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스 스킬더의 생애와 사상
클라스 스킬더의 생애와 사상 (번역 손성은)
인물별/클라스 스킬더
2019-04-08 01:57:38
클라스 스킬더 ( 1890.12.19.~1952.3.23.)
J. Douma/번역: 손성은
클라스 스킬더는 화란의 캄펜시에서 1890년 12월 19일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그의 부모는 Hervormde Gemeente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몇 년 뒤 Gereformeerde Kerk로 옮겼습니다. 어린 스킬더는 상당히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초등학교교육을 마친 뒤에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장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벌어야 했습니다.
그가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던 사람들의 개입으로 스킬더는 더욱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는 캄펜에 있는 개혁신학에 기초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그후 1909~1914년 캄펜신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젊은 스킬더는 그의 비상한 언어능력으로 인하여 오히려 빠르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고전언어(라틴어와 희랍어)에 능통하였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도 잘하였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는 단테, 괴테, 슐라이에르마허, 도스토예프스키, 니이체, 그리고 키에르게고르와 같은 유명한 사상가들과 저자들에 익숙해 졌습니다. 그는 그가 읽은 것 모두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영적 위기 속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스킬더 안에는 그가 나중에 이와 같이 공식화시켰던 하나의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개혁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야생적 부요함(wild opulence)이며, 개혁신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의 목사고시를 우등으로(cum laude) 치룬 후, 그는 1914년 Ambt Volenhove에서 목사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다섯 곳의 회중들을 목양하였는데, 한 곳에서 결코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습니다. Rotterdam-Delfshaven에서 목양하는 중, 휴가가 제공되어 2년 동안(1930~1932년)을 독일의 Erlangen에서 공부하였습니다. 1933년 초 그는 그곳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최우수성적으로(summa cum laude) 받았습니다.
은사들이 있고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신학교수가 된다는 것을 명백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1933년 일찍 그가 캄펜신학교의 A.G.Honig교수의 후임자로 지명되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는 교의학, 윤리학, 신조학(symblics)과 교양학(encyclopedia) 주제를 가르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교회인
클라스 스킬더는 신학저서를 쓰는데 집중했던 상아탑 속의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정기간행물 De Reformatie(개혁)지를 수단으로 하여, 그는 교회생활에 대하여 반짝거리는 방식으로 방향을 제시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CGK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들의 위치를 벗어난 교회 행동에 관하여, 발트주의자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에 관하여, 그 자신의 교회 사람들과 더불어서 교회의 본질, 일반은총, 언약,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다른 주제들에 관하여 논쟁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들이 여전히 실제적으로 모든 논쟁의 끝이었던 시대에 스킬더는 카이퍼 신학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존경심을 갖고 비판하면서 나아왔습니다.
그 자신의 집단 내에서의 교회적인 불일치가 증가되었습니다. 자유대학과 캄펜신학교의 교수요원들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조금 냉냉한 편이었는데, 긴장감이 팽팽해졌습니다. 스킬더는 암스텔담의 동료들인 H.H.Kuyper와 V.Hepp과 반복해서 논쟁을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또한 캄펜 그 자체에서도 갈등은 드러났습니다. 신약학교수였던 S.Greijdanus 외에는 스킬더는 자신의 동료들 가운데서 거의 신학적 후원자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수평선상에는 교회의 문제들이라는 구름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들의 구름들도 역시 떠올랐습니다. 히틀러라는 별이 스킬더가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떠올랐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공부할 때 그는 “학생들과 반셈주의”(Students and Anti-Semitism)에 관한 토론회에 참여하였다가 심지어는 논쟁이 불붙었는데, 그는 유대인 동정론자들의 갈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1936년 그는 화란개혁교회의 암스텔담 총회에 나치에 동정적인 NSA(National Socialist Alliance)와 평화주의적인 CDU(Christian Democratic Union)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은 개혁교회의 신자들로서는 교회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보고서를 썼습니다.
국가사회주의적 견해들에 대한 그의 격렬한 저항은 1940년 독일군이 화란을 정복하였을 때 비싼 값을 치뤘습니다. De Reformatie지의 수많은 용기있는 글들이, 대부분의 저자들이 너무나 현혹되어 있거나 너무나 두려워하던 그런 시대에 쓰여졌는데, 나치로 하여금 스킬더를 체포하려고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1940년 8월부터 12월까지 그는 Arnhem의 한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리고 De Reformatie지의 출간이 금지되었습니다.
해방
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한 재난은 그가 감옥에서 방면된 후에 왔습니다. 나찌편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형제들의 손에서 온 것입니다. 전쟁중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란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en)의 총회들은, 언약과 세례의 문제를 포함하여, 교회들 사이에 있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점들에 대해서 입장을 결정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이 결정에 동의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모든 당회들에게 서신을 보냄으로써 그는 이것에 주목하게 하였습니다. 이 편지의 글이 Utrecht 총회에서 그를 1944년 3월23일부로 캄펜신학교 교수직을 유보한다는 결정의 이유들로 사용된 것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8월 3일 그는 해임되었습니다. 동일한 불행이 그의 동료인 Greijdanus교수에게도 임하였습니다.
1944년 8월 11일 헤이그의 루터파교회에서 가졌던 “해방파모임”에서 스킬더는 “해방과 귀환의 헌장”(Act of Liberation and Return)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 해방은 하나의 사실이 되었습니다. 캄펜신학교의 학생회의 많은 학생들이, 해고된 두 교수들이 캄펜의 새로운 주소인 Broederweg 15번지에서 목회자훈련을 계속하였을 때, 함께 따라와서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단지 몇 년 만 더 교수로서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1952년 3월23일, 그는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심장마비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61세때의 일입니다. (총회파개혁교회를 떠나서) 해방파를 따라 나온 그 이후의 역사는 순전히 황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는 B.A.Bos 목사를 추종하는 집단(교회분열은 교파간 대화를 통해서 곧장 치료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던 집단)과 직면했습니다. 그는 아주 신속하게 해방파개혁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일 후 곧바로 스킬더는 K.Doornbos목사와 다른 이들의 독립주의(independentism)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해방사건 이전에 몇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총회파”의 교권정치에 반동하여서, 이런 설교자들은 지역교회의 독립성을 무척 강조하였습니다. 광범위한 회중들의 결정에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독립성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투쟁으로부터 스킬더의 너무나도 잘 알려진 진술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혈을 교회연합을 위해서도 흘리셨다”(Christ shed His blood also for the church federation).
미국의 설교자이면서 신학자인 Herman Hoeksema와의 갈등은 또한 스킬더로 하여금 실망을 야기하였습니다. 스킬더는 훅세마와 그의 집단(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es)를 1938년에 있었던 그의 미국으로의 첫 번째 여행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상호간의 유대는, 이들교회가 그를 1947년에 초대하여 미국에 두 번째 방문하게 된 것에 의해서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에 그들은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스킬더는 훅세마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교리를 비판하는 것에 지지하였지만, 훅세마의 강한 카이퍼적인 언약관은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해방사건 이후에 그 자신의 교단 안에 있었던 지역적이면서 전국적으로 지지부진했던 갈등은 스킬더의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신학적 저작물들을 출간할 기회가 적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2차대전 이전에 하이델베르그문답해설을 심도있게 시작하지만, 주의 날 10일째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해방파개혁교회들 바깥에서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깊은 존경심과 그 집단 안에서의 스킬더에 대한 깊은 사랑은 언론에 나타난 그의 죽음과 장례식에 보여주었던 광범위한 주목으로부터 분명해졌습니다.
IJsselmuiden 시정부의 묘지에 있는 그의 묘지석에는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은 왜 최종적으로 스킬더가 다양한 전선들에서 그렇게 언제나 싸움을 벌일 준비들이 되어 있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두 개의 중요한 측면들을 강조하고 싶은데, 첫째는 교의학자로서의 스킬더이고, 두 번째는 그의 문화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입니다.
교의학적 사상가로서의 스킬더
고려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주제들 중에서 우리는 두 가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교회라는 주제를 선택할 것입니다.
스킬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말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들은 사람은 그가 어떤 특질들(지성, 의지, 의로움, 거룩함 등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추론합니다. 사람들은 또한 광의의 의미에서의 형상(모든 사람들이 각각 사람이라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식의)과 협의의 의미에서의 형상(오직 신자들만이 “지식과 의와 거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 때문에)의 구분을 창안해 내었습니다. 이런 구분들은 사람들이 그 형상을 주로 인간적인 특질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킬더에 따르면, 창세기1장을 조심스럽게 읽는 사람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이델베르그문답에 대한 그의 해설에서, 스킬더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다른 피조물들을 통치하는 그의 과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주된 질문은 직분이나 소명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러고 나서만 지식, 의와 거룩과 같은 특성들이 중요하게 됩니다. 이 특질들은 사람들이 여기 지상에서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은사들일 뿐입니다. 이 관점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들과 사역을 이해하는데 중요해 집니다.
스킬더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어떤 만족스러운 전기로부터 분명한 것은, 교회의 주제가 그의 심령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연합에 대해서 열렬하게 애를 썼고, 교회적인 분열과 타협한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의 “다중형태”에 대한 가르침, 또한 그것과 더불어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라는 구분을 공격하였습니다. 만약 교회가 다양한 형태들(다중형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러면 왜 교회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교회의 형태에 있어서 다중성은 자기-의지와 불복종을 흘깃이라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모든 신자들이 속해 있는) 비가시적 교회의 한 지체가 된다는 것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하는 모든 것이라면, 그러면 왜 여기 지상에서의 가시적인 교회의 통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소란을 떨어야만 한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와 똑같이, 스킬더는 교회에 적용되어져 왔던 다양한 “스콜라주의적” 구분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문화적 비젼가로서의 스킬더
“문화”는 스킬더에게 있어서 여러분이 성경의 첫페이지들에서부터 이미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동산을 관리하라,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 세상은 그 최종적인 형태로 창조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대신에 진화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NDK?) “창조”의 기초 위에서 “진화”(“발전”을 의미함)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1장의 동산에서 계시록22장의 도시로 옮겨가야 합니다. “문화”는 하나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프로그램이며, 그 충만한 수에 이르게 되는 도중에 있는 인류의 체계적인 한 노력입니다.
