf.눅 4:18,19), 그 나라가 땅에 임하기
를 기도하셨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기도하기를 원하셨다(마 6:10). 하나님 나
라가 이 세상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교회는 아미쉬(Amish) 공동체처럼 세상과 동 떨어진
삶을 살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과 구별하지만,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는
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속에서 펼쳐지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나라라
는 것이다.
저항의 암시성
위에서 간단하게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인 예수는 암시적인 모습과
명시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의 이런
신앙은 우리가 평범한 시민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암시적
으로 평범한 삶을 인도한다. 대체적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일반은혜 가운데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라는 법질서 속에서 전도와 예배에 전념할 수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 것이었지(행 17:3) 로마 제국의
폭력성과 정의롭지 못함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행 6,7). 정리하면, 교회(그리스도인)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예배와 신앙을 유지하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거룩성-을 지
님으로써 세상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저항한다고 볼 수 있다.
저항의 명시성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암시적 저항은 동시에 명시적 저항을 내포하고 있다.
비록 모함이기는 했지만, 데살로니가의 선동자들이 바울 일행을 일컬어 ‘이 사람들’-그리스
도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교회-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두 가지의 구체적인 사실로 규정한
것은 맞는 말이다.
첫째, 이 사람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다(17:6). 교회는 로마 제국, 미국 제
국, 일본 제국, 당대의 정치권력 등과 같은 인간의 권력에 일차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교회가 특정 권력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
문이다(cf. 롬 13:1; 딛 3:1).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범위를 넘어서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때 교회가 과연 순종해야 하는가? 세상의 역사와 맞물린 교회의 역사에서우
리는 저항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이 사람들은 예수를 왕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7). 비록 교회가 가이사, 버락 오바
마, 시진핑, 박근혜를 왕으로 따르고 있지만, 교회의 진정한 왕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
리스도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왕의 가르침과 명령 아래에서 인간 왕의 통치에 순종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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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과 암시적인 긴장을 이루어 살아가면서, 그런 암시가 세상과 명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품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
다. 그것은 예수가 교회의 왕이고 교회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
하여 존 스토트(J. Stott)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혁명가가 아니라 성실하고 준법적인 시민이 되도록 부
름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된
다. 우리는 그분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 어떤 통치자나 이데올로기에도 그분만의 홀
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충성과 전적인 순종을 바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5)
2)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
교회를 향한 암시적이고 명시적인 명령은 구체적으로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난
다.
소극적 저항
저항의 소극적 측면은 교회사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저항의 형태이다. 이것은 외부의 세
력이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고 금지할 때 나타난다. 교회사를 통하여 초대 교회-황제 숭배
사상에 거부한 교회-와 신실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개신교 교회는 신앙의 박해를 견디어
냈다. 이처럼 소극적 저항은 고난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인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적극적 저항
그러나 적극적 저항은 수동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저항한다. 즉 교회는 참고 견
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교회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근거는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고, 예수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예수의 통치 원리와 명령에 위배될 때 교회
는 세상을 향하여 적극적인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시려고도 했지만(요나서),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나훔서). 하나님이 인간의 권력이나 통치에 순종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롬 13: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딛 3:1)
5) 존 스토트, 『사도행전 강해』,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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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말씀, 특히 로마서 13
장은 바울이 모든 인간의 권력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다(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르쳐왔다!). “만일 이 본문을 문맥에서 꺼내어서 절대적인 말로 사용함으로써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요구되든지 관계없이 무비판적으로 순응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본문을 오해한 것이다.6) 로마서 13장은 무조건적인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고이며 그리스도인과 국가와의 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
다.7)
다음은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라는 목사의 글이다. 읽고 판단해보라.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것이 크리스천의 길이라면, 좋은 꾸가
에 대해서나 나쁜 국가에 대해서나 복종과 사랑으로 대하고, 비록 포학한 정권하에 있
더라도 오히려 나를 학대하는 권력자에게 복종하고, 또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이 국권 복종의 밑바탕에 가로놓인 것은 기독교적 사랑
의 정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 교훈이 영원히 폐기할 수 없는 훈계로서 남아 있
을 것임을 알 수 있다.8)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평화의 백성이다. 세상에서 혁명이나 소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한다.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
다. 또 자발적으로 혁명이나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그러나 여
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만일 정권이 몹시 부패하여 명백히 백성의 원수가 된 경우,
혹은 자기 나라가 압제국의 판도에 속하여 포학과 횡포에 시달리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
야 하나? 이를 테면, 크롬웰의 영국 혁명 전쟁, 오렌지 공 윌리엄의 네덜란드 독립 전
쟁, 조지 워싱턴의 미국 독립 전쟁 같은 것은 모든 불의의 발호를 제지하려고 의를 위
해 사랑을 위해 떨쳐 일어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의의 전쟁으로서 칭찬할 것이
며, 또 기독교로서 당연히 가담해야 할 것이 아닌가?9)
이 문제에 유념할 것은, 이런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곧 정치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여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라도, 크리스천은 평화적인 수단에만 호소해야
한다. 먼저 겸손과 온화로써 권력자를 향하여 항의(포로테스트)해야 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항의하며, 그 밖에 평화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모든 수단을 취해야
한다. 백절불굴의 마음으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르나 목적이 이
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력에 호소하여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평화적인 수단에
만 한하고, 그 성공 여부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10)
우리는 권력이 하나님의 법과 예수의 가르침에 위배되었을 때 저항할 수 있을까?
