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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 김성수

메르시어 2023. 5. 17. 14:29

잠언 - 김성수

2012-01-23 14:59:48


잠언(ילשׁמ; Proverbs)

히브리 성경 중 독특한 쟝르가 바로 지혜서이다. תמא(에메트;진리)에서 א(히브리 첫 글자로서 ‘알렙’이라고 읽고 음가는 ‘ㅏ’발음이 남)는 욥기(בויא=욥=이옵), מ(‘멤’이라고 읽고 음가는 ‘ㅁ’이다)은 잠언(ילשׁמ=미슐레), ת(‘타우’라고 읽으며 음가는 ‘ㅌ’이다)는 시편(םילהת=타할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합쳐져서 지혜서를 이룬다. 그러므로 시편 속에서도 지혜문이라 부를 것이 많다. 욥기, 잠언, 전도서는 쟝르가 각각 다르다. 시편이 큰 범주이고, 욥기, 잠언, 전도서는 독특한 범주이다.

히브리어 자체가 어렵다. 역사서에서 보는 이야기체가 아니다. 이 부분을 엮어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이다. 잠언, 전도서, 욥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오리무중이다. 내용상 난해하다. 성경의 다른 부분의 결론과 다르다. 전도서는 허무하다로 시작하여 허무하다로 끝난다. 회의를 느낀 사람의 회의를 적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알레고리란 헬라어 원어 뜻으로는 다른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본문하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포괄적 뜻이다. 알레고리 해석의 특수 상황이 알렉산더학파였다. 알레고리는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먹고 마시는 뜻을 신령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알레고리이다. 전도서 전체 흐름, 구조는 짧은 글이나 몇 시간 강의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잠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책이었다.

1장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했는데 그대로 받으면 된다. 왕이 지은 잠언이다. 왕이 지었다는 것 외에 지혜문학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거꾸로 말해 잠언은 이스라엘 혹은 성경의 독특한 문학 쟝르 아닌 여러 나라에서 유포된 문학 쟝르라고 한다. 잠언이 존재하고 남겨놓은 것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닌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외국의 경우도 잠언의 수집, 출판은 궁전 중심으로 발견된다. 대개 왕은 한 나라 통치하는데 내치(內治)를 할 때, 무력이 아닌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왕 주위에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지혜자들이 있었다. 왕의 통치를 보좌하여 지혜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지혜자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도 이런 지혜자들이 있었다. 이는 아히도벨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잠언을 독특한 형태로 분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ץעי(야아츠) = councel 이런 지혜자들은 이스라엘 궁정에 있었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제사장, 선지자 등이 지혜자였고, 같은 동의어로 םימכח(하카밈;지혜자들) ← םכח(하캄;지혜자)가 나온다. 역대기에 보면 히스기야 신하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편찬했다는 말이 나온다.
애굽의 지혜문의 특징은 “말한 것을 귀 기울여 들으라, 내 마음을 기울여 들으라, 네 마음에 두라, 억눌린 자를 착취하지 않도록 하라, 상전에게 말대꾸하지 말도록 하라” 등의 문체가 잠언과 유사하다고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이처럼 외적 유사성, 문체 등이 이스라엘 내 모사집단이 있어서 나라 정책에 크게 관여했고, 그들을 통해 잠언이 수집, 편찬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이 혹자에 의해 주변 국가의 잠언집과 성경의 잠언을 동일시 취급하려는데 대해 우리의 견해는 어떠한가? 그런 주장의 전제와 그 결과가 초래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보편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고유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고,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의미 속에 포함된 뜻은 계시와는 무관하다는 뜻이다. 타민족에도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계시와 상충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친근히 느낄 것은 잠언이다. 우리 양심을 편하게 해주는 말이 있다. 또 예수 믿는 초신자에게 권하는 책이 시편 혹은 잠언이다. 여기에 특별히 거룩하고 희생하는 삶이 있지 않고 세상을 지혜롭게, 약게, 꾀 많게 살 수 있는 지식의 보고로 본다. 말하자면, 보편적이라는 말은 세속적 지혜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런 것은 너무 피상적 관찰이다. 잠언 서두에서 이것을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했다. דוד־ןב(벤 다위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이라 했다. 여기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은 영원한 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란 뜻이고, 이스라엘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구약교회에서 왕이었다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스린다는 것이 이스라엘 속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인류의 보편적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같은 특별한 의미에서 말하는 잠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의미는 다르다. “이스라엘 왕”이라 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교회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왕”은 교회 통치자, 지도자의 잠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메시야를 상징한다. 유래없는 지혜를 수여받은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받은 지혜라 할 때, 여러 인간 중 특출한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혹은 교회의 통치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잘 다스릴까 해서 구한 것이 지혜였고(대하 1:7-13), 이때 하나님께서 유래없는 지혜를 주신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잠언이 나온 것이다. 다른 나라의 지혜문을 읽어보면 겉으로는 유사하나 본질은 천양지차이다. 잠언을 통해서 우리를 풀어 놓아주는 듯한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혜문의 번역은 앞으로 많은 손을 봐야한다. 잠언에 대한 이해를 쉽게하면서 삶의 지도서로서 이해하는 것은 번역의 책임이 있다.


1절 לשׁמ(마샬) = ①통치하다, 이는 동음이의(同音異意)로 해서, ②비슷하다, 같다, 복사하다. 여기 לשׁמ이 잠언이라는 뜻을 갖게 되는 것은?
영어 Proverbs - 일반적 진리를 유용한 사상으로 효과적이게 표현하는 격언이란 뜻.
독어 Gleichnis - 이것이 더 לשׁמ에 가까운 뜻이라고 본다. 신약에서 비유로 해석하고, 사전적 의미로 본질적인 유사한 두 사건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
이때 לשׁמ이 Gleichnis(글라이슈니스;비유, 격언)와 가깝다면 어원적 의미와 같아진다. 유사 사건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는 것. 사실 לשׁמ은 유사성, 동질성, 동등성을 전제로 한다. 쉬운 예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반드시 문자적 의미가 아니다. 여기에 일반적 뜻이 있다. 따라서 격언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본질적 진리를 찾아야 한다. 격언의 형성과정은 어떻게 되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여러 일들 속에는 세부적 상황이 다르나, 동일한 원리가 개입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다양한 사건 속에 함축된 원리를 뽑아내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원칙을 포함한 대표적 실례를 들어 원칙을 설명한다. 그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원리를 깨달아서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원리를 잘 나타내는 실례를 들어 말하는 것이 격언의 성격이다. 우리가 잠언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해석학적 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잠언의 사례를 통해 표현하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음녀의 집에 가까이 말라”고 했을 때 “음녀”의 상징되는 근본 원리가 있다. 경우에 따라 이런 문학 쟝르가 훨씬 효과적으로 정곡을 찌를 수 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장 효과있게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원리를 함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 예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 이 잠언은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놀라운 지혜를 얻게 된 것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한 지혜였다. 형식 자체가 깊고 심오한 진리를 어려운 말로 직설적 표현이 아닌 우리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실례로 하여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잠언을 대할 때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2절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이후 부정사가 나온다. 솔로몬의 말하려는 기능을 나타낸다. 첫째는 알기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즉, 지식이다. 지식의 내용이 지혜로 되어 있다. רסומ(무사르;교훈하다;훈계) = המכח(하크마;지혜) 1장은 잠언의 서언이고, 2절, 3절의 말은 역사서에 쓰일 경우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나 잠언에 오면 רסומו המכח(하크마 우무사르;지혜를 교훈한다) 등이 유사 단어인데 반복하므로 어렵다. 각 단어가 유사한 것으로 반복은 내용 강조이다.
תעד(다아트) → 지식......2절의 각 단어들의 유사성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문의 내용에서 2절의 단어 뜻의 기준이 필요하다. 각 단어의 어원 추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 방법은 아니다. 말의 의미는 context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원 중심의 추적은 context에서 벗어나갈 수 있다.
같은 말이 한 문장에 나타날 경우 그 의미 파악에서 어원 추적은 위험성이 있고 이것은 단지 context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전을 찾아 그 단어가 함축한 의미의 사용 경우를 찾으면 된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는 성경 자체 본문에 들어가서 하나 하나를 이해해야 하나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2절의 말은 현대 인간 정신의 분류를 구분하는 것과 다르다. 지식의 내용은 רסומ המכח이라고 말한다.
המכח → 지혜. 우리가 범할 실수 중 하나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서 습득된 개념들과 정신 기능이 성경 이해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잠언을 읽을 때 조심할 것은 이성과 신앙의 분류 도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이성, 신앙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러면 이성은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인가?
이성과 신앙이라 할 때 각 사람마다 틀릴 것이다. 이성과 신앙이라 할 때 인간 정신의 상이한 두 기능으로 생각한다. 성경 자체도 인간 정신 기능의 다양성을 쓴다. 같은 내용을 똑 같이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각 단어는 인간 정신면을 쓴 것이다. 우리가 잠언에 들어갈 때 인간 정신의 구분은 큰 역할을 안한다. 잠언을 이성과 신앙의 구분 도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잠언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전반적인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동일 기능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를 המכח(지혜)라 하고, 또 하나를 어리석은 것(המרע;아르마)으로 말한다. 상이한 정신 기능의 구별이 아니고, 정신 기능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이다. 하나는 지혜로운 정신 기능, 또 하나는 어리석은 정신 기능으로 나타난다. המכח를 지혜라 한다. 이때는 특수 정신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특수기능을 전제하고 말한다. 그래서 잠언의 목적은 알게하는 것인데, 아는 것은 המכח, 그리고 רסומו המכח이다. 여기서 רסומו는 지시하다, 교훈하다, 올바로 인도하다, 꾸짖어 교정하다의 뜻이다.
잠언의 목적은 알게하는 것인데, 지혜와 훈계(רסומו המכח תעדל;라다아트 하크마 우무사르)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지혜를 알고 훈계를 안다. 히브리 어법 중에 hendyadis(二思一意; 두 말이 합쳐 한 뜻으로 나타나는 것)가 있다. 그 예로 תמאו דסח(하사드 웨에메트;친절,긍휼과 진리)가 있는데 이 둘의 요소로 하나의 뜻을 나타낸다. 즉, “인자의 성실”
רסומו המכח에서 המכח 속에 רסומ가 포함된다. 지식, 대상에 대한 המכח가 아니고 רסומ를 포함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바른 길 제시하는 성격을 가진 지혜이다. 지혜가 바른 것을 제시하는 רסומ적 요소를 갖는다면 삶과 밀접히 연관되는 실천적 지혜이다. 모든 이념의 이론적 지식은 삶에 영향을 미치기에 지식이 관념으로만 존재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지식은 삶에 영향을 초래한다. 어느 대상에 대한 지식은 삶의 태도를 지시한다. 나무를 보고 목수와 생물학자의 관점은 다르다. 관념이요, 추상적인 수학도 수학자는 수학으로 세상을 본다. 대표적인 것이 물리학이다. 물리학이 보는 세상과 시인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המכח가 רסומ의 요소를 포함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 바른가?의 기준이다. 3절의 “의”, “공의” 이것은 지혜와 관련된다. 잠언은 가장 일상적 삶과 연결되어 있어서, 잠언이 정리 안되면 가장 일상적 삶의 기준을 놓치게 된다. 일상 삶에 대해 철학이 제시하고 성경은 침묵한다고 여겼으나 성경은 더 정확히 말한다.
복습
지혜문의 문체 특성이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고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이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정리하였는가? 일부 학자들은 이같은 견해를 중시해서 유사한 문체를 비교 연구하여 성경의 잠언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것이 학계에서는 정설화 되어있다.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지혜자, 모사들의 공통점 등, 우리가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게 될 때, 이들 설명의 전제는(타 민족 문화권의 공통점)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편적 현상이니까 잠언의 독특한 규범적 성격을 취급할 이유를 부인하고, 둘째는 보편적 현상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생각해 내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번째 생각이 더 성경 연구에 치명적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이같은 계시를 모든 인류에게 주셨다는 논리를 가능케 한다. 계시의 보편성보다 인간 경험 위주에서 나온 것으로 계시의 성격 자체를 부인한다.
혹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를 혼합해서 말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경험 중에서 하나님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혼합주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 경험 중에 깨달았다는 논리가 되는데, 이 논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떠해야 할까? 우리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계시 중에서 자신을 참되이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이 둘을 나누는 이유는, 일반계시는 그것에 대한 접근이 보편적이어서 모든 사람에 제시된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보이시는 가시적, 물리적, 역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제시되어 계시 대상, 접근도 보편적이어서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 특별계시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채널을 통해 주어진 계시라는 의미이다. 어느 때 사람, 문화에게 주어진 보편계시의 일부로 본다는 것은 잠언을 특별계시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특별계시로써 성경에 포함될 자격이 위와 같은 견해로 보면 없어진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이같은 차원으로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나님이 충실히 자신을 나타내시나 인간이 본래 의도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에게 와닿는 순간 이성에 의해 변질되어 진리가 거짓 것으로 변한다. 일반계시가 중생 못한 자에게 받아들여질 때 왜곡된다. 특별계시는 특별한 채널인 영감을 통해서 깨달아진다. 일반계시 차원에서 깨달을 수 없는 것을 특별한 채널 통해 깨달은 것이 영감이다. 바로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알게되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이라 할 때, 잠언을 인류의 보편적 겸험의 범주에 넣는데 이것은 위험하다.
잠언은 특별계시의 범주에 속한다. 특별계시는 특수 시대, 특수 상황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 잠언에서 그것이 특별계시라는 그 근거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었고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지위를 모르고 일반 국가로 이해할 때 특수한 의미를 모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의미를 알 때 ‘이스라엘의 왕’은 보통 의미가 아니다. 민족 중에 있는 국가 지도자로서 왕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교회의 지도자이다. 흔히 목회자를 교회의 지도자라 할 때의 의미와도 다르다. 이스라엘 왕은 메시야의 예표로서 구약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예표적 직분인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하 7장의 약속과 관련된다.
성경은 왜곡된 일반계시를 수용하지 말고 짓밟으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모든 제단을 부수어야 했다.
잠언이 피상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성경 내에 위치한 계시 범주임을 분명히 한다.
1:1이 잠언의 성격을 분명히 밝힌다. 특히 솔로몬은 유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어받은 자이다. 지혜를 구할 때 자기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한 것이고, 하나님은 유래 없는 지혜를 주셨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의 지혜라 할 때 그것은 특별한 성격을 갖는다.
לשׁמ(마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근본 뜻은 ‘유사하다, 같다’ 이것이 잠언의 뜻으로 사용될 때 영어에서는 proverbs라고 한다. 이 말은 라틴어 proverbia에서 나왔는데 이것의 의미는 본질과 뜻,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문자적 의미의 사건 하나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포함된 근본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잠언은 상징성(대표성)을 띠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그 자체가 아니고 원리, 원칙을 말하려는 것이기에 그 사건은 광범위할 수 있다. 원리를 말하는데 구체적 실례를 들어 핵심을 말하는 것이므로 상징성을 잠언은 띠게된다. 이것이 לשׁמ의 성격이다.
이 뜻으로 잠언으로 발전된 이유의 타당성을 이해했을 것이다. 잠언은 같은 사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의 핵심을 말하므로, 이것이 잠언에는 같다는 뜻이 있는 이유이다. 어떤 본질적인 뜻을 집약해서 표현한 만큼, 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만큼, 단순한 문체이다. 잠언은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표현으로 무엇을 가리킨다. 즉, 상징적 서술이다. 여기에서 ‘음녀’, ‘외인’은 문자 그대로 의미가 아니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같은 사례를 상징하는 무엇이다.
지난번에 말한 것은 רסומ이다. המכח는 인간의 정신 기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잠언은 특수한 인간 기능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기능이 상반된 질로 나타나는데 긍정적으로는 מהכח, 부정적으로는 המרע로 나타난다.
영적 차원,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지혜와 어리석은 길에 대해 잠언은 말하고 이것이 잠언의 주된 관심이다. 사람의 지혜로운 삶에 대해 말한다. 우리 모든 삶이 המכח를 알게 한다. 지혜로운 삶을 파악하고, 인식하고, 배우게 하는 목적이 לשׁמ이다. 인간의 모든 영육활동을 두 개의 상반된 질 속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לשׁמ의 목적이다. 그리고 רסומ는 hendyadis(이사일의;두 가지 다른 뜻의 말이 합쳐져서 한 가지 뜻을 가짐)로서 여기 지혜는 경계, 교정(어그러진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לשׁמ을 통해 지혜를 배우게 하는데 지혜 속에 רסומ이 있다. 여기 뉘앙스는 실천적이고, 이것은 또한 바른 표준을 전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המכח는 약삭빠른 지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절 ןיב(빈)의 어원적 뜻은 between으로 구별한다, 분별한다 → unterscheider(운터샤이더)로 사이, 거리(einscher;아인슈어)를 뜻한다. 또 쪼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 하나 구별한다, 속으로 꿰뚫어본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게하는 지혜를 파악하고, 분별하여 깊이 이해하게 하는 목적이 לשׁמ이다.
목적은 덮어두고 line의 동사의 목적어가 관심을 끈다.
לשׁמ??? 2절 תעדל 알게 하고(라다아트)
? 3절 תחקל ?? 취하게 하고 : 지혜를 통해서(라콰아트)
?? 4절 תתל ?? 주기 위해서 : 여기의 주어는 가르친다의 의미이다.(라테트)