문화의 가능성은, 저주와 축복이 모두 침투되어 있어서, 역사가 계속 되는 중에 저지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은총” 때문이 아닙니다. 어쨌든, 그 “문화”와 함께, 역사가 지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일 뿐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긍정적인 문화의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따를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불신자들조차도 문화적 활동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자들 사이에 있는 교제, 곧 코이노니아(koinonia)에 더하여서, 세상에는 모든 인간 존재들 가운데서 하나의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 곧 수누시아(sunusia)가 있습니다. 스킬더는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피조세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단지, 피조세계의 재료들을 활용한 이중적인 발전이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적 충동이 있지만 두 개의 문화적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동일하게 대리석을 채취하는 곳에서 일하지만, 하나는 교회당을 세우기 위해서 대리석을 채취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댄스홀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문화의 “용광로”(hearth or furnace)입니다. “교회를 제거해 버리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안개 속에 감춰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안개 속에 감싸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문화에 의하여 질식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사람들을 하나의 깨뜨려지지 않는 교제 속에 묶어 주고 있으며, 교회 바깥에조차도 모든 생명관계를 위한 규준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클라스 스킬더 예찬 (In Praise of Klaas Schilder)
Theology 3, 2016년 5월 16일
리챠드 마우/번역: 손성은
클라스 스킬더(1890~1952년)의 작품은 북미에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곧 바뀌게 될 것을 바랍니다. 그는 뛰어난 신학자였고, 거의 40년 이상을 화란에서 칼빈주의 정통주의를 위하여 용감한 음성을 발하였습니다. 그는 화란의 신칼빈주의 사상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 준 “문화사명”의 전망을 내세우면서도 몇 가지 요점들 중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불치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작은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간결한 방식으로 자신의 전반적인 입장을 제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77년 이후부터는 영어권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온타리아주, 해밀톤의 캐나다개혁신학교의 성도들은 훨씬 읽기 쉬운 번역본을 출간하였습니다. 이것은 도움이 되는 설명의 각주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들은 카이퍼리안 진영에 있는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주의할 가치가 있습니다.
카이퍼의 한 추종자로서, 나는 스킬더가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는 방식에 대해서 몇 가지 심각하게 반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그는 카이퍼를 따르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주의사항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카이퍼가 영역 주권 개념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주장하는 일에 있어서 “오히려 큰 도약”을 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고 올바르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창조세계의 영역들을 위하여 성경적으로 기초한 카이퍼적인 유형의 영역개념이 발전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하기는 하지만, 스킬더는 적절한 성경적 전개를 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조심해야 할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카이퍼에 대한 모든 비판들에 있어서, 스킬더는 카이퍼가 개혁신앙의 전통으로부터 이끌어 내었던 근본적인 종류의 강조점들에 대해서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자기 나름대로 재침례파와 바르트적인 전망에 대해서 비판하는데, 어떤 카이퍼리안도 영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찰들을 하면서, 그리스도는 당연히 문화의 주님이시며,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분의 주권에 복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킬더는 우리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일반은총개념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모든 인류가, 택함을 받은 자들이든 아니든, 타락이라는 과격한 효과에 의해서도 지워져 버리지 않았던 피조물의 “함께 함”(수누시아)을 공유하고 있다는 현실에 우리는 눈을 감아버려서는 안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의 문화적 패턴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사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들을 위하여 특별하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스킬더가 발전시킨 한 주제는, 데살로니가후서2:3의 “불법의 사람”에 대한 예언을 우리가 진지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입니다. 개혁신앙공동체에 있는 우리들 중의 많은 이들이 “성경예언”의 틀이 남용되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강력하게 반대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예전에 없던 악의 등장이 있을 것이라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도적 경고를 무시하곤 합니다.
카이퍼리안의 사고틀은 종말에 있을 이 계시를 이해하기 위하여 통찰력이 넘치는 사고틀을 제공해 줍니다. 카이퍼에게 있어서, 창조의 역사는, 다른 일들 가운데서도, 문화영역들의 계속되는 차별화의 한 과정입니다. 분명한 한 가지 예는 바로, 더 이상 분화되지 않는 개체로서의 지파인데, 그 지파의 족장은 친척체계에 있어서 지도자이지만 또한 경제, 군사, 제의적 종교의 실행, 예술, 놀이, 농사 등등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이러한 영역들은 분화되어져 왔습니다. 그의 1898년에 있어서 Stone강좌에서, 카이퍼는 이 점을 특별히 예술영역과 관련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있어서, 예술은 성전의 제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중세를 통해서 교회가 예술의 주요한 후원자였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문예부흥기에는 예술적 활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문화적 생산의 독특한 영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카이퍼가 주장하기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적 삶에 있어서 문제는, 현재의 문화의 복잡한 영역의 다양성이 통일성있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그들이 동시대의 인간생활의 복잡한 다양성에 통전적인 “메타-내러티브”가 없다는 사실을 축하할 때 이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생활 속에서 이것은 역할의 증가해가고 있는 파편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나의 부모, 남편 혹은 아내, 소비자, 스포츠 팬, 노동자 등등으로서의 나의 생활을 통합시킬 것인가요?
이 영역의 문제, 그리고 역할-파편화의 문제에 대한 크리스챤의 답변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주재권입니다. 나는 나의 삶의 복합성을 그분께서 모든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성경적 세계관의 빛에서 보아야만 합니다. 나를 성적 순결함으로 부르신 그 동일한 주님께서 나를 또한 정치생활의 영역에서도 그분의 뜻에 순종하도록 부르십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복음의 그 통일시키는 능력을 실감하지 못하게 되면, 가다라 지방의 귀신이 그 영혼의 쥐어짜는 울부짖음으로 “우리는 군대라 수가 많음이라”고 하였던 그 광기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 생활의 점진적인 파편화는, 집단적으로나 우리의 개별적인 자아들 안에서, 그 파편화의 결과들이 너무나도 극심해서 일반은총이 작용하는 긍정적인 효과들이 너무나도 축소되고 타락성의 충만한 실재가 드러나게 될 그 때가 빠르게 다가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사람”의 지배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인간의 문화를 위한 유일한 희망은 – 물론 개인들을 위해서도 – 구세주께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비관주의에 떨어질 이유는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하나의 왕국 현실주의(a Kingdom realism)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많은 카이퍼리안들보다 더 왜 “그리스도와 문화”를 적절하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세밀하고 구체적인 신학적 집중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문화적 권위를 우리가 분별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렇게 주의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열정으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할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오직 이 개인적인 언급 하나를 첨가하는 것을 허용해 주십시오: 카이퍼의 신학이 화란에서 하나의 “정화”를 경험하였던 것은 클라스 스킬더와 그의 신학적-지성적 동료들의 리더쉽 아래에서였습니다. 우리 미국의 개혁신앙인들이 이런 것이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특별히 언약론, 일반은총론, 그리고 교회론에 관하여, 스킬더는 이렇게 통렬한 분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가 하나의 시인의 영혼으로 썼고 또한 설교하였기 때문에, 클라스 스킬더는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의 영혼의 시인이며 또한 영혼을 위한 시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클라스 스킬더의 생애와 작품
J. Faber(번역: 손성은)
이 장은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 클라스 스킬더의 생애, 2. 그의 작품들, 그리고 3. 그의 의의.
1. 스킬더의 생애
클라스 스킬더는 네델란드 캄펜에서 1890년 12월 19일 출생하였습니다. 개혁신학에 기초한 문법학교를 다녔고 또한 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 6월 Ambt-Vollenhove에서 말씀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Vlaardingen, Gorinchem, Delft, Oegstgeest, 그리고 Rotterdam-Delfshaven의 개혁교회들을 섬겼습니다. Rotterdam-Delfshaven에 있는 동안 그는 휴가를 얻어 독일의 Erlangen에 있는 Friedrich Alexander University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특별히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E. Herrigel교수의 철학강의를 들었습니다. 스킬더는 Erlangen에서 최우등생으로 학위를 받았는데, 그 논문은, 특별히 덴마크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기간에 특별히 주목하고 이 개념을 칼빈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쓴 것과 비교하는, 역설개념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1933년 Middelburg총회가 만장일치로 그를 캄뻔신학교의 교의학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그의 강의는 1939년과 1947년에 있었던 미국여행 때문에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그의 가르침은 독일인들에 의해서 중단되었는데, 처음에는 짧은 기간 중에, 나중엔 좀 더 긴 기간 동안 중단되었습니다. 스킬더는 독일치안경찰(SD)에 의하여 1940년 8월 매주일 발간된 “그의” 『De Roformtie 』지에 표명된 원칙적이고 용감한 입장표명 때문에 이미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1940년 12월까지 Arnhem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4개월). 그때에 출판금지명령을 받았습니다. 뒤에 그는 다시금 1942년 7월부터 1944년 9월까지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2년2개월).
스킬더는, 은퇴한 그의 동료 흐레이다누스박사와 함께 1944년 3월 23일 Utrecht총회에 의하여 교수와 목사로의 직분이 정지되었습니다. 그것은 1942년의 (언약과 세례, 가정적 중생, 그리고 “일반은총”에 대한) 교리진술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며, 1939~1943년, 그리고 1943~1945년에 열렸던 총회들의 교권주의적 행태들에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교권주의는 1939년 Sneek-Utrecht총회 이후로 나타났던 고압적인 자기-연장(the high-handed self-continuation)에서 분명했는데, 스킬더는 그것이 교회정치 50항과 마찰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1944년 8월 11일, 헤이그에 있는 루터파교회당에서 핍박당하면서 관심갖게 된 교회구성원들의 한 모임에서, 클라스 스킬더는 “해방, 혹은 복귀 선언문”을 낭독하였는데, 그가 이미 준비해 왔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언급을 하나 첨부하겠습니다. 헤이그에서의 이 기념비적인 날에 모임을 마친 후, 캄뻔신학교의 학생들이 스킬더 주변에 모여 들어서 – 그는 그 학생회의 명예회원이었습니다 – 그와 별도의 방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모여들었던 우리들은 12명 정도의 신학생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캄뻔신학교 학생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교수의 교단에서의 권징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킬더는 자기 학생들의 존경심과 열정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나에게는 잊어버릴 수 없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들어보세요,” 그는 말하기를, “나는 단지 면직된 교수일 뿐이예요” 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Bergschenhoek에 있는 교회만 개혁교회연맹(the confederation of the Reformed Churches) 바깥에 있어서, 그 교회는 그 당시까지 개혁교회들 안에서 사역이 허락되지 않았던, H.J.Schilder를 담임후보자로 지명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킬더는 솔직하게 우리들에게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습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흐레이다누스박사가 우리들에게 해방선언문에 사인을 하도록 결정하기를 종용하는데 있어서 보여주었던 그 동일한 태도로, 스킬더는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944년 8월 11일, 헤이그에서의 모임에서 그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였고 단지 현재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스킬더는 해방파교회들이 즉각 흐레이다누스교수와 R.J.Dam박사와 함께 그에게 요청하여 목회사역을 위하여 학생들을 계속 훈련시켜달라고 한 이후 교수로서 개혁교회들을 섬기는 일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Dam박사는 1945년 독일군에 의하여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마친 그 해 가을에 흐레이다누스박사와 스킬더는 캄뻔의 Oudestraat에 있는 헐어빠진 YMCA건물에서 그들의 교수사역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전에 우리들의 신학교였던 곳의 바로 맞은편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침실용 세면대가 두분의 교수들을 위한 교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두 분이 모든 강의를 도맡아 하셨습니다: 신약교수가 구약주경도 가르쳤고, 스킬더는 교의학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역사도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들의 설교실습시간을 특별히 잊어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다음 해 1946년, Enschede에서 열렸던 예비총회에서 세 명의 신임교수들을 임명하였습니다: Benne Howerda, Pieter Deddens, 그리고 Cornelis Veenhof. 이 총회가 또한 최종적으로 그 신학교에게 신학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였을 때 스킬더가 얼마나 흥분하였는지, 그리고 캄뻔의 학생들이 그가 Enschede 총회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에게 보여주었던 환대는 얼마나 즐거운 것이었는지!
