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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윤종하

메르시어 2023. 5. 17. 11:40

하나님의 나라- 윤종하

2011-06-28 16:11:48


 

하나님의 나라1

성경말씀 마태복음 4장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선포하신 메시지가 바로 이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데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굉장히 막연한 개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찾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일생에 외치실 메시지의 바로 그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복음서를 쭉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주로 천국에 대해서 설명하셨던 것을 잘 알 수 있고요

사도행전에 넘어가서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대로

제자들이 다른 무리들에게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할 때에

특별히 그 그리스도의 왕권이나 천국에 대한 것을

잘 설명했던 것을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선포의 의미를

일단 이 문맥 속에서 정리하는 것이 첫 시간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교안에 질문이 먼저 조금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첫 번째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하늘나라 또는 천국이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이 어디 가만히 있느냐

아니면 천국이 오고 가고 하느냐

왜냐하면

여기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이

내가 천국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말이냐

아니면 천국이 이쪽으로, 나에게로 왔다는 말이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의 본뜻은

우리가 천국으로 간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은 가만히 어디 붙어 있고

우리가 옮겨간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오는 것이냐

그럼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것이 천국이냐 라는 이야기지요

물론 이것은 종전에 우리가 어떤 하나의 별처럼

천국을 땅덩어리로 인식해 왔기 때문에 질문하는 질문입니다

죽어서 우리가 천국에 간다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천국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냐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천국이 오지 않고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온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을 해야 되겠지요

천국은 하늘 저기 먼 곳에 있다가 이 땅으로 내려 왔느냐

그래서 천국(天國)이 지국(地國)이 되었느냐

하는 질문을 해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그 전에는 천국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냐

천국이 그 전에도 있었다는 말인가 없었다는 말인가

새로 생긴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있었는데 가까이 온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 아래 두 개의 메모를 해 드렸는데요

왜 그런 질문이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지요

이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우주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뭐가 어디로 온다는 말이냐 하는 문제가 있지요

하늘과 땅이 여기 있는데 하늘과 땅이 새로 온다는 말이냐

아니면 이 우주에 또 하나의 천국이라는 것이 따로 멀리 있다가

그것이 처음으로 가까이 온다는 말이냐

또 죽은 성도들은 어디에 가 있느냐 라는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죽은 성도는 천국에 가 있느냐

그렇다면 천국은 우리 쪽에 있지 않고 저 쪽 딴 곳에 있느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천국이 어디 있었고

죽은 성도들은 어디에 가 있었으며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천국이 어디로 오고 있고 죽은 성도들은 그럼 어디로 와야 하느냐

그런 문제가 생기지요

질문 자체가 좀 이상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에서 발전시킨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는 말씀과 함께

회개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물론 심판의 날이 다가왔으니까 회개해야 된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 이 말씀은 심판의 때가 왔다는 말이냐

실제로 예수님이 초림하신 것은 심판의 때가 아니었지요

그것이 심판의 때라고 기대했던 구약적인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면 심판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도 보면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오신 초림과 다시 오실 재림 사이에

그 부분에 대한 차이가 있지요

처음 오셨을 때는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오셨고 다시 오실 재림 때에는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 부분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혼란이 조금 있기 때문에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오늘 조금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때 처음으로 우리에게 심판이 행해지느냐 라고 하면

지금 예수를 믿고 죽은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갔다 라고 한다면

천국에 이미 들어갔으면 끝난 이야기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할 때 들어간 사람을

다시 끌어내서 밖에 세워 놓고

심판한 후에 다시 들여보낸다는 말이냐

하는 문제가 있지요

심판이 도대체 언제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고 지옥에 가고 이렇게 된다면

지금은 어디 가 있느냐 하는 문제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묘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자꾸만 나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대한 오해가 계속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 회개하라는 말은 그런 심판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이냐

아니면 딴 의미를 갖고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 회개라는 것이 꼭 어떤 각도에서 다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회개와는 실제로 어느 정도 중요한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부분을 우리가 조금 더 인식해야만

천국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37절~41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거기 끝부분에 가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런 말씀을 하고 있지요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하고

앞부분에 있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된다는 조건적인 설명하고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이 패역한 세대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을 말하지요

나중에 누가복음 4장 설명할 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마는

구원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어디’로 구원되느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천국에 대한 개념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 라고 할 때 무엇을 의미하느냐

기분이 좋다는 말이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서 나는 구원 받았다 라는 말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셨다는 뜻이냐

물론 그것도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신다는 말이 과연 무엇이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실제로 물질적인 개념으로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표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회복해서

교제를 하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오셨다’ 라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들어오고 나오고 하는

공간적인 이동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라고 할 경우에

그럼 어디에서 어디로 구원되었다는 말이냐

하는 문제가 또 있어야 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또 딴 부분을 즉 ‘어디에서’라는

구원되기 ‘전’의 상태와 구원된 ‘이후’의 상태에 대한 설명해야 되는데

그 전의 상태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부분도 같이 다루어져야만 하겠는데

여기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해서

무엇인가 잘못을 회개하고 그러고 나면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맺어진다 라고 해서

그리스도와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어떤 국가라는 개념으로 묶어주고 있지요

그런데 이 국가는

회개라는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어떤 물질적인 전제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인 전제 조건을 세우고 있지요

윤리성을 갖고 있고 인격적인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있어서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이지요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어떤 하나님의 보호와 통치를 받는 상황에 들어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다시 조금 설명합시다

천국이라는 것이

오는 것이고 가는 것이고 이렇게 이동성이냐

성경에서는 천국을 이동성으로 설명하고 있고

또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표현할 때는

꼭 천국은 장소성으로 가만있고

우리가 이렇게 들어가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천국이 온다 라는 표현도 같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어떤 장소에 문을 열고 드나드는

그런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그런 영토적인 물질적인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요즈음 많은 신학자들이 바실레아 라는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은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역이라는 말로 하기 때문에 오해를 받지 않는데요

더 쉽게 설명합시다

영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실레아 라고 하는 이 천국이라는 말은

영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래 기본 뜻이 그렇다 이 말입니다

물론 영토가 뒤에 따라오겠지만

그 영토를 두고 천국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해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어디까지나 통치 개념을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왕’이다 ‘왕권’에 대한 이야기이지

어떤 땅덩어리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왕권이라는 것은

이동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 말이지요

어떻게 이동하느냐?

옛날식으로 말하면 어느 왕국이 이웃 나라에 쳐들어가서

그 나라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침략이라고 하지요

침략해서 정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침략해서 정복할 때

국민을 침략해서 국민을 정복하느냐

아니면 땅을 침략해서 땅을 정복하느냐 하는 문제는

좀 구분해서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전쟁과 평화’라는 영화에 보면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소련을 침략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전쟁에 자신도 별로 없지만

아주 묘한 전략을 써서 모스크바를 다 비워두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힘들여서 침략해 들어갔더니 빈 성 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다 실어 가버리고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서 이제 겨울이 들이닥치지요

나폴레옹이 굉장히 흥분해 있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왜요?

영토는 다 차지했지만 백성은 저쪽으로 피하고 없으니까

백성을 차지하지 않고는 이 영토를 차지하는 것은

결국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영토는 주인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주인이 없는 영토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물론 아무도 주인이 없는 것 내가 차지하면

내 영토가 확장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데요

사실 영토가 확장된다는 말은

국민이 많은데 땅이 좁을 때

땅이 더 필요하다면 있는 사람들을 어디로 몰아내든지 죽여버리고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서 농사도 짓고 사는

그런 의미에서 영토 확장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천국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살 지구가 좁다든지

땅이 모자라서 천국은 영토로 확장되어야 하고

밭이 더 필요하다든지 논이 더 필요하다든지

집을 지을 곳이 더 필요하다든지

그런 의미로서 천국을 이야기 할 수는 없지요

적어도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할 때는

그 나라 국민을 완전히 침략해서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원래 지배자였던 왕이나 황제나

이런 사람들이 다 처형되어 버리고

새로운 왕이 나의 백성으로 내 통치하에 승복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지금 하늘나라 천국이 왔다 온다 이런 표현은

그리스도라는 천국의 왕이

다른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접근해 와서

그 국민을 정복해서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여기에 ‘온다’ 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 이거지요

이것은 그의 왕권의 확대이지요

왕권이 누구에게 확대되느냐

영토가 아니고 어떤 새로운 국민에게 확대되어 가는 부분이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말은

왕이신 그리스도와 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될 우리와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지 우리가 살 땅을 두고

우리가 이쪽 땅에서 저쪽 땅으로 옮겨 다닌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천국은 어디 있었느냐?

있었느냐? 없었느냐?

우리로 봐서는 없는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백성이 아니었으니까 천국은 우리에게 없었다 이 말입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드디어 우리는 그 분과의 새로운 왕과

신하의 또는 백성의 관계 속에 들어가면서

이것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천국이라는 의미로 등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성도가 천국에 간다라는 말은 진짜 모호한 말입니다

죽은 성도가 천국에 간다 그 말은

살아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왕국 백성이 될 수 없고

죽고 나야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되느냐? 그건 왜 그러냐?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빨리 죽어라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라 이렇게 표현하셔야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살아있을 때 회개해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럼 회개하라는 말은 무엇이냐?

쉽게 말하면 나에게 승복하라 항복하라 이 말이지요

두 손 들어라 이거지요

대항할 생각하지 말고 항복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아라

전쟁할 때 바로 그런 모습이지요

투항하라 투항하는 것을 회개한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투항이 그럼 무엇이냐?

지금까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시는 왕의, 천국의 왕인 그리스도에게

투항한 일이 없고

그 분에게 지배를 받거나 복종한 일이 없고

나는 딴 어떤 왕을 섬기고 있었거나

우리끼리 어떤 국가를 만들어서 우리끼리 어떤 일을 했거나

아니면 내가 스스로 나의 왕이 되었거나 그런 상황에 있었지요

또는 사탄의 백성이었거나...

그런 내가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투항해 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야 되고 하나님을 섬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딴 사람을 왕으로 세웠기 때문에 통치권의 영역에서 본다면

참 천국의 왕이실 그 분을

처음부터 우리는 등지고, 반역하고 나와서

우리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투항하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거지요

항복하고 돌아오라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왕을 세운 것이 잘못입니다

다시 그리스도 당신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두 손을 바짝 들고 용서를 비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은 통치체제에 대한 승복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항복하고

천국 백성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죽은 후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죽은 후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나는 이야기지요

살아있을 때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 회개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우리가 회개하면 회개하는 순간에,

투항하는 순간에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천국에 들어와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이전이나 이후나 거기는 다른 차이가 없지요

죽기 전부터 그 나라 백성이니까

죽은 이후에 부활해서 계속 그 나라 백성으로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내 몸의 변화라든지 그런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뿐이지

내가 통치를 받을 왕과 나의 관계는 죽은 이후에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는 개념은

천국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전도하실 때도

‘당신이 오늘 밤에 죽으면 내일 천국에서 깨어날 자신이 있습니까?’

그런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항복하고 천국 백성이 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고 깨어난 후에

당신은 영원한 멸망에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맞겠지요

이 마태복은 4장 17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태가 마태복음 1장에서부터 어떻게 기록해 왔는가를

조금 더 살펴봄으로써 다른 뜻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족보가 나오고

족보가 나온 후에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부터

그 분의 이름이 예수다

즉 구세주다 구원자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구원사역을 할 구세주냐? 라고 하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자체가 이미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백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말이 무엇이냐?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원래 그리스도가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가 통치해야 될 백성인데,

그리스도가 선택해 둔 백성인데,

이 백성이 자기의 왕을 거역하고 사탄을 섬기고 있고,

세상을 섬기고 있고,

자기를 섬기고 있고,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 왕이 자기 백성을 다시 항복받으러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러 오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22절~23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비로소 그리스도가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임마누엘의 목적 때문에 오시는 것이지요

그럼 함께 계시러 하나님이 오시는 거지요

물론 하나님이 오신다 가신다는 말도

공간적으로만 이해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다가 어디로 오시며

전에는 어디 계시고 지금은 어디 계시냐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합니다

이것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왕이 되시고 왕권을 회복하신 이후에

우리에게 항복을 받으신 이후에

이제는 우리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군림하신다

라는 뜻이 임마누엘의 뜻이지요

그래서 어디엔가 포로로 되어 있던 또는 다른 왕을 섬기고 있던

자기의 백성을 구출해 내셔서 다시 자기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자기가 통치하시는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다

라고 1장에서 소개하고 있고

2장에 가면 그 예수가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왕에게 경배하러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지상에 있는 왕국의 왕인 헤롯이 발칵 뒤집혀 졌습니다

왕궁에 소란이 일어났지요

‘내가 왕인데 어디에 또 다시 왕이 태어나느냐?’

‘내 왕자도 아니고 누가 왕이냐?’

물론 이때는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입니다

그의 마지막 해입니다

주전 4년인데 B.C. 4년 3월에 대 헤롯이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것은 아마 3월이거나 2월이거나 그럴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략 그 정도로 유추할 수 있는데

이 대 헤롯이 죽기 조금 전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

라고 고한 것이지요

이제 자기는 죽을 날이 다 된 사람이지요

나이가 좀 들었고 이미 자기 아들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자기 아들들 중에 세 아들에게 이스라엘 영토를 나누어 주는데요

아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베뢰아를 차지하고

빌립이라는 사람이 드라고닛과 다른 지방을 차지하지요

그렇게 세 아들에게 자기의 영토를 나누어 주게 되는데

바로 나누어 주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이미 내 아들이 다 커있고

그들에게 나누어 줄 준비가 다 되어 있고 한데

도대체 어디에 또 왕이 나타났다는 말이냐?

심각한 문제지요

그러나 헤롯이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써

유대나라 사람들이 메시야를,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리는 없겠지요

그 왕이 누굴까?

그것은 전설처럼 그냥 전해오는 말일까?

실제로 왕이 올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의 꿈처럼 늘 내세우고

필요할 때마다 백성들을 격려하는 하나의 막연한 슬로건일까 뭘까?

온다는 메시야는 한 번도 온 일이 없었으니까 뭘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드디어 어느 날 갑자기 먼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와서

‘우리가 별을 보니까 왕이 태어난 것이 분명한데 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헤롯이 긴장했었지요

그리고는 이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오신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까

왜 세상에 있는 왕이 당황해 하고

또 이 왕과 함께 권세를 장악하고 있던 대제사장이라든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이런 사람들이 왜 당황해 하면서

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울까?

자기들이 갖고 있던 왕권 또는 통치권 자기들의 권력이

박탈당할 위험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천국이라는 말은

어떤 땅이 저기 있는데 저쪽으로 간다면 무슨 상관이 있어요

가고 싶은 사람은 다 가시오

이 땅은 내 땅입니다

이렇게 하면 간단한데

아니고 천국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 왕이 자기 백성을 통치하러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거지요

뒤에 가면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 그런 말도 있고

천국이 침입하는 비슷한 표현들을 쓰고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바로 왕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침략하고 또 침범당하기도 하고

서로 그러한 왕권 때문에 오고 가는 관계지요

권력의 문제입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이제 드디어 예수님이 조용하게 30년을 지나시다가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실 나이가 되시자마자

드디어 나타나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말은

‘나에게 항복해라’

‘나는 내 백성을 다시 건지러 왔다’

‘너희를 통치하러 왔다’

‘내 백성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 억압하고 있는 사람은 내 백성을 내놓으라’

그런 뜻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포로 되어 있을 때, 노예로써 고생할 때

모세를 보내서 바로에게 하나님이 ‘내 백성을 내놓으라’

‘너도 왜 내 백성을 깔고 앉아 있느냐? 왜 탄압하고 있느냐?’

그것은 ‘너의 백성이 아니라 내 백성이다 내놓으라’

그렇게 말씀하신거나 마찬가지지요

거기 ‘고센 땅을 내놓으라’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말이지요

내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셨지요

같은 말씀을 마가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4절~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장 17절과 똑같은 내용인데 표현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표현이 다른 이유는 예수님이 한 문장만 말씀하고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쭉 이렇게 30분을 하셨거나

아니면 한 시간을 하셨거나

아니면 여러 번 나누어 하셨거나 첫 선포를 하셨는데

그 선포의 내용을 마태가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고

마가는 두 문장 정도로 조금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누가복음에 가면 조금 더 길게 표현이 나옵니다마는

14절에 이런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라고 해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용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을 선포했다’ 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과 ‘천국’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같은 것이냐 아니냐?

같은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같은 것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는 그리스도 다음에 전치사가 빠져 있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렇게 되어 있는데요

제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렇게 번역해야 맞습니다

그럼 여기 앞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다’ 라고 되어 있고

앞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 앞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라고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복음이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외치셨으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건 같은 것으로 쉽게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하는 말이 뭐냐?

물론 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되는 인물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애를 또는 사역을 처음 시작하시는 것이다

라는 의미에서 시작이라고 물론 볼 수 있지요

즉 마가복음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책의 시작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단순히 예수님의 전기를 쓰기 시작한다 라는 의미의 시작이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셔서 어떤 일을 수행하는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는 그 시작이다

라는 의미가 있고

그렇다면 복음을 시작한다는 말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과

천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을 조금 살펴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우리가 천국이 온다 라고 말씀했는데

여기 마가복음 1장 15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에

어떤 일이 ‘착수된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런 표현이 따라 나오지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는 말은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보류하고 예고만 하고

기다려오던 일이 있었습니다

구약에 오랫동안 하나님이 어떤 일을 예고하시고 기다려왔는데

그것이 드디어 등장할 때가 찬 것이지요

여기 ‘때가 찼다’ 라는 말은

‘때가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그냥 때가 닥쳐왔다는 의미이기 보다

조금 더 포괄적이지요

쭉 내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해 왔는데

그 예고한 일이 성취된 때가 왔다 이런 말이지요

단순히 시간이 온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이루어질 그러한 때가 되었기 때문에

때가 성취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보면 천국은

이제 처음으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그 권력을 또는 국력을 펴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고 ‘통치’하실

그런 일을 시작하시겠다 라는 의미를 여기 말하면서

그것을 바로 ‘복음’이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굉장히 우리가 억압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면

물론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기분 좋게 어떤 나라의 백성 노릇할 수 있고

내가 나를 섬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어떤 때는 사탄에게 매여 있는 내가

굉장히 초라하고 가련하고 불행하고 괴롭고

그런 상황에서 오래도록 구약의 백성들이 메시야의 약속을 들어왔기 때문에

‘아, 진짜 좋은 왕이 와서 좋은 나라를 세웠으면 좋겠다’

‘이 세상 나라가 참 불행하고 살기가 나쁘구나’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좀 더 이상적인 사회를 늘 꿈꾸지요

좀 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애를 쓰고

정치를 개혁하려고 애를 쓰고

좀 더 이상적인 정치를 자기 나라에서 세우려고

나라마다 노력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나라는 더구나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이상적인 나라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찼다’

‘너희들이 소원하는 이상적인 나라가 드디어 실현될 때가 왔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을 보낸다’

또는 예수님은 ‘내가 왔다’ 이렇게 표현해서

마가복음 1장에서는

천국이 드디어 권력을 행사하는 시작이 된다 라는 의미에서

복음의 시작이다

또는 때가 찼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고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복된 소리지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회개하고 오라는 말은

이번에는 딴 말이 하나 더 붙어 있습니다

‘복음을 믿으라’ 하는 말이지요

이 복된 소식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처럼 ‘믿으라’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 믿으라는 말은 ‘피스추어’(?)라는 동사를 쓰는데요

이 동사 뒤에 목적어가 대개 오지요

목적어가 때로는 그리스도가 등장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등장할 수도 있고,

여기는 복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으라’

또는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런데 이 믿는다는 동사 뒤에는

세 가지 형태의 문장 구조로 대개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바로 목적어가 직접 옵니다

이러이러한 사실을 믿으라

내가 행한 일을 믿으라

내가 한 말을 믿으라

그러면 바로 그 자체가 목적어로 등장하는데

그러지 않고 그 목적어와 이 동사 사이에 전치사가 올 때가 있습니다

두 가지 형태로 오는데

하나는 삼격 전치사가 오고 하나는 사격 전치사가 옵니다

그냥 in (헬라말로 엔) 하는 것은 ‘안에’ 이런 말인데

그런 전치사가 올 때도 있고

여격(데이티브) 전치사가 오는가 하면

목적격 전치사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into 라는 전치사입니다

이 사격 전치사가 오는 일은 좀 특이한 경우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때는

거의 이 into 라는 전치사가 따라옵니다

‘하나님 안으로 믿으라’ 이렇게 번역해야 맞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읽으시다가 그런 표현이 나오면

아마 번역하다가 번역이 좀 이상하게 되었는가 하고

적당히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예수 또는 ‘그리스도 안에 믿어서’ ‘그리스도 안에 믿으므로’

이런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 믿는다는 말은

그냥 대상 자체를 내가 긍정한다 인정한다

라는 그런 의미에서도 믿는다는 표현을 쓰지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쓰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분 인격체와 나와의 관계를 표현하면서

사격 전치사를 사용하면서

그 분과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 안으로 믿는 거지요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신뢰한다 들어간다

그 분에게 의존한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별 무리가 없이 이해가 쉬운데

여기는 복음을 믿으라 할 때도

여기에서 바로 목적격으로 나오지 않고

into 라는 전치사가 따라 나옵니다

복음 안으로 믿으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것은 앞에 회개하라는 말에서 찾아본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 안으로 믿으라는 말은

인격적인 관계와 신뢰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복음이라는 말은 단순히 소식이라는 것만이 아니고

어떤 메시지나 뉴스가 아니고

 복음은 인격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나 하나님, 특별히 그리스도 즉 ‘왕’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는 말은

왕을 당신의 왕으로 받아들이라

이 그리스도를 너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항복하고 나오라

이제는 이 분의 백성 노릇을 해라

이 분으로 돌아오라

그런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과 상당히 유사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복음을 믿으라는 말이

어떤 장소를 말하거나 영역을 말하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 쪽으로 왕을 두고 하는 말로 인식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누가복음 4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4절,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시험을 다 받으신 후에

갈릴리에 돌아오신 설명이 간단히 나오지요?

그렇게 하고 16절부터 첫 선포의 내용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21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 뒤 부분은 나중에 조금 언급하겠고요

이 글을 다시 우리가 조금 유심히 살펴봅시다

이 구절은 자주 잘못 인용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회 참여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이 구절을 굉장히 즐겨 인용하는데

이것은 원래 뜻대로 우리가 잘 찾아야 됩니다

먼저 여기 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복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되겠지요 복음이 무엇이냐?

가난한 자에게 을 주겠다는 말이냐 그것이 복음이냐?

이번에처럼 농민들에게 돈을 일조 원을 풀어서 융자를 해 주겠다

그런 복음이란 말이냐?

갇힌 자에게 건져내준다는 그런 어떤 복음을 말하느냐?

물론 여기에 지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어떤 부(富)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또 그 아래

‘눈먼 자에게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또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하는 그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19절 끝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하는 말이 나오지요?

앞에는 ‘복음을 믿으라’ 그런 말씀을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찾았는데요

‘때가 찼다’ ‘복음을 믿으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렇게 말씀했는데

여기서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해서 복음 은혜의 해와 연관 짓고 있습니다

또 18절에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앞에 목적이 먼저 나왔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물론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왕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때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서

직책을 세웠는데요

특별히 여기서는 왕으로 세웠다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워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라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글을 읽으셨다 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두고 일부러 한 구절을 읽으신 거지요

여기 ‘기름 부었다’는 말이

‘천국’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조금 인식하는 것이 좋겠고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의 해석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21절에 이렇게 해설했지요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말은

그 앞에서는 예수님이 이사야서 본문을 읽었고

책을 건내 준 후에 그리고는 설교를, 강해를 시작하셨습니다

강해를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즉 이사야서가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랬지요

그냥 들린 것만이 아니고 이루어졌다 이 말입니다

이 구절 때문에 이 이사야서는

지금 예수님이 선포하고 설교하고 계신 이 시점에

무엇인가 성취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되겠지요

이 시점에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두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우리가 신약을 이해할 때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에 예고되었던 부분이 드디어 이제 성취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지금부터 이 천년 전에 성취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인데

우리가 때로는 이 천년 후에 지금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지금 성취되는 것처럼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한가지 예로써 사도행전에 보면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베드로가 말세에 내 영을 내 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사람들이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할 것이요 하는 구절을

지금 20세기에 와서 이루어진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 요엘서를 읽고

그때 이미 그것이 응한 것으로 설명한 부분을 무시하는 이야기지요

그 요엘서의 내용은 오순절날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오순절날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을 이 천년 끌고 와서 이제와서 우리가 이루어진다 라고 설명하면

해설상 문제가 생깁니다

물론 오순절날 성령님이 오실 때

성취된 성령님의 어떤 내림과 사역이

지금까지 이 천년 동안 쭉 파급되어 온다

이렇게 푸는 것은 이야기가 가능하지만

일단 오순절날 성취된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성취의 결과가 아직까지 우리에게도 미쳐온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이십세기에 일어날 것을 그 때에 예언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전혀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운동이 지금 일어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오순절 운동은 이미 이 천년 전에 일어났는데

그때 것을 인정하지 않고

지금 오순절 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성경 해석에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와 마찬기지로 여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억눌린 자를 다 자유케 하는 일들이

예수님이 오셔서 선포하실 때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게 이제사 이루어야 되느냐

지금 우리나라에 이루어져야 되느냐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천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응하였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때 예수님께서 그러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이 지금 후에 태어난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이 미치고 있다

라고는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면

일단 이 본문의 본래 의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가 자유로와 졌다는 말이냐?’

‘누가 그때 해방되었다는 말이냐?’ 가 분명해야 되지요

그런데 아주 재미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제국에서 놓여난 일이 없지요

그 가난한 사람들이 물질의 혜택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이 찾아왔을 때 한 말이

‘네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했지

언제 부자가 복이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표현하셨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이 예수님이

‘이미 너희에게 지금 이것이 성취된다’

‘성취되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과연 성취되었느냐? 문자적으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문자적으로 성취된 부분은 눈먼 자가 눈을 뜬 일은 성취되었지요

그럼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물론 요한복음에서 찾아야 됩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는

설명한 부분이 나오지요

한꺼번에 이야기를 다 벌려나서 하나씩 설명해가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것은 이미 너희 귀에 응하였다’

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당대에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야 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현실적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함께

영적으로 성취된 부분을 물론 인식해야 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구원받은 역사들을 놓고 잘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아까 사도행전 2장에서 읽어드린 대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런 구절과 함께 실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구원을 즐기고

또 이러한 해방을 누렸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19절을 다시 해석합시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의 해’라는 말은

요즘 매일성경하신 분은 최근에 보신 부분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나왔었지요

그 희년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은혜의 해입니다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을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의 집에 가서 종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종노릇을 함으로써 자기가 그 노동으로 빚을 갚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그렇게 종노릇 하는 사람이 희년이 돌아오면

무조건 모든 빚은 다 탕감되고 그 종 생활을 끝내고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희년이지요

그래서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해지요

모든 것이 은혜로 처리되어 버리는 그런 해입니다

그 구절이 앞에 16절에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라는 안식일과도 관계있습니다

안식일이나 안식년이나 희년은 똑같이 은혜의 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기 백성을 얽매인데서 노예의 생활에서 건져내어서,

풀어서, 해방시켜서, 평안과 자유와 안식을 준다는 말이

바로 안식일의 뜻이고 안식년의 뜻이고 희년의 뜻이지요

그것을 여기에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준다

이렇게 말하고 있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한다 라는 말이 그런 배경을 놓고 하는 이야기지요

어떤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 죄수가 감옥에 있는데 건져준다는 말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형제들끼리 같은 동족끼리 부채 관계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을 다시 원상 회복시켜주는 그런 것을 물론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또 어떤 면에서는 로마나 바벨론 이런 나라에 포로 되어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이 이사야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바벨론에 포로 될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바벨론에 포로 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앞으로 이방나라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희년처럼 다시 돌아오게 할 때를 주겠다

그렇게 말하지요

그 바벨론 포로 사건은 굉장히 신학적으로 복합적으로

참 재미있게 얽혀 있습니다 역대기하에 나오지요 조금 봅시다

역대하 36장 20절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페르샤) 주재할(다스릴) 때까지 이르니라”

그래서 바벨론 때 포로 되어 갔다가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샤 제국이 등장할 때까지

거기서 포로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지요 노예로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21절에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니까

이쪽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은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농사도 짓지 못하고 그래서 황무했지요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평상시에 안식년에 농토가 쉬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그때처럼 이 기간 동안 쉬었다는 이야기지요

안식하여 얼마동안 지냈느냐 하면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그런 말이 나오지요?

안식년을 지켜라 그런데 ‘안식년’을 잘 안 지킨 것같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 ‘희년’도 잘 안 지키기도 한 것 같아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법령을 좀 잘 안 지켰는데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 있는 동안에

그 동안에 안 지키던 안식년을 한꺼번에 칠십년동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이 안식을 누렸지요

그 구절을 왜 여기 역대기하에 거론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어떤 안식의, 은혜의 해, 구원의 때를 설명하기 위해서

전부 구약의 그 안식년과 희년의 개념을 다 끌고 와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부분을 설명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동안에 땅이 안식하고

그다음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칠십년 만에 또 돌아옵니다

원래 희년은 49년 후에 50년 만에 돌아왔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되어 갔을 때는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70년 동안 노예 생활하다가 돌아왔는데 그것도 7자에 연결되니까

같은 상징적인 표현이 나타납니다마는 다시 돌아와서 나라를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세우고 그런 일을 했었지요

그것을 이사야가 미리 내다보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읽고

이것이 지금 응하였다고 설명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도 어떤 면에서는 성취되었지마는

그도 아직 완전한 성취가 아니고 그림자고

진짜 성취는 이제 너희 귀에 응하였다

이제 내가 와서 너희를 건져내는 것이 진정한 은혜의 해이고 해방이고 안식이다

지금까지 주어졌던 모든 귀환이라든지 해방이라든지 이런 것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건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도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나와서 가나안에서 결국 또 전쟁을 많이 치루어야 되고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죽은 사람도 많이 있고

가나안에 가서도 이방 나라에 계속 침략을 받고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라가 좀 튼튼해졌는데

그러다가 또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바벨론에 또 포로 되어 가고

그래서 또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 때 돌려보내니까

또 해방되어 돌아왔는데 와서 평안한 것이 아니고

또 알렉산더 대왕 때 일어난 헬라제국의 지배를 받고

그러다가 또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끝이 없는 것이지요

이 해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해방이 제대로 되지 않고 또 노예가 되고 또 노예가 되고 했는데

그럼 무엇을 말하느냐?

그리스도가 오셔서 주실 해방을 설명하는 것이고

‘지금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앞에 우리가 질문했던 부분 중에 낱말들을 정리합시다

‘가난한 자에게’ 라는 말은 무엇일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물론 마태복음 5장 같은 데서 쉽게 답을 얻을 수가 있는데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렇게 말했지요

누가복음에서는 6장 20절~21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그렇게 나오지요

조금 뒤에 넘어가면 24절~25절에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그런 말이 나옵니다

여기 가난하다는 말은 특별히 물질적인 표현을 인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실 때에

물절적인 아닌 부분에 대한 교훈도 많이 주시지만

물질적이 아닌 부분은 우리가 딱 끊고 맺고 잘라서 설명이 안 되고

인식이 안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쉽게 물질적인 것을 잘 인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우상이 여러가지가 있지요

명예욕도 우상이고 권리에 대한 욕망도 우상입니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라고 할 때에

하나님도 섬기고 또는 내 직장, 내 사업, 또는 내 어떤 권리,

명예 그런 것을 하나님과 함께 섬기지 말아라

이렇게 말해도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대부분은 물질을 끌어들여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그런 구절 때문에 물질이 부요한 사람들은 항상 갈등이 생기는가봐요

‘내가 부자인데 그럼 나는 도대체 구원되는 거냐? 안 되는 거냐?’

‘내 믿음은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그렇게 부자들이 가끔 고민하는가 봐요

오늘도 어떤 분이 그 부분이 좀 분명하지 않다고 질문하셨어요

그래서 설명해 드리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된다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물질의 경우가 아니고 너의 명예욕을 버려라

너는 명예와 하나님과 두 주인을 섬기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면 글쎄 내 명예욕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 참 애매하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명예욕을 버린 것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남아 있는 것같고

그래서 추상적인 것은 설명해 보았자 딱 끊어지지가 않으니까

예수님이 훨씬 더 쉽게 아예 재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간단하지요

재물은 있으면 이것은 있는거고 없으면 없는거니까

팔아서 다 준다는 말은 실제로 팔아서 다 주고나야 재물이 없어지는 거지요

그런데 내 명예도 다 팔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물론 실제로 어떤 직책 감투 같은 사표를 내고 다 나누어 줄수 있지만

그래도 속으로 나는 선배고 나는 IQ가 얼마고 나는 뭐가 어떻고..

이렇게 자기 높은 생각은 쉽게 안 없어지지요

그래서 재물처럼 깨끗하게 처리가 안 되는 어려움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다른 설명도 하셨지만

그래도 주로 재물을 잘 거론하셨습니다

여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런 말들이 가난하다는 말을 쓰는 이유가

그것이 더 이해가 쉬워서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정신적인 그 외에 여러 가지 부분까지 포함된 가난을 두고한 말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수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주 놀라운 정치를 해주셔서

우리가 굉장히 풍족한 삶을 살 것이지요

그 풍족함이 무엇이냐?

이 구절 때문에 꼭 물질적으로만 이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질적으로만 풍족하리라고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풍족함이 좀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엄청난 축복이 우리에게 오겠지요

우리가 자꾸만 현세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요

조금 더 높여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하는 말이 나오는데 눈먼 자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9장에 있는 말씀을 봅시다

거기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질문했지요? 특히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자들마저도

이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을 보니까 본인의 죄는 아니고

혹시 부모의 죄는 아닙니까?

이런 의미로 부모의 죄 입니까? 자기의 죄 입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딴 경우는 아니지만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경우는

본인의 죄와도 관계없고 부모의 죄와도 관계없다

그럼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가 어떤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사람을 이렇게 한 것이다

그게 무어냐 하면

예수님 내가 와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보여 주고

내가 줄 교훈을, 이 사람을 통해서 실물 교훈을 주려고

이 사람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 날을 위해서, 지금 나이가 몇인지 모르지만

서른 살 쯤 되었다고 합시다

30년 동안 이 사람은 고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하루를 위해서....

그런데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한 후에

뒤에 가서 재미난 말씀이 나옵니다

물론 중간에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하는 말이 쭉 나오는데요

제일 끝에 가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아까 제가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말했는데요

이런 구절 때문에 오해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라는 말이

재림 때 하는 심판을 두고 하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아래 설명이 나옵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을 지금 심판으로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40절에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이렇게 말하니까

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참 알쏭달쏭한 말씀하고 계시지요?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 앞에 조금 돌아가서 봅시다

24절~25절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 당신들이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모르겠고)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런 대답을 했지요?

그렇게 하고 그 아래 내려가면

자기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30절~33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 말을 했지요

지금 이 사건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나는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지금은 낮이다

너희는 빛 가운데 있어야 된다 그런 말씀했지요?

매일 성경 오늘 아침 본문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너희도 빛 가운데 있어야 된다 그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말은

빛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에, 죽음에, 멸망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서

그 빛을 보게 하고, 빛을 받게 하고, 그 빛 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이겁니다

이렇게 어두움과 빛으로 대조해서

구원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그런 상징적인 표현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준다는 말은

바로 그러한 영적으로 어두움 속에, 죄악 속에,

영원한 멸망 속에 있던 자에게

광명의 빛을 또는 구원의 빛을 비추어 준다는 말이지요

가끔 이런 구절들이 잘 설명이 안 되어서 오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60장 1절~3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구절 그냥 함부로 수련회 프로그램 만들 때마다 그냥 써 먹어요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 무슨 빛을 발하라는 말입니까?

횃불하나씩 들고 행진하면 빛을 발하는 겁니까?

이것은 원래 뜻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 어두움이 있는 자들에게 그 밝은 빛을 비추셔서

어두움에 있는 사람을 빛으로 이끌어 주시는

구원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설명하는

‘그리스도가 도래한다’ ‘천국이 도래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그 구절을 그냥 우리가 ‘빛을 발하라’고 해서

다른 것을 우리 것으로 주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런 여러 가지 부분들을 놓고 이사야서에 있는 구절을 다시 정리하면서

그 아래 나오는 부분까지 조금 이어서 설명합시다

지금 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하시면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세우셨다

즉 나는 이 일을 행하러 이 세상에 왔고 또 이 일을 행하려고

성령님이 내게 임하셔서 나는 성령으로 이 일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에게 임한 것이다

그런 모든 표현들은 천국을 설명하면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어두움에, 죽음에, 고통에 잠겨있는 우리들을 건져내어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통치한다는 말이

좋은 의미로 보호하시고 보살피시고 잘 돌보시는 그런 왕의 구실을 할 것을 천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불려가고 건짐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그러한 새로운 통치, 새로운 국가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말은 어떤 영토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왕과 백성의 관계, 구속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것을 그 아래 있는 부분을 조금 더 예수님의 해석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2절~24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지금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이 이사야서를 읽고 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구절은 지금 너희 귀에 응하였다

그 말은 이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나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냐?

당신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당신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이제 꺼낸 거지요

그래서 당신은 누구냐?

그래서 예수님이 그 아래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잘 못 받는 것이 분명하다

너희들이 나를 너희 고향 사람이고, 너희가 보는 대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고, 내가 목수노릇을 했으니까 하찮게 볼런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잘 들으라 라고 하면서 지금 설명해 가는 겁니다

그 아래 25절~26절에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랍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그렇지요?

엘리야가 흉년 때에 다른 사람은 돌봐 주지 않고

이 이방사람인 사렙다의 과부 집에 가서 그 집에 기거하면서

그 집에 먹을 것을 흉년이 끝날 때까지, 가뭄이 끝날 때까지 대 주었습니다

그다음 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으며” 그랬지요

오히려 나아만이 와서 엘리사에게 병 고침을 받았고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엘리사와 같은 훌륭한 선지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둥병 고침 받은 일이 기록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이사야서에 있는 대로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하러 왔고,

자유케 하려고 왔는데 나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너희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가 너희 민족 가운데서 태어나고

너희들이 나와 제일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내 혜택을 못 누리고 나를 왕으로 모셔 들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서 혜택을 못 받아서 눈먼 채로 그대로 있고

아까 우리가 소경이냐 차라리 소경이면 좋았을 텐데

소경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러면 고칠 필요 없지 않느냐?

소경이 아닌데 내가 왜 고쳐주느냐?

그럼 너는 소경이 아니니까 그냥 있어라

그렇게 하니까 이 사람은 영적인 눈을 못 뜨고 계속 소경으로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차라니 나는 소경이니까 내 눈을 좀 뜨게 해 주십시오

해서 내가 고쳐주면 영적으로 살아날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억눌리지 않았다고

자기들은 남의 종이 된 일이 없는데 무슨 종이라는 말을 하느냐?

우리는 아브라함 때부터 한 번도 남의 종이 된 일이 없다

사실 로마 나라 밑에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지요

그렇다면 너희들은 해방이 필요 없고,

너희들은 구세주가 필요 없고...

새로운 이 필요 없지 않느냐?

메시야도 필요 없고...

그래서 구약시대도 보면 하나님이 수리아 나아만이라든지

사렙다 과부 같은 사람에게는 혜택을 주고

자기 백성은 혜택을 못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보면 너희들이 아닌

이방인에게 먼저 갈 것이라고 암시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구든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 의사는 병든 자에게만 필요하듯이

너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다고 하니까

그럼 너희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 않느냐?

병든 사람은 나에게 찾아와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는 사람은 내가 도와주겠다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같은 사람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때

상에 있는 떡을 개에게 주는 일이 어디 있느냐 하니까

개도 부스러기는 얻어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이라야 도움을 주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이 구절은 쭉 내려가면서

예수님 자기를 가리키는 것을 이야기 하고

당신은 누구냐 라고 하니까

네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느냐

필요하지 않다면 할 수 없지 않느냐

너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신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고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고

천국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예수님 당신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는 당신의 통치와 보호를 받고 싶습니다’

‘당신이 다스리시는 이상적인 국가에서,

당신이 주시는 모든 혜택을 받고 싶습니다’

‘나 투항할 테니까 항복하고 들어갈 테니까, 나를 좀 받아 주십시오’

‘나는 죄인이고, 나는 가련한 자이고, 나는 눈먼 자이고,

나는 가난한 자입니다. 나를 좀 돌봐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이고 소경된 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억눌린 자입니다’

라고 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오셔서 해방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왕 노릇을 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래서 이 천국이라는 말은

바로 ‘그 분의 보호, 통치, 축복을 내가 받아 누리겠다’

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온다는 말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같은 이야기이고

영생도 그 안에 있으면 계속해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맺읍시다

오늘 첫 시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예수님의 첫 선포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한 대로

천국이란 어떤 영토 중심의 개념이 아니고 왕 중심의 개념입니다

왕이 오셨다는 뜻이고 왕이 그냥 오시느냐,

그냥 위엄을 갖추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을 실제로 건지러 오시는 것이고,

자기 백성을 건져서 혜택을 주기 때문에

그 혜택을 내가 누리느냐 안 누리느냐에 따라서

내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아니냐 하는 그런 개념이지요

그래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어떤 문을 열고 어디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고

그 분의 통치를 받겠다고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나와서

지배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땅에 있거나 저 쪽에 가 있거나

이사를 다니거나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이 죽은 후에는

부활하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그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천국은 현세와 내세에 연결되어져 있지요

그래서 학자들이 천국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는 현재대로 천국이고

나중에 미래는 이것은 이상적인 여러 가지 더 필요한 부분들이 보완되는,

그런 미래적인 천국이 이루어지겠지만

지금 우리는 미래적인 천국만 생각하지 말고

현재적인 천국을 일단 받아들여야만

미래적인 천국도 내 것이 되는 거지

현재 천국은 안 받아들이고 미래 천국에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요

이 첫 선포를 잘 기억하시고 앞으로 계속해서

천국에 대한 부분들을 다른 말씀에서 조금 더 정리하면서

개념을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여기서 복음이 핵심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 복음이 예수님이 오심과 동시에 처음으로 선포되었고

그때까지는 쭉 예고로, 예언으로만 지내오다가

드디어 복음이 등장하지요

이것을 구속사에서 또는 계시론에 있어서는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고

핵 사건이라고 말하고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말론이라고 말합니다

쭉 예고되어 오다가 드디어 종말이 온 것이지요

즉 예수님의 초림이 바로 종말의 사건이고

예수님 오신 이후부터 전체가 바로 이미 천국이 땅에 실현되어 있는

그래서 이 천국이 바로 우리 눈앞에 와 있고

그리스도가 왕권을 지금 행사하고 있고

내가 언제든지 그 분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에게 항복하고 들어가면

그 왕국에서 그의 보호를 받게 된다는 사실이

바로 이 종말론적인 천국의 개념입니다

질문은 뒤에 한꺼번에 받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억눌려 있던 저희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찾아오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버리시지 않고 그래도 건져내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려고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시고 아들이 우리의 죄를 담당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들이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사탄을 짓밟으시고 그의 손에서 우리들을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지배하에 두시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가운데 두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좀 더 잘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으며 통치를 받기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부분이 무엇이며 항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시옵소서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다시 세상 나라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 나라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저희들은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참되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더 잘 알아보고 확인하고 그것을 즐기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을 소유한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참으로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서 그 보화를 소유하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바로 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그 충만한 축복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 백성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고 세상 백성들이 즐기고 누리고 사모하고 늘 꿈꾸어 오는 그러한 부분을 우리들도 함께 바라고 그것을 갖기를 갈급하고 집착해 있는 그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저희들에게 참 하나님 나라를 이 공부하는 기간 동안에 더 선명하게 보여 주셔서 참 천국의 그 값진 것을 깨닫고 천국 백성의 그 특권과 축복을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아직도 이 천국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시고 또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천국을 미래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현세에서 답답해하고 아쉬워하고 갈급해 하면서 사는 성도들에게 천국이 현재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을 잘 소개해 줌으로 인해서 그들에게도 자유를 주고 그들에게도 부함을 나누어 주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나는 오순절 사건이 그 당시에 성취되었고 지금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그러셨는데 지금도 그런 일들이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거든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동일하게 일어나는지 아닌지도 검토해야 되겠지요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셔서 일어난 사건을 현재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하고 같은 차원에서 보기 때문에 실제로 이천년 전에 오순절에 임했던 사건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거지요 그때 오순절날 누가 예언했습니까? 그때 누가 꿈 꾼 일이 있어요? 방언했다는 말만 나오지요 그 방언도 고린도서에 나오는 방언과는 다르지요 오순절날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요즈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아주 쉽게 그냥 가볍게 넘어가 버리지요 오순절에 일어난 것처럼 지금도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고 환상도 본다 오순절날 그런 일 안 했지요 오순절이 상당히 우리에게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 기회 있으면 그 부분도 공부하십시다 신약 개론할 때 조금 설명하지요

질문-천국을 가서 보고 온 사람들이 책(내가 본 천국:콜레)을 썼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 책을 한 번 읽어봐야 되는데 못 읽어 봤거든요 한 마디로 완전히 속는 겁니다 가짜에요 천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또는 그 책에서 말하는 천국이 언제부터 있는 겁니까? 천지 창조 때부터? 아니면 예수님이 초림할 때 갑자기 생겼어요? 언제 생겼어요? 가보고 왔다니까 구약 때 성도들이 천국에 갔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 또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 당시에 누군가가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말한 기록이 나옵니까? 그런 거 없지요

질문-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는데..