 


3절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קדצ(체뎈)의 어원 자체가 복잡하다. 즉,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자로 재었을 때 바르게 하는 것”, “옳은 것”, “참되다”는 뜻도 있다. 어원 자체가 복잡하다. 용례를 통해 그 의미가 부각되지 않는다. “옳고 바른 것”이 모호하면서도 곁길로 어긋날 가능성이 있으나 그 뜻을 제한적으로 두지 않는다고 본다.
לכשׂה רסומ(무사르 하쎄켈;지혜롭게 하다)을 통상적으로 직역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 לכשׂה(하쎄켈)은 깊이 생각하다, 숙고하다, 통찰력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무엇인가를 꿰뚫어보게 하는 רסומ이다. 즉, רסומ는 옳바른 것을 전제로 한다. 3절 후반부에서 קדצ(체뎈)을 말한다. 옳고 바른 것 취하여 배우게 하는 것이 לשׁמ의 목적이다. 이렇게 할 때 지혜의 성격이 명료해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 얻는 교활한 지혜가 아니라, 옳고 바른 것과 뗄 수 없는 본질적 지혜이다. 잠언을 처세술로 보려는 사람은 처음을 잘 보아야 한다.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옳고 바른 것을 분명히 가르치려는 것이다.


4절 אתפ(페타) → 오도하다, 길을 잘못 인도하다, 유혹되다 → underfahrer 사실 경험없는 사람이 유혹 잘된다. 경험없는 미숙한 사람을 רענ אתפ(페타 나아르)라고 한다. 젊은 사람이 미숙하다는 것은 노인이 지혜롭다는 반어적인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지혜를 획득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이 많은 자가 지혜롭다 할 때 그 속의 원리는 무엇인가? 지혜를 획득하는 과정은 경험, 체험과 그 과정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 여기는 광범위하게 학습, 배우는 것이 포함된다. 우리가 지혜 얻는 것에 대한 균형을 얻기 위해서이다. 지혜는 오랜 경험,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지혜 얻는 것은 그런 과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지혜 획득의 배움은 그 과정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말한다.
성경은 제한적이 아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수학, 과학 등)을 포괄적으로 근본 차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 삶의 영역에서 사는 자세를 말한다. 잠언은 실제적 삶에 직접적 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 번에 서론의 서론을 했다. 특히 6절과 관련하여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다윗이 예표적 메시야라고 했고,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잠언이라고 했다. 혹자는 지혜와 지식의 뜻을 구별하여 사용하나 잠언에서는 상호 긴밀한 요소로 본다. 여기서 המכח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 지식이 아닌 그 속에는 רסומ적 요소인 훈계, 권면의 요소가 들어 있다. 권계, 권면은 바른 것을 전제로 한다. 명철의 말들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2절 하반절). 이 말은 이상하다. 인식의 대상이 동일하다. 명철의 말들(ירמא ןיבהל;레하빈 아므레)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2절 하반절의 말들의 함축적 의미는 무엇인가? 깨달음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잠언이다. 사물을 깊이 파고 들어 그 본질을 파악한 내용, 결과를 전달하는 말, 말은 communication이 전제되는 것이다.
ירמא(아므레;말하다) → 이 말은 지혜 획득에 있어서 말을 매개로 전달 과정이 개입되는 것이다. 지혜로 인도하는 권고를 잠언에서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과 병행되는 것은 옳고 바른 규범들이다. 지혜(רסומ)에서 암시되나, 여기서 명확히 나타난다. 참된 지혜의 속성은 옳고 바른 것이다.
그 다음에 미숙한 젊은이, 분간 못해서 그릇 행동하기 쉬운 젊은이(어리석은 자)에게 통속적인 지혜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1-4절까지 지혜의 목적을 말한다. 잠언의 목적을 말하면서 지혜의 본질을 말한다. 지혜의 성격이 일반적 지혜의 성격과는 다르다. 잠언에서는 지혜를 다양한 시각에서 제시한다.

