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왕의 복음- 스캇 맥나이트
예수 왕의 복음- 스캇 맥나이트
2019-03-13 22:45:02
예수 왕의 복음_ 스캇 맥나이트
서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하지만 복음이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된다면 그것 역시 복음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온 복음은 예수님을 구원 역사의 중심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단순히 구원의 방편으로만 여겨왔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야기를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스캇 맥 나이트-
참된 기독교의 특징은 각 세대가 그것에 대해 새롭게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한 세대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어서 다음 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신앙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의 오랜 이야기의 절정이라고 선포된 나사렛 예수님의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톰 라이트-
영적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원관과 은총 이해가 오늘날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을 가로막는 일차적인 걸림돌이라고 스캇은 말한다. 그런 이해는 어떻게 지금 부활의 삶의 은총과 능력 속에 서 살아갈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왕이신 예수님의 복음, 이 땅에 임한 그분의 나라의 복음은 정말로 ‘구원/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보여주라. -달라스 윌라드-
제1장 중요한 질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전도는 누군가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는 데 몰두하지만, 사도들은 제자를 만 드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결단은 제자의 삶을 살게 하는 핵심 요소는 아니다. 제자의 삶은 꾸준한 주일학교 참석, 중고등부 모임 참여, 그리고 가정의 신앙교육과 훨씬 더 높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중요하게는 어떻게 해야 결단을 넘어 제자도에 이르게 하는 방식으로 전 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중요한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그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다른 모든 것-정치나 종말론, 속죄론, 빈곤-을 기독교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본래의 복음을 찾기 위해 우리 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메시아’와 ‘복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신칭의’ 와 ‘복음’이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심히 우려가 된다. 나는 복음이라는 말이 우리가 ‘개인 구원’에 관해 믿는 바에 의해 납치당했으며,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복음 자체가 변형되었다 고 믿는다. 이 납치의 결과 이제 복음이라는 말에는 본래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이해했던 대로의 의미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소위 우리가 아는 복음이 우리의 신앙 체계를 망가뜨렸다. 문제는 잘못 형성된 복음으로부터 동력을 얻어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문화 전체가 복음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복음이라고 불리는 이 오 해가 교회를 해체하고 있다.
제2장 복음의 문화인가? 구원의 문화인가?
복음주의가 교회와 세상에 주어진 선물이지만, 결코 완벽하지는 않다. 복음주의를 특징짓는 대표 적인 두 단어는 복음과 (개인적) 구원이다. 복음이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단어 유앙겔리온과 영어 단어 에반젤이다. 구원은 그리스어 소테리아를 번역한 말이다. 사도적 복음의 의미에 따르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복음적’이지 않으며 그 대신 ‘구원적’이다. 그 이유는, 복음주의자들 은 복음이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을 동일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구원주의자들’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복음주의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문화’를 만 든 후 그것을 ‘복음의 문화’로 착각해왔다.
구원의 문화 개인적 신앙에 대한 강조는 ‘구원의 문화’, 즉 사람들이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기초해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문화에서는 이런 이 중적 물음을 던지는 경향이 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당신은 안에 있는가? 아니 면 밖에 있는가?” 복음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적 구원 경험을 그 문화를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한다. 이 책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게 요약된다. ①구원의 문화와 복음의 문화는 동일 하지 않다. ②둘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와 복음의 문화가 오늘날 세 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③복음의 문화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으 로 되돌아가야 하며, 그 복음의 문화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회심을 자동적인 과정으로 만들며, 성례전적 과정만으로 교인은 될 수 있으나, 교인을 제자로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복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에릭 목사는 ‘복음의 문화’가 아닌 ‘구원의 문화’를 만드는 복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제자도의 문제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다. 구원의 문화에서는 교인이나 결단한 사람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결단만이 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예수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모두 단순한 구원의 문화가 아니 라 복음의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이 복음은 ‘안’으로 들어오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자가 되기를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복음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복음에서 구원의 문화가 복음의 문화 안으로 통합된다. 그러나 복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네 범주를 구별해야 한다.
제3장 이야기로부터 구원으로
당신은 다음 네 범주 중 어느 것에 복음이라는 용어를 적용하겠는가? 이 범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기초는 이스라엘 이야기(성경 이야기)고 그 기초 위에서 예수 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이야기와 예수님 이야기로부터 유래하며, 설득의 방법은 구원 계획으로부터 유래한다.