- 천국이라는 말은 많이 나오고 그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은 낙원이라는 표현 외에는 별로 없지요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표현이 하나 나왔는데요 그 낙원은 예수께서 오늘 네가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으니까 예수님도 낙원에 계시지요 그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봐야 되는데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딴 곳에 계십니까? 우리가 공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에 불과합니다 자꾸 공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 라고 하고 보았다 라고 하고 어떻게 생겼더라고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질문-요한복음 17장에도 그렇고 다른 데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 보다는 그 개념이? 그리고 낙원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말이..

- 왕권에 대한 이야기지요 보좌라는 말이 실제로 의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지 서 계시는지 누워 계시는지 참 애매합니다

낙원이라고 하는 말이 실제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가 참 어렵습니다 문제가 있는데요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나님이 원래부터 계셨지요 거기가 어딥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이라고 되어있지요?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임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발을 지구에 올려놓고 하늘에 앉아 계시지요? 성경에 많은 구절들을 다 갖다 놓고 다 대조해서 봐야 되는데 어느 한 두 구절만 가지고 한쪽으로 이렇게 설명하니까 그럴듯해 보이는데 그것은 현재 있는, 시공세계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하실 때 그런 식으로 상징적으로 표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우리가 인식하기 위해서. 낙원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낙원이 뭐냐? 에덴동산 같은 데가 있다는 말이냐? 그것은 참 애매한 말입니다 그냥 현재 우리의 불완전한 이곳과 비교해서 좀 즐거운 곳, 아주 아름다운 동산, 사실 은 그렇게 묘사한 것뿐 이지요 그런데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면 여기도 좋지요 우리가 찬송 부를 때 ‘초가집도 천국이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내 마음이 기쁘고 좋지요 아무리 멋있는 금 은 보석 집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괴로우면 천국이 아니고 아주 가난하게 살아도 굉장히 기쁘게 즐겁게 살면 그건 낙원이지요

질문-그러면 에덴동산과 낙원과 천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에덴동산은 지상에 있던 한 지역이지요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통치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낙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체제하에 있을 때 굉장히 즐겁고 기쁠 것이다 하는 의미지요

하여튼 이 천국 문제는 분명히 시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 신앙구조에 있어서 또 성경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많은 오해들이 따라오기 때문에 지금 그 책에 돌아가는 것처럼 그런 오해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그래요 그것이 시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천국이 언제 되었는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재림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럼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때 생기면 서 있는(?)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니까 그러면 낙원이 어디 있다가 이쪽으로 온다는 말이냐 그러면 오는 것이 낙원이냐 있는 것은 뭐냐, 그럼 새로이 만들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아주 복잡하지요 영토 문제랑 뒤에 조금 더 공부합시다

제가 강의한 것 중에 미스테이크가 하나 있었습니다

 

“복음을 믿으라”는 구절이 있었지요?

교안 첫 페이지에 밑에 3번 ‘복음을 믿으라’

거기에 직접 목적어가 나오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는 전치사가 두 가지 삼격과 사격이 나온다고 했는데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는 사격이 아니라

삼격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에이에스라는 사격이 아니고

엔이라는 삼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뜻은 큰 차이가 없는데요

교안에 목적인 복음은 안으로가 아니라

안에 라는 전치사를 갖고 있습니다

즉 복음 안에 믿으라는 표현으로

마치 예수님 안으로 믿으라고 할 때와 표현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 부분은 큰 문제가 없겠는데요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2

오늘 두 번째 강의,

지난번에 하던 주제에 이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는 부분의

두 번째 부분을 먼저 살피고 그리고 제목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주제에서

예수님의 선포를 먼저 살폈었지요?

이 시간에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선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오늘 강의 내용과 관계없지마는

거기 ‘이 날에 제자의 수가’에서 제자라는 낱말은

번역을 의역을 해서 나타난 말인데요

원문에는 사람 또는 영혼(푸슈케, soul)이라는 낱말인데

‘이 날에 삼천 명의 사람이 더하더라’ 그렇게 번역해야 되는데

제자가 되어서 혹시 제자 훈련과 관계되는 어떤 그런 부분에

이 구절이 눈이 번쩍 뜨일지 몰라서 그럽니다

제자라는 말로 되어 있지 않으니까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오순절날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한 설명이 여기 기록되어 있지요

주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 설명이 다 끝나고 나서

그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37절에 보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대답이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그런 긴 설명을 했습니다

그 부분 중에서 우리 주제에 관계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주제와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런 말씀이 먼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런 표현은 나와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아래 우리가 조금 더 읽어보면

구원을 얻으라 하는 말은 40절에 가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 부분이 새로운 세대,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일단 여기 회개하라 그렇게 주장하는

또는 선포하는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선포하시던 부분과 같은 맥락이 나타나기 때문에 살펴보고자 하는 겁니다

교안에 첫 번째 질문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왜 마음에 찔렸습니까?

베드로 설교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으로 메시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자기들이 죽인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주와 그리스도시라는 이야기지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말은

그 분이 바로 왕이시다 라는 뜻이 되지요

그 분이 내가 약속해서 기름 부어 세우려고 너희들에게 약속했던

그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너희들이 죽였다

그런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이에요

두 번째 질문, 베드로는 어떤 해답을 주었습니까?

거기에 세 가지 요점만 설명하고 싶은데요

첫 번째 내용은 ‘회개’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40절과 연결되어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런 말이 끼어 있기 때문에

여기 회개는 도덕적인 회개의 차원이 아니고

‘소속’의 문제를 배경에 깔고 있습니다

3장 19절에도 보면 비슷한 설명이 나옵니다

19절~21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그런 말이 있지요?

거기에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고

그가 만유를 회복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가 오셔서 만유를 회복할 때까지 어떤 기간을 두고 말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유를 회복하시러 보내시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보내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거기에 ‘예정하신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을 이 세상으로 보내시고

그가 오셔서 만유를 회복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회개를 해야 하는, 죄를 범한,

‘타락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에

타락한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회복’해서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대로의 나라로 회복하시겠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하고 거기 19절에

‘회개하라’는 말씀이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같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2장에서 한 설교나 3장에서 한 설교나 같은 베드로의 설교인데요

베드로가 ‘회개하라’ 라고 외쳤을 때는

바로 그러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오셔서

자기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회개하라 라고 했다는 부분은

윤리적인, 도적적인 회개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회개지요

정치적인 회개입니다

또는 종교적인 회개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는데요

즉 왕에 대한 거역을 통해서 나타난 과오들을 회개하고

다시 그 왕에게 승복하라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너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라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에 가서 사도행전 26장 18절, 20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설명인데요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그런 말이 나오지요?

여기는 바울의 선포의 내용인데요

선포의 내용이 바울이나 베드로나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18절에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 말을 바꾸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단의 권세’에서 놓여나서

‘하나님의 권세’로, 하나님의 왕권으로 돌아오게 그렇게 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뉘우치고 고치고 이렇게만 자꾸 생각하는데

무엇을 뉘우치고 고쳐야 되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

오히려 그건 정치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돌아오라’ 하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나가있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와서 내가 이러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나가서 돈을 이러 이러한 데 썼습니다

내가 이런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런 도덕적인 회개를 하지 않았지요

했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는 거기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 부분 때문에 자기 잘못을 일일이 고백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자체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지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은 아버지의 모습이지요

그런 부분들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성경에서 죄인들이 구원 받는 부분에 가서 가끔 혼란이 생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가

십자가에서 그대로 회개하고 구원 받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또 우리에게 성화를 강조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성화가 어디까지 되어야 하느냐?

‘성화’의 부분이 ‘구원’에 있어서 얼마만큼 중요하냐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요

실제로 성화되느냐 점점 거룩해지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지 않고

그 이전에 일차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부문이 더 중요합니다

일단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주어지는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이 회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시겠습니다마는

개심(改心)에 대한 말씀이지

예수를 믿은 후에 우리가 수시로 죄를 회개하는

그 회개의 개념이 아니고

처음 도전 받을 때의 회개는

하나님을 떠났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개심(改心) 정치적인 회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아래도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이제는 너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우상 섬기던 것을 버리라 하는 메시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두 번째 요구한 것은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런 말이 나옵니다

거기에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라고 말을 할 때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세례’라는 말은 ‘회개’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오는,

이 패역한 세대 우상을 섬기는 그 세대나 영역이나

또는 내 삶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면

세례를 받는다는 말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들어온다

또는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가입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례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이 자료를 조사하고 있고

여러 가지 발표들이 나오고 있어서

앞으로 언젠가는 정리가 된 학자들의 설명을 듣게 되겠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고 할 때

죄 사함을 받는다, 죄를 씻는다는 개념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실제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그러한 어떤 죄를 사함 받는다는 의미보다는

물론 앞에서 말한 정치적인 의미에서 회개하고 관계되니까

죄 사함의 의미가 깔려있지만

사실 ‘나는 이제부터는 당신의 통치를 받겠습니다’

‘당신이 세우시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나도 가입을 받아 주십시오’ 라고 하는

가입 원서와 관계되는 그런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대에 있던 쿰란 공동체라든지

그런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여러 종파들에서 행해지던 세례 의식이 세례 요한 때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아직 연구가 되고 있지만 성경에서 거의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의식의 하나로써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지요

만일 단순히 윤리적인 죄를 회개할 때 받는 것이 세례라고 하면

세례를 가끔 받아야 되겠지요

우리가 성찬예식을 행할 때도 물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미가 있지만

그래도 성찬식은 자주 행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한 번 밖에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례를 한 번만 받아라

그런 명시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세례를 두 번 세 번 받아도 될런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마는

대개 세례를 한 번만 받는 이유는 세례는 예수를 믿은 이후에

수시로 범하는 죄를 회개할 때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영역 밖에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통치 공동체 영역 안으로 들어올 때, 개심할 때

회개하면서 받는 의식이기 때문에

한 번만 받는다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들어감을 고백하는

그리고 그것을 확약하는 그러한 의식이 세례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여기에 영적인 의미로써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개념은

아주 분명하게 로마서 6장이나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말 자체가

사람이 실제 죽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을 떠난 그러한 어떤 다른 통치나 영역하에 있던 그 옛 사람

그것은 이제 죽은 것처럼 간주하고

즉 내 과거의 국적을 말살해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국적을 얻는,

새로운 공동체의 멤버로 가입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시간이

바로 세례 받는 시간이지요

그래서 세례를 받기 전에

이 신앙고백만은 분명히 되어져야만 세례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 성경을 잘 몰라도 좋고

아직 생활이 성화되어 있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소속을 바꾸는 것’을 분명히 하고

지금까지 국적 하나를 정리하고

새로운 국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확실해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래서 여기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나서 죄 사함을 얻으라 이렇게 나옵니다

죄 사함이 그 후에 주어지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설명되어 있지 않고

세례를 받고 나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일단 가입하게 되면 과거의 모든 잘못은 다 용서하고 묵살해 주겠다

그것은 도외시 하겠다

그런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죄 사함이 그 후에 따라 오는 것처럼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이 나오지요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물론 이것은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 둘은 명령처럼 ‘회개하라’ ‘세례를 받아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마지막은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말은

‘받아라’ 이런 명령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선포에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함께 살피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오순절날 일어났던 사건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는 말이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을 받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지만

일단 이 시간은 포괄적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성령의 충만’이라고도 표현이 가능한데요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즉 성령을 받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 하면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온다는 뜻이고

성령님이 원하는 대로 내가 행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령님이 이것을 말하라고 하면 이것을 말하고

성령님이 저것을 말하라고 하면 저것을 말하고

성령님께서 입을 다물라고 하시면 다물고

성령님이 이리로 가자고 하면 따라 가고

그렇게 되는 것이 성령 충만의 모습이지요

즉 성령님의 뜻대로 지배를 받고 행동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들어온다는 뜻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회개하고 세례 받은,

그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 자를 지배하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도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이 성령세례 받았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물론 이것은 신학적으로 좀 더 정리해야 될 부분입니다마는

그리고 나서 4장 1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까지 종합해서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로잡으셔서 광야로 이끌어가셨다

또는 몰아 내셨다 라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즉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

이제는 예수님 자신도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도 물론 성령으로 태어나셨지만

특별히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우리의 대표자로써,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도 죄인의 모습으로

회개의 의미를 갖고 있는

세례를 받으셨고

그리고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성령님이 인도(하나님 인도)하시는 대로 그의 공적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사역이 광야에 가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장면입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성령님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성령님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성령님이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셨고

또 예수님이 그대로 심부름하시고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는 힘은

성령님의 힘이라고 해도 좋다 이 말이지요

물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해도 좋은데

그래도 예수님의 사역을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면서

‘내가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

예수님 스스로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인간으로 와 계시는 인성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너무 신적인 의미에서 확대하기 보다는

예수님이 표현하신대로 예수님도 인간으로 와 계셨고

그래서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능력 있는 일을 처리하실 때

그건 자기의 힘이기 보다는 ‘성령님의 힘이었다’ 라고

이해해도 괜찮겠지요

더구나 예수님 스스로가 의도해서 하셨기보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일을 했다고 한다면

더욱더 성령님이 ‘저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자’고

예수님에게 지시하시고

예수님은 그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그 일을 집행하실 때

바로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귀신을 몰아내셨다 라고도 볼 수 있고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을 보면

바로 그 성령님의 사역,

또 성령님의 능력의 지배하심,

또 그 성령님이 어떤 사람 속에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그 사단를 몰아내시고

이제는 그 사람을 성령님 자기의 지배하에 끌어들이시는,

그러한 부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은, ‘천국’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뜻한다는 이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복음서에 있지 않고

사도행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놓치기 쉬운 구절인데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인데

복음서에 나오지 않고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거기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받으셔서

삼년 반 동안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시고

특별히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건져내시는, 고치는

그런 사역을 행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공생애 전체가 바로 성령님의 지배 하에서,

성령님의 충만함 속에서 행하고 계셨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성령님의 충만에 의해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욱더 말할 것도 없이 신적인 존재도 아니고

우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성령님이 나타나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곤 하는데

그것을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고

바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이후에

그런 성령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시작된다는 뜻이지요

누가복음 4장 18절~19절은 지난 주간에 우리가 살폈던 부분입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설명하시면서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고

주께서 보내신 즉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예수님인 내게 임하였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하나님이, 성령님이, 나에게 보내셔서 이런 일을 하게 하셨다

그 표현에서부터 예수님 자신이 성령님의 도우심

또는 지배하에서 사역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고

거기에 성령님의 사역을 상당히 능력있게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가서는 더욱더 많이 나타나지요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는 표현이라든지

성령님의 사역을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능력이라는 것이 바로 그의 통치, 주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회개하라’‘세례를 받으라’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

그리고 ‘너희들이 이 패역한,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라고 표현한 모든 내용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현재 성령님의 지배하에 들어와서

성령님께서 통치하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일을 행해가시는

그러한 놀라운 능력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것이 단순한 공간적인, 정적인, 물질적인 공간이 아니고

‘천국’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강력한 하나님의 통치 체재’를 뜻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조금 더 쉬운 구절인 사도행전 5장 29절로 넘어가겠습니다

같은 사도들의 고백 특별히 베드로의 고백을 다시 보겠습니다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드렸는데요

그 설명들보다 이 5장에서는 훨씬 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부터 하면 더 쉬울지 모르지만 앞에 것을 했기 때문에

더 쉬워 보일지도 모르지요

29절~32절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그런 구절이 나오지요

짧은 구절에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29절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지배, 통치개념을 먼저 끌어들였지요?

그렇게 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들을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신다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다

그 말이 참 이상한 표현 아닙니까?

지금까지 제가 설명 드린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읽는다면

이 구절이 조금 이상한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위에 끌어올리셔야 되느냐?

하는 이야기는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회개하는 것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쪽 한 쪽이, 회개하는 것이

단순히 윤리적인, 도덕적인 죄를 회개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시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거기 ‘임금과’라는 낱말은 ‘룰라’ 지배자 그런 낱말입니다

‘알케’ 헬라에서 나온 말인데

이것은 ‘룰라’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주(主)라고도 상제(上帝)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임금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지배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오르셔서 주가 되시고,

지배자가 되시고

그리고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지요

즉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시면서

구주가 되신다 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쌍하게 되고

사단의 지배를 받고,

나쁜 어떤 것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불행하게 끝나야 될 그 존재를

다시 자기의 사랑의 보호의 지배 하로 끌어들이셔서

자기의 보호를 받게 하는,

자기의 통치를 받는 그런 행복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회개’라고 말하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구주(救主)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말과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된다 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좋은 왕을 모시게 되었다

아주 훌륭한 분의 지배를, 보호를 받기 때문에

이건 안전한 어떤 국민으로 국가 안에서 살게 되었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바로 이러한 지배, 통치, 보호 개념과 연결되었다는 점을

우리가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 그런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오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회개에 대해서 일차적인 개념을 정치적으로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해서

성령님이 하신 일도 그와 똑같은 일을 하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스도가 왕위에 오르셔서 통치하시는 개념과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부분이 똑같은 개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는 그 내용,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려고 하는 것

그러한 것이 바로 회개요, 개심이요, 구원이요,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천국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된 이후부터 성화든 뭐든 일어나지요

즉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고

성령님이 능력으로 나에게 임재하신 이후부터라야

비로소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서 내 삶이,

하나님이 하는 방향으로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지

이 하나님과 또는 성령님과 나와의 관계

또는 그 지배, 피지배가 형성되지 않은 채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선한 일이 된다든지

성화된다든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성화라는 것은 이미 그런 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을 오해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일단 의롭다 함을 받고, 칭의 받고 그러고 나서

성화는 성화대로 또 일어나고

그 두 가지가 다 내가 해야 되는 어떤 부분처럼

또는 칭의는 칭의대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고

성화는 성화대로 또 하나의 단계가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일단 칭의 라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 있던 내가

하나님 안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배 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지

내가 의로워서 의롭다는 것은 아니지요

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의롭다고 일컬어 주셨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는 말도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젠 자기 백성이니까 의롭다고 불러주신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우리가 칭의의 개념은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내가 가입되면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라는 그 점을

명백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칭의의 원리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가입된 것과 같은 의미지요

그렇게 하고나서부터 성화가 비로소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즉 성화는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양육하시는 부분이지요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입니다

물론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부분에도

성령님이 계셔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님이 나에게 복음을 던져 주시고 나를 믿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게 하는 일에도 도우시지만,

성령님이 계셔야 당연하지만

※그러나 그 부분은

‘성령님의 지배하에 내가 들어온다’ 라고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보면 표현하기가 좀 이상하지만

내 밖에서 나에게 도전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이렇게 도우신다 라고는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단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비로소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고 내재하시고 나의 주인이 되시고

이제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나를 돌보시고

양육해 가시기 때문에

그 전에 믿게 될 단계하고 믿은 후에 성령님을 받은 것하고는

어떤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 38절 이하에서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해서

성령님의 사역이 에 와 붙어있다 이겁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님을 먼저 받아야 회개도 하고

세례도 받고 이렇게 할 것 같지요?

물론 앞에 회개할 때부터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쪽은 지배자로 들어와 있는 부분은 아니지요

아직 내가 그 쪽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터득하면

구원의 과정을 이해하는데에도 새로운 정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직신학에서는 대개 이 ‘구원의 서정’을

부르시고, 중생하고, 회개케 하고, 믿게 하고, 칭의 하고, 그런 부분을

그냥 나열해 왔기 때문에

전체가 성령님의 사역이고

어디까지가 성령님의 내주와 관계되는지가 분명하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요즈음도 오순절 사건이나

성령님의 충만이나 세례에 대해서 옥신각신 논란들이 많이 있지요

성령님의 세례는 무엇이고, 충만은 무엇이냐?

같은 것이다, 아니다

반복이다, 아니다 하고 논란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한 논란들이 일어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 없이

그냥 도덕적인 차원에서 자꾸 우리가 회개하고

세례 받고 성화되고 완전하게 되어 진다

그러한 생각을 해왔던 조직신학적인 개념 때문에 오는 혼란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이 앞으로 조금 더 공부하시면서 정리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곳만 더 살피겠습니다

이번엔 바울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이 사도행전 17장은 아덴에서 전도한 내용입니다

앞에 살폈던 부분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고

어떻게 보면 우리 기독교의 분위기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메시지지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에게 전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메시지 내용이 앞에서부터 조금 다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설교의 뒷부분에 가서

30절~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 부분도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여기에 첫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는 것이지요

왜 회개하라고 했을까요?

30절 끝에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

이 말은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했지마는

여기 지금 이방인을 놓고,

이방인들은 이때까지는 복음을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우상을 섬겨온 것을 하나님이 일단 묵인하시겠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들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예수를 믿으라’

하고 말씀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실제는 그런 논리입니다

이제 거기서 ‘회개하라’는 말이 무엇이냐?

무슨 죄를 어떻게 회개하라는 말이냐 라고 하면

앞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개념에서

어떤 도덕적인 회개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도덕적인 회개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왜요? 31절에 그 이유가 나오지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이렇게 나오지요

지금까지 너희들이 믿지 못한 것은

아직도 믿을 만한 분의 어떤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안 믿었을 수도 있겠다 이거지요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될 뚜렷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지 않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어냐? 부활에 대한 이야기지요

그리스도가 부활했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이 믿어야 된다 라는 말이 무어냐?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으면

안 믿어도 된다 라고 너희들이 말할지 모르지만,

믿을 이유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이 믿어야만 하고

회개해야 된다 라는 말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회개하라는 말이냐?

두 번째 질문이 바로 그 같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즉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대해서 베풀 그 심판은

그의 부활과 연관성이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왕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바로 ‘온 세상을 통치할’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아서 대신 이 세상을 통치할

유일한 왕이시다’ 라는 증거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가 어떤 ‘죽음에서 살아났다’ 하는데서 의미를 찾기 보다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꼭 배워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상이

바로 그리스도가 왕위에 오르시는 사건의 기본적인 배경입니다

물론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는 말로 뒤에 따라 나옵니다마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까지 표현이 되면 다 표현이 되는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었다는 말을 안 하더라도

부활했다는 사실자체가 큰 의미를 갖는데

그것이 무어냐? 라고 하면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참 자세하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다, 사기꾼이다, 미친 사람이다,

참람한 사람이다, 자기를 함부로 하나님이라고 하다니...

우리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메시야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무슨 메시아냐?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자주자주 말씀하셨지요

너희들이 나를 아직도 믿지 않지?

그러나 만일 내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다시 들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런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즉 너희들이 내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그냥 옛날처럼 목수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부활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영광스럽게 살아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왕위에 올라가 버리시지요

부활하지 않으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거지요?

부활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면 내가 심상치 않은,

너희들이 함부로 대했던 그러한 범인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왕권을 위임받아 보냄을 받았던

그리고 내가 온 세계를 통치해야 될 메시아다 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부정하지 못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해서

부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심을,

왕 되심을 확정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이 미리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도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계속해서

설교들을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라는 것만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겁니다

십자가보다도 부활을 훨씬 더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요? ‘십자가는 너희들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그 이야기가 사실 어떤 때는 의미가 없어요

이 부분은 우리가 전도할 때도

앞으로 좀 전도지에 시정할 부분이 있는데요

어떤 사람 붙들고

‘당신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당신은 죄인이 아니냐?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스도를 받으면 당신 구원 받는다’

그렇게 말할 때 논리에 모순이 생기지요

이 사람이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렇게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지 아닌지 뭘 가지고 아느냐?

또 내가 그럼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의미가 없지요 그건 공연히 낚시밥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전도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 전도에서 논리에 약간의 문제가 있지요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너무 앞세워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서 죽었다’ 라고 표현해야 되는데

너를 위해서 죽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그 사람이 구원 받을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요?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고

전도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들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은 ‘다시 부활했다’ 라고 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이 사람이 믿거나 안 믿거나 아무 상관없이

부활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설명하는 거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 왕이시다 그 왕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 분을 왕으로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냐? 받아들이면 그의 백성으로써 그 분의 통치와 혜택을 받게 되지만 그분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너는 그분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논리지요

그래서 전도가 내가 이미 지은 죄를 용서받는데서 시작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내 왕으로 모시는데서 시작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데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이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자꾸 강조하지요

물론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도덕적인 죄가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도덕적인 죄가 포함되어 있고

회개할 때 도덕적인 죄가 따라서 회개 되어야 하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핵심 되는 부분은 도덕적인 죄에 있지 않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정치적인 죄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아덴사람들에게도 너희들이 회개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그리스도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때에 너희들은 심판받게 될 것이다 왜?

그분이 유일한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너희들이 왕으로 모시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당연히 너희들은 벌을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지요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은 바로 그들에게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

지금까지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낸 왕을 섬기지 않고

다른 가짜 왕을 섬겼으니까 역적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참 왕이 등장했으니까

그분이 너희들이 섬기는 왕들과 너와 모두를 멸망시킬 것이다

라는 그런 무서운 심판의 도전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부활이 연관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나오는데 그럼 심판할 날이 언제일까요? 라는 질문입니다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어떻게 생각하면

미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해석할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왕권을 그때까지 휘두르지 않고

가만히 저기 앉아 계시다가 이다음에 재림하여 오셔서

드디어 왕권을 행사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왕위에 앉아 있다는 말을

우리가 자꾸만 공간적으로 저 멀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콜레 박사인지 누군지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봤는데

가보니까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가운데 앉아 계시고

예수님도 우편에 앉아 계시고 성령님은 좌편에 앉아 계시더라

그런데 성경에는 성령님이 좌편에 앉아 계시다는 표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순 엉터리인데요

그 책은 여러분이 읽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가만히 앉아 계신 것처럼 표현하지요

그렇다면 언제 다시 오시느냐?

지금 천사들을 동원해서 집을 열심히 짓고 계시는데,

집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 가는데

다 끝나면 천사들을 대동하고 지상에 내려오신다

그때 사람들이 휴거되어서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 표현이 나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틀리는, 귀신에게 입신되어서 무엇을 보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성경의 원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 라는 말은

저 멀리 가 계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지상에 왕으로 군림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지상을 통치하고 계시지

하나님이 지상을 벗어나서 저 먼 곳에 따로 계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도 저 먼 곳에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왕으로 군림해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은, 왕권은 지금 현재 집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심판할 날은 현재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마는

그럼 무엇이 심판이냐? 지금 어떻게 심판한다는 말이냐?

재판하듯이 이렇게 불러놓고

쭉 다 자기 행동을 기록한 것을 읽으면서

재판을 하는 그러한 심판은 아니고

그리스도가 왕으로 군림하시면서

나의 지배를 받겠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다짐한다 이겁니다

‘받겠다’ 라고 하면 구원이고

나는 아직도 당신의 지배를 받기 ‘싫습니다’ 라고 하면

심판받은 상태에 계속해서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심판은 하나님을 떠날 때 이미 심판이 이루어져서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자체를 죽음이라고 말하고

어두움의 권세 하에 있다 라고 말하지요

그 자체는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이하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이 공백상태를 중립상태를 그려놓고

이 사람은 구원도 아니고 멸망도 아니고 심판도 아닌 상태에 있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심판을 받아서 멸망한다

대개 이렇게 이해하는데서 mistake(실수)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기에 중립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알겠어요?

그리스도가 또는 하나님께서 지상을 통치하고 계실 때부터

나는 그분의 통치를 받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미 결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믿지 않은 사람은 전부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를 건져낼 때

 중립상태에서 건져낸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사단의 권세에서, 사망에서, 어두움에서 이쪽으로 건져낸다고 되어 있지요

생명으로, 빛으로.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심판과 지옥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이지

백지상태인 중립상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이것은 건진다는 말자체가 의미가 없지요

구원이라는 말자체가 심판에서 건져낸다는 말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부터

하나님에게서 쫓겨나고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하에 있습니다

완전한 멸망의 날까지 심판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덜 끝난 것처럼 느껴질런지 모르겠지만

이미 하나님의 심판은 끝나있고 다시 조사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지요

물론 그래도 마지막 날 다시 확인시켜주는 심판은 있겠지요

본인이 억울하다고 말할지도 모르니까

아마 행위록을 갖다 놓고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확인시켜 줄 날은 오겠지만

사실 이미 심판은 끝나 있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건져내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과 함께

우리에게 심판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그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축복의 상태에 들어오라고 도전해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선포’이지요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은 저쪽 심판의 상태에서

‘이쪽으로 돌라오라’고 외쳐 주는 것이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사도행전 26장 하나 더 살펴야 되겠네요

18절~20절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 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그렇게 말이 나오지요?

여기서는 회개라는 말 대신에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거기 두 가지 질문이 있지요?

어디에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라고 했습니까?

아주 분명히 했지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조금 전에 설명 드린 그러한 심판의 개념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20절에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회개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무어냐?

온 세상 사람은 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아니야?

이렇게 이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말을

제한된 협의의 의미로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고

온 세상은 지금도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지요?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고

그 통치에는 심판도 포함되어 있고

그 통치에는 형벌도 포함되어 있는 그런 통치인데

그런 넓은 의미의 통치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하는 ‘천국’은

좁은 의미 은밀한 의미에서의 ‘천국’입니다

이것은 심판에 있지 않고 형벌에 있지 않고

축복과 사랑과 평화와 의(義)만 있는 그런 이상적인 하나님의...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이상적인 통치!

그것을 받는 특별한 국민... 제한된 국민만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는 말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하는 뜻인데

그 말은 넓은 의미가 아니고 훨씬 더 구체적인,

직접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의미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럼 언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하는 두 번째 질문이 있지요?

사도들의 선포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 좀 돌아가서

이 부분의 배경을 찾으면 좋겠네요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27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거기도 시형을 한두 개 좀 정리해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앞에 처음에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는 것은

우리나라 표현은 과거형으로 보이지만 현재형입니다

‘얻어 있고’ ‘얻어서 이미 가지고 있고’

영어에는 has 라는 have 동사의 현재형입니다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것은 완료형입니다

여기에 이미 옮겨져서 잃어버렸던 생명을

다시 찾고 받아서 누리고 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지금 이미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이다음에 영생하는 것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 영생한다 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데

천국이 여기에 와서 나에게 영생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앉아서, 천국이 와서 내가 천국 백성이 되고,

내가 천국 안에 들어와 있고, 천국의 생명, 영생을 지금 현재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적이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과거 일이지요

그것은 과거 일이고 현재 나는 천국 백성으로 그 나라의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제는 사단의 권세 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하에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적인 천국 또 현재 천국에 들어간다는

또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고, 그 나라의 왕의 보호 하에 있고,

또 그 나라의 축복인 영생이나

또 그리스도인 왕과 같은 신분을 누리고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 있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누리고 있다

하는 표현도 나오지요?

기업을 누리고 있다는 이러한 모든 표현들을 잘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꼭 미래의 천국 이다음에 우리가 영생을 누린다

이다음에 기업을 누린다

이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가 아니고

현재 이미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의 자녀요

그의 기업을 누리고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잘 받아들여야 됩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이 이쪽에 와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어디 가야만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몸 때문에 못 간다

그러면 죽으면 이 몸을 벗어나서 영혼만 훨훨 날아서 거기 갈 수 있다

그런 것이 콜레 박사나 이런 사람들이 자꾸만

내가 보고 온 천국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는 잘못된 설명들이라 이 말입니다

성경에는 너희들이 죽어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와 있고

우리가 그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고

죽으면 단순히 이 육체가 부활할 것을 전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부분에 대한 전체 정리를 매듭 지읍시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선포한 내용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즉 다가왔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임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일 현재적인 천국을 이해하지 못하면 임박했다는 표현은

사기성이 있다고 보아야 되겠지요

예수님이 천국이 임박했다 임박했다 수없이 말씀했는데

실제로 천국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그러면 사기성이 있지요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 중에 그렇게 오해해서

예수님이 곧 천국이 닥쳐온다 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천국이 금방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스스로 착각을 했던 것처럼

그 유명한 ‘알바이트 슈바이쩌’가 그런 오해를 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슈바이쩌 신학자의 말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을 굉장히 비극으로 끝나는

마지막 자기의 기대가 다 산산 조각이 나버리고 깨어져 버리고

허탈감에 죽으면서 하는 안타까운 부르짖음처럼 이해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끝나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이미 너희 가운데 있지 않으냐

그런 말씀을 수없이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천국이 아니다

천국은 이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할 때라야 나타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사기성이 있는 것이지요

재림이라는 부분도 믿을 수가 없지요

지금 곧 온다 라고 했지

내가 재림할 때 천국이 온다 라고 말씀 안하셨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또 천국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주의를 해야 됩니다

천국은 저쪽에 따로 있는데

개인적으로 죽을 때에 천국에 하나씩 하나씩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면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임할 수는 없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이 지금 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이 이다음에 오고 이렇게 말하면

천국이라는 말자체가 무얼 의미하는 겁니까?

기분이 좋은 것을 말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해서 그렇게 집단체적인 것이지

일대 일(1:1)로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지요

집단체적인 통치개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현재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우리가 확실히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물론 궁금할 것이 많이 있을 건데

계속해서 강의하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제를 바꾸어서 뒤에 부분을 간단하게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앞의 주제하고 조금 더 진보되어 있지요?

앞에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천국이 가까이 왔다 임박했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 다음 예수님의 선포를 읽어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와 있다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구절은 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 설명해 와서

오랫도록 오해해 왔던 구절입니다

이 천국에 대한 개념이 늦게 정리되었기 때문에

오랫도록 오해되었던 구절입니다

이것을 ‘심령 천국’이라고 많이들 이해해 왔는데 잘못된 설명입니다

다시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 보십시다

맨 먼저 질문,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없다고 했지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데 볼 수 없느냐?

콜레 박사가 가 보았다

또 누구누군가도 나도 가 보았다

박희연(?) 전도사님인지 누군지 그 분도 나도 가 보았다

볼 수 없는 나라를 어떻게 가서 보았다고 하느냐? 이거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왔다 라고 했는데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 와요 이쪽에 오고 없는데.

엇갈렸겠지요 엇갈렸으면 무엇을 보고 왔는지 모르겠어요

이 지상에서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던 천국을, 오해하고 있던 천국을

그대로 잠재의식의 연결로써 꿈을 꾸듯이 보고 온 것이지요

그것은 자기 혼자서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입신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가 보았다

그야 우리들이 밤에 꿈 꿀 때도 여러 곳에 다 다니면서 봅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지요 꿈에 내가 가서 본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개꿈이 얼마든지 많지요 실컷 다 보고 왔는데 나중에 보면 아니고

누가 죽는 것을 봤는데 나중에 보니까 살아 있고

맞지 않는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맞다 라고 어떻게 고집하느냐 이거지요

천국은 안 가본 사람들을 보고는 내가 가 보았다 라고 하니까

안 가본 사람들은 바보니까 할 수 없이 당신 말이 맞겠거니 하는데

성경의 설명하고는 다르지요

두 번째 질문을 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답을 풀어 갑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과 ‘하늘나라’라는 말은 어떻게 다르냐

하는 부분을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마태복음에만은 ‘하늘나라’ 라고 나오고

누가복음이나 다른데서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나옵니다

왜 그렇게 설명되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은 우리나라 사람 비슷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칭호는 절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여호와’라는 낱말이 나오면 이것을 ‘아도나이’라는 주(主)라는 낱말로 바꾸어서 부른다든지

때로는 네 글자 이렇게. 우리도 그러지요

저희 아버님보고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하면

새봉(鳳)자 터기(基)자입니다 이렇게 말하지요(윤鳳基 목사님 아들 윤종하) 이름은 못 부르고....

여호와의 이름이 네 글자로 되어 있어서 네 글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전혀 발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발음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조차 지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발음해야 맞는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 부호가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모음 없이 발음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한문을 읽으면 한문에 발음이 붙어 있습니까?

이것이(尹鍾河) 제 이름인데 한국 사람은 윤종하 라고 발음하지요

중국 사람에게 줘 보십시오 뭐라고 발음 하는가?

일본 사람에게 갖다 줘 보십시오 다르게 발음합니다

발음이 붙어 있지 않지요

발음은 하는 대로 자기들이 늘 읽다 보니까

앞에 자는 ‘윤(尹)’자라고 읽자 가운데는 ‘종(鍾)’자라고 읽자

그것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대로 배워서 따라 읽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발음이 자꾸만 달라져요

지금 영어가 그렇지요 영어가 글자대로 읽지 않고, 발음대로 읽지 않고,

이상하게 읽어요

예수님을 예수스(Jesus) 이렇게 써 놓고 지저스라고 발음하지요

이(I) 라고 적어 놓고 아이라고 발음하고,

안드(And) 라고 적어 놓고 앤드 라고 발음하지요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 중에 한 분 블락(W.Black) 선교사 라는 분이 계신데

블락이라고 썼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꾸 블랙이라고 발음해요

검다는 소리지요 그런데 본인은 내 이름이 블락이다 그래요

영국 사람이 자기 이름이 블락이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이 당신 이름이 블랙이라고 고집하면 되요?

영어를 배울 때에 그런 말이 있었어요 고유명사는 발음도 고유하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유명한 강이 있지요? 템즈(Thames)강!

이 템즈강이 다른 스펠링하고 비슷하게 보면 테임즈 라고 발음하고 싶지요

외국 사람들이 테임즈 강이라고 발음하지요? 그런데 틀리지요

정상적인 발음은 템즈강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발음을 이상하게 하느냐? 그것은 고유명사니까...

마치 우리나라의 유씨가 나는 류씨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옛날에 이승만 대통령이 나는 리다 이렇게 하니까

리라고 발음해 줘야 하듯이 자기 원하는 대로 스펠링하고

자기 원하는 대로 발음한다 이 말입니다. 조금 곁 이야기 인데요

 

히브리어 자체가 글짜만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읽기가 어렵습니다

모음자가 몇자 있지만 모음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저 글자를 뭐라고 읽느냐?

그때 사람은 다 읽었는데 지금은 못 읽는 거지요

그래서 히브리어가 서서히 죽어갈 때에, 쓰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학자들이 서둘러서 아, 이러다가는 나중에 전혀 읽을 수가 없구나

지금 우리끼리도 조금 의견의 차이가 있는데

이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읽겠느냐?

그래서 주후 10 세기에 마소레틱 스칼라서(?) 라고 해서

마소라(?) 학자들이 자기들이 연구해서 자기들이 아는대로

전부 발음 부호를 붙였습니다

이것은(אל■ה■ם)? 하나님이라는 글잔데

이렇게만 읽으면 뭐라고 읽어야 될지 모르는데

발음 부호를 이렇게 붙여 놓았어요

‘엘로힘’ 이렇게 발음하라고.

저 점들을 마소라 학자들이 붙인 점이라고 합니다

저것은 원래 붙어 있던 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원래 없는데 주후 10 세기에 붙인 점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은,

여호와라는 이름만은 뭐라고 발음했는지 모르니까

이 학자들이 점을 뭐라고 붙여야 될지 몰라서 점을 못 붙여서 지금도 그냥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야웨, 예호와, 뭐 적당히 발음하는데 비슷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좀 곁길로 갔는데요

저 여호와라는 이름은 절대로 부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도 꺼렸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 말조차도 부르기를 꺼렸어요

우리나라 사람도 그런것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호를 지어서 부르고 무슨 댁, 무슨 댁 하다 보니까

자기 이름이 없어져 버리고 어떤 시골 부인은 실제로 이름 없는 분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이라는 칭호대신에 ‘하늘’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라는 말은 저 공중나라 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 설명이 아니고

학자들이 그렇게 설명하니까 소개하는 것 뿐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마태가 일부러 유대인들이 잘 이해하기도 하고 유대인들의 감정에 맞게 하늘나라, 천국이라고 소개했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신국(神國)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천국(天國)을 공간적인 하늘로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늘로 도망가지 않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구나 태양계를 포함하고 있어야 되고

제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지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지구를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공중에, 허공에, 아무도 없는 곳에,

땅덩어리만 나라라고 이렇게 말하면 그건 무인도지요

무인도는 나라가 아니지요

적어도 나라라고 하면 국민도 있고 다스리는 사람도 있어야 나라지

아무것도 없이 덩그렇게 지어 놓고 이것이 나라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질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온다 라고 예수님이 자꾸 이야기 하셨는데

그러면 언제 옵니까? 어디에 어떻게 옵니까?

예수님 대답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왜 볼 수 없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왜 볼 수 없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볼 수 없다 라는 말은 실제로 국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요

어떤 나라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여기에 질문하는 질문의 내용은

로마제국이나 시리아나 이집트나 바벨론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언젠가는 초대 왕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건 누가 되건 초대 왕이 오셔서 어떻게 해가지고

나라를 세우고 수도가 있고 왕궁이 있고 왕좌가 있고

조각을 해서 장관들이 있고 이렇게 되겠거니 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라가 언제 실현되느냐? 라는 질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그처럼

너희 눈에 왕좌가 있고 왕이 있고 장관이 있고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 직접 영적으로 통치하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동사무소가 필요하거나, 시청(市廳)이 필요하거나

그렇게 우리를 통치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내무부 장관이 필요하고 외무부 장관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서 끝에 있는 말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나라는 너희(바리새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를 전에는 ‘심령천국’이라고 오해 했습니다

여기 너희는 ‘바리새인들’이지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대답하시면서

천국은 이미 너희 마음에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

바리새인들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들은 사람을 전도해서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드는 나쁜 사람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마음에 천국이 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라면 또 이해가 되지만 제자들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너희 안에 있다 라는 말은 마음을 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냐? 원문에는 아주 뚜렷합니다

‘너희들 가운데 여기 와 있다! 너희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너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너희 가운데 여기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 통치는 왕이 와서 시작하는데 그 왕이 언제 어떻게 오느냐?

내가 왕이고 내가 지금 너희 가운데 와 있지 않느냐?

안 보이느냐?

너희 눈에는 안 보일 것이다 이거지요

내가 왕이다!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것이 심령천국이 될 수 없는 부분을 조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제일 마지막 질문에 있지요 심령천국이란 무슨 뜻일까요?

바리새인의 마음속에 있는 뜻이 물론 아니고요

두 번째로 성경 다른 여러 구절들을 우리가 종합해 보면서

천국이 내 마음과 연관있는 부분으로 설명되어 있는 부분도 있지요

내 마음과 천국이 연관되어 있는 부분 또는 내 영혼과 해도 좋고

어쨌든 천국은 현세적인 그런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내가 영혼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천국은 내 마음과 연관이 있지 않으냐?

그래서 심령천국이라고 한들 무슨 잘못이 있느냐?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구나 저 공중에 있다 라고 말하면 안 되지요

지금 내 마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고

내가 하나님을 믿은 이후부터 내 마음이 기쁘고

어쨌든 예수님이 내 안에 와 계시고 그것이 천국이 아니냐?

초가집이든 뭐든 예수님 모시고 있으면 천국이라고

우리가 찬양하는 그런 천국이 아니냐?

 

그런다면 왜 자꾸 저쪽에 있다고 말하느냐? 이겁니다

어쨌든 저쪽에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세 번째로 혹 이렇게 조화를 시킬 수도 있겠지요

천국은 저 높은 공중에 있는데 지상에서 지금 내 마음속에

그 천국의 어떤 즐거움과 영광을 조금씩 맛보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은 저쪽에 하늘에 공중에 있지만

간접적으로 내가 약간 그 천국을 내 마음속에 즐기고 누리고

기쁨을 갖고 있다고 표현하면 뭐가 안 되느냐?