5-6절은 문법적으로 다르다. 위는 명사문장으로 말하다가 5절에 오면 달라진다.
הנקי תולבחת ןובנו חקל ףסויו םכח עמשׁי
(이슈마 하캄 웨요셒 레콰 웨나본 타헤블로트 이크네)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설교자는 본문의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기억할 것은 inpf.(infinitive;부정사)를 modal vb.(동사의 모델 혹은 전형)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so that으로 마지막 낱말을 보아야 한다. “지혜로운 자는 들어 교훈을 더하라 그리하여(so that) 명철한 자가 지침을 얻도록 하라” 즉, “지혜로운 자는 삶의 지침을 얻기 위하여 들어 교훈을 더하라” 특히 여기서 바로 이 지혜를 획득하라는 것은 4절에 근거하여 당연하다.
그러면 4절에서 지난 번에 말한 것은 무엇인가? 경험없는 자(미숙한 자)로 하여금 지혜롭게 한다. 경험없는 자를 젊은이로 해석하는 것은 반대로 나이 많은 자는 지혜롭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혜 획득은 오래 배운 삶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지혜를 들어 획득하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배우라는 것이다. 즉, 배워 습득하라. 배우는 것은 청종의 의미요, 특별한 요소가 있다. 특히 지혜를 삶의 지침으로 말하는 것은 지혜가 옳고 바른 규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들어 배워 삶의 지침을 얻으라 했는데, 권고의 대상은 םכח(지혜자)이다. 지혜를 배우라 하면 어리석고 모자란 사람이 그 대상일텐데, 오히려 대상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7절을 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만이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어리석어 망한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한다고 했다. 이 말씀의 보편적 표현이 에수님의 “있는 자는 더 있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이다. 왜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는가? 모순같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배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절 “잠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지혜로운 자는 들어 교훈을 받아 지침을 얻도록 하라.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말하면 지혜롭지 못한 자는 잠언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이다.
הדיח הצילמ לשׁמ(여기서 밑줄 친 단어는 시편 1편에서는 ‘오만한 자’로 해석했다)
(마샬 멜리차 히다) ץיל(리츠)는 오만한 자, ץילמ(멜리츠)는 중보자, 통역이란 뜻.
뿐만 아니라 ץיל는 ‘문이 갈라진 틈으로 보다'(문틈으로 보다 = durch turspalt schanon)라는 뜻이 있다. הדיח → דוח(후드) 걸어 잠그다, 걸어 잠그니 속의 것이 안보인다. 즉, 수수께끼,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닫아 걸고 자기를 안나타내니 알 수 없어 수수께끼이다. לשׁמ의 의미를 지난 번에는 상징성이라고 말했다. 여러 구체적 사례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칙을 아주 구체적 예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לשׁמ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배후의 깊은 뜻을 알아야 לשׁמ을 알 수 있다.
위의 문장이 לשׁמ의 의미를 알게 한다. לשׁמ의 목적은 우리로 지혜를 얻게하는 것이다. 위 표현이 우리로 지혜를 얻게 하는데까지 이르게 한다. 우선 לשׁמ에 대하여 지혜로운 자를 들어 습득하라. 그래서 לשׁמ을 배우라 한다. לשׁמ을 가리켜 문틈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라 했다. 즉, 잠언은 드러나지 않는 무엇이다. 잠언은 비유, 상징적 표시이다. 감추어져 있다. 희미하다는 의미는 불투명성이다. opaqueness, 이 불투명성이 לשׁמ, לשׁמ은 그 내용이 지혜를 근거로 하니 표현 형식만 아니고 지혜 자체까지 불투명성이 해당되는가? 만일 이것이 지혜 자체의 불투명성과 관련되어 있다면, 지혜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은 아니다. 순전히 인간의 지적 능력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인간의 능력 앞에 불투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혜가 인간의 지적 능력에 불투명한 것이라면 지혜 습득은 계시성에 근거해야 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 외의 것을 필요로 한다.
2:6을 보면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고린도전서 2장을 기억할 것이다.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사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 2장 말씀을 생각할 때, 인간의 지적 능력이 무능력한 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영역에만 해당되고 타 영역은 파악 인식이 가능하다고 대부분 생각한다. Luther 자신도 믿음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으나 이성 영역은 인간 스스로 인식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참된 의미의 지혜는 영역 구분이 있는가? 이다. 방금 이런 말들이 시편, 잠언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중요한 말이다. 기독교인의 지적 활동에서 황금률이라는 것일 수 있는 7절의 말 이해에 배경이 된다.
תישׁאר?(레쉬트;처음, 시작의) 참된 의미의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참된 의미로써 지혜는 하나님 경외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 경외없이 하나님의 지혜에로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 지혜에의 접근 가능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지혜주시는 계시성, 은혜성과 연관된다. 결국 לשׁמ(지혜 가르치는 잠언)은 지혜자가 들어 깨달을 수 있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깨달을 수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어리석다고 배척하여 망하는 길로 가고 지혜자만 지혜로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는 자는 계속 지혜로우나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다가 망하고 만다. 크게 보아서 대개 2가지의 상반된 이야기 했다. 젊은이 → 미숙하고, 지혜없는 자. 늙은이 → 경험있고, 지혜자. 이것은 지혜 습득과정을 말하는데 지혜를 내가 연구하고 습득하는 것 같은데,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지혜를 깨달아 아는 자가 더 지혜롭게 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배척하고 망한다. 이 말은 상치되는 것 같다. 그러나 상치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잠언을 읽어가면서 깨닫도록 하자.
7절의 한 마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자.
תעד תישׁאר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תישׁאר)” 여기서 תישׁאר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①시작, 처음(beginning), ②주된, 머리된(지위; chief) ③가치(cheice;차이세) → 고르고 고른 것, 최상의 것. 이 해석을 따르면 ③은 하나님 경외는 최상의 것이다. ②는 하나님 경외는 주된(chief) 지식이다. ①은 하나님 경외는 지식의 시작이다. ⇔ 이 3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과연 ①, ②, ③ 중 선택 가능한 것은 어디인가? 지식에 있어서 하나님 경외라는 것이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견해를 말하면 “지식에서 제일 원리”라는 표현이다. 이 의미는 지혜, 지식의 앞에서 언급한 속성과 관련시키면, 지식은 옳고 바른 규범과 밀착되어 있다. 여기서 떠나면 참된 지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의미에서 하나님이 제일 원리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바른 척도이다. 하나님께서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의 근원이시다.
이것은 어떤 사실에 근거하는가? 하나님이 세계 창조주와 통치자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세계 창조주와 통치자로 세운 질서(영계, 사회 등)에서 세운 지혜가 바른 척도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이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인격으로 세계 통치자인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창조주와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경외이다.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이 세운 질서, 그 질서의 인격적 주체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의 제일 원리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 인식의 출발이라는 것과, 그 다음에 이성의 작용은 아니며,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하나님 경외하는 활동 자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경외는 지혜, 지식의 출발, 전제요, 근본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행동 안에서 전체 지식 추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 삶의 어떤 부분도, 인간 지적 활동의 어떤 부분도 하나님 경외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Luther보다 Calvin이 옳다.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근래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 신앙인의 영역까지 말하는데, 잠언에서는 특별한 영역인 신자의 영역이다. 이것이 무조건 확대되어 일반 세상에도 동일한 원칙 적용은 힘들다. 솔로몬이 교회 지도자로서 한 말이기에 이미 신자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다.
첫째가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출발점이다.
하나님 경외와 떨어질 수 없는 지혜와 지식을 어리석은 자는 멸시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잠언에서 지혜는 어리석은 것과 대조해서 항상 말한다. 지혜를 신앙과 대비시킨 이성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이성이 모든 인간의 활동기관이라면 이성은 인간존재의 근본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성은 작용한다. 이성 기능에서 두 가지로 기능을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혜롭게 또 하나는 어리석게 기능할 수 있다. 신앙을 토대로,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는 이성 활동은 המכח이다. 이것은 바른 삶을 가능케 한다. 하나님 경외를 목적으로 하는 이성 활동을 뜻한다.
하나님 경외없는,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는, 독자적 이성 활동을 가리켜 어리석음이라 한다. 그래서 계몽주의 시대에 하나님을 제치고 이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께 독립하여 이성 사역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가장 많이 활동한다. 계몽주의 시대 지식을 포용하고, 논증하나 결코 바른 것에 도달 못하고 왜곡을 초래했다. 인간 존재의 기간 동안 이성은 멈추지 않는다. 인간 이성이 모든 것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은 한계가 있다. 원시 상태도, 인간 이성은 한계에 있었다. 타락 후는 더하다. 전도서 2장에서 이것을 말한다. 이성의 판단으로 세계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말한다. 지식을 더해 보았자 고통만 더하다고 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 한계 밖의 것에 대해 신앙을 빙자한 인식론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인간 이성이 오성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을 신앙한다고 한다. 여기서 이성과 신앙의 기능 영역이 갈라지고, 그 대상도 구분된다. 인간 이성의 초월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통해 파악하고,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 받아 누리는 것이다. 그 자체가 초월적 대상을 파악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외 떠난 이성으로만 세계 내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세이다. 신앙과 더불어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여 출발점으로 할 때 인식이 가능하다. 자연계의 인식은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그 안에서 비 가시적 신성 파악까지 이르러야 한다. 신앙 떠난 자연과학은 우상으로 떠나게 되어 현상 자체에 만족한다. 모든 대상에 이성은 신앙과 더불어 지혜의 바른 인식에 도달하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함께 하여 능력을 준다. 이성으로 바른 인식하게 한다. 성령의 성화 역사 말할 때 단순한 인간 활동 아닌 지적 부분까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아는데 있어서, 세계 아는데 성령이 바르게 인도하신다. 신자에게 있어서 영역이 구분된 이분법 아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잠언 1장을 보면 1-9절, 10-19절, 20-33절로 나눌 수 있다.
1-9절은 서론으로서 솔로몬(이스라엘의 왕)이 לשׁמ이라는 표현으로 지혜를 알기 위해 적은 글로 말했다. 서론에서 잠언의 성격을 암시하는 것을 보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לשׁמ과 평행된 רסומ, המכח가 있다. 지혜는 수수께끼와 같이 숨겨져 있고, 문틈으로 엿보듯이 알기 쉽지 않다. 알려주지 않으면 불투명하다. 지혜에 도달하는 어려움과 더불어 לשׁמ의 상징성 때문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인가? 지혜 자체가 도달하기 어려운 것인가? לשׁמ의 사용 자체가 피상적 배후에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이해하기가 어렵고,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지혜 자체의 내용도 불투명하다. לשׁמ을 사용하는 의도는 깊고 심오한 지혜의 상징적 표현이어서 직접적 표현보다 어렵다. לשׁמ을 사용하는 의도는 깊고 심오한 지혜를(그 자체가 접근이 어렵다) 함축한 것을 예로 들어 표현한 것이다. לשׁמ에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하려는 긍정적 의도도 있다. 그것은 지혜의 불투명성을 제거하는데 있다.
예수님이 παβαβολη(파라볼레;비유) ↔ πρρησια(플레시아;명백한 표현) 사용, 예수님께서 παβαβολη(비유)를 쓰신 이유는 어떤 이에게는 명백히 나타내고 어떤 이에게는 숨기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나타낸다는 παβαβολη = לשׁמ은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는 자에게는 나타내시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숨기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에 접근케 하여 그 뜻을 깨닫고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은 지혜의 불투명성의 암시를 준다.
7절에서는 잠언 전체를 지배하는 제일 큰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지혜 얻는 원칙(제일 원칙)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잠언의 원리이다. תעד תישׁאר(레오쉬트 다아트;①시간적 의미에서 처음, 시작, ②지위, 중요성, 지혜의 우선성과 관련하여 주된, 가장 좋은, 값진) 여기서는 2가지의 의미가 결합되어 있다. 지식의 출발점, 시작, 전제가 된다. 지식의 첫 출발점, 단계가 되는 것은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 경외에서 출발, 토대로 한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바탕으로 가능하다. 시간적 의미에서 처음이 아니고, 내용상 중요한 위치라고 하면 참된 지식에 있어 가장 중요, governing principle, 참된 지식 도달에 모든 것 지배하는 원리이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 전제에서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두려워 하다, 경외하다; הארי의 특수형태의 부정사형, הָ(아;글자의 뒤에 붙어 부정사를 만들기도 한다)가 붙어서 부정사가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뿐만 아니라 ארי(야레; 두려워하다)의 Qal inf.(기본적 부정사)로 명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는 경건이라면 의롭게 사는 것으로 이해한다. 경건은 내적 자세이다.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가 경건이다. הוהי תארי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취할 자세이다. 또한 이 말은 신약에서 역시 하나님 앞에 취할 믿음의 자세와 다를 바 없다.
근본 뜻은 하나님 앞에 취할 내적 자세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행동, 삶은 믿음의 삶에서 나온 결과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첫 출발이요, 이같은 자세에서 지혜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님 경외”를 믿음으로 바꾸어도 된다. 믿음을 신앙과 이성으로 나눈 이분법의 의미가 아니다. 경건의 자세,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혜 접근의 첫 출발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잠언 마지막이 “너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곧 무슨 일하든지간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7절에 보면 묘한 대조가 나온다.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 רסומ המכח 이 말은 이사일의(다른 뜻을 가진 두 단어가 합쳐져서 한 단어의 뜻으로 쓰임)로써 훈계하는 지혜를 말한다. 훈계라할 때 권위적 요소가 들어 있다. “하나님 경외가 지식의 시작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한다” 말의 논리가 모순되는 듯하다. 이 말은 가장 압축된 말이다. 모순되는 듯한 말을 통해 많은 것을 말한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 경외인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멸시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멸시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의 말을 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실제로는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를 주어서 깨닫게 한다. 이것과 관련된 것은 있는 자는 더할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하고 들어가므로 지혜를 알 수 없다. 지혜에의 도달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에의 접근이 거부된 사람, 지혜를 멸시한 사람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지혜의 결여는 하나님 거스리는 불신앙의 요소가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하나님 경외하고 출발하는데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은 자는 경멸한다. 그러므로 7절은 전체 속에서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갖는다.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이다. 그 반대는 하나님 경외 없으면 지혜 접근이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한다. 이유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깨닫는 것이다. 요한일서 마지막 장에서 죽음에 이르는 죄에 대하여는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 Calvin은 하나님께서 어떤 이에게 등돌린 것이 분명할 때는 연연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 의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겠다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 간구할 수는 있다.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있다.
8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내 아들이여 네 부모의 가르침과 권고를 참고하고 떨쳐버리지 말라”고 되어 있다. 지혜를 가르치는 자로 부모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면 지혜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교육 즉, 신앙교육의 전부가 하나님 경외 교육이다. 이같은 교육은 부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말한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이 “내 아들이여...”라고 한다.
ינב(베니) = my son, 솔로몬이 말하는 것은 가정의 아들 대상이 아닌 지혜 가르치는 자는(교육자) 부모이고, 피교육자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부모 자식간이 가르치고 배우는 하나의 Model이다. 이것은 창조 질서에 의해 자연스럽게 마련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침 받는 대상이 ינב = my son이라고 한다면, 여기 부모와 아들간은 혈연 관계만 아니고 모든 교육자와 피교육자에 해당하는 전형이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교육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가정교육의 중요성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곳이(창조질서 속에서) 가정이다. 참으로 중요한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질서 속에서 마련하신 교육기관이 가정이다. 우리는 교육을 교육기관에 맡기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등한히 한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핵심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가정교육, 교회에서의 교육은 참된 의미의 교육이다. 학교교육은 사회인으로서 알아야 할 지식 습득 이외에 의미부여 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땀 흘려야 겨우 생계유지 된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 산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것을 통해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교육자와 피교육자간이고, 창조질서 속에서 가정은 하나님 경외의 교육을 위한 틀이다. “아들아”(피교육자)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자는 아비의 심정으로, 사랑과 간절함으로 교육해야 한다. 교육자의 자세를 부모의 비유로 말하고, 피교육자는 교육자를 아버지로 대해야 한다. 부모라는 것이 혈연관계에서 성립된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교육자를 아버지라 한 것은 아버지 속에 권위 요소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עמשׁ(쉐마) = 들으라 → 순종의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바울 사도가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이유와 근거를 알 수 있고, 그 근본 이유는 창조질서(남녀간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특수 의미 아닌 지식 전달, 정보 전달의 의미는 가능하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권위 요소가 포함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특히 훈계와 가르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가르침’(תרות(토라트)에는 규범적 요소가 들어간다)과 ‘들으라’는 말은 교육의 내용이 지식 전달과 동시에 그 지식의 내용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교리, 규범을 말한다. 피교육자로서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같이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שׁטת־לא(알 티보쉬) → ‘떠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은 가르침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피교육자의 취할 자세이다. 왜 아비의 가르침을 들어 순종하고 떠나지 않는 것인가?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여기를 보면 앞의 말과 맞지 않는 듯하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훈계와 가르침을 떠나지 말라 했는데 갑자기 의미가 생소해진다. 앞의 말과 비교하여 달리 표현한다. 머리와 목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사람의 얼굴은 시선이 집중되고 말을 많이 하는 곳이다. 그리고 화관과 목걸이는 장식이다.
ןח(헨) = grace; ①favor, ②우아함, 아름다움
은혜가 은혜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우아함, 아름다움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은? 어원의 뜻에서 추적한다. 그것은 무엇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애정을 느끼고, 동정심 갖는 뜻이 있다. 이것이 사역형의 뜻을 가지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이는 아람어로 어원을 추적할 때의 의미). 이것은 아름다움을 말한다. 우리에게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ןח의 어원적 뜻이 사랑스러운 것, 부드러운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네 머리의 아름다운 화관이요, 네 목의 목걸이다” 여기서 “아름다운”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가장 주(主)가 되는 말이다. 부모가 가르치는 교훈이 너에게 있어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부모가 가르쳐준 하나님 경외함이 진정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는 신약 벧전 3:1-2, 3:3-6,7 이하는 남편된 자의 태도, 영생의 공동 상속자로 취할 것이라고 말한다. 3:3,4 바깥 사람을 금사슬로 꾸미지 말고 썩지 않는 것으로 즉, 속 사람을 꾸미라고 한다. 이는 지혜에 관한 모든 말을 배경으로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적 아름다움이다. 하나님 백성이 꾸밀 것은 내적인 것이다. 영적인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잠언에서 하나님 경외함으로 얻어지는 참된 지식을 말하면서 ‘아름답다’라는 말을 쓰는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를 말한다. 즉, 미(美)의 의미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나님 경외하는 지혜가 너희를 아름답게 꾸미는 화장품이다. 진정한 미(美)는 하나님 본질이다. 모든 참된 미는 하나님 경외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서를 움직인다. 모든 진실된 신앙의 표현이 아름다움이다. 참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의 표현이 참된 아름다움이다(행위, 글 등). 우리 타락한 정서 움직이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추(醜)하다고 한다.
이사야 3장에 보면 여인이 꾸민 아름다움의 외적 모습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으로 심판 선포 중에 말씀하신다.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는 외적 미는 가증스러운 것이다. 믿는 자는 미적 감각에 영향 받는다. 세상이 달리 보인다. 어제까지 무의미한 것이 의미있다. 이것이 변화된 미적 감각이다. 믿는 자는 미의식, 미적 감각이 달라진다. 변화가 일어날 때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신자의 정서를 움직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의 표현이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므로 이 치장은 영적 치장이 되어야 한다. 벧전 3:1 이하에서 여인의 아름다움은 속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0-19절은 죄인들이 잘못된 길로 유혹할 때 행할 태도에 대하여 말한다.