스킬더는 특별히 신론에 있어서의 교의학강의만이 아니라, 주로 『De Roformtie 』 지를 편집하는 일들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분투적으로 그리고 지치지 않고 일하여서, 때로는 밤을 새우고 아침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 한 번 아침 일찍 그가 우편함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교수님, 무척 일찍 일어나셨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친구들, 나는 좀 늦다네!”라고 그는 응답하였습니다. 그의 첫시간 강의때에 간혹 그의 헝클어진 옷차림이나 뚱한 분위기를 보면 우리들의 교수님이 또 다시 지난 밤에 잠을 주무시지 못하였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분명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안팎으로부터 공격에 대항하여 해방파교회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무모할 정도로 일하였습니다. 이 교회들 안에서 다가올지도 모를 어려움들에 대항하여 그는 참된 신앙의 통일성 안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기 위한 것을 하였던 것입니다.
1952년 3월 23일, 그는 외부자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형편에 돌아가셨는데, 실상은 지병이었던 심장이 갑작스럽게 마비가 되어서였습니다. 말씀사역자로 그리고 교의학교수로서 직분이 정지된 이후 정확하게 8년이 지난 이후였습니다. 어린아이같은 신앙으로 그는 자기 동료 Deddens에게 “나에게는 좋은 일이야, 나는 예수님께로 간다네”라고 말하였습니다.
2. 스킬더의 출판물들
교수사역 외에, 스킬더는 출판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결과 45페이지 짜리의 출판물목록이 1953년 캄뻔신학교 학생회(Fides Quadrat Intellectum)의 연감(Almanak)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스킬더의 작품은 세 기간으로 분류될 수 있겠습니다: 1920~30년대, 1930~40년대,그리고 1944~52년.
1) 1920~30년대
스킬더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때가 1920년부터 1930년대였습니다. 카이퍼와 바빙크는 1920년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한편으로는 카이퍼를 노예적으로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더 젊은 세대의 운동”이 발전하였습니다. 이 후기의 운동은 많은 점들에서 개혁신앙고백에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고 J.G.Geelkerken박사와 J.J.Buskes목사의 지도하에서 회복연맹개혁교회(the Gereformeerde Kerken in Hersteld Verband)의 설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차대전 이후 이 교회들은 화란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 안에 포섭되어 없어졌습니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의 그들의 소위 변증법신학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스킬더는 교회잡지들과 De Reformatie에 실린 수많은 글들을 통해서 이런 운동들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의 많은 글들을 통해서 그는 개혁교회들 안에서 중요한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스킬더는 여러 책들을 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 대한 한 강의가 심화되어서 1919년에는 Wat is de Hel?(지옥은 무엇인가?) 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는 지옥의 두려운 현실을 하나님께서 책임적인 인간을 다루시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취급합니다. 그의 책 Kerktaal en Leven(교회의 용어와 생활)은 1923년에 출판되었는데, 오래전에 유행하였던 교회용어중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용어들을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1923년에 논문 두 개를 모아서 Licht in den Rook(연기 사이의 빛)이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는데, 그 안에서 그는 성경구절들이 그 시대의 문제들에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비슷하게 De Openbaring van Johnnes en het Sociale Leven(요한계시록과 사회생활)에서 계시록을 사회경제적인 현황들에 연결시켰습니다. J.G.Geelkerken이 창세기3장에 기록된 동산기록의 일부분이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여 1926년 개혁교회들의 Assen총회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었을 때, 스킬더는 그에게 반대하여 쓰면서 이 총회의 교리적 판단을 옹호하는 글을 Hoornstoot tegen Assen?(아센을 뿔로 쳐받아?)라는 소책자제목으로 발표하였습니다.
동시에 짧은 글들 모음집이 출판되었습니다. Bij Dichters en Schriftgeleerden(시인과 서기관들 가운데서, 1927년)에는 종교에 있어서의 역설에 관하여 한 에세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논문을 위한 이 예비적인 작품에서 스킬더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의 명확성 혹은 명징성에 관한 개혁신학적 고백들을 방어하였습니다. 이 고백들을 그는 칼 바르트와 T.L.Haitjema와 같은 변증법적 신학자들에 대항하여 방어하였습니다. 성육신한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서 단순히 반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가운데에 거하시는(dwelt) 것입니다. 스킬더는 신명기30장과 로마서10장에 호소하였습니다: 말씀이 너에게 가깝도다! 그의 두 번째 장문의 작품, Tusschen “Ja” en “Neen”(예와 아니오 사이에서,1929년)는 칼빈과 신앙의 역설에 관한 에세이가 하나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Groningen국립대학의 Haitjema교수에 의하여 소개되어진 대로의 한걸음 진전된 변증법적 신학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기간을 살펴보건데, 우리는 스킬더가 하나님의 진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모든 주제들에 대해서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것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는 영들의 다툼의 숲속으로 자기자신을 던졌습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윤리신학”을 공격하였고, 개혁진영내에 있는 신비주의를 책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칼 바르트의 개념들에 저항하였는데, 그의 비성경적이고 거짓된 철학적 계획들을 간파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스킬더였던 것입니다.
출판활동에 있어서 이 첫 번째 십년 동안, 스킬더는 또한 성경의 새롭고도 적극적인 연구를 위한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작품들을 생산하였습니다. Van Bottenburg에 의하여 출판된 신약주석들 뿐만 아니라, C.Van Gelderen, M.Noordtzij, 그리고 (Korte Verklaring[간략한 설명] 시리즈에 있는) F.W.Grosheide와 S.Greijdanus와 같은 개혁신학적 주석가들의 작품들을 활용하여, 스킬더는 설교에 대한 구속역사적 그리고 계시역사적 접근을 전개하고 방어하였습니다. 종합과 상상력이 풍부한 연합을 위한 큰 은사를 축복받아서, 스킬더는 성경 안에 있는 다양한 사실들의 일관성과 연결된 점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젊은 개혁목사들 중에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하여 말씀을 영감된 방식으로 설교하는 일에 갱신을 유도하였습니다. 이 애씀은 1930년도에 최정상에 이르러 Christus in Zijn Lijden(수난받으시는 그리스도)라는 세 권의 설교집으로 발간되었고, 영어로 곧 수려하게 번역되었습니다. 시적이면서, 때로는 풍부한 언어로,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삼중직분을 강조하였는데, 그 직분은 선지자직분, 제사장직분, 왕의 직분입니다. 그것은 개혁신학적 주석과 개혁신학의 교의학을 결합시켰기 때문에, 이 작품은 진실로 의심할 바 없이 중요성이 참 큽니다. 스킬더가 사용했던 언어는 지금에서 보면 약간 구식으로 여겨질지 모르고, 스킬더의 종합하고자 하는 경향이 그로 하여금 약간은 억지 주석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큰 수난(passio magna)에 대한 삼부작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에 대하여 더 깊은 인식을 신자들이 가지게 해 줄 것입니다. 특별히 메시야로서의 그리스도를 더욱 경외하게 할 것입니다.
2) 1930~40년대
1930년 Christus in Zijn Lijden(수난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출간은 스킬더의 출판사역에 있어서 두 번째 기간인 1930~1940년의 기간을 표시합니다. 그리스도론에 대한 스킬더의 작품에 너무나도 유명한 Jezus Christus en het Cultuurleven(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생활)이 속합니다. 1947년에 미국으로 스킬더가 여행하는 중에 준비된, 그 두 번째 판은 Christus en Cultuur(그리스도와 문화)라는 다른 제목을 붙였습니다. 스킬더의 작품에 친숙해지기를 원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뛰어난 입문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사명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직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하이델베르그문답 12번째 주일을 위한 문답에 일치하게 강조합니다.
스킬더의 생애를 개관하면서 우리는 그의 학위논문인 Zur Begriffsgeschichte des “Paradoxon”(“파라독스”개념의 역사, 1933년)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저자의 철학적 지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초기연구들(1927년과 1929년)에 보조를 맞추면서, 스킬더는 죄렌 키에르케고르와 칼 바르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비합리주의에 반대하면서, 스킬더는 주장하기를,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의 죄악들(our sins of thought)을 제거하신다고 하더라도, 생각의 법칙(His laws of thought)을 없애버리시지는 않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논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하여 칼빈이 말하였던 것을 복습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칼빈과 더불어서 스킬더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결코 고갈되지 않고 언제나 순수하고 참되다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적응적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우리의 이해능력에 적응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논제는 암스텔담의 자유대학에서 H.M.Kuitert의 학위논문인 De Mensvormigheid Gods (하나님의 신인동형론적 본질)을 통해서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한 성경 속에 나오는 신인동형론이라는 연관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믿기로는, 스킬더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Kuitert 박사는 스킬더를 부정확하게 읽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적응이라는 동일한 주제가 또한 J. De Jong의 학위논문의 주제였습니다.
1934년 1월, 스킬더는 캄뻔신학교의 교의학교수직을 맡으면서 수락연설을 하였는데, 그 안에서 그는 한 번 더 변증법적 신학과 실존주의철학을 주제로 삼아서 그것들에 대항하여 성경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순종(faith-based obedience to the Scripture)을 강조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이 수락강의를 출간하지는 않았는데, 그 내용의 많은 부분들이 그가 1934년에 하였던 한 기념연설 후 출간한 De Dogmatische Beteekenis der Afscheiding Ook Voor onzen Tijd(오늘을 위한 ‘분리’의 교의학적 의의)의 각주들 속에 광범위하게 포함되었습니다.