 

아마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국 개념인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렇게 말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

여기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어떻게 임합니까?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만일 그런 뜻으로 말한다면

이 말자체하고 이상하잖아요?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있지만 아직은 볼 수 없다

우선은 너희 마음에 이만큼만 누리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표현한다든지 다르게 표현했어야 되지

천국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예수님 대답자체가 전혀 그쪽을 암시하고 있지 않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런 오해를 하느냐 하면

이런 구절을 읽으면 천국이 내 마음에 있는 것 같고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니까 저쪽에 있는 것 같고

온다 라고 할 때는 이쪽에 있는 것 같고

요한계시록 22장에 황금 보석 이야기가 나오면 저쪽에 지어놓은 것 같고

그렇게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오해를 일으켜요

그래서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저렇게 생각해 버리고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이쪽으로 생각하고

형편대로 그때마다 편하게 적당히 해석해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 문제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고

분명하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 와 있고,

하나님의 통치가 꼭 여기냐 저기냐 라고 말할 필요 없지요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우주 중에서도 특별히 나는,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만드시고

구원하셔서 은혜의 보호를 받게 하시는

그러한 상태에 있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지요

어떤 사람은 지금 심판 하에 있고

어떤 사람은 지금 형벌 하에 있는 것이고 어두움에 있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께서 지옥이라고 하는 감옥에 가두는 것처럼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의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

그래서 서로 딴 상태에 있으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쪽만을 좁은 의미에서 천국이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된 쫓겨난 사람처럼 말하고 있는 것뿐 이지요

누가복음 10장 9절을 보십시다

세 번째 교안에 나와 있었지요 두 절만 읽고 넘어 갑시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아주 구체적으로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라고 하셨고

11장 20절 아까 마태복음에서 읽어드린 것과 같은 구절인데요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너희에게 와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너희 가운데 와 있다

너희에게 임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천국은 그때 사람, 그들에게...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현재 와 있는 것이지요

오늘 거기까지 말씀드리고

마태복음 13장 예수님의 비유를 오늘 정리를 다 끝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조금 모자라네요 너무 짧게 설명하면 또 안 되겠지요

오늘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중에 질문을 받기로 하고

그리고 그 뒷부분은 다음에 연결해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와 사랑과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를 다스리고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기쁜 대로 도와주기를 원하는 그러한 가상적인 신을 만들어서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었던 저희들을 그리고 사단의 유혹을 쉽게 받아서 어두움의 권세 하에서 처음에는 기쁘게 따라갔지만 결국은 처참한 불행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던 저희들을 하나님께서는 광명의 나라로 옮겨주시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으며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의 통치 하에서 이상적인 그러한 다스림을 받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이 회개하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고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백성의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성령님의 충만하심 속에서 성령님의 지도를 받고 성령님의 내재하심과 그의 인도 하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촉구했던 구절들을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는 그 음성대로 그 외침대로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군림했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왕권을 장악하시고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악의 세력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견제하시고 그 사단의 세력을 어느 정도 결박하시고 제한하시고 마지막 어느 날엔가는 온전히 그들을 멸망시키셔서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로 통일하시고 만유를 회복하시고 이 세상과 저희들의 몸까지 영광스러운 새로운 존재로 부활시키시고 재창조하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의 선언과 약속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에, 지금, 이 지상에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리고 그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항상 미래적인 천국을 꿈꾸기 때문에 현세에서의 도피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현세에서 내 삶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잘 받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언젠가는 천국에 갈 것이다 라는 착각을 범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지금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지 않다면, 지금 내가 성령님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나는 버림받은 자일 것을 생각하게 하시고 나와 내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에게 사도들과 똑같은 말씀으로 전해주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믿고 따르도록 일깨워 주고 복음을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 (질문)

먼저 질문을 좀 받고 시작하겠습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면 성령께서 그 즉시 내주 하신다고 했는데 성령의 내주와 주를 시인하는 것하고는 시간적인 인터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체가 그분을 내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지요 고백해서 그 분에게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부터 바로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시니까 시간적으로 무슨 특별히 갭을 안두어도 되겠지요

질문_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작정하는 그 순간부터 성화로 나아간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라도 자꾸 죄를 짓게 되고 어쨌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서 살지 않는 것 같은 그러한 생활들을 지속해 나가는 것을 생각해 볼 때는 그것이 구원 다시 말해서 믿는 것하고 성령을 받는 것하고 다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성령님을 받는 것을 물질적으로 이해하시지 말고 통치개념으로 이해 하시면 그 문제의 대답은 좀 간단하지요 즉 성령님이 오셔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이 실제로 와서 자리를 얼마만큼 차지하고 있고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이 물질적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육체적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요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말자체가 그분이 나를 지배하신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내 인격을 지배하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그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는데 성령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내 마음에, 양심에 또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데 잘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순종을 곧잘 하기도 하지만 자주 거역도 하지요 그 거역하고 안 하고 하는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요 일어나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령님이 떠나셨다가 들어 왔다가 그렇게 표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야 됩니다 그것을 바울이 육에 속한 자라고도 고백했지요 너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가 아니냐 라는 말은 아직도 성령님을 따라서만 살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육에 속했던 그 삶을 지금도 너희들이 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하는 말인데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당히 깊이 다루어야 할 부분인데요 가르침이 분명하지 않아서 즉 제대로 잘 배운 일이 없기 때문에 내가 성령님의 뜻을 따라야 되는지 거역해야 되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인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냥 육을 따라 살면서 이것이 육을 따라 사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 욕심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된다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말로만 생각하고 지배받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신자면 육에 속한 사람의 모습을 굉장히 많이 보이기도 하겠지요 또 실제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도 처음부터 대뜸 되는 것은 아니지요 마치 시집온 아내가 나는 이제 당신에게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결혼식장에서 서약을 했고 또 그러겠다고 마음도 먹고 왔지마는 막상 남편하고 부딪쳐 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자주 있거든요 자기 마음에 들일은 물론 순종하는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도 따라 해야 되느냐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자꾸 따라 해야 되느냐 그래서 불만이 생겨서 안 따르고 싸움이 일어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내가 복종하겠습니다 주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할 때는 내 생각하고 아마 맞을 것이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주 좋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나하고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 안 맞는 거지요 그래서 왜 하나님 뜻이 나하고 맞지 않느냐 라고 생각해서 자꾸 갈등을 일으키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보기도 하고 그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이것은 배울 때라든지 훈련의 과정 등등 처음에 복음 받을 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잘 설명 들으면 쉬운데 그렇지 않으면 마치 시집가서 당신은 남편에게 절대로 복종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은 성격이 이렇고 이렇고 이런데 당신은 그래도 복종해야 됩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좋은데 중매쟁이가 그렇게 설명안 하고 좋게만 설명하지요 이 남자는 너무나 좋아서 당신 좋은 대로 다 해 줄 껍니다 이렇게 설명 되었다면 시집올 때 편안하게 생각하고 오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다 해줍니다 이렇게 듣고 왔는데 막상 와 보니까 아니지요 그래서 자꾸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복을 받을 때, 교육받을 때 미스테이크가 상당히 큰 이유가 있고요 알고도 잘 안 되는 것은 아직도 성화 과정에, 자라가는 과정에 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저는 봅니다

문제-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쭉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어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음부에 내려갔다는 말씀이 비유로 나와 있는데요 그것을 총무님 말씀대로 미래지향적인 천국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구약시대에 보면 에녹이라든지 엘리야라든지 또 부활하신 예수님도 육신의 몸으로써 오백 사람이 보는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는 데요 그런 하늘의 개념은 어떻게 말씀을 하실 수 있는지요

- 하늘나라라고 할 때도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었듯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저 먼 공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라는 말 자체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요 하나님께서‘나는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그 말이 공간적으로 너는 지구에 있고 나는 저 위에 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우리와 딴 차원으로 이해한다든지 그건 영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영적인 영역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이 실제로 오른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다는 뜻이 아니고요 그 어떤 왕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 이지요 그래서 그 하늘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내면적인 부분하고 외면적인 부분이라든지, 재창조되기 전과 재창조된 이후의 문제와 그 부분은 나중에 구속사적인 설명을 들으신 후에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지옥이라고 해서 저 밑에 옥이 땅 밑에 파고 내려가면 있느냐 그렇지도 않지요 옛날에는 지옥이라고 하면 땅 저 끝에 내려가면 구덩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것은 지구가 평면일 때 말인데 지구가 둥글다 그러면 땅을 파고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사실은 불덩어리 밖에 안 나오지요 실제로 땅 속에 지옥이 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그러면 천옥이냐 성경에는 지옥이라고 나오지 천옥이라고는 안 나오거든요 물론 지옥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번역이고 원문에는‘천(天)’도 아니고 ‘지(地)’도 아니고‘게헨나’라는 말인데 게헨나 라는 말은 저 예루살렘 성 밖에 쓰레기 버리고 하는 거기를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형벌의 장소를 그렇게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거니까 꼭 우리가 장소를 연관 지어서 풀지 않고 조금 다르게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다음에 조금 더 설명하고 나면 이해가 되겠지요

질문-사도행전 읽으실 때 사도 바울 아덴에서 설교할 때‘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이 문맥에서 따져보면 그 이전에 하나님이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하나님게서 용납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했는데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는 말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일차적으로는 아덴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요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이제는 복음을 들었으니까 과거 것은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이제부터는 안 된다 그런 말이기 때문에 복음을 이미 듣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고요 전혀 복음을 한 번도 못 들어 본 사람에게는 전에 것도 그렇고 이제부터도 없지요 그래서 한 번도 못 들었으니까 이제까지 라는 말도 필요 없지요 그런 사람의 경우는 다른 구절로 다르게 적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에는 이렇게 했던 것을 허물치 않겠지만 하는 말은 이제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복음을 듣는 지금부터는 안 된다 하는 말이 있어서 그런데 아직 복음을 전혀 못 들은 사람 한 번도 못 듣고 죽을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해당되지 않지요 그런 사람은 다른 의미로 심판의 문제를 풀어야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자기가 구원하기로 생각하시고 계신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원하시겠지요 사람을 늦게 보내시든지. 과거는 이렇게 지내 왔는데 어느 땐가는 들려주시고 깨달아 믿게 하시든지 아니면 사람이 안 가면 천사를 보내시든지 꿈에 나타나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구원 받을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보면 좋겠지요

질문-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의 삼층 천의 경험을 말씀으로 했는데 제가 알기로는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는 거라고 생각되거든요 관계성이 통치의 개념이라고 보는데 물론 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육적인 개념에서의 지상 하늘 이런 개념은 아니지만 그것을 굳이 표현하려면 영적 공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것 같은데요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꿰뚫고 있는 관념자체가 이 지상의 땅 외에 영적 공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육적인 부활이 물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육적인 부활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주장하셨고요 또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천국자체도 꼭 이런 육적인, 우리가 하늘에서 보는 하늘과 땅은 아니지만 어떤 그런 영적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렇게 이해하셔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물론 설명을 좀 더 들어봐야 되겠는데요 영적인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조금 더 설명을 들어봐야 되겠는데 어쨌든 영적인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공간의 공간과는 다르겠지요 그러면 상관없지요 그러면 저쪽이라고 말 안 해도 되지요 이쪽도 되고 저쪽도 되고 아무 관계없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것하고는 관계없지요 땅이냐 저 위냐 라는 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영적인 공간이라면... 공간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합니다마는‘장소성’이라고 말해도 좋겠지요

‘영적인 장소성’ 뒤에 영토문제를 다룰 때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는 사실 핵심 되는 부분이 오해가 있으면서 제가 핵심 되는 부분을 서론부터 끌고 가기 때문에 핵심 되는 부분에 아직 안 들어가고 있는데 계속 제가 건드리기 때문에 자꾸만 문제가 생기지요 일단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를 어떻게 했는가를 쭉 따라오면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정립해 가면서 이제 그런 공간적인 문제라든지 다른 부분을 다 풀어가야 되겠지요

기도하겠습니다

지금도 온 세계를 통치하시며 특별히 그 가운데 주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친히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높이 계셔서 왕으로 모든 일들을 수행하고 계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계속해서 확대해 가시고 굳게 세워 가시고 구원할 백성들을 구원해 가시는 주님의 사역을 또한 찬양드립니다 이 저녁에도 주님께서 왕권으로 저희 가운데 임재하셔서 저희들이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또한 주님의 백성으로써 함께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공동 사명을 확인하면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역사 하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을 조명하시고 주의 말씀을 대할 때에 그 말씀에 나타난 뜻들을 좀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 3

마태복음에서 쭉 오늘 끝까지 거의 다 훑어야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설명했던 부분 다시 조금 더 복습하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처음으로 선포하신 메시지 였습니다

거기 회개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에 그 나라로 ‘들어오라’는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으로 모시라는 뜻으로 지난 시간에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5장부터 6장, 7장에 걸쳐서 석 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던 귀중한 교훈들입니다

산상설교라고 알려져 있는

이 석 장에 걸친 내용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으로 설명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 된 자가 가져야 할 생활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 5, 6, 7장처럼 살아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 되면 또는 천국 백성이 된 후에 이러한 삶을 살아야 된다 라는 말입니다

이 윤리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강조해 드렸습니다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이해해야 된다

라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일단 천국이라는 나라에 들어온 후에 내 나라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나의 왕이 어떤 분이고 또 그 왕이 세우신 국가가 어떤 형태의 국가인가를 확인하면서

그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미국 법을 국내에서부터 배워서 지키다가

미국 법을 잘 지키면 미국에 들여보내주는 것이 아니지요

그건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요

종교를 우리가 윤리적으로 자꾸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일을 잘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배웠습니다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말은 그냥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입국 신청서를 제출하고

입국 비자를 먼저 받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입국 비자를 받아서 천국이라는 나라에 시민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이제 그 나라 법을 지키고 그때부터 그 나라의 풍속을 따라 살고

그 나라 백성들과 같은 공동체 생활의 윤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필요한 윤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부의 윤리는 아니라는 점이 다루어야 할 부분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제가 이것이 윤리적인 회개가 아니고

정치적인, 종교적인, 국가적인 윤리로 말씀을 드렸으니까 이해하셨지요?

그래서 5장부터 나오는 내용이 대개 그런 내용들(천국백성된 후 윤리)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줄 것임이요’가 아니고

천국이 그의 것이기 때문에 천국을 소유한 자의 자세는 또는 삶의 원리는

마음이 가난해야 되고, 애통해야 되고, 온유해야 되고, 그런 원리들입니다

특별히 그 중에 10절~12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런 말씀들이 박해를 미리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다는 뜻이지요

그건 분명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아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는 말도

소금과 빛이 되고 나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바른 모습으로 살고,

바른 생활을 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국민다운 모습이지요

그것이 소금이요 빛이라는 뜻이지요

또 17절 이하에 율법에 대한 설명도 쭉 나옵니다

천국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율법을 따라서 아주 고차원의, 최선의

그러한 삶,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그러한 형식적인 의가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이 이렇게 산후에 천국 백성이 된다 라는 뜻은 아닙니다

 대인관계의 모든 부분이 바로 그러한 원리인 것이 분명하고요

6장에 나오는 기도의 자세라든지 구제의 문제라든지 등등

여러 가지도 천국 백성에게 주어진, 여기에 나오는 기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같은 것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천국 백성들이 할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6장 끝에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천국을 이다음에 얻을 것처럼 생각해서 지금부터 천국을 사모하라

이런 말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말이 아니고

너희는 그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일단 그 나라에 관계되는 또는 관심 있는 그러한 입장에서

그 나라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 나라가 굳게 세워지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기도나 소원을 갖고 있어야 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부분들은 하나님이 의례히 주실 것이니까

그러한 현세적인 부분에 대해서보다도

이미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기도 생활을 해야 된다 라는 말이 현재적인 이야기지요

7장 이하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특별히 7장 15절 이하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현재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와 있는데

이 나라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어서 하나님 나라 지도자가 아니면서

하나님 나라 지도자인척 하고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된다 라는 현세 지상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부분들이라는 말씀이 역시 거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7장까지 그런 설명들이 나오고

8장부터는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휘두르시는 내용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8장 처음에 문둥병자 고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리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런 기적을 행하는 일들이 쭉 계속해서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전부 하나님 나라의 왕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여기 병을 고치시는 자체가 왜? 하시느냐? 하는 부분을 잘 살피셔야 됩니다

병을 왜 고치셨느냐?

천국이 만일 미래적인 것이기만 하고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면

왜? 현재 지상에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시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그 병자들은 누구냐? 또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꼭 병이 나아야 하느냐?

천국이 아니라면. 천국에 갔을 때 하면 되지 않느냐?

또 천국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자기백성들의 이런 질병을 꼭 처리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사실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가 자기 나라를 이 땅에 도래시켰고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왕으로써 섬기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구절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마태복음 2장에 처음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해서 알려준 구절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그는 목자와 같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라는 표현과 목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항상 동시에 나타납니다

구약에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를 쭉 찾아보면

다윗의 위를 이을 왕이 등장한다 라고 하면서 바로 이어서 목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어떻게 말하면 왕이지만 또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 양떼들을 보살피고 보호하기 때문에 목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말이 지상에 있는 국가 때문에 자주 칼을 휘두르는, 권력을 행사하는 왕처럼만 인식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굉장히 어진, 사랑스러운, 인자한 목자 상으로써 이 군림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예수님이 그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지요

우리가 왕이라는 표현을 물론 써야 하지만 우리의 통치자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실 때는 호령하시고 위엄을 부리시고 그런 방식보다는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섬기시면서 돌보시고 양육하시는

그래서 좋은 자녀로 국민으로 키워 가시는

그런 의미로 지상에서 현재 왕의 일을 행하신다 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8장 17절에 질병들을 고쳐 가시는 도중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하시면서

병까지도 친히 담당하시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도 친히 담당하시는

그러한 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자기 백성들이 지상에 있기 때문에 현재 지상에서 그가 자기백성들의 이러한 부분을 담당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미래 이야기가 아니고 지상에서 행하셨던 일이지요

9장에 넘어가서 보면 중풍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6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여기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라는 말이 바로 천국의 왕의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는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그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이 의 요소들을 제거하셔서 정결한 나라를 세워 가신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왕들이 백성들의 잘못을 없이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왕들은 백성들에게

‘우리 다같이 좋은 나라를 해가자’

‘서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자’

‘서로 사랑하는 국민이 되도록 하자’

그렇게 격려는 할 수 있지만

국민들로 하여금 그런 훌륭한 도덕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런 일은 하지 못하고

이미 저지른 국민들에 대해서 어떻게 죄를 정리해 주는 일을 못하지요

말썽부리는 국민이 있으면 감옥에나 집어넣을까.... 어떻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처리하셔서

죄를 사하는, 여기 사한다는 말은 묵살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죄의 문제를 자기 스스로가 담당하셔서

정결케 하실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병자를 많이 고치신 겁니다

즉 병에 걸린 사람도 병에 걸렸지만, 약한 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 국민이 다 인정해 주겠다 그런 정도가 아니고

그 병 자체를 아예 없이하시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지요

우리 영혼의 어떤 문제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죄를 범해서 약해지고 문제가 있는 사람을 봐 주겠다, 용서해 주겠다, 괜찮다 라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범한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뜯어고쳐서 튼튼하게 만드시는 그런 치료하는 사역을 하시는 것이 천국의 왕의 능력입니다

그런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여기 병을 고치시면서 내가 이런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이유가,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 우리 한국에서도 병 고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채로 실제로 육체의 병을 고치는 그러한 의미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굉장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병을 고치는 것이

영적인 죄를 사하는 그러한 큰 세력을,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조로써 또는 표적으로써 하신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9장 35절로 넘어갑시다

다른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일이 쭉 진행되어 가다가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천국 복음이라는 부분과 약한 것과 병을 고치는 것하고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 드린 그런 배경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천국 복음 즉 천국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과연 무엇이냐?

그건 약한 자, 병든 자, 말하자면 영적으로 죄를 범하고 그런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사역이 왕의 사역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36절 이하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라고 하면서

앞에는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다음절은 질병이기 보다는 통치자가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떼들이 꼴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양떼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에스겔서 34장 이하에 나오는 그런 여러 가지 구약의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보면 목자가 자기만 살찌기 위해서 양들을 잘 보살피지 않고

자기 자체의 어떤 것만 생각한다 라고 해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나라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쭉 내려가다가

하나님께서 그래서 앞으로는 너희들을 다 몰아내고

진짜 목자들을 너희들에게 보내 줄 것이고

아니면 내가 목자로 너희들에게 나타나서 내 백성들을 직접 돌보겠다

그런 선언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기도 같은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37절~38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올바른 지도자들이 또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부분이지요

그리고는 10장에 넘어가서 열두 사도를 선택해서 바로 그러한 일꾼으로 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목자이시면서 그 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일에 옆에서 시중드는 또 많은 목자들을, 지도자들을 세우시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분들이 바로 열두 사도입니다 열두 제자이지요

그래서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런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자들이 병고치는 일을 특별히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이 제자들이 다른 사람의 병을 제대로 고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려운 병은 제대로 안 되어서 그런 이야기는 나왔지만 제대로 병을 고쳐주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가서는 사역이 조금 나옵니다마는 실제로 이 말씀이 우리가 앞에 읽었던 9장의 배경을 통해서 본다면 육체적인 병을 고치는 것을 초점으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죄를 사하는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는 그런 일들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적인 표현들로 잘 이해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를 고르셔서 보내시면서 7절에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라”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결국 그들이 나가서 바로 아래 8절에 나오는 대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병이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는 일을 시키는데

그것이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가까웠다 라는 메시지를 동반하고 가기 때문에

지상에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통치가 왔고 하나님의 그 사죄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를 잘 설명하지 않은 채로

병을 고치거나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봐야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 의사들이 병을 고치는 것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이 일들을 도와주는 것하고는 핵심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겠지요?

그 아래 16절~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들이 또는 일꾼들이 일을 할 때 세상 나라 정권을 장악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날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시면서 내가 성령을 보내주어서 성령님이 너희들에게 그때그때 필요한대로 안내를 해 주실 것이다

그런 설명이 쭉 나오면서 복음사역을 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뒷부분에 넘어가서 34절, 앞의 그 이야기에 이어서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또 나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거기에 서로 지도자와, 이 세상 지도자와 사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과 이 세상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똑같은 갈등과 싸움이 일어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도래했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백성을 골라내서 예수님이 자기 나라를 별도로 이 지상에 건설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 사람들과 계속 갈등이 있지요

물론 그것은 ‘사단의 나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집안, 가족끼리도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장에 가면 2절~3절에 봅시다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이 메시아를 소개하고

‘저 분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알려준 후에 자기 자신이 약간의 회의(懷疑)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만이 아니고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릴 때 또 오실 메시아가 세울 천국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다분히 육체적인, 물질적인, 현실적인 그러한 왕국으로 기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상에 군림은 했지만 영적인 차원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도 오해를 일으키고 오늘 우리도 오해를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자꾸만 우리가 천국을 미래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디 땅을, 영토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어디에 청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이 어디 계신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그러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말은 자꾸만 우리는 단순히 어떤 ‘마음의 평안이다!’ ‘예수 믿고 평화로운 것이 천국이 아니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 기쁘고 즐겁다’ 이런 것이 천국이라고만 설명해 버리는 그런 위험이 우리에게 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현재 아주 확고하게 하나의 국가로 와 있고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으로 되어 있고, 우리의 왕이 계시고, 이 지구 전체가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육체적인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자기가 헤롯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헤롯왕이 저렇게 버젓이 아직 존재할 수 있을까?’

‘메시아가 오셨는데 왜 저런 사람을 심판하지 않을까?’

그래서 천국의 왕이 오셨는데 왕권을 휘두르지 않는데 대한 회의가 있어서 질문했던 것입니다

내가 당신이 오실 그리스도라고 분명히 소개는 했었지만 아무런 그리스도와 같은 일을 안 하신 것처럼도 보이는데

‘혹 내가 잘못 소개한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아닙니까?’

‘당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됩니까?’ 라는 질문을 자기 제자를 보내서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4절~5절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 말은 맞지요

그건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보지 않았느냐?

가서 본 대로 이야기 하라 그랬지요?

너희들이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고해라! 뭡니까?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렇지 않느냐?

잘 보았으니까 가서 본대로 보고해라

그것만 보고 하면 글쎄 그것이 메시아의 일입니까? 아닙니까? 라고 약간 회의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왕이, 메시아가 할 일이 아니냐?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우리 일상의 지상에 있는 국가와 다른 점이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상당히 영적인 차원이지요?

그리고 메시아의 심판 사역이 언젠가는 등장하겠지마는, 일단 심판이 행해지기 전에 천국은 복음을 전해야 하고, 천국으로 백성들을 불러들여야 되고 ,사단의 사슬에 매인 사람을 건져내어서 자유케 하고,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그러한 일들부터 하셔야 되기 때문에 지금 그 일을 먼저 이야기 하는 거지요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물론 악을 심판하는 것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정리할 수 있지요

이 지상에 와서 지상에 있는 악의 세력만 다 멸망시키면 멸망되지 않는 사람은 자연히 구원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천국은 그와 좀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천국 백성들이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끝나기 않고 악을 제거하기 이전에 우선 천국 백성 자체를 사슬에서 건져내야 되고 천국 백성 자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고 천국 백성 자체를 강하게 해야 되고 거룩하게 해야 되고 온전하게 만들어야 되고 하는, 그런 천국 백성들에 대한 혜택과 돌봄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상 국가에서도 늘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삼팔 선 이북에 공산국가를 어떻게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옛날 같으면 임진왜란 때처럼 일본이 쳐들어오면 일본을 막는다든지 그런 외세나 그런 것만 막는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또 우리나라에서 죄를 범하는 나쁜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가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국민들 모두를 교육도 시키고 의료혜택을 주어서 건강하게 만들어야 되고 또 여러 가지 사회적인 보장 제도를 해서 사람들이 다 잘살 수 있도록 그런 여러 가지 배려를 하고 국민을 잘 훌륭하게 양육해 가는 일을 해야만 훌륭한 나라가 되는 것이지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가난하고 농사짓고 어렵게 무식하게 이렇게 사는데 나쁜 사람을 추려낸다고 해서 이상적인 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 나라에서도 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게 먼저 집행되고 있고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이 조금 아쉬워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아래 이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광야에 왜 나갔더냐? 세례 요한을 보러 간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을 이야기 하시면서 10절에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그 말은 왜 하셨느냐 하면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메시아가 오기 전에, 내가 오기 전에 사자를 앞에 보낸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이 사람이 소개해서 바로 뒤에 온 내가 왕이다, 내가 메시아다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지요

그래서 1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는 말이 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왕이 오신 것을 직접 소개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구약 예언의 마지막 예언자로써 세례 요한이 큰 사람이다 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그 천국을, 왕권을, 그 나라의 왕을 확실히 보고, 만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또 왕의 도움으로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고, 양육을 받고 있는 천국 백성이 훨씬 더 복이 있고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리라”

물론 이것은 번역 상에도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아직도 논쟁이 있는 부분입니다마는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국이 이 세상에 침노해 들어온 것처럼

또 반대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천국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처럼

아니면 사단의 세력과 천국과 사이에 이렇게 대결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13절~14절에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말라기서 제일 마지막에 예고된 그 예언자가 엘리야지요?

말라기서 4장 제일 끝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다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이 세례 요한이다

그러면 실제로 오는 왕은 예수님 자신이시지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구체적으로 천국이 현재 지상에 이미 온 것을 설명해 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다가 12장에 넘어가서 보겠습니다

12장부터는 굉장히 중요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을 보면 도움이 되는데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계속 나오는데요

그 논쟁에는 여러 가지로 얽혀있지만 그래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논쟁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이 안식일 논쟁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가 당대의 지도자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미움을 받고 해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런 결말까지 끌고 가는 데요

안식일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고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도 안식일 논쟁이 등장합니다

오늘 안식일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게는 드릴 수 없는데요

이 안식일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일맥상통하는 관계가 있을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이 이미 너희 가운데 와 있다’라는 말씀을 할 때는 이 첫 창조된 세계를 보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온다 라고 말할 필요 없지요

이 우주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인데 무슨 하나님 나라를 다시 찾느냐? 이렇게 말씀하셔야 되는데 천국을 별도로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창세기 1장에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안식하시면서 그 제 칠일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 라는 표현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냥 넘어가 버리는 데요

그 부분은 하나님이 일을 다 하고 쉬신다 이렇게 가볍게 설명되어지지만 실제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안식일의 주제는 구약에서도 계속 중간 중간 나오면서 안식일이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지요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서 34장이라든지 예레미야에서 목자를 보내주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도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구절이 같이 따라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안식일에도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 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창세기 2장에 있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다’ 라는 말을 예수님이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이 붙은 것이지요

이 마태복음 12장에도 똑같은 스토리가 나오는데요

실제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본격적인 천국은 아니고 그것은 일차 사역이고 그 첫 창조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세계 위에 다시 그리스도가 이상적인 참된 모습의 국가를 그 위에 다시 세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넓은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이상적으로 생각하신 나라가 아니고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 ‘좁은 의미’로 참된 의미로 그 첫 창조된 세계 위에 다시 군림하는 겁니다

그것을 안식일로서 설명해 오고 있고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지금까지 하고 계시냐?’ 라고 하면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나도 죽은 자들을 살린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사역이지요

이 구원 사역이 안식일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살려서 구출해 내는 것 또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어서 안식의 나라로 옮겨주고 해방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요

그 구원이라는 말과 출애굽 사건과 안식일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등장하면서 마치 병자를 고쳐주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에게 귀신에게서 놓여나서 안식을 주는 것처럼 안식이라는 말이 구원의 배경을 깔고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고 그리고 18년 동안 귀신들렸던 여인을 고치시면서 ‘아브라함의 딸을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여 있던 데서 풀어내는 것이 뭐가 나쁘냐 그것을 안식이라 하는 것이 왜 나쁘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에게 얽매여 있던 자에게 즉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해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안식일날 행하셔야만 앞뒤의 말이 맞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이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너희들보고 육체노동을 쉬라는 말이냐? 아니고 너희들이 ‘영적으로 안식’을 누려야 되고 해방을 받아야 되고 구원을 얻어야 된다 라는 메시지를 예수님이 아주 뚜렷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안식일의 문제는 다른 기회에 여러분이 공부하셨으면 좋겠고요

현재 세계적으로 안식일 문제는 조금 정리가 덜 되어 있기도 하고 특별히 우리 한국에서는 안식일을 굉장히 육체적인 안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구원과 관계되는 것을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안식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영적으로 이해하셔야만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셔야만 되고 육체적인 안식이 아니라 영적인 안식을 누리지 않으면 우리는 안식을 지키는 자가 못되지요

그 이야기를 해가다가 문제가 조금씩 더 진전되어 갑니다

9절 이하에도 똑같은 안식일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요

그렇게 하고는 22절 이하에 실제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귀신에게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이야기를 해 가시면서 24절에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귀신이라는 그런 무서운 힘의 존재를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

아마 틀림없이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바알세불을 내 힘을 빌려서 하는가 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낸 일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26절에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단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사단의 나라의 왕은 사단입니다

사단의 나라가 스스로 싸우겠느냐 그러지 않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실은 성령님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즉 사단의 나라를 내가 성령님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권으로 가지고 와서 사단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28절~29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사단을 얽어매지 않고 사단을 결박하지 않고 어떻게 사단에게 매여 있는 내 백성을 구출해 내겠느냐 그런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2장 38절 이하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는 말씀에서 설명을 드렸던 부분입니다

46절로 넘어갑시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이런 일을 하면서 논쟁이 붙었지요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조금 귀신의 힘으로 했으니까 귀신들린 사람처럼 되지요

입신을 했다든지 신접한 여인처럼 그런 상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런 말들이 오고 가고 했었지요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46절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마태복음에는 이렇게만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자기 아들이 또는 자기 형님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귀신이 들렸다 라고 하고 집에 붙들어서 가두어 두어야 하겠다 정신이상자니까... 하고 잡으러 온 겁니다

그래서 47절~50절에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이 말씀자체가 이미 천국 백성의 차원을 새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혈연관계 관계적인, 현세적인, 육체적인, 혈육적인 그러한 국민이 아니고 가족관계가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끼리 모인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국민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끼리 나타나는 나라이기 때문에 어떨 때는 내 가족도 아닐 수 있고 남의 가족이 내 가족일 수 있고 그런 전혀 다른 국민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성원들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고 13장에는 중요하게 천국에 대한 비유들을 굉장히 많이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교안에 나와 있으니까 쭉 보겠습니다

13장에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 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먼저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 ‘씨 뿌리는 비유’에서 처음에는 길 가에 다음에는 돌 밭에, 가시덤불에, 옥토에 씨앗이 떨어져서 어떤 것은 죽어버리고 어떤 것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한다는 비유인데요

여기에 나오는 비유의 내용이 또는 이 비유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죽은 후에 일어날 일들입니까? 아니면 현세에서 일어날 일들입니까? 현세에서 일어날 일들이지요

여기 뭐 씨를 빼앗기고, 믿음이 자라다가 어떻게 되어 버리고, 이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어떻게 자라다가 죽어버리고 그런 일들이 현세의 일이지요

이다음에 천국에 가서 되는 일이 아니고...

그런데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물론 이 비유들이 과거에는 천국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전도라고 대개 설명해 왔는데요

그것은 천국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연구되지 않았을 때 19세기까지 하던 설명입니다

지금 20세기는 그런 설명을 훨씬 벗어나서 이 비유들은 전부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 11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고요

19절에도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이렇게 천국이라는 표현이 분명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천국의 어떤 비밀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비유에서 천국은 현재적인 것으로 분명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 하늘에서 있을 일입니까? 아니면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날 일들입니까?’ 라는 질문이 있는데요

저 하늘에서 일어날 일들이 아니고 현재에 있을 일들이지요

해설에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나 악한 자 즉 사단이 와서 뿌리운 것을 빼앗는 일이나 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것이나 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다 현세에서 우리에게 닥쳐온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서 현재 나라를 세워가고 확장해 갈 때에

천국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있고

천국 복음을 듣고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해서 천국이 어떤 때는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확장되는데

어떤 때는 전혀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는

그래서 천국이 지상에서 확장되어갈 때, 세워져갈 때,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이 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적용할 수 있어서 개인이 어떻게 천국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부분도 여기 같이 있지만 이 비유 전체를 놓고 보면 천국은 어떤 때는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처럼, 초대 예수님께서 세운 교회가 삼백년 동안 박해 속에서 지하에 다 들어가 버리고 로마제국시대에 없는 것처럼 보였지요

지난 삼십년 동안 중공에 있던 기독교가, 교회가 전부 없어져 버린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되고 있는 모습, 그런 것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가라지 비유입니다

가라지 비유 해설이 36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38절~39절을 보겠습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추수가 세상 끝에 오지요

그런데 이 추수 때까지 그 전에 좋은 씨를 뿌리고... 어디다가?

이 세상에다가 그리고 가라지가 함께 자라기는 하지만 천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아들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서 이 지상에서 천국 시민으로써 살아가고 있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도 ‘밭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라는 질문인데 밭은 이 세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천국의 아들들의 씨가 어디에 심어진다고 했느냐 하면 이 지상에서 심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현재 이 땅에서 복음을 듣고 있고 이 땅에서 자라고 있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마귀가 가라지를 언제 어디에 심는다고 했습니까?

역시 현세 이 땅에서 마귀도 가라지를 심고 있습니다

해설, 이 모두는 이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추수 곧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판 이후에 있을 천국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의해야 됩니다

현재의 천국을 말씀하고 계시고 또 이 천국의 현재 역사가 진행되다가 심판 날이 있고 심판 후에는 의인과 악인이 분리될 것을 보여줍니다

심판은 미래에 있을 일이고 아직은 일어나지 않지요

아직 심판이 없는데 심판 이후의 천국이 지금 있다 라고 말하면 조금 곤란하지요

아직 심판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미 심판이 있은 것처럼 자꾸 심판 후에 있을 미래의 천국을 현재부터 있다 라고 생각하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세 번째 비유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 비유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기 겨자씨를 심어서 이 겨자씨가 나중에 싹이 트고 자라면서 나무만큼 자라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 자란다는 말자체도 미래에 천국이 점점 자라간다는 말이 아니지요

영토가 점점 커져간다거나 불어난다거나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쓴 사람 말은 천국에 가보니까 예수님께서 계속 천사들을 동원해서 집을 짓고 있더라 이렇게 말하는데...

글쎄, 필요하지도 않는 집을 왜 짓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이 천국의 확장이 아니지요

지금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다니엘 2장에 있는 말씀 잠깐 보겠습니다

34절~35절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여기 이 느부갓네살 왕이 본 큰 금 신상이 있었습니다

이 금 신상에 머리, 팔, 배, 넓적다리 밑에 종아리 해서 열 발가락 시대가 나오는데요

나중에 갑자기 뜨인 돌 하나가 오더니 그 발을 쳤습니다 발가락을...

그래서 이 금 우상 자체가 다 가루가 되어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돌이 점점 커져서 태산을 이루어서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천국을 말하는데요

이 천국이 세상 왕국을, 세상 나라를 또는 사단의 나라를 파괴하고 이 땅에 자기나라를 세워서 서서히 확산되어서 온 세계에 가득할 것을 표현한 겁니다

이것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에 있을 일이고 이 뜨인 돌의 사건은 예수님이 초림하셔서 복음을 전하시면서부터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과거에는 예수님의 재림 때라고 설명해 왔는데 재림 때가 아니고 초림 때입니다

네 번째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누룩비유입니다

누룩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거의 비슷하지요

33절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비슷한 내용이고요 다섯 번째 비유는 44절에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 천국을 보화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주 값진, 너무나 값진, 고귀한 것으로 천국을 비유하고 있고 천국이 이처럼 고귀한 줄 깨달은 사람이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고 그 밭을 사야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렇게 한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 천국을 언제 발견하고 언제 샀느냐 라는 말은 현재 지상에서 천국을 발견하고 지상에서 우리가 천국을 사야하는 것이지요 이다음에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은 보화를 현세에서 발견해야 하고 그 천국은 지금 현세에서 사야하며 사기(buy) 위하여 현세적인 모든 것을 팔아야(sell) 합니다

여섯 번째 비유는 진주 비유입니다

45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이번에는 진주에 비유하지 않고 진주를 사는 장사꾼에 비유했습니다

46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 비유도 밭에 감추인 보화와 거의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그물 비유가 나오는데요

47절~50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도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일은 현재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쭉 진행되다가 이 세상 끝에 이제 갈라놓는 그러한 일을 하지요 모아들이는 것은 현재하는 일이고 다 모은 후에 마지막에 심판하는 일이 세상 끝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사단의 손에서 건져내고 모으는 일이 지금 현재 지상에서 되어져 가고 있는 천국의 사역이고 모습입니다

현재 천국의 마지막에 심판이 있고 그 후에는 영원히 하나님의 뜻만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될 것입니다 이것을 천국의 미래성이라고 말합니다

중간에 14장, 15장은 생략하고 16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6장에 가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조금 더, 천국의 모습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3절~16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이먀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왕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천국의 왕이라는 의미의 거의 가깝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아주 칭찬을 하시면서 그 뒤에

18절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면서 교회를 세운다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이 교회의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다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말이 나오고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 교회라는 말에 덩달아 따라 오는 낱말들이 ‘음부의 권세’라는 말과 ‘천국 열쇠’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이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 세력은 음부의 권세 또는 사단의 권세, 지옥의 권세라고 말을 해도 좋겠지요

그것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천국의 권세를 지상에 확립할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세우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를 말하지 않고 우주적인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개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부터 '그리스도의 왕권의 행사'의 핵심 되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계시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을 예수님 생애의 전환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비로소 이 사실을 밝혔지요

이 사실이 무어냐 하면 내가 천국의 왕으로 지상에 왔고

내가 와서 내 백성을 이처럼 병에서 놓여나고 귀신에서도 건져내고 하는 일들을 통해서 내 백성을 건져내는 일을 이미 시작했고

너희들이 보는 것처럼 천국 복음을 전하면서 천국을 이미 세워가고 있지 않느냐 라고는 말씀하셨지만

다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꼭 주의해서 알아야 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내 나라를 세울 때 빠져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사역

'내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사건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정상적으로 행사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다시 천국의 개념과 연결 지어서 이해하는 노력을 하셔야 됩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윤리적인 차원에서 처리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고 정치적인 차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단순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만이라고 하면 윤리적인 일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내 죄가 사함 받아지느냐?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느냐?

왜 하나님이 꼭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셔야만 하느냐?

또 죄를 처리한다는 말이 꼭 형벌을 주셔야만 죄가 처리되느냐?

또 아담과 하와가 범죄할 때 처음부터 이 죄 문제를 처리하시지 않고 왜 키웠다가 이렇게 문제가 커져서 드디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해야 될 만큼 심각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방치해두셨을까?

그런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풀면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뒤에 내려가서 보겠습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전혀 기대 밖이지요

도대체 왕이 오셔서, 메시야가 오셔서 죽어야 된다고 하니까 그럼 이것은 완전히 제자들로써는 실망할, 너무나 앞이 캄캄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반대했었지요?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 되는 부분,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 되는 기초 작업에 대해서 너는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너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 말이 있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이 윤리적인 차원에서 십자가를 이해한다면 무엇을 말하는지 애매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너의 죄를 대신 담당했다 이렇게 말한 것을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면, 그럼 너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자기 죄를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윤리적으로 청산하고 형벌을 받고 따라와야 된다 그런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요

또 어떤 사람은,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고생을 좀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고생하라는 말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는 말은

천국이 지상에 군림할 때, 도래할 때 또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나라를,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세우실 때 뭐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하나님을 주로, 왕으로 모셔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고집, 자기의 생각, 자기라는 자아에 대한 개념을 한번 크게 바꾸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지금까지는 너 자신이 왕 노릇 했거나 네가 원하는 대로 누구를 섬겼거나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왕을 인정하고 그 나라의 통치를 받겠다고 해야만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니까 천국 백성이 되려면 천국 백성으로써 절대 복종하겠다 라는 서약을 해야 된다

자기를 완전히 꺾고,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해야 된다 라는 말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이지요

그럼 왜 십자가라고 말했느냐?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천국의 왕권을 갖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본(本) 왕이라고 볼 수 있는, 예수님에게 왕권을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가 사함 받거나 다른 이유나 의미들이 따라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져야 된다 라는 사실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왜 십자가를 져야 되느냐 라고 할 때 딴 의미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아주 뚜렷하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자체는 아버지에게 절대 복종하는 일을 예수님이 먼저 행하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복종을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고 늘 아버지께 복종을 잘하셨던 분이지요 왜?

우리를 구원해서 아버지의 백성으로 만드셔야 되는데 우리가 아버지를 왕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우리를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일에 어떤 부분이 필요하냐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연합해서 우리의 대표자가 되시고 우리와 한 통속이 되셔서 예수님이 대표로 먼저 복종하신 일은 우리를 대신하는 복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신(神)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약점도 있을 수 있고,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많은 부분들을 예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 오셔서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완벽하게 복종해 드림으로 인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해야 된다 라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교훈으로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로 어떻게 보면 또 모범으로 아버지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인간으로 오셔서, 연약한 인간으로 오셔서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40일간의 굶주림 속에서도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리고 십자가에 목숨을 내거는 그런 아주 무시무시한 처형까지도 예수님이 기꺼이 받으시면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복종해 드렸지요

완벽한 순종을 해 드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똑 같은 것을 보여주시고 너희들도 이렇게 복종해야만 아버지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보여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우리와 연합해서 그런 일을 하신다는 이야기지요

히브리서 5장

8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설명을 좀 많이 해야 될 구절이지만 제가 설명을 좀 했으니까 그만큼만 설명하고 지나갑시다

그런 구절은 베드로서에도 나오고 신약 여러 곳에 나와 있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좀 더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고요

십자가의 의미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세워집니다

그런데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이나 가르친 것은 어떻게 보면 천국을 아직 안 세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너무 시간적으로 따져서 하는 말이고 실제로 예수님이 오신 자체가 이미 왕이 오신 거고 왕이 결국 십자가를 지고 순종해서 이룰 거니까

그 십자가 사건이 오기 전에도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계셨고 마지막 순종만이 십자가로 뒤에 남아 있는 것이지

그 앞의 모든 순종은 사실 십자가의 한 부분으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미 왕으로써의 모든 모습을 부족함이 없이 온전하게 이루고 계셨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는 일도 실제로 하고 계셨지요

그러나 마지막에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완벽하게 이루실 일이 뒤에 남아 있고 이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천국은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도 천국 백성이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그 말을 보충 설명하기를 마태복음 16장으로 돌아와서 25절~26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말씀에서 여기 십자가 라는 말은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로 되어 있지 고생하라는 말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때 때로는 고생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은 포함될 수 있지만 십자가가 단순히 힘든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쉬운 예로, 결혼해서 시집살이가 고된 사람이 '아, 내 시집살이가 십자가다'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지는 시집살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지요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일을 못할 때 오는 십자가, 나는 저것을 꼭 하고 싶은데, 나는 꼭 저 옷을 사고 싶고, 나는 꼭 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고, 나는 꼭 저 직장에 가고 싶고 하여튼 그리고 내 자녀는 앞으로 어떻게 키우고 싶고, 내 욕심이 있는데 하나님이 안된다 라고 하시니까 하는 수없이 포기해야 될 부분이지요

오늘 아침에도 어떤 부인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최근에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이 굉장히 강하게 자기에게 들려오고 또 다른 구절을 읽을 때 또 그런 말씀이 들리고 자꾸만 들렸어요

그래서 이 분이 강남에 있는 집을 팔고 새로 딴 아파트로 이사 가야 되는데 그 아파트는 알아보니까 강동구에 있어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는데 강이 하나 있지요

강을 건너오면 올림픽 아파트촌에 넘어 오는데 거기는 집은 새 집이라서 좋은데 강동구에요 자녀들 학군문제도 있고 등등 해서 갈까 말까 하는데 친구들이 모두가 바보처럼 왜 가느냐 전부가 반대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엇갈리고 있는데 성경 말씀에서는 가라 하니까 계속 갈등하다가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하고 결국 순종하고 결정해서 이사를 하는데.. 말하자면 그럴 경우에 자기가 모든 딴 생각을 포기하고 학군이 좋은 강남구에서 좋지 않은 강동구로 이사를 가는 것이 자기의 십자가지요

그런 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되기 때문에.