20-33절은 지혜가 부르는 소리에 대하여 말한다.
다시 1-9절에서 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큰 원칙, 근본 원리를 제시하는데 이것과 진정한 아름다움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아름다움의 본성은 중요한 것이다. 타락한 정서가 문제이다. 아름다움이란 독특한 귀한 정서가 있다. 참된 아름다움은 참되게 느낀다.
잠언을 통해 넓고 깊게 성경이 어떻게 우리 삶의 구석 구석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배우게 된다. 신앙 생활이 폭넓고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무지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라고 한 영역이 폭넓다. 잠언을 통해 이같은 것들이 열린다. 잠언을 통해서 성도의 삶의 영역이 폭넓게 열린다면, 진정한 철학의 토대는 전도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복습
잠언 1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1-9절 : 전체적 서론, ②10-19절 : 어리석음의 유혹, ③20-33절 : 지혜의 부름, 초청
서언에서 취급한 중요 내용은 무엇인가?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말 속에 중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לשׁמ 속에 문학적 특성을 말하고, 저자를 솔로몬으로 말하고, 솔로몬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לשׁמ이 성경만의 문헌 아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있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잠언을 외국의 왕에 자문위원을 중심으로 생긴 것을 가지고 추측하여 성경의 잠언도 같다고 한다. 세상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지혜문 중의 하나라고 보는데 그 정도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는 것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란 말이다.
이스라엘 자체가 곧 의미있는 말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교회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메시야로 예표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말은 교회의 통치자라는 뜻인데, 진정한 교회의 통치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이는 그분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교회의 지도자에게 준 잠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유래 없는 지혜를 받았다. 교회의 지도자에게 준 잠언인 만큼 이것이 특별계시의 한 부분으로 기록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잠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성경이 생각하는 지혜의 특수 성격에 대해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다. 일반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아니다. 3절에서 처럼 지혜는 의와 공평과 올바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므로, 지혜는 이같은 성격과 밀접하다.
5-6절과 관련하여 한 말은 무슨 뜻인가?
לשׁמ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다. הצילמ(멜리차)의 어원은 문틈으로 보는 것과 같다. 얼핏 한 번 보는 것이다. לשׁמ이 이해하기 어렵다. לשׁמ이 논리적으로 제시된 성격 아니고 우리게 친숙한 것으로 가리키려는 암시적 방법이요, 상징적 수사법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여러움을 겪는가? 형식상의 어려움만은 아니다. 에수님께서 비유 말씀하실 때 숨기시려는 의도가 있으나 지혜 자체가 어려워 이해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지혜의 접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혜 접근이 어렵다.
5절을 보면 누가 לשׁמ을 깨닫고 청종하게 되는가? 권유대상이 ‘지혜자’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지혜는 지혜자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다. 7절에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는 지혜자를 어리석게 비추어 경멸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경멸하고 배척하나, 지혜자는 지혜를 얻어 더욱 지혜를 가지라 했다. 이 비유는 지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2장이 암시해 준다.
잠언의 결론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황금률이 7절에 나타난다. תישׁאר(레오쉬트)는 하나님 경외의 첫 출발(우선순위),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지배원리이다. 지혜의 첫 출발이 하나님 경외이다. 진정한 지혜의 출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경외하는 심적, 지적 자체가 무력하다. 인간 스스로는 얻을 수 없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진정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음을 7절 한 마디가 말해준다.
8절 עמשׁ(쉐마) = 부모의 법(혹은 교훈)을 들으라, 하나님 경외의 자세가 지혜이다. 이것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과 분리된 부모 나름대로의 법도가 아니고 부모가 가르치는 교훈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자로 부모 언급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자간은 상하의 기본 질서이다. 가르침 속에는 권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교육의 대상이 ‘my son' 즉, ‘나의 아들아’이다. 부모는 다양한 교육자의 대표이다. 부모의 심정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피교육자는 아비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게 한다.
9절 여기서는 하나님 경외가 지혜의 원리이다. 부모가 피교육자에게 말하면서 그 청종할 이유가 ‘네 머리의 아름다운 화관이요 네 목의 목걸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ןח(헨) = 아름다움이 중심 단어이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하나님 경외하는 지혜가 토대되는 지식과 지혜가 참된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지혜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전제 된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외부 사람을 꾸미지 말고 숨은 속 사람을 단장하라고 한다. 동시에 지혜를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목적, 토대로 하고, 권고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이 신자의 신앙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 ןח이 우리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 내면 생활에서 큰 작용하는데 아름다움을 무시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힘이 얼마나 강한가는 타락한 아름다움에 남녀가 빠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쁘기는 하나 아름다움에서 강한 흡인력을 느낀다.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영접하면) 정서의 변화가 나와 미의 개념이 바뀐다. 신약 자체도 아름다움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가장 취할 것은 아름다움이요, 남성에게는 힘이다. 남자의 힘과 여성의 아름다움은 그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아름다움을 잘못 사용하여 추악하게 미혹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된 의미에서 아름다움이 우리 신앙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기독교 문화, 예술에 대한 언급이 가능해진다. 역으로 여기서 아름다움은 하나님 경외가 가능하다. 행동에서 있어서 지혜 등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규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10-19절까지 어리석음의 초대 혹은 유혹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님 경외로 출발되는 진정한 지혜와 지식 따라 사는 실천요강 1조는 10절의 죄인이 유혹할 때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여기서 문제는 הבת(토베)이다. 여기 어근은 무엇인가? 이 본문에 대해 הבאת(타아바)와 אובת(타부아)로 수정한 것으로 사본상 나타난다. הבאת는 אבא(아바)로 어근을 본 것이다. 이것은 desire, 열망하다로서 죄인이 유혹할 때 함께 원해서 따라가지 말라로 볼 수 있고, אובת는 어근을 אוב(보아)로 보아 죄인이 유혹할 때 가지 말라로 볼 수 있다. 근본 뜻에는 변화가 없으나 אובת로 쓸 때 뜻이 강해진다.
개개학자들은 지혜서 작성 시기를 포로 후기 시대로 본다. 이때 공용어는 아람어였다. 이것을 근거로 잠언을 포로 후시기 작품이라 한다면 우리는 고려할 가치가 없다. 아람어는 포로 후시대만 영향을 준 것 아니다. 시편에도 아람어는 나타난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증거의 무덤’을 말할 때 아람어가 나오므로 언어 사용을 가지고 당시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당시 여러 제국을 이스라엘이 거느리고 있던 시기여서 아람어 사용도 가능한 것이다. 본문을 수정하지 않고 설명이 가능한 것은 הבא(아바)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죄인들이 길을 유혹할 때 너는 좋다고 나서지 말라고 한다.
אתפ(파타)가 갖고 있는 것은 어원적으로 화살 쏘는데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ךותפ(파투카)는 성경에서 사람을 꼬여 오도하게 하는데 있다. 젊다는 뜻이 이같이 쓰인 것이다. 젊어서 유혹을 잘 당하기 때문이다. התפ는 표적에서 벗어난다, ךותפ는 오도한다, 바른 규범에서 떠나는 것이 둘의 뜻이다.
지혜는 바른 것과 관련하여 떠날 수 없다. 어리석음은 바른 규범에서 떠나는 것이다. 지혜는 바른 도리, 어리석음은 여기서 떠난 것이다. 바른 것에서 떠나자 할 때 거기에 미혹되어 따라 나서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실천요강 1조이다. 지혜에 대해 실천 요강을 말하면서 바른 것에서 떠나자는 어리석은 말에 유혹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신자의 삶의 환경이 유혹과 미혹의 삶임을 암시하고 있다.
10절의 말은 어리석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의 삶의 실천적 1조라고 말하고, 어리석음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11절에서 말한다.
11절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ונתא הכל(라카 이타누) ‘우리와 함께 하자’ 이후의 말은 흉악하다. 우선 이 말만 먼저 보자. 이 말과 연결하여 13절, 14절을 보자. 13절은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온갖 보화로 우리 집을 채우라” 즉, 부자가 되자. 14절은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우리 중에 제비를 뽑자” 즉, 가장 공평한 처리 방법을 쓰자.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즉, 공유하자. 이 말만 들으면 이웃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이 말은 누구를 제외시키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함께 나누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한다. 여기 ‘함께 하자’, ‘전대 하나만 두자’는 것은 공유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어디 있는가? 함께 모든 것을 하고, 나누고, 공평하게 나누는 사회요 부요해지자는 이것보다 좋은 권고가 없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12절에 “음부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사람의 피를 흘리자”, “음부 처럼 산채로 삼키자” 이는 외부적으로는 사랑의 요소가 있으나 일부분이 바른데서 떠난 폭력적 수단이다. 이렇게 보면 참 사랑과 이웃관계 파괴하는 부정의 차이는 정반대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의리로 밀접한 사회가 폭력 사회이다. 이것이 정당한 사회에서는 좋은 것이나 교묘한 탈을 쓰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매우 달콤하게 함께 하자, 부자가 되자, 공평하게 하자라고 한다. 교회에서는 더 거룩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을 억울케 하는 것이면 그것은 가장 위험하고, 독소를 품은 거짓 사랑이다. 사랑을 까닭없이 해치는데는 당파성이 있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자는 것이다. 당파성 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제일 먼저 당파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었을 것이다. 당파성은 이기심이 전제된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것이다. 이것에 넘어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자기 집 채우려고 부정한 일 한 사람이 나눌 이유없고, 타인의 것 갈취한 사람이 서로 나눌 이유 없다. 이익이 성취되면 그 안에서 또 싸우게 된다.
15-18절 타인의 생명을 해하려고 매복하나 결국 자기 생명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19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עצב(보체아)는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로 성경에서 쓰인다.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로 말한 것은 10절에서부터 볼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을까? 불의하게 착취하려는 목적은 자기 집을 채우려는데 있다. 악행의 근본 동기는 이기주의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심이 있다. 욕심없이 이웃에게 범죄하는 경우는 없다. 모든 이웃관계의 범죄를 요약하면서 10계명 마지막에 “탐내지 말라”고 한다. 어떤 유익과 이기적 목적 얻으려는 행위는 악행이다.
결론 부분이 색다르다. 17-18절에 대해 19절에서 원칙화시켜 말한다. 불의한 죄 자체가 그 생명을 취하게 되어 있다. 근거 제시가 없이 끝난다. 나중에 가서 범죄자가 그 범죄에 대한 보응을 받고, 하나님 경외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 미리 말하면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20-21절 여기서 지혜의 부분과 초청에 대해 말하고 어리석은 자의 거절을 말한다. 지혜가 외치는 장소가 넓은 길거리이고, 성루, 성문이다. 왜 지혜가 외치는 장소를 바깥, 큰 길, 성루, 성문 곁으로 언급하고 있을까? 히브리 성경에는 당시 건축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나온다. 성문은 성 구조 전체이고, 성루는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하고, 광장은 성 주변의 넓은 장소이다. 성문 주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러한 장소에서 지혜가 소리를 높여 외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대개 성문은 재판이 열리는 곳이다. 저자 거리를 형성한다. 개인 생활 중심은 집안이나 공동체 삶의 전체 중심은 성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혜가 외친다 할 때 תומכח(하크모트)이다. 복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종류이다. 여기 암시는? 집 밖에서 사람이 다니는 곳으로, 공동체 삶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지혜가 외치는 것은, 지혜라 할 때 모든 사람이 듣도록 외쳐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성문에서 공동체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할 때 삶의 가장 평범한 장소, 일상 생활의 도처에서 지혜는 그 소리를 높인다. 자선, 구제, 흥정 등 자질구레한 삶, 긍정과 부정의 삶이 이루어지는 저자 거리에서 지혜가 외쳐진다. 사소한 평상의 일만 아니고, 가장 옳고 그름의 시비가 이루어지는 성문에서 지혜의 모습이 드러난다. 성문에서 그 지혜가 소리를 발하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지혜가 차단되었다 할 때 지혜의 은밀성과, 온갖 잡다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저자 거리에서 지혜가 소리를 발한다 할 때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지혜는 집안의 은밀한 중에서만 아니고 일상 생활까지 확대,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상의 말씨, 행동까지 지혜가 나타나 삶의 도처에까지 지혜가 외쳐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 질서 속에 있음을 언급했다. 하나님 통치는 일상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이루어진다. 인간편에서 지혜의 삶이 일상에 드러나야 한다.
지혜가 일상 생활 구석구석까지 외쳐져도 사람이 모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혜 자체는 외쳐진다. 듣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일반계시 영역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의로운 세계 통치는 곳곳에 이루어지나 깨닫지 못하고, 지혜를 외치고 있으나 지혜를 듣지 못하고, 지혜를 알았다 하는 자는 왜곡시키고 있다.
복습
지난 시간에 1:7절 이하에 대해 어리석음의 유혹에 관하여 말했다. 어리석음이란 것은 “...의 결핍”을 의미한 뿐 아니라 끊임없이 강력히 유혹하는 힘이기도 하고, 외부적으로는 참된 것의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하자”, “우리가 공유하자”는 자세는 형식적으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으로 사랑과 일치한다.
그러면 형식적으로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어디에 잘못이 있다고 했는가? 위선성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모든 거짓은 위선의 모습이 있다. 말로는 함께 하자고 하나 그 마음에서 하나 되자는 마음은 없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죽이면서 자기 이익을 찾으려 한다. 자기 이익 위해 이웃을 죽이려는 자가 우리와 함께 하자고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하나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죽이려 하니 자가당착이다. 이런 유혹을 따라 가면 상대의 것을 빼앗는데 보조가 되나 후에 내분이 일어난다. 그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비윤리적인 모습과 사랑이 대치되는 것은 모든 율법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는 것에 다양성이 있다. 비윤리성과 외형적 사랑은 맞물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 율법에 어긋나는 것들이 비윤리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법 어기고 참 사랑 할 수 없다. 하나님 법과 사랑은 같다. 여기서 참 사랑에 불의가 섞일 수 없고 의와 함께 가는 것의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위선적이라는 것을 고의적으로 행했느냐는 것은 주관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이 하나님 법에 정당하느냐는 것이다. 부정당하면 하나님 법에서 어긋나는 것이다. 불의는 심판을 받아 멸망으로 인도된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원리만 배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거짓된 것을 끊는 것이 초보적 단계에서 유용하나, 하나님 사랑을 지키는 것이 유익이요, 상대방 사랑에 내 이익이 섞이면 불의하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에서, 참 의롭고 거룩한 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깨달음에서 구체적 계획놓고 분별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짓밟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모르는 것이다.