이 강연은 ‘분리’운동이 도르트신조에 어떻게 일치되는가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르트신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적인 은혜를 고백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현존하시며 또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하시지,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대 속에서 그리고 연령에 있어서 스킬더는 도르트가 칼 바르트의 신학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이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도르트의 전제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1834년의 가장 확신에 찬 자유주의들보다도 더 멀리 도르트신경으로부터 이탈되어지는 자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것들을 받아들인다면, 그와 더불어서 우리는 기꺼이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우리가 모두 함께 교회의 신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선한 애국자들이고 또한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며, 에큐메니칼 기독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진정성이 있고 개혁주의적 에큐메니칼한 논조를 우리는 또한 그 아름다운 소책자, “Ons Aller Moeder” - Anno Domini 1935(우리들 모두의 어머니- 주후 1935)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화란어로 지금까지 씌여진 것들 중 교회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변증서”라고 불러져 왔습니다. 스킬더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화란개혁교회를 향하여 호소력있는 요청을 결론짓습니다:
“우리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해에, 하늘에 거하시며 그곳에 좌정하사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분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하늘의 위계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를 위하여 무엇을 하겠습니까?....그러면 이제, 계시된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그것을 지금 곧 하라, 그것을 언약적 복종으로 곧 하라. 주후 1935년, - 어떤 것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의 의견에, 이 소책자는 모든 신성한 체하는 분파주의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성한 체하는 모든 불순종에 대항하여 지금도 타당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는 사역을 진행하고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기도 한 것입니다.
스킬더는,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1933년) 국가사회주의의 냉혹한 얼굴에 직면했었는데, 화란에서의 국가사회주의운동에 믿음과 용기로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그는 그것의 철학적 배경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헤겔, 와그너, 그리고 니이체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로젠버그와 그의 20세기의 신화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그의 1936년의 소책자 Geen Duimbreed!(손톱만큼도 안돼!)의 제목과 내용들은, H.H.카이퍼(역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장남으로서 나찌체제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음)에 반대하여 제출한 1936년의 암스텔담총회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서, 그가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여 설립된 반혁명당의 원리들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는 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학생들은 스킬더의 강의노트를 출판하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그는 신학의 서론적 질문들을 윤리와 더불어, 그리고 교의학에서 특별히 신론과 함께 다루었습니다. 이것과 병행하여, 그는 개혁주의신앙고백서들에 나오는 교회와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주제강의들을 하였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한 책을 출간한 뒤에 언약교리가 다시금 스킬더의 주의를 온통 사로잡아서 10개의 시리즈글들을 발표하였습니다. 스콜라주의적 카이퍼주의에 반대하여, 스킬더는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게로 되돌아 갔습니다. 2차대전 후, 그의 인생 후반기에도 비슷하게 스킬더는 그의 교의학연구에 있어서 더욱 뒤로, 곧 소위 교부들에까지 되돌아갔습니다.
그의 책 Wat is de Hemel?(무엇이 천국인가?)에서 스킬더는 이미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였습니다. 1930년대의 언론상의 논쟁 동안, 카이퍼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혐오감을 갖는 자들 편에서의 비판이 그러한 것처럼, 그의 비판은 날카로워졌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학의) 낮은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암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곧, 1936년 암스텔담총회에서 그리고 Dr.V.Hepp의 시리즈소책자들 Dreigende Deformatie(임박한 개혁퇴조)에 그들의 이런 견해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또한 언론에서 카이퍼의 다중형태교회론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에서 스킬더는, 언약적 순종과 참된 교회연합에의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위하여, 전심을 기울여서 참된 교회들과 거짓된 교회들을 신앙고백적으로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변증들을 주고받는 중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독일군이 화란을 침공하였습니다.
도덕적 연약함과 윤리적 강건함이 동시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때입니다. 윤리적 강건함에 대해서 스킬더의 글들은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난처를 떠나시고, 여러분의 제복을 착용하십시오!” 국제법에 강력히 호소하면서 스킬더는 영적 자유를 위한 전투를 싸웠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펜을 사용하여 국가사회주의라는 반기독교적 이념에 대항하여 지치고 않고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1940년 8월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권위(authority)와 권력(power), 다행스럽게도 두 가지 사실들로 남게 됩니다. 결국 적그리스도는 후자(권력)를, 교회는 전자(권위)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위대한 추수의 날이 올 것입니다. 오소서, 추수의 주님이시여, 예, 급히 오소서, (영국)해협을 넘어서 그리고 브렌너협곡을 넘어서, 몰타와 일본을 통해서 오소서, 그렇습니다. 땅끝에서부터 오시되, 주의 전지용 검을 가지고 오소서.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소서; 그것은 넉넉하게, 하지만, 오직 주를 통하여서, 주님만을 통하여, 주님의 영원하시고 선하신 즐거움을 따라서, 권위를 지니고 되나이다.”
그리고는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Bezet Bezit(정복당한 소유물)이란 책은 지금도 읽기에 매력적인데,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스킬더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저항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 전쟁 이후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곧 1982년에야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전쟁 가운데서, 훗날 자기의 처신을 후회하게 되는, G.C.Berkouwer의 지도 하에서, 스킬더는 자신의 직분에서 면직되고, 그렇습니다, 축출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캄뻔의 그 교의학자(역자: 스킬더)는 자신의 전심을 다하여 그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es)을 사랑하였고, 자신의 엄청난 정신적 능력을 사용하여 이 교회와 그 고백서들을 바깥으로부터의 공격과 안으로부터의 변질로부터 방어하였습니다. 그런데, 1944년 그 어둠의 해에, 이 교회의 총회는 그가 독일군에게 도망을 다니고 있는 와중에 그를 교수와 목사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화란의 해방과 ‘개혁교회’ 안에서의 해방은 그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제 3기, 마지막 기간의 시작이었습니다.
3) 1944~52년
마지막 기간은 스킬더의 생의 마지막 8년 동안(1944~52년)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교회의 해방을 위한 싸움, 새로운 교권적 교회정치에 대항하는 싸움, 그리고 1939~42년과 1943~45년의 총회들에 의하여 부과된 성경을 넘어서는 교리들에 교회가 매이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들에 관한 수많은 글들을 쓰고 소책자들을 발간하였습니다.
Looze Kalk(길들여지지 않는 몰타르)라는 소책자에서, 스킬더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생을 통해서 그리고 중생 안에서 세워지는 것으로 간주했던 J. Ridderbos 박사의 이론에 반대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언약과 선택을 상호간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말씀의 독특한 성격을 분연히 방어하였습니다. 우리는 약속이 택자에 대한 하나의 예견인 것처럼 취급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당신의 언약의 자녀들 모두에게 차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이 수반됩니다. 스킬더는 신자들의 권리와, 또한 의무를 지치지 않고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잘못된 신학적 견해들로부터, 그리고 합당하지 못한 교회권징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도 사소한 다양한 일들에 소진하였는데, ‘해방교회’(the Liberated Churches)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점들에 대한 것들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기간 중에 그는 여러 책들의 새로운 판들을 준비하였고(예를 들어, Christus in Zijn Lijden의 1권과 2권), 또한 하이델베르그문답에 대한 그의 주석을 계속하였습니다. 전쟁전부터 그는 이 주석을 De Reformatie지에 매주 삽입하는 형식으로 이미 시작하였었는데, 전쟁 후에 첫 번째 부분을 다시금 썼고 계속해서 집필하였습니다. 네 권의 그 기념비적인 책들은 주의 날 1~10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킬더의 죽음 때문에 비록 이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되었지만 그것은 그의 교의작품 중 최고작입니다. 그것은 스킬더의 강연들을 구체화시키고 있고, 종교개혁 당시로부터의 신학적인 저작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와 라틴교회의 교부들의 저작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독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Heidelbergsche Catechismus 안에서 변증법적 신학에 대항하는 싸움이, 예를 들면, 바르트의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관한 추론을 탐색하는 재고 가운데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das Nichige(무, 無)의 개념에 대하여 써서는 하나님의 오른 손의 일과 왼손의 일을 구분하였습니다. Heidelbergsche Catechismus 의 3권에서 스킬더는 바르트의 가정들과 전제들에 대하여 논의하였습니다. 그 작품은 또한 일반은총에 대한 보고서들을 발행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퍼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에 대항하여 1939년 ‘개혁교회’의 총회를 위하여, D.H.T.Vollenhoven박사와 더불어서,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2차대전 이후의 학문적 강연들에서, 스킬더는 일반은총이란 표현이 신학적으로 정당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훗날 J. Douma박사가 보여주었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킬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답변한 것을 옳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1951년 12월 캄뻔신학교에서 스킬더가 전하였던 그 마지막 학문적 연설은 Heidelbergsche Catechismus 네 번째 권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의 토론 속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스킬더는 De Reformatie지에 마지막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마지막 연구주제와 보조를 같이 하면서, 그는 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닫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열고 닫으시는 하나님의 손이 클라스 스킬더를 1952년 3월 23일 이 땅에서 취하여 가시고 그에게 그 수고로부터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행위는 그를 뒤따를 것입니다(계14:13).
3. 스킬더의 생애와 작품의 의의
세 분기로 그의 출판물들을 조사해 보면서, 우리는 스킬더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언약의 하나님의 신뢰성 있는 말씀에 전념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주관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위하여 싸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킬더는 언약의 하나님에 의하여 말씀하신 그 말씀의 신뢰성과 내용들에 충분히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어떤 사상에 대항해서도 전투를 벌였습니다. 성경에 복종하면서 그는 개혁신앙의 고백서들을 신앙의 통일성의 훌륭한 표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통일을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이 결론을 약간만 더 발전시켜 말한다면, 우리는 스킬더의 신학의 정의, 그리고 특별히 그의 교의학에 대한 정의를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속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과학적 지식입니다. 교의학은 성경에 복종하면서 교의의 문제들을 에큐메니칼 신조들과 일치되는 선에서 공감하고 또한 비판하면서 그 내용들을 재생산하는 일을 조직화하고 또한 체계적으로 취급하는 과학입니다. 이 정의를 아브라함 카이퍼의 것과 비교해 보면, 스킬더는 성경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분한 정당성을 보여주기를 원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알려 주셨고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하셨기 때문에,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설명은 권위와 선명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되,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세 가지 방식으로 역사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의와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을 변호하였습니다. (1) 바르트와 브룬너의 변증법적 신학에 대항하여, (2) 카이퍼신학의 스콜라주의적 요소들에 대항하여, 그리고 (3) 도이벨트의 철학 속에 있는 몇가지 카이퍼적 개념들에 대항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1) 특별히 그의 변증법적 신학과의 싸움에 있어서 스킬더는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의 신뢰성이라는 주제로 반복해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에 계시되어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뢰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 성경 앞에 무릎을 꿇는 이들에게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짓된 철학적 전제에 기초해서 성경의 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cannot be)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대해서는 특별히 오만한 태도로 대응합니다.