1) 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 이야기는 성경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주는 큰 줄기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그런 다음 그를 통해 한 민족 이스라엘을, 그런 다음 교회를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제사장과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 아담처럼 이스라엘도 실패했으며, 그 왕들 역시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왕들 이 하지 않았던(분명히 할 수 없었던) 일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그들의 죄와 구조악 그리고 사 탄으로부터 구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자는 메시아와 주님으로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이 점을 명심하라. 성자를 보내실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예수님을 메시아(‘왕’)로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다. 즉, 이 왕이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이 이야 기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구상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때에 이루어지는 최종적 완성이다. 우리는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새롭게 읽고 그 뜻 을 더욱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이상적인 조건은 번영하며, 활기차고, 문화를 만들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는 도성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곧 복음은 아니다. 복음은 이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은 이 이야기 안에 서만 의미를 갖는다. 즉, 이 이야기 없이는 복음도 없다. 만약에 우리가 이 이야기를 무시한다면 복음은 왜곡되며,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구원의 문화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 예수님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이자 성취, 완성, 해답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주 제는 그분의 왕국에 대한 전망이며, 그리고 이 전망은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 획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도성에 대한 전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메시아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이야기 속에 담긴 완성에 대한 열망이 성취된다. 복음을 개인적∙실존적∙사적인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근 본적인 문제점이다. 예수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 이야기의 결말이고, 예수님 이야 기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것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3) 구원 계획
이스라엘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성경의 이야기는 구원 이야기다. 나는 구원 계획을 특정한 의미 로, 그리고 오직 그 의미, 즉 구원의 메시지라는 우리가 구원받은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자 한다. 그렇다면 (개인적) 구원 계획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말을 ‘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고, 용서받으며,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지, 구원받기 위해 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할 때 복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성경 이야기 속의 요소나 관념’을 일컫는 말 로 사용할 것이다.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성경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예수님 이야기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이 계획과 복음은 동일한 사상이 아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은 구원 계획으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가 ‘구원’을 ‘복음’이라는 더 큰 개념 속에 더 많이 잠기게 할수록 구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도 더 풍성해질 것이다. 구원 계획은 제자도나 정의, 순종이 아니다. 구원 계획은 한 가지, 오 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구원이다. 칭의는 우리가 의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귀결된다. 칭의가 자동적으로 정의와 선, 사랑과 자비의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구원 계획 사이의 관계는 복음과 구원 계획 사이의 관계와 같다. 이것은 두 개의 다른 범주다. 하나님 나라 전망은 구원 계획을 수반∙암시∙포함하고 구원 계획 없이는 하나님 나라 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전망이 구원 계획만 다루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그것을 다루지도 않는다. 구원 계획을 하나님 나라 전망에 억지로 끼 워 맞추려는 노력은 ‘복음’을 ‘구원 계획’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우리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4) 설득의 방법
이것은 사람들의 응답을 이끌어내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설득을 위해 구원 계획을 ‘포장하는’ 방법 을 말한다.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한데, 구체적인 성경의 요소(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믿음)와 이 런 요소를 묶어내는 수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설득의 방법, 즉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시작해 재빨리 최후의 심판, 지옥, 하나님의 진노로 옮겨가는 것은 복음과 동일하지 않다.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한 설교의 역사에서는 복음전도자와 청중의 필요에 따라 복음전도의 방법이 바뀌어왔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디오그네투스 서신, 종교개혁기의 토머스 그랜머, 웨슬리의 설교 등을 통해서 살펴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방법이 교회가 사용해온 유일한 방법 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설득의 방법과 복음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구원 계획과 설득의 방법을 너무나도 강조한 나머지 그것이 이스라엘 이야기와 예수님 이야기를 압도해왔다. 이것은 복음 자체에 대한 이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설득의 방법은 구원의 문화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목적, 즉 사람들을 결단하게 만듦으로써 결단한 사람이라는 경계선 안에 안전하게 들어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방법에는 심각한 수정이 필요하다.