그 아래 27절~28절에 더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지금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하다가 왕권의 이야기까지 연결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이 말은 내가 앞으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너희들이 볼 것이다 여기 있는 너희들 중에 죽기 전에 내가 왕권을 완전히 아버지에게서 받아 오는 것을 볼 자들이 있다

이 말은 사실 시간적으로는 아직은 왕권을 안 받은 상태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왕권을 내가 완전히 받을 것이다

지금도 내가 왕으로 왔고 왕의 어떤 권한을 행사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왕권은 아버지에게서 내가 못 받은 것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나에게 완전히 주어질 것인데 너희들이 죽기 전에 볼 것이다 라고 했지요?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 재림 후에 있을 천국이야기가 아닙니다 왕권이라는 말이....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나타난 왕권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 자세히 나오는데 다음에 우리가 공부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어디에 계시냐?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요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말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에서 나온 것처럼 진짜 의자를 놓고 앉아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 책에 보면 성부 하나님이 가운데 의자에 앉아 계시고 오른쪽에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왼쪽에 성령님이 앉아 계시다 라고 했는데 성경에는 성령님이 왼쪽에 앉아 있다는 표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꼭 의자에 앉아 계시냐?

글쎄요 예수님이 피곤해서 앉아 있는지 왜 앉아 있는지 의자가 꼭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말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왕권을 위임 받는다는 뜻으로 내 오른편에 앉았으라 라고 하는 것이지 ‘네 원수로 내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는 말은 원수를 발로 밟고, 발등상이라는 말은 발을 올려놓는 대(臺)를 말하지요?

네 원수를 발로 밟고 앉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동방의 고대 왕국에서 이웃 나라의 포로를 잡아 오면 전쟁에 이긴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서 발등상 대신에 포로병을 무릎 꿇어 앉혀 놓고 그 포로의 등위에 발을 올려놓고 앉는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승리한 왕의, 왕권의 상징이지요

그렇게 할 때까지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킬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라고 해서 이것은 왕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가 온전한 왕권을 언제 얻으시느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온전한 구세주로, 왕으로 사역을 다 끝내신 후에 왕권을 이어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부활하시지요

그래서 죽음은 순종이지만 순종하고, 죽고 끝나버리면 왕권이고 뭐고 받을 때가 없지요 그런데 부활해서 왕권을 받는데 이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되살아나는 의미만이 아니고 영광의 왕위에 오르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만큼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6장이 끝나고 17장에 실제로 변화 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놀라운 영광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것도 앞으로 나타날 왕권의 일부를 미리 보여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나서 17장 끝에도 25절~27절에 여기 세금을 내라는 말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가로되 (세금을)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여기에 자기는 하나님 나라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한 표현을 극구 해 가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18장에 와서 어린 아이를 놓고 천국 이야기를 다시 하시면서 지금 천국 주제가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천국에서 용서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교회 이야기가 다시 15절~20절까지에 교회와 천국이 같은 맥락으로 한번 더 반복되어서 설명이 나옵니다

더 지나가서 20장으로 넘어갑시다 교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1절~16절까지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13장에서 많이 나오고 중간에는 또 다른 사건을 겸해서 천국을 설명해 오셨는데 20장부터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들 중에서 천국 비유가 또 등장합니다

20장 1절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일찍 나간 집 주인과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을 집 주인에 비유했습니다

즉 왕에게 비유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2절~8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는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그래서 쭉 삯을 다 주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더 많이 받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똑같이 주기 때문에 투덜대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러자 주인이 말하기를 14절~16절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는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 지금 포도원에 농부들을 들여보내는 비유에서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이신데 그리고 품꾼을 들여보내고 일을 시키시는데 마지막에 삯을 주지요?

이 일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 사실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다음에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서 되어 질 일이 아니지요

현재 지상에서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천국의 품꾼으로 불려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어떤 사람은 오전 9시에, 어떤 사람은 12시에, 어떤 사람은 오후 3시에 부름을 받고 천국에 일하러 와 있겠지요

지금이 몇 시쯤인지 모르지만... 아마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지, 오후 한 두시쯤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품삯 받을 때는 멀었지요 품삯을 마지막 날 받겠지만 일단 그 품삯을 받기 전에 긴 기간 동안 시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이 현재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비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면 25장에도 또 비유들이 나오지요?

21장에도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오고 25장에는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이런 비유들이 모두 현세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들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첫 번째, 천국은 천국이라고 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나라라고 오해하지 말고 ‘천’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대치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천국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습니다

즉 현재 이 지상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막연하게 느낌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으로 세 번째에 있는 것처럼 천국은 국가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데 천국의 제일 중요한 요소는 이지요 주권자인데 천국의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천국에는 백성이 있어야 되는데 누가 백성이냐?

천국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주와 왕으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천국의 영토는 현재는 이 지구와 우주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현재 천국은 뚜렷이 왕이 계시고, 통치하고 계시고, 그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지상에 살고 있고, 또 그 백성들은 지상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이 지구와 첫 창조된 세계가 천국의 영토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현재.

네 번째, 이 천국은 심판이라고 불리우는 큰 사건이 앞으로 있을 것이고 그때까지는 현재의 모습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현재는 천국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던 왕 즉 사단이나 그 무리들과 새로 이 나라에, 이 세상에 천국을 가지고 들어오신 그리스도 그의 왕권과의 사이에 대립 상태, 대결된 상태에서 전투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투적인 교회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설명된 그러한 전투적인 모습이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현재 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이것이 저 하늘에 가 버리면 지상의 사단과 싸울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여섯 번째, 천국의 왕인 그리스도가 사단과 그 나라를 파멸시키는 큰 사건인 대 심판의 사건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그때가면 현세적인 천국이, 지금 이렇게 있는 현재의 천국이 온전한 그리스도 중심의 통일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직도 온전히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현재 천국이 어떤 때는 좀 아닌 것도 같고 천국이 왔다 라고 하는데 시시해 보이기도 하고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나라에서는 천국이 없는 둥 마는 둥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비슷한 그런 모습의 영역들도 많이 보이지요

그러나 어떤 지역은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강하게 군림해 있는 지역도 있고 또 시대적으로도 그런 것은 진전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단과 그의 나라를 다 심판하실 때까지 현재적인 천국이 어떤 면에서는 유야무야해 보이더라도 사실은 이미 사단과 그리스도와의 대결에서는 사단이 완전히 파멸 당했고 지금 갇혀 있는 상태나 마찬가지고 힘을 쓰지 못하지요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뜨인 돌이 온 세계에 가득해 지듯이 서서히 확대되어 가서 마지막에 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천국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점점 커지고 확대된다 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설명되어질 수 있지만 실제로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지막 날에 가면 거의 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 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 오해가 없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소수지만 점점 많아져서 나중에는 대다수가 천국 백성이 된다 라는 뜻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성경에는 소수만이 구원을 얻을 것처럼 말하고 있고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셔서 역시 숫자적으로는 천국 백성이 극소수에요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가 팔레스타인에서 사역하실 때보다는 엄청나게 지금 전 세계에 확대되어서 크게 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곱 번째, 그때 이루어질 이상적인 통일국가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맨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미래 천국의 영토입니다 현재 천국의 영토는 현재 첫 창조된 상태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미래 천국의 영토가 될 것이고 또 거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요 이것은 우리가 살 집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미래 천국의 국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왕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다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토와 국민만은 아주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미래의 이상적인 천국이 실현될 때가지 이미 죽은 성도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이 궁금한 질문이지요

이것을 일반적으로 중간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천국은 분명히 설명되어져 있고 미래 천국은 이다음에 예수님 재림할 때, 심판할 때 이루어질 것이라면 그럼 지금 죽은 성도는 현재 천국에서 벗어나서 엉뚱한데 중간에 어디에 가 있느냐?

그 사람들은 미래 천국을 미리 어떻게 누릴 수 있느냐?

사실 미래 천국은 미래에 등장할 꺼니까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요?

예수님 재림할 때 등장하니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미래까지 갈 수 있느냐 아니면 이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 중간상태 부분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살피겠습니다

일단 분명히 우리가 오늘 저녁에 정리한 대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지상에 현재 천국을 세우셨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것의 기초를 분명히 놓으셨고 지금 그는 하나님 우편에 왕권을 갖고 계시고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왕권의 행사를 행하고 계시고 지금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계시고 자기 나라로 불러 모으시고 계시고 이 땅에 그의 나라가 점점 커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재적인 천국이 분명히 먼저 인식되어야 그다음 중간상태가 어떻게 되든지 미래 천국이 어떻게 되든지 이해가 되지 이 앞의 부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다음 이야기를 하기가 좀 애매하지요 그래서 거기까지 말씀드리고 질문을 받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목자 잃은 양들처럼 이 세상에서 거짓된 지도자들과 사단과 그 모든 악한 무리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있고 함께 타락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던 저희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단을 결박하시고 저희들을 그 사단의 세력에서 건져내시고 저희들의 약한 부분을 치료하시고 강하게 만드시고 저희들의 더러운 부분을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백성과 교회로써 세워가고 계시고 양육해 가고 계신 주님의 사역을 다시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러한 영광스러운 찬란한 교회 모습으로 우리 자신들이 온전해 질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와 성도로써 사단의 세력과 함께 아직도 싸워야 하고 우리 가족과도 아직 싸워야 하고 그보다도 나 자신과 싸워야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절대 복종하고 아버지를 왕으로 섬기는 그러한 날마다의 싸움과 날마다의 성화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일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이 일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내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왕되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서 그리스도의 치료하심과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일을 저희들이 감당해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의 나라가 저의 삶속에 임하시고 주님께서 저의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셔서 저의 뜻과 생각과 마음을 다 지배하시고 저의 삶의 하나하나를 직접 간섭하시고 지도하시고 인도해 주시옵소서 천국 백성이 되었다면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게 하시고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 소개해 준 그러한 삶을 저희들이 우리의 천국의 어떤 시민의 윤리로써 배우면서 날마다 실천해 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저희들을 비웃습니다 저희들의 삶의 방향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바보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가기가 힘들만큼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기 때문임을 저희들이 인식하게 하시옵소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아무런 거침도 없이 순탄하게 지나간다면 우리는 아마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고 이 세상 나라 백성일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하기 때문에 세상 왕들과 세상 법들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계속 마찰을 하게 되고 우리와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을 날마다 인식하게 하시고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머리를 짓밟으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고 우리의 이 싸움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심판으로써 끝날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싸움에서 저희들의 나라를 지켜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너희들의 육체의 목숨만 죽이고 너희들의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 세상 나라를 그리고 사단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늘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이 있고 어느 나라거나 어느 사회거나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좌절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저희들은 이 세상 나라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마치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좌절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며 그것이 이미 내 삶 속에, 내 마음 속에, 내 인격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또 내 생활 속에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게 하시고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끼리 만나서 교제하고 격려하고 손에 손을 맞잡고 이 귀중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비록 이것이 좁고 험한 길이지만 이 길을 걸어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날마다 격려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질문받겠습니다

질문⑴-아까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는데 다만 뒤에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거든요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십자가의 부활 사건이 이루어진 이 후에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할 때에 이것을 창세기의 천지 창조된 그것과 만약에 연관을 지어서 생각한다고 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 거하였지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그 명령에 복종을 한 후에야 물론 타락을 했습니다마는 복종을 만약에 했다면 복종을 한 후에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 수가 있었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다고 하면 지금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데 우리가 지금 우리에게 임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역시 우리도 십자가 사건을 확인하기(?) 전 까지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육신을 벗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있는 것으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괜찮겠는지요?

-십자가의 사건을 육체 죽음의 사건으로 아직 설명을 안 했지요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으로 설명했지요

질문⑵-그것이 아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그러한 상태, 우리에게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도록 한 그 상태에 있는 천국과 아직 불완전한 천국으로 이해를 하면 틀리겠느냐 하는 질문인데요?

-어떤 점이 불완전해 보입니까? 어떤 점이 불완전하다고 느껴져요?

질문⑶-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다시 더 어떤 육신의 유혹을 받을 뭐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완전히 승리하신 거지요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당신이 육신으로 계시기 때문에 사실 이 십자가 지기를 싫어하셨지마는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해서 기도로 이기고 결국 지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도 아직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사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지마는 시시 때때로 가기 싫어하는, 안 갈려고 하는 마음이 든다 하는 이야기지요 그러한 관점에서는 지금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우리가 누리기에는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복종을, 그 복종을 한다는 것이 결국 제가 아까 표현한대로 육신이 죽을 때까지는 계속 이 시험가운데 있으니까 이것을 끝까지 지켜나가서 우리가 육신을 벗는 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 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들을 부활시키지요 부활하고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고 악의 세력을 다 제거하실 때는 물론 완전한 통일 국가가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까지는 이상적인 완전한 국가는 아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아요? 그 나라 백성인 것은 확실한데 아직도 그 나라 자체가 국민들이 아직 더 교육을 필요로 하고 국민들이 좀 더 훈련을 받아야 되고 성화되어 가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 나라가 조금 불완전하다라고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나라는 이미 와 있고 우리는 그 나라 백성인 것은 분명하지요

 

하나님의 나라4

오늘은 네 번째 시간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주제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주제였고요

두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는 주제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으로 온 것으로 표현된 부분을 가까이 온 것으로 설명했었고 그리고는 이미 와서 우리 가운데 있다는 그런 점에서 살폈는데

이 시간에는 보통 신학적으로 중간상태라고 말하는 죽은 성도의 입장, 죽은 성도들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살피고자합니다

항목을 여러 개로 나누었는데요

 첫 번 항목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 일간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죽은 성도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그리스도가 어디 계신지가 이해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실 때까지 삼 일간 어디에 계셨습니까?

누가복음 23장 42절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던 강도가 한 말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여기에 당신의 나라에 간다고 했지요?

어떤 영토적인 개념을 말하지 않고 국가 개념으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당신의 나라 안으로 임하실 때 또는 당신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그런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나라, 주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기에 들어간다 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필요하겠지요?

우리가 앞에 그동안 살펴본 대로는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 와 있다고 했습니다

와서 우리 가운데 있는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에게 이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라고 하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특히 예수님 자신이 그 나라의 왕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나라의 왕이 나라를 지상에 세우신 것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왕에게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라는 말은 그럼 예수님도 아직 자기 나라에 안 들어가 계시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왔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말이 잘못된 것인가?

예수님도 아직 자기의 나라에 들어가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는 말은 전부 잘못된 말인가?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드디어 들어갈 곳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죽은 후에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지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직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인가?

그런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 구절하나 때문에 성경 여러 곳에서 살펴왔던 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 라는 그 표현과 이미 하나님 나라가 여기 와 있고 너희 가운데 있다 라는 표현을 전부다 뒤엎을 수는 없지요

그래서 이 구절을 다시 살펴야 될 것 같습니다

또 제자도 아니고 이 강도가 예수님을 그동안 얼마나 접촉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어쩌면 십자가에서 처음 접촉했는지도 알 수 없고 물론 그전에 소문은 들었을지도 알 수 없고 때로는 어떤 모임에 가서 멀리서 들었을 수는 있기는 한데 성경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이런 말을 했을까 라는 것이 상당히 궁금합니다

이것을 좀 이해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6장 28절을 보겠습니다 지난번에 살폈던 구절입니다 그때는 빨리 스치고 지나갔었지요? 오늘 조금 더 살핍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이 말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볼 것이다 무엇을?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본다 그 말을 왕권이라고 번역해서 그런데요

정확하게 원문대로 하면 ‘엔테 바실레이아 아웃 톤’ 그렇게 나오는 데요

‘그의 나라 안에’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인자가 그의 나라 안에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렇게 번역해야 말이 맞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죽기 전에 이 땅에서 인자가 즉 내가 내 나라 안에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그런 말 비슷하지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이상하지요?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왕권을 가지고 온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예수님 나라 안에 들어간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드디어 그 나라의 왕이 된다 왕위에 오른다 그런 의미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그 많은 비유 중에 어떤 귀인이 멀리 왕권을 받으러 가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언제 왕권을 완전히 가지셨느냐 하는 것을 시간적으로 꼭 따지는 것은 조금 무리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꼭 따지자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오르시는 때가 왕권을 정식으로 받으시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세상에 오실 때 이미 그 왕권은 예수님에 의해서 어느 정도 집행되기 시작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즉위식은, 취임식은 그때 하지만,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 투표해서 당선 다 되고 이미 대통령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조각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취임식은 어느 날 날 받아서 하지요 물론 그것하고 똑같은 비유는 될 수 없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자기의 왕권을 확보하시는 날은 물론 승천하실 때로 보아야 되겠지만 사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실 때 이미 왕권을 가지고 오셨기도 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아직은 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때가 아니고 또 내가 왕권을 완전히 소유하고 행사하려면 그 전에 해야 될 일이 있다 라는 말이 바로 마태복음 16장 21절, 22에 했던 말입니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하신 이후에 지난번에 가볍게 설명하고 지나 갔었는데요 다시 보겠습니다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 일이 있고 나야만 정식으로 왕권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에 지금은 왕은 왕이시지만 아직은 왕위에 오르시기 전(前)에 자기가 꼭 치러야할 중요한 일, 바로 ‘구속 사건’을 하고 나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고 나서 그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시지요

우리를 일단 건져내신 이후에, 우리를 건져내는 일 자체가 어떻게 보면 왕권이고 왕만이 행할 수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왕의 사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후에 드디어 왕위에, 그 백성들이 있고 그 백성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는 그런 형태로 보아야 되겠지요

하여튼 그런 의미를 갖고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또는 ‘그 나라 안에 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 23장 42절에 있는 말씀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당신의 왕권을 갖고 다시 오실 때, 이런 말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장소로 옮겨가는 때라는 뜻이기보다는 당신이 왕위를 받아서 온다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또 당신 나라에 왕이 된다고 하셨으니까 이 강도가 자기가 깨달은 범위 내에서 그럼 당신이 그 왕권을 다시 가지고 나타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렇게 보아도 문제는 없지요

물론 이것은 주석학적으로 많은 설명을 또 해보아야 하고 토의도 해야 할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와 있는 것으로 설명했는데 이 구절 하나 때문에 뒤바꾸기 보다는 이 구절 자체를 조금 잘 이해하면 무난히 넘어갈 것 같습니다

이어서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사흘 후가 아니고 오늘 네가 혼자 아니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 낙원은 어디일까 하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낙원이 어디 일까요? 이것이 에덴동산과 대조적으로 표현해서 낙원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즉 에덴동산을 낙원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에덴동산의 회복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이 자기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낙원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성경에서 이해될 수 있지요

그러나 조금 더 주의해야 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과거에 중간상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천국에 우리가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중간 지점인, 대기소인 낙원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 다음 예수님이 재림해서 모든 일을 끝내시고 나면 천국으로 들어간다 라고 이해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부분입니다마는 특별히 중간상태는 천주교에서 많이 성경을 오해해서 첨가해서 덧 부쳐서 발전시킨 교리이기 때문에 연옥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저희 개신교에서는 연옥교리를 받지 않지요? 그래서 낙원을 그렇게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신학적인 배경 때문에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을 혹시 오해하실지도 모르겠는 데요 천주교에서는 중간상태를 연옥 외에 두 가지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림부스 파트럼(?)이란 것이고 ‘조상들이 가 있는 옥’이고 또 하나는 림부스 인판툼(?) 이것은 ‘어린 아이의 옥’인데 이 두 개의 옥이 연옥 외에 또 있다 라고 그들은 설명해 왔습니다

림부스 파트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구약시대 성도들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아직 구속사역을 이루시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갈 수가 없지요

예수님이 천국에 갈 조건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지 않았으니까 아직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의 공로로 가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직 천국은 갈 수 없고 예수님이 그 길을 열어 주실 때까지 대기 상태에 있는 곳이 림부스 파트럼이다

또 어린 아이는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니고 선을 행한 것도 아니고 어린 아이를 보고 천국에 가라 지옥에 가라 하기는 참 곤란하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린 아이들만 모인 꽃동산이 있을 것이다 림부스 인판툼이 있다 그렇게 말하지요

아마 이런 생각을 많이 주워들은 사람들이 잠깐 실신했다가 깨어나면서 꿈을 꾸고 와서 하는 말이 내가 가보니까 진짜 어린아이들은 따로 있더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잠재의식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그 부분은 지금 긍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이기 때문에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천국으로 옮겨가고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필요 없는 장소이지요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개신교 안에서도 예수님의 재림때까지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

그래서 대기하고 있는 곳이 있다 이것을 낙원이라고 한다 반대로 지옥은 바로가지 않고 심판을 받고 난 후에 가야하기 때문에 가기전에 심판때까지 대기하는 곳이 있다 이것은 음부라고 한다 그렇게 설명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잘못된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도 대기소에 지금도 앉아 계시냐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도 대기소에 있느냐?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가 계시지요

물론 이것은 또 이렇게 해석할지도 모르겠지요?

부활할 때까지 사흘 동안만 낙원에 같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도를 거기 남겨두고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신 후에 이번에는 하나님 우편에 가셨을 것이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설명들이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 설명하면 현재 아직 천국에는 아무도 안간 것처럼 말해야 되지요?

또 아브라함의 품에 이야기라든지 몇 가지가 문제되는 것이 더 같이 걸립니다

그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 부분이 이렇게만 설명하기는 문제가 있는 데요

특별히 그 아래 46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 말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또 있습니다

중간상태에 대해서는 아직은 그럴듯한 성경의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단 인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는데요

아주 묘한 것은, 재미있는 것은, 소위 천국에 가보고 왔다는 사람의 글들을 읽어보니까 다 일치하게 낙원이 따로 없더라 낙원이 아니고 천국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확인을 해보았는데 천사에게 물어보니까 낙원이 아니고 천국이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책에 써 있는 것을 보았어요

글쎄,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가지고 이것을 증명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쨌든 천국에 가보았다는 사람도 낙원은 없다고 하니까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낙원이라는 말은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고 절대로 어떤 중간 장소를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해야 될 것이 또 있는 데요 사흘 동안 예수님의 몸은 땅에 묻히고 예수님의 영혼은 낙원에 가 있다가 부활할 때 예수님의 영혼이 다시 내려와서 합했는가?

그래서 40일 동안 있다가 또 승천했는가 하는 문제가 또 따라 옵니다

영혼과 몸을 분리해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더 기본적인 질문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요

이 영혼과 몸이 둘이 분리될 수 있느냐?

소위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면 영혼은 아주 좋은 것이고 몸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훨씬 더 자유롭게 온 넓은 공간을 다닐 수 있는데 이 몸이라는 것 때문에 갇혀서 부자유하게 살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희랍사상입니다

희랍사상은 영혼은 선한 신에게서 왔고 좋은 존재이고 몸은 악한 신에게서 왔기 때문에 불완전한 존재고 나쁜 존재다 그래서 좋은 존재인 영혼이 나쁜 존재인 몸에 갇혀있기 때문에 몸은 감옥과 마찬가지다 영혼의 감옥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굉장히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하는 희랍사상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그 사상이 조금 더 발전하면 영혼불멸설로 발전합니다

몸은 나쁜 존재고 그것은 나중에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영혼은 좋은 존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이 영혼불멸설은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해 보이지만 아니고 희랍철학의 사상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영혼은 영원히 살고 육체는 죽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영혼도 죽는다 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엄연히 구분해서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오늘 그 부분을 이야기하면 시간이 가기 때문에 다른 기회로 미루고요

일단 중간상태에 대해서만 설명하겠습니다

46절의 말씀을 조금 더 보십시다 46절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데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물론 이 낱말을, 헬라 말을 번역하는 데는 굉장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어떤 부분을 설명할 때 상당히 여러 낱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낱말이 ‘영’이라는 낱말이고 그 다음에 ‘영혼’ 또는 ‘혼’이라는 낱말이 있고 ‘몸’이라는 낱말이 있고 ‘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마음, 뜻, 목숨 이런 낱말들이 많이 나오는 데요

이라는 말은 영어로 spirit 이라고 하고 헬라말로는 ‘푸뉴마’라고 합니다

이라는 말은 영어로 soul 이라고 하지요 헬라말로는 ‘푸슈케’ 라고 합니다

이라는 말은 영어로 body 라고 하고 헬라말로는 ‘소마’ 라고 합니다

이라는 말은 영어에서는 flesh 라 하고 헬라말에서는 ‘삭스’ 라고 합니다

이 낱말들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한글, 우리나라 말에서의 비슷한 번역 때문에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영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이 유사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 설명해 봐도 듣는 사람이 자꾸만 혼동해서 들으면서 영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을 자꾸 이렇게 같은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요

헬라 말에서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들으셔야 됩니다

그런데 번역에는 상당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때는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도 했다가 하는 데요

성경 여러 곳에서 번역이 정확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번역하는 학자들 자신들이 신학이론, 자기들이 갖고 있는 신학사상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요

종전에 신학적으로는 영혼이라는 말과 영이라는 말은 같은 것을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른다 라고 설명해 왔습니다 최근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그런 훈련을 받은 번역자들은 경우에 따라서 영으로 번역했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영혼으로 번역했다가 이렇게 임의로 번역하는데 이러한 번역을 주의해서 해주지 않으면 성경 독자들이 읽을 때 사실 어려움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실제로 이것이 혼용되어 있는 곳도 있기 때문에 종전에 학자들이 그렇게 설명해 왔던 것이지요

영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이 같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표현하기도 했다는 거지요

그러더라도 최근에 와서 학자들이 다시 이 부분을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상당히 많은 중요한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부분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영과 육의 대조적인 설명이지요

영과 육을 아주 대조적으로 설명하는데 이 영과 육을 잘못이해하면 희랍철학의 경우처럼 영혼과 몸을 대조한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 보세요 이 영혼과 몸이 희랍철학에서는 대조적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로마서에서 나오는 낱말은 영혼과 몸의 대조가 아니고 영과 육의 대조입니다

전혀 딴 낱말이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말도 내 영혼이라는 말은 내 영으로 번역해야 되는 말입니다 푸뉴마라는 낱말입니다

그럼 영은 무엇이고 영혼은 무엇이냐? 상당히 어려운 데요

제가 도저히 지금 답을 내릴 처지가 못됩니다

자세히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도 아직도 의견이 정립되어서 일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데요

다만 이 푸슈케라는 낱말이, 영혼이라는 낱말이 목숨이라는 말로도 곧잘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 목숨을 다하고’라는 말이 가운데 들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라는 말로, 같은 낱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이 꼭 육체, 몸과 대조적인 반대쪽의 개념이 아니고 우리 몸을 포함하고 있는 인간의 생명, 인간자체를 설명할 때 영혼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라는 말은 몸과 떼어서 설명하기는 상당히 어렵고요 몸과 붙어있어야 하고 다만 영이라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설명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나의 목숨이나 현재 살고 있는 일차 창조에 속해 있는 현재 우리 인간의 어떤 모습이나 생명이나 그런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고,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과 관계되는, 때로는 성령님으로 번역해야 될 낱말이면서 거기 거룩하다는 말만 붙어 있으면 성령이 되고 거룩하다는 말이 없으면 그냥 영이지요 성령님을 영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그 영이신 성령님과 연결되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어서 그것이 때로는 내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이라고도 성경 몇 곳에서 나오는데 대부분은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몇 곳에서만 인간의 영이라는 뜻으로도 이 말을 쓰고 있어요

그 경우에는 영혼이라고 말하는 현재 1차 창조 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하고는 조금 다르게 인식해야만 맞는 것으로 일단 보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자에 따라서도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쓴 기자들하고 바울 사도하고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 사이에 똑같이 사용하고 있지 않은 점도 있어요

그러나 특별히 바울의 경우에는 이 부분을 대개 구별해서 쓰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조금 주의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너무 까다롭게 설명을 했는데요 46절을 봅시다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이 과연 몸을 남겨두고 영혼만 아버지에게로 갔다는 뜻일까? 안 그럴수도 있다 이거지요

왜? 영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내 영을 이라는 말은 내 영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또 설령 영혼이라고 보더라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이 아버지 손이라는 장소로 갔다가 온다는 말인가? 아니면 죽음에 처해있을 때 아버지에게 자기의 전체를 맡긴다는 뜻인가?

십자가에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것이 영혼의 죽음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데요

예수님의 영혼의 죽음인데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버림받고 죽음에 처하는 그 자신의 마지막 종말 순간에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이 내 영혼을 데리고 가십시오 그런 말이 꼭 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자기의 사역을 끝내시면서 자기의 모든 부분을 아버지에게 부탁한다는 뜻인가?

조금 전 만일 영과 육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육에 속한 영혼과 몸은 죽음으로 오늘 끝나지만 아버지께서 나를 다시 부활시켜서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어가실 그 부분에 대한 부탁인가 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혼과 몸 자체는 첫 창조에 속한 영역입니다

이것을 육에 속한 영혼과 몸이라고도 성경에서는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때로는 이것을 혼에 속한 인간이라고도 말해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 재림할 때 구원할 때 재창조된 부분은 이것은 영에 속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한두 곳 읽고 지나갑시다

너무 어려운 부분이라서 여러분이 그냥 감한 잡으시고 그런 것이 있구나 라고만 아시고 안 받아 들이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그런 것이 있구나 하는 것만 알아 두셨다가 이다음에 배울 기회가 있으면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에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을 때는 육으로 오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으로 오셨는데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는 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말이 몸으로 부활 안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셨다는 말은 영혼도 있고 몸도 있는 육으로 오신 것이지요

우리와 똑같은 첫 창조된 영역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영혼과 몸을 다 가지고 첫 창조의 영역에 들어오신 것을 육에 속한 것으로 말해서 육으로 오셨다 육신이 되셨다 라고 했는데

그 육신으로 계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육신에 속한 영혼과 몸이 다 죽음으로 어떤 종말을 고하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부활시키실 때에 육신으로 부활하지 않고 영으로 부활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영혼과 몸이라는 존재가 영에 속한 존재로 다시 일어난 겁니다

성경을 한 곳 더 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 요한복음 3장 16절과 똑같이 기억하시면 좋은 데요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초림이지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부활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한 곳만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거기 몸이 둘이 있습니다

육의 몸이 있고 신령한 몸이 있지요 첫 창조의 몸이 있고 재창조의 몸이 있습니다

번역은 잘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 육이라는 말은 영혼이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푸슈케라는 낱말입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원문대로 번역하면 ‘영혼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이 있느니라 이 영혼에 속한 몸이 있은즉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영혼과 영은 대조적으로 다루고 있는 겁니다

45절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이것은 오역입니다

영혼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즉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뒤에 것은 영이 맞고 앞에 것은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앞에 것은 soul, 푸슈케라는 낱말이고 다음 것은 spirit 푸뉴마라는 낱말이기 때문에 번역할 때 똑같이 번역한 것은 우리들에게 좋은 전달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다음 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즉 “먼저는 영적인 자가 아니요(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혼적인 자요(혼에 속한 자요) 그 다음에 영적인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혼적인 존재로 먼저 지어지고 그다음에 영적인 존재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 ‘혼적인 존재’로 오셨다가 그것을 ‘육에 속한 존재’라고도 하지요

다시 ‘영에 속한 존재’로 부활하셨지요

그래서 순서를, 둘을 먼저는 이것이고 나중에 저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첫 창조는 혼에 속한 존재로 창조하시고, 또는 육에 속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가, 재창조 때 비로소 영에 속한 존재로 만들어 가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이전에는 아직 영에 속한 세계가 없다 하고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시면서 비로소 영적인 영역이 시작되는 그런 의미에서 새 시대가 시작 된다 라고 말하지요

지금 이것은 혼이나 육에 속한 시대입니다

육에 속한 시대가 쭉 지나오다가 그리스도가 오시면서 여기에 영적인 시대가 시작되는 겁니다

이건 이것대로 계속 진행해 가고 있지요?

지금 이 첫 창조 세계는 예수님이 오시거나 말거나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서 영적인 세계가 처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에 첫 창조 때 시작하듯이 재창조 사역 때부터 영적인 시대가 시작되고 예수님이 재림할 때 이 첫 창조의 세계는 끝나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지요

그래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은 두 개의 세계가 있지요

이것을 새 시대라고 합니다

그것을 오는 세상이라고 하고 지금 있는 것을 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 아래 조금 더 봅시다

47절~49절 “첫 사람은(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현재, 아담의 형상이지요) 또한 하늘에 속한 자(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으리라”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여기 육은 옳게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부활이 필요하다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만 말씀드리고 지나가야 되겠습니다

다만 교안에 해설이 조금 나와 있는 데요 누가복음23장 46절에 대한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라고 한 후에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이렇게 아주 쉽게 번역을 해 주었는데요

운명하시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 낱말의 뜻은 엑세트 뉴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엑스 라는 말은 ‘바깥으로’ out over 라는 말이지요

교회를 말할 때에 ‘에클레시아’ ‘어디로부터 불러내었다’ 무엇 무엇으로 부터라는 out over 에크라는 낱말과 똑같습니다

출애굽할 때도 ‘엑소도스’라고 하는 ‘엑’ 똑같은 어두입니다 접두어지요

그리고 ‘에프뉴센’이라는 말은 ‘바람이 분다’라는 낱말이에요

바람이 분다 라는 낱말을 과거로 만들어 둔 겁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었다는 말입니다

바람이 불었는데 바람이 바깥으로 불어나갔지요 엑스가 있으니까.

바람이 바깥으로 불어나갔어요

그런데 이 바람이라는 낱말은 성경에서 굉장히 여러 곳에 나오는데 전부가 이 똑같은 낱말을 쓰고 있는데 아주 재미난 곳 딱 한 곳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이 중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거니와”

거기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는 말을 정확하게 낱말을 따라서 풀이하면 ‘영이 불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이 라는 말과 바람이라는 말은 똑같이 푸뉴마라는 낱말을 쓰기 때문입니다

또는 여기 있는 것처럼 에프뉴센이라는, 바람이 불었다, 영이 불었다 그 똑같은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에 대해서 실제로 바람으로 번역해야 되는지 아닌지도 한번더 검토해야될 소지가 있습니다

너무 옆으로 가면 주석상 문제가 조금 더 있기 때문에 일단 이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했을 때 영이라고 번역하고 뒤에 부분에 가서 운명하시니라는 말을 영이 불어 나갔다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영혼이 나갔다는 말이냐 아니냐? 확실히 알 수 없지요

차라리 영이 나갔다 라는 말로 하면 되는데 영혼이 나갔다 라고 원문이 아닌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럼 영이 나간 것은 무엇이고 영혼이 나간 것은 또 뭐가 다르냐?

많은 복잡한 문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제가 답을 다 못드리더라도 문제점만이라도 던지고 지나가야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로 넘어갑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시던 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사흘 동안에 아버지께 갔다 오신 것이 아니지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사흘 동안 예수님이 어디에 계셨을까?

왜 강도에게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낙원은 어딘가?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아버지 손은 또 어딘가?

그런 문제가 남아 있는 데요

그러나 실제로 이런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이 갔다 왔다 갔다 왔다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돌아가실 때 영혼이 올라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내려와서 몸과 함께 만나서 다시 부활해서 또 지상에 40일 계시다가 승천할 때 또 올라가시고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뭐냐? 계속해서 조금 더 살핍시다

여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자체가 과연 공간적인 장소의 이동을 말하는 것일까?

또 삼일 동안, 시간적으로 삼일 동안 예수님의 영혼이 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은, 시간과 공간 세계에 사는 우리끼리만 걱정하는 걱정이지 시간 세계가 아닌 영의 세계에서는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이지요

걱정할 것이 없는데 우리만 걱정해요

삼일 동안 영혼이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라는 질문 자체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우문이라 말입니다

너는 삼일이지만 나는 삼일이 아니고 너는 어디냐고 자꾸 따지는데 나는 어디든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하나님 입장에서는 영적인 차원이니까 다르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궁금증이겠지요

다음 두 번째 제목,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는 또 하나의 질문입니다

그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살핍시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이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습니다

지상 어디에 계셨을까요? 혹 지상에 계셨습니까 하늘에 계셨습니까?

물론 이것을 하늘에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라는 말은 그럼 언제 해당되느냐? 40일 후냐?

물론 승천을 40일 후에 하셨으니까 그때냐?

만일 그렇다면 40일 동안 지상에 계신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그럼 지상에 계셨다면 어디에 계셨을까? 라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전에는 제자들과 함께 잠도 자고 식사도 하시고 같이 다니셨으니까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는데 부활하신 후에는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방에 나타나셨다가 조금 계시다가는 금방 없어지고는 나타나지 않고 또 한참 있으면 다른 곳에 나타나시지요

때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시고, 때로는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시고, 때로는 갈릴리 산에도 나타나시고, 때로는 다락방 안에도 나타나시고, 그럼 예수님은 죽은 영혼이 돌아다니듯이 돌아다니는가?

이때는 이미 몸이 부활한 후입니다

부활한 몸을 이끌고 예수님이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시는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때는 어디가 계시는가?

공중에 있는가? 저 어느 땅위에 가만히 서서 계시는가? 앉아 계신가?

어느 처마 밑에서 주무시는가? 그런 궁금증이 있지요

몸이 사흘 동안 무덤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영혼이 어디 있었을까 하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사실은.

그때는 몸이 없는 체로 이지만 이제는 몸이 부활한 이후에 부활한 몸과 그럼 40일 동안 예수님은 어디에 어떻게 계셨을까? 글쎄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꼭 공간적인 이동을 하셔야 되고 거처할 집이 있어야 되고 또 시간이 계속 흐르기 때문에 시간을 재시면서 지금 몇 시구나 지금 몇 일이구나 그러면서 사셨을까?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지요, 여러분?

우리가 부활한 이후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아닐 것이라고 대개 알고 있지요?

특별히 앞에서 살핀 많은 구절대로 예수님은 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육적인, 혼적인 몸을 갖고 계실 때는 물론 우리와 똑같으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셨는데 부활하실 때는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셨으니까 문을 열지 않고 벽을 통과해서 드나드시기도 하셨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공간이 예수님을 제약할 필요가 없지요

고린도전서 15장 아까 쭉 다 읽어드렸지요?

그 부분에서 특별히 흙에 속한다는 말과 땅에 속한다는 말이 있었고 하늘에 속한다는 말이 있었지요?

그럼 예수님이 하늘에 속했다 라는 말이 무엇일까? 하늘에 가 있다는 말일까?

땅에 있으면서 하늘에 속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15장 다시 보세요

47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서 위에서 나야된다 라는 말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너는 ‘위에서 나야된다’ 그 말은 ‘하늘에서 나야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중생할 때 하늘에서 태어나면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이냐? 아니지요

48절~49절에도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계신데 하늘에 속한 몸, 하늘에 속한 새로운 존재가 되셨는데 그래도 아직은 승천을 안했으니까 땅에 있지요

하늘에 속한 자가 땅에 있으니까 하늘에 속한 자입니까, 땅에 속한 자입니까?

질문자체가 이상하지요?

그건 공간적인 질문이고 왜 자꾸 공간적으로 질문해야 되느냐 하고 여러분이 아마 속으로 그러실 꺼에요

하늘에 속했다는 말이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질문합니까 라고 저에게 반문하시겠지요

아직은 땅에 계신데 하늘에 속한 자다 라는 말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늘에 가셨다 라는 말도 꼭 공간적으로 하늘에 가야 되느냐?

실제로 소위 천국에 가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 우주를 쭉 빠져나가면 저기 천국이 있다 라는 공간적인 천국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아니고 우주의 어떤 연장선이거나 그렇게 보아야 되지요

물론 아니라고 본인이 말할지 모르지만 그 가는 길이 다 있고 무엇을 지나서 다 가니까 똑같은 이야기이지요

거리가 몇 마일이 되고 크기가 몇 마일이고 높이가 몇 마일이고 그런 말하는 것보니까 우리하고 똑같은 것 같아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이 하늘에 가셨다 라는 말이 실제로 저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말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늘에 속했다는 말자체도 다 저 공중에 속했다는 말로 해석해야 되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지요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상당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세 번째 질문,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1장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9절~11절 사이에 예수님의 승천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 잠깐 보겠습니다

9절~11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는 아주 정확한 표현이 몇 가지 나오는 데요 올리워 갔다 라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예수님이 올라갔을까? 어디가 올라가는 곳인가?

이것이 지구입니다 이것이 우주라고 합시다

지구에 사시던 예수님이 어디로 올라갑니까? 이쪽으로 올라갑니까? 이쪽으로 올라갑니까?

올라간다는 말 자체는 굉장히 우리끼리 하는 편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혀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이상한 표현입니다

지구는 항상 북쪽이 위쪽입니까? 그러면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님이 내려갔다 그래야 되지요

여기 밑에 사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은 저 아래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해야 됩니까?

여기 있는 사람도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우리도 위로 올라갔다고 하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 위로 가는 겁니까?

그런 표현 자체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써먹기에 불편한 낱말입니다

인간들끼리, 자기들끼리 방향을 정해놓고 위다 아래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위다 아래다 라고 하는 것은 안맞는 이야기다 이 말입니다

인간 너희들끼리 위가 있고 아래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위도 아래도 없지요 무슨 하나님에게 위 아래가 있겠어요? 이해가 됩니까?

에베소서 4장 9절~10절을 봅시다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거기 모든 하늘 위로 오르셨다 라는 말은 하늘도 아니고 하늘 위로, 하늘보다 더 위로 올라가면 뭐가 있어요?

영어로 그것은 far above ‘훨씬 더 위로’ 그런 뜻이에요

여기에 하늘보다 더 위로 올라가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존귀와 지위와 신분의 높아짐을 뜻하는 것이지 실제로 공간으로 어디로 올라가야만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올라간다고 해서 어디 갈 때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에베소서 1장 21절~22절 봅니다 20절 끝에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여기에 만물 위에 계시다 그랬지요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만물 위에 라고 해서 꼭 만물보다 몇 미터 높게 있다고 해서 위에 있다는 말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만물을 다스린다는, 그런 지위의, 그리스도의 왕적인 지위를 두고 하는 말이지 꼭 높은 자리에 올라서서 다스려야 높은 사람입니까? 그 말은 아니지요

요한복음 3장 31절~36절 봅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구절은 앞에 나오는 부분부터 살펴야 될 부분인 데요 그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을 하나 건너 뜁시다

교안에 세 번째 나오는 구절, 요한복음 3장 13절 그 앞에 부분으로 돌아 갑니다

3장에서 위에서 나야 한다, 중생해야 된다는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위에서 나야 한다 라고 말하시고 위에서 난다는 말은 영으로 나야 된다 라고 설명하시고 다시 12절부터 합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는 말은 땅에서 태어나는 일을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하늘에서 태어나는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일단 그렇게 이해 합시다 하늘로.

그러면서 13절~14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간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여기 든다는 말은 전에는 쉽게 장대 위에 십자가 라는 나무 위에 그 만큼 높게 들린다는 뜻으로만 해석 했는데요

요한복음 전체의 문맥을 보면 그런 단순히 공간적으로 한 몇 미터 올라간 것을 말하지 않고 실제로 이것은 ‘하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그 아래 계속해서 보면 나타나는 데요 그 부분이 여기 31절 이하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그렇게 말했지요? 그 다음에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 설명이 이 앞에 있는 설명에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고요

이것은 요한복음에 계속해서 가면 계속해서 나옵니다

‘나는 위에서 왔고 너희는 땅에 있느니라 너희들이 지금은 나를 못 믿느냐 내가 만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들이 나를 든 후에 알게 될 것이다 믿게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너희들이 나를 든 후에’ 들었다는 말이 십자가에 들리는 정도도 든 것이겠지만 그래도 글을 계속해서 쭉 읽어보면 그런 정도, 공간적인 듦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에, 왕위에, 높은 신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 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라는 말 자체가 공간적으로 나는 너보다 높은데서 왔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왔고 너희는 첫 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런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으로 돌아갑시다 2장에 베드로의 긴 설교가 나옵니다

그 중에 33절부터 보십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거기에 처음에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라고 했지요

‘위로 올리우시매’ 이렇게 말해도 좋은데 ‘높이시매’라는 말은 바로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34절에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여기에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한다는 말은 모든 너의 원수를 너희 발아래 복종시킬 때까지,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이것은 내 왕권을 행사하고 있으라 그런 말입니다

내 오른편에 앉아라 하는 말을 좀 쉬라는 말로 오해하지 마세요

쉬라는 말이 아니고 내 왕권을 행사하라고 하는 상당히 큰 권위를, 권한을 위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 36절에 마지막 설명이 나오지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상전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것이 바로 앞에 나오는 그 말씀이라 이 말입니다

자, 우편에 대해서 말씀이 나왔으니까 그 앞에 있는 것을 좀 봅시다

앞으로 돌아가서 25절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 구절 잘 보셔야 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라는 말은 예수님이 항상 예수님 앞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웠음이여 예수님으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님 우편에 계시도다 그런 구절입니다

누가 우편에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님 우편에 계시도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입니다 그가, 아버지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럼 도대체 누가 우편에 있는 겁니까?