1927년에 이미 스킬더는 Bij Dichters en Schriftgeleerden(시인들과 서기관들 가운데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든 계시에 있어서 명확성을 조롱해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이미 그것을 언급하였습니다(신30:11~14). 그는 계시에 있어서의 명확성을 말하기 전에는 세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계시된 말씀의 명확성에 대한 이 모세의 언급을, 그 위에 모든 기독론을 세우면서, 메시야의 도래라는 주제에 통합시키고 있습니다(롬10:5~9).
그 밖에 무슨 일을 그가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이 된 그 말씀의 명확성이 육체가 되는 그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육신하신 이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서 단순히 깜빡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교수석을 차지하여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192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1929년에는 그의 이 입장을 Tusschen “Ja” en “Neen”(예와 아니오 사이에서)에서 이런 말로 재진술하였습니다:
“‘위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칼 바르트가 진지하게 의도하였던 바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명백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희롱섞인 완곡어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때때로 어린아이들이 저지르는 범죄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금 질문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것과는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백한 것인데도 그 명백한 것을 회피하기 위하여 질문하는 그런 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위선적인 게임은 하나님께서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입술에 있고 마음에 있다고 모세는 말합니다.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면서 자기 백성과 그 역사를 탐사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나 율법의 명확성, 명백성, 습득가능성, 수평적인 유용성이 모세의 연설 속에 명백하고 위로 섞인 말로 표현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차대전 이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스킬더는 다음과 같이 G.C.van Nifrik 박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van Niftrik교수는 바르트주의자가 되기를 원하시는데, 바르트는 성경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로서 여러 형태들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gestalt)가 된다는 것은 ‘본질’(gehalte)의 반대입니다. 역설적으로, ‘gestalte’(형태)는 ‘gehalte’(본질)의 정반대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의 모든 장들이 하나의 형태로서 존경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자들은 다음의 말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 신학자들은 성경의 모든 장들을 공간에다, 곧 하나의 형태로서 모아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본질로서는 그것들 모두를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모욕적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상황을 엄숙하게 평가하고 있는 바입니다.....제가 바라기는, van Nittrik 박사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무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에 거슬리게 하는 불신앙의 세력들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마지막 요새로서, 내용들을 전달해주는 하나의 메시지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신뢰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신뢰성이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보게 됩니다.
(2) 카이퍼의 “즉각적인 중생”(immediate regeneration)론을 반박하면서 스킬더는 그 이론이 중생케 하는 말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언약과 세례에 대한 “총회파의” 관점에 대항한 그의 전투에 있었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약속을 말씀하시지만, 택자들의 머리 위에 지나가는 하나의 예견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약속은 하나의 개인적인(personal, 인격적인) 서약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의 메시지이며, 회개와 믿음을 가지라는 명령이 수반되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이 점에 있어서 뿌리 깊은 자신의 확신에 신실하게 머물러 있었고, 또한 자기 친구 H. Hoeksema와 미국의 개신교개혁교회(Protestant Reformed Church: PRC)에 반대하였습니다. 성경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위험의 지속성을 경고하는 그의 전단(1950년)은 PRC가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기본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교리적 진술에 대한 반응으로 쓰여졌습니다. 그것은 캐나다와 미국의 개혁교회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성이 없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도이벨트의 Wijsbegeerte der Wetsidee(우주법개념철학)과 관련된 스킬더의 입장에 관하여서 살펴보면, 스킬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의 중요성에 너무나도 민감하였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여기서 누구든 스킬더가 도이벨트의 신앙기능(faith function), 소위 피스티칼 팡션(pistical function)이라고 하였던 개념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였던 비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하이델베르그문답 중 7번째 주일문답을 해설하면서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욧점은 스킬더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분의 계시에 대한 반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에게 말씀하신 당신의 말씀 속에 나타내신 당신의 계시를 통해서 오게 됩니다. 스킬더는 도이벨트의 우주법개념철학체계 속에서는 그 내용들과 함께 그 말씀이 그 마땅히 여겨져야 할 중심위치에 오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킬더 자신은 거짓된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서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는지 누구라도 질문할 것입니다. 특별히 그의 책 Was is de Hemel?(무엇이 천국인가?)에서 그는 때때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는 생소한, 영원과 시간의 이원론으로부터 추론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와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와 작품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를 불러 모으는 일에 있어서 중요하였습니다.
요약
부정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성경의 정상성을 대체시키려고 하는 주관주의에 대항한 그의 전투에 있어서 스킬더의 중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의 신뢰성을 그가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방어하였습니다: “말씀이 네게 너무 가까우니라”(신명기30장; 로마서10장).
개혁적이 된다는 것은 심오하게 행복한 일이다고, 스킬더는 언젠가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 행복을 낙원과 관한 자신의 생각과 연결시키면서 고백하였습니다. 개혁적인 된다는 것은, 또한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성경을 인식한다는 점에서도 심오하게 행복한 일입니다.
스킬더의 천국론 - J. Kamphuis/번역: 손성은
2019-04-08 01:36:09
스킬더의 천국론
J. Kamphuis/번역: 손성은
스킬더의 『What is Heaven?』(1935)은 호소력이 있는 조화의 특징이 있는 교의학적 논문입니다. 하나님의 작품들의 절정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혁신학적 태도 안에서 반영되어지도록 허용되고 있는 “그 심오한 행복” 때문에 이 논문으로부터 하나의 노래가 올라옵니다. 이 찬송과도 같은 교의학적 논문을 (정확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책은 하나의 전체로서 읽혀져야 합니다: 사고의 진전 가운데서 각 부분이 전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몇 페이지의 글로 압축시킬 수가 없습니다. 고딕성당의 장대함을 축소형으로 미니건물을 세움으로써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큰 성당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그것을 깊이 숙고해 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아래에 뒤따르고 있는 것은, 저는 요약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요약하는 대신, 저는 몇가지 욧점들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책을 단순히 소개하는 정도로서 말입니다.
1. 『What is Heaven?』은 - 1934년 스킬더가 교수가 된 이후 첫 번째로 나온 단정적(thetic)-교의학적인 출판물인데 - 그의 작품에 있어서 중심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종말론의 주제에 집중하면서, 변증법적 신학과 그가 직면하였던 그 결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출판물들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될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그문답에 대한 그의 주석 안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 곧 삼일일체, 하나님의 협의, 언약, 약속과 명령이라는 용해될 수 없는 그 상관성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말해지고 있는 말씀, 소위 일반은총문제, 등등에 대한 고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주제들은 집중적이면서도 분명한 방식으로 『What is Heaven?』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본서를 접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스킬더의 신학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서론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타협없이 스킬더는 성경에 대한 신앙, 특별히 원래의 의로움의 상태와 죄로 타락하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2장과 3장의 역사적 신빙성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본서에서 스킬더는, 창세기2장과 3장의 기록의 역사적 신빙성에 관한 1926년의 Assen총회의 결정을 심지어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erkower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What is Heaven?』에 놀랍게도 적용됩니다: “아센의 결정이 스킬더에게만큼 중요한 것처럼 그 내용에 있어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취급되었던 신학자를 개혁신학계에 있어서 나는 아무도 모른다.” 스킬더는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줍니다: “세상의 시작과 관계해서 우리는 창세기1~3장의 역사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스킬더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여러분은.....의로움의 상태에 있음을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다면, 그러면 여러분과 우리 사이에는 성경이 놓여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스킬더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특별히 변증법적 신학의 대변자들과 그들을 온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1935년에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오늘날에도 그 힘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자기 자신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에 종속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을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오직 지상에서일 뿐이다”는 명제를 개진하는 반면, Kuitert와 같은 이들은, “계시 자체는 위에 대하여 아래로부터 주어지는 말이다”는 입장을 전개합니다. 이것은 스킬더가 자신의 계시의 신학 - 곧 계시라는 위에서 오는 것이며 믿음을 요구한다는 그 신학 안에서 경험에서 시작한다는 어떤 신학도 반대하는 입장을 이미 취해왔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입장이 나눠집니다. 동시에 성경에 대한 개혁신학적 신앙the Reformed belief in the Scripture)이 『What Is Heaven?』에서 보다 더욱 설득력있게 그리고 더욱 아름답게 그 생명력을 논증한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What Is Heaven?』을 읽은 이후에 성경에 대한 이 믿음을 근본주의라고 폄하하는 자라면 스스로 자신에게 영적이고 신학적인 불능자라는 증명서를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3. 스킬더는 다시금 변증법적 신학을 반대하면서 역사의 통일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썼습니다. 그러므로, 『What Is Heaven?』의 2장에서 그는 이 신학에 대한 반대입장을 솔직하게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역사의 통일성과 가치였습니다: “역사는 또한 하나님의 활동이며”, “하나님의 활동을 위한 틀이며....그것 자체로서 하나님의 활동이다.” 『What Is Heaven?』의 그 사로잡는 효과는 스킬더가 용감하게 하나의 정체되고 움직임이 없는 영역으로부터 하늘을 떼어내어서 하늘도 역사의 틀 안에서 취하여진 것으로 본다는 사실에서 추출됩니다. 태초론(첫번째 일들에 대한 교리)과 종말론(마지막 일들에 대한 교리)는 그래서 동일한 관점에서부터 고려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을 완전히 역사의 틀 안에서 말함으로써, 스킬더는 개신교 교의학의 “구분을 위한 욕구”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욕구는 “천상의 영역들을 떼어놓고자 하는 것인데, 하나를 다른 것에 대해서 정적으로 반대되는 편에다 놓고, 천국 자체를 지구의 반대쪽에 있는 하나의 정적인 거리 속에다 고정시키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이끄셔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하시는 것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역동적-역사적 사고를 교회에 관한 스킬더의 생각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구분(가시적-비가시적, 전투적-승리적, 등등)을 위한 모든 욕구들에 반대합니다: “(교회의) 불러 모으는(gathering)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이런 분류의 기준들은 교회에 관한 많은 오해들의 원인입니다.”