6)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R. Schreiner), 『로마서』, 809.
7) ibid., 810.
8) 우찌무라 간조, 『로마서 연구』, 252.
9) ibid., 253-54.
10) ibid., 254-55. 로마서 13장을 이렇게 해석한 우찌무라 간조는 자기 나라인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
권력에 대하여 “비교적 좋은 정치”라고 했다(ibid.,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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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태도
폭력과 비폭력11)
나치와 독일을 고백 교회, 칼 바르트, 본 회퍼
인간의 비폭력과 하나님의 폭력12)
2. 저항의 대상
1) 국가 권력
2) 우상
우상
고대의 우상은 종교적인 것에 머물렀지만, 현대의 우상은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다. 존 스토트는 많은 우상들이 교묘하게 퍼져있는 것
을 보고,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탐심(엡 5“5), 이데올로기, 명성, 부, 권력, 성, 음
식, 술과 마약, 부모, 배우자, 자녀와 친구, 일, 오락, 텔레비전과 재산, 심지어 교회, 종교,
기독교적 봉사까지도 우상이 되 수 있다.13)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
스도인이든 현대적인 우상은 현대인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집착하거나 과도하게 몰두하는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에서 나타나는 우상의 모습을 비일(G. K. Beale)은 “현대
교회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노예가 되었다”14)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리스도
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에 내적인 평정과 안위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심리상태를 서구 문화는 ‘자아상’이니 자존감‘이라는 심리학이나 상담학적인 용어로 포장하
고 위로하고 있다.15)
이러한 우상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하다. 명령은 명시적이며, 행동은 적극적이다. 우상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우상과 자기 바깥에 있는 우상에 격분
해야 한다(행 17:16).16) 바울을 움직인 마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한다.17) 하나
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자신의 마음이 쏠리는 것에 내적으로 저항해야 하며 또한
그것들에게 사람들이 마음을 쏟는 것에 외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
시며(24), 통치주시며(28), 심판주시기(31) 때문이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누가는 우상숭배에 맞서는 바울의 모습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11) 저항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적인 방법에 관하여 월터 윙크()Walter Wink)가 지은 『예수와 비폭력 저
항』,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을 참고하라.
12) “하나님의 폭력이 하나님께 부당한 것일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폭력이 우리에게 유
익함을 보여 주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미로스라브 볼프[Miroslav Volf], 『배제와 포용』, 482-83.)
13) 존 스토트, 『사도행전 강해』, 445.
14) G. K. 비일,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424.
15) ibid., 427-28.
16) ‘격분하다’에 해당하는 ‘파로크쉬노’(paroxyno)에서 ‘paroxysm’(발작)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17) 존 스토트, 『사도행전 강해』,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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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다소 비약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현
재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리고 종말의 때에 심판을 행할 것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든 것들-사상, 물질, 삶의 태도-이 어쩌면 우상일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우상
신사참배의 역사와 교회 보호의 명목
탐욕
돈, 물질에 따라 인간을 판단
교회(목회, 교회 행정, 교단, 특정 신학 등)
정치, 이데올로기
■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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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과.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3)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북돋움(encouraging)
사도행전 18:1-23
■ 전체 구조
◎ 18:1-4 _ 바울이 혼자 고린도로 가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다.
◎ 5-11 _ 하나님이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다.
◎ 12-17 _ 이기애 총독 갈리오의 판결
◎ 18-23 - 바울 일행이 에베소,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가다.
■ 본문 길라잡이
1. 바울의 초대 교회 선교 패턴과 21세기의 선교
1) 바울 선교의 패턴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선교를 하였다.
회당 → 유대인 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 이방인(행 13:46; 18:6) →
고난 → 교회 →고난
2) 선교의 간략한 역사
달리 말하면,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일정한 패턴을 따라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의 기독교 선교는 이런 패턴을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313년에
콘스탄티니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화하고,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
화한 이후 기독교는 유대교와의 관계 속에서 발전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따라 진행되었
기 때문이다. 즉 로마 제국 아래에서 출생한 사람은 생득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간혹
실제적인 이방인-로마 입장에서는 야만인-을 대상으로 국지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교는 선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근대 국가의 식민지 정책에 발맞추어서 개신교 진영에
서 식민지 주민에 대한 선교에 눈을 떴고, 여기에 카톨릭도 개신교에 뒤질세라 발 빠르게
움직였다(영화 ‘미션’은 카톨릭 예수회의 남미 선교 정책과 관련있다).