4장 바울의 사도적 복음
복음을 이해하는 지도를 그리고자 할 때,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곳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복음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구절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이 바로 그런 구절이다.. 사도적 복음의 전통 바울이 사도적 복음의 전통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복음의 정의에 관한 한 바울은 분명히 보수주의자다. 자신의 관점에서 복음을 표현하는 대신에 그는 그저 교회의 전 통을 통해 전해진, 검증되고 참된 복음을 암송했다. 고전 15장을 세 부분(A(15:1-2), B(15:3-5), C(15:20-28))으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시한 ‘복음’의 정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서 시작할 때, 우리는 ‘복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신약성경과 교회사 전체를 항 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지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복음에 관한 여덟 가지 관찰 ① “내가 전한 복음” : 단락 A에서 바울은 복음을 매개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을 연결시킨다. 그 복음이란 “내가 전한 복음”인데,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복음이며 “(그들이) 그 가운데 서 있는” 복음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복음이다. ② 전해진 복음 : 단락 B에서는 단락 A에서 제시한 바를 더 자세히 설명한다. “너희가 받은”(15:1, parelabete ), 즉 그들이 터득했고 바울 자신도 전해 “받은”(15:3, parelabon , 같은 그리스어 동사) 사도들의 권위 있는 전통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고 그들이 받았던 참된 전통의 복음은 무엇일까? 단락 B에 그 답이 있다. ③ 복음의 정의 :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핵심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최초 의 복음은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화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하는 ‘사영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일어난 네 가지 ‘사건’(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나타나신 사건)이 나 ‘章(chapter)’에 관해 이야기한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핵심 사건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고, 알리고, 선언하고, 크게 외치는 것이다. ④ 이스라엘 이야기의 성취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를 해결하거나 성취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중요 한 단어는 “성경대로”이다. 사도적 복음이란 ‘성경대로 말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백 번 이상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암시하거나 상기시키는 구절은 놀라울 정도로 많다. 바울의 복음-더 정확히는 초기 기독교의 복음-이 성경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예 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야기도 아니고, 일군의 무시간적인 사상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한 민족, 한 역사, 한 성경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뒤따르고 완성하는 이야기로 볼 때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하고 완성하고 해결한 예수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복음을 추상적이 며 이야기와 동떨어진 구원 계획의 구성 요소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⑤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구원 : 구원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이야기가 의도한 결과다. 예수님의 구원의 죽음의 포괄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내가 선 호하는 방식은 그 죽음 안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일을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동일시) ⒝ 우리를 대신해 (대표와 대리)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의 결합) 예수님이 죽으셨다. 바울은 예수님이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바울은 속죄에 관한 구약성경 전체의 증언에 대해 환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제사 제도와 모세, 욤 키푸르(대속죄일),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사야 52, 53장과 같은 본문을 이야기할 수 있다. ⑥ 완전한 이야기 :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 전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는 단지 성금요일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와 구원 계획에서 십자가 가 아무리 핵심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 그 이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복음은 예수님의 승천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때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성취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⑦ 복음의 예수님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주님으로서의 예수님, 구원자로서의 예수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복음의 예수님을 요약해야 한다면, ‘왕이신 예수님’ 혹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겠다. 왕으로서, 메시아로서, 주님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 혹은 해 방자이시다.
⑧ 종말 : 한 가지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성부 하나님이 만물을 위해,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되실 때 이 이야기는 끝날 것이며, 그분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그 아들 역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에 이를 것이고, 이 이야기의 끝에 이를 것이 다.