4. 스킬더가 개신교 교의학이 “역사의 요소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 때문에 그것을 비판할 때,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16~17세기와 19~20세기(카이퍼와 바빙크)의 개혁신학의 교의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스킬더가 자기 자신의 전통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배경이었고 배경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분명하게 이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종말론의 변증법적 이해(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치 원둘레를 직선이 스쳐지나가듯이 우리의 역사에 단지 순간적으로만 스쳐지나가는 것에 관한는, “오래된, 그리고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의미”의 종말론과 구별되어집니다. 이 오래된 종말론을 우리가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종말, 마지막 일들, 역사 속에서의 마지막 일들, 역사의 최종적인 행위”의 교리를 말입니다. 우리가 스킬더의 입장을 그가 태초에 있었던 일들에 관하여 말한 것 바로 옆에 두게 될 때, 우리는 스킬더의 사고가, 창조와 재창조의 통일로 시작하면서 의로움의 상태에 관하여 성경의 진실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전통과 너무나도 분명하게 일치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H. Bavinck의 『개혁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에 있는 의로움의 상태에 관한 장을 읽어보면 그것이 이것을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한 구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 길의 끝점에 서 있지 않고 시작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상태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이었습니다. 이전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높은 영광으로 올라가든지 아니면 죄와 죽음으로 떨어져야 했습니다.”
5. 하지만, 스킬더의 사고의 독창성은 그가 이 “더 높은 영광으로 올라가는 것”을 (그에게는 전적으로 중요한) 고린도전서15장과 일치하는 “충격”개념과 결합시키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곧 이 변화무쌍한 세상을 절정의 세계로 옮기는 것 말입니다. 창조 이후의 세상의 점진적인 발전과 하나의 충격적인 운동에 의하여 이 세상이 오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변혁을 통합시키는 스킬더의 생각은 모든 진화론과 수평적인 문화적 낙관주의로부터 그를 구별시켜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리고 초월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창조의 때의 과정에서 개입하셨던 꼭 그것처럼 역사의 마지막에서도 개입하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새로운 어떤 일(chedasjah)을 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낙원에서 있었던 전망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킬더가 여기서 구조적인 것,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하여, 구조적인 것으로부터 사람이 이미 낙원에서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으로 반복적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많은 예들이 있지만 한 구절만 인용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낙원에서 인간은 그때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옮긴다는 그의(곧 사람의) 개념을 그의 마음으로부터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역자: 옛것을 새것으로 옮긴다는 그 개념)은 (그의 생각)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가 죄가 없는 한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계시 사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스킬더에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의 논증의 의도와 핵심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은 비록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적 개입에 의존하여 있지만,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길에 있어서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고 또한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스킬더는 그가 종말론을 다룰 때마다 지속적으로 태초론에서 출발점을 취하였습니다. “뒤따르는 모든 것은 태초의 빛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 흐름이 종말에는 어디로 흘러갈 지를 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곳이 그의 신학의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입니다. 스킬더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구조적인(structural)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일반은총 개념에 대하여 그가 반대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곧, 이런 식으로 “타락 이후에 여전히 남겨져 있는 그것”이 우리의 사고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7. 스킬더의 사고는 하나님-중심적이며, 그리스도-중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중심적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직분담당자로서 시작하였습니다. “직분의 개념 안에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원초적인 권리를 보게 됩니다.” 태초론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종말론에 관한 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그 절정의 영광으로 데려오시는데, 그분의 평화의 언약(pactum salutis) 덕분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스킬더는 다시금 자신이 서 있기를 원하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찬양하는 것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편견이 아니라 놀라움 때문입니다: “개헉신학은 오래전부터 이 일들을 고려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전통은 그렇게 하도록 예정되어져 있습니다; 그 전통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는 것 말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중심적입니다. "개혁신학의 교의학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하나의 ‘두번째 역사’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주 태초에 목적하셨던 그것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생각에 충실하게 남아 있기 위해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 다음에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고백이 오게 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형벌을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에 대한 고백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담이 자기 손에 그것을 지키지 않았던 그곳에서 다시금 역사의 선(‘행위’언약으로 죄 가운데서 타락하기 이전에 이것이 시작하였던 그대로)을 붙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서 아버지에게 당신의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순종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그리스도 그리고 문화”인 것입니다.
8. 심지어 누군가 자기 자신을 성경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스킬더와 함께 같은 생각을 가지자로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비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비판이 간혹 희화의 형태를 띄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킬더가 천국을 “차갑고 정적이며 딱딱함”의 지역으로 묘사하기로 원하였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역사의 완성으로서의 절정 가운데서 “사람과 함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스킬더가 그 절정 안에서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동일한 것이 될 것”이라고 진술할 때, 이것은 일하는 것이 그치게 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킬더는,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이 언제나 다시금 오고 있는 것(coming)이 없을 것이고 오히려 옛언약과 새언약의 잔치들의 언제나 다시금 이뤄진(being gone) 것만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이 모든 것이 폐지될 것입니다. 그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바로 자신의 그 섬김 가운데서, 종이 주인입니다. 그곳에서는 구하는 이는, 바로 그 구하는 일에 있어서, 재물로 풍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 영원한 희년의 해 안에 포괄되어 있습니다.” 저는 스킬더의 관점을 “차갑고 정적이며 딱딱한” 것으로서 천국을 보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이런 비판은 하나님의 역사들을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고 할 때의 그 완성(fulfillment)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런 비판과는 달리, 스킬더의 신학, 그 기대(expectation)의 신학의 목욕탕은, 신선합니다. 스킬더가 그 완성의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엄청 애를 쓰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 간혹 간과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펜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킬더가 과연 이미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 아닌가를 우리가 질문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 “새로운 세계”는 더 이상의 어떤 발전도 알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만개하다”(to bloom)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그곳에서 만개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의 완성된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이 만개상태를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말하였습니다....새로운 세계 속에서 ‘만개하는 것, 아무런 시작도, 아무런 성장도 알지 못하는...” 처음 보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주의를 요구하는 진술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 그것은 매우 대담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스킬더는 그것을 인간에게 내적으로 적용시키기조차 합니다. (물론) 스킬더가 생명의 식물적이면서 성적인 상태는 그것들의 봉사(service, 이 맥락에서 중요한 단어임)를 완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때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부터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직분이 그 오는 세상에서 어떤 발전도 더 이상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직분과 자신의 주님과 교제하면 사는 크리스챤들의 직분들을 다루고 있는 하이델베르그문답의 12번째 주일문답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나는...이 생애가 끝나게 되면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명성구들도 분명합니다(딤후2:12와 계22:5). 하지만, 스킬더의 생각 속에서는 이 구절들이 기능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킬더가 역사의 완성에 주목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완성을 단지 아버지에게 아들이 신실한 자들을 바치게 되는 것 속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이제 그 왕국이 아버지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그들을 아버지에게 드립니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완성된 그 영광의 왕국에서 그분의 합당한 위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스킬더가 곤란해 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론 사이에 있는 그 관계에 대한 그의 이해의 곤란함에도 연관됩니다.
스킬더의 종말론에 있어서,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말하자면, 존재론적 삼위일체 속으로 동화되어 버립니다.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이 경향은 하나의 위협으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슐라이에르마허 이후의 신학 안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은 “소위”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굴복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교리와 생명에 치명적인 상처를 부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적인 경향이 스킬더의 신학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향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였습니다. 스킬더는 “세상의 보존은 영원토록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일 것입니다”고 어느 고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창조의 보존은 당신께서 삼위일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일들 속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일입니다. 하지만, 금방 인용한 것과 같은 이런 진술조차도 눈에 띄이도록 결핍되어 있는 것이 바로 스킬더에게 있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보존하심을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그분의 통치하심에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는 그 오는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가 이런 통치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왜 그리스도와 더불어 인간이 만물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이유일까요? 하지만 - 비록 우리는 구체적인 지식을 위하여서는 그 오는 세상을 기다려 보아야만 하겠지만(1요3:2) -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당신 자신의 목적으로 남아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영광이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만물을 다르시게 될 그 직분(the office, the munus)을 공유하게 되는 그들의 목적으로도 남아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이 전개될지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기대감을 올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의 기업과 그것을 물려받을 상속자들에 대한 성경적 개념들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9. 하지만 이 비판은 『What Is Heaven?』에서 보여준 크리스챤 사상에 대한 스킬더의 공헌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을 제거시켜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평주의”에 대해서 주의하면서,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니이체가 묘사한 그런 태도가 아닌, 진실로 크리스챤의 태도로 “지상에 신실하게 남아있기를” 실제로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스킬더는 역사의 가치를 선포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그의 메시지의 동시대적인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활동의 틀로서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우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그는 이 관계 속에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기대의 결핍은 “이 피조된 생명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데,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만 아니라, 또한 사람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죄인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1930년대에 쓰여진 이 교의학적 저서가 지구와 생명 자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에 직면하고 있는 20세기 끝에서 그 시의적절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에 대한 개혁신앙이 우리들 시대에 그 관련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믿는 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시대의 이런 질문들에 답변하고, 동시대의 문제들을 용감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대응해야 하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스킬더는 그가 죽은 지 거의 40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기에서 하나의 선구자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을 바라보면서, 그는 하나의 결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곳으로부터 그는 이 지구를 건너고 우리의 역사를 통과해서 그 미래에까지 이르게 되는 그 길을 가리켰습니다. 그는 광대한 관점들을 구하였고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심장은 기뻐하였고, 하나님의 회중의 심장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공통적인 출발점의 기초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기초에 있어서, 스킬더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이 기쁨이 단순히 신기루(fata morgana)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거처가 사람과 함께 하게 될 대 그 완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곧, “행위언약”, “은혜언약”, “자연언약”,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 이 모든 언약이 성취될 때 말입니다. 그래서 또한 그 안식, 문화-역사적 평화와 우주적 평화를 보장하는, 그 안식도 성취될 것입니다. 다시금, 우리들 앞에 전망들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상가나 몽상가가 아니라, 오순절의 회중 가운데에 하나의 예언적 선견자를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킬더의 언약론 S.A.Strauss(번역: 손성은)
2019-04-06 21:47:09
스킬더의 언약론
S.A.Strauss(번역: 손성은)
원천으로 돌아가라!