20절 이하에서 많이 다루었던 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혜는 길거리, 성문에서 외친다. 이런 장소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성문은 공동체 삶의 사건들이 가장 중요하게 판단되는 곳이다. 삶의 축소판이다. 인간이 공동체 일원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에서 성문은 인간의 삶의 전체 모습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장소는 공개된 곳, 가장 공개된 삶이다. 여기서 소리가 뻗치고, 목소리를 높인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것이 공개적 장소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지혜가 공개적 장소에서 외친다는 것은 누구나에게 지혜가 제시되고 있다는 말이다.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소리를 높여 누구에게나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 경외를 그 내용으로 한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제시되고 삶의 도처에서 외친다는 것은 신약의 로마서 1장에서 삶의 도처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린다는 말보다 포괄적이다. 온 땅에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소리가 충만하다.
여기서 지혜와 관련하여 우리가 처한 삶의 이질적인 다른 환경의 요소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삶은 끊임없는 어리석음의 유혹이 작당하여 이웃을 해하자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삶의 도처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지혜의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는 세상이다. 어리석은 소리와 지혜의 소리가 세상에 공존한다. 일반계시로 볼지 모르겠다. 삶의 도처에서 지혜의 부름이 있고 나서, 22절에서 반문을 제시한다. 어리석은 자는 적극적으로 어리석음을 사랑하고, 오만을 탐하고, 지혜를 미워한다. 어리석음의 적극적 성격을 말한 반면에, 또한 일반계시에 대한 인간의 부정 반응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신약 로마서 1장에서 말한다. 진리를 억누르는 자는 참된 모습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로마서를 썼으나 구약을 바로 깨달은 자는 낯설지 않다. 역으로 로마서 1장의 바울 사도의 말을 알려고 하면 구약의 폭넓은 이해가 없으면 안된다.
이 부분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은 23절의 “나의 권고로 돌아오라”이다. ובושׁת(타슈부; 돌아오라) → 인간의 보편적 타락 모습, 인간의 어리석음, 무지의 말이다.
יחור םכל העיבא ↔ םכתא ירבד העידוא
(아비아 라켐 루히 ↔ 오디아 데바라이 에트켐)
밑줄 친 곳이 나의 신(영)과 나의 말로 대비되고, 첫 단어인 העיבא는 עבנ(나바)로서 샘에서 솟아오른 것, 흘러 나온다, 쏟아붓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혜가 의인화 된 것으로 본다. 지혜가 “나의 신(영)을 쏟아 부을 것이요 나의 말들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면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나의 신(영)’(יחור)과 ‘말’(ירבד)은 어떤 관계인가? 말은 ①마음 속의 것을 표현하는 표현 수단, ②의사 전달, 이 의미는 말은 표현이요 계시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게 돌아와 순종하면 “내가 나의 신을 쏟아 부어 흘러나오게 하고 나의 말을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라고 했다. 나의 신을 쏟아 붓는 것과 나의 말을 알리는 것은 동일 표현인가? 다른 별개의 뜻인가? 여기서 ‘나의 신’과 ‘나의 말’이 신약의 의미에 어디까지 근접하는가? 이것은 뒤에 하기로 하자. 지혜와 인간의 관계는 무생물에 대한 파악 아닌 인격적 관계로 된 것이다. 지혜와 인간이 비인격적 대상의 관계 아닌 다른 차원이다. 인격적 개입이 있다. 필수적이다.
24절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지혜의 간곡한 부름을 배척한 결과로 말한다. 온 천지에 계시의 외침으로 그 소리가 동시에 얼마만큼 간절한 의도가 담긴 것인가를 말한다. “손을 뻗친” 것은 그 부르짖음의 의도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말한다.
두번째로 여기서도 지혜라는 것을 비인격적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어떤 인격으로 보는가? 비인격체인데 인격화시킨 것인가? 어떤 인격과의 관계는 피하더라도 지혜를 신격화 시키는 것은 지혜는 인격과의 관련을 떠나서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지혜의 모든 것으로 의미된다.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지혜는 비인격적인 관계로 하나님 떠나 홀로 존재 못한다.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말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계시의 부름 배후에는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의도가 배제될 수 없다. 특별히 ‘손을 내밀었다’는 표현은 신약에서 ‘내 손을 벌렸으나 그들이 거절하였다’로 표현된다. 이런 지혜의 간절한 권고를 사랑않고 무시했다.
26절 이하에서 지혜를 멀리한 결과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재앙’이다. 여기서 지혜의 부름의 한시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일반적 말로 사후약방문의 뜻으로 볼 것인가? 확대가 가능한가? 지혜를 알 때가 있다. 그때가 지나면 모른다. “문이 닫히면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는 일부에서 사색보다 행동을 요구하나 이같은 맥락에서 볼 때 깊은 사색을 요구한다. 사색 자체가 신앙 안에서 정당히 자리잡아야 한다. 아까 말한 것은 지혜가 공개된 것은 삶의 도처에서 지혜가 누구에게나 외쳐지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 지혜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지혜의 간곡한 부르심을 거역한 결과에 대하여 말씀한다. 우선 이제 공포가 임할 것으로 막연히 말씀한다. 공포의 일반적 성격을 말한 후에 지혜의 부름은 한시적이어서 그때가 지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29절에 보면 매우 특별한 내용이 나타난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행위”(31절) → “삶의 방식”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29절이다. תעד(다아트; 지식) ″הוהי תארי(이르아트 아도나이; 여호와 경외)가 병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하나님 경외가 지혜 자체이다. 지식 추구 목표가 하나님 경외이다. 즉, 지식 자체가 하나님 경외이다. 하나님 경외와 지식은 분리될 수 없다. 지식이 하나님 경외와 분리 불가능하다면 지식 거부는 하나님 거부이다.

31절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우리 삶 속에는 Vergeltung(보응의 원리)가 존재한다. 보응의 원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보응원리 존재는 그 보응하는 인격적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행한대로 그 열매 먹게 되는 것은 지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다른 결과가 초래된다. 지혜의 태도에 따라 각기 보응의 원리가 존재하는데 어리석은 자에 대한 보응은 죽음이다. 지식의 결핍으로 어리석음에 상응하는 결과가 죽음이다. 그 이유는 모든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이다. 어리석음은 지식을 미워하고, 거부하고, 하나님 거부하는 적극적 성격이다. 그러므로 그에 상응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이것은 동시에 지적 영역에서의 하나님 경외 배제가 죽음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라고 하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죄이다. 지식 자체가 인간의 정신 기능과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지식 배제는 하나님 경외의 배제로 죽음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의 형태이다.
32절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어리석은 자의 멸망이 나타난다.
33절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晏然)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지혜자의 안전도 나타난다.
7-19절까지 어리석음의 모습과 악한 자의 보응을 말하고 끝나는데 32-33절에서 어리석은 자와 지혜자에게 각각 상응의 보응이 있다는 것으로 끝난다.

2장
1-2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아비” → 잠언에서는 선생의 대표적 모습이다. 선생이 피교육자에게 권하는 말, 이것이 christian education(기독교 교육)이다. 교육 내용이 전달되는 형식에서 계명을 말한다. 계명은 권위의 요소이다. 교육 내용은 지혜인데, 교육 내용의 전달 형식은 말 = 계명이다. 피교육자의 자세는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명철에 마음을 기울이라”로 귀와 마음은 안과 밖으로 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므로 이런 참 지식 교육에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심령을 기울이는 것이다.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사모하는 간절한 삶이다.