톰 신부와 그렉 목사 톰 라이트는 바울 서신에서의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 “나는 사람들이 ‘복음’이라 고 말할 때 그들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바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 단지 그런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복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톰 라이트는 복음을 구원 계획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음’ 자체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서술적인 선포다.” “혹은 더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바울에게 ‘복음’의 핵심은 거짓 신들에 맞서는 참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다.” 워싱턴 D. C.에 있는 캐피톨 힐 침례교회의 그렉 길버트는 로마서 1-4장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 다고 믿는다. 복음의 의미에 대해 그렉 목사와 에릭 목사는 거의 의견을 같이한다. 하지만 길버트 의 복음은 구원 계획이다. 나의 비판은 이렇다. 길버트는 고린도전서 15장의 구조적 의미를 최소 화시켰다. 그는 사도행전의 전도 설교 중에서 구원을 다룬 부분에만 초점을 맞췄다. 더 나아가 길 버트는 로마서 1:1-5에도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여는 구절이 며,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과 일치하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제시한다. 즉, 복음은 왕이며 주님이신 예수님 이야기의 선언이다. 나는 길버트의 설명이 틀렸다기보다는 그가 복음을 구원 계획과 동일시하는 잘못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복음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이야기의 해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언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요약
이 이야기는 창조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최종적 성취의 때에 비로소 완결된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결 짓는, 예수님의 온전한 구원 이 야기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를 축약된 형태로 제시하지만 복음서에서는 이를 온전히 해명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행하시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와 나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변질시키려는 유혹을 받는다. 다시 말 해서 구원 계획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메시아,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과 한 사람 나에 관한 이야기로 축소시킬 수 있으며, 그러는 사이에 이 이야기의 주제가 그리스도와 공동체에서 개인의 구원으로 바뀌고 만다. 물론 우리에게 후자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전자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질문한다. 어떻게 이 구원 계획이 복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신약성경 이후 교회사의 수 세기를 살펴보려 한다.
5장 어떻게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1. 나는 신조, 특히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본이라고 믿는다. 나는 신조의 역사와 발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교회의 신조들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바울의 복음 이해에 살을 붙은 것이라는 점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위대한 기독교 신조의 원천이다. 신조들의 의도는 사변적인 교리놀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복음 자체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신조를 부인하는 태도는 복음 자체를 부인하는 태도와 다름없다. 왜냐하면 신조의 목적은 성경의 복음 안에 이미 존재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케아 신조 이전의 신앙의 규칙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와 그 이후의 신조들을 신학적 궤변이나 추론의 산물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해야 한다. 신조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복음은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으로서 예수의 이야기이며, 복음의 이야기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복음의 문화 안에서 구원의 문화라는 하위문화가 형성되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를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첫4세기는 사도적 복음전승으로부터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유래한 복음의 문화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현대교회에서 복음은 피상적으로 인식되었고, 구원은 개인적 결단으로 축소되었으며, 예수와 사도들에서 유래된 복음의 문화는 거의 다 소멸되고 말았다.
2.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우리는 복음의 문화로부터 구원의 문화를 만들어 냈는가? 어떻게 복음주의자들이 구원주의자들이 되었는가? 언제 복음이 구원계획으로 변했는가? 여러모로 그 시작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리고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종교개혁 시기였다. 나는 종교개혁의 독특한 공헌은 복음의 무게중심을 인간의 반응과 개인적 책임 쪽으로 이동시켰으며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 점이라고 평가한다. 종교개혁 운동은 개인적 구원의 필요성을 대단히 강조했고 그 결과 복음의 문화가 구원의 문화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복음이라는 말을 구원계획과 동일시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역사적 발전과정 때문이다. 루터파 신앙고백서인 아우스부르크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항목을 구원과 이신칭의에 관한 항목으로 바꾸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문화가 구원의 문화 혹은 칭의의 문화로 바뀌었다. 이 루터파 신앙고백은 복음을 구원의 관점에서 규정했고, 그 결과 복음 이야기는 구원론이 되고 말았다. 개혁파 신앙고백인 제네바 신조도 아우스부르크 신조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문화에 의해 복음을 규정했다. 복음이야기가 구원이야기라는 새로운 틀로 재구성되고 있는 점은 루터보다 칼뱅의 경우에 훨씬 더 분명히 드러난다.