클라스 스킬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언약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썼다는 점은 어쩌면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즉각 강조해야 할 점은, 그의 수많은 저작물들 중의 어느 곳에서도 언약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상황은 오히려 그의 신학적 저작물들 가운데서 때로는 예상치 않은 자리에서 언약이란 용어나 개념이 항시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태는 스킬더가 언약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제시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어렵게 해주고 있습니다. 언약에 대한 그의 관점을 짧은 한 장에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한 2차자료를 하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스킬더의 복잡한 사고의 흐름이 전체적으로 논리적이고 이해할만 한 것으로 해석되어져 제시될 수 있겠습니다. 나의 희망은, 이것이 스킬더의 관점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그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소고의 주관심사항이 스킬더 자신과 그의 언약에 관한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유명한 격언을 여기서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화란어로 저작활동을 하였는데, 그 화란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스킬더의 작품들을 영어로 직접 번역할 것입니다. 단지 중요한 측면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면 화란어원본을 첨가할 것입니다.
스킬더의 언약론에 대한 검토를 어디서부터 하는 것이 좋을까요? 스킬더의 저작물을 집어들기 전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미리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란어에 익숙한 독자라면 J.J.C.Dee의 최근에 발표된 논문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특별히 공헌하는 바는, 스킬더의 출판물들(1934년까지의) 분명히 그의 생애의 맥락에서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 소논문이나 책자들이 기록된 그 상황들을 아는 것은, 그 내용들을 이해하는 것을 무척 쉽게 해 줍니다.
이 필요한 배경정보를 위하여, 그가 다소 분명하게 언약을 다루었던 스킬더의 중요한 몇 가지 저작물들을 여기에 언급합니다. 지옥에 관한 그의 책에서 그는 이미 “설교의 영역에서 언약의 개념은 그 모든 좌석을 차지할 자격이 있습니다”와 모든 설교들은 “사실 언약에서 그 출발점을 취해야 합니다”는 진술로 자기의 관점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관한 그의 유명한 책에서도 스킬더는 언약의 다양한 단계들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히 토론하고 있습니다. 화란의 개혁교회 안에서 다양한 의견들(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특별히 언약과 세례에 대하여)이 분출되던 것이 바로 이때였고, 그것들이 1936년에 모였던 총회석상에 놓여졌습니다. 열정적으로 스킬더는 이 토론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해에 그는 언약에 관한 묵상글들을 시리즈로 썼습니다. 이 묵상글들은 비록 이미 1936년 1월에 인쇄작업이 들어가긴 했어도 그가 죽은 후에야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지니고 있습니다. 매주 출간되었던 그의 De Reformatie지를 통해서 가졌던 V.Hepp교수와 J.Thijs박사와의 변증적 토론도, 또한 언약에 대하여 가치있는 주석들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대될 수 있는 바대로, 스킬더는 1944년에 있어서 ‘해방’ 이후에도 여러 번 언약에 대하여 분명하게 썼습니다. 예를 든다면, “총회파” 개혁교회편에 있는 저자들의 고소에 대항하여 그의 반박글과 하이델베르그문답에 대한 그의 주석 두 번째 권 속에 있는 글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의 출판물 외에도, 그의 강의노트들도 언약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미국에 첫 번째로 방문했을 때 강연하였던 것들과 1943년 ‘개혁교회’의 총회보고서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그가 제공하였던 강연들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들에 대한 이 짧은 개관으로부터 이미 분명해지는 것은, 스킬더는 단순히 자신의 연구실에만 쳐박혀 있었던 학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당대의 교회의 논쟁들에 깊이 연루되었고, 치열한 토론들 가운데서 자신의 관점을 개발시켰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 후계자들의 스콜라적 신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칼 바르트의 현대신학과 싸웠습니다.
스킬더는 두 학파 가운데서 동일한 약점을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그 약점들의 동기는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언약론의 관점에서 두 학파 모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관점에서 너무나도 강하게 사고하였기 때문에 언약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이 평가절하될 정도였습니다. 반대로, 이 책임감란 것이 스킬더 신학의 기본적인 동기였습니다.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책임감이 있는 존재로서 취급하시고 인간에게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 하는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서 언약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책임감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하였는지는 다음 장에서 논의될 것입니다.
역사적 실재
그의 시대를 위하여 스킬더는 역사의 의미를 강력하게 강조하였습니다. 개혁신학적 교의학자들 중에 유행하는 견해는 논의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스킬더는 (여하튼 언약교리에 관한 한)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들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간을 강조하였고 다시금 언약은 단순히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실재인 것입니다. 그 당시 언약에 대한 논쟁들을 요약하면서 그 끝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의 평화의 협의(vrederaad)와 그분의 은혜의 언약은 날카롭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을 본질적이라는 확신과, 또한 선택과 언약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의 수단으로 “시간 속에서” 맺어지는 것인데, 그것으로 언약의 “실제적이고, 역사적인”(werkelijke, historische) 설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역사 속에서 출발점을 갖게 되는 것이 스킬더가 초역사적인 하나님의 작정에 있는 언약의 배경을 부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그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언급합니다 – 심지어 너무 많이 언급해서 간혹 그를 비판하는 이들이 그가 이중예정(선택과 유기)에서 논쟁하여 타락전예정론의 방향으로 너무 많이 기울고 있다고 고소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스킬더의 어떤 진술들은 이런 비판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스킬더가 기록한 모든 것들, 특별히 언약에 관하여 그가 말하고 있는 바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는 자라면, 그가 대부분 양면을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협의(Gods daad in de eeuwigheid)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행동(Gods daad in de geschiedenis). 이 두 가지 진리들이 분리될 수 없지만 결코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스킬더는 자신의 신학방법론을 “삼위일체적-역사적” 방법론이라고 선택하여 불렀습니다. 곧, 한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스킬더가 언약의 역사적 측면을 그렇게 많이 강조한 이유는 다시금 그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가 1934년 교수직을 받아들였던 직후 1834년에 있어서 화란국가교회로부터 “분리”운동의 교의학적 의의에 대하여 중요한 강연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칼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문화비판적, 변증법적 신학과 맞짱을 떴습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개혁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다른 역사관을 고백하게 된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만약 도르트신경으로 우리가 중생과 성도의 견인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또한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의 삶에 개입해 오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수평적으로 간섭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선이 원둘레를 접하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현실을 접촉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우리들의 존재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것은 현존하고 있는 구원(a praesentia salutis)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똑같이, 카이퍼의 추종자들에 반대해서, 예를 들면, 영원전부터 칭의가 된다는 그들의 관점을 반대해서, 스킬더는 시간 속에서 믿음을 통하여 칭의가 된다는 견해를 취하였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강조하는 스킬더의 반발은 그로 하여금 계시의 전체역사가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죄로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의 역사조차도 전혀 역사이전의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킬더가 언약의 역사를 소위 행위언약에까지 역추적하게 되었던 것은 “신앙의 전제”의 기초 위에서였습니다. 교의학의 모든 다른 장들에서처럼, 언약의 교리에 있어서도, 우리는 태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언약의 근본적인 구조를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그곳입니다. 따라왔던 것은 - 예로 든다면,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나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과의 언약,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언약 - 다른 언약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동일한 언약의 다른 단계들일 뿐인 것입니다. 특징적으로, 스킬더는 자신의 통찰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혜언약은 두 번째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복제는 언약과는 너무 다른 것입니다. 하나의 언약은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는 규칙, 그러므로, ‘단 한 번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하여’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아니면 결코’라는 규칙과 함께 넘어지고 섭니다.”
계속성의 범주
역사적 실재로서의 언약에 대한 스킬더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언약의 다양한 단계들 사이에 있는 연속성의 범주로 기술되어질 수 있는 그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용어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스킬더가 언약의 다양한 단계들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동일성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약의 역사의 점진적인 선(낙원에서의 바로 그 태초로서의 proton으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바로 그 마지막으로서의 eschaton까지)을 부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언약의 다양한 세대들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보게 되면 언약의 역사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부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확신들 때문에, 스킬더는 소위 행위언약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썼습니다. 이것을 위한 성경적 토대를 그는 바울이 설명하였던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속(롬5:12; 고전15:45)에서 특별히 보았습니다. 우리가 행위언약을 먼저 첫부분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은혜언약에 대해서도 거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은혜언약이란, 사실, 행위언약의 연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사이의 다양한 유사성들을 지적합니다. 사실, 이 둘 사이에는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방법이나 수단상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차이는 언약이 성취되는 그 방법에 관심을 갖습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이후부터 이것은 약속된 중보자(창3:15)를 통하여, 그분에 대한 믿음의 길로 성취되어집니다.
스킬더는 옛언약(그리스도 이전)과 새언약(그리스도 이후) 사이의 관계를 논의할 때도 비슷하게 계속성의 범주를 응용합니다. 이 주제는, 그 당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습니다. 칼빈을 따라서, 전통적인 개혁주의신학은 언제나 본질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언약의 두 세대들 간의 집행상의 차이도 또한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후기의 개혁신학은, 카이퍼의 후예들에 의해서 실행되기를, 옛언약과 새언약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여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전자는 율법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후자는 복음에 의하여 특징지어지는 언약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 스킬더는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J.Thijs박사에 대한 포괄적인 반응 속에서, 그는 이 문제를 깊이 다룹니다. 초기의 개혁신학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그는 옛언약과 새언약 사이의 차이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견지에서 표현될 수 없다는 자신의 확신을 진술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외적인 복들과 내적인 복들에 관하여 계시되어진 것들이 더 풍부하냐 아니면 덜 풍부하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옛언약은 쌍방적이고, 그러므로 깨뜨려질 수 있는 반면, 새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Thijs 가 그렇게 잘못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언약 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는데, 심지어 더욱 심하게,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이 불순종을 언약의 저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위협은 새언약의 세대에서도 여전히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참된 “언약적 설교는 인간의 책임감에 최상의 호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것은 왜 이런 설교가 또한 너무나도 심각하며 계시적이고...위로가 있으며, 하지만 게으름에 대한 모든 변명들을 파괴하고 있는(maar met stuksnijding van alle duivels-oorkussens) 그 이유이다”는 것이 스킬더의 관점인 것입니다. 이런 언약적 설교는 자신이 천국에 가는 중인데 지옥에 가고 있는 것인 양 상상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한 지옥에 가고 있는데도 천국에 가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스킬더는 언약의 역사를 취급하면서 계속성의 범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이 교회에서의 설교와 영적 생활을 위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는 즉각 분명해집니다. 언약의 틀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설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라도 거짓된 안전감에서부터 회중들을 분명하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이런 면이 스킬더의 언약론의 근본적인 한 특징입니다.