4절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지혜를 소리쳐 부르며(3절), 숨겨논 보물을 찾듯이 찾아 뒤지라는 것은 지혜를 찾는데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함과 노력의 자세를 말한다. 피교육자는 철저히 지혜를 찾되 숨겨놓은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한다.

5절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 즉, 계시를 통해 주신다. 조금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피교육자는 열심히 찾는다 할 때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인간의 지혜 추구 노력과 하나님의 지혜 주심을 깊이 있게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상호보완하는 관계를 경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아야 하나 하나님이 지혜를 계시 통해 알려 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지혜는 숨겨져서 아무도 접근을 못한다. 그 후에 지혜는 공개적 장소에서 외쳐지고 있다고 한다(1장에서). 상반된 표현 같다. 여기서도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찾으라 하고,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고 했다. 상반된 표현은 성경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는 함축적인 경제적 표현이다. 서로를 상호 규정해 준다. 인간이 소리쳐 간절히 찾는 것 이 자세는 하나님이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지혜 추구 자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그를 의지하는, 신뢰하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고, 은혜 구하기를 사모하는 기도의 자세이다. 지혜를 참되게 사모하는 자, 모든 영혼을 기울여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께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이 둘의 관계는 신비로 남아 있다. 조금 전과 같은 표현 양식은 상반된 두 가지가 상호 규정하게 되어 있고, 그 같은 표현으로 지금 취급하는 대상이 신비로운 것이다.

6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여” 지혜 구하는 자에게 지혜 주신다.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여 찾을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는데 하나님 경외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 경외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 경외를 그 목적, 목표로 한다. 지혜 추구의 자세, 모든 지식 추구의 자세가 하나님 경외 자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 경외, 하나님 아는 것, 이것이 참된 지혜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 경외의 틀에서 벗어나 만들어낸 지적 추구 작업(문학, 과학 등)은 진리의 왜곡이요, 참된 지식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진리 왜곡은 과학만이 아니고 예술, 문학 등에도 있다. 모든 참된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말씀해 주셔야만 한다.
지난 시간에 1장 20절 이하에서 지혜의 초청에 대하여 다루었다. 지혜의 부름에 응하는 것과 쓰이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2장에 들어오면서 1장에서의 지혜의 부름, 초청에 응답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이제는 삶의 각처, 도처에서 지혜의 소리가 들리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 방식은 소극적인 자세 아닌 적극적 자세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요,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요, 은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 보물을 찾듯이 파헤치는 자세, 지혜를 찾고, 소리 불러 외치는 자세라고 했다. 지혜를 숨긴 보물을 찾듯이 찾고, 소리 높여 외쳐 부르고, 은을 소중히 여기듯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지혜가 공중 앞에서 외쳐 불리는 때의 이 지혜는 즉각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Transprarenz(트란스프라렌즈; 명백한) 지혜가 도처에서 외치는데도 자연스럽게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혜의 관통성이라고 할까? Durchschanburkeit(뒤르히샨부르카이트; 관통성) 지혜의 편재성, 또는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포착이 용이한 것이 아니고, 지혜는 땅 속 깊이 묻힌 보배처럼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 숨겨져 있고, 삶 처럼 애매모호한 심오함이다. 이것을 삶의 표면에 드러내어 일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일상 사는 사람에게 포착 가능한 것은 상징으로 가능할 뿐 포착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이와같이 지혜의 은밀성, 심오성은 지혜가 포착하려는 삶의 본질 자체가, 지혜가 포착하려는 세계 질서 자체가 인간 한계를 넘어선 창조주 하나님께 근원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 경외 자체이다. 그래서 지혜는 심오하고, 포착 어려운 애매모호한 것이다.
지혜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 경외, 하나님 찾고 깨닫게 된다. 지혜를 찾고 추구하는 자는 경건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 지식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편에서 지혜를 찾는 자세는 반드시 결실을 본다. 이것은 인간이 지혜를 찾는 수고로만 가능하다고 여기면 잘못된 오해이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 경외, 하나님 지식은 관념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 순종의 자세의 차원의 것이다. 신앙하는 자세 속에는 지식이 있다. 지혜에 대한 물음을 인간 편에서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이 결실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지혜를 찾는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지혜, 지식, 긍휼을 주시기 때문이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혜이지 인간 스스로 포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서 파악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 의지, 그를 바라보고, 오직 그의 긍휼과 은혜 베푸시는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 경외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데만 기대한다. 지혜가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면, 인간 편에서 지혜 찾는 노력은 하나님 경외, 신뢰하는 믿음의 틀에서 이루어진다. 지혜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찾는 것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 행위여야 한다. 이런 믿음 안에서 내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결실된다. 하나님의 신실성 즉, 은혜로우신 분으로 여기는 우리 믿음에 대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까지 발전이 가능하다.

7절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그에게 지혜와 명철을 주시어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깨닫게 하도록 하신다고 했고, 온전한 지혜를 예비하시고, 온전한 자의 방패가 된다고 했다.

8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는 공의의 길을 지키신다고 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보호적 기능으로 우리에게 방패가 되며, 지혜 찾는 자에게 길을 주신다고 했다. 좀 자세히 보면 지금까지 말한 것과 상충되는 듯하다. 지혜가 약속된 대상은 누구인가? 옳바른 사람,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다. 욥기 1장에 하나님을 경외하여 온전한 자라고 나온다. 경건한 자에게 이르시기를 참 지혜를 그를 위해 간직하신다. 지혜가 주어지는데도 조건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7절 한 구절만 떼어 본다면 그같은 느낌이 정당화될 수 있으나 1장 1절부터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구별된다.
처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이 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편의 조건이 인간편에서 지혜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고 했다. 여기 7절에서의 경건한 자, 온전히 행한 자의 의미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에게 은혜로 주신다는 표현을 전제로 하는 것이 옳다. 특히 그같은 믿음을 가진 자, 하나님이 경건을, 하나님이 지혜 주시는 전제 조건이 아님에도 지혜와 경건이 밀착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하나님 경외를 토대로 하고, 그 틀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 자체가 하나님 경건을 목적하므로 믿음과 경건이 분리될 수 없고, 지혜와 경건이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 경외하게 하는 지혜 주신다는 것이니까 여기서 경건이라는 말 속에는 지혜를 얻기 전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혜 얻기 위한 전제는 오직 믿음 뿐이다. 하나님 경외를 목적으로 하는 지혜에서 그같은 믿음 주면 결실 맺게 되므로 경건과 자연스럽게 맺어진다.
7-8절에 보면 하나님 지혜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을 올바른 자로 부른 것은 이유가 있다. 지혜 주시는 목적이라 할까? 근본 목적이 지혜주시는데 있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지혜를 바라는 자에게 은혜로 지혜를 주시는데, 그 지혜는 보호 기능을 한다. 그 보호 기능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이 방패가 된다고 했다. 또 공의의 길을 지키시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온전히 행하는 자에게 방패되시고, 경건한 자를 보호하신다. 지혜의 보호 기능 통해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적극적 의도가 암시되어 있다. 단순히 하나님 경외하는 자를 보호하신다는 차원을 넘어서 공의를 유지하시려는 태도가 8절 상반절에 나타나 있다.

9절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여기서 앞과 잘 연결 안된다. 끊어지는 것 같다. 형식적 고려가 이 부분 이해에 도움이 된다. 2장 1절에 보면 ~ חקת־םא ינב(베니 임-티파)
5절 יכ ← יבת זא(아즈 타비)
9절 יכ ← יבת זא
이같은 형식적 고려를 보면 ןיבת זא(아즈 타빈)은 7-8절에서의 계속이라기 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5절까지 거슬러 가기도 하면서 새로운 글의 느낌을 준다. 여기보면 “옳고 바른 세계 질서” 이것이 난잡한 철학적 난제이다. 여기서 9절 말씀은 번역이 어렵다.
טפשׁמ(미슈파트) → 법정 용어, 옳고 그름의 기준이다. “공의”라는 번역은 오역이다. 앞의 내용을 전제할 때 지혜를 간절히 외치는 자에게 모든 선한 길을 찾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체가 영생이다. 9절 자체가 선한 것이다. 공의와 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통치자로서 여호와께서 옳고 바름의 하나님이시요, 그의 통치 본질의 속성이 그렇다. 하나님의 세계 내에 최선의 길은 순종하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어떻게 선하고 옳고 바른 길을 깨닫게 될 것인가? 10절에 나온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사람이 옳고 바른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지혜가 그 마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이 지혜가 사람에게 파고 드는 것이다. 지식이 네 마음에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지혜가 마음 속에 파고 들어가 일으킨 변화로 그의 계명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바로 지혜의 성격이기도 하다.

11절 이하에는 7-8절에서 말한 지혜의 보호적 기능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분별(근신)이 너를 지킬 것이요,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를(11절의 말씀) “악한 자의 길과 편벽되이(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12절 (남자)שׁיאמ ךליצהל(레하칠카 메이쉬) - 악한 자의 길과 편벽되이 말하는 자
16절 (여자)השׁאמ ךליצהל(레하칠카 메이솨) - 음녀와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지혜라는 것은 ......이런 자에게서 너를 구원하리라는 의미
잠언에서 여자의 경우는 남자를 유혹하여 간음하게 한다. 여자만 언급하는 것 아니고 남녀를 같이 말한다. 성경에 남녀는 모든 종류, 계층의 사람이다. “남녀(성별), 노소(나이), 종이나 자유자나(신분계층의 다양성)” → 다양성, 포괄성, 모든 계층 총망라.
12절 이하 지혜의 보호 기능에 대해 “악한 길에서 너를 보호할 것이요 편벽된 데서 너를 구할 것이요”

13절 “...어두운 길로 행하는 자”

14절 “악한 자의 패역을 기뻐하는 자”
여기서도 지혜의 보호 기능이 위의 상식과 어긋나는 듯 하다. 악인에게서 보호라는 뜻은 악인이 우리에게 끼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인데 여기서는 악한 길에서의 구출이다. 이는 악인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보호 기능이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로 보호한다 할 때 세상 악행에서 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악한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신다. 보호기능의 뉘앙스가 다르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악행자로부터 피해를 지키는 것도 보호기능에 속하나 우리로 악의 길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근본적 보호기능이다. 행악자의 악행의 피해는 함께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악행을 하지 않게 지키는 것이 근본적 보호기능이 되는 것은 결국은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의 판단 기준, 갚으심을 안다. 참으로 우리가 두려워 할 처벌은 악인으로 인한 해악이 아니고, 영과 육신을 함께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으로부터 보호가 근본 보호기능이다. 하나님의 심판 근원은 악이다. 이 악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근본 보호기능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씀은 우리 안에 간교히 숨겨져 있는 것을 찌르는 말이다. 우리는 선하다고 스스로 여기고, 타인을 악하게 여긴다. 여기서는 너로 하여금 악인의 악에 오염되지 않게 하셔서 행악의 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범죄 길에서 보호하셔서 나의 연약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기보면 12절의 ‘남자(개역성경은 악한 자)로부터 너를 지킬 것이다’ 남자와 관련된 보호기능, 남자의 악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바른 것 버리고 악을 좋아하는 형태로 본다.

14절 남자와 관련된 악은 폭력과 결부되어 있고, 타인을 억울하게 한다. 남자는 힘의 상징인데, 이것이 왜곡되면 폭력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 이것이 왜곡되면 유혹으로 나타난다.

16절 이전에서는 남자와 관련된 악이나, 여기서는 여자와 관련된 악을 말한다.
הירכנ הרז השׁא(이솨 자라 나크리야) 여기서 הרז(자라)는 낮선 자로서 어떤 집단에 속하지 못한 자요, הירכנ(나크리야)는 국적이 다른 여자를 말한다. 이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낮선 여자( = 음녀)” = ‘이방 여인’이다. 어떤 이는 솔로몬이 말하는 직접 대상은 자기 후에 이스라엘 다스릴 왕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왕에서 큰 위협은 정략상 외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인데,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경외를 모르는 이방 여인의 위험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잠언을 이해하자. 물론 후손(후에 왕들) 교육도 포함한다. 여기서 הירכנ הרז(낮선 자)는 이질적으로 다른, 삶의 공유가 불가능한 이질적 대상이다. 이질적인 자와 삶을 함께 하면, 그 자신의 삶 또한 변질된다. 그렇다면 여자와 관련하여 생긴 위험은 그런 종류의 악을 포함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말한 악이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과 이질적 삶을 말한다. 이런 형태의 모든 삶에 대한 경고이다. 남녀의 대조 자체가 모든 종류의 사람이요, 여기 여자와 관련된 악도 모든 종류의 악이다. 대표적인 여자의 악을 말한 것이다.
여성의 죄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범죄의 유형이 여성적이지 남자도 짓는다. 그 본질은 우선 말을 매끄럽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 말 속에는 강한 유혹성이 있는 것이다. 매끄럽다는 것은 그 외에 위선, 거짓이 있다. 그 다음 지적이 17절이다.