6장 복음서 안의 복음
1. 복음이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 안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울의 복음이었으며 사도적 복음 전승이었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전까지 이 복음이 교회 안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그런데 종교 개혁기에 이 복음이 변형되었으며 결국에는 구원이 복음을 잠식해 복음이 구원계획과 동일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음서는 예수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의 연속이다. 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책을 복음서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사복음서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과 복음서는 모두 예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의 복음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네 가지 판본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했다. 네 개의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복음에 대한 네 가지 판본이 있다는 의미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 이야기를 할 때 자신들을 예수의 전기 작가가 아니라 하나의 복음에 대한 증인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의 핵심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복음서들이 예수에 대한 책이며,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예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으로서 들려준 것이다. 복음서는 구원계획을 이야기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하셨으므로 예수 이야기가 구원의 이야기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2. 물론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이야기가 지닌 구원의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 이야기는 듣는 이들을 향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촉구한다. 복음는 그저 예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이 실제로 구원의 경험과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는 마가복음은 바울과 사도들이 정의했던 복음과 매우 닮아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마가복음은 자기가 말하는 이야기를 복음이라고 정의하며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인 예수 이야기를 구원과 용서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마지막 주에 집중하면서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다. 중요한 점은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 이야기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복음서 안에서는 구약의 성취에 대한 내용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는 (구약)성경 이야기, 즉 이스라엘 이야기가 복음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복음서는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이 두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복음서를 읽지 않으면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는 바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복음서가 복음인 이유는 이처럼 두 이야기를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고린도전서 15장의 바울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서의 핵심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1장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 하니라”는 선언이 등장한다. 이는 실로 엄청난 주장이다. 이는 언약을 배반함으로 멸망당하고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나라가 임할 것인데, 이 모든 일이 마리이가 낳을 아들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서 예수는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세상 죄를 없애실 하나님의 어린 양 “으로 보았다. 사도적 복음, 즉 바울이 받아서 전한 복음은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이 죽음이 죄 사함을 성취했음을 핵심 메시지로 삼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나라 안으로, 영생으로 이끈다. 그러나 ”죄를 위하여“라는 말에는 채워져야 하는 어떤 불완전성이 존재한다. 사도적 신앙은 예수의 죽음이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죄를 이기는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부활을 통해 예수의 죽음은 새로운 피조물을 해방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부활의 복음을 요구한다.
7장 예수와 복음
1. 복음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하는 예수의 이야기라면 과연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라고 선포하셨는가? 이 질문은 초점을 우리가 경험하는 구원의 유익에서 그분 자체가 복음이신 분께로 이동시킨다. 복음은 한 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바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과 전망 선포를 명시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연결시키셨다. 마리아의 마그니피카트(눅1:46-55),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눅1:67-79), 그리고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설교(눅3:1-18)는 모두 이스라엘 이야기의 메시아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대망 속에서 나타나며,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 주제들이 성취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이스라엘이 맞이할 완전히 새로운 상태를 선언한다. 특히 이 구절은 정의와 거룩, 평화, 사랑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공동체를 선포한다. 마리아, 사가랴 그리고 요한에게 하나님나라는 정의와 평화, 사랑, 거룩과 같은 단순히 사건의 상태가 아니라 왕, 메시아가 다스리실 공동체였다.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 이야기 전체를 다루는 네 요소, 즉 하나님과 왕, 백성, 땅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왕은 예수이시며 백성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고 땅은 예수의 다스림이 나타날, 혹은 백성들이 예수의 다스림을 구현할 장소다.
2. 마리아, 사가랴 그리고 요한의 예언적 선언에 이어서 우리는 예수의 선포 안에서 이스라엘 이야기의 이 중대한 시점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를 계시하는 네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역사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고 믿으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막1:15), “그러나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8) 가까워진 혹은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예수 시대에 에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등이 두루 사용했던 하나님나라 이미지와 사상 그리고 기대를 환기한다. 예수는 이 땅에 임할 새로운 세상을 선포하셨다. 이 새로운 세상의 특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좋은 소식, 갇힌 자들을 위한 자유,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함, 눌린 자들을 위한 해방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다.(눅4:18-19) 나아가 예수는 새로운 시민권을 선언하신다. 변변히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소유하고 멀쩡한 자들이 그 나라의 밖에 있다는 팔복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 시민권이 담고 있는 급진적인 뒤집힘을 보여준다. 이렇게 복음서는 예수가 선포하신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이 나라는 유대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와 로마의 통치자 티베리우스가 다스리는 나라와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 창조주, 언약의 주께 복종하라고 부르신다. 주기도문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룬다.