20세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선교’(mission)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1) 이러한 선교는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가진 나라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들어보지 못
1)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인 ‘땅’은 신약시대에도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선교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문화적, 전략적 관점에서 개괄적으로 잘 설명해 놓은 책이 예수전도단에
서 출간된 『퍼스펙티브(Perspectives) 1,2』다. 도널드 맥가브란이 지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CLC)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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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전도 국가나 종족에 대한 선교사 파송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신교 선교
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의 활동이 복음 전파에 크게 작용하였다.2) 이러한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21세기의 미전도 종족이나 민족, 국가에도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
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사를 세우고 파송하는 일에도 많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3) 파송하는 선교 vs. 파송 받는 선교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위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선교 방법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은 선교사
들을 파송했던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문제는 미전도 인종이나 국
가에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선교사들의 국가와 교회의 하
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문제였다. 즉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나 교회들이 오히려 선교사를 파송 받아야 하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오랫동안 인도
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레슬리 뉴비긴은 서구 사회의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였다.3)
따라서 21세기의 선교는 양면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첫째, 미전도 지역의 선
교는 지금도 중요하다. 둘째,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의 문제이다.4)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
라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얼마나 세워가고 있는지,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얼마
나 동일화(identification)시키며 살아가고 있는지가 될 것이다. 결국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를 세워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다.5)
바울의 선교 패턴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와 성경의 21세기적 계시의 빛에 비추어서 바울의 선교 패턴의 원
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중요한 책이다.
2) 그런데 우리 개신교인들은 기독교를 개신교(프로테스탄트)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
나 기독교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카톨릭교(천주교)를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조선 땅에 기독교가 제일
먼저 전파된 것은 천주교를 통해서이다(여기에 대하여 김훈이라는 소설가는 『흑산』이라는 책에서 조
선말기의 천주교 수용과 박해를 정약현, 정약전, 정약용 일가를 중심으로 매우 생생하게 그리고 있
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조선인의 기독교 수용은 성경책을 외지에서 들여와서 자체적으로 연구하
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 수용은 외래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수용의 요소도 있다고 볼 수 있다.
3) 뉴비긴의 이러한 인식은 『현대 서구문화와 기독교』(대한기독교서회)(최근에 IVP에서 『헬라인에게는 미
련한 것이요』란 다른 제목[원래는 그 책의 부제]으로 출간되었다.)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에 잘 나타나있다.
4) 원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becoming’과 ‘living’의 문제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
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거나 현대 기독교인의 문제를 보면, 양자를 구별해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5) 변화하는 선교에 대하여 데이비드 J. 보쉬가 지은 『변화하고 있는 선교』(CLC)를 참고하라. 선교가 하
나님의 주된 사역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
님의 선교』와 『하나님 백성의 선교』(이상 IVP)에서 매우 잘 기술하고 있다. 라이트의 이러한 선교관
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성경적, 실천적인 원리와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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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격려하시고 선교적 삶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
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세우시는 나라이다
(14:27; 15:4). 그런데 그 나라는 쉽게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다양한 환상과 능력과 은사와 용기와 힘
을 부어주시면서 그들을 격려하신다.
18:9-10은 그런 하나님의 약속과 격려를 담고 있다. 예수님6)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
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예수께서 그 나라의 왕이요 메시야시며 그 나라의 백성을 부르러
오셨다-을 전하라고 하시며 두 가지를 격려하신다(격려는 바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다).7)
첫째,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0a). 이 약속은 하나님이 일찍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전형적인 격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족
작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하셨고(창 21:22; 26:3; 31:3), 억울하게 옥에 갇힌 요
셉과 함께 하셨고(창 39:23), 모세가 자신 없어 할 때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출
3:21), 실패한 출애굽 1세대를 대신하여 제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면서 격려하셨고(수 1:9), 도망자 신세였던 다윗과 함께
6) 18:9의 ‘주’를 예수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7) cf. David G. Peterson, The Acts of Apostles , (Grand Rapids: Eerdmans, 2009), 515-16.
바울의 선교 패턴 우리의 선교적 삶
회당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유대인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르거나,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지체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
이방인
교회 안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 교회 밖으로 뻗어가는 것,
복음을 열방에 전하는 것.
고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부딪히는 반대와 핍박.
교회
위의 과정을 거쳐 세워지는
하나님의 공동체와 하나님의 나라.
회당
유대인
이방인
고난
교회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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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고(시 23:4), 이세벨의 위협에 두려워서 도망친 엘리야를 로뎀 나무 아래에서 먹이고
힘을 주셨고(왕상 19:1-8), 불순종하던 이스라엘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셨고(사
41:10), 소명 앞에 두려워 떨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렘 1:8). 무
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세상 끝 날까지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는 사실이 중요하다(마 28:20).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당신의 백
성들에게 함께 한다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이
루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에 가능하다.
둘째,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 성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격려하셨다.8) 즉 하나님
이 예정하신 백성들이 많으므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이 격려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거할 수 있었다(18:11). 이전까지 바울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어
느 정도에 이르고, 그에 따라 고난이 뒤따를 경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른 지역으
로 이동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기간은 에베소(2년, 19:10) 다음으로
길었다.
2.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선교적 삶은 공동체적 삶(Koininia)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선교적 삶은 홀로 이루어가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코이노니아로
이루어가는 삶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인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그 나라를 이루어가
기 때문에 삼위일체적 공동체인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도 함께 그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
다.
본문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살며, 함께 일했다(18:3).9) 바울은 더 이
상 아덴에서와 같은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실라와 디모데가 그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18:5).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삶, 선교적 삶은 형제자매와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다.