아버지는 아들보고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그러고 아들은 자기 아버지보고 아버지는 내 우편에 계십니다 그럼 서로 우편에 있다고 하니까 말이 안 맞잖아요

그것은 오른편, 왼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오른편에 있고 왼편에 있고 앞 뒤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오른편’이라는 말은 자기의 상당한 권한을 위임한 것을 말하고 자기의 오른팔과 같이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 해당하는 동양적인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았으라’라는 말은 ‘내가 너를 내 오른편 팔처럼 너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라는 말이고 반대로 예수님은 예, 그러면 하나님 제 왼편에 앉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 아, 아버지가 내 우편에 계신다 라는 말은 아버지가 바로 내 오른편 팔과 같은 분이십니다 나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의지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표현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그런 표현이지요

예수님이 하나님 좌편에 있다는 말은 제가 찾아보기에 한 곳 밖에 안 나오는데 그래도 이 구절 때문에 제가 설명할 때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여기에 ‘승천하신 자’라는 말이 나오는 데요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늘들을 통하여 가신 자’ ‘하늘들을 관통하여 가신 자’ 그런 말입니다

gone through the heavens ‘하늘들을 관통하여 지나가신 분’

어떤 영어 다른 번역에는

passed through the heavens ‘하늘들을 통과해 가신 자’

그럼 하늘들을 통과해서 어디까지 가시느냐 이 말이지요

사실 공간의 하늘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히브리서 7장 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앞에서 여러번 찾아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 그럼 어디냐?

천국보다 더 위에 가 계시면 그럼 또 어디냐?

천국 위에 또 상천국이 있어요?

예수님의 높아짐을 설명하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것 위에, 만물 위에 그리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고 뭐고 모든 것위에 그런 설명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승천하셨다는 말을 그렇게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런 뜻이 됩니다

그 앞에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라는 말이 나오지요

죄인이 사는 이런 차원을 떠나서 거룩하고 엄위로운 상태에, 그런 영역에 자기 왕권에 들어가신 것을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그런 말이 나오지요?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모두가 심지어 천사들까지, 여기 권세나 능력이나 이런 모든 것은 영물(靈物)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런 천사의 세계까지도 복종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 위에 오르신다 이렇게 표현한다 이 말입니다 하늘보다 더 위에.

빌립보서 2장 9절을 봅시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지요?

예수님이 낮아지시고 높아지시는 본문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조금 높은 것이 아니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번에는 이름 위에 올라가지요

그럼 이름도 아래 위 공간적인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그 말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존재들까지도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게 한다 그 말을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위에 오르신다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이 실제로 자리로 올라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어떠한 왕권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런 구절은 성경에 엄청나게 많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때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그의 왕권을 두고 말하고 바실레이아 라는 말, 나라라는 말 자체가 왕권에 대한 기본적인 낱말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땅덩어리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오해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네 번째 질문, 죽은 성도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것이 풀리면 죽은 성도에 대한 것은 좀 쉽게 풀리겠지요?

성도가 죽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즉 우리가 부활할 때까지 있는 그 영역을 중간상태라고 대개 말하는데 중간상태는 어디에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53절,

이 부분은 제가 설명을 별로 못하겠는 데요 일단 알아두시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모든 사건은 부활 사건은 아니고 육체의 생명을 죽은 데서 다시 살려서 육체의 생명으로 되돌아와서 조금 더 살다가 결국 죽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라는 말은 학자들의 견해가 부활을 가리킨다고 말해요 부활했다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밖에 나온 것처럼 설명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시간으로 자꾸 따져서 그런데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했던 것처럼 설명되기도 합니다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의 글에도 보니까 천국에 가니까 모두 몸 없이 영혼만 돌아다니는데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있더라 엘리야, 에녹, 예수님 그 다음에 상당한 수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때에 부활한 사람들이다 이런 말을 해요 모르겠어요

성경을 알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것인지 실제로 그런지 제가 알 수가 없는 데요

하여튼 이 구절이 일단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라고 만일 해석하는 구절이라면 부활한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몸을 가지고 있지요?

어디에 있을까 라는 질문도 사실 가능합니다

그런데 거기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22절~24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거기 재미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대개 천국, 지옥에 연결해서 많이들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 부분은 굉장히 애매한 구절입니다

거기에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가 있다 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품은 어딜까 하는 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앞에 누가복음 23장에서 찾은 그 낙원을 말하는 것일까? 다른 곳일까?

천국에 가기 전에 기다리는 장소일까, 아니면 이것이 바로 완성된 곳일까?

글쎄, 완성된 곳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마는 그것은 다음 시간에 설명하겠는 데요

그다음 부자는 음부에 가 있다고 했는데 음부는 그럼 지옥에 가기 전에 대기하고 있는 장소일까?

천국을 보았다는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천국에 가보니까 천국이 굉장히 넓은데 천국에 변두리가 있는데 천국의 변두리에는 강도가 있더라 그래요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가 천국에는 못 들어가고 천국 변두리에 있더라 왜?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아직 없어서 천국에는 못 들어가고 변두리에 있다 그렇게 보고 왔다 라고 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건지 실제로 보고 왔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뚜렷한 근거는 없지요

여기 일단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말이 참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 다음 이 사람들은 아직 부활하기 이지요?

부활하기 전인데 부활하기 전에 이 사람들이 몸을 안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가락으로 내 혀에, 불속에서 뜨거워서 고민하나이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

글쎄요,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은 영혼들이 몸은 아니지만 우리 몸과 똑같이 생겼더라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남으로 생겼더라고 말하는데 또 다른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은 베드로도 만나고 바울도 만났는데 못 생겼더라 그래요

글쎄, 천국에서 못 생겼다는 말 자체가 좀 이상하고 만약에 남아메리카 어디 정글지대에서 만났던 그 할아버지도 거기 계시더라

그 말은 색깔이 좀 다를 것이고 또 할아버지니까 얼굴이 쭈굴쭈굴한 체로 있겠지요

무슨 말인지 제가 알 수 없는 데요

실제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기 전에 지금 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지금 죽은 성도들이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손가락이니 혓바닥이니 뜨거우니 그런 말이 과연 가능한가?

또 여기에 낙원과 음부 또는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두 사이에 큰 구렁이, 계곡이 있다고 했지요? 과연 계곡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계곡 때문에 넘어 갈수 없다 라는 말은 그러면 지금 죽은 성도들이 땅을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깊은 골짜기를 못 건너간다는 말인가?

훨훨 날아다니지 않는가? 그런 것도 이상하고요 또 서로 쳐다보고 대화했지요?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하고 서로 이야기 했는데 서로 마주보고 사는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가족 중에 자기 남편은 저 지옥에 있고 자기는 이쪽에 있고 이 부자가 그랬지요?

자기는 여기 와 있고 자기 동생들에게 전도해 달라고 했고 전도해서 믿으면 저쪽에 가 있을 테니까 쳐다보고 서로 뭐라고 그래야 되요? 여보, 뜨거워요? 그러겠어요?

물도 찍어줄 수 없고 그럼 어떻게 도와줘요 도와줄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밤낮 쳐다보고 당신 거기서 고생하는 거 보니까 나는 여기서 참 감사합니다 그래요?

이 구절은 실제로 죽은 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 문제가 많이 있는 내용들이지요?

이것은 그 앞에부터 16장 전체가 예수님이 재물에 대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해야 된다 거기 악한 불의한 재물로 지혜롭게 한 친구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다음에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런 말씀을 해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비유를 한 거에요 이 비유를 하고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것은 지금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즉 재물이 네 주인이냐, 아니냐? 하나님이 주인이냐, 재물이 주인이냐?

내가 두 주인을 섬기느냐 한 주인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두 주인을 섬기는 사람은 멸망하고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멋있게 스토리를 보여준 것 뿐입니다 사실은.

죽은 후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만약 이것이 문자대로 죽은 후에 일어난다고 하면 이것은 상당히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아까 그 낙원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 말씀드렸으니까 그냥 지나가야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으로 넘어갑시다

39절~4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이 나사로는 나흘간 영혼이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아무 말이 없지요

요즈음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이 굉장히 신나게 떠들어 대시는데 이 나사로는 나흘 동안 어디엔가 갔다 왔는지 모르지만 다시 깨어난 후에 아무 이야기도 우리에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아래 볼까요?

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런 말이 나오지요?

또 12장 9절~11절을 봅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그렇지요 나사로 죽은 사람 보고 싶고 만나서 대화하고 어떻게 다시 살아났느냐?

그런데 만일 자기가 진짜 죽어서 어디 갔다 왔다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이야기할 꺼리가 있겠어요

신나게 이야기 했을 터인데 한 말도 했다는 기록이 없고 그냥 살리심을 받은 그 자체만 간증꺼리였고 그것을 통해서 믿었다고 했지 이 나사로가 어디 갔다 온 것을 듣고 믿었다는 말은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요즈음 사는 사람들만은 내가 죽었다가 갔다 왔고 그것도 입신해서 두 번, 세 번, 네 번 수시로 성령이 충만할 때는 극에 달하면 꼭 한 번씩 갔다 오고, 자기 집에 갔다 오듯이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성경에는 다시 살아난 사람에게서 한 번도 그런 이야기가 없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 말이 그러지요 전에는 아직 때가 다 이르지 않아서 그랬는데 요즈음은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건 똑같이 그래요

제가 테이프도 여러 사람 것을 듣고 책도 여러 사람 것을 읽어 봤는데 한결같이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가 가까우니까 너 돌아가서 천국을 본 대로 이야기해라

그래서 자기에게 상당히 무거운 사명을 맡겨서 자기가 돌아왔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내 죽을 때까지 꼭 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다

다른 사람은 ‘아, 그렇겠거니...’ 할지 모르지만 제가 속으로 웃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때가 가깝고 급하시고 할 말씀이 많으시면 왜 하필 콜레 박사 한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셨을까?

다른 사람도 요즈음 좋은 목사님도 많이 계신데 다른 사람도 좀 돌려보내면서 ‘가서 이야기 하라’ 그럴 수도 있고 이왕이면 성경책을 하나쯤 주어 보내시면 더 좋지 않아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말만 하나님이 보내서 제가 읽으니까 전혀 성경과 맞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그런 콜레 박사를 하나님이 보내서 천국은 이렇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저는 그걸 읽으니까 오히려 때가 더 안 된 것 같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3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구절 때문에도 굉장히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잘 보셔야 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랬지요

그걸 강조해서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그렇다면 굉장히 많다 이건 틀림없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런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아니, 있을 곳이 많은데 무슨 처소를 예비합니까?

그래서 이건 딴 의미지요

콜레 박사의 책에 보니까 이렇게 했어요

엘리야를 만났는데 엘리야가 말하기를 자기가 천국에 올 때는 천국이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요즈음 확장공사를 해서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이거에요

계속해서 예수님이 땅을 확장하고 집을 짓고 정비작업을 하고 그러시는가 봐요

수많은 천사를 동원해서 예수님이 직접 설계하시고 계속해서 집을 짓고 있더라 맨션을 짓고 있더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 참.

여기 있는 구절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했습니다

땅이 좁아서 계속해서 짓는 것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이 전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집이 모자라서 또 집 짓고 또 집 짓고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집이 모자라서 계속 지어도 모자라지요?

천국도 집이 모자라서 또 한 사람 믿으면 그 사람 맨션도 지어줘야 되고 또 한 사람 죽으면 그 사람 또 맨션 지어주고 그런 것 아닙니다

여기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하는 그 처소라는 말이 영어에는 맨션으로 번역되어 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 앞에 ‘내 아버지 집에’라는 말은 맨션이라는 낱말이 아니거든요 딴 낱말이에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은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는 처소는 맨션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말이 이상합니다마는 원문이 앞의 집은 별로 큰 집처럼 표현이 안 되어 있고.

과연 맨션을 짓는다는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말은 너희들이 아버지의 집에 가려면 갈 길이 현재는 없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길을 마련해야 너희들이 갈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다시 부활하고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서 모든 것을 다 보고하고 모든 일이 끝나면 너희들이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 라는 말이기 때문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라는 말은 집을 지으러 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사역을 하러 가신다“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처소라는 말은 그 아래 계속해서 보면 10절에 아버지가 어디 계시느냐 하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렇게 나오지요?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셔요

아버지는 큰 집에 계시고 나는 작은 집에 있고 그러지 않고.

보고 왔다는 사람 말처럼 아버지 집은 높이가 몇 천 마일 위에 있고 예수님 집은 또 몇 천 마일 위에 붙어 있고 그렇게 생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 아래 조금 더 내려가면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랬지요?

성령님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언제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 지금부터지요

이 말씀하신 바로 그 이후, 사도행전 때부터 성령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17절 끝에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령님의 집은 우리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서에 여러 번 나오지요 너희들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다

그래서 내 몸은 성령님의 집이지요 그럼 성령님은 어디 계시냐? 내 안에 계시지요

아버지의 집이 거기지요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번에는 우리까지 들어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그러면 아버지는 내 안에 자연히 계시지요

나도 아버지 안에 있고... 언제? 예수께서 자기가 구속사역을 끝내시면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아버지 안에 와 있을 것이다

나를 통해서 너희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아버지 안에 있게 된다

그것이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이지요

아버지 안에 가 있는데 집에는 못 들어갑니까?

아버지가 거기 들어가시면 나도 따라 들어가게 되어 있지요 아버지 안에 있으니까.

집에 들어갈 때 나를 빼놓고 들어가십니까?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즉 성부 성자 성령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그랬지요

세 분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만들러 가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도록 주선하러 가신다 이 말입니다 구속사역!

 

그 말을 뒤에 계속해서 내려가 보면 반대로 설명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거하시게 하시겠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거나,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지요

또 실제로 하나님하고 나하고 거리가 이만큼 있어서 누가 어디로 가느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데 문제는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 의 처소, 하나님이 거하실 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집을 청소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 좁아서 확장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거할 곳이 많으니까.

거할 곳은 얼마든지 많이 있는데 왜 못 들어가느냐?

가 깨끗하지 못해서 못 들어가지요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오시고 싶은데 이 집이 누추해서 못 들어오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은 어떻게 말하면 나를, 우리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우리를 준비하러 가시는 겁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와 계실 수 있으니까.

요한복음 17장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런 말이 나오지요

24절에도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런 말이 계속해서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처소라는 말을 건물로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 안에 내가 있게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번에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15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가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거기에 잔다 라는 말을 하지요 죽은 자가 잔다 라고 바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은 성도의 상태에 대해서 뚜렷한 설명을 우리에게 하고 있지 않고 바울의 설명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잠잔다 라는 표현이고 또 하나는 주와 함께 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말은 빌립보서 1장 23절,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나옵니다

나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런 말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어요

현재 이 몸을 떠나 즉 죽어서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세에서 주님이 두시고 일하게 하시기 때문에 내가 현세에 있다 그런 표현이 나오는 데요

그러면 죽은 자가 과연 잠을 자느냐? 어떤 교파에서는 잠을 잔다 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을 살펴보면 잠잔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고 실제로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와 함께 있다는 말이 있고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도 했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런 등등의 표현이 어떤 무의식 상태, 죽은 것과 비슷한, 잠자는 상태에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잔다 라는 표현을 꼭 문자대로 실제로 잠을 자느냐?

그것도 육체적인 표현이지요 우리 육체의 휴식이 필요하니까 잠이 필요하지 영혼도 잠이 필요한가? 참 이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표현만 나오고 죽은 성도가 어떻게 어떻게 한다 어디에 있다 그런 말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조금 살펴야 될 부분이 있는 데요

6장 9절~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하고 신원하여 달라는 부탁이 나오지요

그러자 11절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기다리라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죽은 성도가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래도 조금 주의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이 계시록에 설명된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되느냐?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글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제단 아래 있어’라는 말도 이상하지요? 천국에 제단이 있느냐?

또 제단에, 아래 옆에 꼭 그런 것이 필요하냐?

흰 두루마기를 주는데 두루마기가 필요하냐?

몸은 아직 없는데 영혼이 두루마기를 입고 다녀야 되느냐?

그런 이상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자, 답이 지금 애매하지요? 애매하지만 답을 더 확인하기 위해서

마지막 질문, 여러분 교안에는 못 만들어 드려서 죄송합니다

살아있는 성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질문이 너무 우문이지요?

살아있는 성도야 땅에 있지요 그러나 조금 더 살핍시다

에베소서 2장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아주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실 때에 우리들을 함께 부활시키셔서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라고 말해도 상관이 없겠고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있다 라고 과거 형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 위에.

그럼 이제 답이 다 풀리지요?

우리는 아직 죽기도 전이고, 우리는 아직 몸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아직 영혼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데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는 하늘에 앉아 있다

그러면 앞에 많은 질문, 구차스러운 질문이지요?

이것을 다른 질문을 해 볼까요? 하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까, 땅에 계십니까?

에베소서 2장 21절~22절을 봅시다 “그의(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말하자면 우리가 다 공동체로 묶여져서 하나의 거대한 건물을 짓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하나님의 집은 짓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진짜 짓고 있는 중이예요

그 집이 무어냐? 우리 성도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구원 받은 숫자도 다 들어가야 되고, 우리 성도들이 거룩하게 성화도 되어야 되고, 하나님이 거하실 만큼 깨끗해지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겠지요

그런데 이미 와 거하신다 라고도 표현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고, 내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니까 나도 하늘에 있고, 뭐가 문제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느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지요 어디에?

예수님이 보좌에 계시면 나도 보좌에 가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가 계시면 나도 하나님 우편에 가 있고,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면 나도 하늘에 있고, 예수님이 땅에 계시면 나도 땅에 있고.

요한복음 12장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그런 말이 나오지요?

14장 3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언제? 예수님 재림할 때 입니까? 부활하신 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나 있는 곳에 즉 예수님 계신 곳에 우리가 함께 있습니다

제가 문제점만 많이 드리고 해답을 시원하게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답이 모호하게 느껴지고 잘 이해가 안된다 라는 분이 여러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5

그래서 지난번 것을 다시 결론만 조금 정리해 드리고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난번에 살폈던 부분은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할 때까지 중간상태라고 소위 말하는 그 기간 동안 죽은 영혼은 어디에 가 있을 것이냐 하는 그 부분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있는 대로 거의 다 찾아 낸 셈입니다

거기에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부분도 우리가 살폈고요

또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부자와 함께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에 하나는 음부에 있으면서 대화하는 장면도 우리가 살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3일 동안 어디에 가 계셨을까?

또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어디에 계셨을까?

승천하신 후에는 어디에 계실까 라는 부분을 우리가 쭉 다루었고요

마지막에는 우리 지금 살아있는 성도는 현재 어디에 있는 것일까 라는 기이한 질문을 해서 뒷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전체적인 것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제일 쉽게는 우리 살아있는 성도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한다면 답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 질문과 함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라는 질문도 똑같은 대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은 대로, 에베소서 2장 6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구원받은 성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해서, 살아나서 이미 하늘에 앉혀져 있다 라고 우리가 살폈지요

우리가 이미 지금 하늘에 있다 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에 있다 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이라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또 그와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냐고 질문하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 라고 답을 내리고 있지 하나님은 땅에 계시다 라고 하거나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 계시다거나 이렇게 대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일학생에게 하나님을 설명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면 내 마음에 계십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계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지요

단답을 내리라고 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늘로 가셨다고 하고 우리도 지금 하늘에 있다 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하늘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의미의 저 하늘이 아니고 지구나 우주 밖에 있는 하늘도 아니고 하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쉽겠지요

도표를 다시 그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부터 이 첫 창조된 세계를 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영으로 부활하시면서 새로 시작된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늘’이라고 말하고 또는 ‘영에 속한 세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에 속한 세계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늘’이라는 말은 물질세계에서 현재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상태에 살고 있는 이 현재 세상을 ‘땅’이라고 말하고 있고 거기에 대조적으로 우리가 부활할 때 이루어질 그 영역에 연결 지어져서 그것을 하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와 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또는 영으로 부활하셔서 오는 세상에, 새로운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와 이미 함께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하늘에 있고 어떤 면에서는 아직도 땅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쪽에 끼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공간적’으로 우리는 땅에도 있고 하늘에 있다 라는 말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첫 창조된, 땅에 속한 현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재창조되지 않은, 구속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을 땅에 속한, 육에 속한 이 세상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기가 먼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면서 자기와 함께 자기 안에 믿음으로 들어온 사람을 모두 일으켜서 구원하신, 구속하신 그래서 자기와 같은 영역에 참여된 하나님 나라 백성을 하늘에 속한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지요

하늘나라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그래서 결국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님도 우리 안에 계시고 성령님도 우리 안에 계시고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고 그 말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있고 라는 의미가 됩니다

지난번에 정리했던 부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리할 때 제가 여섯 가지 말씀을 드렸는 데요

첫 번째, 하나님의 영역에서 그 거처나 그가 오고 가신다 라고 하는 그러한 어떤 표현에 대한 인식부터 우리는 새로 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오신다 가신다 또는 예수님이 초림하셨다 재림하셨다 또는 승천하신다 라는 표현들은 공간적인 이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간적인 이동을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것을 우주라고 합시다

작은 원을 우주라고 하고 큰 원은 천사의 세계건 또는 어떤 사람이 상상하는 천국과 지옥을 다 포함했건 이 전체, 모든 존재,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존재를 포괄해서 큰 원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큰 공간 어디에,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계시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다니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공간과 하나님과는 누가 더 크냐 하는 질문도 할 수 있어요

그 말 자체가 공간적인 질문이지만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분에게 할 질문이 하나님이 더 크시냐 아니면 이 우주와 천국과 모든 것을 다 통 털어서 합한 전체 공간이 더 크냐 하나님과 누가 더 크냐 하는 이야기지요

누가 더 클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간이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안을 이동해 다니셔야만 넓은 공간이 하나님의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하나님이 가보셔야 된다거나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이 더 클지 모르지요

하나님이 더 크다는 말 자체가 공간적으로 이해될지 모르니까 좀 애매합니다마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방이 필요하거나 의자가 있거나 거기 앉아 계셔야 되고 다른 곳에 가려면 여행을 해야 되거나 그런 큰 광활한 공간 속에 조그만 한 분으로 있는 그런 것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 부분이 이해되어야 되겠지요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하시려면 하나님을 붙들고 있을, 바치고 있을 기반이 필요합니까? 지반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공중에 있으면 툭 떨어지기 때문에 어디엔가 하여튼 발을 붙이고 서 계셔야 합니까?

지구도 하나님이 공간에 매달아 놓으셨지요?

공간에 매달아 놓아도 떨어지지 않지요

우리의 생각에 이 지구라는 공간에 발을 딛고 살기 때문에 사람이 어디 있으려면 뭔가 있어야 그 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느냐? 어쨌든 존재한다 라고 하면 그 존재를 받침하고 있는 무엇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있지요

그래서 죽은 영혼도 하여튼 어디엔가 발을 붙이고 있어야 되지 않느냐 라는 생각을 자꾸만 합니다

예수님도 하늘로 우~~ 올라가는 것은 올라가다가 가만히 멈추면 안 되고 하여튼 어디까지 가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거기 가 앉아 계시든지 해야 된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굉장히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주가 하나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주를 지탱하고 계시지요

우리가 조금 더 하나님에 대해서 또 그 분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 좁은 생각의, 시간 공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정리했던 부분은, 사람을 말할 때 영혼과 몸을 꼭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영혼과 몸을 떼어 놓으면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 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야이로의 딸을 만나보고 했습니다

또 특별히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만나고 예수님도 보고 싶지만 사람들이 이 나사로를 꼭 만나보고 싶다 이거에요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이 나사로를 꼭 만나고 싶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진짜 죽었다가 살아났는가?

그래서 나사로 때문에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당국자들이 나사로 까지도 미워하고 문제를 일으켰다는 구절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 나사로를 만나보고 나사로 때문에 믿음 잃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인데 그 사람이 나사로를 만나 보았을 때 우리 같으면 틀림없이 당신 죽어서 어디 갔다 왔느냐? 가니까 어떻더냐? 라고 질문했겠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아무런 말이 없어요

야이로의 딸도 그렇고, 이 나사로도 그렇고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사흘 동안 내가 어디에 갔다 왔다 라는 말을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자기가 죽었다가 깨어난 장면을 전혀 우리에게 언급하지 않고, 성경에서는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데 요즈음 우리들만 내가 죽었다가 깨어나니까 어디에 갔다 왔고, 어디에 갔다 왔고, 이렇게 말해서 꼭 죽으면 어디를 갔다 와야 되는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어요

성경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과연 죽은 후에 영혼만이 몸을 싹 빠져나가서 혼자 어떻게 돌아다니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은 성서적으로 증명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죽음을 말할 때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것처럼은 암시되어 있습니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 자체가 그렇게 저 ‘공간’으로 간다 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지요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라는 말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반대쪽으로 가는 것입니까?

무덤은,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역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거나 땅으로 돌아가거나 지하로 내려가거나 그것도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영혼이 육체와 설령 분리된다고 하더라도 분리될 때 영혼을 땅에 가느냐 하는 것처럼 어떤 우리 눈에 보이는 장소로 설명해야 될 그러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 표현을 우리가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서 너무 가볍게 저 하늘로 올라갔다 라고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입신했다가 또는 죽었다가 깨어나서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의 말은 전부가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자기들이 지상에 살고 있을 때 듣고 생각하고 상상했던 잠재의식을 잠깐 까무러쳤을 때, 잠깐 입신했을 때 그것을 하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재현하는 마치 우리가 잠재의식을 꿈에 나타내는 것처럼, 우리가 꿈에 사방에 돌아다니듯이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지요

그것은 실제로 그런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환상의 세계라 이 말입니다

세 번째, 오늘 설명할 부분입니다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즉 천국은, 이상적인 천국이라고 보통 말하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기 때문에 아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에 가 보았다 라는 말 자체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부분은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임의로 상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영혼의 문제’나 ‘죽음 이후의 문제’는 시간과 공간 세계의 연장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우리가 그것을 추리한다는 것은 굉장히 무리가 오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지 않으셨고 바울도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라는 말을 하지만 아무런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이 과연 무엇인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설명하지요

첫째 하늘은 이 대기권이다

둘째 하늘은 대기권을 벗어나서 무중력 상태인 그곳을 말한다

셋째 하늘은 그 다음에 있는 천국이다 뭐,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해석이지요 실제로 성경이 그런 것을 의미하는지

셋째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라고 할 때 처음부터 하늘은 복수로 나옵니다

핫샤마임(?)이라고 하는 복수 형태를 쓰고 있는데

과연 하늘이 히브리 문학가들의 이야기처럼, 유대인들의 말처럼 거대한 것이고 광활한 것이기 때문에 표현하는 단순한 복수 형태냐?

아니면 실제로 하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복수로 말하는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셋째 하늘이라는 말도 꼭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그런 형태로 세 겹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길이 없고 성경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없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오는 그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쭉 읽어보고는 내가 천국에 가보니까 진짜 그렇게 맨션이, 집이 지어져 있고 길은 순금 길로 되어 있고 과일이 있고 앞에 강이 흐르고 있고 보좌가 어떻게 있고 이렇게 쭉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은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그 부분은 오늘 제가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설명했던 대로는 중간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라는 것이 저의 대답이고요

또 중간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추리하고 오해를 하게 되는 주 요인이 하나님의 영역을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어디에 매여서 제한된 상태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러한 똑같은 공간적인 시간적인 제한된 그러한 상태에서 인식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과오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공간적인 하나님이 아니시고 시간적인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영원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영원’ 속에서 인식해야 된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아주 피곤해서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여덟 시간을 푹 자고 여덟 시간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보면 어떨 때는, 아주 단잠을 잘 때는 여덟 시간을 자는데 눈을 감았다가 금방 눈을 뜹니다 일초도 안 된 사이에 눈을 감았다가 눈을 뜹니다

꿈도 전혀 꾸지 않고 잠자는 중간에는 아무런 의식이 없고 잠이 깜빡 들었는데 금방 깼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여덟 시간을 지켜보고 있지요

보면서 이 친구가 몸은 여기서 지금 뒹굴뒹굴하는데 이 영혼은 지금 어디를 돌아다닐까?

이 지루한 시간을 뭘 하고 있을까?

그렇게 옆에 사람이 쳐다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잠을 자는 사람은 아무데도 갔다 오지도 않았고 시간도 흘러가지 않았고 아무런 것도 모르겠고 나는 금방 눈을 붙였다가 금방 눈을 떴다 이 말입니다

즉 이 사람은 전혀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 않았지요

이 시간이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3차원의 세계니, 4차원의 세계니 그렇게 이해하지 않아도요.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이 사람이 죽고 예수님이 다시 재림해서 부활할 때까지 만일 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합시다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는 아, 이 사람의 시체는 지금 저 무덤에 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사람은 백 년 동안 무덤에 있는데 이 영혼은 백 년 동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은 시간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궁금증에 불과하고 그 사람이 만일 깨어나서 당신 백 년 동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하면 아니, 나 금방 깼는데 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실제로 우리의 꿈속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건 우리가 자꾸 ‘시간 공간적’으로 그동안 어디에 가서, 궁금증이 나서 자꾸만 질문하는데 성경에서는 대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 가지 않을지도 모르고 백년이나 천년(벧후3:8)이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고 지나가도 아무 문제가 없지요 됐습니까?

나중에 질문을 한꺼번에 받겠습니다 오늘 공부로 넘어 갑시다

오늘 다섯 번째 강의는 주제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라는 부분입니다

그동안 제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볼 때 이 세상으로 왔다고 도래했다고 임했다 라는 표현을 설명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천국은 있다 라는 표현을 해 왔습니다

오늘은 도대체 천국이 무엇이냐 하는 개념을 조금 설명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부분 같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3절~37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여기에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왕이다

내가 왕으로 이 세상에 왔고 내 백성을 구출해서 나라를 확립하기 위해서 왔다 라는 의미에서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고 할 때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요소는 나라이기 때문에 주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하면서 영토만 생각하시지 말고 영토보다 훨씬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주권의 문제입니다

이 나라는 누가 다스리는 나라냐?

이 나라는 어떤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천국의 성격을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땅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 나라는 얼마나 크냐? 거기는 뭐가 있느냐? 집이 얼마나 크냐? 그런 것만 자꾸 질문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자주하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자꾸만 우리 한국 사람은 나라를 생각할 때 이 부분이 좀처럼 인식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미국에 이민 가는 사람들이 늘 그래요

‘나 이제 미국에 갑니다’ 그런데 미국에 간다 라는 사람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땅덩어리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미국에 갑니다’ 라고 하면 미국이 어떤 나라냐?

아스팔트가 어떻게 깔려 있고, 하이웨이가 어떻게 생겼고, 집은 어떻게 생겼고, 거기 가면 어떤 볼만한 경치 좋은데가 있고, 땅이 얼마나 넓고, 자동차가 얼마나 많고, 그런 것만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그런 곳에 가서 살면 나는 미국에 와서 산다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어떻고, 하나님 나라는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잘 알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국민, 시민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를 알아야 되는데

그건 상관이 없고 하여튼 거기 가면 내 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 집이 얼마나 큽니까? 다른 것은 다 귀찮으니까, 나 그냥 좀 편안하게 내 집에서 좀 살고,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하면 나는 그만입니다

사는 방식도 지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나는 참 좋습니다

나는 지상에서 다이아몬드, 비취 이런 거 좋아하니까 그런 것만 좀 내 집 벽에 많이 발라놓으면 됩니다

영광스럽고 신령한 뭐 그런 것은 나는 모르겠고, 신령하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물질적인 것 좀 많이 있으면 좋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다 있어서 한국에서 살던 것과 즉 지상에서 살던 것과 비슷하면서 제일 좋은 것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자꾸만 천국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런 것이 있더냐, 없더냐?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죽었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마다 가니까 바로 그런 것이 있더라 하니까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신이 나는 거에요

마치 미국에 갔다 온 사람이 아무도 미국나라 법은 어떻고 미국의 문화는 어떻고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가니까 ‘어떻게 어떻게 살기 좋더라’ 하는 이야기만 하니까 너도 나도 다 간다 이 말입니다

가서 보니까 노인들은 굉장히 불편하지요 노인들은 아주 불편한 사회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돌아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마 천국을 현 세상의 연속으로, 연장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마 갖다 두어도 ‘아이고, 나 불편해서 못 살겠습니다 하나님, 나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주십시오’ 그럴 런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갖는 중요한 부분을 잘 인식해야 됩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권, 왕, 통치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뭐가 다르냐? 정치체재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지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다스림 자체는 우리의 지상의 정치체재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국회도 필요 없고 삼권 분립도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 실제로 왕좌에 앉아서 큰 소리를 땅땅치면서 이렇게 통치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다 라고 하니까 우리가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지요 옛날 왕궁에 있었던 것처럼 뒤에 신하가 부채 들고 흔들고 있고, 옆에 신하들이 서서 ‘폐하’ 하면서 인사하고 하는 그런 어떤 모습만 상상하고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그런 하나님 나라가 아니지요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리도 그 영광스러운 장관 자리에 앉겠다는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렇지 않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섬김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섬기는 나라다

내가 왕인데 나는 섬기러 왔고, 섬기다가 목숨까지 주면서 섬기러 왔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천국의 구조 전체가 지금 우리의 세계와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사랑의 나라지요 그리고 공의의 나라고 밝은 나라입니다

뒤에 가서 다시 좀 설명하기로 하고요

당시 유대인들이 어떤 오해를 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생각한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자기들이 생각한 왕은 로마제국의 황제와 같은 왕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요

이 말을 잘 배우셔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라고 하면서 지금 새롭게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제가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건 이단이다 이 있어야 천국이지’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 ‘주권이야 뭐 있겠지만 을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가짜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똑같으면 그냥 천국이고, 주권이 어떻게 되었건 뭐라고 설명했건 그것은 상관하지 않고 만 잘 설명하면 ‘그건 정통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황제처럼 ‘메시아가 왔다’ 라고 하면 ‘아, 맞다’ 라고 하는 거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왜? 이 주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 이지요

참고 구절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시니까 ‘아, 이 사람이면 우리 왕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12장에도 나옵니다

12장 12절~13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니까 드디어 입성하는구나 하고 신이 나는 거지요

신이 나면서도 아마 초라하게 느꼈을 꺼에요 도대체 왕이 이렇게 초라할까?

로마의 장군은, 그때 왕들은, 시이저들은 대개 전쟁에서 이긴 군인들이지요?

군인 출신들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저기 이집트라든지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개선장군으로 들어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황제가 될 사람들이지요

그런 것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입성을 하는데 나귀 새끼 하나 타고 오니까 흔들기는 흔들면서 신이 났는지 안 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요한복음 19장 12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그 아래 길게 똑같은 말입니다마는 예수님을 가이사 하고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래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가이사와 같은 왕으로 와야 되는데 아니거든요

가짜가 와서 말하니까 ‘이 사람을 죽이십시오’

‘죽이지 않으면 저 가이사하고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메시아를 그런 가이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 나라에 국한된 나라로 오해했고 또 지상에 있는 여러 나라들과 똑같은 형태 이스라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상상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세상은 창조될 때부터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은 로마 나라거나 어느 나라거나 바벨론이거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사람을 내보내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주겠다’ 라고 하면서 메시아를 약속하실 때 이 여인의 후손을 전 인류에게 보내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메시아로 소개한 것이 분명하고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불러서 ‘씨를 주겠다’ 라고 하면서 메시아를 약속하실 때도 모든 족속을 대상으로 준 것이 분명히 그 구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사울 왕 때 특별히 다윗 왕 때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서 주변에 있는 많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조그마한 나라가 그런대로 꽤 힘을 발휘하면서 튼튼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좀 그런대로 그럴듯한 나라로 자리잡혀 갈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착각을 하기 시작했냐 하면 ‘아, 우리는 선택 받은 하나님의 나라다’ ‘다른 나라는 아니고 우리만 하나님의 나라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후에 메시아를 기다릴 때도 이스라엘 나라의 메시아로 기다리고 있고 이스라엘 나라가 온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전 세계적이고 전 민족적인 초국가적인 그런 입장이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 몇 곳만 찾아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2장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거기에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고 했지요

또 3절에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그런 말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19장을 봅니다 조금 더 중요한 장인데요

19장 24절~25절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찌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거기 이상한 말이 나오지요?

앗수르는 바로 북쪽에 있는 적국이고 애굽은 남쪽에 있는 적국입니다

이 두 나라 틈바구니에서,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하나님이 그 두 나라를 가리켜서 ‘내 나라다 나의 백성이다 나의 산업이다 나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56장, 60장 그 외에도 호세아서, 스가랴서 등등 쭉 찾아보면 하나님이 모든 세계 민족을 다 자기 나라로 불러들이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해설을 보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우실 또는 회복하실 나라는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 말이 이해가 됩니까?

한 나라 즉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지상에 있는 한 나라에 소속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어느 지역에 속한 한 국가라야 되는데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국가 중에 한 국가가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 통틀어서 세워질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 나라와는 다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이지요

더욱이 천사의 세계라든지 하늘과 땅 모두를 다 다스릴 왕국이라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살폈습니다

즉 로마나 이스라엘이나 그 외의 모든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격 자체가 다른 그런 나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 부분을 조금 보완해서 로마서 9장에 있는 구절을 살피겠습니다

로마서 9장 1절~8절을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우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런 말이 나오지요

이스라엘 사람도 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된 자만 하나님의 백성이다

혈통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하시기 때문에 구약에서 나타났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내 백성이다 선택받은 백성이다 라고 한 말은 어디까지나 그 중에서도 약속된 백성에게만 국한해서 하는 말이라 이 말입니다

그 약속된 백성이라는 말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는 백성만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로마서 9장 이하는 상당히 오해를 일으키고 있는 구절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을, 본문을 차례로 잘 문맥을 따라 보지 않고 주제별로 연구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일어납니다

처음에 1절~3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골육의 친척인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굉장히 간절한 소원을 갖는 표현이 나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동족애, 바울의 민족애라는 말로 가끔 우리가 설교도 듣고 그러는데요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 아래 계속해서 설명한 대로 바울이 말하는 자기 동족은 혈통적인 동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 동족이라는 말은 외국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맞는데요

내가 내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내 동족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중에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약속한 백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뿐이다 그런 말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런 말을 쭉 해가면서 뒤에 가면 9장 하반부에 가면 선택에 대한 이야기,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을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단순한 혈육적인 관계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 사도가 나는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았지만 일차적으로 내 동족에 대한 관심이 있다 라는 말은 분명해요

그런데 내 동족 중에서도 구원받을 사람에 대한 관심이지, 내 동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구원받기를 원한다 라고 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러면 바울이 차라리 자기를 버리시고 그들을 구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에게 흥정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맥상 아주 뚜렷하기 때문에 오해가 없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9장 하반부에 가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교안에 절수가 나와 있습니다

23절~26절에 나오는 데요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우리라는 말을 그렇게 쓰고 있지요?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즉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어야 되고 자기는 그들에게 분명히 관심이 있다 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나의 관심은 동시에 이방 사람에게도 있다 즉 이방 사람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은 다 구원받기를 나는 원한다

그 중에 우리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일차적으로 있다 그런 말이 로마서 9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일단 우리가 이해하고요

동시에 이 지상에 있는 어떤 국가의 연장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3장 28절~29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말도 이방인인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4장으로 넘어가서 23절 이하에 거기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낳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라와 하갈의 몸에서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율법을 따라 태어나고 하나는 약속을 따라 태어났다 라고 해서 두 언약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25절~26절을 보겠습니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런 말이 나오지요?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하고 또 저 위에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하고 둘을 구분해서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지상에 있는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루살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삭은 저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는 ‘하늘나라’ 백성이고 하나는 ‘땅’에 있는 백성이다 그런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저 위에 있는 나라다 하늘에 속한 나라다

그래서 하늘나라다 라는 말이 가능하고 하늘 하늘, 천국 천국하는 말 자체가 그런 이 세상과 대조적으로 구분해서 하는 말이지 ‘공간적’으로 떼놓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해설을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육적,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나라가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의 나라입니다

결국 천국 자체는 육적이고 물질적인 나라가 아니라 영적 나라입니다

그 다음 에베소서 1장 3절~14절까지 내용인 데요 다는 보지 않고 몇 곳만 보겠습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거기에 하늘에 속했다는 말을 하고 있고 신령한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역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래 4절~5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두 번째 요소는 국민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전 세계, 자기 백성 전 세계에서 구원해 가실 하나님의 영역으로 말씀드렸는데요(주권)

두 번째는 그 백성은 어떤 백성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국민)

땅은 세 번째 문제고요(영토)

일단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째인 ‘국민의 문제’를 우리가 정리해야 하는 데요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세우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 아들들로 그 나라 백성을 삼으신다는 표현이 나오고 그렇게 하시는 방법은 7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에서 구속해내시는 방법으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러한 구속받은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거기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그 백성을 건져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재 구성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재구성해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다 도망쳐버리고 거역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와해된 것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유혹도 있었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거역해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하나님 나라 구실을 못한다 이 말이예요

왜? 땅은 거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그대로 영토는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이 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 여기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요

새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표현은 무엇을 말하느냐 라고 하면 어떤 국가가 이렇게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영토 국민은 이미 여기 있기 때문에 왕이신 주권자가 자기의 주권 회복한다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왕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사단의 손에서 건져내어서 자기 백성으로 만들겠다 라는 말을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 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온다라고 말해도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등장하셔서 사단의 손에서 귀신을 몰아내고 사단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셔서 자기가 통치하고 다시 하나님의 지배를 받도록 만드는 그 일을 하러 오셨고 그렇게 해서 새로 구속받는, 건져냄을 받아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속해 내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계속해서 그 아래 해설을 봅니다

그러기에 죄와 사단에게 노예가 된 모든 인류는 그 상태대로는 천국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국가를 새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사인 데요

거기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전체가 통일된다 라고 했습니다

에 있는 것만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도 ‘포함’되지요

물론 거기 하늘에 있는 것이란 말은 천사도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9절에 이것을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해서 하나님이 경륜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즉 자기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 국가가 된다는 말은 공간적으로 어느 곳에 몰아넣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 지구에 있는 사람을 다 저 천국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이사를 보내서 이주시켜서 천국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고

지상에서 사단에게 노예가 되었거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백성을 다시 용서하시고 불러내어서 건져내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배받게 하는 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누리게 하는 그러한 것을 통일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라고 표현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 백성은 그냥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이라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구속받지 않은 사람은 그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백성이라야만 천국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다 라는 말이 무엇이냐 라는 부분을 상당히 우리가 오해를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은 이미 받았는데 성화해서 완전에 이른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 성화된다는 점점 거룩해 진다는 말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 도덕적인 성화로 대개 이해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 도덕적인 성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성화가 아니고 정치적인 성화입니다

정치적이라는 말 이해가 됩니까?

거짓말을 적게 하고, 구제를 좀 더 잘하고, 덜 미워하고 그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을 얼마만큼 더 자기의 왕으로, 자기 아버지로 잘 신뢰하고 복종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건져내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기는 왔는데 그 하나님을 실제로 잘 복종하고 잘 따르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1절~22절에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라는 말이 바로 하나님을 왕으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른다면 실제로 그 분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복종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하라는 대로, 지시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주권, 통치권이 성립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이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말한다면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즉 이 지상에서 일반적으로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크리스챤보다 월등하게 도덕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성화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건 딴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어떤 도덕적인 수양을 쌓아서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자기가 선을 행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라 이 말이지요

북한에 있는 사람이 우리보다 더 어떤 때는 민주적으로 더 훌륭하게 이웃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할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이 북한 사람보다 나라를 덜 사랑할 수도 있고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더 파괴적일 수 있어요

그래도 대한민국 사람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지 북한에 있는 사람을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왜? 누구에게 자기의 충성과 자기의 사랑과 자기의 생애를, 생명을 바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요

하나님에게 소속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해서 거짓말 안 하고 구제를 하라고 해서 구제를 하기 때문에 결국은 비슷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해서 하는 구제와 다른 누구에게 복종해서 다른 이유로 구제하는 것과는 전혀 딴 차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복종해서 하는 선행과 그렇지 않은 선행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 성화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이 된다는 말이.