3.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나라의 중심에 있다고 선언하신다. 마리아, 사가랴 요한은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함으로써 이스라엘 이야기가 완성에 이루고 있다는 주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 모두가 우리의 시선을 이스라엘의 대망의 해결책이신 예수에게로 이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의 첫 설교(눅4:16-30)는 그분이 이사야 61장의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신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자신 및 자신의 사명이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자신을 통해 지금 역사 안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다고 믿으셨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실 때 자신이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한다고 선포하신다. 그렇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선포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의 대답은 사람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가 다시 살아온 것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요한은 예수를 누구라 생각했을까? 요한은 예수를 “나보다 능력이 많은 신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이해한다. 요한의 이런 이해가 바로 메시아로 연관되지는 않는다.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당신이 누구십니까?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여기서 말라기에 나오는 “오실 그분”은 메시아가 아닌 엘리야를 가리킨다. 이 질문에 예수는 말라기가 아닌 이사야를 인용해 대답하셨는데, 이는 나는 말라기가 말하는 엘리야가 아니라 이사야가 말한 그 사람이라고 대답한 셈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이 누구며 요한이 누구이지에 대해 요한과 의견을 달리하셨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요한이 엘리야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예수의 정체성을 혼동했지만 예수는 어느 것도 혼동하지 않으셨다.
4.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셨는가?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임을 선포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셨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자신에 대해 선포하셨음이 너무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거나 혹은 그것을 초대교회가 예수를 돌아보면서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을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궁극적 성취이자 완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의 연속선상에서 보신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구약성경에서 열망하던 것의 궁극적 계시이자 완성으로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제자를 열둘을 택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구약에서 열둘은 온전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열둘을 택하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기대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완전성 모두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열둘 증 하나가 아니시다. 그분은 그들보다 높으신 분 그들의 왕(메시아)이시다. 예수는 열둘을 택하시는 행동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바로 그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 이야기가 열두 제자들 안에서 성취된다고 보시고 자신을 그 열둘을 임명하고 다스리시는 왕으로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인자와 연관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셨다. 그분은 고통당하고 높임을 받는 인자 안에서 자신을 보셨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시라는 점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이야기의 성취에서 자신이 핵심임을 스스로 증언하고 계신다.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셨는가? 그렇다 그분은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하는 예수의 이야기이며 예수는 분명히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보셨다. 예수는 자신을 선포하셨고, 바울도, 베드로도 예수를 선포했다.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전파란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구원 이야기인 예수 이야기를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8장. 베드로의 복음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이야기한다. 바울은 사도적 복음 전승을 후대에 전했다. 이 셋은 각각 동일한 복음, 즉 이스라엘 이야기 속의 열망이 예수님의 용서의 이야기 안에서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는 선언을 다룬다. 이에 더해 “바울은 베드로와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한다.”(던)
방 안의 두 마리 코끼리
복음전도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에 있는 복음 설교를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 사도행전에는 일곱 혹은 여덟 편(행 7장의 스데반 설교 포함시)의 복음 설교나 복음 설교의 요약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설교는 1세대가 전한 시원적인 복음 설교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에 있는 일곱 편의 설교 요약은 복음을 전하는 설교들이다. 사실상 이 설교들은 1세기 복음전도의 예시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는 우리가 무시하는 두 마리 코끼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복음 설교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아 그들의 복음을 구성했다.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복음전도 방식을 규정한 것은 이스라엘 이야기였다. 만약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고전 15장에 나타난 사도적 복음 전승의 핵심에는 “성경대로”라는 말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설계에서는 사도적 전승 안에 있는 “성경대로”라는 뼈에 근육과 지방을 붙인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깊이 있는 통찰과 탁월한 기억은 사도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이다. 즉, 부활과 성령체험을 통해 사도들은 ‘해석학적 혁명’에 이르게 되었다. 갑자기 그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 구약성경을 다시 읽고 재해석하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사도들 모두가 복음을 이렇게 전했다.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 기억이 예수님 이야기에 의해 재편되어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들이 그분을 만난 후 그들의 성경은 새로운 책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성경을 복음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의 복음전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뼈대 위에 살아있는 몸의 생기를 더한다. 그의 복음은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이라는 선물, 그분의 재림,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역사의 종말을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야기다. 초기 사도들의 설교에서는 예수님의 삶 전체를 이야기했다.
