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성경이 말하는 언약사상

메르시어 2023. 5. 17. 15:22

성경이 말하는 언약사상

2013-03-29 00:45:00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중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로 지으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며 인간 존재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릴 책임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창조시 부터 하나님과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언약관계 가운데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이런 언약관계를 떠나서는 그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는 언약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권세였던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모든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 선악과 금령의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할 존재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은 이 선악과 금령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배웠어야 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권이 조건적 권세임을 깨달아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금령의 교훈을 받는데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 인간의 비참한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게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사망을 경고하여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위협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히면 그래서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아니한다면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다는 엄중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창조시부터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  지어진 언약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것이고 그 결과는 단순한 타락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을 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백성 노릇을 하는 관계를 맺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시고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언약적 자비와 진실을 베푸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뜻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살며 하나님을 향하여 언약적 충성과 공의를 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 부르심을 받은 언약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의 터전으로 주어진 곳이 가나안 땅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의 땅을 뺏어 주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인간들이 더럽힌 땅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그 땅을 새롭게 하라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펼쳐진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내어쫒기는 신세로 전락한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언약백성이라 하더라도 언약적 삶을 살지 않을 때, 곧 언약을 배반하였을 때 그들은 존재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적  존재였는데 언약을 배반하였을 때 사망의 권세하에 놓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도 언약 백성이지만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였을 때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 진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관계의 내용이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의 내용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언약을 배반한 인간의 문제를 이스라엘을 통하여 해결하시려는 것임을 알게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실패하였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쫒겨났다. 나중에 하나님의 자비로 부분적인 귀환을 하였지만 페르시아와 로마의 속국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언약을 배반한 인간의 문제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실패하고 넘어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역사는 위대한 메시야가 등장하는 모판으로 준비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때가 차매 하나님은 약속하신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역사 가운데 들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실패하고 배반하는 언약의 당사자인 사람이 되시기로 아예 작정하신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이분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인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야만 하였을까?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언약을 배반하여 그 결과 사망의 권세에  사잡힌 언약 당사자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메시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죽음은  언약적 죽음인 것이다. 이 말은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메시야는 사람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언약배반의 필연적 댓가인 언약적 형벌로서의 언약적 죽음을 죽으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대신하여 언약적 죽음을 죽으시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언약적 의미가 드러난다. 언약을 배반한 사람이 죽어야 할 언약적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다. 언약을 배반한 언약 당사자는 반드시 죽어야만 그 언약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의 언약배반의 문제를 해결한 사건인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원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자신의 피로 새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새언약을 세우기 위한 언약적 죽음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언약이란 언약을 배반한 언약 당사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제 언약에 충성하는 자로 만드는 언약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없는데 있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나타난 새언약의 약속에는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어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는 약속이 부가되어 있는 것이다. 핵심은 늘 마음의 문제였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고 하나님은 바로 인간의 마음 수술을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 마음 수술의 방법은 먼저 언약 배반의 책임을 해결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영으로 딱딱하고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이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다. 이제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마음이 수술되고 새롭게 되어 충성된 언약 당사자로 설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언약배반의 책임을 벗겨주시고 마음수술을 해주시는 목적은 결국 사람이 창조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언약적 삶을 살게하시려는 것이다. 결국 언약적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언약적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바로 이 땅과 역사에서 이루는 하나님나라일 것이다.

 

 

[추기] 2013. 4. 10

 

성경의 언약사상은 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언약을 아브라함 언약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 시내산 언약을 이야기 하지만 만일 언약이 이스라엘로 부터 시작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언약은 구약의 언약을 갱신한 것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세우신 새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언약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성경의 중심 사상은 언약은 의미가 없게될 것이다.우리는 성경의 언약 사상의 뿌리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계시로 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창조 언약이라 혹은 아담 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분명한 것은 성경의 언약 사상의 출발은 창조로 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 인간을 두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인간은 하나님과 동류의 피조물인 셈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상대로서 인간이 지어진 것이다. 인간의 이런 특별한 위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파트너로 세우신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기를 작정하시고 인간을 지으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뿐만 아니라 창조 목적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존재인 것이다.