그래서 통일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어디까지나 주권 국민의 관계 문제이지 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데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로마서에나 성경 여러 곳에 보면 이 자연계도 땅도 우주도 구속을 받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는 것은 분명해요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다 구속하고 나면 이 자연계는 자동적으로 구속이 이루어져요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땅의 구속에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국민 나 자신의 구속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내가 구속되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가는 것이고 그 일이 끝나면 영토는 자동적으로 구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참고 구절을 한두 곳 더 봅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23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거기에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통일해서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2장 19절~22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거기도 하나의 통일 국가가 이루어질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들은 국민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국민들이 전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때, 천국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건져내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가 실현되는 ‘이상적인 통일 국가’가 될 것이냐 라는 것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땅덩어리는, 영토는 그 후에 마지막에 자동적으로 따라 오겠끔 되어 있고 현재는 구속이 덜 끝난 상태인데 어떻게 보면 이미 우리가 구원은 어떤 면에서 받았지만 아직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완전하게 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나라 백성이지요

그래서 지금 집을 지어가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어가고 있는 이미 구원된 상태에 와 있지요

그래서 권속이다 시민이다 가족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연계도 아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구속되지 않았지만 이 자연계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는 그가 이 지상에 왕으로 와 계셔서 통치하고 계시고 그 백성을 이미 구속해서 자기 통치하에 들여보냈고 우리가 와 있고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주권과 국민과 영토가 현재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속 지나가다가 마지막에 이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 세력들, 사단을 비롯한 모든 무리들을 하나님이 심판해서 정리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될 진짜 통일된 날이 오지요 통일 국가가 이루어질 날이 옵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이상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적이고 온전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때가면 이 영토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 바뀌어서 국민과 영토가 다 온전해 지지요

그것을 우리가 지금 기대하는 이상적인 국가인데 그것은 이다음에 예수님 재림 때 일어날 일이고 현재는 아직 그렇게 이루어져 있지 않고 현재는 그냥 지상에서 불완전한 상태대로 있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3절을 봅시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부분을 다시 여기 나타냈는데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모습이지요

4절~7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된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전의 상태와 하나님의 나라가 온 후에,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된 후의 상태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 해설이 나옵니다

전에는 세상 풍습과 사단을 따라다니면서 그 나라의(즉 사단의 나라의) 백성이 된 우리가 지금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거기에서 건져냄을 받고 구원되어서 그 상태 즉 죽음의 상태에서 살아나서 하늘에 속한 살아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 시민권의 변화를 구원이라고도 하고 구속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구원된 상태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상태 또는 하늘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시민이지요?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다 또는 구속을 받았다 그런 표현입니다

장소를 옮겼다는 뜻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구속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구속받으면 장소야 여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상관없다 이 말입니다

한국에서 미국 시민권을 따도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 아직 가본 일이 없지만 한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미국에 가서 살아도 미국 시민이 아닐 수도 있지요

장소를 이동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국가를 오해하기 때문에 천국이라고 할 때 자꾸만 영토 위주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천국에 간다 라는 말을 자꾸만 장소를 옮겨야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장소를 옮겨서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부분을,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마지막 부분 정리합시다

제가 늘 그 쪽을 강조하면 영토를, 장소를 너무 강조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많이 하는 데요

성경에도 영토는 강조하고 있지 않으니까 저도 강조할 수 없는데 그래도 성경에 나오는 부분만 찾읍시다

21장 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거기 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는지 우리가 살펴야 됩니다

여기 새것이라는 말은 시간적인 새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질적인 새 것이라는 뜻입니다

질적인 새것이라는 말은 현재 있는 이 시간 공간세계 우주계가 전혀 딴 모습으로 바뀔 것을 말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천국이 이 현재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착각입니다

저기까지 가는데 한 시간 걸릴 것이 5분 만에 간다든지 그런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어느 정도 달라지느냐? 부활의 몸을 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이 몸이 부활하셨는데 이 땅에 속한 몸이 하늘에 속한 몸으로 바뀌었지요?

그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몸 자체가 만져지기도 하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고 하는 것을 봐서는 상당히 유사한대도 불과하고 금방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서 못 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광채가 나서 쳐다볼 수도 없기도 하고 그런 몸이지요

식사를 안 하셔도 괜찮은 몸이고 그건 상상이 좀 어려운 영역이지요

그 아래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에도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왜 새것이라고 말했을까?

역시 질적인 것인 데요

5절에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런 말이 나오는데 새롭게 한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에는 영토도 분명히 현재 영토와는 다르게 아주 이상적인 새로운 영토로 바뀌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세히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우리가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가 그런 것을 미리 환상으로 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있을 것을 미리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이 도저히 가히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지요

실지로 표현이 안 되지 않아요?

예수님의 몸은 만져보고 다 했는데도 우리가 표현하기 힘들지요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이 만져지기도 하고 음식도 잡수시는데 그렇게 또 금방 사라질 수 있는가?

그래서 제자들이 부활에 대해서 믿을 때 처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혼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이다 그래서 자꾸 음식이 있느냐 만져 보라 이렇게 한 것은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혼이 아니고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였지요

그런데 증명을 다 해 주었지만 금방 사라져 버리니까 이상하지요

만져는 보았는데 금방 사라지니까 이상한 몸입니다 이 세계도 그렇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 질문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새 나라는 지금 현세와 같은 ‘공간적’인 세계일까요? 또는 현재 세상과 같은 ‘시간적’인 세계일까요? 라는 말이 있는데 시간적이거나 공간적인 세계는 물론 아닙니다

그건 예를 이미 든 것이지요

만져질 수 있는 몸인데 금방 문을 잠가둔 방에서 벽을 뚫고 나갔는지 어디로 나갔는지 나갈 수 있는 걸로 봐서는 공간적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라는 말이 6절에 나오는 데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씀 자체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세계라고 하십시다

영원세계에 어느 날 시간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끝났어요

이것이 공간적으로 그립시다 이렇게.

영원의 세계 안에서 어느 때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세계가 시작되어서 언제 끝나버렸어요

이것이 우리에게는 십만 년이 되든지 얼마가 되든지 긴 시간이 그리고 우주가 무한하다 라고 하든 말든 있는데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겠어요

제가 만일 하나님이라고 합시다 영원의 세계라고 합시다

영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보니까 여기서 시간이 시작되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역사가 쭉 흘러와서 예수님 재림할 때 여기서 끝나버렸어요

이 사람은 엄청난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에 이 긴 시간에 대한 질문들이 많이 있어서 여기서 죽은 성도가 이때까지 어디에 가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거기가 거기라 이 말입니다 거기가 거기지요

이것은 영원세계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참 어렵기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종전에는 영원세계를 이렇게 그리지 않고 잘못 그려서 이렇게 그렸어요

창세 전 이것은 예수님 재림 이후 영원세계 라고 그렇게 그린 것은 잘못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면 역시 시간세계를 가운데 두고 갈려지지요?

시간세계 전의 영원세계와 시간세계 후의 영원세계가 있다는 말은 또 하나의 시간세계가 됩니다

그렇게 그리면 안 되고 이렇게 크게 다 그리든지 다르게 표현해야 되는데 다르게 표현하는 자체가 애매합니다마는 영원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영원세계 속에서 새로운 질적인 세계를 만드시기 때문에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 시간과 공간적인 세계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하시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그 아래 부분에 나오는 데요 8절을 보고 지나갑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거기 지옥이라는 모습이 나오는데 지옥은 어디 일까요?

지옥은 하나님 나라 밖일까요, 안일까요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옥은 천국 안에 있습니까, 천국 밖에 있습니까?

지옥은 있다면 천국 안에 있어야 되지요

지옥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한 영역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감옥이 되었든지 뭐가 되었든지 하나님이 사람을 벌을 주고 있는 곳이니까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부분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분에는 천국은 굉장히 좋은 곳을 말하고 아주 나쁜 곳은 지옥이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따로 떨어져 있어야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복음 16장에 가운데 큰 구렁이 있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었건 어떻게 되었건 이쪽도 음부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고 이쪽 아브라함의 품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모두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현재 세상도, 현재 이 타락한 세상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지금도.

이것도 천국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단의 나라가 있다는 말은 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사단의 나라가 있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사단의 나라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단의 나라가 이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애를 많이 쓰지요

때로는 이것이 영토를 상당히 많이 차지할 수도 있어요

즉 국민을 많이 차지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이 사단의 세력을 다 멸절시키는데... 없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한쪽, 역시 공간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이상하지만 한쪽 어디 감옥에 넣어두는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우리가 공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역시 어려움이 옵니다

그래서 공간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과 천국을 대조적으로 갖다 놓지 말고 천국의 반대 개념은 사단의 나라라고 보셔야 됩니다

지옥이 아니고 천국의 반대 개념은 사단의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냐, 사단의 나라냐 이렇게 해야 되지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기 때문에 혼란이 오는 겁니다

여러분 교안에는 뒤에 한 항목을 못 써 넣었는데요

계시록 21장 그 아래 부분을 하고 말씀을 맺읍시다

9절~10절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그 아래는 여러분이 꼭 본문을 잘 보셔야 됩니다 이 구절은 오해하는 분이 많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잘 보세요)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뭘 보여줬지요?

10절에 무엇을 보여줬지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2절에서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무엇을 보여주겠다고 했지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했지요 어린 양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이지요

그러면 새 예루살렘은 성, 예루살렘은 사람입니까, 땅덩어리입니까? 뭡니까? 성도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10절에서부터 그 아래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이야기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살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 자신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11절~1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여기 성이라는 말은 도시라는 말이고요

성곽이라는 말은 도시를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 담장을 말합니다

성벽. 거기 문이 열둘이 있고 그 열두 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이것이 만일 어떤 건물을 가리킨다면 어떻게 건물의 문이 르우벤도 되고 베냐민도 되고 시므온도 되고 레위도 되고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이 문이 되어 있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아요?

그 아래 14절에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그 말은 이 기초석도 베드로 안드레 야보고 요한 이런 열 두 사도를 가리키는데 열두 지파는 문이 되어 서 있고 베드로나 이런 제자들은 돌맹이가 되어서 밑에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아서 산다 이 말이예요?

상상을 좀 잘해도 이런 정도는 답이 나와야 되지요

이것은 전부가 성도들의 집합체,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물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지요 국민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열 두 지파 신약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 아니면 통틀어서 어쨌든 교회를 대표할 때 열 두 지파나 열두 사도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열둘이란 대표자 이름으로 대치해둔 것뿐 이지요

결국 큰 영광스러운 도시를 하나 보여주시는데 이 도시는 사람들로 구성된 도시입니다

전부가 사람이라 이 말이에요

거기 보니까 베드로도 있고 누구 누구 다 있다 이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배운 대로 우리에게 전승해준 그들의 가르침 위에 배우고 그 복음을 따라서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집합체다 이 말입니다

22절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은 없습니다

콜레 박사가 성전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고 예수님의 집무실이 있고 뭐 그런 말을 하는데 성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물이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틈바구니에 와 계시다는 상징 표현이지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열두 지파가 쭉 진을 치고 있고 그 한 가운데 성막을 짓게 하고 하나님이 ‘이것이 내 집이다 성막이다’ 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건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게 하고 ‘여기 내가 와 있다고 생각해라’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상징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시도록 구속사건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죽을 육체를 가리킨 것이다’ 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어서

실제로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시에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임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나에게 임재하시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내 안에 와 계셔서 내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되지요

그것을 고린도서에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다, 전이다’라는 표현을 한 이유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개인에게만 따로따로 이렇게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예요

내 집에도 하루 주무시고 가시고 누구 집에도 하루 주무시고 가시고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성도들이 다 하나님이 거하실 집인데 따로따로가 아니고 우리 모든 성도가 하나의 이상적인 집합체를 이루고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니까

하나님의 지배 하에서 통일된 마음과 뜻이 똑같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어서 이 국가라고 하는 사회, 교회 조직체 전체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성전이라고 표현했지요 똑같은 성전인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가고 있다 라고 표현한 것은 아직도 덜 지은 것이지요

아직도 숫자도 너무 모자라고 구원받을 사람도 더 들어와야 되고 여러 가지로 지어져 가고 있는데 결국 한 개의 큰 건물을 짓는데 한 개의 큰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그 한 개의 큰 하나님의 집은 많은 성도로써 구성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로써 하나님을 모시게 되어요

그것을 다르게는 또한 몸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라고 해서 수많은 지체가 모여서 한 개의 몸을 이룬다

그래서 머리인 그리스도가 지시하면 전체 몸이 수많은 세포가 일사분란하게 다 동시에 움직이지요 그러한 통일된 몸이 되지요

그와 비슷하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상적인 연합, 협력관계를 만든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여기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는 성으로 비유합니다

도시로 비유하면서 문, 길 등등 모든 것이 아주 질서정연하게 네모반듯하게 입체적으로 다 이렇게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고 길이 사방에 나서 누구든지 자유로 드나들 수 있는 것처럼 마치 혈액순환이 잘 되듯이 그 성도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우리 몸과 같은 그러한 이상적인 연합조직체, 통일체가 이루어질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강조하는 대로 천국에서는 상급이 차이가 없다 라고 자꾸 표현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공동체에 임재하시고 공동체가 긴밀하게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내가 잘했느니 네가 잘했느니 그런 말이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받았건 이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다 마찬가지라 이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되었건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던 강도가 되었건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아서 함께 하늘나라에 와 있으니까 함께 찬양하고 함께 하나님 모시고 있으면 되었지 네 맨션이 더 크냐, 내 맨션이 더 크냐 그러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더 잘 섬긴 사람은 하나님의 집에 더 가까운 곳에 산다고 그러데요 누군가가.

그래서 그러지 않은 사람은 좀 변두리에 있고 특히 강도는 보니까 제일 변두리에 살더라 그래요

그런데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제일 동네 도시 한 가운데 하나님의 집, 예수님의 집 바로 옆에 살더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도 공간적인 착각이지요

이것을 실제로 우리 성도들의 공동체를 표현하는 것을 건물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가 실제로 죽어서, 입신해서 가보니까 꼭 이렇게 생겼더라 라는 말은 성경을 완전히 오해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자기 상상한 데로 보고, 오는 자기의 환상이라 이 말입니다

실제로 천국이 이렇게 생겨있더라고 하면 계시록 자체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이지요

말씀을 맺읍시다

하나님 나라는 세 가지 요소로 있다고 합시다

왕과 국민과 영토, 그래서 이 그림 자체가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국가의 삼대 요소는 세 가지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조화를 잘 이루어서 형성되어 있느냐 하는 그러한 통일국가의 모습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상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신데 지상에 있는 왕처럼 군림하는 왕도 아니고 칼을 휘두르시는 왕도 아니고 의자 위에 앉아서 호통 치는 왕도 아니고 아버지와 같고 친구와도 같고 사랑이 넘치는 그러한 모습의 아버지시지요

특히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러한 아주 특별한 관계, 왕과 백성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백성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하나님에게 절대복종하는 아주 이상적인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원래 그런 이상적인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첫 창조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재창조할 것까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이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뱀의 꼬임을 받고 범죄를 하건 말건 그것은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해서 다 처리해야 될 부분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서 보면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지요

다만 하나님의 그 통치에서 벗어났느냐 아니냐 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중요하지만요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 하와의 후손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용서하시고 받아들여주셔서 새로 하나님의 관계 속에, 하나님 안에 들어오게 해서 이제는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하는...

그러면서 나 혼자가 아니고 여러 성도들이 아주 사이좋게, 가인과 아벨처럼 그런 사이가 아니고, 아주 이상적인 사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러한 한 가족과 같은 한 몸과 같은 이상적인 조직체가 이루어집니다

그때 우리의 몸도 아주 놀라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우주계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길이 있고 땅바닥이 있고 그럴는지 아닐지도 저는 모르겠어요

길과 땅바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고 발을 딛고 살 것 같아 보이지도 않고 더욱이 집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먼지도 날지 않는 곳에서 벽이 왜 필요하며 뭐가 필요합니까?

어떤 사람 책에 보니까 안이 다 보이더라고 하는데 다 보이면 뭐하려고 집을 짓고 살아요?

집이 있으나 마나지요 도대체 집이라는 자체가 자기를 제한하는 구실밖에 더합니까?

자기를 가두어 놓는 구실밖에 하지 않지요 갇힐 필요가 없는 데 왜 집이 필요합니까? 그런 것하고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또 가족을 만났다는 말도 책에 보니까 나오는데 자기가 가족을 만나서 같이 살고 이렇게 말하는데 도대체 자기 가족이 어디까지가 자기 가족입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살 겁니까, 남편이나 아내를 데리고 살 겁니까, 부모님을 모시고 살 겁니까? 아마 부모님은 자기 부모님도 모시고 살고 싶어 하겠지요?

그 부모님은 또 그 위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고 그러면 전부 한 집에 살아야 되지요 어디서 나눌 겁니까? 어디서 잘라서 아버지까지는 여기서 사십시오

나부터 내 몇 대까지는 여기서 살고 이렇게 하겠어요?

내 자녀도 결혼해서 이미 딴 사람하고 살고 있는데 그러면 내가 누구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서 가족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집가지도 않고 장가가지도 않고 ‘천사들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습을 너무 우리가 많이 연장선으로 생각해서 천국에 가면 집도 이렇게 생겼을 것이고 사는 모습도 비슷할 것이고 그 얼굴 그 모습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고 다시 그 사랑하는 사람 다 만나서 요단강 건너가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렇게 만난다고 보장하기 힘듭니다 그런 모습으로 만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던 인척관계로 만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관계로 만나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모든 제도는 와해되어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 가서도 한국사람 끼리끼리 우리는 김치 먹고 흑인들은 흑인들 끼리끼리 또 다르게 살고 그럽니까? 그럴 수 없지요

완전히 얼굴 모습이고 뭐고 바뀌어야만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지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지금 지상에 살던 그 제도나 문화나 조직, 관계 모든 것은 완전히 다 뒤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제가 상상적으로 자꾸 풀어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설명되어 있는 어떤 기본적인 설명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예수님께 질문했던 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반박 설명하셨던 부분도 우리는 이해해야 하지요

그러면서 천국은 현 지상의 어떤 것을 연장선으로 이해하시지 말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상적인 사회, 어떤 의미의 영토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믿으시면 제일 간단한 것이고 계시록 21장 22장에 나오는 부분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그러면 문제는 다 풀리는 것이지요

그 이상은 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영토’를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요

하여튼 이상적인 영토인지 무언지 있을 꺼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렇게 인식하면 되고 현재는 이 지상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이고 지상에 우리가 있으면 되는 것이고 지상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라고 해서 천사들이나 죽은 성도들은 제외하느냐 그것도 아니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하고 인식할 수 없는 영역까지 다 포함해서 그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이 거기 있거나 저기 있거나 어쨌든 그 하나님의 전체 나라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도 거기 계실 것이고,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냐? 저 밑에 계시냐? 할 필요 없이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 계시고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있고 다만 우리는 육체를 가졌으니까 눈에 보이고 땅에 딛고 사는 것뿐이고 죽은 성도나 천사들이나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니까 영적으로 계시고 그 차이만 인식하면 되는 것이지요

우리도 부활할 때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그때는 같은 존재가 되겠지요

여기서 강의를 마치고 질문을 한꺼번에 받기로 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또 하나님 나라를 너무나 이상적이고 영광스러운 나라로 만드실 것을 저희들에게 조금이나마 보여 주시고 특별히 이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이 놀라운 새 세계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첫 창조 세계인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다가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놀랍게 능력으로 그를 영적인 존재로 부활시키셔서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전혀 새로운 몸과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해서 우리 모두가, 이 온 우주계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존재로 변화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변화될 것인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지금은 서로가 관계가 복잡하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갈등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나라가 이루어질 때 우리 모두는 꼭 한 몸처럼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고 사랑의 관계가 맺어질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 이상적인 위대한 사회와 교회와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저희들에게 주시옵소서 그래서 지금 이 세상에서 아둥바둥 다투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면서 까지도 경쟁하고 싸우고 욕심을 부리지 않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이 세상은 지나갈 세상이며 장차 소멸되고 새로운 나라로 바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답게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생각하며 살며 일하게 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수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앞두고 주님의 그 부활의 의미를 우리는 다시 한번 새겨 보며 주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에게 엄청난 새 세계가 시작된 것을 상상하게 하시고 그 때문에 우리는 흥분하며 감격하며 그 때문에 우리의 삶이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영역 속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그러한 축복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6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어 있으니”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또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과 그리고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떤 상태에 있을 것이냐 라는 그 중간상태에 대한 부분까지 우리가 살폈습니다

오늘은 다시 천국의 현재적인 모습에서 천국에 이미 시작된 부분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까지의 중간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간상태라고 하면 죽은 후의 부분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현재 상태에서 천국의 시작과 천국의 완성 그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빌립보서 1장 19절~30절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 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오늘 강의 내용은 우리가 대개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정리했던 부분하고 조금 연관만 지어서 정리를 해 두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가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부분인 데요

여기 23절~24절에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하면서 그 두 사이에 대한 설명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해서 두 사이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영역하고 육신에 거하는 것하고 그렇게 둘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확인하기 위해서 20절로 돌아가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해서 ‘살든지 죽든지’라는 표현을 쓰도 있습니다

다음 구절인 21절에는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역시 사는 것과 죽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 데요

현재 살아있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개 사이에 끼어있다는 말입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살핀 대로 내가 죽은 이후의 상태는 그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한 점이 있고 또 시간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시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성경에서도 죽은 후에 성도가 어떤 상태에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거기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두거나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지요

천국이 완성되었을 때 우리가 영원한 부활에 참여했을 때 모든 것을 해결하면 될 것이니까....

문제는 현재 지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으면서 어떤 갈등이 있지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고 우리가 그 나라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빨리 이 세상, 불편한 세상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완전한 축복을 누리고 싶은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계속해서 두시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 현재 상태로 있는 것이 더 유리한가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완전히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은가 하는 그 두 사이에 끼어있다 이 말이지요

바울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또는 사는 것과 죽는 것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거지요

사실 더 좋기는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욕망이지만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2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즉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욕망이 자기는 더 큰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24절에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결국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그 외에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고 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육신에 거하는 것이 더 좋다, 더 유익하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이 세상 나라와 관계는 청산하고 온전히 주님과만 함께 있는 그런 삶을 누리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 하나님 백성들이 당연히 가져야 될, 고백해야 될 하나님의 욕망이라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데는 우리에게 조금 문제가 있지요 아직은 날 데려가지 마십시오

아직은 이 세상에 더 있고 싶습니다 라는 부분이...,

물론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직은 내가 믿음도 온전치 못하고 좀 더 그리스도를 맞이할 그런 상태가 될 때까지 나에게 좀 시간을 더 주십시오’ 그런 말로 고백하는 사람은 이해가 조금 되는데

그러지 않고 때로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오늘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사실 우리가 그렇게 반가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정리가 우리에게 덜 되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갖고 있는, 육체를 갖고 있는 현재상태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 인식이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딘가 하여튼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 말하지요 두려움이라는 것은 꼭 그것이 무서운 존재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고 모르면 무섭다는 것이지요

밤에 길에 나가면 공연히 무서운 이유는 어두우니까 어디서 누가 나타날지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궁금한 것이고 낮에 길을 잃으면 별로 겁이 나지 않는데 밤에 길을 잃으면 지금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너무나 막연해 보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심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접하게 되면 그 다음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죽으면 이제는 육신을 떠난 상태에서 온전히 주와 함께 있다는 그 사실은 확실하게 우리가 확인하고 있어야만 혹시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또는 질병이 온다든지 위험한 때가 올 때에라도 별로 그런 것을 겁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 드디어 내가 바라던 그러한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그렇게 느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어야 될 이유를 바울 사도는 교회를 위해서 또는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서 필요하다 유익하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목숨을 더 부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더 유지시키는 한, 참으로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나 같은 존재도 그래도 이 세상에 더 존재할 만한 유익함이 있는가? 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것이 좋겠지요

여기에서 살고 죽는다는 말은 육적 몸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영적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영적으로 죽었던 자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서 이제는 영원히 주와 함께 이미 거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으로는 우리가 이미 살아있지요 그리고 다시 죽지 않습니다

다만 육적인 몸이 한번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부활하는 그런 아주 놀라운 영광스러운 영역으로 바뀌어야 할 과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사모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육적 몸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어차피 한번 지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 육적 몸으로 현재 있는 것을 주와 함께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 않고 주님과 따로 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그 존재와 나는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육적 몸을 갖고 있는 존재 사이에 공존할 수 없는 어떤 벽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했지만 육체적으로는 그것이 지금 불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이 나도 부활해버리면 바로 마주보고 서로 얼굴을 대하면서 이렇게 교제가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할 텐데 지금은 우리가 기도하고 이렇게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고 몸으로는 함께 거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에 현재 있지요

그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9절과 30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런 말씀이 나오는 데요

우리가 육적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은 고난이 있고 싸움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싸움이 무엇일까? 라는 부분을 생각해야 되겠는 데요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곧 ‘하늘나라’와 ‘세상나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그 두 나라가 갖는 갈등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고난이고 싸움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이 두 나라 사이의 긴장관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챠트가 나와 있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육적 몸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셔서 오는 세상 또는 하늘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하늘나라로 옮겨져서 지금 천국 백성으로 천국에 들어와서 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고 하나님 나라 백성 틈바구니에서 함께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천국 시민이고 천국에 와 있는 것이지요

죽은 후에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천국에 와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육적 몸이 이 하늘나라의 영역에  따라 들어오고 있다 이 말입니다

부활을 해야 하는데 이 육적 몸이 꼬리가 길게 따라 오듯이 뭐가 미처 못 따라 오고 자꾸만 끌리고 뒤에 쳐져 있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육적 몸이 불편할 때가 있어요

이 영광스러운 영역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육적 몸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 몸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내가 바뀌어서 들어가면 완전한 천국이 되어버리는데 그러기 전에 내게 문제가 있는데 이 두 개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적인 몸만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가 육적 몸 때문에 이 세상에 그대로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부분이 같은 상황에 있지요

같은 성도들도 그런 상태에 있고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계 전체도 아직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가면 계속해서 나올 부분입니다마는 이 두 개 사이에 끼어 있는 부분을 우리가 잘 인식하는 것이 좋고 그것 때문에 괴로움이 있고, 싸움이 있고, 고난이 있고 때로는 그것이 내 안에서의 싸움으로도 나타난다 이 말이지요

나와 외부, 자연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때로는 나와 나와의 싸움으로도 나타납니다

그건 뒤에 가서 살피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몸이 세상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고난을 받아야 하고 불완전한 내 몸과 자연세계와 세상나라로 인한 고통을 면할 길이 없고 또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을 뿐 이지요

그때 가서는 즉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그 날에 가서는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다 제거하실 것이고 내 육적 몸을 벗기시고 영적 몸 즉 부활의 몸을 입혀 주실 것이고 그때 심판하셔서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그것을 우리는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 날을 ‘재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어디서 어디로 오는 것이란, 오고 가고 하는 개념은 지난번에 설명을 드렸었지요

오고 가고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또 한 차례 놀라운 사역이 실제로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눈으로 보일만큼, 육적 눈으로 보일만큼의 놀라운 그리스도의 작업이 나타나지요

그것을 재림이라고 말하고 이 재림이라는 말은 우리 표현으로는 다시 온다 라고 해서 재림으로 되어있는데 ‘파루샤’라는 말 자체는 헬라 말에서는 그냥 ‘다시 나타남’이라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남’ 저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건 말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그때가면 모든 것이 처리되면서 이상적인 천국이 실현됩니다

그 이상적인 천국을 미래의 천국이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미래의 천국입니다

이것을 재림이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다시 나타나셔서 처리하시는 작업이 지나면 드디어 미래의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앞에 부분은 현재 천국이라 이 말입니다

이 부분은 현재의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 뒤는 미래의 천국이 되지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이것은 현재의 천국이고 이것은 미래의 천국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기 보다는 조금 이렇게 그릴 수 있겠지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현재 천국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현재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현재성이라고 말하고 죽은 사람이 가서 있는 천국을 미래의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천국이 동시에 두 개가 존재하지요

현재 천국은 여기 우리가 있는 대로 있고 죽은 성도들이 가 있는 미래 천국은 저쪽에 따로 있고 말만 그렇지 실제로는 두 개의 천국이 있지요

시간적으로 미래가 아니고 그것도 현재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것은 없어지고 이쪽으로 우리가 다 옮겨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기 때문에 이쪽으로 다시 가는 것이 아니고 갈 필요 없고 이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면서 미래의 천국이 됩니다

만일 이렇게 설명하면 이 현재 천국은 버려야 되지요

하나님이 굉장히 수고해서 노력해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버리시지 않는다 라고 대개 이해합니다

마치 우리 몸을 버리시지 않고 이 몸을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바꾸어 주시듯이 이 세계를 버리시지 않고 이 세계를 영광스러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또 미래의 천국이 저쪽에 지금 이미 있다 라고 하면 ‘이것은 누가 언제 창조했느냐?’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하지요

보통 중간시대를 설명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속사건을 이룰 때까지는 이 천국이 ‘아직은 아니다 없었다’고 하든지 아니면 ‘있어도 들어갈 수 없다’ 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중간상태인 낙원에 대기하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천국으로 옮겼다 그렇게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간상태를 생각하게 되는데 중간상태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죽은 후에 재림 때까지 어디에 가 있느냐? 그 질문보다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이루시기 전에는 사람이 어디 가 있었느냐? 하는 부분 때문에 중간상태가 원래는 생각이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지난번에 조금 설명을 드렸었지요? 림부스라고 해서....

그런 생각이 천주교 때부터, 중세 교회 때부터 있어왔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다가 개신교에 들어오면서 그 생각이 거의 없어져 버렸는데 아직도 개신교 안에서 이런 낙원이 있어서 중간상태를 거쳐서 간다는 생각을 하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이 낙원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다 가버렸다면 지금 죽는 사람은 낙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야 되지요

다른 성도들이 천국에 가 있다고 하면 낙원을 거쳐 갈 필요가 없는데 어떤 사람은 또 생각하기를 ‘아직도 천국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고 있고 아직은 낙원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한 후에 여기 낙원에 와 있는 사람을 다시 하나하나 심판을 해본 후에 합격하면 천국으로 보내줄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렇다면 낙원에 가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지요?

천국에까지 이미 왔는데 다시 심판해보고 되돌려 보낸다면 낙원에 들어올 때부터 잘못 받은 것처럼 되잖아요?

낙원에 들어올 때부터 제대로 받았어야 되지요

그래서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말도 상당히 어폐가 생깁니다

그 이전에 도대체 이 낙원이나 천국은 누가 언제 만들어서 언제부터 있었느냐?

아담, 하와를 창조하신 그 창조 때,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미 천국은 있었느냐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거기 계셨고 아담은 여기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 오실 때 천국에서 이쪽으로 오셨다가 다시 가셨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구약 성경이나 여러 곳에서 그런 설명이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천국이 저쪽에 따로 있다 라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말할 때 이 천국이 이쪽으로 왔다 라고 말하면 참 이상하지요

천국이 이동해 왔다 라고 하면 참 이상하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이 천국이 개방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직은 천국이 문을 닫아 놓고 아무도 못 들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천국에 문이 열리면 이제는 낙원에 있었거나 여기 있었거나 어디 있었거나 간에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동안 쭉 살펴온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말씀 외에도 ‘천국은 너희 가운데 이미 와 있다’ 그런 많은 말씀들이 실제로 여기에 와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이렇게 가까워 졌다 라거나 천국에 들어갈 날이 다가왔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천국은 이미 너희 가운데 와 있다’ 라는 것을 너무나 많이 살펴왔고요

또 우리가 마태복음을 살핀 대로 천국은 계속해서 팽창해 간다거나 천국은 자라가고 있다거나 천국 안에서 많은 현재적인 어떤 변천, 발전 그런 부분이 나와 있었지요

그럼 이 천국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냐?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저 천국 자체가 뭐, 가라지도 와 있고 이렇게 되는 천국은 아니겠지요

가라지도 와 있고 나중에 골라내어야 되고 심판해야 되고 그런 말은 전부 이 현재 세상에서 일어날 이야기지 저쪽에 있는 천국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전부 이 현재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말하고 있는데 저 천국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냐? 하는 이야기지요

고린도후서 5장으로 넘어갑시다

이 구절도 주제별로 공부하셨거나 주제별로 요절 암송하신 분은 다시 정리하셔야 되겠습니다

요절 암송하시는 분들에게 주의할 부분이 있는 데요

요절을 한절씩 골라서 암송하는 법은 지양하셔야 됩니다

대개 요절 암송을 그렇게들 많이 시키는 데요 주제별로 암송하면 고린도후서 5장 1절만 암송한다고 해 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그 구절만 읽으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또 있으니까 결국 집이 두 곳에 있지 않느냐?

이 지상에도 우리의 집이 있고, 이 지구도 있고, 영토도 있고, 우리가 실제로 사는 집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도 있다고 했으니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처소를 예비하고 계실 것이고 내가 언젠가는 이 현재의 집을 벗어나서 저 영원한 집으로 옮겨갈 것이 아니냐 그렇게 대개 생각을 하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제별로 이 구절을 오용하기 때문이고 요절 암송을 한절만 해서 일어나는 과오입니다

2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거기에 ‘하늘로부터’라는 말이 있지요?

‘오는’ 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으니까 작은 글자로 되어 있는 데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이 처소를 옷 입는 것처럼 입는다고 표현하지요? 또 덧입는다 라고 하니까 이미 있는 현재 장막위에다가 덮어 입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지요

그럼 장소를 도대체 어떻게 입느냐 라는 문제가 생기는 데요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아주 분명하게 이제 입는다 벗는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4절~9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거기에 두 개의 집이 1절에 나타나 있는데 땅에 있는 집과 하늘에 있는 집 그런데 이것은 ‘집’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문맥상 잘 보아야 되겠습니다

8, 9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 말이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즉 이 몸과 함께 거하든지 몸을 떠나든지 그런 표현 자체가 빌립보서 1장에 나왔던 말과 똑같은 설명이지요

6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그 말이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육적 몸을 갖고 있는 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육적으로는 같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설명이라 이 말입니다

또 하늘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우리 몸까지는 완전한 하늘나라를 누리지 못하다는 이야기지요

하나님의 통치는 받고 있지마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상적으로 실현되는 영역에 우리 몸까지는 지금 참여를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즉 우리 몸은 아직도 하늘나라에 속한 몸이 아니고 땅에 속한 몸을 가지고 있지요

재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2절~4절에 보면 그 처소를 덧입는다 라고도 표현하고 또는 벗는다 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질그릇과 같은 육적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부활체의 몸을 받아 입겠다 라는 말입니다

즉 육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을 입겠다는 말입니다 문맥이 분명하지요?

현재 있는 우리의 몸을 땅에 있는 장막 집이라고 말하고 있고 부활할 때 우리 몸을 하늘에 있는 우리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문맥을 따라서 앞뒤를 다 읽어보셔야지 한절만 가지고 시비를 걸면 곤란하고 요절 암송할 때도 한절만 암송하지 않도록 하시고 꼭 한절만 암송하고 싶더라도 앞뒤를 잘 봐두고 이 구절은 어떤 뜻이다 앞뒤에 대략 어떤 말이 있더라는 것을 알고 암송은 설령 한 절만 하시더라도 그래서 이 구절을 암송할 때는 앞뒤가 머리에 떠오르도록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4장 7절을 봅니다 문맥을 위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거기 우리 몸을 질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또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해서 이제는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고요

14절에 가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그런 표현 자체가 실제로 죽음을 거쳐서 부활과 관계되는 그러한 몸에 들어갈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고 특별히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질그릇에 속한 몸을 가지고 있다가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뀐 것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같은 문맥의 내용을 이 빌립보서 1장과 같은 내용이 고린도후서 4, 5장에도 나오는데 여기도 환난을 언급하고 있어서 두 사이에 끼어있는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16절을 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여기서는 일단 내가 육체적인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육에 속한 몸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병에도 걸리고 피곤하고 하여튼 이 몸이 때로는 우리를 몹시 괴롭힙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는 꼭 몸이 죄를 범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만큼.

왜? 내 속 사람은 바르게 하고 싶은데 몸이 방해해서 안 되는 것처럼 느낄 만큼 몸이 우리를 제한하고 있어서 꼭 이 몸이 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고행주의가 있었지요

몸을 억제하기 위한 헬라철학에서 온 영향 때문에 몸은 나쁜 신에게서 지음 받아 왔다 영혼은 좋은 신에게서 지음 받아 왔고 그래서 이 영혼이 몸에 갇혀 있는 한은 굉장히 불편하게 되어 있다 라는 그러한 희랍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인들까지도 몸은 죄악시 하고 영혼은 좋게 생각하는 그런 기독교 안에서 사상이 한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불교나 다른 종교의 영향 때문에 비슷한 생각이 있어요

요즈음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마는 과거에도 꽤 많이 있었는데요

몸 때문에 내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서 몸을 좀 굶기기도 하고, 일부러 밤에는 편안하게 못 자도록 예배당에 가서 꿇어 엎드려서 불편하게 잠을 자기도 하고, 자기 몸을 어떻게 하면 좋아진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요

그래서 금식하면 영이 맑아진다 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하는 데요

저는 그 말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많이 굶으면 때로는 정신이 좀 맑아질지는 모르지요

정신이 맑아지는 것하고 영이 맑아지는 것하고 같은 것인지 어떻게 압니까?

또 많이 굶은 사람이 굶었기 때문에 뇌 작용에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허황한 것을 보게 되지요 헛것을 보게 되요

대개 굶으면 그렇게 많이 합니다 그래서 오래 굶고 기도하는 사람이 이상한 환상 같은 것을 보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켜서 진짜 자기가 너무 기력이 없으니까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그런 이상한 착각에 빠져서 환상을 보았다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하셔야 됩니다

기도할 때 많이 굶고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고 성경에서 그런 장기 금식을 권장한 구절이 한 곳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대개 한 세 가지 부류의 금식의 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누가 죽었을 때 애통하며 애곡할 때 금식하는 것이 있었어요

하룬지 이틀인지 사흘인지 모르지만 장례식 치를 때까지 때로는 일주일도 걸리기도 합니다마는 가족이 죽었을 때 애통해서 금식하는, 밥이 먹히지 않고 또 남은 죽었는데 나는 밥을 먹기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굶기도 했고요

두 번째 부류는 죄를 회개할 때 특별히 전 민족이, 전 국민이 함께 회개하든지 할 때 금식을 선포하고 같이 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아무것도 안 먹고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고 또 며칠간씩 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며칠씩 회개하고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할 때는 자기 몸을 학대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스럽고 밥을 먹고 할 그런 마음의 여유라든지 그런 것이 없어서 한 것이지요

그 두 가지 부류 외에 세 번째 부류는 어떤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종교의식적인 그런 것이 서서히 형성되어 갔습니다 일종의 외식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도 바리새인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일주일에 이틀씩 꼭 정해놓고 금식을 했습니다

특별히 죄를 회개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고 자기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럼 왜 금식하느냐?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경건하게 삽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금식을 곧잘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 번째 금식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앞에 두 가지는 그래도 이유가 다 있고 괜찮은데 세 번째 부분은 예수님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셨지요

그래서 금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아무에게도 표시를 하지 말고 몰래 살짝 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금식을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 바리새인들도 금식하고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도 금식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그런 비판을 받으실 만큼 예수님은 금욕 생활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게 기쁜데 왜 금식하느냐?

잔치를 하고 있는데 금식을 해야 될 이유가 뭐냐?

결혼식인데 많이 먹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지 않느냐?

그러나 신랑을 잃어버릴 때가 올 텐데 그때는 금식해도 좋다

그 말이 사실은 이러이러한 때는 금식을 하라 하는 적극적인 표현은 아니고 꼭 한다면 그럴 때는 밥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슬프기도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데 그런데 실제로 신랑을 잃어버릴 때가 언제냐 하는 문제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라든지 예수님을 잃어버린 때를 어느 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이 하루 남짓 만에 다시 부활하셨지요

금요일에 처형되셨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까 금식을 했더라도 하루 남짓 밖에 못했을 꺼에요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부활의 즐거움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되겠지요

그 후에 아들을 잃어버린, 신랑을 잃어버린 그런 슬픔이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일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치려고 할 때에 잘 안 되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왜 우리는 해도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기도를 해야 한다

그 기도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기도라는 의식을 거쳐야 된다 라고 착각을 하는 데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들이 고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라’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이지 너희 힘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너희 스스로의 영역으로 그 사람을 고치려고 했기 때문에 안 된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인데

우리가 그걸 쉽게 기도가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라는 말을 기도라는 하나의 주문을 외우는 그런 형태로 착각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기도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본에, 어떤 사람이 성경을 베낄 때에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하고 금식이라는 말은 보탰어요

그래서 우리 성경에 보면 밑에 난외 주에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라는 말이 있는데 금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써 넣었겠지요

그래서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금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위에 본문을 읽지 않고 밑에 주를 보고서는 ‘예수님이 그런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것은 성경에 없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을 권장하는 표현을 쓰신 일이 없습니다

얘기가 조금 길어졌는데요 실제로 우리 몸 자체가 죄를 짓는 부분은 아닙니다

몸을 학대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몸을 학대하지 마십시오

몸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몸이고 또 언젠가는 부활해야 될 몸입니다

너희 몸은 성령님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 몸을 하나님의 처소로 생각하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잘 돌보아야 합니까? 너무 잘 먹어서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게 하면 진짜 뇌가 마비 현상이 일어나지요

너무 굶어도 마비 현상이 일어나지만 너무 많이 먹어도 마비 현상이 일어납니다

늘 느끼지요?

그래서 기도회를 할 때는 밥을 많이 먹고 오면 잠이 와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을 봐도 시험 공부할 때는 아예 굶든지 조금 먹든지 이렇게 해야 잠이 극복이 되지 밥 다 찾아 먹으면 시험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도 안 되지요

일전에 어떤 주부를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지난 번 수난 주간 때 이야기입니다

금식 기도를 꼭 좀 해야 되겠는데 나는 체질상 밥을 굶으면 위장에 문제가 좀 생겨서 굉장히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금식을 위한 금식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금식은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하는 것뿐인데 주일날 아침이든지 금요일 아침이든지 일어나서 밥을 먹는 시간을 뒤로 미루어 놓고 기도를 빨리 하고 기도가 끝나서 밥을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 그럼 참 좋겠네요”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 제목이 있어서 산에 갔습니다

기도 제목이 하루 만에 풀렸다고 합시다

밥이 나왔으면 찬양하고 밥을 먹고 내려오면 되는데 내가 사흘 금식하러 왔는데 사흘 채우고 가야 되지 않느냐? 해답이 났는데 왜 사흘을 채웁니까?

그런 것이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나쁜 방법이지요

그런데 ‘왜 금식하는 것이 의가 되느냐’ 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육체를 학대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공연하게 우리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녀가 그냥 무엇을 달라고 말할 때보다 아예 밥도 안 먹고 달라고 하면 애처로와서도 잘 주지 않느냐?

글쎄, 그런 부모님이 계시는지 잘 모르지만 저는 그런 자식이 있으면 ‘이 바보야’ 그러겠어요

‘아니 너는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하지 왜 먹지 않고 나에게 이야기 하느냐?’

‘네가 안 먹고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하면 내가 더 동정을 해 줄것처럼 내 동정을 더 얻기 위해서 그러느냐?’