17:3에 의하면 공동체적 삶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함께 사는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은 실
제적으로 같이 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공동체적 삶을 같이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많
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같이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은 육신에 생명을 유지해주는 수단이면
서 같이 밥을 먹는 행위를 통하여 공동체에 건강한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둘
째,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홀로 할 수 없다. 그럴 경우 그 나라는 자
기의 나라가 될 위험이 크다. 또한 함께 함으로써 그 나라를 더 강하게 이루어갈 수 있다.
현대의 지나친 사생활 우선주의, 개인주의가 교회에도 침투하여 공동체성보다 개인성을
강조하는 풍토는 사탄의 전략이라는 것을 깨닫자. 사탄은 단단하게 뭉쳐있는 공동체는 겁내
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개인은 겁내지 않는다.
■ 적용
8) 마치 하나님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던 선지자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처
럼(왕상 19:18).
9) 헬라어는 ‘함께’라는 단어가 없고, 주로 영어 성경은 ‘with them’이라고 해석하지만, 이 경우 오히려
한글 번역이 더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의 공동체 사상을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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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과.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도시(polis)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사도행전 18:23-20:12
■ 전체 구조
◎ 18:23 _ 바울 일행이 3차 선교 여행을 출발하여 1차 선교 여행 중에 개척했던 교회를 격
려하다.
◎ 24-28 _ 아볼로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 19:1-7 _ 에베소에서의 성령 강림
◎ 8-20 _ 에베소에서의 영적 대각성
◎ 21-41 _ 에베소에서의 소동
◎ 20:1-6 _ 바울 일행이 에베소를 떠나 데살로니가 지역을 거쳐 드로아에 이르다.
◎ 7-12 _ 드로아의 유두고
■ 본문 길라잡이
1.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과 형제자매도(兄弟姉妹道)(동역자성[同役者性]): 바울은 심었고 아
볼로는 물 주었다(고전 3:6): 전적 신뢰
예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으나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아볼로가 바울의 충성스러운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예수에 대한 온전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을 때
(18:26), 그는 바울이 1년 6개월을 양육했던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설 수 있었다(행
19:1). 그런 아볼로를 바울은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다”(고전 3:6)고 할 정도로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은 형제자매에 대한 전적인 신뢰(사랑)로써 이루어진다. 형제자
매를 끝까지 믿어주는 것, 사랑하는 것, 배신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신뢰함으로써 공
동체는 탄생한다. 바울은 아볼로를 믿었고(고전 3: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신뢰했다(롬
16:3). 그리고 아볼로와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역시 바울을 사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서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인 교회의 동역자가 될 수 있었다(고전 3:9).
2. 도시와 교회(하나님 나라)
현대 사회에서 도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요람이자 중심지이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고대 도시들(polis)은 지금의 도시(mega-police)들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많은 점에서 유
사하다.
3차에 이르는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은 소아시아와 유럽 지역의 도시들을 중심으
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정말 바울은 고대의 한적한 촌구석에서 한 번도 복음을 전파하지 않
았다!). 더구나 2차 선교 여행의 주요 거점인 에덴과 고린도, 그리고 2차 선교 여행 기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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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여년을 머문 에베소는 다시 고대 세계의 도시들 중 거대 도시에 속한 것들이었다. 바울이
고대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다(우리는
이것을 바울의 의도라고 보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전략적인 중심 도시에서 다음 도시로 목적을 갖고 이동한 것은 바울의 의도적인
정책이었던 듯이 보인다. 그를 도시들로 이끈 것은 아마도 그 도시들에 유대 회당이 있
고, 더 많은 인구와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1)
비록 도시의 문화가 퇴폐적이고, 도시인의 삶이 팍팍할지라도, 바울이 살던 시대나 지금
이나 도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중요한 거점이다. 하나님이 도시 안에서 하나님 나
라의 공동체인 교회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2) 도시는 예수 그리스
도의 보혈로 구속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한다.3) 교회는 도시의 외곽이나
근교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황폐한 곳,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에 세워져야
한다. 또한 전략적인 지역에 세워져야 한다. Stot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세기의 중대한 새로운 사실인 이 도시화 과정은 기독교 교회에 커다란 도전을 가한다.
한편으로 그리스도인 도시 계획자와 건축가, 지발 자치제 정치가, 도시 전문가, 개발자,
지역 사회의 사회사업가 등 도시 안에서 정의와 평화, 자유와 아름다움을 위해 일할 사
람들이 긴급히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도시 거주자들을 그리스도께 돌
아오게 하기 위해 도시 안으로 이사해서 거기에서 사는 것으로 인한 고통과 압박들을 체
험할 필요가 있다. 통근 기독교(쾌적한 교외에 살면서 도시 교회로 통근하는)는 성육신적
참여를 대신하지 못한다.4)
2차 선교 여행과 3차 선교 여행에서 바울의 선교 전략은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무는 것이
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행 18:11), 에베소에서 적어도 2년 반(19:9, 10)을 살
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쳤다. 바울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오래 머문 것은 그곳이 유
럽과 소아시아 지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효과적인 복음의 파급력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에베소를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인 일로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말씀을 들었다(19:10). 더구나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소위 ‘에
베소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다(19:18-19). 누가는 에베소에서 영적 부흥 운동을 “주
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5)고 요약한다(19:20).