 

인간 창조에 대한 이런 계시는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가 창조로 부터 출발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 언약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책무를 감당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이 창조목적을 이루는 파트너로서 동역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언약 사상의 근본이고 뿌리이다.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은 바로 창조언약의 반영인 것이다. 사실 그 내용도 창조언약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창조 언약이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세우신 것 처럼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룰 언약 백성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방인의 죄악으로 더러워진 가나안 땅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사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사명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인간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낼 모판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창조 목적을 이루시려는 자신의 계획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아담의 실패를 그대로 반영하는 역사의 샘플이엇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 가운데 등장하시는 배아의 역할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온 세상을 위한 메시야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하여 오신 것이고 아담이 실패한 창조언약을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두번째 아담이라고 부른 것이다.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맺었던 창조 언약을 새롭게하는 언약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새언약의 목적은 아담이 실패했던 창조 목적을 이룰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들을 세우는 것이다.

 

 

[추기] 2013. 4. 11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창조언약은 성경에 나타난 언약사상의 뿌리이다.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나타난 언약은 이 창조언약에 대한 역사적 해설이며 장차 나타날 새언약의 모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언약은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 아니라 창조언약의 갱신이다 첫번째 아담이 배반한 창조언약을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으로 갱신하신 것이다. 첫 번째 아담이 인간을 대표하여 창조언약에 참여하였듯이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을 대표하여 새언약에 참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새언약에 대응하는 옛언약은 시내산 언약이 아니라 창조언약이어야 한다.   창조언약이 온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듯이 새언약도 온 인류를 상대로 한 언약이다.

 

 창조언약이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듯이 새언약도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후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하신 대 사명의 말씀은 예수님이 세우신 새언약이 창조언약을 회복임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권세이다. 그런데 아담은  창조 언약을 배반함으로 사망의 권세에 매이게 되었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사건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권세인데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되찾으신 것을 의미한다. 새언약은 깨어진 창조언약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언약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조목적을 이룰 수 있는 권세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성경의 언약사상을 다시 생각함

2013-08-03 16:46:04


1. 최초의 언약인 창조언약

 

  언약 사상이 신구약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핵심적 계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우리의 기존 신학에 언약 사상에 대한 혼동이 있는 것이다. 전통신학이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한 것은 구약과 신약의 상관 관계를 율법과 은혜라는 이원론적관점으로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언약 신학에서 이해하는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 그 자체었다. 그러나 언약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지지를 받기 어렵다. 전통신학의 언약 개념은 성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성경을 보는 시각의 반영인 듯 하다. 성경에는 분명히 언약 사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약 사상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언약 사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언약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언약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창조언약이라고 부를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이 창조언약은 이후의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언약 사상의 뿌리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개념을 분명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통 신학이 언약의 개념을 하나님의 일방적 약속으로 이해한 것은 창세기 2장의 선악과 금령만을 첫번째 언약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악과 금령을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은 독립된 명령이 아니라 앞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된 명령이었다. 하나님은 그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아니면 그들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려고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의 선악과 금령은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와 연결된 계시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천지를 창조하셨다.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 28절을 문화명령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 명령은 문화명령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천지를 지으셨고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고 그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룰 인간을특별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유일한 존재이며 인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경륜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2장에 등장하는 선악과 금령을 창조목적과 관련지어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은 단순한 금령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어야 할 인간이 어떻게 창조목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인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피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순종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피조세계를 다스리되 자기 뜻대로가 아니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선악과 금령은 분명히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언약은 선악과 금령만이 아니라 창조목적의 명령과 함께 이해하여야 함을 알게된다. 언약은 근본적으로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므로 언약의 양 당사자가 있어야 하고 언약의 양 당사자간의 주고 받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창세기는 최초의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쌍방간에 이루어진 어떤 것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언약의 쌍방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언약의 한 편인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우선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 이것은 언약을 맺기 위한 필수적인 하나님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먼저 언약의 상대방인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로 지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언약적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주셨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이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언약의 당사자인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할 일을 말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이다. 그러니까 선악과 금령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였으며 순종은 인간의 언약적 의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통치 권세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언약의 실체를 분명히 보게된다. 언약의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언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일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일이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주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창조언약을 구성하는 언약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약속이 아니며 그렇다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도 아니다. 창조 언약은 이런 모든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언약이 지향하는 목적을 이루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결과가 죽음으로 경고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이 경고는 단순히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금령을 준수하게 하기 위한 위협이 아니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기는 것은 곧 언약 배반이고 동시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언약은 깨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경고는 바로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의미가 상실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무엇이며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데 그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창조목적을 떠나게 만드는 불순종은 곧 인간 존재 의미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언약

 