플레밍 목사
플레밍 목사는 “첫 인간 아담은 강하다. 그러나 둘째 인간 그리스도는 훨씬 더 강하시다.”라고 설교한다.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대신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며, 이 부활은 예수님의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강하신 이의 능력을 부여한다. 더 강하신 이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승리를 이끄신다. 또한 플레밍 목사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에는 왕이신 예수님의 승천이 포함되고 성령의 능력의 임재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고 계셨으며, 성령을 교회에 부으셨다. 오순절 성령은 모두에게 임했으며, 성령은 예언과 환상, 꿈을 주셨다. 그리고 회개한 신자는 죄 사함과 더불어 성령을 받았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를 이 땅에서 살았고 죽었으며 부활했고 승천했으며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동시에 온 세상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초기 복음전도에 이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모든 사도들이 예수님을 메시아와 주로 보았다. 사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왕이신 예수님이었다. 사도적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복음이였다(지금도 그러하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던 반면,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을 이방인에 맞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적용시킨다. 첫째,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공유하는 바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보이지 않는 창조주이시고 이는 곧 하나님이 모든 종교에 공통된다는 뜻이다. 이 공통요소는 ‘내적 변증’이라고 불릴 수 있다. 두 번째,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 유대인은 그들이 가장 확신하는 바 즉, ‘영혼 불멸’에 관한 플라톤주의적 신념을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로 예리하게 공격했으며, 바로 이 차이점을 근거로 자신의 복음을 제시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많은 이교도들이 했던 첫 번째 질문은 “이 예수님이라는 분은 누구이신가?” “왜 그가 모든 사람의 심판자인가? 왜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는가?”였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 속에서 불러일으키셨던 것과 똑같은, 복음에 관한 물음이다. 사도적 전승과 일치하는 참된 복음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물음으로 곧바로 나아가게 한다.
복음전도에 관한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다. 사도들은 일관되게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기 위해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믿으라는 말은 ‘자신의 삶 전체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라’는 뜻이다. 믿음은 하나의 큰 개념으로 회개와 세례는 그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향한 사람은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돌아서며(회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세례를 통해 그 믿음을 구현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사는 삶을 구현한다. 복음에 응답하는 이들은 구속을 받고, 해방되고, 의롭다 하심을 입지만,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구원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그리고 오직 이 이야기만이 구원한다. 혹은 예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리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사람들이 믿음과 회개, 세례로 응답하게 하고 구원을 받도록 이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사도적 복음을 말함으로써만 우리는 복음의 문화를 재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문화는 구원의 문화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시작(창조,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과 중간(다윗), 결말(예수님, 최종적 구속)을 갖춘 복음의 이야기 안에 자리하게 한다.
9장. 오늘날의 복음전도
오늘날에도 ‘복음전도’는 베드로와 바울의 시대만큼이나 힘들고 어렵다.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도행전은 첫째로 복음이 이스라엘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복음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중심으로 한다. 셋째로, 복음전도에는 사람들의 응답을 촉구함이 포함된다. 넷째로, 복음은 구원하며 구속한다. 사도적 복음은 죄 사함과 하나님의 성령이라는 선물, 의롭다 하심을 약속한다. 이제 우리의 복음전도와 사도들의 복음전도를 비교해보자.
비교1: 복음전도는 무엇을 성취하려 하는가?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구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선언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우리의 복음 전도에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전자 안에서 후자가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오늘날 전도에 대한 구원주의적 접근법에서는 대부분(개인적)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에만 집중하고,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은 회피하려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복음전도는 응답을 촉구하는 담대한 선언인 반면, 오늘날의 전도는 대부분의 경우 교묘한 설득이다.
비교2: 무엇이 복음전도를 규정하는가?
아마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사도행전의 복음이 구원 이야기나 속죄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하나님이나 다른 이들과의 화해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전혀 없으며,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도,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 죄와 자아, 시스템, 사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언급도 없다. 사도행전의 설교에는 복음의 요약으로서의 은총 자체는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비교 3: 복음전도, 진노, 심판
초기 기독교의 복음전도에서도 최후의 심판이 최후의 심판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복음을 전할 때 심판의 메시지는 피할 수 없다. 복음전도에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재판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반드시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포함되어야 한다.
