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6장 여리고 전투
여호수아 6장 여리고 전투
Tolle Rege/여호수아
2011-06-26 23:18:27
여리고 전투는 이전에 이스라엘이 경험하였던 전투와는 전혀 양상이 달랐다. 그것은 일반적인 전투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 넘는 기이한 방법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전투의 방식은 우선 6일 동안 매일 한번씩 성을 도는데 무장한 자들이 앞에서 행진하며 그 뒤로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면서 나아가고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른다. 그 다음에 후군은 언약궤를 따르는 순서로 성을 도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번 돌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분다. 제사장들이 일곱번째 성을 돌때 나팔을 길게 불면 백성이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르면 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여리고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전혀 무력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성이 무너지며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에 특별한 명령이 덧붙어지는데 그것은 신명기 20장 16절에서 지시된 바와 같이 약속의 땅에 거하는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모두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아있는 이방민족이 자기 신들을 섬기며 행하는 가증한 일들을 이스라엘이 본받아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할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사람과 동물은 진멸하고 그들의 물건도 취해서는 안되고 전부 불사르고 불타지 않는 은금과 동철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므로 여호와의 곳간에 들여야 한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무너진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성을 다시 세우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여리고 전투의 방식과 여리고 전투에 덧붙여진 특별한 명령은 여리고 전투가 철저하게 여호와의 언약전쟁인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 뿐이요 실제적인 전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것이다.
[추기 2017년 1월 22일 주일]
여리고성에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전투의 방식은 대단히 기이하다. 여리고 전투는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데, 이 첫 전투를 이렇게 기이한 방식으로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여리고 전투이후 이어지는 계속된 전투는 더이상 이렇게 기이한 방식으로 수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 전투인 여리고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나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여리고 전투의 특징은 이스라엘이 실제적인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압승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여리고 전투는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는 전투 경험이 전혀없는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는 대단히 중요했을 것이다. 만일 첫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두 가지 이유에서 여리고 전투의 방식이 대단히 기이하게 이뤄진 것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번씩 엿새 동안을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번 돌라고 명하셨다.(3-4절) 성을 도는 방식은 선두에 무장한 자들이 서고 그 뒤에 나팔부는 제사장이 서고 제사장 뒤에는 언약궤가 따르고 맨 끝에 무장한 자들이 따르는 행진 방식이었다. 엿새동안 매일 한번 성을 돌때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선두와 후미의 군사들은 침묵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백성들이 그 나팔소리에 화답하여 크게 소리를 외쳤고 성벽이 바로 이 때에 무너졌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분 것만으로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나팔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를 지를 때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분 것은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그 나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화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팔을 불고 그 나팔 소리에 백성들이 크게 소리쳐 화답했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그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바로 가나안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한다는 교훈이다. 약속이 없다면 믿을 수도 없지만 그 약속은 약속에 대 한 믿음을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하나님나라의 중대한 진리를 엿보게 된다.
[추기 2017년 2월 5일 주일]
여기 "완전한 바침"이란 문제가 등장한다. 이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렘"인데, 이 단어의 뜻은 헌납 혹은 진멸이며 동사로 쓰일 때는 완전히 파괴한다로 풀이된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너진 성을 복구하지 않으며 그 성안의 모든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는 것이었다. 헤렘에 대한 규정을 이미 신명기에서 등장한다. 신명기 20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는 가나안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들을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명한다. (16절)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들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본받게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게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8절) 땅이 없이 유리방황하던 이스라엘에게 땅에 주어진다는 것을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땅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쫒겨나야하는 가나안족들에게는 심판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은 한편으론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백성 다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나안 족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헤렘을 명하신 것은 이 두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특수한 규례이지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 헤렘을 명한 신명기 20장에는 가나안 족외의 다른 성읍에서는 헤렘이 요구되지 않았다. 먼저 화평을 선언하고 화평을 거부할 경우에만 싸우도록 했으며 싸운 경우에도 남자만 죽이고 다른 비전투원들이나 짐승은 다만 죽이지 말고 빼앗도록 하였다.(20장 10-14절) 그런데 여리고 성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사람뿐 아니라 성 안의 짐승들도 죽이고 불에 타지 않는 물건들인 금은 동철 기구들도 이스라엘이 취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곳간에 바치도록 요구되었다. 이것은 가나안족과의 철저한 단절을 상징하는 행위로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되 가나안족과의 철저히 단절하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여리고성을 다시 복구하는 자들도 저주를 받게된다. 여리고성의 철저한 헤렘은 하나님이 얼마나 가나안족들의 죄악을 미워하시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들과 단절하고 새롭게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여리고성 외에는 이런 철저한 헤렘이 요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가나안 첫 성인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인다. 주목할 것은 여리고 성에서 라합과 그의 집에 동거하는 모든 자들은 죽임을 면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여리고성이 진멸을 당한 이유가 그들이 단지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혹은 악을 행했기 때문에 진멸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 대한 대적과 불순종때문임을 잘 보여준다.
여호수아 6장
닥치고 성경/여호수아
2019-10-31 22:51:06
여호수아 6장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 여리고 전투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나안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여리고성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무너진 것을 가지고 여리고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후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돌 때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성을 돌았다. 여리고성을 도는 퍼포먼스에는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제사장 일곱명, 숫양 뿔 나팔 일곱개, 일곱번 성을 돌기 등, 이렇게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를 통해 가나안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완전한 심판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고 가나안 사람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땅을 얻고 가나안은 땅에서 쫒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패역하여 땅을 더럽힌 가나안을 심판하고 이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나라를 세울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 여리고성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무너졌지만 그 과정에서 제사장들이 뿔 나필을 불고 백성들이 그 나팔 소리에 화답하듯이 함성을 질렀을 때 성벽이 무너진 일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방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스라엘의 반응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뤄지고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도도 그러함은 하나님나라의 불변의 진리다.
무너진 여리고 성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는 안되고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멸시켜서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짐승까지도 죽여야 했고 물건도 모두 불살라야 하며 불에 타지 않는 은 금이나 놋이나 철 그릇은 모두 하나님의 금고에 바쳐야 한다. 어떤 물건도 개인이 손을 대서는 안된다. 여리고 전투나 전투후 그 처리 방법은 모두 매우 특이하고 이후의 다른 전투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앞에서 일곱이란 숫자가 반복해서 나오면서 가나안 전쟁이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임을 상징했듯이 여리고성의 철저한 진멸과 복구 금지는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과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철저한 진멸에서 예외인 사람이 있는데 바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라합이 구원은 받은 것은 단지 정탐꾼을 감추어준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은 대적하는 패역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라합의 경우나 이후에 등장하는 기브온 족속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삶을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멸당하기로 예정된 가나안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누구든지 돌이키는 자는 살아날 기회가 주어졌다. 라합이나 기브온 족속의 사례는 대단히 신약의 복음과 흡사하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족속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돌이키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당시에도 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