  이미 언급하였듯이 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언약사상은 창세기의 창조언약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창조언약의 맥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언약을 생각헤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씨와 땅의 약속을 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고 나아가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였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분명히 창조 언약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사 언약의 당사자를 만드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심으로 언약의 당사자로 아브라함을 세우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육과 번성의 복을 주시며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주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의 번성과 그 씨가 장차 가나안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아담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씨와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을 지라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없으면 그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쌍방적인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에 충성하였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에서 그의 믿음과 언약적 충성은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토 달지 않는 절대적인 순종이었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에서 배웠어야 할 순종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이 조상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 언약은 이렇게 창조언약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기 위한 예비적 언약이었지 아직 본격적인 언약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본격적인 언약은 역시 시내산 언약이다. 시내산 언약은 당연히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당사자로 세워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바로 그들을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시어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셨고 이제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어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신 것이다. 이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는 십계명의 서언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서언은 하나님과 이스라엥 백성이 언약의 당사자임을 천명한 것이고 출애굽은 바로  언약을 위한 수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당연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약을 맺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 1세대가 정탐꾼 사건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을 때 광야에서 진멸되는 역사를 보아서도 분명하다. 아브라함 언약이 그러하였듯이 시내산 언약 역시 창조 언약의 맥락을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 당시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씨의 번성은 이미 성취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땅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땅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위하여는 이스라엘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땅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이 주어지는 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무엇인가?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진 십계명은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 순종하여야 할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니까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내산 언약은 창조언약의 맥락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창조언약의 목적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듯이 시내산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가나안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후에 나타난 모압언약은 출애굽 1세대가 진멸된 이후에 모세가 출애굽 2세대와 시내산 언약을 갱신한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언약의 내용과 목적은 동일하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새 언약

 

  새 언약에 대한 언급은 구약의 에레미야서에서 최초로 나타났다. 그 내용은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고 그 언약은 이스라엘이 깨뜨린 시내산 언약과는 다른 차원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기록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언약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한 다는 것이 새 언약의 목적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언약의 목적이 단순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전제한 것으로서 창조 언약의 맥락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에레미야서에서 말하는 새 언약은 시내산 언약을 옛 언약으로 간주한 것지만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다만 새 언약과 옛 언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근본적인 능력이 새 언약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의 본격적인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데 특별히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마지막 유월적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은 새 언약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언약의 피 혹은  피로 세우는 언약이라는 말을 하심으로 자신의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일임을 계시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언약을 세우기 위한 언약적 죽음이라는 것이고 그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얻게하는 속죄의 죽음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히브리서는 새 언약을 (옛 언약 보다) 더 좋은 언약이라고 표현하며 예수는 바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우시는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언약의 피라고 표현하시면서 그 죽음이 언약을 세우기 위한 죽음임을 말하셨고 그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얻는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죄 사함은 새 언약을 세우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창조 언약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나 시내산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 처럼 인간의 죄를 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를 세우는 일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옛 언약에서 출애굽이 그러하였듯이 새 언약에서도 죄의 용서는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언약 당사자가 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을 언약의 당사자를 만들기 위한 언약적 죽음이었던 것이다.

 

  죄사함을 통하여 새 언약의 당사자가 되었다면 새 언약의 양 당사자는 당연히 하나님과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 언약인 시내산 언약이 그러하듯이 창조 언약에서 주어진 언약의 목적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새 새언약의 목적은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의 당사자가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들이 다스려야 할 곳이 가나안 땅에 국한되었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세상의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새 언약은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차원이 아니라 첫 언약인 창조 언약의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단순히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 아니라 창조 언약의 갱신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명하신 소위 대사명의 명령은 새 언약의 목적이 창조언약의 목적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 곧 창조목적을 이루는 일임을 보여준다.

 

  이제 새 언약에서 관건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문제이다. 창조 언약에서도 아담의 불순종이 문제가 되었고 시내산 언약에서도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언약의 목적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새 언약에서 순종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은 언약을 맺기 위한 것이었지 그 자체가 순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진 죄 사함도 언약을 맺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순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창조 언약이나 시내산 언약이나 순종을 보장하는 장치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두심으로 그들의 순종을 보장하신다고 한것이 새 언약의 특징이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은 죄사함을 받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내주하심으로써 신자들의 생각을 지키시고 그 마음과 행동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라는 법이라고 하였고 육신의 생각을 좇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고 권면하였다. 새 언약의 목적은 정확하게 창조언약과 동일한데 그것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약의 새로운 백성인 새 이스라엘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시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죄사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은 백성이 이제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피조세계를 다스리기 위한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언약을 위하여 세상이 오셨고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이다. 아담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창조 언약의 머리가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여 새 언약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언약에서 실패한 첫 아담을  대신하여 새 언약의 둘 째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