17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여기 죄를 여성의 간음죄와 밀착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죄는 어떤 죄의 대표적 성격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과거의 남자를 배신하며 그녀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는다” 여기서 החכשׁ הי(הלא תירב)־תא(에트 베리트 엘로헤하 샤케하)는 ①그녀의 하나님 언약 → divine covenant, 신적 언약, ②그녀의 신적 언약 → 혼인 관계, 혼인이 하나님 차원에서 언약, 혼인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 혼인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 구절이다.
הלא(엘로헤)를 남편에 좁게 국한 시키지 말고 넓게 해석한다면 친밀한 사람의 관계를 배신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불성실한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הלא ①남자와 관련시키면 남편 배신한 죄가 된다. ②혼인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 여성 언급이 여성의 악의 대표로 죄를 언급한다. הלא와 관련시킬 것만 아니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는 불성실한 태도이다. לשׁמ이 비유적 상징적이므로, 여기서 너무 축소해서 하지 말고 넓게 보는 해석이 필요하다.
지혜의 보호기능은 편벽된 길에서와 이방 여인에게서의 보호 성격 기능 이상의 대응이다. 모든 여성 특유의 감정, 유혹으로 사람을 오도하는 그런 종류의 위험에서 보호, 바른 길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위험으로부터 탈출하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한 쪽은 남성적 형태, 다른 한 편은 여성적 형태의 오도에 대하여 말한다. 지혜의 보호 기능에 있어서 목적 중 소극적 목적은 ......에서부터 구출하는 것이며 적극적, 궁극적 형태의 지혜의 기능은 20절에서 언급된다.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우리도 악에서 이처럼 구원한 후 선한 길로 가게하기 위함이다. 물론 선한 것이 무엇이고 의로운 자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구체적 내용은 짐작하기 어려우며 나중에 나오나 미리 이야기하면 선한 길 = 하나님의 뜻 = 지혜. 선하고 의로운 길 걷게 하기 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악에서부터 구조해 내는 것이 지혜의 보호적 기능이 될 수 있는가?

21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올바른 자가 땅에 거하면 악인은 그 땅에서 끊어지고, 소멸된다. 여기보면 매우 중요한 개념이 땅이며, 선하고 의로운 길을 걷는 목적이 땅에 거하기 위해서이다. 이유는 이 땅은 정직과 온전한 자만이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땅에 거한다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 이 땅이라 하는 것이 우리가 노래하는 삶의 터전과 공간으로서,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잘 산다는 그런 뜻인가? 여기 말하는 땅의 특수한 의미는 혹자는 모든 사람의 삶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잠언의 표현성을 강조하는 자들이 이같이 강조한다. 여기 잠언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되어 있는 땅으로, 영역으로 지시하는 듯한 표현이 많다. 그렇다면 여기 21절은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가?
역으로 이 땅에서 의인과 정직한 자만 잘살고, 악인은 징벌을 당하여 그들에게 지상의 삶의 영역이 거부되고 있는가? Yes로 대답하기 힘들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데로 이 잠언은 솔로몬이 교회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백성 위해 이야기한 것이다.
21절의 내용은 신약의 표현과 비교 되는데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여기서 땅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처럼 하나님 백성이 사는 특수한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선한 길을, 지혜의 길을 가야 하는가? 정직한 자만이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이 땅에 사는 것의 조건이 되는가? 우리가 의롭게, 선하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가는가? 신약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많다. 한 쪽에서는 은혜, 한 쪽에서는 율법주의로 가리키는가? 이는 그 나라에 거하기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그 나라에 사는 자로써의 삶의 본질을 가리킨다.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은혜로 그 나라에 속한 자에게서 이것이 나타난다. 의외로 이 순서를 이해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은혜에 속하다가 어떤 경우에는 율법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 나라에 속했다 하면서 삶이 다를 때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은 공로와 관계 아니며, 삶과 관계 아니다.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은혜 속에는 그 심령이 그 나라 삶에 적합하도록 변화되는 은혜가 역시 포함되어 있다.

3장
이때까지는 지혜의 부름과 부름에 대한 응답 방식을 언급했다. 적극적으로 지혜도 추구하는 자세여야 한다. 3장에 보면 1절에서 지혜는 한 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지혜와 더불어 사는 삶,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지혜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따라 사는 사람에게 지혜가 가져다 주는 결과로 ①장수할 것이다. ②생명의 해와 날이 길 것이요, ③평강을 더할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날과 연한이 길 것이다라고 하나 문제는 하나님 시각에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이 어떤 시각인가? 하는 것이다.앞에서 땅이라는 것이 육적 차원의 영역이 아님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 할 때, 생명과 평강이라는 말은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날이 길다’는 오래 계속된다는 지속성을 뜻한다. 지속성이라 하면 무엇을 전제하는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음을 전제한다. 구약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한 육적 생명의 장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복된 삶의 영역에서 흔들린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 땅에서 너의 유업이 견고하리라.
3절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二思一意; 인자와 진리. דסח(헤세드) → 번역하기 까다로우며, 의미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사전에도 이런 식, 저런 식으로 중구난방이다. 그러나 넓고 광범위하게 번역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진실한 사랑, 진실이 구약에서는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뜻과도 같지만 근본 뜻은 견고하다, 흔들리지 않다, 신뢰할만 하다, 믿을만 하다이다. 그래서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묘하게도 2:12절 이하의 내용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12절 이하에서는 바른 길에서 떠나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이웃과 관계에서 억울케, 착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דסח = 사랑이다. 그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언제나 도울 태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이방 여인, 신실치 못함과 관계되어 진다. 여기서 דסח(헤세드; 사랑)와 תמא(에메트; 진리)가 앞에 있는 두 가지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면 재미있다. 앞에서는 지혜의 부정적인 면, 여기서는 지혜의 긍정, 적극적인 면이다. 여기서 신실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은 아니고 하나님과 신실한 사랑이다. 어떤 다른 인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관계는 신실한 사랑이다.
“목에 매며”는 가장 잃어버리지 않으려 할 때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 항상 소중히 여겨 내게서 떼어 놓지 않는다.
“네 마음 판에 새기라”는 그리하면 4절이 된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앞에서 דסח와 תמא가 인간과의 관계만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자세로서 포괄적인 자세임을 알 수 있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을 향한 דסח,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인가? 말씀 →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대개 요한일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그의 지혜를 순종, 그의 계명 순종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 중요한 전 단계를 생략한 표현임을 명심치 않으면 오해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 사랑 말고도 게명 지킬 수 있다. 지키는 척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 = 계명 순종을 완전히 동일시 하면 오해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계명의 순종이 되어지나 그러나 하나님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 신뢰하는 것이다. 신약적 표현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6절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절), “네 모든 길에서 그를 의지하라” “너는 범사에 그

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지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네 모든 삶에서 네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삶의 주관자가, 주인이 되시게 하라이다. 네 삶에서 주인되심, 삶의 목적과 방식 모든 것에 있어서 הוהי(아도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지혜로운 것인가?
나중에 가서 결론 부분에 나올 것이지만 세계의 통치자가 하나님이시므로 이 삶의 틀에서 가장 지혜로운 길은 세계 통치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안전한 길이다. 그분께 우리 삶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네 스스로 지혜로운 것 처럼 하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볼 때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 또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자세인가? 자신의 삶을 자기가 주인으로 여기며, 자율적 인간이며, 자신이 자기 삶을 주관한다. 내 스스로 내 지혜, 힘으로, 내가 옳고 귀중하다는 대로 내 삶을 꾸려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반 세속 철학, 학문이 겉으로 고상해 보여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역하며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 교육의 목표가 자기성취, 자기완성이며 이같은 교육을 인간 삶의 최고 목적으로 둔다. 그러므로 겉으로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본질에 있어서는 마귀적이다. 성경을 볼 때는 괜찮으나 나아가서는 다 넘어간다. 학식있는 자 앞에서 그것 괜찮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고 하는가? 아니면 믿으면 이렇게 되고, 인격이나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답게 되며, 효과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에서도 이렇게 하기 쉽다. 말은 쉽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다 잃으면 유익이 되나 이것 따라 사는 것이 어렵다.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9절 전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하나님으로 네 주인이 되게 하라”하고 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경하라” = 귀하게 여기다. 네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 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소중히 여겨라. 하나님을 네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10절에 관심이 있다.

10절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것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인가?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인데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이라기 보다 영적 축복이다.

11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가 나타난다. 징계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형태의 하나이다. 아버지의 사랑 가지고 우리를 직접 교정하신다. 자신의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 공경해야 한다. 그의 징계하심 즉, 아버지의 사랑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자세이다.

13절 이하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한 지혜를 발견한 자가 왜 복된가?

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은보다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 직역하면 ‘지혜가 장사해서, 무역해서 얻은 것, 지혜가 초대하여 얻은 결과이다’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결과,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14-15절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지혜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것이 금, 은, 산호,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이 지혜가, 진리가 참으로 복되다.

16절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부귀, 영화 가진다 하니” 지혜에는 관심없고, 교회에 잘 나가고, 목사님 시킨대로 잘하고, 헌금 잘하면 이것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 보면 장수 = ךרא(오렉), 부는 항상 돈을 생각하나 부귀는 풍요로움, 결핍없는 상태이다. 영화 = דובכ(카보드), 전적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요함, 존귀의 길이다. 그 길은 사랑스러운 길이요, 여호와 보시기에 사랑, 평강의 길이다. 흔히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평강은 가정 화목, 사랑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이런 수준 못벗어나면 안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지혜이다.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생명나무 붙잡는 자, 생명나무는 생명과가 열리는 나무이며, 생명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소유하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가?

19절 이하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것, 바다를 만드신 것, 비, 이슬, 삶의 공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다.

21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내 아들아 분별하여 지키라”

2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 영혼을 살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며”

23-26절 이미 앞서 언급했으나 19절 이하에서 지혜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형제되셨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셨다. 형제 = 동일한 본질을 교리로 이야기하는 것, 그러나 구제시 믿는 자에게만 구제하는 것 아니다. 다른 무엇이 있다. 그 이유는 그 동일한 지혜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다스리신다. 지혜로 다스리신다.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 살리고 아름답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체가 지혜로운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그 내용을 말씀하신다.

27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이유를 향한 דסח, 앞에서는 지혜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삶의 자세에서 דסח와 תמא를 말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이 자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본절에서 “인자와 성실”의 자세는 무엇인가? 선은 주인으로부터 거절되어서는 안된다. 선의 주인은 내가 베푸는 선을 꼭 필요로 하는 자, 도움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 거절해서는 안된다. 특히 네가 도울 힘이 있을 때 거절하지 말라.

28절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갔다 다시 돌아오라 내가 내일 주리라” 하는 태도도 안된다.

29절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謀害)하지 말며”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라 그가 너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는 더불어 사는 삶의 원칙이다. 그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다.

30절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나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시비, 논쟁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비, 논쟁하는 것이 가하나 시비, 논쟁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 있으므로 시비, 논쟁에 가담치 않겠다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누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나 몰라라 해서는 안된다.

31절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편벽된 자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와 친밀하시기 때문이다.

32절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느니라” ודוס(수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과 늘 영적 깊은 교통 가운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다.

