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의 현재성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2019-10-13 20:39:51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흔히 우리는 “하나님나라는 이미 왔지만 그 충만한 도래는 미래에 실현된다.”는 신학적 명제를 가지고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명제의 방점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보다는 미래성에 찍혀있다. 이미 온 하나님나라는 불완전하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있고 결국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도래는 미래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인식은 결국 현재 이미 실현된 하나님나라보다는 미래에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나라를 바라게 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간과하거나 하나님나라를 현세가 아닌 내세 지향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인식하거나 체험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악과 불의 그리고 온갖 문제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고 이런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전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미래성과 내세성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교회라는 종교적 제도에 국한시켜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관점에 안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은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이나 내세성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이나 내세성은 결국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에서 출발하며 현재성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강조해서 말한다면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없이는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이나 내세성도 없다고 말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살 것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과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점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가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것인가에만 주로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지극히 취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먼 미래의 혹은 내세의 하나님나라에 초점을 맞추게 되며 이는 결국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의 종교적인 삶을 중시하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지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물론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을 말하지만 그 강조는 현재성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미래성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이 가시적이고 충만하게 발현되는 것이지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관계없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누리고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시는 일없이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화신으로 오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우선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함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천하 만민이 너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란 그 약속을 실현시킨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 함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 즉 다윗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이 주어진다는 그 약속의 실현으로 오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예수는 천하 만민을 다스려 복을 주시는 영원한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선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 즉 하나님이 특별히 기름 부어 천하 만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신 분이시라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천하 만민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수에 대한 선포이다. 예수는 누구이신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만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바르게 알지 않는다면 어찌 예수를 믿을 것이며, 잘못된 믿음으로 무슨 구원을 받겠는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한 죄 사함이나 내세의 극락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나라 밖에 있던 자가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천하 만민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왕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분이시다. 라는 이런 믿음이 바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나라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런 분이심을 믿음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를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믿는 일이 없이는, 누구라도 그 나라 안으로 들어오거나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천하의 왕으로 세우신 일은 결코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현재적으로 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고 계심을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예수는 지금 천하를 다스리고 계신 분이시지 장차 세상을 다스리실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현재적 통치를 믿고 그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야지 마치 그 통치는 먼 미래의 것 인양 생각하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무관하게 우리 멋대로 이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왕이심을 믿는 것이고, 그 왕의 통치에 순종한다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왕으로 계시며 현재적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예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인식하고 느끼며 그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천하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 왕은 지극히 겸손하게 이 세상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로서 오셨다. 이것은 지극한 역설이지만 동시에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 그 나라에서는 왕이 군림하거나 압제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왕들은 자기를 위하여 백성들을 압제하고 군림하지만 예수가 다스리는 그 나라에서 왕은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을 섬기고 심지어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를 내어준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높은 자가 되고 나중에 온 자가 첫째가 된다. 그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다. 그 나라에서는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 그래서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는 왕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로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그의 낮아지심이며 그가 자신을 자기 백성들을 위해 내어주신 사건이었다.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 죽음은 그가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하신 왕적 사역인 셈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예수의 이런 낮아지심과 복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부활이고 승천이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의 그 행위가 의로우심을 인정하셨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의로우신 행동인 십자기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응답인 셈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은 예수도 의로우시고 하나님도 의로우심을 증명한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일이 바로 예수의 승천 사건이다. 예수의 승천 사건은 바로 예수가 천하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만천하에 하나님이 공포하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가 승천하심으로 비로소 왕이 되신 것은 아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왕으로 세움을 받은 분이고 왕으로 오신 분이시며 왕으로서 역사하고 행동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그가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그의 왕 되심은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니 이제 승천하심으로 예수는 천하의 왕이심이 만천하여 공포된 것이다. 예수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고백은 예수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보좌에 좌정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원한 왕이심을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제자들에게 명령을 하신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명령이 바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은 지금 예수가 온 세상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예수가 현재적으로 온 세상의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왕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며 그분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준다. 먼저 그분이 왕이심을, 그분이 지금 다스리고 계심을, 그분이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그분의 다스리심이 어떠하며 우리는 그 다스림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이런 질문으로 나갈 수 없으며 이런 질문으로 나가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 것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사도신경은 예수가 승천하여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고백하는 동시에 미래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가 미래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비로소 그가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이미 왕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은 그가 이미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세상 심판은 그가 왕으로서 하시는 일이요 지금 왕으로서 하시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우리가 진정 근심해야 할 일은 예수가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지금 천하를 다스리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알지 못하며 그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어야 한다. 비록 우리 눈에 세상은 악으로 가득하고 우리 일상은 불의로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눈을 들어 지금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곧 믿음으로 행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의 실체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어떻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실현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일 것이다. 예수가 현재적 왕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순종의 행동이 나올 수 없고, 그런 순종의 행동이 없다는 예수가 왕이심을 믿는다는 그 믿음은 헛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