그것은 나를 무시하는, 아버지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지요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은 좀 마음이 약해요

그래서 구걸하는 사람이 떳떳하게 구걸하지 않고 다 죽어가는 소리로 구걸하지요

우리 한국 사람의 심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도 그러려니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냥 기도할 때보다는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더 잘들어 주신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약속한 일이 없어요

‘그냥 기도할 때는 내가 잘 안들어 주지만 네가 굶고 기도하면 애처로와서 내가 더 잘 들어주겠다’ 그렇게 우리에게 약속한 일이 없습니다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스스로 밥이 먹히지 않고‘ 내가 너무 마음이 괴롭고 그래서 육체만이 아니고 마음이 괴로우니까 육체가 따라서 고통을 받는 것이지

영혼은 괜찮은데 몸이 좀 문제가 있으니까 몸도 좀 굶어라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이 홀가분해지느냐 그런 것 아닙니다

둘은 항상 붙어서 움직이지요

마치 우리가 중간상태를 설명할 때 영혼이 몸을 떠나서 어디 가 있느냐 라고 이렇게 떼서 생각하면 안 된다 라고 했듯이 실제로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몸과 영혼을 떼서 몸은 문제가 있고 영혼은 괜찮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요

이런 이론이 발전해서 소위 삼분설에서 영, 혼, 몸이 있는데 우리가 영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선이고 혼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잘못이고 더구나 몸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도 잘못이다 라는 것은 몸을 죄악시 하는 잘못된 발상입니다

프로이드의 착각일지 모르지요

성경에서는 몸을 정죄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정죄를 받을 때는 영혼과 몸이 같이 정죄를 받아야 하고 몸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조금 빗나갔는 데요 다시 정리합시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live) 때 몸이 상당히 많은 장애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몸이 중생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중생이라는 말이 좀 이상합니다마는 구속받지 않았다 라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몸이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몸이 약해요

실제로 일을 좀 많이 해도 문제가 생기고, 기도를 좀 길게 해도 잠이 오고, 또 성경을 오래 공부하면 나중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지요

그래서 설교도 길게 하면 안 된다고 늘 20분만 하시오 30분만 하시오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저는 그래도 도저히 20분만에는 못하겠어서 늘 30분내지 40분, 50분씩 설교합니다마는. 어느 정도 지나가면 뇌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이 약하지요

그래서 예배를 오래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는 그런 불편이 없겠지요

지금의 몸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직도 첫 창조된 상태에 있는 몸이기 때문에 역시 부활한 몸만큼은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런 의미에서 첫 창조된 우리는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담, 하와가 지음 받았던 그 상태가 완전하다 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범죄하기 전의 아담, 하와는 글쎄, 안자도 잠이 안 왔는지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팠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몸하고는 같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몸보다는 조금 나았을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다른 몸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이지요

그래서 처음 지음 받은 인간 자체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은 두 번째 창조를 통해서, 부활을 통해서 완전하게 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완성될 단계에 가기 이전에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럼 영혼은 완전해졌느냐? 그렇게 설명하면 곤란하지요

 영혼  늘 붙어 다니기 때문에 결국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어쨋든 몸이 불편하고 몸이 잘 안 따라오면 다 같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하지요

아니면 영혼 너는 자거라 하고 영혼만 기도하면 좋은데 그렇게 안 된다 이 말이지요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영혼도 기도가 안 되지요

어떤 사람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자칫하면 정신분열증에 빠지지요

인격 분열증이 생기거나 정신 분열증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당히 정상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실제로 기도를 그렇게 착각하고 하시는 분들이 자주 정신이상에 빠지고 금식기도를 오래하는 분 중에 죽는 사람도 꽤 많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될 부분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18절~25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여기 아주 중요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잘 정리해 두면 오늘 주제가 거의 이 잘 나오는 데요

여기에도 지금 두 사이에 끼어 있어서 고난 받는 설명이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에서 22절을 다시 봅니다

여기 피조물이 즉 자연세계가 고대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고대를 하고 있느냐 하면 20절에 피조물이 지금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고요 피조물이 복종할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나 자연 어떤 현상에 복종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한 목적대로 사람이 이 자연계를 바르게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악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계가 파괴되기도 하고, 어떤 꽃이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책상에 올라앉아서 그 사람을 기쁘게 해야 되기도 하고, 포도나무에서 난 이 포도송이가 나쁜 사람의 입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취하게 해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그런 일에 사용되고 있는 그 자체가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자연계의 몸부림이라 그러면

왜 자연계가 그런 허무한데 굴복해야 되느냐?

그건 자기 뜻이 아니고 자기는 굴복하기 싫지만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 말은 하나님이 그렇게 운명지어 주셨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느냐?

그것은 인간이 범죄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자연계까지도 그렇게 문제를 일으켰지요

창세기에 나오지요? 3장 이하에.

아담 하와가 범죄한 이후부터 땅이 엉겅퀴와 가시를 낸다 이 말입니다

그 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엉겅퀴와 가시를 내고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는 인간이, 자기 동생까지 죽이는 인간이 동물도 때릴 수도 있겠고 죽일 수도 있겠지요

많이 그렇게 했겠지요

그러니까 이 동물들이 자기들끼리도 또 싸우고, 물고, 잡아먹기도 하고, 그런 문제가 동물계에도 일어났다 이 말입니다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이것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느냐 하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즉 하나님의 자녀들인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릴 그 영광스러운 자유 이 몸이 어디에선가부터 지금 질그릇과 같은 몸에서 벗어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자유를 누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몸으로 자유로워질 것처럼 우리도 해방 받고 싶다

어디에 얽매어 있는데 해방 받고 싶다 라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물론 피조물을 사람으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23절에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두 가지가 나오지요?

지금 여러분 교안의 1번, 2번을 같이 설명했습니다

1번에서는 19절~22절에 '피조물이 구속의 날, 해방의 날을 고대하고 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현재 죄로 인한 허무함에 굴복되고 있는 피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23절에 보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 얻은 백성들도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라고 말하지만 또 아직도 자유함을 못 누리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 몸의 부분이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우리 몸이 구속받기를,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몸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우리의 구원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지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영혼과 몸을 떼서 영혼만 구원받는다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은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몸의 구속을 간절히 소원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25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라는 말은 아직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부활 때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망하고 기다리라 이 말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니까 소망하지 지금 일어난 일이라면 뭐 때문에 소망이라는 말을 쓰느냐 소망하라는 말 자체는 훗날 일어날 일이 아니냐? 그때 이루어질 것이니까 참음으로 기다리라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돌아가서 18절에 말이 그런 말이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즉 '우리가 부활할 때 그때는 너무나 영광스러워지는데 지금 현재는 그렇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그때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짧고 빈약한 고통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참아라'

'지금 어떻게 보면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암에 걸려서 고민하는 사람이 나, 너무 괴롭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봤자 몇 달이지, 일 년이지 참을만 하지 않느냐? 진통제도 있고...'

'그러나 부활할 때는 영원한 세계에서 너무나 영광스럽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한 그러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좀 참아라' 그런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두 사이에 끼어있는 모습이지요

지금까지 설명을 정리해 봅시다

첫 번째,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과 몸이 어떻게 분리되며 또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지는 우리가 잘 인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들어온 즉 구원받아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날부터 계속해서 육적 몸을 갖고 있고 이 육적 몸을 벗는 그날까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동안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요 모르고 있는 것 아니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후부터 우리의 몸이 부활할 그때까지 지상에서 우리의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이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여기서는 긴장관계라고 말하고 있고 고난의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천국의 모습입니다

미래적인 천국은 모든 구속사역이 끝날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로마서에서. 구속의 남아 있는 부분이 우리 몸과 자연계의 구속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끝나야만 미래 천국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야만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미래의 천국이 있는 것이지 아직은 없다 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변화되는 거니까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현재적인 천국 밖에 없지요

미래적인 천국과 현재적인 천국, 두 개의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은 현재니까 현재적인 천국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미래적인 천국은 그때 가서 이루어질 것이고요

두 번째, 하나님 나라를 바로 이해하면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상태 즉 현재의 삶이지요

이 지상에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자세, 책임 그런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고 또 여러 가지 궁금증도 풀리게 됩니다

괴로운데 왜 내가 살아야 되느냐?

고난이니까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면 기다리고 있어야 되느냐?

그래야만 나중에 영광을 누릴 때 얼마나 즐겁겠느냐?

또 바울의 고백처럼 할 일이 조금 있다 또 자연계가 우리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우리도 좀 고통을 받으면서 우리의 잘못이 얼마만큼 문제가 일어나는지도 좀 알아야 되고 그래서 우리가 이 현세가 아름답지 못한지도 알고, 영광의 부활을 고대하면서 주님, 영광의 부활의 몸을 빨리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주님, 어서 오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지요

세 번째, 이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이 긴장상태를 보통 복음시대라고도 부르고, 교회시대라고도 부르고, 천년왕국시대라고도 부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내용들을 우리가 잘 보면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은 저 미래, 마치 미래천국이 이루어질 재림 직전에 일어날 일로 거의 해석하지마는 사실은 예수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이 현재 긴장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계시록 전체가.

거기에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등이 나오지요?

거기 보면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있고, 전쟁이 있고, 미혹하는 자가 있고, 순교하는 일이 있고, 그런 많은 설명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 이 말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니까 주의해야 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이미 너희 가운데 많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편지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성도들이 받았는데 그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인데 이것은 너희들은 그냥 읽기만 읽고 보관했다가 후대 사람들에게 주어라 너희들하고는 관계없는 성경이다

이것은 이천년이나 삼천년 후에 일어날 일이니까 그냥 가만히 갖고 있다가 넘겨주어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지요

처음부터 이렇게 했지요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미래 이야기를 해주고는 지금 읽고 듣고 지키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일곱 교회가 자기 당대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잘 읽고 잘 배우고 자기들이 그 말씀대로 지켜야, 자기들도 그 과정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켜야할 부분이라 이 말이지요

현재적인 부분이지요

그래서 그들도 지진을 겪어야 되고, 그들도 전쟁을 겪어야 되고, 기근을 겪어야 되고, 그들도 박해를 받았고, 그때도 적그리스도가 있었고, 미혹하는 자가 있고,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시대마다 계속 반복되어 왔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이 두 사이에 끼어있는 긴장상태에 있는 이 시대에 일어날 일들을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시대나 일어나는 일을 종합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 바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에요

우리 주변에도 적그리스도가 있고, 거짓 선지자가 있고, 박해가 있고, 지진의 소리가 우리에게도 들리고, 기근도 있고, 전쟁도 있고, 다 일어나고 있지요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또 있고 또 있고 해서 항상 깨어 있고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되고 잘 감당하고 있어야만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고 그때 모든 일이 정리되면서 우리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바뀌고 이 자연계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면 드디어 모든 고난이 해결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 천국은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미완성 상태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고난이 따르는 천국입니다

이 고난이 따르는 이유는 그건 우리 몸의 부분이나 자연계의 부분도 있지만 아직도 악의 세력, 사단의 세력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수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훨씬 열세입니다

수적으로는 악의 세력이 훨씬 많아요

다만 그리스도 힘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소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를 보호하셔서, 보호받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고 확실하지만 아무리 사단이나 악의 세력이 들끓더라도 우리가 보호받을 것은 너무나 안전하고 확실하지만 그러나 고통은 있는 것이지요

도전이 있고, 갈등이 있고, 수적으로 보이는 세력은 그쪽이 크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현재 천국의 모습인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17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전투하는 모습입니다

이 두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가 긴장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전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전투는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에 대립관계에서 일어나는 전투입니다

물론 내 안에서도 육에 속한 몸과 거기서 벗어나려는 내 영적인 갈구와 이런 것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도 있습니다

그건 로마서 7장에서 설명드리기로 하고요

일단 에베소서 6장에서는 적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우리가 싸워야 할 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마귀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게 나옵니다 악의 영들입니다

싸울 때 내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공연히 자기 몸과 싸우고 공연히 옆의 사람과 싸우고 그렇게 잘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상당히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악령의 세력이 때로는 어떤 사람을 앞 세워서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때로는 내 가족이 사단의 신하로써 내 앞에 등장하기도 하지요

그러더라도 그 사람이 바로 원수가 아니고 그 사람 에서 역사하는 사단이 원수인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공연히 싸움이 이상하게 붙어서 인간적인 싸움으로 발전해 버린다 이 말입니다

여기에 그런 설명을 제가 했었지요?

우리의 적대 세력은 육체를 가진 어떤 인간이나 인간집단이나 나라나 정체가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어떤 민족주의적인 생각에 빠져도 안 되고요

우리민족, 다른 민족 이렇게 해서 우리 민족을 어떻게 해야 되지 하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생각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민족을 대적하는 다른 민족, 일본이나 소련이나 중국은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해도 안 되고, 또 현실적인 사회참여를 할 때도 정부가 바로 우리의 적이다, 어떤 정당이 우리의 적이다, 어떤 세력이 우리의 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문화적인 사명을 논할 때도 이런 과오를 자주 범합니다

우리가 땅을 정복하라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세워가야 되겠다 라고 할 때에 그 그리스도의 문화가 뭐냐 라고 하면 실제로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되지요

그런데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바로 눈에 보이는 어떤 마을을 하나 다 복음화 하는 것이다 어떤 집단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예술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자칫하면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적을 이해할 위험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늘 주의하지 않으면 사단은 돌아서 내 뒤에 와 있는데 앞에 있는 사람만 가지고 씨름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어쨌든 에베소서 6장에서는 이 긴장상태를 전투하는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고요

로마서 7장 보십시다

14절~2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구절에서 이것이 중생하기 전(前)이냐? 아니냐? 하는 시비가 신학적으로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오늘 제가 설명하고 싶지 않은데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저는 중생 전의 모습이라고 가볍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건 여러분이 또 다른 기회에 공부하시기로 하고요

오늘 저녁에 제가 설명하고 싶은 내용은 이 구절을 읽고 우리의 두 사이에 끼어 있어서 긴장관계에 있는 부분을 이 구절 때문에 딴 쪽으로 오해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구절을 읽은 겁니다

우리가 두 사이에 끼어 있다는 말이 우리 몸이 육적인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천국이 아직도 완성된 상태에 가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긴장인데도 불구하고 내 안에 내가 성화되어 가는 갈등과 연관 지어서

‘내 안에 두 개의 내가 있다’

‘두 개의 내가 있어서 선을 행하려는 나와, 악을 행하려는 나와 두 내가 있어서 싸우고 있다, 그 갈등이 있다’ 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이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조금은 보충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데요

거기 제가 기록한 것을 읽으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천국 곧 현재적인 천국이 당면하고 있는 그 긴장상태의 전투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겪게 되는 투쟁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즉 내 속에 두 사람 곧 새 사람과 옛 사람이 있어서 싸우는 그런 것이 아니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미완성된 상태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는 완성되지 않은 그런 부분 때문에 갖고 있는 갈등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20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인인 나와 뭐가 싸우느냐 하면 와 싸운다고 되어있지요? 20절 다시 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했지 중생한 나와 중생되지 않은 내가 또는 옛 사람인 나와 새 사람인 내가 싸우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23절에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이렇게 해서 이라고 표현되어 있지요? 다른 법이라고.

물론 이것은 문맥상으로 봐서는 율법과 관계되는 설명들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말자체가 율법의 정죄에서 일어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뒤에 법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다른 법, 옛날에 나를 얽어매던 법, 구속받기 전에 나를 지배하던 율법이 지금도 자꾸만 지배하려고 하는 그런 어떤 설명과 관계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 완전히 된 상태라면 이것은 벗어나 있으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데 어떻게 보면 아직 중생되기 전에 율법 하에서 갖는 자기 노력 때문에 오는 문제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내 속에는 두 개의 내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개의 내가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물론 이것은 신학적으로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마는 제가 깨달은 대로 설명할 뿐인 데요

내가 죄를 범하고 싶은 생각과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두 생각으로 늘 싸우고 있다면 나는 중생 받은 자인 증거다 그런 말을 하지요?

물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고 가능성은 있는 데요

그래도 주의해야 될 것은 역시 인격분리 현상이 일어나지요

내 안에 두 개의 내가 있다 라는 말 자체가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거지요

어떻게 나는 하나지 내가 둘이 되느냐?

새 사람인 나와 옛 사람이 나 이렇게 두 개의 내가 있다 라는 말 자체는 무엇이 새 사람이고 무엇이 옛 사람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지 옛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고 새 사람이 또 들어온 것이냐? 그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부활할 때도 이 몸은 이대로 있고 또 부활한 몸이 더 와서 만일 진짜 덧입는다는 표현처럼 내가 옷을 하나 덧입듯이 부활의 몸을 위에 뒤집어서 입으면 속에 육에 속한 몸이 남아 있으니까 이 부활한 몸이 무엇을 하려고 막 돌아다니고 하면 속에 있는 육에 속한 몸이 걸려서 잘 안 될 수도 있는 그런 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덧입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채로 위에 덮어 입는다는 말이 아니고 사실은 바꿔 입는 변화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육에 속한 몸을 완전히 내버리고 어디서 새로운 몸을 받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이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원리로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지 옛 사람은 옛 사람대로 있고 또 새 사람은 새 사람대로 들어와서

‘어르렁’ 거리면서 싸우다가 언젠가는 옛 사람이 져서 물러날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라 이 말이지요

그럼 왜? 그런 갈등이 있느냐?

일차적으로는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것처럼 적의 세력이, ‘사단의 세력’이 나에게 와서 자꾸만 괴롭히는 거지요

그것이 때로는 내 가족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다른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에게 가까이 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 문제가 일어나는 거지요

화가 갑자기 나는 이유는 내 안에서 문제만이 아니고 옆에 사람이 나에게 화나겠끔 만들기도 한다 이 말입니다

참으려고 참으려고 애를 쓰는데 옆에 사람이 갑자기 나를 화나게 만들어서 폭발하지요

주변이 영향이 있다 이거지요 사실은 사단의 영향이...

그런데 이 사단이 주변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내 안에까지 밀고 들어오지요

내 안에 들어와서 말하려고 하면 갑자기 교만한 생각이 나기도 하고,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겠끔 하지요? 이유도 없이, 밖에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그것이 옛 사람이라고 보기 보다는 ‘사단의 세력’이라고 보는 것이 쉽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다 라고 말하면 어떻게 내가 콘트롤합니까?

어느 것이 옛 사람이고 어느 것이 새 사람이고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만 가능합니까?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느냐 이 말입니다 가능합니까?

내가 콘트롤할 수 있어요?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왜? 콘트롤하는 내가 있고 콘트롤 받는 두 개의 내가 또 안에 있으니까 세 사람이 싸워야 되요

그건 굉장히 이상한 말입니다

말할 때는 쉽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런 착각에 빠지면 자기가 자기를 이기지 못할 때 정신분열증에 빠져서 자기 스스로 고난에 빠진다 이 말입니다

옛 사람을 이기기 위한 자기 투쟁 때문에 굉장히 갈등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시험에 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마세요!

‘아, 사단이 나를 괴롭히는구나’, ‘유혹을 일으키는 구나’ 이렇게 생각 해야 되지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지요

사단과 관계없는 부분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육적인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피곤해서 그렇기도 하고 누구를 좀 도와주고 싶고 남편이 밖에서 종일 일하고 집에 가서 아이들도 봐주고 싶고 아내 일도 도와주고 싶지만 자기도 피곤하고 하니까 만사가 귀찮고 집에 가면 그냥 드러눕고 싶고 그래서 못 도와주는 것이 특별히 사단이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도 내 몸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것을 꼭 내 옛 사람 때문이다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게 말하면 내 몸이 옛 사람처럼 되기도 하고 갈등이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두 사이에 끼어있는 현재 상태에서는 많은 약한 부분들과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너무 고민하시지 말고

이것은 고난의 시기다 사단 때문에 있을 수도 있고 내 자신의 불완전 때문에 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이것은 겪어가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

물론 그러면서 사단과는 싸우도록 노력하되 그것도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싸우시는 것이니까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 가볍게 넘어가야 되지 그런 것을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나와 더불어 싸우려고 몸부림을 치고 철야기도하고 나를 죽이려고 굶기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는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굉장히 신비적으로 풀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요

신비적으로 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저는 느껴집니다

예수님도 지상에 계실 때 이 긴장상태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령을 따라 행하셔서 죄를 전혀 범하지 않고 그 죄의 법을 이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피곤한데 잠을 안 주무신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배가 안 고프신 것도 아니지요

예수님이 때로는 피곤해서 배 안에서도 주무셨지요?

깨어 기도하지 않고, 쉬지 않고 기도하시지 않고, 잠도 주무셨다 이 말입니다

왜 제가 그렇게 표현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을 기도하고 싶을 때는 잠도 안 오고 꼭 이렇게 되어야만 되는 거냐?

나는 왜 기도하고 싶으면 잠이 오느냐?

왜 나는 꼭 성경을 펴서 읽으면 잠이 오느냐?

그런 것이 어떤 마귀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예배드리러 와서 잠자는 사람이 잠자는 마귀가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조는 마귀도 아니고,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지요?

물론 습관적으로 생길 수도 있어요 습관적인 것도 육체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육체를 잘 돌보아야 됩니다 잠을 많이 자야 되고.

지난 금요일도 저희 교회에서 9시부터 11시까지 기도회가 있었는데 제가 낮에 계속 다니고 좀 피곤했거든요 9시까지는 한 시간쯤 남아 있어요

9시에 가서 기도할 때 잠이 오면 어떻게 할까?

그래서 잠을 좀 자고 가야지 하고 잠을 자려고 잠을 청하는데도 잠이 제대로 들지 않고 잠이 들라 말라 하다가 시간이 되어서 일어나 갔는데요

왜 제가 미리 자려고 하느냐 하면 잠을 미리 좀 자고 기도시간에 가면 좋은데 안자고 철야기도를 하려니까 밤에 힘들지요

그 잠을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 사이에 끼어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다각도로 잘 생각하셔서 아주 편안하게 잘 생각하시고 실제로 사단과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기고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도록 노력하시고 그 중에 내 몸 때문에, 몸이라는 말만 자꾸 씁니다마는 또는 자연환경 때문에, 날씨가 굉장히 더우면 같이 힘들고 너무 추워도 기도가 안 될 수도 있고 이 사회가 전부 날 괴롭히면 막 짜증스럽고 그럴 수 있지요

그런 것은 이 사회, 자연계가 변화되기 전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그냥 지나가야 되지요

제가 싱가폴에 해마다 갔습니다마는 그 나라는 적도지요

그래서 일 년 사시사철 여름밖에 없습니다

봄도 없고 가을도 없고 겨울은 물론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있으면 하루 종일 더우니까 또 샤워하고 또 샤워하고 짜증스러운 나라지요

그래서 그런 나라 사람들은 게을러요 게으르고 부지런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지요

그건 자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게으르다고 해서 죄가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런 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극히 자연스럽게 현재 미완성 단계에 있는 천국 자체가 두 사이에 끼어 있어서 갖는 갈등이기 때문에 고통을 그냥 받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죄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구속의 날을 기다리면 되겠지요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살면서 승리한다 라는 고백이 25절에도 나오고 8장에도 나옵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도 나오고요 자기가 결국은 승리의 삶을 살지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 사도가 몸도 안 아팠느냐?

바울 사도에게도 사단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뭐가 있었지요?

이것이 내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답답하니까 세 번씩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괜찮다고 갖고 있으라고 해서 그냥 갖고 있었고, 바울도 몸이 아주 약하고, 눈이 나쁘고 그래서 항상 남이 내 편지를 써줘야 되고 끝에 가서만 내가 친필로 쓰노니 하고 큰 글자로 쓰지요 눈이 나쁘니까 큰 글자로 쓰고 어렵게 살았지요

그리고 굶주리기도 하고 박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몸이라면 굶어도 괜찮고 매를 맞아도 괜찮은데 그런 몸이 아니고 현재의 몸이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힘들고 풍랑에 휩쓸려도 상당히 괴롭고 잠을 못 자서도 괴롭고 그런 고통을 바울도 엄청나게 많이 받았지요?

그런 고통이 올 때 ‘아, 나는 고통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참 고통스럽지요 그래서 빨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좋지만 여러분들을 위해서 내가 더 있는 것이 유익하다 이렇게 고백하는 바울의 말이 지상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편안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괴로운 것이지요 그 괴로움을 이기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이거지요

그 괴로움은 달게 받고, 인내하고, 부활의 날을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까지 말씀드리고 기도하고 그 후에 질문받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주님이 창조하신 그 피조세계 한 부분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이 피조세계에서 그것도 우리보다도 더 날씨가 덥고 불편한 그런 나라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주님도 비천한 생활을 하셨고 주님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로마 식민지하에서 자기 나라 지도자들이 자기 국민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그런 속에서 사셨고 주님께서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장자로써 동생들을 거느리며 어머니를 모시는 그러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머리 둘 곳이 없는 생활도 하셨고 많은 고난을 겪으시면서 불편한 여행, 많은 길을 걸으면서도 늘 참고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또 주님께서도 많은 시험을 받으셨고 계속 사단이 예수님을 괴롭히려고 애를 쓰고 또 종교지도자들이 계속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질문을 하고 따라오는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해서 엉뚱한 발상을 하고 다투고, 오해를 하고, 가서 외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그런 일들을 늘 접하면서도 주님은 묵묵히 3, 4년간의 생애를 잘 보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육체적으로는 겪으실 고난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 쓰라린 십자가까지 다 지셨고 그러나 부활하실 때 주님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시고 이제는 이 자연계와 이 지상에서 그 모든 것에서 초월하신 그러한 하늘에 속한 몸을 입으신 그 사실을 저희들이 생각하면 참으로 우리도 부활의 날을 사모하고 고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주님처럼 저희들도 고난을 견뎌야하고 인내해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두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저희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되지 아니하고 소망가운데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받으신 그 영광스러운 부활이 우리 앞에도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 몸은 죽이지만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함께 멸하실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때로는 우리 목숨을 빼앗길 위험이 올지도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는 심각해지는 사람이 자살할 만큼 자기의 목숨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일어나는데 저희들이 이 육체의 목숨 때문에 너무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언젠가는 이 육체의 몸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부활의 그 영광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고, 죽음이 다가올 때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망가운데서 기쁘게 그것을 지나갈 수 있는 믿음을 저희들에게도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갖는 많은 고난 속에서 짜증내지 않게 하시고, 내 약한 부분 때문에 갈등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내 어떤 부분을 죄악시 하지 않게 하시고, 또 그렇게 잘하지 못하는 가족이나 형제나 친구들이나 성도들을 볼 때에 그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고, 지상의 교회와 지상의 성도들이 불완전한 것을 잘 깨달으면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돕고, 서로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언젠가는 그 영광의 날이 올 것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주님께 감사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주님! 그날까지 저희들을 계속 지켜주시고 굳게 세워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질문받겠습니다

질문1-고린도후서 5장 10절“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그 구절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도 주제별로 공부하신 분은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신 후에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가 선악 간에 행한 대로 체크를 받고 행한 대로 받을 것이다 라고 오해하시는 분이 많이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이 문맥에 따라 오기 때문에 그렇지요 10절 처음에 ‘이는’이라는 말은 앞에 문장하고 연결되지요?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왜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힘쓰느냐 라고 하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어느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행한 대로 갚음을 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냐? 부활의 몸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내가 이 육적 몸에서 벗어나고 싶다 덧입고 싶은데 바울처럼 몸에 거해야 되느냐 그 두 사이에 끼어서 갈등하고 있지요? 그런데 몸에 거할 때에든 아니든 나는 주를 기쁘시게 하겠다 지금 이 불편한 몸을 갖고 있더라도 참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겠다 왜? 그렇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하고 산대로 이 몸을 나중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 입니다

질문2-그런데 왜 선악 간에 라고 했나요?

-그러니까 이 몸에 거할 때에 짜증내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선이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악이지요

질문3-또 한 가지는 아까 자연계에서 어떤 갈등상황이 일어나는 것이 사람이 원죄에 빠지고 난 후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는데요

-처음에 자연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는 좋았지요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더라도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은 더웠을 것이고 물론 그러긴 하지만 이 자연계와 인간사이가 이렇게 나빠지고, 파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여러 가지 그런 문제들이 아마 타락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타락 이전의 부분은 사실 우리가 사실 좀 상상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성경구절에 설명이 좀 나와 있고 로마서 설명에도 나와 있기 때문에 그전에는 사람이 동물들을 잘 다스렸고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잘 들은 것 같아 보입니다

질문4-그런데 사람의 손이 미처 닿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그런 어떤 곤충계나 식물계나 동물계에 있어서도 야생동물들이 양육강식의 자기네 자체 내의 그런 것에 의해서 먹고 살고 이렇게 하는 그런 논리에 대해서는 사람이 거기에 개입하려는 생각이 없는..?

-하나님께서 이 자연계 전체를 그렇게 타락시킨 것이지요 타락시켰다는 말 자체가 도덕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타락을 시키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죄를 범하니까 하나님이 자연계 자체의 질서를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마치 갑자기 땅에서 가시가 나오고 엉겅퀴가 나오고 이렇게 하는 것처럼 이 자연계 자체가 갑자기 질서가 혼란해 지면서 동물도 그렇게,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마음이 어디서 갑자기 났느냐? 그냥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인간 자체가 그렇게 지배자가 없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남을 헤치는 존재로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어요? 동물계도 그렇게 하루아침에 본능적으로 악하게 되어 버린 거지요

질문5-그런데 식물들은 꼭 다른 식물을 없애거나 약탈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자체 내에서 그런 숙명적인 자연계의 질서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데 단지 우리가 약탈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정한 육식 동물에서만 보여 지는 것 아닌가요?

-글쎄, 그건 제가 생물학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 서로가 물고 뜯고 하는 건 아니지요 조화도 남아있고 아직도 질서는 어느 정도 남아 있지요 마치 믿지 않는 이 사회가 굉장히 반항적인 사회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 7

기도하겠습니다

위대한 나라를 세워 가시는 위대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극히 못난 저희들을 훌륭한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놀랍게 설계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지금도 쉬지 않고 저희들을 양육하고 계시고 또한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저희들이 너무나 못 알아드리고 하나님의 그 수고와 노력과 그 간절한 소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내 소원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쉽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참으로 저희들은 내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되기를 너무나도 원했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참 편안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참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저희들이 이 어리석은 땅에 속한 자의 생각을 버릴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 백성이 되었다면 내 생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신 하나님의 그 생각을 배워가며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에 내 생애를 전폭적으로 맡길 수 있는 그런 참된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 끌어내리려는 바보짓을 하지 않도록 저희들을 하나님 새롭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하시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은 자로써 항상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좋은 국민이 되려고 날마다 소원하며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오셔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조명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인도를 받는 자가 되도록 하나님, 특별히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질문도 하는데 왜? 대답하시지요?

그리고 니고데모가 말하는 내용하고 예수님이 대답하고 무슨 연결이 있습니까?

그러면 니고데모의 말한 내용은 뭘까요?

여기 예수님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 앞에 나온 내용자체가 질문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 않지만 사실은 질문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으니까.

물론 기록하기는 간단하게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아마 이보다 훨씬 더 길게 한 시간쯤 이야기를 하셨을지 모르지요

이렇게만 말하면 일분 밖에 안 걸리는데 일분의 대화는 아니고 아마 30분 내지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의 대화였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그 많은 내용을 압축해서 요한 사도가 성경에 일일이 다 기록하면 너무 분량이 많기 때문에 요점만 기록한 것 같아 보입니다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압니다’ 그럼 뭐 끝났지요 사실은.

아는데 뭐가 문제냐?

그 말자체가 그런데 ‘확실합니까? 아닙니까?’ 라는 질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신이 이때까지 행하시는 모든 표적을 가만히 보니까 사람이 행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님 같은데 맞습니까? 그런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여기에 설명되지 않은 딴 궁금증이 같이 따라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렇다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건 무슨 대답일까요? 앞의 질문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말은 이 땅의 차원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하게 그런 말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 성령님 이런 말들을 우리가 흔히 쉽게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런 여러 가지 부분들은 보통사람으로써는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사람이 거듭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첫 창조된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것은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 주가 붙어 있지요?

뭐라고 주가 붙어있습니까? ‘위에서’ 라고 번역되어 있지요 ‘아노센’ 이라는 낱말입니다 위에서 라는 부사가 붙어 있습니다

성경에 중생이라는 낱말이 여러 곳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데요

어떤 낱말은 ‘난다’ 라는 동사의 접두어가 붙기도 하고 또는 부사가 붙기도 하고 해서 ‘다시 난다’ 또는 ‘반복해서 난다’ ‘새로 난다’ 그런 낱말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이 낱말은 새로, 다시, 거듭 그런 낱말이 아니고 ‘위’에서 라는 낱말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번역해서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번역할 때 번역하시는 분들이 충분히 이해가 안 되었는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번역하면 실제로 해석에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번역하면 훨씬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바로 그 ‘위, 아래’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한 책자가 네 권이지요?

네 복음서인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한 책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한 책입니다

마가복음은 종으로, 마태복음은 왕으로, 누가복음은 사람의 아들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한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내용 전체가 딴 차원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으면 계속해서 왕권에 대한, 왕의 능력, 왕이 병도 고치고 사람들 구원해 내고, 그런 부분이 많이 나오고 있고, 마가복음에는 섬기러 오신 분의 모습이 조금 더 강조되어 있고, 누가복음은 사람의 어떤 모습이 많이 설명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은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모습이 많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다르게 말하면 ‘위에서 오신 분’입니다

뒤에 가면 나올테니까 조금 더 읽어 내려가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즉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람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땅에 소속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아직도 땅에 속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납니까 라는 질문이지요?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두 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길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때 하늘에서 한번 나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자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3절, 5절에서 아멘 아멘 하는거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언제든지 중요한 대목이 나올 때지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같은 뜻으로 일단 보시는 것이 문맥상 좋지요?

다시 6절~7절에 해석이 나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내가 네게 위에서 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말자체가 으로 난 것을 첫 창조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에서 난 사람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이 상태를 ‘육’으로 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시 그리스도 에서 새로운 지음 받는 사람은 에서 난 자라고 말하고 이것을 으로 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났다는 말과 성령으로 났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로마서에서도 육과 영이 대조적으로 나오는데 거기 영이라는 말은 거의 성령님이라는 뜻으로 로마서에서도 쓰이고 있고요

물론 꼭 성령님에게만 국한되어서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성령님에 의해서 영에 속한 자로 새로 태어난 우리도 영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꼭 성령님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가 재창조되었을 때 성령님과 연관되어진 상태에서 재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에 속한 우리를 우리도 영이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내적인 부분도 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 영에 대한 부분은 오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깊은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마는 지금 시중에 상당히 많이 영과 육에 대한 설명들이 나오는데 오해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좋으면서도 아쉬운 점은 신학교라든지 이런 기성교회가 아니고 교회밖에 있는 단체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많이 개발해 내고 있는데 그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굉장히 교회에 도움도 주고 교회가 미처 하지 않은 부분을 많이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약점이 있는 것은 신학적인 기초가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단체들에서 개발한 부분은 항상 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점검되어져서 걸러져 나오지 않으면 상당히 신학적인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전도 이론도 마찬가지고, 제자 훈련 이론도 마찬가지고 대개 지금 시중에서 행해지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원래 의도와 기본적인 어떤 부분은 다 동의할 수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상당한 결함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수정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 영이라는 말도 쉽게들 많이 해요

그래서 영으로 나야 된다, 영성이 맑다, 영성 운동, 이런 말들을 굉장히 많이 하고 금식을 하고 나면 영이 맑아진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 데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저는 이해를 못합니다

영이라는 것이 그런 무엇이 아니지요

정신이 맑다는 말이 영이 맑다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되지요?

금식하고 나면 정신이 좀 맑을 수 있겠지요 왜요?

밥을 많이 먹으면 육체가 둔해지니까 뇌 작용이 좀 피곤하고 그래서 잠이 오고하는데 밥을 먹지 않고 굶으면 정신이 좀 맑아질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도 어느 한도가 있지 지나쳐버리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혼미한 상태에 들어가서 실제로 나중에는 헛소리를 하게 되고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영이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적당히 해석해 버리기 때문에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시중에 나오는 책 중에서도 웟치만 니가 쓴‘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은 될 수 있으면 보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좋은 점도 많이 있는데‘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은 우리에게 굉장히 혼란을 가져다주는 책입니다

특별히 이 영에 대한 부분은 최근에 신학자들이 많이 개발하고 있고 앞으로 책자를 볼 기회가 서서히 올 것 같습니다

지금 물론 번역된 책도 한두 권 나와 있고, 영어로 된 것도 조금씩 보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아마 여러분에게 접할 기회가 올 것 같은데요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뚜렷하게 영과 육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면서 첫 창조 재창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차례 이 챠트를 그려드렸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헬라어까지도 써드린 것 같은데요

우리말 영어 헬라말(한글표기식)
영(靈)
혼(魂)
육(肉)
Spirit
Soul
Flesh
Body
프뉴마
프슈케
사륵스
소마

다시 이 본문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나야된다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한다’

또는 ‘영으로, 위로부터 태어나야한다’라는 말씀을 조금 더 정리합시다

요한복음 1장 33절~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세례 요한이 처음부터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세례요한이 물을 줄 때에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내려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분이 바로 메시아 이다’ 라고 하나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세례를 주면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실제로 성령님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 저 분이 그리스도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쉽게 성령 세례를 받았다 저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이것도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리적인 연구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저도 좀 더 시간을 두고 봐야 되겠는 데요

우리가 성령 세례를 받는다 라는 말을 할 때 사람에게만 연결 짓지만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 라는 표현이 일차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말도 이해하기 더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일단 그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실제로 성령님이 내려오셨으니까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라는 말은 중생과만 연결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아직 꼭 그렇게 단언해야 되는지는 자신이 없는 데요

일단 여러분에게 아이디어를 드리고 또 숙제를 드리면서 그 이야기는 지나가겠습니다

여기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가 계시다 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는 데요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는 말이 마태복음 3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요?

마태복음 3장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실은 성령 세례를 먼저 받고 물세례를 뒤에 받습니다

물론 물세례를 줄 때 잘 확인하지 않고 주면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물세례를 주기도 하지만 원리대로 하자면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표시로써 물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물을 줄 때는 아직 그렇게 된 것 같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가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주실 성령 세례를 유도하는 것처럼 앞서 와서 길을 예비하는 자의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부분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성령론에 대해서는 연구가 너무나 안 되어 있기 때문에 궁금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가지 언급하는 부분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들으시고 또 과제로 남기시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세례 요한이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줄 때는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 때 성령님이 내려오셨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준 딴 사람들은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이지요

거기서도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님과 비슷해지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일단 오신 이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 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그 사건도 물론 성령 세례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장 4,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2장 4절에 가면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는데 그것을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받은 그 성령님이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이건 학자들이 다 다르게 설명하는 부분도 많이 있는 데요

그 부분만은 제가 조금 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거기 성경에 분명히 나오기 때문에.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고 몇 날이 못 되어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을 성령 세례라고 표현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 세례와 다른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받는 성령 세례와 어떻게 관계가 되느냐 하는 부분도 생각해야 되겠는 데요

일단 그것은 과제로 남겨두고라도 지금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에 연결해서 예수님의 말씀이라든지 또는 마태복음,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실제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라고 하신 말씀은

성령님이 예수님을 지배하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성령님이 ‘사역’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시간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문제점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중간상태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시간의 측정이라고 할까요?

판단기준을 벗어나도록 여러분에게 독려를 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성령으로 태어나셨지요

그리고 그 전에도 예수님이 계속 성령님의 돌보심 속에서 30년간의 생애를 살았어야 당연해 보입니다 이것은.

그런데도 요한에게 물세례 받을 때 성령님이 임하셨다 라고 하면 그럼 그 전에는 성령님이 예수님에게 같이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이 그전에도 성령을 입고 있었고 성령님의 지배하에 있은 것은 사실이지 다시 뚜렷하게 상징적으로 세례 요한의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성령님이 임재하셨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장면이다

처음으로 성령님이 임하신 것이 아니고 성부 하나님이 바로 이 예수가 내가 보낸 아들이고 메시아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려고 확증적으로 성령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성령론만 나오면 좀 복잡하니까 제가 이것저것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더 혼란에 빠지지 마시고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어서 설명하는 것이니까 그냥 대충 알아듣고 지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성령님과의 관계가 있지만 그러나 세례 받으실 때 성령님이 내려오시면서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오셔서 구체적으로 지도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셔서 때로는 몰아가시기도 하시고 이렇게 해서 구원사역을 성취하도록 즉 완전한 100% 인간으로 와 계신 예수님, 으로 와 계신 예수님을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도록 지배하고 계신 그것을 분명히 하려고 성령 세례 장면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신 예수님께서 그 후에는 우리에게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령세례를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오순절 날에 처음으로 보내셨느냐?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이미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신앙고백도 했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그렇게도 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성령님은 그 전(前)에도 사역하셨고 또 성령님을 예수님이 보내신 것도 분명한데 그래도 오순절 날에 와서 드디어 성령세례를 받는 것처럼 또 표현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만 따지면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언제부터 성령세례가 있었다 라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어느 시점에 뚜렷하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에 뜨일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셨지요

그것이 예수님이 성령 세례를 받으실 때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오순절 날에는 크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과 그런 특이한 사건으로 성령님 오심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임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의 방법이지요

물론 오순절 이전과 이후에 성령님의 사역에 차이점이 있는 것은 또 신학적으로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실현되기 ‘이전’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성취된 ‘이후’와의 성령님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령님의 사역은 아직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사역을 배경으로 하고 그 구원사역 근거 위에서 어떤 구원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사건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아직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우리 시간세계로 볼 때 역시.

그러나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끝난 이후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하신 일을 끝내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님을 대신 보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라에, 하나님 나라에 왕이 되셔서 그 나라의 왕인 그리스도로부터 성령님이 파송 받아 오셔서 본격적인 무대 중앙에 나타나셔서 주연을 행하는 그런 모습이 오순절 사건이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의 성령님의 사역과 이후의 성령님의 사역은 또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인 데요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가 종합적으로 봐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이 도대체 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은 오늘 우리가 조금 많이 살피겠습니다마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강조했던 부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필수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과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이냐 라고 하면 소속의 변화입니다 거기 소속을 바꾸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지요?

소속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때는 이미 예수님 자기 것이라는 보증으로써 도장 찍듯이 성령님을 보내주신 그런 내용으로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선택을 한 것이 첫 번째 도장 찍은 것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체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선택한 사람 도장찍어 준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하시고 부활시키는 그 사건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싸인입니다

세 번째 성령님을 보내셔서 다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붙들고 끝까지 이 구원 사역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최종적인 사역이 등장합니다

이 성부, 성자, 성령님이 논리적으로 말하면 세 차례에 자기 것이라고 확증하는 이유들인데 그 중에 첫 번째 부분인 하나님의 선택의 부분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고 그 다음 창세전에, 영원세계 속에서 이미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라는 정도로 끝나야 되고요

그 다음 두 번째 사건인 그리스도께서 오신 사건은 우리로써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인 이천 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다 처리하셨고 위에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근거,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요

구원받은 백성을. 그것도 이천 년 전에 일어났는데 가시적으로 분명히 나타났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이천 년 전이니까 우리하고는 시간적으로는 아주 상관없는 것처럼 먼 거리를 두고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성령님께서 오신 사건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 우리에게 오셔서 직접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성자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우리에게 연결지어주고 그 효력을, 선택과 구속의 사건을 우리에게 실제로 효과가 나도록 결과가 나도록 그렇게 사역하셔서 실제로 그 두 분의 사역이 우리 생애 속에 변화를 일으켜가는 그런 일을 행하시는 것을 성령님의 세 번째 보증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을 적용이라고 표현하지요

두 분의 했던 일이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결되어져서, 적용되어져서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입니다

그것을 성령님의 구원사역의 적용사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론에 가서 다시 이 부분을 조금 더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요

그래서 여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 또는 성령으로 나야된다 라는 말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내 구속사역이 그 사람에게, 너희에게 효과가 발생되어져서 너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써, 구원받은 백성으로써 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써 다시 새 출발을 해야 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었습니까?

영생이라는 말을 함께 설명합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소속이 새로 시작되면서 하나님에게 소속되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삶을 새로 시작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물론 그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냥 말하면 생명이라고 표현하면 되는 데요 하나님에게서 생명이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표현하지요?

하나님과 관계없이 일차 창조세계 속에 있는 것은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인생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영원히 살 수 없는 우리를 성령님이 오셔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그 구원 거기에 연결 지어서 다시 하나님에게 소속시킴으로 인해서, 수도로 말하자면 파이프가 다시 연결되어져서 물의 공급을 받는 것이고, 전기로 말해도 플러그에 꽂아서 다시 전기 공급을 받는 그러한 것을 거듭남이라, 위에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에게 다시 플러그를 꽂아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곳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소속이 되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선을 행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뒤에 가면 바울 사도의 설명 중에서는 다분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하고 이해가 잘 안 되면 ‘믿음’이란 말에 큰 오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 설명합니다

그 부분은 구원론에서 제가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요

일단 오늘은 이쪽에만 설명드리겠습니다

디도서 3장 5절~7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 말이 나옵니다

거기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런 일을 통해서 하시는데 이것을 씻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요

이것은 죄 사함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은 첫 강좌에서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으라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그 회개라는 말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씻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있던 버린 자식 또는 거역한 반역한 상태에 있는 삶 전체를 용서받는다는 의미에서 씻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도덕적인 죄이기보다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내 자식이 딴 사람 밑에 가서 자식노릇하고 내 아내가 될 사람이 딴 사람을 섬기는 아내가 되어 있거나 내 나라 백성이 딴 나라를 섬기고 있거나 하는 그러한 잘못을 용서하는 의미에서 소속을 바꿀 때 일어나는 용서, 씻음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말을 세례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물이라고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라는 그 물이라는 말은 세례라는 의미와 관계가 있고, 씻음과도 관계가 있는 데요 두 가지 해석이 있지요?

물이라는 말이 ‘말씀’으로도 해석하고 ‘세례’로도 해석하는데 같은 것입니다

씻음이라는 의미로 보면 세례라고 표현하면 되고요

그 세례는 실제로 무엇으로 씻는다는 말이냐?

말씀으로 씻음 받는 즉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것이지요

말씀으로 새로워진다는 말 자체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뜻을 발표한 것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요한복음 1장 이하에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러 오신 분, 계시자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또한 말씀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나오셔서 집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말씀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 또 성령님이 그 말씀을 우리에게 조명해 주셔서 즉 성경말씀을 통해서 즉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비로운 사역을 깨닫고

내 소속을... “아, 바꾸어야 하는구나”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꾸어 주시는 구나”

“아,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잘못된 곳에 와있구나”

“내가 저쪽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주셔서 깨닫고 소속을 바꾸어 가도록 인도할 그 자체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잘 인식이 안 되어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깊이는 설명하지 않더라고 여러분이 좀 인식하시면 좋겠습니다

즉 우리가 거듭난다, 중생한다, 위에서부터 난다 라고 표현할 때 뭐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그냥 느낌으로 ‘아, 나는 중생된 것 같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또 성령님이 나를 중생시키지 않느냐 라고 해서 성령님이 나도 모르게 어떻게 신비롭게 바꾸어 놓았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로써는 인식하기 힘들지요 그렇지요?