3. 도시의 우상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투
1) John Stott, 『사도행전 강해』, 448.
2) Harvie M. Conn, Manuel Ortiz, 『도시목회와 선교』, 441.
3) 여기에 대하여 Timothy Keller의 『팀 켈러의 센터 처치』, 188-513을 참고하라.
4) John Stott, 『사도행전 강해』, 448.
5) 헬라어로는 ‘주의 힘(능력)(kratos)에 의하여 말씀이 확장되고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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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tt는 민주주의의 요람인 아덴을 인간 사상의 중심지, 고린도를 상업의 중심지, 에베소를
종교의 중심지로 보았다.6) 그런데 이 고대 도시들의 공통점은 우상에 대한 예배와 우상신
학(idology)7)이 가득찬 도시였다. 에덴은 최고신 제우스와 다른 하급 신들도 섬기던 만신전
의 도시였고, 고린도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던 도시였고, 에베소는 제우스의 딸이
자 아폴로의 쌍둥이였던 여신 아데미8)를 섬기던 도시였다.
아덴, 고린도, 에베소가 가진 공통적인 특징인 우상숭배는 각각의 연결들-사상과 우상,
상업과 우상, 종교와 우상-이 결국은 그 자체로 우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사상, 경제, 종교가 우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 어떤 특정한 사상-민주주
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이나 심리학적 사고 등-에 사로잡히거나 편향된 사고를
가질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물질과 부가 인간의 삶을 좌우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종
교나 유사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지배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실제로 이런 것들은 현대인
이 가진 우상의 실체들이며, 기독교인들조차 여기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19:8)가 도시에 전파될 때 악한 영은 떠나고(19:11, 12), 우상은 파
괴된다(19:19). 하나님 나라와 어둠의 영과 우상은 양립할 수 없다.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
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한다(20:23-41). 하나님 나라는 심지어 믿는 사람조차도 새롭게 변
화시킨다!(19:18)
에베소의 우상신학
에베소인들은 아데미를 ‘크다’고 네 번이나 불렀다(20: 27, 28, 34, 35). 여기서 ‘크다’는 헬
라어로 ‘megas’인데, 여기서 ‘mega’(great 또는 greater)라는 단어가 나왔다. 에베소인들이
아데미를 그렇게 부른 것에는, 그것이 하나님이나 예수보다(19:11, 13)보다 크다는 암시가
들어가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손으로 만든 우상은 신이 아니라고 했을 때(19:26)9) 바울
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에베소인들은 바울의 신학
(theology)을 자신들의 우상신학(idology)으로 이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학식이 풍부한 아덴인과 달리 에베소인들은 바울에 대적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가 에베소의 신인 아데미를 모욕했다고. 그런데 이들의 폭동의 이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속에 그들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울 때문에 그들의 생업이 위기
를 맞게 되었기 때문에 아데미를 핑계로 데모를 일으켰던 것이다(19:25, 27). 결국 에베소
인들의 우상은 아데미로 대표되는 ‘풍족하게(19:25) 먹고 사는 것’이었다. 즉 에베소의 우상
신학은 ‘돈’이었다.10) 에베소인들은 돈과 물질을 최고의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현대 도시인
들의 조상이요 표상이었다.
데메드리오라는 에베소 아데미신상 제조업회 회장(또는 노조위원장)이 자기와 비슷한 탐
욕을 가진 사람들을 선동했지만, 고린도의 아가야 총독처럼 지혜로운 에베소의 서기장의 조
정으로 바울 일행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19:35-41). 이것은 고린도에서 바울을 격려
6) John Stott, 『사도행전 강해』, 449-50.
7) 강도사가 만든 용어.
8) Atremis. 영어로 Diana.
9) cf. 행 18:24, 29.
10) 최근 이와 유사한 모습은, 최순실과 최태민이라는 사람과 그 일당이 대통령을 정신적으로 홀린 사이
비 종교의 교주와 딸로 행세했지만, 그들은 돈과 권력을 탐하던 자들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은 ‘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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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하나님의 말씀(18:10)이 에베소에서도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상숭배와 죄
Tim Keller는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
지라도 세우는 것”11)이라고 우상과 관련해서 정의했다. 알든 모르든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높이 두려는 것,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우상이다.