두 당사자들
특별히 1936년 총회 이후에, 언약의 구조는 개혁파권에서는 상시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주제였습니다. 스킬더는 논의가 되면서 의견상의 차이점들이 있는 것들에 대한 질문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1) 누가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들인가? 택자들 뿐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도 포함되는가? (2) 은혜언약은 조건들을 포함하는가? 포함하지 않는가? (3) 은혜언약은 일방적인가? 아니면 쌍방적인가? (4) 은혜언약은 하나님 편에서부터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인가? (5) 새언약은 인간 편에서부터 깨뜨려질 수 있는 것인가? (6) 새언약 안에는 언약의 저주라는 것이 있는가? (7) 언약 안에서 본질과 외형 사이를 구분해야 하는가? (8) 언약은 누구와 맺게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맺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맺는 것인가?
애당초 스킬더는 언약은 그 기원에 있어서는 일방적(monopleurisch)이고 그 계속되는 존재방식에서는 쌍방적(dipleurisch)이라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혁신앙적 입장과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이 언약의 쌍방적 측면을 평가절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언약의 쌍방적 특성에 더욱더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동역자들”(fellow-workers 혹은 co-workers, 고전3:9)이라는 성경의 진술 속에서, 언약은 당연히 양 편(하나님과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위한 특별한 지지를 그는 발견하였습니다. 1936년, O.Noordmans박사와의 논쟁에 있어서 그는 이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그는 “동역자”(co-workers) 라는 용어 속에 있는 “동”(co-, ‘함께’)이란 접두사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특별히 언약에 있어서, 이 접두사는 대단히 문자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unilaterally)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우리들 사이에 양방적(bilateral) 관계를 창조하신다.
일년 후, V.Hepp교수는 공개적으로 언약을 양방적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적하여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Hepp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스킬더는 개혁신학이 언제나 언약은 양편(하나님과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쳐 왔음을 감동적으로 진술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누구라도 언약의 개념 바로 그 핵심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일방적 기원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면서, 누구든지 그 양방적 존재방식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언약은 양방적입니다. 그것은, 비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양편이라 할지라도, 결국 양방간의 상호적 동의인 것입니다.
왜 스킬더는 이 관점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방어하였을까요?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언약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실제적이고 책임있는 상대자로 여기신다는 것을 충분히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은 언약에 있어서 하챦은 존재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책임감있는 위치에 있게 하는 것이 언약을 성립시키는 부분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책임에 대한 호소가, 언약의 본질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킬더가 이 점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다음의 꽃같이 화려한 선언에 의해서 강조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바닥을 뜨겁게 한 방 안에서 곰들이 춤을 추게 합니다. 언약을 또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은 부채질을 해서 열이 자꾸 올라가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언약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은 무한하게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킬더는 언약에 있어서 일방적 기원과 쌍방적 존재방식을 둘 다 동시에 유지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집행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 스킬더는 우리 인간의 책임을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예정론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한 설교에서 “‘네 창조주가 네 남편이라’(사54:5)라는 성경의 진술이 언약론의 ABC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순전한 은혜로 인하여 우리들 – 잃어버린 죄인들 –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남편과 아내의 관계처럼, 우리들과 하나의 양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언약은 양방적 관계를 구성하는 고로, 그것은 양쪽편에서 “상호적 의무”사항을 지니고 있는 것을 함축합니다. 초기의 개혁신학자들은 이 용어를 법률학부(the Faculty of Law)에서 가르치는 자신들의 동료들에게서 취했습니다. 스킬더는 그것을 양방적 관계로서의 언약은 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끝임없이 그가 강조하였던 것은, 언약은 언약백성의 구성원들에게 법적(legal)인 신분을 수여해주는 법적(legal) 절차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언약이란 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순한 법적 계약일 뿐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단적일 것입니다. 우리들과의 하나님의 언약은 은혜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언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들이 하나의 법적인 관계 속에서, 법적인 보증물(rechtgaranties)을 지닌 채로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라고 스킬더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법적인 권리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갑니다; 이것이 왜 제가 하나님의 옷 끝자락을 잡아당길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이유입니다.
언약의 이러한 법적 성격은, 스킬더의 관점에서, 최소한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갖게 합니다. 한 편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의 법적인 관계가 우리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순전한 보증물과 함께, 언약 속에서 우리들에게 오는 것임을 함축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언약에 있어서 다른 한쪽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게 되는 그 요구는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반복해서 선포하였던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에게 “법정소송”을 제기하실 가장 충분한 권리를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음 장에서의 주제를 이미 조금 다루게 되었습니다.
두 부분들
우리는 지금까지 스킬더가 언약에 관한 의문들을 그가 요약하였던 것들 중에 몇 가지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배웠습니다. 언약은 법적인 성격을 가진 양방적 관계라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마땅한 것은, 언약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대한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개혁신앙적 형태에 동의하면서, 스킬더는 이 점을 언약의 두 부분들에 연관시킵니다. 곧, 약속과 요구에 대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스킬더에게 특징적인 것은, 이 두 부분들에 언약의 제재규정들(sancties)를 첨가하였다는 점입니다. 곧, 믿음의 길 안에서 보상의 확신과 불신앙과 불순종의 경우 심판의 위협이라는 제재규정들 말입니다. 스킬더는 이 약속(보상의 확신을 가진)과 요구(심판의 위협을 지닌)의 요소들을 언약의 역사의 모든 다른 단계들 속에 담겨 있는 언약의 본질의 부분들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진노(레26:25)는 구약의 경륜에서만 발생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스킬더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언약을 특징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요소들은 언약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확신을 강조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곧, 그것은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게 되면 언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언약은 우리들에게 법적 보증물(rechtsassuranties)과 함께 우리들에게 오는 그것 때문에, 그것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약속들을 제공해주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의 신뢰를 자극합니다. 하지만, 언약의 그 약속은 결코 그것의 요구로부터 분리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과 요구는 언약 안에서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요구로부터 약속을 분리시키려고 하면, 그 약속을 그는 단순한 예측으로 변질시켜 버릴 것입니다. 반면에, 약속으로부터 요구를 분리시켜버리게 되면, 율법적 성격을 가진 새로운 법을 도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부분들, 약속과 요구를 상호간에 분리시켜버리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스킬더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결혼의 유대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나눠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언약백성의 생활들 속에서 언약의 두 부분들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는 스킬더가 세례에 대해서 쓴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성례적인 방식에 있어서 복음의 약속에 인을 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사실, 우리들로부터 우리가 믿음 안에서 약속되어지는 것을 우리들에게 준용해서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 때문에, 스킬더는 믿음을 언약 안에서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치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치 사람이 복종을 통해서 무슨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알미안주의적인 의미로서의 조건(conditio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신앙적 의미에서의 조건(condition)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쓰기를, 믿음은 당연히 언약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설정된 조건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조건(condition)이란 단어는 한 가지 의미 이상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스킬더가 “개혁주의 조건교리” 라는 말로 자기 머리 속에 담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믿음 없이는 실현되어질 수 없도록 작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은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구원을 수여하신다는 교의적 선언을 함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의 세례 안에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언설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를 받는 자는 누구에게라도 개인적으로 선언해주시는 메시지 말입니다: 네가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지속적인 의의
스킬더의 신학은 너무나도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특징적인 것을, 또한 언약과 관계해서, 선언된 것은, 그 당시의 신학적 논쟁들에 의하여 결정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를 문맥에서 떼어내어 인용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점에서 그가 공헌한 점은 너무나도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신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오늘날에도 여전히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스킬더가 언약을 역사적 실재로서 강조했던 것은 현대신학자들이 단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H.Berkhof박사 같은 이들은 자기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그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킬더는 역사 속에서의 언약의 양방적 존재방식만을 강조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그는 또한 영원 속에서의 그 일방적 기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측면을 위하여 현대신학은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원한 작정들에 대한 언급을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여겨 거절하면서 그 작정들을 어쨌든 언약과 연관시키는 것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너무 불확실하게 만들며 모든 종류의 알미니안적 개념들을 위해서 활짝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언약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언약 안에 포함되어 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자유선택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런 집단들 안에서는 유아세례는, 언약의 교리와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또한 재침례파적인 견해로 바뀌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언약도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이중예정에 대하여 스킬더가 주석한 것에 대하여 모든 면에서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 이미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스킬더에게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들과 역사적 실재로서의 언약을 동시에 고백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그가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선택과 언약을 동일시하지 않도록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언약(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분 안에서 모든 택자들과 함께 영원전에 세워졌던)과 은혜의 언약(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시간 속에서 세워졌던) 사이를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도르트신경(1장)과 더불어서, 선택을 고백하면서, 또한 동시에, 복음의 약속은 예외없이 모든 인류에게 회심과 믿음의 요구를 하면서 선포되어야 한다(2장5항)고 말하게 됩니다. 스킬더가 보여준 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유기의 고백은 결코 인간의 책임을 제외시켜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언약의 양면성에 대한 스킬더의 관점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관련성이 있습니다. H.Berkhof의 견해에 있어서,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현대적 개념은 언약의 두 당사자들 사이에 있는 관계를 기술하는데 적절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언약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협력의 개념에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파트너쉽에 대한 이런 현대적 강조가 스킬더가 당대에 해설하였던 것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은 너무나도 신중하게 답변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신학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자충족성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없이는 하나님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는 “언약적” 파트너쉽이란 개념에 기초로 하는 하나님의 개념으로 대체시켜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킬더가 가르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언약에 대한 그의 관점은,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우리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약의 약속과 요구에 대하여 스킬더가 썼던 것은, 언제나 고마운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언약의 약속을 강조하는 만큼이나 동일하게 언약의 요구를 강조하는 것이 마치 복음에 모순되는 것인 양 들립니다. 이런 관점은 쉽게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이 먼저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약속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식으로 추론하는 사람은, 마치 언약이 오직 죄인들이 회심하고 믿음을 갖게 될 때에만 맺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언약의 주관주의적 관점을 사실상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스킬더가 (웨슬리안) 메소디즘의 어떤 숨겨진 형태를 자신의 언약론 속으로 통합시켰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서 그가 강조하고자 하였던 바는, 언약이 잘못된 안전감에 빠져들어가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이 약속을 가졌기 때문에 구원이 이미 자신들의 것인 양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약의 약속은 예측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요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구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언약의 요구로서 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약속과 요구 사이의 연결은, 하나님의 한 말씀 안에서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위로하시지만 다른 편으로는 위협하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스킬더가 우리들에게 언약에 대하여 가르쳤던 것의 위대하고 지속적인 의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사람들과 맺으실 때, 그분은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들로서 취급하십니다. 스킬더가 특징적으로 그것을 묘사한 것처럼, 언약은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하는 그 원칙에 따라서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