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by J.Geertsema
스킬더의 "그리스도와 문화" by J.Geertsema
2019-05-30 21:44:42
카이퍼는 문화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카이퍼는 문화라는 단어가 하나님편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다고 생각했다. 문화라는 단어가 인간 중심적이라는 이유로 카이퍼는 그것 대신 일반은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길 원했다. 이 점은 카이퍼의 문화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카이퍼는 문화는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격없는 사람들에게 내려주신 은총의 결과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은총은 일반적이기에 문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발전해왔다고 말한다. 물론 카이퍼는 일반은총에 근거한 문화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인정했고, 특별은혜가 덧붙여져야 문화는 충분히 장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카이퍼는 기독교가 그리스 로마 문화에 덧붙여졌을 때. 이 문화는 유례없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꽃을 피웠다고 말한다. 카이퍼는 다른 모든 문명들은 사라졌지만, 유독 서양문화가 세계적으로 확대된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카이퍼가 보기에 서양문화에서는 특별은혜(구원사역)과 일반은총(문화)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 카이퍼는 이런 식으로 다른 문명들이 퇴보한 반면에 서양문명이 진보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렇게 카이퍼식으로 생각하면 기독교 문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만 기독교에 영향을 받은 서양 문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독교 문화를 지향하며 일할 필요가 없고 다만 서양문화를 더 기독교화하려고 하면 된다. 카이퍼가 정치와 교육을 위해 벌인 활동은 그의 이런 문화관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카이퍼가 설립한 반혁명당과 자유대학교는 서양 사회를 좀 더 기독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
스킬더가 문화에 대해 쓴 논문과 카이퍼의 일반은총 사이에는 약 35년의 간격이 있는데 이 시기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카이퍼 당대의 사람들이 서양문화에 대하 품고 있던 무한한 신뢰가 스킬더 시대에 와서는 산산조각이 났다.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권력이던 독일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서양문화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이 문화가 고대문명에 대한 기독교적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서양문명은 위기에 처했고,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스킬더였다. 카이퍼도 그랬지만 스킬더도 문화와 관련하여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문화에 대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다. 카이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로마 문화에 자신의 특별한 은혜를 부으시는 문화의 구주로 바라본다. 그러나 스킬더는 그리스도를 인간의 구주로 바라보고 그가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문화적 활동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만드신다고 말한다. 스킬더는 인간의 문화활동이 에덴에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문화명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충분히 발전된 상태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활동을 통해 발전해 나가도록 창조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일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문화사명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인간은 죄를 범하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주에게 불순종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문화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가 개입하신다. 그분은 구주로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일을 하시고 거듭난 인간들이 문화적인 활동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스킬더는 문화를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역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이 땅에서 수행되는 모든 유형의 인간노동이 문화에 속한다. 스킬더는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명령은 인간이 세상을 계발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며 따라서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완전히 발전된 형태로 창조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여러 가능성을 지닌 세상을 지으셨고 인간은 일을 하여 그 가능성들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킬더는 창조에 근거한 진화에 관하여 말한다. 나아가 스킬더는 이 문화명령이 온 인류의 의미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문화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며 자신들의 일상의 과업을 문화활동으로서 수행해야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으로 문화활동을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스킬더는 이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문화활동들이 더럽혀지며 종국에는 그들의 문화적 성취들이 토로소스, 혹은 끝이 잘려나간 피라미드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스킬더는 거듭난 사람들의 문화활동 역시 완성된 문화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이 잘려진 피라미드로 남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소수이고 그들에게도 여전히 죄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킬더는 문화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문화활동이 하나님에게서 이탈되었고 문화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의 문화적 산물들은 오히려 위험하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또한 죄는 문화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스킬더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을 일으키게 하는 방식으로 문화를 규명했기 때문이다. 카이퍼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물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내것이라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한치도 없다." 카이퍼의 이 말은 스킬더 자신의 확신이기도 했다. 스킬더는 문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문화적으로 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네델란드 개혁교회(해방파)가 수행한 많은 활동들을 이해하려면 스킬더가 문화에 대하여 진취적으로 가르친 배경을 알아야 한다. 문화명령이라는 표현도 스킬더가 만들어 사용한 것일 개연성이 높다. 문화에 대한 스킬더의 견해는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스킬더의 문화관이 처음 알려졌을 당시에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노오르드만스는 스킬더의 문화관이 복음이 토대를 둔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일반은총 교리를 일반화한 행위, 성경을 폄훼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자유대학의 동료교수였던 헵도 스킬더의 문화관이 그 시대의 교회를 허물 소지가 있는 개악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스킬더가 언급한 문화명령은 성경적인 토대가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스킬더는 창세기1-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신 말씀을 문화명령의 주된 증거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이 창조시에 인간에게 요구하신 시초의 순종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킬더는 인간 노동이 범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범죄 이전 낙원에서부터 주어진 문화명령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문화명령은 타락 후에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만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지위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스킬더는 문화명령이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지닌다고 주장하며 그 명령을 따라 이 세상에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잠재적인 것을 개발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말한다. 문화명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낙원에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의무가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죄악된 세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제 죄악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문화발전이 아니라 복음전파라고 말하며 주님의 재림은 문화명령이 성취될 때가 아니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의 문화명령 성취에 달려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스킬더도 그래스도의 재림이 문화가 충분하게 발달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스킬더는 신자들이건 불신자들이건 인간의 모든 문화적 노력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게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지니는 성격이다. 이 시기가 오직 복음전파의 의무만 수행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노동할 의무는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인가? 창조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갖는 의미는 복음전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성령이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시기이기도 하다. 성령께서는 더 이상 낙원이 아닌 세상에서라도 우리의 일상의 과업을 창조시에 주어진 문화명령에 비추어서 바라보고 수행하도록 요구하신다. 따라서 신약시대 교회의 시기에서 중생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우리 일상의 과업은 생계를 유지하는 필요성을 넘어 우리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들로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문화명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개발하는데 따르는 위험들이 가시화된 시대에 문화명령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문화명령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고, 자연 자원들을 다 소모할 수 있으며 동식물을 파괴랄 수 있고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관념에 어떤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자연이 파괴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문화명령이 그 주범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가? 스킬더는 우리는 땅의 자원들을 각각의 성질을 따라서 개발해야 하며 그 본질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 그는 지구의 자원들을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 곧 성경에 순종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창조세계를 남용하는 행위에 대하여 스킬더가 언급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경고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불법적인 성장, 더러운 성장이지 창조 세계의 사용과 그 개발 자체가 아니다. 땅을 훼손하는 것은 문화명령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은 이기적인 지배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문화명령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다. 문화명령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러 직종에서 일할 수 있으며 교회에서는 직종 때문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상대는 동료 사역자요 자기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기 때문이다. 문화명령은 우리의 일상을 과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의 일부분으로 보아아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노동은 우리가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일이된다. 특별히 죄가 세상에 들어온 까닭에 노동이 고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에 따르는 수고를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참아내야 하며 일에 끌려다니지 말고 일을 즐거워해야 한다. 이렇게 스킬더는 복음은 신자들로 하여금 창조시에 제정된 의무, 즉 세상을 다스리라는 의무에 직면하게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일상의 직업들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비추어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