여기에 대하여 십계명의 제1, 2계명은 경고하고 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4)
그리스도인도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 있
는데, 잘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주의 말씀을 듣고 믿은 에베소의 신자들은 악귀 소동이
발생하자 두려워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렸다’(19:18).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는가? 그들은
예수를 믿는 후에도 마술이나 주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마술과 주술을 깨고 승리한다(19:19, 20).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투: 하나님의 백성 vs. 악(惡)
고대의 우상과 우상숭배, 그것의 파생품들인 다양한 형태의 현대적 우상들과 숭배적 삶들의
이면에 무엇인가 존재할 수 있을까?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가르쳤을 때(19:10) 그
속에 그가 나중에 에베소인들에게 보낼 에베소서의 일부 내용도 들어있었을까? 아무튼 영적
전투를 언급하고 있는 에베소서 6:10-18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에베소의
영적인 상황과 무척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삶의 이면에는 그것들을 조종하고 있는 실체가 있다. 이것을 실
체적인 면에서 ‘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어떤 힘이나 존재적인 측면에서 ‘사탄’이라
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과 예수에게로 돌이키는 삶은 악과 사
탄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영적 전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이다.12)
바울에게 영적 전투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은 다름 아닌 아덴, 고린도, 에베소였
다. 바울은 에덴의 철학자들 앞에서 허공에 대고 연설하는 기분으로 하나님을 전파했을 것
이다. 타락의 도시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힘주심으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에베소
에서는 우상숭배사상과 혼합된 에베소인들의 탐욕에 맞서야 했다. 현대의 도시도 마찬가지
이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서울은 온갖 정치적 모략과 사기가 가득하다. 세계 정치의 중
심지 워싱턴은 성차별, 인종차별의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의 온상지가 되었다. 따라서 도
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사탄과 악과의 영적 싸움이다.13)
11) Timothy Keller, 『팀 켈러의 센터 처치』, 271.
12) 과거에는 영적 전투를 개인의 영성의 문제, 자아의 어두운 면과의 싸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실제적
인 문제와는 관계없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문제로만 보았다. 그러나 영적 싸움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
동체적이고 집단적인 싸움이며 총체적인 싸움이다.
13) cf. Harvie M. Conn, Manuel Ortiz, 『도시목회와 선교』, 4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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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영적 전투를 수행할 것인가? 먼저 사탄의 어두운 실체를 잘 파악해야 한
다. 바울은 에베소서 6:12에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마치 에베소인들이 섬
기던 아데미를 염두에 두듯이).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악하고
어두운 존재들이다. 이들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요 1:5)과 그를 증거하
는 말씀이다. 에베소의 마술과 우상이 파괴된 것은 바울이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을 사람들
이 들었을 때이다(19:9, 10).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의 힘에 의지할 때까지는 훈련과
시간이 필요하다.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을 가르친 결과 영적 부흥과 저항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에도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는 기도이다. 바울이 말씀을 가르쳤을 때 기도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
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의 출발점이지만, 특히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에
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라고 기도하라
고 했다. 에베소서 6장의 영적 전투의 말씀은 그 자체로 말씀의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할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1) 죄와 악의 실체를 밝혀주시옵소서, 2) 그것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주시옵소서, 3)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시옵
소서.
셋째,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이 필요하다. ‘spiritual warfare’는 ‘Spiritual warfare’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적 전투는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능력과 도움이 필
요하다. 성령의 도우심은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사실 기도와 성령의 역
사는 구분되지 않는다(엡 6:18). 성령은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기도는 성령 안에서 해
야 한다.
넷째, 영적 무장이 필요하다. 먼저 방어 무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갑옷,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엡 6:14-17). 다음으로 공격 무기는 성
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다(6:17). 자세히 살펴보면, 방어 도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
음의 내용,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이다. 결국 영적 전투의 방어나 공격 무기
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 주관자, 심판자라는 말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속죄하셨다는과 그 결과 인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씀, 예수께서 부활하심으
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되셔서 지금 당신의 백성들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말씀, 그리고 그
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사탄의 궁극적으로 멸하시고, 모든 것들을 회복하실 것
이라는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악과의 영적 전투에 관하여 추천하는 기본 도서들
월터 윙크(Walter Wink), Naming the Powers: The Language of Power in the New
Testament.
------------------,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이상 월터 윙크이 3부작)
톰 라이트(N. T. Wright),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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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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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과. 바울의 밀레도 연설
나를 따르라(Follow me):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리더십
사도행전 20:13-38
■ 본문 길라잡이
1. 본문의 구조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행한 연설은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비기독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다. 본문에서 누가는 바울의 입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
의 지도자들인 장로들(17)에게 자신을 본받아 교회를 잘 섬기기를 부탁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바울 자신이 (에베소의) 하나님의 백성-성도-
에게 어떻게 행하였는가’이고, 둘째는 ‘그 백성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이다. 따라
서 본문은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목회자, 평신도 항존직, 다양한 공동체의 리
더들 등-을 대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 살기를 바
라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리더십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본문을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따라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바울의 리더십과 모범 (18-21)
에베소 교회 리더들의 제자도 (28-32)
바울의 리더십과 모범 (33-35)
2. 나를 본받으라 / 나를 따르라!
1) 나를 따르라: 리더십(leadership) (18-21)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예수의 삶을 따라간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 스승들의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따름으로써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리더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라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
어야 한다. 리더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
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였는지’(18), 어떤 ‘모본을 보여주었는지’(35)를
밝히면서 자기를 따를 것은 암시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고전 4:16; 11:1;
빌 3:17).1)
‘본받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μιμητής(mimetes)인데, 여기서 imitate(모방하다, 본뜨
다), imitator(모방자)란 말이 나왔다. 즉 ‘나를 본받으라’라고 하는 것은 ‘나를 모방하라’는
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4: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
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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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다.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 번째 유럽지역의 교회인 에베소 교인들에
게, 그리고 영적으로 혼란한 도시에 살고 있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님
께 순종하면서 사람들을 섬겼던 삶을 모방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에는 바울의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도 함께 포함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의 총체적인 삶을 따르
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2) 무엇을 따를 것인가?: 리더십의 모범 (22-27)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울의 영적인 삶, 영성에 있다. 하나님 나라
의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좇을 수 있는 거룩한 모범을 가지고 있어
야 한다. 달리 말하면, 공동체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은 영성이다. 그런데 사
람들은 공동체를 행정적, 경영적으로 잘 이끄는 것이 리더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 사회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로서 교회의 리더도 어느 정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러
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리더십은 그런 것이 아니다.