성부와 성자의 사역은 인식 못할 부분도 있고 옛날 사건이기도 하지만 성령님은 현재 내게 오셔서 사역하시기 때문에 내게 오셔서 성령님이 사역하시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있어야 되지 전혀 인식이 안 되면 글쎄,

‘성령님이 나를 거듭나게 하신다 뭐 어떻게 하는 것이냐?’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우리가 상당히 모호해 지지요

그러나 실제로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사역하시는 여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라고 하면

말씀을 나에게 들려주시고

말씀을 이해도 시켜주시고

말씀을 나에게 조명해서

‘아, 이렇게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이렇게 이렇게 예수님이 구속하시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를 하나님 나라로 옮겨 주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도우셔서 그것이 깨달아지고 있는 그 자체가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없는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상당히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물론 인식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문제는 더 확대되기는 해야 되겠지요

어린 아이는 그런 인식을 못하는 채로 성령님에 의해서 새로 태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본인이 의식이 없으면 물론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아이의 경우는 사실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자아의식이 생긴 이후부터는, 내 자각이 있는 이후부터는 내 자각을 따라서 인식하고, 복음을 받고, 믿고, 구원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믿는다 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내용을, 내 변화에 일어나는 내용을 말씀을 통해서 인식이 가능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사역은 말씀의 사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밑에 가면 조금 더 나올 것이니까 지나갑시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기 말씀은 ‘로고스’라는 낱말입니다

아래 25절에 나오는 말씀은 ‘레마’라는 낱말인데요

레마와 로고스가 또 어떻게 다르냐 하는 부분은 오늘 설명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23절에 나오는 것은 로고스라는 말인 데요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런 말이 있지요?

여기 거듭난 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썩어질 씨도 아니고 새로운 종자인데 그 새로운 종자는 말씀을 통한 새로운 종자가 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어서 성령으로 다시 나야 된다 하는 말과 말씀으로 다시 나야 된다 라는 말은 거의 같은 의미입니다

그 말씀자체가 성령님의 사역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설명 드리고 또 넘어가겠습니다

같은 요한복음 3장 3절~7절에서 살필 두 번째 부분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된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다른 성경구절과 대조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5절~9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말이 이렇게 저렇게 자꾸 바뀌는데 같은 것입니다

영이라는 말은 성령님을 가리키고 이것을 하나님의 영이라고도 표현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표현하고 있고, 그 성령님이 내 안에 와 계심은 내 영이라는 말과도 어떤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영에 속한 사람이다, 요즈음 ‘영성운동’이라는 말을 만일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 영이 맑아진다는 말을 제가 이상하다고 말했는데 사실 이상한 표현인데 만일 그 말을 억지로 끼어 맞춘다면 성령님이 오셔서 나에게 말씀을 잘 깨닫게 도와주시는 그 자체가 즉 성경이 잘 깨달아지도록 돕는 그 자체가 영이 맑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8장 12절~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거기에 아주 분명히 나오지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 아래 15절~16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거기에 성령님과 우리 영이라는 말이 따로 나오지요?

‘성령님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라고 해서 내 영, 성령님 이렇게 따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구절을 잘 연구하지 않으면 내 안에도 영이 있고 성령님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요

그러나 그 구절을 뒷받침할만한 구절이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 영으로 더불어’라는 말이 실제로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내 자체를 표현하는 그런 것으로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영혼 아닌  어떤 영이라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기 보다는 내 영혼이나 몸이나 할 것 없이 통틀어서 ‘나’라는 존재가 성령을 받고 성령님의 지배하에 있을 때, 소속되어 있을 때 그것을 내 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묶어서요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라는 말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걸 Lord ship 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Lord ship 이라고 할 때 주님이 Lord가 된다 라고 하면

제2위 되신 그리스도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보다 우선적으로 성부 하나님이 나의 Lord가 되시고

그리고 성령님도 나의 주가 되십니다

즉 성령님이 나의 ‘상전’도 되시고 ‘왕’도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떻게 되었건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를 받고 있는 상태를 물과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말은 사실 쉬운데 이렇게 복잡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냐?

즉 하나님의 지배를 잘 받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잘 받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싫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지요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려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용의가 있느냐?

그 말과 마찬가진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어떻게 받느냐?

물론 하나님이 직접 다스린다고 표현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마는 그래도 성부, 성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 쉽게 성령님을 보내줄 것이니까 너희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으면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해서 우리가 훨씬 더 가깝게 성령님이 오셔서 사역하는 그런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여기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가 자기 백성에게 찾아 오셨는데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즉 자기 백성을 구출하러 오신, 이 세상에 자기 백성을 구출하러 오신 그 왕을 받아들이고 모셔 들이고 “예”하고 그 왕에게 복종하겠다고 따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렇게 되는 길이 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육정으로 즉 육의 생각으로 또는 육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의 주제가 계속 나오지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위에서 난 자들이니라’ 하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체가 소속에 대한 문제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 때문에 제가 보충해서 여기에 언급한 겁니다

이 구절을 살펴서 앞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종합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 구절 주의하셔야 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일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데, 어떻게 가르치시느냐 라고 하면 예수님이 설명하셨던 내용을 다시 기억나게 해서 이해시키는 그런 일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의 범주 안에서 행해집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다시 성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씀의 범주 안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결국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신 범주 내에서 이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것을 더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 안에서 사역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5장 26절~27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여기는 성령님이 역시 진리의 영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서 앞에와 똑같은 일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는데 그 말을 다시 여기에 표현하기를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라고 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느냐?

물론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르쳐준다고 해도 되지만 다시 핵심을 말하라고 하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시는 일을 합니다

16장 7절~8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하는 일이 세 가지 나옵니다) 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 책망한다는 말은 ‘확인한다’라는 뜻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컨폼(confirm)이라는 낱말인데 또는 컨비트 ‘확신시켜준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데요 책망한다 라는 말은 잘못을 지적해 주면서 바르게 깨닫게 한다 이런 뜻으로 이해합시다

그런데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죄에 대하여 심판한다 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건 이해가 되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은 것을 나중에 성령님이 오셔서 왜 그렇게 안 했느냐 그건 너희들이 잘못이다 이 분이 바로 메시아가 맞다 이 분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하신다 이 말이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일이지요?

두 번째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이 구절은 설명하지 않으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지금 이것이 옳은 길이다

저것은 불의하고 이것이 의다 라고 성령님이 보여 주시는데 무엇이냐 라고 하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는 말이 있지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지금은 나를 믿지 않지만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나면 너희들이 나를 믿을 것이다 또 내가 들리면 그때는 너희들이 믿을 것이다 그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그 말은 내가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왕권을 장악하게 되면 그때에야 너희들이 아, 그 분이 맞았구나 하는 것을 그때 깨달을 것이다

그런 표현이 요한복음에 계속 나왔기 때문에 여기 의에 대하여 증거한다, 확증한다, 책망한다 라는 말은 이 당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꾸만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님이 오셔서 그 보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느냐?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느냐?

그 분이 하나님께서 오신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다

너희들이 이때까지 아니하고 하지 않았느냐?

땅에서 난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실은 그렇지 않고 아버지에게서 내려오신,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시다 다시 올라가지 않았느냐?

그렇게 성령님이 나중에 확인시켜 주시면서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책망한다 이 말입니다

이것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지요

세 번째는“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그 말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심판받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 것이 확인되기 전에는 심판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메시아였다, 그리스도였다 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십시오 하고 처형한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죽였으니까 심판받아야 되지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이 드러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제대로 확인되어질 것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주신 말씀 같습니다

물론 더 연구할 부분이 남아 있지만요 그 다음 계속해서 봅니다

12절~13절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 말은 지금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너희들이 잘 못 알아듣는다

부활을 말해도 못 알아듣고 하나님 나라를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

이다음에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해주는 것뿐이다 내게 들은 것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 말이지요

14절~15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결국 예수님이 하셨던 말을 성령님이 오셔서 다시 보완하거나 보충하거나 해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을 도와주는 그런 구실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나야한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 라는 그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말에 앞부분에는 소속의 부분을 설명 했는데요 뒷부분에 와서는 성령님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로 받아 들이겠끔 하는 그 사역이 바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사역입니다

해설에 1번은 설명이 다 되었는데요

2번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해 주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주되심을 확증해 주십니다

거기에 성경을 통하여 라는 말을 앞에서부터 지금 계속해 왔지요?

성경을 떠나서 성령님은 사역하시지 않고 1번 끝에 있는 말씀처럼 성경말씀 안에서 성령님은 일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라는 부분은

성경말씀이 나에게 분명하게 이해가 되고,

성경말씀이 더 잘 믿어지고

전에 몰랐던 부분이 성경말씀 안에서 더 잘 깨달아져서

특별히 그리스도가 누구인지가 확인되어지면

'아,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게 인식되어지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왕으로 잘 모시고 따라다니는 그런 삶으로 변화가 일어나면 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운동은 상당히 문제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았다 뭘보고 아느냐? 방언을 하고, 뜨겁고, 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가 성령을 받았다 무얼보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더 확인되어 지더라!

성경말씀이 더 확실하게 나에게 깨달아지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성령받은 사람이지요

이 성령론에서는 성경의 논리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에 특별히 성령님의 사역은 요한복음 외에는 별로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잘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이 부분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제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제목은,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옵시고 당신의 뜻이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귀에 좀 어색할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표준역에서 제가 옮긴 것입니다

우리 개역에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옵시고 당신의 뜻,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번역하면 좀 더 쉽겠지요?

마태복음 6장,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인 데요 너무나 익숙한 구절이니까 자세한 말씀은 드리지 않고 조금 확인만 하십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방인들과 같이 자꾸 엉뚱한 기도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말고 기도를 이렇게 올바르게 하라 라는 말인 데요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다른 기도가 따라 나오는데요 앞에 것이 이해되어야만 뒤에 부분도 이해가 되겠습니다

앞에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미래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적인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이 빨리 재림 하십시오 라는 말이 내포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 나라와 나와의 관계가 먼저 확정되어져야만, 확립되어져야만 예수님의 재림이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냥 ‘재림 하십시오’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말은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 속에 들어 오십시오 라는 말이고 거꾸로 말하면 제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오늘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의미입니다

주기도문 할 때 잘 하셔야 됩니다

재림을 빨리 하십시오 라고만 이해하시지 말고 오늘 하루도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을 오늘도 확인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잘 받게 하십시오

그 말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즉 내 오늘의 삶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시옵소서 그 말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것을 천국이라고,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 그 끝 부분에 13절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데요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권력이나 영광이나 명예가 전부 하나님에게 귀속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광도 하나님이 받으셔야 되고 권력도 하나님이 장악하셔야 되고 명예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늘 암송하면서도 내 영광을 구하고, 내 명예를 추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영광을 잘 안 챙겨주시고 그러면 화가 나고 하나님 도대체 뭘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굉장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전부가 자기 위주의 생각을 많이 하고 자기 좋도록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심부름 다 해 주시고 또 이 다음에 죽으면 날 천당에 잘 데려가서 좋은 맨션 하나 주셔야 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이기적이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내 나라지요 자기 나라입니다

그렇게 내 나라가 더 커야 되고 영광스러워야 되니까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고 이 현세에서는 물론이지만 내세에까지도 가서 내 집이 더 커야 되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하고 아무 관계없는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나라지요

그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에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을 우리가 굉장히 가볍게 생각하는데 절대로 가볍게 처리하면 안 됩니다

구원론에서 다시 설명합시다

세 번째,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그것만이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 뜻이 어떻게 실현되느냐 하면 그 백성에게 일차적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릅니까?

그런데 우리 한국 신자들은 참 재주가 좋아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 뜻대로 되게 해 주십시오

그 말은 내 뜻대로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과 똑같이 써먹으니까 그렇지요

왜? 내 뜻은 내가 잘 아니까.

그래서 내 뜻대로 기도를 다 하고 하나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내가 지금 다 한 이것이 제발 하나님 뜻하고 꼭 일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제가 잘 모르겠는데 내 마음대로 하나님도 좀 따라오셔서 이거 그냥 그대로 액면대로 받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 안하려면 또 교회에서 하나님 뜻대로 기도해야 된다는 말은 들었고 하나님 뜻은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내 마음대로 기도 다 하고 나서 설마 비슷하게 맞겠지 내가 잘 되는 것도 하나님이 잘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취직 잘 되는 것 하나님 좋지 뭐 손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 백성이 훌륭해지는 것 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스럽습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 실속 다 차리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내게 영광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잘 안되어야만 내게 영광이다 라는 표현이 많지요

이건 우리가 성경을 잘 배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뜻을 잘 분별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시집 온 아내가 우리 신랑은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우리 신랑은 어떤 취미가 있는가? 그런 것을 좀 알아볼 관심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자꾸 눈치를 보고 이렇게 해서 음식을 마련해 놓고 어느 것을 즐겨 먹는가 유심히 보고는 또 물어보고 해서, 확인해서 음식을 남편의 입에 맞도록 만들어 주려고 애를 쓰지요

그런데 어떤 부인은 아마 그렇게 안 할꺼에요

요즈음 뭐, 남녀평등 시대인데 내 입맛대로 다 만들어 놓고 ‘이거 참 맛있지요’ 먹어보라고 ‘맛없다’고 그러면 당신 ‘이거 먹어보라’고 계속해서 ‘먹어보라’고 ‘이거 맛이 있다’고 당신 입이 문제가 있는데 ‘잘 먹어 보라’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끼리는 뭐, 사실 남녀평등이니까 그렇게 해서 잘못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내 입맛대로 다 하고는 하나님이 좀 나를 이해해주고 이렇게 좀 따라오면 되지 뭐 그렇게 복잡하냐 라는 생각을 하는 그것이 참 문제입니다

좋은 아내라면 사실은 자기 희생적으로 물론 남편도 마찬가지지만 자기희생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상대방이 즐거워할 수 있는 쪽으로 내가 따라가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면 당연히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건 알려고 노력해야 되고 알려고 노력만 하면 일 년만 지나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남편과 일 년을 살고도 아직도 남편의 식성도 모른다 그건 어디에 문제가 좀 있을 꺼예요

하나님을 일 년 정도 섬겼는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성격이 어떠신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취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은 돈을 더 좋아 하던가, 집을 더 좋아 하던가, 내가 어떻게 봉사하는 걸 하나님이 더 좋아 하시던가 그건 난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그냥 무작정 헌금만 자꾸 갖다 내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월급만 아내에게 계속 갖다 주면서 돈 많이 벌어주니까 되었지 않느냐?

아마 일 년 후에 아내가 이혼하지고 그럴 꺼에요 돈만 갖다 주면...

나는 당신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시집왔지 돈 받으러 왔느냐고...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이 없다면 이건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참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물론 교육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인지 우리가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걸 모르니까 마음은 있어도 못 했을지는 모르지요

그건 참 다행인데 마음 자체도 그렇게 안 되어 있는 사람은 아직 구원 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이 나는 하나님을 좀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다

하나님에 대해서 좀 관심이 있다 라고 한다면 방법을 배우셔야 되겠지요

로마서 12장 2절 봅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거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자체가 딱 내 손에 주어지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 하나님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 그냥 이거다 그러면 쉬운데 왜 분별하라고 하십니까?”

그 말은 우리를 하나님이 훌륭한 자녀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로보트로 만드시면 분별할 필요도 없지요

그냥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그러면 간단한데 하나님이 재미가 없으시지요

우리가 스스로 알아가기를 원하시지요

남편이 일일이 “여보, 나는 무엇을 좋아해요 무엇을 좋아해요” 밤낮 이렇게 말하면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래도 조금 어떤 것은 말 안해도 눈치를 좀 보고 싸인만 해도 좀 알아채야지요

항상,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서 지금 기분이 좀 나쁘다 그걸 꼭 이야기해야 됩니까?

시무룩하게 들어오면 아, 기분이 나쁘구나 알아야 되지... ‘당신 어때요?’ 그럼 눈치보고 좀 알아줘야 되지 반대로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 여자가 기분이 좀 안 좋으면 ‘아, 오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이렇게 알아줘야지. ‘왜 아무 말도 안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지금 말할 심정이 아니지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인격자라면 적어도 하나님을 내 스스로가 좀 생각해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뜻을 알아낼 노력을 해야 되지...

“하나님, 그거 복잡합니다 항상 단답을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내 스스로 나를 저급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나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잘 알 수 있지 않느냐? 노력해 보아라 이렇게 하면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 뜻을 알도록 그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2절에 해야 될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것이 첫 번째 주의 사항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만 해도 50점은 올라갑니다

대개 하나님의 뜻을 왜 잘 못 알아차리느냐 하면 이 세대하고 자꾸 비슷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요

아마 하나님도 돈을 좋아하실 꺼야 그건 처음부터 미스테이크입니다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집을 좋아하실 꺼야 라고 다윗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는 왕이 되고 싶다 라고 했지요

나는 집이 필요하지 않다 라고 했어요 다윗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이유는 내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지 집이 하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사무엘하 7장에서는 깨달은 것같아 보였는데 뒤에 가서 솔로몬에게 성전 짓는 일을 잔뜩 준비시켜 주는 것을 보면 아직도 좀 덜 깨달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 세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하고 반대쪽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참 이상하지만 꼭 생각하셔야 됩니다

왜? 이 세상 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반대쪽으로 사단이 좋아하는 쪽으로 거의 우리가 훈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 아닐 것이다” 라고 처음부터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서양 문화에 대해서 어느정도 익숙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도 외국에 몇 번만 다녀왔는데 익숙하지 않아도 그래도 가만히 보면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과도 아주 차이가 많이 있어요

말을 완전히 반대로 하고 식사할 때 스프를 주면 우리는 앞으로 기울여서 먹어야 되는데 이 사람들은 저쪽으로 기울여서 먹지요?

수저질하는 것도 다르고 셈할 때도 우리는 이렇게 셈 하는데 저 사람들은 거꾸로 하지요? 우리하고 반대로 해요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반대로 합니다

지상에 사는 인간끼리도 떨어져있으면 문화가 차이가 있어요

참 이상할 만큼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개를 보고 이렇게 오라고 하지요?

사람을 이렇게 부르면 실례입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은 사람을 이렇게 부릅니다

아마 개는 반대로 부르는 가봐요 어떻게 부르는지.

하여튼 다른 것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하나님은 또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와 굉장히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콜레 박사 같은 사람이 쓴 책을 자꾸 비판하는 이유가 너무나 이 세상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생각하고는 너무나 다른 생각을 많이 해요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딴 차원에서 인식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과 반대쪽으로 많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직장에 다니지요?

내가 직장을 좀 옮겨야 되겠는데 어디로 옮길까? 그러면...

이 세대 사람들은 월급 많이 주는 곳, 일이 좀 수월한 곳, 보너스 많이 주는데 등등 따지지요

그러면 아, 하나님 뜻은 그것과 반대인가보다

월급을 적게 주는데, 일자리가 불편한데... 잘 생각하십시오

이거 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자매들이 많이 있는데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왜 잘 안되는지 아십니까?

이 세대를 따라서 키가 몇 센티는 되어야 되고, 미남이라야 되고, 학벌이 어째야 되고, 집안이 어째야 되고, 그런 거 따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생각하는 사람을 잘 안 주시지요

그런데 말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 더구나 헌신된 사람을 찾는데 그건 앞에 내세우는 이유고 뒤에 헌신된 사람 중에서도 이 세대가 생각하는 비슷한 사람은 있고 밑에 그리고는 헌신된 사람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보여 줘도 그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다 아니고 하다가 나중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 내 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벌써 지나갔다”

물론 하기는 쉬운데

실제로 당면하면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이 나오는 데요

이 말은 중생이라는 말하고 다릅니다

중생된 자이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항상 마음을 딴 차원에서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태어난 자가 아래서 태어난 자처럼 늘 생각하면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 위에서 태어난 자이니까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는 모든 것이 항상 달라야 해요 반대로 생각해야 되요

그래서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면 나는 ‘아, 그거 안 가도록 해야지’ ‘그거 아닌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늘 좀 딴 쪽에서 서로 격려하고 성도들끼리도 만나서 이 세상을 따라 가려고 하면 붙들어서 ‘그쪽으로 가면 되느냐? 이쪽으로 가야지’ 이렇게 좀 도와줘야 되는데 어떤 때는 성도들끼리도 ‘얘, 너만 그렇게 별스럽게 믿느냐? 저쪽으로 가거라’ 그렇게 말하지요

저희들 성경 공부하는 모임에 어떤 주부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부모님들이 친정에서도 시집에서도 다 너만 별스러우냐

우리도 다 교회 중진인데 너만 이상한 하나님을 믿느냐?

그래서 자기가 꼭 정신 이상자인양 내가 뭘 잘못되었느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왜 나만 이상하게 믿지?

윤총무하고 나하고 뭐 좀 잘못 되었는가? 내가 잘못 배웠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도 성경 원리도 이야기 해보면 자기가 맞기는 맞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 다르니까 가끔 가다가 착각이 일어난다는 말을 듣는데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보십시다 1절부터 봅니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여기 ‘그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그 놀라운 계획을 말합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그 경륜입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즉 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그것을 깨달았지요?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바울이 아주 쉬운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사도다, 나는 계시를 받았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라는 말을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삼층천에도 가 보았다 이런 말을 했는데요(고후12장)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깨달은 비밀과 그 귀한 것을 너희도 내가 너희들에게 적어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말했기 때문에

바울만이 누리는 특권이냐 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즉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이란 사람을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를 받는 사람으로 쓰신 것뿐이니까

그의 글을 읽으면 즉 그가 쓴 에베소서, 로마서 등등 읽으면 알게 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훨씬 쉽지요

문자화 되어 있는 글을 읽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즉 성경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

아주 비밀에 속하는 구원 계획까지도 우리는 알 수 있어요

하물며 내 결혼 문제, 내 취직 문제 그런 사소한 문제야 물론 알 수 있어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지요

어마어마한 구원 계획은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내 주위에 일어날 일은 도저히 모르겠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뭘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해가 쉬운데

내 생애 일어나는 일은 왜 뜻을 분별하기 어려우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 세대 사람들이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대와 관계없지요

이 세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가지 않고 성경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해 가신다

그런 아무런 편견, 선입견 없이 배우니까 쉬운데

내게 일어날 문제는 항상 이 세대를 따라가면서 항상 생각해요

나도 이런 사람과 결혼해야지, 나도 이런 직장가야지, 그런 이 세대를 따라 하는 생각이 내 생활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 삶에 대한 부분만은 하나님 뜻을 거의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잘 분별하는데.(그래서 구원을 믿고 있는것을 굉장히 경계하신 윤종하 장로님의 강조점 아닌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편집자 주)

다섯 번째로, 성경묵상의 시간인 Quiet time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오늘 강조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공부하는 식으로 읽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자기 뜻을 보여 준다는 생각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좋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신다고 하시는가?

하나님이 현재 어떤 일을 해 가시면서 하나님의 기분이 어떤 상태에 와 있는가?

하나님의 일이 지금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고 하나님이 지금 일을 서두르고 계시는가?

일을 천천히 하시는가?

지금 다지고 계시는가?

어떻게 하시는가?

그 부분을 잘 보셔야 되고 동시에 그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도 하시지요

자기의 일도 보여 주시지만 나에게 지시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아, 예 알았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 제가 잘못했습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Quiet time의 핵심이지요

 

Quiet time 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강의를 듣고, 테이프도 듣고 했을 테니까 제가 긴 말씀드리지 않겠는 데요

Quiet time을 왜 꼭 해야 되느냐 하는 것만은 다시 확인하고 지나갑시다

성경 공부와 Quiet time은 똑같지 않습니다

성경 공부는 꼭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할수록 훨씬 좋지만

미처 못했거나 할 줄 몰라서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면 못해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데 Quiet time은  하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모르는 부분은 모르고 지나가도 좋아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요

박사가 되어도 다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때로 전문가들이 설명해 줄 기회가 올 때 그때 들으면 되는 것이니까 내가 스스로 공부해서 터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괜찮지만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생활해야 될까? 하는 것은 내가 알아내야 되지요

내가 그대로 행동해야 되니까 동시에 성경 공부에서 얻어질 어떤 큰 원리 같은 것은 내가 깨달아 가는 것이 어떤 때는 잘못할 수도 있고 불안할 가능성이 있어서 객관적으로 전문가들이 연구해서 설명하는 강의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안전하고 좋지만, 또 그들이 충분이 그렇게 해 줄 수 있지만 내 개인의 신상에 일어날 문제는 아무도 나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상담을 해도 안 되고 이건 길이 없어요

저도 상담을 자주 해 봤지만 본인이 Quiet time을 하고 오지 않으면 상담을 할 재간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그럼 대답이 간단하지요

'나는 하나님이 아니니까 모릅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물어보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잘못들었습니까, 아닙니까?"

그것은 내가 조금 검토해 볼 수 있지만 "이렇게 해야 됩니까, 저렇게 해야 됩니까?"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왜? 하나님이 사람마다 일정하게 지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선교사로 갈까요, 말까요?" 그건 어떻게 압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지요

누구에게는 선교사로 가라고 하고 누구에게는 가지 말라고 할 터이니까 그건 알 길이 없습니다

그건 개인이 주관적으로 각자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입니다

Quiet time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객관성이 있는 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똑같이 하면 따라가면 되는데 똑같지 않으니까 같은 성경을 읽고도 이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저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쉐어링(Sharing) 해 보면(나누어 보면) 많이 드러납니다

똑같은 구절을 읽고 서로가 다른 것을 생각해요

그것이 성령님이 나에게 말씀을 통해서 조명해 주시는 부분이고 그것은 내가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열왕기상을 읽고 놀랍게 적용한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가 굉장히 신이 나서 quiet time을 한 2년간 했는데도 전에는 평안한 삶 속에서 그냥 평범하게 하다가 말다가 그렇게 해서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분이 범양회사에 있는 이사예요

이 회사가 갑자기 문제가 생겼는데 다급한 문제도 있고 자기 문제도 있어서 quiet time을 하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자기 회사에 일어난 일과 비슷한 거에요

그래서 그 분이 말로는 하나님이 매일성경 날짜대로 따라오시더라 이거에요 물론 뒤집어서 말한 거지요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나님 스케줄대로 매일 성경 분문에 다행히 나왔다는 건데 그 분이 보기에는 꼭 이 매일성경의 날짜대로 하나님이 그날만큼 따라오신 걸로 보이더라는 것이예요 날짜대로 맞아떨어지니까요

지난 주일날 제가 들었는데요

그 재미를 보고 나서 그 분이 굉장히 열심히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처음에 모반을 했지요

그때부터 그 회사 안에 모반 운동이 있었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화가 났는데도 제단 뿔을 잡고 있는 아도니야를 주의만 시키고 집에 보냈지요

그래서 "아, 일단 솔로몬이 용서했구나" 그런데 그 회사 안에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누구를 몰아내야 된다 어째냐 된다 하면서 연판장을 돌려야 된다 그런 말이 있는데 이 분이 집사님인데 ‘다시 생각해 봅시다 꼭 그렇게 해야 됩니까? 다시 우리가 좀 더 사이좋게 잘 조정을 해서 화해해 봅시다’ 뭐 어떻게 해서 일단 무마를 시켜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은 다시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와서 다윗왕의 동녀(童女)를 저에게 주십시오

밧세바가 가만히 들으니까 나쁘지 않지요

안 그래도 왕이 되려다가 못 돼서 기분이 나쁘고 그럴 텐데 동녀(童女)를 하나 주어서 위로하고 끝나야지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밧세바가 좋다고 그 정도면 왕에게 부탁해 본다고 허락했지요

그것이 그날 본문으로 끝납니다

솔로몬과 대화하는 것은 그 다음날 본문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회사 안에서 나쁜 쪽에 있는 사람들이 사표 쓰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고 일부에서는 사표를 쓰자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좀 더 기다려보자 수습하자 이렇게 했는가 봐요 제가 내막을 자세히 모르겠는 데요

그래서 어떻게 들으면 아주 좋은 이야기 같이 들리는 거지요?

좋은 이야기 같이 들려서 그런가? 왜 또 그렇게 나오는가? 이렇게 생각했는데도 이 집사님은 사표 쓰고 다 했는데 그 다음날 지난 토요일 본문입니다

솔로몬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도니야를 쳐 죽입니다

그래서 "아, 그것이 좋은 의미가 아니고 저것이 모반이구나"

"야, 그러면 저 사람들 오늘 무슨 일이 나는 것 아닌가?" 그러고 긴장이 되었지요

회사에 나갔는데 전부 지분을 다 인수했지요

그 날로 전부 다 싹 파면 처분했지요 그래서 이 집사님이 눈이 둥그래진거지요

일이 하여튼 날짜대로 잘 맞아 떨어지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듣고 간단하게만 들었느 데요

똑같은 본문을 읽고 자기 회사, 자기 여건이 그 쪽에 있으니까 그 쪽에 주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고 그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자기는 처신을 해서 이 사람은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고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었다는 거에요

말씀 믿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 했으니까 이 사람들이 말해도 따라가지 않고 이 사람들이 말해도 안 따라가고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니까 나는 하나님 편이지요

성경 말씀을 Quiet time 할 때 잘 주의해서 들으면 각자 자기에게 다급한 자기에게 아주 중요한 자기만이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이 딴 사람하고 아무 관계 없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은 범양회사와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구절을 다른 부분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꺼에요

어떤 사람은 밧세바에게 어떤 사람은 솔로몬에게 어떤 사람은 아도니야에게 여러 가지 적용이 가능했을 꺼에요

그래서 Quiet time 이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객관화시켜서 처리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각자가 해야지 각자가 하지 않으면 알길이 없다 이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그 말씀은 솔로몬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해서 도전하는 세력을 처분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건 객관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을 잘 배우고 그쪽을 물론 일차적으로 배워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쉽게 배워지는 부분이 아니지요

전문가들이 설명해야 알아듣기 쉽습니다

그것은 강의도 듣고 설교도 듣고 또 여러분이 익숙해지면 성경 공부를 해서 깨달아서도 되는데 그것은 미처 못 깨달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좋은데 또 그것이 그건지 몰라도 구원은 받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당장 내가 처신해야 될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 그건 남이 알 수 없지요

자기 문제인데 어떻게 누가 압니까?

사표를 내야 하는지 연판장을 돌려야 되는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내막도 모르고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하신지도 모르고 물론 쉐어링(나눔)을 하면 옆에서 조금 도와 줄 수 있지요

그 부부가 계속 쉐어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quiet time은 개별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각자가 꼭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는 잃어버려집니다

각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갈 길이 없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고 각자가 책임져야 됩니다

마지막 큰 제목 나는 양의 목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이것도 지나 번에 살폈던 본문인 데요 다른 각도에서 조금 더 보겠습니다

1절~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여기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목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장에도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미가서를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말할 때 목자가 난다, 다스리는 자, 목자가 난다는 표현이 나오는 데요

이 다스린다는 말이 목자의 개념과 늘 일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다 통치자시다는 말을 정치적인 술어로 우리가 이해하면 권력가처럼 보이지요

그건 이 세상 나라의 방법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권력대로 군림하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 분이 권위를 갖고 계시고 그 분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세상나라 왕보다 훨씬 더 군림하시는 분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힘을 과시해서 처리하시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목자와 같이 섬기는 자의 자세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시고,

아들은 자시 생명을 내어 놓고,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서 계속 탄식하면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갓난아이를 돌보는 어머니가 군림하지 않습니다

5살 먹은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가 군림하지 않습니다

이놈하고 호통치면서 그렇게 3살, 4살 먹은 아이를 키우지 않지요

항상 씻겨주고 붙들어 주고 업어주고 이렇게 키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철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다스리고 양육하실 때도 목자와 같은 자세를 사용하십니다

여기에 교안에 쓰여 있는 것처럼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 라고 표현되어 있고 또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도 우리의 목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목자라고도 할 수 있지요

물론 보혜사라는 낱말이나 목자라는 낱말이나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다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고 또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그러한 분으로써 결국은 이 세 분의 사역에 의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됩니다

즉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를 잘 받고 하나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다른 곳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하는 일을 세 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직접 이루어가십니다

이 말은 조금 더 잘 이해하셔야 되는 데요

제가 ‘하나님의 인도’라는 테이프에서 굉장히 강조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상담해 볼 때마다 그 부분이 잘 안되요

상담해 볼 때마다 다른 내용은 기억을 잘하고 있는데 제가 굉장히 강조했던 부분만은 기억을 잘 못하고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인도를 받아야 됩니다' 하면 인도를 어떻게 받을까만 계속 신경을 쓰고

‘그 분이 어쨌던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부분을 잘 신경을 쓰지 않아요

물론 하나님이 인도하시니까 내버려두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알려고 노력해야 되고 앞에 말씀처럼 분별해야 되고 관심이 있어야 되고 신경을 써야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는 네가 잘 알아서 Quiet time 잘 하고 해서 뜻을 분별해서 잘 따라와야 된다 네가 잘못 따라와서 길을 잃어버리면 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겠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양의 비유가 있는 것이지요

양은 목자를 잘 따를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짐승이지요

그래서 길을 곧잘 잃어요

개는 냄새를 맡고도 얼마든지 돌아다니는데 양은 그걸 할 줄 모른다 이 말입니다

양은 길을 잘 잃는 짐승이지요

그래서 목자가 항상 신경을 쓰고 챙겨야 됩니다

우리가 길을 자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신경써서 챙기시는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는 목자다 이렇게 표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노력도 해야 되지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옆길로 가다 보면 길을 막으시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시고, 와서 잡아가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손길만 인식하고 있어도 좋지요

발람이 하나님이 자꾸 길을 막으시는데도 불구하고 못 알아본다든지 나중에 알아보기는 해도 잘못했습니다 하고 돌아가지 않고 가면 안 됩니까? 그 질문 자체가 가고 싶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꼭 막으시는 겁니까, 돌아갈까요? 혹시라도 하나님이 ‘가거라’ 하면 기꺼이 갈 마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가도 좋다고 하니까 기꺼이 가지 않았어요?

그런 우리의 자세를 뜯어 고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인도가 우리 주변에서 강하게 내가 못 느낄 정도가 아니고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을 내가 자꾸 뿌리치고 반대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구분을 못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알고 있는 것까지도 안 따르려고 하는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예수님이 내 생명을 위해서 구속사역을 이루셨다면 그리고 성령님이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내 곁에 와 계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를 구원하실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르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물론 그런데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꼭 그렇게 알려고 애를 쓰고 순종하려고 애를 써야 됩니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어떤 방법이든지 다 하시는 데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맹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자발적으로 잘하는 인격적인 좋은 백성을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 가만있어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목자의 인도를 잘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야곱처럼 매를 좀 오래 맞아야 됩니다

고생도 많이 해야 되고, 방황도 많이 해야 되고, 일생을 헤매다가 노년에 돌아와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지난 일생이 부끄럽기 짝이 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생을 보내고 얼마나 부끄러워요?

그리고 고생할 때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따라다니면 어려운 일이 와도 신나고 기분이 좋지요

요셉이 감옥에 내려가도 신난다 이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이 뭐가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아직 잘모르겠지만 하여튼 꿈에 보여주었던 어떤 일을 향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고 계신 것 같다 이 말입니다

나중에 그것이 실현될 때 그러면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구나 나를 총리를 만드시려고 감옥에까지 집어 넣으셨구나 그런 여러 가지 들을 이 나라의 총리가 되게 하시려고 이 나라에 팔려오게 하셨구나 우리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셨구나 그런 일을 깨달으니까 ‘아, 하나님 참 대단한 분이시다’ 하는 것을 느꼈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요셉이 그러도록 잘 따라왔으니까 아주 순조로운 거지요

거기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이 나오지요

요셉의 생애에 나타난 형통케 하셨더라는 부분은 사실은 우리가 보기에는 형통한 것이 아니지요 팔려가고, 종노릇하고, 오해받고, 감옥에 갇히고 뭐가 형통한 겁니까?

그런데 그 사건 장면마다 형통케 하셨더라는 말이 나온다고요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도 받았겠다

또 저기 가니까 예쁜 처녀가 두 명이나 있고, 또 장인의 일을 도와주니까 재산이 늘어나고 얼마나 좋아요 진짜 형통한데 거기는 형통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거기는 문제투성이지요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항복해야 되는 그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 지금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를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내가 인도를 잘 받는 것이 참 귀하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내가 섬세하게 인도를 받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나 인도는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인도를 잘못 받는다, 서투르다고 해서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하나님이 틀림없이 하실 것이다 그럼 나는 평안하게 해야 되지요

그래서 잘 모를 때는 어떻게 하느냐?

혼자서 고민하시지 말고 ‘하나님, 나 잘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어쨌든 인도하시는 줄 알고 다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라고 하면 편하지요?

그 말이 무책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어거지를 쓰면서 고민하기 보다는 어쨌든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다는 그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의존’하라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에서는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말을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다 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신다' 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시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 안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바로 자기 백성인 우리에게 연결되는 부분이니까 다른 일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잘 되도록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서툴더라도 점점 맡기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점점 익숙해지지요

"아, 이럴 때는 이렇게 하시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하시더라"

요셉의 생애 같은 것을 잘보면서

"아,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일을 하시는구나"

그렇다면 내 앞길에 어려움이 계속해서 오더라도

"하나님, 이것을 피해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냥 맡겨놓고 기다릴 수 있지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르니까.

그래서 맡기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일을 놀랍게 처리해 버리시기 때문에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그 일을 통해서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뜻을 잘 따르는 백성으로 결국은 양육되는 자체가 성화요 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일입니다

즉 천국이 실현된다 완성된다 미래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인도를 잘 받아가는 국민이 되는 성화를 말합니다

성화라는 말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고 소속에 관계되는 정치적인 의미입니다

성화된다는 말은 훌륭한 도덕적인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배를 잘 받는다는 뜻입니다

지배를 잘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선이 되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는 이상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내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세상 도덕적인 차원에서 나를 성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미스테이크입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가장 성화된 모습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여전도사님이 지난번에 수련회에 오셔서 간증을 자세히 해 주셨는데요

Quiet time 하다가 "하나님이 나에게 아들을 하나 주신다" 라고 했어요

이 분은 처녀 전도사님이었기 때문에 "무슨 아들을 주실까? 아, 믿음의 아들을 주시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어요 11시 30분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이상하다 틀림없을 텐데 내가 잘못 알았는가? 그러고는 문을 걸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시가 넘어서니까 사람이 둘이 찾아왔는데 강도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해 하기도 하고 무섭고 했는데 어려움도 겪고, 가리고 야단났지요

칼을 목에다 대고... 결국은 밤새 아침 9시까지 계속 같이 있으면서 전도의 문이 서서히 열려서 전도하기 시작해서 그 사람이 결국 전도사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나중에 붙들려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이제 재판을 받아야 되는데 재판받기 전에 처음에는 전도사님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고 내 아들인데 형(刑)을 좀 작게 받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하셨어요

본인이야 물론 그렇게 기도했겠지요 아직 서툰 초신자지만, 그런데 하루는 ‘아, 내가 기도를 잘못하고 있구나’ 사실 그것은 이 세대를 본받는 기도지요

그래서 자기가 quiet time 하다가 잘못했다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제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오래 주시려면 오래 주십시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아, 이 사람은 거기 오래 있는 것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 가는 장면이 나오지요?

형님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너 전선에 나가 보아라! 골리앗이 있을 때입니다

먹을 것을 싸 줄 테니까 갖다 오너라!

그런 말 들으면 면회를 가야, 하여튼 말씀의 지시를 받고 면회를 갔는데 실제로 골리앗을 앞에 두고 두려워 떠는 자기 형님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틀림없이 두려워 떨고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찾아가서 두려우냐, 겁이 나느냐, 불안하냐고 물으니까 겁이 난다고 해서 왜 그러느냐? 재판 때문에 그러지? 그러면서 너 딴 생각하지 말고 감옥에 오래 있으라 일찍 나오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 밖에 나오면 잠잘 집도 없고, 밥 먹여줄 사람도 없고, 직장도 얻을 수 없고, 할 일도 없지 않느냐? 그런데 왜 나오려고 하느냐? 거기 가만있으면 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고 얼마나 좋으냐? 그러고 네가 할 일이 있다

네가 할 일은 네가 강도질을 하다가 전과 7범인 데요

나를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네가 강도에게 전도해라

강도는 강도에게 전도하는 것이 제일 잘 먹혀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강도에게 전도해 봐야 잘 되겠느냐? 네가 전도해라

네가 강도에게 전도하려면 거기 있어야 강도를 만나지 밖에 나오면 어떻게 만나느냐? 거기 있어라!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국 거기서 현재까지 강도 15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전도 받은 사람이 또 자기 부인에게 전도하고 등등 해서 밖에 사람이 몇 사람 있고 취재하던 형사가 믿고 조사하던 어떤 언론인, 신문기자인가 누군가가 믿게 되고 여러 명이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실제로 하나님께 인도를 받는다는 부분을 우리 좋도록 자꾸 생각하면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이 묘하게 하시는 일을 기다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되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신뢰감이지요

말씀을 맺읍시다

오늘 강의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부분인 데요

그동안 제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라든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미래성, 중간상태 등등 딴 것을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그 설명은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우리가 많은 오해가 있기 때문에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많은 설명을 했는데요 알맹이는 뭐냐?

처음 조금 말씀드렸던 부분 오늘 말씀인데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고상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그런 이상적인 국가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야 워낙 훌륭한데, 하나님은 놀라운 뜻을 갖고 계시는데 국민이 계속해서 바보짓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구속이 필요합니다

구원한다는 말은 바보 같은 우리를 훌륭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그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을 어떻게 말하면 '죄'라고도 말하고 '거역'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 뜻을 어기는 거니까.

그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깨달아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국민이 되어가는 것을 구원, 구속이라고 하고 성화라고도 말하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실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는데 이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이제 국민이 훌륭한 국민이 될 때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제일 중요하냐?

quiet time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인도가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quiet time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꼭 quiet time하셔야 되고 quiet time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의 방법을 여러 가지로 잘 배우셔야 됩니다

 

제 강의 테이프도 있고 뒤에 책자도 여러 가지 와 있는 데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서 우리 한국 교인들이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꼭 잘 배우셔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맹이는 다 빼고 한국교회들이 천국은 혼자서 다 차지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구원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잘못 설명하면 상당히 월권이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구원’이라는 말 자체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의사가 없거나

하나님의 인도를 전혀 안 받고 있는 사람은

구원문제를 이론적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해야 될 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7장에 나왔던 부분이지요?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된다

그 구절이 실제로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어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너희가 월등히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킵니까?

우리는 그들을 도저히 못 따라 갑니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럼 어느 정도해야 되느냐?

그런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형식을 갖추고 격식을 갖추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실제로 내 마음 전폭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되는 거에요

서툰 것은 괜찮다 이거지요 서툴러도 좋으니까 잘하라 이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따를 때 남편의 의사를 잘 따르려고 늘 예, 예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남편도 사람인데 내가 꼭 예, 예 할 필요 있느냐?

밥만 잘하고 옷만 잘 만들고 살림만 잘 살면 되지 않느냐? 그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밥을 좀 태워도 좋고, 반찬을 제대로 못 만들어도 좋고, 집을 좀 지저분하게 해도 좋으니까 옷을 제대로 할 줄 몰라도 좋으니까 남편의 의사를 따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때 내가 하나님을 섬겨가는 방법자체가 좀 서툴고, 전도를 하는데 서툴러서 엉터리로도 좀 하고,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것도 좀 서툴고, 찬양도 좀 잘 부를 줄 모르고, 헌금도 잘할 줄 모르고 여러 가지가 서툰 것은 그래도 좋다 이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 라는 의도와 순수한 마음, 사랑의 마음은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왜 내가 하나님 뜻에 꼭 따라야 되느냐?

내가 이 정도해드리면 되지 해서 교회봉사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다 잘하는데

마음속에 '나는 나를 위한 무엇이 꼭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구절입니다

그 정도 설명드렸으면 하나님 나라의 핵심부분을 오늘 한 시간에 대충 설명드렸는 데요 무엇인지 감이 충분히 잡히겠지요

다른 부분, 이제 구원이라는 주제에서 계속 설명드릴 테니까 한 달쯤 걸릴지 아직 구원에 대해서는 컬리큐럼을 짜지 않았는데요

좀 짜보고 어느 정도 걸릴지는 모르겠는데 해 보고 이것저것 말씀드려야 되겠고요

그 천국의 상급 문제도 사실 거론하고 싶은 부분인데 그것도 '구원론'에서 다루겠습니다

상급 문제도 다루고 중생 문제나 기타 다른 문제를 또 복습할 부분도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