비교 4: 복음이 해소하는 문제
또 다른 논점은 문제와 관계가 있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 사건을 연구할 때, 사도들이 복음을 통해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지를 심각하게 재고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제시한 약속-죄 사함과 성령이라는 선물, 새롭게 되는 날-으로부터 죄, 하나님의 능력 부재, 새로운 창조의 필요성이 문제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주제들을 개인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만약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 성취되었다면, 우리는 단지 내 이야기와 내 필요 안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이야기의 구조와 윤곽 안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복음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점임을 기억하라. 존 월턴은 세계를 우주적 성전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성전 안에 두셨지만, 인간을 이콘,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으며,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이들로서,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 다른 이들,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이콘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책무였다. 창세기 3장의 타락은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하여 범죄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의 근본 역할을 저버렸음을 뜻한다. 우리는 동산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깨어진 이콘으로, 상처 입은 형상을 지닌 자로 영원히 살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배제하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에덴 동쪽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우리에게 동일한 책무를 맡기신다. 하지만 인간은 그 책무를 담당하는데 계속 실패하고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대표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신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받아들여야만 이 이야기를, 복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이콘이시다. 예수님만이 메시아와 왕으로서의 임무를 완벽히 성취하셨다고 말하면서, 놀랍게도 그 책무를 우리-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시 부여한다.
비교 5: 복음과 제국
사도적 복음과 초기 기독교의 반제국적 경향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복음의 선언 안에 카이사르는 그렇지 않다는 함의가 포함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자. 문제는 이러한 반제국적 주제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복음전도에서 얼마나 의식적이고 노골적이며 의도적으로 나타났는가? 이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에 뚜렷한 반제국적 성향을 부여했다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성전체제를 비판한 점은 반제국주의라고 주장할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카이사르가 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복음 자체에 전복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증거를 넘어서는 확대 해석이다.
비교 6: 예수님의 이야기
사도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함으로써 복음을 전했지만 우리는 개인이 구원받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 이야기와 구원 계획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 우리는 복음전도의 표적을 오직 하나로만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즉, 복음전도에서 죄인의 마음만 겨냥하려 한다. 사도적 복음은 죄사함의 약속을 포함한다.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셔서 예수님 이야기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 이야기는 죄를 자각하게 하고 예수님이 메시아와 주님, 구원자가 되셔야 함을 일깨워준다. 둘째로,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묻는 질문은 우리의 복음 안에 예수님이 충분히 담겨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 질문은 이렇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는가? 마가의 책을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사도들이었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소식이며, 복음서는 이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장. 복음의 문화 만들기
복음은 생명의 이야기에 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해석이다. 복음의 문화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복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골자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태초에 하나님은 두 이콘,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과 하와에게 단순한 임무, 하나님을 대신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임무를 주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권을 찬탈해서 에덴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다스릴 기회를 망쳐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셨고, 후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통치를 세우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러나 두 번째 계획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은혜로 다윗을 세우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통치의 세 번째 형태였다. 그러나 예언자들을 통한 외침도 소용없이 이스라엘은 세상을 축복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할 임무를 망각했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른후 하나님은 마지막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다. 갑자기 하나님은 후손이면서 후손이 아닌 누군가, 찬탈자로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다스리실 누군가와 더불어 역사 안으로 파고들어 오셨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선을 행한다고 알려지셨지만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죽였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바는 하나님이 그들의 찬탈과 죽음을 역전시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수 있다는 것이고, 이렇게 죽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인 그분의 백성과 함께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교회라 불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으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하려는 마음을 버리며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찾게 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셨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불완전한 이콘으로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불완전한 세상을 다스린다. 그런 언젠가 완벽한 이콘이 다시 오실 것이며 찬탈자들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릴 것이다. 영원히
복음의 문화
이것이 복음이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 분화로부터 복음의 문화가 나타난다. 첫째, 우리는 그 이야기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복음의 핵심은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되었으며 이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 이야기에 훨씬 더 많이 몰입해야 한다. 우리는 사복음서를 읽고 묵상하고 소화하고 머리와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예수님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도들의 글이 어떻게 다음 세대와 다른 문화에 이스라엘 이야기와 예수님 이야기를 전해주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세대가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전해주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일회성의 다짐이 아니라 평생의 헌신이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재구성하려는 이야기들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음 이야기에 의해 우리가 구원받고 변화될 수 있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