19-21에서 바울은 자신의 리더십, 모범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주를 섬긴
것’이다(19). ‘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태도를 가리킨
다. 따라서 바울이 주를 섬겼다는 말은 종으로써 왕 예수님을 철저하게 따랐다는 말이다(사
실 이것은 리더십의 최우선적인 요건이다. 장을 달리하여 설명할 것이다). 둘째는 사람들에
게 ‘유익한 것’을 가르친 것이다(20). 하나님 나라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다(21). 따라서
바울의 리더십의 모범은 섬김, 가르침, 증언으로 요약할 수 있고, 각각 그 대상은 예수님,
하나님 나라, 말씀이 된다.
바울은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24), ‘하나님 나
라를 전파하는 것’(25),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27)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모범이 바로 이 모든 것들을 증언, 전파, 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 철
저하게 순종했다는 것(22,23), 자기의 생명조차도 내놓을 정도였다는 것( 24; 21:13)에 있
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이 주로 믿음에 관한 것이라면, 바울은 연설을 마치는 33-35절에서 주로 공동체 내
부적인 삶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바울은 공짜로 먹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꾼이 그 삯을 받
는 것이 마땅하다(눅 10:7)는 예수님의 말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33,34). 둘째, 바울은 공동체의 약한 자들을 돕고 환대를 베풀었다(35).
3) 어떻게 따를 것인가?: 제자도(discipleship) (28-32)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십은 결국 제자도와 연결된다. 제자는 스승이나 선배와 같은 리더를
통하여 세워진다. 그리고 그 제자는 언젠가는 다른 제자를 낳는 리더가 된다. 리더십과 제
자도는 이처럼 교차적으로 상호 연결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공동체의 모델이다.
바울은 자신의 모범을 따라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감독자(28)2)라
2) ‘감독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episkopoi 인데, bishop(주교)라는 말이 나왔다. 17절의 ‘장로’에 해당
하는 prebuteroi 라는 말에서 presbyter(장로)라는 말이 나왔다.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오늘날 ‘목사’(pastor)에 해당하는 poimaino (목자)는 26절 ‘(양떼를) 치라(보살피라)’(poimaineo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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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리더로서 교회를 잘 세워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리더로 탈바꿈을 시도하는, 아직은 제
자들인 에베소의 감독자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겸손과 눈물로 인내했던 것(19)과 3년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권면했던 것(31)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에서 제자도의 태도는 인내와 눈물이다.
4) 무엇을 위한 리더십과 제자도인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28)
우리의 리더십과 제자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팎에서 세워나가는 데 있다. 그런
데 그 나라가 교회 안에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밖에서
그 나라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든
든하게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리더십과 제자독의 목적은 우선적으로 교회를 세우
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리더가 된 제자들을 하나님이 감독자로 세우신 목적은 ‘교
회’(ecclesia)를 보살피는 데 있다고 말한다. 28절의 헬라어를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성
령이...여러분을 하나님의 교회를 치게3) 하기 위하여 감독자로 삼았다. 하나님은 그 교회를
자기의 피로 사셨다.”이다.4) 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
들을 당신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주셨다(참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다!). 바
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산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공동체인 교
회를 잘 돌보라고 지금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하나님 나라’
1:3, 6; 8:12; 14:22; 19:8; 20:25; 28:23, 31.
5) 누구를 따를 것인가?: 예수, 리더십과 제자도의 궁극적 모범
리더십과 제자도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다(롬 15:5).5) 예수님을 따름과 하나님
을 따름은 다르지 않다(엡 5:1). 예수님을 따름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름이다(마 8:22; 9:9; 막 2:14; 눅 5:27; 요 1:43).
신약의 역사에서 바울을 포함한 최초의 제자들인 이들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최초
의 리더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조차도 먼저 리더인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
들이었다. 즉 최초의 리더들은 동시에 최초의 제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을 통하여 교회의 리
더십과 제자도가 역사적,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궁극적
으로 예수님의 제자였다.
말에서 나왔다. 3세기가 지나면서 이런 용어들은 공교회의 구조에서 전문적인 사역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아직 바울 당시에는 그렇게 세분화되어 있지 않았다. 모두 가정교회의 리더를 가
리키는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였다.
3) 양떼를 치다.
4) 본문에서 ‘양 떼’, ‘교회’는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에베소 교회의 가정 교회
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더 넓게는 바울의 선교를 통하여 채척된 전체 가정교회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도 포함된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교회’란 단어는 지금의 교회와 같은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소규모의 가정교회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5) 본문에서 ‘주를 섬기는 것’(19)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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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삶-공생애와 가르침-으로의 초대이다(마 19:21; 막 10:21; 눅
9:59; 18:22; 요 21:19, 22). 리더는 예수님의 삶을 몸에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 제자는 리
더의 그런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자가 리더가 되었을 때 그
는 예수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예수님의 삶을 좇아갈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
게 일러주는 말씀의 내용들이다.