33절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의인의 밭(집)에는 복이 있다”

34-35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顯達)함은 욕이 되느니라” 여기 보면 이웃에게 어떠한 자세 가질 것인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우라. 인색한 마음으로 차일피일하지 말라. 까닭없이 다투지 말라. 악한 사람 부러워 하지 말라. 이것은 참 지키기 어렵다. 어느 한 파당이 있어서 나쁜 짓으로 중요한 자리 차지할 경우에 나는 가만히 있으면 나는 다 빼앗긴다. 그러므로 나도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악인이 그런식으로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이런데 넘어가서 망치는 자 처럼 어리석은 자 없다. 선하게 있다가 남 하는 것보다 함께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회에 속한 자가 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자기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 망할 것이다. 무엇이 부러운 것인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행악자가 잘되는 것 보고 행악을 행하고 내가 분을 내고 하면 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웃을 향한 바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해답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성실한 삶이 결국 하나님과 관계된 말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관련지어지고 만다. 이웃과 잘못, 죄, 악에 대해 사람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종속된 무엇이요, 거기에 포함된다. 지혜가 이처럼 윤리적 성격인 사랑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은,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지혜라 할 때 약삭빠른 것이나 지식을 생각하는데 지혜라는 것은 약삭 빠르게 굴어 무엇인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우리도 잘하다가도 자긍하면 옛날의 부리던 솜씨로 돌아간다. 망하는 길이다.
복습
1-8장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1장 서론 지난 후 지혜의 부름이 나타나고 8장까지 이어진다. 1:20절부터 지혜의 부름, 초청이 나오고 이후는 지혜의 응답 자세를 말한다. 3장에서는 지혜를 계속 기억할 것을 권고하고,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13절 이하부터는 지혜 획득자의 복됨을 말한다. 3장에서 어떤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간에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사랑과 신실함”으로 말한다.
어떤 대상에 지혜로운 태도는 “사랑과 신실함”(דסח와 תמא)이다. 이 둘은 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신실함”은 이사일의(二思一意)이다. 이것이 하나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로운 삶의 원칙이다. 다같이 하나님, 이웃에 대해 사랑과 신실함이다. 3:5의 신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이냐 하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네 생활을 의지하지 말고”라는 말을 통해 전자의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 자세를 6절에 보면 “모든 일을 행함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4장
2장 후반부에 나온 내용을 확대, 반복하고 있다. 초두인 1-3절을 보면서 우리가 주의하여 짚고 넘어갈 것은 내 말에 귀 기울일 것을 권고하면서 “나도 내 부모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부모는 선생의 전형이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암시인가? 지혜의 전승, 지혜를 물려받은 것이다. 지혜의 전승적 성격, 또는 전승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우리가 이미 앞서 말했듯이 부모는 모든 교육자를 대표하는 표현이요, 부모가 교육자의 전형으로 나타난 것은, 교육자는 부모의 권위, 부모의 상징인 자기 자식 사랑으로 피교육자를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상적 교육자상을 부모에게 찾았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모든 교육자의 1차적인 것은 부모이다. 에베소서 5장 마지막과 6장 초두에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말한다. 자식은 부모 공경하고 부모는 주의 훈련으로 양육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현재 교육은 변질되었고, 실제 교육은 양육의 한 부분이요, 진정한 교육은 양육과 일치한다.
부모가 1차적 책임있다. 자식을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로 해야 한다. 부모가 1차적 교육자요, 책임자이다. 현재 교회 교육이 각 부서로 나누어 있으나 이것이 부모의 1차적 자녀 교육의 책임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부모의 자녀 교육을 통해 지혜가 전수된다는 것은 전승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지금 지혜를 교육하는 부모 자신도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 한다. 지혜의 전승은 교육자의 교육 통해 전승되는데, 참된 의미에서 지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이시고, 이것이 성경이나 부모 통해 교육으로 지혜가 전승되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통해, 그가 세우시는 여러 직분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과 사람을 통해 행하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님이 하시나 사람을 통해 하신다고 할 때 이 두가지 요소가 균형갖기 보다 역방향으로 기울지 않았나 한다. 성경은 은혜 베푸는 자가 하나님이요, 모든 시선이 그분에게 가야한다. 그런데 인간 쪽에 너무 치우친 듯 하다.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통해 일한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 반대 방향도 나타난다. 하나님 역사의 직접성을 간과하고 약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이처럼 지혜가 교육자 통해서 전수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라할까, 하나님의 대리 통치 부류가 ①제사장, ②선지자, ③지혜자로 나누어진다. 지혜자가 제사장, 선지자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leadership이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지혜자가 어떤 공적 직분을 맡았는지 확인되지 않으나 예레미야서에는 제사장, 선지자와 더불어 언급되므로 직책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그들은 상담자로 표현되기도 한다.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했다. 즉, 왕의 참모 정도였을 것이다(ץעי;야아츠; 복수형태는 ץעיי;이아츠; 상담자). 이는 5절과 7절에서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7절 הניב הנק ךנינק־לכבו המכח הנק המכח תישׁאר(한 문장 - 지혜가 제일이니, 연계형 - 지혜의 시작은
(레오쉬트 하크마 퀴네 하크마 우베칼-퀸얀카 퀴네 비나)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지혜를 사라고 하는 적극적 권유를 2장에서 배웠다.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 얻고,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이요, 출발이다. 지혜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나 인간편에서 얻으려는 적극적 자세를 동시에 언급한다.
6절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를 사랑하라”
8절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지혜를 품으라”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인간의 적극적인 추구의 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 둘은 연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인간편에서 적극적 자세가 하나님이 주시면 개입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인간편에서 적극적 자세는 내 의지,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이런 개념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성과 상충되게 여긴다. 지혜는 인간 의지로 도달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대전제 되었다면 인간의 자세는 하나님을 지혜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지혜를 구하는 믿음의 자세이다.
하나님이 지혜의 근원이요, 하나님이 지혜주신다는 하나님 경외의 자세를 가질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그것도 하나님이 세운 일반적 보편자인 부모, 선생의 교육의 전승을 통해 주신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믿는 자에게 있어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하나님편의 은혜주심과 인간편에서 구하는 것이 결합될 수 없는 이중적 자세로 본다. 그같은 생각은 인간의 진정한 의미의 적극적 자세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 떠나서는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하나님 향한 인간의 유일한 자세는 믿음의 자세 뿐이다.
“사랑과 신실한 마음”이 하나님께 타나날 때는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나타나고, 하나님이 모든 일에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자세와 연결된다(약 1:5).
이런 면에서 세속 교육의 때를 벗지 못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적극적 인간 자세의 혼동을 갖고 온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것이 깨어지지 않을 때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7절에서는 “......지혜를 얻으라” 신약에서는 ‘값진 진주를 얻으라’ 고린도전서나 골로새서에서는 복음 자체가 지혜요, 복음의 본질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지혜라고 한다. 7절의 말씀은 지혜를 최우선의 것으로 생각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10절 이하는 앞의 말의 반복이다. “악인의 길에서 떠나라......” 지혜로운 자의 제 1원칙이다.
17절 이하에는 지혜롭지 못한 자의 삶이 악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한다.

5장
두번째는 2장 말미에서 말했듯이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이방 여인”의 의미를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했다. 이방인을 성경에서는 불신자, 하나님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한다. 본질에 있어서 이질적 존재이다. 존재의 새로움을 알지 못한다. 즉, 중생, 새 생명을 모른다.
3-6절 이방 여인의 특징에 대한 설명,
4절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위선적 모습, 여기의 근본적 경계의 말은 하나님의 교회와 근본적으로 이질적 요소를 조심하라는 말이다. 특히 이방 여인이라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케 하는데 여성적 세력, 여인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아름다움이다. 그 영향력은 달콤하고 매끄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이 아름다움이 변질될 때 무서운 무기가 된다. 외향으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나 실상은 칼처럼 사람을 상하게 한다. 이것을 멀리하라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7-8절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아예 접근을 하지 말라. 달콤하고 매끄럽게 유혹하는 그런 형태의 죄에 빠지지 않는 것은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15-19절 실제적으로 신자의 삶(부부관계)에 적용가능하나 이것은 이방 여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여기 “아내”는 이방 여인을 폭넓게 이해할 때 세상 쾌락에 취하지 말고 교회의 아름다움에 만족하라. 너에게 주어진, 교회에 맡겨진 참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라.
잠언은 부모 자식간의 관계로 이해하기 쉬우나 이스라엘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때 잠언은 그 적용성이 넓어진다. 남녀간의 규범이 신실성에 있어 이방 여인의 유혹에 안넘어가고, 아내와 동거동락은 교회에 속한 자로 믿음을 지키는 신실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21-23절 이방 여인에게 유혹당하지 않고 본 아내를 사랑할 이유가 21절 이하에 나온다. 여기보면 인과응보가 하나님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와 직결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이다.

6장
1절 이하 이웃의 보증을 서는 일에 대해 나온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여기서 “이웃”은 그 다음 구절에 의해 규정된다. 어떤 종류의 이웃인가? 그는 외인이다. 이것은 이방 여인과 연결된다. 이방인으로 표현되는데, 이방의 이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이다. 하나님 백성과 질이 다른,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런 자이다. 보증을 선다는 것은 그 사람을 신뢰하고 동사(同事)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보증 취소”는 세상 사람과 교회에 속한 자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 생각을 말라. 신약에서는 이방인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 권고로 악인을 멀리하라는 부류의 권고이다. 너와 본질적으로 다르고 신뢰가 불가능한 자와의 약속은 잘못이므로 약속을 취소하라는 것이다. 교회 밖 사람, 이질적인 자와 같이 말라. 그것은 스스로 굴레에 얽매이는 것이다.
26절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정숙지 못한 유부녀를 좇지말라. 유부녀와 관계는 불륜의 관계이다. 정당치 못한 행위의 대표이다.

7장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자는 유혹이 교묘하게 나온다. 정숙하지 못한 여자의 접근 방법은 어떠한가? 그것은 7절 이하에 나온다.
10절 유부녀가 창기의 옷을 입고 접근한다. 이 여자는 집 안에 머무르는 일이 없다. 12절 이하에도 하나님께서 내 서원한 바를 들으셨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이 하나님 일이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다. 하나님이 간음하도록 허락하셨다고 한다.

8장
1절 이하의 표현과 1:20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지혜의 초청, 부름의 장소가 나온다. 지혜의 부름의 장소를 말씀하기를 길가, 높은 곳, 모든 사람의 시선이 들어오는 곳, 늘 접촉하여 사는 일상 속 등이 지혜의 삶의 장소, 지혜의 초청의 장소이다. 이는 지혜의 보편성, 누구에게나 개방된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지혜를 획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혜가 진실, 올바름과 긴밀한 관계에 있고 편벽, 왜곡 된 것과는 반대된다. 지혜라 하면 규범적 성격과 관계없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윤리성, 옳고 바름과 떨어질 수 없고,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윤리성만 아니고 하나님을 근거한 믿음의 자세이어야 한다.
15절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이하에 보면 땅의 제왕들이 지혜를 가지고 그들의 통치를 베푼다고 한다. 이 저변에는 어떤 전제가 있는가? 왜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지혜로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언급된 열왕, 통치자들은 하나님께 세계 통치의 위임을 받은 대리 통치자이다. 모든 지상 통치자가 지혜로 다스릴 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 다스리는 통치는 의, 신중, 분별, 상황에 적절한 판단력이 지혜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22절 이하에 보면 지혜가 한 인격으로 제시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지혜의 근원, 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 근원적 답변을 한다. 표현을 의인화시킨다. 마치 인격 처럼 취급되어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가 의인화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혜 자체의 인격성을 말한다고 못박을 것은 아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지혜를 의인화해서 부른다.
22절의 전후 문맥을 보면 지혜와 지혜 추구자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로 추구한다. 지혜가 인격적이 아닐 때 창조했다는 것은 창조된 무엇이다. 지혜를 하나님 속성 중 하나라 한다면 이는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는 창조된 것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가 한 인격과 관련된다고 할 때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다. 무관하지 않는 이유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지혜에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여기서 창조했다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인가?
יננק(콰나니); 창조하다, 획득하다, 존재하다. וכרד תישׁאר(레오쉬트 다르코); 특정한 시간에 없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 초월해서 영원적으로 발생하신의 의미이다. 이 표현 속에는 성자의 영원적 발생이 포함되어 있다. יננק와 성자의 영원적 발생과 큰 무리가 아니다. 창조 사역에 인격으로 참여하였다는 가까운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히 넓은 기반 위에 이해된다.
23절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창세 전에 나는 태어났다
1-21절까지 지혜를 말한다. 22절에서 독특한 지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은 모든 지혜가 한 인격 속에 환원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신약 골로새서 2:3에서도 증언한다. 한 인격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가 축적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으로서 지혜임을 말한다. 지혜의 본질 자체가 인격으로 연결되는 것은, 지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진리, 길, 벗이다. 또 이런 내용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된다. 세계 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할 때 하나님 곁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다. 30절에 ןומא(아몬)을 쓰면서 건축자의 계획대로 실현하는 것으로 말한다.
지혜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하나님 계명, 하나님 경외, 의로운 삶의 동의어가 된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혜는 삶의 기술이라면 성경에 그대로 적용되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혜가 삶의 기술로 어떻게 삶을 바로 사는 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되는가? 쉽게 말해 하나님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이 지혜의 삶이 되는가? 세계와 그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삶의 질서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가하는 지혜, 지식(사물을 관찰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포함된다. 어떤 존재의 참된 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 피조물의 일부인 물리적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도 믿음 안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참된 본질은 하나님만 아시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알 수 없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하고 지혜, 지식의 출발은 하나님이다. 모든 것의 지적 작업은 하나님 경외하는 믿음에서이다. 하나님 경외가 지혜, 지식의 출발이라 할 때 포괄적 의미가 있다. 8장은 지혜의 가장 근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