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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정통주의 시대

메르시어 2023. 5. 21. 21:02

17세기 정통주의 시대

2014-11-12 13:27:50


    16세기가 루터 칼빈등 종교적 천재들이 등장한 세기라면 17세기는 이런 천재들의 작업물을 정리하고 주석하며 집대성하는 시기였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신학자들이고 그들이 관심은 학문적이고 교리적이었다. 이들은 영성보다는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업은 지성화하고 도그마화되기 시작한다. 루터파 정통주의는 루터의 신학을 정립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나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것은 루터가 반대하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루터교의 신학과 교리는 탄생하였지만 정작 루터의 영성과 경건은 배제되었다.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에 30년 전쟁이 독일에서 터졌다. 1555년 아우스부르크 협약이후 카톨릭과 개신교 진영간에는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왔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보헤미아 지역을 카톨릭화하려는 시도로 인하여 다시 카톨락과 개신교 진영간의 전쟁이 독일 영토내에서 발발하게 된 것이다. 카톨릭 진영인 신성로마제국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가담했고 개신교 진영인 보헤미아에는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가담하여 국제적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전쟁은 30년간이나 진행되어 독일을 황폐하게 만들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전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진행되던 이 시기가 바로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였다. 세상은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데 개신교 신학자들의 관심은 목회보다는 교리와 신학이었고 일빈 민중보다는 지성인들과 신학도들을 위한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정통주의 시대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것이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1675년 야콥슈패너는 경건에의 열망이라는 소책자에서 독일교회의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신학교 개혁을 언급한다. 참된 설교자를 신학교가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다.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이 삶의 지침이 아니라 신학을 위한 자료가 되어버렸는데 경건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이추상적 사색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을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을 체험하자는 운동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인데 이런 일은 교회사에서 이 때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사색과 신학의 대상이 아닌 몸으로 살아내자는 운동이다.

 

  독일에서 경건주의가 등장하던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난다. 메리 튜더의 핍박을 피해서 스위스로 피신하였던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이 칼빈과 불링거에게 개혁신학을 배우고 에리자베스 시대에 돌아오게 된다.  엘리자베스 시대 이후로 성공회는 중도노선을 취하게 되는데 돌아온 개신교 지도자들은 성공회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고 복식이나 사제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교도들과 대랍하게 된다. 국교도들이 이들을 조롱하여 퓨리턴이라고 부르면서 청교도가 영국에 등장하게 된다. 주로 옥스포드 출신의 국교도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고 주로 캠브리지 출신의 중산층 시민계급인 청교도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게 되는데 이 두 세력의 갈등은 영국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드디어 찰스 1세때 성공회 주교인 윌리엄 러드가 대대적으로 청교도들을 박해함으로 왕당파와 의화파로 갈라진 국교도와 청교도간의 내전이 일어나고 크롬웰이 지도한 의회파가 승리하게 된다. 의회파의 승리는 영국이 입헌군주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청교도는 성공회에 남아있으려는 비분리파와 성공회를 떠나려는 분리파로 나뉘게 되고 분리파들은 박해를 피해 네델란드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도했던 신정사회를 꿈꾸며 자신드링 정착한 한 곳은 언덕위의 도시(city upon a hill) 이라고 불렀다. 이후 성공회의 감독정치를 반대하였던 청교도들은 간접민주제 방식의 장로 정치제도를 택한 장로파와 직접민주제 방식의 회중교회를 택한 독립파로 갈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