■ 적용
1. 나는 교회에서나 밖에서 제자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2. “제자 없이 리더 없다”는 말에 동의하는가?
3. 나는 청년 공동체의 리더로서 리더십을 함양하고 있는가?
4. 나는 공동체의 리더로서 설 의향이 있는가? (리더십을 함양하고, 제자를 훈련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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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다
예수의 길: 바울의 길: 우리의 길
사도행전 21:1-36
■ 본문의 구조
1-6절: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정
7-16: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
17-26: 바울의 예루살렘 도착
27-36: 바울의 체포
37-40: 바울과 천부장의 대화
*유의할 점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8:1-3, 9:1-31에서 등장하고, 본격적으로 11:19-30에서 안디옥 교회
의 사역자로 등장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만이 부각되는 것은 그가 선교 여행을 시작하는
13장에서부터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전체 28장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60%정도인 17여개의
장(章)이다. 그런데 17여개의 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된 이후 로마로 압송되는 과
정까지의 21장부터 28장까지 8개 장이다. 즉 바울 이야기에서 바울의 고난이야기가 대략
반 정도나 된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후반부인 바울의 고난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가가) 알리고 있다.
■ 본문 길라잡이
1.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까?
-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당시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19:21)(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성령 안에서’1)란 말이 들어가 있다).
- 만약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바울 선교의 최종 목적지를 로마로 보았다면(19:21; 23:11),
왜 바울은 굳이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려고 했을까?
- 바울은 아가야와 마게도냐 교회들이 준비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했을까?(롬 15:25-27; 고전 16:1-3)
1) ‘성령 안에서’란 말이 ‘in the Spirit’을 가리키는지 사람의 마음(spirit)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는 않
다. 설령 바울이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했다하더라도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점을 감
안할 때 결국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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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행전 21:4(성령의 감동2)과 제자들의 만류), 21:11-12(성령의 말씀과 아가보의 만류),
그리고 21:13(바울의 결단)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보는가?
3.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 길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 길이 비슷해 보이는
가?
- 누가가 바울의 고난 이야기를 그의 선교 이야기만큼의 분량으로 적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
까?
4. 예수께서 걸어간 길을 바울도 역시 걸어갔다면,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어떤 길일까?
2) 원문은 ‘성령을 통하여’(through the Spiri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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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과. 바울의 로마 여행
아직도 가야할 길(the way less travelled)
사도행전 27-28장
■ 본문의 구조
27:1-28:15_가이샤라에서 로마로의 항해
28:16-31_로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
*바울의 후기 연대
52-53년경 _ 에베소 사역
.................. _ 고린도서, 로마서 저술
57년 _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57-59년 _ 가이샤라 감옥
59년 9월-60년 2월 _ 로마로의 항해와 도착
60-62년 _ (1차) 로마 가택연금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64년 7월 _ 로마 대화재
64-65년 _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
*바울이 언제 로마에서 순교했는지에 관하여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크게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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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견해가 있다.
첫째,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고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했을 당시인 64년경에 순교했다는
설. 바울은 1차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후 잠시 자유의 시간을 가졌고, 그 때 목회서신(디도
서, 디모데전후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둘째,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후 바울이 스페인으로 선
교여행을 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cf. 롬 15:23, 28). 그리고 65-68년경에 2차 가택연금
을 당하고 67(8)년경에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 본문 길라잡이
1. 왜 누가는 바울이 로마로 항해하는 이야기를 길고 상세하게 기술했을까? 오히려 그가 로
마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자세히 다루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2.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가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살
펴보았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1:3). 제자들
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기대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나라
가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1:6-8).
하나님의 나라는 사도행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사도들과 제자들이 선포
하는 복음의 내용이었다. 예루살렘 밖에서 활동한 최초의 전도자 빌립은 사마리아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8:12). 1차 선교 여행지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의지하고 담대히 일어섰다(14:22). 그가 가장 오랫
동안 머물렀던 에베소에서 전파했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다(19:9). 그가 선교 여행을 마무
리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나라를 다시 상기시켰다
(20:25). 그리고 로마에서 그 나라를 계속 전파했다(28:23, 31).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고(1:3), 사도 바울이 전파했던(28:31)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
행전에서 봉투 구조를 이루고 있는 형태를 inclusio(수미상[쌍]관)라고 배웠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고, 그 나라가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주제이며, 누가는 그 나라가 외연적
으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가를 역사적 사실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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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23,31).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의 관계는 무엇일까? 예수 없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어떤 위험이
따를까?
3. 누가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절인 28:31의 동사 ‘전파하며’, ‘가르치며’를 헬라어 시제로 현
재분사(present participle)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분사들이 걸리는 동사 ‘영접하다’(30)
를 미완료(imperfect)1)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제들이 21세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4. 디모데후서가 바울의 마지막 편지라 생각하고 딤후 4:6-8을 읽어보자. 여러분에게 어떤
울림(메시지)을 던지고 있는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
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1) 헬라어 미완료 시제는 과거의 행동이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